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

 

21. 4, 5절,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Verses 4, 5.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And God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he called night.

 

빛을 일컬어, ‘좋았더라’, 곧, ‘’(good)이라 합니다. 이 빛이 주님으로 말미암기 때문인데, 주님은 선 그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Light is called “good,” because it is from the Lord, who is good itself.

 

어둠’은 그동안 빛인 줄 알았던 모든 걸 의미합니다. 사람에게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말이지요. 그동안 악은 선인 것처럼, 거짓은 진리인 것처럼 행세해 왔습니다만, 이제 보니 그것들은 그저 어둠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것들은 그저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그런 것들이었고, 여전히 남아 있는 어둠일 뿐입니다. The “darkness” means all those things which, before man is conceived and born anew, have appeared like light, because evil has appeared like good, and the false like the true; yet they are darkness, consisting merely of the things proper to man himself, which still remain.

 

※ 사람은 자기가 이해하고 그에 따라 생각하는 모든 것을 진리로 여기며, 또 자기가 의도하고 그에 따라 생각하는 모든 것을 선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든 그것이 주님께 속한 것이면, 그것은 ‘’으로 비교됩니다. 낮은 빛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든 그것이 사람의 본성에 속한 것이면, 그것은 ‘’으로 비교됩니다. 밤은 어둠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Whatsoever is of the Lord is compared to “day,” because it is of the light; and whatsoever is man’s own is compared to “night,” because it is of darkness.

 

이런 비교, 이런 대비가 말씀에는 아주 자주 나옵니다. These comparisons frequently occur in the Word.

 

AC.21, 창1,4-5,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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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k1DgfdRrxF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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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3

 

1575. 8절,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Verse 8. And Abram said unto Lot, Let there be no contention, I pray, between me and thee, and between my herdmen and thy herdmen, for we are men brethren.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는 속 사람이 겉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의미입니다. Abram said unto Lot” signifies that the internal man said thus to the external.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는 둘 사이 하나 되지 못함이 있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한 친족이라’는 그들 가운데 하나 됨이 있었음을 각각 의미합니다. Let there be no contention, I pray, between me and thee, and between my herdmen and thy herdmen” signifies that there ought to be no disagreement between the two; “for we are men brethren” signifies that in themselves they were united.

 

 

1576.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Abram said unto Lot.

 

이 말의 의미가 속 사람이 겉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라는 의미임은 여기 아브람은 속 사람을, 롯은 겉 사람을 각각 표상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분명합니다. 이 겉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곧 분리되게 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 internal man said thus to the external is evident from the representation of Abram, as being here the internal man; and from the representation of Lot, as being the external man that was to be separated.

 

아브람이 속 사람을 표상한다는 것은 그가 롯과 관련되어 언급되기 때문인데, 롯은 겉 사람 안에 있는, 곧 분리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That Abram represents the internal man is because he is spoken of relatively to Lot, who is that in the external man which was to be separated.

 

전에 말씀드린 대로, 겉 사람 안에는 함께 할 수 있는 것들과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There are in the external man, as before said, things that agree, and things that disagree.

 

여기서 ‘’은 함께 할 수 없는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반대로 겉 사람 안에 있는 것들을 포함해서,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 이유는, 이들은 속 사람과 함께 하나를 이루며, 속 사람에게 속하기 때문입니다. By “Lot” are here meant the things that disagree; by “Abram,” therefore, are meant those which agree, including those which are in the external man; for these together with the internal man constitute one thing, and they belong to the internal man.

 

 

1577. 나나 너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Let there be no contention, I pray, between me and thee.

 

이 말의 의미가 둘 사이 하나 되지 못함이 있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의미라는 것은 이미 드린 말씀으로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re ought to be no disagreement between the two is evident from what has already been said.

 

속 사람과 겉 사람 간 함께 함 또는 하나 됨에 관한 아케이나는 지금까지 들을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The arcana relating to the agreement or union of the internal man with the external are more than can ever be told.

