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18)
AC.404
이모든이름은‘가인’(Cain)이라불린최초의이단에서파생된이단들을의미합니다.그러나그것들에관하여는이름들외에는전해지는것이없으므로,그것들에관하여무엇인가말하는것은불필요합니다.그이름들의어원으로부터어느정도알수있는것이있을수있습니다.예를들어‘이랏’(Irad)은그가‘성읍에서내려온다’(descendsfromacity)는것을의미하며,따라서‘에녹’(Enoch)이라불린이단에서내려왔음을의미합니다.다른이름들도이와같습니다. All these names signify heresies derived from the first,which was called “Cain”;but as there is nothing extant respecting them,except the names,it is unnecessary to say anything about them. Something might be gathered from the derivations of the names;for example,“Irad” means that he “descendsfromacity,” thus from the heresy called “Enoch,” and so on.
해설
AC.404는 창4:18에 이어지는 가인의 계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간결하게 밝혀 줍니다. 가인에게서 에녹이 나왔고, 에녹에게서 이라드가 나왔으며, 그 뒤로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이 이어집니다. 문자적 의미에서는 한 가문의 족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이름이 ‘가인’이라 불린 최초의 이단에서 파생된 여러 이단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제 가인의 계보는 단순히 여러 세대가 이어지는 혈통이 아니라, 최초의 영적 분리가 계속 다른 형태로 파생되어 가는 하나의 교리적 계보로 읽힙니다.
이 설명은 앞의 AC.399-400과 직접 연결됩니다. AC.399에서는 가인이라는 분열 또는 이단이 자기 자신에게서 또 다른 분열을 산출했고 그것이 에녹이라 불렸다고 했습니다. AC.400에서는 그 원리를 더욱 일반화하여 ‘하나의이단이잉태되면거기에서수많은이단이태어납니다’라고 했습니다. AC.404는 바로 그 말이 실제 가인의 계보에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가인에서 시작된 최초의 분리가 에녹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의 여러 이름으로 계속 파생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최초의이단’이라는 표현은 가인의 본래 의미를 다시 기억하게 합니다. 가인은 단순히 어떤 잘못된 교리 하나를 표상한 것이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상태를 표상했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고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지만,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에게서는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AC.398의 표현대로 하면 ‘의지대신이해가,사랑대신신앙이지배하게된’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최초의 분리에서 이후의 여러 이단이 파생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라드, 므후야엘, 므드사엘 등이 각각 정확히 어떤 교리를 주장했는지 알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스스로 멈춥니다. ‘그것들에관하여는이름들외에는전해지는것이없으므로,그것들에관하여무엇인가말하는것은불필요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AC를 읽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해석 태도를 보여 줍니다. 속뜻이 있다고 해서 본문이 제공하지 않는 세부 내용까지 자유롭게 만들어 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스베덴보리는 이름의 의미에서 어느 정도 추론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예로 ‘이라드’를 듭니다. 이라드라는 이름은 ‘성읍에서내려온다’는 의미를 가지므로, 속뜻에서는 앞의 ‘성읍’, 곧 에녹이라 불린 이단에서 파생되어 내려온 것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AC.401에서 에녹은 시작되거나 형성되기 시작한 가르침과 연결되었고, AC.402에서 성읍은 교리적인 것 또는 이단적인 것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이라드가 ‘성읍에서내려온다’는 것은 앞서 형성된 에녹의 교리적·이단적 상태에서 또 다른 상태가 파생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렇게 보면 가인의 계보에는 상당히 일관된 흐름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가인이라는 최초의 분리가 있습니다. 그 분리에서 에녹이라는 새로운 이단이 산출됩니다. 에녹은 가르침으로 시작되고 형성되는 상태와 관련되고, 그 이름을 따라 성읍이 세워지면서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가 하나의 형태를 갖춥니다. 그리고 이제 그 ‘성읍’에서 이라드가 내려옵니다. 하나의 분리된 신앙이 가르침이 되고, 그 가르침이 교리적인 전체를 이루며, 그 교리적 전체에서 다시 새로운 형태의 분리가 파생되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AC.404에서 말하는 ‘계보’는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앞의 상태가 뒤의 상태를 낳는 연속성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AC.400에서 이미 말한 ‘잉태와출생’의 원리와 같습니다. 하나의 교리적 전제가 받아들여지면 그 안에서 다음 결론이 나오고, 그 결론에서 다시 다른 결론이 나옵니다. 처음의 근본 원리가 계속 후속적인 형태들을 산출하면서 하나의 계보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의 절제입니다. 그는 ‘다른이름들도이와같다’고 말할 뿐, 각각의 이름에 대해 상세한 교리적 내용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이름의 어원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을 뒷받침할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상응을 다룰 때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상응은 무엇이든 마음대로 영적 의미를 붙이는 작업이 아니라, 말씀 자체와 AC의 설명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이 점은 앞의 AC.403과도 잘 연결됩니다. 