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은 앞선 몇 편처럼 오래된 수도사들의 특별한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강문호 수도사가 충주봉쇄수도원에서 직접 겪은 아주 작은 일상에서 시작합니다. 수도원에는 금붕어와 비단잉어 백여 마리가 사는 조그마한 연못이 있는데, 어느 목사님의 제안으로 연못 바닥에 자갈을 깔고 정비하기로 했습니다. 포클레인을 불러 연못을 수리하려면 먼저 그 안의 물고기들을 모두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그래서 강문호 수도사가 직접 연못 안에 들어가 물고기들을 손으로 잡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사정을 알 리 없는 물고기들은 필사적으로 도망칩니다. 자신들을 잡으려는 손이 죽이려는 손이 아니라 살리려는 손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도망가는 물고기들을 보며 속으로 ‘, 이놈들아. 잡혀라. 안 잡히면 포클레인에 깔려 죽는다’고 합니다. 이 짧은 장면이 이번 영상 전체를 여는 하나의 영적 비유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장면을 바라보면 먼저 ‘섭리’가 떠오릅니다. 우리는 흔히 주님의 섭리라 하면 내가 원하는 일이 잘 풀리고, 위험에서 벗어나며, 기도한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섭리는 언제나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모습으로만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붙잡히는 것처럼 느껴지고, 내가 원하는 방향과 반대로 끌려가는 것처럼 느껴지며, 지금까지 편안하게 살던 자리에서 갑자기 옮겨지는 것처럼 경험되기도 합니다. 연못 속 물고기의 눈으로 보면 자기를 붙잡는 손은 위협입니다. 그러나 연못 밖에서 전체 상황을 보고 있는 사람의 눈에는 그 손이 생명을 살리는 손입니다. 물고기는 곧 포클레인이 들어온다는 것을 모르지만 사람은 압니다. 이 작은 차이에서 인간과 주님의 시야가 얼마나 다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은 눈앞의 순간을 보지만 주님은 영원을 보십니다. 우리는 지금 나에게 좋은 것을 구하지만 주님은 그것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가?’라고 묻는 순간에도 주님의 섭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더 먼 곳을 향해 움직이고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고난과 실패를 단순히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다’고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도 선을 위하여 사용하실 수 있으며, 우리가 자유롭게 주님을 향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물고기에게는 붙잡힘이었지만 실상은 구원이었던 그 순간처럼 말입니다.

 

연못을 수리하는 동안 물고기들은 수도원에서 가장 큰 물통으로 사용할 수 있는 목욕탕에 임시로 옮겨집니다. 그런데 넓은 연못에서 살던 물고기들에게 목욕탕은 답답했는지 자꾸 물 밖으로 뛰쳐나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바닥에 떨어진 물고기들을 다시 주워 넣으며 또 말합니다. ‘나오면 죽어. 물 안에 있어.’ 여기서 두 번째 영적 그림이 생겨납니다. 처음에는 ‘잡혀야 산다’였고, 이제는 ‘안에 있어야 산다’입니다. 그리고 강문호 수도사는 자연스럽게 요한복음 15장의 주님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인간도 주님 안에 거하지 않고서는 참된 영적 생명을 가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지점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매우 깊이 만납니다.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인간은 생명의 주인이 아니라 ‘생명을 받아 사는 존재’입니다. 생명 자체는 오직 주님께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는 사랑도, 생각도,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도 그 근원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생명을 인간에게 주시면서 마치 그것이 인간 자신의 것인 것처럼 느끼게 하십니다. 우리가 ‘내가 생각한다’, ‘내가 사랑한다’, ‘내가 선택한다’, ‘내가 살아간다’고 느끼는 것은 정상입니다. 그래야 인간에게 자유와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깨어날수록 사람은 한 가지를 점점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내 안에 있는 참된 생명은 나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바로 이것이 포도나무와 가지의 아르카나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가지는 실제로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가지가 스스로 생명의 근원은 아닙니다. 줄기와 뿌리에서 생명을 받아 열매를 맺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선을 행해야 하고, 실제로 악을 피해야 하며, 실제로 이웃을 사랑하고 맡겨진 쓰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도 ‘이 선은 나에게서 나온 것이다’라고 자기 공로로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을 설명하면서 반복해서 강조하는 중요한 질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행해야 하지만, 동시에 선을 행할 힘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의 ‘잡혀서 살아라’라는 표현도 아름답게 들립니다. 물론 주님께 붙잡힌다는 것은 인간의 자유를 빼앗아 강제로 끌고 가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은 인간의 자유를 지극히 존중하십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억지로 붙잡혀 있는 인간이 아니라, 진리를 알고 그것이 생명의 길임을 깨달아 자유롭게 주님 안에 머물기를 원하는 인간입니다. 처음에는 계명이 나를 붙잡는 울타리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 말라’, ‘용서하라’, ‘사랑하라’, ‘거짓을 버려라’, ‘탐욕을 버려라’ 하는 말씀들이 자유를 제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은 그 계명들이 자신을 가두는 울타리가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지켜 주는 울타리였음을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물 밖으로 뛰쳐나온 물고기를 생각하면 이것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물고기에게 물은 속박이 아닙니다. 물고기가 물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자유의 제한이 아니라 그 존재가 살아갈 수 있는 질서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주님의 계명은 생명을 억압하는 규칙이 아니라 영적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질서입니다. 악을 마음껏 행할 수 있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은 물고기가 물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처음 몇 순간은 어디든 갈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생명 자체를 잃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자유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하는 자유가 아니라, 선을 사랑하고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이 점에서 proprium의 문제가 자연스럽게 나타납니다. 인간의 proprium은 끊임없이 ‘내가 내 삶의 주인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야 자유다’, ‘내 판단이 옳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상태가 주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가지의 모습입니다. 가지가 ‘나는 이제 줄기가 필요 없다’며 나무에서 떨어져 나온다면 그것은 독립이 아니라 죽음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주님 없이 자기 지혜와 자기 능력과 자기 의만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할수록 영적으로는 생명의 근원에서 멀어집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인간의 개성이 없어지는 과정이 아니라, 자기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라는 착각에서 깨어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이어 한 사람의 인상적인 목회 현장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교회에서 어떤 오해가 생겨 약 십 년 동안 교회를 떠나 있던 사람이 어느 날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무당이 굿하는 자리에 있게 되었는데, 굿을 하던 무당이 갑자기 ‘여기 예수 믿는 사람이 있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이 사람의 마음에 놀라운 깨달음이 찾아옵니다. ‘나는 십 년 동안 주님을 떠나 있었는데 주님은 나를 떠나지 않으셨구나. 나는 주님을 버렸는데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구나.’ 그리고 그는 그 일을 계기로 다시 교회로 돌아와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일화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고백일 것입니다. ‘나는 주님을 떠났지만 주님은 나를 떠나지 않으셨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서 자연스럽게 ‘리메인스’를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 안에 선과 진리의 상태들을 남겨 두시고 보존하십니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서 받은 사랑, 말씀을 들으며 느꼈던 거룩한 감동,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순간, 잘못을 뉘우치며 주님을 찾았던 경험 등은 모두 단순히 사라져 버리는 과거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선과 진리의 상태들을 사람의 깊은 내면에 보존하시며, 훗날 거듭남을 위하여 사용하십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리메인스의 신비입니다.

 

사람은 때로 아주 멀리 떠날 수 있습니다. 십 년이 아니라 수십 년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신앙과 아무 관계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서 과거에 심어 두신 선과 진리를 함부로 잃어버리지 않으십니다. 어느 날 한 말씀을 듣다가, 어떤 사람을 만나다가, 예상하지 못한 사건을 겪다가 오래전에 묻혀 있던 것이 갑자기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래, 나에게도 주님을 사랑했던 때가 있었지.’ 그렇게 사람의 마음이 다시 열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화의 중심은 기이한 현상 자체보다 ‘십 년 동안 기다리신 주님’에게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강문호 수도사의 메시지가 참 따뜻해집니다. 인간은 주님을 놓을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인간을 쉽게 놓지 않으십니다. 물론 인간에게는 끝까지 거절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편에서는 끊임없이 구원하시려는 사랑이 흘러옵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빌리면 주님의 신적 섭리는 모든 순간 인간의 영원한 구원을 목표로 합니다. 인간이 돌아설 수 있는 길을 남겨 두시고, 선을 선택할 가능성을 보존하시며, 때가 되면 다시 부르십니다. 그래서 ‘나는 주님을 버렸는데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이 사람의 고백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를 아주 아름답게 표현하는 말로 들립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이어 태양을 예로 듭니다. 지구와 태양의 관계가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질서 안에 있듯이 인간도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참된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 역시 스베덴보리의 세계에서는 더욱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의 태양에 관하여 매우 중요하게 말합니다. 천국의 태양은 주님의 신적 사랑이 나타나는 것이며, 그 태양으로부터 나오는 열은 사랑에, 빛은 지혜와 진리에 상응합니다. 자연계에서 태양의 열과 빛이 생명을 가능하게 하듯, 영적으로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가 인간의 영적 생명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연못의 물과 포도나무와 가지와 태양이 모두 하나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물고기에게 물이 생명의 환경이고, 가지에게 포도나무가 생명의 근원이며, 자연계의 생명에게 태양의 열과 빛이 필요하듯, 인간의 영적 생명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필요합니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핵심은 얼마나 많은 것을 ‘내가 이루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깊이 주님으로부터 받아 살아가는가에 있습니다.

