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29(D5)-매일예배(2486, 눅10,21-24),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시는 주님'.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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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UfHW4I_21HQ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시는 주님

 

 

21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2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23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24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눅10:21-24)

 

 

일반적으로 학식이 있는 사람보다 단순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더 분명하게 이해하는 까닭은 학식이 있는 사람들은 진리를 배울 때 지식을 통해 배우려고 하며, 그렇게 해서 내적 통찰력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내적 통찰력이 파괴될 때, 그들은 모든 것을 천국의 빛을 통해 보지 않고, 세상의 빛으로 본다. 왜냐하면 지식은 세상의 빛 안에 있으며, 그러므로 그것이 천국의 빛에 의해 비춤을 받지 않으면 암흑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AC.4760:4)

 

 

창세기 32장에는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말씀에서 야곱은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형 에서에게 보낼 선물들을 챙기고, 두 아내와 여종들과 아들들을 데리고 얍복나루를 건넙니다. 야곱이 뒤에 홀로 남아있는데 문득 어떤 사람이 나타나 둘 사이에 씨름이 벌어졌습니다. 야곱이 얼마나 지독하게 대들었는지 허벅지 관절이 빠졌는데도 씨름이 계속되었습니다. 새벽 무렵이 되자 그 사람이 야곱에게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말씀에는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어떤 것입니까? 단순히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기 위해 고향으로 가는 중에 하나님으로 짐작되는 분을 만나 밤새 씨름을 하여 이겼다는 뜻일까요? 그게 아닙니다. 영적으로 이 말씀은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당하셨던 시험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의미로는 야곱으로 표상되는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주님의 교회가 세워지게 된 배경에 대한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전혀 영적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그들 가운데 교회를 세우신 이유는, 그들이 누구보다도 여호와의 축복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주님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한 것을 보더라도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라는 축복이 영적인 것이 아니라 세상적, 세속적 축복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는 한 가지 장점이 있었는데, 그들이 말씀의 외적인 것을 철저히 지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 가운데 교회를 세우시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따라서 유대교회는 진정한 의미의 교회는 아니고, 단지 교회를 표상(表象)하는 교회일 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유대인들의 내면에는 교회를 이룰만한 영적인 것들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주님에 대한 믿음이라든가 사랑 같은 것이 그들에게는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유대교회가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가 아니었다면 그런 교회에서 어떻게 거룩한 예배를 드릴 수 있으며, 또한 그러한 예배를 통해 어떻게 주님과 인간이 서로 소통할 수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대답을 출애굽기 28장 42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속바지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두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 (출28:42)

 

여호와께서는 제사장들에게 속바지를 만들어 입혀 그들의 하체를 가리게 하라 명령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체’는 유대인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불결한 욕망들을 나타내고, ‘속바지를 입히는 것’은 그러한 욕망들이 예배의 행위 가운데로 흘러 들어오지 못하도록 말씀의 외적 의미를 통해 막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속바지를 입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지극히 세속적이고 감각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내면에는 말할 수 없이 불순한 욕망들이 들끓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러한 욕망들이 예배 행위 가운데 흘러 들어온다면 예배가 더럽혀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예배 중에 그들의 내면을 닫으시고, 불결한 것들이 흘러나오지 않도록 차단하셨습니다.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속바지를 입혀 하체를 가리게 하라는 것은 그런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은 그런 방법으로 표상의 교회인 유대교회 가운데로 임재하셨고, 그들의 예배를 통해 인류 전체와 소통하실 수 있었습니다.

 

유대교회가 진정한 교회가 아니고 교회의 표상인 것처럼 신앙인들 가운데도 내면에 교회가 있는 사람이 있고, 교회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자는 믿음과 삶의 행위가 일치하는 사람들이고, 후자는 믿음만 있고 삶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칠십 인의 제자들이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말했을 때,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주님은 가끔 믿음만 있고 삶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구원 사역을 맡기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라도 한 사람이라도 더 주님께 돌아오도록 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을 맡아 한다 해서 모두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과 삶의 행위가 일치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주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입으로만 주님을 믿고 삶의 행위로는 못하는 걸까요? 오늘 본문 21절은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21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하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은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마음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시는 것이 왜 주님께 기쁜 일일까요? 그 이유는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와 어린아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우리 마음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늘 한결같지 않다는 겁니다. 어느 때는 교만하여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고, 어느 때는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이 됩니다. 전자의 상태일 때는 시험이 오면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성령이 함께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와 주님께 매달리면 성령이 다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그런 방법으로 조금씩 주님의 모습으로 변해갑니다. 그러니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시는 것이 주님에게나 인간에게나 모두 기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실 때 기쁨과 감사가 있습니다. 성령이 주시는 기쁨은 진리를 삶으로 옮기고자 하는 새로운 의지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감사는 모든 선한 것을 오직 주님께 돌리는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것을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아버지께 감사하신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무엇입니까? ‘성령’은 본질적으로 사랑을 동반한 진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이 임재하실 때는 기쁨과 감사가 있고, 또한 진리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있습니다. 성령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말씀의 진리 속으로 한 치도 들어갈 수 없으며, 시험 가운데서 능히 이길 수 없습니다. 또한 모든 선하고 진실한 것이 오직 주님의 것임을 인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한 모든 것이 주님의 성령으로부터 나옵니다. 그것에 대해 2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2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여기서 ‘아버지’는 선 자체이신 주님을 뜻하고, ‘아들’은 선으로부터 나오는 진리이신 주님을 뜻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아버지’는 주님 안에 계신 신성 자체이시고, ‘아들’은 신성에서 비롯한 거룩한 인간이신 예수님을 뜻합니다. 진리가 선의 형상인 것처럼, 거룩한 인간이신 주님 역시 신성의 형상이십니다. 이와 같은 진리는 이제껏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지옥을 이기시고 거룩한 인간이 되셨을 때,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인성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당신의 인성까지 거룩하게 만드시고, 인성과 신성을 하나로 만드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인간은 신성 자체로부터 나오는 무한한 사랑과 지혜를 이해할 수 없으며, 그러므로 거룩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성령이야말로 인간이 만날 수 있는 가장 완전하신 주님이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진리에 대해 이사야서 30장 26절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영원 전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마치 주님이 달라지신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이 변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입장에서 주님을 이해하는 깊이가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를 받은 자가 아니면 주님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즉 성령을 받은 자가 아니면 주님을 바로 이해할 수 없으며, 진리에 따라 살 능력도 없다는 것입니다.

 

24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여기서 ‘너희가 보는 바’는 부활하신 주님이 밝혀주시는 새 교회 신앙, 새 예루살렘 교회 신앙, 곧 진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너희가 듣는 바’는 그 신앙에 따른 삶을 뜻합니다. 모든 시대의 선지자들이 그것을 원했지만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의 마지막 교회와 함께하시는 성령을 통해서만 그것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 시대에 태어난 것은 대단히 큰 축복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신앙인들의 책임이 무겁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주님을 믿고 따랐던 사람들은 학식이 많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단순하고 순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와 같은 어부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천국의 빛을 보내주셔서 진리를 통찰할 힘을 주셨습니다. 반대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세상적으로는 많이 배운 사람들이었지만 주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보다 자신의 지혜를 더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지식을 내세움으로써 스스로 내적 통찰력을 저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리이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결국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는 사람에게는 오실 수 없으시며, 반대로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한 사람에게는 오십니다. 마태복음 21장 15절에서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마21:15)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는 어린이들을 보고 제사장들이 노(怒)했다고 합니다. 순진한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주님에 대한 고백과 찬송에 대해 학식이 있는 사람들이 노(怒)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시편 8편 2절에서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시8:2)

 

어떻게 하면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함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야만 합니다. 성령의 힘으로 세상의 거짓을 분별할 수 있고, 우리 안에 있는 악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온갖 지옥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리스도의 성령이 임할 때 순진한 사람들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사11:8)

 

어떤 지옥의 독사들도 순진한 사람들을 해칠 수 없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영이 그들을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부터 오는 순진함이 오늘 이 말씀에 마음으로 아멘하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45아랫사람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그들이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46아랫사람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47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48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49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요7:45-49)

 

아멘

 

원본

2019-10-13(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6-29(D5)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

2023-06-27(D3)-매일예배(2485, 눅10,17-20, AE.581.6),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시는 주님'.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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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5oTplJ6rGpk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시는 주님

 

 

17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18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19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20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눅10:17-20)

 

마가복음 16장 18절에서 주님은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지옥의 영들이 아무리 교활하고 악의를 가지고 덤벼도 주님이 지키시는 사람들은 해칠 수 없음을 뜻한다. (AE.581:6)

 

지난주에는 진리를 믿지 않고 인간의 지식을 믿는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설교를 전해드리면서 최근에 문제가 되고 있는 어느 장관의 인사를 예를 들어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주중에 교인 한 분이 전화를 해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보수정당 당직자들의 자녀도 문제가 많은데 왜 법무장관 자녀만 가지고 비판을 하느냐, 그것은 중립적인 태도가 아니지 않는가? 라고 하셨습니다.

 

※ 이 설교는 지난 2019년 9월 설교로, 검색을 해보니 당시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인사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던 때였습니다.