태고인들은 영적인 것들을 ‘표상적유형들’아래 ‘역사형식’으로 배열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계보에 등장하는 이름들도 영적인 상태들의 연속을 역사적 족보의 형태로 나타냅니다. 그러나 표상적 역사라고 해서 모든 이름의 세부 의미가 우리에게 자동으로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속뜻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우리가 그 속뜻의 모든 세부를 알고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AC.404는 한편으로는 매우 강하게 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강하게 말하는 것은 ‘이모든이름은가인이라는최초의이단에서파생된이단들을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은 ‘각각이구체적으로무엇인지는이름외에는자료가없으므로자세히말하지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두 태도를 함께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교리 이해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잘못된 근본 원리는 여러 후속적인 오류를 낳을 수 있습니다. 특히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진리를 선한 삶에서 분리하며, 이해를 사랑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시키는 원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교리적 형태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역사 속의 모든 교리나 교파를 임의로 가인의 어느 후손과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AC.404자체가 그런 과도한 추정을 경계하게 합니다.
오히려 가인의 계보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면 더욱 유익합니다. 하나의 잘못된 원리를 받아들였을 때 그것이 어떤 후속적인 생각들을 낳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옳다는것이사랑하는것보다중요하다’는 원리가 마음에 자리 잡으면, 거기서 상대를 판단하는 생각이 나오고, 그 판단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생기며, 마침내 사랑하지 않는 행동까지도 옳다고 설명하는 하나의 내적 ‘성읍’이 세워질 수 있습니다. 하나의 분리가 그 자체에서 후손을 낳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거듭남의 역사에서는 그 반대도 가능합니다. 잘못된 근본 원리가 발견되고 그것을 악으로 인정하여 피할 때, 주님께서는 진리를 다시 선과 결합시키십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섬기게 되고, 이해는 자기 지성에서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표현하는 수단이 됩니다. 가인의 계보를 읽는 목적은 단순히 옛 이단의 역사를 분류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신앙과 사랑의 질서가 어떻게 유지되거나 무너지는지를 보는 데 있습니다.
결국 AC.404는 가인의 후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상세히 해독하려 하기보다 그 계보 전체의 성격을 먼저 붙들게 합니다. 그들은 모두 ‘가인’이라 불린 최초의 이단에서 파생된 이단들을 나타냅니다. 이라드가 ‘성읍에서내려온다’는 이름으로 에녹의 이단에서 파생된 상태를 보여 주듯, 뒤의 이름들도 같은 계보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세부 내용이 주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멈추어야 합니다. 말씀의 속뜻을 깊이 읽는 것과 말씀보다 앞서 나가는 것은 다른 일이기 때문입니다. AC.404는 바로 그 두 가지를 함께 가르쳐 주는 번호입니다. (AC.404해설)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창4:17)
AC.402
가인이‘쌓은성읍’(citythatwasbuilt)이그이단에서나온교리적인것과이단적인것전체를의미한다는사실은말씀에서성읍의이름이나오는모든구절로부터분명합니다.그어느곳에서도성읍자체를의미하지않고,언제나어떤교리적인것또는이단적인것을의미하기때문입니다.천사들은성읍이무엇인지,또어떤성읍의이름이무엇인지전혀알지못합니다.앞에서보여준것처럼그들의관념은영적이고천적이기때문에성읍에대한어떤관념도가지고있지않으며가질수도없습니다.그들은오직성읍과그이름이무엇을의미하는지만퍼셉션합니다.따라서‘거룩한성’(holycity),곧‘거룩한예루살렘’(holyJerusalem)은일반적으로는주님의나라를,특별히는그나라가그안에있는각개인을의미합니다.‘성읍시온’(city)과‘시온산’(mountainofZion)도이와같은방식으로이해되는데,후자는신앙의천적인것을,전자는신앙의영적인것을의미합니다. That by the “citythatwasbuilt” is signified all the doctrinal and heretical teaching that came from that heresy,is evident from every passage of the Word in which the name of a city occurs;for in none of them does it ever mean a city,but always something doctrinal or else heretical. The angels are altogether ignorant of what a city is,and of the name of any city;since they neither have nor can have any idea of a city,in consequence of their ideas being spiritual and celestial,as was shown above. They perceive only what a city and its name signify. Thus by the “holycity,” which is also called the “holyJerusalem,” nothing else is meant than the kingdom of the Lord in general,or in each individual in particular in whom is that kingdom. The “city” and “mountainofZion” also are similarly understood;the latter denoting the celestial of faith,and the former its spiritual.
