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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5.02.07 2. 눅1:26-38, ‘수태고지(受胎告知)’

 

 

수태고지(受胎告知)

 

 

26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27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28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29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매 30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31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34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35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36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37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38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눅1:26-38)

 

 

지난 몇 주 동안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침례(세례) 요한을 잉태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속뜻으로 침례 요한은 자연적 차원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글자로 표현된 말씀이라는 것이죠. 예를 들면,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직접 주신 신약 복음서의 말씀이나, 또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히신 말씀의 속뜻 같은 것이 바로 침례 요한으로 표상(表象, representative)되는 말씀입니다. 제가 이렇게 침례 요한의 의미를 설명했더니, 언젠가 어떤 성도님께서, 말씀의 속뜻이면 당연히 내적 진리인데, 왜 그것을 자연적 진리라고 하나요 하신 적이 있는데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말씀의 속뜻이 내적인 의미(internal sense, inner meaning), 즉 영적 의미인 것은 맞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이 곧 내적 진리라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된 것이고, 그런 만큼 그것은 내적 진리를 받기 위한 자연적인 그릇일 뿐 그것이 곧 내적 진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진리는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될 수 없는 아주 깊은 진리입니다. 그래서 비록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히신 말씀의 속뜻이 내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곧 내적 진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아시려면, 아래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약어 AC,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주석) 8443번 글의 ‘진리의 여섯 단계’를 참고하세요.

 

※ 다음은 AC.8443 일부 인용입니다.

 

신적 진리(神的, Truth Divine)라고 하는 신성한 진리는 한 단계(one degree)만이 아닌, 여러 단계로 되어 있습니다. 그 첫 번째와 두 번째 단계는 주님으로부터 직접(immediately) 나오는 진리인데, 이는 천사들의 이해조차 초월하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 단계부터는 피조물인 천사가 이해할 수 있으며, 이 진리는 가장 안쪽 천국, 곧 삼층천에 있는 진리와 같습니다. 이 진리는 그러나 인간은 조금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네 번째 단계는 중간 천국, 즉 이층천 진리와 같습니다만, 그러나 여전히 인간은 지각할 수 없는(neither... intelligible) 진리입니다. 다섯 번째 단계는 가장 바깥 천국, 곧 일층천 진리와 같습니다. 이 진리는 그 내면이 열린 사람이면 어느 정도 지각할 수 있는 진리입니다만, 그러나 여전히 그 대부분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혹시 이게 아이디어가 되면, ‘아, 그래서 그 경우가 그런 거구나!’ 하는 지각과 함께 믿는 역량이 생깁니다. Truth Divine is not of one degree, but of many. Truth Divine in the first degree, and also in the second, is that which proceeds immediately from the Lord; this is above the angelic understanding. But truth Divine in the third degree is such as is in the inmost or third heaven; this is such that it cannot in the least be apprehended by man. Truth Divine in the fourth degree is such as is in the middle or second heaven; neither is this intelligible to man. But truth Divine in the fifth degree is such as is in the ultimate or first heaven; this can be perceived in some small measure by man provided he is enlightened; but still it is such that a great part of it cannot be expressed by human words; and when it falls into the ideas, it produces the faculty of perceiving and also of believing that the case is so.

 

※ 그러니까 이 맨 마지막 문장은 그동안 인류를 이롭게 한 수많은 천재적 발견들을 말하는 것 같은데요, 우리가 천재라고 하는 사람들의 한 줄기 번쩍이는 생각들은 바로 이 다섯 번째 단계의 신적 진리인 일층천 진리가 인간의 아이디어로 나타난 것이라는 말인 것 같습니다.


(계속) 그러나 신적 진리의 여섯 번째 단계는 인간과 함께하는, 인간의 지각을 수용할 수 있는(with man, accommodated to his perception) 진리로, 곧 말씀의 겉 글자의 뜻으로 표현된 진리입니다. 이 뜻, 즉 이 진리는 구름으로, 그리고 그 내적 진리(the interior truths)는 구름 속 영광으로 표현됩니다. 이것이 곧 왜 여호와, 즉 주님이 그렇게 자주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에게 구름으로 나타나셨는가 하는 이유입니다. 가령 출24:15-16, 40:34-35, 왕상8:10-11, 마24:30 및 그 밖의 다른 곳에서 말입니다. But truth Divine in the sixth degree is such as is with man, accommodated to his perception; thus it is the sense of the letter of the Word. This sense, or this truth, is represented by the cloud, and the interior truths are represented by the glory in the cloud. This is the reason why Jehovah (that is, the Lord) so often appeared to Moses and to the sons of Israel in a cloud (see Exod. 24:15, 16; 40:34, 35; 1 Kings 8:10, 11; Matt. 24:30; and other places).