 

생각해 보니 듣는 사람에 따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런 말씀을 드린 것은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한 것은 아닙니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부도덕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사법제도를 개혁하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교리적인 측면에서 설명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잘못이 있으면 우편에 있는 사람이나 좌편에 있는 사람이나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내가 지지하는 쪽의 사람이라고 해서 잘못이 있는데도 잘못이 없는 것처럼 옹호하거나, 또는 다른 쪽 사람의 잘못을 파헤쳐 자기 쪽 사람의 잘못을 희석, 물타기를 하려고 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특히 새 교회 분들은 그러면 안 됩니다. 저는 우리 교회 분들이 모두 세상에 속한 사람이 되지 않고 천국에 속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슨 일이든 자아와 세상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항상 진리의 시각으로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인 분별력을 잃지 않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주님으로부터 우리 마음 가운데로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는 진리의 강이 있습니다. 그 강은 처음에는 큰 물줄기로 흐르다가 점차 수많은 작은 물줄기로 바뀌고, 그렇게 해서 속 사람과 겉 사람, 기억의 미세한 부분에까지 흘러 들어갑니다. 그것은 마치 인체의 혈액이 동맥과 정맥과 미세혈관을 통해 아주 작은 세포 안에까지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그런 방법으로 우리 마음속 미세한 부분에까지 선과 진리를 공급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자아와 세상의 논리로 사물을 바라본다면 혈액에 때가 끼는 것처럼 마음속에 거짓이 쌓입니다. 왜냐하면 거짓을 진리로 알고 계속 받아들이기 때문인데요, 그렇게 거짓이 쌓이다 보면 그 거짓들로 인해 주님과 연결된 진리의 통로가 막혀버립니다. 어쩌면 최근에 문제가 되고 있는 사람들도 그런 사람들일지 모릅니다. 마음속을 흐르는 진리의 강이 막힌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거짓말을 하면서도 그것이 거짓인 줄을 모릅니다.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도 않습니다. 주님과 연결된 선과 진리의 흐름이 완전히 막혔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항상 진리의 시각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진리의 강이 흐릅니다. 강둑에는 나무가 푸르고 새가 날아다닙니다. 이사야서 58장 11절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사58:11) 했습니다. 자아와 세상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시험에 들기 쉽고, 일단 시험에 들면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진리가 없으며, 그러므로 주님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에는 그런 사람들에게 달려드는 지옥의 영을 뱀과 전갈로 비유합니다. 어떻게 하면 뱀과 전갈을 피할 수 있을까요? 본문의 말씀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17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17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여기서 ‘칠십 인’은 주님께서 복음을 전하라고 각처로 보내셨던 칠십 인의 제자들입니다. 즉 진리를 따라 체어리티(charity)의 삶을 사는, 교회 안의 모든 사람입니다. 그들이 세상에 나갔다 돌아오는 것은 신앙인들의 일상의 삶을 나타냅니다. 즉 세상에 나가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기도 하고, 주님에게로 돌아와 새로운 힘을 얻기도 하는 그런 삶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기뻐하며 돌아왔다’고 합니다. 무엇이 그렇게 기뻤을까요? 진리에 따라 체어리티의 삶을 사는 것이 기쁘고, 그러한 삶을 통해 새 교회의 진리가 세상으로 퍼져나가는 것이 기뻤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기쁨에 대해 제자들은 좀 더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귀신은 신앙인들을 순간순간 괴롭히는 지옥의 유혹을 뜻합니다. 지옥은 신앙인의 삶 곳곳에 교활하고 악의적인 덫을 놓아 그들을 사로잡으려고 합니다. 그때 지옥의 유혹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주님의 이름에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주님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주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입니다. 주님은 눈에 보이시지도 않고, 귀에 들리게 말씀하시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때로는 무모해 보입니다. 두 손 놓고 주님을 믿기만 하라는 말인가 하는 회의가 들 때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싸워 결국 이기신다는 것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넘어지면 일어서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 싸워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 나는 점점 더 낮아지고, 믿음은 점점 더 깊어집니다. 주님에 대한 믿음은 한 번에 생기지 않습니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자아가 낮아질 대로 낮아져야 그때부터 조금씩 믿음이 생깁니다. 우리가 주님을 온전히 믿을 때, 시험에서 한 번 이길 힘이 생깁니다. 그리고 한 번 이길 때, 두 번 세 번 이길 힘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토록 우리를 괴롭히던 귀신이 마침내 물러갑니다. 그것이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의 항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칠십 인의 제자들은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느끼는 기쁨은 지옥의 영들로부터 다시는 해를 당하지 않을 사람들이 느끼는 천국의 평화입니다.

 

18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신앙인들을 끈질기게 괴롭히던 지옥의 귀신들도 때가 되면 지체하지 않고 물러납니다. 그 모습을 18절에서는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으로 표현 했습니다. 여기서 ‘하늘’은 사탄이 괴롭히는 주님의 교회이며, 또는 내면에 교회가 있는 신앙인들을 뜻합니다. 그래서 19절에서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9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말씀에서 ‘’은 지옥의 영들의 교활함과 악의적인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전갈’은 신앙인들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거짓 논리와 그 능력을 뜻합니다. 전갈의 독에 쏘이면 사람의 몸이 마비되어 꼼짝을 못 한다고 합니다. 그만큼 전갈의 독은 치명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전갈은 진리를 왜곡하는 거짓 논리와 그 능력을 뜻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당신의 제자들에게 주시겠다고 합니다. ‘뱀과 전갈을 밟는 능력’은 뭘까요? 지옥의 악의적인 도발과 거짓 논리에 넘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또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은 지옥의 영들에 의해 더 이상 해를 입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온전한 믿음으로 체어리티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세상의 어떤 유혹이나 거짓 진리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20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주님께서는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이름이 하늘에 기록될 때 참된 평화가 있다는 뜻입니다. ‘기쁨’은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귀신이 항복하는 영적 상태’와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는 영적 상태’는 어떻게 다를까요? 대개는 같지만, 그러나 언제나 같은 것은 아닙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온전한 믿음을 갖지 않은 사람에게도 귀신이 항복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는 온전한 믿음을 갖지 않은 사람, 즉 믿음만 있고 체어리티의 삶을 살지는 않는 사람들에게도 때로는 진리를 전하는 일을 맡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음 마태복음 7장 말씀은 주님의 일을 하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말씀입니다.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7:22-23)

 

때로는 체어리티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도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귀신을 쫓아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그런 신앙인들에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라 하시고, ‘내게서 떠나가라’ 하십니다. 참으로 두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신 것입니다.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는 것’은 우리의 믿음과 사랑이 각자의 생명책인 의지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의지는 곧 사람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사랑이 의지에 새겨질 때, 우리는 비로소 믿음에 따라 기쁨으로 이웃 사랑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주님이 택하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신 칠십 인의 제자들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신앙인들입니다. 그렇지만 각자의 믿음의 상태가 모두 같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진리에 따라 체어리티의 삶을 살고, 어떤 사람은 사랑으로부터 체어리티의 삶을 삽니다. 새 교회에서는 전자의 사람을 영적인 사람이라고 하고, 후자의 사람을 천적인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또 어떤 경우는 믿음만 있고 체어리티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각자 믿음의 분량에 따라 진리를 전하는 사명을 그들에게 맡기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내보내시면서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 하셨습니다. 그만큼 진리를 대적하는 거짓 논리가 세상에 만연하다는 뜻입니다. 거짓 논리는 전갈의 독과 같아서 잘못 쏘이면 이성이 마비되고 분별력을 잃습니다. 그러므로 자아와 세상의 논리에 휩쓸리지 말고 언제나 진리의 시선으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내적인 믿음으로 이름을 하늘에 기록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메시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축원합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출20:7)

 

아멘

 

 

원본

2019-09-2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6-27(D3)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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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신적 본질을 이루는 두 키워드는 사랑과 지혜다(The very Divine Essence is Love and Wisdom)’ (2023/6/26)

 

 

콤펜디움(COMPENDIUM, 叢書)’ 1장 ‘하나님에 관하여’, 오늘은 5강, ‘주님의 신적 본질을 이루는 두 키워드는 사랑과 지혜다(The very Divine Essence is Love and Wisdom)’입니다.

 

※ ‘콤펜디움(COMPENDIUM, 叢書, Samuel. M. Warren, 1875)’

 

1. 어떤 저자의 모든 저작(Writings)을 한 데 모아놓은 것으로, 여기서는 스베덴보리의 모든 신학적 저작 가운데서 특정 주제별로 그에 해당하는 글들을 선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을 말합니다. 일종의 조직신학 같은 책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2. 이 콤펜디움을 엮은 워렌은 그저 주제별 해당 글들을 선별, 엮기만 했을 뿐 무슨 자의적 해설을 더하거나 섞거나 하지 않았으므로 여전히 원저자는 스베덴보리라 해도 될 듯 합니다.

 

오늘의 메인 본문은 스베덴보리 저,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Angelic Wisdom concerning Divine Love and Wisdom, 1763) 1장, ‘창조주’(The Creator) 8강, ‘주님의 신적 본질을 이루는 두 키워드는 사랑과 지혜다(The very Divine Essence is Love and Wisdom)’에 나오는, 책 전체 글 번호로는 29, 30번 글입니다.

 

29

그 본질에 있어 지혜와 한 몸인 사랑(Love together with wisdom in its very essence)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이 사실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안에 있는 사랑으로 모두를 사랑하시며, 자기 안에 있는 지혜로 모두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피조 세계(The created universe)역시 그 창조 질서의 측면에서 볼 때(viewed in relation to its order),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로 너무나도 충만, 그 안 모든 만물(all things in the aggregate)을 일컬어 지혜 그 자체라 할 정도입니다. 셀 수 없이 많은 것들(things limitless)이 그런 질서 가운데 계속 연결되고, 동시에 하나로 합쳐 하나를 이루기 때문인데요, 이 모든 것이 하나로 단결, 끊임없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그리고 오직 이것 때문입니다. Love together with wisdom in its very essence is in God. This no one can deny; for God loves everyone from love in himself, and leads everyone from wisdom in himself. The created universe, too, viewed in relation to its order, is so full of wisdom coming forth from love that all things in the aggregate may be said to be wisdom itself. For things limitless are in such order, successively and simultaneously, that taken together they make a one. It is from this, and this alone, that they can be held together and continually preserved.