 

영상 마지막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수도사의 삶을 ‘하나님만 붙잡고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거룩한 삶’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번 영상에서는 이 말이 전체 이야기를 잘 정리해 줍니다. 수도생활의 본질이 반드시 세상을 떠나 깊은 산속에서 사는 데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참된 수도는 결국 매일의 삶에서 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수도원에 있는 사람도 주님에게서 멀어질 수 있고, 시장과 직장과 가정 한복판에 있는 사람도 주님 안에 깊이 거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사랑의 방향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붙잡는다’는 말 역시 다른 모든 인간관계를 버린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참으로 붙잡을수록 이웃을 더 바르게 사랑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경쟁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이 이웃을 향하여 흘러갈 때 그것이 체어리티가 되고, 실제적인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가 살아 있다는 증거는 줄기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데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 안에 거하는 사람의 신앙은 결국 그의 삶에서 선한 열매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영상의 핵심을 ‘잡혀서 살아라’라는 강렬한 표현에서 시작하여 ‘붙어 있어라’, 그리고 마지막에는 ‘열매를 맺어라’로 이어서 읽고 싶습니다. 처음에는 주님께서 나를 붙드시는 은혜를 깨닫습니다. 다음에는 내가 주님 안에 거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에게서 받은 생명이 나를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야 함을 깨닫습니다. ‘붙잡힘 거함 열매 맺음’입니다. 이 셋이 함께 있을 때 신앙은 단순한 고백을 넘어 삶이 됩니다.

 

연못에서 필사적으로 도망가던 금붕어에게 자신을 붙잡는 손이 살리는 손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능력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주님께서 말씀을 주셨고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이성을 주셨으며, 그 진리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거듭남은 물고기처럼 억지로 붙잡혀 옮겨지는 일이 아니라,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주님의 손길이 사실은 사랑이었다는 것을 조금씩 깨달아 가며 스스로 그 손을 신뢰하게 되는 과정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연못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물고기가 물 안에서 살고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열매를 맺듯, 인간은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 살아가며, 거듭남이란 그 생명이 자기에게서 난 것이 아님을 점점 더 깊이 인정하면서 받은 사랑과 진리를 이웃을 위한 선한 열매로 돌려드리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강문호 수도사의 ‘잡혀서 살아라’라는 말을 그대로 마음에 담으면서 한마디를 덧붙인다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붙잡고 사는 것보다 먼저인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연못 속에서 주님의 손을 피해 달아나는 동안에도, 좁고 답답하다며 물 밖으로 뛰쳐나가는 동안에도, 심지어 십 년 동안 주님을 떠났다고 생각하는 동안에도 주님의 목적은 하나입니다. 우리를 붙잡아 당신에게 예속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려 참으로 자유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작은 연못에서 발견할 수 있는 주님의 섭리이며,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하신 말씀의 깊은 위로이기도 합니다.

 

 

 

SY.68, 강문호 수도사, ‘시오도르 수도사’ (20191215)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https://youtu.be/ycpr_QuUjbc?si=heNUWptbnsCcOZsH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동방정교회에 전해 내려오는 ‘시오도르’ 수도사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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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지옥, 고통과 구원, 그리고 삶의 의미

이번 영상은 앞의 영상보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았을 때 훨씬 더 직접적인 대화가 가능한 내용입니다. 천국과 지옥, 사후세계, 예수를 알지 못한 사람의 구원, 양심, 하나님의 섭리, 고통과 악, 부활, 그리고 마지막에는 인간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까지 다루기 때문입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김학철 교수가 전통적인 한국 개신교의 천국·지옥 이미지를 해체하려는 과정에서 제시하는 몇몇 통찰이 스베덴보리와 놀라울 만큼 가까워지는 한편, 결정적인 몇 지점에서는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멀어진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은 단순히 ‘맞다, 틀리다’로 평가하기보다, 김학철 교수가 무엇을 해체하려 하는지 먼저 이해하고, 그 해체 이후 스베덴보리가 어떤 더 넓은 그림을 제시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대담의 출발점은 ‘익숙함을 의심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오랫동안 성경을 읽었다고 해서 성경을 잘 아는 것도 아니며, 모태신앙이라고 해서 기독교를 잘 아는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는 능력이 사라지는 순간 종교와 고전은 생명력을 잃는다는 것입니다. 이 태도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의미 있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실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는 경험 자체가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평생 읽어 온 창세기의 익숙한 문장들이 전혀 다른 깊이를 가진 말씀으로 다시 열립니다. ‘’, ‘’, ‘’, ‘나무’, ‘동산’, ‘’, ‘여자’, ‘가인’, ‘아벨’ 같은 너무나 익숙한 말들이 인간의 거듭남과 천국의 질서를 담은 말씀으로 새롭게 읽힙니다. 그러므로 ‘나는 성경을 안다’는 확신보다 말씀 앞에서 계속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김학철 교수의 지적은 충분히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그러나 천국과 지옥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해집니다. 김학철 교수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천당과 지옥’의 이미지 상당 부분이 성경 자체에서 직접 나온 것이 아니라 문화적·종교적 번역 과정에서 형성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천당’이나 ‘지옥’이라는 한국어 자체가 동아시아 종교문화의 영향을 받은 말이며, 단테의 ‘신곡’ 같은 작품이 서구인의 지옥 이미지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의 ‘바실레이아’를 오늘날의 영토적 국가 개념보다 ‘통치’ 또는 ‘질서’로 이해해야 한다면서,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주로 ‘죽어서 가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지금 여기에 임하는 것’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까지는 스베덴보리와 만나는 중요한 지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천국을 단순히 우주의 어느 장소에 있는 물리적 공간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천국과 지옥’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핵심 가운데 하나는 천국이 본질적으로 ‘상태’라는 것입니다. 물론 영계에는 공간처럼 경험되는 질서가 있습니다. 천국의 공동체들이 있고, 집과 길과 산과 정원 같은 것들도 실제적으로 지각됩니다. 그러나 그 공간은 자연계의 공간과 같은 것이 아니라 영들의 내적 상태가 외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질서와 통치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김학철 교수의 설명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가까운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김학철 교수가 ‘신약 성서는 사후세계에 대한 관심이 사실 거의 없다고 생각하면 된다’, ‘천국은 죽은 다음에 가는 곳이 아니다’라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에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분명한 보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단지 사후세계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사후세계의 실재가 기독교에서 주변적인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는 천국과 지옥을 인간의 종교적 상상이나 후대 문화가 만들어 낸 이미지로 보지 않고, 자연계와 함께 창조 질서를 이루는 실제 영계로 설명합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천국은 장소인가, 상태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양자택일이 아닙니다. 천국은 ‘상태가 공간으로 나타나는 세계’라고 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자연계에서는 서로 미워하는 두 사람도 같은 방에 앉아 있을 수 있지만, 영계에서는 내적 상태가 서로 완전히 반대되는 영들이 지속적으로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이 공간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단순히 ‘죽어서 올라가는 저 위의 장소’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단순한 은유나 현재적 하나님의 통치만도 아닙니다. 그것은 실제 세계이되 자연계와 전혀 다른 법칙, 곧 사랑과 애정과 상응에 따라 형성되는 세계입니다.

 

이 차이는 지옥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김학철 교수는 ‘게헨나’가 힌놈의 골짜기와 관련된 말이며, 고대의 우상숭배와 인신공양, 부정함과 죽음의 이미지가 지옥의 표현과 결합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역사적·언어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에는 의미 있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라면 여기에서 다시 ‘상응’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불, 유황, 어둠, 구더기, 악취 같은 지옥의 표현이 등장한다고 해서 반드시 자연계의 물리적인 불과 유황이 영원히 존재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것들이 단순한 고대인의 문학적 상상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지옥적 사랑과 거짓의 실제 상태에 ‘상응’하는 표현입니다.

 

가령 천국의 불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 사랑에 상응하지만, 지옥의 불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욕망과 증오에 상응합니다. 같은 ‘’이라는 이미지가 사랑의 성질에 따라 정반대의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문자적 지옥 이미지를 그대로 물질화하지도 않고, 반대로 그것을 신화나 은유로 해체해 버리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문자 그대로의 불지옥이 아니다’와 ‘지옥은 실재하지 않는다’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영상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 가운데 하나는 ‘이순신 장군은 구원받았을까?’라는 질문입니다. 김학철 교수는 로마서 2장의 양심을 이야기하고, 유스티누스의 ‘로고스의 씨앗’을 소개하며, 마태복음 25장의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곧 주님께 행한 것이라는 말씀을 들어 ‘예수를 역사적으로 알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자동적으로 지옥에 간다고 말할 수 없다’는 방향으로 설명합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한국 개신교의 구호가 성경 전체의 구원론을 정확하게 압축한 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는 스베덴보리와의 접점이 매우 큽니다. 스베덴보리는 기독교 세계 밖에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해서 구원에서 배제되지 않는다고 분명히 가르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았는가, 악을 악으로 여기고 선을 행하려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선하게 살았던 사람들이 사후에 천사들에게 진리를 배우고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여러 곳에서 설명합니다. 반대로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성경과 교리를 많이 알고 있어도 실제 삶의 지배적 사랑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었다면, 그 외적 신앙고백 자체가 천국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순신 장군이 예수를 몰랐으므로 지옥에 갔다’는 식의 단순한 판정은 스베덴보리의 구원 이해와도 맞지 않습니다. 다만 여기에서도 ‘선행을 많이 하면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핵심은 행위의 외형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입니다.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빛 안에서 양심을 따라 선을 사랑하고 행했다면, 그 선의 근원은 본인이 당시 명시적으로 알지 못했더라도 궁극적으로 주님께 있습니다. 사후에는 그 선 안에 있는 사람에게 진리가 주어지고, 그는 자신이 이미 사랑하고 있었던 선의 근원이 주님이셨음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최근 ‘아벨’과 체어리티를 읽으며 살펴보고 있는 내용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이름으로만 ‘신앙’을 소유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가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이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독립적인 구원의 자격증처럼 될 때, 바로 가인으로 상징되는 문제가 시작됩니다. 반대로 사람이 가진 진리의 양은 제한되어 있더라도 그가 선을 사랑하고 양심에 따라 살고 있다면, 그 안에는 주님께서 이후 진리와 결합시키실 수 있는 토대가 있습니다.

