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번 영상은 앞서 다루었던 202015일의 티혼 수도사 이야기와 상당 부분 겹칩니다. 다만 이번에는 티혼 수도사의 극단적 금욕생활뿐 아니라 그가 연결되어 소개되는 아토스의 이비론 수도원, 그곳의 공동생활과 식사 규칙, 기도와 금식, 그리고 강문호 수도사가 실제로 그곳에서 경험한 일들까지 함께 펼쳐집니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는 앞서 이미 살핀 ‘금욕과 거듭남’의 문제를 되풀이하기보다, 영상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과 하나 되는 ’, ‘외적 질서와 내적 질서’, 그리고 ‘거룩한 공동체란 무엇인가’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추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역사적으로 한 가지는 구별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에서는 1884년 러시아에서 태어난 티혼 수도사가 여러 수도원을 찾아다닌 끝에 이비론 수도원에 이르러 그곳에서 수도한 인물처럼 소개됩니다. 그러나 현재 확인되는 정교회 자료에서 티혼 골렌코프(1884-1968)는 아토스의 카프살라에서 살았던 러시아계 은수자로, 말년에는 스타브로니키타 수도원에 속한 성십자가 켈리에서 살았으며, 훗날 성 파이시오스의 영적 스승으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2026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청이 그를 공식 성인 명부에 올렸습니다. 그러므로 티혼을 이비론 수도원이 ‘배출한 대표적 수도사’로 직접 연결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는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Cloud of Witnesses) 이것은 영상의 영적 메시지를 무너뜨리는 문제가 아니라, 수도원과 인물의 실제 관계를 구별해 두자는 정도입니다.

 

영상의 티혼 수도사 묘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극단적인 금욕입니다. 잠들지 않기 위해 목에 끈을 걸고 밤새 기도하고, 아주 적은 음식만 먹으며, 딱딱한 잠자리와 한 장의 담요로 겨울과 여름을 지낸 것으로 소개됩니다. 또한 ‘탐식은 모든 죄가 들어오는 현관문’이라는 생각 아래 배부름을 경계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전해지는 티혼의 생애에서도 극심한 가난과 지속적인 기도와 금욕은 중요한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Cloud of Witnesses) 이런 삶을 바라볼 때 우리는 먼저 그 진지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지기를 갈망하여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고 기도에 생애를 바친 사람의 열망 자체를 가볍게 볼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언제나 여기서 한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갑니다. 적게 먹는 것이 곧 탐욕을 제거하는 것은 아니며, 딱딱한 침대에서 자는 것이 곧 proprium을 제거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하루에 열매 반쪽만 먹으면서도 자기 금욕을 자랑할 수 있고,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감사와 절제 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음식의 양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지배하는 사랑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은 육체를 가능한 한 괴롭히는 과정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악한 욕망이 주님의 질서 아래 놓이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외적 절제는 내적 거듭남을 돕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지만, 둘을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배부르면 음란해지고, 배부르면 교만해지고, 배부르면 자기 자랑을 하게 된다’는 영상의 설명도 이런 구별이 필요합니다. 과식과 탐식이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고 영적 집중력을 흐릴 수 있다는 수도 전통의 경험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죄의 근원이 음식이나 배부름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악의 뿌리는 인간의 proprium 안에서 주님과 이웃보다 자신을 사랑하려는 질서의 전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탐식을 절제했는데도 사람을 지배하려 하고, 인정받기를 원하고, 자기 공로를 높이고, 타인을 업신여긴다면 근본적인 싸움은 아직 남아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음식에 대한 절제도 결국 이러한 내적 악과 싸우는 데 봉사할 때 영적 의미를 갖습니다.

 

티혼과 동물들의 관계를 전하는 부분은 따뜻합니다. 여우가 찾아오고, 멧돼지 새끼들을 보호하며, 사냥꾼에게 동물을 숨겨 주고, 심지어 곤충들에게 자신의 피를 먹게 했다는 성인전적 이야기까지 소개됩니다. 이런 세부를 모두 역사적으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전달하려는 방향은 분명합니다. 수도자의 거룩함이 인간에게만 친절한 데서 끝나지 않고 피조물 전체에 대한 온유함으로 확장되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론에서도 동물은 인간의 다양한 애정들을 표상합니다. 그렇다고 실제 여우나 멧돼지를 곧바로 특정 애정과 일대일 대응시킬 필요는 없지만, 인간 안의 거칠고 자연적인 것까지 주님의 질서 아래 평화롭게 놓이는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장면으로는 충분히 읽을 수 있습니다.

 

영상은 이런 혹독한 훈련 끝에 티혼이 ‘하나님과 합일의 단계’에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중요한 구별을 하나 더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동일해지는 의미에서 ‘합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언제나 생명 자체이시고 인간은 그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유한한 피조물입니다. 인간이 주님과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 안의 선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임을 더욱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참된 결합은 ‘내가 어떤 높은 영적 단계에 올랐다’는 자기의식보다, 자신의 생명과 선이 전적으로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점 더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영상 중간의 우물 이야기에서도 같은 원칙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가뭄으로 우물이 말랐을 때 성자의 초상화를 우물에 넣고 수도자들이 기도하자 물이 차올라 초상화가 떠올랐다는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그리고 강문호 수도사는 ‘기도는 응답이다. 기도는 되는 것을 되게 하고,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고, 닫힌 문을 연다’는 취지로 강조합니다. 이 이야기는 수도원 전승으로 받아들이면 충분하겠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본질을 ‘내가 바라는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는 능력’으로만 이해하면 기도가 어느새 인간의 뜻을 관철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참된 기도는 주님의 뜻을 내 뜻에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이 주님의 섭리와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응답이 내가 요구한 형태로 오지 않을 때에도 주님을 신뢰할 수 있는가가 오히려 더 깊은 기도의 시험일 수 있습니다.

 

이번 영상에서 매우 흥미로운 부분은 이비론 수도원의 공동 식사입니다. 원장이 먹기 시작하면 모두 함께 먹고, 원장이 수저를 놓으면 아직 다 먹지 못했어도 모두 수저를 놓으며, 식사 중에는 한 사람이 성경을 읽어 육신의 양식과 영의 양식을 함께 취한다는 설명입니다. 여기에 담긴 질서와 절제는 충분히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수도원장이 모든 것의 표준’이라는 표현은 영적으로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공동체의 운영에는 외적 질서가 필요하고 수도자는 자발적으로 그 질서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양심과 진리의 최종 기준은 인간 지도자가 아니라 주님과 말씀입니다. 인간 지도자에게 대한 순종이 주님께 대한 순종을 돕는 수단이라면 좋은 질서가 되지만, 지도자의 의지가 곧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다면 외적 순종이 내적 자유를 침범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수도원 밖의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강제로 거듭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보존하시면서 그가 선과 진리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이끄십니다. 따라서 가장 깊은 순명은 ‘ 인간이 시키는 대로 하는 ’이 아니라, 자기 의지를 내려놓고 주님의 선과 진리에 기꺼이 순종하는 것입니다. 외적 규율이 그것을 훈련해 줄 수는 있지만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원장이 숟가락을 놓았기 때문에 나도 숟가락을 놓는 훈련보다 더 깊은 것은, 내 욕망이 ‘조금 먹고 싶다’, ‘ 뜻대로 하고 싶다’, ‘나는 예외이고 싶다’고 말할 때 그것을 주님의 질서 아래 놓는 내적 순종입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만난 일본 수도사가 ‘한국에서 수도사가 없다. 한국과 아토스의 고리를 만들어 달라’며 자신을 붙들었다는 일화도 흥미롭습니다. 여기에는 ‘한국에도 이런 수도 영성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강문호 수도사의 오랜 열망이 드러납니다. 영상 마지막에도 ‘우리나라에도 이런 교회 수도사들이 많이 배출되어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이 소망 자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현대교회가 활동, 성장, 재정, 조직, 프로그램에 치우칠 때 기도와 절제와 하나님 중심의 삶을 회복하자는 요청은 귀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수도사가 많이 배출되는 ’과 ‘거듭난 사람이 많아지는 ’을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수도복을 입은 사람의 수가 많아져도 자기 사랑과 공로의식과 지배욕이 그대로라면 천국이 가까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수도사라는 이름을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사람이 가정과 직장과 교회에서 자신의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정직한 쓰임을 행한다면 그는 실질적으로 천국의 질서를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수도 영성을 바라보면서 계속 외적 형식과 내적 상태를 구별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영상 마지막의 ‘하나님하고 가까이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사막이 도시가 된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살기 때문에 그곳이 아름답다’는 취지의 말은 상당히 좋습니다. 다만 ‘아름다운 사람’의 기준을 다시 주님께 돌려놓으면 훨씬 깊어집니다. 사람 자체가 스스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이 삶으로 흘러나올 때 그 사람을 통해 천국의 아름다움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천국의 아름다움도 천사들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있는 주님의 사랑과 지혜가 외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번 영상은 앞서 살핀 티혼 수도사 이야기보다 조금 더 넓은 질문을 우리에게 남깁니다. ‘거룩한 수도자가 되는 ’보다 ‘거룩한 공동체가 어떻게 형성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극단적인 금식, 긴 기도, 엄격한 규칙, 침묵, 수도원장의 권위가 공동체를 특별하게 보이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적 공동체의 진정한 표지는 구성원들이 얼마나 서로 사랑하며, 상대의 자유를 존중하고, 자신의 공을 내려놓으며, 각자의 쓰임을 통해 전체의 선을 섬기는가에 있습니다. 외적 질서가 이러한 내적 질서를 보호한다면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외적 질서 자체가 거룩함의 증표가 되는 순간 수도원 역시 세상의 다른 조직과 크게 다르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이번 영상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가장 주의 깊게 바라보게 되는 문장은 어쩌면 ‘지독한 훈련 끝에 드디어 하나님과 합일의 단계에 들어갔다’는 표현일 것입니다. 인간의 거듭남은 ‘지독하게 하면 도달하는 영적 고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신의 악과 거짓을 인식하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버리며, 주님께서 우리 안에 새 의지와 새 이해를 형성하시도록 허용하는 평생의 과정입니다. 인간이 노력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 자체를 구원의 원인으로 만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가장 깊이 거듭난 사람일수록 ‘내가 여기까지 올라왔다’보다 ‘주님께서 나를 여기까지 이끄셨다’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티혼의 극단적 금욕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 이 영상에서 우리가 취할 결론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삶에서 받아들일 것은 ‘하나님을 무엇보다 우선하고 싶었던 갈망’, ‘욕망에 끌려다니지 않으려 했던 절제’, ‘기도를 삶의 중심에 두려 했던 태도’, ‘피조물에게까지 미친 온유함’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오늘 우리의 형편 속에서 더 내적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음식을 조금 덜 먹는 것보다 탐욕을 덜 먹이고, 말을 조금 덜 하는 것보다 자기 자랑을 덜 말하며, 세상을 떠나 동굴로 들어가는 것보다 자기 안의 proprium을 발견하고 주님께 맡기는 것이 더 깊은 수도가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아토스의 숲과 수도원이 ‘천국 같은 ’인 이유가 있다면 건물이나 금식 규칙이나 수도복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 그것을 서로를 향한 사랑과 쓰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곳에 천국의 어떤 것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천국은 아토스에만 세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의 식탁에서도, 작은 교회에서도, 직장에서도, 병실에서도 주님의 질서가 인간의 의지와 생각 속에 받아들여지면 천국의 어떤 것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수도원의 외적 아름다움을 지나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바라보게 하는 더 깊은 수도원, 곧 인간 안에 주님께서 세우시는 내적 질서일 것입니다.

 

 

 

SY.96, 강문호 수도사, ‘바늘로 천국을 만들었다’ (20260901)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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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사도행전 9장의 다비다 이야기를 ‘바늘로 천국을 만들었다’는 하나의 이미지로 풀어냅니다. 다비다가 과부들을 위해 속옷과 겉옷을 만들어 주었다는 성경의 짧은 기록에서 출발하여, 바늘의 작음, 꿰매는 기능, 소리 없음, 자신을 드러내지 않음, 이어 줌, 완성품을 만들어 냄, 흔적을 남김, 한 땀 한 땀 일함, 직접 손에 쥐고 일함, 일을 마치고 사라짐이라는 열 가지 영성을 끌어냅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자기가 가진 아주 작은 것으로도 주변을 천국으로 만들 있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번 영상은 최근 영상들 가운데서도 특히 ‘쓰임(use)이라는 중심 주제와 상당히 가까이 맞닿아 있습니다.

 

우선 다비다의 이야기를 ‘큰일을 사람’의 이야기보다 ‘자기 손에 있던 것으로 이웃에게 선을 행한 사람’의 이야기로 읽은 점은 매우 좋습니다. 다비다는 왕도 아니고 사도도 아니며, 거대한 조직을 세운 사람도 아닙니다. 성경이 기억하는 것은 그가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다’는 사실과, 그가 죽었을 때 과부들이 그에게서 받은 옷을 들고 울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쓰임’과 매우 가까운 장면입니다. 천국적인 삶은 반드시 거대한 일을 해야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능력과 형편을 가지고 실제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데서 나타납니다. 바늘 하나와 손재주가 누군가에게는 추위를 막아 주고, 존엄을 지켜 주며,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사랑의 표지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바늘은 작은데 일을 한다’는 비유는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주님의 나라에서는 외적 크기보다 그 안에 담긴 사랑과 쓰임이 중요합니다. 세상에서는 수천 명을 움직이는 일을 ‘큰일’이라고 부르고 한 사람의 옷을 꿰매 주는 일을 ‘작은 ’이라고 부르기 쉽지만, 천국의 질서는 그렇게 단순히 규모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진실한 체어리티에서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이 주님 앞에서는 훨씬 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상의 ‘작은 것을 무시하지 말자’는 메시지는 단지 ‘작게 시작하면 나중에 큰일을 있다’는 성공론으로 끝나기보다, ‘작은 쓰임도 자체로 주님의 나라에 속한다’는 데까지 가면 더 깊어집니다.

 

바늘은 헤어진 곳을 꿰맨다’는 비유는 더 직접적으로 체어리티와 연결됩니다. 상한 것을 꿰매고, 아픈 곳을 어루만지고, 배고픈 것을 채워 준다는 설명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매우 아름답습니다. 체어리티는 추상적인 호감이 아니라 구체적인 유익을 행하는 사랑입니다. 누군가의 삶이 찢어진 곳을 발견했을 때 정죄하기보다 가능한 범위에서 그것을 이어 주는 것, 관계가 끊어진 곳에서는 화해를 돕고, 가난한 곳에서는 필요한 것을 채우며, 외로운 사람에게는 곁이 되어 주는 것, 이것이 ‘바늘의 영성’을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 영적 삶으로 만드는 길입니다.

 

바늘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바늘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두 대목은 이번 영상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예수님은 드러나고 나는 드러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아주 중요한 원칙입니다. 선을 행하고 나서 ‘내가 이것을 했다’는 공로의식이 강해질수록 선 안에 proprium이 섞이기 쉽습니다. 선의 근원은 주님이고 인간은 그 선이 흘러가는 그릇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사람은 자기가 한 일을 자랑하기보다 감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늘은 옷을 만들고 나면 보이지 않는다’는 이미지는 이번 영상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만 여기에도 미세한 차이는 있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외적으로 완전히 숨어야 한다는 규칙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쓰임은 공개적으로 해야 하고, 가르치는 사람은 앞에 서야 하며, 지도자는 책임 있게 자신의 이름으로 말해야 합니다. 문제는 ‘보이는가, 보이지 않는가’가 아니라 ‘누구의 영광을 구하는가’입니다. 사람들 앞에 서 있으면서도 마음으로는 주님께 공을 돌릴 수 있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봉사하면서도 마음속으로 ‘나는 겸손한 사람’이라고 자기를 높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감추어짐은 외적 익명성보다 내적 비공로성에 있습니다.

 

바늘은 이어 준다’는 부분도 좋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다비다와 과부들, 다비다와 예수, 과부들과 천국을 바늘이 이어 주었다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비유적 표현으로 받아들이면 의미가 있습니다. 다비다가 만든 옷은 단지 직물이 아니라 사랑의 관계를 남겼습니다. 사람이 죽은 뒤 과부들이 그 옷을 들고 울었다는 것은 다비다가 그들의 삶 속에 실제 쓰임으로 남아 있었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공동체를 실제로 결속시키는 것도 교리적 구호가 아니라 선과 진리가 삶에서 만날 때입니다. 진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여 주고, 선은 그것을 행하게 하며, 체어리티는 사람과 사람을 살아 있는 관계로 연결합니다.

 

바늘은 완성될 때까지 일한다’, ‘ 순서를 지킨다’는 대목은 거듭남과 연결해서 읽을 만합니다. 거듭남은 한 번의 감동이나 한 번의 결단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이루어지는 질서 있는 과정입니다. 인간은 하루아침에 전혀 다른 존재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의 악을 보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피하고, 그 자리에 선한 습관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반복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 ’은 상당히 좋은 비유입니다. 다만 ‘매뉴얼대로, 규정대로’라는 표현은 영적 삶에서는 조금 조심해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거듭남에는 주님의 질서가 있지만 모든 사람의 외적 과정이 동일한 매뉴얼을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섭리는 각 사람의 상태와 자유를 따라 놀랍도록 개별적으로 역사합니다.

 

바늘이 지나간 자리에는 실이 남는다’는 표현도 생각할 거리를 줍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바울이 지나간 자리에는 교회가 남고, 사람 역시 어디를 지나갔든 어떤 흔적을 남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 역시 ‘업적을 남겨야 한다’는 쪽으로 흐르지만 않는다면 좋은 가르침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무엇을 남겼는가’보다 ‘어떤 상태를 남겼는가’가 중요합니다. 내가 지나간 자리에 내 이름과 기념물이 남는 것보다, 한 사람이 더 평안해지고, 한 관계가 회복되고, 한 사람이 주님께 더 가까워졌다면 그것이 훨씬 귀한 흔적입니다. 다비다가 남긴 가장 중요한 흔적은 바느질 공동체의 규모가 아니라 과부들이 몸으로 기억하고 있던 사랑이었습니다.

