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3

 

1567. 6절,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Verse 6. And the land was not able to bear them that they might dwell together, because their substance was great, so that they could not dwell together.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내적, 천적인 것에 속한 것들은 다른 것들과 함께 할 수가 없음을,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속 사람에 의해 습득된 것들은 겉 사람 안에 습득된 것들하고는 함께 할 수가 없음을 각각 의미합니다. The land was not able to bear them that they might dwell together” signifies that the things belonging to the internal celestial things could not be together with the others; “because their substance was great, so that they could not dwell together” signifies that the things that had been acquired by the internal man could not agree with those acquired in the external man.

 

 

1568.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The land was not able to bear them that they might dwell together.

 

이것은 내적, 천적인 것에 속한 것들은 다른 것, 곧 여기서는 ‘’으로 표상된, 그런 것들하고는 함께 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This signifies that the things belonging to the internal celestial things could not be together with the others, that is, with those here signified by “Lot.

 

앞서 말씀드린 대로, 아브람은 주님, 여기서는 주님의 속 사람을 표상하는 반면, 롯은 주님의 겉 사람, 여기서는 주님의 겉 사람으로부터 분리될 것들을 표상합니다. 이것은 내적인 것과 함께 지낼 수 없는 것들입니다. Abram, as before said, represents the Lord, here his internal man; but Lot represents his external man, here the things that were to be separated from the external man, with which the internal things could not dwell.

 

겉 사람 안에는 속 사람이 함께 지낼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선한 애정(affections of good)이라든지, 거기서 나오는 기쁨과 즐거움(the delights and pleasures)이라든지 말이지요. 이런 건 속 사람의 선(the goods of the internal man) 및 기쁨과 행복(its joys and happiness)의 결과들, 효과들이기 때문인데요, 이렇게 되면, 즉, 겉 사람에게 나타나는 이런 효과들은 속 사람과 완전한 상응 가운데 있게 되고, 그때 이들은 속 사람에게 속하게 됩니다. 겉 사람이 아니고 말입니다. There are many things in the external man with which the internal man can dwell, such as affections of good, and the delights and pleasures thence originating; for these are the effects of the goods of the internal man, and of its joys and happiness; and when they are the effects, they altogether correspond; and they are then of the internal man and not of the external.

 

이것은 알려진 대로, 효과가 아닌, 효과를 일으키는 원인에 속한 것이기 때문인데요, 예를 들면, 얼굴 가득 환히 빛나는 체어리티(charity)는 얼굴이 아닌, 내면에 있는 체어리티에 속한 것이며, 그것이 얼굴을 빛나게 하고, 겉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어린아이들의 순진무구함도 같은 이유입니다. 그 표정이며, 몸짓이며, 자기들끼리 노는 모습 가운데 나타나는 순진무구함은 그 표정이나 몸짓에 속한 게 아니라 아이들의 영혼을 통해 아이들 안으로 흘러드는 주님의 순진무구하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전반적으로 순진무구함이 드러나는 것이며, 이런 것은 다른 모든 케이스들도 같습니다. For the effect, as is known, is not of the effect, but of the effecting cause; as, for example, the charity which shines forth from the face is not of the face, but is of the charity that is within, and which so forms the face, and presents the effect; or as the innocence of little children that shows itself in their looks, gestures, and play with each other, is not of the countenance or the gesture, but is of the innocence of the Lord that flows in through their souls; so that the manifestations of innocence are effects; and it is the same in all other cases.

 

[2] 이런 사실로 분명한 건, 겉 사람 안에는 속 사람과 같이 지내며 함께 할 수 있는 게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From this it is evident that there are many things in the external man that can dwell together and agree with the internal man.

 

하지만 그 반대, 곧 속 사람과 함께 할 수 없거나 같이 지낼 수 없는 것들 또한 무척 많다는 사실입니다. 자아 사랑, 세상 사랑이라는 샘에서 솟아나는 모든 케이스가 다 이런 건데요, 이런 건 모두 그 목적이 자기 자신이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But there are also very many which do not agree, or together with which the internal man cannot dwell; this is the case with all things that spring from the love of self, and from the love of the world, for all such things regard self as the end, and the world as the end.

