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3

 

1570. 7절,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Verse 7. And there was strife between the herdmen of Abram’s cattle and the herdmen of Lot’s cattle; and the Canaanite and the Perizzite were then dwelling in the land.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함께 할 수 없었음을,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 천적인 것들을, ‘롯의 가축의 목자’, 감각적인 것들을,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겉 사람 안에 있는 악과 거짓들을 각각 의미합니다. There was strife between the herdmen of Abram’s cattle and the herdmen of Lot’s cattle” signifies that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man did not agree; “the herdmen of Abram’s cattle” are the celestial things; “the herdmen of Lot’s cattle” are the sensuous things; “and the Canaanite and the Perizzite were then dwelling in the land” signifies evils and falsities in the external man.

 

 

1571.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There was strife between the herdmen of Abram’s cattle and the herdmen of Lot’s cattle.

 

이 말의 의미가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함께 할 수 없었다라는 것은, ‘가축의 목자’가 예배에 속한 것들을 가르치는 자라는, 누구나 다 알고 있어 굳이 말씀에서 찾아 따로 확인시켜드릴 필요조차 없는, 이런 걸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did not agre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herdmen [or shepherds—pastores] of cattle,” as being those who teach, and thus things that are of worship, as may be known to everyone; it is therefore unnecessary to confirm this from the Word.

 

※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는 속 사람의 예배를, 롯의 가축의 목자는 겉 사람의 예배를 각각 가르치므로 도저히 둘이 함께 할 수 없었다는 것은 당연히 알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뜻입니다.

 

이것은 앞서 5절에 나오는 ‘장막’이라고 하는 것과 관련되며, 그 내용의 포인트는 그것들이 바로 예배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These things relate to what were called “tents” in the preceding verse 5; and it was there pointed out that these signify worship.

 

본 절 바로 앞 절인 6절에서 말씀드린 것은, 5절에 나오는 ‘양과 소’라고 한 것과 관련됩니다. 그 구절을 곰곰 생각해 보시면, 이 구절들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나 습득한 것들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에 또한 포인트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What is said in verse 6, that immediately precedes these words, relates to what were called “flock and herd” in verse 5; and in the consideration of that verse it was also pointed out that these denote possessions or acquisitions.

 

※ 5절의 ‘양과 소와 장막’, 6절의 ‘소유’ 모두 사실은 예배, 곧 속 사람의 예배, 겉 사람의 예배와 관련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예배를, 즉, 속 사람의 예배와 겉 사람의 예배를 다루며, 또 이들은 서로 함께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본 절에 이르기를,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있었다’라고 한 것입니다. 아브람은 속 사람을, 롯은 겉 사람을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As worship is here treated of, namely, that of the internal man and of the external, and as these did not yet agree, it is here said that “there was strife between the herdmen”; for Abram represents the internal man, and Lot the external.

 

예배에 있어, 속 사람과 겉 사람 간 불일치의 본성과 퀄러티는 특히 눈에 띄며, 이는 세세한 것 하나까지도 다 그렇습니다. 예배 때, 속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들에 주목하길 원하지만, 겉 사람은 세상에 속한 것들에 주목하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예배 전반, 어느 것이 우위를 점하느냐 하는 이런 불일치가 생기며, 천국에서는 이런 불일치는 가장 작은 것일지라도 굉장히 명료하게 드러납니다. In worship the nature and quality of the disagreement betwee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are especially discernible, and this even in every single thing of worship; for when in worship the internal man desires to regard the ends that belong to the kingdom of God, and the external man desires to regard the ends that belong to the world, there thus arises a disagreement which manifests itself in the worship, and that so plainly that the smallest bit of such disagreement is noticed in heaven.

 

※ 지상에서는 다소 좀 석연찮은 요소, 동기, 예를 들면, 목사가 교인들에게 주님의 메시지 전달에 주목하기보다 자기가 하고픈 말을 말씀으로 살짝 포장하여 한다든지, 신령과 진정, 주님 사랑, 이웃 사랑에 주목하기보다 교회 외형이나 내부 치장 등에 신경 쓰며, 찾아오는 손님들의 비위를 맞추거나 뭘 과시하는 등의 석연찮은 동기들을 가진 채 예배를 드려도 아무 일이 안 일어나지만 천국은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 간 다툼’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This is what is signified by the “strife between the herdmen of Abram’s cattle and the herdmen of Lot’s cattle.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라는 어구가 추가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The cause is also subjoined, namely, that “the Canaanite and the Perizzite were then dwelling in the land.