 

15모세가 산에 오르매 구름이 산을 가리며 16여호와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가리더니 일곱째 날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 (출24:15-16)

 

34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35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출40:34-35)

 

10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하매 11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함이었더라 (왕상8:10-11)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24:30)


(계속) 주님의 현현(顯現, The appearing of the Lord)은 신적 진리를 통해서이며, 더더욱 신적 진리이십니다. ‘구름’(a cloud)은 진리를 가리키며, 이 진리는 퍼셉션을 위해 제공되는 거라는 이 사실은 저세상에 있는 다음과 같은 표상들로 말미암는데요, 거기서는 더 높은 천국 천사들의 스피치는 그 아래 천국 천사들한테는 빛으로 나타나며, 밝기 또한 빛으로 말미암는 반면, 더 낮은 천국 천사들의 스피치는 그 위 천국 천사들이 볼 때는 밝은 구름으로, 그 진리의 퀄러티에 따라 다양하게, 그리고 짙거나 옅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으로 다음 말씀, 곧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 하는 말씀은, 지각에 맞춰 제공된 진리 안에 거하시는 주님의 임재를 상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The appearing of the Lord is by means of Divine truth, and moreover is Divine truth. That a “cloud” denotes truth accommodated to the perception, is from the representatives in the other life, where angelic speech of the higher heavens appears to those who are beneath as light, and also as the brightness from light; whereas the speech of the angels of a lower heaven appears as a bright cloud, in form various, and in density or rarity according to the quality of the truths. From all this it can be seen that by “the glory of Jehovah seen in the cloud” is signified the presence of the Lord in truth accommodated to the perception. (AC.8443, 변일국 역)

 

※ 그러니까 주님의 진리는 하나요 동일하지만, 그 진리를 받는 인간의 역량에 따라 다르게 보이며, 인간의 눈높이에 맞춰 조절되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유, 초등 어린이에게 고등학교, 대학교 수학을 가르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계속) 위 인용 글은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라는, 출16:10 말씀을 속뜻으로 푼, 주석한 글입니다. //

 

그렇다면 이러한 말씀을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에게 주실까요? 사가랴-엘리사벳 부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거짓 진리를 가르치는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주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삶으로 실천하려고 애썼던 사람들입니다.

 

※ 현 개신교를 포함한 기독교회 안에 이런 분들이 열에 서넛(너무 적게 잡았나요? ㅎㅎ)은 되지 싶습니다.

 

그것은 사가랴에 대해 유대 나라 헤롯왕 때 제사장이라고 말한, 아래 본문으로 알 수 있습니다.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눅1:5)

 

말씀에서 유대 나라는 주님 당시의 유대교회처럼 종말에 가까운 교회의 상태를 나타내며, 헤롯왕은 거짓 진리가 교회를 다스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왕은 진리, 또는 반대의 의미로는 거짓 진리를 나타내기 때문인데요, 그렇다면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왜 진정한 진리는 없고, 거짓 진리만 있을까요? 교회 지도자들이 진리를 자기 마음대로 왜곡, 모두 거짓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가랴는 지금 거짓 진리 안에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가랴는 또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그가 비록 잘못된 교회 안에 있기는 하지만 주님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제사장의 속뜻은 주님에 대한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선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가랴와 같은 사람, 즉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교회 안에 있지만, 그럼에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참된 진리의 말씀을 열어 주십니다. 그것이 사가랴-엘리사벳 부부에게 침례 요한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그동안 우리가 겪었던 많은 일이 떠오릅니다. 저는 그렇게 주님을 사랑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저의 어떤 면을 보셨는지 이렇게 귀한, 새로운 진리의 말씀을 제게 열어 주셨는데요, 그것은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진리의 말씀을 가지게 됐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할 따름입니다.

 

전에 사가랴에게 나타났던 천사 가브리엘이 이번에는 처녀 마리아에게 다시 나타났습니다. 26, 27절입니다.