 

속 사람과 겉 사람 간 하나 된 적이 있는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나가 될 수도, 하나로 있을 수도 말이지요. 오직 주님만이 그러셨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With no man have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ever been united; nor could they be united, nor can they be, but with the Lord only, for which cause also he came into the world.

 

거듭난 사람들의 경우는 마치 이 둘이 하나 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함께 하는 것들은 주님의 것이고, 함께 하지 않는 것들은 사람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With men who have been regenerated, it appears as if they were united; but these belong to the Lord; for the things which agree are the Lord’s, but those which disagree are man’s.

 

※ 즉, 주님이 허락하셔서, 주님이 도우셔서 거듭날 수 있었다는 것이지, 절대 그들이 잘나서, 그들의 무슨 공로로 그런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겉과 속의 하나 됨은 오직 주님으로만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2] 속 사람 안에는 두 가지, 곧,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있어 이 둘이 하나를 이룹니다. 영적인 것이 천적인 것으로부터 올 경우엔 말입니다. 같은 말이지만, 속 사람 안엔 두 가지, 선과 진리가 있어 이 둘이 하나를 이룹니다. 진리가 선으로부터 올 경우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역시 같은 얘깁니다만, 속 사람 안엔 두 가지, 사랑과 신앙이 있어 이 둘이 하나를 이룹니다.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올 경우엔 말입니다. 계속해서 같은 말입니다만, 속 사람 안엔 두 가지, 의지와 이해가 있어 이 둘이 하나를 이룹니다. 이해가 의지로부터 올 경우엔 말입니다. There are two things in the internal man, namely, the celestial and the spiritual, which two constitute a one when the spiritual is from the celestial; or what is the same, there are two things in the internal man, good and truth; these two constitute a one when the truth is from good; or what is also the same, there are two things in the internal man, love and faith; these two constitute a one when the faith is from love; or what is again the same, there are in the internal man two things,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and these two constitute a one when the understanding is from the will.

 

이는 빛이 나오는 해를 보면 계속해서 더 잘 명료하게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This may be apprehended still more clearly by considering the sun, from which is light.

 

만일 해에서 나오는 빛 가운데 열과 광력(光力, illuminating power), 이 둘이 있으면, 봄철, 만물은 그로 인해 무럭무럭 생장(生長)합니다. 그러나 빛은 있는데 그 안에 해에서 나오는 열이 없으면, 겨울철, 만물은 쇠잔하여 죽게 됩니다. If in the light from the sun there are both heat and illuminating power, as in the springtime, all things are thereby made to vegetate and to live; but if there is not heat from the sun in the light, as in the time of winter, then all things become torpid and die.

 

[3] 이 모든 것으로 속 사람을 이루는 게 무엇인지가 분명하며, 그때 겉 사람을 이루는 것이 나타납니다. From all this it is evident what constitutes the internal man; and what constitutes the external thence appears.

 

겉 사람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자연적입니다. 겉 사람이라는 자체가 자연적인 사람이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In the external man all is natural; for the external man itself is the same as the natural man.

 

속 사람에게 속한 천적, 영적인 것이 겉 사람에게 속한 자연적인 것 안으로 흘러들어와 마치 하나가 된 듯 움직일 때, 이때 속 사람은 겉 사람과 하나가 되었다는 말을 듣습니다. The internal man is said to be united to the external when the celestial spiritual of the internal man flows into the natural of the external, and makes them act as a one.

 

그 결과, 자연적인 것은 또한 천적, 영적인 것이 되는데, 천적, 영적인 것의 입장에서 보면, 더 낮은 단계입니다. 같은 말이지만, 겉 사람 역시 천적, 영적인 것이 되는데, 천적, 영적인 것의 입장에서 보면, 더욱 겉, 바깥 단계가 됩니다. As a consequence of this the natural also becomes celestial and spiritual, but a lower celestial and spiritual; or what is the same, the external man becomes celestial and spiritual, but a more external celestial and spiritual.