 

 

1572.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는 속 사람에게 속한 천적인 것들이며, ‘롯의 가축의 목자’는 겉 사람에게 속한 감각적인 것들이라는 사실은 이미 쭈욱 말씀드린 걸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That “the herdmen of Abram’s cattle” are the celestial things which are of the internal man, and that “the herdmen of Lot’s cattle” are the sensuous things which are of the external man is evident from what has already been said.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로 표현된 천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게 속한 예배의 천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By the celestial things which are “the herdmen of Abram’s cattle” are meant the celestial things in worship which are of the internal man.

 

롯의 가축의 목자’는 겉 사람에게 속한 예배의 감각적인 것들을 의미하며, 속 사람에게 속한 예배의 천적인 것들하고는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By “the herdmen of Lot’s cattle” are meant the sensuous things that are in worship, which are of the external man, and do not agree with the celestial things of the worship of the internal man.

 

이런 것들이 어째서 그런지는 이미 보여드린 것들로 확실합니다. How these things stand is evident from what has already been shown.

 

 

1573.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And the Canaanite and the Perizzite were then dwelling in the land.

 

이것의 의미가 겉 사람 안에 있는 악과 거짓임은 ‘가나안 사람’이 겉 사람 안에 있는, 어머니로부터(※ 앞에 1444번 글 참조) 유전한 악을 의미하고, ‘브리스 사람’은 거기서 나온 거짓을 의미한다는(※ 아래 내용 참조) 걸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evils and falsities in the external man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Canaanite” as being the hereditary evil from the mother in the external man (as before shown, n. 1444);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Perizzite” as being the derivative falsity (concerning which see below).

 

주님에게는 그의 겉 사람 안에 어머니로 말미암은 유전 악이 있으셨다는 사실은 위 1414번, 1444번 글에서 보실 수 있으며, 거기서 나오는 거짓이 있으셨음은 그 필연적 결과입니다. 악이 유전되는 곳에 거짓 또한 있으며, 이는 후자는 전자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That there was with the Lord an evil heredity from the mother in his external man may be seen above (n. 1414, 1444); and that there was falsity from this is a necessary consequence; for where there is hereditary evil, there is also falsity; the latter being born of the former.

 

그러나 악에서 비롯되는 거짓은 사람이 지식(scientifica et cognitiones, 비종교적 지식과 종교적 지식)으로 가득 채워지지 않고서는 태어날 수 없습니다. But the falsity that is from evil cannot be born until the man has been imbued with knowledges [scientifica et cognitiones].

 

악은 이런 지식들 안으로 흘러들어 그 안에서 활동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의지 파트에 속한 악이 지적 파트에 있는 거짓으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이 거짓 또한 유전적이었습니다. 유전한 악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직 거짓의 원리들(principles of falsity)에서 나오는 거짓이 아닌, 겉 사람 안에 있었으며, 거기는 속 사람이 보기에는 거짓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Evil has nothing but these into which it may operate or flow; for in this way the evil which is of the will part is turned into falsity in the intellectual part; so that this falsity also was hereditary, because it was born of what was hereditary, and yet was not the falsity that is derived from principles of falsity; but it was in the external man, and there the internal man could see it to be false.

 

[2] 그리고 아브람의 애굽 체류 전으로 표상된, 주님이 지식을 충분히 습득하시기 전에는 아직 어머니로부터 유전하신 악이 있었기 때문에, 전 장 6절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하였고, 브리스 사람에 대한 언급은 아직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가 지식을 습득하신 후이시라 이르기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로 ‘가나안 사람’은 악을, ‘브리스 사람’은 거짓을 의미함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And because there was hereditary evil from the mother before the Lord had been imbued with knowledges, or before Abram sojourned in Egypt, it is said in the preceding chapter, verse 6, that “the Canaanite was in the land,” but not the Perizzite; but here, after he had been imbued with knowledges, it is said that “the Canaanite and the Perizzite dwelled in the land”; from which it is evident that by “the Canaanite” is signified evil, and by “the Perizzite” falsity.

