천국 이야기 여덟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주제는 ‘교회에 속했던 적이 없는데도 천국에 있는 사람들’(The Heathen, or Peoples outside of the Church, in Heaven)인데요, 오늘 이야기를 끝으로, 이런 일대일 카톡 형태의 나눔 대신 제 개인 블로그(https://bygrace.kr/)를 통한 나눔 형태로 전환하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1. 이렇게 상대가 원하지도 않는데 일방적으로 보내는 건 ‘모든 건 자원(自願)함으로!’라는,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에 어긋나는 측면이 있다 평소 늘 여겼기 때문이며,

 

2. 그래서 일종의 신앙, 사랑을 빙자한 폭력이요, 자칫 스토킹일 수도 있고,

 

3. 솔직히 말씀드리면, 보내고 나서도 매번 좀 마음고생 하는 것에 이젠 지쳤기 때문입니다.

 

4. 부연하여 하나 더 말씀드리면, 어쩌면 이게 가장 중요한 이유일 것 같은데요, 이 이야기 공유를 정례화하다 보니 정작 제가 소명으로 받은 번역의 일에 전념할 수가 없게 되어 가고... 그래서 고민, 이건 아니다 판단,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혹시, 그동안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읽어오신 분들 계시면, 그분들껜 정말 죄송한 말씀 드립니다. 그러나 제가 글을 안 쓰겠다는 게 아니고, 단지 지금까지 일일이 보내드렸던 것을 대신, 앞으로는 제 개인 블로그에 올려 놓겠습니다 하는 것이니, 앞으로도 생각나실 땐 언제든 방문하여 보시면 되겠습니다.

 

또한 그동안 정말 원치 않으셨는데 차마 말씀은 못 하시고 꾹꾹 참으셨던 분들께는 정말 죄송한 말씀 드립니다. 다시 한번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저로선 ‘이 사실은 모두가 알아야 해!’ 하며,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제가 받은 모든 걸 나누고자 하였어도 그것이 상대방에겐 신앙을 빙자한, 사랑을 빙자한 폭력이 될 수도 있음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사42:3)시는 주님을, 그리고 탤런트 김혜자 씨의 책 제목,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를 많이 생각한 며칠이었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 오늘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제 36장을 주로 레퍼런스하였습니다.

 

우리 기독교, 특히 개신교인들은 거의 대부분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살아생전, 예수를 안 믿으면, 죽은 후 바로 지옥 가는데 아... 이걸 어째? 주님도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 하셨으니 내가 다소 좀 무례하더라도, 욕을 먹더라도 어떻게든 교회를 다니게, 예수를 믿게 해야겠다. 그것이 참된 도리요, 효도고, 우정이요, 사랑이다!

 

꼭 이대로는 아니어도 거의 많은 전도와 선교의 동기와 시도가 이런 비슷한 아이디어에서 연유하지 싶습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가 주님의 허락으로 27년간 수시로 천국을, 영계를 왕래하면서 그는 거기서 정말 많은, 비기독교인들이 천국에 와 있음을 보았으며, 또 그들과 교류하였다는 사실인데, 그러면, 이는 어찜이며, 이 사실을 과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 행하는 경우를 이야기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눅13:29-30)

 

하신 것을 보면, 분명 살아생전 기독교 개신교인이 되어 예수영접기도를 해야만 천국 가는 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할 수만 있다면 그게 가장 바람직한, 그 사람의 내면이, 속 사람이 그 기도를 받쳐주는 한, 가장 좋은 경우이겠지만 말입니다.