 

[4] 속 사람과 겉 사람은 둘 다 뚜렷이 구별됩니다. 천적, 영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자연적인 것들은 겉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are altogether distinct, becaus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are what affect the internal man, but natural things are what affect the external.

 

뚜렷이 구별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여전히, 즉, 속 사람에게 속한 천적, 영적인 것이 겉 사람에게 속한 자연적인 것 안으로 흘러들어와 그것을 그 고유 본성으로 둘 때, 이들은 하나 된 상태에 있습니다. But though distinct, they are still united, namely, when the celestial spiritual of the internal man flows into the natural of the external, and disposes it as its own.

 

※ 즉, 마치 두 종류의 나무를 그 좋은 부분만 더욱 특화하기 위해 접붙이기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밀감나무를 탱자나무에 접을 붙여 병충해에도 강하고 씨 없는 귤을 생산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직 주님 안에서만 속 사람은 겉 사람과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이 둘 사이의 하나 됨은 주님이 그렇게 하셨거나 그렇게 하시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에게도 해당되는 일이 아닙니다. In the Lord alone the internal man was united to the external; this is not the case in any other man, except so far as the Lord has united and does unite them.

 

사랑과 체어리티만이, 혹은 선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랑과 체어리티, 즉, 어떠한 선도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결코 있을 수가 없습니다. Love and charity only, or good, is what unites; and there is never any love and charity, that is, any good, except from the Lord.

 

이것이 바로 아브람의 말,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는 말 속에 담긴 하나 됨입니다. Such is the union that is intended in these words of Abram: “Let there be no contention between me and thee, and between my herdmen and thy herdmen.

 

[5]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라고 말하는 건 이런 경우입니다. 속 사람 안에는 두 가지, 천적, 영적인 것, 전에 말씀드린 대로, 하나를 만드는 두 가지가 있는 것처럼, 그렇게 또 겉 사람 안에도 자연적 선이라고 하는 천적인 것과, 자연적 진리라고 하는 영적인 것, 두 가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It is said, “Between me and thee, and between my herdmen and thy herdmen,” for the case is thus: as there are two things in the internal man, namely, the celestial and the spiritual, which as before said make a one, so also are there in the external man, its celestial being called natural good, and its spiritual natural truth.

 

나나 너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는 말은 선과 관계가 있는 말입니다. 속 사람의 선은 겉 사람의 선과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라는 걸 의미하며,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는 말은 진리와 관계가 있는 말입니다. 속 사람의 진리는 겉 사람의 진리와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Let there be no contention between me and thee” has reference to good, meaning that the good of the internal man should not disagree with the good of the external man; and “Let there be no contention between my herdmen and thy herdmen” has reference to truth, meaning that the truth of the internal man should not disagree with the truth of the external man.

 

 

1578. 우리는 한 친족이라 For we are men brethren.

 

이 말의 의미가 둘이 함께 하나가 되어 있음이라는 것은, ‘친족’(man brother)의 의미가 하나 됨, 곧, 진리와 선의 하나 됨이라는 걸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y are united together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man brother,” as being union, and in fact the union of truth and good.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3장 8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속뜻)

속 사람이 겉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였으니 어떤 경우에도 이 하나 됨을 해치는 일이 없게 하자. 내 안에 있는 천적, 영적인 것들과 네 안에 있는 자연적 선과 진리들 사이에 늘 하나가 되게 하자.’

 