 

이 사실에서 또한 분명한 건,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에 대한 언급이 무슨 역사적 기록을 하는 중에 나온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들에 대한 언급 전후로 무슨 아무런 관련도 없이 갑자기 난데없이 툭 등장하는 걸 보면 그렇습니다. 전장 6절의 가나안 사람에 대한 언급도 그렇습니다. 이 모든 걸 통해 보면 여기엔 속뜻이 아니고서는 절대 알 수 없는 무슨 아케이나가 숨겨져 있음이 분명합니다. It is also evident from this, that the mention of the Canaanite and the Perizzite is not in any historical series, for in what goes before and in what follows they are not treated of at all; and the same is true of the mention of the Canaanite in the foregoing chapter, verse 6; from all which it is evident that some arcanum lies hidden here which cannot be known except from the internal sense.

 

[3] 주님에게 어머니로부터 유전한 악이 있었다 하는 말에 아마 놀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여기 보면 분명히 그렇다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이 속뜻으로는 주님에 대한 내용이기 때문에, 사실이 그렇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Its being said that there was with the Lord hereditary evil from the mother may cause surprise, but as it is here so plainly declared, and as the Lord is treated of in the internal sense, it cannot be doubted that so it was.

 

사람이면 어느 누구도 부모를 통해 악의 유전 없이 태어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For no human being can possibly be born of another human being without thence deriving evil.

 

그러나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는 유전 악이요, 어머니로부터의 유전 악은 또 별개입니다. But the hereditary evil derived from the father is one thing, and that from the mother is another.

 

아버지로부터 유전한 악은 더욱 내적(內的, internal)이며, 영원히 존재합니다. 그것은 뿌리 뽑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경우는 그런 악이 아니셨습니다. 주님은 아버지 여호와로 말미암아 태어나셨기 때문이며, 그래서 내적으로는 신성(Divine) 곧 여호와이셨습니다. The hereditary evil from the father is more internal, and remains to eternity, for it cannot possibly be eradicated; but the Lord had not such evil, because he was born of Jehovah the Father, and thus as to internals was Divine or Jehovah.

 

그러나 어머니로부터 유전한 악은 겉 사람에 속합니다. 주님의 경우가 바로 이 경우였으며, 그래서 일컫기를,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하였고, 여기서 비롯된 거짓을 ‘브리스 사람’이라 한 것입니다. But the hereditary evil from the mother is of the external man; this did exist with the Lord, and it is called “the Canaanite in the land”; and the falsity from this is “the Perizzite.

 

이렇게 주님도 여느 사람들처럼 태어나셨고, 여느 사람들이 갖는 연약함을 가지셨습니다. Thus was the Lord born as are other men, and had infirmities as have other men.

 

[4] 주님이 어머니로부터 유전 악을 물려받은 게 분명한 것은 주님이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악 없이 시험을 받을 수 없습니다. 시험받는 사람 안에는 악이 있으며, 악을 통해서 그는 시험을 받는 것입니다. That he derived hereditary evil from the mother is clearly evident from the fact that he underwent temptations; no one can possibly be tempted who has no evil; it is the evil in a man which tempts, and through which he is tempted.

 

주님이 시험을 받으셨다는 것, 그리고 주님은 여느 사람이 견딜 수 있는 것보다 수천 배 더 극심한 시험을 받으셨다는 것, 또 주님은 그 시험들을 홀로 견디시고, 악을, 마귀와 지옥 전체를 혼자 힘으로 극복하셨다는 것 등은 모두 확실한 사실입니다. That the Lord was tempted, and that he underwent temptations a thousandfold more grievous than any man can ever endure; and that he endured them alone, and overcame evil, or the devil and all hell, by his own power, is also evident.

 

이런 시험들에 관하여 누가복음에 기록하기를 Concerning these temptations we read thus in Luke:

 

1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13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14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눅4:1-2, 13-14) Jesus was led in the spirit into the wilderness, being forty days tempted by the devil, so that he did not eat in those days. But after the devil had ended every temptation, he departed from him for a season. Thence he returned in the power of the spirit into Galilee. (Luke 4:1–2, 13–14)

 

[5] 그리고 마가복음에서는 And in Mark:

 

12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3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막1:12-13) The spirit impelling Jesus made him go forth into the wilderness. And he was in the wilderness forty days, being tempted, and he was with the wild beasts; (Mark 1:12–13)

 

여기 ‘들짐승’은 지옥을 의미합니다. where hell is signified by “the wild beasts.

 

게다가, 주님은 죽을 정도로 시험을 받으셨고, 그래서 흘리시는 땀방울은 핏방울이 되었습니다. Moreover, he was tempted even unto death, so that his sweat was drops of blood: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눅22:44) And being in an agony, he prayed the more earnestly; and his sweat became as drops of blood falling down upon the earth. (Luke 22:44)

 

[6] 어떤 천사도 악마에게 시험을 당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가 주님 안에 있는 동안은 악한 영들은 그에게 접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멀리 떨어진 데에서조차 악한 영들은 천사들을 보면 큰 두려움과 전율로 즉시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No angel can ever be tempted of the devil; because, while he is in the Lord, evil spirits cannot approach him, even distantly, without being instantly seized with horror and terror.