 

비기독교인으로서 천국에 있는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그들은 살아생전 선한 삶을 살았으며, 이웃을 사랑했고, 비록 그땐 몰라 주님 아닌 자기들의 무슨 우상을 경배하였지만, 그 경배는 과연 제대로 된 경배였으며, 기독교인들의 경배보다 훨씬 더 거룩하였고, 그들의 영의 상태가 신앙의 모든 것을 받을 수 있었으며, 그것을 내적 애정으로 흡수할 수 있는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겐 사랑에서 우러난 자비가 있었고, 그들의 무지에는 이노센스(innocence, 천진난만, 순진무구)가 있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신앙의 모든 것을 즉시 기쁨으로 받을 수 있는 상태에 있었고, 그래서 그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 책 36장 본문에서 메인 아이디어를 얻어 최대한 간략하게, 그리고 요약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

 

1. 천국은 신성(神性, the Divine)으로 충만한 나라다.

 

2. 주님의 신성은 사랑의 선(善, the Divine good)과 신앙의 진리(眞理, the Divine truth)다.

 

3. 진리(교리)는 선을 담는 그릇(recipient)이다.

 

4. 중요한 건, 그릇이 아니라 거기 담기는 내용물이다.

 

5. 단지 기독교의 그릇, 교리가 권장되는 이유는, 기독교에는 주님과 직접 결합할 수 있는 말씀(the Word)이 있기 때문이며, 그 말씀 아래 살아생전, 이미 밝고 환한 빛 가운데 천국 생활에 꼭 필요한 선으로 명료하게 준비될 수 있기 때문이다.

 

6. 이에 비해 타 종교는 흐린 초롱불이며, 초라한 그릇들이어서 어쩔 수 없다면 몰라도 가능하다면 이 밝은 빛 아래서, 이 좋은 그릇 안에서 신앙 생활하자 권하는 게 전도요, 선교다.

 

7. 주님의 마음, 주님의 시야는 온 세상이다.

 

※ 참고로, 전 세계 현 종교 분포는 다음과 같습니다.

 

대략적으로, 기독교 25억, 이슬람교 18억, 힌두교 11억, 불교 5억, 중국 전통 신앙 3억 9천 4백만, 부족 신앙 3억, 아프리카 전통 1억, 시크교 2천 3백만, 스피리티즘 1천 5백만, 유대교 1천 5백만 등, 이 외에도 계속되며,

 

여기서 기독교만 보더라도

 

가톨릭 53%, 개신교 40% (이중 주류 교단 17%, 독립교회, 초교파 19%), 성공회 4%, 정교회 11%, 기타 1.3% 등...

 

이 자료는 위키피디아 현재 자료에서 참조했습니다.

 

8. 비기독교인들, 생전에 교회를 다녀본 적이 없는 사람들, 말씀을 들어본 적도, 접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은 그럼 어찌 되는가?

 

그들의 구원이 단순히 예수를 안 믿었다는 걸로,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지 않았다는 걸로 결정된다면... 그건 너무 불공정하지 않을까? 믿음이라는 거, 신앙이라는 거는 단지 그릇, 교리의 문제일 뿐인데, 그 그릇의 문제 때문에 천국을 못 간다면, 주님이 그런 신이시라면, 그건 너무 불공정하지 않을까? 만인에게 공정한, 누구라도 수긍할 수 있는 보다 시스템적인 구원이 필요하지 않을까? 누구라도 ‘’으로 준비되었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시스템! 왜? 천국은 ‘’의 나라이므로...

 

9. 생전에 주님을 몰랐지만 자기 종교의 교리라는 그릇 안에서 ‘’한 삶을 살며, ‘’으로 준비된 자들은 천국 오리엔테이션 때, 천사들을 통해 주님의 선과 진리에 대한 정성을 다한 안내를 받고는,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한다! 그것도 아주 흔쾌히, 아주아주 기뻐하며, 감사하며...

 

이렇게 해서, 주님의 말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

 

가 거기서 이루어지며 완성된다!

 

10. 주님은 심지어 지옥에 있는 사람들도 영원히 사랑하신다. 그래서 지옥의 기운이 전체 피조 세계의 균형을 흔들 때, 그냥 쉽게 바로 지옥에 내려가 직접 교통정리를 하실 수 있는 분이 불편(?)을 감수하시고, 인성을 입으시고 지옥을 방문하신 것! 왜? 그래야 지옥이 소멸되지 않으니까...