 

손은 일하고 마음은 하나님께 드린다’는 아홉 번째 원칙 역시 이번 영상에서 매우 좋은 문장입니다. 이것은 수도원적 영성과 일상적 쓰임을 연결할 수 있는 접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세상 일을 버리고 종교적 명상에만 몰두하는 삶보다, 자신의 직업과 가정과 사회적 의무 안에서 정직하게 쓰임을 행하는 삶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그러므로 바느질을 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음식을 만들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청소하고, 가르치고, 운전하고, 돌보고, 행정을 하는 동안에도 주님의 선을 이웃에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다비다는 수도원 밖에서 수도 영성의 핵심을 살았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영상에는 성경 본문과 설교적 확대를 구별해야 할 부분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여제자는 다비다 명이다’라는 말은 사도행전 936절에서 실제로 다비다에게 여성형 ‘제자’에 해당하는 표현이 사용된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그것을 근거로 다비다가 ‘예수님과 행동을 완전히 똑같이 하는 특별한 완전한 ’이라는 하나의 신분명처럼 설명하는 것은 본문보다 많이 나아간 해석입니다. 본문이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은 다비다가 제자였고 선행과 구제가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상은 설교적 적용으로 구별해서 듣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다비다의 회복과 고넬료 사건을 연결하여 ‘다비다의 바늘 하나 때문에 해외 선교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표현도 설교적 연결로서는 흥미롭지만, 사도행전 자체가 그렇게 인과관계를 명시하지는 않습니다. 베드로가 다비다 사건 이후 욥바에 머물렀고 그곳에서 고넬료의 사람들을 만나 가이사랴로 간 것은 본문 흐름상 맞습니다. 그러나 ‘다비다 때문에 이방 선교가 시작되었다’고 단정하면 성경이 말하는 것보다 한 걸음 더 나갑니다. 오히려 ‘다비다 사건을 계기로 베드로가 욥바에 머무르게 되었고, 바로 시기에 고넬료 사건이 이어진다. 하나의 쓰임이 주님의 섭리 안에서 예상하지 못한 다음 쓰임과 연결될 있다’ 정도로 말하면 훨씬 깊고 안전합니다.

 

죽은 다비다를 두고 사람들이 ‘베드로가 오면 반드시 살아날 것을 믿었다’고 해석하는 부분 역시 본문은 그렇게까지 분명히 말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은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지체 말고 달라’고 간청했다고 기록하지만, 그들이 이미 확실하게 부활을 기대했다고 명시하지는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베드로의 기도를 통해 다비다가 살아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이전 사람들의 내면을 ‘반드시 살아날 것을 믿었다’고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부분은 설교의 감동을 줄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말씀 자체와 우리의 아름다운 추론을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

 

반면 영상 후반에 강문호 수도사가 다비다에 관한 후대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지금부터 이야기는 믿을 아니라 참고만 하는 전승, 전설’이라고 명확하게 선을 긋는 것은 매우 좋습니다. 다비다가 부활 후 더욱 열심히 구제했고 ‘욥바의 어머니’라 불렸다는 이야기, 사람들이 다비다의 집에 모여 ‘바늘 공동체’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성경과 같은 권위로 말하지 않고 전승으로 구별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이런 구별은 중요합니다. 전승은 영적 묵상의 재료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을 계시된 사실과 동일한 층위에 놓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번 영상에서 조금 더 주의 깊게 바라볼 부분은 후반전 이야기입니다. 다비다의 전승을 소개한 뒤 강문호 수도사는 모세, 예수, 아브라함을 들어 ‘후반전이 커야 한다’고 말하고, 자신의 아버지가 은퇴 후 29년 동안 해외에서 더 크게 일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자신도 ‘은퇴한 7년째인데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자신의 현재 활동을 연결합니다. 이 부분은 노년과 은퇴를 소극적 퇴장으로 여기지 않고 남은 삶에서도 쓰임을 찾자는 뜻에서는 매우 귀합니다. 사람은 몇 살이 되었든 주님께서 허락하신 상태 안에서 계속 이웃에게 유익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후반전은 앞보다 커야 한다’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조금 바꾸어 듣는 편이 좋겠습니다. 주님 앞에서 후반전이 더 ‘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책을 쓰고, 더 많은 나라를 다니고, 더 많은 일을 해야 영적으로 더 큰 삶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후반전은 오히려 외적으로 작아지면서 내적으로 더 깊어질 수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수천 명 앞에서 설교하던 사람이 노년에는 한 사람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는 것이 마지막 쓰임일 수도 있고,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병상에서 자신의 성급함과 자기의지를 내려놓는 것이 평생의 가장 깊은 거듭남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영상 안에는 묘한 대비가 있습니다. 앞에서는 ‘바늘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일을 하면 바늘은 사라진다’, ‘예수님은 드러나고 나는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후반에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아버지의 큰 사역과 자신의 은퇴 후 활동을 예로 듭니다. 이것을 곧바로 모순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예화로 사용하는 것은 설교에서 흔한 일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이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가장 조용히 비추어 볼 만한 자리이기도 합니다. ‘바늘의 영성’을 말하는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시험은 어쩌면 ‘내가 바늘처럼 일했다는 사실조차 말하고 싶어지는 마음’을 살피는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proprium은 노골적인 자랑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나는 겸손합니다’, ‘나는 주님만 드러내고 싶습니다’, ‘나는 은퇴 후에도 쉬지 않고 일합니다’라는 종교적으로 선한 문장 안에도 아주 미세하게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강문호 수도사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 글을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모두에게 해당합니다. 참된 ‘바늘의 영성’은 내가 얼마나 많은 천국을 만들었는지를 세는 것이 아니라, 일을 마친 뒤 ‘ 일을 하게 하신 분도 주님이고, 선을 주신 분도 주님이며, 내가 것은 주님께서 주신 것을 받아 사용한 것뿐입니다’라고 더 깊이 인정하는 데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늘로 천국을 만들었다’는 제목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한 번 더 깊게 읽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천국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인간 안에 형성됩니다. 그러나 다비다의 바늘은 그 천국적 선이 자연계에서 하나의 구체적 쓰임으로 나타나는 도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다비다가 바늘로 천국을 만들었다’기보다 ‘주님께서 다비다의 사랑과 바늘을 통해 천국의 어떤 것을 이웃의 가운데 나타내셨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번 영상에서 결국 ‘바늘’보다 ‘옷을 들고 울던 과부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비다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기록한 이력서가 남은 것이 아니라,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그의 사랑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한 인간의 쓰임에 대한 매우 아름다운 증언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난 뒤 누군가가 ‘ 사람은 굉장한 사람이었다’고 말하는 것보다 ‘ 사람이 내가 힘들 나를 도와주었다’, ‘ 사람 때문에 내가 다시 일어날 있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훨씬 천국적인 흔적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영상의 ‘바늘의 영성’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께 받은 작은 능력을 가지고 상한 것을 이어 주며, 소리 없이 이웃의 필요를 채우고, 선을 자신의 공으로 돌리지 않은 , 끝까지 쓰임을 행하는 .’ 그렇게 살다가 일이 끝났을 때 바늘은 조용히 놓이고 옷만 남습니다. 그리고 더 깊이 보면 옷조차 우리의 공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 손을 빌려 누군가에게 입혀 주신 사랑의 흔적일 것입니다.

 

 

 

SY.97, 강문호 수도사, ‘티흔 수도사’ (20200120)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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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94, 강문호 수도사, ‘미르사바 수도원’ (20200119)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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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미르사바 수도원을 바라보며 가장 깊이 주목하는 것은 ‘침묵’입니다. 영상 앞부분에는 물이 솟아난 이야기, 수도원 설립자 사바의 유해에서 향기가 난다는 이야기, 병자의 치유와 기도 응답 같은 여러 기적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정작 강문호 수도사가 이 수도원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붙드는 것은 그것들이 아닙니다. ‘침묵은 하는 침묵이 아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침묵입니다.’ 이 한 문장이 사실상 영상 전체의 중심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이번 영상에는 상당히 귀하게 받아들일 만한 것이 있습니다. 다만 그 침묵을 단순히 ‘말하지 않는 수도 규칙’에서 ‘의지와 생각까지 주님 앞에서 잠잠해지는 내적 상태’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영상에 소개되는 미르사바 수도원의 극단적인 자연환경은 수도생활의 외적 모습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찾아보기 어려운 유대광야의 절벽 사이에서 사람들이 오랜 세월 기도하며 살아왔다는 사실 자체는 깊은 인상을 줍니다. 세상의 소음과 편의를 뒤로하고 하나님께 집중하려 했던 사람들의 열망을 가볍게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광야의 진정한 의미는 단순히 사람이 없는 지리적 공간에 있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광야’는 흔히 진리와 선이 결핍된 상태, 또는 시험과 준비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실제 유대광야에 들어갔다고 해서 자동으로 내적 광야를 통과하는 것은 아닙니다. 서울 한복판에서도 자신의 악과 거짓을 직면하며 주님을 찾는 사람은 영적 광야를 통과할 수 있고, 반대로 깊은 수도원 안에서도 자기 생각과 자기 의로 가득하다면 내적으로는 아직 광야의 의미를 배우지 못할 수 있습니다.

 

영상에 소개되는 세 가지 ‘기적’에 대해서도 같은 원칙이 필요합니다. 수도원을 세운 뒤 많은 사람이 사용할 만큼 물이 솟아났다는 이야기, 사바의 유해에서 향기가 난다는 이야기, 그곳에서 병자가 치유되고 수많은 기도 응답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오랜 수도원 전승과 신앙적 증언의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것들을 모두 사실이라고 확정해야 수도원의 영적 가치가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역사적으로 하나하나 입증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수도원에서 수많은 사람이 드린 기도와 헌신까지 무가치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 중요한 것은 기적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사람을 어디로 이끄느냐입니다. 기적을 보고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악에서 돌아선다면 선한 쓰임이 있지만, 기적 자체를 신앙의 중심으로 삼거나 특별한 장소와 사람의 영적 권위를 입증하는 증거로 사용하기 시작하면 오히려 본질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영상이 세 가지 기적을 지나 마침내 ‘침묵’으로 들어가는 것은 오히려 의미가 있습니다. ‘말을 배우는 데는 3년이 걸리고 침묵을 배우는 데는 50년이 걸린다’는 수도원의 격언은 인간의 영적 현실을 상당히 정확하게 건드립니다. 사람은 말을 배우는 것보다 자기 말을 멈추는 것을 훨씬 어려워합니다. 더욱이 입술만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옳다’, ‘ 생각을 알아주어야 한다’, ‘내가 설명해야 한다’, ‘내가 판단해야 한다’는 내면의 목소리를 멈추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외적 침묵은 내적 침묵을 위한 좋은 훈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다시 한 단계 깊어집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반드시 귀에 어떤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무엇보다 말씀의 진리를 통해 인간의 이해성(understanding), 즉 이해하는 능력을 밝히시고, 그 진리를 삶에 적용하려는 사람의 의지(will)를 이끄십니다. 따라서 참된 침묵은 단순히 주변의 소리를 차단하여 어떤 신비한 음성을 기다리는 상태라기보다, 자신의 proprium에서 올라오는 욕망과 자기합리화와 자기주장을 잠잠하게 하고, ‘주님의 진리는 무엇을 말씀하는가’를 받아들이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보면 ‘침묵에는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말하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듣지 않는 것이다’라는 영상 속 표현도 흥미로워집니다.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이면 세상과 단절하라는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읽으면 매우 깊어질 수 있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외부에서 들어오는 말과 자신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말에 영향을 받습니다. 명예욕, 경쟁심, 정욕, 탐욕, 분노, 자기연민, 자기과시를 부추기는 소리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일종의 ‘듣지 않는 침묵’입니다. 모든 소리를 듣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들을 것인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질서에 반하는 소리에는 귀를 닫고, 선과 진리를 향해서는 귀를 여는 것입니다.

 

영상에서 소개되는 ‘필요한 말은 짧게 낮은 목소리로 하라’, ‘병자를 위로하고 봉사하기 위한 말은 있다’는 원칙도 특히 눈에 들어옵니다. 여기에는 침묵의 목적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있습니다. 만일 침묵 그 자체가 최고의 덕이라면 병자를 위로하는 말도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고통받는 사람을 위한 말에는 침묵의 규칙보다 우선권을 줍니다. 이것은 결국 ‘체어리티’가 외적 규율보다 위에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말하지 않는 것이 이웃에게 유익하면 침묵하고, 말하는 것이 이웃에게 유익하면 말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중요한 것은 ‘내가 말을 했는가, 하지 않았는가’가 아니라 ‘ 말과 침묵이 어떤 사랑에서 나왔는가’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도 매우 잘 만납니다. 말 자체는 인간 내면의 표현입니다. 같은 침묵이라도 사랑에서 나온 침묵과 미움에서 나온 침묵은 전혀 다릅니다. 누군가에게 화가 나서 입을 닫고 냉랭하게 외면하는 것도 침묵이고, 상대방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기 위해 말을 삼키는 것도 침묵입니다. 외적으로는 똑같이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하나는 악에서 나온 침묵이고, 다른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나온 침묵입니다. 반대로 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말을 하더라도 이웃을 살리고 진리를 전하며 위로하기 위한 말이라면 선한 쓰임이 될 수 있고, 몇 마디 하지 않더라도 상대를 깎아내리고 자신을 높이는 말이라면 악한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혀가 길면 된다’는 수도원의 가르침도 단순히 말을 적게 하라는 규칙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야고보서가 혀를 작은 지체이면서도 큰 불을 일으킬 수 있는 것으로 말하듯, 인간의 말에는 그 사람의 내면이 흘러나옵니다. 하지만 입술만 통제한다고 내면이 정결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미움을 품고 있으면서 말하지 않는다고 미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교만하면서 입을 다문다고 교만이 겸손으로 변하는 것도 아닙니다. 참된 거듭남에서는 ‘악한 말을 하지 않는 단계’를 지나 ‘ 그런 말을 하고 싶어 하는가’를 살피게 됩니다. 결국 주님께서 다루시는 것은 혀보다 그 혀를 움직이는 사랑입니다.

 

영상 후반의 ‘최고의 달변은 없음’이라는 표현도 이런 관점에서 읽으면 좋겠습니다. 침묵을 말보다 우월한 영적 행위로 절대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때로 침묵하셨지만 때로는 가르치셨고, 책망하셨고, 위로하셨고,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쓰실 있는 입술’을 갖는 것입니다. 말해야 할 때 말하고,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는 것입니다. 그 기준은 내 기분이나 체면이 아니라 선과 진리, 그리고 이웃의 유익입니다. 이것이 침묵을 ‘쓰임’의 관점에서 보는 방법입니다.

 

이 때문에 저는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마지막에 ‘이런 거룩한 수도원들이 우리나라에도 많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부분도 조금 다르게 확장해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실제 수도원이 많이 생기는 것도 하나의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바쁜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이 잠시 세상의 소음을 떠나 기도하고 말씀을 읽으며 자신을 돌아볼 공간은 분명 필요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더 중요한 것은 ‘수도원의 숫자’가 아니라 ‘수도원의 정신이 사람 안에서 어떻게 살아나는가’입니다.

 

어쩌면 수도원의 가장 깊은 형태는 건물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세워져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루 종일 세상에서 일하고 사람을 만나며 가족을 돌보는 사람도 자기 안에 작은 ‘침묵의 ’을 가질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말을 듣다가 즉시 반박하고 싶을 때 잠시 멈추는 것, 다른 사람의 허물을 말하고 싶을 때 입을 닫는 것, 자신의 공을 드러내고 싶을 때 그것을 주님께 돌리는 것, 분노가 올라올 때 바로 말하지 않고 자신의 의도를 살피는 것, 그리고 말씀 앞에서 ‘ 생각이 무엇인가’보다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먼저 묻는 것, 이것들이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수도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침묵의 가장 깊은 적은 단순한 수다가 아니라 ‘proprium 목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proprium은 끊임없이 자신을 변호하고, 자신의 공을 세우고,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합니다. 입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마음속에서는 하루 종일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외적 침묵보다 훨씬 어려운 것이 내적 침묵입니다. 그리고 그 내적 침묵은 생각을 없애는 무념무상의 상태가 아니라, 자기중심적 의지가 주님의 선과 진리 앞에서 한 걸음 물러나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보면 미르사바 수도원의 오랜 침묵 전통은 우리에게 매우 좋은 하나의 ‘표지판’이 됩니다. 그러나 표지판 자체가 목적지는 아닙니다. 침묵은 거룩함 그 자체가 아니라 거룩함을 향하도록 도울 수 있는 그릇이며, 수도원은 천국 그 자체가 아니라 천국의 질서를 배우도록 도울 수 있는 학교입니다. 결국 사람이 배워야 하는 것은 ‘말하지 않는 ’만이 아니라 ‘ 말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입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의 마지막 질문은 ‘나는 얼마나 오래 침묵할 있는가?’보다 이것이면 좋겠습니다. ‘나는 안에서 끊임없이 말하고 있는 proprium 목소리를 얼마나 분별하고 있는가?’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는 침묵 속에서 들은 주님의 진리를 이웃을 향한 선한 쓰임으로 살아내고 있는가?’입니다. 침묵 끝에 체어리티가 없다면 그것은 아직 완성된 침묵이 아닙니다. 그러나 침묵을 통해 자기주장이 낮아지고, 다른 사람의 말을 더 잘 듣게 되고, 판단이 줄어들며, 필요한 때에는 상처 입은 사람에게 따뜻한 한마디를 건넬 수 있게 된다면, 그 침묵은 이미 거듭남을 섬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미르사바 수도원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도 결국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소리를 얼마나 완벽하게 차단했는가’가 아니라 ‘자기의 소리를 낮추어 주님의 음성을 듣고, 들은 것을 삶으로 옮길 있는가.1,500년 넘게 이어진 광야의 침묵보다 더 깊은 침묵은 바로 인간의 proprium이 주님 앞에서 잠잠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침묵에서 다시 나오는 말이라면, 많든 적든 누군가를 살리고 위로하며 주님의 선과 진리를 전하는 말이 될 것입니다.