 

만일 주님이 어머니로부터 유전한 악 없이 신성만 가지고 태어나셨으면 지옥은 주님에게 아예 접근조차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Much less would hell have been able to approach the Lord if he had been born Divine; that is, without evil adhering from the mother.

 

[7] 주님이 또한 인류의 불법과 악을 담당하셨다라는 것은 설교자들의 공통된 표현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불법과 악을 자신에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유전적인 방법 말고는 완전히 불가능합니다. 신성은 악에 민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It is likewise a common expression with preachers, that the Lord also bore the iniquities and evils of the human race; but for him to admit into himself iniquities and evils, except by the hereditary way, is utterly impossible; for the Divine is not susceptible of evil.

 

그래서 그분이 자신의 힘으로 악을 정복할 수 있기 위하여 - 이 일은 사람은 그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었던,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 그리고 홀로 의가 되실 수 있도록, 주님은 기꺼이 여느 사람들처럼 태어나고자 하셨습니다. And therefore in order that he might conquer evil by his own powers—which no man has been able to do, or is able to do—and so might alone become righteousness, he was willing to be born as are other men.

 

만일 이런 게 아니었으면, 주님은 사람으로 태어나실 필요도 없으셨습니다. 그냥 주님은 출생 없이 인성(the human essence)으로만 계실 수도, 곧 때때로 그러셨던 것처럼, 가령 태고교회 때 나타나신 것이나 선지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처럼 그렇게 계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악을 옷 입으신 후, 악과 싸워 악을 정복하고 나서 자신 안의 신성(the Divine essence)과 인성을 결합하고자 하는 부수적인 목적을 위해 주님은 세상에 오셨습니다. If it had not been for this, there would have been no need of his being born; for the Lord could have assumed the human essence without birth, as he did sometimes assume it, when seen by the most ancient church, and likewise by the prophets; but for the additional purpose of putting on evil, against which he might fight, and which he might conquer, and might thus conjoin in himself the Divine essence with the human essence, he came into the world.

 

[8] 그러나 주님은 실제로 그 본성 상 어떠한 악도 없으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But the Lord had no evil that was actual, or his own, as he also says in John: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요8:46) Which of you convicteth me of sin? (John 8:46)

 

지금까지 쭈욱 말씀드린 내용을 통해 정말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라는, 바로 앞 선행 표현의 의미가 무엇인지 하는 것을 말입니다. From what has been said it is now clearly evident what is signified by there being “strife between the herdmen of Abram’s cattle and the herdmen of Lot’s cattle,” which words immediately precede.

 

그 이유는 바로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입니다. The reason was that “the Canaanite and the Perizzite were then dwelling in the land.

 

 

1574. ‘가나안 사람’의 의미가 겉 사람 안에 있는, 어머니로부터 유전한 악이라는 것은 전에 보여드렸습니다. (※ 1444번 글 참조) 그러나 ‘브리스 사람’의 의미는 악에서 나오는 거짓이라는 것은 말씀에서 브리스 사람들이 나오는 다른 구절들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That “the Canaanite” signifies the hereditary evil from the mother, in the external man, was before shown (n. 1444); but that “the Perizzite” signifies the falsity that is from evil, is evident from other passages in the Word where the Perizzite is named.

 

야곱에 관한 다음과 같은 본문에서 As in the following concerning Jacob: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창34:30) Jacob said to Simeon and Levi, Ye have troubled me, to make me to stink among the inhabitants of the land, among the Canaanites and the Perizzites; and I am mortals of number [i.e., few], and they will gather themselves together against me and smite me; and I shall be destroyed, I and my house; (Gen. 34:30)

 

여기도 같은 식으로, ‘가나안 족속’은 악을, ‘브리스 족속’은 거짓을 각각 의미합니다. where in like manner evil is signified by “the Canaanite,” and falsity by “the Perizzite.