 

주님은 천국보다 지옥보다 크신 분! 천국이든 지옥이든, 또 이 세상이든 주님이 여호와의 신성 그 자체로 만일 이 피조 세계에 훅 들어오시면, 주님의 방문을 받은 그 세계는 그냥 바로 소멸됨! 주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삼층천 천사들조차 사실은 주님이 얇은 막을 입히셔서 소멸되지 않게 보호하신다는 사실!

 

우리 주님은 그런 분이신데, 하물며 전 세계 67%에 육박하는 비기독교인들, 그리고 기독교 안에서도 6, 70%에 육박하는 비개신교인들을 외면하실 수 있을까? 우리 주님은 개신교인들만의 하나님이실까?

 

...

 

네, 이상으로 저 36장의 내용을 제 나름대로 좀 풀어보았습니다. 좀 더 생생하고 실제 영계 체험에 관한 에피소드들은 저 책 36장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3년 전, 처음 저 내용을 접하고는 크나큰 충격을 받았으며, 몇 번이고 읽으면서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고, 그리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얼마나 편협한 기독교 개신교 침례교인이었는지 말입니다!

 

저는 지금은 장로교 통합 측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태생부터 밝은 빛 아래 말씀으로 양육 받을 수 있는 환경을 허락하셨던 주님께 무한감사를 드립니다. 요즘 흔한 말로는 금수저도 이런 금수저가 없지요!

 

저 역시 그러나 그동안 이런 주님의 은혜를, 다른 입장, 다른 그릇이라는 환경 가운데 태어나 그런 신앙, 그런 종교인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을 정죄하고 이단이다, 삼단이다 하는 일에 힘썼던 지난날을 고백합니다. 정말 아무 것도 모르던 신앙적 철부지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제 천국이 어떤 곳이며, 주님은 어떤 분이시고, ‘말씀’이란 오직 주님이 하신 말씀이라야만 진정한, 그리고 유일한 ‘말씀(the Word)임을 시인, 고백하게 된 지금은 오직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곧 체어리티(charity)의 삶에 힘쓰며,

 

※ ‘말씀’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야 사도들, 특히 현 기독교 교리의 상당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 바울의 편지에서 자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바울을 비롯, 신약성경 사도들의 서신서들, 그리고 구약성경의 여러 글들, 가령, 룻기, 역대서,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욥기, 잠언, 전도서 등... 은 주님의 말씀을 환히 비추어 주는 조명등의 역할입니다. 우리는 이 조명등들이 비추는 주님을 바라보아야지 이 조명등들을 보면서 거기서 교리를 추출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처럼, 곧 주님은 현 좌파를 비롯, 우파나 중도 안에서도 여전히 불의한 자들이 있지만 변함없이 햇볕과 비를 공평하게 내리시는 주님처럼 선한 삶, 사랑의 실천, 변함없으시고 한결같으신 주님 앞에 나의 할 도리 다 하는 데에만 집중하고자 합니다.

 

체어리티의 삶, 주님 사랑으로 이웃 사랑하기에 여념이 없으신 분들을 보면, 그분들은 이단, 삼단 어쩌고 하실 겨를도 없으시며, 아무리 자기가 듣기에 많이 낯설고 좀 이상한 말을 하더라도 천사들처럼 그 속 사람, 곧 상대방의 내면의 선만 보십니다. 그릇이 아닌, 그 안에 담긴 내용에만 주목하시더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그래야 하겠습니다. 천국은 내면의 나라, 내적 상태의 나라이기 때문에, 주님과 천사들은 사람의 내면, 속 사람, 영의 참모습만 보십니다! 우리도 그래야 하겠습니다.

