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

 

14-17절,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Verses 14–17. And God said, Let there be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distinguish between the day and the night; and let them be 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And let them be for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And God made two great luminaries, the greater luminary to rule by day, and the lesser luminary to rule by night; and the stars. And God set them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33. 무슨 사랑이라는 게 전혀 없다면 삶이라는 게 절대 불가능하며, 사랑에서 나오는 무엇이 없으면 기쁨이라는 게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사람들은 정말 누가 안 가르쳐줘도 잘 압니다. It is in everyone’s power very well to know that no life is possible without some love, and that no joy is possible except that which flows from love.

 

사랑이라는 거, 삶이라는 거, 즐거움이라는 게 바로 이런 겁니다. 만약 누가 사랑이라는 것들을, 같은 말이지만, 무슨 원하는 것들을, 이런 게 다 사랑에 속한 건데요, 이런 걸 만약 제거할 수 있어 정말 그랬다고 하면, 그 즉시 그는 무슨 사고,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없게 되어, 그는 마치 제가 저세상에서 보아 온 무슨 죽은 사람처럼 되고 말 겁니다. Such however as is the love, such is the life, and such the joy: if you were to remove loves, or what is the same thing, desires—for these are of love—thought would instantly cease, and you would become like a dead person, as has been shown me to the life.

 

※ 이런 사실을 믿지 않는 영이 있어 그를 모든 입류(入流, influx, 주님으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로 흘러드는 어떤 것)로부터 일시 차단된 상태에 있게 하자 그는 그 즉시 마치 무슨 뭍으로 나온 바닷속 해파리처럼 되어 살짝살짝 그저 꿈틀대기만 하더랍니다. 그는 그동안 자기 힘과 능력으로 버젓이 활동도 하며, 이것저것을 하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천국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입류로 그랬던 것입니다.

 

자기 사랑(the loves of self)과 세상 사랑(the loves of the world)은 그 안에 뭔가 삶과 즐거움 비슷한 게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잘 보면 이 둘은 참사랑(true love)하고는 완전 정반대인데요, 참사랑이라는 것은 사람이 주님을 무엇보다도 가장 사랑하는 것이며, 또한 자기의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사랑, 세상 사랑은 사실은 사랑이 아닙니다. 오히려 미움이지요. 사람이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면 할수록 그는 그에 비례해서 이웃을, 그리고 그 결과 주님을 미워하게 됩니다. The loves of self and of the world have in them some resemblance to life and to joy, but as they are altogether contrary to true love, which consists in a man’s loving the Lord above all things, and his neighbor as himself, it must be evident that they are not loves, but hatreds, for in proportion as anyone loves himself and the world, in the same proportion he hates his neighbor, and thereby the Lord.

 

참사랑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참된 삶은 주님 사랑으로 살아가는 삶이며, 참된 기쁨은 참된 삶을 살아갈 때 맛보는 기쁨입니다. Wherefore true love is love to the Lord, and true life is the life of love from him, and true joy is the joy of that life.

 

참사랑은 오직 하나만 존재하며, 그래서 참된 삶도, 그 삶에서 맛보는 참된 기쁨, 더할 나위 없는 행복 역시 그러하며, 바로 이 모든 것을 천국 천사들은 누리고 있습니다. There can be but one true love, and therefore but one true life, whence flow true joys and true felicities, such as are those of the angels in the heavens.

 

 

34. 사랑과 신앙은 분리가 허락된 적이 없습니다. 이 둘은 하나가 되어 같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광명체’가 처음 언급될 때, 그들은 하나로 간주되었으며, 그래서 이르기를,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으라’(Let there be [sit]) 하신 것입니다. Love and faith admit of no separation, because they constitute one and the same thing; and therefore when mention is first made of “luminaries” they are regarded as one, and it is said, “Let there be [sit]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 우리말 번역은 복수형이지만 라틴 표현은 sit, 즉, 영어의 be동사에 해당하는 라틴 sum의 현재 능동태 접속법 3인칭 단수형입니다.

 

이런 정황과 관련, 주님의 허락으로 후술되는 다음 내용들은 정말 놀라운 내용들입니다. Concerning this circumstance it is permitted me to relate the following wonderful particulars.

 

천적 천사(天的, the celestial angels)들은 천적 사랑(the celestial love)을 힘입어 모든 것을 주님으로 말미암는 천사들입니다. 그들은 신앙에 관한 모든 지식 안에서 이 사랑으로 말미암으며, 지상의 언어로는 표현하기가 여의치 않은 그런 어떤 삶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습니다. The celestial angels, by virtue of the celestial love in which they are from the Lord, are from that love in all the knowledges of faith, and are in such a life and light of intelligence that scarcely anything of it can be described.

 

그러나 이와 달리, 신앙의 교리 관련 지식들은 많이 알면서도, 그러나 사랑은 없는 그런 영들의 경우, 천국 마당의 첫 번째 문턱조차 도저히 넘지 못한 채, 도로 달아나버려야 하는, 어떤 냉기 어린 삶이나 희미한 빛 가운데 있습니다. But, on the other hand, spirits who are in the knowledge of the doctrinals of faith, without love, are in such a coldness of life and obscurity of light that they cannot even approach the first threshold of the court of the heavens, but flee back again.