 

[2] 여호수아에서는 In Joshua: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하니라 (수17:15) Joshua said to the sons of Joseph, If thou be much people, get thee up to the forest, and cut down for thyself there in the land of the Perizzite and of the Rephaim, if Mount Ephraim is too narrow for thee; (Josh. 17:15)

 

여기서도 ‘브리스 족속’은 거짓의 원리들을, ‘르바임 족속’은, 이것은 그들이 근절시켜야 하는 것들인데, 거짓에 속한 설득들을 의미합니다. 영적인 의미로 ‘에브라임 산지’는 지성이기 때문입니다. where principles of falsity are signified by “the Perizzite,” and persuasions of falsity by “the Rephaim,” which they were to extirpate; for in the spiritual sense “Mount Ephraim” is intelligence.

 

[3] 사사기에서는 In the book of Judges:

 

1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2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 하시니라 3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내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네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하니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4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그들의 손에 넘겨 주시니 (사1:1-4) After the death of Joshua, the sons of Israel also asked of Jehovah, Who shall go up for us first against the Canaanite, to fight against him? And Jehovah said, Judah shall go up; behold I have given the land into his hand. And Judah said unto Simeon his brother, Come up with me into my lot, and let us fight against the Canaanite; and I likewise will go with thee into thy lot. And Simeon went with him. And Judah went up; and Jehovah gave the Canaanite and the Perizzite into their hand; (Judg. 1:1–4)

 

여기서 ‘유다’는 마찬가지로 천적인 것들에 대한 주님을, ‘시므온’은 거기서 파생된 영적인 것들을 각각 의미하며, ‘가나안 족속’은 악이고, ‘브리스 족속’은 거짓인데, 이것들은 정복되었습니다. where by “Judah” likewise is represented the Lord as to celestial things, and by “Simeon” as to the derivative spiritual things; “the Canaanite” is evil, and “the Perizzite” falsity, which were overcome.

 

이는 응답, 혹은 위 설명 정도로도 이해가 되는 신성한 신탁(Divine oracle)이었습니다. This was the response, or Divine oracle, which, with this explanation, is understood.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3장 7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속뜻)

어린 시절 주님의 속 사람에 속한 천적인 것들과 겉 사람에 속한 감각적인 것들은 이제 더 이상 함께 할 수가 없었습니다. 에굽 체류를 끝낸, 즉 지식을 충분히 습득하신 주님 안에는 어머니로부터 유전하신 악과 거짓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주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는 굳이 사람들처럼 태어나지 않으시고도 얼마든지 인성으로 계실 수 있으셨을 텐데도, 그러나 주님은 인류의 악과 거짓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그리고 그러려면 악에게 시험을 받으셔야 하고, 또 그러려면 악이 주님을 가까이 할 수 있어야겠기에 어머니를 통한 유전 악을 굳이 옷처럼 입고 오신 것입니다. 아멘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2021-11-21(D1)-주일예배(2240, AC.1570-1574, 창13,7),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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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Gy1C_p3uA1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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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21(D1)-제9권47호통430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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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장

천국의 모든 것과

사람의 모든 것은 상응한다

There Is a Correspondence

of All Things of Heaven

with All Things of Man

 

 

87. 상응(相應, correspondence)이라는 게 뭔지 오늘날 사람들은 모릅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인해 스스로를 천국으로부터 멀어지게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What correspondence is, is not known at the present day, for several reasons, the chief of which is that man has withdrawn himself from heaven by the love of self and love of the world.

 

자기 자신과 세상을 무엇보다도 더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세상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세상일은 그의 외적 감각에 어필하며, 그의 타고난 성향을 만족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는 영적인 일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 건 내적 감각에 어필하며, 내면을 기쁘게 하기 때문인데, 그래서 그는 그런 것들은 옆으로 제쳐놓고 말합니다. 이런 건 자기한텐 너무 고차원적이어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For he that loves self and the world above all things gives heed only to worldly things, since these appeal to the external senses and gratify the natural longings; and he does not give heed to spiritual things, since these appeal to the internal senses and gratify the mind, therefore he casts them aside, saying that they are too high for his comprehension.

 

고대인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This was not so with the ancient people.

 

그들에게는 상응 지식은 여러 지식들 중에서 가장 주된 지식이었습니다. To them the knowledge of correspondences was the chief of knowledges.

 

그것으로 그들은 지성과 지혜를 얻었으며,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그것으로 천국과 커뮤니케이션을 했습니다. 상응 지식은 천사의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By means of it they acquired intelligence and wisdom; and by means of it those who were of the church had communication with heaven; for the knowledge of correspondences is angelic knowledge.

 

천적(天的, celestial) 인간이었던 태고인들은 천사들처럼 상응 자체로 생각했습니다. The most ancient people, who were celestial men, thought from correspondence itself, as the angels do.