 

 

 

SY.96, 강문호 수도사, ‘바늘로 천국을 만들었다’ (20260901)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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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92, 강문호 수도사, ‘게라시모스 수도원’ (20200114)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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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설교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신성종 목사가 죽음을 ‘교리 문제’로 시작하지 않고 ‘사람의 두려움’에서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화장장에서 어머니의 유골함을 받아 든 아들이 ‘이렇게 태웠는데 나중에 부활할 어머니 몸은 어떻게 됩니까?’라고 묻자, 그는 그 질문의 밑바닥에 ‘내가 어머니한테 몹쓸 짓을 것은 아닙니까?’라는 죄책감이 있음을 알아차립니다. 이것은 목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통찰입니다. 사람이 죽음 앞에서 묻는 질문은 표면적으로는 신학적이어도 실제로는 사랑, 상실, 죄책감, 두려움의 언어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좋은 가셨어요’, ‘천국 가셨으니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라는 말이 실제 유가족에게 별 위로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그의 고백도 진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이런 태도는 충분히 귀하게 볼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는 먼저 상대방의 실제 상태를 살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죽음이 두렵다고 해서 신앙이 없는 것은 아니다’, ‘슬퍼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소망 없는 사람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다’는 설교 후반의 권면도 좋습니다. 신앙을 인간의 자연적 정서 자체를 억압하는 도구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육체를 입고 자연계에 사는 동안 사람에게 죽음은 이별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눈앞에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슬픔 자체가 신앙의 실패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 슬픔이 절망으로 닫히느냐, 아니면 주님을 향한 신뢰 가운데 통과되느냐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성종 목사의 ‘무섭지 않은 것이 믿음이 아니라 무서운데도 손을 놓지 않는 것이 믿음’이라는 표현은 목회적으로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설교는 여기서부터 스베덴보리와 매우 중요한 갈림길에 들어섭니다. 신성종 목사는 고린도전서 15장을 통해 ‘몸은 버려지는 껍데기가 아니다’라는 명제를 세우고, 당시 헬라 철학의 영혼-육체 이원론을 비판합니다. 그는 ‘육신의 옷을 벗고 하늘나라로 갔다’, ‘몸은 껍데기이고, 진짜는 영혼이다’ 같은 기독교 장례식의 익숙한 표현 안에 사실 헬라적 사고가 들어 있다고 지적합니다. 여기까지는 상당히 생각해 볼 만한 문제 제기입니다. 인간을 영혼이라는 ‘진짜 인간’과 아무 가치 없는 육체라는 ‘껍데기’로 단순 분해하는 사고는 분명 조심해야 합니다. 자연계의 몸 역시 주님이 인간에게 주신 것이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랑하고 섬기고 일하고 체어리티를 실천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제3의 길이 열립니다. 그것은 ‘물질적 몸이 껍데기가 아니므로 물질적 몸이 다시 살아나야 한다’도 아니고, ‘물질적 몸은 아무 가치가 없고 영혼만 진짜다’도 아닙니다. 인간은 사후에도 완전한 인간이며, 몸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다만 그 몸은 이 자연계의 물질로 이루어진 몸이 아니라 영계의 실체에 상응하는 ‘영적 ’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 자연계의 육체는 자연계에 남겨 두지만, 그 사람 자신은 몸 없는 의식이나 구름 같은 영혼이 되어 떠도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사람의 형상을 그대로 지닌 영으로 깨어나고, 보고 듣고 말하고 걷고 사람을 만나며 살아갑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영계에서의 인간이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처음에는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삶의 연속성을 경험한다고 거듭 설명합니다.

 

이 점에서 신성종 목사가 ‘신령한 ’을 ‘유령 같은 비물질적인 무엇’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 것은 뜻밖에도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가까운 지점까지 옵니다. 차이는 그다음입니다. 신성종 목사는 그 ‘신령한 ’을 마지막 날 현재의 육체가 변화하여 얻는 몸으로 이해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죽는 순간 자연적 몸을 벗고 이미 영적 몸으로 영계에 들어간다고 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는 수천 년 동안 무덤 속에서 몸의 부활을 기다리는 영혼이라는 상태가 없습니다. 아담 시대의 사람도, 오늘 죽은 사람도 사후에는 영계에서 인간으로 살아갑니다. 마지막 날에 무덤으로 돌아와 옛 물질을 다시 모아 몸을 만드는 과정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의 출발점이 된 ‘화장하면 나중에 어머니의 몸은 어떻게 됩니까?’라는 질문에 스베덴보리는 신성종 목사보다 훨씬 더 직접적으로 대답했을 것입니다. ‘화장하든 매장하든 어머니 자신에게는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어머니는 육체 속에 남아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연적 육체는 이 자연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잠시 입었던 몸이며, 죽음과 동시에 인간 자신은 영적 몸으로 영계에서 깨어납니다. 따라서 화장은 부활을 어렵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애초에 사후의 인간이 다시 사용해야 할 몸을 훼손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매장된 시신도 다시 필요한 것이 아니고, 화장된 재도 다시 모을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설교의 ‘씨앗’ 비유도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다르게 읽힙니다. 신성종 목사는 고린도전서 15장의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를 장례와 미래의 육체 부활로 연결합니다. ‘어머니는 지금 땅에 심겨 있는 거네요’라는 유가족의 말은 이 설교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목회적 위로로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정확히 말해 ‘어머니가 땅에 심겨 있는 ’이 아닙니다. 땅에 있는 것은 어머니가 자연계에서 사용하던 육체입니다. 어머니 자신은 이미 영계에서 깨어나 삶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 정확한 위로는 ‘어머니는 사라진 것도 아니고, 땅속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다른 세계에서 사람으로 살아 계십니다’가 될 것입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사후세계 이해 전체를 바꿉니다. 전통적 육체 부활론에서는 ‘죽음 영혼의 중간 상태 마지막 육체 부활’이라는 구조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집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죽음 영계에서 깨어남 중간영계에서 내면이 드러남 자신의 지배적 사랑에 따라 천국 또는 지옥으로 들어감’이라는 흐름입니다. 따라서 부활은 먼 미래에 있을 사건만이 아니라 죽음과 함께 인간에게 실제로 일어나는 사후의 깨어남과 깊이 연결됩니다. 이것은 유가족에게 주는 위로의 내용까지 크게 달라지게 합니다. ‘언젠가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보다 ‘ 사람은 지금도 주님의 섭리 아래 존재하며 살아 있습니다’라는 쪽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더욱 세심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신성종 목사는 부활하신 예수가 만져질 수 있었고, 음식을 드셨으며, 못 자국도 있었다는 사실을 들어 우리의 미래 부활 몸 역시 이와 같은 물질적 몸이라는 논증을 펼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부활은 일반 인간의 사후 과정과 동일한 사례가 아닙니다. 주님은 인간처럼 자연적 몸을 버리고 영으로 살아난 분이 아니라, 지상 생애 동안 인성을 신성과 하나 되게 하시는 영화의 과정을 완성하시고, 신적 인성(Divine Human)으로 부활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무덤에 주님의 몸이 남아 있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일반 인간의 죽음과 다릅니다. 이것을 모든 인간의 시체가 마지막 날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직접적인 모델로 삼으면 스베덴보리의 기독론과 사후세계론에서는 중요한 구별 하나가 사라집니다.

 

그렇다고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보이고 만져지고 함께 음식을 드신 사건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영적인 것은 물질적이지 않으므로 실체도 없다’는 우리의 자연적 선입견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영계는 희미하고 추상적인 의식의 세계가 아닙니다. 그곳에는 사람, 집, 길, 공동체, 산과 들, 식물과 수많은 환경이 있으며, 사람들은 서로 보고 말하고 살아갑니다. 그것들은 자연계 물질이 아니라 영적 실체와 그 상응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몸이 없으면 어떻게 서로 알아봅니까?’라는 질문 자체가 스베덴보리에게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영들은 몸 없는 영혼들이 아니라 사람의 형상을 지닌 인간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머니를 다시 만나면 알아볼 있습니까?’라는 설교 속 질문에도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매우 적극적입니다. 알아볼 수 있습니다. 다만 천국에서의 재회는 단순히 얼굴을 기억하여 알아보는 차원을 넘어섭니다. 영계에서는 사람의 내면이 외면에 더욱 직접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자연계에서는 몸과 사회적 역할과 여러 외적 조건이 사람의 내면을 가릴 수 있지만, 영계에서는 점차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과 실제 성품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진정한 결합은 단순한 혈연만으로 영원히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내적 사랑과 삶의 상태가 서로 조화를 이루느냐와 관계됩니다. 이 부분은 ‘죽으면 가족이 모두 그대로 모여 영원히 함께 산다’는 식의 단순한 위로와는 구별해야 합니다.

 

설교에서 또 하나 크게 갈라지는 부분은 요한계시록 21장의 ‘ 하늘과 ’입니다. 신성종 목사는 ‘성경의 마지막 그림은 우리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내려오는 ’이라며, ‘새로워진 몸을 입은 우리가 새로워진 땅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흙냄새, 밥 짓는 냄새, 손을 잡는 감촉, 함께 밥 먹는 시간 같은 자연적 삶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정서적으로 매우 따뜻하고 매력적인 그림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 하늘과 ’ 해석은 이것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 하늘과 ’은 물질 우주가 폐기되고 새로운 물질 지구가 만들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영계에서 이루어지는 새 하늘과 그에 상응하여 자연계에 세워지는 새로운 교회, 곧 새로운 영적 질서를 가리킵니다. ‘ 예루살렘’ 역시 하늘에서 물리적으로 내려오는 거대한 도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새 교회의 교리와 삶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설교에서 가장 조심해서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천국은 결국 새로워진 지구이며, 우리는 부활한 물질적 몸으로 그곳에서 다시 산다’는 그림은 성경의 문자적 이미지를 매우 충실하게 붙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는 그 문자 안의 속뜻을 자연적 차원에 고정한 해석이 됩니다. 요한계시록의 ‘ 하늘’, ‘ ’, ‘ 예루살렘’을 자연적 공간과 물질적 도시로 읽기 시작하면, 계시록 전체에 흐르는 상응적 언어를 놓치게 됩니다.

 

그렇지만 신성종 목사가 이 교리를 통해 도달한 윤리적 결론은 매우 귀합니다. 그는 고린도전서 15장이 58절에서 ‘그러므로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안에서 헛되지 않은 앎이라’로 끝난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교회 화장실을 청소한 사람, 새벽에 난로를 피운 사람, 김치를 담가 홀로 사는 노인에게 가져다준 사람, 수십 년 동안 주보를 접은 사람들의 손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아주 중요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천국을 이루는 것은 단순히 올바른 교리를 알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실제 삶의 유용한 일, 곧 쓰임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 손이 다시 살아납니다’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다시 해석해야 합니다. 관절이 붓고 굳은살이 박힌 바로 그 물질적 손의 원자들이 다시 모인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손으로 행했던 사랑과 쓰임이 그 사람의 영원한 인격 안에 남는다고 보는 편이 더 가깝습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의도했고, 그 사랑을 어떻게 삶으로 행했는지가 그 사람의 내적 생명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는 신성종 목사의 ‘부활이 있으므로 지금 하는 일이 헛되지 않다’는 결론과 스베덴보리의 ‘사람이 세상에서 형성한 지배적 사랑과 삶의 상태를 가지고 영원으로 들어간다’는 가르침이 뜻밖에 깊이 만납니다. 결론의 영적 방향은 가까운데 그 결론을 설명하는 사후세계의 구조가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 설교를 읽으며 특별히 눈여겨볼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중심 본문이 고린도전서 15장이라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울 서신을 포함한 사도들의 서신을 복음서나 계시록과 같은 의미에서 ‘말씀’으로 보지 않으며, 그 안에 연속적인 내적 의미, 곧 아르카나가 담겨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사도서신이 무가치하거나 읽을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교회를 가르치고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을 권면하는 중요한 교훈이 그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5장의 ‘’, ‘썩을 것과 썩지 아니할 ’, ‘육의 몸과 신령한 ’을 창세기나 계시록의 상응처럼 하나하나 아르카나로 풀어내기보다, 사도 바울이 당시 교회에 가르치려 했던 교리적 가르침으로 읽고 그것을 말씀 전체와 조화시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더 적절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설교는 아주 흥미로운 역설을 보여 줍니다. 신성종 목사는 ‘ 없는 영혼이 천국으로 간다’는 통속적 기독교 관념을 헬라 철학의 영향이라고 비판하면서 성경적 사후세계를 회복하려 합니다. 문제 제기 자체에는 중요한 진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대안으로 ‘마지막 무덤에서 육체가 부활하여 지구에서 살아간다’는 방향으로 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그림 모두를 넘어섭니다. 인간은 몸 없는 영혼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시 자연적 육체를 입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죽는 순간 자연적 몸을 내려놓고 영적 몸으로 깨어나며, 그 몸으로 영계에서 완전한 인간의 삶을 계속합니다. 저는 이번 설교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바로 이 지점이 가장 중요한 분별점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처음 화장장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면, 세 관점의 차이가 아주 선명해집니다. ‘어머니의 몸을 태워 버렸는데 어떻게 부활합니까?’라는 질문에 통속적인 영혼불멸론은 ‘몸은 중요하지 않고 영혼만 천국에 갔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신성종 목사는 ‘ 몸은 씨앗이며 하나님께서 마지막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리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머니 자신은 유골함 안에도, 무덤 안에도 계시지 않습니다. 자연적 육체는 그곳에 남았지만 어머니는 이미 영적 몸으로 영계에서 깨어나셨습니다’라고 대답하게 됩니다. 세 답은 비슷하게 유가족을 위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이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떤 상태로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세계관을 전제합니다.

 

그럼에도 이 설교 전체를 오류 때문에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처음부터 끝까지 흐르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정죄하지 말자’, ‘유가족의 슬픔을 억누르지 말자’, ‘화장 때문에 죄책감을 갖지 말자’, ‘몸으로 행한 작은 사랑의 수고를 하찮게 여기지 말자’, ‘죽음이 마지막이므로 현재의 삶이 허무한 것이 아니라 영원이 있으므로 오늘의 사랑과 수고가 중요하다’는 목회적 메시지는 충분히 귀합니다. 특히 이름 없이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돌본 사람들의 작은 수고를 기억하는 부분은 체어리티와 쓰임이라는 스베덴보리의 핵심 가르침과 매우 아름답게 만납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이 설교에 던지는 질문은 ‘신성종 목사의 부활 신앙이 옳으냐 그르냐’ 정도가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부활이란 정확히 무엇인가?’입니다. 자연적 육체의 재생인가, 아니면 인간이 죽음을 통과하여 영적 세계에서 자신의 참된 몸으로 깨어나는 것인가? ‘ 하늘과 ’은 미래의 물질 우주인가, 아니면 주님이 이루시는 새로운 영적 질서와 새 교회인가? 그리고 예수의 부활은 우리 육체 부활의 단순한 견본인가, 아니면 주님의 인성이 완전히 영화되어 신성과 하나 된 유일무이한 사건인가? 이 질문들 앞에서 신성종 목사의 설교는 오히려 좋은 출발점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의 목회적 고백을 그대로 귀하게 남겨 두어도 좋겠습니다. ‘무섭지 않은 것이 믿음이 아니라 무서운데도 손을 놓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여기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을 덧붙인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가 붙드는 소망은 ‘언젠가 흩어진 육체의 원소가 다시 모일 ’이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소망은 ‘죽음조차 주님이 주신 생명의 연속을 끊을 없다’는 데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과 함께 무(無)로 사라졌다가 먼 훗날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문을 통과하여 영계에서 계속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장례는 한 사람의 존재가 끝나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의 눈에서는 닫히지만 그에게는 다른 세계가 열리는 경계가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설교가 품고 있는 따뜻한 목회적 위로와 스베덴보리의 놀라울 만큼 구체적인 사후세계의 가르침이 서로 만날 수 있다고 봅니다.

 

 

심화

바울은 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을 이렇게 말했을까?

 

 

SY.93, 신성종 목사, 심화 1, ‘바울은 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을 이렇게 말했을까?’

SY.93, 심화바울은 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을 이렇게 말했을까? 앞의 신성종 목사의 설교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살펴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에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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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먼저 영상에서 매우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거룩하게 살고 싶다’는 열망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1,600년 동안 그곳에서 수도하다 세상을 떠난 수도자들의 유골을 보면서 끔찍함보다 오히려 ‘향기가 났다’, ‘고개를 숙이고 흠모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또 게라시모스가 기도하던 동굴과 그곳에 얽힌 이야기들을 소개하면서 마지막에는 자신도 ‘그런 영이 임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 마음 자체는 가볍게 볼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무엇을 더 얻고 높아질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가까이 것인가’를 사모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수도 전통이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도 바로 이 지점일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거룩함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한 번 더 묻게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룩함은 어떤 장소에서 오래 기도하고, 육체를 극도로 절제하고, 세상을 떠나 고독하게 산다는 사실 그 자체에서 생기지 않습니다.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오직 주님이며,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실제 삶에서 살아갈 때 그 삶이 거룩해집니다. 그러므로 수도원도 거룩함을 돕는 장소가 될 수 있고, 광야의 동굴도 그럴 수 있지만, 그것들이 그 자체로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수도원 안에서도 proprium은 얼마든지 살아 있을 수 있고, 오히려 ‘나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산다’, ‘나는 이렇게 많이 기도한다’, ‘나는 이런 금욕을 견뎌 냈다’는 영적 자기의가 더 미세한 형태로 자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수도생활을 부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수도생활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제자리에 놓아 줍니다. 침묵, 금식, 기도, 독거, 절제, 단순한 생활은 모두 훌륭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의 목적은 ‘수도자가 되는 ’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가 주님께 굴복하고,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주님께 받은 선을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데 있습니다. 결국 천국의 삶은 세상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었는가보다 ‘무엇을 사랑하며 살았는가’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 영상에서 특별히 아름다운 대목은 게라시모스와 사자의 이야기입니다. 게라시모스가 발에 가시가 박힌 사자를 치료해 주었고, 그 뒤 사자가 그를 따르며 도왔으며, 마침내 게라시모스가 죽은 뒤에도 그의 무덤 곁을 떠나지 않았다는 전승입니다. 이것을 역사적으로 어디까지 사실로 받아들일 것인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영상 자체도 수도 전통에서 전해 내려오는 성인전적 이야기의 성격으로 읽는 것이 안전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동물은 매우 흥미로운 존재입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동물들은 인간의 여러 정서와 애정을 표상합니다. 온순하고 유익한 동물들은 선한 애정들을, 사납고 해로운 동물들은 악한 애정들을 표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현실의 사자 한 마리를 곧바로 어떤 하나의 영적 의미와 기계적으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영적 그림은 상당히 아름답습니다. 인간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야생의 힘이 사랑과 돌봄 앞에서 적대성을 잃고 봉사하는 힘으로 바뀝니다. ‘가시를 주는 ’에서 시작하여 ‘곁을 지키는 ’으로 끝나는 이 이야기는, 인간 안의 거칠고 자연적인 것조차 주님의 질서 아래 들어오면 선을 섬기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그림으로 읽어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도 한 가지는 조심해야 합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마지막에 ‘동물과도 친해지고, 동물도 알아주고, 하나님이 알아주는 것은 물론 사람들이 인정하는 신성한 ’을 구하는 취지로 기도합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사람들이 알아보는 거룩함’이 아닙니다. 심지어 ‘동물까지 알아보는 성자 같은 사람이 되는 ’도 아닙니다. 우리가 구해야 하는 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는 ’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성자라고 생각하는지, 영성이 깊다고 인정하는지는 본질적으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대단히 중요합니다. ‘ 수도자처럼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지’라는 열망은 아름답게 출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중심이 ‘주님’에서 ‘거룩한 ’로 옮겨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인간의 proprium을 경계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거룩해졌는가’를 바라보는 순간, 거룩함은 어느새 자기 소유물이 되기 쉽습니다. 반대로 ‘ 안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으며, 모든 선과 진리는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점 깊이 인정하는 사람은 자신을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려고 애쓰기보다 주님께서 자기 안에서 일하시도록 자신을 내어 드리게 됩니다.

