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2026/10/11)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7, ‘사랑의 하나님’, 찬130, ‘찬란한 주의 영광은’입니다.

 

오늘은 창5 절별 주석 그 첫 번째, 1절로 5절, AC 글 번호로는 469번에서 495번입니다. 먼저 창세기 본문입니다.

 

 

1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1-5)

 

 

제목은

 

하나님의 형상에서 모양으로, 그리고 시작된 변화

 

 

이며, 다음은 ‘3분 요약’입니다. 이 요약은 새로 오신 분들, 그리고 그동안 함께해오신 분들 모두를 위한, 지난 2월부터 시작한 이 특별한 주일예배를 위한, 그 흐름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시간입니다.

 

오늘 리딩에 들어가기 전에 지금까지의 큰 흐름을 잠깐 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 그러니까 겉 글자의 뜻을 존중하면서,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천국의 비밀, 창, 출 속뜻 주석)를 따라 그 속뜻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창1에서는 천지창조를 거듭남의 과정으로, 창2에서는 에덴동산을 천적 상태로, 창3에서는 사람이 주님보다 자기 감각과 proprium을 따르면서 그 질서가 무너지는 과정으로 읽었습니다.

 

창4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냈으며,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서 아벨이 죽임을 당하고 그 계열은 라멕에 이르러 황폐해졌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가인의 표’를 통해 신앙을 보존하시고, 마침내 셋과 에노스를 통하여 신앙이 다시 체어리티와 결합되고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가 시작되게 하셨습니다. 인간의 황폐보다 주님의 섭리와 회복이 더 깊다는 것이 창4의 마지막 메시지였습니다.

 

오늘부터는 창5로 들어갑니다. 창5는 겉으로는 아담에서 노아까지 이어지는 족보이지만, 속뜻으로는 태고교회로부터 여러 교회가 어떻게 이어지고 변화되어 갔는지를 보여 줍니다. 오늘 첫 다섯 절에서는 그 출발점인 태고교회의 본래 모습을 먼저 살펴봅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영적으로 창조하시고 천적으로 만드시며, 신앙과 사랑을 하나로 결합하셨을 때 비로소 그들을 ‘사람’이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셋에 이르면서 아주 미세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셋 교회에서도 신앙은 여전히 사랑과 결합되어 있었지만, 태고교회에서처럼 ‘사랑이 그만큼 주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창5의 ‘날과 해’는 교회의 여러 상태를, ‘아들들과 딸들’은 그 안에서 생겨나는 진리와 선을 나타냅니다. 마침내 ‘죽었더라’는 말씀은 태고교회의 고유한 생명이었던 ‘퍼셉션’, 곧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알아차리던 상태가 점차 사라져 갔음을 보여 줍니다.

 

오늘은 이것을 마음에 두고 읽겠습니다. ‘교회의 생명은 신앙이 사랑과 어떤 관계를 이루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나왔고, 그 둘이 하나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 질서에 작은 변화가 시작되면서 교회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오늘은 창5의 첫 리딩을 통해 주님께서 이루신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와, 그 질서 안에서 시작되는 변화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다음은 오늘 리딩 범위인 AC.469-495 요약입니다. 그전에 오늘부터는 그동안 창 각 장 앞뒤로 소개하던 ‘영계 체험’ 및 각 장이나 단락의 ‘개요’는 생략, 바로 각 장 본문으로 들어가기로 하였습니다만, 그러나 이 첫 요약에서만큼은 그 내용 역시 요약 버전으로 조금 언급하는 것이 그 연결성 면에서 적절할 것 같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AC.449-468을 리딩하시면 되겠습니다.

 

창세기 5장은 ‘아담 자손의 계보’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겉으로 보면 아담에서 노아까지 이어지는 사람들의 이름과 나이, 그리고 죽음이 반복되는 족보입니다. 그러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이 장을 단순히 오래전 사람들의 혈통을 기록한 족보로만 읽지 않습니다. 그 속뜻에서는 태고교회로부터 여러 교회가 어떻게 이어지고, 그 내적 상태가 어떻게 변화되어 마침내 노아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교회의 영적 역사’로 읽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5장 본문을 해설하기에 앞서, AC.449-459에서는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한 영계 경험을 먼저 소개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5장의 각 절을 직접 풀이하는 부분은 아니지만, 이어질 태고교회와 그 후대 교회들의 상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사람들은 흔히 천국을 세상에서 경험하는 가장 좋은 것들이 끝없이 계속되는 곳으로 생각합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 부족한 것 없이 풍요롭게 사는 것, 찬란한 빛 가운데 있는 것, 아무런 수고 없이 평안히 쉬는 것, 혹은 영원히 주님을 찬양하는 것 등을 천국의 행복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만난 영들은 그러한 생각만으로는 천국의 참된 기쁨을 알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먼저 어떤 ‘장소’가 아니라, 사람 안에 형성된 사랑과 체어리티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AC.450은 천국을 높은 곳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관념을 다룹니다. 세상에서는 높은 자리에 오르고 다른 사람보다 위에 서는 것이 행복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려는 욕망 자체가 천국의 질서와 반대됩니다. 천국의 기쁨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의 행복을 기뻐하고 그 행복을 위하여 섬기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체어리티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AC.452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천국에서 ‘큰 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을 높이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행복을 원하며 그들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다만 그 섬김 역시 자신이 인정받거나 보상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 자체에서 나와야 합니다. 여기서 천국의 기쁨이 무엇인지가 드러납니다. 천국의 기쁨은 자기 자신을 위한 만족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이웃을 향하여 흘러가는 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AC.454는 천사들의 삶을 ‘쓰임’과 연결합니다. 천사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영원히 평안만 누리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새로 영계에 들어온 영들을 가르치고, 사람들을 섬기며, 악한 영들의 영향을 억제하고, 사람들에게 선한 것을 불어넣으며, 이 세상을 떠난 영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일으키고, 준비된 영들을 천국으로 인도합니다. 천사들의 행복은 이러한 쓰임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쓰임 안에서, 쓰임으로부터, 그리고 쓰임에 따라 행복을 누립니다.

 

찬란한 빛을 보는 것만으로도 천국의 행복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놀라운 외적인 광경이라도 그것만 계속된다면 결국 익숙해집니다. 주님을 찬양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의 삶은 끝없이 입술로 찬양만 하는 삶이 아닙니다. 참된 찬양은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에서 나오는 결과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단지 입술의 찬양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사랑이 실제로 이웃을 향한 선과 쓰임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천국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양성이 있습니다. 모든 천사가 똑같이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수많은 천국 사회가 있고, 그 안에서도 각자의 사랑과 신앙에 따라 무수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모든 다양성은 하나를 이룹니다. 그 하나 됨의 근원은 ‘오직 주님’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서로 다른 존재들을 조화롭게 연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하나 됨은 모두가 똑같아지는 획일성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들이 주님 안에서 사랑으로 조화를 이루는 하나 됨입니다.

 

AC.459에서는 이러한 천국의 질서를 ‘천적’과 ‘영적’이라는 구분으로 마무리합니다. 천적인 존재는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신앙을 받으며, 영적인 존재는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받습니다. 이 차이는 이제 창세기 5장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5장의 출발점인 태고교회는 바로 ‘천적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먼저 사랑이 있었고, 그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나왔습니다. 진리를 먼저 배운 뒤 그것을 사랑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 안에서 무엇이 참인지 알았습니다.

 

이러한 배경 위에서 AC.460-468은 창세기 5장 전체의 지도를 먼저 보여 줍니다. 창세기 5장의 족보는 속뜻에서 태고교회로부터 홍수에 이르기까지 여러 교회가 차례로 이어지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사람’, 곧 아담은 천적 교회였던 태고교회 자체를 나타내고, 셋은 그 뒤를 잇는 두 번째 교회, 에노스에서 므두셀라까지는 그 뒤를 이어 나타나는 여러 교회를 나타냅니다. 라멕은 아홉 번째 교회이며, 노아는 열 번째 교회로서 홍수 이후의 새로운 교회로 이어지는 출발점이 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이름들을 속뜻에서 읽을 때 중요한 것은 각각의 인물을 단순히 개인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나타내는 ‘교회의 상태’를 보는 것입니다. 각 교회는 앞선 교회로부터 무엇인가를 이어받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았습니다. 특별히 그 차이는 ‘퍼셉션’의 차이에서 나타났습니다. 태고교회가 지녔던 퍼셉션이 후대의 교회들로 이어지면서 조금씩 달라지고 약해졌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에녹은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알아차리는 퍼셉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모든 것을 교리로 정리하여 배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퍼셉션이 점차 사라질 것을 대비하여, 태고교회에서 받은 계시와 퍼셉션을 교리의 형태로 모아 보존하는 일이 필요해졌습니다. 이것을 나타내는 교회가 에녹입니다. 당시에는 아직 그 교리가 크게 필요하지 않았지만, 훗날을 위하여 보존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는 말씀도 이러한 보존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마침내 노아에 이르게 됩니다. 태고교회의 고유한 퍼셉션은 거의 사라졌지만 모든 것이 완전히 없어져 버린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셨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5장의 마지막에서 노아로 이어지는 중요한 의미이며, 여기서 ‘리메인스’라는 주제가 나타납니다. 주님께서는 교회가 쇠퇴하는 가운데서도 다음 교회를 위하여 필요한 선과 진리를 남겨 두십니다. 한 사람의 거듭남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살아오면서 주님께 받은 선과 진리, 순진함과 체어리티의 상태들을 주님께서 보존하시고, 훗날 거듭남을 위하여 사용하십니다.

 

따라서 창세기 5장 전체에는 두 흐름이 함께 있습니다. 하나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점차 쇠퇴하는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그 쇠퇴 속에서도 주님께서 필요한 것을 보존하시며 다음 교회를 준비하시는 흐름입니다. 인간의 상태만 보면 점점 내려가는 역사처럼 보이지만, 주님의 섭리에서 보면 그 안에서도 끊임없이 보존과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실제 본문인 창세기 5장 1절에서 5절, AC.469-495로 들어갑니다. 첫 말씀은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입니다. AC.469는 여기서 ‘계보를 적은 책’이 태고교회에 속했던 교회들을 열거하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나오는 이름과 숫자를 단순한 족보의 정보로만 읽지 않고,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지는 교회의 여러 상태를 나타내는 말씀으로 읽게 됩니다.

 

이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라고 합니다. 여기서 ‘창조하다’와 ‘만들다’는 비슷해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AC.472에 따르면 ‘창조하다’는 사람이 새롭게 창조되어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 곧 거듭나는 것을 뜻합니다. 반면 ‘만들다’는 그 사람이 더욱 완전해져 천적인 사람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우리가 이미 살펴본 거듭남의 질서와 연결됩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완성된 천적 존재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면서 먼저 영적인 사람이 되게 하시고, 더 나아가 천적인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영적인 사람은 주님의 ‘형상’이고, 천적인 사람은 주님의 ‘모양’입니다. 형상에서 모양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더 많은 진리를 알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알고 믿는 진리가 사랑 안으로 들어가고, 마침내 사랑으로부터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에게는 아직 신앙이 먼저 보입니다. 진리를 배우고, 그것이 옳기 때문에 믿으며, 그 진리를 따라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천적인 사람에게서는 사랑이 먼저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이 참인지 알고, 그 사랑에서 신앙이 나옵니다. 이것이 태고교회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신앙과 사랑은 서로 떨어진 두 가지가 아니라, 사랑 안에 신앙이 살아 있는 하나의 생명이었습니다.

 

그래서 AC.473은 ‘하나님의 모양’을 천적인 사람과 연결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영적인 사람과 연결합니다. 형상은 모양으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에게 진리를 주시는 목적도 단지 많은 것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진리를 통하여 사람의 의지와 삶이 변화되고, 마침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 안에서 살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어 2절에서는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고 합니다. 여기서 ‘남자’와 ‘여자’ 역시 단순히 성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AC.475-476에 따르면 ‘남자’는 이해와 신앙을, ‘여자’는 의지와 사랑을 나타냅니다.

 

사람이 아직 영적인 상태에 있을 때에는 이해와 신앙이 앞서고 의지와 사랑이 뒤따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어 천적인 상태에 이르면 신앙과 사랑, 이해와 의지가 하나의 결혼을 이룹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다’고 합니다. 신앙만 따로 있어도 온전한 사람이 아니고, 사랑을 말하면서 진리를 떠나 있어도 온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와 선, 신앙과 사랑, 이해와 의지가 하나를 이룰 때 비로소 속뜻에서의 ‘사람’이 됩니다.

 

여기서 ‘사람’이라는 말은 매우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가장 높은 의미에서 오직 주님만이 참으로 ‘사람’이십니다. 교회가 ‘사람’이라 불릴 수 있는 것도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 주님의 모양과 형상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참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를 받아 그것들이 자기 안에서 하나를 이룰 때 참된 의미에서 사람이 되어 갑니다.

 

그러므로 ‘아담’이라는 이름 역시 이 속뜻에서는 한 남성 개인만을 가리키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AC.478-479는 ‘아담’이 ‘사람’을 뜻하며, 여기서는 특별히 태고교회를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다’는 표현 자체가 남자와 여자 모두를 함께 ‘사람’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본문의 중심이 한 개인의 전기가 아니라, 신앙과 사랑이 결합되어 하나를 이루었던 교회의 상태임을 보여 줍니다.

 

AC.480은 ‘그들이 창조되던 날’이라는 표현도 설명합니다. 여기서 ‘날’은 단순한 24시간의 하루가 아니라 하나의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창세기 1장의 여섯째 날 끝에서 사람은 ‘사람’이 되고, 이어지는 일곱째 날, 곧 안식일의 상태에서 천적인 사람이 됩니다. 결국 창세기 5장의 첫 두 절은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다루었던 거듭남의 전체 과정을 아주 압축된 형태로 다시 보여 주고 있는 셈입니다.

