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7-30(D1)-주일예배(2497, 눅12,1-7),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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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DFnU2GV7-DY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1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2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3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4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6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7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눅12:1-7)

 

 

이 세상에서는 아무도 어떤 일에 대해 이 일은 주님으로 말미암았다, 아니다, 사람으로 말미암았다 할 수 없습니다. 겉보기에는 그 둘이 똑같기 때문이지요. 오직 주님만 구별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사후에는 다릅니다. 거기서는 이 일들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AE.794:3) In this world no one can determine whether works are from the Lord or from man, since in external form the two kinds appear alike, but they can be distinguished by the Lord alone, and after man’s life in the world their origin is disclosed (Matt. 10:26, 27; Mark 4:22; Luke 8:17; 12:2, 3, 8, 9). (AE.794:3)

 

우리 사회 전반에 종북(從北) 또는 종중(從中) 좌파의 사람들이 주도하는 거짓 선동의 거대한 움직임이 있습니다. 최근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후쿠시마 오염수 선동, 양평 IC 선동이 있습니다. 이번 서이초 교사의 안타까운 사례는 다행히 교사들 스스로 전교조의 개입을 원천 차단, 저들이 무슨 선동질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저들의 모든 움직임을 선동 또는 괴담이라 하는 이유는 저들의 주장이 거의 다 사실과 진실이 심각하게 결여된, 거짓 뉴스이기 때문입니다.

 

4.15 부정선거로 다수당이 된 게 99% 분명한 더불어민주당을 비롯, 문재인 전 정권 사람들, 그리고 민노총을 비롯, 방송, 언론 노조와 정부 각 부처 산하 곳곳에 심어놓은 저들 좌파의 사람들을 보면 거의 예외 없이 모두 다 거짓과 위선, 곧 겉과 속이 너무나 다른 모습들을 봅니다. 물론 우파 보수라 하여 이 거짓과 위선의 사람들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위선자들의 행동과 관련하여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794번 글 3항에는 이런 말이 있는데요,

 

이 세상에서는 아무도 어떤 일에 대해 이 일은 주님으로 말미암았다, 아니다, 사람으로 말미암았다 할 수 없습니다. 겉보기에는 그 둘이 똑같기 때문이지요. 오직 주님만 구별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사후에는 다릅니다. 거기서는 이 일들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AE.794:3)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는 일이 있고, 인간으로 말미암아 하는 일이 있는데, 겉으로 보면 비슷, 거의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는 일이란 어떤 것입니까? 일을 함에 있어 선 또는 진리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인간으로 말미암아 하는 일은 겉으로는 선과 진리이신 주님의 일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그 속에 사사로움이 똬리를 틀고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는 일은 언제나 진실하고, 인간으로 말미암아 하는 일은 언제나 거짓된 위선의 일입니다. 위선자들의 행동은 건전한 사람들의 이성을 파괴하고 분별력을 흐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누구보다도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미워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의 위선을 조심하라 하십니다. 1절입니다.

 

1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무리 수만 명이 모였는데 서로 밟힐 만큼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무리’(multitude)는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많은 무리가 모였다는 것은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선은 없고 진리만 많이 있다는 뜻인데요, 교회 안에 선은 없고 진리만 있을 때는, 그런 교회에서는 교인들끼리 서로 다투고, 서로에 대한 중상과 비방으로 심하면 교회가 분열되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의 의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예견,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조심하라 하십니다. 진리만 있고 선이 없는 사람들은 자칫 위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위선자들은 자신도 해치지만 주변 사람들까지 해치기 때문에 주님은 그들을 특별히 경계하셨습니다. 2절, 3절입니다.

 

2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3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남을 비방하거나 중상하는 사람들은 대개 대놓고 비방하지는 않습니다. 보통 누가 들을까 아주 은밀하게 하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고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고 하셨습니다.

 

※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48장, ‘두고 가는 것은 육체밖에 없다’(After Death Man Is Possessed of Every Sense, and of All the Memory, Thought, and Affection That He Had in the World, Leaving Nothing Behind except His Earthly Body) 462번 글로, 여기에 바로 이 구절들에 대한 의미가 나옵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 기억 전체를 유지한다는 것을 나는 수많은 경우를 통해 보아왔다. 기록할 만한 많은 것 중 몇 가지를 예로 들어보겠다.

 

이 세상에서 지은 자기 죄와 악행을 부인하는 영들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스스로 결백하다고 믿지 못하도록 그들의 기억에서 생의 초기부터 말년까지의 모든 행위가 차례로 꺼내져 재현되었는데 주로 간음과 음탕한 행위들이었다.

 

악한 기술로 남을 속이고 훔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사기행각과 도둑질도 연달아 모두 드러났는데 그중 많은 것은 세상에서 자기 혼자만 알고 있던 것들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고백해야 했다. 그 당시 그들 마음속에 뒤섞여 있던 모든 생각, 의도, 즐거움과 두려움까지 낱낱이 백일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재판과 관련, 뇌물을 받고 돈을 번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기억으로 조사받았고, 처음 직책을 맡은 때부터 그만둔 날까지의 모든 것이 드러났다. 자세한 뇌물의 액수와 가치, 받은 일시, 당시 그들의 마음 상태와 의도까지 수백 가지가 떠올라 눈앞에 상영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놀랍게도 그들이 그런 행위를 기록해 둔 수첩까지 한 장 한 장 펼쳐져 읽힌다.

 

처녀들을 유혹해 수치스럽게 했거나 순결을 빼앗은 사람들도 이와 같은 심판을 받는다. 그들의 기억으로부터 범행이 자세하게 떠오르고 재현된다. 처녀들과 여자들의 얼굴, 장소, 그때 했던 말들과 의도가 실제처럼 나타난다. 이것은 어떤 장면을 눈으로 볼 때처럼 즉각 나타나고, 어떤 때는 그 상영이 몇 시간씩 계속된다.

 

남을 중상하는 것을 가볍게 여긴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의 비방과 중상이 그때 사용한 단어들까지 그대로 재연되는 것을 들었다. 세상에서 그가 아주 조심스럽게 감추어 왔음에도, 비방의 대상이 된 사람과 그것을 듣고 있던 사람까지 모든 것이 생생하게 재생되고 상영되었다.

 

사기로 친척의 유산을 가로챈 사람이 있었다. 그도 같은 심판을 거쳐 판결을 받았다. 놀랍게도 그들 사이에 오간 서류와 편지가 읽혀지는 것이 내 귀에 들렸는데, 그것은 한 글자도 빠짐이 없다고 했다.

 

바로 그 사람은 죽기 얼마 전에 그의 이웃을 몰래 독살한 사람이었다. 이것이 밝혀진 과정은 이렇다. 그가 발밑에 구덩이를 파고 있는 모습이 나타났다. 그 구덩이에서 한 사람이 마치 무덤에서 나오듯이 나와서 그를 향해 외쳤다. “나에게 무슨 짓을 했는가?” 그러자 그 살인자가 친절하게 말을 거는 모습, 잔을 건네주는 모습, 게다가 그 행위를 하기 전에 그가 한 생각과 그 후에 일어난 일까지 모든 것이 드러났다. 그 모든 것이 다 드러나자 그는 지옥을 판결받았다.

 

한마디로 모든 악한 영에게는 그의 모든 악과 범행과 약탈과 사기와 속임수가 밝히 드러나고, 그의 기억에서 떠올려져 죄과가 충분히 입증된다. 또 모든 상황이 전부 공개되므로 이것을 부인할 여지가 없다.

 

나는 사람의 기억을 천사가 조사할 때, 그가 한 달 동안 생각한 것이 하루하루 일어난 그대로 하나도 틀림없이 되살려지는 것도 보았다.

 

이상의 사례들로, 사람은 자기의 기억을 전부 가지고 간다는 것과 사후에 만인 앞에 드러나지 못하게 감출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의 주님 말씀도 그것을 의미한다.

 

2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3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눅12:2-3)

 

(HH.462)

 

계속해서 4절, 5절입니다.

 

4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주님의 친구는 어떤 사람입니까? 요한복음 15장 14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15:14)

 

말씀처럼 주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사람들, 즉 영적인(spiritual) 사람들이 주님의 친구입니다. 영적인 사람들은 육신을 죽이는 재물이나 지위, 질병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연적인(natural) 사람의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사람의 두려움에 대해 계시록 해설 696번 글 23항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영적인 사람의 두려움은 악한 삶과 교리의 거짓으로 인해 주님으로부터 멀어지지는 않을까, 또는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해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인 사람들의 두려움은 세상 재물이나 지위, 질병에 대한 두려움이 아닙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행여 자기 안에 있는 사랑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6, 7절입니다.

 

6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7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말씀에서 ‘참새 다섯 마리’는 신앙인의 지혜를 형성하는 작은 진리들을 뜻합니다. 그리고 돈을 받고 참새를 파는 것은 눈앞의 이득을 위해 진리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참새 하나도 잃어버리는바 되지 않게 하겠다고 하시고요,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십니다. ‘머리털’은 몸의 가장 바깥쪽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계에서의 신앙인의 삶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하면 일상의 삶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여러 행동과 그 속에 담긴 의도가 머리털입니다. 따라서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다’ 하는 것은 주님께서는 우리의 말과 행동뿐 아니라 그 속에 들어있는 의도까지 모두 아신다는 뜻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작은 이익을 얻기 위해 어리석은 선택을 할 때가 참 많지요. 그리고 바로 수치심과 후회와 같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입니다. 그러나 의도가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었다면 주님께서는 진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조금 했더라도 진리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라 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 속에는 영적인 두려움뿐 아니라 세상의 권세에 대한 두려움까지 포함되어 있다고 저는 이해합니다. 참으로 위안이 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이 혼란과 진통은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와 우리 안에 있는 악과 거짓 간 싸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새 교회 가르침에서는 큰 싸움을 시험이라고 부르고요, 작은 싸움을 발효(醱酵)라고 부릅니다. 발효란 술이 익을 때 일어나는 바로 그 발효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발효 과정을 거쳐 술의 맑은 원액과 찌꺼기가 분리되는 것처럼 영적인 발효를 통해 우리 안에 있는 진실과 거짓, 선과 악이 분리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뒤섞여 있는 한 사회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모든 과정이 그렇듯이 우리 사회가 거듭나려면 영적인 시험과 발효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악한 자와 선한 자, 위선자와 진실한 자들이 주님에 의해 가려질 것입니다. 이때 우리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못된 신앙생활로 인해 주님이 주신 사랑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항상 스스로를 경계하고 절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세속적인 사람에서 영적인 사람으로 한 단계 올라설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분과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3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15:13-14)

 

아멘

 

 

원본

2020-05-10(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7-25(D3)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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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7-23(D1)-주일예배(2496, 눅11,43-54), '주님이 바리새인, 율법사, 서기관들을 매우 엄히 꾸짖으신 이유'.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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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a1jkIAFXH7U

 

 

주님이 바리새인, 율법사, 서기관들을 매우 엄히 꾸짖으신 이유

 

 

43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44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45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46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47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48이와 같이 그들은 죽이고 너희는 무덤을 만드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49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 하였느니라 50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51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52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53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묻고 54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더라 (눅11:43-54)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 속으로는 악한 생각을 하면서도 입으로는 선한 말을 하는 사람들, 그리고 신앙의 진리와 사랑의 선에 대해 속으로는 정신 나간 생각들을 하면서도 입으로는 번듯하게 말하는 사람들은 겉만 하얗고 속은 무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AE.659:10) Those who think evil about God and the neighbor but speak well, and those who think insanely about truths of faith and goods of love but speak sanely, such inwardly are sepulchers whited without, (AE.659:10)

 

※ 위 내용은 스베덴보리 저,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1장 9절,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계11:9) 주석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 지난 2020년 4월 19일 주일설교인 이 설교 원본에는 앞서 15일에 있었던 17대 국회의원 선거에 관한 내용이 좀 길게 나와서 이를 생략, 본문으로 바로 들어갑니다. 지금이야 이 선거가 99% 부정선거였음을 우파 보수 및 건전한 중도에서는 알게 되었고, 이걸 어떻게 바로잡아야 하나 그 때를 기다리며, 그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중이지만 그때만 해도 저쪽 사람들이 설마 그런 엄청난 장난을 칠 줄은 일반 국민들은 정말 그 어느 누구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그런 정황이 느껴지는 내용입니다. 저 역시 그때 그 결과가 너무나 이상했거든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두 얼굴 등 당시 분위기로 보아 총선 때 저들의 폭망이 너무나 예견되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바리새인들을 매섭게 꾸짖으십니다.

