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gathering together of the waters called he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1:10)

 

AC.28

 

말씀에서 ‘(waters)로는 여러 지식(knowledges, cognitiones et scientifica)을, ‘바다(seas)로는 그 많은 물, 곧 지식의 집합을 의미할 때가 참 많은데요, 이사야에 보면, It is a very common thing in the Word for “waters” to signify knowledges [cognitiones et scientifica], and consequently for “seas” to signify a collection of knowledges. As in Isaiah: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11:9) The earth shall be full of the knowledge[scientia] of Jehovah, as the waters cover the sea (Isa. 11:9).

 

이사야 또 다른 데 지식의 결핍이 다루어지는 곳을 보면, And in the same prophet, where a lack of knowledges [cognitionum et scientificorum] is treated of:

 

5바닷물이 없어지겠고 강이 잦아서 마르겠고 6강들에서는 악취가 나겠고 애굽의 강물은 줄어들고 마르므로 갈대와 부들이 시들겠으며 (19:5, 6) The waters shall fail from the sea, and the river shall be dried up and become utterly dry, and the streams shall recede (Isa. 19:5–6).

 

학개에서 새 교회에 대해 말하면서, In Haggai, speaking of a new church:

 

6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7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2:6, 7) I will shake the heavens and the earth, and the sea and the dry [land]; and I will shake all nations; and the desire of all nations shall come; and I will fill this house with glory (Hag. 2:6–7).

 

또 거듭나는 중인 사람에 대해 스가랴서에서는 And concerning man in the process of regeneration, in Zechariah:

 

7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8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14:7, 8) There shall be one day, it is known to Jehovah; not day, nor night; but it shall come to pass that at evening time it shall be light; and it shall be in that day that living waters shall go out from Jerusalem, part of them toward the eastern sea, and part of them toward the hinder sea (Zech. 14:7–8).

 

시편에도 보면, 황폐해졌다가 거듭나 주님을 경배하게 될 사람을 묘사하면서, David also, describing a vastated man who is to be regenerated and who will worship the Lord:

 

33여호와는 궁핍한 자의 소리를 들으시며 자기로 말미암아 갇힌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나니 34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생물도 그리할지로다 (69:33, 34) Jehovah despiseth not his prisoners; let the heavens and the earth praise him, the seas and everything that creepeth therein (Ps. 69:33–34).

 

(earth)이 그릇(recipient)을 의미한다는 것이 스가랴를 보면 분명한데, That the “earth” signifies a recipient, appears from Zechariah: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경고의 말씀이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이가 이르시되 (12:1) Jehovah stretcheth forth the heavens, and layeth the foundation of the earth, and formeth the spirit of man in the midst of him (Zech. 12:1).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waters)과 ‘바다(seas)가 말씀 전체에서 일관되게 지식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여러 선지서의 예문을 통해 확증합니다. 이는 창세기 1장의 상응 해석이 자의적이거나 국지적인 것이 아니라, 성경 전반에 걸쳐 반복되는 보편적 언어 사용임을 보여 주는 작업입니다. 즉, 물을 지식으로 읽는 것은 특정 본문에 대한 독특한 해석이 아니라, 말씀 자체가 제공하는 해석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이사야 11장의 말씀은 긍정적 상태를 보여 줍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하다(The earth shall be full of the knowledge [scientia] of Jehovah)는 표현은, 단순히 정보가 많아진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인식이 인간과 교회 전체를 채운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그 충만함이 ‘물이 바다를 덮음’에 비유된 것은, 지식이 부분적으로 흩어져 있는 상태가 아니라, 질서 있게 모여 전체를 이루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바다는 기억과 삶 속에 축적된 지식의 총체이며, 물이 바다를 덮는다는 것은 그 총체가 살아 있는 의미로 충만해졌음을 뜻합니다.

 

반대로 이사야 19장의 말씀은 지식의 결핍, 곧 황폐한 상태를 묘사합니다. 바다에서 물이 끊어지고, 강과 시내가 마른다는 표현은, 지식이 사라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의미 있는 지식의 흐름이 끊어진 상태’를 뜻합니다. 정보는 남아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을 연결하고 살리는 생명의 흐름이 멈추면, 말씀은 이를 ‘마름’으로 표현합니다. 이는 AC.18에서 말한 황폐의 개념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학개의 인용은 이 상응이 개인을 넘어 교회 전체에 적용됨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새 교회를 세우실 때 하늘과 땅과 바다와 마른 땅을 함께 진동시키십니다. 이는 교회의 속 사람과 겉 사람, 그리고 그 안에 축적된 지식과 아직 열매 맺지 못한 영역까지 모두 재정렬하신다는 뜻입니다. 새 교회는 단순히 새로운 교리의 추가가 아니라, 지식의 질서와 수용 구조 전체가 새롭게 되는 사건입니다.