[2]천적인것과영적인것자체도‘성읍들’(cities),‘궁전들’(palaces),‘집들’(houses),‘성벽들’(walls),‘성벽의기초들’(foundationsofwalls),‘방벽들’(ramparts),‘성문들’(gates),‘빗장들’(bars),그리고그가운데있는‘성전’(temple)으로묘사됩니다.에스겔48장과The celestial and spiritual itself is also described by “cities,” “palaces,” “houses,” “walls,” “foundationsofwalls,” “ramparts,” “gates,” “bars,” and the “temple” in the midst;as in Ezekiel 48;
여기서‘진리의성읍’(cityoftruth),곧‘예루살렘’(Jerusalem)은신앙의영적인것들을의미하고,‘성산’(mountainofholiness),곧‘시온산’(ofZion)은신앙의천적인것들을의미합니다. where the “cityoftruth,” or “Jerusalem,” signifies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and the “mountainofholiness,” or “ofZion,”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3] 신앙의천적인것들과영적인것들이성읍으로표상되는것처럼,유다와이스라엘의성읍들은모든교리적인것들을의미합니다.이성읍들은각각그이름이언급될때어떤교리적인것에관한고유한의미를가지지만,그것이무엇인지는속뜻으로부터가아니면아무도알수없습니다.‘성읍들’(cities)이교리적인것들을의미하므로이단들도역시성읍들로의미되며,이경우각각의성읍은그이름에따라어떤특정한이단적견해를의미합니다.지금은다음말씀의구절들로부터일반적으로‘성읍’(city)이어떤교리적인것또는이단적인것을의미한다는사실만을보여주고자합니다. As th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of faith are represented by a city,so also are all doctrinal things signified by the cities of Judah and of Israel,each of which when named has its own specific signification of something doctrinal,but what that is no one can know except from the internal sense. As doctrinal things are signified by “cities,” so also are heresies,and in this case every particular city,according to its name,signifies some particular heretical opinion. At present we shall only show from the following passages of the Word,that in general a “city” signifies something doctrinal,or else heretical.
여기서는주님의강림때영적이고천적인것들에관한기억지식(memory-knowledge)을다룹니다.또환상의골짜기,곧환상(fantasy)을다루는곳에서는, where the subject treated of is the memory-knowledge of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at the time of the Lord’s advent. So again,when treating of the valley of vision,that is,of fantasy:
예레미야에서는‘남방에있는자들’(inthesouth),곧진리의빛가운데있으면서그것을꺼버리는자들을말하면서, In Jeremiah,speaking of those who are “inthesouth,” that is,in the light of truth,and who extinguish it:
여기서‘성벽’(wall),‘방벽’(rampart),‘성문’(gates),‘빗장’(bars)이오직교리적인것들을의미한다는것은누구나볼수있습니다. where anyone may see that by a “wall,” a “rampart,” “gates,” and “bars,” doctrinal things only are meant.
여기서‘혼돈의성읍’(cityofemptiness)은교리의공허함을의미하며,‘거리들’(streets)은여기서도다른곳에서와마찬가지로성읍에속한것들,곧거짓들이나진리들을의미합니다.계시록에서는, where the “cityofemptiness” denotes emptinesses of doctrine;and “streets” signify here as elsewhere the things which belong to the city,whether falsities or truths. In John:
그여자가그러한성격의교회를의미한다는것은앞에서보여준바와같습니다. and that the woman denotes a church of that character has been shown before.
해설
AC.402는 가인이 에녹의 이름을 따라 세운 ‘성읍’이 왜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를 의미하는지를 말씀 전체의 용례를 통하여 설명합니다. AC.399에서는 이 의미를 간단히 제시했지만, 이번 번호에서는 거룩한 예루살렘과 시온에서부터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시편, 스가랴, 민수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많은 구절을 인용하여 ‘성읍’이라는 표상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많은 성경 인용에 압도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무엇 하나를 입증하기 위해 이 모든 구절을 모으고 있는지를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하나의 명제는 ‘성읍은교리적인것또는이단적인것을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하게 ‘말씀에서성읍은어느곳에서도성읍자체를의미하지않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말씀의 속뜻을 설명하는 그의 방식에서 나온 진술입니다. 문자적 의미에서 실제 예루살렘이나 시온이나 여러 성읍이 역사적 장소로 존재했다는 것을 부정하는 말이라기보다, 천사들이 받아들이는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는 그러한 자연적 장소가 영적인 실재를 표상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 문장을 근거로 말씀의 문자적·역사적 의미가 무가치하다고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집중하는 것은 성읍의 ‘속뜻’입니다.