 

이제 3절에서 새로운 변화가 시작됩니다.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라고 합니다. 여기서 ‘백삼십 년’은 단순히 세속적인 시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교회가 일어나기까지의 하나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교회가 ‘셋’입니다.

 

셋 교회는 태고교회와 전혀 다른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AC.484는 셋 교회가 태고교회와 ‘매우 비슷했다’고 설명합니다. 신앙도 여전히 사랑과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아주 중요한 차이가 하나 나타납니다. ‘사랑이 그만큼 주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겉으로 보면 매우 작아 보입니다. 신앙과 사랑이 아직 분리된 것도 아니고, 사랑이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가장 본래적인 질서에서는 사랑이 모든 것의 중심이었고 신앙은 그 사랑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셋 교회에서도 둘은 여전히 결합되어 있지만, 사랑의 중심성이 이전과 완전히 같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교회의 상태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이 점은 창세기 4장에서 보았던 셋과도 구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름은 같지만 속뜻에서 언제나 같은 교회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AC.485는 창세기 5장의 셋 교회가 창세기 4장 25절의 셋과는 다른 교회라고 분명히 설명합니다. 같은 이름이 사용되더라도 문맥과 계열에 따라 서로 다른 교리와 교회의 상태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4절에서는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라고 합니다. 여기서부터 창세기 5장을 읽을 때 반복해서 만나게 될 중요한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바로 ‘날’, ‘해’,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입니다.

 

AC.482와 AC.486 이하에서는 이러한 ‘해’와 숫자들이 교회의 상태를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시간은 상태와 연결됩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몇 년 동안 지속되었는지를 생각하지만, 천사들은 말씀의 속뜻에서 그러한 시간보다 그 기간이 나타내는 영적 상태와 그 변화를 지각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5장의 긴 수명과 숫자들은 단순한 연대 계산을 넘어, 각 교회가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를 담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문자적 의미의 역사성을 단순히 지워 버린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가 여기서 집중하는 것은 말씀의 속뜻입니다. 속뜻에서 천사들은 세상의 시간과 숫자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들이 나타내는 상태를 지각합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이 장을 읽으면서 ‘몇 년을 살았는가?’만이 아니라 ‘그 숫자를 통하여 어떤 교회의 상태가 표현되고 있는가?’를 보게 됩니다.

 

‘아들들과 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AC.489-491에서 ‘아들들’은 진리를, ‘딸들’은 선을 나타냅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교회가 살아 있으면 그 안에서 무엇인가가 태어납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신앙과 사랑이 결합되어 있으면 그 결합으로부터 새로운 진리와 선이 생겨납니다.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그 진리가 삶에서 선한 행위와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영적인 의미에서 ‘아들들과 딸들을 낳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들과 딸들의 상태는 그들을 낳는 교회의 상태와 관계됩니다. 교회가 어떠한가에 따라 그 교회가 받아들이고 산출하는 진리와 선도 달라집니다. 사랑이 중심에 있는 교회가 받아들이는 진리와, 자기 자신이나 세상을 중심에 둔 교회가 받아들이는 진리는 겉으로 같은 말처럼 보여도 그 내적인 생명은 다를 수 있습니다. 진리의 생명은 그것이 어떤 사랑에서 나오는가와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개인의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같은 성경 말씀을 알고 같은 교리를 고백하더라도, 그것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려는 마음에서 받아들여지는지 아니면 자신을 높이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위하여 사용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열매를 낳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진리를 많이 가지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그 진리가 어떤 사랑과 결합되어 있으며 어떤 선을 낳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침내 5절은 ‘그는 죽었더라’는 말로 끝납니다. 창세기 5장에서는 앞으로 이 표현이 계속 반복됩니다. 문자적으로는 한 사람의 생애가 끝났다는 뜻이지만, AC.492 이하에서는 이것을 교회의 내적 상태와 관련하여 설명합니다. 여기서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태고교회가 가지고 있던 것과 같은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독특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퍼셉션’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머리가 좋아서 진리를 빨리 이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AC.495에 따르면 퍼셉션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참인지를 ‘주님으로부터’ 지각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주님을 향한 사랑의 선과 그분을 향한 신앙의 진리를 주님으로부터 내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가 어떤 문제를 놓고 먼저 교리를 찾아보고 논리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선과 진리를 지각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사랑과 신앙이 깊이 하나 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랑으로부터 무엇이 참인지 지각하는 내적인 능력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천적 교회의 고유한 퍼셉션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대를 거치면서 이러한 퍼셉션은 점차 쇠퇴합니다. AC.494는 그 배경에서 유전적인 악을 다룹니다. 인간의 실제적인 악이 계속되면서 그것이 후대에 영향을 미치고, 인간의 내적 상태는 점점 더 이전의 순수한 상태에서 멀어집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아담 한 사람의 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악해졌다’는 식으로만 이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이 실제로 선택하고 행하는 악이 쌓이고 이어지면서 유전적인 악의 경향도 더욱 강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AC.494는 여기서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유전적인 악이 있다고 해서 인간이 거듭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심으로 그 악을 억제하고 약화시키십니다. 사람 자신의 힘으로 악의 뿌리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보존하신 선과 진리를 통하여 그를 새롭게 하십니다. 이것은 앞서 창세기 5장 전체 개요에서 살펴본 ‘리메인스’와도 연결됩니다.

 

이렇게 보면 이번 주에 읽는 모든 내용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먼저 천국의 참된 기쁨은 자기 자신을 위한 행복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체어리티가 이웃을 위한 쓰임이 되는 데 있음을 보았습니다. 천국의 모든 다양성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서 하나를 이룹니다. 그리고 천적인 존재에게서는 바로 그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나옵니다.

 

그러한 천적 질서를 지상에서 가장 온전히 나타냈던 교회가 태고교회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영적으로 창조하시고, 더 나아가 천적인 사람으로 완성해 가십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에서 ‘하나님의 모양’으로 나아가며, 그 과정에서 신앙과 사랑, 이해와 의지가 하나를 이룹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함께 ‘사람’이라 부르셨습니다. 참된 사람은 진리만 가진 사람도 아니고 사랑만 말하는 사람도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진리와 선, 신앙과 사랑이 하나의 생명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결합으로부터 ‘아들들과 딸들’, 곧 진리와 선이 계속 태어납니다. 살아 있는 교회는 진리와 선을 낳습니다. 살아 있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믿는 것이 실제 사랑으로 이어지고, 그 사랑이 다시 삶의 선과 쓰임으로 나타날 때 신앙은 살아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창세기 5장 앞의 ‘천국의 기쁨은 쓰임에 있다’는 가르침과 오늘 본문의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는 말씀이 서로 만납니다.

 

그러나 동시에 변화도 시작됩니다. 셋 교회에서도 신앙과 사랑은 아직 결합되어 있지만 사랑의 중심성은 태고교회와 조금 달라집니다. 교회가 계속 이어지면서 상태가 변하고, 마침내 태고교회가 지녔던 고유한 퍼셉션도 점차 쇠퇴합니다. ‘그는 죽었더라’는 짧은 한마디 안에 한 사람의 죽음뿐 아니라, 한 교회의 고유한 내적 생명이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게 되는 깊은 변화가 담겨 있습니다.

 

그럼에도 창세기 5장의 이야기는 단순한 쇠퇴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회가 달라지고 퍼셉션이 사라져 가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는 필요한 것을 보존하십니다. 태고교회의 계시와 퍼셉션은 에녹을 통하여 교리로 보존되고, 마지막에는 노아라는 새로운 교회를 준비하십니다. 인간에게서 무엇인가가 사라질 때마다 주님의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붙드시고 그것을 통하여 다음 단계를 준비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읽으며 우리는 ‘나는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가?’만을 묻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내가 알고 믿는 진리는 어떤 사랑에서 나오고 있는가?’, ‘내 신앙과 사랑은 서로 결합되어 있는가?’, ‘내가 받은 진리는 실제 삶에서 선을 낳고 있는가?’, 그리고 ‘그 선은 이웃을 위한 쓰임으로 이어지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오늘날 우리에게 그대로 주어져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퍼셉션의 근원은 여전히 같습니다.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옵니다. 우리의 거듭남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신앙과 사랑을 하나 되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시며, 우리 안에서 진리와 선의 열매가 태어나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상태가 약해지고 이전에 가졌던 것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남겨 두신 것을 보존하시며 다시 거듭남의 길을 여십니다.

 

이것이 오늘 창세기 5장 첫 다섯 절을 통해 보게 되는 큰 그림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자신의 형상에서 모양으로 이끄십니다. 그 과정에서 신앙과 사랑을 하나 되게 하시고, 그 결합으로부터 진리와 선이 삶 가운데 태어나게 하십니다. 교회의 상태가 변하고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점차 쇠퇴하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는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시며 다음 교회를 준비하십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5장의 족보는 단지 ‘누가 누구를 낳고 몇 년을 살다가 죽었다’는 반복되는 기록이 아닙니다. 그 이름과 날과 해, 아들들과 딸들, 그리고 ‘죽었더라’는 말씀 속에는 사람과 교회의 내적 상태가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 그리고 그 모든 변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어떻게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며 구원의 역사를 계속 이어 가시는지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다시 주님을 바라봅니다. 우리의 신앙이 사랑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시고, 우리가 아는 진리가 삶의 선으로 이어지게 하시며, 그 선이 이웃을 위한 쓰임이 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 안의 좋은 것들이 약해지고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에도,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깊은 곳에서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며 다시 생명의 길을 준비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창세기 5장은 바로 그 주님의 오래 참고 보존하시며 이어 가시는 섭리 속에서 이제 첫걸음을 시작합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469, 창5:1, '계보의 책, 영적으로 창조되어 천적으로 된 태고교회'(AC.469-474)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This is the book of the births of man. In the day that God created man, in the likeness of God made he him. (창5:1) AC.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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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0, 창5:1, ‘이름들은 사람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들을 뜻한다’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0‘계보의 책’(book of the births)이 태고교회에 속했던 사람들을 열거한 것이라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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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1, 창5:1, ‘집과 가족과 민족으로 구별되어 살았던 이유’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1그들이 이처럼 따로 떨어져 살면서 오직 집과 가족과 민족으로 구별되어 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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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2, 창5:1, ‘창조함과 만드심,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2‘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날’(day in which God created man)이 그가 영적으로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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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3, 창5:1, ‘하나님의 형상에서 하나님의 모양으로’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3‘하나님의 모양’(likeness of God)이 천적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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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4, 창5:1,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나아간 태고교회’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4그러므로 여기서 다루는 주제는 태고교회의 출생 또는 번성(birth or propagation)이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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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5, 창5:2, ‘신앙과 사랑의 결혼을 이룬 교회’(AC.475-480)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and blessed them, and called their name man, in the day when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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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6, 창5:2, ‘남자와 여자에서 하나의 사람으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6‘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신앙과 사랑 사이의 결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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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7, 창5:2, ‘오직 주님만이 참된 사람이시며, 교회는 그분의 형상과 모양’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7‘사람’(man)이 태고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자주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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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8, 창5:2, ‘아담이라는 한 사람이 아니라 태고교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8그를 ‘아담’(Adam)이라 하는 이유는 히브리어 ‘아담’(Ad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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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9, 창5:2, ‘흙에서 취하여 거듭나고 참된 사람이 된 태고교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9말씀에서 ‘이름을 부르다’(calling a name) 또는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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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80, 창5:2, ‘여섯째 날의 끝과 안식일의 시작에 이른 사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80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사람’이라 일컬어졌다는 것은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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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3, AC.481, '태고교회와 닮은 새 교회 셋(Seth)'(AC.481-485)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And man lived a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into his likeness, after his image, and called his name Seth. (창5:3) AC.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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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3, AC.482, ‘해(years)와 연수(numbers of years)는 교회의 상태를 의미’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2이 장에 나오는 ‘해’(years)와 ‘연수’(numbers of years)가 속뜻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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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3, AC.483, ‘퍼셉션(perception)의 차이로 구별된 태고교회의 여러 교회’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3뒤이어 나오는 ‘셋’(Seth), ‘에노스’(Enosh), ‘게난’(Kenan), ‘마할랄렐’(Mahalalel),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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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3, AC.484, ‘사랑이 여전히 신앙과 결합되어 있었던 셋 교회’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4‘셋’(Seth)이라 하는 교회가 태고교회와 매우 비슷했다는 것은, 사람이 자기의 모양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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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3, AC.485, ‘창4의 셋과 창5의 셋은 서로 다른 교회’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5여기서 ‘셋’(Seth)이 앞에서 묘사된 교회(창4:25)와는 다른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AC.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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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86, '날들과 해들, 아들들과 딸들의 의미'(AC.486-491)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the days of man after he begat Seth were eight hundred years, and he begat sons and daughters. (창5:3) AC.486‘날들’(days)은 일반적인 시간과 상태를 의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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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87, ‘날들과 해들에 기록된 교회의 상태 변화’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7‘날들’(days)이 일반적인 시간과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1장에서 보여 주었습니다. 거기서 창조의 ‘날들’은 다른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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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88, ‘천사들에게 시간은 상태와 그 변화’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8‘날들’(days)이 일반적인 상태를, ‘해들’(years)이 특별한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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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89, ‘교회가 낳는 아들들과 딸들, 진리와 선’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9‘아들들과 딸들’(sons and daughters)이 그들이 퍼셉션한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하며, 특히 ‘아들들’(sons)은 진리들을,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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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90, ‘딸들이 의미하는 사랑과 신앙의 선’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90말씀에서 ‘딸들’(daughters)은 자주 선들을 의미합니다. 시편에서는, In the Word “daughters” frequently denote goods; as in David: 9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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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91, ‘교회의 어떠함에 따라 달라지는 아들들과 딸들’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91이 장에서 ‘아들들’(sons)과 ‘딸들’(daughters)(4, 7, 10, 13, 16, 19, 26, 30절)도 같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어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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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2, ‘사라진 퍼셉션을 의미하는 사람의 죽음’(AC.492-49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that man lived were nine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he died. (창5:5) AC.492여기서 ‘날들’(days)과 ‘해들’(years)은 위에서와 같이 시대들과 상태들을 의미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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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3, ‘시간과 척도를 넘어 상태를 나타내는 말씀의 숫자’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3‘날들’(days)과 ‘해들’(years)이 시대들과 상태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세상에서는 시간들과 척도들이 반드시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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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4, ‘퍼셉션의 죽음과 유전적 악의 누적’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4그가 ‘죽었다’(died)는 것이 그러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죽다’(die)라는 말의 의미에서 분명합니다.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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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5, ‘태고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열쇠, 퍼셉션’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5태고교회가 어떻게 쇠퇴하였는지는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을 가진 교회였으며, 오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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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아래는 오늘 범위 창5:1-5, AC.469-495 중 리딩 필독 3편 링크입니다. 혹시 몹시 바쁘신 분들은 꼭 이 3개 링크만이라도 읽으시기 바랍니다.

