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54.심화

1. 천상의 결혼이란 무엇인가?

 

AC.54에는 매우 중요한 표현 하나가 등장합니다. ‘천상의 결혼(heavenly marriage)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자기들의 결혼이 주는 행복이 이 천상의 결혼에서 온다고 퍼셉션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천상의 결혼은 무엇일까요? 천국에 간 남자와 여자가 이루는 결혼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이해와 의지의 결합을 말하는 것일까요?

 

먼저 AC.54가 직접 말하는 것부터 구별해야 합니다. 이 글은 태고교회 사람들의 실제 결혼이 그들에게 행복과 기쁨의 주된 근원이었고, 그들이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을 보았기 때문에 자기들의 결혼을 통해 천상의 결혼을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결혼의 행복이 그 천상의 결혼에서 온다고 퍼셉션했다고 합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 안의 이해를 남자’, 의지를 여자라고 불렀으며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고 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AC.54 안에서만 보아도 결혼이라는 말은 자연적인 남녀 관계에만 머물지 않고 인간 내면의 두 기능이 하나로 작동하는 관계까지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천상의 결혼 = 이해와 의지의 결합이라고 완전히 동일시하는 것도 조금 조심해야 합니다. AC 전체에서 천상의 결혼이라는 개념은 여러 층위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해와 의지의 결합, 진리와 선의 결합, 신앙과 사랑의 결합 등이 서로 연결되며, 궁극적으로 모든 참된 결합의 근원은 주님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천상의 결혼을 하나의 평면적인 등식으로 외우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참된 결합이 여러 차원에서 나타나는 질서라는 방향으로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다만 이 표현 역시 AC.54 자체의 문장을 넘어선 전체 AC의 관점에서 정리한 설명이라는 점은 구별해야 합니다.

 

AC.54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형태는 이해와 의지의 결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해를 남자, 의지를 여자라고 하고  둘이 하나로 작동할  그것을 결혼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는 이해이고 의지는 의지인 채로, 둘이 하나로 작동합니다.

 

이것은 결혼이라는 상응의 중요한 성질을 보여 줍니다. 참된 결합은 차이를 없애는 동일화가 아니라 구별된 것들이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해와 의지가 결합한다고 해서 이해가 의지가 되거나 의지가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다른 두 기능이 하나의 생명을 이루어 작동합니다.

 

앞의 AC.53과 연결하면 신앙과 사랑의 관계도 여기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AC.53은 이해에 속한 신앙과 의지에 속한 사랑을 구별했습니다. 따라서 이해와 의지의 결혼은 자연스럽게 신앙과 사랑의 결합과도 연결됩니다. 이후 AC.475-476에서도 스베덴보리는 남자와 여자가 신앙과 사랑의 결혼을 뜻한다고 다시 설명합니다.

 

여기서 신앙과 사랑의 결혼은 교리를 많이 알면서 사랑도 조금 더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과 사랑이 참으로 결합한다는 것은 사람이 아는 진리와 그가 실제로 사랑하고 원하는 선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은 상태와 관계됩니다. 이해가 한 방향을 보고 의지가 정반대 방향을 향한다면 둘이 하나로 작동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곧바로 아는 대로 완벽하게 살아야만 결혼이 이루어진다는 도덕적 완전주의로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거듭남은 진행되는 과정이며, AC.54는 그 과정의 세부 단계를 설명하는 글이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참된 영적 질서가 이해와 의지의 분리에 있지 않고 그 결합에 있다는 것입니다.

 

천상의 결혼이라는 말을 선과 진리의 관계에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해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기능과, 의지는 선을 사랑하고 행하는 기능과 깊이 관계되므로 이해와 의지의 결합은 진리와 선의 결합과 분리되어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술 전체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은 천국과 거듭남을 이해하는 매우 근본적인 원리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남자 = 진리’, ‘여자 = 이라는 하나의 기계적인 공식으로 모든 성경 구절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상응은 문맥을 따라 보아야 합니다. AC.54가 직접 말하는 것은 영적 인간 안에서 남자 = 진리’, ‘여자 = 이며,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관련된 더 넓은 대응은 이후의 AC 설명과 함께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태고교회 사람들의 실제 결혼은 이 내적인 결혼과 어떤 관계였을까요? AC.54의 표현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결혼에서 누리는 행복이 천상의 결혼에서 온다고 퍼셉션했습니다. 즉 자연적인 결혼 자체를 행복의 최종 근원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 결합의 행복 안에서 더 높은 결합의 질서를 보았고, 그 근원을 천적인 것과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찾았습니다.

 

그렇다고 자연적인 결혼을 단순한 그림자나 중요하지 않은 외피로 취급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결혼이 행복과 기쁨의 주된 근원이었다고 AC.54가 직접 말합니다.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을 참으로 표상할 때 외적인 것은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을 담고 드러내는 귀한 형식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태고교회 사람들이 무엇이든 결혼에 비유할 수 있으면 결혼에 비유했던 이유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그들에게 결혼은 단순히 사회제도 하나가 아니라 서로 구별되는 것들이 하나를 이루는 행복을 경험하게 하는 매우 깊은 표상이었습니다.

 

또 이 때문에 말씀에서 교회 자체도 ’, ‘처녀’, ‘아내라는 결혼의 언어로 표현됩니다. AC.54는 그 이유를 교회의 선에 대한 애정에서 찾습니다. 이후 말씀에서 주님과 교회의 관계가 혼인과 부부의 언어로 나타날 때에도 이 천상의 결혼이라는 큰 주제가 배경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면 천국에서의 실제 남녀 결혼과 천상의 결혼은 아무 관계가 없을까요? 그렇다고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저술에서 천국의 결혼과 결혼애를 별도로 매우 깊게 다룹니다. 다만 AC.54 천상의 결혼을 처음부터 사후세계의 부부생활만을 뜻하는 용어로 제한하면 이번 글의 중심을 놓치게 됩니다. 여기서는 자연적인 결혼의 행복이 더 내적인 천상의 결합에서 온다는 방향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결합의 궁극적인 근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AC.54에서 태고교회 사람들의 생각은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내적인 것에서 천적인 것으로,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모든 이신 주님께로 향했습니다. 따라서 천상의 결혼도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내는 완전한 조화가 아닙니다. 모든 참된 선과 진리와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앞의 AC.39 이후의 원리는 여기에서도 그대로 유지됩니다.

 

그래서 천상의 결혼을 가장 안전하게 기억하는 방법은 하나의 단단한 등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 질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서로 구별되는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가 주님에게서 오는 질서 안에서 하나로 결합하여 작동하는 것입니다. AC.54에서는 그 가운데 특별히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작동하는 것을 결혼이라고 부릅니다.

 

결국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실제 결혼의 행복은 그 자체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더 내적인 결합을 비추었고, 그 결합은 다시 천적인 것으로, 궁극적으로 주님께 시선을 돌리게 했습니다. 이것이 AC.54에서 남자와 여자의 속뜻을 설명하면서 굳이 태고교회의 결혼의 행복과 천상의 결혼을 함께 이야기하는 이유입니다.

 

 

 

AC.54, 창1:27, ‘남자와 여자’ :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작동하는 결혼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AC.54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속뜻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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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1

 

이 영상은 처음부터 ‘장자권’이라는 교리를 차분히 설명하는 성경강의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약 35분 동안 찬양과 기도, 집회를 향한 기대와 사모함이 길게 이어지고, 그 가운데 반복해서 강조되는 것은 ‘이번 집회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것을 받아 가자’, ‘이영환 목사를 통해 주시려는 것을 취하고 가자’는 태도입니다. 특히 인도자는 이영환 목사가 자신의 몸을 찢어 주듯 무엇인가를 전하려 한다는 상당히 강한 표현까지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이 영상의 ‘장자권’을 이해하려면 단순히 하나의 성경 주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는 ‘어떤 영적 유산을 전달받고, 그것을 다시 가지고 가는 ’이라는 강한 전수의 분위기가 처음부터 형성되어 있습니다. 실제 영상 후반에는 ‘장자선교회’ 정기후원과 ‘장자권 교재’가 소개되고, 이 교재를 그동안의 핵심 내용을 모은 일종의 ‘장자권의 완결판 교재’라고 설명합니다. 즉 ‘장자권’은 이 집회에서 우연히 선택한 한 번의 설교 제목이 아니라, 이미 하나의 체계적인 교육 내용과 운동으로 발전한 주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처음부터 상당히 흥미로운 지점에 서게 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 역시 성경의 ‘장자’, ‘처음 ’, ‘장자권’을 결코 사소하게 다루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다 보면 아벨의 ‘양의 새끼’에서부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에서와 야곱의 장자권 문제, 르우벤의 장자권에 이르기까지 ‘처음 ’과 ‘장자권’은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열쇠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장자권을 강조한다’는 사실 자체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장자권을 무엇으로 이해하느냐’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일반적인 장자권 운동과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들어갑니다. ‘장자’는 단순히 집안에서 먼저 태어난 사람을 뜻하는 데 그치지 않으며, 더구나 ‘하나님의 특별한 복을 남들보다 먼저, 많이 받을 권리를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로 고정되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장자’는 무엇이 ‘첫째 자리를 차지하는가’, 다시 말해 사람과 교회 안에서 무엇이 우선권과 주도권을 갖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생각보다 아주 미묘합니다. 사람이 거듭나는 과정에서는 먼저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를 신앙으로 받아들인 뒤, 마침내 그것을 삶으로 살아 선에 이르게 됩니다. 시간적으로 보면 ‘진리와 신앙’이 먼저 나타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말씀에서는 어떤 문맥에서 신앙이나 진리가 ‘장자’처럼 나타납니다. 그러나 실제 질서에서는 정반대입니다. 진리는 선을 위해 존재하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위해 존재합니다. 진리가 먼저 배워진다고 해서 진리가 목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가 사람 안에서 살아 있는 진리가 되는 것은 그것이 선과 결합할 때이며, 신앙이 살아 있는 신앙이 되는 것도 체어리티와 결합할 때입니다.

