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3:7)

 

AC.212

 

눈이 밝아져(eyes opened)는 내적 딕테이트(interior dictate)를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의 유사한 표현들로부터 분명합니다. 예를 들어, 발람은 환상들을 본 결과, 자신을 가리켜 눈을 감았던 자(man whose eyes are opened)라고 합니다 (24:3). That by having the “eyes opened” is signified an interior dictate is evident from similar expressions in the Word, as from what Balaam says of himself, who in consequence of having visions calls himself the “man whose eyes are opened.” (Num. 24:3)

 

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24:3)

 

또한 요나단은 꿀을 맛본 후, 그것이 악한 일임을 내적으로 깨닫게 되었을 때, 자신의 눈이 밝아졌다(eyes saw)고 말하는데, 이는 그가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었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삼상14:29). And from Jonathan, who when he tasted of the honeycomb and had a dictate from within that it was evil, said that his “eyes saw,” that is, were enlightened, so that he saw what he knew not. (1 Sam. 14:29)

 

요나단이 이르되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삼상14:29)

 

더욱이 말씀에서 (eyes)은 자주 이해(understanding)를 뜻하며, 따라서 거기서 나오는 내적 딕테이트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시편은 Moreover in the Word, the “eyes” are often used to denote the understanding, and thus an interior dictate therefrom, as in David: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13:3) Lighten mine eyes, lest I sleep the sleep of death (Ps. 13:3),

 

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eyes)은 이해를 뜻합니다. 에스겔에서도 이해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켜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have eyes to see, and see not) (12:2)라고 말합니다. where “eyes” denote the understanding. So in Ezekiel, speaking of those who are not willing to understand, who “have eyes to see, and see not.” (Ezek. 12:2)

 

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 (12:2)

 

이사야서의 In Isaiah: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6:10) Shut their eyes ,lest they see with their eyes (Isa. 6:10),

 

라는 말씀 역시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도록 영적으로 눈멀게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한 모세는 백성에게 denotes that they should be made blind, lest they should understand. So Moses said to the people,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29:4) Jehovah hath not given you a heart to know, and eyes to see,and ears to hear (Deut. 29:4),

 

고 말하는데,여기서 마음(heart)은 의지를, ‘(eyes)은 이해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사야서에서는 주님께서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실 것(he should open the blind eyes) (42:7)이라 하며, where “heart” denotes the will, and “eyes” denote the understanding. In Isaiah it is said of the Lord, that “he should open the blind eyes.” (Isa. 42:7)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42:7)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The eyes of the blind shall see out of thick darkness and out of darkness) (29:18)라고 말합니다. And in the same prophet: “The eyes of the blind shall see out of thick darkness and out of darkness (Isa. 29:18).”

 

그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29:18)

 

 

해설

 

이 본문은 AC.211의 ‘interior dictate’를 스베덴보리가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설명입니다. 그는 자신의 해석을 단순한 추측이나 상상으로 제시하지 않고, 말씀 전체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상응의 법칙에 근거하여 설명합니다. 창3:7의 ‘눈이 열렸다’를 이해하려면 먼저 말씀에서 ‘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눈 = 이해(understanding)’라는 상응입니다. 자연계에서 눈이 빛을 받아 사물을 보듯이, 영적 차원에서는 이해가 진리의 빛을 받아 사물을 분별합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눈이 밝아진다는 것은 단순히 시력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밝아지고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발람의 경우가 좋은 예입니다. 그는 자신을 ‘눈이 열린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육체의 눈이 갑자기 좋아졌다는 뜻이 아니라, 영적인 것을 볼 수 있는 상태에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요나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꿀을 먹은 뒤 실제로 눈이 번쩍 뜨인 것이 아니라, 정신이 맑아지고 상황을 분별하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눈이 밝아졌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예들을 통해 창3:7의 ‘눈이 열렸다’ 역시 같은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어떤 새로운 초능력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또한 뱀이 약속한 것처럼 하나님 같은 지혜를 얻은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상태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눈이 열린 것은 지혜의 획득이 아니라 자기 상태의 인식입니다.

 

특히 AC.212에서 중요한 것은 ‘눈이 열렸다’와 ‘interior dictate’가 연결된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내적 지시란 어디선가 음성이 들리는 현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해가 빛을 받아 어떤 사실을 즉시 알게 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는 발람, 요나단, 다윗, 모세, 이사야, 에스겔의 본문들을 모두 가져와 ‘눈’이 이해를 뜻한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결국 AC.212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창3:7에서 ‘눈이 열렸다’는 것은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는 뜻이 아니라, 이해가 아직 남아 있던 지각의 흔적에 의해 자신들의 실상을 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처럼 된 것을 본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이전의 순진무구함 가운데 있지 않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눈뜸은 영광의 눈뜸이 아니라 자각의 눈뜸이며, 승리의 눈뜸이 아니라 상실의 눈뜸입니다.

 

또한 이 본문은 말씀 전체에서 ‘눈’이라는 표현을 읽는 중요한 원리를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눈은 단순한 신체 기관이 아니라 진리를 받아들이는 이해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눈먼 자의 눈을 밝히신다’는 말씀은 단순한 육체적 치유를 넘어, 이해를 열어 진리를 보게 하시는 주님의 사역을 의미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AC.212는 단순한 어휘 해설이 아니라, 말씀 전체를 읽는 상응적 해석의 한 모범을 보여 주는 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화

 

1. ‘민24:3’

 

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민24:3)

 

 

‘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민24:3)라는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창3:7의 ‘그들의 눈이 열렸다’는 표현이 단순히 육체적 시력의 변화가 아니라 내적 이해와 영적 인식의 열림을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발람은 여기서 자신을 ‘눈이 열린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육체의 눈이 갑자기 뜨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발람은 이미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눈이 열렸다’는 말은 영적 차원의 어떤 것을 보게 되었다는 뜻이며, 더 정확히는 주어진 계시와 환상을 이해하고 지각할 수 있는 상태에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합니다. 만일 말씀에서 ‘눈이 열렸다’는 표현이 단순히 육체의 눈을 가리킨다면, 발람의 이 표현은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해와 인식을 가리킨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발람은 환상을 보았고, 그 환상의 의미를 어느 정도 인식하는 상태에 들어갔기 때문에 자신을 ‘눈이 열린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AC.212에서 발람의 사례는 ‘눈 = 이해’라는 상응을 증명하는 하나의 중요한 예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3:7의 ‘눈이 열렸다’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아담과 하와가 육체적으로 새로운 시력을 얻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상태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이해가 작동하여 자신들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순진무구한 상태에 있지 않음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발람의 경우에도 ‘눈이 열림’이 반드시 높은 영적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발람은 계시를 받았지만 끝내 참된 의미에서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눈이 열렸다’는 표현 자체의 의미이지, 발람의 영적 수준이 아닙니다. 곧 ‘눈이 열림’은 어떤 사물을 이해하고 인식하게 되는 내적 작용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AC.212에서 민24:3을 인용하는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말씀에서 ‘눈이 열렸다’는 표현은 반복적으로 ‘이해가 열렸다’, ‘내적 인식이 주어졌다’, ‘어떤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뜻으로 사용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창3:7의 ‘눈이 열렸다’ 역시 새로운 지혜를 얻었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들의 영적 상태를 보게 된 내적 자각을 의미한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발람의 ‘눈이 열린 사람’은 AC.211의 ‘interior dictate’, 곧 ‘내적 지시’ 또는 ‘내적 자각’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례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2. ‘삼상14:29’