 

이런 것들과, 주님 사랑, 이웃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the celestial things)들은 서로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이들 천적인 것들은 주님을 그 목적으로, 주님의 나라 및 주님과 주님의 나라에 속한 모든 것들을 그 목적으로 삼고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With these the celestial things which are of love to the Lord and love toward the neighbor cannot agree; for these look to the Lord as the end, and to his kingdom and all things that are of him and his kingdom as the ends.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을 향한 목적은 밖이나 아래를(outward or downward) 향합니다만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을 향한 목적은 안이나 위를(inward or upward) 향합니다. 이 모든 것으로 분명한 건, 이 둘은 서로 절대 함께 할 수 없을 정도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The ends of the love of self and the love of the world look outward or downward; but the ends of love to the Lord and love toward the neighbor look inward or upward; from all which it is evident that they disagree so much that they cannot possibly be together.

 

[3] 겉 사람과 속 사람 간 서로 상응하는 게 뭔지, 서로 함께 할 수 있거나 혹은 함께 할 수 없거나 하는 게 뭔지를 알려면 한 가지만 보면, 즉, 어떤 동기, 무슨 목적으로 그러는지, 혹은 같은 말이지만, 어떤 사랑으로 그러는지를 보면 됩니다. 사랑하는 게 사실은 목적이요, 무엇이든 귀히 여기는 그것이 곧 그런 행동의 근본 동기이기 때문입니다. That it may be known what makes the correspondence and agreement of the external man with the internal, and what makes the disagreement, one needs only to reflect upon the ends which reign; or what is the same, upon the loves which reign; for the loves are the ends; for whatever is loved is looked to as the end.

 

살아온 삶의 퀄러티가 어떨 것인지, 그 결과, 사후 어떤 상황이 될지를 이런 걸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동기, 무슨 목적으로 살아왔는지, 나는 평생 무엇을 사랑하며 살았는지를 가지고 내가 살아온 삶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의 삶이란 이것 말고 무슨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It will thus be evident of what quality the life is, and what it will be after death; for, from the ends, or what is the same, from the loves which reign, the life is formed; the life of every man is nothing else.

 

영원한 삶(생명)과 함께 할 수 없는 것들, 즉, 영적, 천적 삶, 이것이 영원한 삶인데, 세상 살 동안 제거되지 않아 아직 남아 있는 이런 것들은 저세상에서는 반드시 제거되는데요, 만일 저세상에서도 제거될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되면, 이런 사람은 영원히 불행해지는 것 말고는 무슨 다른 삶이 없습니다. The things that disagree with eternal life—that is, with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which is eternal life—if not removed in the life of the body, must be removed in the other life; and if they cannot be removed, the man cannot be otherwise than unhappy to eternity.

 

[4] 다음과 같은 사실들, 곧 겉 사람 안에는 속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것들과 함께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과, 전자, 곧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은 후자, 곧 함께 할 수 없는 것들과 도저히 같이 갈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더 나아가, 겉 사람 안에 있는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은 속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며, 이는 곧, 주님으로 말미암아 속 사람을 통해서 오는 것이라는 사실, 이는 마치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것으로 빛나는 얼굴, 혹은 체어리티의 얼굴빛 같은 것이며, 혹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어린이들의 표정과 몸짓에 깃든 순진무구함 같은 것이라는 사실들을 지금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These things are now said that it may be known that there are things in the external man which agree with the internal man, and things which disagree; and that those which agree cannot possibly be together with those that disagree; and further, that the things in the external man which agree, are from the internal man, that is, through the internal man from the Lord; like a face that beams from charity, or a face of charity; or like the innocence in the countenance and gestures of little children, as before said.

 

하지만 함께 할 수 없는 것들은 사람과 사람 고유 본성에 속한 것입니다. But the things which disagree are of the man and what is his own.

 

이상 말씀드린 내용으로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의 의미입니다. From what has been said it may be known what is signified by the words, “the land was not able to bear them that they might dwell together.