 

 

AC.473, 창5:1, ‘하나님의 형상에서 하나님의 모양으로’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3‘하나님의 모양’(likeness of God)이 천적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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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6, 창5:2, ‘남자와 여자에서 하나의 사람으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6‘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신앙과 사랑 사이의 결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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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5, ‘태고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열쇠, 퍼셉션’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5태고교회가 어떻게 쇠퇴하였는지는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을 가진 교회였으며, 오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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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이며, 다음은 다음 주 본문 소개입니다.

 

다음 주에는 창5:6-14, AC.496-509를 읽습니다. 셋에서 에노스로, 다시 에노스에서 게난으로 이어지는 족보를 통해, 이 이름들이 단순한 개인들이 아니라 태고교회 이후 차례로 이어진 서로 다른 교회들을 나타냄을 살펴보겠습니다. 특히 한 교회가 다음 교회로 이어지면서도 ‘본질적인 것들’은 점차 감소해 가는 모습과, 그럼에도 그 흐름을 끊지 않으시고 교회를 계속 이어 가시는 주님의 섭리를 살펴보겠습니다.

 

 

네, 이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10-11(D1)

 

2672, 1, 창5.1, 2026-10-11(D1)-주일예배(창5,1-5, AC.469-495), ‘하나님의 형상에서 모양으로, 그리고 시작된 변화’.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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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10/04, 창4:25-26, AC.434-442), ‘보존된 신앙에서 체어리티의 예배로’

※ 오늘(2026/10/04)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6, ‘은혜로신 하나님 우리 주 하나님’, 찬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 찬96, ‘예수님은 누구신가’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일곱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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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혼을 둘러싼 문제를 깊이 들여다보다 보면 결국 피하기 어려운 질문 하나와 만나게 됩니다. ‘한 사람을 더 이상 붙들어 줄 수 없어 이혼했는데, 그 사람이 그 뒤 무너져 버린다면 떠난 배우자는 어디까지 책임이 있는가?’ 더 극단적으로는 이혼 후 상대방의 인생이 파탄 나고 절망 끝에 스스로 생명을 끊는 일까지 생긴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그렇다면 끝까지 혼인의 울타리를 지켜 주었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라는 질문이 따라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더 어려운 질문이 기다립니다. ‘그 모든 과정에서 주님의 섭리는 어디에 있었는가?’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은 ‘혼인의 울타리를 지키는 것’과 ‘배우자를 대신 살아 주는 것’입니다. 앞서 살펴본 ‘존버리즘’ 영상의 첫 사례에서는 결혼 전에는 어머니가 딸의 생활을 대신 책임졌고, 결혼한 뒤에는 남편이 사실상 그 역할을 이어받았습니다. 아내의 어머니 자신도 ‘어릴 때부터 내가 다 해줘 버릇해서 그런 거야’라고 말합니다. 남편은 아내가 해야 할 몫을 계속 대신 감당했고, 심지어 자신이 심하게 아픈 상황에서도 집안일을 해야 했습니다. 여기서 남편이 ‘혼인을 지킨다’는 이유로 평생 아내의 몫까지 대신 감당한다면 외적인 결혼은 유지될지 몰라도, 아내가 자신의 자유와 책임을 사용하는 한 인간으로 성장할 기회는 오히려 줄어들 수 있습니다. 따라서 ‘떠나지 않는 것=사랑’, ‘떠나는 것=버림’이라는 단순한 등식부터 다시 살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에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자유’가 중요해집니다. 주님의 사랑은 인간을 강제로 선하게 만드는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시지만,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을 제거하여 선을 강요하시지는 않습니다. 강제로 만들어진 선은 그 사람 자신의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전능하신 주님조차 인간이 악을 선택할 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인간을 구원하시지 않는다면, 한 배우자가 다른 배우자의 자유로운 선택이 낳는 모든 결과를 평생 대신 막아 주어야 하는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결과를 대신 치워 주는 사랑’이 오히려 상대의 악이나 무책임을 지속시키는 조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가장 아픈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한 배우자가 더 이상 파괴적인 관계를 감당하지 못하고 이혼했습니다. 그런데 남겨진 배우자의 삶이 무너지고, 극단적인 경우 스스로 생명을 끊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이때 시간을 거꾸로 돌려 ‘결국 이렇게 되었으니 이혼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하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결론 내리면 뜻밖의 문제가 생깁니다. 한 사람의 생존에 대한 최종 책임을 다른 한 사람에게 무기한 부과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으로 ‘당신이 나를 떠나면 나는 죽겠다’는 말이 성립하는 순간 상대방은 평생 떠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것은 더 이상 사랑에 의한 결합이 아니라 두려움과 죄책감에 의한 결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혼했으니 이제 상대가 어떻게 되든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체어리티’의 문제가 들어옵니다. 체어리티는 혼인관계를 유지하느냐 끝내느냐의 문제보다 더 깊습니다. 이혼했더라도 상대방이 실제로 극단적 선택의 위험에 있다면 그 위험을 외면하지 않고 가족이나 적절한 도움에 연결하며, 가능한 범위에서 생명을 보호하려 노력하는 것은 체어리티에 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 다시 배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그 사람의 생명을 염려하는 것’과 ‘그 사람의 배우자로서 다시 결합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전자는 체어리티의 요구가 될 수 있지만, 후자가 언제나 의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마태복음 19장 8절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는 주님의 창조 질서를 보여 줍니다. 주님이 뜻하신 혼인은 두 사람이 ‘한 몸’이 되어 서로의 선과 영원한 행복을 기뻐하는 결합입니다. 그러나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라는 말씀은 인간의 악이 그 창조 질서를 실제로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단지 ‘어떤 일이 있어도 법적인 혼인관계를 유지하라’는 뜻으로만 읽으면 인간의 ‘완악함’이 만들어 내는 현실을 충분히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세 사례에서도 결정적인 문제는 생활습관의 차이나 성격 차이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나는 변할 필요가 없다’는 태도였습니다. 특히 두 번째 사례에서 아내는 상담자에게 ‘저는 화낸 적 없는데요. 말을 좀 세게 할 뿐이에요’라고 말합니다. 자기의 분노와 모욕적인 언어가 배우자와 자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지 못합니다. 이것이 지속되면 회개의 출발점 자체가 사라집니다. 회개는 ‘내 안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주님 앞에서 보는 데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문제의 원인을 상대방에게서만 찾는다면 사람은 자신의 악을 볼 기회를 잃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먼저 이혼장을 냈느냐’만으로 누가 혼인을 깨뜨렸는지를 판단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혼인의 ‘외적 해체’와 ‘내적 해체’를 구별해야 합니다. 법원에서 이혼 판결이 난 날이 반드시 혼인이 처음 깨진 날은 아닙니다. 상대를 오랫동안 멸시하고 지배하고 이용하며,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계속 떠넘기면서도 돌이키기를 거부한다면 ‘둘이 한 몸’이라는 내적 질서는 법적인 이혼보다 훨씬 전부터 훼손되고 있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인 혼인관계를 계속 유지한다고 해서 내적인 혼인이 반드시 보존되는 것도 아닙니다. 한집에서 수십 년을 살아도 서로를 증오하고 이용하고 지배한다면 ‘외적인 혼인의 울타리’와 ‘내적인 혼인의 결합’을 같은 것으로 볼 수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섭리’의 문제가 대단히 중요해집니다. 주님의 섭리를 ‘파국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든 나쁜 일을 미리 막아 주시는 것’으로만 이해한다면, 이혼 후 한 사람의 삶이 무너지거나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는 경우 섭리는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이 계셨다면 왜 막지 않으셨는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섭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에게 자연계에서 아무 고통도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원한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인간의 자유를 제거해서라도 당장의 파국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섭리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이 악을 원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로운 인간을 구원하시기 때문에 악의 가능성과 그 결과가 ‘허용’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혼 뒤 삶이 무너진 사람에게도 섭리는 계속되고 있을까요? 그렇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혼은 그 사람에게 생애 최대의 파국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 사람에게 어떤 영적 의미를 갖게 될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평생 다른 사람 탓만 하던 사람이 더 이상 탓할 사람이 없어졌을 때 처음으로 ‘혹시 내게도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앞의 첫 사례에서도 남편이 떠나자 아내는 며칠 동안 스스로 집을 치웠습니다. 비록 영상에서는 결국 원래 상태로 돌아간 것으로 묘사하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내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대신 해 주지 않는다’는 현실과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로 이어질 수도 있고 다시 책임전가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선택까지 배우자가 대신 해 줄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섭리가 있다면 왜 이혼을 막지 않으셨는가?’라는 질문을 조금 다르게 바꾸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이 이혼과 그 이후의 고통 가운데서도 두 사람을 어떻게 각각 이끌고 계시는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떠난 사람에게는 원망과 죄책감, 혹은 ‘나는 옳았고 상대방만 잘못했다’는 자기의(自己義)에 빠지지 않는 것이 새로운 거듭남의 과제가 될 수 있습니다. 남겨진 사람에게는 더 이상 자신의 삶을 배우자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자기 내면을 바라보는 것이 새로운 과제가 될 수 있습니다. 같은 이혼이라는 사건이 두 사람에게 서로 다른 영적 과제가 되는 것입니다. 섭리는 사건 하나를 없애 버리는 방식으로만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사건 속에서도 각 사람의 영원한 선을 향하여 계속 역사합니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한쪽은 ‘하나님, 제가 이렇게 오래 참았는데 왜 결국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셨습니까?’라고 할 수 있고, 다른 쪽은 ‘하나님, 왜 저 사람이 나를 떠나게 두셨습니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두 원망 속에는 공통된 전제가 숨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상대방의 자유를 움직여 주셔야 한다’는 기대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한쪽을 강제로 붙들어 놓지도 않으시고 다른 한쪽을 강제로 회개시키지도 않으십니다. 두 사람 모두를 자유로운 인간으로 대하십니다. 이것이 때로는 섭리를 잔인하게 느끼게 하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 자유 때문에 사랑과 회개와 거듭남도 실제적인 것이 됩니다.

 

물론 이 논리를 실제 이혼을 너무 쉽게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상대가 내 성장을 방해한다’, ‘상대가 자기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 ‘우리의 내적 결합은 이미 끝났다’는 말은 자기 욕망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얼마든지 악용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9장의 출발점은 여전히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입니다. 먼저 화해하고, 참고, 용서하고, 상담하고, 자신부터 돌아보며 가능한 회복의 길을 충분히 찾아야 합니다. 다만 그렇게 했는데도 한쪽이 지속적으로 파괴적인 악을 행하면서 변화 자체를 거부한다면, ‘혼인을 지킨다’는 이름으로 다른 한 사람에게 그 악의 결과를 무기한 떠맡기는 것이 과연 주님이 말씀하신 혼인의 본뜻인가는 다시 물어야 합니다.