 

요나단이 이르되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삼상14:29)

 

 

‘요나단이 이르되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삼상14:29)이라는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눈이 밝아졌다’는 표현이 단순히 육체적 시력의 회복이 아니라 이해와 인식의 밝아짐을 뜻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본문의 역사적 의미를 보면, 요나단은 전투 중 지쳐 있었고, 숲에서 발견한 꿀을 조금 맛본 뒤 기력을 회복합니다. 그래서 문자적으로는 몸에 힘이 돌아오고 정신이 맑아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더 깊은 의미를 봅니다. 요나단은 단순히 눈이 잘 보이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보다 더 분명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으로 ‘눈이 밝아졌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AC.211의 ‘interior dictate’와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3:7의 ‘그들의 눈이 열렸다’를 육체적 변화가 아니라 내적 인식의 작용으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성경 전체의 사용법과 일치함을 보여 주기 위해 요나단의 말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눈으로 새로운 대상을 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태와 주변 상황을 더 명확히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즉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이해가 밝아졌다는 뜻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꿀’입니다. 말씀에서 꿀은 종종 선한 즐거움이나 선에서 오는 기쁨을 상징합니다. 요나단은 꿀을 맛본 뒤 활력을 얻고 판단력이 맑아졌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볼 때, 선과 결합된 기쁨이 이해를 밝게 한다는 원리와도 상응합니다. 그래서 ‘눈이 밝아졌다’는 표현은 더욱 자연스럽게 이해의 계몽(enlightenment)을 가리키게 됩니다.

 

이 때문에 AC.212에서 요나단의 사례는 발람의 사례와 나란히 놓입니다. 발람은 계시와 환상을 통해 ‘눈이 열린 사람’으로 불렸고, 요나단은 꿀을 맛본 뒤 ‘눈이 밝아졌다’고 말합니다. 두 경우 모두 공통점은 육체의 눈이 아니라 내적 인식과 이해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매우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말씀에서 ‘눈’은 자주 이해를 의미하며,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이해가 밝아지고 어떤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3:7의 ‘눈이 열렸다’도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들의 상태를 인식하게 된 내적 자각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기 위한 성경적 근거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단의 ‘눈이 밝아졌다’는 말은 곧 ‘나는 이제 더 분명히 알게 되었다’는 뜻이며, 이것이 AC.212에서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핵심입니다.

 

 

3. ‘시13:3’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시13:3) Lighten mine eyes, lest I sleep the sleep of death (Ps. 13:3),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시13:3)를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눈’이 단순한 육체의 시각 기관이 아니라 이해(understanding)와 영적 인식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다윗은 고난 가운데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눈을 밝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다윗은 단순히 시력이 좋아지기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것이 육체의 눈만을 뜻한다면, 뒤에 이어지는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라는 표현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다윗이 두려워하는 것은 육체적 수면이 아니라 영적 무감각과 영적 죽음입니다.

 

그래서 ‘눈을 밝히소서’는 ‘내 이해를 밝히소서’, ‘내가 진리를 보게 하소서’, ‘내 내적 인식을 깨워 주소서’라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그리고 ‘사망의 잠’은 거짓과 악 안에서 진리를 보지 못하는 상태, 곧 영적으로 잠든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 전체는 ‘주님, 제 이해를 밝히셔서 제가 영적 죽음의 상태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라는 기도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점 때문에 이 구절을 AC.212에 인용합니다. 창3:7의 ‘눈이 열렸다’ 역시 같은 원리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이 열린다는 것은 새로운 시력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열리는 것이며, 눈이 밝아진다는 것은 영적 사물들을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이 시편 구절은 AC.211의 ‘interior dictate’와도 잘 연결됩니다. 다윗은 외부 정보를 더 많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이해할 수 있는 빛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내적 조명, 내적 인식, 내적 지시와 매우 가까운 개념입니다. 사람은 단순히 많은 정보를 안다고 해서 진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밝아질 때 비로소 진리를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구절은 ‘빛’과 ‘생명’, ‘어둠’과 ‘죽음’의 관계를 보여 줍니다. 이해가 밝아질수록 사람은 영적으로 살아 있고, 이해가 어두워질수록 영적으로 잠들어 갑니다. 그래서 다윗은 눈의 밝아짐과 사망의 잠을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놓고 있습니다.

 

결국 AC.212에서 시13:3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 전체에서 ‘눈’이 이해를 의미하고, ‘눈이 밝아짐’은 진리의 빛을 받아 이해가 계몽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창3:7의 ‘눈이 열렸다’도 육체적 변화가 아니라 이해의 작용이며, 자신들의 상태를 인식하게 된 내적 자각을 의미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성경적 예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기도는 ‘시력을 주소서’가 아니라 ‘이해의 빛을 주소서’라는 기도이며, 바로 그 점 때문에 AC.212의 논증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4. ‘겔12:2’

 

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 (겔12:2)

 

 

‘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겔12:2)를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눈’이 단순한 육체의 눈이 아니라 이해(understanding)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이 말씀은 이상한 표현입니다. 그들은 분명 눈이 있었고 실제로 사물을 보고 있었습니다. 또한 귀도 있었고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들을 가리켜 ‘볼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여기서 ‘보다’와 ‘듣다’는 육체적 감각 작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이해와 수용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합니다. 사람은 눈으로 말씀을 읽을 수 있고, 귀로 설교를 들을 수 있으며, 입으로 신앙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해가 닫혀 있고 의지가 거부하고 있다면, 영적으로는 여전히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의 백성들은 육체적으로는 정상인이었지만 영적으로는 맹인과 귀머거리였습니다.

 

이것은 AC.211의 ‘interior dictate’와도 연결됩니다. 창3:7에서 아담과 하와의 ‘눈이 열렸다’는 것은 이해가 어떤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에스겔 12:2의 사람들은 눈은 있으나 이해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보지 못합니다. 즉 한쪽은 내적 인식이 열리는 상태이고, 다른 한쪽은 내적 인식이 닫혀 있는 상태입니다.