 

속뜻으로는, 이 본문은 주님에 관한 본문이며, 그래서 주님과, 주님 닮은 모든 것과 이미지 또한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와 교회, 그리고 그 나라나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 또한 그래서이며, 이렇게 사람들 안에 있는 것들을 여기서 다루어 나가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In the internal sense, the Lord is here treated of; and because the Lord, every likeness and image of him is also treated of—his kingdom, the church, and every man of his kingdom or church; and it is for this reason that the things which are in men are here set forth.

 

주님이 자신의 힘으로 악, 곧 마귀와 지옥을 정복하시고, 또한 그래서 그 인성(his human essence)에 대하여 천적(celestial)이 되시고, 신성(Divine)이 되시며, 여호와가 되시기 전, 주님께 속한 것들을 지금 주님의 예전 상태와 관련하여 살피고 있습니다. The things appertaining to the Lord, before he from his own power overcame evil, that is, the devil and hell, and so became celestial, Divine, and Jehovah, as to his human essence also, are to be considered relatively to the state in which he then was.

 

 

1569.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Because their substance was great, so that they could not dwell together.

 

이는 속 사람을 통해 습득된 것들은 겉 사람 안에 있는, 겉 사람을 통해 습득된 것들하고는 함께 할 수 없다는 의미라는 것을, 방금 말씀드린 내용을 통해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 things that had been acquired by the internal man could not agree with those acquired in the external may be seen from what has just been said.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3장 6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속뜻)

겉 사람 안에 있는 것으로서, 주님으로 말미암아 속 사람 안에 있는 것과 함께 갈 수 있는 것들은 속 사람에게 속하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것, 곧 자기 사랑, 세상 사랑에 속한 것들은 속 사람에게 속할 수 없어 둘 사이 분리가 일어난다

 

※ 우리가 사랑하는 그것이 곧 우리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그것을 목적으로 모든 걸 의도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속 사람 안에는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 곧 우리 인생 전체를 통해서 해야 할 한 가지 일은, 우리의 겉 사람을 속 사람에게 맞추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영계는 겉과 속이 같이 가는 상태의 나라요, 천국은 속 사람의 상태, 곧 주님의 것으로 살아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삶은 겉과 속이 달라도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 속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 가운데서도 늘 속에 맞춰서, 곧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을 목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겉을 속을 향해 정돈하는 것입니다.

2021-11-17(D4)-매일예배(2236, AC.1567-1569, 창13,6),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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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cH9OSZwv0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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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3

 

1562. 5절,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Verse 5. And Lot also, who went with Abram, had flock and herd, and tents.

 

아브람의 일행 롯도’, 주님 안에 있었던 겉 사람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겉 사람에게 있는 풍성한 것들을 각각 의미하며, ‘양과 소’는 겉 사람의 소유들을, ‘장막’은 겉 사람의 예배입니다. 겉 사람에게 속한 이런 것들은 스스로를 속 사람으로부터 분리하고 있었습니다. And Lot also, who went with Abram” signifies the external man that was in the Lord; “had flock and herd, and tents” signifies those things in which the external man abounds; “flock and herd” are the external man’s possessions; “tents” are his worship: these things were separating themselves from the internal man.

 

 

1563. 아브람의 일행 롯도 And Lot also, who went with Abram.

 

이것이 ‘주님 안에 있었던 겉 사람을 의미함’은 롯(Lot)이 표상하는 바가 감각적인(sensuous) 사람, 같은 말이지만, 겉 사람임을 생각할 때,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e external man that was in the Lord is evident from the representation of Lot as being the sensuous man, or what is the same, the external man.

 

누구나 다 그 안에 겉 사람과 속 사람이 있다, 혹은 같은 말이지만, 사람은 겉과 속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얘깁니다. (※ 전에 말씀드린 내용에 대해 보시려면 AC.978, 994-995, 1015 참조) That there is an internal and an external in every man, or what is the same, that man is internal and external, is known to everyone within the church (concerning which see what has been said before, n. 978, 994–995, 1015).

 

겉 사람은 그 생명을 주로 속 사람, 즉, 영이나 혼으로부터 받습니다. The external man receives its life principally from the internal man, that is, from the spirit or soul.