 

※ 복음서에는 바리새인, 율법사, 서기관 등의 명칭들이 나오는데요, 이들은 모두 종교적으로는 다 바리새인이며, 다만 그 사회적 역할에서 좀 다를 뿐입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했던 사람들에게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하시며 용서하셨던 주님, 그러나 그런 주님이 유독 이 바리새인들에게만은 매우 엄격하셨는데요, 그 이유는 주님이 보시기에 바리새인들은 모두 위선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이기 때문에 미워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뿌리 깊은 위선을 미워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거룩한 것처럼 하면서 속으로는 교활한,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차라리 노골적으로 사기를 치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더 나은데요,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최소한 오히려 이웃에게 경각심이라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선자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속으로는 독이 든 이빨을 감춘 독사이면서도 겉으로는 양의 탈을 쓰고 슬며시 이웃에게 다가가 그들의 분별력을 어지럽히고 때로는 양심을 파괴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천사들의 눈에는 이들 위선자들은 마치 독이 있는 뱀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천사들은 내적 존재이며, 주님의 빛 가운데 있어서 그 내면, 곧 그 속 정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며, 영계에서는 겉과 속이 다른 상태로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지상에서 이런 위선자들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 내면에 영적인 빛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 빛과 육의 눈으로는 그들의 영적 정체를 볼 수 없으며, 그래서 세상에서는 많은 경우, 이들 위선과 거짓의 사람들에게 오히려 속임과 사기를 당하는 그런 상황입니다.

 

주님 눈에 비친 이런 위선자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43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여기서 ‘회당’과 ‘시장’은 모두 교회를 뜻합니다. 특별히 시장도 교회를 뜻하는 이유는 시장에서 물품들이 유통되는 것처럼 교회에서는 선과 진리의 지식이 유통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높은 자리’는 뭘까요? 높은 자리는 주님, 또는 주님이 계신 천국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을 기뻐한다는 것은, 위선자들은 교회의 직분을 이용해 스스로 주님의 자리에 앉으려 하고, 이웃을 섬기기보다 대접받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악하기만 한 자들은 보통 하나님의 나라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세상 것에만 관심을 가집니다만 그러나 위선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나라까지도 넘봅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결국 천국의 신성한 것에다 세상의 것을 섞어버리는데요, 그것은 주님 앞에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을 서로 섞는 것을 말씀에서는 영적 간음에 비유합니다.

 

※ 이런 ‘영적 섞음’이 특히 그 속 사람에게 아주 치명적인 이유는 다른 건 주님이 어떻게 해보실 수 있지만, 이 각 사람의 영의 변질은 주님조차 어찌하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우리는 살면서 주님 말씀하신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마5:37)만 하는 삶을 살든지, 비록 좀 삐뚤어지고, 못되게 굴더라도 최소한 잔머리 굴려 겉 다르고 속 다른 지경까지는 가지 않는 게 정말 중요하지 않을까 저는 생각합니다.

 

44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평토장(平土葬)한 무덤은 봉분이 없이 평평하게 만든 무덤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무덤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 다음은 류모세 저, ‘열린다 성경, 절기 이야기’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유월절 한 달 전인 아달월 15일부터 성전은 전국에서 몰려드는 순례자들을 맞이하는 준비에 들어간다. 성전에서 파견된 사람들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올라오는 모든 길들을 보수한다. 이것은 오늘날의 ‘도로 보수’와는 다른 개념이다. 성서 시대의 가난한 자들은 땅을 대충 파서 시체를 묻었는데,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유대 산지는 흙을 조금만 파도 석회암 바위가 나오기 때문에 깊이 앞 수가 없었다. 이들의 무덤은 아무런 표시가 없는 ‘평토장한 무덤’(unmarked grave)이었고, 깊이 파서 묻지 않았기 때문에, 때로 뼈들이 밖으로 튀어나오기도 했다. 순례자들의 몸이 무심코 무덤이나 시체에 닿았다가는 레위기적으로 일주일 동안 부정하게 되고, 그런 상태로는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다. 성전 파견단은 순례자들이 다니는 길에서 이러한 평토장한 무덤을 찾아 회칠로 표시하는 일을 했다. 순례자들은 이 표시를 보고, 길을 우회해서 갔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시체 접촉으로 인한 부정을 피할 수 있었다.

 

말씀에서 무덤은 본래 거듭남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반대로 지옥을 의미합니다.

 

※ 천사들은 사람이 지상에서 죽어 장사 되면 반드시 영계에서 깨어나 새로운 생명으로 계속 산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들은 말씀에 나오는 ‘무덤’이나 ‘장사하다, 땅에 묻다’ 등의 표현들이 나오면 그걸 거듭남, 새롭게 일어남, 생명 등으로 읽습니다.

 

그러므로 평토장한 무덤 같다는 것은 겉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속에는 지옥이 들어앉아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회칠한 무덤’(마23:27)에 비유하기도 하셨습니다. 이때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한 율법교사가 불쾌함을 토로합니다.

 

45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이것은 위선자가 진리의 소리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사람이 겉과 속이 다른 모습으로 주님과 이웃을 대할 때, 주님께서는 양심을 통해 그를 타이르십니다. 어떻게 타이르실까요? 교회의 직분은 이웃을 섬기는 자리이지 섬김받는 자리가 아니다. 그러니 평토장한 무덤과 같은 사람이 되지 말라고 타이르십니다. 그때 위선자들은 그것이 진리의 소리인 줄 알면서도 몹시 불편해합니다. 이 율법교사가 지금 그런 상태인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진리인 것을 분명히 알았지만 외면하고 싶은 것이지요. 그것은 그가 주님께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으로 알 수 있는데요, 영적 의미로 ‘선생’은 진리를 의미합니다. 만약 주님의 말씀이 진리가 아니었다면 위선자들은 그냥 무시해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인 줄 알았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진리로 인해 그동안 쌓아 올린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릴 수도 있다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죽일 듯이 미워했습니다. 주님은 율법교사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46절에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46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신앙인들에게 부여된 짐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의 짐입니다. 만약 교회의 성직자들이 교인들을 주님께로 온전히 이끈다면 성도들의 짐은 아주 가볍고 쉬운 짐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짐을 대신 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많은 성직자들이 진리를 왜곡해 가르치고, 그렇게 해서 교인들을 주님으로부터 떼어놓는 일을 합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과 함께 가 아니라 교인들 혼자 짐을 져야 합니다. 그러니 힘들고 어려운 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짐을 교인들에게 지워놓고 정작 자신들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 맞서 싸울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랑 안에 안주합니다. 그것이 지기 어려운 짐을 교인들에게 지우고 자기는 한 손가락도 짐에 대지 않는 성직자들의 모습입니다.

 

교회들은 어떤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했을까요? 그것에 대해 50절과 5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50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51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창세 이후로’는 주님께서 인류에게 최초로 교회를 세워주신 이후부터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말씀에서 비롯한 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선지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선지자가 흘린 피’는 뭘까요?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의 생각을 섞어 말씀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지자가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또 아벨(창4:10-11)과 사가랴(대하24:20-22)가 피 흘려 죽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사랑, 또는 체어리티(charity, 仁愛)를 말살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아벨은 말씀 속에 들어있는 체어리티, 또는 사랑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가해진 이러한 폭력들은 유대교회에서는 모세의 율법보다 장로의 전통을 중시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한 오늘날에는 믿음과 사랑이 분리된 믿음만의 교리, 즉 ‘오직 믿음’의 교리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더럽힌 죄를 타락한 교회와 성직자들이 감당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52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여기서 지식의 열쇠는 말씀의 능력이며, 그러므로 천국을 여는 능력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말씀을 전하는 위치에 있는 위선자들이 말씀을 왜곡해 자기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교인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것을 걱정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을 읽다 보면 주님께서 특히 바리새인들을 심하게 나무라시는 모습이 자주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을 회칠한 무덤 같다 하시고, 독사의 자식이라 비난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서는 선지자를 죽인 자, 말씀의 열쇠를 가지고 자기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른 사람도 막는 자라 하십니다. 참으로 신랄하고 두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교회 안의 위선자들을 특히 꺼리신 이유는, 그들이 교인들의 이성을 마비시킬 뿐 아니라 그들에게서 체어리티의 신앙을 빼앗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믿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만큼 이 위선은 매우 무서운 죄입니다.

 

주님을 죽이고 선지자를 죽인 사람들은 모두 교회 안의 위선자들이었습니다. 그것만 봐도 위선자들이 얼마나 진리를 혐오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진리를 싫어하는 이유는, 진리로 인해 그동안 쌓아놓은 세상 것들, 이를테면 명성이나 평판과 재물 같은 것들을 모두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리를 애써 외면하려 하고, 때로는 주님을 책잡았던 바리새인들처럼 책을 잡아 진리를 말살하려고 합니다.

 

진리를 향하는 길은 참으로 좁고 험한 길입니다. 그러나 가장 밝은 빛 안에서 자신의 위선과 악을 볼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매일같이 선의와 진실을 키울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 겉과 속이 같은 사람 되기를 힘쓰기, 선과 진리 실천함에 있어 잔머리 굴리는 대신 단지 그렇게 하는 것이 옳으니까, 그것이 곧 주님 말씀이니까 실천, 실행에 옮기기, 주님 말씀하신,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의 삶에 힘쓰기 등 솔직담백, 순진무구, 좀 부족하고 모자라서 실수는 하되 악한 사람이 되지는 않는, 그런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계2:9)

 

아멘

 

원본

2020-04-1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7-2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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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7-20(D5)-매일예배(2495, 눅11,37-42),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pdf
0.37MB

https://youtu.be/s95W5lrf6xM

 

 

잔과 대접의 겉’, ‘안에 있는 것’,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의 속뜻

 

 

37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38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39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40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41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42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눅11:37-42)

 

 

사람에게는 내적, 영적인 것(an internal spiritual)과 외적, 자연적인 것(an external natural)이 있습니다. 여기서 이 내적인 것은 천국과, 외적인 것은 세상과 결합되어 있는데요, 그래서 다음과 같은 사실, 곧 사람이 내적인 것으로부터 외적인 걸 통해(from that internal through the external) 하는 그 어떤 일이든 그는 천국으로부터, 즉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through heaven from the Lord)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내적인 것 없이 외적인 걸로만(by the external without the internal) 하는 건 그게 무엇이든 자아로 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뒤따르게 됩니다. (AE.794:3) And as man has an internal spiritual and an external natural, and the internal is conjoined with heaven and the external with the world, it follows that whatever man does from that internal through the external he does from heaven, that is, through heaven from the Lord; but anything that a man does by the external without the internal, this he does from self. (AE.794:3)

 

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계13:5)

 

 

오늘 말씀에서도 주님은 사람을 그릇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릇의 겉보다는 속을 깨끗하게 하라고 우리에게 당부하십니다. 그러면 주님의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 본문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분문 37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37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어느 바리새인이 주님께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자 주님은 그의 청을 받아들여 그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말씀에서 ‘바리새인’은 위선자를 뜻하는데요,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이고, 내적으로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세의 율법이나 규례들은 철저히 지켰지만, 그 속에 담겨있는 영적 의미, 곧 그 정신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말씀에서 ‘바리새인’ 하면 겉으로만 거룩해 보일 뿐 내적으로는 악하고, 심지어 교활하기까지 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개중에는 주님에게 관심을 보이는 바리새인들도 있었는데, 오늘 본문에 주님을 식사에 초대한 바리새인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말씀에서 ‘식사를 한다’는 것은 진리를 배우고, 선을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마시는 것’은 진리를 배우는 걸 의미하고, ‘음식을 먹는 것’은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바리새인이 주님과 함께 식사하기를 원하는 것은 위선자가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배우고, 선을 행하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이 진리를 배우려고만 할 뿐 그대로 사는 데는 그다지 뜻이 없거나 관심이 없는데요, 바로 그런 사람들이 위선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위선자라 할지라도 만일 그가 진리를 배우기 원하면 밀어내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이든 구별하지 않고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바리새인이지만 그의 청을 받아들여 그의 집으로 가신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주님께서는 식사하기 전 손을 씻는 유대의 전통을 지키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38절에

