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31(D1)-주일예배(2537, 눅24,1-12, 부활절), '다시 살아나신 주님'.pdf
0.45MB
축도.2024-03-31(D1)-주일예배(2537, 눅24,1-12, 부활절), '다시 살아나신 주님'.pdf
0.23MB

 

 

다시 살아나신 주님

 

 

1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4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12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눅24:1-12)

 

사람의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은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 차례로 흘러들어온다. 외적인 것은 호감이 느껴지는 기억의 지식과 가장 바깥쪽의 것인 감각에 속한 것인데, 감각에 속한 것이란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짐으로써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다. 외적인 것에 내적인 것들이 머무는 까닭은 내적인 것의 흐름이 거기서 끝나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로 사람이 걸치는 피복이나 옷으로 나타내어지는 것은 바로 이 외적인 것을 말한다. (천국의 비밀 9216:2, 이순철 역) These also follow in order from interior to exterior things. Exterior things are memory-knowledges with their pleasant feelings; and outermost things are those of the senses, which communicate with the world by the sight, the hearing, the taste, the smell, and the touch. Upon these the interior things rest, for in these they terminate. These are the things which are signified in the spiritual sense by the “covering” or “garment wherein he may sleep.” (AC.9216:2)

 

 

오늘은 부활절, 주님 부활하신 이 아침에 성도들과 함께 주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감사와 영광을 주님께 돌립니다.

 

주님은 왜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을까요? 그와 관련해 새 교회 가르침 “천국의 비밀” 9216번 글 2번 항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은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 차례로 흘러들어온다. 내적인 것들이 외적인 것에 머무는 까닭은 내적인 것의 흐름이 거기서 끝나기 때문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가장 내적 존재인 주님은 가장 외적 존재인 인간에게로 오셔서 영원히 그와 함께 사시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섭리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셨던 무한하신 주님이 당신의 피조물인 유한한 인간과 영원히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는 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은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실 정도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지극히 높은 천국으로부터 지극히 낮은 이 땅으로 내려오셔서 모진 고난을 이기시고, 신성하고 완전한 진리가 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진리를 통해서만 인간은 주님을 바르게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은 완전하고 신성한 진리(Divine Truth)로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1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새벽’은 영적으로, 즉 그 속뜻으로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가 임하는 때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활하신 주님이 완전하신 진리로 인간 앞에 모습을 드러내시는 때이며, 동시에 그 진리를 가지고 낡고 부패한 교회를 심판하시고, 새로운 교회를 여시는 때입니다. 그때가 새벽입니다. 그때 여자들이 향품을 준비해 무덤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여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진리를 사랑하여 참된 진리이신 주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심판 때 구원받을 사람들이며, 주님이 세우시는 새 교회에 참여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자들은 살아계신 주님이 아니라 주님의 시신을 만나러 갑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있는 진리가 죽은 자의 시신처럼 아직 생명 없는 진리라는 반증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시신’은 죽은 진리, 즉 생명 없는 말씀의 지식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처음 진리를 받아들일 때의 진리는 생명이 없는 진리, 못 움직이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창세기 1장 창조의 순서 중 식물부터 먼저 창조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이유는, 처음에는 진리를 믿기만 할 뿐 아직 행동하지는 않기 때문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여자들이 향품을 가지고 주님의 시신에 바르는 것은 죽은 것 같은 진리에 생명을 불어넣는 최초의 노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향품’은 내적 진리를 획득하기 전에 신앙인들이 소유하는 자연적인 진리, 이를테면 십계명의 문자적인 가르침 같은 것을 뜻합니다.