※ 겉 사람 안에도 두 종류, 곧 속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것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말에 주목하여, 주님으로 말미암은 속 사람, 곧 천적, 영적인 것과 함께 할 수 있는 겉 사람의 것은 더욱 힘쓰고, 함께 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는 물러서는 일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2021-11-24(D4)-매일예배(2241, AC.1575-1578, 창13,8),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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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kb1ZzcH8zx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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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이야기 네 번째 시간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예를 들어, ‘아담’ 하면 ‘아담’이라는 한 개인을, ‘하와’ 하면 ‘하와’라는 한 개인을, 그런 식으로, ‘아벨’도, ‘가인’도... 다 그렇게 그런 이름을 가진 한 개인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말씀(the Word)을 겉 글자의 뜻으로만 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마치 육이 영의 생각, 영의 사정을, 겉 사람이 속 사람의 생각과 사정을 도저히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뿐 아니라 지난 2천 년 기독교가 말씀의 속뜻에 관한 한, 이런 지독한 어두움 가운데 놓이게 된 데에는, 초대교회의 연약함을 비롯, 니케아 회의의 심의와 칙령(the deliberations and decrees of the council of Nice, 325년) 및 이후 전개된 교리의 역사 등 역사적 배경 이야기가 좀 있으며, 나중에 필요하면 다루겠습니다. (TCR.206)

 

한 마디로, 상응 지식(the knowledge of correspondences)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지식이 있어야 말씀의 영적 의미, 곧 속뜻에 접근할 수가 있는데요, 초대교회 이후, 위와 같은 이유로 인류에게 이 지식이 닫힌 것입니다. (TCR.206)

 

하지만 비록 말씀의 겉 글자의 뜻 가운데 살았더라도, 즉, 이런 걸 모르고 살았더라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선과 진리의 삶을 사신 분들에게는 주님의 은혜로 끊임없이 구원이 베풀어졌습니다. 즉, 천국의 대기인 신성(神性, the Divine) 호흡을 할 수 있게 되어 천국 생활이 가능했습니다. 천국 가는 길이 그렇게 어렵고, 문턱이 높은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주님의 자비로 지금 이 상응 지식이 계시되고(啓示, revealed), 즉, 드러나고 있고, 교회에 관한 신적 진리들(the Divine truths of the church)이 빛 가운데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진리들이 바로 말씀의 영적인 의미, 곧, 속뜻을 구성하는 진리들입니다. (TCR.207)

 

다시 ‘아담’이라는 이름 이야기로 돌아와서, 요점부터 말씀드리면, ‘아담’은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그 시대를 대표하는 교회의 이름이며, 신앙의 이름, 신학의 이름이요, ‘하와’ 같은 경우는 어떤 내적 의미라는 것입니다. ‘아벨’도, ‘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잘 아는,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 하면 ‘므두셀라’입니다. 창세기 5장 27절을 보면,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이때 이 ‘므두셀라’는 ‘므두셀라’라는 한 개인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대표된 어느 한 작은 단위의 교회 시대를 말하며, 또한 여기 이 ‘구백육십구 세’라는 기간 역시 우리가 이해하는 969세라는 정량적인 의미가 아닌, 장구한 세월을 뜻하는 어떤 영적인 의미라는 것이지요.

 

창세기 1장부터 11장 ‘에벨’의 때까지 모든 등장인물의 이름은 어느 한 개인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그 시대 교회와 신앙을, 그리고 어떤 영적 의미를 각각 그 이름으로 일컬었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12장 아브람부터가 비로소 실제 역사, 곧 이때부터 나오는 이름들이 비로소 실제 살았던 한 개인의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걸 이해하시려면 먼저 말씀의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며, 그래서 오늘은 이 이야기를 좀 해드리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는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모드는 이랬습니다. 그들은 땅에 속한, 이 세상의 것을 언급할 때, 그것이 표상하는(represented) 영적, 천적(天的, celestial)인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단지 그것을 무슨 대표성을 띤 것(representatives)으로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역사 시리즈물(historical series)로도 꾸몄습니다. 그렇게 하면, 보다 더 생생하니까요. 이렇게 하는 게 그들에겐 굉장히 차원 높은 즐거움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것이 한나의 다음과 같은 예언에 사용된 스타일입니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삼상2:3) Speak what is high! high! Let what is ancient come out of your mouth. (1 Sam. 2:3)

 

개역개정 번역과 영어가 상당히 달라 좀 당황스러운데요... 직역하면, ‘높고 높은 것을 말하며, 입을 벌려 고대의 것이 나오게 하라’가 되겠습니다.