 

38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라고 말합니다. 이 ‘손을 씻는 것’과 관련하여 출애굽기 30장 17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7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8너는 물두멍을 놋으로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만들어 씻게 하되 그것을 회막과 제단 사이에 두고 그 속에 물을 담으라 19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두멍에서 수족을 씻되 20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제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여호와 앞에 화제를 사를 때에도 그리할지니라 21이와 같이 그들이 그 수족을 씻어 죽기를 면할지니 이는 그와 그의 자손이 대대로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출30:17-21)

 

주님께서 제사장들에게 회막에 들어갈 때에 수족을 씻도록 명령하신 까닭은, 손과 발을 씻는 것은 그들에게 있는 악을 씻어내는 것을 뜻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런 뜻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채, 식전에 손 씻는 것을 전통으로 만들어 마치 율법처럼 지켰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위생 때문에라도 손을 씻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즉 물리적으로 손을 씻는 것은 주님에게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주님께 나아올 때 먼저 자신의 악 씻어내기를, 즉 ‘아, 내 안에 악이 있으니 이대로는 주님을 뵈옵지 못하겠다...’ 하며, 먼저 회개의 시간을 갖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말씀에는 주님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손 씻는 문제로 갈등하는 모습이 여러 번 나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교리에는 관심이 없고, 교회의 외관이나 세련된 예배 의식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크고 화려한 교회에 다니는 것을 항상 긍지로 여깁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손을 씻지 않는다고 주님을 이상하게 여기는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바리새인이 이상하게 여기는 것을 아시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39절 말씀입니다.

 

39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주님께서는 바리새인을 음식을 담는 잔과 대접에 비유하시면서 ‘겉은 깨끗이 하나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하십니다.

 

여기서 ‘’과 ‘대접’이 무엇일까요? 잔과 대접은 사람의 겉 사람을 뜻합니다. 겉 사람을 그릇에 비유하신 것은, 속 사람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주님의 진리를 받는 그릇이 겉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릇의 겉만 깨끗하고 속에는 악이 가득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무슨 일을 하더라도 속 사람으로부터 하지 않고, 겉 사람으로부터만 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럴 경우, 겉으로는 선하고 진실한 것처럼 행동하지만 목적이나 의도는 항상 이기적이며 악합니다. 왜냐하면 겉 사람으로부터 하는 행동은 모두 인간의 자아로부터 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우리는 어느 공직자의 수려한 외모와 세련된 언변 뒤에 숨겨진 불순하고 파렴치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그릇의 겉만 깨끗하고 속은 불결한 위선자들입니다.

 

※ 2019년, 20년 상간 온 나라를 뒤흔들었던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41절에서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41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는 것은 이웃을 구제할 때 겉 사람으로만 하면 안 되고, 속 사람과 함께, 즉 속 사람으로부터 받은 걸 가지고 겉 사람을 통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속 사람으로부터 하는 행동이라야 주님으로부터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794번 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내적, 영적인 것(an internal spiritual)과 외적, 자연적인 것(an external natural)이 있습니다. 여기서 이 내적인 것은 천국과, 외적인 것은 세상과 결합되어 있는데요, 그래서 다음과 같은 사실, 곧 사람이 내적인 것으로부터 외적인 걸 통해(from that internal through the external) 하는 그 어떤 일이든 그는 천국으로부터, 즉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through heaven from the Lord)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내적인 것 없이 외적인 걸로만(by the external without the internal) 하는 건 그게 무엇이든 자아로 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뒤따르게 됩니다. (AE.794)

 

여기서 내적, 영적이라고 하는 것은 속 사람을, 외적, 자연적이라는 것은 겉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매일같이 깨끗해지기 위해서는 자아의 생각을 따르면 안 되고,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주님의 생각을 따라야만 합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정말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끝으로 주님은 위선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2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주님 당시 유대의 성직자들은 박하와 운향과 같은 값비싼 향품을 가지고 십일조를 드렸고, 그런 식으로 자신의 경건함을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화(禍)가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또 ‘정의와 하나님의 사랑을 버렸다’고 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들의 십일조가 속 사람으로부터 드리는 것이 아니라 겉 사람으로부터 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드리는 예배는 무엇보다도 속 사람으로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또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내적인 예배와 외적인 예배를 함께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새 교회분들 중에는 내적인 것만 중시하여 간혹 외적인 걸 소홀히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예배와 성찬에 참여하는 것, 각자의 능력에 맞게 십일조를 드리는 것, 이웃을 구제하는 것 등이 모두 외적인 예배입니다. 내적 예배는 외적인 예배를 통해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외적인 예배를 드릴 때는 이기적인 목적을 가지고 드리면 안 되고, 주님과 이웃을 위해, 진리와 선 그 자체를 위해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외적이며, 동시에 내적인 예배입니다. 그와 관련하여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8610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적인 것은 외적인 것과 결합하고 상응을 통해 가장 마지막 최종적인 것과 결합합니다. 그때 첫 번째 진리는 마지막 진리 안에서 힘을 얻는데, 그 이유는 첫 번째 진리가 마지막 진리 안에 있고, 마지막 진리를 통해 실행되기 때문입니다. (AC.8610) For interior things are conjoined with exterior and finally with the last or ultimate by means of correspondences; then the truth which is first has strength in that which is last, because it is in this and acts by means of it. (AC.8610)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출17:12)

 

※ 여기서 ‘모세’는 주님을 표상합니다.

 

여기서 내적인 것, 곧 내적 진리 또는 첫 번째 진리는 주님에게서 직접 나오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오한 진리(the truth Divine)를 뜻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반면에 외적인 진리, 또는 마지막 진리는 글자로 기록된 성경의 말씀입니다. 아무리 심오한 진리라도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이 이해하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어야 진정한 진리이며 능력의 진리입니다. 그 진리가 인간을 거듭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모든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과 함께 있어야 하며, 그래야 완전하고 힘이 있다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 하신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위선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위선자가 어떤 사람입니까? 무슨 일을 하더라도 속 사람으로부터 하지 않고, 겉 사람으로부터만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주님 말씀에 의하면, ‘화 있을진저’, 곧 모든 재앙과 액화가 따를 것이라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겉 사람으로부터 하는 모든 행동에는 언제나 이기적 욕심이 깔려 있기 때문이며, 그래서 지옥을 향한 문, 곧 지옥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오직 겉 사람으로부터만 말하고 행동하는 위선자들은 환난 중에 화를 면할 수가 없습니다.

 

어려울수록 인간의 힘에 의지하지 마시고, 속 사람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주님의 지혜를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시험을 이길 힘을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또한 시험으로 고통받는 모든 분과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정의로우시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으시리니 (사5:16)

 

아멘

 

원본

2020-03-2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7-20(D5)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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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7-18(D3)-매일예배(2494, 눅11,29-36),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의 속뜻.pdf
0.38MB

https://youtu.be/RVBFeMhcl_o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의 속뜻

 

29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30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31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32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33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34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35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36네 온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눅11:29-36)

 

사람이 몸으로 하는 모든 것은 그의 머릿속 마음 상태를 반영한다는 사실, 예를 들어, 마음이 쓰임새의 삶을 사랑하여(in the love of uses) 뭔가를 하고 싶어 하면, 몸은 자기의 모든 지체들, 곧 손, 발, 입 등을 가지고(by means of its members) 결국 그걸 해내고자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이게 과연 그런 것은, 의지와 이해하는 능력은 무슨 중심 원리로서(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in their principles) 머릿속에 있고, 거기서 파생되어 나오는 것들은 몸 안에 있는데요, 이것은 마치 의지는 행위 안에 있고, 사고는 말에 있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즉 그의 행위를 보면 그의 마음을 알 수 있고,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과 같기 때문이지요. (TCR.403:2) Who does not also comprehend that all the works that a man does with his body are done according to the state of his mind in the head; and if the mind is in the love of uses, the body by means of its members accomplishes them? And this is so, because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in their principles are in the head, and in their derivatives in the body, as the will is in deeds, and the thought in speech, (TCR.403:2)

 

 

※ 아래 에피소드는 원본에 나오는 서울 새 교회 에피소드이지만 저 역시 이와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어 그대로 옮깁니다.

 

얼마 전의 일입니다. 어떤 큰 교회에 다니는 부부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분들이 새 교회와 기성교회가 다른 점이 무엇이냐 물어보셨습니다. 그래서 몇 가지 차이점을 말씀드렸지요. 첫째는, 하나님을 믿기만 해서는 구원받을 수 없고, 믿고 행해야 한다 했고, 둘째는,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는 겉뜻으로는 하나님의 아들로 기록되었지만 속뜻으로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신데 다만 우리 눈에 보이게 육을 입으신 하나님이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셋째는,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 즉 기록된 겉 글자의 뜻 안에는 영적 의미, 즉 속뜻이 담겨 있기 때문에,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와 영적 의미, 즉 겉뜻과 속뜻을 함께 알아야 한다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부인 되시는 분이 제 말을 조목조목 비판했습니다. 그분은 본인이 다니는 교회에서 신학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것은 각자의 신앙의 문제이기 때문에, 논쟁을 할 일은 아니라 말씀드리며, 대화를 마친 적이 있습니다.

 

주님 당시에도 주님과 제자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이 유대교회의 교리와는 많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유대교회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장로의 전통이라는 생활 규범을 만들어 그것을 율법보다 더 소중하게 지켰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 그것은 사람의 법이지 하나님의 법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태복음 15장에서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3절) 하시며, 그들을 꾸짖으셨지요. 어느 시대에나 이렇게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라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 라면서 증거를 요구합니다. 그것은 마치 주님에게 당신이 메시아라는 표적이 어디 있느냐? 라고 하면서 표적을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사람의 전통을 지키면서 표적을 요구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9절 말씀입니다.

 

29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주님은 그동안 유대인들에게 수없이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눈먼 자를 보게 하셨고, 귀먹은 자를 듣게 하셨습니다. 중풍 병자를 고치시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님이 메시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새로운 기적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애초에 진리에 뜻이 없는 사람들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악한 세대’라 하시고,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 하신 것입니다. 수많은 기적을 보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표적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것이 없다 하셨을까요?

 

요나는 타락한 도시 니느웨 사람들을 회개시키라는 하나님의 명을 거절하고 도망치다가 결국 니느웨 성으로 돌아가 그곳 사람들을 구한 선지자입니다. 요나가 그렇게 니느웨로 다시 돌아가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고래의 배 속에 가두어 사흘 밤과 낮을 지내게 하십니다. 요나가 고래 배 속에서 머무는 사흘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세상에서 주님이 당하신 지독한 시험을 표상합니다. 주님이 그렇게 혹독한 시험을 견디신 이유는 인류에게 세상의 행복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의 복을 내리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유대인들은 하늘의 복을 원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것이 없다 하시고, 또 30절에서는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주님이 행하신 모든 기적은 세상 영광을 위한 기적이 아니고, 하늘의 영광을 위한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또 31절과 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1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32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솔로몬으로부터 지혜를 얻고자 찾아온 시바의 여왕이나 요나의 예언을 듣고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진리를 믿고 구원을 얻은 이방인들입니다. 왜냐하면 솔로몬 왕이나 요나는 모두 주님을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교회 밖의 이방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방법으로 구원을 얻을까요? 계시록 해설 351번 글 2번 항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천국의 빛은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통해 내려오며, 중심이 되는 빛으로부터 주위의 모든 방향으로 퍼져나간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교회 밖의 이방인들에게까지 이른다.