 

이것이 ‘장자권’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먼저 나타난 ’과 ‘실제로 첫째인 ’이 반드시 같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가 먼저 글자를 배우고 나중에 그 글자로 사랑의 편지를 쓴다고 해서 글자가 사랑보다 높은 것은 아닙니다. 의학을 먼저 공부하고 나중에 환자를 치료한다고 해서 의학지식 자체가 환자를 살리려는 사랑보다 궁극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먼저 진리를 배우고 신앙을 형성하지만, 그 모든 것은 결국 선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사람이 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의미의 ‘장자권’은 단순한 특권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나를 지배해야 하는가’라는 질서의 문제입니다.

 

이 점에서 최근 우리가 살펴본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놀랍도록 직접 연결됩니다. 가인은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표상합니다. 처음에는 신앙이 먼저 등장합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면 가인이 ‘장자’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야 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배우는 이유는 결국 그 진리를 따라 선하게 살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자신을 첫째 자리에 놓고 체어리티와 분리되면 어떻게 됩니까? 가인이 아벨을 죽입니다. 이것이 단순한 형제 살인의 역사적 사건을 넘어, ‘신앙이 사랑보다 자신을 높일 교회 안에서 체어리티가 소멸한다’는 무서운 속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장자권 회복’을 말하려면 상당히 조심해야 합니다. 만일 그것이 ‘내가 영적 장자가 되어 특별한 권세를 얻는다’, ‘ 가문이 특별한 복을 받는다’, ‘ 자녀에게 축복이 계승된다’, ‘내가 남보다 앞선 영적 위치를 차지한다’는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성경의 장자권을 자연적인 특권 체계로 되돌려 놓을 위험이 있습니다. 반대로 ‘ 안에서 무엇이 첫째가 되어야 하는가’, ‘내가 아는 진리가 사랑을 섬기고 있는가’, ‘ 신앙이 체어리티를 낳고 있는가’, ‘주님께서 삶의 첫째 자리를 실제로 차지하고 계시는가’를 묻는다면 장자권은 대단히 깊은 거듭남의 주제가 됩니다.

 

특히 AC에서 ‘처음 ’이 궁극적으로 주님께 속한다고 설명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아벨이 드린 ‘양의 새끼’가 거룩했던 까닭도 인간 자신이 어떤 영적 우월성을 소유하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사랑과 거기서 비롯되는 참된 신앙이 주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 ’을 여호와께 돌리는 표상은 ‘내가 장자이므로 이것은 권리다’라는 선언이라기보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 안에 있는 선도, 진리도, 사랑도, 신앙도 근원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사용자가 작업해 둔 AC 자료에서도 ‘처음 것은 모두 거룩했는데, 이는 그것들이 오직 홀로 장자이신 주님을 가리켰기 때문’이며,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신앙’이 장자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장자권’이라는 말은 오히려 인간의 특권의식을 꺾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참된 장자는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먼저 받았다면 그것은 남보다 높은 사람이 되라는 뜻이 아니라, 먼저 받은 것을 다른 사람의 선을 위해 사용하라는 뜻이 됩니다. 진리를 먼저 알았다면 진리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진리대로 먼저 살아야 하고, 은혜를 먼저 받았다면 그것을 자신의 영적 계급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내야 합니다. 직분을 먼저 받았다면 권위가 커지는 것이 아니라 쓰임의 책임이 커집니다. 이 의미에서 ‘장자권’은 ‘특권’보다 ‘쓰임’에 가깝습니다.

 

영상 초반의 뜨거운 찬양과 기도 역시 바로 이 기준으로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 분밖에는 사랑할 이가 없다’, ‘주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있기 원한다’는 고백 자체는 매우 귀합니다. ‘ 집회를 통해 무엇인가를 받아 가겠다’는 사모함 역시 그 자체로 잘못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진리를 향한 애정이 필요하며, 냉랭한 지성만으로는 영적 생명이 자라기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도 사람의 의지와 애정이 실제 생명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이 집회의 뜨거움 자체를 경계할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매우 세심하게 보아야 합니다. 초반 인도자가 반복해서 ‘이영환 목사를 통해 주시려는 ’, ‘목사가 찢어 주듯 주려는 ’을 ‘취하여 가자’고 강조하는 대목입니다. 이것을 선의로 이해하면 ‘ 목회자가 평생 깨닫고 살아온 신앙의 유산을 배우자’는 뜻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신앙의 선배에게서 배우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도 반드시 하나의 안전장치를 둡니다. ‘사람에게서 받은 진리라 해도 진리가 참된 것은 사람에게서 나왔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과 말씀에서 나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교사는 통로일 수 있지만 근원은 아닙니다. 어떤 목회자의 체험이나 교리 체계가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그것이 말씀보다 높은 해석의 열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영상의 첫 35분을 단순히 ‘찬양이 길다’ 정도로 지나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이 도입부가 이후 장자권 강의를 받아들이는 청중의 마음을 미리 형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청중은 단순히 ‘장자권이라는 성경 개념을 공부하겠다’는 상태가 아니라 ‘ 집회에는 특별히 받아야 무엇인가가 있고, 이영환 목사를 통해 그것이 전달된다’는 기대 속에서 강의를 듣게 됩니다. 이것은 강력한 장점이면서 동시에 위험 가능성이기도 합니다. 선한 진리가 전달된다면 사람의 마음을 열어 주는 좋은 토양이 되지만, 특정한 인간의 해석이 지나치게 절대화될 경우에는 검증보다 수용이 먼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영환 목사나 장자선교회를 처음부터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방식으로 접근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아주 단순한 질문 하나를 끝까지 붙들면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장자권은 결국 누구를 첫째 자리에 세우는가?’입니다. 주님을 첫째 자리에 세우는가, 아니면 장자권을 가진 인간을 특별한 사람으로 만드는가. 선과 사랑을 첫째 자리에 세우는가, 아니면 신앙의 지식과 영적 권위를 첫째 자리에 세우는가. 이웃을 섬기는 쓰임으로 나아가는가, 아니면 나와 내 가문이 특별한 복을 받는 체계로 나아가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영상 초반만으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이후 이영환 목사가 장자권을 실제로 어떻게 풀어 가는지를 충분히 들은 뒤 판단해야 합니다.

 

다만 출발점 하나만큼은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장자권’은 ‘내가 남보다 먼저 받을 권리’가 아닙니다. 더 깊게는 ‘ 안에서 주님의 선과 사랑이 첫째가 되고, 진리와 신앙은 그것을 섬기는 질서로 돌아가는 ’입니다. 그리고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인간 누구도 스스로 장자가 아닙니다. 모든 선과 진리의 처음이시며 근원이신 주님만이 참된 ‘장자’이십니다. 따라서 인간이 장자권을 제대로 받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자기 것으로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 것이라고 생각했던 선과 진리와 능력까지 주님께 돌려드리는 ’입니다.

 

이 기준을 세워 놓고 다음 2부에서는 이영환 목사가 본격적으로 ‘장자권’을 어떤 성경적 구조로 설명하는지 들어가 보겠습니다. 특히 ‘장자에게 주어진 ’, ‘장자의 명분’, ‘아브라함·이삭·야곱과 에서’,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의 성도와 가정과 다음 세대에 어떻게 적용된다고 보는지를 따라가면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먼저인 진리와 실제로 첫째인 ’, 곧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와 하나씩 대조해 보겠습니다.

 

2

1부에서는 이 집회의 전체 분위기와 ‘장자권’이라는 주제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렌즈를 먼저 세웠습니다. 이번 2부부터는 그 렌즈를 조금 더 안쪽으로 가져가 보겠습니다. 이 집회에서 장자권은 단순히 ‘이스라엘 사회에서 맏아들이 가졌던 권리’라는 역사적 지식을 가르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장자선교회라는 조직과 교육용 교재가 따로 있을 만큼 하나의 영적 체계로 발전해 있습니다. 영상 끝에서도 현재 사용하는 교재를 이전 교재들의 핵심적인 장자권 내용을 모은 사실상의 ‘완결판 교재’처럼 설명하고, 목회자 전문교재가 아니라 평신도 교육용으로 보급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분별해야 할 것도 단순한 설교 한 편이 아니라 ‘장자권이라는 성경 개념을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하는 하나의 해석 체계’입니다.