 

그다음 ‘고통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함부로 설명하지 말라’는 부분도 매우 귀합니다. 김학철 교수는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 ‘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그런 겁니다’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울부짖음을 막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시편에는 하나님을 향한 탄원과 절규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예수께서도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시편의 탄원을 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고통받는 사람의 질문을 억압하는 책이 아니라 때로는 그 사람과 함께 울어 주는 책이라는 설명입니다.

 

이 부분은 목회적으로 매우 중요하며, 스베덴보리의 섭리 이해와도 충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섭리를 안다고 생각할수록 더욱 조심해야 할 말이 바로 ‘다 뜻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신적 섭리의 개별적인 연결고리를 현재의 시점에서 모두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건 하나만 보지만 주님은 그 사람의 영원한 생명과 자유, 수많은 사람의 관계와 선택, 그리고 미래의 가능성까지 동시에 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왜 이 일을 허용하셨는지 제가 압니다’라고 쉽게 말하는 것은 오히려 섭리를 깊이 이해한 태도와 거리가 멀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스베덴보리적 구별이 하나 더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허용하신 것’과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악과 고통을 하나님께서 직접 보내신 것으로 생각하면 신적 사랑의 본질과 충돌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은 오직 선만을 의도하시며, 악을 일으키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가 존재하는 세계에서는 악이 허용될 수밖에 없고, 주님의 섭리는 허용된 악에서 가능한 한 선을 끌어내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역사합니다.

 

이 점에서 영상의 ‘고양이 스케일링’ 비유처럼 ‘우리가 악이라고 보는 것이 사실은 더 큰 하나님의 선일 수도 있다’는 설명은 일정 부분 도움이 되지만, 모든 고통에 그대로 적용하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고양이의 스케일링은 보호자가 직접 의도한 고통이며 그 자체가 치료의 과정입니다. 그러나 살인, 학대, 전쟁, 배신 같은 악을 하나님께서 인간의 유익을 위해 직접 계획한 ‘영적 스케일링’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이 매우 섬세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은 악을 선을 위한 수단으로 창조하지 않으시지만, 인간이 자유 속에서 일으킨 악을 허용하시면서도 그 악이 영원한 파괴로 끝나지 않도록 끊임없이 선한 방향으로 굽히십니다.

 

영상에서 하나님의 전능을 ‘사랑의 전능성’이라고 표현하는 부분도 흥미롭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기계적으로 프로그램해 놓고 인간을 움직이는 분이 아니라 인간을 파트너로 불러 혼돈에 질서를, 어둠에 빛을, 눈물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시는 분이라는 설명입니다. 이 가운데 ‘사랑의 전능성’이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신관과 상당히 잘 어울립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적 사랑, 신적 지혜, 신적 능력은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전능은 사랑과 반대되는 자의적인 힘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이 원하고 지혜가 아는 것을 능력으로 이루십니다.

 

다만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세계를 만들어 가는 파트너’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조금 조심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주님과 동등한 창조의 공동주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선을 행할 능력과 진리를 이해할 능력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야 자유로운 응답이 가능하지만, 실제 선과 진리의 생명은 모두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proprium을 매우 세밀하게 다루는 이유입니다. 인간은 ‘내가 선을 행한다’고 느끼면서 살아야 하지만 동시에 ‘선의 근원은 내가 아니라 주님’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을 때 자유와 겸손이 동시에 보존됩니다.

 

영상에서 부활을 ‘사후 정산’이라고 표현하는 부분에서는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큰 차이가 나타납니다. 김학철 교수는 역사적 배경을 따라 유대교의 부활 신앙이 불의하게 죽은 의인들에게 하나님께서 결국 정의를 회복해 주신다는 신정론적 희망과 연결되어 발전했다고 설명합니다. 역사학적 설명으로서는 의미가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사후생을 단순히 역사적 종교관념의 발전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인간은 육체가 죽은 직후에도 인간으로서 계속 살아 있으며, 의식과 사고와 기억과 애정을 가지고 영계에서 깨어납니다. 사후세계는 먼 미래에 이루어질 추상적인 ‘정산’이 아니라 죽음 직후부터 이어지는 실제적인 인간 생명의 연속입니다.

 

특히 지금 우리가 AC.320 이후에서 읽었던 내용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사람이 죽은 뒤에도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너무나 생생하게 느끼기 때문에 처음에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며, 감각과 사고와 언어가 자연계에서보다 오히려 더 분명해진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영상에서 ‘성경의 사후세계 관심은 거의 없다’는 진술과 AC.320 이하에서 스베덴보리가 증언하는 영계의 모습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두 관점을 억지로 일치시키기보다 그 차이를 그대로 인정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러나 고통의 ‘원인을 설명하는 것보다 그 고통받는 사람을 돕는 것이 먼저’라는 김학철 교수의 강조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께서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두고 ‘이 사람의 죄인가, 부모의 죄인가?’라는 인과관계의 질문에 매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일이 나타날 방향을 바라보셨다는 설명, 그리고 불교의 ‘독화살 비유’를 가져와 원인을 모두 알아낸 뒤에야 사람을 도우려 해서는 안 된다는 설명은 앞 영상에서 말한 ‘사랑의 급진성’과도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바꾸면 이것은 ‘쓰임’과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고통받고 있을 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신학적으로 완벽하게 설명하는 것보다 지금 내가 그 사람에게 어떤 선한 쓰임이 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 중요합니다. 때로는 설명보다 함께 앉아 있는 것이 쓰임이고, 때로는 음식을 가져다주는 것이 쓰임이며, 때로는 그의 말을 판단하지 않고 듣는 것이 쓰임입니다. 진리는 쓰임을 위해 존재합니다. 진리를 가지고 고통받는 사람을 압도한다면 진리의 목적을 거꾸로 사용하는 셈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영상 후반의 아우슈비츠와 하나님의 고통에 관한 부분에서는 조금 더 신학적 주의가 필요합니다. 김학철 교수는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을 소개하면서 ‘하나님이 전능한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와 같이 고통당하면서 죽는다’는 발상을 언급합니다. 이것은 현대 신학의 특정한 문제의식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전능을 포기해야 하나님의 사랑을 보존할 수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신적 사랑과 신적 전능은 충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제는 우리가 ‘전능’을 무엇으로 이해하느냐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전능은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면서 악을 강제로 제거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려는 인간의 자유를 매 순간 물리적으로 차단하신다면 인간은 인간일 수 없으며, 사랑도 사랑일 수 없습니다. 사랑은 자유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전능은 자유를 보존하면서도 인간을 가능한 한 악에서 선으로 이끄시고, 지옥이 인간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질서를 유지하시는 전능입니다. 이것은 힘이 부족해서 악을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목적 때문에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행복을 추구하지 말라’는 부분은 이번 영상 가운데 스베덴보리와 가장 아름답게 만나는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김학철 교수는 ‘인간은 행복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행복을 직접 추구하면 오히려 행복을 얻기 어렵고, 자신이 삶을 지속할 만한 가치를 실제로 행할 때 행복은 ‘선물처럼’ 따라온다고 말합니다. 특히 다른 사람을 돕고 돌보고 사랑하며 자신의 가치가 누군가에게 실제 기쁨이 될 때 삶의 의미가 발생하고, 그 의미가 고난을 견디게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쓰임(use)이라는 개념과 매우 가까이 놓아볼 수 있습니다. 천국의 행복은 천사들이 ‘행복해지고 싶다’고 끊임없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천사들은 선한 쓰임을 사랑하고, 그 쓰임을 행하는 기쁨 가운데 삽니다. 그 결과로 천국의 기쁨이 흘러듭니다. 행복은 목적이라기보다 사랑이 올바른 방향으로 흐를 때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김학철 교수가 소개한 ‘너는 살면서 기쁨을 발견했느냐, 그리고 그 기쁨이 다른 사람에게도 기쁨이 되었느냐?’라는 이야기는 비록 성경의 직접적인 가르침은 아니지만, 스베덴보리의 천국관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습니다. 천국의 기쁨은 고립된 개인의 쾌락이 아니라 서로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으로 느끼는 사랑에서 생기기 때문입니다. 자기 행복만을 추구할수록 천국의 질서에서 멀어지고, 다른 사람의 선과 행복을 기뻐할수록 천국적 사랑에 가까워집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마지막 한 걸음을 더 들어가야 합니다. ‘타인에게 기여하면 삶의 의미가 생긴다’는 것만으로는 아직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에 완전히 이른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타인을 도우면서도 자기 공로를 사랑할 수 있고, 자신의 선함을 확인하기 위해 봉사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쓰임의 가장 깊은 질은 ‘무엇을 했느냐’뿐 아니라 ‘무엇을 사랑해서 그것을 했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결국 다시 지배적 사랑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이렇게 보면 이번 영상에는 매우 흥미로운 흐름이 있습니다. 앞부분에서는 ‘천국과 지옥이라는 익숙한 관념을 의심하라’고 말하고, 중간에서는 ‘예수를 명시적으로 알지 못한 사람도 양심과 사랑에 따라 살았다면 하나님의 구원에서 배제된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말하며, 후반에서는 ‘고통의 원인을 모두 설명하려 하기보다 함께 울고 사랑하라’고 하고, 마지막에는 ‘행복을 직접 추구하지 말고 가치 있는 삶을 살아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은 ‘종교적 관념보다 삶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이번 영상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가까이 옵니다. 스베덴보리도 끊임없이 삶을 봅니다. 무엇을 믿는다고 말했는가보다 무엇을 사랑했는가, 무엇을 알았는가보다 그것으로 어떻게 살았는가를 봅니다. 사후에 사람을 천국이나 지옥으로 이끄는 것도 외적인 종교 명칭이 아니라 그의 ‘지배적 사랑’입니다. 죽음은 그 사랑을 갑자기 다른 것으로 바꾸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연계의 외적 제약이 벗겨지면서 사람이 실제로 사랑했던 것이 점점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이 대담과 스베덴보리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도 나타납니다. 김학철 교수는 사후세계에 대한 전통적 이미지를 해체하면서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로 관심을 돌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전자의 오류를 해체하면서도 사후세계 자체를 조금도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사느냐가 영원히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사후세계가 실제이기 때문입니다. 자연계의 삶은 영계와 분리된 별개의 삶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첫 단계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번 영상의 천국과 지옥에 관한 핵심을 다시 표현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착하면 천국 가고 나쁘면 지옥 간다’는 말은 너무 단순합니다. 그러나 ‘천국과 지옥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사후세계 이미지일 뿐이다’라는 방향 역시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 정확한 것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무엇을 사랑할 것인가를 자유롭게 형성하고 있으며, 죽음 뒤에는 그 사랑에 상응하는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선행에 대한 외적 상금이 아니며 지옥은 잘못에 대한 외적 형벌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판결하여 강제로 지옥에 던지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평생 자유롭게 형성한 지배적 사랑이 사후에 그에게 맞는 공동체를 찾습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랑과 같은 생명을 가진 이들과 함께 있는 것을 기뻐하고, 자기 자신과 세상을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와 같은 사랑을 가진 이들에게 끌립니다. 천국과 지옥은 그래서 ‘상벌’이기 전에 ‘사랑의 귀결’입니다.