 

그러니까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거처 내려오는 진리의 빛은 처음에는 교회로 내려오고, 다음에는 교회를 중심으로 그 외연(外延)을 이루는 수많은 종교의 교리 안으로 흘러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 안에 있는 사람이라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참된 진리와 연결이 되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열왕기상 11장에서는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3절)는 식으로 표현합니다. 많은 사람이 이 말씀을 단순히 솔로몬 왕이 타락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이 말씀은 이방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도 자기 종교의 교리 안에 있는 진리를 통해 주님과 결합할 수 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왜냐하면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솔로몬 왕은 주님을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도 이렇게 진리를 사랑하는데 정작 주님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진리를 대적하고 모독한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남방 여왕과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를 정죄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희미한 진리의 빛 안에 있는 이방인들도 구원을 받는데, 가장 밝은 빛 안에 있으면서도 그 빛을 받아들이지 못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들은 왜 진리를 대적하고, 진리의 표적만을 요구했을까요?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만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소망하지 않고, 오직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와 관련하여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403번 글 2번 항에는

 

사람이 몸으로 하는 모든 것은 그의 머릿속 마음 상태를 반영한다는 사실, 예를 들어, 마음이 쓰임새의 삶을 사랑하여 뭔가를 하고 싶어 하면, 몸은 자기의 모든 지체들, 곧 손, 발, 입 등을 가지고 결국 그걸 해내고자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이게 과연 그런 것은, 의지와 이해하는 능력은 무슨 중심 원리로서 머릿속에 있고, 거기서 파생되어 나오는 것들은 몸 안에 있는데요, 이것은 마치 의지는 행위 안에 있고, 사고는 말에 있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즉 그의 행위를 보면 그의 마음을 알 수 있고,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과 같기 때문이지요.

 

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상태에 따라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과 애정이 영향을 받으며, 그것에 따라 말과 행동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34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35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36네 온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34절에서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말씀하신 것은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몸은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을 뜻하고, 눈은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온전하다면 말이나 행실도 바르고 온전할 것이며, 반대로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잘못되면 그가 하는 말이나 행실도 잘못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동안 진리를 제대로 알고 실천했던 사람들은 진리에 대한 이해력, 곧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변하지 않도록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나갔던 귀신이 자기보다 더 나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오는 것처럼 이전보다 영적으로 더 나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마태복음 6장 23절에서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라고도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 당시나 요즈음이나 진리 안에 있다 자부하면서도 정작 참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주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고, 영의 눈이 닫혀있기 때문입니다. 영의 눈이 닫힌 사람은 진리를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진실을 거짓이라 하고, 거짓을 진실이라고 믿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며, 참된 진리를 핍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4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영의 눈이 어두워지면 진실을 왜곡하면서도 잘못인 줄을 모릅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속이면서도 그것이 악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영의 눈이 어두워지면 주변과 사회 전체에 해악을 끼칩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영의 눈이 어두워 주변과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반대로 영의 눈이 밝은 사람은 스스로 진리를 자랑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을 진리로 인도합니다. 주님께서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말씀하신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 진리를 자랑하지 않아도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말이나 행동을 통해 진리가 드러나도록 하십니다. 그 진리를 통해 많은 사람이 참된 진리가 있는 교회로 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일에 참여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에 의해 진리가 ‘등경 위에 올려놓아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말과 행동을 통해 나타나는 선과 진리가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는 힘을 얻기 위해서 항상 주님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는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며, 그래야 언제나 바르고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메시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나의 대적이여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에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미7:8)

 

아멘

 

원본

2020-02-23(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7-18(D3)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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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7-16(D1)-주일예배(2493, 눅11,24-28), '물 없는 곳, 청소되고 수리되었다, 악한 귀신 일곱, 당신을 밴 태, 당신을 먹인 젖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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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2Cjvo55u5Ok

 

 

‘물 없는 곳’,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악한 귀신 일곱’, ‘당신을 밴 태, 당신을 먹인 젖’의 속뜻

 

24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25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26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27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28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눅11:24-28)

 

 

영적 자유(Spiritual freedom)라는 것은 영생을 사랑하는 태도에서 옵니다. 악을 죄로 여겨 그걸 의도하지 않으며, 동시에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이라야만 이 사랑과 그 기쁨을 맛보며 경험하게 됩니다. (DP.73:6) Spiritual freedom is from love of eternal life. Into this love and its enjoyment only he comes who regards evils as sins and therefore does not will them, and who also looks to the Lord. (DP.73:6)

 

 

사람들은 보통 자기한테서 일어나는 일상 모든 일을 자기가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실상은 무슨 일을 하더라도 전적으로 자기와 함께 있는 영들의 영향 아래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 대해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2887번 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람한테는 악한 영들(evil spirits)과 천사들이 늘 함께 와있습니다. 악한 영들을 통해서는 지옥하고, 그리고 천사들을 통해서는 천국하고 커뮤니케이션합니다. 만일 사람한테서 이들 악한 영들과 천사들을 떼어내면(to be taken away), 사람은 순식간에 그 의도하는 능력과 생각하는 능력(willing and thinking)을, 그 결과 생명이라는 것을 잃어버리게(be devoid of)됩니다. (AC.2887) With man there are evil spirits constantly, and also angels; by the spirits he communicates with the hells, and by the angels with the heavens. If these spirits and angels were to be taken away from him, he would in a moment be devoid of willing and thinking, thus of life. (AC.2887)

 

이런 사실은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인류에게 새롭게 오픈하신 영적 실상입니다. 이런 실상을 알고 인류가 더 이상 속지 않기를 원하셨기 때문인데요, 즉 자기 안에서 악과 거짓 관련, 지옥의 기운이 시작될 때, 얼른 ‘이건 내가 하는 게 아니야. 내 안의 악한 영들이 하는 거야!’라고 하며, 거기서 한발 물러나 그런 기운에 발 담그지 않고, 대신 반대로 천사들을 통해 선과 진리 관련, 천국의 인도를 받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아무런 힘이 없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각자의 행위에 따라 사후에 천국도 가고, 지옥도 가는 것일까요? 아무 힘이 없는데도 왜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까요? 그 이유는, 인간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선택의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선택의 자유를 통해 항상 자기와 함께 있는 천사들의 손을 잡았던 사람은, 그래서 그 내면이 천국에 합당하게 준비된 사람은 사후에 천사들과 함께 천국에 들어갑니다. 반대로 천사들의 손을 뿌리치고, 대신 항상 악령의 손을 잡았던 사람은, 그래서 그 내면이 지옥에 어울리게 된 사람은 악한 영들에게 끌려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지옥의 영들은 기를 쓰고 사람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합니다. 그것이 그들의 가장 큰 기쁨이기 때문인데요, 그들은 특히 오늘날은 세상 사랑과 자아 사랑에 푹 빠진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에게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 속삭입니다. 그리고 한술 더 떠 사람의 힘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살 수 없으며, 그러니 계명대로 살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믿는 것이지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고 교묘하게 설득합니다. 그때 세상에 대한 집념이 강한 사람들은 그들의 논리에 쉽게 넘어갑니다. 그리고 체어리티(charity, 仁愛)의 신앙, 곧 사랑 실천을 강조하는 신앙을 ‘행위 신앙’, 행위를 강조하는 신앙이라 하며 거부합니다. 바로 그들이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말 못하게 하는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중에도 주님에 의해 구원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시험을 통해 겸손하여져서 이제는 이 체어리티의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때로는 시험을 허용하십니다. 질병이나 사업의 실패, 각종 사고나 사람들에게 버림받음 같은 시험들을 허용하십니다. 시험을 거치면서 신앙인들은 자기 자신은 실제상황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 곧 평소 입만 살았지 실제상황에서는 악과 거짓을 이길 힘이 전혀 없음을 깨닫습니다. 또 세상 것들은 잠깐 있다 사라지는 뜬구름 같은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그렇게 높았던 마음이 낮아질 때, 이제 그는 주님의 인도를 받아 체어리티의 신앙 가운데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때가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이 주님에 의해 쫓겨나는 때입니다. 왜냐하면 그때 그들은 체어리티의 신앙이 자신의 신앙이라 분명하게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귀신은 그동안 그가 이런 고백을 하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체어리티의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지옥과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체어리티의 교리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유혹을 이겨내야 하기 때문인데요, 그런데 자신의 지성을 믿는 사람, 또는 스스로 의지가 강하다 생각하는 사람은 그 자부심이 잘 없어지질 않습니다. 그럴 경우, 지옥의 영들을 이기기 어렵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진리가 아니라 자꾸 자신의 진리와 선, 곧 자기가 옳다 여기는 것으로 싸우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오랫동안 세상 즐거움에 깊이 빠졌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 역시 예전 버릇을 완전히 버리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싸움이 시작되면 마음 한쪽은 주님의 계명을 따르려 하는데, 다른 한쪽은 자꾸 세상으로 달려갑니다. 그러다 보면 싸움에서 질 때가 많고, 거듭남은 계속 뒷걸음질 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런 상태에 있는 신앙인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이 체어리티의 삶을 살지 못할 때, 나갔던 귀신이 다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문 24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4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더러운 귀신은 신앙인들의 마음속에 숨어 체어리티의 신앙을 반대하던 영입니다. 주님이 그를 쫓아내시자 귀신은 쉴 곳을 찾아 ‘물 없는 곳으로 다녔다’고 합니다. 물 없는 곳은 어떤 곳입니까? 물 없는 곳은 진리는 없고, 거짓과 악만 있는 곳입니다. 물은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지옥의 귀신들, 즉 지옥의 악령들은 바로 그런 곳에 삽니다. 그래서 물 없는 곳을 찾아다녔으나 마땅한 곳을 찾지 못했고, 그래서 이 귀신은 처음 나온 집, 곧 그 사람한테로 다시 돌아가려고 합니다.

 

25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25절에서는 이 귀신이 전에 살았던 그 사람의 마음 상태를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청소되어 아무것도 없는 것은 청결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에서 말한 물이 없는 것과 같은 상태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인들에게 진리는 없고, 악과 거짓만 가득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들이 그런 상태에 있는 이유는, 비록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아직 주님보다는 자신을 신뢰하는 마음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또 세상 정욕을 좇아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 마음속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는 없고, 여전히 자아에서 비롯된 진리와 정욕만 있습니다. 그런 상태가 바로 집이 청소되어 아무것도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귀신은 이제 다른 귀신들과 함께 거기에 들어가 살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그것을 26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6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귀신이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 산다’ 했습니다. 여기서 ‘일곱’은 완전한 상태를 말합니다. 완전한 상태란 어떤 것입니까? 지옥의 영들이 그 사람에게 있는 선과 진리를 모두 파괴해 버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신앙인의 내면을 귀신이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는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회개하고 죄를 짓고, 회개하고 다시 죄짓기를 반복할 때, 점점 더 악한 귀신이 들어와 선과 진리를 남기지 않고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의 삶을 살지 않는 신앙인들은 영적으로 점점 나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드리다 보니 마치 제 얘기를 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고 착잡하네요...