 

30

사람에게 생명(삶)을 위한 두 가지 능력(capacities, abilities)이 생기는 것, 곧 하나를 통해서는 언더스탠딩(understanding, discernment)이, 다른 하나를 통해서는 윌(will, volition)이 생기는 것은 바로 이 ‘주님의 신적 본질을 이루는 두 키워드는 사랑과 지혜다(the Divine essence itself is love and wisdom)’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언더스탠딩을 생기게 하는 능력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지혜의 입류(the influx of wisdom from God)로 말미암는 모든 것이 시작되고, 윌을 생기게 하는 능력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입류(the influx of love from God)로 말미암는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사람이 정말 지혜롭지도, 그리고 올바른 사랑을 하지도 않는다 해서 이 능력들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단지 닫힐 뿐인데요, 다만 이 능력들이 닫혀 있는 한은, 비록 언더스탠딩을 여전히 언더스탠딩이라 하고, 윌을 윌이라 하더라도 사실은 더 이상 아닙니다. 언더스탠딩도, 윌도 이 능력들이 정상적으로 작동 중일 때만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일 이 두 능력이 사라지면 사람의 모든 것(all that is human)은 소멸될 것입니다. 인간(the human)은 사고(thought)를 통해서 생각하고 말하며, 의지(will)를 통해서 의도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윌과 언더스탠딩이 있어 사람입니다. 이 사실로 분명한 건, 주님의 신성(the Divine)은 인간 안에서 이 두 능력, 곧 지혜로울 수 있는 능력과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안에 자리를 잡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사랑의 가능성이 있음을, 그리고 지혜로움의 가능성이 있음을 저는 많은 경험을 통해 그동안 알게 되었습니다. 비록 당장은 할 수 있는 만큼 사랑도, 될 수 있는 만큼 지혜롭지도 않을지라도 말이지요. 이 사실은 앞으로 여러 다른 데서 풍부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It is because the Divine essence itself is love and wisdom that man has two capacities for life; from one of these he has understanding, from the other will. The capacity from which he has understanding derives everything it has from the influx of wisdom from God, and the capacity from which he has will derives everything it has from the influx of love from God. Man’s not being truly wise and not loving rightly does not take away these capacities, but merely closes them up; and so long as they are closed up, although the understanding is still called understanding and the will is called will, they are not such in essence. If these two capacities, therefore, were to be taken away, all that is human would perish; for the human is to think and to speak from thought, and to will and to act from will. From this it is clear that the Divine has its seat in man in these two capacities, the capacity to be wise and the capacity to love (that is, that one may be wise and may love). That in man there is a possibility of loving [and of being wise], even when he is not wise as he might be and does not love as he might, has been made known to me from much experience, and will be abundantly shown elsewhere.

 

2023-06-26(D2)-C.1.5.1, '주님의 신적 본질을 이루는 두 키워드는 사랑과 지혜다(The very Divine Essence is Love and Wisdom)’.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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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보태는 몇 가지 설명 및 오늘의 권면입니다.

 

1. ‘피조 세계 역시 그 창조 질서의 측면에서 볼 때,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로 너무나도 충만, 그 안 모든 만물을 일컬어 지혜 그 자체라 할 정도입니다.’ (29번 글에서)

 

다음은 위 문장에 나오는 ‘지혜’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글입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에서 인용했습니다.

 

천국의 총합이 한 사람의 모양(heaven in its whole complex reflects a single man)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신비(an arcanum)이지만, 천국에서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사실과 그에 관련된 세부 사항들을 아는 것이 천사의 지성을 이루는 핵심(the chief thing in the intelligence of the angels there)이다. 천사들이 이 사실을 보편 원리(general principle)로 삼고 있지 않으면, 거기 의존하는 많은 것을 명확히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의 공동체도 각각 사람 모양을 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천국을 ‘가장 큰 신적 사람(the greatest man and the Divine man)’이라고 부른다. 신적(Divine)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주님의 신성이 천국을 이루기 때문이다. (HH.59)

 

즉 어떤 건물이나 도시 전체 설계에 그 설계자의 모든 지혜가 담겨있듯 천국 역시 그 전체 설계에 주님의 지혜가 온전히 담겨있을 것이므로, 우리가 그 천국의 설계 형태에 주목하면 주님의 지혜에 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는 말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2. ‘셀 수 없이 많은 것들이 그런 질서 가운데 계속 연결되고, 동시에 하나로 합쳐 하나를 이루기 때문인데요, 이 모든 것이 하나로 단결, 끊임없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그리고 오직 이것 때문입니다.’ (29번 글에서)

 

이 역시 다음 글들을 통해 그 의미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역시 ‘천국과 지옥’에서 인용했습니다.

 

천국의 형상이 그렇기 때문에, 천국은 주님에 의해 단 한 사람처럼, 즉 한 단위로 다스려진다. 잘 알려진 대로 사람은 전체나 각 세부나 무수히 다양한 부분들로 이루어졌다. 전체는 사지와 기관과 내장들로, 그리고 각 부분은 섬유와 신경과 혈관으로 되어 있어 지체 안에 지체가, 부분 안에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사람은 한 사람으로 움직인다. 이와 같이 천국도 주님의 감찰과 인도하심(the auspices and direction of the Lord)에 따라 하나로 움직이는 것이다. (HH.63)

 

 

사람 안에 있는 많은 부분들이 하나로 움직이는 것은, 사람 안에 있는 것은 모두 전체의 유익을 위해 뭔가 기여하고, 쓰임새(use) 없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전체는 부분들로 구성되고, 부분은 전체를 이루기 때문에, 전체는 부분을 위한, 부분은 전체를 위한 쓰임새를 수행한다. 그러므로 양쪽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서로를 목적으로 삼으며, 모든 부분이 합동해서 각기 전체와 전체의 유익에 참여하는 형태를 이루어낸다. 그 결과 모든 부분이 하나로 움직이는 것이다.

 

[2] 천국들 간에도 이런 연합(affiliations)이 이루어진다. 천국에서는 모두 그 쓰임새를 따라 같은 형태(form)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공동체에서 쓰임새를 수행하지 않는 자는 이질적이므로 천국에서 추방된다. 쓰임새를 수행한다는 것은 전체의 공동유익을 위해 타인에게 선한 의도로 행하는 것을 말한다. 쓰임새를 수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타인에게 선한 의도로 행하기는 하지만 전체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후자는 모든 것보다 자기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며, 전자는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천국에서는 모두가 하나로 움직이는데, 그것은 주님으로 말미암는 것이지, 천사들 스스로가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주님을 모든 것의 유일한 원천으로 바라보고, 주님 나라를 그 유익을 추구해야 할 사회로 삼기 때문이다. 이것을 주님은 성서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3)

 

‘그의 의를 구한다’는 것은 주님의 선을 구하는 것(to seek his good)이다.

 

[3] 이 세상에서 자기 조국의 유익을 자기 유익보다, 이웃의 유익을 자기 유익보다 더 사랑한 사람은 내세에서 주님의 나라를 구하고 사랑한다. 거기서는 주님의 나라가 조국이기 때문이다. 또 타인에게 행하는 선을 사랑한 사람들은 내세에서 이웃을 사랑한다. 천국에서는 선이 이웃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모두 ‘가장 큰 사람(the greatest man)’ 안에, 즉 천국에 있다. (HH.64)

 

 

3. 영어 ‘understanding’과 ‘will’을 앞으로는 가급적 소리나는 그대로 ‘언더스탠딩’과 ‘’로 적겠습니다. 이 ‘understanding’에 대한 번역이 참 애매하기 때문인데요, 그냥 ‘이해’라 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조금 풀어 ‘이해하는 능력’이라 하기도 그렇고... 무슨 ‘이해력’이나 ‘사고력’, ‘이성’이나 ‘생각’ 등... 참 쉽지가 않습니다. 영어 ‘charity’나 ‘affection’ 등과 같은 케이스입니다. ‘will’의 경우는 ‘의지’나 ‘의도’ 등 크게 문제될 건 없지만, 그냥 ‘understanding’과 짝을 맞추기 위해 ‘’로 표기하겠습니다만, 그러나 융통성 있게 하겠습니다.

 

 

4. ‘언더스탠딩도, 윌도 이 능력들이 정상적으로 작동 중일 때만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일 이 두 능력이 사라지면 사람의 모든 것은 소멸될 것입니다. 인간은 사고를 통해서 생각하고 말하며, 의지를 통해서 의도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윌과 언더스탠딩이 있어 사람입니다. 이 사실로 분명한 건, 주님의 신성은 인간 안에서 이 두 능력, 곧 지혜로울 수 있는 능력과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안에 자리를 잡는다는 것입니다.’ (30번 글에서)

 

다음은 위에서 말한 ‘언더스탠딩(understanding)’과 ‘(will)’에 대한 이해를 돕는 글입니다.