 

이 점을 알면 영상의 ‘이순신 장군은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에도 훨씬 깊은 답이 가능해집니다. 핵심은 그가 지상에서 ‘예수’라는 이름을 들었느냐 듣지 못했느냐만이 아닙니다.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빛 안에서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양심으로 받아들였으며, 그것을 따라 어떻게 살았는가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내면을 완전히 아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정인의 사후 운명을 함부로 판정할 수 없습니다. 동시에 이것은 ‘무엇을 믿어도 상관없다’는 상대주의도 아닙니다.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이며, 사후에 선한 사람은 그 근원을 더 분명하게 배우고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번 영상에서 가장 오래 남겨 둘 만한 질문은 ‘천국과 지옥이 정말 있습니까?’보다 마지막에 나온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라면 두 질문이 사실 하나라고 할 것입니다. 천국은 죽은 뒤 갑자기 시작되는 낯선 삶이 아니라 지금 내가 사랑하고 선택하고 행하는 것 속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오늘 진실보다 체면을 사랑하고 있는지, 다른 사람의 행복보다 내 우월함을 사랑하고 있는지, 용서보다 복수를 사랑하고 있는지, 아니면 조금씩이라도 진실과 선과 쓰임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해 가고 있는지, 그것이 천국과 지옥의 질문입니다. 사후세계에 대한 지식이 중요한 이유도 죽은 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다면 나는 오늘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를 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대담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한 가지 중요한 보완을 얻을 수 있습니다. 김학철 교수가 말하듯 천국을 단순한 사후의 보상 장소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도 시작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끝나지도 않습니다. 자연계에서 시작된 인간의 내적 생명은 죽음을 넘어 계속되며, 여기에서 형성된 사랑은 영계에서 더욱 분명한 자신의 형체를 얻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있습니다’라고만 답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렇게 묻도록 우리를 이끌 것 같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천국을 자기 안에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그리고 ‘지금 당신이 사랑하는 그것과 영원히 함께 살아도 좋습니까?’ 천국과 지옥을 가장 진지하게 생각하는 방법은 사후세계의 지도를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 안에서 어떤 사랑이 나의 주인이 되어 가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서 천국과 지옥은 이미 시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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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4:2)

 

AC.341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은 체어리티이며, ‘아벨(Abel)형제(brother)가 이를 상징합니다. ‘양 치는 자(shepherd of the flock)는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을 나타내고, ‘농사하는 자(tiller of the ground)는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비록 그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아무리 깊이 있다 하더라도 그러하며,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The second offspring of the church is charity, signified by “Abel” and “brother”; a “shepherd of the flock” denotes one who exercises the good of charity; and a “tiller of the ground,” is one who is devoid of charity, however much he may be in faith separated from love, which is no faith.

 

 

해설

 

AC.341은 매우 짧지만, 창4의 가인과 아벨을 이해하는 핵심 구조를 한 문장 안에 압축하고 있습니다. 바로 앞 AC.338-340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첫 번째 자손을 ‘신앙’이라고 했고, 그 신앙을 ‘가인’으로 나타냈습니다. 이제 두 번째 자손으로 ‘체어리티’가 등장하며, 이를 ‘아벨’과 ‘형제’가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창4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처음부터 두 개인의 형제 관계를 중심으로 읽기보다, 태고교회 안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어떤 관계에 있었으며, 그 관계가 어떻게 변해 갔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체어리티를 ‘아벨’뿐 아니라 ‘형제’도 상징한다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이후 창4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단순히 한 사람이 자기 동생을 죽였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신앙이 자기 ‘형제’인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본래 서로 남남이 아니라 함께 있어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아벨을 계속 가인의 ‘형제’라고 하는 데에도 깊은 뜻이 있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을 때에만 참된 신앙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섬세하게 구별할 것이 있습니다. AC.338에서는 태고교회의 ‘첫 번째 자손’을 신앙이라고 했고, AC.341에서는 ‘두 번째 자손’을 체어리티라고 합니다. 이것을 시간순으로 ‘먼저 신앙이 생기고 나중에 체어리티가 생겼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는 오히려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이 그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질서였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첫째와 둘째는 자연적인 출생 순서를 그대로 영적 우선순위로 옮긴 것이 아닙니다. 창4의 계보와 출생은 AC.339에서 살펴본 것처럼 교회에 속한 것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으며 나타나는지를 고대의 출생과 계보 형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벨’과 함께 나오는 것이 ‘양 치는 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양 치는 자’를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체어리티가 단순한 감정이나 관념으로 머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체어리티는 실제로 선을 행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이웃의 선을 바라고, 그 선을 위하여 실제로 행동하며, 자신에게 맡겨진 쓰임을 성실하게 행하는 것이 체어리티의 삶입니다. 따라서 ‘양을 친다’는 것은 속뜻으로 단순히 목축업에 종사한다는 뜻이 아니라, 체어리티의 선을 돌보고, 그것을 삶으로 행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양 떼’라는 표현도 이와 잘 어울립니다. 말씀에서 양은 순진함과 선, 그리고 주님께 인도받는 사람들과 연결됩니다. 목자는 양에게 먹을 것을 주고, 위험에서 보호하며, 길을 잃지 않도록 돌봅니다. 그러므로 ‘양 치는 자’라는 모습에는 체어리티가 무엇인지가 매우 아름답게 담겨 있습니다. 체어리티는 무엇을 옳다고 주장하는 데 머물지 않고, 실제로 다른 사람의 선을 돌보고 보살피며 섬기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반면 가인은 ‘농사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를 매우 강하게 해석하여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자칫 ‘농사’ 자체에 부정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에서 ‘’은 문맥에 따라 매우 다양한 의미를 가지며, 좋은 의미로 사용될 때도 많습니다. 여기서는 ‘가인’이 나타내는 상태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농사하는 자’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 몰두하면서 체어리티는 없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AC.341의 마지막 말은 매우 단호합니다. 그런 사람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아무리 깊이가 있다 하더라도’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이며,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창4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명제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단지 어떤 교리를 정확하게 알고, 그것이 참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외형상 아무리 정교하고 확고한 신앙처럼 보여도 그 안에는 신앙의 생명이 없습니다.

 

바로 여기서 가인의 문제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가인의 처음은 반드시 명백한 거짓에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AC.340에서 보았듯이, 원래 마음에 새겨져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구별하여 교리로 정리하고, 그것을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분리가 계속되면 결국 신앙은 자신의 형제인 체어리티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고 여기게 됩니다. AC.341은 그 결과를 미리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앞서 생각했던 ‘부부생활 준수 가이드 20가지’의 비유와도 연결됩니다. 서로 사랑하는 부부에게 생활의 원칙과 약속은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사랑 자체보다 규칙이 중심이 되어 ‘나는 20가지를 모두 지켰으니 좋은 배우자다’라고 주장한다면 이상해집니다. 상대방을 향한 사랑과 배려는 사라졌는데 규칙 준수만 남았다면, 결혼의 형식은 유지해도 결혼의 생명은 크게 훼손된 것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도 이와 비슷합니다. 교리와 신앙의 고백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자기 완결적인 것이 되면 신앙의 본래 생명을 잃습니다.

 

앞서 떠올리셨던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관한 비유도 여기에서 더욱 선명해집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부모 자식 간에도 돈 계산은 분명해야 해요’라고 말하는 것 자체는 경우에 따라 틀린 말이 아닐 수 있습니다. 실제로 재정 문제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와 자녀 사이를 지탱하던 사랑과 신뢰보다 ‘계산의 원칙’이 더 근본적인 자리에 올라가 버린다면 관계의 성질이 달라집니다. 원칙이 사랑을 섬기는 동안에는 유익하지만, 사랑에서 독립하여 관계를 지배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가인의 분리도 바로 이런 종류의 변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AC.341의 ‘형제’라는 말이 더욱 무겁게 다가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경쟁자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진리가 중요하냐 사랑이 중요하냐’, ‘신앙이 먼저냐 행위가 먼저냐’라고 서로 맞세우는 순간 이미 가인의 문제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밀어내지 않으며, 참된 체어리티 역시 진리를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둘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형제’입니다. 더 깊이 말하면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고, 체어리티는 신앙을 통하여 무엇이 참으로 선한지를 배우며 올바른 방향을 얻습니다.