 

아멘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샬롬! ^^

 

2021-12-17(D6)-천국이야기(8), '교회에 속했던 적이 없는데도 천국에 있는 사람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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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

 

42. 21절,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Verse 21.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ul that creepeth, which the waters made to creep forth, after their kinds, and every winged fowl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물고기들’은 앞서도 말했듯, 이제 주님으로 말미암은 신앙으로 움직이고, 그래서 살아있는 상태가 된 기억-지식들을 상징합니다. Fishes,” as before said, signify memory-knowledges, now animated by faith from the Lord, and thus alive.

 

※ 무엇이든 주님으로 말미암으면 ‘살아있는’(alive), ‘움직이는’(animate) 상태이지만, 자신으로 말미암으면 ‘죽은’(dead), ‘못 움직이는’(inanimate) 상태이기 때문이며, 지식들이 이런 상태가 된다는 것은, 비록 세상, 세속 지식이지만 주님으로 말미암아 거듭나 주님을 향해, 주님을 위해 쓰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식, 특히 세상 지식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닙니다. 다만 그걸 사용하는 사람에 의해 선악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큰 바다짐승들’(whales, 고래, 또는 고래와 같은 거대한 수중생물들)은 기억-지식들의 일반 원리들을 상징하는데, 세부 원리들이 이 원리들을 향하기도, 또 들어오기도 하는 그런 것들입니다. 주님 지으신 이 피조 세계에서는 어떤 지식이 일반 원리 아래 있지 않은 채, 무슨 낙동강 오리알처럼 스스로 존재하는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존재하고 또 존속할 수 있으려면 다 자기의 근원 되는 그런 더 큰 원리들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Whales” signify their general principles, in subordination to which, and from which, are the particulars; for there is nothing in the universe that is not under some general principle, as a means that it may exist and subsist.

 

고래들’, ‘큰 바다짐승들’이 바로 그런 겁니다. 이들이 선지서, 예언서에서 가끔 언급되는 이유는, 이들이 바로 그 본문에서 다른 기억-지식들의 무슨 근원적인 역할들을 하기 때문입니다. Whales,” or “great fishes,” are sometimes mentioned by the prophets, and they there signify the generals of memory-knowledges.

 

예를 들면, 애굽 왕 바로를 가리켜 ‘큰 악어’라 할 때, 그것은 인간의 지혜 또는 지성, 즉 일반적으로는 지식 [scientia]을 가리켜 ‘애굽의 바로 왕이여’라고 하는 것입니다. Pharaoh the king of Egypt (by whom is represented human wisdom or intelligence, that is, knowledge [scientia] in general), is called a “great whale.

 

에스겔에서는 As in Ezekiel:

 

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겔29:3) Behold, I am against thee, Pharaoh king of Egypt, the great whale that lieth in the midst of his rivers, that hath said, my river is mine own, and I have made myself. (Ezek. 29:3)

 

[2] 또 다른 곳에서도 And in another place:

 

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에 대하여 슬픈 노래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를 여러 나라에서 사자로 생각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의 큰 악어라 강에서 튀어 일어나 발로 물을 휘저어 그 강을 더럽혔도다 (겔32:2) Take up a lamentation for Pharaoh king of Egypt, and say unto him, thou art as a whale in the seas, and hast gone forth in thy rivers, and hast troubled the waters with thy feet, (Ezek. 32:2)

 

이 말씀이 가리키는 바는 기억-지식들을 가지고 신앙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고자 무척 애를 쓰는 사람들인데요, 이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힘으로 뭘 해보겠다는 사람들인 겁니다, by which words are signified those who desire to enter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memory-knowledges, and thus from themselves.

 

이사야입니다. In Isaiah:

 

그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사27:1) In that day Jehovah, with his hard and great and strong sword, shall visit upon leviathan the longish [oblongum] serpent, even leviathan the crooked serpent, and he shall slay the whales that are in the sea. (Isa. 27:1)

 

여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는 것은 진리의 일반적인 원리들 조차 모르는 그런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By “slaying the whales that are in the sea” is signified that such persons are ignorant of even the general principles of truth.