 

스가랴의 ‘생수(living waters)는 이 글의 핵심 이미지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 물은 더 이상 정적인 지식이 아니라, 생명을 지닌 지식입니다. 이 물들이 예루살렘에서 흘러나와 동쪽 바다와 서쪽 바다로 나뉘어 흐른다는 것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지식이 인간의 모든 기억 영역으로 퍼져 나가 삶의 전 영역을 적신다는 뜻입니다. ‘동해’는 사랑의 근원을, ‘서해(toward the hinder sea)는 상대적으로 어두운 영역을 가리키므로, 살아 있는 지식은 밝은 영역뿐 아니라 아직 미처 조명되지 않은 영역까지도 도달한다는 말입니다.

 

시편의 인용은 황폐했던 사람의 거듭난 이후의 상태를 찬양의 언어로 묘사합니다. 하늘과 땅, 바다와 그 안의 모든 것이 주님을 찬양한다는 말은, 속 사람과 겉 사람, 그리고 기억 속에 저장된 모든 지식이 주님을 향한 질서 안에 들어왔음을 뜻합니다. 여기서 바다는 더 이상 혼란의 장소가 아니라, 찬양에 참여하는 영역이 됩니다. 이는 기억과 지식이 주님께 복종할 때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마지막으로 스가랴 12장의 말씀은 ‘(earth)의 의미를 분명히 합니다. 땅은 스스로 무엇을 만들어 내는 주체가 아니라, 주님이 영을 형성하시는 그릇, 곧 수용체입니다. 하늘이 펼쳐지고 땅의 기초가 놓일 때, 그 한가운데서 사람의 영이 형성됩니다. 이는 지식과 기억, 겉 사람의 구조가 갖추어질 때, 비로소 주님의 생명이 그 안에 질서 있게 자리 잡는다는 뜻입니다.

 

결국 AC.28은 ‘물–바다–땅’이라는 연쇄가 거듭남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종합적으로 보여 줍니다. 물은 지식이며, 바다는 그 지식이 모여 저장된 총체이고, 땅은 그것을 받아 생명으로 전환하는 수용 구조입니다. 이 질서가 살아 있을 때, 지식은 더 이상 머리에 머무르지 않고 삶이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생수’(生手), 곧 물이 ‘살아 있다’고 말하며, 지식이 생명으로 변하는 지점을 정확히 짚어 줍니다.

 

 

 

AC.29, 창1:11-13,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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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7, 창1:9,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 (창1:9) AC.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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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 (1:9)

 

AC.27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모두 존재한다는 사실과, 여러 진리와 선이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에서 겉 사람으로, 즉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으로 흘러 들어온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러니까 겉보기에는 그렇지 않아 보여도 말이지요, 그때 거듭나는 중인 사람 안에 있는 그러한 여러 진리와 선, 곧 참과 선에 관한 여러 지식은 그의 기억 속에 저장되어 ‘기억 지식(scientifica) 가운데로 분류됩니다. 왜냐하면 겉 사람의 기억 속에 스며든 건, 그것이 자연적이든, 영적이든, 또는 천적이든 간에 모두 기억 지식으로 그곳에 머물며, 나중에 필요에 따라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지식들이 바로 ‘한곳으로 모인 물(waters gathered together into one place)이며, 이렇게 모인 것들을 ‘바다(seas)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때 겉 사람 자체를 가리켜서는 ‘마른 땅(dry [land])이라 하고, 곧이어 ‘(earth)이라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다음 내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When it is known that there is both an internal and an external man, and that truths and goods flow in from, or through, the internal man to the external, from the Lord, although it does not so appear, then those truths and goods, or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the good in the regenerating man, are stored up in his memory, and are classed among its knowledges [scientifica]; for whatsoever is insinuated into the memory of the external man, whether it be natural, or spiritual, or celestial, abides there as memory-knowledge, and is brought forth thence by the Lord. These knowledges are the “waters gathered together into one place,” and are called “seas,” but the external man himself is called the “dry [land],” and presently “earth,” as in what follows.