 

이 점에서 먼저 인정할 것은 ‘장자권을 소중히 여기라’는 권면 자체에는 상당히 좋은 영적 직관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판 사건은 분명히 가볍지 않습니다. 눈앞의 욕구 때문에 하나님께 속한 더 높은 것을 하찮게 여겼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자권을 ‘눈앞의 욕망 때문에 영적인 것을 팔아 버리지 말라’는 교훈으로 읽는 것은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실제 다른 관련 강의 자료에서도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판 것을 ‘식욕의 지배를 받아 하나님이 주신 영적 우선순위, 영적 질서를 파괴한 행위’라고 설명합니다. 이 적용에는 귀담아들을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사람의 낮은 자연적 욕망이 더 높은 영적인 것을 지배하게 되는 상태를 매우 심각하게 봅니다. 거듭남이란 결국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지배하던 질서가 뒤집혀, 영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을 다스리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의 통치 아래 놓이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팥죽 그릇 때문에 장자권을 팔지 말라’를 ‘순간적인 자연적 욕망 때문에 영적인 선과 진리를 희생하지 말라’고 읽는다면,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인간론과도 상당히 가까워집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중요한 갈림길이 생깁니다. ‘에서가 장자권을 팔았다’는 것을 단순히 ‘에서는 귀한 영적 복을 가볍게 여겼고 야곱은 그것을 귀하게 여겼다’ 정도로 읽으면 비교적 간단합니다. 그러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의 속뜻으로 들어가면 에서와 야곱의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에서는 나쁜 사람, 야곱은 좋은 사람’, ‘에서는 장자권을 잃은 사람, 야곱은 장자권을 쟁취하여 받은 사람’이라는 도식만으로는 말씀의 내적 구조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에서와 야곱은 두 개인의 성격을 넘어 사람의 거듭남 안에서 일어나는 ‘선과 진리의 관계’를 표상합니다. 크게 말하면 에서는 자연적 차원의 ‘’을, 야곱은 자연적 차원의 ‘진리’를 표상합니다. 그런데 거듭남의 초기에는 사람이 무엇이 선인지 아직 직접적으로 사랑하고 지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먼저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옳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것은 주님의 뜻이다’라는 진리를 배우고, 처음에는 그것을 의무와 순종으로 실천합니다. 그래서 시간의 순서에서는 진리가 앞에 나섭니다. 이 단계에서는 야곱이 앞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최종 질서가 아닙니다. 진리는 왕이 되기 위해 먼저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선을 섬기기 위해’ 먼저 들어옵니다. 사람이 거듭나면서 처음에는 ‘진리이기 때문에 선을 행하지만’, 나중에는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진리를 행하는’ 상태로 바뀝니다. 처음에는 ‘주님께서 하라고 하셨으니 해야 한다’였다면, 나중에는 ‘그것이 선하기 때문에 하고 싶다’가 됩니다. 바로 이때 외적으로 먼저였던 진리가 본래 자리로 물러나고, 실제로 첫째인 선이 앞에 서게 됩니다. 이것이 장자권을 둘러싼 말씀의 역설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그래서 ‘누가 장자인가?’라는 질문은 스베덴보리에게 단순히 출생순위를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사람 안에서 무엇이 첫째가 되어야 하는가?’를 묻는 질문입니다. 진리가 먼저 배워지므로 진리가 장자처럼 보이지만, 실제 목적에서는 선이 먼저입니다. 신앙이 먼저 형성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생명에서는 체어리티가 먼저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를 먼저 배우지만,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목적은 그를 교리를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선을 사랑하고 행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데 있습니다.

 

이것을 놓치면 장자권이 쉽게 ‘영적 특권론’으로 변합니다. ‘나는 장자권을 가진 사람이다’, ‘우리 가정에는 장자권의 복이 있다’, ‘내가 장자권을 자녀에게 물려준다’는 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장자권의 중심이 주님에게서 인간에게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물론 부모의 신앙과 삶이 자녀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부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모가 주님을 사랑하고 정직하게 살며 자녀에게 말씀을 가르친다면 그것은 자녀에게 귀한 영적 환경과 리메인스를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부모가 가진 영적 신분이나 권리가 혈통을 따라 자녀에게 이전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구원도, 거듭남도, 천국도 혈통으로 상속되지 않습니다. 선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자녀가 선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목회자의 자녀라는 이유로 영적인 장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마다 자유 안에서 주님을 향하여 돌이키고,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여기며 피하고, 받은 진리를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장자권’이 있다면 그것은 특별한 영적 신분증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삶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일 것입니다.

 

이 점에서 ‘처음 ’을 여호와께 돌리라는 성경의 명령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장자권이라고 하면 ‘장자가 무엇을 받는가’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오히려 ‘처음 것은 누구의 것인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대답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에서 ‘양의 새끼’가 주님께 속한 것을 표상한다고 설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처음 난 것은 거룩하게 구별되었으며, 궁극적으로는 오직 주님만이 참된 ‘장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거기서 비롯되는 신앙 역시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용자가 번역·해설해 둔 AC 자료에서도 이 점을 분명히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성경의 장자권에는 놀라운 방향 전환이 일어납니다. 자연적인 인간은 ‘장자이므로 받는다’에 관심을 둡니다. 그러나 속뜻은 ‘처음 것이므로 주님께 돌린다’고 말합니다. 자연적인 인간은 ‘나에게 어떤 복이 오는가’를 묻지만, 영적인 인간은 ‘내가 받은 것이 누구에게서 왔으며 무엇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가’를 묻습니다. 자연적인 장자권은 소유의 언어로 읽기 쉽지만, 영적인 장자권은 ‘귀속과 질서와 쓰임’의 언어로 읽어야 합니다.

 

따라서 장자권과 함께 ‘’을 말할 때도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성경에서 복에는 자연적인 차원도 분명히 있습니다. 자녀, 토지, 풍요, 건강, 평안 같은 것이 복으로 표현됩니다. 이것을 억지로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연계의 좋은 것들도 모두 주님의 섭리 안에서 감사히 받을 수 있는 선물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영적 실체 그 자체로 만들어 버릴 때입니다. ‘장자권을 회복하면 사업이 잘된다’, ‘가문이 일어난다’, ‘자녀가 성공한다’, ‘물질적인 형통이 따라온다’는 식의 공식이 만들어지는 순간, 말씀의 영적인 복이 자연적인 성공의 약속으로 축소될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진정한 복은 훨씬 안쪽에 있습니다. 사람이 주님과 결합하는 것,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게 되는 것, 진리를 단지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기쁨으로 행하게 되는 것, 자기중심적인 proprium의 지배가 약해지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사람의 삶을 이끌게 되는 것, 그리고 마침내 자신에게 주어진 쓰임을 이웃을 위해 기쁘게 감당하게 되는 것이 복입니다. 이런 사람이 부자가 될 수도 있고 가난할 수도 있습니다. 건강할 수도 있고 병들 수도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도 있고 이름 없이 살 수도 있습니다. 외적인 형편이 그의 장자권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에서의 팥죽 이야기도 한층 깊어집니다. 에서의 문제를 단순히 ‘먹는 것을 좋아했다’는 데 두어서는 안 됩니다. 팥죽은 눈앞에 있는 즉각적인 자연적 만족입니다. 장자권은 그보다 더 깊고 먼 질서에 속한 것입니다. 따라서 ‘팥죽 그릇에 장자권을 판다’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눈앞의 자연적 만족 때문에 영적인 질서를 뒤집어 버리는 ’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돈 때문에 양심을 버리는 것, 인정받고 싶은 욕망 때문에 진리를 왜곡하는 것, 교회 성장을 위해 체어리티를 희생하는 것, 교리를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사람을 미워하는 것, 영적 권위를 얻으려다 겸손을 잃는 것, 심지어 ‘장자권을 얻겠다’는 열심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 싶은 욕망에 빠지는 것까지 모두 이 원리 아래에서 성찰할 수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경우는 역설적입니다. ‘장자권을 귀하게 여기라’는 가르침을 듣다가 오히려 ‘내가 장자가 되어야 한다’는 자기 우월성에 사로잡힌다면, 장자권을 지키려다가 장자권의 속뜻을 잃어버리는 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나라에서 첫째가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 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더 많이 받은 사람은 더 높은 사람이 아니라 더 많이 쓰임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진리를 더 많이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평가할 권리를 더 많이 받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먼저 그 진리대로 살아야 할 책임을 더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장자권을 ‘권세’보다 ‘책임’, ‘소유’보다 ‘귀속’, ‘특권’보다 ‘쓰임’으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장자권’보다 ‘주님의 장자권’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내가 첫째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서 첫째가 되셔야 합니다. 내 신앙이 첫째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통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체어리티가 첫째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가인과 아벨 이야기가 다시 연결됩니다. ‘양의 새끼’를 드린 아벨은 체어리티를 표상합니다. 사용자가 작업한 AC.351 자료에서도 ‘양의 새끼’가 오직 주님께 속한 것을 상징하며,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신앙’이 ‘장자’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순서입니다. ‘신앙과 거기서 비롯된 사랑’이 아니라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신앙’입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사실 장자권 전체를 뒤집습니다. 사람이 처음 거듭날 때에는 ‘신앙에서 사랑으로’ 가는 것처럼 경험합니다.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믿고, 그 결과 선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관점에서 실제 유입의 질서는 ‘사랑에서 신앙으로’입니다.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오고, 그 선으로부터 진리가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전자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순서’이고 후자는 주님에게서 오는 ‘실제 질서’입니다. 이 둘을 구별하지 못하면 신앙이 영원히 장자 자리를 차지하려 하고, 결국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상태, 곧 신앙이 체어리티를 억압하는 교회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장자권’이라는 주제가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기에 아주 좋은 주제라고 봅니다. 일반적인 설교에서는 장자권을 ‘빼앗기지 말아야 ’으로 읽기 쉽지만, 속뜻에서는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 ‘ 안에서 무엇이 진짜 장자인가’를 묻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내가 장자인가?’라는 질문마저 내려놓게 합니다. 모든 선과 모든 참된 신앙의 근원이신 주님만이 참된 장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장자권을 회복한다는 것은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되는 ’이 아닙니다. ‘ 안의 질서가 회복되는 ’입니다.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섬기고, 진리가 선을 섬기며,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하고, 지식이 삶이 되며, 자기 사랑이 쓰임의 사랑 아래 놓이고, 마침내 나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 첫째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진다면 장자권이라는 표현을 굳이 사용하든 사용하지 않든 그 사람 안에서는 말씀의 ‘장자권’이 실제로 회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준을 가지고 보면 다음 단계에서 더 민감한 문제가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조상의 신앙과 , 부모와 자녀, 가문과 장자의 관계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입니다. 제공된 자막에는 후반부에 한국의 전통적인 제사와 탈상, 장자에게 제사 음식을 먹이는 관습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나라는 장자들이 빨리 죽는다’는 상당히 강한 주장까지 등장합니다. 이 지점부터는 단순한 ‘장자권의 영적 의미’ 문제를 넘어 ‘조상의 죄와 영적 영향, 가문의 저주, 제사와 장자, 세대 영적 계승’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훨씬 중요한 분별의 문제가 시작됩니다. 바로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유전악’, 영들의 유입, 인간의 자유, 책임, 섭리를 함께 놓고 보아야 정확히 풀립니다. 3부에서는 이 문제를 집중해서 살펴보겠습니다.