 

27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주님께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고 진리를 전파하실 때,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얼핏 들으면 이 말은 주님을 낳은 마리아를 찬양하는 말 같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우리처럼 하늘과 땅으로부터 찬송의 대상이 되면 안 됩니다. 이 피조세계에서 찬송의 유일한 대상은 오직 주님 한 분뿐이십니다. 주님은 비록 마리아의 몸을 빌어 세상에 오시기는 했지만, 사시는 동안 마리아에게서 받은 인간(人性, human), 곧 유전악의 속성을 가진 인성을 모두 벗으시고, 여호와로부터 받은 신성한 인간(Divine Human), 신적 인성으로 갈아입으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마리아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무리 중의 여인은 왜 그런 말을 했을까요? 체어리티의 삶이 있는 신앙을 찬송하기 위해서입니다. 진리이신 주님은 체어리티의 교리를 통해 각 사람에게 태어나시며, 체어리티의 삶을 통해 성장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잉태하는 태’는 체어리티의 교리를 뜻하고, ‘주님을 먹이는 젖’은 사랑, 또는 체어리티의 삶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인은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라고 큰 소리로 외쳤던 것입니다. 여인의 말을 들으신 주님께서 화답하시듯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8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체어리티의 교리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는 체어리티의 교리를 받아들일 뿐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는 자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주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어 새 교회, 새 예루살렘 교회가 가진 체어리티의 신앙 가운데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체어리티의 교리를 잘 이해한다 하더라도 실제로 지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선은 실행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체어리티의 교리 안에 있으면서도 체어리티의 삶을 살지 못할 때,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말해 줍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주님께서 지옥의 영들을 쫓아내시면 그걸 우리가 다시 불러들이는 그런 악순환이 계속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나갔던 영들이 돌아올 때마다 우리 안에 있는 선과 진리는 조금씩 파괴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모든 진리와 선들을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체어리티의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는 스스로 강한 자라고 생각하는 버릇, 자신을 믿는 버릇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는 천사들의 손을 잡고,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둘째는 악을 죄로 알고 멀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Divine Providence) 73번 글을 보면, ‘영적 자유라는 것은 영생을 사랑하는 태도에서 옵니다. 악을 죄로 여겨 그걸 의도하지 않으며, 동시에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이라야만 이 사랑과 그 기쁨을 맛보며 경험하게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자유의지를 키우지 못하면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더라도 체어리티의 삶을 살기가 어렵습니다. 다니엘 4장 16절은 그런 사람들에 대해 ‘또 그 마음은 변하여 사람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내리라’고 하였습니다. 일곱 때를 지나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일곱 귀신의 지배를 받는 것이고, 우리 안에 선과 진리가 완전히 파괴되고 없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으로 두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신 자유를 가지고 매 순간 나쁜 영들을 거절해야, 즉 내게 와있는 악한 영들이 하는 악하고 거짓된 생각들과 나를 분리해야 합니다. ‘지금 이 악하고 어두운 생각은 내가 하는 게 아니야!’라면서 말이지요. 그 대신, 천사들의 손을 잡고, 즉 주님이 천사들을 통해 주시는 천국의 밝고 환한 생각들을 받아들여 체어리티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14:2-3)

 

아멘

 

원본

2020-02-0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7-1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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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7-13(D5)-매일예배(2492, 눅11,14-23), '말 못하게 하다, 강한 자, 더 강한 자,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의 속뜻'.pdf
0.40MB

https://youtu.be/ojMWf5bNsT4

 

 

 

말 못하게 하다, 강한 자, 더 강한 자,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의 속뜻

 

 

14예수께서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놀랍게 여겼으나 15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16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니 17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18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19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20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1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22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23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눅11:14-23)

 

 

‘육정’(肉情, the will of the flesh)과 ‘사람의 뜻’(the will of man)(요1:13)은 떼어놓는 것(what disjoin)인 반면,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결합하는 것(what conjoin)이며, 그래서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났기 때문에 그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sons of God)이라, 그분의 ‘자손’(seed)이라 하셨는데, 그것은 이들에게 천국을 주시겠다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AC.1608:2) For the will of the flesh and the will of man are what disjoin; but love and the derivative faith are what conjoin; therefore they in whom are love and the derivative faith, are they who are born of God. And because they are born of God, they are called “sons of God,” and are his “seed,” to whom is given the heavenly kingdom. (AC.1608:2)

 

 

고린도후서 11장에서 바울은 4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13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고후11:4, 13)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통해 우리는 바울 시대에도 이단적인 교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또 그들의 말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교리가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바울은 그것을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이며,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주님과 주님의 복음에 대해 잘못 가르치기는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류 교회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입으로는 삼위일체를 말하면서 속으로는 아버지 하나님 따로, 아들 하나님 따로, 성령 하나님 따로 이렇게 세 분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 전부터 계셨던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비록 그럴 의도는 없었을지라도 사실은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이른바 대속과 믿음만의 신앙을 만들어 내어 이 역시 비록 그럴 의도는 없었을지라도 실제로는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시어 죽임당하시고 부활하신 것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가 아닌, 인간을 구속하기 위해서입니다. 대속(代贖)이란 대신하셨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를 통해 주님이 밝히신 바에 따르면, 구원받는 것, 곧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무슨 표를 받거나 라이센스를 취득하는 게 아니라 단지 그 입국 요건만 충족되면 누구에게나 오픈되어 있는 그런 것입니다. 그 입국 요건이란 다름 아닌, 당사자의 속 사람, 곧 영의 상태가 천국 상태이면 되는 것입니다. 영계는 상태와 그 변화의 나라이기 때문인데, 어떤 사람의 사후 영의 상태가 천국에 맞으면 천국으로, 지옥에 맞으면 지옥으로 배정되는, 그런 시스템인 것이지요. 중요한 건, 각 사람의 영, 곧 속 사람의 상태는 전적으로 본인의 선택과 결정의 영역이지 이걸 누가 대신, 곧 주님이라도 대신 해주실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구원 문제에 있어 주님이 해주실 수 있는 범위는 사람의 능력을 벗어나는 배경, 즉 선악 간 본인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自由)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즉 주님 오시기 전까지는 이 세상 삶이 지옥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면 그걸 주님이 오셔서 바로잡아 주셨고, ‘자, 그동안은 태생적으로 어려웠지만 이제는 전적으로 네 결정과 선택에 달렸으니 잘 해보렴. 내가 네 평생 네 곁에서 끝까지 도와주마...’ 하시는 것이지요. 이 정도가 ‘대속’과 ‘구속’에 대한 짤막한 설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말씀드렸습니다.

 

다음은 방금 말씀드린 ‘자유’와 ‘구속’에 대한 보충 설명입니다. 구속이란 인류가 그동안 잃어버렸던 영적 자유를 되찾는 일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 인간의 영적 상태는 애굽의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자유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아를 부정하고 주님을 선택할 자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직접 세상에 오셔서 부활하심으로 해서 지옥을 완전히 이기시고, 지옥에 눌려있던 인간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 자유의 회복이며, 인간의 구속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주어진 선택의 자유를 통해 스스로 하는 것처럼, 즉 자신의 의지로 자아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스스로 하듯, 즉 자기 의지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계시는 주님이 하시는 것을 믿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한복음 15장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열매는 선한 삶의 행위를 뜻합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께서 복음서 전체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이 주님이 가르치시지 않은 진리, 즉 ‘대속’의 복음과 ‘오직 믿음’의 교리를 전하고, 또 그렇게 믿는 이유가 뭘까요? 그들의 내면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인 체어리티(charity, 仁愛, 이웃 사랑)의 신앙을 가로막는 지옥의 영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옥의 영들은 사람들의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을 통해 우리 마음속으로 흘러 들어와 우리의 생각과 의지를 마음대로 지배합니다. 그러므로 자아와 세상에 대한 입장과 주관, 집착과 신념이 강한 사람일수록 체어리티의 신앙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그런 상태에 있는 신앙인들을 구원하신다는 내용입니다. 본문 14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14예수께서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놀랍게 여겼으나

 

주님이 말을 못 하는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셨다고 합니다. ‘말을 못 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주님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체어리티의 신앙이 참된 신앙임을 인정 못 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진리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는 까닭은, 그동안 그의 안에 있는 지옥의 영들이 진리를 방해했기 때문인데, 만약 그가 주님 앞에 진심으로 겸손해진다면, 그리고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주님은 그에게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 주십니다. 그리고 그때 그는 아버지는 사랑 자체이신 주님이시고, 아들은 그 사랑으로부터 빛나는 진리시라는 것과,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이 둘이 아니라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뿐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도 인정하게 됩니다. 그것이 말 못하게 하는 귀신에게서 풀려나 비로소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을 한다는 것’은 주님이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체어리티를 동반한 신앙이 온전한 신앙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당당하게 주님에 대해, 그리고 체어리티의 신앙에 대해 고백할 때, 잘못된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체어리티의 신앙을 이단 신앙이라고 비난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신앙이라는 근거가 무엇이냐 증거를 요구합니다. 그들의 그런 모습을 15절과 16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5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16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니

 

주님이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냈을 때, 주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알세불이란 ‘높은 거처의 주인’이란 뜻으로 자세한 건 인터넷에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인가 하면, 누군가 체어리티의 신앙을 고백할 때, 그것은 지옥의 바알세불로부터 오는 신앙, 즉 이단 신앙이라고 공격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주님을 시험하여 하늘의 표적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늘의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체어리티의 신앙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신앙이라는 근거를 대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늘의 표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마태복음 12장에서

 

39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속에 있으리라 (마12:39-40)

 

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그들에게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요나가 사흘 밤낮을 물고기 배 속에 있는 것은, 주님이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해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주님보다 자신의 자아를 더 믿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아무리 큰 기적을 보여 주시더라도 체어리티의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기적을 보여 주시지 않고,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 하신 것입니다. 요나가 사흘 밤낮을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은 주님이 모진 시험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을 표상하는데요, 이것을 기억하고, 우리도 체어리티의 신앙을 가지고 지옥의 시험을 견디고 이겨내야 합니다. 그때 그런 우리의 신앙이 하늘로부터 오는 신앙이며, 구원 신앙이라는 것이 저절로 증명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18절에서 또 말씀하십니다.

 

18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까닭은, 체어리티의 신앙은 바알세불의 신앙이 아니라 지옥의 바알세불과 맞서 싸우는 신앙임을 분명히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바알세불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은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체어리티의 신앙을 공격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바알세불의 신앙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아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21절과 2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1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22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이 말씀에서는 인간의 자아를 내려놓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해 말합니다. 여기서 ‘강한 자’는 바로 인간의 자아를 뜻합니다. 그리고 ‘무장’은 자아에서 나오는 선과 진리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강한 자가 무장하고 자기 집을 지킨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진리와 선을 가지고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 믿는 것입니다. 가끔 자신의 판단력과 의지만으로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으며, 심지어 영적으로 거듭날 수 있다 믿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나오는 선은 겉으로만 선하게 보일 뿐 본질에 있어서는 악하고 거짓된 것이며, 그렇기에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22절에서는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킨다’고 하는 것입니다.

 

더 강한 자’는 지옥의 영들을 뜻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도움 없이 자기 자신을 지키려고 할 때, 지옥의 영들이 와서 우리를 꼼짝 못 하게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에게서 나오는 선이나 진리에는 아무런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도움 없이 인간 혼자서는 어떻게 해도 지옥의 영을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지옥의 영들에 의해 우리가 가지고 있던 선과 진리마저 모두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그가 믿던 무장과 재물을 모두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3절에서 주님께서는

 

23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즉 ‘나와 함께해야 한다’ 하시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를 반대하는 자’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또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가 된다’ 하셨습니다. 여기서 ‘헤치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라는 뜻입니다. 신앙인들은 자기 자신을 믿지 말고 주님만 믿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자기 혼자 하려고 하면 안 되고, 반드시 주님과 함께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안에 있는 귀신을 쫓아낼 수 있고,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견실하게 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주님과 함께하지 않고 혼자 하려고 하는 걸까요?

 

주님과 함께하는 길은 나를 버리는 길이며, 나를 희생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지름길을 두고 멀리 돌아가게 하시더라도 순종하며 따라야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길을 자꾸 멀리하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하는 길이야말로 의로운 길이고, 구원의 길, 진정한 지름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그 길로 가야 합니다.