 

겉 사람의 생명 자체가 일반적으로는 속 사람으로부터 옵니다. 그러나 이 생명은 겉 사람의 유기적 그릇들(organic vessels), 곧 속 사람 특유의 것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담게 되어 있는, 겉 사람에게 있어 속 사람과 연결되어 있는 그릇들이 열리지 않는 한, 겉 사람한테 어떻게든 담길 수가 없습니다. Thence comes its very life in general; but this life cannot be received in its particulars, or distinctly, by the external man, unless its organic vessels are opened, which must be the recipients of the particulars and the singulars of the internal man.

 

※ 일단 무엇이든 뭘 담으려면 먼저 뚜껑이 열려야 하는데 안 열린다는 말이지요.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들은 오직 주님의 생명,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에 대해서만 열리기 때문입니다. 감각적이라고 다 무조건 나쁜 건 아닙니다. 겉 사람의 모든 감각적 즐거움도 그것이 주님으로 말미암으며, 주 안에서 그 쓰임새를 따라 누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활짝 열립니다. 그러나 반대로 악한 정욕과 자아와 세상을 사랑함으로 말미암는다면 그때는 열리지 않습니다. 그런 건 생명이라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지금 겉 사람의 생명이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데 둘 사이 무슨 불일치가 있어 그릇이 안 열리고, 그래서 속 사람의 생명이 겉 사람에게 흘러들 수가 없다는 얘깁니다.

 

수용체 노릇을 하게 될 이들 유기적 그릇들은 감각들, 특히 청각과 시각이라는 감각들을 사용하지 않으면 열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그릇들이 열리면 속 사람은 속 사람 특유의 것들을 가지고 그 안으로 흘러 들어갈 수 있습니다. These organic vessels, which are to be the recipients, are not opened except by means of the senses, especially those of hearing and sight; and, as they are opened, the internal man can flow in with its particulars and singulars.

 

그릇들은 감각들을 매개로 해서 지식과 즐거움, 기쁨들을 통해서 열립니다. 지식을 통해서는 이해에 속한 것들이, 즐거움과 기쁨을 통해서는 의지에 속한 것들이 열립니다. They are opened with the senses as the media, by means of knowledges [scientifica et cognitiones], and also by means of pleasures and delights; those belonging to the understanding by means of knowledges, and those belonging to the will by means of pleasures and delights.

 

[2] 이런 것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영적 진리와 함께 갈 수 없는 지식은 자기를 겉 사람한테로 슬그머니 밀어 넣을 것이며, 천적 선과 함께 갈 수 없는 만족과 기쁨도 그럴 것이라는 거, 육체적, 세속적, 그리고 땅에 속한 모든 것을 목적으로 삼는 것들의 경우도, 그런 것들이 목적이 될 때, 겉 사람을 밖으로, 아래로 끄집어내어 속 사람으로부터 제거되는 일이 반드시 일어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From these things it may be seen that it must necessarily happen that such knowledges as cannot agree with spiritual truths will insinuate themselves into the external man; and that such pleasures and delights will insinuate themselves as cannot agree with celestial goods; as is the case with all those things which regard corporeal, worldly, and earthly things as the ends; which, when regarded as ends, draw the external man outward and downward, and so remove it from the internal man.

 

※ 즉, 영적, 천적, 그리고 주님을 향하지 않는, 그와는 정반대로, 육체와 세상, 세속을 향하는 것들은 겉과 속의 하나 됨은커녕, 오히려 분리와 제거의 운명에 처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먼저 흩어버리지 않으면 속 사람은 겉 사람과 하나 될 수가, 함께 갈 수가 없습니다. 속 사람이 겉 사람과 하나 되려면 반드시 이런 일들이 먼저 해결되어야 합니다. Wherefore, unless such things are first dispersed, the internal man cannot possibly agree with the external; so that before the internal man can agree with the external, such things must first be removed.

 

주님과 함께 이런 일들이 제거되거나 분리되는 바로 이런 것이 롯과 아브람 간 서로 헤어지는 걸로 표상되고 있습니다. That with the Lord these things were removed or separated is represented and signified by the separation of Lot from Abram.

 

 

1564.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Had flock and herd, and tents.