 

특히 본문은 그 이유를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고 밝힙니다. 다시 말해 문제는 지능 부족이 아닙니다. 정보를 몰라서도 아닙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의지가 진리를 받아들이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자주 말하는 원리와도 일치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따라 보게 되고,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은 보아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AC.212에서 이 구절은 매우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만일 눈이 단순히 육체의 기관만을 의미한다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는 말씀은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눈이 이해를 의미한다면 이 말씀은 매우 자연스러워집니다. 그들은 육체의 눈으로는 보았지만, 이해의 눈으로는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겔12:2를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눈’이 이해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창3:7의 ‘눈이 열렸다’도 육체적 시력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의 문제이며, 자신들의 상태를 인식하게 된 내적 자각을 의미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성경적 근거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의 백성들은 눈이 있으면서도 보지 못한 사람들이고, 창3:7의 사람들은 비로소 자신들의 상태를 보게 된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5. ‘사6:10’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사6:10) Shut their eyes, lest they see with their eyes (Isa. 6:10),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사6:10)를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눈’이 육체적 시각이 아니라 이해(understanding)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문자적으로만 읽으면 이 구절은 매우 이상하게 들립니다. 마치 주님께서 사람들이 진리를 보지 못하도록 일부러 눈을 감기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그렇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말씀은 종종 인간 편에서 일어나는 일을 마치 주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표현하는데, 실제로는 사람들이 스스로 진리를 거부하고 이해를 닫아 버리는 상태를 묘사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눈을 감기게 하라’는 말은 육체의 시력을 빼앗는다는 뜻이 아니라, 이해가 더 이상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반대로 ‘눈으로 본다’는 것은 영적 진리를 이해하고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사야의 말씀은 ‘그들이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영적 상태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AC.212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만일 ‘눈’이 단순히 육체의 눈이라면, ‘눈을 감기게 하라’는 말은 단지 시력을 잃게 하라는 뜻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눈’이 이해를 의미한다면, 이 말씀은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과 관련된 매우 깊은 영적 의미를 갖게 됩니다.

 

특히 이 구절은 앞서 본 에스겔 12:2와도 연결됩니다. 에스겔에서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고 했고, 이사야에서는 ‘눈이 감기게 하라’고 말합니다. 두 경우 모두 핵심은 육체적 시각이 아니라 영적 이해입니다. 즉, 이해가 열리면 진리를 보고, 이해가 닫히면 진리를 보지 못합니다.

 

이것은 AC.211의 ‘interior dictate’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아담과 하와의 ‘눈이 열렸다’는 것은 자신들의 상태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의 경우는 그 반대입니다. 이해가 닫혀 있기 때문에 진리를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창3:7의 ‘눈이 열림’과 사6:10의 ‘눈이 감김’은 서로 정반대의 영적 상태를 보여 줍니다.

 

더 깊이 보면,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인간의 자유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진리를 보여 주시지만, 사람이 자기 own과 자기 사랑을 붙들고 있으면 이해가 어두워져 결국 보아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눈이 감기는 원인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상태에 있습니다.

 

결국 AC.212에서 사6:10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 전체에서 ‘눈’이 이해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창3:7의 ‘눈이 열렸다’는 것도 육체적 변화가 아니라 이해가 열려 자신들의 상태를 인식하게 된 것을 뜻합니다. 이사야의 ‘눈이 감기게 하라’는 말씀은 그 반대의 경우로서, 이해가 닫혀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상태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6. ‘신29: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신29:4) Jehovah hath not given you a heart to know, and eyes to see, and ears to hear (Deut. 29: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신29:4)를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마음’, ‘눈’, ‘귀’가 각각 의지(will), 이해(understanding), 순종 또는 수용(obedience and reception)에 대응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눈’이 단순한 육체의 기관이 아니라 이해를 의미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려고 합니다.

 

이 구절의 특징은 세 가지가 나란히 등장한다는 데 있습니다. ‘깨닫는 마음’, ‘보는 눈’, ‘듣는 귀’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서로 비슷한 말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는 각각 다른 내적 기능을 가리킵니다. ‘마음(heart)’은 사랑하고 원하는 의지를, ‘눈(eyes)’은 진리를 분별하는 이해를, ‘귀(ears)’는 들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보는 눈을 주지 아니하셨다’고 말할 때, 그것은 백성들이 시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은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고, 광야의 기적들을 보았으며, 만나와 메추라기를 경험했습니다. 육체의 눈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보는 눈이 없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그 사건들의 영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점이 AC.212의 핵심과 연결됩니다. 창3:7에서 ‘눈이 열렸다’는 것은 시력이 생겼다는 뜻이 아니라 이해가 열렸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신29:4에서 ‘보는 눈을 주지 아니하셨다’는 것은 이해가 아직 열리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두 본문은 서로 반대 방향에서 같은 원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구절은 스베덴보리가 자주 설명하는 ‘의지와 이해’의 구조를 잘 보여 줍니다. 그는 여기서 특별히 ‘마음은 의지, 눈은 이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AC.209에서 본 ‘태고 사람들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가졌고, 홍수 이후 사람들은 진리로부터 선을 가졌다’는 설명과도 연결됩니다. 의지와 이해는 인간의 두 중심 기능이며, 말씀은 이를 ‘마음’과 ‘눈’이라는 상응적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모세가 여기서 ‘여호와께서 주지 아니하셨다’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것도 문자적 표현입니다. 주님이 일부러 눈을 주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스스로 닫혀 있었기 때문에 그 빛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말씀은 이런 상태를 종종 ‘주님께서 하지 않으셨다’는 형식으로 표현합니다.

 

결국 AC.212에서 신29:4를 인용하는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보는 눈’이란 육체의 시력이 아니라 이해를 의미하며, ‘깨닫는 마음’은 의지를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창3:7의 ‘눈이 열렸다’는 것도 이해가 열려 자신들의 상태를 인식하게 된 것을 뜻합니다. 신29:4는 이러한 상응 관계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는 구절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이를 AC.212의 중요한 증거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7. ‘사42:7’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사42:7)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사42:7)를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눈’이 이해(understanding)를 의미하며, ‘눈을 밝힌다’는 것이 단순한 육체적 치유가 아니라 영적 이해를 열어 진리를 보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문자적으로 이 구절은 메시아의 사역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지상에 계실 때 실제 맹인들의 눈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기적 자체보다 그 안에 담긴 더 깊은 의미에 주목합니다. 왜냐하면 본문이 단지 맹인의 시력 회복만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어지는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는 표현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눈먼 자’는 육체적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또한 ‘감옥’과 ‘흑암’은 거짓과 무지 안에 갇혀 있는 영적 상태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 전체는 주님께서 인간을 무지와 거짓의 상태에서 건져 내어 진리의 빛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사역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AC.212에서는 이 구절이 매우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만일 ‘눈’이 단순한 육체의 기관만을 의미한다면,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힌다’는 말씀은 의학적 치유의 의미에 머물게 됩니다. 그러나 ‘눈’이 이해를 의미한다면, 이 말씀은 주님께서 인간의 내적 이해를 열어 주시고 진리를 보게 하신다는 훨씬 깊은 의미를 갖게 됩니다.

 

특히 이 구절은 AC.211의 ‘interior dictate’와도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창3:7에서 사람들은 아직 남아 있는 지각의 흔적에 의해 자신들의 상태를 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는 그보다 더 적극적으로, 주님께서 친히 눈먼 자들의 눈을 열어 주십니다. 즉 이해를 밝히시고, 진리를 보게 하시며, 거짓의 감옥에서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다.

 

또한 이사야의 이 예언은 복음서에서 실제로 성취됩니다. 주님께서는 육체의 맹인을 고치셨을 뿐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사람들의 이해를 열어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기적은 언제나 영적 의미의 표상이기도 합니다. 육체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은 이해의 눈을 뜨게 하시는 더 큰 사역을 보여 주는 상응적 행동이었습니다.