 

영적이고 천적인 문제에 대한 바른 개념이 없는 사람은, 영적이고 천적인 것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사람의 모양과 형상으로 배열되고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사람은 사람의 외면(man’s outmost nature)을 구성하는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이 사람을 만든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떠나서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들이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은 선한 것을 의도하고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his ability to understand what is true and to will what is good)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의지(willing)와 사고력(understanding)이 바로 사람을 이루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이다. 게다가 모든 사람의 특질(quality)은 그의 사고력과 의지의 성질에 의해 결정된다. 또한 사람의 육신은 이 세상에서 사고력과 의지에 봉사하도록 지어진 것이고, 그 두 기능의 명령에 따라 자연계에서 사용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이유로, 몸은 그 자체가 행하는 것이 하나도 없고, 항상 사고력과 의지의 명령에 완전히 복종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생각이 입과 혀를 통해 말로 나오고, 사람의 의도가 사지를 통해 행동에 옮겨지는 것이다. 따라서 행동하는 것은 사고력과 의지이지 몸 자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사고력과 의지에 속한 것이 사람을 이루며, 내면이 외면에 작용하듯(as what is internal into what is external) 그 두 기능이 육체의 지극히 세부적인 데까지 작용하기 때문에, 영과 육은 같은 형태로 되어 있음이 명백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내적인 인간, 영적인 인간이라 하는 것이다. 천국은 바로 가장 크고 가장 완벽한 사람의 형태이다. (HH.60)

 

여기서는 번역자의 번역을 존중, ‘사고력’과 ‘의지’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오늘 강의의 요약 및 결론은,

 

첫째, 주님의 신적 본질을 이루는 지혜는 천국의 구조와 설계 형태에 반영되어 있으며, 그래서 천국 설계 형태를 아는 것이 주님의 신적 지혜를 아는 첫걸음이라는 사실입니다.

 

둘째, 주님의 신적 사랑에서 주님의 신적 지혜가 나옵니다. 여기서 주님의 신성의 본질인 선과 진리가 나오며, 또 여기서 사람을 이루는 의지와 이해하는 능력, 곧 윌과 언더스탠딩이 나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인플럭스(influx)로 연결되어 있는데요, 이 인플럭스는 피조 세계 전체와 주님을 연결하는,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어떤 영적 연결이요, 흐름입니다. 이 인플럭스로 주님의 신적 사랑과, 신성을 이루는 선, 그리고 인간의 의지가 한 흐름으로 연결되고, 또 주님의 신적 지혜와, 신성을 이루는 진리, 그리고 인간의 이해하는 능력인 언더스탠딩이 한 흐름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런 흐름과 연결로 인해, 어떤 사람이든지 선하고 진실한 사람이 될 가능성, 선과 진리의 사람이 될 가능성, 그리고 주님의 사랑과 지혜의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자기 자신은 물론, 어느 누구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으로 5강, ‘주님의 신적 본질을 이루는 두 키워드는 사랑과 지혜다(The very Divine Essence is Love and Wisdom)’를 마치고, 다음은 6강, ‘주님의 신적 사랑과 주님의 신적 지혜는 실체(實體)이며, 형태를 가진다(Divine love and Divine wisdom are substance and are form)’입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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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6-25(D1)-주일예배(2484, 눅10,10-16), '발에 묻은 먼지'.pdf
0.36MB

https://youtu.be/8GdWZbakf3Q

 

2.  축도 원고

2023-06-25(D1)-주일예배.축도.pdf
0.23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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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2023-06-22(D5)-매일예배(2483, 눅10,1-9), '주님이 칠십 인을 보내시며 하신 말씀의 속뜻'.pdf
0.38MB

https://youtu.be/Pk6184X2de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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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실 수 없으시다(The Divine is not in space) (2)’ (2023/6/21)

 

 

콤펜디움 1장 ‘하나님에 관하여’ 4강,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실 수 없으시다(The Divine is not in space)’, 오늘은 그 두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의 메인 본문입니다.

 

71

다음 내용을 보시면 그저 자연적이기만 한 인간(the merely natural man)은 영적이고 신성(神性)한 것들(spiritual and Divine things)을 공간을 가지고(from space) 생각하고, 영적 인간(the spiritual man)은 공간을 떠나서(apart from space) 생각한다는 걸 확실히 아시게 됩니다. 그저 자연적이기만 한 인간은 눈에 보이는 사물들한테서 얻은 걸 가지고 생각하는데요, 이들 사물들에는 길이, 넓이 및 높이를 갖는 형상(figure)과 각지거나 둥글거나 하는, 이들 형상을 가지고 결정되는 모양(shape)이 다 포함됩니다. 이들 자연 오리엔티드된 개념들은 그가 지상에 있는, 눈에 보이는 것들에 관해서나 보이지 않는 것들, 가령 사회적, 도덕적인 것들에 관해 생각할 때 그의 생각을 지배합니다. To make it clear that the merely natural man thinks of spiritual and Divine things from space, and the spiritual man apart from space, let the following serve for illustration. The merely natural man thinks by means of ideas which he has acquired from objects of sight, in all of which there is figure partaking of length, breadth, and height, and of shape determined by these, either angular or circular. These [conceptions] are manifestly present in the ideas of his thought concerning things visible on earth; they are also in the ideas of his thought concerning those not visible, such as civil and moral affairs.

 

이에 대해 그는 전혀 의식을 못 하지만, 그러나 그를 둘러싼 삼차원 공간 속 형상과 모양이라는 속성들은 끊임없이 존속, 계속해서 생겨납니다. 영적 인간, 특히 천국 천사의 경우, 그 사고방식에 있어 자연적 인간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른데요, 이 경우에도 자연계에서처럼 무슨 공간이 있고, 형상(figure)과 형태(form)가 있지만, 이 경우에는 그것이 영적이라는 것, 즉 그 형상과 형태가 영적인 길이, 넓이, 그리고 높이를 띤 것에서 나온다는 점, 다시 말해, 영적 공간에 있는 것은 그 형상과 형태가 그것의 영적 생명의 상태(the state of its life)로 말미암는다는 점에서 자연적 사고의 경우와는 전혀 무슨 공통점이 없습니다. 그 결과, 천사는 자연계 공간의 길이(length of space) 대신 그 생명이 선한 어떤 것의 선(the good of a thing from good of life)을, 넓이(breadth of space) 대신 그 생명이 진실한 어떤 것의 진리(the truth of a thing from truth of life를, 높이(height) 대신 그것들의 정도(the degrees of these), 즉 선한 정도, 진실한 정도를 생각합니다. 이것은 곧 그는 영적인 것들과 자연적인 것들 사이에 있는 상응으로(from the correspondence)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상응으로, 말씀에서 ‘길이’는 어떤 것의 선을, ‘넓이’는 어떤 것의 진리를, 그리고 ‘높이’는 그것들의 정도를 의미합니다. This he is unconscious of; but they are nevertheless there, as continuations. With a spiritual man it is different, especially with an angel of heaven, whose thought has nothing in common with figure and form that derives anything from spiritual length, breadth, and height, but only with figure and form derived from the state of a thing resulting from the state of its life. Consequently, instead of length of space he thinks of the good of a thing from good of life; instead of breadth of space, of the truth of a thing from truth of life; and instead of height, of the degrees of these. Thus he thinks from the correspondence there is between things spiritual and things natural. From this correspondence it is that in the Word “length” signifies the good of a thing, “breadth” the truth of a thing, and “height” the degrees of these.

 

이상으로 분명한 사실은 천국의 천사는 그가 하나님의 편재(the Divine Omnipresence)를 생각할 때, 하나님은 자연계 공간을 떠나 만물에 충만하신 분(the Divine, apart from space, fills all things)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는 이렇게 말고는 달리 어떻게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과, 또 천사가 하는 생각은 진리인데, 그것은 그의 내면을 열어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빛(the light which enlightens his understanding)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Divine wisdom)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From this it is evident that an angel of heaven, when he thinks of the Divine Omnipresence, can by no means think otherwise than that the Divine, apart from space, fills all things. And that which an angel thinks is truth, because the light which enlightens his understanding is Divine wisdom. (DLW.71)

 

 

72

이것이 하나님에 관한 생각의 기초입니다. 안 그러면, 인간이신 하나님(God-man)의 우주 창조와 그의 섭리(providence)와 전능하심(omnipotence) 및 편재하심(omnipresence)과 전지하심(omniscience)에 대한, 앞으로 드릴 말씀들이 이해까지는 되더라도 마음에 담아둘 수까지는 없기 때문인데요, 그저 자연적이기만 한 인간은 비록 이런 것들에 대해 이해까지는 하더라도 언제든 금방 돌이켜 자신의 삶(life, 생명)에 대한 사랑, 이 사랑이 곧 그의 의지인데요, 그 사랑 속으로 가라앉기 때문입니다. This is the basis of thought concerning God; for without it, what is to be said of the creation of the universe by God-man, of his providence, omnipotence, omnipresence and omniscience, even if understood, cannot be kept in mind; since the merely natural man, even while he has these things in his understanding, sinks back into his life’s love, which is that of his will;

 

이 사랑, 곧 그의 자기, 자아 사랑, 세상 사랑은 그가 머리로 이해하고 있는 저런 진리들, 즉 주님의 천지창조, 섭리와 전능, 편재와 전지 등에 대해 신학적으로, 지식으로 많이 알고 있는 것들을 소멸(dissipate)시켜 그의 사고로 하여금 자연계라는 공간 안에 잠기게, 갇히게 하는데요, 그는 이곳을 자기를 환히 비추는 빛이 있는 곳이라 하며, 이 빛이야말로 래셔널(rational, 합리, 이성, 영계와 자연계를 연결해주는 능력, 자연적 인간으로 하여금 영적인 것을 이해하게 해주는 능력)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소중히 여기는 이 빛은 사실은 빛이 아니라 어두움이며, 자신의 현재 상태와 위치조차 모르게 하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빛입니다. 사람은 주님의 빛을 받아야 참된 래셔널을 갖게 되기 때문이지요. and that love dissipates these truths, and immerses his thought in space, where his lumen, which he calls rational, abides, not knowing that so far as he denies these things, he is irrational.

 

이것은 ‘하나님은 인간이시다, 이것은 진리다’라는 생각을 통해서 확실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내용들(11-13)과 앞으로 이어질 내용들을 정독하셔서(精讀, read with attention) 꼭 이해하실 수 있게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That this is so, may be confirmed by the idea entertained of this truth, that God is a man. Read with attention, I pray you, what has been said above (n. 11–13) and what follows after, and your understanding will accept it.