 

결국 이 문제는 ‘이혼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보다 훨씬 깊은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상대의 모든 결과를 대신 치워 주는 것이 사랑일까요? 아니면 때로는 ‘나는 여전히 당신의 선을 원하지만 이제 당신의 몫을 대신 살아 주지는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 사랑일까요? 상대가 넘어지지 않도록 평생 붙잡아 주는 것만이 체어리티일까요? 아니면 때로 손을 놓음으로써 그 사람이 처음으로 자기 두 발로 주님 앞에 서게 하는 것도 체어리티일 수 있을까요?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마지막 선이 있습니다. ‘놓아주는 것’은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당신과 더 이상 부부로 살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망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 두 문장은 동시에 참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여기에서 ‘혼인의 울타리’와 ‘체어리티의 울타리’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완악함 때문에 혼인의 울타리는 끝내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어리티의 울타리까지 반드시 함께 무너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부로서는 헤어져도 한 인간의 영원한 선을 바라며 미워하지 않고, 위험에 처했을 때 가능한 도움을 외면하지 않으며, 동시에 그 사람의 자유와 책임까지 빼앗아 대신 살아 주지는 않는 것, 바로 그 좁고 어려운 길이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는 주님의 말씀이 더욱 슬프고 깊게 들립니다. 주님의 뜻은 애초부터 ‘어디까지 견디다가 이혼해도 되는가?’가 아니었습니다. 두 사람이 ‘한 몸’이 되어 서로의 영원한 선을 기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완악함이 그것을 깨뜨렸을 때에도 주님의 섭리는 끝나지 않습니다. 혼인이 실패했다고 해서 섭리가 실패한 것이 아니며, 배우자를 더 이상 대신 살아 주지 않는다고 해서 사랑이 반드시 끝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때부터 주님은 두 사람을 각각 자유로운 한 인간으로 다시 만나시며, 각자가 자기 몫의 악과 책임을 보고 돌이키도록 서로 다른 길에서 계속 이끌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질문은 ‘끝까지 혼인의 울타리를 유지했어야 하는가?’에서 ‘끝까지 사랑해야 하는가?’로 바뀝니다. 이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해야 하므로 그 사람의 모든 선택과 그 결과까지 내가 끝까지 대신 책임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는 다르게 답해야 합니다. 그것은 사랑과 같은 말이 아닙니다. 참된 사랑은 상대의 자유를 빼앗지 않으며, 상대의 책임을 영원히 대신 짊어짐으로써 그 사람의 회개 가능성까지 가려 버리지 않습니다. 혼인의 울타리가 무너진 뒤에도 체어리티는 남을 수 있고, 인간관계가 끝난 자리에서도 주님의 섭리는 끝나지 않습니다. 어쩌면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의 사랑이 할 수 있는 일과 오직 주님께 맡겨야 하는 일이 비로소 구별되기 시작하는지도 모릅니다.

 

 

 

SY.111, 존버리즘, ‘5년 안에 100% 이혼하는 최악의 여자 유형 3가지’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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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2-495 심화

2.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오늘날의 양심은 어떻게 다른가?’

 

AC.495는 태고교회가 ‘퍼셉션을 가진 교회’였으며 ‘오늘날에는 그러한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읽으면 질문이 생깁니다. 오늘날에도 사람은 기도하거나 말씀을 읽는 가운데 ‘이것은 옳다’, ‘이것은 해서는 안 된다’는 내적인 깨달음을 경험합니다. 어떤 때에는 이유를 길게 따져 보지 않아도 무엇이 선하고 진실한지를 깊이 확신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도 태고교회의 ‘퍼셉션’(perception)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그렇지 않습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후대 영적 인간의 양심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에 관계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질서가 서로 다릅니다.

 

그 차이를 가장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천적 인간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하지만, 영적 인간은 ‘배운 진리로부터 양심이 형성되어 선으로 인도’됩니다. AC.2831은 이 차이를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천적 인간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주님으로부터 일종의 내적인 지각으로 즉시 알아차립니다. 그들이 주님과 사랑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영적 인간에게는 그러한 퍼셉션이 없으며 그 대신 양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양심은 부모와 스승에게서 배우고, 교리와 말씀을 통하여 받아들인 선과 진리로부터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퍼셉션은 단순히 ‘양심이 아주 강해진 상태’가 아닙니다. 둘은 주님께서 인간을 이끄시는 서로 다른 질서에 속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는 사랑의 선이 먼저 있었고 그 선으로부터 무엇이 진리인지 퍼셉션되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외부에서 먼저 배우고 논증하여 ‘이것이 참이므로 믿겠다’고 하는 방식이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선 안에서 무엇이 진리인지 내적으로 알아차렸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계속 살펴온 ‘천적 질서’, 곧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는 질서입니다.

 

반대로 영적 인간은 진리를 먼저 배웁니다. 말씀을 읽고, 가르침을 받고, 무엇이 주님의 뜻인지 배운 뒤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삶에서 행합니다. 이렇게 받아들인 진리가 사람의 속 사람에 깊이 새겨지고 삶으로 확증되면 그것이 양심을 형성합니다. AC.7935는 영적 교회 사람들의 양심이 그들이 어려서부터 배우고 이후 삶으로 확증한 교회의 진리들로부터 ‘태어나고 형성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렇게 진리가 내면에 자리 잡으면 사람은 그것에 따라 생각하고 원하고 행동하도록 내적으로 이끌립니다. 이것이 영적 인간에게 있는 양심입니다.

 

예를 들어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이 어떤 일을 마주했을 때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의 선으로부터 그것이 선인지 아닌지를 퍼셉션했습니다. 반면 오늘날 영적 질서 안에 있는 사람은 ‘주님께서 말씀에서 어떻게 가르치셨는가’, ‘이웃을 사랑하라는 진리에 비추어 이것은 옳은가’, ‘내가 알고 믿는 진리에 따라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통하여 양심의 인도를 받습니다. 처음에는 배운 진리를 기억하여 판단하지만, 그 진리에 따라 오래 살아가면 그것이 내면에 깊이 자리 잡아 일일이 논리를 펼치지 않아도 ‘이것은 해서는 안 된다’는 내적인 요구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양심 역시 단순한 사회적 죄책감이나 심리적 불편함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AC.2831은 시민 생활에서의 정의와 공정함을 지각하는 것, 도덕생활에서 명예로운 것을 지각하는 것과 신앙의 선과 진리에 관한 영적 퍼셉션을 구별합니다. 또한 사람의 양심은 그가 받아들인 선과 진리에 의해 형성되므로, 그가 배운 것이 충분히 참되지 않다면 양심 역시 불완전하게 형성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내 양심이 그렇게 말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판단이 언제나 절대적으로 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양심도 말씀의 진리에 의해 계속 밝혀지고 바로잡혀야 합니다.

 

이 점은 퍼셉션과 개인적인 직감을 구별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강하게 떠오르는 것’, ‘내적으로 어떤 음성을 듣는 것’, ‘설명하기 어렵지만 확신이 드는 것’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강한 느낌은 자기애, 욕망, 두려움, 선입견에서도 나올 수 있습니다. AC.2515는 퍼셉션에서 나오는 생각, 양심에서 나오는 생각, 양심 없이 욕망과 환상에서 나오는 생각을 분명히 구별합니다. 따라서 확신의 강도가 그 근원이 주님이라는 보증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퍼셉션과 양심에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둘의 근원은 궁극적으로 주님이며, 둘 다 인간을 선과 진리로 이끄시는 방식입니다. 차이는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질서에 있습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사랑의 선이 의지 안에 자리 잡아 그 선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하는 질서가 있었고, 영적 인간에게는 진리가 먼저 이해 안에 받아들여지고 그 진리에 따라 새로운 의지가 형성되면서 양심이 생기는 질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퍼셉션과 양심은 서로 무관한 두 능력이 아니라 주님께서 서로 다른 상태의 인간을 이끄시는 서로 다른 방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차이를 알면 왜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사라지는 것이 그렇게 중대한 ‘죽음’이었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교회의 생명은 주님을 향한 사랑 안에서 선과 진리를 직접 퍼셉션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의지가 악으로 물들면서 그 질서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선에서 진리를 퍼셉션하던 통로가 변질되면, 자기 욕망을 주님의 뜻으로 오인하는 훨씬 위험한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타락한 인간에게 옛 퍼셉션을 그대로 유지시키시는 대신 진리를 외적으로 배우고 그것으로 새로운 내면을 형성하는 영적 질서, 곧 신앙과 양심의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억지로 회복하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도 주님으로부터 직접 무엇이 진리인지 느끼고 싶다’며 특별한 내적 감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말씀의 진리를 겸손히 배우고 그것을 삶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삶으로 확증될수록 그것은 단순히 머릿속에 기억된 지식으로 머물지 않고 우리의 내면을 형성하며, 마침내 양심을 통하여 생각과 의지와 행동을 이끄는 살아 있는 진리가 됩니다.

 

그렇다고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모든 신앙생활이 계속 외적인 규칙 확인에만 머문다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더 높은 형태의 양심과 선으로부터의 지각도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성급하게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특별한 체험을 했는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가르치신 진리가 우리의 삶 안에서 선과 결합되고 있는가입니다. AC.495가 퍼셉션을 설명하면서 마지막에 ‘삶으로 확증되는 신앙고백’을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퍼셉션과 양심의 차이는 창세기 초반 전체를 관통하는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를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에서 신앙으로, 선에서 진리로 나아갔고, 영적 인간은 진리를 받아들여 신앙으로 삼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선으로 인도됩니다. 방식은 다르지만 두 경우 모두 생명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태고교회의 상태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과 신앙과 양심의 길을 따라 주님께서 우리를 이끄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리가 삶이 되고 신앙이 사랑과 결합될 때, 주님은 우리를 영적 인간에서 더욱 온전한 사랑의 질서로 계속 이끌어 가십니다. (AC.492-495 심화 2)

 

 

 

창5:5, AC.495, ‘태고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열쇠, 퍼셉션’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5태고교회가 어떻게 쇠퇴하였는지는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을 가진 교회였으며, 오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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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2-496 심화 1, ‘유전적 악은 어떻게 대대로 누적되며, 우리는 조상의 죄까지 책임져야

창5:5, AC.492-496 심화1, ‘유전적 악은 어떻게 대대로 누적되며, 우리는 조상의 죄까지 책임져야 하는가?’ AC.494는 태고교회가 쇠퇴한 주된 원인을 설명하면서 ‘유전적 악’(hereditary evil)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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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2-495 심화

1. ‘유전적 악은 어떻게 대대로 누적되며, 우리는 조상의 죄까지 책임져야 하는가?’

 

AC.494는 태고교회가 쇠퇴한 주된 원인을 설명하면서 ‘유전적 악’(hereditary evil)이라는 매우 중요한 문제를 다룹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은 부모와 조상으로부터 악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을 물려받으며, 자신이 실제로 행하고 반복한 악을 거기에 더합니다. 반복된 악은 점차 그 사람의 본성처럼 되고, 이렇게 형성된 성향이 다시 자녀와 후손에게 전달됩니다. 그래서 세대가 계속되면서 유전적 악이 축적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내가 조상의 악을 물려받았다면 조상의 죄에 대한 책임도 내가 져야 하는가?’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분명히 ‘아니다’입니다. 유전되는 것과 개인에게 책임이 돌아가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사람은 유전적 악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그 악 자체 때문에 책망받지는 않습니다. AC.4563은 이 점을 아주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유전적 악은 사람이 성장하여 자신의 이해와 의지로 그것을 실제로 행하기 전까지는 숨어 있으며, ‘주님의 자비로 아무도 유전적인 것 때문에 책망받지 않고 실제적인 것 때문에 책망받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악한 성향과 내가 자유롭게 받아들여 실제로 행한 악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쉽게 분노하는 성향, 지나친 자기중심성, 물질에 대한 강한 집착과 같은 기울어짐을 물려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성향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의 개인적인 죄는 아닙니다.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의도적으로 즐기고 행할 때 비로소 ‘실제적인 악’(actual evil)이 됩니다. 그러므로 유전적 악은 우리에게 주어진 출발 조건에 가깝고, 실제적인 악은 그 조건 안에서 우리가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행함으로써 자신의 것으로 만든 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아담 한 사람의 범죄에서 모든 인류의 유전적 악이 시작되었다는 견해를 부정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AC.313은 오늘날 존재하는 모든 유전적 악이 최초의 한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고 명시합니다. 각 사람이 실제 죄를 반복함으로써 자신의 본성에 악을 더하고, 그것이 자녀에게 전달되며, 다시 그 자녀가 자신의 실제 악을 더함으로써 후손에게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인류의 유전적 악은 한 조상의 한 번의 범죄가 모든 사람에게 법적인 죄책으로 전가되는 구조라기보다, 수많은 세대의 실제 삶에서 형성된 악의 성향이 계속 축적되어 내려오는 구조입니다.

 

그러므로 ‘조상의 죄가 내게 유전된다’는 말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조상이 범한 구체적인 죄의 행위와 그 죄책이 그대로 내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달되는 것은 그 악에서 형성된 기울어짐입니다. 나는 그것을 선택하여 태어난 것도 아니고 그것이 내 안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정죄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안에서 일어날 때 그것을 받아들이고 실제로 행할 것인지, 아니면 악으로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물리칠 것인지 하는 문제는 나의 자유와 책임의 영역으로 들어옵니다. 이 때문에 유전적 악의 교리는 인간의 책임을 없애지도 않고, 반대로 조상의 책임을 후손에게 떠넘기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AC.494가 말하는 ‘유전적 악의 증가’는 왜 교회의 쇠퇴와 연결될까요? 한 세대가 악을 반복하여 그것을 본성처럼 만들면 다음 세대는 이전보다 더 복잡하고 강해진 악의 기울어짐을 출발점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다음 세대가 그것을 다시 실제 악으로 만들고 새로운 악을 더한다면 그 흐름은 더욱 강해집니다. 태고교회에서도 이러한 일이 세대를 거쳐 일어났고, 그 결과 처음의 온전한 퍼셉션이 점차 변질되어 마침내 소멸하게 되었다는 것이 AC.494의 설명입니다. 교회의 쇠퇴는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 안에서 선택한 악이 세대를 지나며 누적된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이 설명의 마지막은 결코 숙명론이 아닙니다. AC.494는 유전적 악이 ‘주님에 의해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감소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악의 성향이 가문과 세대를 따라 내려왔다 하더라도 그것이 한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주님은 각 사람에게 선과 진리를 공급하시고, 사람이 자신의 악을 보고 인정하며 그것에 맞서도록 이끄십니다. 거듭남은 바로 이 오래된 악의 흐름이 한 사람 안에서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지배하지 못하도록 주님께서 새 질서를 세워 가시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부모의 책임도 새롭게 보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완전한 상태만을 물려줄 수 없습니다. 자신도 여러 세대로부터 받은 유전적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부모에게 절망이나 과도한 죄책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에서 발견되는 악을 그대로 방치하고 반복하여 굳히느냐, 아니면 주님 앞에서 그것을 인정하고 거듭남의 길을 걷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주님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시도록 허용함으로써 나를 통하여 계속되던 악의 흐름이 이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이어지지 않게 할 수는 있습니다.