 

그들 중 더러는 그분의 계명대로 살지 않았으면서도 말하기를, 자기들은 주님을 믿어왔다고 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마태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Some of them, while not living according to his precepts, say that they have believed in the Lord, and it was of such that the Lord said in Matthew: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7:21-22, 끝까지) Not everyone that saith unto me, Lord, Lord, shall enter into the kingdom of the heavens, but he that doeth my will: many will say to me in that day, Lord, Lord, have we not prophesied through thy name. (Matt. 7:21–22, to the end)

 

[2] 그래서 사랑 안에 있는 사람들은 또한 신앙 안에 있으며, 그렇게 해서 또한 천국적 삶 가운데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들은 신앙 안에 있다 말은 하면서도 사랑의 삶 가운데 있지는 않은 사람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음이 분명합니다. Hence it is evident that those who are in love are also in faith, and thereby in heavenly life, but not those who say they are in faith, and are not in the life of love.

 

사랑 없는 신앙생활은 열 없는 햇빛과도 같습니다. 겨울, 아무 것도 자라지 못 하는, 만물이 무기력하게 죽은 것 같은 그런 겨울과도 같은 것입니다. 반면, 참신앙은 사랑으로 쭉쭉 뻗어나가는 그런 건데요, 봄철 햇빛과도 같은 것입니다. 봄이 되면 겨울과 달리 빛 외에도 열이 있어 이 해의 열, 곧 햇볕의 결과, 만물이 소생하여 자라고 번성합니다. 대지로 하여금 열매 맺고 비옥하게 하지요. The life of faith without love is like the light of the sun without heat, as in the time of winter, when nothing grows, but all things are torpid and dead; whereas faith proceeding from love is like the light of the sun in the time of spring, when all things grow and flourish in consequence of the sun’s fructifying heat.

 

이것은 영적이고 천국적인 것과 관련하여 정확히 일치하는데요, 말씀에서 세상과 지표면에 존재하는 것들을 가지고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 It is precisely similar in regard to spiritual and heavenly things, which are usually represented in the Word by such as exist in the world and on the face of the earth.

 

신앙이 없거나 사랑 없는 신앙을 또한 주님은 ‘겨울’로 비유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주님이 시대의 끝, 종말, 완성을 미리 말씀하실 때, No faith and faith without love are also compared by the Lord to “winter,” where he foretells the consummation of the age, in Mark:

 

18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19이는 그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막13:18-19) Pray ye that your flight be not in the winter, for those shall be days of affliction. (Mark 13:18–19)

 

하셨는데요, 여기서 ‘이 일’(flight, 비행, 들림, 휴거)은 마지막 때를, 그리고 또한 모든 사람이 자기가 죽는 때를 의미하지요. “Flight” means the last time, and also that of every man when he dies.

 

※ 휴거는 특히 개신교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겉 글자의 뜻 그대로 이해를 했기 때문입니다. 같은 본문의 마태복음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마24:31)

 

AC.4060을 보면, 이 말씀은 새 교회의 일어남을 의미합니다. ‘택하신 자들’은 사랑의 선과 신앙의 선 안에 있는 사람들을, ‘사방에서’는 선과 진리의 모든 상태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는 교회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들을 각각 의미합니다.

 

즉, 휴거란 종말의 때임에도 불구, 여전히 사랑과 신앙의 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일으켜, 주님의 새 교회를 세우시는 걸 의미하지, 우리가 아는 것처럼 갑자기 사람들이 공중으로 들림 받고 하는 게 아닙니다. 태고교회 종말의 때에, 그런 암흑과도 같은 상황에서도 노아라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주님 신앙을 이어가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즉 그들을 리메인스처럼 보관하셨다가 나중에 쓰신 것입니다.

 

‘겨울’은 사랑이 결핍된 삶을, ‘환난의 날’은 저세상 삶의 끔찍한 상태를 말합니다. “Winter” is a life destitute of love; the “day of affliction” is its miserable state in the other life.

 

 

35. 사람에게는 두 가지, 타고나는 능력이 있는데, 바로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입니다. Man has two faculties: will and understanding.

 

후자가 전자에 의해 다스려질 때, 이 둘은 한 마음이 되며, 그것은 곧 하나의 삶, 겉과 속이 같은 삶이 됩니다. 그때 사람은 자기가 의도하고 생각하는 것을 또한 마음먹고 행하기 때문입니다. When the understanding is governed by the will they together constitute one mind, and thus one life, for then what the man wills and does he also thinks and intends.

 

그러나 만일 후자, 곧 이해가 의지와 모순되고 서로 상충될 때, 이때가 바로 말로는 신앙을 가졌다 하면서도 실제로는 신앙과 모순되게 살고 있을 때인데, 이때는 하나였던 마음이 둘로 나뉘게 됩니다. 이때는 마음 하나는, 즉 말로는, 머리로는 천국을 그렇게 간절히 사모하여 천국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하지만, 다른 마음, 곧 의지로는 지옥을 향하는 경향을 띠게 됩니다. 이 경우, 의지가 모든 행위에 있어 행위자(doer)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사람은 만일 주님이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면 지옥으로 곤두박질쳐지는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But when the understanding is at variance with the will (as with those who say they have faith, and yet live in contradiction to faith), then the one mind is divided into two, one of which desires to exalt itself into heaven, while the other tends toward hell; and since the will is the doer in every act, the whole man would plunge headlong into hell if it were not that the Lord has mercy on him.