 

사람이 그 생각을 자연계의 빛(the natural lumen)으로 내려놓으면, 즉 자연계에 안에서만 생각하면, 이 빛은 자연계의 공간(space)에서 나오는데요, 위에서 말씀드린 것들은 마치 무슨 역설들처럼(as paradoxes) 보이지 않을까요? 그래서 그것들을 멀리 내려놓게 되고, 그러면 그것이 곧 그것들을 거부하게 하는 게 아닐까요? 이것이 곧 왜 ‘하나님(the Divine, 신성, 신)은 온 우주 공간에 충만하시다’라고는 하지만, ‘인간이신 하나님(God-man)은 온 우주 공간에 충만하시다’라고는 하지 않는가 하는 이유입니다. 만일 그렇게 말하면, 그저 자연적이기만 한 빛은 절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니까요. 그러나 ‘하나님(the Divine)은 모든 공간에 충만하시다’라는 명제에 관하여는 동의하는데, 그 이유는 이것은 ‘하나님은 편재하시며, 그는 모든 걸 들으시고, 또 알고 계신다’라는 주제에 대한 신학자들의 말투와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이 주제에 관해서는 위 7-10번 글에 더 많은 걸 보실 수 있습니다.) But when you let your thought down into the natural lumen which derives from space, will not these things be seen as paradoxes? And if you let it down far, will you not reject them? This is why it is said that the Divine fills all spaces of the universe, and why it is not said that God-man fills them. For if this were said, the merely natural lumen would not assent. But to the proposition that the Divine fills all space, it does assent, because this agrees with the mode of speech of the theologians, that God is omnipresent, and hears and knows all things. (On this subject, more may be seen above, n. 7–10.) (DLW.72)

 

2023-06-21(D4)-C.1.4.2,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실 수 없으시다(God is not in Space) (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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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윗글은 스베덴보리 저,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Angelic Wisdom concerning Divine Love and Wisdom, 1763) 1장, ‘창조주’(The Creator) 17강, ‘하나님은 공간을 떠나서 우주 모든 공간에 충만하시다(The Divine, apart from space, fills all spaces of the universe)’에 나오는, 책 전체 글 번호로는 71, 72번 글입니다.

 

 

아래는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보태는 몇 가지 설명 및 오늘의 권면입니다.

 

1. 위 두 글은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의역, 그리고 설명을 좀 충분히 보충하느라 번역이 다소 길어졌습니다. 그냥 드리는 말씀이지만... 솔직히 그냥 원본 번역에 충실해야 하는 거 아닐까? 괜히 보충 설명 때문에 더 헷갈리시게 해드리는 건 아닐까 하는 고민이 늘 있습니다...

 

 

2. 설명 때문에 내용이 좀 길어졌지만, 요약하여 말씀드리면, 자연계와 영계, 양쪽에 다 공간이라는 게 있지만, 그 속성은 전혀 다르다는 것, 자연계의 모든 것은 길이, 넓이, 높이라는 3차원 속성을 갖는 반면, 영계의 공간은 사실은 공간처럼 보이는 것으로, 그 속성은 상태와 그 상태의 변화라는 영적 속성을 갖는다는 것, 영계에서는 사랑과 애정의 상태, 즉 주님의 신성인 선과 진리에 대한 상태에 따라 가깝고 멀고와 빠르고 느리고가 결정된다는 것, 천국보다 크신 주님은 그러므로 자연계의 공간 안에 계실 수 없는 분이시라는 것, 천국 천사들은 천국 전체가 주님 모습을 한 사람 형태이기 때문에 ‘사람 모습을 하신 주님이 천국 전체에 충만하시다. 즉 온 피조 세계는 주님의 신성으로 충만하다’라는 생각 말고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다는 것 등이 되겠습니다.

 

 

3. 이 교리 공부를 시작했더니 ‘말씀만 묵상하세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하는, 진정성 어린 권면의 말씀들을 많이들 주십니다. 참 고맙고 감사하지요. 천사들은 사람을 볼 때, 그가 한 행동, 행위가 아닌, 그의 마음 속 의지, 동기를 본다고 합니다. 사람을 이루는 게 의지(will)와 이해하는 능력(understanding)이기 때문이지요. 언제부턴가 저도 그렇게 조금씩 변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 저런 권면을 하실 때, 그 속을 볼 수 있게 되네요 ^^

 

권면을 명심, 어떻게 하면 이 교리 공부 속에서도 살아계신 주님의 음성, 그 뜨거운 주님의 사랑과 애정을 느끼게 할 수 있을까 주야로 고민, 또 고민하겠습니다.

 

 

4. 저 개인적으로는 이 교리 공부가 큰 유익이 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들은 교리를 편안해하는데, 그 이유는 교리는 사람들한테 있어 일종의 침대와도 같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천국은 지상의 빛보다 몇 배나 더 밝다고 합니다. 천국을 이처럼 밝게 하는 빛이 바로 진리인데요, 천국의 진리 안에는 주님의 사랑의 선이 담겨 있어서, 그래서 천국은 또한 주님으로 충만한 곳입니다. 모든,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 안에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자연계에서는 진리는 추상적 개념이지만, 영계에서는 진리가 눈에 보인다고 합니다. 자연계의 햇빛을 우리가 눈으로 보듯 말이지요. 천국은 이 진리가 신적 질서를 따라 아름답고 질서정연하게 충만하다고 합니다. 천사들은 그런 신적 질서의 나라에서 사는데요, 지금 우리가 이 교리 공부를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삶을 미리 살고자 연습하는 것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은 이 질서를 미리 이 지상에서 충분히 익히면, 우리는 이 지상에서도 조금씩 천국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아멘

 

 

이것으로 4강,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실 수 없으시다(The Divine is not in space)’를 마치고, 다음은 5강,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과 지혜 그 자체다(The very Divine Essence is Love and Wisdom)’를 다루겠습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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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6-18(D1)-주일예배(2482, 눅9,57-62), '주님을 따르려면'.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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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PQcL8Nk0q5M

 

2.  축도 원고

2023-06-18(D1)-주일예배.축도.pdf
0.22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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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실 수 없으시다(The Divine is not in space) (1)’ (2023/6/16)

 

 

하나님에 관하여’ 4강,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실 수 없으시다(The Divine is not in space)’,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의 메인 본문입니다.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실 수 없으시다 The Divine is not in space

 

(, the Divine), 즉 하나님(God)은 비록 편재(遍在,omnipresent)하셔서 지상 모든 사람과 천국 모든 천사, 그리고 천국 아래 모든 영과 함께하시지만, 그러나 공간(空間, space)안에 계시는 건 아니라는 이 놀라운 사실은 단순한 자연적 사고(思考, a merely natural idea)로는 이해할 수 없고, 오직 영적 사고(a spiritual idea)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연적 사고로는 할 수 없는 이유는, 자연적 사고는 공간과 관련되기 때문인데, 이 공간이라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면서 하나에서 열까지 다 눈에 보이는 그런 것들로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크고 작은 것들은 다 공간을 차지하는데, 모든 길이, 넓이, 높이를 갖는 것들은 공간을 차지합니다. 즉 모든 측정, 모양 및 형태를 가진 것들은 다 공간이라는 것을 차지하지요. 이것이 바로 그저 자연적이기만 한 사고로는 하나님의 편재를 말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실 수 없으시다 하는 걸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그가 만일 영적 빛에 속한 것에 마음을 열면(admit into it something of spiritual light), 이때는 비록 그가 자연적 사고 가운데 있을지라도 이걸 이해할 수 있는데요, 이런 이유로, 무엇이든 영적인 걸 먼저 말하고, 그걸 가지고 이어서 나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영적 사고는 공간으로부터는 아무것도 가지고 나오는 게 없고(Spiritual idea derives nothing from space), 대신 모든 걸 상태(狀態, state)로부터 나오게 합니다. 상태라는 것은 사랑, 생명, 지혜, 애정(affections)및 거기서 나오는 기쁨 등, 일반적으로 선과 진리의 속성입니다. 즉 이런 것들을 다 상태로 설명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정말 영적인 것들에 대한 사고(An idea of these things which is truly spiritual)는 공간하고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습니다. 이 사고는 공간적 사고(the ideas of space)보다 높아서 마치 하늘이 땅을 내려다보듯 그걸 내려다보는데요, 이 영적 사고는 이렇게 공간적 사고보다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들과 영들 역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눈으로 보기 때문에, 그리고 공간이라는 게 없으면 그 대상(objects)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비록 천사들과 영들이 있는 영계에 지상의 공간처럼 보이는 공간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은 실제 공간이 아니고 단지 그렇게 보이는 외관(appearances)일 뿐입니다. 이는 지상의 경우처럼 고정되거나 일정하게 정해진 게 아니기 때문인데, 영계의 공간은 길어지거나 짧아질 수 있고, 바뀌거나 다양하게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계에서는 공간이라는 걸 이곳 자연계에서처럼 측량이라는 걸 해서 정할 수가 없는데요, 이런 건 그 어떤 자연적 사고로도(by any natural idea) 이해할 수 없고, 오직 영적으로만(only by a spiritual idea) 이해할 수 있는 겁니다. 영적으로 공간 간 거리(The spiritual idea of distances of space)는 선 간 거리(distances of good)나 진리 간 거리(distances of truth)와 같은데, 이는 선과 진리의 상태에 따른 친밀한 정도와 닮은 정도(affinities and likenesses)입니다. (DLW.7) That the Divine, that is, God, is not in space, although omnipresent and with every man in the world, and with every angel in heaven, and with every spirit under heaven, cannot be comprehended by a merely natural idea, but it can by a spiritual idea. It cannot be comprehended by a natural idea, because in the natural idea there is space; since it is formed out of such things as are in the world, and in each and all of these, as seen by the eye, there is space. In the world, everything great and small is of space; everything long, broad, and high is of space; in short, every measure, figure, and form is of space. This is why it has been said that it cannot be comprehended by a merely natural idea that the Divine is not in space, when it is said that the Divine is everywhere. Still, by natural thought, a man may comprehend this, if only he admit into it something of spiritual light. For this reason something shall first be said about spiritual idea, and thought therefrom. Spiritual idea derives nothing from space, but it derives its all from state. State is predicated of love, of life, of wisdom, of affections, of joys therefrom; in general, of good and of truth. An idea of these things which is truly spiritual has nothing in common with space; it is higher and looks down upon the ideas of space which are under it as heaven looks down upon the earth. But since angels and spirits see with eyes, just as men in the world do, and since objects cannot be seen except in space, therefore in the spiritual world where angels and spirits are, there appear to be spaces like the spaces on earth; yet they are not spaces, but appearances, since they are not fixed and constant, as spaces are on earth; for they can be lengthened or shortened; they can be changed or varied. Thus because they cannot be determined in that world by measure, they cannot be comprehended there by any natural idea, but only by a spiritual idea. The spiritual idea of distances of space is the same as of distances of good or distances of truth, which are affinities and likenesses according to states of goodness and truth. (DLW.7)