 

여자들이 무덤에 갔을 때,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져 있었고, 그 안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시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덤을 막은 돌’은 뭘까요? 신앙인들의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는 걸 방해하는 여러 가지 자아의 거짓을 뜻합니다. 예를 들면, 진리를 안다는 자부심이나 진리에 대한 잘못된 추론, 또는 그 밖에 이기적인 악과 그것에서 비롯한 거짓들입니다. 우리 안에 그런 것들이 있는 동안에는 진리는 무덤 밖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처음에는 자연적 진리로, 그리고 다음에는 내적 진리로 말씀을 이해하고 지키려고 할 때, 주님에 의해 진리를 방해하던 거짓들이 물러갑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자아의 거짓을 물리칠 수 없고, 심지어 어떤 게 거짓인지도 잘 모릅니다. 거짓들은 마치 칡넝쿨이 나무를 감아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 것처럼 진리가 자라는 걸 가로막습니다. 주님만이 그것들을 잘라내 치워주실 수 있습니다. 그때 죽었던 진리가 살아납니다. 바로 그런 상태가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지는 것이고, 주님이 무덤에서 살아나시는 것입니다.

 

※ 제가 그랬습니다. 저는 이 새로운 계시, 그러니까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새롭게 여신 이 계시를 지난 2017년 가을에 처음 접했습니다. 당시 갈보리교회 강문호 목사님이 충주봉쇄수도원을 준비하시면서 수도사 학교(후에 수도 학교로 개명)를 시작하셨는데, 첫 학기 종강 때인 그해 초여름, 강사로 오신 시흥 영성수련원 원장 박희진 수도사의 권유로 저는 그 후 틈틈이 대전 바이블아카데미를 다니게 되면서 거기 주교재인 ‘핵심진리’를 접하게 되었는데, 거기에 나오는 ‘영계의 구조’에 이 ‘스베덴보리’라는 이름이 나오는 걸 보고 말이지요. 나중에 혹시나 하여 저의 지난날 일지를 보니 과거 제가 부사역자로 있던 교회에서 제가 돌보던 어느 목장 목자를 통해 제 생애 처음으로 이 ‘스베덴보리’라는 이름을 들었더군요. 목장원 중 한 분이 이 이름으로 모이는 무슨 이상한 성경공부 모임에 다닌다는 그런 상담이었습니다. 그때는 그냥 흔한 이단 분파, 신천지 같은 덴 줄 알고 금했죠. 그때가 2011년 2월이었습니다. 아무튼, 지난 2017년 1학기부터 1기생으로 출발한 저는 그때부터 접하는 모든 내용이 지난 50여 년 알아 오던 모든 기존 교리 내지는 신앙의 결을 내려놓고, 완전 새롭게 시작해야만 하는 것들이었는데, 그것은 마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는 것과 같았습니다. 저는 스베덴보리를 스베덴보리 연구회 출판, ‘위대한 선물’로 시작, 이어 그의 많은 저작 중 가장 대중적인 ‘천국과 지옥’으로 만나기 시작했고, 그렇게 이어진 주님의 이끄심으로 현재는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주석인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라틴, 天界秘義) 번역과 함께 이런저런 나름의 활동, 즉 유튜브와 블로그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지경입니다. 더욱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시간을 갖겠습니다.

 