 

영상에 등장하는 광풍도 이런 관점에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앞을 제대로 보기 어려울 만큼 거센 바람과 먼지가 부는 날에도 동굴을 향해 걸어갔고, 안내자는 ‘게라시모스는 이런 날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 기도했던 성인’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분명 인상적인 장면입니다. 그러나 영적 삶에서 더 중요한 광풍은 바깥의 날씨가 아니라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시험입니다. 기도하기 좋은 분위기가 깨졌을 때,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할 때, 내가 옳다고 생각한 것이 무너질 때, 자존심이 상할 때, 내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에도 주님을 향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훨씬 깊은 문제입니다. 외적 광풍을 견디는 수도보다 ‘proprium 광풍’을 견디는 내적 싸움이 더 어렵습니다.

 

또 한 가지, 영상에는 한국 목회자들이 악천후에도 동굴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강문호 수도사가 ‘역시 한국 사람들은 한국 사람이구나’ 하며 감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역시 그 현장에서 느낀 반가움과 감동의 표현으로 받아들이면 충분하겠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누가 독하게 기도하는가’가 영성의 척도가 되지는 않습니다. 오랜 시간 기도하는 것도 귀하고, 새벽기도도 귀하며, 금식도 귀합니다. 그러나 기도의 열매는 결국 그 사람이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나타납니다. 더 온유해졌는가, 자기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는가, 타인의 허물을 덜 정죄하게 되었는가, 자신의 악을 더 분명하게 보게 되었는가, 이웃에게 더 유익한 사람이 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영상의 핵심을 ‘게라시모스처럼 되어야 한다’에서 한 걸음 더 안쪽으로 옮겨 읽고 싶습니다. 게라시모스의 동굴도, 1,600년의 수도 전통도, 수도자들의 유골도, 광풍 속의 기도도, 사자의 충성도 모두 우리를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가리켜야 할 마지막 대상은 ‘위대한 수도자’가 아니라 ‘사람을 거룩하게 하시는 주님’이어야 합니다. 성자의 삶이 귀하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서 주님의 어떤 것이 비쳐 나왔기 때문이지, 그 사람이 스스로 거룩함의 원천이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특히 사자 이야기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저는 ‘사자가 성인을 알아보았다’는 데서 찾기보다 ‘고통받는 존재의 가시를 주었다’는 데서 찾고 싶습니다. 이것은 아주 작은 차이 같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큰 차이입니다. 사자를 굴복시킨 영적 능력이 중심이 아니라, 아파하는 생명에게 다가가 그 고통의 원인을 제거해 준 체어리티가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발에 박힌 ‘가시’를 발견하고 그것을 빼 주는 사람, 상처받은 사람에게 다가가 고통을 덜어 주는 사람, 그리고 그 일을 자신의 공으로 돌리지 않는 사람이라면, 수도복을 입고 있든 평범한 옷을 입고 있든 이미 수도 영성의 깊은 중심에 가까이 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영상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기도도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주님, 사람들이 알아보는 성스러운 사람이 되게 하소서’라기보다 ‘주님, 안의 악을 보게 하시고, 그것을 죄로 알고 피하게 하시며, 제게 주시는 선을 것이라 여기지 않게 하시고, 오늘 곁에 있는 존재의 가시 하나라도 주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저는 이것이 게라시모스의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통과시켰을 때 남는, 더 조용하지만 더 깊은 수도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SY.94, 강문호 수도사, ‘미르사바 수도원’ (20200119)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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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87, 강문호 수도사, ‘수도학교’ (20200112)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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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설교에서 가장 먼저 귀하게 볼 수 있는 것은 ‘교회의 본질과 비본질을 구별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입니다. 박요한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복음을 본질로, 조직과 제도와 건물과 직분 같은 것은 비본질로 구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이 구별은 상당히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를 단순히 외적인 조직이나 제도로 보지 않고,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 주님의 생명이 받아들여지는 상태와 깊이 연결하여 봅니다. 그러므로 건물, 직제, 교단, 예배 형식 등은 교회를 위한 외적 그릇일 수는 있어도, 그 자체가 교회의 생명은 아닙니다.

 

누가복음의 ‘ 포도주와 가죽 부대’ 비유를 박요한 목사가 교회의 제도와 형식의 갱신 문제에 적용한 것도 나름의 설교적 힘이 있습니다. 오래된 제도가 본래의 목적을 잃고 스스로 절대화될 때, 오히려 새롭게 역사하는 생명을 억압할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외적인 것은 반드시 내적인 것을 섬겨야 합니다. 외적 형식이 내적 생명을 담는 그릇으로 기능하면 좋은 것이지만, 그릇 자체가 목적이 되는 순간 질서가 뒤집힙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가죽 부대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 가죽 부대가 포도주를 담고 있는가’입니다.

 

이 점에서 박요한 목사가 직분을 ‘계급’으로 변질시키는 것을 비판한 대목은 의미가 있습니다. 장로, 권사, 안수집사 등의 직분이 본래는 섬김을 위한 기능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명예와 권세와 특권의 상징으로 변할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모든 직분과 지위는 ‘용도(use)’를 위해 존재합니다. 직분 자체가 사람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그 직분을 통해 얼마나 선한 용도를 수행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직분이 ‘나는 이만큼 높은 사람이다’라는 자기 확장의 수단이 된다면, 외적으로는 교회 직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적으로는 proprium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균형은 필요합니다. 직분이나 제도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계급화될 수 있다는 이유로 모든 구조를 제거하는 것이 곧 영적으로 더 높은 상태를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제도가 없어도 사람의 자기 사랑과 지배욕은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제도가 없을수록 특정 개인의 영향력이 더 커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직분이 없는 교회’라는 형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직분이 있든 없든 권한을 자기 영광이 아니라 용도를 위해 사용하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구조의 유무보다 그 구조를 움직이는 사랑의 성질을 더 중요하게 봅니다.

 

박요한 목사가 ‘교회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강조한 것도 핵심을 잘 짚은 부분입니다. 교회의 주인이 목사도, 장로도, 특정 헌금자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교회관과도 잘 맞습니다. 참된 교회는 주님에게 속하며, 사람은 그 안에서 맡겨진 용도를 수행할 뿐입니다. 어느 한 사람이 교회를 ‘ 교회’, ‘ 성도’, ‘ 조직’으로 소유하려는 순간, 주님의 것이 인간의 proprium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박요한 목사는 전통 교회의 문제를 주로 장로 중심 구조나 당회 구조에서 찾습니다. 이 부분도 조금 더 넓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 정치의 문제는 장로교의 당회라는 특정 제도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가 독점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교회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날 수 있고, 회중제가 강한 교회에서는 다수의 여론이 또 다른 권력이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정치가 없는 교회’라고 선언한 공동체에서도 비공식적인 영향력과 인간관계가 정치처럼 작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치가 없는 교회를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권력을 사랑하지 않는 교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임직헌금에 대한 비판도 이 설교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박요한 목사는 장로나 권사, 안수집사를 세우면서 상당한 금액의 임직예물을 요구하거나 자발적 감사헌금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경쟁을 유도하는 관행을 문제 삼습니다. 이 지적 역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깊이 생각할 만합니다. 돈과 영적 지위를 연결하면, 외적 재산이 내적 가치와 섞이기 쉽습니다. 헌금 자체는 선한 용도가 될 수 있지만, ‘내가 이만큼 냈으므로 이만큼 인정받아야 한다’는 마음이 들어오면 그 헌금은 오히려 proprium을 강화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박요한 목사가 ‘헌금을 많이 하지 말라’고까지 말하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입니다. 그 취지는 헌금 액수와 영적 권위를 연결하지 말라는 데 있습니다. 이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핵심은 액수 자체가 아니라 동기입니다. 적게 드린다고 자동으로 겸손한 것도 아니고, 많이 드린다고 자동으로 교만한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행위의 외형보다 그 행위를 움직이는 사랑을 봅니다. 많은 헌금을 하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선한 용도를 위해 할 수 있고, 반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나는 제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자기 의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헌금 문제에서도 결국 중요한 것은 ‘얼마를 드렸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여 드렸는가’입니다.

 

박요한 목사가 주일 예배와 교회 활동을 다루는 방식도 흥미롭습니다. 그는 지나치게 많은 교회 활동이 오히려 사람을 지치게 하고, 예배의 본질을 잃게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하루 종일 교회에서 봉사하고 정작 예배 시간에 졸게 되는 상황을 예로 들며 ‘예배가 중심’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외적 활동이 내적 목적을 압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설교 전체의 논리와 일관됩니다. 교회 봉사 자체가 주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는 용도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라는 자기 의를 만드는 수단이 된다면, 외적 종교 활동이 오히려 내적 신앙을 가릴 수도 있습니다.

 

특히 시아버지의 중요한 가족 행사보다 제자훈련 참석을 더 높이 평가하는 문화를 비판한 대목은 체어리티의 관점에서 생각할 만합니다. 신앙생활은 교회 프로그램에 많이 참석하는 것으로만 측정할 수 없습니다. 가족에 대한 책임, 이웃에 대한 성실함, 직장에서의 정직함 역시 모두 신앙이 삶으로 나타나는 자리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예배는 성전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에서 이루어집니다. 주일의 예배가 삶을 바꾸지 못하고, 오히려 가족을 무시하거나 일상의 의무를 경시하게 만든다면 외적인 종교성과 실제 체어리티 사이에 균열이 생긴 것입니다.

 

다만 박요한 목사가 ‘주일 예배도 번씩 빠지는 것이 좋다’, ‘오기 싫으면 유튜브로 드려도 된다’고 말하는 부분은 조금 더 신중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외적 예배를 절대화하지 말자는 취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외적 예배를 가볍게 여기게 되는 반대편의 위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외적 예배를 무의미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외적 예배는 내적 예배를 담고 유지하는 중요한 그릇입니다. 문제는 형식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형식 안에 생명을 넣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당에 반드시 나와야 구원받는다’는 식의 압박도 잘못이지만, ‘마음만 있으면 형식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방향으로 가는 것도 균형을 잃을 수 있습니다.

 

이 설교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 가운데 하나는 ‘유튜브가 교회다’라는 선언입니다. 박요한 목사는 온라인으로 실시간 예배를 드리는 사람도 현장 참석자와 동일하게 성도로 인정하며, 유튜브를 오프라인 교회로 끌어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오늘의 교회 형태 변화 속에서 상당히 새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교회는 반드시 특정 장소에 모여야 하는가?’ ‘ 공간에 있지 않아도 교회적 공동체가 가능한가?’라는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교회의 본질은 장소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주님을 향한 신앙과 체어리티가 사람 안에 있고, 그 사람들이 진리와 선 안에서 연결될 때 교회가 형성됩니다. 따라서 건물이 없다고 교회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이 점에서 박요한 목사의 ‘예배당 건물이 교회가 아니다’, ‘내가 교회다’라는 강조에는 상당한 진실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의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말씀을 사람 자신에게 적용한 것도 방향상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교회다’라는 말 역시 조금 더 정확히 해야 합니다. 개인 한 사람이 독립적으로 교회 전체가 되는 것이라기보다, 주님이 그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실 때 그 사람 안에 교회의 형상이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서로 연결될 때 더 넓은 의미의 교회가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건물이 교회가 아니다’에서 멈추지 않고, ‘그렇다면 안에 정말 교회가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가야 합니다. 내 안에서 진리와 선이 결합되어 있는가, 신앙과 체어리티가 하나 되어 있는가, 주님이 중심인가, 아니면 나 자신이 중심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박요한 목사가 ‘오무’를 강조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뒤이어 제시하는 ‘이유’입니다. 무엇을 없앴는가보다 무엇이 살아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계급이 없고, 정치가 없고, 임직헌금이 없고, 건물이 없어도, 그 안에 주님의 생명과 체어리티가 없다면 그것만으로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직분과 건물이 있고 제도가 있어도, 그것들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섬기고 있다면 얼마든지 좋은 외적 질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번 설교의 ‘오무’는 목적이라기보다 정리 작업에 가깝습니다. 낡은 가죽 부대의 불필요한 부분을 걷어내는 일입니다. 그러나 비워낸 그 자리에 무엇이 들어오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박요한 목사는 그것을 ‘십자가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십자가를 단순히 교리적으로 믿는 데서 그치지 않고 주님을 따르는 삶, 곧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오는 악을 물리치고 선을 행하는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설교에서 바울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구절을 강조하는 부분은 복음주의적 설교의 중심을 잘 보여줍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십자가를 ‘대속 교리의 문장’으로만 축소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주님께서 지옥들과 싸워 이기시고 인성을 영화롭게 하신 완성의 사건이며, 동시에 사람이 주님을 따를 때 겪는 시험과 자기 부인의 삶을 보여주는 표상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십자가’라는 말이 참으로 깊어지려면 ‘십자가를 믿는다’에서 ‘십자가의 길을 따른다’로 나아가야 합니다.

 

설교 후반의 ‘목사가 노동하는 교회’라는 강조도 스베덴보리의 ‘용도’ 개념과 접점이 있습니다. 박요한 목사는 자신의 육체노동이 영적 건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말합니다. 노동을 통해 현실 감각을 잃지 않고, 게으름을 피하며, 삶의 현장에서 성도들의 어려움을 더 이해하게 된다는 취지입니다. 이것은 노동 그 자체를 영적 수행으로 절대화할 필요는 없지만, 선한 용도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삶이 영적 성장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설교에서는 질병이나 경제적 어려움 같은 고난을 ‘메기’에 비유하면서 영혼을 깨우는 축복의 도구라고 설명합니다. 이 역시 일부 사람에게는 실제로 그렇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어려움을 통해 자기 삶을 돌아보고 주님께 돌아오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질병과 고난을 ‘하나님이 영적 각성을 위해 보내신 도구’라고 단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에서 주님은 악이나 고통 자체를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만 이미 발생한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가능한 선을 끌어내시고, 그것을 사람이 거듭나는 방향으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이 고통을 보내셨다’보다 ‘주님은 고통 속에서도 선을 이루신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적절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설교 초반에서 스트레스와 근심이 당뇨, 비만, 암 등의 가장 큰 원인인 것처럼 말하는 부분도 설교의 영적 주제와는 별도로 신중해야 합니다. 육체 질병은 여러 복합적인 원인을 갖기 때문에 영적 상태나 심리적 스트레스 하나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비본질에 매달리다가 삶의 중요한 것을 잃을 있다’는 설교적 비유는 이해할 수 있지만, 의학적 인과관계까지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 해설에서도 설교의 중심 진리와 주변의 과도한 표현을 구별해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번 설교에서 제가 가장 중요하게 보고 싶은 대목은 ‘묵은 것을 얼마나 벗어내느냐’라는 표현입니다. 박요한 목사는 신앙생활을 오래할수록 오히려 익숙한 형식에 갇힐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과도 깊이 연결할 수 있습니다. 거듭남은 한 번의 결단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낡은 proprium의 습관과 사랑을 벗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 가죽 부대’는 새 예배 형식이나 새 교회 모델보다 먼저 ‘새로워지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설교 전체를 조금 더 깊게 뒤집어 볼 수 있습니다. 전통 교회의 장로 제도, 당회, 임직헌금, 건물 중심주의를 낡은 가죽 부대라고 비판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것을 없앤 새로운 교회를 한다’는 생각 자체도 시간이 흐르면 또 하나의 묵은 포도주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교회와 다르다’, ‘우리는 본질적이다’, ‘우리는 제도를 벗어났다’는 자의식이 굳어지는 순간, 새로움을 추구하던 개혁 자체가 새로운 제도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낡은 가죽 부대는 언제나 ‘저쪽 교회’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새롭게 시작한 교회도 내일이면 낡을 수 있고, 제도를 비판하는 사람도 자기 방식에 집착하면 새로운 제도주의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개혁은 외적 형식을 한 번 바꾸는 사건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 앞에서 계속 자기 자신을 수정하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자면, 새 포도주는 주님에게서 오는 새로운 생명과 진리이고, 새 가죽 부대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새로워진 사람의 마음과 삶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때 핵심은 교회 제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유연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옳다고 믿었던 것을 주님의 진리 앞에서 다시 살펴볼 수 있는가, 내 전통과 경험보다 주님의 뜻을 앞세울 수 있는가, 내가 가진 지위와 익숙함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박요한 목사 자신에게도, 설교를 듣는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장로들이 문제다’, ‘전통 교회가 문제다’, ‘건물 교회가 문제다’라고 말하는 순간, 다시 나단의 ‘당신이 사람이라’는 말씀을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비판하는 그 제도주의와 자기 의가 내 안에는 없는가? ‘나는 개혁적이다’라는 자기 의는 없는가? ‘나는 본질을 안다’는 교만은 없는가? 개혁의 영은 남의 낡음을 벗겨내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 안의 낡음을 벗겨내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이번 설교의 중심 문장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다시 표현한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참된 가죽 부대는 새로운 제도나 새로운 교회 모델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계속 자기 proprium 벗어내고 새롭게 되는 사람이며, 참된 교회 개혁은 외적 형식을 제거하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안에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살아나게 하는 데서 완성됩니다.