 

그래서 그들은 천사들과 대화했고, 주님도 자주 그들에게 나타나셨으며, 직접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And therefore they talked with angels, and the Lord frequently appeared to them, and they were taught by him.

 

그러나 오늘날은 이 지식을 완전히 잃어버려서 아무도 상응이라는 게 뭔지 모를 지경이 되었습니다.72 But at this day that knowledge has been so completely lost that no one knows what correspondence is.72

 

 

88. 상응이 무엇인지를 모르고서는 영계(靈界, the spiritual world)라든지, 영계에서 자연계로 흘러드는 어떤 흐름(inflow)이라든지, 그리고 영계와 자연계 간 관계며, 영혼(the soul)이라 하는 사람의 영(the spirit of man)에 대한 것과, 이 영이 사람의 신체 안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또 사람의 사후 상태 등에 관한 어떠한 설명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상응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본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먼저 필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Since, then, without a perception of what correspondence is there can be no clear knowledge of the spiritual world or of its inflow into the natural world, neither of what the spiritual is in its relation to the natural, nor any clear knowledge of the spirit of man, which is called the soul, and its operation into the body, neither of man’s state after death, it is necessary to explain what correspondence is and the nature of it.

 

이것은 앞으로 이어질 내용에 대한 일종의 길이 될 것입니다. This will prepare the way for what is to follow.

 

 

89. 먼저, 상응이란 무엇인가입니다. First, what correspondence is.

 

자연계 전체가 영계와 상응하며, 이는 대략적으로뿐 아니라 자연계를 구성하는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이렇게 영계로부터 생겨나는 자연계 내 모든 것을 가리켜 상응물이라 합니다. The whole natural world corresponds to the spiritual world, and not merely the natural world in general, but also every particular of it; and as a consequence everything in the natural world that springs from the spiritual world is called a correspondent.

 

정확히 원인과 결과처럼, 자연계는 영계로부터 생겨나며, 영계에 의해 영속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꼭 이해해야 합니다. It must be understood that the natural world springs from and has permanent existence from the spiritual world, precisely like an effect from its effecting cause.

 

해 아래 퍼져나가는 모든 것, 그리고 해의 열과 빛을 받는 모든 것을 자연계라 합니다. 자기들의 최소한의 것을 자연계로부터 받는 모든 것은 그 세계에 속합니다. All that is spread out under the sun and that receives heat and light from the sun is what is called the natural world; and all things that derive their subsistence therefrom belong to that world.

 

반면, 영계는 천국입니다. 천국에 있는 모든 것은 그 세계에 속합니다. But the spiritual world is heaven; and all things in the heavens belong to that world.

 

 

90. 사람은 가장 큰 이미지를 닮은 가장 작은 형태의 천국이요, 세상이기 때문에(※ 위 57번 글 참조), 사람 안에는 영계와 자연계 둘 다 존재합니다. Since man is both a heaven and a world in least form after the image of the greatest (see above, n. 57), there is in him both a spiritual and a natural world.

 

사람의 마음(mind)에 속하고, 또 사람의 이해와 의지(understanding and will)에 관련되는 내부의 일들은 사람의 영계를 이루는 반면, 사람의 몸에 속하고, 또 감각과 행동에 관련되는 외부의 일들은 사람의 자연계를 이룹니다. The interior things that belong to his mind, and that have relation to understanding and will, constitute his spiritual world; while the exterior things that belong to his body, and that have relation to its senses and activities, constitute his natural world.

 

따라서, 사람의 영계로 말미암아 (즉, 사람의 마음 및 이해와 의지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사람의 자연계의 (즉, 사람의 몸 및 몸의 감각과 행동들의) 모든 것을 상응이라고 합니다. Consequently, everything in his natural world (that is, in his body and its senses and activities), that has its existence from his spiritual world (that is, from his mind and its understanding and will) is called a correspondent.

 

 

91. 사람의 얼굴을 보면 상응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From the human face it can be seen what correspondence is.

 

꾸미는 걸 배운 적이 없는 얼굴에서는 마음의 모든 어펙션(affection, 애정, 애착)이 유형에 따라 자연적 형태로 나타나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In a face that has not been taught to dissemble, all the affections of the mind present themselves to view in a natural form, as in their type.

 

이것이 왜 얼굴을 가지고 마음의 표지라 하는지 하는 이유입니다. 즉, 얼굴은 자연계에 드러난, 사람의 영계인 것입니다. This is why the face is called the index of the mind; that is, it is man’s spiritual world presented in his natural world.

