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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07.02 주일예배(2023/7/2, 눅10:25-37),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7-02(D1)-주일예배(2487, 눅10,25-37),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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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YB4PkXIFGcE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25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눅10:25-37)

 

 

이웃 사랑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서 그를 이웃으로 만드는 덕목, 즉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다. (AC.5028)

 

 

어떤 율법교사가 주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러자 주님께서는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되물으셨고, 이에 율법교사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하자, 주님께서는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율법교사는 율법에 적힌 대로 줄줄 암송은 했지만, 사실 그 의미를 잘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했다는 사실과, 비록 지금 자기 앞에 계신 분이 뉘신지를 몰랐다 하더라도 자기가 지금 암송한 이 말씀을 참으로 이해하는 사람이었다면 감히 이런 식, 곧 상대방을 시험하는 용도로 말씀을 이용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사랑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어떤 이기적 동기 없이 선과 진리를 그 자체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과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이지요. 이웃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의 비밀’ 5028번 글에는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은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서 그를 이웃으로 만드는 덕목, 즉 선과 진리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은 선과 진리를 그 자체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그 사람 안에 계시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지요. 선과 진리는 주님의 신성이요, 곧 주님 자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심지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 하신 주님 말씀을 지킬 수 있으려면 반드시 이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실제로는 정말 쳐다보기도 싫은 사람, 정말 상종하기도 싫은 사람이 있지요.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라신 이 주님 말씀을 지키려면 그 사람 자체보다는 그 사람 안에 계시는 주님을 사랑하는 법, 곧 그 사람 안에도 주님이 허락하신 주님의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법을 꼭 익혀야 합니다. 그 사람이 예뻐서가 아니라 그 사람 안에 계시는 주님에 대해 예의를 갖추기 위한 것입니다. 그 사람에 대한 나의 감정과 상처보다도 주님을 향한 사랑이 더 크고 중요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는 이유는, 마음, 즉 하트(heart)는 사랑을 뜻하고, 목숨, 즉 소울(soul)은 믿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사랑할 때는 반드시 사랑과 믿음이, 신앙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말과 행동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뜻인데요, 왜냐하면 믿음은 말로 나타나고, 사랑은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의 모든 구절들 안에는 선과 진리, 사랑과 믿음 간 결합이 있으며,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29절에 율법교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주님께 묻습니다. 자기를 옳게 보이려 한다는 것은 영어로는 저스티파이(justify)인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또는 변명한다는 뜻입니다. 평소에 어떤 행동을 했기에 율법교사는 지금 변명을 하는 걸까요? 유대인들처럼 세속적인 사람들은 자기에게 이로운 사람만 이웃으로 인정하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의 가족이나 몸 담고 있는 직장, 사회 또는 자신의 나라만을 이웃으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웃 사랑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율법교사는 주님과 대화하는 중에 문득 자신의 이웃 사랑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변명을 하듯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주님께 묻는 것입니다. 율법교사의 말을 듣고, 주님께서 비유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29km 떨어진 성읍입니다. 기록에는 주님 당시 예루살렘과 여리고를 왕래하는 사람이 꽤 많았다 합니다. 지리적으로 예루살렘은 해발 800m 고지에 있고, 여리고는 지중해 수면보다 250m나 아래에 있었습니다. 즉 여리고에서 보면 예루살렘은 천 미터 고지인 셈이고,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꽤 가파른 내리막길이었습니다. 더구나 그곳은 강도가 수시로 출몰하던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이 길은 영적으로는, 즉 속뜻으로는, 예루살렘은 교회의 교리를 뜻하고, 여리고는 삶의 선한 행위를 뜻합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속 사람을 통해 흘러들어온 교회의 진리가 겉 사람의 삶 속에 뿌리내리는 험난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강도를 만났다 했는데, 강도는 겉 사람 안에 진리가 뿌리내릴 때까지 방해하고 저항하는 수많은 악과 거짓들이며, 지옥의 유혹들입니다. 신앙인들이 그러한 악과 거짓의 유혹에 넘어간다면 그는 지옥을 향한 가파른 길로 굴러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가지고 있던 진리와 선을 모두 빼앗겨버릴 것입니다. 누구에게? 바로 지옥의 영들에게 빼앗깁니다. 그것이 강도에게 옷이 벗겨지고 매를 맞는 것입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이 그렇게 죽어가고 있는데 마침 그곳에 제사장이 나타났습니다. 제사장은 그를 보고도 못 본 척하고 그냥 자기 갈 길을 갔습니다. 다음에는 레위인이 도착했는데 그 역시 그를 피해 지나갔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앞에서 말한 율법교사처럼 유대교회, 유대 사회에서는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며, 그러므로 진리를 많이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죽어가는 사람을 못 본 척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러면 속뜻으로 제사장과 레위인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주님 당시 유대교회의 지도자들이며, 오늘날로 말하면, 종교적 지위와 신분을 이용하여 세속적 삶을 추구하는 종교 지도자들, 특히 교회 리더십들입니다. 