 

박요한 목사가 마지막에 ‘내가 교회다’라고 말한 것도 바로 이런 방향에서 읽으면 더 깊어집니다. ‘예배당이 교회가 아니다’라는 부정적인 선언보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교회인가?’라는 질문이 더 중요합니다. 내 안에 주님이 거하시는가, 내 안에 주님의 진리가 있는가, 그 진리가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타나는가, 내 삶이 다른 사람에게 선한 용도가 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건물이 없어도 교회가 아닐 수 있고, 이것이 있다면 작은 공간에서도 참된 교회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결국 이번 설교에서 가장 귀한 부분은 ‘무엇을 없앴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남기려 하는가’입니다. 조직과 제도와 건물은 모두 바뀔 수 있습니다. 오늘의 새 가죽 부대도 내일은 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과 진리는 언제나 새롭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과제는 끊임없이 새로운 외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새 생명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사람 자신이 계속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오무를 추구하는 교회’라는 표어도 결국 ‘오무’(五無)보다 ‘일유(一有)가 더 중요해집니다. 무엇을 다섯 가지 없앴는가보다, 그 모든 것을 벗겨낸 뒤 ‘주님이 계시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계신다는 것은 단지 입술로 예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선과 진리가 실제 삶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교회의 가장 깊은 자리이고, 이번 설교가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지점이라고 봅니다.

 

 

 

SY.89, 박요한 목사, ‘극우 정치병자 소굴이 된 한국교회의 비참한 실상’ (20260710)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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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도올은 강의 시작부터 종교가 무엇인지를 아주 단호하게 규정합니다. 하나님을 믿어서 죽은 뒤 천당에 가려는 신앙을 ‘도피세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종교의 목적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진리와 예수의 말씀대로 살고, 사랑을 베풀고, 이웃을 보살피며, 아름다운 윤리가 실현되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점에서는 기독교든 불교든 유교든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더 나아가 종교란 인간에게 어떤 별도의 초월적 세계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깨달음과 각성’을 통해 삶의 자세를 변화시키는 메시지라고 규정합니다.

 

이 대목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참 묘합니다. 상당히 가까이 다가왔다가 결정적인 지점에서 갈라지기 때문입니다. 우선 ‘죽어서 천국 가는 ’만을 신앙의 목적으로 삼고 현재의 삶을 소홀히 하는 태도에 대한 비판은 스베덴보리에게도 상당 부분 통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죽은 뒤 갑자기 들어가는 보상 장소가 아닙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자신의 지배적 사랑을 형성하고, 그 사랑에 따라 사후 자신의 영원한 상태가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를 믿으니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고백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 따라 산다면, 그 고백 자체가 천국을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특히 도올이 말하는 ‘사랑을 베풀고 이웃을 보살피며 아름다운 윤리가 실현되는 공동체’라는 표현은 외형만 놓고 보면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와 상당히 가까워 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종교를 단순한 신조의 동의로 보지 않습니다. 참된 신앙은 삶 안에서 나타나야 하며, 선을 행하는 삶과 분리된 신앙은 살아 있는 신앙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는 도올이 한국 기독교를 향해 던지는 질문을 굳이 방어적으로 거부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당신의 신앙이 실제 이웃을 향한 삶으로 나타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기독교가 계속 들어야 할 질문입니다.

 

그러나 도올이 ‘기독교라고 말한들, 불교라고 말한들, 유교라고 말한들 똑같다’고 넘어가는 순간 스베덴보리와는 갈라집니다. 선한 삶이 중요하다고 해서 모든 종교의 진리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선과 진리는 서로 결합해야 합니다. 선만 있고 진리가 필요 없다거나, 어떤 진리를 믿든 착하게 살기만 하면 모두 같다는 식으로 갈 수 없습니다. 더욱이 주님은 단순히 훌륭한 윤리적 스승 가운데 한 분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인성을 입고 오신 분이라는 것이 스베덴보리 신학의 중심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아주 미세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도올에게 예수의 말씀은 인간을 ‘깨닫게 하고 변화시키는 위대한 말씀’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말씀은 인간에게 단순히 깨달음을 제공하는 가르침을 넘어 ‘생명을 주는 신적 진리’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면서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잠시 뒤 도올이 사용하는 ‘트랜스포메이션(transformation)이라는 말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도올은 도마복음의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하면 ‘나라는 존재가 트랜스포메이션을 일으킨다’고 말하고, 그것을 불교의 ‘대각’이나 ‘해탈’과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여기서 ‘변화’라는 현상 자체에는 동의하면서도 그 변화의 근원을 완전히 다르게 설명할 것입니다. 인간이 말씀을 깨달아 스스로 높은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의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을 질서 안으로 가져오시는 과정, 곧 ‘거듭남’입니다.

 

바로 여기서 이번 강의의 가장 흥미로운 대목이 등장합니다. 도올은 도마복음의 서문과 첫 번째 말씀 사이에 있는 ‘그리고 그가 말하였다’라는 표현을 세밀하게 분석합니다. 여기서 ‘’가 예수일 수도 있고 기록자인 도마일 수도 있다고 본 뒤, 결국 자신은 도마라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유명한 문장, 곧 ‘ 말씀들의 해석을 발견하는 자는 누구든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를 도마가 독자에게 제시한 일종의 해석 원리로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도올이 강조하는 ‘해석을 발견한다’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도올은 단순히 교수에게 배우거나 책에서 뜻을 찾아내는 것이 해석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ChatGPT에게 물어서 얻는 해석 같은 것도 아니라며, ‘너의 한가운데서 그것을 느껴야 한다’고 합니다. 말씀의 의미가 삶 속에서 발견되어야 하고, 그 발견이 자기 존재의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상당히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말씀을 지식으로만 아는 것과 그 말씀이 삶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은 분명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말씀의 진리를 단순히 기억 속에 저장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진리가 의지 안으로 들어가 삶이 될 때 비로소 사람의 것이 됩니다. 머릿속에 알고 있는 진리와 사랑하여 행하는 진리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말씀의 해석을 발견한다’는 것이 단순히 독자의 실존적 깨달음에서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 자체 안에 이미 신적 질서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문자적 의미 안에 영적, 천적 의미가 있으며, 그것들은 인간이 자유롭게 만들어 내는 의미가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 안에 두신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참된 해석은 ‘ 삶에서 나에게 어떤 의미가 되었는가?’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삶에서 발견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그 발견은 말씀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신적 진리에 의해 인도되어야 합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 자체에도 중요한 경계가 됩니다. 우리 역시 어떤 문장을 읽고 스베덴보리를 가져다가 자유롭게 의미를 붙이는 작업을 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그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보고,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힌 상응과 속뜻이 무엇인지 살피고, 그 다음 그것이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해석’이 어느 순간 본문을 듣는 일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본문에 집어넣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도올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를 매우 독특하게 해석합니다. 일반적인 기독교식으로 ‘영생을 얻는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도마복음에는 애초에 ‘영혼’이라는 카테고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대신 ‘맛본다’는 행위 자체에 주목합니다. 맛보는 것은 죽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이 하는 행위이므로, ‘죽음을 맛본다’는 것은 사후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으면서 죽음을 먹고 있는 상태’를 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올은 오염된 음식을 먹는 비유를 듭니다. 먹는 행위 자체는 생명을 유지하는 행위인데, 먹는 음식에 독이 들어 있으면 그 사람은 살아가기 위해 먹으면서 오히려 죽음을 먹게 됩니다. 그리고 이 비유를 한국 기독교에 적용합니다.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신앙생활을 하는데, 잘못된 성경 해석과 죄책감, 협박과 겁박의 종교를 계속 받아들이면서 오히려 인간이 정신적으로 죽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도올은 ‘죽음을 맛본다’고 해석합니다.

 

여기에는 도올 특유의 상당히 자유로운 해석이 들어 있습니다. ‘죽음을 맛보다’라는 고대 표현 자체를 이렇게까지 현대 한국 기독교의 정신적 경직과 직접 연결하는 것은 본문 자체에서 곧바로 나오는 결론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후반에 특정 정치적 집단까지 연결하여 ‘성경을 공부할수록 뇌가 경색되고 특정 정치세력이 된다’는 식으로 말하는 순간에는 신학적 해석과 도올 자신의 정치·사회적 평가가 뒤섞입니다. 이 부분은 구별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특정 정치적 성향을 가졌다는 사실 자체를 사람의 영적 죽음의 증거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반대편 정치 성향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해야 할 원칙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살아 있으면서 죽음을 먹는다’는 발상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세계에서는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당히 깊은 접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생명’과 ‘죽음’은 단순히 육체가 살아 있느냐 죽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생명이며,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비롯되는 악과 거짓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영적 죽음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육체적으로 멀쩡히 살아 있으면서도 영적으로는 죽음에 속한 것을 계속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육체의 죽음을 맞더라도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 안에 있다면 실제로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도올과 스베덴보리는 아주 가까이 왔다가 다시 갈라집니다. 도올은 ‘아무도 죽음을 체험할 없다. 인간은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 있다’고 말합니다. 육체적 경험의 차원에서는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경계 너머를 이야기합니다. 육체의 죽음은 인간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영으로서 삶이 계속되는 전환입니다. 사람은 육체를 벗은 뒤에도 보고, 듣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다른 영들과 관계하며 살아갑니다. 따라서 도올이 ‘영혼’과 사후세계의 문제를 제거하고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를 오직 현세적 삶의 질로 가져온다면, 스베덴보리는 그 현세적 의미를 인정하면서도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라면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를 훨씬 급진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은 사람에게 육체의 죽음은 존재의 종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람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는 말씀도 이런 관점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육체가 죽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악과 거짓이라는 영적 죽음에 빠지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 안에 거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도올이 ‘영생으로 해석하면 된다’고 밀어낸 바로 그 자리에서 스베덴보리는 ‘영생’이라는 말을 훨씬 더 깊게 되찾습니다. 영생은 ‘죽은 다음 끝없이 오래 사는 ’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지금 이 순간부터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 사는 상태이며,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그 상태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도올이 처음 비판한 ‘천당 가려고 예수 믿는 신앙’과도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천국을 미래의 보상 상품처럼 이해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먼저 사람 안에 형성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사람의 의지와 이해 안에 받아들여지고, 그것이 실제 삶에서 체어리티로 나타날 때 사람 안에 천국의 질서가 형성됩니다. 죽음은 그 사람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순간이 아니라, 이미 형성되어 있던 내적 상태가 외적으로 드러나는 문턱입니다.

 

그러므로 도올이 ‘죽어서 천국 가려고 하지 말고 지금 땅에서 사랑하며 살아라’고 말한다면, 스베덴보리는 상당 부분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중요한 말을 덧붙일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렇게 살아 형성된 사랑이 죽음 이후에도 당신의 삶이 된다.’ 현세와 내세는 서로 경쟁하는 두 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연속선 위에 있습니다.

 

이번 강의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그래서 도올이 너무 좋은 문제를 제기하고도 그것을 결국 인간의 ‘깨달음’으로 수렴시킨다는 데 있습니다. ‘해석을 발견하라 삶에서 깨달아라 인격의 트랜스포메이션을 이루어라 죽음을 맛보지 말라.’ 아름다운 구조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여기에는 한 분이 빠져 있습니다.

 

주님’입니다.

 

거듭남은 자기계발의 최고 단계가 아닙니다. 인간이 말씀의 비밀을 깨달아서 스스로 고양되는 과정도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의 proprium으로부터 자신을 거듭나게 할 수 없습니다. 선도 진리도 생명도 인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흘러들어옵니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 유입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배운 진리를 실제 삶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변화의 주체는 궁극적으로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도올의 ‘해석을 발견하라’는 말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조금 바꾸어 보면 이렇게 될 것 같습니다. ‘말씀의 속뜻을 알고 거기서 끝나지 말라. 진리가 안으로 들어오게 하라. 그러나 진리를 발견한 내가 나를 변화시킨다고 생각하지 말라. 진리를 통하여 나를 변화시키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도마복음과 정경 복음서 사이의 차이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도올은 도마복음이 서술을 제거하고 ‘살아 있는 예수의 말씀’만 남겼기 때문에 더 순결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반드시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행하심’을 떼어 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시험받으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제자들과 함께하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고, 십자가의 마지막 시험을 통과하시고, 인성을 영화롭게 하신 그 모든 과정 역시 계시입니다.

 

그러므로 도마복음의 어록에서 귀한 것을 발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서사가 없기 때문에 순결하다’는 결론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뒤집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서사가 불순물을 첨가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 ‘서사’ 안에 주님의 구속과 영화라는 가장 깊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강의를 들으면서 저는 도올에게서 상당히 좋은 질문 하나를 받게 됩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나는 생명을 먹고 있는가, 죽음을 먹고 있는가?’ 이것은 충분히 간직할 만한 질문입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교리를 많이 알고, 심지어 스베덴보리를 많이 읽는 것 자체가 우리를 천국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자신을 높이며 자기 지성을 자랑하게 된다면, 진리의 지식조차 proprium을 강화하는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도올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생명을 주는 것은 ‘내가 발견한 탁월한 해석’이 아닙니다.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서 옵니다. 말씀의 속뜻도 결국 우리를 지적으로 놀라게 하기 위해 열린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주님께 연결하고 우리의 사랑과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강의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저는 이렇게 정리하고 싶습니다.

 

도올은 말씀의 해석을 삶에서 발견함으로써 죽음을 맛보지 않는 인간을 말하지만, 스베덴보리는 말씀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 거듭나는 인간을 말합니다.

 

둘 사이에는 상당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다 죽은 교리를 경계하고, 삶 없는 신앙을 경계하며, 말씀을 실제 삶으로 가져오려고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중심은 다릅니다. 한쪽에는 ‘깨닫고 변화하는 인간’이 있고, 다른 쪽에는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도올을 보는 일은 바로 그 차이를 발견하면서도, 도올에게서 발견되는 진리의 조각을 버리지 않는 일이겠습니다. 그의 모든 말을 받아들일 필요도 없고, 그의 몇몇 과장 때문에 모든 말을 버릴 필요도 없습니다. ‘말씀을 삶에서 발견하라’, ‘신앙이 사랑과 이웃 돌봄으로 나타나야 한다’, ‘성경을 읽으면서 오히려 사람이 굳어질 수도 있다’는 그의 경고는 충분히 들을 만합니다. 다만 그 모든 것을 받아 들고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묻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일관됩니다.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리고 아마 그 한마디가 이번 도올 강의와 ‘스베덴보리의 렌즈’ 사이의 가장 깊은 접점이면서, 동시에 가장 결정적인 갈림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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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 강의에서 도올 김용옥이 처음 던지는 질문은 매우 근본적입니다. ‘예수는 정말 살았는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사람인가?’입니다. 도올은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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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설교는 사무엘하 121절로 6절, 곧 나단이 다윗에게 가난한 사람의 암양 한 마리를 빼앗은 부자의 비유를 들려주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설교의 상당 부분은 한국 근현대사와 오늘의 정치 현실, 그리고 한국 교회 일부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인물 숭배에 대한 강한 비판으로 전개됩니다. 박요한 목사는 자신의 교회가 붙드는 두 가치를 ‘개혁’과 ‘애민’이라고 말하며, 특히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괴롭히는 ’, ‘상처 입은 사람을 조롱하는 ’, ‘자기가 지지하는 정치적 인물을 우상화하여 그의 어두운 면을 보지 않으려 하는 ’을 기독교 신앙과 양립하기 어려운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어린 시절부터 ‘인간을 우상화하지 않고’, 상처 입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사람을 길러야 한다는 교육의 비전으로 나아갑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이 설교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의외로 이승만도, 명성황후도, 오늘의 정치인들도 아닙니다. 오히려 나단이 다윗에게 한 한마디입니다. ‘당신이 사람이라.’ 이 말이야말로 이 긴 설교 전체를 영적인 차원으로 돌려놓을 수 있는 결정적인 말씀입니다. 다윗은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암양을 빼앗았다는 이야기를 듣자 즉시 분노합니다. ‘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그런데 다윗이 그렇게 분명하게 볼 수 있었던 악은 사실 자기 안에 있는 악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들었을 때에는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지만, 자기 자신의 삶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다루는 인간의 proprium 문제와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생각하고 판단할 때 자기 악을 정당화하고, 변명하고, 때로는 아예 보지 못합니다. 반면 타인의 악은 놀라울 만큼 선명하게 봅니다. 그래서 남의 탐욕은 탐욕으로 보면서 자기 탐욕에는 이유가 있고, 남의 권력욕은 악으로 보면서 자기가 지지하는 사람의 권력욕에는 명분을 붙이며, 남의 거짓에는 분노하면서 자기편의 거짓에는 관대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좌우 어느 한 정치 진영에만 있는 현상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proprium 자체가 가진 보편적인 성향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번 설교의 정치적 메시지는 오히려 정치적 진영을 넘어서는 영적 메시지가 될 수 있습니다. 박요한 목사는 ‘인간을 우상화하지 마세요’라고 반복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지적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인간을 우상화하는 까닭은 단순히 그 사람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 사람 안에서 ‘내가 사랑하는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질서, 내가 원하는 나라, 내가 원하는 성공, 내가 원하는 힘을 어떤 지도자가 대신 구현한다고 느끼면, 어느 순간 그 사람의 진실과 거짓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 사람을 통해 확장된 자신’을 지키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정치적 우상화의 가장 깊은 뿌리에는 결국 자기 사랑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 사람을 우상화하지 말라’는 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늘 한 인물을 우상에서 끌어내린 사람이 내일 다른 인물을 그 자리에 올려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른쪽의 우상을 깨뜨리면서 왼쪽에 새로운 우상을 세울 수도 있고, 왼쪽의 우상을 비판하면서 오른쪽의 인물을 절대화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나는 누구도 우상화하지 않는다’는 자기 자신의 판단과 정의감을 우상화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단순한 ‘우상 교체’가 아니라 인간 중심에서 주님 중심으로의 방향 전환입니다.