 

따라서 유전적 악의 교리는 ‘나는 원래 이런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다’는 운명론도 아니고, ‘조상이 죄를 지었으니 나도 그 죄에 책임이 있다’는 집단적 죄책의 교리도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현실을 매우 깊이 인정하면서도 자유와 거듭남의 가능성을 동시에 붙듭니다. 우리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많은 성향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주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를 만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성향을 자신의 삶으로 확정하지 않고 주님께 돌이킬 때, 세대를 지나며 축적된 악의 힘은 거듭남 가운데 감소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AC.494가 말하는 태고교회의 역사는 오늘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한 세대의 삶은 그 세대에서 완전히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반복하여 자신의 본성으로 만드는 것은 다음 세대에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의 역사가 세대를 넘어간다고 해서 주님의 역사가 거기에서 멈추는 것은 아닙니다. 유전적 악보다 더 근원적인 것은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주님의 사랑이며, 거듭남은 바로 그 사랑이 한 사람의 자유 안에서 악의 오래된 흐름을 꺾고 새로운 생명의 질서를 세워 가시는 역사입니다. (AC.492-495 심화 1)

 

 

 

창5:5, AC.492-495 심화 2,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오늘날의 양심은 어떻게 다른가?’

창5:5, AC.492-495 심화2.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오늘날의 양심은 어떻게 다른가?’ AC.495는 태고교회가 ‘퍼셉션을 가진 교회’였으며 ‘오늘날에는 그러한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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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5, ‘태고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열쇠, 퍼셉션’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5태고교회가 어떻게 쇠퇴하였는지는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을 가진 교회였으며, 오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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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86-491 심화

1, ‘천국에는 시간이 없다면 천사들은 변화와 영원을 어떻게 경험하는가?’

 

AC.488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상당히 낯선 말을 합니다. 천사들은 지상에서와 같은 시간을 알지 못하며, 날들과 해들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고 오직 ‘상태와 그 변화’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즉시 질문이 생깁니다. ‘시간이 없다면 천국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가? 어떤 일이 먼저 일어나고 다른 일이 나중에 일어나는 순서도 없는가? 천사가 배우고 성장하고 상태가 변한다면 그것 자체가 결국 시간 아닌가? 그리고 영원히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천국에는 시간이 없다’는 말을 ‘천국에는 변화나 연속성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 HH) 154-161은 아예 한 장 전체의 제목을 ‘천국에서 천사들의 상태 변화’로 두고 있습니다. 천사들은 사랑과 신앙,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지혜와 총명의 상태가 계속 변화합니다. 어떤 때에는 사랑과 지혜가 더 충만하고 밝은 상태에 있고, 어떤 때에는 상대적으로 덜 충만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모든 것이 한순간에 얼어붙어 있는 정지된 세계가 아닙니다. 천사들에게도 ‘이 상태에서 저 상태로’ 이어지는 분명한 연속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상의 시간과 무엇이 다를까요? HH.162-169는 ‘천국의 시간’을 따로 설명하면서 그 차이를 분명히 합니다. 지상에서 우리의 시간은 해와 지구의 운동을 바탕으로 해, 달, 주, 날, 시간 등 일정한 단위로 측정됩니다. 그러나 천국의 해는 그런 방식으로 날과 해를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몇 시’, ‘며칠 후’, ‘몇 년 전’이라는 자연적 시간의 관념으로 삶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지상의 시간에 해당하는 것은 ‘상태와 그 상태의 변화’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이 없다’는 것은 ‘전후의 연속성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연속성을 지상의 시계와 달력의 단위로 경험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이 사실을 아주 희미하게나마 경험합니다. 즐겁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두 시간이 마치 몇 분처럼 지나가기도 하고, 고통이나 불안 속에서 기다릴 때에는 몇 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시계가 가리키는 객관적인 시간은 같지만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시간의 길이는 마음의 상태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경험을 시간의 근원이 상태와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는 하나의 단서로 설명합니다(HH.168). 천국에서는 자연적 시간의 외적 척도가 사라지고 그 근원에 해당하는 상태와 그 변화가 직접적으로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에게도 ‘먼저’와 ‘나중’에 해당하는 질서는 있습니다. 다만 그것은 시계의 숫자가 앞뒤로 배열되는 방식이 아니라 상태가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질서입니다. AC.4901도 영들과 천사들의 생명이 ‘시간 안에서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사람처럼 시간으로 생각하지 않고 ‘생명의 상태들’로 생각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천국에는 시간이 없다’는 표현보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천국에는 지상과 같은 자연적 시간이 없으며, 그에 대응하는 상태의 연속과 변화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AC.488에서 왜 ‘날’과 ‘해’가 상태를 의미하는지도 분명해집니다. 사람이 말씀을 읽을 때 ‘날’, ‘해’, ‘오늘’, ‘내일’, ‘어제’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시간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천사는 그러한 표현에서 그 시간에 상응하는 영적 상태를 지각합니다(HH.165-166). 아침과 봄은 사랑과 지혜가 새롭게 밝아지는 상태를, 저녁과 가을은 다른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말씀의 문자에 있는 시간 표현이 천국에서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겨 있던 영적인 실재인 ‘상태’로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더욱 흥미롭습니다. HH.167은 천사들이 ‘영원’을 사람과 다르게 이해한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은 흔히 영원을 ‘끝없이 계속되는 시간’으로 상상합니다. 지금부터 1억 년, 1조 년, 그보다 더 긴 시간이 지나도 끝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큰 숫자를 붙여도 그것은 여전히 시간의 연장일 뿐입니다. 천사들은 영원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고 ‘무한한 상태’라는 관점에서 지각합니다.

 

AC.1382도 같은 점을 매우 인상적으로 설명합니다. 사람은 시간 속에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원조차 끝없는 시간으로 상상하기 쉽지만, 천사들에게는 수천 년조차 우리가 생각하는 식의 긴 시간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과거와 미래를 현재와 전혀 단절된 것으로 경험하지 않으며, 그들의 현재 안에는 주님의 영원과 무한에 대한 지각이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천국의 영원한 생명은 ‘끝없이 오래 버텨야 하는 삶’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생명을 받아 새로운 사랑과 지혜의 상태로 나아가는 삶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천사가 ‘영원’을 무한한 상태로 지각한다고 해서 천사가 무한한 존재가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무한과 영원은 본래 주님께 속합니다. 천사들은 유한한 피조물이며, 다만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끝없이 받아들이면서 계속해서 완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영원은 천사가 어느 순간 완성되어 더 이상 아무 변화도 없는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무한한 선과 진리를 유한한 존재로서 계속 받아들이며 더 깊은 사랑과 지혜로 나아가는 삶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창5의 ‘날들과 해들’로 돌아오면 AC.486-491의 의도가 훨씬 선명해집니다. 창5가 ‘팔백 년’, ‘구백삼십 년’과 같은 숫자를 기록할 때 속뜻의 중심은 단순히 지상의 달력으로 얼마만큼 오래 살았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AC.487-488이 강조하는 것은 그 ‘날들과 해들’ 안에 교회의 상태와 그 변화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지상의 독자는 시간을 읽지만, 천국은 그 시간 안에 담긴 상태를 읽습니다. 이것이 창5의 족보를 단순한 연대 기록을 넘어 교회의 내적 역사로 읽게 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결국 ‘천국에는 시간이 없다’는 말은 천국이 변화 없는 정지 상태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천국에는 사랑과 지혜, 선과 진리의 끊임없는 상태 변화가 있습니다. 다만 그 변화를 해와 달과 시계와 달력으로 재지 않을 뿐입니다. 우리는 ‘몇 년을 살았는가’를 먼저 묻지만 천국의 관점에서는 ‘어떤 상태를 지나왔으며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가’가 더 본질적인 질문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거듭남을 바라보는 시선도 바꾸어 줍니다. 주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단지 신앙생활을 ‘몇 년 했는가’가 아닙니다. 그 세월 동안 우리의 사랑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살던 상태에서 얼마나 주님과 이웃을 향하는 상태로 옮겨졌는지가 중요합니다. 지상에서 우리는 날과 해를 지나지만, 주님은 그 날과 해 안에서 우리의 상태를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창5의 ‘날들과 해들’은 단순히 오래된 사람들의 기이하게 긴 수명을 기록한 표현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간 속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실제로 이루어 가시는 것은 ‘시간의 축적’이 아니라 ‘상태의 변화’, 곧 거듭남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AC.486-491 심화 1)

 

 

 

창5:4, AC.491, ‘교회의 어떠함에 따라 달라지는 아들들과 딸들’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91이 장에서 ‘아들들’(sons)과 ‘딸들’(daughters)(4, 7, 10, 13, 16, 19, 26, 30절)도 같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어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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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의 제목만 보면 조금 불편할 수 있습니다. ‘모은 돈 없는 30대 여자들의 충격적인 특징들’이라는 표현은 자칫 특정 성별과 세대를 하나의 유형으로 묶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상 속 ‘윤서 씨’를 남자로 바꾸어도 이야기의 본질은 거의 달라지지 않습니다. 월급이 들어오자마자 카드값이 빠져나가고, 할부와 리볼빙이 이어지고, 주변 사람들의 소비 수준에 맞추며, 여행과 공연에는 ‘경험이니까’라는 이유를 붙이고, 목돈이 생기면 ‘이 정도 보상은 괜찮다’며 써버리는 모습은 남녀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욕구와 자기관리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이 영상의 제목은 사실 이렇게 바꾸어도 좋을 것입니다. ‘왜 나는 열심히 사는데 남는 것이 없을까?’

 

영상의 첫 장면은 상징적입니다. 월급 290만 원이 들어오지만 몇 시간 뒤 카드값 190만 원이 빠져나갑니다. 결혼자금 통장에는 남자친구가 100만 원을 넣지만 윤서 씨가 넣은 돈은 없습니다. 문제는 윤서 씨가 명품에 중독되었거나 거대한 빚을 숨긴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택시 1만 4천 원, 라떼 5천5백 원, 점심 1만 3천 원, 동료들에게 산 커피, 배달음식, 니트 한 벌처럼 각각의 소비에는 모두 설명 가능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돈을 많이 썼다고 생각하지 않은 하루의 지출이 15만 원이 됩니다. 여기에 노트북, 에어컨, 항공권, 코트, 필라테스 할부가 겹치면서 ‘이번 달에는 아무것도 사지 않아도’ 이미 42만 원이 나갑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흥미롭게 작동합니다. 악은 언제나 거대한 모습으로만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 삶을 지배하는 많은 것은 ‘이 정도는 괜찮아’라는 작은 허용들의 축적입니다. 5천 원짜리 커피 한 잔이 악이라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여행이나 좋은 식사나 공연을 즐기는 것도 그 자체로 악이 아닙니다. 문제는 내 삶의 전체 질서를 보지 않은 채 순간순간의 욕구마다 ‘이것쯤은 괜찮다’고 허락하는 습관입니다. 하나하나는 합리적으로 보여도 그것들이 모여 내 삶 전체를 지배하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영상 속 윤서 씨에게는 그래서 ‘큰 사치’가 없습니다. 대신 모든 소비에 ‘이유’가 있습니다. 택시는 지각하지 않기 위해, 커피는 직장생활을 위해, 비싼 집들이 선물은 초라해 보이지 않기 위해, 브라이덜 샤워는 친구를 축하하기 위해, 콘서트와 여행은 물건이 아니라 ‘경험’이기 때문에, 비싼 월세는 안전하고 출퇴근하기 편하기 때문에, 필라테스는 건강을 위해, 성과급 소비는 ‘1년 동안 고생한 나에게 주는 보상’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유가 없어서가 아니라 ‘모든 욕구에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proprium을 생각하게 됩니다. proprium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그대로 ‘나는 이것을 원한다’고 드러내기보다 종종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냅니다. ‘이건 사치가 아니라 경험이야’,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어’, ‘열심히 일했으니 이 정도는 나에게 해줘야지’, ‘다들 하는데 나만 빠질 수 없잖아.’ 각각의 문장은 어느 정도 사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질문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인가?’만이 아니라 ‘나는 왜 그 사실을 지금 붙들고 있는가?’입니다. 진실은 때때로 욕구를 섬기는 변호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영상에서 두 번째 특징으로 지적하는 ‘내 월급이 아니라 주변 사람을 보고 소비 수준을 정한다’는 문제도 그래서 중요합니다. 윤서 씨는 같은 직장 동기의 집들이에 23만 원짜리 선물을 가져갑니다. 다른 사람들은 3만~5만 원 정도의 선물을 가져왔는데도 ‘싸 보이는 것을 들고 가기 싫어서’였습니다. 친구들의 모임에서도 빠지면 눈에 띌까 봐 돈을 냅니다. 결국 소비의 기준이 ‘나에게 정말 필요한가?’에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로 이동합니다.

 

이것은 돈보다 더 깊은 영적 문제를 보여줍니다. 사람은 자신의 행복을 다른 사람의 시선에 맡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가진 것의 가치는 그것이 나에게 얼마나 유용한가가 아니라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에 의해 결정됩니다.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 더 비싼 식사, 더 멋진 여행이 필요한 이유도 그것 자체의 유용보다 ‘나는 이 정도 수준의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때 돈은 생활의 도구가 아니라 자아를 표현하고 방어하는 수단이 됩니다.