 

※ 진리의 일반적인 원리는, 모든 세부, 또는 하부 진리는 상부 진리에서 오며, 상부 진리들은 단 하나의 근원 되는 진리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에서는 So in Jeremiah: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나를 먹으며 나를 멸하며 나를 빈 그릇이 되게 하며 큰 뱀 같이 나를 삼키며 나의 좋은 음식으로 그 배를 채우고 나를 쫓아내었으니 (렘51:34) Nebuchadnezzar the king of Babylon hath devoured me, he hath troubled me, he hath made me an empty vessel, he hath swallowed me as a whale, he hath filled his belly with my delicacies, he hath cast me out, (Jer. 51:34)

 

이 말씀의 의미는 그가 신앙의 지식들을 삼켰다는 것입니다. 위 말씀에서는 ‘좋은 음식’으로 표현되었는데요, 이걸 마치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키듯 그렇게 삼켰다는 것입니다. ‘큰 뱀’(a whale)은 신앙 관련 지식들의 일반적 원리들을 단지 기억-지식들로만 소유하고, 또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denoting that he had swallowed the knowledges of faith, here called “delicacies,” as the whale did Jonah; a “whale” denoting those who possess the general principles of the knowledges of faith as mere memory-knowledges, and act in this manner.

 

※ 지식 중에서도 신앙에 관한 지식은 아주 값비싼 지식이며, 그중에서도 일반적 지식, 가령,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3:16)

 

와 같은 말씀 지식은 가히 그 한계를 알 수 없는 너무나도 귀한 생명의 지식입니다. 그런데 이런 걸 그저 지식으로만, 머리로만 알고 가볍게, 대수롭지 않게 여길 뿐, 도무지 무슨 가슴 신앙으로 감동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위 예레미야 본문에서는 ‘큰 뱀’이라 한 것입니다.

 

 

※ 이상으로, 오늘 본문 창세기 1장 21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속뜻)

주님은 사람의 겉과 속, 겉 사람과 속 사람 안에 모든 기억-지식과 합리, 지성을 가득하게 하시되 근본원리에서 특별원리로, 일반원리에서 세부원리로 아주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질서대로 쌓이게 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선입니다.

 

※ 세상 지식을 학습, 습득하면서도 그 원천이 주님이심을, 또 그 지식들을 가지고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생각하여 천국 지성에 이르는 중에도 그 원천이 주님이심을 늘 시인하고, 지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을 천국으로 데려가고 싶으시면 그냥 간단히 허락만 하시면 될 것 같은데, 왜 주님은 이렇게 속 사람, 겉 사람, 내면, 외면, 기억-지식, 합리와 이성, 지성 등 복잡한 일을 또 치밀하게 조직적으로 하실까요?

 

그것은 천국은 내면의 나라, 내적 상태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겉으로 그럴듯하게 보여도, 속으로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설령 주님의 허락이 있다 해도 사람은 천국에 머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방열복을 안 입고 용광로 작업을 하는 것과 같아 천국에 들어갔는데도 지옥도 그런 지옥이 없는 상태를 맛보게 되기 때문이며, 그래서 주님은 사전에 이렇게 아주 단단히 준비를 시키시는 것입니다.

창1,21, AC.42,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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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0ckHC7alI9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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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

 

39. 20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Verse 20.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es of the expanse of the heavens.

 

큰 광명체들이 속 사람 안에 자리를 잡고 불이 켜지면, 겉 사람은 그들로부터 빛을 받습니다. 그때 비로소 사람은 처음으로 살기 시작합니다. After the great luminaries have been kindled and placed i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receives light from them, then the man first begins to live.