 

26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27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천사가 찾아간 마리아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라고 합니다. 여기서 처녀는 순결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녀가 다윗의 자손 남자와 약혼했다는 것은 그가 진리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진리와 하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다윗의 자손은 주님의 교회를 뜻하고, 남자는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자손 남자와 약혼했다는 것은 그의 안에 이미 주님의 교회를 통해 흘러 들어오는 진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천사가 찾아간 곳은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아주 작은 동네였습니다. 왜 천사는 갈릴리로 갔을까요? 큰 성 예루살렘도 있고, 다른 많은 곳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말씀에서 갈릴리는 이방인을 뜻하기 때문인데요, 그러니까 천사가 갈릴리 나사렛으로 간 이유는, 주님이 교회 밖에 있는 이방인에 오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교회가 타락, 더 이상 회복 가능성이 없을 때는 새로운 교회를 세우시는데,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 인류의 역사는 교회의 역사, 교회 시대의 역사인데요, 지금까지 크게 세 번의 교회 시대가 있었고, 지금은 기독교회라고 하는 네 번째 교회 시대인데, 이마저 사실은 그 끝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동안 있었던 교회들은 순서대로 태고교회, 고대교회, 유대교회 및 현 기독교회입니다. 각 교회 시대마다 종말이 있었고, 그로 인한 새 교회의 일어남이 있었는데요, 그러니까 태고교회의 종말이 노아의 홍수로 표현되었고, 이후 노아교회라고도 하는 고대교회가 일어났고, 이 고대교회는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마감, 이후 율법을 가진 유대교회가 있어나고... 하는 식이지요. 교회의 종말은 교회 안에 주님의 신성, 곧 주님의 선과 진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 곧 황폐한 상태가 되는 것이며, 이때 하나의 시대가 마감되고, 새 시대를 여시는 것인데요, 비유하자면, 촛대가 옮겨지는 것입니다. 주님 오실 때 유대교회가 바로 이런 상태였습니다.

 

말씀에서는 이방인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이란 말은 상황에 따라서 좋은 의미로 쓰일 수도 있고, 나쁜 의미로 쓰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출애굽기에 나오는 이방인들은 주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적하는 모든 민족과 모든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쁜 의미입니다. 그런 반면, 주님 당시의 이방인들은 좋은 의미의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때는 오히려 교회가 주님을 대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릴리로 표상되는 이방인들은 타락한 교회의 거짓 진리와 타협하지 않는 사람들이며, 그러므로 참된 진리를 갈망하는 모든 사람이었습니다. 말씀에서는 그런 이방인들을 거지 나사로 같은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사랑하고 애타게 갈망했는지는 그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 부스러기로라도 배를 채우려 했다는 것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음식은 교회를 통해 내려오는 진리와 선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에 나오는 마리아는 그러한 이방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말씀의 겉 글자의 뜻으로 보면 마리아는 분명 확실한 유대인이었습니다. 다만 속뜻으로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제 그를 통해서 새 교회를 세우시려고 천사 가브리엘을 보내신 것입니다.

 

28, 29절입니다.

 

28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29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매

 

이 장면은 주님께서 천사를 통해 마리아에게 임재하시는 순간인데요, 천사의 말을 들은 마리아는 깜짝 놀라며,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합니다. 크게 놀란 것이지요. 마리아가 놀라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 내면으로 흘러 들어오실 때 인간이 느끼는 공포와 전율 같은 것인데요, 그것은 주님에 의해 새롭게 태어나는 사람들만 느끼는 거룩한 공포입니다. 성경 여러 장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 저 역시도 이 정도는 아니지만 이런 영적 체험을 몇 번 했는데요, 나중에 기회 되면 자세히 나누겠습니다. 이런 체험은 한 개인의 영적 성장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유익이 됩니다. 많은 유익 중 한두 가지는, 첫째, 영계가 분명히 있다는 걸 확실히 지각하게 됩니다. 신앙이라는 게 무슨 개인의 욕심과 소원을 살짝 영성의 옷을 입혀 흉내 내는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건 아무리 그래도 그저 겉 사람의 일일 뿐이지요. 그러나 천국은 오직 속 사람으로만 가는 나라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둘째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걸 무슨 누구의 설명 없이도 그냥 알게 되며, 그래서 그냥 무조건 꿇어 엎드리게 됩니다. 이걸 다른 말로는 자아 부인이라 할 수도 있겠지요. 주님을 이렇게 만난 사람이라야 참된 회심을 했다 할 수 있습니다. 네, 뭐, 이 외에도 아주 많습니다.

 

30절, 31절입니다.