 

여기서 ‘양 치는 자’와 ‘농사하는 자’의 대비도 단순한 두 직업의 대비를 넘어섭니다. 한쪽에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선을 돌보고 실제로 행하는 삶이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체어리티가 없는 상태가 있습니다. 그래서 창4의 질문은 결국 ‘누가 더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가?’가 아닙니다. ‘그 진리가 실제로 어떤 사랑을 품고 있으며 어떤 선을 낳고 있는가?’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을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하며, 신학적인 오류를 예리하게 찾아낼 수 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참된 신앙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 지식과 신앙이 이웃을 향한 선으로 이어지는지, 다른 사람을 돌보고 용서하고 섬기는 체어리티로 나타나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를 진리 없는 막연한 친절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주님의 진리로부터 무엇이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지를 분별하며 행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341은 가인과 아벨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출발점을 마련합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독립하려는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양 치는 자’는 그 체어리티의 선을 실제로 행하는 사람을 나타내며, ‘농사하는 자’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판단의 기준을 조금도 흐리지 않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이 한 문장이 앞으로 이어질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읽는 열쇠가 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단순히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이 자신의 생명을 이루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면서 결국 자기 자신도 참된 신앙이기를 그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창4의 비극은 아벨만 죽는 데 있지 않습니다. 체어리티를 죽이는 순간, 가인이 붙들고 있던 ‘신앙’ 역시 그 본래의 생명을 잃는다는 데 더 깊은 비극이 있습니다.

 

 

 

AC.340, 창4:1,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4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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갔다 와 본 사람 말에 귀 기울이지 않기 (2025/4/26)

 

글 제목을 보면, 이미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고자 함인지 다들 아시겠지요? 맞습니다. 바로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는 방법인데요, 가짜들은 평소 말은 그럴듯하게 하지만 정작 자기들이 해오던 말이 실제로 일어나면 안 믿습니다. 대표적인 게 바로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인데요, 평소 그리스도, 그리스도 이미 오랜 세월 온 국민의 수 대, 수십 대, 수백 년을 이어온 염원이었지만, 정작 주님이 실제로 오시자,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물론, 유대인들 거의 전부가 몹시 불편해했어요. 이런저런 핑계들이 있겠지만, 일단 저들은 가짜여서 주님을 알아볼 수 없었던 겁니다.

 

※ '가짜'라는 거북한 표현을 써서 좀 그러시지요? 많이 미안합니다...

 

25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26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요10:25-27)

 

말씀처럼 말입니다. 주님도 ‘너희는 내 양이 아니다’, 즉 너희는 가짜다 말씀하고 계십니다.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7:21-23)

 

이 말씀도 같습니다. 주님은 이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하십니다. 너희 역시 가짜다 하고 계십니다.

 

이런 케이스가 성경에 참 많이 나옵니다. 거의 모든 선지자와 사도들, 그리고 그 속사도들, 즉 사도들의 직계 제자들 또한 그랬는데요. 어쩌면 태고교회부터 고대, 유대, 기독 등 교회사 전체를 이 주제로 기술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짜와 진짜의 차이는 그 숨은 동기에 있습니다. 가짜는 그 모든 겉보기와는 달리 그 숨은 동기가 자기 사랑입니다. 진짜는 그렇지 않습니다. 진짜 역시 그 모든 겉보기와는 달리 그러나 그 숨은 동기는 주님 사랑입니다. 천사들은 사람의 겉을 보지 않습니다. 내적 존재인 천사들한테는 사람의 겉은 안 보이고, 사람의 속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이 볼 때 사람은 곧 그의 의지이며, 어떤 일을 하는 그 숨은 동기입니다. 사람들은 겉만 보지만, 천사들은 속, 곧 그 숨은 동기를 봅니다.

 

그런데 다른 건 몰라도 주님에 관해서는 가짜들도 좀 그 혀가 뻣뻣해지는지 주님에 대한 직접적인 사랑의 고백 같은 거를 어색해 합니다. ‘주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주님은 저런 분이십니다’ 하는 얘기를 잘 못해요. 아마 주님에 대한 개인적 경험이 별로 없어서 그런가 봅니다. 대신 ‘아무개가 주님에 대해 이런 책을 썼는데 저는 그 책을 읽었습니다. 아무개는 평생 주님과 동행했는데, 그 기록을 저는 읽어 보았습니다’ 식으로 그 핀트를 살짝 틉니다. 그리고 그런 책 많이 읽은 걸 자랑합니다. 본의 아니게 가짜가 되셨겠지만... 문제는, 이런 분들의 많은 말과 글을 접하고 나면, 우리의 시선이 주님을 향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향하게 된다는 게 문제입니다.

 

천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 천국 해서 정말 천국에 대해 알고픈 모양이구나 싶어 주님의 허락으로 천국을 오랫동안 왕래한 사람이 천국에 대해 알려주려고 하면, 정작 이 사람 말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천국을 가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천국에 대해 연구하고, 기술한 책만 잔뜩 읽고 있습니다. 엉뚱합니다. 천국, 천국 하는 그 숨은 동기가 정말 천국을 사랑하여 거기 가 살고픈 게 아니라 천국을 통해 얻고자 하는, 자기도 잘 모르는 무슨 목적들이 있었나 봅니다. 이런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저는 전혀 그럴 생각도, 그럴 마음도 없었는데 제 나이 57세 되던 어느 날 주님이 천사를 보내어 저를 부르시더니 이렇게 무려 27년간 영계를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경험 중 기록으로 남기라 하신 것만 이렇게 적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의 말입니다. 강문호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은 자원병을 쓰지 않으시고, 차출병을 쓰신다는 적확한 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가고 없는 지금, 주님의 지시와 허락으로 그가 남기고 간 책을, 특히 그중에 ‘천국과 지옥’을, 신기하게도 저 역시 57세 때 접한 이후, 지난 8년 여의 세월, 집안 행사 등 부득이한 날만 빼고, 거의 하루도 낭비 없이 이 길을 달려왔습니다. 마치 뭐에 이끌리듯 말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제 주변, 가족이며, 친지며, 교계 지인들이며... 그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아, 우리 큰아들 포함, 몇 분 계시군요. 다행입니다. 그러나 1%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어디에 적기를 이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천 명 중 한 사람도 쉽지 않다 했다는데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다만 그,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몇몇 분한테서는 주님이 서둘러 저를 떼어놓으셨고, 대부분은 선량하신 분들입니다. 그 가운데 온유하신 분들과 다소 강한 분들의 차이만 있지요. 그러나 그런 것과 이건 다른 건가 봅니다.

 

각 사람의 거듭남의 여정은 각 사람에게 맞춘 철저한 맞춤식이라 절대 획일적일 수도, 일률적일 수도 없습니다. 또한 각 사람이 붙들고 있는 나름의 교리적 입장은 그에게 있어서는 생명과도 같아 주님조차 그걸 무조건 새것으로 가시지 않습니다. 그랬다가는 큰일나기 때문입니다. 그 역시 지금은 그의 생명이기 때문인데요, 아우 아벨을 죽인 가인을 헤아려 그에게 무슨 표를 주어 살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의 이단적 입장 역시 나중을 위해, 후손을 위해, 인류가 결국은 신앙에서 사랑을 분리하는 길로 걸어갈 걸 아시고, 그런 가인을 보호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게 무슨 주님의 섭리 있으시지 싶고, 그래서 지금은 그러려니 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얼마나 더 지상에 머무르게 될까요? 사실 천국에 대해 많이 알면 알수록 주님을 향한 경외감이 말할 수 없이 깊어지며, 그래서 그냥 오늘 밤에라도 훌쩍 떠난들 무슨 아무 미련도 없고, 후회도 없을 것 같습니다. 아내와 자식들이 처음 얼마 동안 좀 힘들어할까요? 제가 그동안 가정경제에 거의 보탠 게 없어 그 부분은 참 많이 미안합니다. 그래서 요즘 이 부분을 많이 주님께 구하고 있어요. 제 아내와 두 아들, 특히 작은아들에게 주님이 경제적으로 조금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말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신 주님 말씀이 전에 제게 들렸듯 오늘도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께 들렸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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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1, '저자 서문(序文)'(Author’s Preface)(HH.1)

※ HH는 'Heaven and Hell'의 머릿글자입니다; 본문 번역은 김은경 역입니다. 단, 주석들은 저의 번역입니다; 주석에 나오는 참조 숫자들은 스베덴보리 저, 'Arcana Coelestia'(AC, 창, 출 속뜻 주석, 라틴, 174

heavenanditswondersandhell.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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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스베덴보리의 글들(Writings)이 필요하시면 (2025/4/13)

 

아래 Swedenborg Foundation에 가시면 거의 모든 글을 pdf로 받으실 수 있습니다. 참고로 Redesigned Standard Edition이며, 1900년대 초 번역을 1990년대에 몇 가지 손본 버전입니다. 그러니까 영어가 좀 옛글투입니다. 저는 이걸로 하고 있어 그런지 이젠 오히려 NCE라고 현대어역은 좀 낯설더군요. 뭐랄까... 좀 지나치게 의역을 했다고나 할까? 네, 뭐 좀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제 처음 입문하시는 분들한테는 오히려 NCE역이 나을 수도 있겠습니다.

 

https://swedenborg.com/emanuel-swedenborg/writings/rse-downloa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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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글들을 읽다 보면 (2025/4/13)

 

스베덴보리의 글들을 읽다 보면, 순간 뇌 정지가 오는 때가 있습니다. 글의 내용이 저의 이해력 역량을 초과했기 때문인데요, 그래서인지 더 이상 진도가 안 나가지는 겁니다.