 

※ 속 사람 안 두 큰 광명체는 사랑과 신앙입니다. 이렇게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준비가 끝난 사람이라야 생명이 시작되었다 말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근원 되신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빛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면서 그 선이 자신에게서 나오는 줄 알고 살아왔다면, 또 무슨 진리를 말하면서도 역시 그렇게 여기며 살아왔다면, 그는 그동안 ‘살아온’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자신에게 사로잡혀 있는 동안은 그는 ‘죽은’ 상태이며, 그의 안에는 악과 거짓 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그게 무엇이든 사실은 모두 살아있는 게 아닙니다. 그 자체로 선인 그런 선을 사람이 자신으로 말미암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Heretofore he can scarcely be said to have lived, inasmuch as the good which he did he supposed that he did of himself, and the truth which he spoke that he spoke of himself; and since man of himself is dead, and there is in him nothing but what is evil and false, therefore whatsoever he produces from himself is not alive, insomuch that he cannot, from himself, do good that in itself is good.

 

※ 오직 주님만이 선하시며, 주님만이 선의 근원이십니다. 달이 해의 빛을 받아 반사만 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도 주님의 선을 반사만, 전달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사람은 선을 마음먹는 것은 고사하고, 생각하는 것조차 사실은 할 수 없으며, 그 결과 선을 행한다는 것은 도저히,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신앙의 교리, 가르침을 보면 누구나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마태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That man cannot even think what is good, nor will what is good, consequently cannot do what is good, except from the Lord, must be plain to everyone from the doctrine of faith, for the Lord says in Matthew: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마13:37) He that soweth the good seed is the son of man. (Matt. 13:37)

 

※ 그만큼 사람은 주님의 선과 진리로부터 정말 철저히 분리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선은 그 유일하신 참 근원 되시는 분 아니고서는 어디서도 올 수 없습니다. 다른 데서 하신 주님 말씀입니다. Nor can any good come except from the real fountain of good, which is one only, as he says in another place: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눅18:19) None is good save one, God. (Luke 18:19)

 

[2] 이런 정황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사람을 소생시키실 때, 즉 그를 거듭나게 하셔서 생명을 얻게 하실 때, 주님은 먼저 사람이 그가 선을 행하는 것도 자기요, 진리를 말하는 것도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더라도 그렇게 하도록 허용하십니다. 그 이유는, 이때는 사람이 그밖에 무슨 다른 걸 생각할 수도, 무슨 다른 방법으로 인도함을 받아 믿을 수도, ‘아, 모든 선과 진리는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말미암는구나!’ 깨달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Nevertheless when the Lord is resuscitating man, that is, regenerating him, to life, he permits him at first to suppose that he does what is good and speaks what is true from himself, for at that time he is incapable of conceiving otherwise, nor can he in any other way be led to believe, and afterwards to perceive, that all good and truth are from the Lord alone.

 

※ 김혜자 씨의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책 이름이 생각납니다. 주님은 비록 그것이 옳고 정당하다 하더라도 만일 우리가 그 지적, 그 비판을 힘들어하며, 아파하겠다 여겨지시면, 대신 빙 돌아가며 기다리는 편을 택하십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리가 자원함으로 주님 편으로 돌아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중간에 그저 수수방관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불꽃 같은 두 눈으로 늘 우리를 붙드시며, 전능하신 섭리로 영원히 우리를 돌보시는 분입니다.

 

사람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동안은 그의 선과 진리들은 ‘’과 ‘씨 맺는 채소’, 그리고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에 비유될 수 있으며, 이 모든 것은 ‘못 움직이는’(inanimate), 즉 생물은 생물인데 움직이지 못하는 생물입니다. 그러나 이제 사람은 사랑과 신앙으로 활기를 띠게 되었고, 자기가 행하는 모든 선과 말하는 모든 진리를 행하시는 분은 사실은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는 이제는 먼저 ‘물에서 번성하는 생물들’, 그 다음 ‘땅 위를 나는 새들’, 끝으로 ‘짐승들’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제는 ‘움직이는’(animate) 것들이며, 그래서 언급하기를 ‘생물’이라 하는 것입니다. While man is thinking in such a way his truths and goods are compared to the “tender grass,” and also to the “herb yielding seed,” and lastly to the “tree bearing fruit,” all of which are inanimate; but now that he is vivified by love and faith, and believes that the Lord works all the good that he does and all the truth that he speaks, he is compared first to the “creeping things of the water,” and to the “fowls which fly above the earth,” and also to “beasts,” which are all animate things, and are called “living souls.