 

30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31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임재하실 때에는 누구나 그렇게 극도의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말씀에 보면, 다니엘이나 주님의 제자 요한이 주님을 뵈었을 때, ‘마치 죽은 자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때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면서 그들의 몸을 만지시지요. 주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만지실 때, 그때 주님의 생명이 우리 안으로 흘러들어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죽었던 영혼이 되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철저히 자아를 내려놓을 때, 그러니까 죽은 자같이 될 때, 그때 주님께서 우리의 그 죽은 영혼을 살려주십니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주님께서 무서워 말라 말씀하시는 순간입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합니다. 처녀가 아이를 낳는다는 말의 속뜻은, 주님을 순결하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진리로 오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름도 미리 알려주시는데, 바로 ‘예수’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보내주시는 그 진리 안에 선(善, good) 그 자체이신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냥 평범한 진리가 아닌, 그 진리 안에 선이신 주님께서 계시는, 그런 진리입니다. 말씀에서 그리스도는 진리의 측면에서 주님을, 그리고 예수는 선의 측면에서 주님을 각각 나타냅니다. 그래서 천사는 아들의 이름은 예수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진리 안에 선이신 주님께서 계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그런 진리를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천사의 전언은 계속됩니다. 32절과 33절입니다.

 

32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천사는 태어날 아기를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가 누구십니까?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태어날 아기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그 태어날 아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처녀를 통해 당신의 아들을 낳으신다는 의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의 의미를 확실하게 이해해야 하는데요, 하나님의 아들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께서 세상에 오실 때 입으신 인성(Divine Human)입니다. 왜 그것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냐면, 주님이 입으신 인성은 보통 인간들처럼 어머니로부터 받은 인성이 아니고, 여호와로부터 받은 거룩한 인성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님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렇게 해서 입으신 이 몸이라는 옷이 곧 주님의 인성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 안에는 신성과 함께 거룩한 인성이 있습니다. 주님에게 신성과 인성이 함께 있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언제나 사람 모습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주님을 사람이 아닌, 어떤 다른 것으로 인식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의 또 다른 의미는 신적 진리(Divine Truth)입니다. 왜 신적 진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냐면, 신적 진리는 마치 태양에서 빛이 나오는 것처럼, 사랑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빛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적 진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진짜 인간의 아들처럼 아버지로부터 나온 아들이 아니구요,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빛이시기 때문에, 인간적 수사(修辭)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주님이 입으신 인성과 신적 진리는 상응적으로는 서로 같은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이 입으신 인성이 바로 신적 진리를 의미한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신적 진리나 신적 인성이나 모두 사랑 자체이신 주님의 드러나심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아들이란 개념을 보다 확실히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신적 인성이나 신적 진리는 모두 사랑 자체이신 주님이 걸치고 계신 옷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의 인성은 곧 신적 진리인 것입니다.

 

34절입니다.

 

34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조금 전에 남자는 진리를 나타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따라서 남자를 알지 못한다는 말은 진리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어떻게 주님께서 오실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하는 말은 그가 그만큼 주님 앞에 겸손하다는 뜻입니다. 마리아의 속뜻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방인입니다. 그 말은 그가 타락한 교회의 거짓 진리를 모른다는 것일 뿐, 그에게 진정한 진리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실제로 마리아의 내면에는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가 결합되어 있었는데, 그것을 본문에서는 ‘마리아가 다윗의 자손 남자와 정혼한 사이’라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35절입니다.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성령이 마리아를 덮는다고 말했습니다. 성도님들께서는 성령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성령, 성령, 성령이란 말을 많이들 하시는데 성령이 무엇입니까? 성령은 주님으로부터 직접 나오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성령 안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주님이 그 안에 계세요. 그렇기 때문에 성령은 주님이 하시는 모든 일 가운데 살아 움직입니다. 그 살아있는 능력의 진리가 바로 성령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하는 일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 안에 있는 악하고 거짓된 것을 몰아내시구요, 잘못된 생각이나 신념들을 교정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우리 인격을 바꿔주십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성령이 우리에게 오실 때 이루어지는 역사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이 마리아를 덮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고 합니다. 이 말은 마리아에게 오시는 신적 인성이신 주님은 바로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적 인성이신 주님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36절입니다.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서로 친족관계라는 사실입니다. 말씀에서 친족은 그냥 친척이라는 뜻이 아니구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선이나 진리의 종류가 서로 비슷하다는 뜻입니다. 즉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친족이란 말은 두 사람이 서로 비슷한 종류의 선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마 그래서 주님께서 그들에게 거룩한 아들들을 주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있는 선은 어떤 선입니까? 그것은 주님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는 선입니다. 그냥 이웃에 대한 사랑이 아니구요, 주님에 대한 순결한 사랑에서 나온 선입니다. 그러면 그들에게는 서로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신앙이 서로 달랐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첫 번째는, 엘리사벳이 늙도록 아이가 없었다는 사실로 알 수 있습니다. 엘리사벳이 늙도록 아이가 없었다는 말은 자기는 신앙이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왜 엘리사벳은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했을까요? 그가 알고 있는 진리가 거짓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교회에서 가르치는 거짓 진리를 진리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된 진리를 가르치는 교회를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거짓 진리가 사가랴-엘리사벳으로 표상되는 신앙인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했으며, 심지어 사가랴는 천사를 만난 후에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주님 앞에 신앙을 고백하지 못한다는 뜻이라고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사가랴-엘리사벳 부부에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그들의 마음이 지극했기 때문입니다.

