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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07.09 주일예배(2023/7/9, 눅11:1-4), '주기도문의 속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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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09(D1)-주일예배(2490, 눅11,1-4), '주기도문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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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AnACqmb8kus

 

 

주기도문의 속뜻

 

1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2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3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4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눅11:1-4)

 

 

천사들의 말이,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God the Father)을 생각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는 보이지 않기(invisible) 때문이다. 우리는 신적 인성(Divine Human) 안에 계신 그분을 생각한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그분이 보이시기(visible) 때문이다. 신적 인성 안에 계시는 그분을 당신은 그리스도(Christ)라 하고, 우리는 주님(the Lord)이라고 한다. (AR.839.6) we do not then think of God the Father, because he is invisible; but we think of him in his Divine human, because in this he is visible; and in this he is called by you Christ, but by us the Lord; (AR.839.6)

 

 

오늘은 주기도문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루에도 여러 번 기도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한 번, 취침 전에 또 한 번, 그리고 식사 때마다 등 최소한 이렇게 여러 번 기도합니다. 그러다 보면 가끔은 형식적인 기도가 될 때도 있지요. 그러나 가정에 우환이 생겼거나 자녀들이 시험을 볼 때, 또는 직장 승진심사가 있거나 할 때는 마음을 모아 정성껏 기도합니다. 아마 거기에 인생이 달렸다, 모든 게 걸렸다 생각하기 때문이겠죠. ‘천국의 비밀’ 8179번 글에는 ‘기도에 너무 의존하지 말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가 꼭 이루어질 것이라 기대하지는 말라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기도가 주님의 의도와 다르면 주님은 그 기도를 듣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자기 욕심과 욕정으로 인한 시험 가운데 있는 사람이 정작 회개는 안 하고, ‘주님! 이 시험의 고통에서 나를 구하소서’ 한다면 주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시험의 목적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 시험이 중단되면 그 사람은 영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놓치게 되고,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되면 그는 결국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험의 목적이 온전히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시험이 시작되어 끝날 때까지 전 과정을 사람이 스스로 하는 것처럼, 즉 자기 힘으로 견디고 이겨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내와 자기와의 싸움이 전제되지 않은 기도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 자신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주님께서 기도하신 것처럼 어떤 경우든 ‘하나님 아버지, 저희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기도해야 합니까? 이와 관련, ‘천국의 비밀’ 2535번 글은 ‘기도는 주님과 대화하는 것이며, 기도하는 내용을 내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기도하면서 자기가 기도하는 것을 내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좀 더 주님 뜻에 가까운 기도를 할 수 있을 것이며, 그래서 오늘은 주기도문의 의미, 그 속뜻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본문 1절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1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주님의 제자들이 주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합니다. 세례요한은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요한’의 영적인 뜻은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letter sense)를 나타냅니다. 세례요한이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나타내는 이유는, 처음 교회 나오는 사람들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먼저 배우고, 그것을 통해 주님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의 문자적 의미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이며, 곧 세례자 요한(John the Baptist)입니다. 요한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기도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통해 배우는 기도를 말합니다.

 

말씀에는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6장에서 주님은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6) 하시고, 또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하십니다. 이러한 말씀 안에는 모두 내적인 의미(internal sense)가 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의미를 알지 못하면 온전한 기도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문자의 뜻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요한의 제자들입니다. 반면에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주님의 제자들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가르치는 기도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그 내적 의미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르침을 구하는 상대인 주님은 문자적인 의미와 내적 의미가 함께 있는 말씀(The Word)이시며, 말씀 그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주님에 대해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요1:27)고 말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청하자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주님은 먼저 ‘아버지여’로 시작하십니다. 기도를 하려면 당연히 그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 대상은 인간을 창조하신 영원한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버지라 부를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구약의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오늘날 기독교인들조차도 그것을 분명히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구약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하나뿐인 아들이라고 믿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을 따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분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며, 그러므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의 진리에 위배되는 일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믿어야 하는 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생물학적인 부자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두 가지 본질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즉 아버지는 사랑 자체이시고, 존재 자체이시며, 신성 자체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뜻하고, 아들은 사랑의 열기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빛이시고, 존재의 드러남이시며, 신성에서 비롯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 말씀하시고, 또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요17:21), 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14:9)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버지라고 불러야 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이름을 부를 때는 그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내면의 모습(quality)을 함께 떠올리며 부릅니다. 그것처럼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주님의 겉모습인 인성과 그 내면에 있는 신성을 함께 부르는 것입니다. 내면에 신성(神性)을 담고 있는 주님의 인성(人性)을 우리는 신적 인성(Divine Human)이라고 합니다. 즉 거룩한 인간이라는 뜻이지요. 그러므로 주님의 이름은 바로 신적 인성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신성과 함께 인성을 가지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피조물의 입장에서는 주님의 신성은 볼 수도 없고, 인식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볼 수도 없고 인식할 수도 없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사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성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세상에 오실 때 입으셨던 그 인성은 아직은 거룩한 인성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인성 안에는 마리아로부터 받은 유전적 악이 그대로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모진 시험을 통해 마리아로부터 받은 인성을 벗으시고 여호와로부터 받은 새로운 인성으로 갈아입으셔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인간이 거듭나는 과정에서 타고난 자아를 벗고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자아를 받는 것과 유사한 일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마리아의 인성을 벗으시고 여호와로부터 새로운 인성을 입으셨을 때, 비로소 주님의 인성은 당신 안의 신성과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의 신적 인성을 우리는 거룩하게 되신 주님, 또는 영화롭게 되신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처럼 주님이 우리 마음에 처음 오실 때는 완전한 주님이 아니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처음 진리를 받아들일 때는 완전한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진리는 개인의 자아를 통과하는 순간 조금씩 왜곡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빛이 물을 통과할 때 굴절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왜곡된 진리는 사람이 영적으로 거듭남에 따라 점차 완전한 진리로 변합니다.