 

 

4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생물’은 겉 사람에게 속한 기억-지식(memory-knowledge)을 뜻합니다. ‘새들’은 보통은 합리적(rational)이고 지성적인(intellectual) 것들을 뜻하는데, 이 중 후자는 속 사람에게 속한 것입니다. By the “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 are signified the memory-knowledge which belong to the external man; by “birds” in general, rational and intellectual things, of which the latter belong to the internal man.

 

수중 생물들’이나 ‘물고기들’이 기억-지식들을 가리킨다는 것은 이사야서를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e “creeping things of the waters,” or “fishes,” signify memory-knowledges is plain from Isaiah:

 

2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찌 됨이냐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짖어 바다를 마르게 하며 강들을 사막이 되게 하며 물이 없어졌으므로 그 물고기들이 악취를 내며 갈하여 죽으리라 3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굵은 베로 덮느니라 (사50:2-3) I came and there was no man; at my rebuke I dry up the sea, I make the rivers a wilderness; their fish shall stink because there is no water and shall die for thirst; I clothe the heavens with blackness. (Isa. 50:2–3)

 

[2] 에스겔서를 보면 더 분명합니다. 거기서 주님은 새 성전, 혹은 일반적으로는 어떤 새 교회 및 그 교회에 속한 사람이나 어떤 거듭난 사람을 묘사하시는데, 누구든지 거듭난 사람은 다 주님의 일종의 성전이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But it is still plainer from Ezekiel, where the Lord describes the new temple, or a new church in general, and the man of the church, or a regenerate person; for everyone who is regenerate is a temple of the Lord:

 

8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9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10또 이 강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겔47:8-10) The Lord Jehovih said unto me, These waters that shall issue to the boundary toward the east, and shall come toward the sea, being led into the sea, and the waters shall be healed;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 living soul that shall creep forth, whithersoever the water of the rivers shall come, shall live, and there shall be exceeding much fish, because those waters shall come thither, and they shall heal, and everything shall live whither the river come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fishers shall stand upon it from En-gedi to En-eglaim, with the spreading of nets shall they be; their fish shall be according to its kind, as the fish of the great sea, exceeding many. (Ezek. 47:8–10)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어부들’은 자연적인(natural) 사람을 신앙의 진리로 가르칠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Fishers from En-gedi unto En-eglaim,” with the “spreading of nets,” signify those who shall instruct the natural man in the truths of faith.

 

※ 주님이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하신 말씀,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마4:19)

 

가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

 

[3]’가 합리적이고 지성적인 것들을 상징한다는 것은 예언서들, 가령, 이사야서를 보면 분명합니다. That “birds” signify things rational and intellectual is evident from the prophets; as in Isaiah:

 

내가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을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 (사46:11) Calling a bird from the east, the man of my counsel from a distant land. (Isa. 46:11)

 

예레미야에서는 And in Jeremiah: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렘4:25) I beheld and lo there was no man, and all the birds of the heavens were fled. (Jer. 4:25)

 

에스겔서에도 In Ezekiel:

 

22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 23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 (겔17:22-23) I will plant a shoot of a lofty cedar, and it shall lift up a branch, and shall bear fruit, and be a magnificent cedar; and under it shall dwell every fowl of every wing, in the shadow of the branches thereof shall they dwell. (Ezek. 17:22–23)

 

호세아서에서는 어떤 새 교회나 거듭난 사람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And in Hosea, speaking of a new church, or of a regenerate man:

 

그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호2:18) And in that day will I make a covenant for them with the wild beast of the field, and with the fowls of heaven, and with the moving thing of the ground. (Hos. 2:18)

 

여기 ‘들짐승’은 정말 들짐승을, ‘’는 그냥 새를 상징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 누가 보아도 분명한 것은, 주님은 이들과 ‘언약을 맺겠다’ 하시기 때문입니다. That “wild beast” does not signify wild beast, nor “bird” bird, must be evident to everyone, for the Lord is said to “make a new covenant” with them.