 

이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 수 있는데요, 먼저 사람의 사고가 그저 자연적이기만 하면,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지만, 그러나 공간 안에 계시는 건 아니라는 걸 도저히 이해 못 한다는 것과, 둘째, 그러나 천사들과 영들은 반대로 아주 명료하게 이해한다는 것, 셋째, 그 결과, 사람 역시 그가 영적 빛에 속한 것에 마음을 열면, 즉 영적 사고를 하면 이해할 수 있다는 것 등입니다. 이 모든 것은 생각하는 주체가 육(body)이 아니라 영(spirit)이기 때문이며, 영적 사고라는 것이 자연적이지가 않고 영적이기 때문입니다. (DLW.8) From this it may be seen that man is unable, by a merely natural idea, to comprehend that the Divine is everywhere, and yet not in space; but that angels and spirits comprehend this clearly; consequently that a man also may, provided he admits into his thought something of spiritual light; and this for the reason that it is not his body that thinks, but his spirit, thus not his natural, but his spiritual. (DLW.8)

 

그러나 많은 사람이 이걸 이해 못하는데요, 그 이유는 자연에 대한 그들의 사랑, 즉 그들의 사고를 자연에서 영적 빛으로 높이기를 꺼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오로지 공간 안에서만 생각할 수 있으며, 심지어 하나님에 관해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공간 안에서만 하는 건 자연의 확장(the expanse of nature)에 대해서 하는 것과 같은 건데요, 예를 들면, 하나님의 편재에 대해 말하면, ‘아, 하나님은 우주만큼 크신 분인가 보다’로 이해하는, 그런 식이지요.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시는 게 아니라는 이 사실이 먼저 전제되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즉 이런 사실에 대한 지식과 나름의 퍼셉션(perception, 지각) 없이는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하나님의 생명, 곧 사랑과 지혜에 관해 전혀 이해할 수 없으며, 그래서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의 섭리, 편재하심, 전지하심, 전능하심, 무한하심과 영원하심(divine providence, omnipresence, omniscience, omnipotence, infinity and eternity) 등 연이어 다루게 될 주제들에 대해서도 거의 아무것도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DLW.9) But many fail to comprehend this because of their love of the natural, which makes them unwilling to raise the thoughts of their understanding above the natural into spiritual light; and those who are unwilling to do this can think only from space, even concerning God; and to think according to space concerning God is to think concerning the expanse of nature. This has to be premised, because without a knowledge and some perception that the Divine is not in space, nothing can be understood about the Divine life, which is love and wisdom, of which subjects this volume treats; and hence little, if anything, about divine providence, omnipresence, omniscience, omnipotence, infinity and eternity, which will be treated of in succession. (DLW.9)

 

2023-06-16(D6)-C.1.4.1,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실 수 없으시다(God is not in Space) (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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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윗글은 스베덴보리 저,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Angelic Wisdom concerning Divine Love and Wisdom, 1763) 1장, ‘창조주(The Creator)의 세 번째 주제,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실 수 없으시다(The Divine is not in space)’에 나오는, 책 전체 글 번호로는 7, 8, 9번 글입니다.

 

 

아래는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보태는 몇 가지 설명 및 오늘의 권면입니다.

 

1. ‘비록 천사들과 영들이 있는 영계에 지상의 공간처럼 보이는 공간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은 실제 공간이 아니고 단지 그렇게 보이는 외관(appearances)일 뿐입니다

 

다음은 오늘 메인 글들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먼저 좀 읽어야 하는 그런 글들인데요,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19장, ‘천국 안의 표상과 외관(Representatives and Appearances in Heaven)’, 그리고 22장, ‘천국의 공간(Space in Heaven)’에서 부분 발췌했습니다만 꼭 각 장 전체를 다 읽어보시기를 당부드립니다.

 

먼저 ‘외관(appearances)’입니다.

 

천사들의 내면에 상응하는 모든 것은 그들의 내면을 그대로 그려내기 때문에 ‘표상(表象, representatives)’이라고도 불린다. 그리고 그것이 천사들 내면의 각 상태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외관(外觀, appearances)’이라고 불린다. 그렇게 불리긴 해도 사실 천사들 눈에 보이는 것과 그들의 여타 감각에 지각되는 것은 우리가 지상에서 지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생하며, 오히려 더 뚜렷하고 명료하며 사실적이다. (HH.175)

 

천국 안에 사물이 생기는 방식은 지상에 물질이 생기는 방식과 다르다. 천국의 모든 것은 주께로부터 오며, 천사들의 내면에 상응하여 형성된다. 천사들에게는 외면과 내면이 있다. 그들의 내면에 있는 모든 것은 사랑과 신앙에, 따라서 의지와 사고력에 관계되어 있다. 의지와 사고력은 사랑과 신앙의 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외면은 내면에 상응한다. 외면적인 것이 내면에 상응한다는 것은 위 12장, ‘천국의 모든 것과 사람의 모든 것은 상응한다(There Is a Correspondence of All Things of Heaven with All Things of Man)’와 13장, ‘천국은 지상의 모든 것과 상응한다(There Is a Correspondence of Heaven with All Things of the Earth)’에서 설명했다. 이러한 사실은 천국의 열과 빛에 대한 기록을 예로 들어 설명할 수 있다. 즉 천사들은 그들의 사랑의 속성에 상응하는 열을, 그들 지혜의 속성에 상응하는 빛을 지니는 것이다. cf. 15장, ‘천국의 빛과 열(Light and Heat in Heaven)’ 천사들의 감각에 느껴지는 다른 모든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HH.173)

 

다음은 ‘공간(空間, space)’입니다.

 

천국에서는 모든 것이 이 세상과 똑같이 장소와 공간 안에 위치한듯 보인다. 그러나 천사들은 장소나 공간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다. (HH.191)

 

영계에서의 장소변화는 모두 내면 상태의 변화(changes of state of the interiors)에 따라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장소변화는 바로 상태변화이다. 바로 이런 방법으로 나는 주님에 의해 천국으로 옮겨진 것이다. 그곳을 여행한 것은 나의 영혼이었으며, 내 몸은 지상의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천사들의 모든 이동도 이와 같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거리가 없으며, 거리가 없으므로 공간도 없다. 다만 공간 대신 상태와 그 변화가 있다. (HH.192)

 

장소변화가 이런 것이기 때문에, 가까운 것은 내면 상태가 비슷한 것이고, 먼 것은 내면 상태가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가까이 있는 이들은 비슷한 상태에 있는 이들이고, 떨어져 있는 이들은 서로 다른 상태에 있는 이들이다. 천국에서의 공간이란 오직 내면 상태에 상응하는 것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것(the external conditions corresponding to the internal states)이다. 세 천국이 서로 떨어져 있는 것, 그 각 천국 내의 공동체들 사이와 그 안의 개인들 사이에 간격이 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역시 같은 원리로 지옥과 천국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지옥은 천국과 완전히 반대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HH.193)

 

이 모든 것으로 보아 천국에도 지상과 같이 공간이 있지만 그것이 공간을 기준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고, 상태에 따라 정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천국의 공간은 이 세상 척도로 잴 수 없으며, 오직 그곳 천사들의 내면 상태에 따라 나타난다는 것도 알 수 있다. (HH.198)

 

그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주께서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사랑과 신앙의 정도에 맞게 임재하시기 때문이며, 주의 임재에 따라 모든 것이 가깝고 멀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주의 임재가 천국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또한 주의 임재하심에 따라 천사들은 지혜가 생기고, 그들의 생각이 확산되며, 생각의 확산에 의해 천국의 모두는 서로 교통한다. 한마디로, 이로 인해 그들은 사람이 자연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HH.198)

 

여기까지 읽으셨으면 다시 오늘의 메인 글들을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2. ‘천사들과 영들 역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눈으로 보기 때문에

 

사람이 아직 지상에 있을 동안은 그 영은 육체라는 옷을 입고 있습니다만, 사후, 즉 육체의 옷을 벗은 후에는, 이번에는 영체라는 옷을 입게 되지요. 육체에 눈이 있듯, 영체에도 영적 눈이 있습니다. 천사들과 영들은 자신의 영체에 속한 눈으로 천국 모든 사물을 보는 것입니다.