※ 생각해 보면, 누구보다도 특히 교리적인 부분에서는 절대 타협이 없는, 골수도 정말 특이한 골수인 제가 달라도 너무 다른, 완전 그 근본부터 다른 이 아르카나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 역시 주님이 하신 것이며, 처음엔 요나처럼 도망가기 바빴던 저를 그러나 끊임없이 권하시되 마치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듯’ 저로 하여금 주님을 향하게 하신 분 역시 주님이십니다. 오직 주님만이 저를 옴짝달싹, 마치 칡넝쿨처럼 옭아맨, 기존 기독교, 특히 개신교 교리인 ‘오직 믿음’ 교리를 모두 잘라내 치워주셨던 것입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을 치우시고, 살아나신 주님께서 말입니다. 제가 주님의 이끄심으로 스베덴보리를 통해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있었던 것은, 마치 태생적으로 유대교인이었던 주님의 제자들이, 그리고 바울이, 그러나 주님을 만나 자기들의 DNA에 새겨진 것과도 같았던 유대교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과도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지고, 주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자, 여자들은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그 모습을 4절과 5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4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한글 성경에는 여자들이 근심했다고 하지만, 영어 성경에는 perplex, 즉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공황 상태에 빠졌다는 것이지요. 주님이 부활하셨는데 여인들은 기뻐하지 않고, 도리어 왜 공황 상태에 빠졌을까요? 첫째는, 신앙인의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려면 자아에 속한 게 죽어야 하는데, 그때 모든 걸 잃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진리가 살아났다 해도 처음 한동안은 진리가 나를 주장한다는 걸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 앞에 바로 나타나시지 않은 것과도 같은 일일 것입니다. 한마디로,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날 때, 신앙인들은 역설적으로 어디에도 기댈 진리가 없는 것 같은 상실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인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때 그들 곁에 빛나는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두 사람은 누굴까요?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살아있는 진리이신 주님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입은 빛나는 옷’은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가장 밝고 완전한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두 사람’이 나타났다고 했을까요?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는 선만 있고 진리가 없거나 진리만 있고 선이 없는 그런 진리가 아니라, 선과 진리가 함께 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여인들에게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여인들은 주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거라는 말을 듣기는 했으나 실제로 이루어질 거라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이 아직 자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직접 눈으로 봐야만 믿는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천사들을 보고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립니다. 주님이 나타나실 때, 사람들이 두려워 떨거나 죽은 자처럼 되었다는 것은 말씀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계시록을 쓴 요한도 주님의 발 앞에 죽은 자처럼 되었다고 했습니다. 신앙인들이 그렇게 두려워하는 것은 내면에서 어떤 영적 변화가 일어날 때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의미합니다. 주님의 신성이 사람 안으로 임하실 때, 인간이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들이 느끼는 두려움은 일종의 경건한 두려움입니다. 그러면 여자들에게 일어난 내면의 변화란 어떤 것입니까? 그에게서 죽은 진리가 살아나는 것이며, 그로 인해 자연적 신앙이 영적 신앙으로 한 단계 올라서는 것입니다.

 

7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여자들이 마침내 주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사신다고 한 것을 기억해 내고는 무덤에서 돌아가 그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렸습니다. 무덤은 그들이 죽은 진리를 만나던 곳이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사용하던 곳입니다. 이를테면 진리의 지식이 보관된 내면의 기억과 같은 곳이죠. 그러나 진리가 완전히 살아날 때, 이제는 애써 그곳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살아있는 진리, 살아계신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때그때 필요한 진리를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들은 사도들은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 역시 아직은 자연적 신앙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직접 보고 만져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베드로가 주님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그것에 대해 1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12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베드로’란 이름은 진리에 대한 순종을 뜻합니다. 실제로 베드로의 성품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급히 무덤으로 달려가 몸을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봤습니다. ‘무덤으로 달려가는 것’은 진리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뜻합니다. 그리고 ‘몸을 구부려 들여다보는 건’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 안에 있는 진리들을 돌아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 또는 말씀을 대할 때는 언제나 몸을 낮춰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진리가 보이고, 또한 죽었던 진리가 살아나는 것이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때 베드로의 눈에 들어온 것은 뭘까요? 주님의 시신이 아니라 세마포였습니다. ‘세마포’는 주님이 주시는 내적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본 진리는 이전에 알던 생명 없는 지식이 아니라 내적 진리였던 것입니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에게 있던 진리들이 살아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는 건 눈먼 자가 눈을 뜨는 것 이상의 기적입니다. 흔히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살아나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던 기질이 바뀝니다. 그것은 주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기적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모든 일을 놀랍게 여겼다고 합니다. 놀랍게 여겼다는 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절을 맞아 다시 한번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오늘 말씀에서 여자들은 향품으로 표상되는 자연적 진리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자연적 진리란 말씀의 문자로 표현된 진리이며, 내적 진리를 담기 위한 그릇 역할을 하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그 자체로는 아직 완전한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자연적 진리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점차 그 안에 내적 진리를 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는 까닭은, 내적 진리가 자연적 그릇 안에 담길 때, 온전하고 힘 있는 진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옥을 이기신 주님의 능력이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세상에 계실 때, 완전하지 않은 진리의 상태에서 지옥의 시험을 완전히 이기시고, 신성한 진리 자체가 되셨습니다. 만약 주님이 처음부터 신성한 진리 그 자체셨다면, 주님은 시험을 당하실 수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지옥이 감히 주님을 대적하거나 도발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는 시험을 당하시는 주님의 진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만큼 완전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께 기대어 자신에게 있는 진리를 매일 살려야 하고, 더 내적인 진리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온전히 거듭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호6:2)