 

 

해설

 

이 글은 창세기 1장의 셋째 날, 곧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는’ 장면이 인간 거듭남에서는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풀어 주는 핵심 연결 고리입니다. 앞선 글들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이 세워졌다면, 이제 그 둘 사이의 ‘유입과 저장의 질서’가 설명됩니다. 거듭남은 단지 내면에서 무언가가 일어나는 사건만이 아니라, 기억과 삶의 차원에서도 실제로 무언가가 일어나는, 축적되는 과정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중요한 전제를 다시 확인합니다. 진리(truths)와 선(goods)은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으로 흘러 들어옵니다. 그러나 이 유입은 대부분의 사람들한테 있어서는 이런 순서로 인식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가 이해하고, 자기가 느끼고, 자기가 선택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그러나 실제로는 그 모든 것이 속 사람을 통해 조용히 유입된 결과입니다. 이것이 영적 실상입니다. 이 ‘보이지 않는 유입’을 알게 되는 것, 이런 영적 실상에 대해 눈이 떠지는 것, 이것이 거듭남의 중요한 인식 단계입니다.

 

이렇게 유입된 진리와 선이 어디로 가는가 하면, 겉 사람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저장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매우 분명히 말합니다. 자연적인 지식이든, 영적인 지식이든, 아니면 천적인 지식이든, 한 번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온 것은 모두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으로서 그곳에 머뭅니다. 즉, 기억은 단순한 정보 창고가 아니라, 주님이 언제든지 꺼내어 사용하실 수 있는 ‘영적 저장소’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기억 지식이 인간의 소유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불러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기억 속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주님은 적절한 때에, 적절한 질서로, 필요한 지식을 기억에서 꺼내어 삶과 사고에 연결시키십니다. 이는 거듭남이 인간의 계획이나 통제가 아니라, ‘주님의 섭리에 의해 조율되는 과정’임을 다시 한번 보여 줍니다.

 

이제 창세기의 표현이 상응으로 해석됩니다. 기억 속에 저장된 이 모든 지식이 ‘한곳으로 모인 물’입니다. 물은 진리의 지식을 뜻하고, 그것들이 한곳으로 모인다는 것은 이렇게 모인 지식이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지 않고, 기억이라는 한 영역 안에 정돈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가리켜 ‘바다’라고 합니다. 바다는 넓고 깊으며, 겉으로 보기에는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풍부한 내용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겉 사람 자체는 ‘마른 땅’으로 불립니다. 이는 겉 사람이 그 자체로는 생명을 생산하지 못한다는 뜻이지요. 마른 땅은 씨앗을 받아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겉 사람은 속 사람을 통해 유입된 진리와 선이 있어야만 의미 있는 활동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때 비로소 겉 사람은 단순한 ‘마른 땅’을 넘어 ‘(earth)이라 불리게 됩니다. 이는 다음 단계에서 생명 있는 것이 나타날 준비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글은 거듭남의 중요한 균형을 가르쳐 줍니다. 한편으로는,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들이 인간의 기억과 삶의 영역에 실제로 저장되고 사용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거듭남은 인간을 수동적인 그릇으로 만들지 않고, 기억과 사고와 행위를 지닌 ‘살아 있는 협력자로 세웁니다’.

 

또한 이 설명은 왜 말씀과 교훈, 설교와 배움이 거듭남에서 중요한지를 잘 보여 줍니다. 지금 당장 이해되지 않거나 감동 없는 말씀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기억 속에 저장되면, 언젠가 주님에 의해 기억-지식이라는 바다에서 불려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관점에서 보면, 헛된 배움은 없습니다. 모든 참된 것과 선한 것은, 때를 기다리며 바닷속에 모여 있습니다.

 

결국 AC.27은 셋째 날의 준비 단계입니다. 물들이 모이고 땅이 드러난 뒤에야, 비로소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가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진리와 선에 관한 수많은 지식이 기억 속에 질서 있게 모이고, 겉 사람이 그 자리를 갖춘 뒤에야 삶의 실제 변화가 시작됩니다. 이 질서는 느리지만 확실하며, 언제나 주님의 손안에서 진행됩니다.