 

말씀에는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신앙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하는데요, 36절에서는 ‘엘리사벳이 늙어서 아기를 배었고 아기를 가진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고, 26절에서는 ‘천사 가브리엘은 여섯째 달에 마리아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여기서 ‘여섯’이란 표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는데요, 이 ‘여섯’이란 수는 주님을 위한 수고와 싸움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가랴-엘리사벳 부부는 침례 요한으로 표상되는 새로운 말씀을 받은 다음에 비로소 내적 싸움을 시작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전의 거짓 진리를 버리고,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싸움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아기를 잉태하기 전부터 이미 내적 싸움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찾은 건 여섯째 달이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의 신앙이 이렇게 서로 달랐기 때문에 사가랴-엘리사벳 부부에게는 자연적 차원의 말씀을 주시고, 마리아에게는 주님으로부터 직접 나오는 내적 진리를 주신 것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내적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주님이십니다. 37절, 38절입니다.

 

37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38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마리아는 스스로 주님의 여종이라 말하고, 주님의 뜻이 그대로 자기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랐습니다. 마리아의 이런 모습은 사가랴가 천사의 말을 듣고도 믿지 못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배우면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로 오신다는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14:21)

 

말씀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서로 신앙이 다르기 때문에, 주님은 각자의 신앙 상태에 따라 오신다는 것 또한 아셨을 것입니다. 사가랴-엘리사벳 부부로 표상되는 사람은 다시 말씀드리지만, 타락한 교회 안에 있는 신앙인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주님을 깊이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거짓 진리의 영향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진정한 신앙을 가지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또한 신앙의 열매를 맺기도 어려웠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거짓 진리가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가랴는 천사의 말을 들었을 때,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벙어리가 된 것입니다. 그가 주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벙어리가 되었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다는 뜻이구요, 그러므로 참된 신앙 고백을 할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고, 또 선하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가랴-엘리사벳 부부에게 새로운 말씀을 주셨는데요, 그 새로운 말씀이 바로 침례 요한입니다. 주님은 그 말씀을 통해서 그들이 자신들에게 있는 거짓 진리를 몰아내고, 진정한 신앙을 가지길 참으로 원하셨습니다.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진 지 여섯 달 되었다’는 말은 그들이 새로운 말씀을 통해 거짓 진리를 몰아내는 싸움을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그에 비해 마리아는 속뜻으로 보면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신앙은 거짓 진리에 오염되어 있지 않은 그런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갈 때가 여섯째 달이라고 말한 것은, 그가 이미 주님을 만나기 전에 주님을 위한 싸움을 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내적 싸움을 이미 하고 있었던 것이죠. 주님은 그런 마리아에게 오셔서 새 교회를 세우시려 하십니다.

 

그러면 사가랴-엘리사벳 부부에게 주시는 아들과 마리아에게 주시는 아들은 서로 어떻게 다를까요?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사가랴-엘리사벳 부부에게 주신 아들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된 말씀입니다. 그것은 신앙 없는 사람들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한 말씀입니다. 거짓 진리에 빠진 사람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한 새로운 말씀입니다. 그에 비해 마리아에게 주시는 아들은 주님 자신이세요. 신적 진리 자체이신 주님께서 직접 오셔서 그들과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진리는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주님이 그 안에 살아계신, 놀라운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그 진리가 우리에게 흘러들어올 때, 세상에서 오는 어떤 유혹이나 난관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그런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오시는가 하는 것은 각자의 신앙에 따라 다릅니다. 부디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께 죽은 자처럼 자기를 낮추시기를, 마리아가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그리고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며 자기를 낮춘 것처럼 낮추시기를 바랍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실 것입니다.

 

 

68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69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눅1:68-69)

 

아멘

 

원본

2016-04-24(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2-25(D7)

한결같은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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