그는 이 점을 천사들의 관념을 통하여 설명합니다. 천사들은 성읍이 무엇인지 또는 어떤 성읍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그들의 관념은 영적이고 천적이기 때문에 자연계의 성읍에 관한 관념을 갖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이 퍼셉션하는 것은 그 성읍과 이름이 ‘무엇을의미하는가’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말씀 이해에서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자연적 이미지가 말씀을 통하여 천국에 이를 때 천사들은 그 자연적 형태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상응하는 영적·천적 실재를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거룩한예루살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룩한 성, 곧 거룩한 예루살렘이 일반적으로는 ‘주님의나라’를 의미하고, 특별히는 그 나라가 그 안에 있는 각 개인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단지 인간 밖에 존재하는 천국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가 한 사람 안에 세워질 때 그 사람 안에도 주님의 나라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룩한 예루살렘이라는 성읍은 주님의 나라가 교리와 진리의 질서 안에서 형성된 모습을 나타냅니다.
이어 ‘시온산’과 ‘성읍시온’을 구별합니다. 산은 신앙의 ‘천적인것’을, 성읍은 신앙의 ‘영적인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천적인 것은 사랑과 선에 더 직접적으로 관련되고, 영적인 것은 그 사랑과 선에서 나오는 진리와 신앙에 관련됩니다. 산이 높은 곳으로서 사랑의 천적 상태를 나타낸다면, 성읍은 그 안에 질서 있게 배치된 길과 집과 성벽과 문을 가진 구조로서 진리와 교리의 영적 질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2]에서는 성읍뿐 아니라 ‘궁전,집,성벽,성벽의기초,방벽,성문,빗장,성전’이 한꺼번에 등장합니다. 에스겔 48장과 계시록 21장의 거룩한 성이 대표적입니다. 이것들은 단순한 천국 건축물의 설계도가 아니라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이 어떻게 하나의 질서를 이루는지를 자연적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특히 성벽과 성문과 기초는 성읍을 이루고 보호하며 출입을 규정하는 요소들이므로 교리의 진리들과 그 질서에 관련된 표상으로 이해됩니다.
시편의 ‘하나님의성’, 에스겔의 ‘여호와께서거기계시다’, 이사야의 ‘여호와의성읍’, 스가랴의 ‘진리의성읍’도 모두 같은 논증에 사용됩니다. 특히 슥8:3에서 ‘예루살렘은진리의성읍’, ‘시온산은성산’이라고 한 구절은 스베덴보리의 구별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는 예루살렘, 곧 진리의 성읍을 ‘신앙의영적인것들’로 보고, 시온산을 ‘신앙의천적인것들’로 봅니다. 성읍이 진리와 교리의 질서와 연결된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구절인 셈입니다.
그러나 성읍이 언제나 좋은 교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3]부터의 중요한 전환입니다. ‘성읍’이라는 상응은 교리적인 것을 나타내므로, 그 교리가 거짓과 악에서 나온 경우에는 이단적인 것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성읍 자체가 선하거나 악한 상응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어떤 성읍인지, 어떤 문맥에 있는지,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각각의 성읍도 각기 다른 교리적인 것을 의미하며,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속뜻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이것은 앞의 AC.386에서 확인한 중요한 원리와도 통합니다. 상응은 기계적인 일대일 암호표가 아닙니다. ‘성읍=참된교리’라고 고정할 수도 없고 ‘성읍=거짓교리’라고 고정할 수도 없습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성읍은 ‘교리적인것’을 나타내며, 그것의 영적 질은 그 성읍이 놓인 전체 문맥과 이름에 따라 결정됩니다. 거룩한 예루살렘은 주님의 나라와 참된 교리의 질서를 나타내지만, 가인의 에녹 성읍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를 나타냅니다.