 

 

3. ‘그러나 천사들과 영들은 반대로 아주 명료하게 이해한다는 것, 그 결과, 사람 역시 그가 영적 빛에 속한 것에 마음을 열면, 즉 영적 사고를 하면 이해할 수 있다는 것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마5:45) 하신 주님 말씀처럼, 주님 비추시는 사랑의 빛, 영적 빛에는 무슨 조건 같은 거 없습니다. 그냥 내가 마음을 열고 마치 해바라기가 해를 바라듯 주님을 바라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으로 말미암는 입류(入流, influx)에 의해 서서히 내 안에서 영적 사고가 시작됩니다. 그러면서 나의 내면의 첫 번째 단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4. ‘퍼셉션(perception, 지각)’

 

다음은 퍼셉션에 대한 설명입니다.

 

오늘날은 퍼셉션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퍼셉션은 일종의 무슨 내적 느낌(a certain internal sensation) 같은 건데요, 오직 주님으로만 말미암으며, 어떤 게 선인지 진리인지를 아는 것으로, 태고 교회(the most ancient church)에 가장 잘 알려졌던 것입니다. 이 퍼셉션이라는 것은 천사들한테 있어 가장 퍼펙트(perfect)해서, 그들은 이것으로 무엇이 진리이고 선인지, 그리고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은 무엇이고, 자신들로 말미암은 것은 무엇인지, 또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상대방이 어떤 퀄러티(quality)의 소유자인지를 단지 그의 접근과 그가 가진 생각 한 토막으로 알아차리며 관련 지식을 얻습니다. 영적 인간은 퍼셉션 대신 양심이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양심조차 없지요. 많은 사람이 양심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며, 그러니 퍼셉션에 대해서는 더 모릅니다. (AC.104)

 

영어 ‘perception’을 ‘지각’으로 옮기지 않고 그대로 ‘퍼셉션’으로 적는 이유는, 우리말 ‘지각’ 하나로 다 담을 수 없는 더욱 많은 의미와 뉘앙스들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용어가 몇 개 더 있는데요, 예를 들면, ‘affection’이라든가 ‘charity’같은 것입니다. 각각 ‘애정’, ‘인애’ 등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마찬가지 이유로 저는 좀 망설여져서 거의 대부분, ‘어펙션’, ‘체어리티’로 그대로 옮기고 있습니다. 참고하세요.

 

위 104번 글을 통해 살짝 느끼셨겠지만 이것은 노아의 홍수 이후엔 사라지고 없는 영적 능력 내지는 통찰력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그 내면이 열린 사람들한테는 이 퍼셉션이 나타나고 있어 특히 주님의 아르카나에 대한 이해에 없어서는 안 될 통찰력이요, 빛이지 싶습니다. 제가 매일 이 컴펜디움 작업 때마다 맨 먼저 하는 기도가 바로 이 퍼셉션 기도, 곧 주님의 빛 비추어 주시기를 구하는 기도랍니다.

 

오늘 작업은 그 분량이 과연 역대급입니다. 이렇게 장편의 내용을 나누는 게 과연 유익이 있을까, 괜히 힘들게 해드리는 건 아닐까 좀 고민도 됩니다...

 

주님은 천국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천국보다 크셔서 천국 밖, 즉 피조 세계 밖에 계십니다. 그러니 더더욱 공간 안에 계실 수 없으시지요. 주님이 천국에 사람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건, 아까 살핀 것처럼 ‘표상’, ‘외관’으로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 안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주님한테서나 주님의 말씀한테서나 주님을 느끼는 것입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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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바로 사람이시다(God is very Man) (2)’ (2023/6/15)

 

 

하나님에 관하여’ 3강, ‘하나님이 바로 사람이시다’, 그 두 번째, 아래는 오늘의 메인 본문입니다.

 

신인(神人)에 대한 무슨 신관(神觀)(the idea of a Divine Man)이라는 게 없는 사람이 하나님 자신(the Divine Itself)을 생각할 때, 그런 사람의 신관은 확실하지가 않으며, 그런 불확실한 신관은 사실 신관이 아닙니다. 또 무한하거나 무한하지는 않은데 희미한,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런 우주로부터 신관을 형성하는 사람의 경우도, 그런 신관은 자연 숭배자들의 신관(the idea of the worshipers of nature)과 결합, 결국 자연으로 귀결되는데, 그래서 이 역시 전혀 신관 아닌 게 되는데요, 이와 같은 사실로 볼 때, 올바른 신관이 아닌 경우, 하나님과 신앙을 통한, 혹은 사랑을 통한 어떠한 결합도 없다는 게 분명합니다. 모든 결합은 어떤 대상을 필요로 하며, 그 결합의 효력은 그 대상의 퀄러티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을 그 신적 인성 측면에서(the Lord as to the Divine Human) 중재자(a Mediator)’, ‘중보자(an Intercessor)라고 합니다만, 그러나 주님이 중재, 중보하시는 대상은 주님 자신(Himself)이십니다. 하나님 자신(the Divine Itself)은 그 어떤 신관으로도 이해될 수 없다는 사실을 주님은 요한복음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If anyone without the idea of a Divine Man thinks of the Divine Itself, he thinks indeterminately, and an indeterminate idea is no idea; or he conceives an idea of the Divine from the visible universe without an end, or with an end in obscurity, which idea conjoins itself with the idea of the worshipers of nature, and also falls into nature, and thus becomes no idea. From this it is evident that there would not be any conjunction with the Divine through faith, nor through love. All conjunction requires an object, and the conjunction effected is according to the quality of the object. For this reason the Lord as to the Divine Human is called “a Mediator” and “an Intercessor,” but He mediates and intercedes with Himself. That the Divine Itself cannot be apprehended by any idea, is evident from the Lord’s words in John: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1:18) No one hath ever seen God; the only begotten Son, who is in the bosom of the Father, He hath set Him forth (John 1:18).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요5:37) Ye have never heard the voice of the Father, nor seen His shape (John 5:37).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것은, 자신들을 기준으로, 혹은 육(肉, the flesh)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에 대해 불확실한, 즉 무슨 확실한 관념이 없는 반면, 자신이나 육이 아닌, 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관념, 즉 자신들에게 사람 모습의 신관(an idea of the Divine under a human form)을 제공한다는 사실입니다. 천국의 천사들이 바로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the Divine)을 생각하고 있으며, 고대의 현자들(the wise ancients)역시 그렇게 생각했는데요, 그들은 자신들에게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the Divine Itself)으로 나타나실 때, 그래서 신인(神人, a Divine Man), 즉 사람 모습을 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AC.8705) Nevertheless, what is remarkable, all who think from themselves or from the flesh about God, think of Him indeterminately, that is without any determinate idea; whereas they who think of God not from themselves, nor from the flesh, but from the spirit, think about Him determinately, that is, they present to themselves an idea of the Divine under a human form. So the angels in heaven think of the Divine, and so the wise ancients thought, to whom also, when the Divine Itself appeared, it appeared as a Divine Man; (AC.8705)

 

2023-06-14(D4)-C.1.3.2, '하나님이 바로 사람이시다(God is very Man) (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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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윗글은 스베덴보리 저, 창세기, 출애굽기 주석인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The heavenly arcana contained in the Holy Scripture or Word of the Lord unfolded, beginning with the book of Genesis, 1749-1756) 출애굽기 18장,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이스라엘의 모든 송사를 모세 혼자 감당하느라 피차 고생하는 걸 보고 지혜로운 권면을 하는 장면인데요, 19절, ‘이제 내 말을 들으라 내가 네게 방침을 가르치리니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실지로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그 백성을 위하여 그 사건들을 하나님께 가져오며(Now hear my voice, I will counsel thee, and God shall be with thee; be thou for the people with God, and bring thou the words unto God.)’ 중 ‘너는 그 사건들을 하나님께 가져오며’에 대한 주석 일부입니다.

 

 

아래는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보태는 몇 가지 설명 및 오늘의 권면입니다.

 

1.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에 대한 라틴 표현인 ‘Deus(God)’ 대신 ‘Divinum(The Divine)’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아마도 deus라는 단어에 내포된, 로마 신화의 다신 숭배적 뉘앙스를 피하고자 함이 아니었을까라는,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라틴 버전을 우리말로 옮긴 김은경 교수의 주석을 인용합니다.

 

 

2. 오늘 메인 본문의,

 

이런 이유로, 주님을 그 신적 인성 측면에서(the Lord as to the Divine Human) ‘중재자(a Mediator)’, ‘중보자(an Intercessor)’라고 합니다만, 그러나 주님이 중재, 중보하시는 대상은 주님 자신(Himself)이십니다.

 

이 부분은, 솔직히 저도 그 의미가 잘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좀 더 살피다가 깨닫게 되면 그때 전해드리겠습니다.

 

 

3. ‘하나님 자신(the Divine Itself)은 그 어떤 신관으로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

 

아래는 주석 ‘Arcana Coelestia’ 8443번 글인데요, 이 글로 위 표현이 가리키는 바를 살짝 엿볼 수 있지 싶어 인용합니다.