 

이런 대표성을 가리켜 시편에서는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이라 하고 있습니다.

 

2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3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4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시78:2-4)

 

천지창조, 에덴동산 등 아브람의 때까지 이어지는 이들 하나하나에 대하여 모세는 태고교회 후손들에게서 얻었습니다.

 

두 번째는 역사기록물(historical) 스타일로서, 아브람의 때로부터 시작, 모세의 책들 및 여호수아, 사사들, 그리고 사무엘과 열왕들의 책에서 볼 수 있는 스타일입니다. 이들 책에서는 역사적인 사실들이 글자의 기록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전체가 일반적으로나 세부적으로나, 속뜻으로는 아주 다른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세 번째는 예언적(prophetical) 스타일인데, 이는 태고교회에서 아주 높은 공경을 받던 어떤 것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 스타일은 태고교회 스타일처럼 계속 연결되어 역사적 무슨 형태를 갖추지를 못하고 그만 끊어져, 가장 깊은 아르카나(arcana, 秘義)가 들어있는 속뜻을 제외하고는 오늘날은 거의 이해할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이 아르카나는 아름다운 순서로 연결되며, 거기에는 겉 사람과 속 사람에 관한 것, 교회의 수많은 상태들 및 천국 그 자체, 그리고 가장 내적으로는 주님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네 번째는 다윗의 시편(the psalms of David) 스타일로서, 예언적 스타일과 일상적 언어 스타일 간 중간 스타일입니다. 이 스타일에서 주님은 다윗이라는 사람으로 등장하지만, 속뜻으로는 왕이십니다. (AC.66)

 

어떠신가요? 좀... 어려우시죠? 네, 저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빛 환히 비추심을 구하며,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들 서술 스타일의 관점으로 보면,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는 태고교회 스타일로, 그리고 12장부터는 역사기록 스타일로 그 서술 스타일이 바뀌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창세기를 읽을 때,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저는 지구의 지질학적 연대를 받아들입니다. 대략 45, 6억 년 전후라 합니다. 이 장구한 연대 중 태고교회의 시작, 즉, 아담의 등장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그때부터 아브람의 때까지가 태고교회 스타일로 기록되었다고 봅니다. 즉, 일종의 역사 시리즈물로 기록되었다는 것이지요. 일종의 스토리텔링으로 이해가 됩니다.

 

말씀이 무슨 다큐멘터리나 일지도 아니고... 이 장엄, 장구한 수십억 년 역사를 실제 역사로 기록한다면 얼마나 많은 페이지가 필요하겠으며, 과연 그럴 필요가 있기나 할까요? 그런 기록이 사람을 거듭나게 하여 천국으로 데려가고자 하시는 일에 무슨, 그리고 얼마나 도움이 될까요?

 

이런 이유로, 고대의 역사를 이런 문체, 이런 이야기 스타일로 기록, 인류의 그간 있었던 총 네 번의 교회 시대, 즉, 태고교회, 고대교회, 유대교회(혹은 표상교회, 表象) 및 현 기독교회 중 앞 두 교회인 태고교회(혹은 아담교회)와 고대교회(일명 노아교회)를 창세기의 맨 앞부분 열한 개의 장으로 압축, 요약, 이야기체로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압축, 요약했다고는 하지만, 그 속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속뜻을 넣어두셔서 이 아르카나를 오직 상응(相應, correspondence)으로만 알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앞서 말씀드린 주님의 지혜의 5, 4, 3등급 지혜라 하겠습니다. 말씀은 6등급 지혜인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창세기의 이런 말씀 서술 스타일을 이해하신다면 비로소 창세기 첫 열한 장은 글자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또한 이해하실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이 또한 창세기 이야기를, 본문을 가지고 제대로 시작하기 앞서 제가 이토록(?) 뜸을 들이는 이유이기도 하며, 또 왜 우리의 모든 신앙의 출발을 창세기에서 해야 하는지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

 

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2021-11-22(D2)-창세기이야기(4), '말씀(the Word) 서술의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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