 

3

2부 끝에서 저는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 가르침이 ‘가문·조상·제사·유전적 영적 영향’의 문제로 들어간다고 예고했습니다. 그런데 자막의 해당 부분을 더 자세히 확인해 보니, 여기서는 한 가지를 먼저 바로잡아야겠습니다. 이영환 목사는 흔히 일부 영적 전쟁이나 가계치유 계열에서 주장하는 ‘가계의 저주’를 오히려 매우 강하게 부정합니다. 그는 부모나 조상의 죄가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영적 저주로 계속 이어진다는 주장을 거부하면서, 갈라디아서 313절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는 말씀과 고린도후서 517절의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씀을 근거로 듭니다. 부모가 살아온 문화와 정서가 자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을 ‘조상의 때문에 지금도 저주받는다’는 영적 법칙으로 만드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아무리 신령하고 아무리 대단해도 가계를 저주하면 저주 부분에서는 잘못된 ’이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 부분은 앞서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건전하며, 정확하게 평가해 주어야 합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유전악’이라는 말을 분명히 사용하지만, 이것은 ‘조상이 지은 특정 죄의 형벌이 후손에게 영적 저주로 전가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유전되는 것은 조상의 죄책 그 자체가 아니라 악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람은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축적된 자연적 성향을 물려받지만, 그 성향 때문에 곧바로 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자기 의지로 받아들여 실제 악으로 만들 때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에 이런 죄가 있었으니 나는 영적으로 묶여 있다’, ‘조상이 우상숭배를 했으므로 후손이 저주를 끊어야 한다’는 식으로 개인의 현재 상태를 조상의 행위와 기계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인간론과도 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영환 목사가 ‘삶의 공간에서 문화와 정서는 영향을 있다’고 구별한 대목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경험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폭력적인 가정에서 성장하면 폭력적인 반응방식을 배우기 쉽고,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가정에서 성장하면 물질 중심의 가치관을 습득하기 쉽습니다. 반대로 정직과 섬김과 기도가 일상화된 가정에서 성장하면 그러한 삶의 형식들이 마음에 깊이 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 저주가 혈통을 타고 흐른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전자는 인간의 유전적·심리적·문화적 조건이고, 후자는 조상의 죄책이 후손에게 영적으로 전가된다는 주장입니다. 이영환 목사가 이 둘을 구별하려 한 것은 좋은 지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더하면 이 문제는 오히려 인간의 자유를 더욱 선명하게 만듭니다. 사람에게 악으로 기울어지는 수많은 유전적 성향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을 그 성향 속에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어린 시절부터 선과 진리에 관한 수많은 상태를 사람 안에 보존하시는데, 이것이 우리가 계속 다루어 온 ‘리메인스’입니다. 사람에게 유전악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은밀하게 보존하시는 선과 진리의 상태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성장하여 자유롭게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여기며 싸우기 시작할 때, 주님은 그 리메인스를 사용하여 사람을 거듭나게 하십니다. 따라서 인간의 이야기는 ‘조상에게서 무엇을 물려받았는가’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주님께서 내게 주시는 선과 진리에 내가 어떻게 응답하는가’입니다.

 

이것은 장자권 문제와도 직접 연결됩니다. 만일 영적 저주가 혈통을 따라 자동으로 전달되지 않는다면, 반대로 영적 장자권이나 축복 역시 혈통을 따라 자동으로 전달된다고 말하기 어려워집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가문의 저주’를 부정하면서 ‘가문의 영적 특권’은 자동적으로 계승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양쪽에 같은 원리를 적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조상의 악 때문에 내가 자동적으로 정죄되지 않는 것처럼 조상의 선 때문에 내가 자동적으로 거듭나는 것도 아닙니다. 부모가 훌륭한 신앙인이었다고 해서 자녀가 자동으로 천국의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며, 반대로 부모가 악한 삶을 살았다고 해서 자녀가 그 때문에 지옥의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각 사람을 자유로운 존재로 대하십니다.

 

그렇다고 부모와 조상의 삶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매우 중요합니다. 다만 그 영향의 방식이 ‘영적 신분의 자동 이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선하게 살면 자녀에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고, 말씀과 기도와 체어리티의 삶을 보여 줄 수 있으며, 어린 마음에 귀한 리메인스가 형성되는 자연적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부모의 악한 삶은 자녀에게 매우 어려운 자연적 조건을 남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그 자녀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섭리는 그보다 훨씬 깊고 개별적입니다.

 

여기서 ‘장자’라는 말의 의미도 다시 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연적 가정에서는 장자가 부모의 유산을 물려받고 가문의 책임을 이어받을 수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에서도 장자에게 특별한 법적·종교적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그대로 영적 세계에 옮겨 ‘영적인 장자도 부모의 영적 권세와 축복을 상속받는다’고 하면 자연적 질서와 영적 질서를 혼동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자연계의 장자 제도는 영적 실재를 표상하는 하나의 형식입니다. 중요한 것은 형식 자체를 오늘날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 형식이 무엇을 표상했는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강의에는 또 하나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 등장합니다. 이영환 목사는 한국의 전통적인 제사문화를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농촌에서 성장하며 실제로 보았던 옛 상례와 제례의 모습을 상당히 생생하게 회상합니다. 특히 탈상 때까지 죽은 이를 위해 밥을 차려 놓고, 그 음식을 장자가 먹던 풍습을 언급하면서 ‘그래서 우리나라는 장자들이 빨리 죽어 버려요’, ‘조선시대부터 장자들이 빨리 죽어 버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 ‘제사 문화는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는 앞의 ‘가계의 저주’를 부정한 대목과 달리 상당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 조상을 신적 존재처럼 섬기거나 죽은 사람에게 종교적인 제의를 드리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제사 음식을 장자가 먹었기 때문에 한국의 장자들이 빨리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주장입니다. 전자는 신앙과 예배의 대상에 관한 신학적 판단이지만, 후자는 역사적·의학적 인과관계에 관한 주장입니다. 제공된 자막 안에서는 ‘조선시대부터 장자들이 실제로 다른 형제보다 일찍 죽었다’는 통계나 역사적 근거가 제시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대목은 설교자의 어린 시절 경험과 해석을 일반화한 것으로 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더구나 조금 전까지 ‘경험도 존재할 없고 사람들의 논리도 존재할 없다’, 결국 진리가 선포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취지로 가계저주론을 비판했던 논리와도 긴장이 생깁니다. ‘우리 집안에 이런 일이 반복되니 가계의 저주다’라는 경험적 추론을 경계했다면, ‘내가 농촌에서 이런 제사 풍습을 보았고 장자들이 일찍 죽었다’는 경험 역시 같은 엄격한 기준으로 검증해야 합니다. 이 부분에서는 이영환 목사가 앞에서 세운 좋은 원칙을 자기 자신의 제사문화 해석에도 동일하게 적용했으면 훨씬 더 설득력 있었을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문제를 또 다른 방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사람이 죽으면 자연계 어딘가에 머물면서 제삿밥을 받아먹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물질적인 몸을 벗는 것이며, 사람은 영적 몸을 가진 채 영계에서 계속 살아갑니다. 따라서 죽은 조상이 제삿날 집으로 돌아와 차려 놓은 음식을 먹는다거나, 그 음식에 어떤 영적인 기운이 들어가 그것을 먹은 장자에게 죽음의 영향이 전달된다는 식의 사고는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이해와 맞지 않습니다. 자연적인 음식은 자연계에 속하고 영은 영계의 질서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제사 행위의 ‘영적 의미’가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음식 자체에 어떤 마력이 있느냐가 아니라 ‘ 행위를 하는 사람의 애정과 의도’입니다. 사람이 죽은 조상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과, 그 조상에게 자신의 운명과 복을 맡기며 종교적인 숭배를 드리는 것은 다릅니다. 부모와 조상을 존경하고 그들의 선한 삶을 기억하는 것은 체어리티의 질서와 충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을 주님에게 속한 자리에 올려놓고 그에게 복과 화를 좌우하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핵심은 ‘제삿밥이라는 물질’이 아니라 ‘예배와 신뢰가 누구에게 향하고 있는가’입니다.