 

이 점에서 다윗 이야기는 매우 중요합니다. 다윗의 위대함은 그가 죄가 없는 사람이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그의 죄를 끔찍할 만큼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밧세바를 취하고, 그 사실을 감추려 하며, 마침내 충성스러운 우리아를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박요한 목사가 잘 짚었듯이 성경은 다윗의 ‘앞모습’만 보여 주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모습과 추한 모습을 모두 보여 줍니다. 이것 자체가 인간을 우상화하지 못하게 하는 성경의 놀라운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 중요한 것은 다윗이 ‘들켰다’는 사실이 아니라 ‘자기의 악을 자기 악으로 인정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출발입니다. 회개는 ‘인간은 모두 죄인입니다’라는 일반적인 교리를 인정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악입니다’라고 자기 삶에서 특정한 악을 보고, 그것이 주님의 뜻에 반하기 때문에 물리치려 하는 데서 실제적인 회개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나단의 ‘당신이 사람이라’는 선언은 단순한 고발이 아닙니다. 다윗의 눈을 자기 자신에게 돌려놓는 진리의 빛입니다.

 

여기서 설교 전체를 향해서도 같은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에서는 이승만, 명성황후, 한국 교회의 극우적 정치교육, 특정 정치세력과 지도자들의 문제를 매우 강한 언어로 비판합니다. 박요한 목사가 제시한 각각의 역사적 사실과 정치적 평가는 별도로 검증하고 논의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더 중요한 질문은 ‘그들 가운데 누가 악한가?’가 아니라 ‘ 말씀을 듣고 있는 안에는 이것이 없는가?’입니다. 나단의 비유를 듣고 다윗이 ‘저런 놈은 죽어야 한다’고 외치는 데서 끝났다면 아무런 회개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말씀의 목적은 다윗으로 하여금 다른 악인을 정확하게 평가하게 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라는 말씀을 듣게 하는 데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번 설교가 정말 깊은 영적 설교가 되려면, ‘ 정치인들이 사람이다’, ‘ 극우 기독교인들이 사람이다’, ‘ 지도자들이 사람이다’에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에는 반드시 ‘그리고 나도 사람일 있다’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것이 없다면 나단의 비유가 오히려 남을 심판하는 도구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반대로 이것이 들어오면 설교의 정치적 소재 전체가 갑자기 거듭남의 문제로 바뀝니다.

 

박요한 목사가 강조하는 ‘애민’도 같은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약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상처 입은 사람을 조롱하지 않으며,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보호해야 한다는 강조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와 상당히 가까운 부분이 있습니다. 특히 ‘상처 입은 자의 손을 만져 주고 안아 있는 따뜻한 사람’을 길러야 한다는 설교 후반의 말은 기독교 신앙이 삶의 선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점에서 귀합니다. 신앙은 사람을 더 잔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선하게 만들어야 하며, 교리가 참이라면 결국 이웃을 향한 선한 삶이라는 열매를 맺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애민’과 ‘체어리티’를 완전히 같은 것으로 놓을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체어리티는 단순한 연민이나 따뜻한 감정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실제 삶에서 행하는 것이며, 동시에 진리에 따라 지혜롭게 행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돕는 것이 체어리티이고, 때로는 악을 제지하는 것이 체어리티이며, 때로는 잘못을 분명하게 말하는 것도 체어리티가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 분노를 쏟아내는가’가 아니라 ‘이웃의 참된 선을 위하여 행동하는가’입니다.

 

이 기준을 적용하면 박요한 목사가 약자에 대한 조롱과 멸시를 거부하면서 ‘기독교인은 써야 언어와 쓰지 않아야 언어가 있다’고 말한 부분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자기와 생각이 다르거나 자신이 도덕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을 비하하고 조롱하는 것과 그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을 옳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이것은 체어리티와 진리를 함께 붙들려는 태도와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기준을 박요한 목사 자신의 언어에도 똑같이 적용해야 합니다. 설교 안에는 정치적 반대편이나 역사적 인물을 향한 매우 거친 표현과 조롱에 가까운 표현들이 적지 않게 등장합니다. 이것은 이번 설교가 스스로 제시한 ‘기독교인은 써야 언어와 쓰지 않아야 언어가 있다’는 기준과 긴장을 일으킵니다. 상대편의 조롱을 비판하면서 상대편을 조롱한다면, 주장하는 진리와 그것을 전달하는 형식 사이에 균열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중요한 것은 누구를 향한 조롱이냐가 아니라, 그 언어를 움직이는 정서가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분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불의 앞에서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는 것이 반드시 선한 것은 아닙니다. 약자가 짓밟히는 것을 보고 마음 아파하는 것은 체어리티에서 비롯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노는 특히 자기 사랑과 결합하기 쉬운 정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분노’였던 것이 어느 순간 ‘악인이라고 판단한 상대를 미워하는 즐거움’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둘 다 정의로운 분노처럼 보이지만 영적 기원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주님은 행위의 외형만 아니라 그 행위를 움직이는 사랑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박요한 목사가 말하는 ‘애민’은 매우 좋은 출발점이지만, 그것이 참된 체어리티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애민’을 넘어가야 합니다. 내가 정치적으로 동의하는 사람, 내가 피해자라고 인정하는 사람, 내가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내가 몹시 싫어하는 사람에게조차 그의 인간됨을 부정하지 않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악은 악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사람 자체를 지옥에 던져 버리고 싶은 마음을 즐기지 않는 것, 이것이 훨씬 어려운 체어리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 후반에 소개되는 어린 학생의 질문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는데 정치인도 사랑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어떤 교회 지도자가 그 정치인을 ‘사탄’으로 규정하고 ‘박멸해야 한다’고 가르쳤다는 대목입니다. 사실 여부와 구체적 맥락은 별도로 확인해야 하지만, 박요한 목사가 이 사례를 통해 지적하는 문제 자체는 매우 중요합니다. 정치적 상대를 더 이상 하나의 인간으로 보지 않고 절대적인 악으로 규정하는 순간, 신앙은 체어리티를 잃을 위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진영에서 일어나든 동일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사람과 악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악은 거부해야 하지만 사람의 구원을 바라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지옥적인 것은 악과 거짓이지, 내가 미워하는 특정 인간 집단 자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악을 선이라고 인정하라는 뜻이 아니라, 악을 거부하면서도 사람에게 선이 회복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치적 양극화가 극심할수록 더욱 어려우면서도 더욱 필요한 기독교적 태도입니다.

 

이제 다시 설교 제목 ‘한국 교회는 어떻게 극우 양성소가 되었나?’로 돌아가 봅니다. 여기서 박요한 목사가 말하는 ‘극우 양성소’는 문맥상 낡고 부패한 종교체제, 권력과 결탁하고 인간을 우상화하는 교회의 모습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는 ‘옛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악하고, ‘새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선한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참된 새로움은 제도와 간판을 바꾸는 데 있지 않고 사람의 속 사람이 새로워지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개혁의 가장 깊은 자리는 교단 총회도, 정치적 입장도, 예배 형식도 아닙니다. 한 사람의 속 사람입니다. 내가 진리를 이용하여 남을 심판하는가, 아니면 그 진리가 먼저 나를 심판하게 하는가? 내가 지지하는 사람의 악에도 같은 기준을 적용할 수 있는가? 내가 반대하는 사람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구원의 가능성을 인정하는가? 내 신앙은 결국 이웃을 향한 선한 삶으로 나타나는가? 이런 질문 앞에서 교회가 끊임없이 자신을 살피는 것이 참된 개혁에 더 가깝습니다.

 

그 점에서 이번 설교의 ‘개혁’과 ‘애민’이라는 두 기둥도 조금 다르게 배열해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개혁과 애민’이 서로 나란히 서 있는 두 가치라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와 선의 결합으로 보는 편이 더 깊습니다. 진리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드러내고 개혁하게 하며, 선은 왜 그것을 고쳐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진리만 있고 체어리티가 없으면 개혁은 정죄가 되기 쉽고, 체어리티만 있고 진리가 없으면 사랑은 방향을 잃기 쉽습니다. 참된 교회에서는 이 둘이 결혼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설교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결국 정치적 인물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왕궁 안에 홀로 서 있는 나단과 다윗입니다. 한 사람은 진리를 말하고, 한 사람은 그 진리 앞에 섭니다. 다윗에게는 나단을 제거할 권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단을 제거한다고 자기 안의 악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단의 말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다윗에게 다시 시작할 길이 열립니다.

 

우리에게도 ‘나단’은 찾아옵니다. 때로는 말씀으로, 때로는 양심을 통해, 때로는 다른 사람의 지적을 통해, 때로는 실패와 수치를 통해 찾아옵니다. 그때 proprium은 즉시 변명하고 싶어 합니다. ‘ 사람도 그러지 않았는가’, ‘저쪽은 심하지 않은가’, ‘내게도 사정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그 모든 비교를 멈추고 주님 앞에서 ‘ 사람이 바로 나입니다’라고 인정할 수 있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번 설교를 한 문장으로 다시 읽는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한국 교회가 새로워지는 길은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의 우상을 깨뜨리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앞에서 안의 proprium 내가 만든 우상을 발견하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인정하고 물리치며, 자리에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가 살아나게 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렇게 보면 박요한 목사가 마지막에 품었다는 교육의 비전도 의미가 달라집니다. 아이들에게 ‘누가 좋은 정치인이고 누가 나쁜 정치인인가’를 먼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인간도 절대화하지 않는 법,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의 잘못도 볼 수 있는 법,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도 인간으로 대하는 법, 약한 사람의 고통에 마음 아파하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안의 악을 발견했을 때 변명하지 않고 돌이키는 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런 교육이라면 그것은 특정 정치 진영의 다음 세대를 만드는 교육이 아니라, ‘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라는 말씀 앞에 설 수 있는 양심을 길러 주는 교육이 될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이번 설교에서 가장 귀하게 건질 수 있는 결론입니다. 교회의 위기는 세상에 악한 사람이 많아서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자기편의 악을 악이라고 부르지 못할 때, 진리를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고 남에게만 적용할 때,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될 때 교회 안에서 이미 위기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개혁은 언제나 남을 향해 들었던 손가락이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순간 시작됩니다. ‘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 앞에서 ‘그렇습니다. 제가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을 때, 심판의 말씀이 오히려 거듭남의 문이 됩니다.

 

 

 

SY.91, 박요한 목사, ‘내가 장로와 당회를 없애버린 이유’ (20260724)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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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85, 박요한 목사, ‘내 어머니 같은 나의 하나님 -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어린아이 같은 신앙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설교는 마태복음 21장의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사건에서 출발하여, 예루살렘 성전의 외형적 종교성과 어린아이 같은 신앙, 하나님과의 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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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 강의에서 도올 김용옥이 처음 던지는 질문은 매우 근본적입니다. ‘예수는 정말 살았는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사람인가?’입니다. 도올은 요세푸스의 역사 기록에는 세례 요한이 비교적 분명하게 등장하는 반면 예수에 대해서는 확실한 역사적 자료가 빈약하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복음서에서 만나는 예수와 역사학이 복원할 수 있는 ‘역사적 예수’ 사이에 상당한 거리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어 복음서는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기록한 전기가 아니라 ‘드라마적 구성’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먼저 한 가지는 구별해야 합니다. ‘예수에 관한 동시대의 외부 기록이 우리가 기대하는 것만큼 풍부하지 않다’는 것과 ‘예수에 관한 역사적 근거가 없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더구나 도올 자신도 결국 예수를 완전한 허구의 인물로 돌리지는 않습니다. 그는 예수를 ‘영원한 X’라고 부르면서도, 예수의 죽음 이후 그를 향한 강렬한 기억과 운동을 낳은 어떤 역사적 진원이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도올의 실제 관심은 ‘예수가 있었느냐 없었느냐’보다 ‘후대 교회가 고백하는 그리스도상에서 역사적 인간 예수를 얼마나 분리하여 찾아낼 있느냐’에 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와 도올의 방향이 갈라지기 시작합니다. 도올은 후대의 ‘그리스도’를 걷어내면서 그 아래 묻혀 있는 ‘인간 예수’를 찾으려 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정반대의 질문을 합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라는 인간 안에서 여호와께서 어떻게 자신의 인성을 신성하게 하셨는가?’입니다. 도올에게는 ‘인간 예수 후대에 신화화된 그리스도’라는 방향이 강하다면, 스베덴보리에게는 ‘여호와 인성을 취하심 시험과 승리 인성의 영화 신적 인성’이라는 방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문제는 단순한 ‘위대한 종교인의 전기’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인간에게 훌륭한 가르침 몇 가지를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시 영계에 극도로 팽창한 지옥의 세력을 제압하고 천국과 지옥의 질서를 회복하시며, 동시에 취하신 인성을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성육신 이해에서 결정적인 부분입니다. 따라서 복음서에서 기적, 시험, 십자가, 부활 등을 걷어내고 ‘예수의 순수한 말씀’만 남기면 더 본래적인 예수에게 가까워진다는 도올의 생각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주님의 생애에서 가장 깊은 차원을 제거하는 일이 됩니다.

 

그렇다고 도올의 문제 제기가 무가치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여기서 기존 기독교가 들어야 할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실제로 알고 있는가, 아니면 예수에 관한 교리만 알고 있는가?’입니다. 도올이 바울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바울에게는 ‘예수라는 인간’이 거의 없다고 말하는 이유도 이것입니다. 바울에게 중심은 갈릴리를 걷고, 사람을 만나고, 병자를 불쌍히 여기고, 비유를 말씀하시고, 죄인들과 식사하신 예수보다 ‘십자가에 박힌 그리스도’라는 신학적 의미라는 것입니다.

 

이 지적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도 그냥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교리적으로 ‘예수는 하나님이시다’를 아무리 정확하게 고백해도 그분이 실제로 어떻게 사랑하셨고, 어떻게 사람을 대하셨으며, 무엇을 선이라고 하셨는지를 삶에서 따르지 않는다면 그 고백은 살아 있는 신앙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체어리티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도올이 ‘교리화된 그리스도’ 뒤에 가려진 예수의 실제 말씀과 삶을 다시 보자고 요구하는 것은 기존 기독교에 유익한 자극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올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바울이 ‘예수 운동’이 아니라 ‘그리스도 운동’을 했고, 그 운동을 통해 교회가 형성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초기 교회는 승천한 예수가 곧 다시 돌아와 세상을 심판할 것이라고 기다리는 ‘종말론적 회중’이었으며, 심지어 이를 현대의 극단적 휴거 집단과 비교합니다. 예수가 오지 않자 재림을 계속 연기하다가 결국 ‘여기서 궁리를 하자’는 방향으로 신학이 변했다고 풍자합니다.

 

여기에는 분명 짚어야 할 과장이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 안에 강렬한 종말론적 기대가 있었다는 사실과 초기 교회 전체를 현대의 시한부 종말론 집단과 사실상 동일시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더구나 ‘처음에는 어느 해에 재림한다고 구체적으로 정했다가 오니 계속 연기했다’는 식의 서술은 이 강의에서 도올이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역사적 설명과 강연자의 풍자적 재구성을 구별해야 하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바로 이 지점에서 도올과 스베덴보리가 뜻밖에 가까워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재림을 주님께서 육체를 입고 구름을 타고 지구로 다시 내려오시는 사건으로만 이해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유는 도올과 전혀 다릅니다. 도올은 문자적 재림 기대가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초기 기독교의 종말론적 신앙 자체를 역사적으로 상대화하는 방향으로 갑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문자가 품고 있는 속뜻을 밝힘으로써 ‘구름을 타고 오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새롭게 풉니다. ‘구름’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그 가운데 나타나는 ‘영광’은 말씀의 내적, 신적 진리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은 실패하여 연기된 사건이 아니라 인간이 그 의미를 문자적으로 잘못 이해했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상당히 중요합니다. 도올은 ‘ 왔다’고 말하고, 스베덴보리는 ‘사람들이 오심의 방식을 잘못 알았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그리고 강의의 중반 이후부터 도올의 주장은 더욱 대담해집니다. AD 70년 예루살렘 멸망 이후 교회가 ‘바울의 철학만으로는 되겠다. 역사적 예수의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이른바 ‘마가 교단’에서 일종의 드라마 팀을 만들어 팔레스타인의 예수 전승을 수집하여 최초의 복음서 드라마인 마가복음을 만들었다고 설명합니다. 마가가 성공하자 마태가 나오고, 이어 누가가 나오고, 마지막으로 요한이 종합했다는 식입니다. 심지어 복음서가 처음에는 중동의 구전문화나 판소리처럼 ‘챈팅(chanting), 곧 일정한 가락을 붙여 낭송하는 공연적 형태였을 것이라는 설명까지 합니다.