 

저는 살면서 이런 걸 몇 번 경험했는데요, 지금 생각나는 첫 번째는, 대학 시절, 철학과 다니는 친구 통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처음 읽었던 때입니다. 비록 어려서부터, 그러니까 중학생 때 벌써 한국문학전집 같은 걸 읽은 저지만, 예를 들면, 월탄 박종화의 ‘금삼의 피’를, 페이지당 열 개 정도 나오는 고어들을 사전을 찾아 노트에 옮겨 적어 가며 읽었지요. 그런 저인데도... 아, 그때 그 당혹감이란... 단 한 문장을 후련하게 읽지 못하겠더군요. 아니, 그 책은 고사하고, 그 친구의 글조차 읽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전자공학을 하던 저라서 그랬는지... 나중엔 화가 나서 원어로 읽고 싶더군요. 그러나 독일어를 따로 해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포기했지요.

 

또 하나는, 제가 삼성에 입사, 당시 기흥 첨단연구소라는 데를 가서 C 언어 관련 무슨 과정 밟느라 연수 중이었는데, 하루는 어느 현업 여성 개발자 한 분이 나와 소프트웨어 드라이버 개발 과정을 설명하면서 특별히 어셈블리 관련 부분 핸들링을 설명하셨던 것 같은데... 저는 당시 이게 무슨 외계어인가 머리가 하얘지며 토할 것 같았습니다. 이 역시 저의 수준을 훨씬 웃도는, 저 높고 깊은 세계를 잠깐 들여다본 것이었지요.

 

그 후론 거의 없다가 오랜만에 또 이런 일이 생겼는데 바로 스베덴보리의 글들입니다. 이분의 글들은 영계를 다녀오신 분의 글이라 기본적으로 신비스러운데요, 특히 그에 더해 당혹스럽기까지 한 건 거의 모든 추상 개념을 마치 영상처럼 설명하시는 겁니다. 눈으로 보지 않았으면, 도저히 그렇게 표현, 묘사하실 수 없는... 이 지상의 모든 추상 개념은 그곳에선 눈에 보이게 나타난답니다. 주님의 어떠하심에 대한 설명들 역시 사실 저 개인적으로는 참으로 영광스럽고 그렇게 귀할 수가 없음에도, 본 적 없는 나라, 접한 적 없는 개념들 앞에 뇌 정지가 오는 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아래는 이럴 때 눈 딱 감고 드리는 유일한 기도입니다.

 

오, 주님, 지금 제게 천국 빛을 더하사 이 글들을 읽고 이해하게 해주세요. 저를 천국 천사들 가운데 잠시 올려주셔서 이 글들을 이해할 수 있는 천사들의 지혜 가운데 저를 잠시 있게 해주세요...

 

놀랍게도 이 기도를 드리고 나면 잠시 후 웬만하면 거의 다 깨닫게 됩니다. 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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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31(D1)-주일예배(2537, 눅24,1-12, 부활절), '다시 살아나신 주님'.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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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3-31(D1)-주일예배(2537, 눅24,1-12, 부활절), '다시 살아나신 주님'.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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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살아나신 주님

 

 

1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4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12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눅24:1-12)

 

사람의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은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 차례로 흘러들어온다. 외적인 것은 호감이 느껴지는 기억의 지식과 가장 바깥쪽의 것인 감각에 속한 것인데, 감각에 속한 것이란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짐으로써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다. 외적인 것에 내적인 것들이 머무는 까닭은 내적인 것의 흐름이 거기서 끝나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로 사람이 걸치는 피복이나 옷으로 나타내어지는 것은 바로 이 외적인 것을 말한다. (천국의 비밀 9216:2, 이순철 역) These also follow in order from interior to exterior things. Exterior things are memory-knowledges with their pleasant feelings; and outermost things are those of the senses, which communicate with the world by the sight, the hearing, the taste, the smell, and the touch. Upon these the interior things rest, for in these they terminate. These are the things which are signified in the spiritual sense by the “covering” or “garment wherein he may sleep.” (AC.9216:2)

 

 

오늘은 부활절, 주님 부활하신 이 아침에 성도들과 함께 주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감사와 영광을 주님께 돌립니다.

 

주님은 왜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을까요? 그와 관련해 새 교회 가르침 “천국의 비밀” 9216번 글 2번 항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은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 차례로 흘러들어온다. 내적인 것들이 외적인 것에 머무는 까닭은 내적인 것의 흐름이 거기서 끝나기 때문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가장 내적 존재인 주님은 가장 외적 존재인 인간에게로 오셔서 영원히 그와 함께 사시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섭리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셨던 무한하신 주님이 당신의 피조물인 유한한 인간과 영원히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는 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은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실 정도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지극히 높은 천국으로부터 지극히 낮은 이 땅으로 내려오셔서 모진 고난을 이기시고, 신성하고 완전한 진리가 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진리를 통해서만 인간은 주님을 바르게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은 완전하고 신성한 진리(Divine Truth)로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1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새벽’은 영적으로, 즉 그 속뜻으로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가 임하는 때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활하신 주님이 완전하신 진리로 인간 앞에 모습을 드러내시는 때이며, 동시에 그 진리를 가지고 낡고 부패한 교회를 심판하시고, 새로운 교회를 여시는 때입니다. 그때가 새벽입니다. 그때 여자들이 향품을 준비해 무덤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여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진리를 사랑하여 참된 진리이신 주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심판 때 구원받을 사람들이며, 주님이 세우시는 새 교회에 참여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자들은 살아계신 주님이 아니라 주님의 시신을 만나러 갑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있는 진리가 죽은 자의 시신처럼 아직 생명 없는 진리라는 반증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시신’은 죽은 진리, 즉 생명 없는 말씀의 지식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처음 진리를 받아들일 때의 진리는 생명이 없는 진리, 못 움직이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창세기 1장 창조의 순서 중 식물부터 먼저 창조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이유는, 처음에는 진리를 믿기만 할 뿐 아직 행동하지는 않기 때문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여자들이 향품을 가지고 주님의 시신에 바르는 것은 죽은 것 같은 진리에 생명을 불어넣는 최초의 노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향품’은 내적 진리를 획득하기 전에 신앙인들이 소유하는 자연적인 진리, 이를테면 십계명의 문자적인 가르침 같은 것을 뜻합니다.

 

여자들이 무덤에 갔을 때,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져 있었고, 그 안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시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덤을 막은 돌’은 뭘까요? 신앙인들의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는 걸 방해하는 여러 가지 자아의 거짓을 뜻합니다. 예를 들면, 진리를 안다는 자부심이나 진리에 대한 잘못된 추론, 또는 그 밖에 이기적인 악과 그것에서 비롯한 거짓들입니다. 우리 안에 그런 것들이 있는 동안에는 진리는 무덤 밖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처음에는 자연적 진리로, 그리고 다음에는 내적 진리로 말씀을 이해하고 지키려고 할 때, 주님에 의해 진리를 방해하던 거짓들이 물러갑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자아의 거짓을 물리칠 수 없고, 심지어 어떤 게 거짓인지도 잘 모릅니다. 거짓들은 마치 칡넝쿨이 나무를 감아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 것처럼 진리가 자라는 걸 가로막습니다. 주님만이 그것들을 잘라내 치워주실 수 있습니다. 그때 죽었던 진리가 살아납니다. 바로 그런 상태가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지는 것이고, 주님이 무덤에서 살아나시는 것입니다.

 

※ 제가 그랬습니다. 저는 이 새로운 계시, 그러니까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새롭게 여신 이 계시를 지난 2017년 가을에 처음 접했습니다. 당시 갈보리교회 강문호 목사님이 충주봉쇄수도원을 준비하시면서 수도사 학교(후에 수도 학교로 개명)를 시작하셨는데, 첫 학기 종강 때인 그해 초여름, 강사로 오신 시흥 영성수련원 원장 박희진 수도사의 권유로 저는 그 후 틈틈이 대전 바이블아카데미를 다니게 되면서 거기 주교재인 ‘핵심진리’를 접하게 되었는데, 거기에 나오는 ‘영계의 구조’에 이 ‘스베덴보리’라는 이름이 나오는 걸 보고 말이지요. 나중에 혹시나 하여 저의 지난날 일지를 보니 과거 제가 부사역자로 있던 교회에서 제가 돌보던 어느 목장 목자를 통해 제 생애 처음으로 이 ‘스베덴보리’라는 이름을 들었더군요. 목장원 중 한 분이 이 이름으로 모이는 무슨 이상한 성경공부 모임에 다닌다는 그런 상담이었습니다. 그때는 그냥 흔한 이단 분파, 신천지 같은 덴 줄 알고 금했죠. 그때가 2011년 2월이었습니다. 아무튼, 지난 2017년 1학기부터 1기생으로 출발한 저는 그때부터 접하는 모든 내용이 지난 50여 년 알아 오던 모든 기존 교리 내지는 신앙의 결을 내려놓고, 완전 새롭게 시작해야만 하는 것들이었는데, 그것은 마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는 것과 같았습니다. 저는 스베덴보리를 스베덴보리 연구회 출판, ‘위대한 선물’로 시작, 이어 그의 많은 저작 중 가장 대중적인 ‘천국과 지옥’으로 만나기 시작했고, 그렇게 이어진 주님의 이끄심으로 현재는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주석인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라틴, 天界秘義) 번역과 함께 이런저런 나름의 활동, 즉 유튜브와 블로그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지경입니다. 더욱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시간을 갖겠습니다.