 

이 구별은 한국 기독교가 제사 문제를 다룰 때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제사를 반대한다면서 조상에 대한 모든 기억과 존경까지 악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면 가족 간 갈등만 커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냥 문화일 ’이라며 그 행위에 담긴 종교적 의미를 전혀 살피지 않는 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라면 외적인 형식만 보고 판단하기보다 그 형식 안에 있는 ‘애정과 목적’을 보려고 할 것입니다. 주님께 돌려야 할 예배가 죽은 인간에게 향한다면 바로잡아야 하지만, 돌아가신 부모를 기억하며 감사하고 가족이 함께 모여 그들의 선한 삶을 되새기는 것까지 같은 범주로 묶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죽은 조상이 살아 있는 후손에게 영향을 미칠 있는가?’라는 더 미묘한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영들의 유입을 매우 실제적으로 말합니다. 사람의 생각과 애정에는 영계로부터 유입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우리 할아버지의 영이 나를 따라다닌다’, ‘우리 가문의 조상 영들이 후손에게 붙어 있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사람에게 결합되는 영들은 사람이 그들의 개인적 정체를 알아보고 관계를 맺도록 붙어 있는 것이 아니며, 유입은 주님의 섭리 아래 인간의 자유가 보존되는 질서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영계론을 한국적인 ‘조상신’ 개념이나 기독교 일부에서 말하는 ‘가계의 ’과 섞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에서 오히려 이영환 목사가 ‘가계의 저주’를 부정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와 만날 수 있는 중요한 접점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무슨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내가 저주를 받는다’는 사고에서 사람을 해방시키려는 방향은 옳습니다. 강의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씀을 붙들고 ‘옛것은 지나갔다’고 강조하는 것도, 신약의 문자적 의미 안에서는 분명한 복음적 힘이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을 단지 신분의 즉각적인 변경으로만 보지 않고 ‘거듭남’이라는 실제적인 과정으로 봅니다. 주님께 돌아섰다고 해서 오랜 세월 형성된 악한 성향과 습관이 순간적으로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죄책의 전가나 가계저주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지만, 내가 물려받고 스스로 강화해 온 악한 성향과는 평생 싸워야 합니다. 이것은 ‘저주가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을 자유롭게 거듭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 믿었으니 가계의 저주는 끝났다’에서 멈추면 사람은 자기 안의 실제 악을 너무 쉽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조상의 때문에 정죄받는 사람이 아니지만, 안에는 유전적으로 기울어진 수많은 악의 성향이 있으며 그것이 실제 악으로 나타나지 않도록 주님 앞에서 날마다 살펴야 한다’고 이해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여기에는 두려움이 아니라 책임이 생깁니다. ‘우리 집안이 원래 화를 내니까 어쩔 없다’고 할 수도 없고, ‘조상의 분노의 영을 끊으면 된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내가 분노를 악으로 인정하고, 그것이 행동으로 나오려 할 때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피해야 합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반대로 부모가 훌륭한 신앙인이었다고 해서 안심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집안은 대째 목회자 집안이다’, ‘우리 부모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우리 가문에는 장자의 복이 흐른다’는 사실이 나의 거듭남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장자권 가르침에서 특히 지켜야 할 균형입니다. ‘저주는 상속되지 않지만 복은 자동으로 상속된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자연적 환경과 영적 기회는 전달될 수 있지만, 사랑과 신앙 자체는 각 사람이 주님에게서 받아 자기 삶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모가 자녀에게 남겨 줄 수 있는 최고의 영적 유산은 ‘내가 받은 장자권을 네게 넘긴다’는 선언보다 훨씬 실제적입니다. 부모 자신이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 잘못했을 때 자녀에게 사과하는 것, 말씀을 삶보다 앞세우지 않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 어려운 사람을 섬기는 것, 돈과 명예보다 선한 양심을 귀하게 여기는 것, 자녀를 자기 소유가 아니라 주님께 맡겨진 한 사람으로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 속에서 자녀의 마음에는 수많은 선한 상태가 심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씨앗을 나중에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일은 결국 그 자녀 자신의 자유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보면 ‘가문의 회복’이라는 말도 새로운 의미를 얻습니다. 가문의 회복은 어떤 영적 의식을 통해 조상의 저주를 끊는 일이 아니라, ‘나에게서부터 악의 반복을 멈추는 ’입니다. 할아버지가 폭력적이었고 아버지도 폭력적이었다면 ‘폭력의 영을 끊는다’는 선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분노와 폭력을 죄로 여기고 실제 삶에서 그것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집안이 대대로 돈 때문에 싸웠다면 ‘가난의 저주’를 끊는 것보다 탐욕과 소유욕을 살피는 것이 먼저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억압해 왔다면 내가 내 자녀에게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 가문의 영적 질서를 바꾸는 실제적인 시작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거듭남과 훨씬 가깝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지점에서 ‘장자권’이라는 말을 아주 아름답게 다시 사용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내가 우리 가문의 장자가 되어 복을 독점하겠다’가 아니라 ‘내게서부터 악의 대물림을 멈추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장자권’을 직접 이런 문장으로 정의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의 거듭남 교리를 오늘의 가정 문제에 적용한 표현입니다. 내가 먼저 용서하고, 내가 먼저 정직해지고, 내가 먼저 악을 끊고, 내가 먼저 이웃을 섬기며, 내 자녀에게 이전 세대와 다른 선한 환경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라면 ‘영적 장자’라는 표현은 특권이 아니라 매우 무거운 책임을 뜻하게 됩니다.

 

더 깊게는 그 책임마저 ‘ 힘으로 우리 가문을 바꾸겠다’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의 주체는 주님이십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지만, 실제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내가 장자니까 내가 우리 집안을 구한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나부터 고쳐 주셔서, 나를 통하여 다음 세대에 조금 선한 길이 열리게 하신다’가 되어야 합니다. 이때 장자권은 인간의 영적 영웅주의에서 벗어나 주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로운 협력이라는 질서 안으로 들어옵니다.

 

결국 이영환 목사의 이 부분에는 ‘함께 보존해야 ’과 ‘분별해서 내려놓아야 ’이 동시에 있습니다. ‘조상의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계속 저주 아래 있다’는 가계저주론을 거부하는 것은 보존할 만합니다. 부모의 삶과 문화와 정서가 자녀에게 실제 영향을 미친다는 구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제사 음식을 장자가 먹었기 때문에 한국 장자들이 일찍 죽었다는 식의 주장은 근거가 충분하지 않으며, 앞서 자신이 가계저주론을 비판할 때 사용한 엄격한 기준과도 잘 맞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둘을 함께 볼 수 있게 합니다. 사람을 심판할 필요도 없고, 한 대목의 오류 때문에 그가 말한 모든 진리까지 버릴 필요도 없습니다. 반대로 좋은 가르침 몇 가지가 있다고 해서 검증되지 않은 주장까지 받아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조상의 죄책은 나의 죄책이 아니다. 그러나 유전된 악의 성향은 실제로 존재한다. 그것은 저주풀이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평생의 거듭남을 통해 질서가 바로잡힌다. 부모의 선도 자동으로 나의 선이 되지는 않는다. 나는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직접 받아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 저는 이 정도가 이 부분을 통과하는 가장 균형 잡힌 정리라고 봅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4부는 자연스럽게 ‘그러면 장자에게 주어진 복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문제로 넘어갑니다. ‘’을 가정과 자녀와 물질과 사역의 형통으로 읽을 것인지, 아니면 그 자연적 표현들 안에서 더 깊은 영적 실재를 읽을 것인지가 핵심입니다. 이 지점이 이 장자권 가르침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분별할 때 사실상 가장 중요한 고비 가운데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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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3부에서는 이영환 목사가 ‘가계의 저주’를 오히려 분명하게 부정한다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조상의 죄책이 후손에게 자동으로 넘어오는 것은 아니라는 그의 설명은 스베덴보리의 ‘유전악’ 개념과 구별하면서도 상당 부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4부에서는 장자권 가르침에서 더 중요한 문제, 곧 ‘’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장자에게 복이 있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복을 ‘무엇’이라고 이해하느냐에 따라 장자권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는 이영환 목사의 다른 강의 자료에서 초보적 신앙의 성도가 좋아하는 것을 ‘주일성수, 교회 봉사, 물질 축복, 행복한 가정’ 등으로 설명하면서, 그것을 신앙의 완성으로 보지 않고 이후 죄성과 정욕을 다루는 연단의 과정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대목도 함께 참고할 만합니다. 즉 그의 전체 가르침을 단순히 ‘장자권 = 물질축복’이라고 축소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장자에게 주어지는 복을 생각하면 먼저 ‘ ’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신명기의 율법에서도 장자는 아버지 소유 가운데 다른 자녀보다 두 몫을 받았습니다. 이삭의 축복을 둘러싼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도 있고,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통하여 요셉이 사실상 두 지파의 몫을 받게 되는 모습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적 의미에서 ‘장자권’과 ‘ 많은 ’이 연결되는 것은 성경에 근거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 자연적인 질서를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그대로 옮겨 ‘영적 장자는 다른 사람보다 많은 물질과 성공과 권세를 받는다’는 공식으로 만드는 순간입니다. 그렇게 되면 표상이 가리키는 실재를 보는 대신 표상의 외형을 다시 붙잡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말씀 해석에서 이것은 매우 중요한 원칙입니다. 구약의 토지, 재산, 자녀, 장수, 승리, 풍요는 실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연적인 복이었습니다. 그것을 역사적 사실이 아니었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신적 말씀인 이유는 그 자연적인 사건들 안에 영원하고 천국적인 실재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은 단지 부동산을, ‘곡식과 포도주’는 단지 식량과 경제적 풍요를, ‘자손’은 단지 생물학적 후손의 증가를 의미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들어가면 그것들은 선과 진리, 신앙과 체어리티, 교회의 번성, 거듭남에서 생겨나는 영적인 열매들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갑절의 ’을 받는다는 것도 반드시 ‘연봉이 배가 된다’, ‘사업 규모가 배가 된다’, ‘자녀가 남보다 크게 성공한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가 풍성해지고, 그것을 이웃의 선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능력과 책임이 커지는 것으로 읽어야 합니다. 주님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받았다는 것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뜻보다 ‘ 많이 섬길 있게 되었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복 개념과 정반대입니다. 세상은 ‘많이 가진 사람이 받은 사람’이라고 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질서에서는 ‘많이 흘려보낼 있는 사람이 받은 사람’입니다. 세상에서는 권한이 커지면 나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지지만, 천국에서는 쓰임이 커집니다. 지혜가 많으면 사람들을 지배할 자격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에게 진리를 나눌 책임이 생깁니다. 재물이 많으면 그것 자체가 높은 영적 상태의 증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재물을 어떤 애정과 목적으로 사용하는지가 중요해집니다.