 

같은 식으로, 이해에 관련된 것은 말로(in speech) 나타나고, 의지에 관련된 것은 몸의 움직임으로 나타납니다. So, too, what pertains to the understanding is presented in speech, and what pertains to the will is presented in the movements of the body.

 

그래서 몸에 나타나는 모든 것, 그것이 얼굴 표정이든, 말이든 아니면 몸의 무슨 움직임이든 다 상응이라고 합니다. So whatever effects are produced in the body, whether in the face, in speech, or in bodily movements, are called correspondences.

 

 

92. 또한 이 모든 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속 사람이 무엇이며, 겉 사람이 무엇인지, 즉, 속 사람은 영적인 사람(the spiritual man), 겉 사람은 자연적인 사람(the natural man)이라 한다는 사실과, 또 이 둘이 다른 것이 마치 천국이 세상과 다르듯 다르다는 사실과, 또 겉 사람 혹은 자연적인 사람 안에서 발생하여 진행되는 모든 일은 그전에 속 사람 혹은 영적인 사람에게서 발생하여 진행되는 것이라는 사실 등입니다. All this shows also what the internal man is and what the external, namely, that the internal is what is called the spiritual man, and the external what is called the natural man; also that the one is distinct from the other as heaven is from the world; also that all things that take place and come forth in the external or natural man take place and come forth from the internal or spiritual man.

 

 

93. 사람의 속 혹은 영적인 것과 사람의 겉 혹은 자연적인 것 사이 상응에 대해서는 이 정도면 충분히 말씀드렸습니다. 이제부터는 천국 전체와 사람에게 관련된 모든 것 사이 상응에 관해서 다루겠습니다. This much has been said about the correspondence of man’s internal or spiritual with his external or natural; now the correspondence of the whole heaven with everything pertaining to man shall be treated of.

 

 

94. 지금까지 천국 전체가 한 사람을 반영한다는 것과, 이 사람 모습의 이미지를 가장 큰 사람이라 한다는 걸 쭈욱 보여드렸습니다. It has been shown that the entire heaven reflects a single man, and that it is in image a man and is therefore called the greatest man.

 

또 천사 공동체들, 천국이 이들로 구성되는데, 이런 이유로, 이들은 마치 사람의 지체, 기관 및 내장들처럼 배치되어 있음도 쭈욱 보여드렸습니다. 즉, 일부는 머리에, 일부는 가슴에, 일부는 팔에, 이런 식으로 저마다 자신의 해당 부위에 있다고 말이지요. (※ 위 59 – 72번 글 참조) 그 결과, 어느 지체에 있는 공동체들은 사람의 해당 지체와 상응하고, 머리에 있는 공동체들은 사람의 머리와, 가슴은 가슴과, 그렇게 다른 모든 부분들도 서로 상응합니다. It has also been shown that the angelic societies, of which heaven consists, are therefore arranged as the members, organs, and viscera are in man, that is, some are in the head, some in the breast, some in the arms, and some in each of their particulars (see above, n. 59–72); consequently the societies in any member there correspond to the like member in man; those in the head corresponding to the head in man, those in the breast to the breast in man, those in the arms to the arms in man; and so with all the rest.

 

이런 상응이 있어 사람은 존재를 지속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늘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천국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It is from this correspondence that man has permanent existence, for from heaven alone does man have permanent existence.

 

 

95. 천국이 두 나라, 하나는 천적 나라(the celestial kingdom), 다른 하나는 영적 나라(the spiritual kingdom)로 나뉜다는 것도 앞서 해당 장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That heaven is divided into two kingdoms, one called the celestial kingdom and the other the spiritual kingdom, may be seen above in its own chapter.

 

천적 나라는 보통 심장과 체내(體內, in the whole body) 심장과 관련된 모든 것과, 그리고 영적 나라는 폐와 체내 폐와 관련된 모든 것에 각각 상응합니다. The celestial kingdom corresponds in general to the heart and all things of the heart in the whole body, and the spiritual kingdom to the lungs and to all things of the lungs in the whole body.

 

사람 안에서 심장과 폐, 곧 동맥과 정맥을 통해 그와 관련된 나라를 다스리는 심장과, 힘줄과 운동 섬유를 통해 그와 관련된 나라를 다스리는 폐, 이렇게 둘이 함께 두 나라를 이루며, 모든 노력과 움직임 등 전체 활동을 관장합니다. Likewise in man heart and lungs form two kingdoms, the heart ruling there through the arteries and veins, and the lungs through the tendinous and motor fibers, both together in every exertion and movement.