 

 

 

AC.26, 창1:8,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econd day. (창1:8) AC.26 ‘저녁’(evening), ‘아침’(mo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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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22)

 

AC.519

 

그 당시에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에서 퍼셉션의 대상이 되었던 것들로부터 교리를 구성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는 그러한 교리가 규범, 곧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알기 위한 규범으로 쓰이게 하려고 그런 건데, 이 일을 한 사람들을 가리켜 ‘에녹(Enoch)이라 하며, 이것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and Enoch walked with God)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성한 교리를 또한 그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이는 ‘에녹’이라는 이름의 뜻이 ‘가르치다(instruct)라는 데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또한 이는 ‘동행하다(walk)라는 표현의 의미와, 그가 여호와가 아닌 하나님과 동행하였다(walked with God, not with Jehovah)라고 하는 사실에서도 분명해집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walk with God)은 신앙의 교리에 따라 가르치고, 또 살아가는 것을 뜻하지만, ‘여호와와 동행하는 것(walk with Jehovah)은 사랑의 삶(life)을 사는 것, 곧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무엇을 하든 그 동기가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것이지요. ‘동행하다(walk)라는 말은 살아가는 걸 의미하는 상용 표현으로, ‘율법 안에서 살아가다(walk in the law), ‘규례 안에서 살아가다(walk in the statutes), ‘진리 안에서 살아가다(walk in the truth)와 같은 표현이 그러합니다. ‘동행하다(walk)라는 표현은 본래 길과 관련된 말로서, 진리와 관련되며, 따라서 신앙이나 신앙의 교리와 관련됩니다. 성경에서 ‘동행하다(walking)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다음의 말씀들에서 어느 정도 분명해집니다. There were some at that time who framed doctrines from the things that had been matters of perception in the most ancient and succeeding churches, in order that such doctrine might serve as a rule whereby to know what was good and true: such persons were called “Enoch.” This is what is signified by the words, “and Enoch walked with God”; and so did they call that doctrine; which is likewise signified by the name “Enoch,” which means to “instruct.” The same is evident also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expression to “walk,” and from the fact that he is said to have “walked with God,” not “with Jehovah”; to “walk with God” is to teach and live according to the doctrine of faith, but to “walk with Jehovah” is to live the life of love. To “walk” is a customary form of speaking that signifies to live, as to “walk in the law,” to “walk in the statutes,” to “walk in the truth.” To “walk” has reference properly to a way, which has relation to truth, consequently to faith, or the doctrine of faith. What is signified in the Word by “walking,” may in some measure appear from the following passages.

 

[2] 미가에서는 In Micah: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6:8) He hath showed thee, O man, what is good, and what doth Jehovah require of thee, but to do judgment and the love of mercy, and to humble thyself by walking with thy God? (Micah 6:8)

 

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walk with God)은 여기서 말씀하신 것들을 따라 사는 걸 뜻합니다. 다만 여기서는 ‘하나님과(with God)라고 되어 있고, 에녹에 대해서는 또한 ‘하나님으로부터(from with God)라는 의미를 지닌 다른 말이 쓰여, 그 표현이 다소 중의적으로 사용됩니다. 시편에서는 where to “walk with God” signifies to live according to the things here indicated; here, however, it is said “with God,” while of Enoch another word is used which signifies also “from with God,” so that the expression is ambiguous. In David: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56:13) Thou hast delivered my feet from impulsion, that I may walk before God in the light of the living, (Ps. 56:13)

 

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하나님 앞에 다니는 것(walk before God)은 신앙의 진리 안에서 동행하는 것을 뜻하며, 이것이 곧 ‘생명의 빛(light of the living)입니다. 이와 같이 이사야에서는 where to “walk before God” is to walk in the truth of faith, which is the “light of the living.” In like manner in Isaiah: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9:2) The people that walk in darkness see a great light. (Isa. 9:1)

 

라고 말합니다. 또 주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So the Lord says by Moses: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 (26:12) I will walk in the midst, and will be your God, and ye shall be my people, (Lev. 26:12)

 

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율법의 교리에 따라 사는 것을 뜻합니다. signifying that they should live according to the doctrine of the law.