 

그래서 ‘장자의 ’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다면 ‘ 배의 특권’보다 ‘ 배의 쓰임’이라고 읽는 편이 훨씬 안전합니다. 이것은 ‘ ’의 모든 속뜻을 단순히 ‘쓰임’ 하나로 번역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말씀의 각 문맥마다 상응은 더 정밀하게 살펴야 합니다. 다만 오늘날 우리의 삶에 적용할 때, ‘장자는 받아 누리는 사람’보다 ‘먼저 받아 많이 섬기는 사람’이라는 방향이 천국의 질서와 훨씬 잘 맞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물질적인 복을 구하면 되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계의 삶을 하찮게 여기지 않습니다. 집이 필요하고, 음식이 필요하고, 건강이 필요하며, 자녀가 평안하기를 바라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는 경제적 조건을 구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주기도문에도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가 있습니다. 문제는 자연적인 복 자체가 아니라 ‘질서’입니다.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섬기느냐, 영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되느냐입니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큽니다. ‘주님을 사랑하니 주님께서 사업을 잘되게 주실 것이다’와 ‘주님께서 맡겨 주신 사업을 통하여 정직하게 일하고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며 얻은 재물을 선한 쓰임에 사용하고 싶다’는 말은 겉으로는 모두 신앙과 사업을 연결하지만 안쪽의 방향이 다릅니다. 첫 번째에서는 주님이 나의 성공을 위한 수단이 되기 쉽고, 두 번째에서는 자연적인 사업이 주님의 선을 행하기 위한 수단이 됩니다. 전자는 종교가 자연적 욕망을 섬기는 방향으로 뒤집힐 위험이 있고, 후자는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목적을 섬기는 질서입니다.

 

바로 이것이 ‘장자권의 ’을 분별하는 핵심입니다. 장자권을 배운 뒤 사람이 ‘이제 우리 가정이 잘되고, 자녀가 잘되고, 사업이 잘되고, 경제적으로 형통할 것이다’라는 기대를 주로 갖게 된다면, 그 가르침이 아무리 성경 구절을 많이 사용하더라도 그 열매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반대로 장자권을 배운 뒤 ‘나는 우리 가정에서 먼저 회개해야겠다’, ‘내가 먼저 용서해야겠다’, ‘내가 가진 것을 가족과 이웃의 선을 위해 사용해야겠다’, ‘자녀를 성공의 연장이 아니라 주님께 맡겨진 독립된 영혼으로 대해야겠다’, ‘ 많이 받기를 구하기보다 충실하게 쓰임을 감당해야겠다’는 방향으로 마음이 움직인다면 그 장자권 가르침은 상당히 다른 열매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자녀의 ’은 매우 조심해서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부모라면 자녀가 잘되기를 원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건강하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지 않고, 사회에서도 인정받으며 살기를 바랍니다. 그것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복이 이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자녀에게 가장 큰 복은 ‘천국에 적합한 사람이 되어 가는 ’입니다. 정직을 사랑하고, 악을 죄로 여기며, 이웃의 선을 기뻐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쓰임을 성실히 감당하며,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녀가 세상에서 크게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 수도 있고 뜻밖의 질병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외적인 사건 하나하나를 ‘장자권의 복을 받았는가, 잃었는가’를 판단하는 척도로 삼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시작하면 신앙은 필연적으로 결과 중심이 됩니다. 일이 잘되면 ‘하나님이 주셨다’고 하고, 일이 안 되면 ‘내가 장자권을 놓쳤나’, ‘가정에 무슨 문제가 있나’, ‘신앙이 부족한가’를 찾게 됩니다. 그러면 고난당하는 의인과 가난한 성도, 병든 사람을 설명하기 어려워집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는 이보다 훨씬 깊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사람을 이 세상에서 가능한 한 편안하고 성공하게 만드는 것을 최종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자연적 성공은 그 사람에게 허용될 수 있고, 어떤 성공은 오히려 막힐 수도 있습니다. 어떤 실패가 사람을 겸손하게 하여 더 깊은 선으로 이끄는 도구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큰 성공이 사람의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키워 영적으로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한 사건만 보고 그 섭리 전체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 형통’이라는 공식은 영적으로 매우 위험합니다. 이 공식이 자리 잡으면 자연스럽게 ‘고난=복 없음’이라는 반대 공식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 자신은 세상적인 의미에서 형통한 생애를 사신 분이 아닙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천국의 행복을 자연적인 부와 명예의 확대판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천국의 기쁨은 사랑과 쓰임에서 옵니다. 다른 사람의 선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기쁨,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자신을 통해 흘러간다는 기쁨이 천국의 행복과 연결됩니다.

 

이 점에서 이영환 목사의 전체 가르침에는 흥미롭게도 ‘번영신학’과 단순히 동일시하기 어려운 요소가 보입니다. 관련 강의에서 그는 초보적인 성도가 ‘물질 축복 받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자신의 죄성을 뼈저리게 발견하고 다루는 과정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또 부자 청년 본문을 설명하면서 예수께서 ‘소유를 팔라’고 하신 것을 단지 물질적 재산만이 아니라 사람 안의 ‘정욕, 죄성과 정욕이라는 소유’까지 내려놓는 문제로 확대합니다. 이것 역시 문자적 본문의 정밀한 속뜻 해석과는 별도로, 자연적인 소유보다 내면의 악을 더 근본적인 문제로 본다는 점에서는 주목할 만합니다.

 

따라서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을 평가하면서 ‘결국 많이 벌고 자녀 잘되자는 이야기’라고 단순화하면 그의 가르침에 있는 중요한 부분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영적 훈련과 죄의 처리, 헌신과 사명도 강조합니다. 오히려 문제는 그 여러 요소들이 ‘장자권’이라는 하나의 틀 안에서 어떻게 결합되느냐입니다. 자연적 축복과 영적 성숙이 함께 언급될 때 무엇이 목적이고 무엇이 수단인지 끝까지 지켜봐야 합니다. 이 구별 하나가 전체 가르침의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특히 유용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적인 것을 없애지 않습니다. 자연적인 것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몸도 필요하고, 돈도 필요하고, 가정도 필요하고, 직업도 필요하며, 교회라는 외적 조직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그 안에 영적인 것이 담길 때 제자리를 찾습니다. 자연적인 것은 그릇이고 영적인 것은 그 안의 내용입니다. 그릇을 깨뜨릴 필요는 없지만, 빈 그릇을 내용 자체라고 착각해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복된 가정’도 새롭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아무 문제가 없는 가정이 반드시 복된 가정은 아닙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가정이 반드시 복된 가정도 아닙니다. 자녀들이 모두 사회적으로 성공한 가정도 그것만으로는 복된 가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서로 잘못했을 때 용서를 구할 수 있고, 약한 가족을 버리지 않으며, 돈보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갈등 속에서도 진리를 따라 자신을 돌아보며, 가족 구성원을 자기 소유물로 대하지 않는 가정이라면 그 안에는 천국의 질서가 조금씩 형성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복된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 높은 소득은 감사할 조건일 수 있지만 영적인 복의 척도는 아닙니다. 오히려 자녀가 자기 능력을 남을 누르는 데 쓰지 않고 쓰임에 사용하며, 성공했을 때 교만해지지 않고 실패했을 때 악한 길을 선택하지 않으며,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업신여기지 않고, 진실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성장한다면 부모로서는 그보다 더 큰 복을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복된 장자’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남들보다 두 몫을 차지한 사람이 아니라 ‘ 몫을 맡은 사람’입니다. 많이 받은 만큼 많이 책임지고, 먼저 깨달은 만큼 먼저 실천하며, 먼저 주님을 알게 된 만큼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을 정죄하기보다 섬기는 사람입니다. 장자의 권위가 있다면 그것은 지배할 권위가 아니라 섬길 책임에서 나오는 권위여야 합니다.

 

여기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첫째’의 역설이 장자권을 비추는 매우 좋은 빛이 됩니다. 제자들은 누가 큰가를 자주 다투었지만 주님은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장자권에 적용하면 놀라운 전환이 일어납니다. ‘장자이므로 첫째다’에서 ‘첫째이므로 가장 먼저 섬긴다’가 됩니다. ‘장자이므로 받는다’에서 ‘ 받았으므로 많이 내어놓는다’가 됩니다. ‘장자이므로 자녀가 받는다’에서 ‘내가 먼저 거듭나 자녀에게 선한 삶을 보여 준다’가 됩니다.

 

그리고 이 전환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가인과 아벨의 문제까지 다시 풀어 줍니다. 가인의 오류는 단순히 ‘신앙이 있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우위에 서려 한 것입니다. 먼저 태어난 것이 실제로도 첫째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질서에서는 진리가 선을 섬겨야 하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야 합니다. 따라서 참된 장자권의 회복은 ‘신앙의 우월권을 회복하는 ’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이 자기 자리를 찾아 체어리티를 섬기는 것입니다.

 

여기에 AC.351의 ‘양의 새끼’가 다시 결정적인 빛을 줍니다. 사용자가 작업한 해당 자료에는 ‘처음 것은 모두 거룩했는데, 이는 그것들이 오직 홀로 장자이신 주님을 가리켰기 때문’이며, 이어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신앙이 장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결정적인 문장이 뒤따릅니다.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인간에게서 오는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주님만이 장자이십니다.