 

반대로 같은 직장에 같은 시기에 들어가 비슷한 월급을 받은 동기는 해외여행을 포기하고 본가에서 출퇴근하며 차도 사지 않았습니다. 윤서 씨는 그런 동기를 ‘좀 재미없게 산다’고 생각했지만 몇 년 뒤 그 동기에게는 전세보증금이 생겼습니다. 영상은 이를 매우 인상적으로 표현합니다. ‘그날 그 방에서 가장 비싼 선물을 들고 온 사람이 모아둔 돈은 가장 적은 사람이었다.’ 지금 보이는 풍요와 실제로 축적된 삶의 기반이 서로 반대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절제’의 의미를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절제는 좋은 것을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누릴 수 있는 좋은 것을 더 큰 선을 위해 스스로 제한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여행이 나빠서 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집을 마련한다는 더 큰 목적 때문에 이번 여행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커피가 나빠서 마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세운 목적을 위해 오늘의 욕구를 뒤로 미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제에는 반드시 ‘미래’가 들어 있습니다. 지금의 나뿐 아니라 미래의 나까지 사랑할 수 있어야 절제가 가능합니다.

 

이 영상에서 ‘경험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는 대목은 특히 오늘날의 소비문화를 정확하게 건드립니다. 윤서 씨는 오사카 콘서트에 120만 원을 쓰면서 ‘물건이 아니라 경험이고 평생 기억에 남을 밤’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상에 따르면 그는 직장생활 8년 동안 해마다 여러 차례 해외여행을 했고 여행비로만 2천만 원 이상을 사용했습니다. 그 결과 휴대전화에는 8년치 여행 사진이 쌓였지만 통장에는 200만 원 정도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여행하지 말라’는 결론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천국의 삶은 금욕 자체를 선으로 삼지 않습니다. 문제는 질서입니다. 유용을 위한 휴식, 가족과의 여행, 아름다운 것을 경험하는 기쁨은 충분히 좋은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험은 남으니까 괜찮다’는 말 역시 무제한적인 소비를 정당화하는 교리가 될 수 있습니다. 경험도 소비입니다. 기억은 남지만 지불한 돈 역시 사라집니다. 따라서 ‘좋은 경험인가?’와 함께 ‘지금 내 형편에 맞는 경험인가?’도 물어야 합니다.

 

더 심각한 장면은 어머니가 8년 동안 매달 5만 원씩 넣어준 청약통장을 깨는 부분입니다. 어머니는 ‘이건 절대 깨지 마. 나중에 너 집 구할 때 쓰는 거야’라며 딸의 미래를 위해 돈을 모아주었습니다. 그런데 윤서 씨는 설 연휴 여행 잔금을 내기 위해 그 통장을 해지합니다. 그러면서 ‘어차피 결혼하면 남자친구 쪽에서 집은 해결되잖아’라고 생각합니다. 이 순간 문제는 더 이상 단순한 소비습관이 아닙니다. 자기 미래를 준비해야 할 책임을 다른 사람의 축적 위에 올려놓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남자친구의 말이 영상 전체를 관통합니다. ‘나는 네가 돈을 못 모으는 것보다 달라질 생각이 없다는 게 무서워.’ 그리고 이어서 ‘나는 그 돈을 9년 동안 모았어. 차도 안 바꾸고 여행도 1년에 한 번만 가면서. 그게 너랑 같이 쓰기 싫다는 게 아니야. 같이 모을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다는 거야.’ 이것은 결혼에 관한 상당히 중요한 통찰입니다.

 

결혼은 ‘내 것과 네 것을 합치는 것’이기 전에 ‘내 삶의 방향과 네 삶의 방향을 합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에게 8천만 원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 200만 원밖에 없다는 사실만으로 결혼의 적합성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삶에는 질병, 가족부양, 학업, 실직, 사업 실패 등 수많은 사정이 있습니다. 많은 돈을 모았다고 반드시 성실한 것도 아니며 모은 돈이 적다고 반드시 무책임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돈을 대하는 ‘방향’이 완전히 다르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한 사람은 오늘의 만족을 줄여 미래를 준비하고, 다른 사람은 미래의 자원을 끌어와 오늘을 즐깁니다. 한 사람은 ‘먼저 모으고 남은 돈을 쓰자’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먼저 쓰고 남으면 모으자’고 생각합니다. 이런 두 사람이 결혼하면 단순히 통장만 합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상의 표현대로 ‘두 사람이 돈을 쓰는 방식도 한 통장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결혼 전에 서로의 연봉만 확인할 것이 아니라 돈에 대한 ‘사랑의 방향’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결혼애’(Conjugial Love, 1768, CL)에서 스베덴보리가 바라보는 참된 결혼의 핵심에는 두 마음의 결합이 있습니다. 결혼은 몸과 재산과 주거의 결합만이 아니라 삶의 목적과 의지의 결합을 향해 갑니다. 그렇다면 돈은 결혼의 본질은 아니지만 두 사람의 내면을 드러내는 매우 현실적인 창이 될 수 있습니다. 무엇에 기꺼이 돈을 쓰는지, 무엇을 위해 기꺼이 참는지, 무엇을 위해 저축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가 어느 정도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영상 속에서 가장 흥미로운 숫자는 어쩌면 8천만 원과 200만 원이 아닙니다. 남자친구는 9년 동안 매주 일요일 밤 10분씩 자신이 쓴 돈을 기록했습니다. 반면 윤서 씨는 자신의 월 지출이 월세를 제외하고 약 150만 원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 최근 3개월 평균 카드 사용액은 238만 원이었습니다. 배달은 한 달 23번, 택시는 19번이었습니다. 남자친구가 특별한 투자 천재여서 돈을 모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돈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도 의미심장합니다. 거듭남 역시 먼저 ‘보는 것’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지 않는 사람은 그것을 고칠 수도 없습니다. ‘나는 그렇게 많이 쓰지 않아’라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 기록을 보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화를 잘 안 내’, ‘나는 남을 판단하지 않아’, ‘나는 돈에 욕심이 없어’, ‘나는 가족을 위해 살고 있어’라는 자기평가와 실제 하루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다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진리는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자신이 아니라 실제 자신을 보게 합니다.

 

그래서 가계부와 영적 자기성찰 사이에는 뜻밖의 닮은 점이 있습니다. 둘 다 ‘기록하지 않으면 모른다’는 것입니다. 돈도 작은 지출들이 모여 큰 흐름이 되고, 영적 삶도 작은 허용들이 쌓여 습관이 됩니다. 5천 원짜리 커피 한 잔이 가계를 무너뜨리지 않듯 한 번의 짜증이 사람을 악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반복되는 작은 선택은 어느 순간 삶의 방향이 됩니다.

 

그리고 영상 속 윤서 씨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영상은 일곱 번째 특징을 ‘돈이 없는 이유를 문제로 보지 않는다’고 정리합니다. 그는 돈이 없다는 사실 자체보다 ‘결혼하면 합치면 된다’, ‘집은 남자친구 돈으로 해결하면 된다’, ‘혼수는 엄마가 해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즉 자신의 삶에서 생긴 문제를 자신의 변화가 아니라 외부의 자원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이것은 돈을 넘어서는 인간의 오래된 성향입니다. ‘환경이 좋아지면 나는 괜찮아질 거야’, ‘좋은 배우자를 만나면 행복해질 거야’, ‘돈이 많아지면 절약할 거야’, ‘시간이 생기면 말씀을 읽을 거야’, ‘상대가 먼저 달라지면 나도 달라질 거야.’ 그러나 거듭남은 언제나 ‘지금 여기의 나’에게서 시작됩니다. 주님은 내가 다른 환경에 들어간 뒤의 나를 먼저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가 자유롭게 선택하는 작은 것들을 통해 나를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이 영상의 핵심은 ‘30대 여자는 얼마를 모아야 하는가?’가 아닙니다. 더구나 ‘모은 돈이 적은 사람은 결혼상대로 부적합하다’는 결론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지금까지 어떤 방향으로 살아왔으며, 그 방향에 문제가 있음을 보았을 때 바꿀 의지가 있는가?’입니다. 남자친구 역시 액수가 아니라 바로 그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달라질 생각이 없어 보여서’였습니다.

 

이것은 주님 앞에서 우리의 영적 삶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미 완성된 사람이어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고쳐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진리의 빛 가운데 보았을 때 계속 변명하며 붙드는가, 아니면 ‘주님, 이것이 제 안에 있었군요’ 하며 돌이키는가 하는 것입니다. 완성된 상태보다 방향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영상 마지막의 장면이 의미심장합니다. 어머니는 딸이 결혼할 때 집을 구하는 데 쓰라고 8년 동안 청약통장을 부어주었지만 딸은 그 돈을 여행과 카드값에 사용했습니다. 딸은 ‘결혼하면 남자친구의 통장이 집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영상은 이를 ‘엄마는 딸이 결혼하면 그 통장이 집이 될 거라고 믿고 있었고, 딸은 결혼하면 남자친구의 통장이 집이 될 거라고 믿고 있었다. 둘 중 어느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정리합니다.

 

참 인상적인 문장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사라진 것은 통장만이 아닙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위해 오늘 무엇인가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능력이 약해져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8년 동안 매달 5만 원씩 미래를 선택했지만 딸은 그 미래를 현재의 여행으로 바꾸었습니다. 이 차이는 액수의 차이가 아니라 시간에 대한 태도의 차이입니다.

 

거듭남 역시 그렇습니다. 오늘의 proprium은 언제나 ‘지금’을 원합니다. 지금 인정받고 싶고, 지금 화를 내고 싶고, 지금 즐기고 싶고, 지금 내 뜻대로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더 먼 것을 보게 하십니다. 지금 한 번 참는 것, 지금 한 번 정직해지는 것, 지금 한 번 욕구를 내려놓는 것이 즉시 큰 기쁨을 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작은 선택들이 모여 영원한 성품을 형성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축’은 그 자체가 영적인 선은 아니지만 ‘절제’와 ‘질서’와 ‘미래를 위한 현재의 포기’를 연습하는 매우 현실적인 장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돈을 많이 모았다는 사실 자체가 영적 성숙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탐욕 때문에 돈을 모을 수도 있고, 이웃을 외면하면서 자기 재산만 쌓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모았는가’보다 ‘무엇을 사랑하기 때문에 모으고, 무엇을 사랑하기 때문에 쓰는가’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을 보고 통장 잔액보다 먼저 물어볼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무엇에는 너무 쉽게 “이 정도는 괜찮아”라고 말하는가?’, ‘내가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소비하는가?’, ‘내가 오늘 누리는 것 때문에 미래의 누군가가 대가를 치르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무엇보다 ‘문제를 발견했을 때 나는 변명하는 사람인가, 방향을 바꾸는 사람인가?’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마지막에 비추어야 할 곳은 윤서 씨의 통장이 아니라 결국 우리 자신의 내면입니다. ‘왜 이것밖에 없지?’라는 질문을 돈에만 던질 필요는 없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는데 내 안에 체어리티는 얼마나 쌓였는가, 수없이 말씀을 읽었는데 내 성품에는 무엇이 남았는가, 많은 은혜와 진리를 받았는데 그것들은 실제 삶에서 어떤 선으로 축적되었는가를 돌아볼 수도 있습니다.

 

돈은 쓰면 사라지지만 선은 행할수록 사람 안에 남습니다. 오늘의 작은 선택이 쌓여 통장의 잔액이 되듯, 매일의 작은 의지와 행동이 쌓여 결국 그 사람의 삶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영상이 던지는 가장 깊은 질문은 ‘서른세 살에 얼마를 모았는가?’가 아닐 것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쌓으며 살아왔는가?’ 그리고 ‘지금의 방향으로 계속 간다면 내 안에는 과연 무엇이 남게 될 것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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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1, AC.469-474 심화

2,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은 어떻게 다른가?’

 

창1:26에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되어 있고, 창5:1에는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드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형상’과 ‘모양’을 비슷한 의미의 반복으로 읽기 쉽지만, AC.472-473에서 스베덴보리는 두 표현을 분명히 구별합니다.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은 영적 인간을, ‘하나님의 모양’(likeness of God)은 천적 인간을 의미하며, ‘형상은 모양을 위한 준비 단계’라고 설명합니다.

 

이 구별은 AC.472의 ‘창조하다’(create)와 ‘만들다’(make)의 구별과 연결됩니다. 사람이 새롭게 ‘창조된다’는 것은 거듭나서 영적 인간이 되는 것이고, 그렇게 영적 인간이 된 사람이 더욱 온전하게 ‘만들어진다’는 것은 천적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두 설명을 함께 놓으면 ‘창조-영적 인간-형상’과 ‘만듦-천적 인간-모양’이라는 거듭남의 질서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거듭남의 시작과 진행 가운데 주님의 질서가 사람 안에 나타나기 시작한 상태이고, 하나님의 모양은 그 질서가 사랑과 삶에 더욱 온전히 자리 잡은 상태입니다.

 

영적 인간은 진리와 신앙을 통하여 선과 사랑으로 나아갑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것이 진리임을 인정하며, 그 진리에 따라 자신의 삶을 바로잡아 갑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는 아직 싸움이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과 주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것 사이에서 갈등하고, 진리이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며 순종해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미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에 따라 살려고 하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주님의 것이 그의 생각과 삶 안에서 비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질서가 더욱 깊어집니다. 그는 단지 진리가 명령하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데 머물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고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보고 행합니다. 그래서 AC.473은 천적 인간이 주님의 ‘모양’인 이유를 ‘전적으로 주님의 다스림을 받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를 외적으로 억압하고 통제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의지와 사랑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기쁘게 받아들이므로,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점점 그의 자유와 기쁨이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모양’이 ‘실제적인 닮음’(real replica)이라는 표현도 사람이 신적인 존재가 되거나 주님과 동일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은 언제나 피조물이고 생명 자체는 오직 주님께 있습니다. 다만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려는 것을 내려놓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을 받아 살아갈수록, 그의 생각과 의지와 행위 안에서 주님의 사랑과 질서가 더욱 실제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적 인간은 영적 인간보다 더욱 실제적인 ‘모양’이 됩니다.