 

[3] 예레미야에서는 In Jeremiah:

 

그들이 사랑하며 섬기며 뒤따르며 구하며 경배하던 해와 달과 하늘의 뭇별 아래에서 펼쳐지게 하리니 (8:2) They shall spread them before the sun, and the moon, and to the armies of the heavens, whom they have loved, and whom they have served, and after whom they have walked, and whom they have sought, (Jer. 8:2)

 

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는 사랑의 것들과 신앙의 것들이 분명히 구별됩니다. 사랑의 것들은 ‘사랑하며(loving)와 ‘섬기며(serving)로 표현되고, 신앙의 것들은 ‘뒤따르며(walking)와 ‘구하며(seeking)로 표현됩니다. 모든 예언서에서는 모든 표현이 정확하게 사용되며, 어느 한 용어도 다른 용어를 대신하여 쓰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에서 ‘여호와와 동행하다(walk with Jehovah) 또는 ‘여호와 앞에서 행하다(before Jehovah)라는 것은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where a manifest distinction is made between the things of love, and those of faith; the things of love being expressed by “loving” and “serving”; and those of faith by “walking” and “seeking.” In all the prophetical writings every expression is used with accuracy, nor is one term ever used in the place of another. But to “walk with Jehovah,” or “before Jehovah,” signifies, in the Word, to live the life of love.

 

 

해설

 

이 글은 ‘에녹’의 교회가 왜 태고교회 흐름 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밝혀 줍니다. 에녹의 교회는 퍼셉션 그 자체로 살아가던 교회가 아니라, ‘퍼셉션의 내용으로부터 교리를 구성하여 보존하려 했던 교회’였습니다. 퍼셉션이 점차 약화되면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즉각적으로 알 수 없게 되자, 그것을 대신할 규범이 필요해졌고, 그 결과 교리가 형성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교리를 단순한 인간적 산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는 주님의 섭리 안에서 허락된 보존의 방식이었습니다. 에녹이라 불린 사람들은, 이전 교회들에서 살아 있던 퍼셉션의 내용을 붙잡아, 그것을 가르칠 수 있는 형태로 정리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녹(Enoch)이라는 이름 자체가 ‘가르치다(instruct)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구분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다’와 ‘여호와와 동행하다’의 차이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신앙의 교리에 따라 살고 가르치는 것을 뜻합니다. 반면 여호와와 동행하는 것은 사랑의 삶, 곧 쓰임새의 삶을 직접 사는 것을 뜻합니다. 이 구분은 결코 사소하지 않습니다. 이는 교회의 중심이 퍼셉션과 사랑의 삶에서 교리와 신앙의 삶으로 이동했음을 보여 주는 결정적 표시입니다.

 

동행하다(walk)라는 표현 자체도 이 변화를 잘 드러냅니다. 동행은 길과 관련된 말이며, 길은 진리와 연결됩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동행하다’는 주로 신앙과 교리, 진리의 길을 따라 사는 것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예언서의 구절들을 통해, 이 표현이 얼마나 일관되고 정확하게 사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사랑과 관련된 표현과, 신앙과 관련된 표현이 결코 뒤섞여 쓰이지 않는다는 점이 특히 강조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오늘날 교회의 현실을 깊이 비추는 거울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감정적 친밀감이나 개인적 체험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에녹의 교회가 보여 주는 동행은, ‘교리를 통해 신앙의 방향을 유지하는 삶’입니다. 이는 살아 있는 퍼셉션이 약해진 시대에, 신앙을 지키는 매우 현실적인 방식입니다.

 

동시에 이 글은 교리의 한계도 암시합니다. 교리는 생명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생명이 사라지는 것을 막는 그릇이 될 수는 있습니다. 에녹의 교회는 바로 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퍼셉션이 직접 작동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었지만, 그 진리들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교리라는 형태로 다음 시대에 전해지도록 준비한 것입니다.

 

결국 AC.519는 에녹의 교회를 ‘보존의 교회’, ‘가르침의 교회’로 규정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은, 신앙의 교리를 따라 살고 그것을 가르친다는 뜻이며, 이는 퍼셉션이 약화된 시대 속에서도 주님께서 교회의 생명을 이어 가시는 섭리의 한 방식이었습니다. 이 글은 교회 역사뿐 아니라, 오늘 우리의 신앙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성찰하게 만드는 깊은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AC.518, 창5: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C.518-519)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Enoch walked with God after he begat Methuselah three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창5:22) AC.518 ‘하나님과 동행하며’(walk with 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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