 

이 한 문장은 인간 중심의 장자권 이해를 근본에서 뒤집습니다. ‘내가 장자다’가 최종 진리가 아닙니다. ‘주님이 장자이시다’가 최종 진리입니다. 내가 받은 복의 근원도 주님이고, 내가 가진 진리의 근원도 주님이며, 내가 행할 수 있는 선의 근원도 주님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남보다 먼저 무엇을 받았다는 사실은 자랑할 근거가 아니라 감사하고 돌려드릴 이유가 됩니다. 장자의 첫 열매가 여호와께 속했던 것처럼, 내 삶의 첫째도 주님께 속해야 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장자권은 ‘성공의 신학’에서 ‘헌신의 신학’으로, ‘소유의 신학’에서 ‘쓰임의 신학’으로, ‘가문의 특권’에서 ‘거듭남의 책임’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저는 이 변화가 이영환 목사의 가르침 안에 있는 좋은 요소들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장자권을 훨씬 안전하게 이해하게 해 준다고 봅니다. 사명을 강조하는 것은 살릴 수 있습니다.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것도 살릴 수 있습니다. 신앙의 유산을 전하자는 열망도 살릴 수 있습니다. 부모가 먼저 바로 서야 한다는 책임도 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중심에서 ‘장자인 ’가 점점 커지는 것이 아니라 ‘참된 장자이신 주님’이 점점 커져야 합니다.

 

결국 ‘장자의 ’은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얼마나 받았는가?’가 아니라 ‘받은 것이 안에서 무엇이 되었는가?’입니다. 재물이 선한 쓰임이 되었는가, 지식이 지혜가 되었는가, 신앙이 체어리티가 되었는가, 권위가 섬김이 되었는가, 자녀에 대한 사랑이 소유욕이 아니라 그들의 영원한 선을 구하는 사랑이 되었는가, 그리고 내가 받은 진리가 나 자신을 먼저 고치는 진리가 되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렇게 보면 장자권의 가장 큰 복은 어쩌면 ‘갑절의 재산’이 아니라 ‘질서의 회복’일 것입니다. 내 안에서 주님이 첫째가 되고, 선이 진리를 다스리며,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이 되고, 영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을 다스리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쓰임을 향해 배열되는 것, 이것이 이루어질수록 사람은 천국의 질서에 가까워집니다. 자연적인 형통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이 질서가 사람 안에 이루어진다면 그는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5부에서는 조금 더 넓게 보겠습니다.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놓고 ‘무엇은 보존할 것인가, 무엇은 재해석할 것인가, 무엇은 내려놓아야 하는가’를 정리하겠습니다. 특히 ‘장자권이라는 별도의 교리 체계가 과연 필요한가?’라는 질문까지 들어가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장자권이 독립된 영적 특권의 교리라기보다 ‘선과 진리의 질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 거듭남과 쓰임’이라는 훨씬 큰 질서 안에서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5부에서 이 영상 전체를 종합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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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지막 5부에서는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 가르침 전체를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겠습니다. 앞의 네 편에서 우리는 이 가르침 안에 분명히 보존할 만한 요소가 있다는 것과, 동시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과하면서 상당히 깊게 재해석해야 할 부분도 있다는 것을 함께 보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결론을 ‘장자권은 옳다’ 또는 ‘장자권은 잘못되었다’ 가운데 하나로 단순하게 내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질문은 ‘성경의 장자권이라는 표상이 궁극적으로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가?’입니다.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 가르침이 사람을 주님께 더 가까이 데려가고, 자기 안의 악을 살피게 하며, 받은 진리를 삶으로 옮기고, 가정과 교회와 이웃을 섬기는 쓰임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그 안에는 분명 보존해야 할 선한 것이 있습니다. 반대로 장자권이 ‘특별한 사람’, ‘특별한 가문’, ‘특별한 ’, ‘특별한 영적 권세’를 소유하는 의식으로 굳어진다면 바로 그 지점에서 장자권의 속뜻과 멀어질 수 있습니다.

 

먼저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 가르침에서 긍정적으로 보아야 할 것은 ‘신앙을 다음 세대에 전해야 한다’는 강한 책임의식입니다. 영상 마지막까지 ‘장자선교회’라는 이름으로 후원과 교재 보급이 이루어지고 있고, 장자권에 관한 여러 내용을 하나의 교재로 정리하여 평신도들도 배우게 하려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이영환 목사에게 장자권이 단순히 설교를 위한 흥미로운 소재가 아니라 자신의 목회와 사역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주제임을 보여 줍니다. 이런 열심 자체를 가볍게 볼 필요는 없습니다. 한 세대가 받은 신앙을 자기 세대에서 소비하고 끝내지 않고 다음 세대에 전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오늘날 교회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또 하나 보존할 것은 ‘가계의 저주’를 함부로 말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3부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영환 목사는 조상의 죄 때문에 오늘의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저주 아래 있다는 주장을 분명히 거부합니다. 부모의 삶과 문화와 정서가 자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과 조상의 죄책이 영적으로 후손에게 전가된다는 것을 구별합니다. 이것은 장자와 가문을 강조하는 가르침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가문을 강조하다 보면 쉽게 ‘가문의 저주’와 ‘가문의 ’이라는 양극단으로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영환 목사의 전체 가르침을 단순한 ‘물질축복론’으로 규정하는 것도 공정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 관련 강의에서는 물질 축복과 행복한 가정을 신앙생활의 최종 단계로 보지 않고, 사람이 자기 안의 죄성과 정욕을 발견하고 다루는 더 깊은 과정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 점은 중요합니다. 장자권과 복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곧바로 ‘번영신학’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면 실제로 그가 말하고 있는 더 넓은 신앙의 구조를 놓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가장 먼저 조정해야 할 것은 ‘장자권’이라는 개념 자체의 위치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장자권은 기독교인의 삶 전체를 설명하는 독립된 중심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말씀 안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매우 중요한 ‘표상’이며, 그 표상이 가리키는 것은 궁극적으로 ‘선과 진리의 우선순위’, ‘사랑과 신앙의 질서’, 그리고 더 깊게는 주님 자신입니다. 따라서 장자권을 하나의 거대한 교리 체계로 확대하여 성경 전체와 신앙생활 전체를 그 틀로 설명하려 하면, 본래 더 큰 질서를 설명하기 위해 주어진 하나의 표상이 오히려 전체를 지배하는 해석의 틀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성경 주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언약’을 붙들고 성경 전체를 언약 하나로만 읽을 수도 있고, ‘성전’을 붙들고 모든 것을 성전으로 설명할 수도 있으며, ‘영적 전쟁’을 중심에 놓고 모든 문제를 귀신과 전쟁으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각각의 주제에는 분명 성경적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진리가 다른 모든 진리를 흡수하기 시작하면 균형이 깨집니다. 장자권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자권은 중요하지만, ‘모든 것을 설명하는 열쇠’는 아닙니다. 말씀 전체의 중심은 장자권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오직 주님만이 장자이시다’는 설명이 결정적인 기준이 됩니다. 사용자가 작업한 AC 자료에는 ‘처음 것은 모두 거룩했는데, 이는 그것들이 오직 홀로 장자이신 주님을 가리켰기 때문’이며, 이어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신앙’이 장자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더욱 결정적으로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인간에게서 오는 것은 조금도 없으므로 오직 주님만이 장자이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을 장자권 가르침의 맨 중심에 놓으면 많은 것이 저절로 정리됩니다. ‘내가 장자가 되는 ’보다 ‘주님이 안에서 첫째가 되시는가?’가 중요해집니다. ‘장자의 복을 어떻게 받을 것인가?’보다 ‘내가 받은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는가?’가 중요해집니다. ‘장자의 권세를 어떻게 행사할 것인가?’보다 ‘내가 받은 것을 어떤 쓰임에 돌릴 것인가?’가 중요해집니다. 장자권의 초점이 인간에게서 주님에게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우리가 최근 AC에서 계속 만나 온 ‘가인과 아벨’의 문제가 정확하게 들어옵니다. 가인이 먼저 태어났습니다. 외적인 시간의 순서에서는 가인이 장자입니다. 가인은 신앙을 표상하고 아벨은 체어리티를 표상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거듭날 때 경험하는 순서와도 닮았습니다. 사람은 먼저 진리를 배우고 신앙을 형성한 뒤 그것을 따라 살아가면서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것처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먼저’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 질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위해 존재합니다. 진리는 선을 위해 존재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배우는 목적은 진리에 관한 지식을 축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하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시간적으로 먼저 나타난 신앙이 자기 자신을 본질적으로도 첫째라고 주장하는 순간 질서가 뒤집힙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은 바로 이 비극을 표상합니다. ‘사랑과 분리된 신앙’이 자신을 첫째 자리에 놓으면서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장자권 운동을 바라볼 때 매우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장자권을 그렇게 열심히 강조하면서도 그 결과 사람이 더 사랑하지 못하고, 더 용서하지 못하고, 더 섬기지 못하며, 오히려 ‘나는 특별한 영적 권리를 가진 사람’이라는 의식이 강해진다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반대로 장자권을 배운 사람이 ‘내가 먼저 회개하겠다’, ‘내가 먼저 용서하겠다’, ‘내가 먼저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겠다’, ‘내가 먼저 가족을 섬기겠다’고 한다면 그 가르침은 체어리티를 향하고 있습니다. 결국 나무는 열매로 분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가문’이라는 말도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장자권 가르침에서는 자연스럽게 ‘우리 가문’과 ‘다음 세대’가 중요해집니다. 이것에는 좋은 면이 있습니다. 현대사회가 지나치게 개인화되면서 신앙도 ‘나와 하나님 사이의 개인적인 문제’로 축소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가 자녀에게 영향을 주고, 한 세대의 선택이 다음 세대의 환경을 바꾸며, 내가 받은 선한 것을 다음 사람에게 전해야 한다는 책임의식은 소중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반드시 ‘자유’를 놓습니다. 나의 거듭남을 자녀에게 물려줄 수는 없습니다. 내가 받은 천국의 상태를 유산처럼 자녀에게 넘길 수도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좋은 환경을 마련하고 말씀을 가르치며 선한 삶을 보여 주고, 주님께서 그 어린 마음에 귀한 리메인스를 보존하시는 데 자연적 도구가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그 자녀 역시 자기 자유 안에서 주님을 향하여 돌아서야 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의 유산은 ‘영적 신분의 상속’이 아니라 ‘거듭남에 유리한 선한 환경과 본보기의 전달’이라고 하는 편이 훨씬 정확합니다.