 

이것이 겉 사람한테 있는 풍부한 것들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바로 아래 설명된 ‘양’(flock), ‘소’(herd) 및 ‘장막’(tents)의 의미를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e things with which the external man abounds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flock,” “herd,” and “tents,” explained just below.

 

여기 나오는 저들은 겉 사람의 소유들을 의미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롯은 주님의 겉 사람을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They here signify the possessions of the external man; for by Lot, as before said, is represented the Lord’s external man.

 

겉 사람 안에 있는 그의 소유들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요, 하나는 속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함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There are two classes of possessions in the external man, namely, such as can agree with the internal, and such as cannot agree.

 

여기 ‘양과 소와 장막’이 함께 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다음의 이어지는 7절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7절) By “flock, herd, and tents” are here signified those things which cannot agree, as is evident from what follows—“and there was strife between the herdmen of Abram’s cattle and the herdmen of Lot’s cattle” (verse 7).

 

 

1565. ‘양과 소’가 겉 사람의 소유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과 ‘’의 의미가 선이라는, 343번 및 415번 글을 보면 분명합니다만 그러나 여기서는 분리될 것들, 곧 선이 아닌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여기서는 이것들이 롯의 속성으로 설명되고 있으며, 그것은 곧 아브람과 분리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That “flock and herd” signify the possessions of the external man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flock” and “herd,” as being goods (see n. 343 and 415); but here they signify things that are to be separated, and thus things that are not good, because they are attributed to Lot, who was being separated from Abram.

 

’과 ‘’는 또 선하지 않은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을 다음 이어지는 구절들을 보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That “flock” and “herd” signify also things not good is evident from the following passages of the Word.

 

스바냐에서는 In Zephaniah:

 

5해변 주민 그렛 족속에게 화 있을진저 블레셋 사람의 땅 가나안아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를 치나니 내가 너를 멸하여 주민이 없게 하리라 6해변은 풀밭이 되어 목자의 움막과 양 떼의 우리가 거기에 있을 것이며 (습2:5-6) I will destroy thee, that there shall be no inhabitant. And the sea coast shall be habitations dug out for shepherds, and folds for a flock. (Zeph. 2:5–6)

 

예레미야에서는 In Jeremiah:

 

네가 목자와 그 양 떼를 분쇄하며 네가 농부와 그 멍엣소를 분쇄하며 네가 도백과 태수들을 분쇄하도록 하리로다 (렘51:23) I will disperse in thee the shepherd and the flock; and I will disperse in thee the husbandman and his yoke. (Jer. 51:23)

 

계속해서 In the same:

 

28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공격을 받은 게달과 하솔 나라들에 대한 말씀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일어나 게달로 올라가서 동방 자손들을 황폐하게 하라 29너희는 그들의 장막과 양 떼를 빼앗으며 휘장과 모든 기구와 낙타를 빼앗아다가 소유로 삼고 그들을 향하여 외치기를 두려움이 사방에 있다 할지니라 (렘49:28-29) Go ye up to Arabia, and lay waste the sons of the east; their tents and their flocks shall they take. (Jer. 49:28–29)

 

 

1566. ‘장막’이 속 사람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 중인 예배라는 것은 ‘장막’의 의미가 거룩한 예배라는, 414번 글과, 또 롯의 표상이 ‘장막’ 곧, 겉 사람의 예배로 서술되고 있음을 볼 때, 분명합니다. That “tents” are the worship of that which was separating itself from the internal,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ent,” as being the holy of worship (n. 414); and also from the representation of Lot, as being the external man, of which “tents”—or worship—are predicated.

 

장막’의 정반대의 뜻이 거룩하지 않은 예배라는 것은 이어지는 다음 구절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That in the opposite sense “tents” signify worship not holy, is also evident from the following passages of the Word.