 

 

36. 신앙을 사랑으로부터 분리해 온 사람들, 신앙 따로, 사랑 따로인 사람들은 사실은 신앙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것입니다. They who have separated faith from love do not even know what faith is.

 

신앙이라는 걸 떠올릴 때, 어떤 사람들은 그건 단지 생각일 뿐이라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건 주님을 다이렉트로 생각하는 거라고 합니다. 신앙을 생각할 때, 신앙의 교리(the doctrine of faith)를 떠올리는 사람들은 아주 극소수입니다. When thinking of faith, some imagine it to be mere thought, some that it is thought directed toward the Lord, few that it is the doctrine of faith.

 

신앙이라는 것은, 신앙의 교리 안에 들어있는 모든 것에 대한 일종의 지식과 인정(認定, acknowledgment) 및 그 교리들이 가르치고 있는 모든 걸 또한 복종하여 따르는 것입니다. But faith is not only a knowledge and acknowledgment of all things that the doctrine of faith comprises, but especially is it an obedience to all things that the doctrine of faith teaches.

 

신앙이 가르치고 있는, 그리고 사람이 반드시 따라야 하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이런 신앙 가운데 있는 게 아니라면 그는 신앙인이 아닙니다. The primary point that it teaches, and that which men should obey, is love to the Lord, and love toward the neighbor, for if a man is not in this, he is not in faith.

 

이것이 바로 주님이 마가복음에서 아주 명료하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This the Lord teaches so plainly as to leave no doubt concerning it, in Mark: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The foremost of all the commandments is, Hear, O Israel, the Lord our God is one Lord; therefore thou shalt love the Lord thy God with all thy heart, and with all thy soul, and with all thy mind, and with all thy strength: this is the foremost commandment; and the second is like, namely this, thou shalt love thy neighbor as thyself; there is none other commandment greater than these. (막12:29-31)

 

마태복음에서는, 주님은 이 둘 중 첫째를,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 하셨고,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1)라고 하셨습니다. In Matthew, the Lord calls the former of these the “first and great commandment,” and says that “on these commandments hang all the law and the prophets.”(Matt. 22:37–41)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41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마22:37-41)

 

‘율법과 선지자’는 신앙 관련 범 우주적 교리, 곧 말씀 자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The “law and the prophets” are the universal doctrine of faith, and the whole Word.

 

 

37. 본문 14절, 광명체들로 하여금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의 경우, It is said that the luminaries shall be “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여기에는 사실은 현재 수준에서 밝힐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비의(秘義, arcana)가 들어 있습니다. 글자 상으로는 그런 종류의 비의가 전혀 나타나지 않아도 말이지요. In these words are contained more arcana than can at present be unfolded, although in the literal sense nothing of the kind appears.

 

여기서는 이제 말씀드리는 내용 정도로도 충분하겠습니다.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 교대(alternations), 반복이라는 게 있습니다. 전체적으로든 세부적으로든 말이지요. 날의 변화, 해의 변화 같은 것입니다. Suffice it here to observe that there are alternations of things spiritual and celestial,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which are compared to the changes of days and of years.

 

날의 변화의 경우, 아침, 정오, 그리고 저녁, 밤을 거쳐 다시 아침이지요. 해의 변화도 비슷합니다. 봄, 여름, 그리고 가을, 겨울을 거쳐 다시 봄으로 이어집니다. 이런 게 있는 것입니다. The changes of days are from morning to midday, thence to evening, and through night to morning; and the changes of years are similar, being from spring to summer, thence to autumn, and through winter to spring.

 

열과 빛도 그렇고 그래서 그 결과, 땅에서 나는 소산물들도 그렇습니다. Hence come the alternations of heat and light, and also of the productions of the earth.

 

이 모든 것이 영적, 그리고 천적인 것들의 교대, 반복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To these changes are compared the alternations of things spiritual and celestial.

 

이런 교대와 변화, 반복, 다양성이 없는 삶은 단일, 획일적이 되며, 그 결과, 그런 삶은 전혀 삶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선과 진리도 전혀 알아차리거나 구분, 심지어 감지조차도 할 수 없게 됩니다. Life without such alternations and varieties would be uniform, consequently no life at all; nor would good and truth be discerned or distinguished, much less perceived.

 

이런 교대, 반복을 선지서에서는 ‘법도’(ordinances)라 하셨습니다. These alternations are in the prophets called “ordinances” [statuta], as in Jeremiah:

 

35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는 해를 낮의 빛으로 주셨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정하였고 바다를 뒤흔들어 그 파도로 소리치게 하나니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36이 법도가 내 앞에서 폐할진대 이스라엘 자손도 내 앞에서 끊어져 영원히 나라가 되지 못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31:35-36) Said Jehovah, who giveth the sun for a light by day, and the ordinances of the moon and of the stars for a light by night, . . . these statutes shall not recede from before me. (Jer. 31:35–3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주야와 맺은 언약이 없다든지 천지의 법칙을 내가 정하지 아니하였다면 (렘33:25) Said Jehovah, If my covenant of day and night stand not, and if I have not appointed the ordinances of heaven and earth. (Jer. 33:25)

 

이 일들에 관해서는, 이 일들은 주님의 신적 자비에 속한 일들인데, 창세기 아래 구절에서 좀 더 깊이 살펴볼 것입니다. But concerning these things, of the Lord’s Divine mercy, at Genesis 8: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창8:22)

 

 

※ 이상으로, 오늘 본문 창세기 1장 14-17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속뜻)

주님은 속 사람 안에 사랑과 신앙의 불을 켜시고 이것으로 이후 모든 주님의 질서를 베풀고자 하셨습니다. 사랑으로는 사람의 의지와, 신앙으로는 사람의 이해와 각각, 그리고 함께 연동되어 하나가 되게 하시며, 신앙 관련, 수많은 진리의 교리들을 허락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두 큰 빛을 사람의 마음에 허락하셨습니다.