 

이 부분은 특별히 조심해서 들어야 합니다. 복음서가 구전 전승과 공동체적 전승 과정을 거쳤다는 문제, 마가복음이 공관복음 가운데 이른 시기에 작성되었다는 견해 등과 ‘마가 교단이 드라마 작가 그룹을 팔레스타인에 파견했다’는 이야기는 동일한 수준의 역사적 명제가 아닙니다. 후자는 이 강의만 놓고 보면 도올의 상당히 자유로운 역사적 상상과 재구성이 들어간 설명입니다. ‘재미있는 설명’과 ‘입증된 역사’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귀담아들을 통찰은 있습니다. 복음서가 현대적인 의미의 녹취록이나 CCTV 기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자료를 선택하고 배열하며, 각각의 공동체와 신학적 목적 속에서 예수의 생애를 증언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그러므로 드라마이며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라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신학적 목적을 가지고 기록했다’와 ‘역사적 사실을 창작했다’ 사이에는 상당히 큰 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도올은 이 둘 사이를 때때로 너무 빨리 건너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강의의 중심인 ‘도마복음’이 등장합니다. 도올에게 도마복음은 거의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도마복음에는 예수의 말씀 114개가 어록 형태로 수록되어 있고, 정경 복음서와 달리 예수의 탄생과 활동을 연결하는 서사, 십자가, 무덤, 부활, 승천 등의 이야기가 없습니다. 도올은 바로 이 ‘비어 있음’을 대단히 중요하게 봅니다. 후대 기독교의 신화적 요소가 들어가기 이전의 ‘순결한 예수’가 여기에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마복음이 사복음서보다 늦다는 견해를 강하게 거부하고, 오히려 이것이 예수 전승의 원초적 형태를 보존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논리적으로도 한번 점검할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문서에 십자가와 부활 이야기가 ‘없다’는 것과 그 문서가 ‘십자가와 부활 전승보다 먼저 만들어졌다’는 것은 같은 명제가 아닙니다. 문서의 장르가 ‘어록집’이라면 애초에 서사적 사건을 기록하지 않는 것이 그 장르의 특징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도마복음에는 십자가와 부활 서사가 없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부활은 후대 교회의 창작이다’라는 결론은 그 사이에 상당한 논증을 더 필요로 합니다. 강의에서는 이 간격이 너무 쉽게 넘어가집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아주 선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복음서의 ‘말씀’과 ‘사건’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만 진짜이고 사건은 후대에 덧붙은 신화라는 식으로 나눌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생애는 하나입니다. 주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것, 병자를 고치신 것,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 십자가를 지신 것,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에는 역사적 층위가 있으면서 동시에 주님의 내적 과정, 곧 지옥들과의 싸움과 인성의 영화라는 더 깊은 신적 실재가 있습니다.

 

그래서 도올이 복음서에서 ‘신화’를 제거하여 역사적 예수를 찾으려 한다면,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그가 ‘신화’라고 부르는 대목 안에서 가장 깊은 아르카나를 발견합니다.

 

특히 십자가가 그렇습니다. 전통 기독교의 형벌대속론과 스베덴보리의 십자가 이해는 같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성부가 인간의 죄에 대한 형벌을 성자에게 대신 가하여 진노를 만족시켰다는 식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주님이 지옥들과 싸우신 마지막 시험이며, 그 모든 시험을 이기심으로써 취하신 인성을 완전히 영화롭게 하신 과정의 절정입니다. 그러므로 도올이 기존 기독교의 ‘우리 죄를 대신하여 벌받은 예수’라는 도식을 문제 삼는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비판 가운데 들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러므로 십자가와 부활은 후대 교회가 만들어 신화적 예수상이다’로 넘어가면 스베덴보리와는 결정적으로 갈라집니다.

 

도마복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안에 아름답고 깊은 예수의 말씀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배척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문헌이 정경 밖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안의 모든 내용을 거짓이라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 말이 사람을 주님께, 선과 진리에, 체어리티의 삶에 이르게 하는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과 ‘그러므로 도마복음이 사복음서보다 순결한 복음이다’라는 주장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더욱 근본적으로는,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은 단순히 예수의 육성 어록을 많이 보존했다고 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문자적 의미 안에 천적, 영적 의미가 질서 있게 들어 있고, 그 상응을 통하여 천국과 인간을 연결하는 신적 계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실제로 하셨을 가능성이 높은 말들을 가장 오래된 형태로 모았다’는 역사비평적 가치와 ‘이것이 신적 말씀인가?’라는 문제는 서로 다른 차원의 질문입니다.

 

이 점에서 도올의 접근에는 흥미로운 역설이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를 ‘신화에서 해방’하여 원래 예수에게 돌려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는 그렇게 ‘신화적 요소’를 하나씩 제거하고 나면 마지막에는 오히려 주님께서 왜 세상에 오셨는지가 사라질 위험이 있습니다. 예수는 훌륭한 말씀을 남기고 진실하게 살다가 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위대한 스승으로 남습니다. 실제로 강의 후반에서 도올이 그리는 예수상은 상당히 그 방향으로 갑니다.

 

스베덴보리는 거기서 묻습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친히 오셔야 했는가?

 

좋은 윤리적 가르침만 필요했다면 선지자를 보내는 것으로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인간에게 새로운 철학만 필요했다면 또 하나의 현자를 보내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와 영계 전체의 질서가 무너지고 인간이 더 이상 자유롭게 선과 진리를 선택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옥의 세력이 팽창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직접 인성을 취하셨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설명입니다. 이것을 제거하면 성육신의 우주적 의미가 사라집니다.

 

강의 마지막에 도올은 도마복음을 통한 기독교의 재건을 한국인의 주체성 문제와 연결합니다. 서양에서 수입된 기독교를 마치 강대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처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한국인의 상식과 미학적·신앙적 감각으로 기독교를 새롭게 재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보수적인 기독교 신앙으로는 21세기를 견딜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이 대목 역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반은 상당히 공감되고 반은 경계하게 됩니다. 신앙을 특정 문화의 옷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옳습니다. 서양 선교사들이 전해 준 신학적 체계 전체를 곧 주님의 진리 자체로 동일시할 수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부터 당시 기독교의 삼위일체론, 이신칭의, 형벌대속적 구원 이해 등을 매우 근본적으로 다시 검토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전통이 그렇게 가르쳤으니 그대로 믿어라’는 태도를 스베덴보리 역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양의 기독교’를 벗어난 자리에 ‘한국인의 감각’을 최종 기준으로 세운다면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서양도 기준이 아니고 한국도 기준이 아닙니다. 보수도 기준이 아니고 진보도 기준이 아닙니다. 도마복음도 기준이 아니고 스베덴보리라는 인간 개인도 기준이 아닙니다. 기준은 주님이며, 주님에게서 나오는 선과 진리입니다.

 

이것이 어쩌면 이번 강의를 통해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가장 깊이 배울 수 있는 지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도올에게서 배울 것은 배우는 것입니다. 그는 기독교인에게 익숙한 전제를 낯설게 만들어 다시 질문하게 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습니다. ‘당신이 믿는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 자신과 예수에 관한 신학을 구별해 적이 있는가?’, ‘재림을 정말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복음서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 정경 밖의 초기 기독교 문헌은 아예 들여다보지도 않는가?’ 이런 질문들은 충분히 유익합니다.

 

그러나 도올에게서 멈추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가 ‘신화’라고 제거하는 것 가운데 실제로는 말씀의 가장 깊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역사적 인간 예수’를 되찾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오히려 그 인간 안에 계셨던 ‘여호와’를 놓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강의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하고 싶습니다.

 

도올은 교회가 만든 그리스도에게서 역사적 예수를 구해내려 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역사적 예수 안에서 인성을 입고 오신 여호와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작지 않습니다. 전자는 우리를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으로 데려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자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 그분의 선과 진리로 거듭나는 사람’으로 데려갑니다. 예수의 말씀을 존경하는 것과 예수께서 ‘주님’이심을 아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번 도올 김용옥을 ‘틀린 사람’이라는 한마디로 정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그의 질문 때문에 우리가 너무 익숙해서 더 이상 묻지 않던 것들을 다시 묻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질문을 충분히 따라간 뒤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대어 보면, 기존 기독교와 도올 가운데 어느 한쪽을 단순히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제3의 풍경이 열립니다. 전통 기독교가 십자가를 이해한 방식에도 다시 물음을 던지고, 도올이 십자가를 후대의 신화화 쪽으로 밀어내는 방식에도 다시 물음을 던집니다. 문자적 재림론에도 물음을 던지고, 재림 자체를 초기 교회의 실패한 기대처럼 취급하는 데에도 물음을 던집니다.

 

아마 이것이 앞서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주님의 시선을 조금이라도 배우고 싶다’는 마음과도 연결될 것입니다. 누구의 편에 서서 상대방의 오류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있는 곳에서는 진리를 기뻐하고, 거짓이 섞인 곳에서는 그것을 분별하되, 그 사람 전체를 그 오류 하나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도올의 날카로운 질문도 받고, 그의 지나친 역사적 재구성도 경계하고, 기존 기독교의 소중한 고백도 보존하면서 그 안에 굳어진 인간적 전통 역시 다시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결국 스베덴보리를 가지고 세상을 재단하는 작업조차 아닐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열어 보여 준 말씀과 영계의 질서를 도움 삼아, ‘ 모든 가운데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는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가는 작업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을 오래 붙들수록, 사람을 너무 빨리 ‘우리 ’과 ‘저쪽 ’, ‘옳은 사람’과 ‘틀린 사람’으로 나누고 싶어 하는 우리의 시선도 조금씩 달라질 수 있겠습니다.

 

 

 

SY.90, 도올 김용옥, ‘종교라는 게 도대체 뭐냐?’ (20251112)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도올은 강의 시작부터 종교가 무엇인지를 아주 단호하게 규정합니다. 하나님을 믿어서 죽은 뒤 천당에 가려는 신앙을 ‘도피세적’이라고 비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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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강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상당히 강한 긴장 속에서 진행됩니다. 정동수 목사는 이동원 목사의 지구촌교회 창립기념 설교를 계기로, 떼제 공동체와 관상기도, 가톨릭과 개신교의 일치, 에큐메니즘, 유진 피터슨과 레노바레 운동까지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 비판합니다. 그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단순히 ‘기도 방법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에게 이것은 결국 ‘다른 복음’의 문제이며, 교회가 성경에서 떠나 종교통합과 신비주의로 이동하는 ‘배도’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1장의 ‘다른 복음’, 고린도후서 11장의 ‘다른 예수, 다른 , 다른 복음’, 요한이서의 ‘그리스도의 교리’를 가져와 자신의 비판을 뒷받침합니다.

 

이처럼 정동수 목사의 문제의식 자체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사랑’, ‘화해’, ‘포용’, ‘넓은 마음’이라는 아름다운 말 아래서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를 더 이상 중요하게 여기지 않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 문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모든 종교적 차이를 지워 버리고 ‘무엇을 믿든 착하게만 살면 된다’는 식의 무차별주의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에게 선과 진리는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선만 있고 진리가 없어도 안 되고, 진리만 있고 선이 없어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이번 강의가 제기하는 ‘넓은 마음이라는 이름으로 진리의 경계까지 없애도 되는가?’라는 질문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반드시 진지하게 받아야 할 질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정동수 목사와 스베덴보리의 길은 크게 갈라집니다. 정동수 목사는 ‘진리의 경계’를 거의 교리적 소속과 정통성의 경계로 설정합니다.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와 개신교가 함께 예배하는 것을 종교통합으로 보고, 그것을 사실상 ‘다른 복음’과 연결합니다. 더 나아가 강의 마지막에는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의 교리를 그대로 믿으면 구원이 없다고 단정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진리의 경계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경계는 사람이 어느 교단 명부에 속해 있는가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번 강의를 읽는 데 가장 중요한 차이 가운데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후세계에 관한 방대한 기록에서 사람을 ‘가톨릭’, ‘개신교’, ‘유대교’, ‘이방인’이라는 지상의 명칭만으로 나누어 구원을 판정하지 않습니다. 물론 각 종교 안에는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이 있으며, 특히 종교를 이용하여 사람의 양심을 지배하거나 자신에게 신적 권위를 돌리는 것은 매우 심각하게 비판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어떤 교회적 환경에서 태어났고 어떤 교리를 배웠다는 사실과,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며 어떻게 살았는가는 구별합니다. 그의 저서,‘천국과 지옥’에서 반복되는 중요한 원리도 결국 사람이 사후에 자기의 지배적 사랑에 따라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단순히 지상에서 가입했던 교파의 연장선이 아닙니다.

 

따라서 정동수 목사의 ‘가톨릭 신자는 교리를 그대로 믿으면 구원이 없다’는 식의 결론은 스베덴보리의 구원 이해와 상당히 다릅니다. 스베덴보리라면 먼저 그 사람이 알고 있는 진리가 무엇인지, 그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았는지,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보아야 한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은 교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는 사람을 선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교리는 구원의 목적이 아니라 삶을 인도하는 수단입니다. 교리적으로 많은 것을 정확히 알고 있으면서 자기애와 세상 사랑 속에서 사는 사람보다, 제한된 진리밖에 모르면서도 자신이 아는 진리에 따라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사람이 주님께 더 가까울 수 있습니다.

 

이 점을 먼저 세워 놓고 이동원 목사의 ‘하나님의 넓은 마음’이라는 표현을 보아야 합니다. 이 표현에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상당히 아름다운 진실이 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인간이 만든 교파의 울타리보다 훨씬 큽니다. 주님은 개신교라는 명칭 아래 있는 사람만 돌보시는 분이 아니며,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 합니다. 심지어 참된 종교에 관하여 거의 아무것도 알 기회가 없었던 사람에게도 그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선과 진리를 공급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의 교파적 마음보다 넓다’는 뜻이라면 그것은 스베덴보리에게 낯선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한 문장이 뒤따라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이 넓다는 것과 주님께서 진리와 거짓을 구별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입니다.’ 사랑은 진리를 폐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적 사랑은 신적 지혜와 영원히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교리를 동일하게 참이라고 선언하는 것이 ‘넓은 마음’은 아닙니다. 가톨릭과 개신교와 동방정교회 사이에 실제 교리적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정직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교황권, 성인에 대한 기도, 성찬 이해, 칭의, 교회론 등에 실제 차이가 있는데 ‘우리는 똑같으니 아무 차이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화해라기보다 진리 문제의 회피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떼제 공동체에서 서로 다른 전통의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기도한다는 사실 자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이 문제에서도 양극단을 피해야 합니다. ‘함께 기도했으니 모든 교리가 참이라고 인정한 것이다’라고 단정할 수도 없고, 반대로 ‘함께 기도했으니 아무 문제도 없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모임이 실제로 무엇을 고백하고 무엇을 지향하며, 참여자가 그 가운데서 무엇을 받아들이느냐입니다. 정동수 목사는 떼제를 ‘가짜들끼리 같이 모이는’ 곳이라고까지 표현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사람의 내적 상태를 이렇게 집단적으로 판정하는 데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외적 형식만 보고 그곳에 모인 수많은 사람의 영적 상태를 우리가 알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 강의에서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예레미야 24장의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과’입니다. 정동수 목사는 이동원 목사가 이 본문에서 ‘하나님의 넓은 마음’을 끌어낸 것을 ‘설교 왜곡’이라고 비판합니다.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바벨론으로 보내신 목적이 ‘넓은 마음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자가 먼저 하고 싶은 말을 정해 놓은 다음 성경 본문을 그것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설교 왜곡’이라고 정의합니다. 이 지적은 상당히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 역시 본문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는 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여기서 우리 자신에게도 똑같은 경고를 적용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라고 해서 어느 본문에든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집어넣어서는 안 됩니다. 먼저 문자의 뜻을 정직하게 읽어야 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 역사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본문의 직접적인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존중해야 합니다. 그 뒤에야 말씀의 속뜻을 살펴야 합니다. 속뜻은 문자적 의미를 무시하여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자 안에 주님께서 넣어 두신 더 깊은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24장에서 좋은 무화과는 바벨론으로 끌려간 포로들을, 나쁜 무화과는 남아 있거나 심판 아래 놓인 이들을 가리킵니다. 놀라운 것은 인간의 눈에는 정반대로 보였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포로가 된 사람들이 실패자이고 예루살렘에 남은 사람들이 살아남은 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포로로 끌려간 이들을 오히려 ‘좋은 무화과’라고 하십니다. 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징계를 통하여 보존하시고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만으로도 매우 깊은 영적 원리가 보입니다. 인간이 불행이라고 판단하는 사건이 반드시 영적 파멸은 아니며, 인간이 안전이라고 생각하는 상태가 반드시 영적 안전도 아닙니다.

 

그리고 여기서 ‘무화과’라는 표상은 스베덴보리의 성경 해석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말씀에서 무화과는 대체로 자연적 선, 곧 사람의 외적·자연적 삶에서 나타나는 선과 관련됩니다. 포도나무가 보다 영적인 선과 연결되고 올리브가 보다 천적인 선과 연결되는 것과 비교하면, 무화과는 인간의 자연적인 차원에서 나타나는 선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과의 대비는 단순히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라는 도덕적 구분보다 더 깊게, 사람의 자연적 삶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선하게 형성되었는가 아니면 부패했는가 하는 문제까지 열어 줍니다.

 

그렇게 보면 바벨론 포로라는 사건도 색다르게 보입니다. 포로 생활 자체가 선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유다의 오랜 우상숭배와 불순종으로 인한 심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심판 가운데서도 리메인스를 보존하십니다. 모든 것이 무너진 것처럼 보이는 가운데 다시 교회를 일으킬 수 있는 남은 것을 지키십니다. ‘좋은 무화과’는 바로 그런 보존과 회복의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의 악을 선이라고 부르지 않으면서도 그 악의 결과 가운데서 선을 끌어내십니다.

 

이 점에서는 이동원 목사가 고난을 통하여 더 넓은 시야를 배우는다는 방향으로 적용한 것이 본문의 문자에 직접 쓰여 있지는 않더라도, ‘고난을 통한 변화’라는 적용 자체를 곧바로 성경 왜곡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조금 더 살펴볼 여지가 있습니다. 설교에는 본문 해석과 오늘의 적용이라는 두 단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적용은 본문의 문장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적용이 본문의 중심 흐름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가, 아니면 본문을 발판으로 전혀 다른 주장을 하는가입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이동원 목사의 실제 설교 전체 문맥을 놓고 따져야 공정합니다. 이번 원고가 제시한 비판자의 설명만으로 그의 설교 전체를 최종 판정하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오히려 정동수 목사 자신에게도 동일한 기준을 적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본문에 없는 것을 가져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 설교 왜곡’이라고 매우 좋은 원칙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이후 예레미야에서 ‘하늘의 여왕’을 가져와 현대 가톨릭의 마리아 칭호와 직접 연결하고, 따라서 예레미야를 설교한다면 가톨릭의 마리아 숭배와 종교통합을 버리라고 설교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동일한 질문을 해야 합니다. 예레미야가 당시 말한 ‘하늘의 여왕’과 후대 가톨릭에서 마리아에게 사용된 ‘하늘의 여왕’이라는 칭호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두 대상을 곧바로 동일시할 수 있는가? 이것 역시 본문 밖의 역사적·신학적 연결을 사용한 ‘적용’입니다.