 

이렇게 보면 부모가 자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도 달라집니다. ‘너는 우리 집안의 장자권을 이어받았다’고 가르치는 것보다 ‘나는 주님 앞에서 이렇게 살려고 애썼다. 너도 사람을 두려워하기보다 선과 진리를 사랑하고, 악을 죄로 여기며, 네게 맡겨진 쓰임을 찾아 살아라’고 삶으로 보여 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부모의 신앙이 진짜였다면 자녀가 물려받아야 할 것은 부모의 영적 지위가 아니라 부모가 사랑했던 ‘선과 진리’입니다.

 

’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자권을 말할 때 자연적인 복이 자꾸 중심으로 올라오면 경계해야 합니다. 건강, 물질, 성공, 자녀의 형통은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장자권을 가진 사람이라는 증거가 아닙니다. 4부에서 살펴보았듯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의 최종 목적은 사람을 자연계에서 가능한 한 성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에게는 성공이 허용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실패가 허용될 수도 있습니다. 자연적인 결과만 가지고 주님의 복을 측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놓치면 장자권 신앙은 매우 고통스러운 역설을 만들 수 있습니다. 열심히 믿었는데 자녀가 잘되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장자권을 붙들고 기도했는데 사업이 망하면 어떻게 합니까? 병이 낫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사랑하는 가족이 일찍 세상을 떠나면 어떻게 합니까? 그때 ‘장자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 ‘믿음이 부족했다’, ‘무엇인가 영적 원리를 어겼다’는 설명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복음이 오히려 사람을 짓누르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섭리는 그런 공식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장자권의 ‘ ’을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한다면 ‘ 배의 소유’보다 ‘ 쓰임’으로 읽는 편이 좋다고 봅니다. 먼저 받은 사람은 먼저 섬깁니다. 많이 배운 사람은 많이 가르치기 전에 먼저 많이 살아야 합니다. 재물이 많은 사람은 그만큼 더 넓은 쓰임의 가능성을 갖습니다. 권위가 있는 사람은 더 큰 책임을 집니다. 부모는 자녀보다 먼저 태어났기 때문에 지배자가 아니라 돌보는 사람이 됩니다. 목회자는 성도보다 높은 계급이기 때문에 목회자가 아니라 말씀과 사람을 섬기는 쓰임을 맡았기 때문에 목회자입니다.

 

그렇게 읽으면 ‘장자’라는 말이 오히려 무거워집니다. 장자가 되려고 경쟁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장자권이 특권이 아니라 책임이라면 ‘내가 장자다’라고 주장하는 것보다 ‘내가 먼저 섬기겠다’고 하는 것이 장자의 실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천국의 첫째 자리 역시 바로 이런 역설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제사’ 문제 역시 마지막으로 이 기준에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영환 목사가 제사문화를 강하게 비판하는 배경에는 ‘예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신앙적 의도가 있습니다. 그 핵심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사 음식을 먹은 장자들이 일찍 죽었다’는 식의 경험적 주장은 별도로 검증되어야 하며, 신학적 확신과 역사적 인과관계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죽은 조상을 기억하고 존경하는 것과 그들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도 구별합니다. 외적 형식만 보지 않고 그 행위 안의 애정과 목적을 살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영적 전쟁’ 역시 장자권과 결합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 천사와 악한 영들의 실재를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인간에게 영계로부터 유입이 있다는 것도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모든 실패와 질병과 가정 문제를 어떤 특정한 영이나 조상에게 연결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유가 보존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이 있다고 해서 ‘내가 악을 행한 책임’을 악한 영에게 넘길 수 없습니다. 선한 천사가 있다고 해서 ‘내가 선하다’고 자랑할 수도 없습니다. 선의 근원은 주님이고 악은 인간이 자기 것으로 만든 proprium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장자권의 회복도 어떤 특별한 영적 선언 한 번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거듭남’이라는 긴 과정이 필요합니다. 오늘 진리를 하나 배우고, 그 진리의 빛으로 자기 안의 악 하나를 발견하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실제로 피하고, 그 자리에 반대되는 선을 행합니다. 그리고 또 넘어지고 다시 일어섭니다. 그렇게 수없이 많은 상태를 지나면서 주님께서 사람의 내적 질서를 조금씩 바꾸십니다.

 

그러므로 ‘장자권 회복’이라는 말을 굳이 스베덴보리식으로 번역한다면 저는 ‘질서의 회복’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물론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직접 ‘장자권 회복=질서의 회복’이라는 용어로 정의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전체 교리를 바탕으로 오늘의 장자권 담론을 재해석한 표현입니다. 내 안에서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 아래 놓이고, 거짓이 진리에 의해 밝혀지고, 진리가 선을 섬기며,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하고, 자기애가 쓰임의 사랑 아래 놓이고, 궁극적으로 모든 것이 주님의 통치 아래 배열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장자권’이라는 말을 사용해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아주 깊은 말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무엇을 받을까?’가 먼저 떠오르느냐, ‘ 안에서 무엇이 첫째가 되어야 할까?’가 먼저 떠오르느냐입니다. 전자는 자연적인 장자권의 욕망으로 내려가기 쉽고, 후자는 거듭남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 가르침에서 가장 귀하게 건질 수 있는 부분도 바로 이 방향이라고 봅니다. ‘ 세대에서 끝내지 말자. 다음 세대를 생각하자. 받은 것을 전하자. 먼저 사람이 책임을 감당하자.’ 이런 정신은 버릴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오늘날 개인주의적인 신앙에 필요한 부분도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가문의 특별한 영적 권리’에서 떼어 내고 ‘선과 진리를 다음 세대에 삶으로 전달하는 책임’으로 바꾸면 훨씬 깊어집니다.

 

그러면 장자선교회의 ‘장자’도 새로운 의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남들과 다른 특별한 장자들이다’가 아니라 ‘우리가 먼저 들었으니 먼저 살자’입니다. ‘우리가 장자의 복을 받자’가 아니라 ‘먼저 받은 만큼 먼저 섬기자’입니다. ‘우리 자녀에게 장자권을 물려주자’가 아니라 ‘우리 자녀가 주님을 자유롭게 선택할 있도록 우리가 먼저 선과 진리를 살아 보여 주자’입니다. 이렇게 바뀐다면 장자라는 이름은 우월성의 이름이 아니라 책임의 이름이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면서도 가르침을 분별하는 이유가 드러납니다. 이영환 목사의 내면이 어떠한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오랜 목회 가운데 어떤 사랑으로 장자권을 가르쳤는지, 주님 앞에서 그 사역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 우리가 최종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말한 내용은 말씀 앞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 안에 진리가 있다면 받아들이고, 자연적 의미에 머문 부분은 영적으로 더 깊게 읽고, 충분한 근거가 없는 주장은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됩니다. 사람을 버리지 않으면서 오류를 분별하고, 오류를 발견했다고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으며, 진리를 발견했다고 그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다섯 편의 해설을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저는 이렇게 정리하고 싶습니다.

 

참된 장자권은 내가 남보다 먼저 받을 권리가 아니라, 안에서 주님이 첫째가 되시고 선이 진리를 다스리며 신앙이 체어리티의 생명이 되어, 먼저 받은 내가 먼저 이웃을 섬기는 천국의 질서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한 문장을 더 붙인다면 이것입니다.

 

참된 장자는 내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이 두 문장을 붙들면 장자권을 지나치게 높일 필요도, 반대로 장자권이라는 성경의 귀중한 표상을 버릴 필요도 없습니다. 장자권은 그 자체가 목적지가 아니라 주님께로 향하게 하는 하나의 표지판이 됩니다. 그 표지판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나의 권리’에서 ‘주님의 질서’로, ‘나의 ’에서 ‘이웃을 위한 쓰임’으로, ‘ 가문의 특별함’에서 ‘모든 사람을 향한 주님의 섭리’로, ‘신앙의 우월성’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 아벨의 ‘양의 새끼’를 만나게 됩니다. ‘처음 ’은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사랑도 주님에게서 오고, 그 사랑에서 살아나는 신앙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장자권의 완성은 결국 ‘내가 장자권을 얻었다’는 선언이 아니라 ‘주님, 처음 것도 마지막 것도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라는 고백일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이라는 긴 가르침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과하면서 아주 뜻밖의 자리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장자가 되어라’에서 출발했지만 마지막에는 ‘참된 장자는 오직 주님이시다’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남는 것은 장자의 특권이 아니라 ‘먼저 받은 만큼 먼저 사랑하고, 먼저 섬기며, 먼저 살아내는 쓰임’입니다. 저는 바로 그 지점에 이 영상에서 건져 올릴 수 있는 가장 깊고 아름다운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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