 

아멘

 

2023-04-0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3-3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

 (계속)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

CONTINUATION CONCERNING HEAVENAND HEAVENLY JOY

 

 

545. 저로 하여금 천국과 천국 기쁨의 본질과 퀄러티에 대해 알게 하시려고 주님은 오랫동안 종종 제가 천국 기쁨의 즐거움을 지각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이런 실제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것을 말로, 글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But in order that I might know the nature and quality of heaven and of heavenly joy, for long and often I have been permitted by the Lord to perceive the delights of heavenly joys, so that as I know them from actual experience I can indeed know them, but can by no means describe them.

 

하지만 제가 다음과 같이라도 말씀드리면 혹시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살짝 가늠하실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천국의 기쁨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즐거움과 기쁨을 수반하는 일종의 어펙션입니다. 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즐거움과 기쁨이 전면적으로 동시에 경험되는 하나의 기쁨인데요, 이 전면적인 기쁨, 즉, 전면적인 어펙션 안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어펙션들이 조화를 이루며 존재합니다. 이때 이것은 하나하나 뚜렷이 지각되는 게 아니고, 모호하게 지각됩니다. 퍼셉션이 매우 전면적이기 때문입니다. However, in order to give some idea of it I may say that heavenly joy is an affection of innumerable delights and joys that form one general simultaneous joy, in which general joy, that is, in which general affection, there are harmonies of innumerable affections that do not come distinctly to perception, but obscurely, because the perception is very general.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허락하심을 받아 그 안, 천국의 기쁨 안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이 내재하고 있음을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말로는 도저히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질서로 내재해 있었는데, 바로 천국의 질서로부터 흐르는 질서였습니다. Yet I was permitted to perceive that there are things innumerable within it, in such order as can never be described, these innumerable things being such as flow from the order of heaven.

 

이런 질서는 그 어펙션 모든 가장 미세한 것에까지 존재하며, 함께 합쳐 그 전체가 하나로 보이고, 그것의 주제, 곧 그 어펙션을 느끼고 있는 그 사람의 역량에 따라 아주 전체적인 것으로 지각됩니다. Such order exists in every least thing of the affection, all of which together are presented and perceived as a very general one according to the capacity of him who is the subject of it.

 

한 마디로, 모든 전반적인 기쁨 혹은 어펙션에는 가장 온전한 형태로 조성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이 존재하지만, 살아있지 않거나 우리 안 가장 내적인 것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천국의 기쁨은 가장 내적인 것들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In a word, in every general joy or affection there are illimitable things ordinated in a most perfect form, and there is nothing that is not alive or that does not affect even the inmost things of our being, for heavenly joys proceed from inmost things.