 

주님은 또 당신과 함께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모으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과 화합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셋이 아니라 한 분 주님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와 신앙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주님과 함께하지 않는 사람은 ‘모든 것을 흩어버리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파당을 지어 사람들을 흩어지게 합니다. 한 분 주님을 세 하나님으로 나눕니다. 신앙에서 체어리티를 분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주님과 함께해야 하고, 모든 것을 모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고, 흔들림 없이 체어리티의 신앙을 고백하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주님의 그러하신 은혜가 오늘 이 메시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사35:6)

 

아멘

 

 

원본

2020-01-26(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7-13(D5)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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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7-11(D3)-매일예배(2491, 눅11,5-13), '구하는 자에게 성령, 곧 거룩한 진리와 생명을 주시는 주님'.pdf
0.33MB

https://youtu.be/0kUthMEABng

 

 

구하는 자에게 성령, 곧 거룩한 진리와 생명을 주시는 주님

 

 

5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6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9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11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알을 달라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눅11:5-13)

 

 

성령을 주시는 것은 신성한 진리로 깨달음을 주시는 것이며, 그것으로부터 생명을 주시는 것을 뜻한다. 그 생명은 총명과 지혜의 생명이다. (AC.9818:24, 출28:3 주석 중) In Luke: If ye, being evil, know how to give good things to your children; how much more shall the Father who is in heaven give the Holy Spirit to them that ask him? (Luke 11:13); “to give the Holy Spirit” denotes to enlighten with Divine truth, and to endow with the life thence derived, which is the life of intelligence and wisdom. (AC.9818:24)

 

 

사람이 진리를 배우는 방법은 보통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성으로 진리를 추론(推論), 경험의 지식을 통해 진실을 검증하는 방법이고요, 다른 하나는 추론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지각(知覺)하는 방법입니다. 전자의 경우는 책을 통해 진리를 배울 때의 방법입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주님으로부터 진리의 영감을 받아 깨달음을 얻을 때의 방법입니다. 그때는 마치 전등에 불이 켜지듯 불시에 진리를 깨닫습니다. 그것을 논어에서는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하는 기쁨, 즉 ‘멀리 있는 친구가 불현듯이 찾아오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역시 친구가 찾아오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본문 5, 6절입니다.

 

5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6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우리가 여행을 할 때 어떻게 합니까? 일정을 짜고 그에 따라 예산을 세우고 필요한 물품들을 배정합니다. 마찬가지로 거듭남의 여정에서도 선과 진리 같은 영적 자산들을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잘 배분해 사용합니다. 그런데 거듭남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 가끔 선과 진리의 균형이 깨질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선은 많은데 진리가 부족하거나, 진리는 많은데 선이 부족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여행하는 친구가 찾아와 먹을 것을 요구하는 것은 후자의 경우를 나타냅니다. 즉 진리는 있는데 선이 없는 상태입니다. 자신에게 진리만 있고 선이 없다고 느껴질 때는 언제입니까? 이웃의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이 보일 때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알면서도 진정한 회개가 어려울 때입니다. 그때 우리는 자기 안에 선이나 사랑이 없음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럴 때는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 저에게 선이 없으니 선을 주십시오’ 이렇게 간절히 선을 구하는데요,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밤중에 친구를 찾아가 떡을 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은 선이 없는 때를, 그리고 ‘’은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선이 없는 사람이 주님 앞에 나아가 선을 구할 때 주님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실까요? 7, 8절입니다.

 

7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진리만 있고 선이 없을 때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연결하는 내면의 문이 닫힙니다. 그래서 속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진리들이 겉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올 수 없고, 그러므로 거듭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문이 닫혀있는 것이며, 주님으로부터 떡을 받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고 했습니다. ‘침실’은 속 사람을 나타내고, ‘아이들’은 속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진리들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주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향해 마음의 문을 닫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주님으로부터 선을 얻을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그가...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하십니다.

 

여기서 주님의 친구는 진리 안에 있는 사람, 즉 진리를 이해하고 믿는 우리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선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진리를 믿기는 하는데 주님으로부터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아로부터 믿기 때문입니다. 자아로부터 주님을 믿는 사람은 진리를 믿으면서도 주님의 나라에는 뜻이 없고, 세상의 권세와 부귀에만 뜻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믿음으로는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없고, 주님으로부터 선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친구에게는 주지 아니할지라도 간청하는 사람에게 요구대로 선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9, 10절에서는,

 

9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주님께 ‘구하는 자, 찾는 자, 문을 두드리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무조건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 저에게 사랑이 없으니 사랑을 주십시오’하는 사람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아에서 나오는 믿음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믿음으로 선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믿음 가운데 있는 사람에 대해 ‘계시록 해설’ 815번 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은 주님의 나라와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은 어떤 것을 구한다면 그의 믿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믿음이 아니다. (AE.815)

 

주님은 우리가 세상 사는 동안 무엇이 필요한지를 잘 아십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것을 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필요한 만큼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구해야 할 것은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의입니다. 그것을 구할 때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믿음 안에 있는 것이고, 주님 앞에 간청하는 자, 문을 두드리는 자가 됩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믿음 안에 있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계시록 해설’ 815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당신으로부터 오는 믿음을 산을 바다에 던지는 능력에 비유하셨다. 왜냐하면 산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을 뜻하고, 바다는 지옥을 뜻하기 때문이다. (AE.815)

 

주님으로부터 오는 믿음이라야 주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의 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주님으로부터 신성한 생명이 우리에게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11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알을 달라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천국의 비밀’ 9818번 글에서는 ‘성령을 주시는 것은 신성한 진리로 깨달음을 주시는 것이며, 그것으로부터 생명을 주시는 것을 뜻한다. 그 생명은 총명과 지혜의 생명이다. (AC.9818:24)’라며, 눅11:13 말씀을 풀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주님께 구하는 모든 기도의 목적은 궁극적으로는 주님의 성령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성령은 모든 어둠을 흩어버리는 깨달음의 빛이며 지혜의 영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종류의 악과 거짓을 몰아내는 신성한 생명입니다. 그 생명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 생명으로 인하여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도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 생명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거룩한 것을 원하게 하시고 구하게 하시며 그것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성령의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 축원합니다.

 

 

2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22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마21:21-22)

 

아멘

 

원본

2020-01-1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7-11(D3)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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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7-09(D1)-주일예배(2490, 눅11,1-4), '주기도문의 속뜻'.pdf
0.37MB

https://youtu.be/AnACqmb8kus

 

 

주기도문의 속뜻

 

1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2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3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4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눅11:1-4)

 

 

천사들의 말이,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God the Father)을 생각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는 보이지 않기(invisible) 때문이다. 우리는 신적 인성(Divine Human) 안에 계신 그분을 생각한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그분이 보이시기(visible) 때문이다. 신적 인성 안에 계시는 그분을 당신은 그리스도(Christ)라 하고, 우리는 주님(the Lord)이라고 한다. (AR.839.6) we do not then think of God the Father, because he is invisible; but we think of him in his Divine human, because in this he is visible; and in this he is called by you Christ, but by us the Lord; (AR.839.6)

 

 

오늘은 주기도문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루에도 여러 번 기도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한 번, 취침 전에 또 한 번, 그리고 식사 때마다 등 최소한 이렇게 여러 번 기도합니다. 그러다 보면 가끔은 형식적인 기도가 될 때도 있지요. 그러나 가정에 우환이 생겼거나 자녀들이 시험을 볼 때, 또는 직장 승진심사가 있거나 할 때는 마음을 모아 정성껏 기도합니다. 아마 거기에 인생이 달렸다, 모든 게 걸렸다 생각하기 때문이겠죠. ‘천국의 비밀’ 8179번 글에는 ‘기도에 너무 의존하지 말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가 꼭 이루어질 것이라 기대하지는 말라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기도가 주님의 의도와 다르면 주님은 그 기도를 듣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자기 욕심과 욕정으로 인한 시험 가운데 있는 사람이 정작 회개는 안 하고, ‘주님! 이 시험의 고통에서 나를 구하소서’ 한다면 주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시험의 목적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 시험이 중단되면 그 사람은 영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놓치게 되고,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되면 그는 결국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험의 목적이 온전히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시험이 시작되어 끝날 때까지 전 과정을 사람이 스스로 하는 것처럼, 즉 자기 힘으로 견디고 이겨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내와 자기와의 싸움이 전제되지 않은 기도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 자신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주님께서 기도하신 것처럼 어떤 경우든 ‘하나님 아버지, 저희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기도해야 합니까? 이와 관련, ‘천국의 비밀’ 2535번 글은 ‘기도는 주님과 대화하는 것이며, 기도하는 내용을 내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기도하면서 자기가 기도하는 것을 내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좀 더 주님 뜻에 가까운 기도를 할 수 있을 것이며, 그래서 오늘은 주기도문의 의미, 그 속뜻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본문 1절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1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주님의 제자들이 주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합니다. 세례요한은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요한’의 영적인 뜻은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letter sense)를 나타냅니다. 세례요한이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나타내는 이유는, 처음 교회 나오는 사람들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먼저 배우고, 그것을 통해 주님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의 문자적 의미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이며, 곧 세례자 요한(John the Baptist)입니다. 요한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기도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통해 배우는 기도를 말합니다.

 

말씀에는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6장에서 주님은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6) 하시고, 또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하십니다. 이러한 말씀 안에는 모두 내적인 의미(internal sense)가 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의미를 알지 못하면 온전한 기도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문자의 뜻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요한의 제자들입니다. 반면에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주님의 제자들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가르치는 기도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그 내적 의미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르침을 구하는 상대인 주님은 문자적인 의미와 내적 의미가 함께 있는 말씀(The Word)이시며, 말씀 그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주님에 대해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요1:27)고 말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청하자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주님은 먼저 ‘아버지여’로 시작하십니다. 기도를 하려면 당연히 그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 대상은 인간을 창조하신 영원한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버지라 부를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구약의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오늘날 기독교인들조차도 그것을 분명히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구약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하나뿐인 아들이라고 믿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을 따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분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며, 그러므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의 진리에 위배되는 일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믿어야 하는 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생물학적인 부자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두 가지 본질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즉 아버지는 사랑 자체이시고, 존재 자체이시며, 신성 자체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뜻하고, 아들은 사랑의 열기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빛이시고, 존재의 드러남이시며, 신성에서 비롯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 말씀하시고, 또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요17:21), 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14:9)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버지라고 불러야 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이름을 부를 때는 그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내면의 모습(quality)을 함께 떠올리며 부릅니다. 그것처럼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주님의 겉모습인 인성과 그 내면에 있는 신성을 함께 부르는 것입니다. 내면에 신성(神性)을 담고 있는 주님의 인성(人性)을 우리는 신적 인성(Divine Human)이라고 합니다. 즉 거룩한 인간이라는 뜻이지요. 그러므로 주님의 이름은 바로 신적 인성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신성과 함께 인성을 가지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피조물의 입장에서는 주님의 신성은 볼 수도 없고, 인식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볼 수도 없고 인식할 수도 없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사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성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세상에 오실 때 입으셨던 그 인성은 아직은 거룩한 인성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인성 안에는 마리아로부터 받은 유전적 악이 그대로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모진 시험을 통해 마리아로부터 받은 인성을 벗으시고 여호와로부터 받은 새로운 인성으로 갈아입으셔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인간이 거듭나는 과정에서 타고난 자아를 벗고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자아를 받는 것과 유사한 일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마리아의 인성을 벗으시고 여호와로부터 새로운 인성을 입으셨을 때, 비로소 주님의 인성은 당신 안의 신성과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의 신적 인성을 우리는 거룩하게 되신 주님, 또는 영화롭게 되신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처럼 주님이 우리 마음에 처음 오실 때는 완전한 주님이 아니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처음 진리를 받아들일 때는 완전한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진리는 개인의 자아를 통과하는 순간 조금씩 왜곡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빛이 물을 통과할 때 굴절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왜곡된 진리는 사람이 영적으로 거듭남에 따라 점차 완전한 진리로 변합니다.

 

그와 관련해 ‘계시록의 속뜻’ 935번 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님은 사람에게 있는 진리의 질(質, quality)에 따라 그에게 인애(仁愛, charity)와 선을 만들어 주신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개인에게 있는 진리의 특성에 따라 인애와 선이 점점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각 사람 안에서 진리와 선이 균형 있게 성장하고 서로 결합하는 것, 이것이 진리가 완전해지는 것이고 우리 안에서 신적 인성이신 주님이 거룩하게 되시는 것입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는 그런 뜻입니다. 왜냐하면 진리와 결합한 선이 바로 신적 인성이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렇게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나라가 임하시오며’입니다. 신앙인들이 영적으로 거듭날수록 우리 마음은 점점 천국으로 변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나라가 각 사람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주님의 나라가 임하시기를 기도하여야 합니다.