 

결국 AC.212에서 사42:7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 전체에서 ‘눈’이 이해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힌다’는 것은 진리를 보지 못하던 사람들의 이해를 열어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창3:7의 ‘눈이 열렸다’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에도 직접 연결됩니다. 눈이 열린다는 것은 단순한 시력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의 문제이며, 주님께서 주시는 빛 안에서 자신의 상태와 진리를 보게 되는 영적 각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8. ‘사29:18’

 

그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사29:18)

 

 

‘그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사29:18)를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듣는다’는 것이 단순히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고, ‘본다’는 것이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해(understanding)를 통해 진리를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이 구절은 귀머거리와 맹인이 기적적으로 회복되는 장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영적인 상태에 관한 예언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본문은 단순히 육체의 장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책의 말을 듣는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책’은 말씀을 가리키며, 따라서 ‘듣는다’는 것은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마찬가지로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본다’는 표현도 육체적 시력 회복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어둠과 캄캄함은 영적으로는 무지와 거짓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 상태에 있던 사람이 이제 보게 된다는 것은, 이해가 열려 진리의 빛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맹인’은 단순히 육체적 장애인이 아니라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던 사람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점 때문에 이 구절을 AC.212에 인용합니다. 창3:7의 ‘눈이 열렸다’는 표현이 단순한 시력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사야 29장에서도 ‘맹인의 눈이 본다’는 말은 이해가 밝아진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으므로, 창3:7 역시 같은 원리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구절은 AC.211의 ‘interior dictate’와도 잘 연결됩니다. 사람은 진리의 빛이 비칠 때 비로소 자신의 상태와 주님의 뜻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 전에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해를 밝히실 때, 이전에는 어둠으로 보이던 것들이 의미를 갖기 시작하고, 이전에는 들리지 않던 말씀의 소리가 마음에 들리기 시작합니다.

 

또한 이 구절은 AC.212 전체의 논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역할도 합니다. 발람의 ‘눈이 열린 사람’, 요나단의 ‘눈이 밝아졌다’, 다윗의 ‘눈을 밝히소서’, 에스겔의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 이사야의 ‘눈을 감기게 하라’, 모세의 ‘보는 눈을 주지 아니하셨다’, 그리고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힌다’는 말씀까지 모두 하나의 원리를 증언합니다. 곧 말씀에서 ‘눈’은 이해를 뜻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AC.212에서 사29:18을 인용하는 이유는, ‘맹인의 눈이 본다’는 표현이 이해의 계몽과 진리의 인식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창3:7의 ‘눈이 열렸다’는 표현 역시 육체적 변화가 아니라 이해가 열려 자신의 상태를 인식하게 된 것을 뜻한다는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사야가 말하는 ‘맹인의 눈이 본다’는 것은 단순한 기적의 약속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의 이해를 열어 진리의 빛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구원의 약속인 것입니다.

 

 

 

AC.211, 창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AC.211-21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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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1.심화

 

1. ‘interior dictate

 

interior dictate’는 직역하면 내적 지시’, ‘내면의 지시’, ‘내적인 일깨움 정도가 됩니다. 여기서 interior’는 단순히 마음속(inner)이라는 뜻보다 더 깊은 차원의 속 사람에 속한’, ‘내적인’, ‘영적인’이라는 의미를 가지며, ‘dictate’는 누군가가 말을 받아 적게 하는 받아쓰기(dictation)의 어원이지만, 스베덴보리 문맥에서는 안에서 알려 주는 작용’, ‘내적으로 지시하는 것’, ‘직접 깨닫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따라서 AC.211에서의 interior dictate’는 어떤 음성이 귀에 들리는 현상을 뜻하지 않습니다. 또한 양심의 가책과도 완전히 동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남아 있던 지각(perception)의 흔적이 작용하여, 자신들의 상태를 즉각적으로 알게 되는 내적 깨달음에 가깝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당신이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해주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설명을 듣기 전부터 이미 ,내가 잘못했구나 하고 안에서 분명히 아는 상태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interior dictate’는 이런 종류의 직접적인 내적 인식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AC.211에서 그들의 눈이 밝아져’라는 것은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는 뜻이 아니라, ‘interior dictate’, 곧 내적 지시에 의해 자신들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순진무구한 상태에 있지 않고, 악 가운데 있음을 알게 되고 인정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번역으로는 내적 지시’가 가장 무난하고 정확해 보입니다. 다만 해설에서는 내면의 소리’, ‘내적 일깨움’, ‘마음 깊은 곳에서의 자각’, ‘설명 없이도 즉시 알게 되는 내적 인식 등의 표현을 함께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interior dictate’는 소리라기보다 지각이며, 음성이라기보다 직접적인 내적 앎에 가까운 개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전체 저작을 놓고 보면, 이 표현은 특히 태고교회의 특징과 잘 어울립니다. 그들은 오늘날 사람들처럼 논증과 추론을 통해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직접 진리를 지각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interior dictate’란 누군가의 설명이나 설득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 안에서 자신의 상태를 곧바로 알게 되는 내적 작용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211 interior dictate’는 내적 지시’이면서 동시에 지각의 마지막 흔적’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AC.211, 창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AC.211-21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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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3:7)

 

AC.211

 

그들의 눈이 밝아져(eyes being opened), 내적 딕테이트(interior dictate), 즉 아직 조금 남아 있는 퍼셉션에 의해 자신들이 벗은 줄(naked), 곧 이전처럼 더 이상 순진무구한 상태에 있지 않고, 악 가운데 있음을 알게 되고 인정하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Their “eyes being opened” signifies their knowing and acknowledging, from an interior dictate, that they were “naked,” that is, no longer in innocence, as before, but in evil.

 

 

해설

 

이 구절은 창세기 37절의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라는 말씀을 해설하는 대목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 구절을 ‘지식을 얻게 되었다’, ‘무언가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전혀 다르게 읽습니다. 그에게 ‘눈이 밝아짐’은 지혜의 획득이 아니라 자기 상태에 대한 자각입니다.

 

특히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적 딕테이트(an interior dictate)라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선 AC.193에서도 타락 이후 사람들 안에 아직 ‘지각의 남은 흔적(remnant of perception)이 남아 있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완전히 무감각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상태에 들어갔는지를 어느 정도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남아 있는 내적 빛에 의해 자신들의 실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눈이 밝아져’는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다’는 뱀의 약속이 성취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높아진 것이 아니라 떨어졌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지혜를 얻은 것이 아니라 순수함을 잃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눈 밝아짐은 승리의 눈 밝아짐이 아니라 상실의 눈 밝아짐입니다.

 

또한 여기서 ‘벗은(naked)은 단순히 옷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벌거벗음은 선과 진리의 보호를 잃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전에는 순진무구함과 주님에 대한 신뢰 안에 있었기 때문에 영적으로 보호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 own이 중심이 되었고, 그 결과 그 보호가 벗겨진 것입니다.