 

※ 우리 안에 주님으로 말미암은 이 두 크고 거룩한 빛, 사랑과 신앙의 빛이 환히 켜졌음을 늘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비록 아직은 지상에 머물며 살고 있지만, 그러나 천적 천사들 못지않게 천국을 경험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아멘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창1,14-17, AC.30-37,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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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ITbje8EgJ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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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

 

30. 14-17절,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Verses 14–17. And God said, Let there be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distinguish between the day and the night; and let them be 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And let them be for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And God made two great luminaries, the greater luminary to rule by day, and the lesser luminary to rule by night; and the stars. And God set them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먼저, 신앙의 본질(the essence of faith)이 무엇인지, 그리고 새롭게 빚어지는 중인 사람들한테서 볼 수 있는 그것의 진보(progress)가 무엇인지를 알기 전까지는, 본문의 ‘큰 광명체’의 의미를 클리어하게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What is meant by “great luminaries” cannot be clearly understood unless it is first known what is the essence of faith, and also what is its progress with those who are being created anew.

 

신앙의 본질과 생명 그 자체는 홀로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 자신 요한복음에서 선언하신 것처럼 말이지요. The very essence and life of faith is the Lord alone, for he who does not believe in the Lord cannot have life, as he himself has declared in John: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3:36) He that believeth on the son hath eternal life, but he that believeth not on the son shall not see life, but the wrath of God shall abide upon him. (John 3:36)

 

[2] 새롭게 빚어지는 중인 사람들한테서 볼 수 있는 신앙의 진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The progression of faith with those who are being created anew is as follows.

 

처음에는 그들에게 생명이라는 게 없습니다. 생명은 오직 선과 진리 안에만 있고, 악과 거짓 안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그들은 신앙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데요, 먼저는 기억 신앙(faith of the memory)으로입니다. 그저 일종의 지식 신앙(a faith of mere knowledge [fides scientifica])이지요. 다음은 머리 신앙(faith in the understanding)으로, 곧 일종의 지성 신앙(an intellectual faith)으로입니다. 끝으로, 가슴 신앙(faith in the heart)으로입니다. 사랑 신앙(the faith of love), 구원 신앙(saving faith)이라고도 하지요. At first they have no life, for it is only in the good and the true that there is life, and none in the evil and the false; afterwards they receive life from the Lord by faith, first by faith of the memory, which is a faith of mere knowledge [fides scientifica]; next by faith in the understanding, which is an intellectual faith; lastly by faith in the heart, which is the faith of love, or saving faith.

 

앞 첫 두 종류의 신앙을, 3절로 13절에서 못 움직이는 것으로, 세 번째인 사랑으로 활기찬 신앙은 20절로 25절에서 움직이는 것으로 각각 설명하고 있습니다. The first two kinds of faith are represented from verse 3 to verse 13, by things inanimate, but faith vivified by love is represented from verse 20 to verse 25, by animate things.

 

이런 이유로, 사랑과 그 사랑에서 비롯되는 신앙을 여기서 먼저 다루는 것이며, 이르시기를 ‘광명체’(luminaries)라 하셨고, 이때 사랑을 ‘낮을 주관하는 큰 광명체’, 사랑에서 비롯되는 신앙을 가리켜서는 ‘밤을 주관하는 작은 광명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둘은 하나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주님은 이들을 언급하실 때 단수로 부르십니다. ‘광명체들이 있으라’ be 동사의 라틴어 표현을 보면 ‘sit luminaria’입니다. 복수 표현인 ‘sint luminaria’가 아닙니다. For this reason love, and faith thence derived, are now here first treated of, and are called “luminaries”; love being “the greater luminary which rules by day”; faith derived from love “the lesser luminary which rules by night”; and as these two luminaries ought to make a one, it is said of them, in the singular number, “Let there be luminaries” [sit luminaria], and not in the plural [sint luminaria].

 

[3] 속 사람 안의 사랑과 신앙은 육체를 가진(corporeal) 겉 사람에게 있어서는 열과 빛에 해당합니다. 즉, 전자는 후자로 표현되는데요, Love and faith in the internal man are like heat and light in the external corporeal man, for which reason the former are represented by the latter.

 

이것이 광명체들을 ‘하늘의 궁창에 있어’, 곧 속 사람 안에 두신 이유입니다. 큰 광명체는 속 사람의 의지 안에, 작은 광명체는 속 사람의 이해 안에, 마치 해의 빛이 그 빛이 닿는 대상이 있어야만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들 사랑과 신앙은 의지와 이해로만, 즉 의지와 이해가 겉으로 표현될 때만 나타나는 것입니다. It is on this account that luminaries are said to be “set in the expanse of heaven,” or in the internal man; a great luminary in its will, and a lesser one in its understanding; but they appear in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only as does the light of the sun in its recipient objects.