 

3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네 번째는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양식은 육신의 양식이 아닙니다. 영혼의 양식인 선과 진리이며 사랑과 지혜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고, 거듭날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와 선을 지나치게 욕심(?)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말씀을 공부하면서 가끔 드는 생각은, 성경 전체의 내적, 외적 의미를 체계적으로 정리,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말씀을 읽을 때마다 구약과 신약의 수많은 말씀이 서로 연결되면서 진리의 깨달음이 폭죽처럼 터질 것입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16장에는 ‘일용할 양식을 매일 거둘 것이며 아침까지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아침까지 만나를 두는 것’은 진리와 선을 주님이 주시는 대로 받지 않고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만나에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 먹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진리의 세계는 무한해서 인간의 작은 머리로는 담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그때그때 필요한 진리들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항상 주님께 마음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그것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마음입니다.

 

4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다섯 번째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는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자가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옥에 가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때 주인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크게 화를 내며,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옥졸들에게 넘겼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불쌍히 여기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까맣게 잊고, 이웃에게 모질게 대할 때가 참 많습니다. 앞에서 인용한 구절을 보면,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은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한 매우 중요한 요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기 위해 늘 노력해야 하고, 그것이 잘 안되면 주님 앞에 용서의 능력을 구하셔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왜냐하면 그러지 않으면 주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입니다. 시험을 통해 우리는 자기 안에 있는 악을 볼 수 있고,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시험에 들지 않기를 구하라’ 하십니다. 시험이 없으면 영적으로 변화될 수가 없는데 왜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실까요? 시험이 없는 상태, 즉 완전히 거듭난 후의 상태를 목표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라는 이 기도는 완전한 거듭남, 또는 영적 안식의 상태를 소망하는 기도이며, 동시에 그것을 위해 당면한 시험들을 견디고 이겨나가겠다고 하는 결단의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동안 주기도문을 매일 외우면서도 우리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내적인 의미를 통해 이 간결하고 아름다운 기도 안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기도의 시작은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 그것은 신적 인성이신 주님이 영화롭게 되신 것처럼 우리 안에 있는 진리 역시 완전하고 순수한 진리가 되기를 염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기도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입니다. 이것은 목적을 위한 수단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거듭나기 위해서는 주님으로부터 진리와 선을 받아야 하고요, 또한 죄 사함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죄 사함을 받으려면 먼저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이렇게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입니다. 그것은 시험이 없는 상태 즉 완전한 거듭남을 소망하면서 당면한 시험들을 이겨나가겠다는 결단의 기도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 안에는 구원의 목적과 수단에 대한 염원 및 인간의 결단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기도 안에 있는 모든 구절이 다 소중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소서’라는 말씀이 저의 마음을 때렸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 앞에 큰 죄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작은 허물을 용서하지 않은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이웃의 잘못을 진심으로 용서할 때, 막혔던 혈관이 뻥 뚫리는 것과 같은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용서와 화해와 치유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 축원합니다.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 (마6:33-34)

 

아멘

 

 

 

 

원본

2019-12-0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7-09(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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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06(D5)-매일예배(2489, 눅8,22-25), '호수를 건너가는 동안 예수께서 잠이 드셨다는 말씀의 속뜻'.pdf
0.40MB

https://youtu.be/EGd-vV7cIac

 

 

 

호수를 건너가는 동안 예수께서 잠이 드셨다는 말씀의 속뜻

 

 

22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23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24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25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눅8:22-25)

 

 

어느 날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게 되셨습니다. 배가 진행되는 동안 주님이 잠깐 잠이 드셨는데 갑자기 큰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파도가 배를 덮쳤습니다. 그리고 금방 배에 물이 가득 찼습니다. 제자들은 이대로 그냥 배가 가라앉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잔뜩 겁을 먹고, 잠이 드신 주님을 깨웠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이렇게 외치듯 주님을 깨웠습니다. 제자들은 그동안 주님이 기적을 행하시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얼마나 큰 능력을 갖고 계신 분이신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정작 위기가 닥쳤을 때, 주님에 대한 믿음이 잠깐 사라졌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그들이 마치 바람 앞에 등불처럼 떨었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주님에 대한 믿음이 견고하게 있었다면 아마 그렇게까지 두려워하며 떨지는 않았을 겁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깨우는 소리를 들으시고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는 바람과 파도를, 물결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순식간에 바다가 조용, 잔잔해졌습니다. 오늘 말씀의 줄거리가 여기까지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주님의 제자들의 모습이나 우리 자신의 모습이 어쩜 이리도 흡사할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을 믿는다 하지만 어떤 위기에 처하면 언제나 두려움을 느끼고 마음이 초조해집니다. 왜 우리는 주님을 이렇게 온전히 믿을 수 없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요. 오늘은 그러한 문제들을 본문의 영적인 의미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22절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22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본문에는 ‘하루는’이라고 표현되어 있는데요, 영어 성경에는 ‘어느 날’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말씀에서 ‘시간’은 어떤 뜻입니까? 각자의 영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어느 날이라고 하는 것은 신앙인 각자가 도달해 있는 어떤 영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 상태는 물론 사람마다 같지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상태에 있고, 어떤 사람은 저런 상태에 있고... 다 다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이제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는데요, 여기서 ‘’는 뭘까요? 배는 교리를 나타냅니다. 배가 없으면 바다를 건널 수 없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교회의 교리를 모르면 거듭남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교리를 모르면 어떻게 행동하는 게 옳은지 그런 걸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배는 교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호수’는 물이 많기 때문에, ‘바다’와 같은 의미입니다. 즉 지옥을 의미합니다. 보통 ‘’은 진리를 의미하지요. 세례의 관점에서는. 그러나 반대로는 거짓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호수는 물이 많은 곳입니다. 그래서 긍정적인 의미로는 지식을, 바다와 마찬가지로 지식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진리의 지식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거짓이 많은 곳, 그러니까 지옥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이제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가는 것은 신앙인들이 지옥의 항해를 뚫고, 교리에 따라 거듭남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들이 교리에 따라 거듭남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은, 이들이 그냥 배만 타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배 안에 주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교리 가운데 주님이 계신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주님이 계실 때, 교리는 살아있는 교리가 됩니다. 교리나 진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그들이 교리를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교리에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교리가 살아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배를 타고 가는 동안 큰바람이 불더니 파도가 일어 배를 덮쳤습니다. 그 광경을 23절에서는,

 

23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잠이 드셨다고 합니다. 시편 121편 4절에 보면,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이런 말씀이 있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이 잠이 드셨답니다. 주님께서 잠이 드셨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는 문자 그대로 주님이 잠이 드셨다는 것이 아니구요, 신앙인들이 주님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을 믿는 상태를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자기 자신의 이익을 먼저 챙기고, 세상의 것들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때 주님은 우리의 마음의 중심에서 바깥으로 밀려납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 중심에는 이기심과 세속적 욕망들이 자리를 잡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며, 말씀에서는 이런 상태를 주님이 주무시는 것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만약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다면, 시시때때로 지옥으로부터 밀려들어 오는 모든 악과 거짓의 물결을 우리가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계셔야만 주님이 그것을 막아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는 것은 지옥으로부터 밀려들어 오는 수많은 악과 거짓들을 의미합니다. 그 악과 거짓들이란, 지옥이 인간의 머릿속으로 불어넣는 수많은 생각과 추측들입니다. 그 생각과 추측들이란 어떤 것이냐 하면, 모든 실제 상황을 부풀리거나 그 실제 상황을 왜곡하는 겁니다. 지옥은 우리에게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지를 않습니다. 그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든 왜곡해서 오해하고 의심하게 만듭니다. 그런 경험은 너무나도 많으실 겁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우리가 매일 수많은 일을 겪고, 매일 수많은 사람을 만나지 않습니까? 사람을 만나거나 일을 겪을 때, 우리가 느끼는 느낌이 있는데요, 주님이 함께 계실 때는 언제나 긍정적인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계시지 않을 때는 지옥이 그 많은 정보를 왜곡해서 우리한테 전달합니다. 저 사람이 나한테 이렇게 했는데 그것은 필시 저 사람 마음속에 이런 것이 있기 때문일꺼야... 라고 그 사람의 진심을 의심하거나, 저 사람이 나한테 잘해주어도 저거는 뭐 어떤 다른, 또 다른 무슨 좋지 않은 의도가 있을꺼야 이렇게 추측하게 만든다거나 등등 이런 것들이 다 지옥이 우리에게 불어넣는 왜곡된 정보들입니다. 그것은 모두 거짓입니다. 그러므로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한 것’은 영적 시험을 의미합니다. 24절에는, 시험 가운데서 신앙인들이 극도의 불안을 느끼면서 주님을 찾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24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우리가 시험이 올 때, 어떤 느낌입니까? 싸움 아닙니까? 마치 외나무다리에서 힘센 사람과 싸우는 것 같은 느낌을 느낍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때는 주님께서 앞장서셔서 그 싸움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승리하게 하시는데, 주님께서 계시지 않을 때는,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을 때,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주님을 믿지 않고 세상을 믿거나 자기 자신의 지혜를 믿을 때는 우리는 혼자 싸워야 하며, 그때 그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제롭니다. 그래서 거짓의 유혹에 넘어갈 때, 신앙인들은 극도의 불안을 느낍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제자들이 바로 주님을 깨웠다 기록하고 있는데, 실제의 삶에서는 시험이 시작되더라도 한동안은 주님을 찾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대로 이렇게도 해보려고 하고, 저렇게도 해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지옥은 점점 더 우리의 목을 죕니다. 그렇게 해서 시험은 점점 더 깊어집니다. 시험이 깊어질 때는 이웃을 사랑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웃을 배려하기도 어렵고, 이웃에게 너그럽게 대하기도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요? 첫째는, 자기 자신을 돌보는 것조차 힘에 부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지옥에서 오는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오해와 불신을 조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험 중에는, 시험을 받을 때는 큰 실수를 하기도 하고, 작은 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어떨 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이웃에게 주기도 하지요. 그런 식으로 시험의 절정에 도달합니다. 그때 비로소 신앙인들은 ‘주여, 제가 죽겠나이다. 제 힘으로는 제가 아무것도 할 수 없나이다!’ 이렇게 외치면서 주님의 손을 붙잡습니다. 그것이 잠들어 계신 주님을 깨우는 순간입니다. 그때 주님은 깨셔서 미칠 듯이 부는 바람과 파도를 꾸짖으십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 마음속에서 부글거리던 모든 의심과 오해, 분노와 적개심, 그리고 불순한 욕망이 모두 사라져버립니다. 한순간에 사라져버립니다. 마치 바람과 파도가 딱 멎는 것 같이, 바다가 잔잔해지는 것 같이 그렇게 사라져버립니다. 그렇게 시험은 끝이 납니다. 주님께서 바람과 파도를 꾸짖으시기 전에는 시험은 절대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시험은 오직 주님을 의지할 때만 이길 수가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참된 기독교’ 123번 글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옥은 마치 괴물이나 사자와 같아서 주님이 족쇄를 채우시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 혼자서는 절대로 감당할 수 없다 (TCR.123)

 