 

저는 또 지각하기를, 그 기쁨과 상쾌함은 마치 심장에서 나와 모든 가장 미세한 섬유조직들을 통해, 그리고 그렇게 조직 다발 속으로, 즐거움의 가장 내적 감각을 가지고 자신들을 아주 부드럽게 퍼트리는 것 같았으며, 이것은 마치 기쁨과 상쾌함만 남은 섬유조직 같았고, 이런 가운데서 나온 퍼셉션과 감각의 영향권 역시 전체적으로 그 행복하게 살아있는 것이 같았습니다. I perceived also that the joy and deliciousness came as if from the heart, and very softly diffused themselves through all the inmost fibers, and so into the congregated fibers, with such an inmost sense of delight that the fiber is as it were nothing but joy and deliciousness, and the whole derivative perceptive and sensitive sphere the same, being alive with happiness.

 

이들 기쁨들을 육체적 쾌락이 주는 기쁨과 비교하자면, 전자는 맑고 부드러운 산들바람 같다면, 후자는 역겹고 퀘퀘한 먼지와도 같다 할 수 있습니다. In comparison with these joys the joy of bodily pleasures is like gross and pungent dust as compared with a pure and gentle breeze.

 

 

546. 천국에 무척 있고는 싶은데 사실 천국에 있을 수는 없는 그런 사람들의 경우는 어떻게 되는지를 저로 하여금 알게 하시려고, 한번은 제가 하늘 어느 소사이어티에 있을 때, 한 천사가 머리에는 밝게 빛나는 파란 꽃들로 엮은 화관을 쓰고, 가슴에는 다른 색 꽃들로 꾸민 화환을 두른 유아로 제게 나타났습니다. In order that I might know how the case is with those who desire to be in heaven and are not such that they can be there, once when I was in some heavenly society, an angel appeared to me as an infant with a chaplet of bright blue flowers about its head, and girded about the breast with wreaths of other colors.

 

이걸 보고, 저는 그곳이 체어리티가 있는 어느 소사이어티임을 알았습니다. By this I was given to know that I was in some society where there was charity.

 

그때 어떤 착한 영들이 제가 있던 같은 소사이어티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들은 들어오는 순간, 들어오기 전보다 훨씬 더 총명해져서 마치 천사적 영들처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Some well-disposed spirits were then admitted into the same society, who the moment they entered became much more intelligent, and spoke like angelic spirits.

 

그 후, 어떤 영들이 들어왔는데 그들은 스스로 순진무구하기를 원하던 영들이었고, 그중 저에게 표현된 한 영의 상태는 젖을 입 밖으로 토하는 유아의 모습이었습니다. Afterwards some were admitted who desired to be innocent from themselves, whose state was represented to me by an infant that vomited milk out of its mouth.

 

이것이 그들의 상태였습니다. Such is their state.

 

그때 또 어떤 영들이 들어왔는데, 그들은 스스로를 지성적이다, 총명하다 여기던 영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상태가 그들의 얼굴로 표현되었는데, 날카로워 보였으나 매우 고왔습니다. 그들은 날카로운 부분이 돌출된, 끝이 뾰족한 모자를 쓰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런데 그들의 얼굴은 사람의 살처럼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마치 칼로 깎은 듯, 생명이 없는 듯한 얼굴이었습니다. Then some were admitted who supposed that they were intelligent from themselves, and their state was represented by their faces, which appeared sharp, but fair enough; and they seemed to wear a peaked hat from which a sharp point projected, but their faces did not appear to be of human flesh, but as if carved out and devoid of life.

 

이런 것은 스스로를 우리는 영적이다, 즉, 스스로를 우리는 신앙을 가졌다 믿는 사람들의 상태입니다. Such is the state of those who believe that they are spiritual from themselves, that is, able from themselves to have faith.

 

거기 머무를 수 없는 다른 영들이 들어왔는데, 실망들을 하며, 괴로워들을 하더니, 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Other spirits were admitted who could not remain there, but were dismayed, became distressed, and fled away.

2021-07-30(D6)-매일예배(AC.545-546, 창5 C), '창5 클로징,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2)'.hwp
0.07MB

https://youtu.be/3h7B2fLioXI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