 

의지가 사랑의, 이해가 진리, 신앙의 영향을 각각 받게 된 것은 홀로 주님의 자비로 말미암음입니다. It is the Lord’s mercy alone that affects the will with love, and the understanding with truth or faith.

 

※ 주님은 기꺼이 주님 자신의 거룩한 것으로 하여금 사람의 것과 연동되게 하셨는데요, 곧 사랑, 선, 진리, 신앙 같은 신성한 것들로 하여금 사람의 의지, 이해와 연결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자비, 거룩한 신적 자비입니다.

 

 

31. ‘큰 광명체들’이 사랑과 신앙을 의미하며, 또 다른 데서는 이들을 가리켜 ‘해, 달, 별들’이라 한다는 사실은 에스겔서 같은 선지서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e “great luminaries” signify love and faith, and are also called “sun, moon, and stars,” is evident from the prophets, as in Ezekiel:

 

7내가 너를 불 끄듯 할 때에 하늘을 가리어 별을 어둡게 하며 해를 구름으로 가리며 달이 빛을 내지 못하게 할 것임이여 8하늘의 모든 밝은 빛을 내가 네 위에서 어둡게 하여 어둠을 네 땅에 베풀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겔32:7-8) When I shall extinguish thee, I will cover the heavens and make the stars thereof black; I will cover the sun with a cloud, and the moon shall not give her light; all the luminaries of the light of heaven will I make black over thee, and I will set darkness upon thy land. (Ezek. 32:7–8)

 

이 구절에 나오는 바로와 애굽 사람들은, 말씀에서는 일반적으로 감각적이기만, 그리고 지식적이기만 한 원리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감각적이고 지식적이기만 한 것들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끝나버렸음을 말합니다. In this passage Pharaoh and the Egyptians are treated of, by whom are meant, in the Word, the principle of mere sense and of mere knowledge [sensuale et scientificum]; and here, that by things of sense and of mere knowledge, love and faith had been extinguished.

 

그래서 이사야에서 So in Isaiah:

 

9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 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10하늘의 별들과 별 무리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추지 아니할 것이로다 (사13:9-10) The day of Jehovah cometh to set the land in desolation, for the stars of heaven and the constellations thereof shall not give their light; the sun is darkened in his going forth, and the moon shall not cause her light to shine. (Isa. 13:9–10)

 

계속해서, 요엘서에는 Again, in Joel:

 

1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2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새벽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 10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 (욜2:1-2, 10) The day of Jehovah cometh, a day of darkness and of thick darkness; the earth trembleth before him, the heavens are in commotion; the sun and the moon are blackened, and the stars withdraw their brightness. (Joel 2:1–2, 10)

 

[2] 이사야서에서 주님은, 주님의 오심과 이방인들의 각성, 곧 결과적으로 새 교회의 도래, 그리고 특별히 어두움에 있다가 빛을 받고, 그리고 거듭남의 여정을 시작한 사람들에 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Again, in Isaiah, speaking of the advent of the Lord and the enlightening of the gentiles, consequently of a new church, and in particular of all who are in darkness, and receive light, and are being regenerated:

 

1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2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3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20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 (사60:1-3, 20) Arise, shine, for thy light is come; behold darkness covers the earth, and thick darkness the peoples, and Jehovah shall arise upon thee, and the gentiles shall come to thy light, and kings to the brightness of thy rising; Jehovah shall be to thee a light of eternity, thy sun shall no more go down, neither shall thy moon withdraw itself, for Jehovah shall be to thee a light of eternity. (Isa. 60:1–3, 20)

 

다윗도 그렇게 노래합니다. So in David:

 

5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6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7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8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9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136:5-9) Jehovah in intelligence maketh the heavens; he stretcheth out the earth above the waters; he maketh great luminaries, the sun to rule by day, the moon and stars to rule by night. (Ps. 136:5–9)

 

3해와 달아 그를 찬양하며 밝은 별들아 다 그를 찬양할지어다 4하늘의 하늘도 그를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할지어다 (시148:3-4) Glorify ye Jehovah, sun and moon, glorify him, all ye stars of light, glorify him, ye heavens of heavens, and ye waters that are above the heavens. (Ps. 148:3–4)

 

[3] 이 모든 구절들에서 분명히 ‘광명체들’은 사랑과 신앙을 상징합니다. In all these passages, “luminaries” signify love and faith.

 

유대교회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끊임없이 등불이 타오르게 하신 이유는 바로 이것, 곧 ‘광명체들’로 하여금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표현하고 상징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유대교회의 모든 규례는 주님을 나타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It was because “luminaries” represented and signified love and faith toward the Lord that it was ordained in the Jewish church that a perpetual luminary should be kept burning from evening till morning, for every ordinance in that church was representative of the Lord.

 

이 빛에 대하여 기록되기를, Of this luminary it is written:

 

20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않게 등불을 켜되 21아론과 그의 아들들로 회막 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보살피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지킬 규례이니라 (출27:20-21) Command the sons of Israel that they take oil for the luminary, to cause the lamp to ascend continually: in the tabernacle of the congregation without the veil, which is before the testimony, shall Aaron and his sons order it from evening even until morning, before Jehovah. (Exod. 27:20–21)

 

이 모든 것이 사랑과 신앙을 상징한다는 사실, 주께서 거기에 불을 붙이셔서 먼저 속 사람에게 빛을 비추시고, 그렇게 속 사람을 통해서 또 겉 사람에게 말이지요. 주님의 이런 신적 자비를 우리는 말씀 곳곳에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That these things signify love and faith, which the Lord kindles and causes to give light in the internal man, and through the internal man in the external,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shown in its proper place.