 

그러므로 ‘형상에서 모양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외형이 점점 하나님처럼 변한다는 뜻이 아니라, 거듭남의 중심이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진리를 알고 믿고 순종하는 데서 시작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진리를 사람의 사랑과 의지에까지 심으십니다. 마침내 사람은 ‘진리이기 때문에 억지로 행하는 상태’에서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쁘게 행하는 상태’로 나아갑니다. 신앙이 사랑으로 들어가고, 진리가 선과 결합하며, 외적인 순종이 내적인 기쁨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태고교회를 ‘천적 교회’라고 부르는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고유한 상태는 단순히 많은 진리를 알고 있었던 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을 중심으로 살았으며, 그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하는 퍼셉션을 누렸습니다. 그러므로 창5:1에서 태고교회를 다시 소개하면서 단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드셨다’고 하는 것은, 이 교회의 고유한 천적 상태를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차이는 거듭남이 어디를 향하여 가는지를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진리를 주셔서 먼저 당신의 ‘형상’을 이루시고, 거기에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그 진리를 사랑과 결합시키고 우리의 의지와 삶 속에까지 심으셔서, 우리가 점점 당신의 ‘모양’을 닮아 가도록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목적은 단지 올바른 진리를 많이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가 사랑이 되고 그 사랑이 삶이 되어 주님의 선이 우리를 통하여 나타나는 사람이 되는 데 있습니다. (AC.469-474 심화 2)

 

 

 

AC.474, 창5:1,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나아간 태고교회’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4그러므로 여기서 다루는 주제는 태고교회의 출생 또는 번성(birth or propagation)이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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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9-474 심화 1, ‘태고교회는 왜 집안과 일가와 민족으로 구별되어 있었는가?’

AC.469-474 심화1, ‘태고교회는 왜 집안과 일가와 민족으로 구별되어 있었는가?’ AC.470-471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 시대의 사람들이 ‘집안’(house), ‘일가’(family), ‘민족’(nation)으로 구별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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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8 심화

‘리메인스가 없으면 왜 사람은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가?’

 

AC.468에는 매우 강한 표현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모든 사람 안에 리메인스를 보존하지 않으신다면 그는 필연적으로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 생명과 천적 생명이 리메인스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리메인스가 무엇이기에 인간의 영원한 생명과 이처럼 직접 연결되는 것일까요?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리메인스를 단순히 어린 시절의 좋은 기억이나 과거에 배운 종교적 지식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리메인스는 주님께서 사람의 내면에 저장하고 보존하시는 선과 진리, 그리고 그것들과 연결된 순진함, 사랑, 자비, 체어리티 등의 상태입니다. 특히 사람이 아직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완전히 사로잡히기 전, 부모를 신뢰하고 이웃에게 호의를 품으며 주님과 천국에 관한 선한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주님은 그러한 상태들을 사람의 내면에 보존하십니다. 사람은 나중에 그것을 의식적으로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주님은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리메인스는 사람이 스스로 쌓아 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쓰는 영적 저축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그의 내면에 보존하시는 것입니다.

 

왜 이것이 그렇게 중요할까요? 사람이 성장하면서 프로프리움(proprium), 곧 자기 자신의 것에 깊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만으로는 사람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욕망과 거짓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만일 사람 안에 이것과 다른 근원에서 온 것이 전혀 없다면, 주님께서 그에게 역사하실 접점도 남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존하신 리메인스 안에는 사람이 한때 받아들였던 선과 진리, 순진함과 체어리티의 상태가 있습니다. 주님은 거듭남의 과정에서 바로 이것들을 사용하여 사람을 자기중심적인 생명에서 돌이키고 선과 진리를 다시 받아들일 수 있게 하십니다.

 

따라서 리메인스가 구원한다는 말은 리메인스 자체가 주님과 별도로 어떤 구원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리메인스가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주님께서 친히 사람 안에 보존하신 것이며, 훗날 그 사람을 거듭나게 하실 때 사용하시는 기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리메인스의 교리는 결국 인간의 공로에 관한 교리가 아니라 주님의 선행하시는 자비와 섭리에 관한 교리입니다. 사람이 아직 자신의 거듭남을 생각하지도 못하던 때부터 주님은 이미 훗날 그를 살리실 것을 준비하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주님은 사람을 강제로 선하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선과 악, 참과 거짓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어야 하며, 그래야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자신의 의지와 이성으로 받아들여 마치 자기 것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리메인스는 이러한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하도록 사람의 내면에 보존된 천국적인 기반이 됩니다. 악과 거짓의 영향만 있고 그 반대편에 주님께서 보존하신 선과 진리의 상태가 전혀 없다면 참된 영적 선택과 거듭남의 가능성도 성립할 수 없습니다.

 

AC.468이 개인의 리메인스와 교회 전체의 리메인스를 나란히 설명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한 사람 안에서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는 것처럼, 인류 전체 안에서도 주님은 참된 교회와 신앙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언제나 어떤 사람들을 남겨 두십니다. 홍수 직전의 ‘노아’가 바로 그 원리를 보여 줍니다. 온 땅이 부패했다고 표현될 만큼 교회가 황폐해졌지만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보존하신 마지막 리메인스가 있었고,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고대교회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개인의 거듭남과 인류 가운데 교회가 다시 일어나는 일이 같은 영적 원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서에서 ‘남은 자’가 반복해서 등장하고, ‘십’과 ‘십분의 일’이 리메인스를 표상합니다. 사6:13의 모든 것이 베임을 당한 뒤에도 남아 있는 ‘거룩한 씨’, 암5:3의 백 명 가운데 남은 열 명, 창18:32의 소돔에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멸하지 않겠다는 말씀은 모두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보존하시는 것’이라는 원리를 보여 줍니다. 중요한 것은 숫자의 크기가 아니라 주님께서 남겨 두신 선과 진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리메인스가 없으면 영원히 멸망한다’는 AC.468의 말씀은 사람을 두렵게 하기 위한 표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인간의 구원이 얼마나 철저하게 주님의 선행하시는 역사에 의존하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언제 어떤 선을 받아들였으며 그것이 자신의 내면 어디에 보존되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알고 계시며, 사람이 훗날 거듭남의 길에 들어설 때 그것을 불러내어 사용하십니다.

 

이 점에서 ‘노아’는 우리 각 사람의 거듭남을 비추는 매우 깊은 표상이 됩니다. 우리 안의 상태가 아무리 황폐해지고 선과 진리가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여도, 주님께서 보존하신 것은 인간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은 곳에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지키시고 때가 되었을 때 사용하시며,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영적 생명을 시작하십니다. 그러므로 리메인스는 단순히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다시 주님께 돌아가고 거듭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오래전부터 그의 내면에 준비하고 보존해 두신 생명의 씨앗입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AC.468은 ‘영적 생명과 천적 생명이 리메인스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AC.468 심화)

 

 

 

AC.468, 창5, ‘노아는 교회에 남아 있던 마지막 리메인스를 가리킨다’

속뜻 AC.468앞 장에서 말하고 보여 준 것으로부터, 이름들이 이단과 교리를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장의 이름들이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들을 뜻하며, 여기서는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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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은 처음부터 시청자의 감정을 한쪽으로 강하게 끌고 갑니다. 결혼 전에는 ‘요즘 누가 외벌이를 해? 나도 300 버는데 그걸 왜 놔?’라고 말했던 아내가 임신 후 회사를 그만두고,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한 뒤에도 직장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남편은 월급 380만 원으로 세 식구의 생활비와 대출을 감당하면서 점심값까지 아끼는데, 아내는 어린이집 등원 후 친구들과 카페와 브런치 식당을 다니고 필라테스를 등록하고 제주 여행까지 갑니다. 영상 첫 장면부터 남편의 통장에는 11만 원밖에 남지 않았는데 아내는 ‘내가 얼마나 힘든 줄 알아? 나 요즘 숨 돌릴 틈이 하나도 없어’라고 말합니다. 이런 구성이라면 시청자가 남편에게 감정이입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먼저 영상이 만들어 놓은 감정의 자리에서 조금 물러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요즘 여자들은 편하게 살려고 전업주부가 되려 한다’는 식으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영상 자체도 육아 때문에 실제로 직장을 떠날 수밖에 없는 여성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또한 전업주부라는 삶의 형태 자체를 잘못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마지막에 영상이 정확하게 짚듯이 ‘문제는 전업주부라는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결혼 전에 한 사람이 ‘나는 아이를 낳으면 집에서 아이를 키우며 살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상대가 그것을 알고 동의했다면 그것은 두 사람이 함께 선택한 결혼의 모습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영상의 진짜 문제가 드러납니다. ‘맞벌이냐 외벌이냐’가 아니라 ‘진실이 있었느냐’입니다. 남편은 결혼 전 자신의 월급명세서를 보여주면서 혼자 벌어 대출을 갚고 아이까지 키울 자신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합니다. ‘우리 둘 다 계속 일하는 거 맞지?’라고 명시적으로 확인합니다. 아내는 ‘당연하지’라고 대답합니다. 남편은 그 대답을 기초로 결혼 후의 경제생활을 계산했고, 실제 신혼 1년 동안 두 사람은 함께 일하며 적금을 붓고 내 집 마련을 계획합니다. 따라서 이 약속은 연애 중 흘려들은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결혼생활의 구조를 결정한 중요한 전제였습니다.

 

그런데 영상 후반부에서 아내는 마침내 ‘나 다시 회사 다니고 싶지 않아. 애 때문이 아니야. 그냥 그 길로 돌아가기 싫어’라고 고백합니다. 남편에게 결정적으로 아팠던 것은 아내가 직장생활을 싫어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차라리 결혼 전에 이 말을 들었다면 적어도 선택이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를 얼마나 존중하시는가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참된 자유에는 진리가 필요합니다. 사실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는 온전한 선택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상대에게 중요한 사실을 감춘 채 그의 선택을 받아냈다면 외형적으로는 상대가 자유롭게 결정한 것처럼 보여도 그 자유의 토대는 훼손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결혼에서 정직은 단순히 ‘거짓말을 하지 않는 예의’ 정도가 아닙니다. 배우자의 자유를 존중하는 사랑의 한 형태입니다. ‘나는 아이를 낳으면 직장을 그만두고 싶다’, ‘나는 외벌이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 ‘나는 자녀를 꼭 원한다’, ‘나는 부모를 모시고 살고 싶다’, ‘나는 빚이 이만큼 있다’ 같은 문제들은 결혼 전에 솔직하게 밝혀야 합니다. 상대가 그 사실을 알고도 나와 결혼할 것인지를 선택할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는 결혼을 얻기 위해 상대가 싫어할 만한 사실을 감추는 순간, 사랑은 이미 상대를 위한 사랑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사랑’ 쪽으로 기울기 시작합니다.

 

이 지점에서 proprium이 아주 교묘하게 나타납니다. proprium은 언제나 ‘나는 이기적이다’라는 얼굴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냅니다. 영상 속 아내에게 처음에는 ‘돌까지’라는 이유가 있었고, 돌이 지나자 ‘두 돌까지’, 다시 아이가 어린이집에 들어가자 ‘아프면 누가 데리러 가느냐’, ‘경력 단절 여성을 누가 뽑아주느냐’라는 새로운 이유가 등장합니다. 남편이 하나를 해결하면 또 다른 이유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밝혀진 내면의 실제 이유는 훨씬 단순했습니다. ‘나는 다시 회사에 다니고 싶지 않다’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자기기만의 무서운 점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먼저 정해 놓고 그 욕구를 정당화할 이유를 나중에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육아, 건강, 가족, 희생처럼 선한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 자기 자신조차 속이기 쉽습니다. ‘나는 편하고 싶다’고 말하면 양심에 걸리지만 ‘아이를 위해서다’라고 말하면 스스로도 선한 사람처럼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외적 명분보다 그 아래 있는 사랑, 곧 ‘무엇을 위해 이것을 원하는가’를 봅니다. 주님 앞에서는 명분보다 동기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영상 속 아내의 지난 3년을 ‘놀았다’고 단순화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출산과 초기 육아가 실제로 매우 힘든 노동이라는 사실은 영상 자체도 인정합니다. 아이가 태어난 첫 1년 동안 남편 역시 아내가 일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루 종일 아이를 돌보는 것 자체가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례의 문제를 ‘밖에서 돈을 벌지 않으면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가정 안의 노동 역시 실제 노동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중요한 것은 노동의 시장가격보다 그 노동이 공동의 선을 위해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부부 사이의 ‘공동의 짐’이 무너졌다는 데 있습니다. 남편이 원하는 것도 처음부터 반드시 월 300만 원짜리 정규직 복귀는 아니었습니다. 하루 네 시간, 월 100만 원 정도라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원했던 것은 영상의 표현대로 ‘우리 집 돈 문제를 둘이 같이 들고 있다는 감각’이었습니다. 이 문장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결혼은 모든 일을 정확히 50 대 50으로 나누는 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시기에는 한 사람이 돈을 더 벌 수 있고, 어떤 시기에는 다른 사람이 육아를 더 맡을 수 있으며, 질병이나 실직이 생기면 한쪽이 거의 전부를 감당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양이 똑같으냐가 아니라 ‘우리가 이것을 함께 지고 있느냐’입니다.