 

그와 관련해 ‘계시록의 속뜻’ 935번 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님은 사람에게 있는 진리의 질(質, quality)에 따라 그에게 인애(仁愛, charity)와 선을 만들어 주신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개인에게 있는 진리의 특성에 따라 인애와 선이 점점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각 사람 안에서 진리와 선이 균형 있게 성장하고 서로 결합하는 것, 이것이 진리가 완전해지는 것이고 우리 안에서 신적 인성이신 주님이 거룩하게 되시는 것입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는 그런 뜻입니다. 왜냐하면 진리와 결합한 선이 바로 신적 인성이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렇게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나라가 임하시오며’입니다. 신앙인들이 영적으로 거듭날수록 우리 마음은 점점 천국으로 변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나라가 각 사람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주님의 나라가 임하시기를 기도하여야 합니다.

 

3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네 번째는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양식은 육신의 양식이 아닙니다. 영혼의 양식인 선과 진리이며 사랑과 지혜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고, 거듭날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와 선을 지나치게 욕심(?)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말씀을 공부하면서 가끔 드는 생각은, 성경 전체의 내적, 외적 의미를 체계적으로 정리,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말씀을 읽을 때마다 구약과 신약의 수많은 말씀이 서로 연결되면서 진리의 깨달음이 폭죽처럼 터질 것입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16장에는 ‘일용할 양식을 매일 거둘 것이며 아침까지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아침까지 만나를 두는 것’은 진리와 선을 주님이 주시는 대로 받지 않고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만나에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 먹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진리의 세계는 무한해서 인간의 작은 머리로는 담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그때그때 필요한 진리들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항상 주님께 마음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그것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마음입니다.

 

4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다섯 번째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는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자가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옥에 가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때 주인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크게 화를 내며,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옥졸들에게 넘겼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불쌍히 여기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까맣게 잊고, 이웃에게 모질게 대할 때가 참 많습니다. 앞에서 인용한 구절을 보면,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은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한 매우 중요한 요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기 위해 늘 노력해야 하고, 그것이 잘 안되면 주님 앞에 용서의 능력을 구하셔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왜냐하면 그러지 않으면 주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입니다. 시험을 통해 우리는 자기 안에 있는 악을 볼 수 있고,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시험에 들지 않기를 구하라’ 하십니다. 시험이 없으면 영적으로 변화될 수가 없는데 왜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실까요? 시험이 없는 상태, 즉 완전히 거듭난 후의 상태를 목표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라는 이 기도는 완전한 거듭남, 또는 영적 안식의 상태를 소망하는 기도이며, 동시에 그것을 위해 당면한 시험들을 견디고 이겨나가겠다고 하는 결단의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동안 주기도문을 매일 외우면서도 우리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내적인 의미를 통해 이 간결하고 아름다운 기도 안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기도의 시작은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 그것은 신적 인성이신 주님이 영화롭게 되신 것처럼 우리 안에 있는 진리 역시 완전하고 순수한 진리가 되기를 염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기도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입니다. 이것은 목적을 위한 수단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거듭나기 위해서는 주님으로부터 진리와 선을 받아야 하고요, 또한 죄 사함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죄 사함을 받으려면 먼저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이렇게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입니다. 그것은 시험이 없는 상태 즉 완전한 거듭남을 소망하면서 당면한 시험들을 이겨나가겠다는 결단의 기도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 안에는 구원의 목적과 수단에 대한 염원 및 인간의 결단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기도 안에 있는 모든 구절이 다 소중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소서’라는 말씀이 저의 마음을 때렸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 앞에 큰 죄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작은 허물을 용서하지 않은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이웃의 잘못을 진심으로 용서할 때, 막혔던 혈관이 뻥 뚫리는 것과 같은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용서와 화해와 치유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 축원합니다.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 (마6:33-34)

 

아멘

 

 

 

 

원본

2019-12-0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7-09(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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