 

그래서 AC.211은 매우 중요한 균형을 보여 줍니다. 타락한 사람들은 아직 완전히 죽은 상태가 아닙니다. 그들 안에는 여전히 자신들의 상태를 알아볼 수 있는 최소한의 내적 빛, 퍼셉션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빛은 그들을 기쁘게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보게 된 것은 자신들의 지혜가 아니라 자신들의 상실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우리 자신의 영적 경험과도 닿아 있습니다. 사람은 때때로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 깨달음은 언제나 즐겁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아프고 부끄럽고 불편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바로 그 자각이 은혜의 시작입니다. 완전히 어두워진 사람은 자신이 어둠 속에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211의 ‘눈이 밝아져’라는 표현은 단순한 지식의 획득이 아니라, 아직 남아 있는 지각의 흔적에 의해 자신들의 참된 상태를 보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벗은’은 그들이 더 이상 이전의 순진무구함 가운데 있지 않고, 자기 own과 악의 영역 안으로 들어왔음을 인정하게 된 것을 뜻합니다. 이 장면은 타락의 한가운데에서조차 주님께서 완전히 꺼뜨리지 않으신 마지막 내적 빛이 여전히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매우 인상적인 대목입니다.

 

 

심화

 

1. ‘interior dictate

 

 

AC.211, 심화 1, ‘interior dictate’

AC.211.심화 1. ‘interior dictate’ ‘interior dictate’는 직역하면 ‘내적 지시’, ‘내면의 지시’, ‘내적인 일깨움’ 정도가 됩니다. 여기서 ‘interior’는 단순히 마음속(inner)이라는 뜻보다 더 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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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2, 창3:7, ‘interior dictate’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이해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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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0, 창3:6,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own’의 정의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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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0.심화

 

2. ‘own에 갇힌 자들의 생생한 실존을 보고

 

실제로 지옥에 가서 이 own에 갇힌 자들의 생생한 실존, 곧 비참한 상태를 본 스베덴보리로서는 더더욱 이 own 설명이 생생했겠어요...

 

 

그렇습니다. 저는 AC.210 같은 본문을 읽을 때마다, 이것이 단순히 책상 앞에서 세운 신학 이론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스베덴보리는 own은 지옥적이며 저주받은 것이다’라고 추상적으로 말하고 끝내지 않습니다. 그는 이후 수많은 저작들에서 실제 영계와 지옥의 주민들을 관찰한 내용을 반복해서 기록합니다. 그래서 그의 own 설명은 철학자의 정의라기보다 목격자의 증언에 가깝게 느껴집니다.

 

특히 스베덴보리가 지옥에서 본 사람들은 대개 자신들이 악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가장 옳고, 가장 지혜롭고, 가장 정당하다고 확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중심에 두고 모든 것을 해석하기 때문에, 미움을 사랑이라 부르고, 지배욕을 정의라 부르고, 복수를 정당한 권리라 부르며,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을 가장 합리적인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AC.210 그들은 미움을 사랑이라 부르고, 어둠을 빛이라 부른다’는 말은 바로 이런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지옥의 고통이 외부에서 가해지는 형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자기 own 안에 갇혀 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남보다 위에 서고 싶어 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며, 지배하고 싶어 하고, 자신이 중심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똑같이 그렇게 원하기 때문에, 결국 서로 충돌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속이고, 공격하게 됩니다. 그 결과가 바로 지옥의 비참함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own은 단순한 성격상의 결함이나 작은 이기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을 주님으로부터 분리시키고, 동시에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분리시키는 원리입니다. 주님과의 연결이 끊어지고, 이웃과의 연결도 끊어지며, 결국 자기 자신만 남게 됩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자기 자신만 남은 상태가 바로 가장 깊은 고독과 불행의 상태가 됩니다.

 

이 점에서 보면, 스베덴보리가 own을 그렇게 강하게 표현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단지 교리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끝이 어디로 가는지를 실제로 보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마치 절벽 아래를 직접 내려다본 사람이 그 길로 가지 마시오’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 말은 이론적 경고가 아니라 체험적 경고입니다.

 

한편으로는, 스베덴보리가 own을 가장 강하게 비판하는 만큼 주님의 자비도 가장 강하게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인간 안에 own이 얼마나 깊이 뿌리박혀 있는지를 보았고, 또한 그 own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주님께서 얼마나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지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저작을 읽다 보면, 인간에 대한 평가는 매우 엄격하지만, 주님에 대한 평가는 끝없이 따뜻하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어쩌면 목사님 말씀처럼, 실제로 지옥에 가서 own에 갇힌 영들의 삶을 보고 돌아온 사람이라면 AC.210 같은 문장을 이렇게밖에 쓸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는 단순히 own은 나쁘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것이 끝내 어떤 모습이 되는지를 보았다’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210의 무게는 단순한 교리의 무게가 아니라, 영원한 세계를 목격한 증인의 무게처럼 다가오는 것입니다.

 

 

 

AC.210, 창3:6,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own’의 정의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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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0, 심화 1, ‘그저 악과 거짓이 될 뿐’(become mere evil and falsity)

AC.210.심화 1. ‘그저 악과 거짓이 될 뿐’(become mere evil and falsity) 사람은 이렇게 함으로써 그저 악과 거짓이 될 뿐이며, In this way men become mere evil and falsity, (AC.210) 이 문장은 처음 읽으면 매우 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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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0.심화

 

1. ‘그저 악과 거짓이 될 뿐(become mere evil and falsity)

 

사람은 이렇게 함으로써 그저 악과 거짓이 될 뿐이며, In this way men become mere evil and falsity, (AC.210)

 

 

이 문장은 처음 읽으면 매우 충격적으로 들립니다. 마치 스베덴보리가 인간 안에는 선한 것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인간 존재 자체를 정죄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여기서 ‘주님으로부터 분리된 인간’, 곧 own 안에만 머무는 인간이 어떤 상태가 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문장의 앞부분에 있는 ‘이렇게 함으로써(In this way)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갑자기 악과 거짓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앞에서 그 과정을 설명했습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중심에 두고, 주님보다 자기 자신을 신뢰하며,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기 시작하면, 사람은 점차 모든 것을 자기 own의 관점으로 판단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함으로써’ 사람은 악과 거짓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은 사랑의 왜곡을 의미하고, ‘거짓’은 이해의 왜곡을 의미합니다. 사랑이 왜곡되면 악이 되고, 이해가 왜곡되면 거짓이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인간 안의 의지와 이해가 모두 own에 의해 지배될 때, 사람 전체가 악과 거짓의 방향으로 기울게 된다고 말합니다.

 

또한 이 표현은 인간에게서 주님께 속한 것을 제거하고 생각해 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인간 안에 있는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오며, 인간 안에 있는 모든 진리도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만일 사람이 그것들을 모두 자기 것으로 돌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거부한다면 무엇이 남겠습니까? 바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악과 거짓뿐이라는 것이 그의 논리입니다.

 

그래서 AC.210의 이 문장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혐오스러운 존재라는 선언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생명과 진리의 근원이 될 수 없다는 선언에 가깝습니다. 인간은 달과 같아서 스스로 빛을 만들어 내는 존재가 아니라, 빛을 받아 비추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달이 태양과의 연결을 끊고 자기 스스로 빛을 내겠다고 하면 결국 어둠만 남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런 상태를 ‘그저 악과 거짓일 뿐(mere evil and falsity)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말은 동시에 주님의 자비를 더욱 크게 드러냅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 힘으로 선해지는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주님의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희망은 자기 own에 있지 않고, 주님께 있습니다. AC.210의 강한 표현은 인간을 절망시키기 위한 말이 아니라, 인간이 어디를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기 위한 말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사람은 그저 악과 거짓이 될 뿐입니다’라는 말은 ‘인간은 본래 쓸모없는 존재다’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분리된 own만 남게 되면, 결국 악과 거짓밖에 남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의도에 가장 가깝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그는 인간의 own을 경계하면서도, 동시에 주님의 인플럭스와 자비를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입니다.