 

※ 생각해 보면, 누구보다도 특히 교리적인 부분에서는 절대 타협이 없는, 골수도 정말 특이한 골수인 제가 달라도 너무 다른, 완전 그 근본부터 다른 이 아르카나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 역시 주님이 하신 것이며, 처음엔 요나처럼 도망가기 바빴던 저를 그러나 끊임없이 권하시되 마치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듯’ 저로 하여금 주님을 향하게 하신 분 역시 주님이십니다. 오직 주님만이 저를 옴짝달싹, 마치 칡넝쿨처럼 옭아맨, 기존 기독교, 특히 개신교 교리인 ‘오직 믿음’ 교리를 모두 잘라내 치워주셨던 것입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을 치우시고, 살아나신 주님께서 말입니다. 제가 주님의 이끄심으로 스베덴보리를 통해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있었던 것은, 마치 태생적으로 유대교인이었던 주님의 제자들이, 그리고 바울이, 그러나 주님을 만나 자기들의 DNA에 새겨진 것과도 같았던 유대교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과도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지고, 주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자, 여자들은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그 모습을 4절과 5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4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한글 성경에는 여자들이 근심했다고 하지만, 영어 성경에는 perplex, 즉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공황 상태에 빠졌다는 것이지요. 주님이 부활하셨는데 여인들은 기뻐하지 않고, 도리어 왜 공황 상태에 빠졌을까요? 첫째는, 신앙인의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려면 자아에 속한 게 죽어야 하는데, 그때 모든 걸 잃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진리가 살아났다 해도 처음 한동안은 진리가 나를 주장한다는 걸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 앞에 바로 나타나시지 않은 것과도 같은 일일 것입니다. 한마디로,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날 때, 신앙인들은 역설적으로 어디에도 기댈 진리가 없는 것 같은 상실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인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때 그들 곁에 빛나는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두 사람은 누굴까요?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살아있는 진리이신 주님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입은 빛나는 옷’은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가장 밝고 완전한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두 사람’이 나타났다고 했을까요?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는 선만 있고 진리가 없거나 진리만 있고 선이 없는 그런 진리가 아니라, 선과 진리가 함께 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여인들에게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여인들은 주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거라는 말을 듣기는 했으나 실제로 이루어질 거라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이 아직 자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직접 눈으로 봐야만 믿는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천사들을 보고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립니다. 주님이 나타나실 때, 사람들이 두려워 떨거나 죽은 자처럼 되었다는 것은 말씀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계시록을 쓴 요한도 주님의 발 앞에 죽은 자처럼 되었다고 했습니다. 신앙인들이 그렇게 두려워하는 것은 내면에서 어떤 영적 변화가 일어날 때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의미합니다. 주님의 신성이 사람 안으로 임하실 때, 인간이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들이 느끼는 두려움은 일종의 경건한 두려움입니다. 그러면 여자들에게 일어난 내면의 변화란 어떤 것입니까? 그에게서 죽은 진리가 살아나는 것이며, 그로 인해 자연적 신앙이 영적 신앙으로 한 단계 올라서는 것입니다.

 

7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여자들이 마침내 주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사신다고 한 것을 기억해 내고는 무덤에서 돌아가 그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렸습니다. 무덤은 그들이 죽은 진리를 만나던 곳이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사용하던 곳입니다. 이를테면 진리의 지식이 보관된 내면의 기억과 같은 곳이죠. 그러나 진리가 완전히 살아날 때, 이제는 애써 그곳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살아있는 진리, 살아계신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때그때 필요한 진리를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들은 사도들은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 역시 아직은 자연적 신앙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직접 보고 만져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베드로가 주님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그것에 대해 1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12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베드로’란 이름은 진리에 대한 순종을 뜻합니다. 실제로 베드로의 성품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급히 무덤으로 달려가 몸을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봤습니다. ‘무덤으로 달려가는 것’은 진리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뜻합니다. 그리고 ‘몸을 구부려 들여다보는 건’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 안에 있는 진리들을 돌아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 또는 말씀을 대할 때는 언제나 몸을 낮춰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진리가 보이고, 또한 죽었던 진리가 살아나는 것이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때 베드로의 눈에 들어온 것은 뭘까요? 주님의 시신이 아니라 세마포였습니다. ‘세마포’는 주님이 주시는 내적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본 진리는 이전에 알던 생명 없는 지식이 아니라 내적 진리였던 것입니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에게 있던 진리들이 살아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는 건 눈먼 자가 눈을 뜨는 것 이상의 기적입니다. 흔히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살아나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던 기질이 바뀝니다. 그것은 주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기적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모든 일을 놀랍게 여겼다고 합니다. 놀랍게 여겼다는 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절을 맞아 다시 한번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오늘 말씀에서 여자들은 향품으로 표상되는 자연적 진리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자연적 진리란 말씀의 문자로 표현된 진리이며, 내적 진리를 담기 위한 그릇 역할을 하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그 자체로는 아직 완전한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자연적 진리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점차 그 안에 내적 진리를 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는 까닭은, 내적 진리가 자연적 그릇 안에 담길 때, 온전하고 힘 있는 진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옥을 이기신 주님의 능력이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세상에 계실 때, 완전하지 않은 진리의 상태에서 지옥의 시험을 완전히 이기시고, 신성한 진리 자체가 되셨습니다. 만약 주님이 처음부터 신성한 진리 그 자체셨다면, 주님은 시험을 당하실 수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지옥이 감히 주님을 대적하거나 도발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는 시험을 당하시는 주님의 진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만큼 완전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께 기대어 자신에게 있는 진리를 매일 살려야 하고, 더 내적인 진리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온전히 거듭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호6:2)

 

아멘

 

2023-04-0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3-3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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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속)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

CONTINUATION CONCERNING HEAVENAND HEAVENLY JOY

 

 

545. 저로 하여금 천국과 천국 기쁨의 본질과 퀄러티에 대해 알게 하시려고 주님은 오랫동안 종종 제가 천국 기쁨의 즐거움을 지각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이런 실제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것을 말로, 글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But in order that I might know the nature and quality of heaven and of heavenly joy, for long and often I have been permitted by the Lord to perceive the delights of heavenly joys, so that as I know them from actual experience I can indeed know them, but can by no means describe them.

 

하지만 제가 다음과 같이라도 말씀드리면 혹시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살짝 가늠하실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천국의 기쁨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즐거움과 기쁨을 수반하는 일종의 어펙션입니다. 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즐거움과 기쁨이 전면적으로 동시에 경험되는 하나의 기쁨인데요, 이 전면적인 기쁨, 즉, 전면적인 어펙션 안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어펙션들이 조화를 이루며 존재합니다. 이때 이것은 하나하나 뚜렷이 지각되는 게 아니고, 모호하게 지각됩니다. 퍼셉션이 매우 전면적이기 때문입니다. However, in order to give some idea of it I may say that heavenly joy is an affection of innumerable delights and joys that form one general simultaneous joy, in which general joy, that is, in which general affection, there are harmonies of innumerable affections that do not come distinctly to perception, but obscurely, because the perception is very general.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허락하심을 받아 그 안, 천국의 기쁨 안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이 내재하고 있음을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말로는 도저히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질서로 내재해 있었는데, 바로 천국의 질서로부터 흐르는 질서였습니다. Yet I was permitted to perceive that there are things innumerable within it, in such order as can never be described, these innumerable things being such as flow from the order of heaven.

 

이런 질서는 그 어펙션 모든 가장 미세한 것에까지 존재하며, 함께 합쳐 그 전체가 하나로 보이고, 그것의 주제, 곧 그 어펙션을 느끼고 있는 그 사람의 역량에 따라 아주 전체적인 것으로 지각됩니다. Such order exists in every least thing of the affection, all of which together are presented and perceived as a very general one according to the capacity of him who is the subject of it.

 

한 마디로, 모든 전반적인 기쁨 혹은 어펙션에는 가장 온전한 형태로 조성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이 존재하지만, 살아있지 않거나 우리 안 가장 내적인 것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천국의 기쁨은 가장 내적인 것들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In a word, in every general joy or affection there are illimitable things ordinated in a most perfect form, and there is nothing that is not alive or that does not affect even the inmost things of our being, for heavenly joys proceed from inmost things.

 

저는 또 지각하기를, 그 기쁨과 상쾌함은 마치 심장에서 나와 모든 가장 미세한 섬유조직들을 통해, 그리고 그렇게 조직 다발 속으로, 즐거움의 가장 내적 감각을 가지고 자신들을 아주 부드럽게 퍼트리는 것 같았으며, 이것은 마치 기쁨과 상쾌함만 남은 섬유조직 같았고, 이런 가운데서 나온 퍼셉션과 감각의 영향권 역시 전체적으로 그 행복하게 살아있는 것이 같았습니다. I perceived also that the joy and deliciousness came as if from the heart, and very softly diffused themselves through all the inmost fibers, and so into the congregated fibers, with such an inmost sense of delight that the fiber is as it were nothing but joy and deliciousness, and the whole derivative perceptive and sensitive sphere the same, being alive with happiness.

 

이들 기쁨들을 육체적 쾌락이 주는 기쁨과 비교하자면, 전자는 맑고 부드러운 산들바람 같다면, 후자는 역겹고 퀘퀘한 먼지와도 같다 할 수 있습니다. In comparison with these joys the joy of bodily pleasures is like gross and pungent dust as compared with a pure and gentle breeze.

 

 

546. 천국에 무척 있고는 싶은데 사실 천국에 있을 수는 없는 그런 사람들의 경우는 어떻게 되는지를 저로 하여금 알게 하시려고, 한번은 제가 하늘 어느 소사이어티에 있을 때, 한 천사가 머리에는 밝게 빛나는 파란 꽃들로 엮은 화관을 쓰고, 가슴에는 다른 색 꽃들로 꾸민 화환을 두른 유아로 제게 나타났습니다. In order that I might know how the case is with those who desire to be in heaven and are not such that they can be there, once when I was in some heavenly society, an angel appeared to me as an infant with a chaplet of bright blue flowers about its head, and girded about the breast with wreaths of other colors.

 

이걸 보고, 저는 그곳이 체어리티가 있는 어느 소사이어티임을 알았습니다. By this I was given to know that I was in some society where there was charity.

 

그때 어떤 착한 영들이 제가 있던 같은 소사이어티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들은 들어오는 순간, 들어오기 전보다 훨씬 더 총명해져서 마치 천사적 영들처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Some well-disposed spirits were then admitted into the same society, who the moment they entered became much more intelligent, and spoke like angelic spirits.