그들은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오직 믿음’의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거짓 목자들입니다. 백번 양보, 비록 악의는 없었을지라도 한쪽만 강조, 본의 아니게 신앙과 체어리티 간 하나 됨을 느슨 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함으로써 성도들로 하여금 ‘뭐, 그래도 나는 믿음이 있으니까 구원받을 수 있을꺼야’라는 잘못된 확신 가운데 머무르게 한, 그렇게 함으로써 실제로는 속 사람의 준비에 소홀하게 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천국은 속 사람의 상태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곳인데, 잘못된 교리를 확신, 그렇게 성도를 가르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그 짧은 지상생활 동안 정말 중요한 결정적 준비를 다 놓치며 살게 한 책임 말입니다. 성경 모든 구절이 선과 진리의 결혼, 또는 믿음과 사랑의 결합을 가르치는데, 거짓 목자들은 끊임없이 선과 진리를 분리하고, 믿음과 사랑을 분리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야말로 신앙인들에게서 진리를 빼앗는 강도이며, 죽어가는 사람을 못 본 척 피해 가는 제사장과 레위인인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보면, 제사장과 레위인은 우리 신앙인들의 마음속에도 있습니다. 신앙인들이 스스로 진리를 많이 안다 생각할 때가 있는데, 바로 그 마음이 제사장이며 레위인입니다. 우리 내면에 제사장과 레위인이 있으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이 막힙니다. 그래서 자신이 영적으로 죽어가더라도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 식으로 제사장과 레위인은 구원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구하지 않고, 피하여 지나갔다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못 본 척 지나갈 때, 죽어가는 사람을 일으켜 세운 사람은 유대인들이 그토록 혐오하고 업신여겼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잘들 아시듯 역사적 어떤 사건 때문인데, 나중에 따로 기회 되면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이 사마리안인은 모두 우리 신앙인들 안에 있는 마음들입니다. 전자는 진리를 잘 안다 하면서도 실천하지는 않는 마음이고, 후자는 겸손한 태도로 아는 만큼 진리를 실천하는 마음입니다. 우리에게 사마리아인과 같은 마음이 있을 때는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병들었다 판단되면, 가지고 있던 모든 진리와 선을 동원해서 병을 고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데, 본문에서는 그것을,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여기 기름과 포도주는 선과 진리를 뜻합니다. ‘기름’은 선이고, ‘포도주’는 진리를 뜻합니다. 또 ‘자기 짐승’은 영적 지성, 즉 진리에 대한 이해력이나 분별력을 뜻합니다. 영적 지성이 있어야 자기가 어떤 영적 질병을 앓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치유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마리아인은 죽어가는 자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주막’은 주님의 가르침이 있는 곳입니다. 주막에 가면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있지 않습니까? 먹을 것과 마실 것은 영적으로는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뜻합니다. 주막은 주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주막으로 환자를 데리고 가는 것은, 한편으로는 영적 지성을 통해 병을 스스로 치유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신앙인들의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율법교사에게 물으셨습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 질문에 율법교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답했고, 그러자 주님께서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심으로써 이 에피소드는 일단락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의 모습이 이 율법교사와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율법교사는 어떤 사람입니까? 스스로 진리를 많이 안다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입으로는 영생을 위해 산다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세상의 영화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진리를 선택하기보다 자아가 원하는 쪽을 선택하면서도 주님 앞에서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그에게 영생을 얻으려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진리를 아는 것뿐만 아니라 사랑, 즉 행함이 중요하다 말씀하십니다. 율법교사는 어쩌면 이웃 사랑을 이미 실천하고 있다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사랑하는 것은 주님이 좋아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변명하듯 주님께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물은 것이며, 주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이 셋 중 자비를 베푼 선한 사마리아인이 네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다’ 대답하신 것입니다. 사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이 사마리아인 같은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에서는 누구나 힘없는 사마리아인보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을 더 사랑합니다. 또한 사마리아인처럼 겸손하고 따뜻한 사람이 되기보다 제사장이나 레위인 같이 높은 사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은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우리 안에 있고, 동시에 이웃들의 마음속에도 있는 진리와 선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선한 사마리아인을 지지, 사랑해야 하고, 우리 자신도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메시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7:12)

 

아멘

 

원본

2019-10-2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7-02(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 성찬 원고

성찬.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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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축도 원고

2023-07-02(D1)-주일예배.축도.성찬.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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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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