 

호세아에서는 In Hosea:

 

보라 그들이 멸망을 피하여 갈지라도 애굽은 그들을 모으고 놉은 그들을 장사하리니 그들의 은은 귀한 것이나 찔레가 덮을 것이요 그들의 장막 안에는 가시덩굴이 퍼지리라 (호9:6) The nettle shall inherit them; thorns shall be in their tents. (Hos. 9:6)

 

하박국에서는 In Habakkuk:

 

7내가 본즉 구산의 장막이 환난을 당하고 미디안 땅의 휘장이 흔들리는도다 8여호와여 주께서 말을 타시며 구원의 병거를 모시오니 강들을 분히 여기심이니이까 강들을 노여워하심이니이까 바다를 향하여 성내심이니이까 (합3:7-8) I saw the tents of Cushan; the curtains of the land of Midian were greatly moved; Jehovah was angry against the rivers. (Hab. 3:7–8)

 

예레미야에서는 In Jeremiah:

 

목자들이 그 양 떼를 몰고 와서 주위에 자기 장막을 치고 각기 그 처소에서 먹이리로다 (렘6:3) Shepherds with their flocks shall come unto the daughter of Zion; they shall pitch tents against her round about; they shall feed down everyone his space. (Jer. 6:3)

 

시편에서는 In David:

 

애굽에서 모든 장자 곧 함의 장막에 있는 그들의 기력의 처음 것을 치셨으나 (시78:51) He smote all the firstborn in Egypt, the beginning of strength in the tents of Ham. (Ps. 78:51)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시84:10) I had rather stand at the threshold in the house of my God, than dwell in the tents of wickedness. (Ps. 84:10)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3장 5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속뜻)

겉 사람의 여러 소유와 예배는 오직 속 사람과 함께할 때만 쓰임 받으며, 만일 그렇지 못할 때는 오히려 속 사람과의 분리를 가중시킨다

 

※ 겉 사람의 것이라고 무조건 다 나쁘며, 역기능을 하고, 악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순종입니다. 겉 사람에게 속한 감각과 즐거움, 기쁨 및 예배들이 만일 속 사람과 함께할 수 있다면, 속 사람을 섬겨 속 사람을 통한 주님의 뜻 받드는 일에 쓰임 받을 수 있다면 그때는 겉 사람에게 속한 것이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주님께 열납되며,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의도가 없고, 그저 육체의 감각과 세상, 세속적 즐거움과 쾌락 추구에만 전념한다면 그때는 아브람의 조카 롯이 결국 아브람과 헤어지는 것처럼 겉 사람은 속 사람과 헤어지게 되며, 이렇게 되면, 겉과 속이 다르게 되어 사후, 영계에서 아주 안타까운 운명을 만나게 됩니다.

 

속 사람 안에는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만 있으며, 그래서 주님은 오직 속 사람을 통해서만 말씀하시고, 사람을 인도하십니다. 주님의 질서는 주님, 속 사람, 겉 사람 순입니다. 이 순서를 잘 기억하고, 반드시 이 순서, 이 질서대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2021-11-16(D3)-매일예배(2235, AC.1562-1566, 창13,5),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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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qjD3OqCcZ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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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이야기 세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부터는 창세기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들어가기 앞서, 거듭 당부드리는 몇 가지입니다.

 

첫째, 사람의 영과 육은 정말 다르듯 말씀의 영과 육, 곧 속뜻과 겉 글자의 뜻은 정말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말씀(the Word)은 어떻게든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려는 인간을 또한 어떻게든 주님과 연결되어 있게 하시려는 주님의 마음, 주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입니다.

 

셋째, 주님의 관심은 오직 사람의 구원, 곧 거듭나서 천국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데 있습니다. 말씀은 한마디로, 거듭남에 관한 책이라는 사실입니다.

 

넷째, 그래서 말씀은 그 주된 포커스가 오직 주님과 천국, 그리고 교회에 맞추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우선, 이 정도만 꼭 붙드셔도 앞으로 읽으시게 될 내용들을 향해 잘 준비된 마음, 착하고 좋은 마음 밭의 상태를 잘 유지하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주님의 신성은 이런 마음 상태라야 한 방울 누수 없이 고스란히 다 담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네, 그럼 시작합니다.