 

 

32. 사랑과 신앙을 처음에는 ‘큰 광명체들’로 부르시다가, 그 다음엔 사랑은 ‘큰 광명체’, 신앙은 ‘작은 광명체’로 부르시고, 계속해서 사랑에 관해서는 ‘낮을 주관하라’, 신앙에 관해서는 ‘밤을 주관하라’ 하십니다. Love and faith are first called “great luminaries,” and afterwards love is called a “greater luminary,” and faith a “lesser luminary”; and it is said of love that it shall “rule by day,” and of faith that it shall “rule by night.”

 

이 모든 것이 그동안은 감추어진 하늘의 비의(秘義, 아케이나 arcana)였는데 이제, 특히 종말의 때인 오늘날,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 비의들에 대한 설명이 허락되었습니다. As these are arcana which are hidden, especially in this end of days, it is permitted of the Lord’s Divine mercy to explain them.

 

이들 비의들이 종말인 오늘날, 특히 더 봉인된 이유는, 지금이 시대의 끝,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아주 희귀하게 되었고, 그 결과 신앙 또한 아주 희귀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주님 자신 복음서에서 이미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예언하신 것입니다. The reason why these arcana are more especially concealed in this end of days is that now is the consummation of the age, when there is scarcely any love, and consequently scarcely any faith, as the Lord himself foretold in the evangelists in these words: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마24:29) The sun shall be darkened, and the moon shall not give her light, and the stars shall fall from heaven, and the powers of the heavens shall be shaken. (Matt. 24:29)

 

여기서 ‘해’가 의미하는 것은 사랑인데, 그 해가 어두워진다 하시며, ‘달’은 신앙을, 그런데 그 달이 빛을 내지 않는다 하십니다. ‘별들’은 신앙의 지식들인데, 하늘에서 떨어진다 하십니다. 이 ‘별들’이 ‘하늘의 권능들’입니다. By the “sun” is here meant love, which is darkened; by the “moon” faith, which does not give light; and by the “stars,” the knowledges of faith, which fall from heaven, and which are the “virtues and powers of the heavens.”

 

[2] 태고교회는 사랑 밖에는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습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 acknowledged no other faith than love itself.

 

천적 천사들도 사랑과 관련되지 않은 무슨 다른 신앙을 알고 있지 않습니다. The celestial angels also do not know what faith is except that which is of love.

 

천국 전체가 사랑입니다. 천국에서 사랑 말고 무슨 다른 삶이라는 건 없습니다. The universal heaven is a heaven of love, for there is no other life in the heavens than the life of love.

 

천국의 모든 행복은 여기, 곧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이 사실은 한 번도 그 설명이 허락된 적도, 심지어 어느 누구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어서 더욱 놀라운 것입니다. From this is derived all heavenly happiness, which is so great that nothing of it admits of description, nor can ever be conceived by any human idea.

 

사랑의 영향 아래 있는 사람들은 주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렇게 알고, 말하고, 지각할 뿐입니다. 모든 사랑, 그리고 그 결과 삶 전체가, 삶은 곧 사랑인데, 그래서 행복이라는 것은 오직 홀로 주님으로부터만 옵니다. 주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로부터는 어떤 사랑도, 삶이나 생명, 행복을 조금도 얻지 못합니다. Those who are under the influence of love, love the Lord from the heart, but yet know, declare, and perceive, that all love, and consequently all life—which is of love alone—and thus all happiness, come solely from the Lord, and that they have not the least of love, of life, or of happiness, from themselves.

 

주님은 모든 사랑의 근원이시라는 사실을 큰 광명체로, 혹은 주님의 변형 관련 말씀에서, ‘해’로 표현하셨습니다. That it is the Lord from whom all love comes was also represented by the great luminary or “sun” at his transfiguration, for it is written: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마17:2) His face did shine as the sun, and his raiment was white as the light. (Matt. 17:2)

 

얼굴은 내면의 가장 깊은 것들을 비추며, 옷은 그것들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비춥니다. Inmost things are signified by the face, and the things that proceed from them by the raiment.

 

그래서 주님의 신성은 ‘해’, 혹은 사랑으로 상징되고, 주님의 인성은 ‘빛’, 혹은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로 상징되었습니다. Thus the Lord’s Divine was signified by the “sun,” or love; and his human by the “light,” or wisdom proceeding from love.

 

창1,11-13, AC.29,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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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JnDX_YnOe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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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이야기 여섯 번째 시간입니다.

 

창조 첫째 날입니다.

 

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3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1:2-5)

 

이야기 #3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창세기 1장 천지창조 첫 육일 간 기록은, 사실은 한 사람의 거듭남 전 과정을 대략 여섯 단계로 나눠 설명한 것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지난 11/15일자 이야기를 참고하시고요, 혹시 카톡 지난 글 찾는 게 불편하시면, 아래 링크, 제 블로그의 ‘창세기 이야기’라는 카테고리로 가시면 지난 글들을 편리하게 보실 수 있으니 참고하세요.