 

‘결혼애’(Conjugial Love, 1768, CL)에서 스베덴보리가 바라보는 결혼의 핵심 역시 두 사람이 점차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데 있습니다. 참된 결혼에는 ‘하나가 되고자 하는 의지’가 있습니다(CL.215). 그렇다면 결혼생활에서 돈은 ‘당신 돈’과 ‘내가 쓸 돈’으로 완전히 분리될 수 없고, 육아 역시 ‘당신이 맡아야 할 일’이 될 수 없으며, 집안일 역시 한 사람의 고정된 운명이 될 수 없습니다. 서로의 형편과 능력과 시기에 따라 역할은 달라질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을 ‘우리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내적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상 속 가장 심각한 장면은 어쩌면 카페도 필라테스도 제주 여행도 아닙니다. 아내가 ‘당신 월급으로 못 사는 것도 아니잖아’라고 말하는 장면입니다. 이 말 안에서는 남편의 노동이 이미 ‘우리 가정을 위해 한 사람이 감당하는 희생’이 아니라 그냥 매달 들어오는 380만 원으로 변해 있습니다. 남편이 점심값 6천 원을 아끼고, 야근하고, 막차를 타기 위해 뛰고, 회사에서 자리가 흔들릴까 두려워하는 과정은 사라지고 결과인 월급만 남습니다. 사람은 사라지고 기능만 남은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감동 주는 일본 여자와 눈치 주는 한국 여자’ 영상과도 묘하게 연결됩니다. 그 영상의 핵심은 ‘상대가 한 일을 알아봐 주는가’였습니다. 이번 영상에서도 남편이 무너진 이유는 단순히 돈이 부족해서만은 아닙니다. 자신의 부담과 두려움이 배우자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영상 후반부는 외벌이 남편들이 ‘수고했다’보다 ‘당신이 뭘 아느냐’는 말을 더 많이 듣고, 그래서 결국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된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남편에게만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전업주부의 가사와 육아를 남편이 ‘집에서 하는 게 뭐가 힘들어?’라고 말한다면 정확히 같은 오류입니다. 배우자의 수고를 보지 않고 그 역할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남편의 월급도 당연하지 않고 아내의 밥과 빨래와 육아도 당연하지 않습니다. 어느 한쪽이 ‘나는 원래 해야 할 일을 하고 있고 당신도 원래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감사가 사라지고 결혼은 사랑의 공동체에서 권리와 의무의 거래로 바뀌기 쉽습니다.

 

영상 속 아내에게 또 하나 나타나는 것은 ‘비교’입니다. ‘내 친구 남편들은 그런 거 안 따져’, ‘지은이 남편은 애 어린이집 보내면 필라테스라도 다니라고 한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영상에 따르면 그 비교 대상의 경제적 조건은 이 가정과 상당히 달랐습니다. 비교의 문제는 다른 가정의 ‘결과’만 가져오고 그 결과를 가능하게 한 조건은 가져오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다른 집의 여행, 자동차, 주택, 육아 방식, 소비 수준만 바라보면 내 배우자는 계속 부족한 사람이 됩니다. 이것은 결혼 안에서 체어리티를 매우 빠르게 말라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한 가지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나는 힘들다’는 말이 한 사람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내가 육아 때문에 힘들다고 말할 권리가 있다면 남편도 생계 때문에 두렵다고 말할 권리가 있습니다. 남편이 직장에서 힘들다고 말할 권리가 있다면 아내 역시 하루 종일 아이와 씨름하며 지쳤다고 말할 권리가 있습니다. 사랑은 ‘누가 더 힘든가’를 판정하는 경쟁이 아닙니다. 한쪽의 고통이 다른 쪽의 고통을 무효화하지 않습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나도 힘들어’라고 상대의 고통을 덮기 전에 ‘당신도 힘들었구나’를 말할 수 있는 데서 시작합니다.

 

이 영상의 마지막 해결 과정에서 그래서 눈여겨볼 것이 있습니다. 남편은 결국 가계부 전체를 식탁에 펼쳐 놓습니다. 그리고 ‘석 달 안에 하루 네 시간이든 재택이든 일을 시작하자’, ‘그때까지 가족카드 한도를 줄이자’, ‘일을 시작하면 등원과 주말 오전은 내가 맡고 아이가 아프면 연차를 번갈아 쓰자’는 구체적인 조건을 제시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남편이 아내를 굴복시켰다’고 읽을 장면은 아닙니다. 적어도 영상의 서사 안에서는 그동안 감정과 변명 속에 묻혀 있던 문제를 ‘현실의 숫자와 구체적인 역할’ 앞으로 가져온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도 한 가지를 덧붙입니다. 결혼에서 상대를 변화시키는 궁극적인 방법은 명령과 압박이 아니라 진리와 자유입니다. 가계의 실제 형편을 함께 보고, 서로의 수고를 정확하게 말하고, 무엇을 감당할 수 있고 무엇을 감당할 수 없는지를 진실하게 밝힌 뒤 두 사람이 자유롭게 공동의 질서를 다시 세워야 합니다. ‘내가 돈을 버니 내 말을 들어라’도 잘못이고 ‘내가 아이를 낳고 키웠으니 당신이 모든 경제적 책임을 져라’도 잘못입니다. 둘 다 자신의 기여를 상대를 지배할 권리로 바꾸는 순간 사랑의 질서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영상에서 가장 아픈 지점은 어쩌면 돈도, 직장도, 카페도 아닙니다. ‘결혼 전에 알았더라면 선택할 수 있었을 텐데’라는 남편의 말입니다. 결혼은 상대의 자유로운 ‘예’를 받아 이루어지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그 ‘예’를 얻기 위해 중요한 진실을 감춘다면 상대는 내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가 아니라 내가 보여준 사람에게 ‘예’라고 한 셈이 됩니다. 그래서 사랑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말을 하면 이 사람이 나와 결혼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어도 말해야 할 것은 말하는 용기입니다. 그것이 상대의 자유를 존중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결혼 전에 정말 물어야 할 것은 ‘맞벌이할 거지?’ 하나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돈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아이를 낳으면 누가 어느 정도 일을 줄일 것인가?’, ‘한 사람이 직장을 그만두고 싶어지면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가사와 육아는 어떻게 나눌 것인가?’, ‘부모의 도움은 어디까지 받을 것인가?’, ‘소비 수준을 어디에 맞출 것인가?’ 같은 질문입니다. 영상은 날짜와 금액까지 구체적으로 정하라고 조언합니다. 실제 삶에서는 모든 미래를 계약서처럼 정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서로가 어떤 삶을 원하는지는 숨기지 않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결국 이 영상의 제목도 조금 달라집니다. ‘왜 이 여자는 전업주부를 원하게 되었을까?’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나는 배우자에게 내 진짜 욕구를 얼마나 정직하게 보여주고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선한 명분을 이용하고 있지는 않은가?’입니다. 이것은 영상 속 아내에게만 던질 질문이 아닙니다. 남편에게도, 아내에게도, 결혼을 준비하는 사람에게도, 이미 수십 년을 함께 산 부부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거듭남은 자기 욕구가 없는 사람이 되는 과정이 아닙니다. 자기 욕구를 진실의 빛 가운데 바라보는 과정입니다. ‘나는 직장에 돌아가기 싫다’면 먼저 그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배우자에게도 솔직히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외벌이를 감당하기 두렵다’면 그것 역시 숨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각자의 두려움과 욕구를 진리 가운데 꺼내 놓을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을 함께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월 380만 원도, 61만 원의 카페와 브런치 비용도, 1억 800만 원의 사라진 소득도 아닐 것입니다. 숫자는 문제를 보이게 했을 뿐입니다. 더 깊은 곳에는 ‘당신이 알고 선택할 수 있도록 나는 나 자신을 진실하게 보여주었는가?’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은 상대에게서 원하는 것을 얻는 기술이 아니라 상대가 자유롭게 나를 선택할 수 있도록 진실한 나를 내어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두 사람이 ‘당신 책임’, ‘내 책임’을 넘어 ‘우리의 짐’이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결혼은 비로소 한 몸의 질서를 향해 갑니다. 한 사람이 돈을 벌든 둘이 벌든, 한 사람이 아이를 더 돌보든 둘이 정확히 나누든 그것은 가정마다 달라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선택 안에 진실과 자유와 상호성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결혼의 핵심은 ‘누가 더 많이 했는가’를 계산하는 데 있지 않고, 두 사람이 자기성을 조금씩 내려놓으며 서로의 선을 원하고 함께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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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0-468 심화

‘창5의 이름들은 왜 사람이 아니라 교리 또는 교회를 의미하는가?’

 

창5를 처음 읽으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족보입니다. ‘아담은 셋을 낳고, 셋은 에노스를 낳고, 에노스는 게난을 낳고...’ 하는 식으로 이름과 나이, 출생과 죽음이 이어집니다. 따라서 문자적으로 읽을 때 이 이름들을 사람의 이름으로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AC.468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단호하게 ‘이 장의 이름들은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닌, 다른 어떤 것들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교리들 또는 교회들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창5의 문자적 형태를 부정한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말씀의 속뜻으로는 이 족보가 전혀 다른 차원의 내용을 담고 있다는 뜻일까요?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은 ‘본문이 족보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과 ‘속뜻으로 그 이름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문제입니다. AC.460-468이 직접 설명하는 것은 후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의 이름들을 통하여 태고교회로부터 노아에 이르기까지 여러 교회와 교리의 상태가 어떻게 이어지고 변화했는지를 읽습니다. 따라서 AC.461의 ‘사람’은 천적이었던 태고교회 그 자체를, AC.462의 ‘셋’은 그보다 덜 천적인 두 번째 교회를, AC.463의 ‘에노스’에서 ‘므두셀라’까지는 세 번째에서 여덟 번째 교회를, AC.465의 ‘라멕’은 아홉 번째 교회를, AC.466의 ‘노아’는 열 번째 교회이자 새로운 고대교회를 나타냅니다. 창5의 족보 전체가 속뜻으로는 ‘교회의 계승과 상태 변화의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창4와 창5를 읽을 때 생기는 중요한 질문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창4에서는 가인과 그의 후손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등장한 뒤 마지막에 아담과 하와에게 셋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창5의 속뜻에서는 셋이 태고교회에 바로 이어지는 ‘두 번째 교회’라고 합니다. 만일 창4와 창5를 하나의 평면적인 연대기적 족보로만 읽으면서 동시에 각 이름을 교회의 순번으로 대응시키려 한다면 이 둘은 쉽게 맞아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읽는 속뜻의 층위에서는 창4와 창5가 각각 교회의 서로 다른 영적 역사를 펼쳐 보입니다. 따라서 창4에서 어떤 이름이 먼저 나오고 나중에 나온다는 문자적 서술 순서를 그대로 창5의 ‘첫 번째 교회, 두 번째 교회...’라는 영적 계승 순서에 옮겨 놓아서는 안 됩니다.

 

특히 AC.468은 이 문제에 중요한 기준을 제공합니다. 앞 장, 곧 창4에서 이름들이 ‘이단과 교리’를 의미한다는 것이 이미 나타났으며, 그로부터 창5의 이름들 역시 사람이 아니라 ‘어떤 것들’, 여기서는 교리 또는 교회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말씀에서 이름이 단순한 호칭을 넘어 그 이름으로 표현되는 영적 성질과 상태를 담을 수 있다는 상응의 원리에 근거합니다. 따라서 ‘에녹’, ‘라멕’, ‘노아’라는 이름을 만날 때 속뜻이 묻는 첫 질문은 ‘이 사람에게 역사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가?’가 아니라 ‘이 이름을 통하여 말씀은 어떤 교회 상태를 나타내는가?’입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곧바로 ‘그러므로 아담, 셋, 에녹, 노아라는 역사적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결론 내리는 것도 AC.460-468이 직접 말하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이 대목에서 스베덴보리가 분명하게 밝히는 것은 ‘속뜻으로는 이 이름들이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역사성 자체에 관한 질문과 속뜻으로는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질문을 구별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우리가 AC를 따라갈 때 우선 붙들어야 하는 것은 후자입니다. 문자적 본문은 족보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그 안에서 주님이 가르치시는 속뜻은 교회와 교리의 상태에 관한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창5의 놀라울 정도로 반복적인 형식도 새롭게 보입니다. 이름이 나오고, 나이가 나오고, 낳았다고 하고, 다시 살았다고 하고, 마침내 죽었다고 하는 동일한 구조가 계속됩니다. 문자적으로는 족보의 반복처럼 보이지만, 속뜻으로는 태고교회에서 시작된 어떤 영적 상태가 다음 교회로 전달되고 변화하며 마침내 쇠퇴해 가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각 이름과 수, 그리고 ‘낳음’과 ‘죽음’의 표현은 이후 본문 해설에서 각각 교회의 상태와 그 변화라는 관점에서 풀리게 됩니다.

 

결국 창5의 이름들을 교회와 교리로 읽는 것은 문자적 본문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자 안에 담긴 더 깊은 말씀의 흐름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표면에는 한 세대가 다음 세대를 낳는 족보가 있고, 그 안에는 한 교회의 상태가 다음 교회의 상태로 이어지는 영적 역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긴 흐름의 끝에서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노아’라는 리메인스가 남습니다. 이것이 창5의 족보를 단순한 고대인의 명단이 아니라, 주님께서 교회를 어떻게 이어 가시고 쇠퇴 가운데서도 어떻게 다음 교회를 준비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게 하는 열쇠입니다. (AC.460-468 심화)

 

 

 

AC.468, 창5, ‘노아는 교회에 남아 있던 마지막 리메인스를 가리킨다’

속뜻 AC.468앞 장에서 말하고 보여 준 것으로부터, 이름들이 이단과 교리를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장의 이름들이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들을 뜻하며, 여기서는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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