 

우리가 다 잘 아는 창세기 1장은 천지창조의 장,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신 첫 육 일간 기록입니다. 이것이 겉 글자의 의미 그대로이며, 저 역시 사십여 년 전인 대학생 시절, 창조과학회에 심취, 공대생으로서 뭔가 과학적으로도 이론적 뒷받침이 되는 것 같아 더 깊이 들어갔던 생각이 납니다 ^^

 

그러면서도 당시 아인슈타인과 ‘코스모스’의 저자, 칼 세이건의 글 등을 통해, 한편으로는 미니, 마이크로, 분자, 원자, 중성자, 소립자, 미립자의 세계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광활한 우주, 끝도 없는 유니버스의 세계로 등 양쪽 극단의 지식들을 조금, 아주 조금 접하고 제 안에 부인할 수 없었던 의문점들이 있었지요.

 

여기서 이런 얘길 말씀드리려는 건 아니지만... 한 가지만 말씀드리면, 우주 저 수많은 은하 중 비교적 가깝다고 하는, 250만 광년(光年, 빛이 1년 동안 가는 거리) 거리에 있는 안드로메다 은하만 해도 우리 태양계의 태양에 해당하는 항성 수가 1조 개... 이런 헤아릴 수 없는 별들을 그저 이 지구라는 조그마한 행성 하나를 밤에 반짝반짝 비추기 위한 용도로만 지으셨다고? 너무 비능률, 비효율적인 게 아닐까? 하는,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건 있었습니다 ^^

 

네, 이 얘긴 이쯤하고... 다시 창세기 1장입니다.

 

어쨌든 창세기 1장은 겉뜻으로는 창조 첫 육 일간 기록입니다. 그러나 속뜻으로는, 한 사람의 거듭남 전 과정과 관련된 여섯 단계 또는 상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지난번 천국 이야기 #3, ‘천국은 상태(狀態, state)의 나라’에서 말씀드렸듯 창세기를 포함, 말씀도 역시 ‘상태’ 관점에서 보시면 좋습니다.

 

사람의 거듭남을 무슨 계단처럼 딱딱 구분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대략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해지는 노을, 아름다운 색조가 그레디언트하게 연이어져 딱딱 구분은 어려워도 대략적으로는 나눌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잠깐, 거듭난 사람과 거듭나지 않은 사람 간 한 가지 차이점을 말씀드리면요, 거듭난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새 의지(will)와 새 이해(understanding, 이성, 사고력, 이해하는 능력)를 받아 그것으로 주님의 선을 행할 마음을 먹고, 주님의 진리를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의지라기보다는 탐욕으로 기우는 갈망(yearning)이 있고, 이성이라기보다는 잔머리에 가까운 머리굴림(reasoning)이 있습니다. 네, 두 사람은 이렇게 다릅니다.

 

첫 번째 상태는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 상태입니다. ‘혼돈’, ‘공허’, ‘흑암’이라고 하는 상태입니다. 이때 주님의 자비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입니다.

 

두 번째 상태는 주님의 것과 사람의 것 사이, 어떤 구분이 생기는 상태로서, 주님의 것은 ‘리메인스’(remains)라 하여, 모든 사람의 영유아기를 비롯, 어린 시절에 주님으로부터 이슬비처럼 내려 조용히 쌓이는 주님의 선과 진리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모든 사람의 속 사람 안에 영구 보관하시며, 나중에 이걸 가지고, 각 사람의 거듭남의 여정을 도우십니다. 이 리메인스는 사람이 어떤 큰 시험, 불행, 혹은 슬픔 등을 겪을 때, 비로소 깨어나며, 그 사람의 인생에서 이 리메인스가 깨어나면, 그때까지 그가 정신없이 추구하던 모든 세상에 속한 것들은 휴면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두 번째 상태 때, 주님께 속한 것과, 사람에게 속한 것 사이, 구분이 일어납니다. 참고로, 십일조의 기원이 바로 이 리메인스입니다.

 

세 번째 상태는 신앙의 말도 하고,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 선행, 기부, 자선)도 실천하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자기밖에 모르던 사람이 기특하게도 전에 안 하던 이쁜 짓(?)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 아직 활기, 생명력이 없습니다. 이런 걸 자기가 하는 줄로, 자기가 대단해서 하는 줄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풀’,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입니다.