 

https://bygrace.kr/

 

자, 그럼, 위 본문을 중심으로 거듭남의 첫 번째 상태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 참고로, 이후 내용은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의 창세기 주석, ‘Arcana Coelestia’ 글 번호 17번에서 23번까지를 주로 레퍼런스하였습니다.

 

사람의 거듭남 첫 번째 상태는 아직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합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요. 저런 상태에서 이런 상태로 상태 변화가 시작되려면 뭔가 준비 작업이 필요한데요, 그래서 이 첫째 날은 주님이 사람에게 거듭남에 필요한 사전 준비, 거듭남이라는 빌딩을 짓기 전, 땅을 다지는 일종의 사전 정지 작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

 

거듭남 이전 상태, 아직 거듭남이 시작되지 않은 사람의 상태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라 한 것입니다. 여기서 ‘’은 선과 진리의 씨 심긴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의 마음을, ‘혼돈’은 그 땅에 선이 전혀 없음을, ‘공허’는 진리가 전혀 없음을 각각 의미합니다.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이 사랑의 외적 발현이 선(善, the Divine good)이며, 이 선을 담은 그릇이 진리(眞理, the Divine truth)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선은 사랑의 선이요, 주님의 진리는 사랑의 진리인 것입니다.

 

어떤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 말미암았으면, 그 선과 진리의 결과, 그는 주님을 만나며, 주님 앞으로 인도됩니다. 천국은 주님의 선과 진리, 곧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의 나라이므로 주님을 만나는 사람은 곧 천국과 같은 상태가 되어 천국을 맛보게 됩니다. 할렐루야!

 

사람은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가 있어 사람입니다. 주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 사람이 자기의 신성과 상응(相應, correspondence)하도록, 곧 주님의 선(good)과 사람의 의지(will)가, 주님의 진리(truth)가 사람의 이해(understanding)와 각각 서로 상응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거듭남이란, 바로 이 상응이 깨어나 활성화, 서로 공명(共鳴)하는 것이며, 그래서 아직 거듭남이 시작되지 않은 사람의 상태, 주님의 선과 진리가 전혀 없는 상태를 가리켜서는 특별히 ‘혼돈과 공허’(a void and emptiness)라 하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필연적으로 ‘흑암’의 상태, 곧 주님 신앙에 속한 모든 것과, 영적(靈的, spiritual), 천적(天的, celestial) 삶에 속한 모든 것에 매우 어리석고 무지한, 심각한 상태가 되고 맙니다. ‘깊음 위에 있고’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탐욕과 거기서 비롯되는 거짓을 말합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전적으로 이런 상태이며, 그 가운데 완전히 잠겨 있습니다. 이 상태에서는 빛이라는 게 전혀 없기 때문에, 그래서 ‘깊다’, 뭔가 모호하고 혼란스럽다 하는 것입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란 바로 이런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또 천국에서 보면 마치 까만 덩어리(a black mass)처럼, 활기라고는 하나도 없는(destitute of vitality), 아주 극심한 궁핍 덩어리로 보입니다.

 

주님의 진리는 빛인데, 이 빛이 전혀 없으므로 저렇게 까만 덩어리로 보이는 것이지요. 천국이 광명한 나라인 것은 천국은 주님의 진리로 가득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안타까운 상태는 주님의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로 다음 단계인 거듭남을 향해 나아갑니다. 사람은 거듭남이 시작되면 진리라는 게 무엇인지를 알게 되며, 선이라는 것을 통해 마음에 감동이 시작되는데요, 그런데 이때 먼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자기 안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싫어하고 반발하는(hinder and resist) 일체의 요소들을 잠재우는 것입니다. 즉, 옛사람이 죽어야 하는 것이지요. 새사람이 그 안에 잉태되려면 반드시 이런 일이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 이 표현은 주님의 자비를 가리키는 표현인데요,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ove), ‘품으시니라’(brood) 하신 것입니다. 마치 암닭이 알을 품에 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운행하시는 ‘수면 위’(the faces of the waters)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님이 사람 안에 숨기시고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시며 보관하여 오신 것들인데요, 말씀 전체를 통하여, 이것을 가리켜 ‘리메인스’(remains), 혹은 ‘남은 자’(a remnant)라고 합니다. 이것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으로 이루어지며, 외적인 일들, 겉의 일들이 황폐해질 때까지는 결코 겉으로 밝히 드러나지 않는 그런 것입니다.

 

이 지식을 가리켜 여기서 ‘수면 위’라 하신 것입니다.

 

이 ‘리메인스’ 이야기, ‘리메인스’라는 개념은 앞으로 말씀 전체를 관통합니다. 모든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면 그의 영유아 시절, 자기도 모르게 주님으로부터 이 리메인스를 공급받게 되며, 즉 주님이 아이의 안으로 이 리메인스를 밀어넣으시며, 이것은 나중에 그의 거듭남과 회심에 아주 결정적으로 쓰임 받게 됩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주님으로 말미암은 이 천적인 것, 주님의 것이 들어있기 때문에, 주님 보시기에 한 사람이 천하보다 귀하며, 그렇게 사람의 ‘인권’(人權)이라는 것이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즉 인권에 대한 올바른 관점은 각 사람 안에 주님이 보관하신, 주님의 것에 대한 예의와 존중이며, 그것은 곧 이웃 사랑(charity)으로 연결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인권’이라 쓰고, ‘교만’이라 읽는 게 아니고 말입니다. ‘남은 자’ 사상이나 십일조도 다 이 리메인스에서 출발합니다.