 

그래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영계에, 곧 그것이 그의 영적인 사람인데요, 거기에 두 나라, 곧 하나는 의지의 나라, 다른 하나는 이해의 나라가 있습니다. 선을 위한 애정으로 다스리는 의지의 나라와 진리를 위한 애정으로 다스리는 이해의 나라입니다. 이들 두 나라는 각각 몸의 심장과 폐의 나라와 상응합니다. So in every man, in his spiritual world, which is called his spiritual man, there are two kingdoms, one of the will and the other of the understanding, the will ruling through affections for good, and the understanding through affections for truth; and these kingdoms correspond to the kingdoms of the heart and of the lungs in the body.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적 나라는 천국의 자원하는 파트로서 거기는 사랑의 선이 다스리는 곳입니다. 영적 나라는 천국의 지성 파트로서, 거기는 진리가 다스리는 곳이지요. It is the same in the heavens; the celestial kingdom is the voluntary part of heaven, and in it good of love reigns; the spiritual kingdom is the intellectual part of heaven, and in it truth reigns.

 

이들이 사람 안 심장과 폐 기능에 각각 상응하는 것입니다. These are what correspond to the functions of the heart and lungs in man.

 

말씀에서 ‘마음’(심장, heart)이 의지와 및 사랑의 선을, 그리고 폐의 ‘숨’(breath)이 이해와 신앙의 진리를 각각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런 상응의 연유가 있어서입니다. It is on account of this correspondence that in the Word the “heart” signifies the will and also good of love, and the “breath” of the lungs signifies the understanding and the truth of faith.

 

같은 이유로, 심장으로 애정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전혀 그 안에 있지도 않고, 그것으로 말미암지도 않는 데 말입니다.73 For the same reason affections are ascribed to the heart, although they are neither in it nor from it.73

 

 

※ 각주

 

72. 상응 관련 지식은 다른 지식들보다 월등히 탁월합니다. (n. 4280) How far the knowledge of correspondences excels other knowledges (n. 4280).

 

상응 지식은 고대의 사람들에게는 가장 주된 지식(the chief knowledge)이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에게는 완전히 잊혀진 지식입니다. The knowledge of correspondences was the chief knowledge of the ancient people; but at the present day it is wholly forgotten (n. 3021, 3419, 4280, 4749, 4844, 4964, 4966, 6004, 7729, 10252).

 

상응 지식들은 동방 국가들과 이집트에서 번창했습니다. The knowledge of correspondences flourished among the Eastern nations and in Egypt (n. 5702, 6692, 7097, 7779, 9391, 10407).

 

 

73. 천국에 있는, 가장 큰 사람의 심장과 폐의 상응에 관하여, 경험 이야기 The correspondence of the heart and lungs with the Greatest Man, which is heaven, from experience (n. 3883–3896).

 

심장은 천적 나라에 있는 사람들하고, 폐는 영적 나라에 있는 사람들하고 상응합니다. The heart corresponds to those in the celestial kingdom, and the lungs to those in the spiritual kingdom (n. 3885–3887).

 

천국에 마치 심장의 고동과 같은 어떤 고동과 폐의 호흡과 같은 어떤 호흡이 있습니다. 내적으로 말이지요. There is in heaven a pulse like that of the heart, and a respiration like that of the lungs, but interior (n. 3884, 3885, 3887).

 

거기 심장의 고동은 사랑의 상태에 순응하는 정도에 따라 다양하며, 호흡은 체어리티와 신앙의 상태에 순응하는 정도에 따라 다양합니다. There the pulse of the heart varies in conformity to states of love, and the respiration in conformity to states of charity and faith (n. 3886, 3887, 3889).

 

말씀에서, ‘심장’은 의지를, ‘심장으로부터’는 의지로부터를 의미합니다. In the Word the “heart” means the will, and “from the heart” means from the will (n. 2930, 7542, 8910, 9113, 10336).

 

또 말씀에서, ‘심장’은 사랑을, ‘심장으로부터’는 사랑에서부터를 의미합니다. In the Word the “heart” also signifies love, and “from the heart” means from love (n. 7542, 9050, 10336).

HH.1.12.87-95.'12장, 천국의 모든 것과 사람의 모든 것은 상응한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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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lc6aV9ITt2U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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