 

네 번째 상태는 애정 어린 사랑의 사람, 조명받은 신앙의 사람이 되는 상태입니다. 드디어 속 사람 안에 신앙의 불, 체어리티의 불이 켜집니다. ‘두 큰 광명체’입니다.

 

다섯 번째 상태는 자기가 하는 신앙의 말과 체어리티의 행위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음을 아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비로소 활기와 생명력을 갖는 상태입니다. ‘바다의 물고기’, ‘하늘의 새’입니다.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의 말을 할 때도, 사랑의 선을 행할 때도 주님을 사랑하여 마음에서 우러나서 하는 상태입니다. ‘생물’, ‘짐승’입니다. 비로소 그는 영적 인간이 되었으며, 이런 그를 가리켜 ‘형상’(image)이라 합니다. 그의 영적 삶은 ‘먹을거리’라고 하는, 신앙의 지식과 체어리티의 일로 더욱 더 밝아지고, 지속되며, 그의 몸과 감각 등 자연적 삶 역시 그렇게 밝아지고, 지속됩니다. 이때 그의 겉 사람은 이런 그의 변화를 저항하며, 그래서 그의 겉 사람과 속 사람 사이 전투가 일어납니다.

 

이 마지막 상태인 여섯 번째 상태 끝에 가서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데, 이제 도저히 이 사람이 예전 삶으로 유턴할 가망이 없다 판단한, 그의 평생에 그를 지옥으로 끌어당긴 악한 영들은 그를 포기하고 물러갑니다. 전투란 서로 상대가 있어야 하는데, 악한 영들이 더 이상 싸움을 포기하고 물러감으로 더 이상 싸울 일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드디어 쉴 수 있게 되며, 그래서 드디어 주님이 쉬실 수 있는 상태, 안식의 상태에 들어갑니다. 이것이 안식일의 속뜻입니다. 우리의 영적 전투는 사실은 우리 대신 주님이 싸우신 싸움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안식일인 것이며, 이 안식의 상태가 바로 일곱 번째 상태입니다.

 

이 일곱 번째 상태는 지상에서는 몇몇 성인(聖人)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 천국의 상태입니다. (사실, 후세를 사는 우리는 이분들을 성인이라고 하지만 정작 본인들은 이런 호칭에 대해 기겁을 하고, 정색을 할 겁니다...)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시대, 아담 교회 때 사람들이 바로 이런 상태였고, 그래서 그때는 천사들도, 그리고 주님도 친히 지상의 사람들과 직접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었습니다. 네, 그런 상태가 바로 일곱 번째 안식의 상태이며, 이런 사람을 가리켜 천적(天的, celestial) 인간이라 합니다. 여섯 번째 상태에 도달한 인간을 영적 인간이라 하고, 여기서 악한 영들이 포기하고 물러간 사람들을 천적 인간이라 합니다.

 

참고로, 그래서 영적 인간의 이야기인 창세기 1장은 주님에 대한 호칭이 ‘하나님’이고, 천적 인간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2장은 주님에 대한 호칭이 ‘여호와’이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겨우 첫 번째 상태에, 그중에서 일부가 두 번째, 그중에서, 그중에서... 여섯 번째 상태만 해도 아주아주 극소수입니다.

 

창세기 이야기의 오프닝, 개략을 너무 많이, 자세히 다루었나요? 앞으로 장별, 절별 자세히 다루는 방식은 좀... 순서대로 나가되 특별한 주제, 이슈 중심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마 이런 얘긴 생전 처음 듣는 분들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가 창세기를 읽을 때, 우리 안의 천사들은 저렇게, 저런 속뜻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영은 영, 육은 육인 것처럼, 우리는 육의 글자를 읽을 때, 천사들은 영의 글자, 곧 속뜻으로 읽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말씀의 속뜻으로 오십니다. 이 표현이 참 어려우실 듯한데요... 네, 어쨌든 그래서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며, 기다리시는 아름다운 분들마다 어서 이 말씀의 속뜻 공부를 좀 하셔야 합니다. 네, 그래서입니다 ^^ 아멘아멘, 할렐루야!

2021-11-15(D2)-창세기이야기(3), '창1 천지창조 이야기는 사람의 거듭남에 관한 이야기'.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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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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