 

거듭남의 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라는 것이 뭔가 더 높은 차원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 때부터 시작됩니다.

 

온통 겉 사람 뿐이기만 한 사람들은 무엇이 선이요 진리인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을 선이라고 여기며, 그리고 또 이런 자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호의적인 모든 걸 진리로 여깁니다. 그런 선들은 악이요, 그런 진리들은 거짓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뭔가가 다시 시작될 때, 그때 그는 그동안 자기가 믿어왔던 선이 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빛 가운데로 더욱더 다가갈 때, 이 빛이 바로 주님이신데요, 이분이 바로 선 그 자체이신 분이라는 사실을,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라는 사실을 또한 처음으로 알게 됩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요8:24)

 

사람은 주님의 존재,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믿어야만 한다는 위의 말씀과, 또 주님은 선 또는 생명 그 자체시며, 진리 또는 빛 그 자체시라는 사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주님이 아니면 선도, 진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람은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요1:1, 3-4, 9)

 

빛을 일컬어, ‘좋았더라’, 곧, ‘’(good)이라 합니다. 이 빛이 주님으로 말미암기 때문인데, 주님은 선 그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그동안 빛인 줄 알았던 모든 걸 의미합니다. 사람에게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말이지요. 그동안 악은 선인 것처럼, 거짓은 진리인 것처럼 행세해 왔습니다만, 이제 보니 그것들은 그저 어둠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것들은 그저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그런 것들이었고, 여전히 남아 있는 어둠일 뿐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이해하고 그에 따라 생각하는 모든 것을 진리로 여기며, 또 자기가 의도하고 그에 따라 생각하는 모든 것을 선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든 그것이 주님께 속한 것이면, 그것은 ‘’으로 비교됩니다. 낮은 빛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든 그것이 사람의 본성에 속한 것이면, 그것은 ‘’으로 비교됩니다. 밤은 어둠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저녁’은 모든 선행 상태, 앞서 있었던 모든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상태는 그늘진 상태, 거짓의 상태, 아무런 신앙이 없는 상태입니다. ‘아침’은 모든 후속 상태, 앞으로 진행될 상태를 말합니다. 빛의 상태, 진리의 상태, 신앙에 관한 지식의 상태입니다.

 

저녁’은 일반적으로, 사람의 본성에 속한 모든 걸 의미합니다. 반면에, ‘아침’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모두 주님께 속한 것을 말합니다. 다윗을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2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3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4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삼하23:2-4)

 

아무 신앙이 없는 때를 ‘저녁’이라, 신앙의 때를 ‘아침’이라 하였으므로,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심이 ‘아침’이요, 주님이 떠나가실 때, 그때는 신앙이 없는 때이므로, ‘저녁’이라 하는 것입니다.

 

왜 ‘저녁’에서 바로 ‘아침’이 될까요? 그것은 천국에는 ‘’이 없기 때문입니다. ‘’은 지옥의 상태이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천국에 ‘아침’이니, ‘저녁’이니 하는 무슨 상태들이, 무슨 상태들의 변화가 있다는 말인가요? 네, 맞습니다. 천국에는 상태 변화가 있습니다. 천국은 상태와 그 변화의 나라인데요, 천국의 상태는 곧 천사들의 상태입니다. 천사 하나하나가 가장 작은 천국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천사들의 상태가 새벽, 아침, 낮, 저녁 등으로 변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천사들은 늘 밝은 빛 가운데 하하호호 하며, 항상 충만한 기쁨 가운데 있는 줄 아는데요, 아닙니다. 천사들의 상태도 밝았다, 흐렸다, 기뻤다, 우울했다 합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천사들 역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세상 모든 피조물은 자기를 사랑함이라는, 본성적으로 ‘자기 사랑’에 함몰되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천사들은 이 ‘자기 사랑’을 ‘주님 사랑’으로 억제하는 만큼만, 저지되는 만큼만 천사입니다. 천사들은 생전에 우리하고는 차원이 다르게 주님을 사랑하여서 천사가 되었고, 지금도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존재들인데도 말입니다.

 

천국 한 공동체 내 같은 천사들일지라도 이 천사의 상태와 저 천사의 상태가 다르며, 또 여러 공동체들 역시, 이 공동체와 저 공동체의 상태가 다릅니다. 이 천국과 저 천국의 상태도 다르고요! 이는 마치 이 지구 상의 여러 날씨와 기후, 시간의 상태가 다 다른 것과 같습니다. 지구 이편이 밤이면, 저편은 낮이고, 이쪽에 동이 터오면, 저쪽은 해가 저물며, 이쪽은 타들어가는 가뭄이면, 저쪽은 모든 걸 다 휩쓸어 가는 홍수요, 이쪽이 여름이면, 저쪽은 겨울이고... 등등 지상의 이 모든 상태 변화는 곧 천국의 어떠함을 상응하는 것입니다. 오, 주님! 아멘, 할렐루야!

 

그래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것이요, 그래서 ‘’이 없는 것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이 정도로 첫째 날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을 주님이 주님의 빛, 천국 빛으로 환히 비추사 내면이 밝아져 밝히 깨닫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2021-12-06(D2)-창세기이야기(6), '첫째 날, 거듭남이 시작되는 첫 번째 상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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