유튜브 영상 가운데는 사람이 호랑이와 싸우는 장면을 보여주는 그런 영상이 있습니다. 그 호랑이가 바로 지옥의 모습입니다. 먹이를 쫓는 사자나 호랑이가 얼마나 집요하게 덤빕니까? 지옥이 바로 그러한 모습으로 우리한테 달려드는데요, 그래서 베드로도 그의 편지에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적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혼자의 힘으로는 절대로 지옥의 유혹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바람이 멈췄을 때, 주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25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이렇게 이르셨을 때, 주님의 제자들의 반응은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였습니다.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겼다고 했습니다. ‘두려워하고’는 주님을 아직 잘 믿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두려움’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는, 나의 뜻대로 되지 않을까 봐 걱정하는 마음입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설사 나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주님의 섭리, 주님께서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신다는, 궁극적으로는 주님께서 바른길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지금 내가 원하는 길로 가지 않는다고 해서, 지금 이 상황이 내가 원하는 상황이 아니라고 해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제자들은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서로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바람을 잠재우는 기적을 행하시는 것은 그 기적을 통해서 주님의 능력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무슨 영광을 받으시고자 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기적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섭리가 아주 작은 것 하나하나에도 다 들어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같은 인간과 다르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적은 신성한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그런 기적하고는 전혀 다른, 차원이 다른 기적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시험을 이길 수 없고, 오직 주님의 능력으로만 시험을 이길 수 있으며,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주님은 바람을 잠재우는 기적을 통해 보여주셨기 때문에, 주님은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주님은 지옥이라는 데가 어떤 곳, 어떤 상태임을, 그 속성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그동안, 오랫동안 가까이서 주님을 모셔 왔기 때문에, 주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많이 봤습니다.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하시고요, 중풍 들린 자를 걷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런 기적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수천 명을 먹이는 현장에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직 주님에 대해 잘 모르고 있습니다. 주님에 대해 모른다는 것은 그들이 주님의 신성을 아직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이 메시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은 인정하지만, 그러나 주님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실 주님을 가까이서 아는, 잘 아는, 주님을 잘 아는 사람일수록 주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렵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고향 사람들이 주님을, 주님이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주님의 고향 사람들이 보여준 반응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고향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그것을 마태복음 13장 54절 이하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54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55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56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 57예수를 배척한지라 (마13:54-57)

 

주님은 그들에게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의 진리가 정작 교회로부터는 인정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주님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교회는 주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과 사랑을 분리,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사랑을 따로 떼어놓는 사람들은 주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천국의 비밀’ 3868번 글을 보면, ‘믿음은 이웃 사랑에서 비롯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사랑의 형상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은 일종의 의지와 같은 것이구요,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겉으로 잘 드러나지도 않습니다. 이런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뭡니까? 진리입니다. 우리가 믿는 진립니다.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사랑의 형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진리를 많이 알아도,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믿음은 살아있는 믿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런 믿음 가운데는 주님이 계시지 않구요, 그런 믿음에는 능력이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세상의 바람과 파도가 높을수록 이웃을 자기 자신보다도 더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서 그 바람과 파도를 멈추게 하실 수가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한다고 해서, 이웃을 자신보다 더 사랑한다고 하니까 이것을 오해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야 이웃을 사랑할 수가 있지 않느냐? 맞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이웃을 자신보다 더 사랑한다는 것은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막 팽개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올 때, 화장도 안 하고, 머리도 아무렇게나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식사도 아무렇게나 하고, 운동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나 자신만을 위해서 그것을 하지는 말라는 겁니다. 주님과 이웃과 교회를 위해 나를 돌보고 바로 세우는 것은, 그러므로 언제나 옳은 일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우리 삶의 곳곳에 주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요8:31)

 

아멘

 

원본

2018-11-1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7-06(D5)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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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04(D3)-매일예배(2488, 눅10,38-42), '마르다에게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하신 말씀의 속뜻'.pdf
0.32MB

https://youtu.be/KmAyCZKouuU

 

 

마르다에게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하신 말씀의 속뜻

 

 

38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41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눅10:38-42)

 

 

교회 교세가 너무도 미약, 어떻게 하면 교회를 성장시키고, 부흥시킬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마음이 복잡할 때는 계시록 12장, 아들을 낳는 여인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위안을 얻곤 합니다. 계시록 12장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5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6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계12:5-6)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아들을 낳은 여자’는 새 교회, 곧 주님 오셔서 새롭게 시작하실 새 예루살렘 교회, 인류의 다섯 번째가 될, 그리고 더 이상은 없는 마지막 영원한 교회를 뜻합니다. 그리고 ‘아들’은 그 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이 새 교회는 기존 교회의 마지막 때 세워집니다. 즉 기존의 교회들이 믿음과 삶의 행위를 분리시켜서 완전히 타락했을 때, 주님께서는 그 교회들의 문을 닫으시고, 새 교회를 세우십니다. 늘 그러셨습니다. 인류의 교회사를 보면, 지금이 네 번째 교회 시대인데, 앞 모든 교회 시대마다 늘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 새 교회, 그러나 이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영원하실 교회를 말씀에서는 ‘여자’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가 낳는 ‘아들’은 주님이 새 교회를 통해 밝히시는 새로운 교리이며 말씀입니다.

 

새 교회 교리가 처음 나타날 때, 기존 교회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그들을 지탱하고 있던 교리가, 그리고 지금은 ‘오직 믿음’의 교리가 한 번에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들은 새 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주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주님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요. 새 교회가 기존 교회들에 의해 박해를 당하는 것을 말씀에서는 ‘여자가 광야로 피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초목이 자라지 않는 황폐한 땅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진리도 없고, 사랑도 없는 교회들의 모습입니다. 바로 그런 광야 한 가운데 이 새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험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그런 이유로 해서 처음에는 새 교회 진리를 믿는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않다고 합니다.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새 교회의 진리를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만 명 중 하나도 쉽지 않다고 하지요. 그러다가 주님의 때가 이르면 빠르게 부흥이 된다고 합니다. 말씀에는 그것을 ‘여자가 천이백육십일 동안 하나님의 양육을 받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양육을 받는 천이백육십일은 새 교회가 열악한 상태에서 차츰 부흥이 되는 기간인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말씀의 의미를 통해서 우리는 새 교회가 처음에 얼마나 열악한지, 그리고 시험이 얼마나 많은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어려울 때마다 저는 이 말씀으로 위로를 받습니다. 새 교회는 주님께서 지켜 주시는 특별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무너지지 않으며, 때가 되면 크게 부흥할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주께서 예비하신 천이백육십일 동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두 손 놓고 그냥 주님이 이루어주시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그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려 보겠습니다. 본문 38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8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서 마르다라는 여인을 만나셨다는 겁니다. 말씀에서 ‘여자’는 교회를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마르다는 마음속에 교회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주닙을 자기 집에 영접했습니다. ‘’은 사람의 의지를 나타내기도 하구요, 여기서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선한 마음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마르다가 주님을 집으로 모시는 것’은 그가 주님으로 표상되는 새 교회 진리를 선한 마음 가운데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속에 선한 것이 없는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선과 진리는 서로 끌어당겨 하나가 되고자 하는, 하나로 결합하려고 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선한 마르다는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참 진리이신 분이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봤습니다.

 

주님을 받아들였을 때, 마르다의 믿음의 상태는 어땠을까요? 주님께서 마을로 들어가셨다는 사실로부터 마르다의 믿음이 어떤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마을’은 신앙의 외적인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예배 의식이나 교회의 제도 같은 것이 바로 마을입니다. 마을과 비교되는 것으로 좀 더 큰 성읍이 있지요. ‘성읍’은 신앙의 내적인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교리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성읍이 중심에 있고, 마을은 그 바깥쪽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마르다의 신앙은 외적 신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그가 성읍에 살지 않고, 마을에 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적 신앙과 외적 신앙은 서로 어떻게 다를까요? 한 마디로, 내적 신앙은 진리를 알면 바로 삶으로 옮기는 신앙입니다. 반면, 외적 신앙은 입으로는 믿음을 고백하는데 삶으로는 옮기지 않는 신앙입니다. 따라서 마르다의 믿음은 후자의 신앙입니다. 39절에는 마르다와 비교되는 그의 동생 마리아가 등장하는데, 그에 대해 말씀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9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지금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주님의 발은, 주님은 진리이신 분 아닙니까? 그리고 발은 가장 낮은 곳에 있지요? 그래서 ‘주님의 발’은 말씀의 문자적인 뜻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발치에 마리아가 앉아있는 것'은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로부터 내적 진리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입니다. 또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했는데, ‘듣는 것’은 말씀에 순종하는 뜻이지요? 그렇게 보면, 마리아의 신앙이 언니 마르다보다는 더 내적인 신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동안, 언니 마르다는 주님을 대접할 준비를 하느라 마음이 바쁩니다. 그런 동생이 언니 마르다의 눈에는 한가로워 보이기만 합니다. 심지어 야속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주님께 나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40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이게 무슨 말일까요? 교회에서나 직장에서 눈에 띄는 일을 하기를 좋아하고, 혼자 바쁜 사람들이 있지요.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것이 선이고 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주장이 많아지고, 자기가 한 일을 인정받지 못할 때는 불평을 하기도 합니다. 지금 마르다가 그런 상태입니다. 마르다는 마리아가 주님에게서 물러나 자기 일 돕기를 원합니다. 마르다처럼 외적 신앙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마리아 같은 내적인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마치 그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눈치 없이 이기적이며, 게으름을 부리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르다는 주님 앞에서 자기 신앙이 마리아의 신앙보다 옳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마르다의 말을 들으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1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주님께서는 마르다가 불필요한 일을 너무 많이 하고 있다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는구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 교회의 예배 의식이나 교회의 제도, 또 선교, 전도 활동 등은 교회의 재정과 역량에 맞게 가능한 한 단순한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그것이 과연 주님을 위한 일인지 의문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만일 그러한 모든 일들이 목회자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일이거나, 또는 교인들의 자부심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면 그만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숨은 동기로 하는 일들은 모두 외적인 신앙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은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것이 주님을 위한 일인지를 먼저 생각하시고, 그것에 따라서 일의 경중과 순서를 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2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주님은 마리아가 지금 선한 일을 하고 있으니 그 일을 빼앗지 말라 하십니다. 그 일을 그만두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글 성경에는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영어 성경의 번역은 다릅니다. ‘한 가지 일로 족하니라’ 이렇게만 되어 있습니다. ‘한 가지 일’이라고 하니 정말 한 가지 일만 하라는 뜻으로 이해하기가 쉬운데 그게 아니고요, 여기서 ‘하나’는 속뜻으로 선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한 가지 일로 족하다’는 것은 선한 일만 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번잡하게 여러 가지, 주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또는 우리 가족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여러 가지 하는 일 중에는 선하지 않은 것이 많다는 겁니다. 그 목적이 선하지 않은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왜 선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순수하게 이웃을 위한 것이 아닐 경우, 순수하게 교회를 위하는 일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위한 어떤 좀 불순한 목적이 들어 있을 경우에는 그것은 선한 것이 아닌 게 되겠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리아가 선한 편을 택했으니 그것을 빼앗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나 겉으로 표 나는 일이 있고, 표가 나지 않더라도 꼭 필요한 일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든 표가 나는 일을 하려고 하고요, 심지어 없는 일도 만들어서 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내용이 없고 보여주기식의 일을 할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런 것은 선한 행동이 아닙니다. 그리고 주님이 원하시는 일도 아닙니다. 주님은 어느 곳에서나 표가 나든지 말든지 꼭 필요한 일만을 묵묵히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주님을 위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위하는 일은 쓰임새에 충실한 일입니다. 천국은 쓰임새의 나라요, 천국 모든 구성원은 모두 이 쓰임새에 충실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마르다는 외적 신앙 가운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행하기보다는 주님을 대접하는 일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동생 마리아가 이 바쁜 와중에 한가로이 주님 말씀이나 듣고 앉아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 마르다에게 주님은 한 가지 일에 족하라고 충고하십니다. 한 가지 일은 앞에 말씀드린 대로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마르다와 달리 동생 마리아는 어땠습니까?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배우고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리아의 행동을 선하게 보시고, 그가 선한 편을 택했으니 빼앗지 말라 언니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대접한다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아니구요,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배우고, 삶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런 예배를 받기를 원하십니다. 교회 건물이 하늘을 찌르고, 수천 명의 성가대가 찬양을 하더라도, 교인들이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행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외적인 것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외적인 것 안에는 반드시 내적인 것이 함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런 마음으로 주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 새 교회 사람들은 그런 마음으로 주님의 때가 오기를 기다려야만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새 교회의 미래가 머지않아 눈부시게 펼쳐질 날이 올 것입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눅10:42)

 

아멘

 

원본

2019-11-10(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7-04(D3)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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