 

그 후, 어떤 영들이 들어왔는데 그들은 스스로 순진무구하기를 원하던 영들이었고, 그중 저에게 표현된 한 영의 상태는 젖을 입 밖으로 토하는 유아의 모습이었습니다. Afterwards some were admitted who desired to be innocent from themselves, whose state was represented to me by an infant that vomited milk out of its mouth.

 

이것이 그들의 상태였습니다. Such is their state.

 

그때 또 어떤 영들이 들어왔는데, 그들은 스스로를 지성적이다, 총명하다 여기던 영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상태가 그들의 얼굴로 표현되었는데, 날카로워 보였으나 매우 고왔습니다. 그들은 날카로운 부분이 돌출된, 끝이 뾰족한 모자를 쓰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런데 그들의 얼굴은 사람의 살처럼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마치 칼로 깎은 듯, 생명이 없는 듯한 얼굴이었습니다. Then some were admitted who supposed that they were intelligent from themselves, and their state was represented by their faces, which appeared sharp, but fair enough; and they seemed to wear a peaked hat from which a sharp point projected, but their faces did not appear to be of human flesh, but as if carved out and devoid of life.

 

이런 것은 스스로를 우리는 영적이다, 즉, 스스로를 우리는 신앙을 가졌다 믿는 사람들의 상태입니다. Such is the state of those who believe that they are spiritual from themselves, that is, able from themselves to have faith.

 

거기 머무를 수 없는 다른 영들이 들어왔는데, 실망들을 하며, 괴로워들을 하더니, 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Other spirits were admitted who could not remain there, but were dismayed, became distressed, and fled away.

2021-07-30(D6)-매일예배(AC.545-546, 창5 C), '창5 클로징,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2)'.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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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3h7B2fLioX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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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스베덴보리의 저서(Writings) 목록입니다.

 

인류사에 존재했던 사람 중 가장 지능이 높은 사람으로 기네스 북에는 밀턴, 괴테 그리고 스베덴보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생전에 가장 많은 저술량을 보유한 자를 기록하는 분야가 있었다면, 역시 거기에도 스베덴보리는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저술 분야는 광범위합니다. 시, 음악, 과학의 여러 분야, 공학, 철학, 경제 등등. 나중에 ‘스베덴보리 - 부름 전’이라는 글도 준비, 그가 주님의 부름을 받기 전 저작들 또한 소개하여 저술의 광범위함과 깊이를 엿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이러한 초기 저작도 부름을 받은 후 기록한 신학저서의 방대함과 깊이, 영향력에 견준다면 초라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의 본격적인 영계 체험과 신학 저술은 1747년,  영계 일기로 시작, 1771년,  참 그리스도교로 대미를 이룹니다.

 

※ 아래 목록 중 스베덴보리 재단(https://swedenborg.com/)에서 릴리즈한 영문 원서들을 첨부합니다. 필요하신 분들은 다운로드하셔서 보시기 바랍니다.

 

※ 맨 아래 COMPENDIUM이라는 책은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술, 모든 글 중에서 특정 주제별로 대표적인 글들을 추출, 마치 조직신학처럼 체계적으로 엮은 책으로, 일체 엮은이의 무슨 사사로운 견해를 덧붙이지 않은, 그래서 이 역시 스베덴보리의 저서라 할 수 있어 여기 첨부합니다.

 

 

영계 일기, 전 5권, 1747-1765 (※ 이 글은 따로 pdf 버전을 구할 수 없어 그냥 소개만 합니다. 간혹 종이책으로 나오는 건 있습니다.)

Spiritual Diary

 

천계비의, 전 8권, 1749-1756, 런던 출판

Arcana Coelestia

arcana_coelestia_01(창1-9, 1-1113), 648.pdf
1.95MB
arcana_coelestia_02(창10-17, 1114-2134), 639.pdf
1.93MB
arcana_coelestia_03(창18-22, 2135-2893), 612.pdf
1.86MB
arcana_coelestia_04(창23-27, 2894-3649), 560.pdf
1.74MB
arcana_coelestia_05(창28-31, 3650-4228), 524.pdf
1.65MB
arcana_coelestia_06(창32-38, 4229–4953), 602.pdf
1.87MB
arcana_coelestia_07(창39-43, 4954–5727), 549.pdf
1.74MB
arcana_coelestia_08(창44-50, 5728–6626), 535.pdf
1.69MB
arcana_coelestia_09(출1-12, 6627–8032), 743.pdf
2.26MB
arcana_coelestia_10(출13-21, 8033–9111), 696.pdf
2.18MB
arcana_coelestia_11(출22-28, 9112–9973), 831.pdf
2.50MB
arcana_coelestia_12(출29-40, 9974–10837), 760.pdf
2.32MB

 

천국과 지옥, 1758, 런던 출판

Heaven and Hell

heaven_and_hell, 581.pdf
1.77MB

 

우주 안의 지구들, 1758, 런던 출판

Earths in the Universe

05 earths_in_the_universe, 113.pdf
0.48MB

 

최후 심판, 1758, 런던 출판

Last Judgment

06 last_judgment, 85.pdf
0.41MB
10 last_judgment_posthumous, 152.pdf
0.55MB

 

새 예루살렘과 그 천적 교리, 1758, 런던 출판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01 new_jerusalem, 214.pdf
0.73MB

 

백마, 1758, 런던 출판

White Horse

04 white_horse, 34.pdf
0.27MB

 

계시록 해설, 전 6권, 1759

Apocalypse Explained

apocalypse_explained_01(계1-4, 1–295), 653.pdf
1.96MB
apocalypse_explained_02(계5-6, 296–414), 662.pdf
1.97MB
apocalypse_explained_03(계7-10, 415–625), 729.pdf
2.19MB
apocalypse_explained_04(계11-12, 626–771), 708.pdf
2.13MB
apocalypse_explained_05(계13-16, 772–1028), 556.pdf
1.78MB
apocalypse_explained_06(계17-19,10, 1029–1232), 601.pdf
2.03MB

 

주의 교리, 1763, 암스테르담 출판

Doctrine of the Lord

01 the_lord, 144.pdf
0.47MB

 

성경의 교리, 1763, 암스테르담 출판

Doctrine of the Sacred Scripture

03 holy_scripture, 109.pdf
0.41MB

 

생활의 교리, 1763, 암스테르담 출판

Doctrine of Life

04 life, 70.pdf
0.31MB

 

신앙의 교리, 1763, 암스테르담 출판

Doctrine of Faith

05 faith-1, 39.pdf
0.23MB

 

속 최후 심판, 1763, 암스테르담 출판

Continuation Concerning the Last Judgment

07 continuation_on_last_judgment, 45.pdf
0.27MB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 1763, 암스테르담 출판

Divine Love and Wisdom

divine_love_and_wisdom, 299.pdf
0.99MB

 

하나님의 섭리, 1764, 암스테르담 출판

Divine Providence

divine_providence, 435.pdf
1.31MB

 

계시록 풀이, 전 2권, 1766, 암스테르담 출판

Apocalypse Revealed

apocalypse_revealed_01(계1-13, 1-611), 679.pdf
2.00MB
apocalypse_revealed_02(계14-22, 612-962), 659.pdf
1.95MB

 

결혼애, 1768, 암스테르담 출판

Conjugial Love

conjugial_love, 696.pdf
2.22MB

 

간략한 해설, 1769, 암스테르담 출판

Brief Exposition

02 brief_exposition, 110.pdf
0.46MB

 

영혼과 몸의 소통, 1769, 런던 출판

Communication of the Soul and the Body

03 interaction_of_soul_and_body, 38.pdf
0.28MB

 

참 그리스도교, 전 2권, 1771, 암스테르담 출판

True Christian Religion

true_christian_religion_01(1–462), 650.pdf
1.98MB
true_christian_religion_02(463–851), 595.pdf
1.84MB

 

총서(叢書, A COMPENDIUM of the Theological Writings of Emanuel Swedenborg), Samuel M. Warren

COMPENDIUM

SF_Compendium_Warren_파트1.pdf
18.19MB
SF_Compendium_Warren_파트2.pdf
18.49MB
SF_Compendium_Warren_파트3.pdf
18.46MB
SF_Compendium_Warren_파트4.pdf
4.63MB

 

※ 파일 당 20MB로 제한이 걸려 있어 할 수 없이 네 조각(조각 당 250페이지)으로 분할, 공유합니다.

※ 알PDF로 분할했으니 참고하세요.

 


※ 혹시 스베덴보리 재단에서 직접 다운로드하고프신 분은 아래 링크를 참조하세요.

 

Redesigned Standard Edition Downloads - Swedenborg Foundation

Most people who cite Swedenborg’s writings use what is currently known as the Standard Edition, the English translation produced in the early 1900s. In the 1990s, these translations were electronically input in order to create a new typeset version, and

swedenbor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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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제가 번역하는 책들의 저자에 대한 간단한 소개입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는 1688년,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출생, 웁살라대학에서 언어학, 수학, 광물학, 천문학, 생리학, 신학을 수학했습니다. 자연과학을 연구하여 광산학자로서의 권위를 인정받고, 아이작 뉴턴과 같은 최고 과학자 반열에 올랐으나 57세에 주님의 부르심으로 영계 체험을 시작, 이후 27년 간 영계를 자유롭게 오고 가며, 보고 들은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겨 그 라틴어 원고만 수만 장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의 과학적 재능을 아낀 동료들에게 그는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합니다.

 

저와 같은 과학자는 얼마든지 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 곧 영계에 관한 진리를 남기는 일은 인류 전체의 생명이 걸린 중요한 문제입니다. 주님께 받은 이 특별한 소명은 제가 과학자로 공헌하는 것보다 수천수만 배 더 중요합니다...”

 

그는 그의 마지막 저서, ‘True Christian Religion(1771)을 끝으로 이듬해인 1772년 주님이 부르시는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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