 

이것은 정동수 목사의 결론이 반드시 틀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해석의 일관성입니다. 이동원 목사가 본문에서 현대 교회의 화해를 적용하는 것은 ‘본문에 없는 것을 넣은 ’이라 비판하면서, 자신은 같은 예레미야에서 현대 가톨릭의 마리아론을 끌어오는 것이 자동적으로 허용된다면 해석 기준이 비대칭적이 됩니다. 설교자를 분별하는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는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해석 원칙을 자기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하는지 보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매우 유익한 제3의 길을 제공합니다. 역사적 문맥은 역사적 문맥대로 존중하면서, 그 안에 있는 영적 의미는 인간의 자의적인 연상으로 찾지 않고 말씀 전체의 상응을 통해 살펴보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하늘의 여왕’을 단순히 2천여 년 뒤 특정 교단의 명칭으로 바로 점프시키는 것보다, 우상숭배가 인간 내면에서 무엇인지 먼저 묻는 것입니다. 사람이 주님에게 속해야 할 사랑과 경배를 자기 자신이나 세상의 어떤 대상에게 돌릴 때 무엇이 일어나는가? 이것이 모든 시대의 사람에게 적용되는 속뜻의 질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번 강의에서 계속 등장하는 ‘배도’ 역시 단순히 교단 이동이나 에큐메니즘 참여보다 훨씬 깊은 문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가장 심각한 배도는 입으로 주님을 고백하면서 삶에서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교리가 아무리 정통이어도 체어리티가 죽어 있으면 신앙도 살아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천국의 비밀’에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해 반복해서 나타나는 원리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자기가 주인 노릇을 하기 시작하면 결국 아벨, 곧 체어리티를 죽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복음’을 경계하는 사람은 동시에 ‘나는 올바른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확신 때문에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있지는 않은가?’도 물어야 합니다.

 

이것은 이번 강의의 언어를 돌아보게 합니다. ‘가짜 목사’, ‘쓰레기’, ‘마귀가 만든 ’, ‘가짜들끼리 모인다’, ‘침례교의 침자도 모르는 사람’ 같은 표현이 반복됩니다. 교리적 오류를 강하게 비판하는 것과 사람을 멸시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진리를 위한 열심도 그 안의 정서에 따라 전혀 다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선에서 나오는 열심은 진리를 보호하면서도 사람의 구원을 원합니다. 자기애에서 나오는 열심은 진리를 방패 삼아 상대를 공격하고 이기는 데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둘 다 매우 강한 말을 할 수 있지만 속의 불은 서로 다릅니다.

 

그렇다고 ‘사랑해야 하므로 오류를 지적하지 말자’는 뜻도 아닙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를 오해하는 것입니다. 체어리티는 무조건 상대의 말을 인정하는 온순함이 아닙니다. 악을 악이라고 하고 거짓을 거짓이라고 하는 것도 이웃 사랑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어떤 가르침이 사람을 영적으로 해친다면 그것을 밝히는 것이 오히려 체어리티일 수 있습니다. 다만 목적이 중요합니다. ‘ 사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거짓에서 벗어나 선과 진리 안으로 들어오도록 하기 위해서’여야 합니다. 이것이 논쟁에서 가장 어려운 지점입니다.

 

이제 관상기도 문제를 보겠습니다. 강사는 관상기도, 침묵기도, 향심기도, 호흡기도 등을 거의 하나의 범주로 묶고, 불교·힌두교의 명상 및 만트라와 연결합니다. 반복적인 말을 계속하면 이성적 사고가 정지되고 의식을 잃게 되며, 수동적인 상태가 되어 외부 영적 존재에게 열리고 결국 ‘마귀가 들어온다’고 설명합니다. 촛불을 바라보거나 호흡을 조절하는 것 역시 같은 위험의 통로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서는 매우 세심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영계와 실제로 연결되어 있다고 가르칩니다. 인간은 혼자 생각하고 느끼는 독립된 섬이 아니라 영들과 천사들을 통해 영계와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영적 영향’이라는 개념 자체를 스베덴보리에게 낯선 것으로 취급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 부분만 보면 강사의 경계심이 스베덴보리와 접점을 갖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평상시에도 영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정 기도법을 사용해야 비로소 영이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섭리 아래 인간이 자유와 이성 안에서 보존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촛불을 켰다는 사실, 몇 분 침묵했다는 사실, 짧은 기도문을 반복했다는 사실만으로 ‘마귀가 들어오는 통로가 열렸다’고 단정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와도 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정말 중요한 경계선은 ‘자유와 이성을 훼손하는가’입니다. 사람을 무비판적 수동성으로 몰아가고, 자신의 이성을 내려놓게 하고, 어떤 내적 음성이나 느낌을 곧바로 하나님의 직접 계시라고 믿게 만드는 수행이라면 분명 위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파괴하여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이해하고 자유롭게 선택하여 그것을 삶으로 행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이 점에서는 강사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데 중요한 진실이 있습니다.

 

하지만 ‘침묵’ 자체는 악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고 잠시 침묵하면서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것 역시 그 자체로 비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문제는 그 침묵 속에서 무엇을 하는가입니다. 자기 생각을 완전히 제거하여 무의식 상태로 들어가려 하는 것과, 방금 읽은 말씀을 주님 앞에서 조용히 되새기며 자신을 살피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외형은 둘 다 조용히 앉아 있는 모습일 수 있지만 내적 활동은 정반대일 수 있습니다.

 

반복기도도 같은 구별이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헛된 반복’을 경계하신 것은 분명 중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반복이 곧 ‘헛된 반복’은 아닙니다. 같은 시편을 반복해서 읽는 것,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진심으로 여러 번 기도하는 것, 찬송의 후렴을 반복하는 것을 그 자체만으로 힌두교 만트라와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핵심은 말의 횟수보다 그 말 안에 있는 의도와 의식입니다. 의미를 제거하고 의식을 변형시키기 위한 기계적 반복과, 마음을 주님께 돌리며 의미를 더욱 깊이 새기는 반복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의도’와 ‘목적’에 관한 가르침으로 보면 더욱 분명합니다. 같은 외적 행위라도 목적이 다르면 영적으로 전혀 다른 행위가 됩니다. 한 사람은 침묵 속에서 자기 안의 신성을 발견하려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침묵 속에서 주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낮출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반복을 통해 의식을 지우려 하고, 다른 사람은 같은 말씀을 반복하며 그 의미를 마음에 새길 수 있습니다. 외적 형식만으로 내적 상태를 판정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떼제 찬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음악의 구조가 단순하고 짧은 문장을 반복한다고 해서 그 구조 자체가 곧 악령을 불러들이는 장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아름답고 평화로운 음악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영적으로 선한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것입니다. ‘ 찬양이 사람의 애정을 어디로 이끄는가? 주님을 향한 겸손과 사랑으로 이끄는가, 아니면 자기 감정의 황홀경 자체를 사랑하게 하는가? 그리고 정서가 이후의 삶에서 체어리티로 이어지는가?

 

이 기준은 통성기도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조용한 기도만 위험하고 큰소리 기도는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큰소리로 열정적으로 기도하면서도 자기 감정에 도취될 수 있고, 조용히 침묵하면서도 깊은 회개 가운데 주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외적인 기도 형식보다 그 안에 있는 사랑과 신앙이 본질입니다.

 

강의에서 ‘설교 없는 예배’에 대한 비판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로마서 10장의 ‘신앙은 들음에서 난다’를 근거로 말씀 선포가 반드시 있어야 하며, 성경을 읽고 5~10분 침묵하는 것을 ‘설교’라고 부르는 것은 성경적 설교관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문제에서도 말씀을 가르치는 직무의 중요성은 충분히 인정해야 합니다. 사람은 진리를 배워야 하고,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 채 감정적 체험만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말씀 자체는 인간 설교자의 설명보다 더 근원적인 거룩함을 지닙니다. 설교자는 말씀의 주인이 아니라 봉사자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봉독한 뒤 잠시 조용히 그 말씀을 생각하는 시간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말씀 선포를 폐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설교가 있느냐 없느냐보다 ‘사람이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도록 인도받고 있는가’입니다. 훌륭한 설교도 사람을 자기 숭배로 이끌 수 있고, 짧은 말씀 봉독 하나가 사람의 삶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대목은 역설적으로 이번 강의 자체에도 적용됩니다. 강사는 성도들에게 ‘유명한 목사가 말한다고 무조건 아멘하지 말라’고 거듭 강조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원칙은 이동원 목사에게만 적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강의를 하는 강사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해야 합니다. ‘이동원 목사가 유명하다고 믿지 말라’가 옳다면 ‘이동원 목사를 비판하는 유명한 목사가 말한다고 그대로 믿지도 말라’ 역시 옳습니다. 모든 주장을 말씀과 사실과 이성 앞에서 살펴야 합니다.

 

이것이 이번 강의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분별의 원칙입니다. ‘누가 말했는가?’보다 ‘무엇을 말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말했는가?’보다 ‘ 말이 참인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생각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말씀 전체를 어떻게 연결하고 주님과 천국과 인간의 거듭남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유진 피터슨을 다루는 부분에서도 이러한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강사는 유진 피터슨을 ‘신비주의자’, ‘이단’이라고 규정하고 ‘메시지’를 ‘쓰레기’라고까지 표현합니다. 여기서는 한 사람의 저작과 신학 전체를 특정 연관관계 몇 가지로 한꺼번에 판정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저자의 특정 주장에 문제가 있다면 그 주장을 구체적으로 살피면 됩니다. 리처드 포스터나 댈러스 윌라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 사람과 관계가 있으므로 사람도 잘못되었다’는 연쇄적인 방식보다 각각의 가르침을 실제 내용에 따라 검토하는 편이 더 공정합니다.

 

특히 ‘누구 이름이 나오면 가지 말라’는 방식의 분별은 성도들에게 단기적으로는 편리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분별력을 약화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이름 목록만 외우면 되기 때문입니다. 참된 분별은 ‘ 사람은 금지된 사람인가?’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 가르침은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존중하는가, 주님께로 향하게 하는가, 말씀의 진리와 조화를 이루는가, 체어리티의 삶으로 열매 맺게 하는가’를 판단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번 강의에서 가장 민감한 문제인 가톨릭과 구원의 문제로 돌아가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로마 가톨릭의 교황권과 성인 숭배, 인간에게 신적 권위를 돌리는 문제를 결코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밝히기’에서 바벨론에 관한 해설을 읽어 보면 그 비판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종교를 이용하여 사람의 영혼과 천국에 대한 권세를 자기에게 돌리는 사랑을 심각한 악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는 포용적이니까 가톨릭 교리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보았다’고 말한다면 그것 역시 큰 오해입니다.

 

그러나 그 비판은 ‘가톨릭 신자는 모두 지옥 간다’는 결론과 전혀 같지 않습니다. 교리 체계의 오류를 비판하는 것과 그 안에 태어나 살아온 개개인의 영원한 운명을 판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놀라울 정도로 섬세한 부분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알지 못했던 진리에 대해 같은 방식으로 책임지지 않습니다. 주님은 각 사람이 받은 빛과 기회 안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십니다.

 

이것은 동방정교회뿐 아니라 불교, 이슬람교 등 기독교 밖의 사람들을 바라볼 때도 적용됩니다. ‘천국과 지옥’에서 스베덴보리는 교회 밖의 민족들, 곧 이방인들의 구원 가능성을 분명히 다룹니다. 그들이 기독교인이 아니었다는 이유만으로 정죄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종교 안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선한 삶을 살며 양심에 따라 행동했다면 사후에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번 강의 마지막의 ‘구원은 기독교 안에만 있다’는 문장은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중요한 수정이 필요합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만 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도 단호합니다. 그러나 ‘오직 주님을 통해 구원받는다’와 ‘지상에서 특정한 기독교 교리 체계에 소속된 사람만 구원받는다’는 같은 문장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지상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 기회를 얻지 못했더라도 그가 받아들인 선과 진리의 근원은 궁극적으로 주님입니다. 그리고 사후에 그 근원이 누구인지를 배우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구원론은 놀랍도록 넓으면서 동시에 철저하게 주님 중심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넓은 마음’이라는 이번 논쟁의 표현이 다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됩니다. 주님의 마음은 정말 넓습니다. 그러나 ‘아무거나 괜찮다’는 의미에서 넓은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선과 진리 안으로 인도하시려 하기 때문에 넓습니다. 불교인도, 무슬림도, 가톨릭 신자도, 개신교 신자도 사랑하시지만 그들 안에 있는 모든 거짓을 사랑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사랑하시되 거짓에서는 건져 내시고, 선을 보존하시며, 더 온전한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에큐메니즘과 잘못된 종교통합도 구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교리 차이는 아무 의미가 없으니 모두 똑같다’고 하는 것은 진리를 희생한 통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다른 교리를 가지고 있지만 상대를 악마화하지 않고, 함께 대화하면서 무엇이 참인지 찾고, 가능한 선에서는 협력하며, 최종적인 심판은 주님께 맡긴다’는 태도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는 후자와 훨씬 가깝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번 강의의 장점과 한계를 동시에 볼 수 있습니다. 장점은 매우 분명합니다. 교회의 화해와 포용이라는 아름다운 말이 진리의 문제를 덮는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 설교자가 본문을 자기 주장에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 유명한 목사의 말도 성도가 분별해야 한다는 경고, 감정적·신비적 체험이 말씀의 진리를 대신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는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고가 지나치게 확대되면서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침묵을 곧 관상기도로, 관상기도를 곧 동양 종교의 명상으로, 반복 찬양을 곧 만트라로, 만트라적 반복을 곧 의식 상실로, 의식의 이완을 곧 마귀의 침입으로 연결하는 일련의 논증에는 단계마다 별도의 검증이 필요합니다. 또한 떼제에 참여한 사람들을 ‘가짜’로 묶고,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의 사람들에게 구원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분별’에서 ‘심판’으로 넘어갈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보여 주는 영적 세계는 오히려 우리에게 더 큰 경외심과 신중함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겉모습은 볼 수 있지만 그 사람의 내적 사랑 전체를 볼 수 없습니다. 누가 천국에 속했고 누가 지옥에 속했는지는 주님께서 아십니다. 우리는 교리를 살필 수 있고 행동의 선악을 판단할 수 있으며 위험한 가르침을 경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영혼 자체를 최종적으로 판결하는 자리에 앉아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사용하는 우리 자신에게도 매우 중요한 경고입니다. 스베덴보리를 읽다 보면 기존 기독교의 여러 교리가 얼마나 다르게 보이는지 경험하게 됩니다. 삼위일체, 믿음만의 구원, 속죄, 부활, 천국과 지옥, 최후의 심판, 말씀의 속뜻 등 거의 모든 핵심 주제가 새롭게 보입니다. 바로 그때 가장 조심해야 할 유혹이 ‘나는 이제 알았고 저들은 모른다’는 우월감입니다. 그것이 들어오는 순간 진리를 많이 아는 것이 오히려 proprium의 먹이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진리를 보여 주시는 목적은 다른 사람을 정죄할 자격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먼저 우리 자신을 고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물어야 할 것은 ‘ 사람이 틀렸는가?’가 아니라 ‘ 말씀이 안에서 무엇을 드러내는가?’입니다. 예레미야 24장의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과도 결국 내 안의 문제입니다. 내 자연적 삶 안에서 주님께 순종하는 선은 무엇이며, 이미 부패하여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내가 붙들고 있는 예루살렘은 정말 주님의 도성인가, 아니면 내가 안전하다고 착각하는 proprium의 성인가? 때로는 내가 실패라고 생각하는 ‘바벨론 포로’ 같은 경험을 통해 주님께서 오히려 내 안의 리메인스를 보존하고 계시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읽기 시작하면 ‘좋은 무화과 광주의 소망’이라는 본문은 특정 목사의 에큐메니즘을 공격하기 위한 무기가 되기 전에 우리 자신의 거듭남을 비추는 말씀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속뜻을 열어 보이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말씀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판정하는 책이기 전에 나를 심판하고 고치고 거듭나게 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결국 이번 강의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보며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넓은 마음이냐, 진리 수호냐’라는 양자택일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서는 사랑과 진리가 결코 싸우지 않습니다. 신적 사랑은 신적 지혜와 하나이며, 선은 진리와 결혼해야 합니다. 진리를 버린 사랑은 참된 사랑이 아니고, 사랑을 잃은 진리는 살아 있는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리적 차이를 분명하게 말하면서도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잘못된 영성을 경계하면서도 침묵과 묵상 자체를 악마화하지 않아야 합니다. 가톨릭의 교리적 문제를 비판하면서도 가톨릭 신자의 영혼을 우리가 대신 심판하지 않아야 합니다. 에큐메니즘의 위험을 살피면서도 다른 전통의 그리스도인을 만나는 것 자체를 배도로 규정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유명한 목사의 설교를 분별하라고 가르치면서 그 목사를 비판하는 또 다른 유명한 목사의 말 역시 똑같은 기준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넓은 마음’이라는 말을 가장 안전하게 이해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그 넓음은 진리를 희석시키는 넓음이 아니라, 진리를 가지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사랑의 넓음입니다. 주님은 거짓을 참이라고 부르실 만큼 넓으신 분이 아니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까지 버리지 않고 참으로 이끄실 만큼 넓으신 분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분별도 바로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붙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리에는 경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자비에는 우리가 함부로 그을 있는 경계가 없습니다.’ 이 둘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잃으면 한쪽에서는 무차별적인 종교혼합으로 흐르고, 다른 한쪽에서는 교리적 정죄와 영적 우월감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한 시간의 강의를 다 듣고 난 뒤 우리에게 남아야 할 질문은 ‘이동원 목사는 배도한 목사인가?’ 하나만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어야 합니다. ‘나는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거짓을 경계하는가, 아니면 내가 옳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오류를 찾고 있는가?’ 그리고 또 하나, ‘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진리의 차이를 흐리고 있는가, 아니면 진리를 사랑하면서도 진리가 궁극적으로 사람을 살리기 위한 주님의 것임을 기억하고 있는가?

 

이 두 질문 사이에서 선과 진리, 체어리티와 신앙이 하나가 될 때, 우리는 비로소 ‘넓지만 흐리지 않고, 분명하지만 정죄하지 않는’ 분별에 조금씩 가까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이번 논쟁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보면서 제가 가장 중요하게 붙들고 싶은 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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