 

 

41. 사람에게나 적절한 것들은 그게 무엇이든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게 얼핏 보기에 무슨 메인인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그저 딱딱한 무슨 뼈나 까만 덩어리처럼 나타납니다. 그러나 주님으로 말미암는 것들은 그게 무엇이든 거기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영적, 천적인 것이 들어 있으며, 만일 눈에 보이게 나타날 때는 사람의 모습으로, 그리고 살아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Whatever is proper to man has no life in itself, and whenever it is made manifest to the sight it appears hard, like a bony and black substance; but whatever is from the Lord has life, containing within it that which is spiritual and celestial, which when presented to view appears human and living.

 

믿기 어렵겠지만, 그러나 정말 사실입니다. 천사 스피릿을 가진 모든 표현 하나, 모든 아이디어 하나, 그리고 모든 생각의 조각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들은 살아 있으며, 지극히 작은 조각들조차 그 안에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말미암는 애정들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It may seem incredible but is nevertheless most true, that every single expression, every single idea, and every least of thought in an angelic spirit, is alive, containing in its minutest particulars an affection that proceeds from the Lord, who is life itself.

 

※ 사람의 생명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주님께 사로잡힌 사람은 그 모든 언행에서 주님의 생명이 흘러나오며, 빛처럼 뿜어져 나옵니다. 주위 사람들은 그의 주변에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목격하며, 생명력을 경험합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으로 말미암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 안, 그것들 안에 주님을 향한 신앙이 있기 때문인데요, 이것이 바로 여기서 ‘생물’(living soul)이 상징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이 생물들은 또한 일종의 몸을 가지고 있는데요, 그것이 여기서 ‘스스로 움직이는 것’, ‘기는 것’이 가리키는 바입니다. 하지만 이들 진리들은 사람에게는 아직 너무 심오한 비밀들이어서, 여기서는 단지 ‘생물’, ‘스스로 움직이는 것’ 정도로만 표현되고, 또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And therefore whatsoever things are from the Lord, have life in them, because they contain faith toward him, and are here signified by the “living soul”: they have also a species of body, here signified by “what moves itself” or “creeps.” These truths, however, are as yet deep secrets to man, and are now mentioned only because the “living soul,” and the “thing moving itself,” are treated of.

 

 

※ 이상으로, 오늘 본문 창세기 1장 20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속뜻)

우리는 비록 겉 사람의 일일지라도 열심히 기억-지식을 습득하여 그것들로 주님을 향한 신앙의 징검다리들이 되게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빛을 구하여 주님 주신 모든 합리와 지성, 이성과 지혜로 우리의 속 사람을 채워야 하겠습니다.

 

※ 우리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준비되며, 무엇으로 채워져야 하는지를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겉 사람은 기억-지식으로, 속 사람은 합리와 지성으로 채워지며, 번성, 충만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생물’, 곧 주님을 향한 신앙과 사랑의 생명이어야 합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은 지식, 합리, 지성은 참 지식, 참 합리, 참 지성이 아니며, 거기엔 생명이 없어 사실은 ‘죽은’ 것입니다.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아야 합니다. 모든 공과 영광을 홀로 오직 주님께만 돌리는 것, 그것이 ‘사는 것’이요, 바로 ‘생명’, ‘생물’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창1,20, AC.39-41,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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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SyAklYxDg_M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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