 

 

 

AC.210, 심화 2, ‘own에 갇힌 자들의 생생한 실존을 보고’

AC.210.심화 2. ‘own에 갇힌 자들의 생생한 실존을 보고’ 실제로 지옥에 가서 이 own에 갇힌 자들의 생생한 실존, 곧 비참한 상태를 본 스베덴보리로서는 더더욱 이 own 설명이 생생했겠어요... 그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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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0, 창3:6,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own’의 정의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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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the tree was good for food, and that it was pleasant to the eyes, and a tree to be desired to give intelligence, and she took of the fruit thereof and did eat, and she gave also to her man [vir] with her, and he did eat. (3:6)

 

AC.210

 

사람의 own이 무엇인지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own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되는 모든 악과 거짓이며, 주님이나 말씀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는 데서 나오는 것이고, 또한 감각과 기억 지식[sensualiter et scientifice]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함으로써 그저 악과 거짓이 될 뿐이며, 따라서 모든 것을 왜곡된 시선으로 보게 됩니다. 악한 것을 선한 것으로, 선한 것을 악한 것으로 보며, 거짓된 것을 참된 것으로, 참된 것을 거짓된 것으로 봅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은 모든 것인 양 여깁니다. 그들은 미움을 사랑이라, 어둠을 빛이라 부르며, 죽음을 생명이라, 그 반대로도 부릅니다. 말씀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저는 자(lame)맹인(blind)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own인데, 이것은 그 자체로 지옥이며, 저주받은 것입니다. What man’s own is may be stated in this way. Man’s own is all the evil and falsity that springs from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and from not believing in the Lord or the Word but in self, and from supposing that what cannot be apprehended sensuously and by means of memory-knowledge [sensualiter et scientifice] is nothing. In this way men become mere evil and falsity, and therefore regard all things pervertedly; things that are evil they see as good, and things that are good as evil; things that are false they see as true, and things that are true as false; things that really exist they suppose to be nothing, and things that are nothing they suppose to be everything. They call hatred love, darkness light, death life, and the converse. In the Word, such men are called the “lame” and the “blind.” Such then is the own of man, which in itself is infernal and accursed.

 

 

해설

 

이 본문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own’의 정의 가운데 가장 강렬하고도 중요한 대목 중 하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own’을 단순히 ‘자기 자신’, ‘개성’, ‘자아’ 정도로 이해하기 쉽지만, 스베덴보리에게 own은 훨씬 더 깊고 심각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스스로 존재하고 스스로 판단하며 스스로 살아간다고 믿는 상태 전체를 가리킵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own을 단순한 도덕적 악행으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그 뿌리를 ‘주님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는 것’에서 찾습니다. 다시 말해, 문제의 핵심은 행동 이전에 중심의 이동입니다. 원래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생명과 빛을 받아 살아야 하는 존재인데, own은 그 자리에 자기 자신을 앉혀 놓습니다. 그래서 ‘내가 판단하겠다’, ‘내가 결정하겠다’, ‘내가 기준이다’라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이와 연결하여 스베덴보리는 또 하나의 특징을 지적합니다. own은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AC.194-209에서 계속 설명된 창3의 뱀의 원리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즉, 감각으로 보이지 않으면 믿지 않고, 학문적으로 증명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태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단순한 지적 오류가 아니라 own이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그 결과 사람은 현실을 거꾸로 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본문의 중심입니다. 그는 악을 선으로, 선을 악으로 보며, 거짓을 진리로, 진리를 거짓으로 봅니다. 이것은 단순한 판단 실수가 아닙니다. 영적 시력이 뒤집힌 상태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없는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모든 것처럼 여긴다고 말합니다.

 

특히 ‘그들은 미움을 사랑이라, 어둠을 빛이라, 죽음을 생명이라 부른다’는 표현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own의 본질을 드러내는 설명입니다. own은 선을 악으로, 악을 선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까지 바꾸어 버립니다. 그래서 자신이 미워하면서도 사랑한다고 믿고, 어둠 속에 있으면서도 빛 가운데 있다고 생각하며, 영적으로 죽어 있으면서도 자신이 가장 살아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이런 사람들을 ‘저는 자’와 ‘맹인’이라고 부른다고 설명합니다. 저는 자는 바르게 걸을 수 없는 사람이며, 맹인은 바르게 볼 수 없는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그들은 진리의 길을 제대로 걸을 수 없고, 선과 진리를 올바로 분별할 수도 없습니다. 문제는 눈이 없어서가 아니라, 눈이 있으면서도 잘못 보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매우 강렬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바로 사람의 own이며, 그것은 그 자체로 지옥이요, 저주받은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는 인간 자체를 저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주님과 분리될 때, 남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서 주님의 생명과 빛을 제거하면 남는 것은 자율성과 독립성이 아니라, 왜곡된 사랑과 왜곡된 판단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AC.210은 단순한 인간 비관론이 아닙니다. 이 본문은 오히려 인간이 왜 주님을 필요로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말하는 것처럼, 인간 안에 있는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리고 인간이 그것을 자기 것으로 착각하는 순간, 곧 own이 중심이 되는 순간, 그는 점차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을 뒤바꾸어 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AC.210이 경고하는 own의 본질이며, 동시에 창세기 3장 전체가 보여 주는 타락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심화

 

1. ‘그저 악과 거짓이 될 뿐(become mere evil and falsity)

 

 

AC.210, 심화 1, ‘그저 악과 거짓이 될 뿐’(become mere evil and falsity)

AC.210.심화 1. ‘그저 악과 거짓이 될 뿐’(become mere evil and falsity) 사람은 이렇게 함으로써 그저 악과 거짓이 될 뿐이며, In this way men become mere evil and falsity, (AC.210) 이 문장은 처음 읽으면 매우 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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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own에 갇힌 자들의 생생한 실존을 보고

 

 

AC.210, 심화 2, ‘own에 갇힌 자들의 생생한 실존을 보고’

AC.210.심화 2. ‘own에 갇힌 자들의 생생한 실존을 보고’ 실제로 지옥에 가서 이 own에 갇힌 자들의 생생한 실존, 곧 비참한 상태를 본 스베덴보리로서는 더더욱 이 own 설명이 생생했겠어요... 그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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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1, 창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AC.211-21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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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9, 창3:6, ‘창3의 표현들이 의지, 애정의 언어들인 이유’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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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9.심화

 

1. ‘이해(understanding)와 관련된 표현들

 

그러나 말씀에서 홍수 이후 사람들을 다룰 때에는, 의지보다는 이해(understanding)와 관련된 표현들이 사용됩니다. Where the Word treats of the people who lived after the flood, such expressions are used as relate not so much to the will as to the understanding; (AC.209)

 

혹시 저렇게 사용된 말씀의 예를 든다면?