 

신적 진리(Truth Divine)는 하나가 아닌, 여러 단계(degree, 등급)로 되어 있습니다. 맨 처음 두 단계는 주님으로부터 직접 나오는(proceeds immediately from the Lord)진리인데, 이는 천사들의 이해를 초월(above the angelic understanding)합니다. 셋째 단계에 있는 신적 진리는 가장 내적 천국, 즉 삼층천(the inmost or third heaven)에 있는 진리인데, 이는 인간은 전혀 깨달을 수 없는(cannot in the least be apprehended by)진리입니다. 넷째 단계의 신적 진리는 중간, 즉 이층천(in the middle or second heaven)에 있는 진리인데, 이 역시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neither is this intelligible to)진리입니다. 다섯째 단계의 신적 진리는 가장 바깥, 즉 일층천(in the ultimate or first heaven)에 있는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빛을 받은 사람은 어느 정도 지각할 수 있는(can be perceived in some small measure by man provided he is enlightened)진리입니다만, 그러나 여전히 그 가운데 거의 대부분은 인간의 언어(human words)로는 표현할 수 없지요. 그러나 만일 인간의 머릿속 아이디어로 떠오르게 되면, ‘아, 그 경우가 이런 거구나!’ 지각, 믿는 역량이 생기게 되는 그런 진리입니다. 여섯 째, 마지막 단계의 신적 진리, 이 진리가 바로 인간에게 맞는, 인간이 수용, 지각할 수 있는(with man, accommodated to his perception)진리이며, 그래서 말씀의 겉 글자의 뜻이 이것으로 된 것입니다. 말씀에 나오는 ‘구름(cloud)’이 표상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며, ‘구름 속 영광(the glory in the cloud)’의 표상 역시 바로 이 내적 진리들(the interior truths)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께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종종 구름 가운데서 나타나신 이유입니다. (AC.8443)

 

모세가 산에 오르매 구름이 산을 가리며;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가리더니 일곱째 날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 (출24:15-16)

 

 

4. ‘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관념, 즉 자신들에게 사람 모습의 신관(an idea of the Divine under a human form)을 제공한다는 사실입니다.

 

네, 이것이 오늘의 결론이겠습니다.

 

이것으로 3강, ‘하나님이 바로 사람이시다(God is very Man)’를 마치고, 다음은 4강,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시지 않는다(God is not in Space)’를 다루겠습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아멘!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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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바로 사람이시다(God is very Man) (1)’ (2023/6/13)

 

하나님에 관한 세 번째 주제, ‘하나님이 바로 사람이시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입니다.

 

 

모든 천국에서는 하나님은 사람이시라는 신관(神觀, idea of God) 말고 다른 건 없습니다. 이는 천국이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모두 사람 형태(form like a man)를 띠고 있기 때문인데요, 천국에서는 천국을 이루는 것이 천사들에게 있는 신성(神性, the Divine which is with the angels)이며, 천국에서는 생각(thought)이라는 것이 천국 형태(the form of heaven)를 따라 뻗어나가고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천사들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다른 식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살면서 천국과 결합되어 있는 사람들 역시 모두 그 자신 내적으로(interiorly), 즉 자신의 영으로 생각할 때는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데, 그건 바로 이런 사실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모든 천사와 모든 영이 그 형태에 있어 완전한 사람인 것은 바로 이 사실, 곧 하나님은 사람이시다라는 이 사실로 말미암습니다. 이런 결과는 천국의 형태에서 오는데요, 천국은 가장 큰 데와 가장 작은 데 어디서도 그 모습이 같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사람과 같은 형태라는 것은 저서, ‘천국과 지옥’ 8, 9, 10, 11(글 번호로는 HH.59-86)에서 보실 수 있으며, 생각이 천국 형태를 따라 뻗어나간다는 것도 관련 글(HH.203, 204)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이 창세기(1:26, 27)를 통해 알려졌는데요, 하나님은 또한 아브라함과 다른 사람들에게 사람으로 나타나셨습니다. (DLW.11) In all the heavens there is no other idea of God than that he is a man. This is because heaven as a whole and in part is in form like a man, and because it is the Divine which is with the angels that constitutes heaven and inasmuch as thought proceeds according to the form of heaven, it is impossible for the angels to think of God in any other way. From this it is that all those in the world who are conjoined with heaven think of God in the same way when they think interiorly in themselves, that is, in their spirit. From this fact that God is a man, all angels and all spirits, in their complete form, are men. This results from the form of heaven, which is like itself in its greatest and in its least parts. That heaven as a whole and in part is in form like a man may be seen in the work Heaven and Hell (n. 5986); and that thoughts proceed according to the form of heaven (n. 203, 204). It is known from Genesis (1:26, 27), that men were created after the image and likeness of God. God also appeared as a man to Abraham and to others. (DLW.11)

 

 

※ 윗글은 스베덴보리 저, ‘신적 사랑과 지혜(Angelic Wisdom concerning Divine Love and Wisdom, 1763)’ 1장, ‘창조주(The Creator)’의 네 번째 주제, ‘하나님이 바로 사람이시다(God is very Man)’에 나오는, 책 전체 글 번호로는 11번 글입니다.

 

 

※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은 모두 3부 63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래를 참고하세요.

 

1부 천국(Part I: Heaven)(1-43)

 

2부 영들의 세계와 인간의 사후 상태(Part II: The World of Spirits and Man’s State after Death)(44-55)

 

3부 지옥(Part III: Hell)(56-63)

 

 

※ 아래는 위 메인 본문에서 참고하라는 8-11장 제목입니다.

 

8장, ‘천국 전체는 사람의 형상을 이룬다(All Heaven in the Aggregate Reflects a Single Man)’(59-67)

 

9장, ‘천국의 각 공동체는 한 사람으로 보인다(Each Society in Heaven Reflects a Single Man)’(68-72)

 

10장, ‘천사는 완전한 사람 형태로 있다(Therefore Every Angel Is in a Complete Human Form)’(73-77)

 

11장, ‘천국이 사람 모습임은 주의 신적 인성에서 비롯된다(It Is from the Lord’s Divine Human That Heaven as a Whole and in Part Reflects Man)’(78-86)

 

 

아래는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보태는 몇 가지 설명 및 오늘의 권면들입니다.

 

1. 하나님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해서 천국의 형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요,

 

이는 마치 우리가 3차원 공간인 자연계에 갇혀(?) 살기 때문에, 그리고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태양계에 갇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필연적으로 우리의 모든, 사물을 인식하는 체계, 사고방식 자체가 ‘시간과 공간’, 즉 시공간을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천국 모든 구성원 역시 그곳 형태에 기반한 모든 사고 및 인식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며, 그래서 천국 형태의 출발점, 곧 천국이 비롯된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에 대한 이해가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이 형태를 따라 주님의 모든 신성이 온 피조 세계에 흐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모습의 사람인 것도, 그리고 이런 사람을 그 구성원으로 하는 천국 수많은 사회도, 더 나아가 그런 사회 전체로 이루어지는 천국 전체의 모습도 주님 앞에는 한 사람 모습인 것은 곧 주님이 사람 모습을 하신 사람이시기 때문이라는, 그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신비(arcana)를 우리는 지금 접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어제 나눈 HH.59번 글과 비슷한 글인데요, 천국이 사람 모습이라는, 천국 형태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 이유를 다시 한번 강조하는 글입니다.

 

천국이 ‘가장 큰 사람’(the greatest man)임을 밝힌 이유는, 이것을 먼저 알지 않으면 앞으로 천국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천국의 형상에 대한 분명한 개념도 가질 수 없고, 주님과 천국 간의 결합이나 천국과 사람 간의 결합, 또 영계에서 자연계로 흘러드는 입류(入流, influx)나 상응(相應, correspondence)에 대한 것도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앞으로 이 모든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 그 전제로 천국의 형태를 미리 설명한 것이다.’ (HH.67)

 

 

2.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은 다들 꼭 좀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그의 수많은 저서 중에 그래도 가장 포퓰러한 책이며, 어떤 면에서는 그의 저작들에 대한 입문서라 해도 괜찮은 책인데요,

 

그런데 참 놀라운 사실은, 이 책을 접하신 분들은 그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분들은 처음 읽는 순간, 마치 개안(開眼)을 하듯 영이 열리며, 그 모든 내용을 마치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그렇게 쭈욱 쭉 흡수하시는 반면, 또 어떤 분들은 아무리 읽어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다고 하셔요... 참고로, 저는 전자의 경우였고요, 후자와 같은 경우는 참... 저로서는 도저히 그 이유와 원인을 모르겠습니다. 이에 관한 스베덴보리가 남긴 글을 읽어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말입니다...

 

아래는 위 책을 구매할 수 있는 링크입니다. 그냥 편의상 알려드리는 것이고요, 저는 이 서점과 무슨 관계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https://bit.ly/45XE1jr

 

천국과 지옥

천국과 지옥, 그 중간의 영인들의 세계의 구조, 현상, 그곳 사람들의 상태와 생활을 보여준다. 사람이 사후 겪게되는 세계를 스베덴보리의 천사와의 대화, 관찰과 기록을 통해 알게되며 영의 실

spiritual-world.com

 

 

3. 다음은 위 메인 본문에서 참고하라고 한, ‘생각이 천국 형태를 따라 뻗어나간다’는, ‘천국과 지옥’ 23장, ‘천국의 형태가 구성원 간의 관계와 교통을 결정한다(The Form of Heaven That Determines Affiliations and Communications There)’ 203번 글 일부입니다.

 

사람은 천국 형태를 띠는 정도만큼 천국에 있고, 사실상 가장 작은 형태의 천국이 된다.(HH.57) 따라서 그 정도만큼 지성과 지혜가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개인의 사고력(understanding)에서 나오는 모든 생각, 그리고 의지(will)에서 나오는 모든 애정은 천국의 형태를 따라 놀라울 정도로 두루 퍼져나가 그곳 공동체들(societies)에 전달되며, 반대로 그 공동체들의 모든 생각과 애정도 개인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생각과 감정은 모두 자기 안에 있고 밖으로 뻗어나가지는 않는다고 믿는다. 그들이 보기에 생각은 멀리서가 아니라 머릿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다. 우리 시각이 멀리 있는 물체에 가 닿아 거기 보이는 형체에 초점을 맞추듯이, 우리 내적 시각(the interior sight)인 사고력의 시각도 영계에서 그렇게 뻗어나간다...

 


일곱 배로 밝은 빛 가운데 거니시는 하루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2023-06-13(D3)-C.1.3.1, '하나님이 바로 사람이시다(God is very Man) (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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