 

 

좋은 질문입니다. AC.209를 읽으면 ‘의지와 관련된 표현’과 ‘이해와 관련된 표현’이 실제로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집니다. 스베덴보리가 의도한 차이를 가장 쉽게 보려면 창세기 3장과 홍수 이후 인물들, 특히 노아와 아브라함 이야기를 비교해 보면 됩니다.

 

3:6의 표현들을 보십시오. ‘먹기에 좋고’, ‘눈에 즐겁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는 말들이 반복됩니다. 이것들은 모두 사랑, 욕망, 즐거움, 끌림 같은 의지의 언어입니다. 무엇을 생각하는가보다 무엇을 원하고 사랑하는가에 초점이 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선을 사랑하는 상태에서 진리를 알았기 때문에, 말씀도 그들의 내적 애정과 의지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방식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반면, 홍수 이후를 보면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노아에 대해서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행하였다’와 같은 표현들이 나옵니다. 여기서는 무엇이 옳은지 배우고, 이해하고, 순종하는 모습이 강조됩니다. 또한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는 ‘보라’, ‘들으라’, ‘알라’, ‘기억하라’, ‘생각하라’, ‘깨달으라’와 같은 이해와 인식에 관련된 표현들이 훨씬 많이 나타납니다.

 

선지서들에서도 같은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듣고 깨달으라’, ‘보아도 알지 못한다’, ‘마음으로 깨닫지 못한다’, ‘지혜와 명철’, ‘지식과 총명’ 같은 표현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런 표현들은 인간의 이해와 판단, 분별과 관련된 언어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사랑의 상태가 중심이었다면, 홍수 이후 사람들에게는 진리를 배우고 이해하는 과정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복음서에서 하신 말씀도 흥미롭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깨닫지 못하느냐?’, ‘어찌하여 생각하지 못하느냐?’ 같은 말씀들이 많습니다. 물론 복음서의 최종 목적은 사랑이지만, 접근 방식은 이해를 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 역시 홍수 이후 인류의 구조와 관련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빌리면, 태고 사람들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무엇을 사랑하는가?’를 주로 말합니다. 반면 홍수 이후 사람들은 ‘진리로부터 선을 가집니다’. 그래서 말씀은 ‘무엇을 알고 있는가?’, ‘무엇을 이해하는가?’, ‘무엇을 분별하는가?’를 더 많이 말합니다.

 

그래서 AC.209의 요점은 단순히 문체의 차이가 아닙니다. 말씀의 언어 자체가 인간 구조의 변화에 맞추어졌다는 것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의지의 언어가, 홍수 이후 사람들에게는 이해의 언어가 더 적합했습니다. 그 결과 창3에서는 ‘먹기에 좋고’, ‘눈에 즐겁고’, ‘탐스럽다’가 중심이 되지만, 이후 말씀에서는 ‘듣다’, ‘알다’, ‘깨닫다’, ‘명철’, ‘지혜’, ‘총명’ 같은 표현들이 점점 더 전면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AC.209, 창3:6, ‘창3의 표현들이 의지, 애정의 언어들인 이유’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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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the tree was good for food, and that it was pleasant to the eyes, and a tree to be desired to give intelligence, and she took of the fruit thereof and did eat, and she gave also to her man [vir] with her, and he did eat. (3:6)

 

AC.209

 

여기 사용된 표현들,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the tree was good for food, pleasant to the eyes, and desirable for giving intelligence)는 표현들은, 태고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성향에 맞추어진 것들로서, 특별히 의지(will)와 관련하여 사용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악은 의지로부터 흘러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에서 홍수 이후 사람들을 다룰 때에는, 의지보다는 이해(understanding)와 관련된 표현들이 사용됩니다. 이는 태고 사람들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가졌지만, 홍수 이후 사람들은 진리로부터 선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The expressions here employed, as that “the tree was good for food, pleasant to the eyes, and desirable for giving intelligence,” are such as were adapted to the genius of those who lived in that most ancient time, having especial reference to the will, because their evils streamed out from the will. Where the Word treats of the people who lived after the flood, such expressions are used as relate not so much to the will as to the understanding; for the most ancient people had truth from good, but those who lived after the flood had good from truth.

 

 

해설

 

이 본문은 매우 짧지만, 스베덴보리 인간론 전체의 핵심 구조가 들어 있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그는 여기서 왜 창세기 3장의 표현들이 유난히 ‘욕망’, ‘즐거움’, ‘탐스러움’ 같은 의지적 표현들로 가득 차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오늘날 사람들과 인간 구조 자체가 달랐습니다. 그들은 먼저 사랑했고, 그 사랑 안에서 진리를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중심은 이해가 아니라 의지였습니다. 그들은 선을 사랑했기 때문에 진리를 알았지, 진리를 배우고 분석해서 선을 찾아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태고 사람들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가졌다’고 말합니다.

 

이 때문에 그들의 타락 역시 의지에서 시작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보통 먼저 잘못 생각하고, 그 생각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태고교회 사람들은 먼저 사랑이 변질되었습니다. 사랑이 변하자 지각이 흐려졌고, 그 결과 진리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창3:6에는 ‘먹기에 좋고’, ‘눈에 즐겁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 같은 표현이 나오는 것입니다. 모두 의지와 애정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말들입니다.

 

반면 홍수 이후 인간은 달라졌습니다. AC.200에서 이미 보았듯이, 주님은 인류가 완전히 멸망하지 않도록 인간 구조 자체를 바꾸셨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선에서 진리로 가는 길이 아니라, 진리에서 선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홍수 이후 사람들은 먼저 배우고, 이해하고, 분별한 뒤에 선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태고 사람들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가졌고, 홍수 이후 사람들은 진리로부터 선을 가졌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전자는 사랑이 먼저이고 진리가 뒤따르는 구조이며, 후자는 진리가 먼저이고 선이 뒤따르는 구조입니다.

 

이 때문에 말씀의 표현도 달라집니다. 태고교회를 다룰 때에는 의지와 애정을 나타내는 표현들이 많고, 홍수 이후 교회들을 다룰 때에는 이해와 사고, 분별에 관한 표현들이 더 많이 등장합니다. 이는 단순한 문체 차이가 아니라, 인간 구조 자체의 변화가 말씀의 언어에도 반영된 결과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도 인간의 타락을 단순한 도덕적 문제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인간 안의 사랑과 진리의 질서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설명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이 먼저였기 때문에 사랑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함께 무너졌습니다. 반면 홍수 이후 사람들은 이해가 먼저였기 때문에, 비록 더 낮은 상태에 살지만, 한편으로는 더 안전하게 보호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AC.209는 창3:6의 표현들을 설명하는 해설인 동시에, 태고교회와 홍수 이후 인류를 가르는 거대한 전환점을 설명하는 본문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선으로부터 진리를 보는 시대’가 지나가고, ‘진리로부터 선을 배우는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이 후자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태고교회의 언어를 읽을 때면 낯설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랑으로 알았지만, 우리는 이해를 통해 배우기 때문입니다.

 

 

심화

 

1. ‘이해(understanding)와 관련된 표현들

 

 

AC.208, 심화 1, ‘이해(understanding)와 관련된 표현들’

AC.209.심화 1. ‘이해(understanding)와 관련된 표현들’ 그러나 말씀에서 홍수 이후 사람들을 다룰 때에는, 의지보다는 이해(understanding)와 관련된 표현들이 사용됩니다. Where the Word treats of the people w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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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0, 창3:6,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own’의 정의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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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8, 창3:6, ‘태고교회의 네 번째 후손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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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8.심화

 

3. ‘스베덴보리가 집중한 주제

 

스베덴보리 본인도 학자였으면서 천국을 왕래하며 어떻게 이런 걸 일절 다루질 않았을까요? 마치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말이지요... 천국은 이 지상의 일과 역사에 아무런 관심이 없나 봐요?

 

 

목사님 같은 의문을 가진 사람은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오래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아니, 천국과 지옥을 수십 년 동안 드나들었고, 천사들과 대화했으며, 인류의 가장 오래된 교회들까지 언급하는데, 왜 정작 우리가 궁금해하는 역사 연대나 고고학이나 지구의 나이 같은 것은 거의 말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주님께서 지상에 계셨을 때도 비슷했다는 점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로마 제국의 미래,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 메시아 왕국의 건설, 종말의 시기 같은 것에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대부분 그런 질문들에는 직접 답하지 않으시고, 사람의 마음과 삶, 사랑과 신앙, 회개와 거듭남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매우 비슷한 방향을 보입니다.

 

천국이 지상의 역사에 아무 관심이 없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가 사실은 교회의 역사와 인류의 영적 역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 고대교회, 히브리교회, 유대교회, 기독교회에 대한 설명만 보아도 천국은 인류 역사에 깊이 관여하고 있습니다. 다만 천국이 보는 역사의 관점이 우리와 매우 다를 뿐입니다.

 

우리는 보통 ‘언제?’를 묻습니다. ‘몇 년도인가?’, ‘몇천 년 전인가?’,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가?’를 궁금해합니다. 그러나 천국은 ‘어떤 상태였는가?’를 더 중요하게 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연대기보다 애정의 변화에 관심을 두고, 사건보다 상태를 보고, 왕조의 흥망보다 인간과 교회의 내적 변화를 봅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의 여러 저작을 보면 천사들은 시간 자체를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천국에서는 시간 대신 상태(state)가 중심 개념입니다. 사랑이 변하면 상태가 변하고, 상태가 변하면 거리도 변하고, 만남도 변합니다. 그래서 천사들에게 ‘몇 년이 지났다’는 것은 우리만큼 중요한 정보가 아닙니다.

 

목사님께서 지금 읽고 계신 창3도 좋은 예입니다. 우리는 ‘아담 이후 몇 년 뒤의 후손인가?’를 묻지만, 스베덴보리는 ‘세 번째 후손’, ‘네 번째 후손’이라는 말을 하면서도 연대는 전혀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들이 어떻게 주님에 대한 신뢰를 잃고, 어떻게 자기 own을 신뢰하게 되었는지에 집중합니다. 천국의 시선이 바로 그곳에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천국이 역사나 자연계 자체를 무시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자연계 전체가 영계의 결과물이며, 역사는 섭리의 무대라고 설명합니다. 다만 천국은 역사를 그 자체로 보지 않고, 역사 속에서 형성되는 인간의 사랑과 의도, 상태를 보는 것입니다.

 

어쩌면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마치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이라는 표현이 핵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지상에 계실 때 로마 황제의 이름보다 사람의 마음을 더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지구의 연대보다 인간 영혼의 구조를 더 중요하게 다루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천국은 이 지상의 일과 역사에 관심이 없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관심의 초점이 다르다’고 답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사건을 보지만 천국은 상태를 봅니다. 우리는 연대를 보지만 천국은 사랑을 봅니다. 우리는 ‘언제 일어났는가?’를 묻지만, 천국은 ‘왜 일어났는가?’와 ‘그것이 영혼을 어디로 이끌었는가?’를 묻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천국을 그렇게 다녀왔으면 지구의 역사나 고대 문명의 비밀도 좀 알려 주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오래 읽다 보면, 천국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가지 주제에만 거의 집착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사람이 어떻게 주님께 가까워지는가’입니다. 그리고 그 관점에서 보면, 수천 년의 역사도 결국은 한 영혼의 사랑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를 보여 주는 배경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AC.208, 창3:6, ‘태고교회의 네 번째 후손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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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8, 심화 2, ‘후손과 후손 사이 실제 시간 간격’

AC.208.심화 2. ‘후손과 후손 사이 실제 시간 간격’ 이 각각의 후손이 실제로는 몇백, 몇천, 몇만 년의 간격이 있었을까요? 현재까지 우리가 확인한 AC 본문만을 근거로 매우 조심스럽게 말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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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8.심화

 

2. ‘후손과 후손 사이 실제 시간 간격

 

이 각각의 후손이 실제로는 몇백, 몇천, 몇만 년의 간격이 있었을까요?

 

 

현재까지 우리가 확인한 AC 본문만을 근거로 매우 조심스럽게 말한다면, ‘각 후손 사이에 실제로 몇백 년, 몇천 년, 혹은 몇만 년의 간격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AC.194에서 ‘세 번째 후손’을, AC.208에서 ‘네 번째 후손’을 언급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이 서로 얼마만큼의 시간적 간격을 두고 존재했는지는 전혀 말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연대기보다 영적 상태의 변화에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현재까지 확인한 본문들 가운데는 ‘세 번째 후손과 네 번째 후손 사이에는 몇 년이 흘렀다’거나, ‘첫 번째 후손부터 네 번째 후손까지는 몇 세기에 걸친 변화였다’는 식의 진술이 없습니다. 따라서 AC 본문만으로는 수백 년인지, 수천 년인지, 혹은 그보다 더 긴 기간인지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다만 추론은 가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를 인류 최초의 교회로 설명하며, 그 쇠퇴 또한 하루아침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점진적인 과정이었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또한 창3:1-6의 몇 절 속에 세 번째 후손과 네 번째 후손이라는 서로 다른 후손들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적어도 스베덴보리의 눈에는 창세기 본문이 단순한 하루의 사건 기록이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친 영적 역사를 압축한 기록으로 보였음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조심해야 합니다. ‘여러 세대’라는 말이 곧 ‘수천 년’이나 ‘수만 년’을 뜻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몇십 년’에 불과했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현재까지 확인된 AC 본문은 그 어느 쪽도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질문에 대한 현재의 가장 안전한 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 번째 후손과 네 번째 후손의 존재는 AC.194 AC.208을 통해 확인되지만, 그들 사이의 실제 시간 간격은 스베덴보리는 밝히지 않는다. 따라서 수백 년인지 수천 년인지 수만 년인지는 알 수 없으며, 현재로서는 추정의 영역에 속한다.’

 

어쩌면 여기서도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시간적 거리보다 영적 거리였던 것 같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가’보다, ‘주님으로부터 직접 지각하던 상태가 어떻게 감각과 자기 판단을 신뢰하는 상태로 변해갔는가’였습니다.

 

따라서 지금 시점에서 가장 정직한 결론은 이것입니다. ‘후손들 사이에 상당한 시간적 간격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AC 본문은 그 기간을 알려 주지 않는다. 우리는 영적 상태의 변화는 확인할 수 있지만, 그것을 연대기적 숫자로 환산할 수는 없다.’ 이것이 현재까지 확인된 AC 자료에 가장 충실한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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