[4]와 [5]의 수많은 인용은 바로 이 원리를 양쪽 방향에서 입증합니다. 애굽 땅의 다섯 성읍, 환상의 골짜기의 떠들썩한 성읍, 닫힌 남방의 성읍들, 시온의 성벽과 성문과 빗장, 견고한 성읍, 혼돈의 성읍, 계시록의 큰 성읍과 만국의 성읍들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각각의 구절을 별개의 주제로 떼어 심화하기보다, 모두 ‘성읍과그구성요소들이교리적상태를표현한다’는 하나의 증거군으로 읽는 것이 이번 번호의 논지를 가장 잘 살립니다.
특히 사24:10의 ‘혼돈의성읍’은 이해하기 좋은 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교리의공허함’이라고 풀이합니다. 실제 건물들이 비어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진리가 사라져 교리가 텅 빈 상태를 성읍의 황폐함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읍의 ‘거리들’은 성읍에 속한 것, 곧 문맥에 따라 거짓이나 진리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하나의 성읍이 전체적인 교리의 질서를 나타낸다면 그 안의 거리와 성벽과 문과 집들도 그 전체를 구성하는 개별적인 것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계16장의 ‘큰성읍이세갈래로갈라지고만국의성읍들이무너졌다’는 말씀도 같은 방식으로 읽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단순히 어떤 거대한 도시가 물리적으로 세 부분으로 갈라지는 사건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단적인 교회 상태와 그 교리적 구조의 붕괴를 나타낸다고 봅니다. 계17:18에서는 그 큰 성읍이 요한이 본 ‘여자’라고 설명되며, 스베덴보리는 그 여자가 그러한 성격의 교회를 의미한다고 연결합니다. 따라서 ‘성읍’과 ‘여자’와 ‘교회’가 서로 다른 자연적 표상을 통하여 하나의 영적 실재를 여러 측면에서 보여 주게 됩니다.
이제 이 모든 설명을 다시 가인의 성읍으로 가져오면 AC.399-402의 흐름이 선명해집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분열을 표상합니다. 그 가인에게서 에녹이라는 또 다른 분열이 태어났습니다. AC.401에서는 에녹이라는 이름이 ‘시작되거나형성되기시작한가르침’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에녹의 이름을 따라 성읍이 세워집니다. 즉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하나의 새로운 가르침을 낳고, 그 가르침에서 다시 여러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들이 형성되어 하나의 전체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이성읍을쌓았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단계입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신앙의 관계가 뒤집힌 하나의 원리였습니다. 그 원리가 새로운 분열을 낳았고, 그 분열이 가르침이 되었으며, 이제 그 가르침이 하나의 교리적 세계를 형성합니다. 잘못된 영적 원리가 개인적인 생각의 수준을 넘어 전승되고 조직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교리체계’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거룩한 예루살렘 역시 성읍입니다. 즉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질서 있게 결합되어 이루는 참된 교리도 성읍으로 표상됩니다. 문제는 성읍을 세우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 성읍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체어리티를 중심으로 진리가 질서를 이루면 거룩한 성읍이 될 수 있지만,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원리가 중심이 되면 가인의 성읍이 됩니다.
이 점은 교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도 중요한 기준을 줍니다. 교리는 필요합니다. 인간이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잃은 뒤에는 진리를 배우고 이해하며 그것을 통하여 주님께 인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앞의 AC.393-398에서 신앙이 ‘인류의쓰임을위하여’보존된 이유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교리가 많다는 것도, 교리가 체계적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 교리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는지, 그리고 사람을 실제 사랑과 선한 삶으로 이끄는지가 중요합니다.
AC.402가 보여 주는 가장 아름다운 대조는 결국 ‘가인의성읍’과 ‘거룩한예루살렘’입니다. 둘 다 성읍이며 둘 다 교리적인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형성된 교리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나라가 그 안에 이루어진 교리적·영적 질서입니다. 외적으로는 모두 ‘성읍’이지만 그 안에 거하는 사랑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성읍의 속뜻을 이해하는 핵심은 건물의 규모나 성벽의 견고함이 아니라 그 성읍을 이루는 진리들이 어떤 선과 결합되어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진리는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을 때 주님의 나라를 이루는 거룩한 성읍이 됩니다. 반대로 진리가 사랑에서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조직될 때에는 아무리 견고한 성벽과 정교한 구조를 갖추더라도 가인의 성읍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AC.402가 수많은 말씀의 성읍들을 통하여 가인이 쌓은 한 성읍의 속뜻을 밝혀 주는 이유입니다. (AC.402해설)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창4:17)
AC.401
‘에녹’(Enoch)이라불린것은그모든교리적또는이단적가르침을포함한하나의이단이었다는사실은,이이름자체에서도어느정도분명합니다.‘에녹’이라는이름은그렇게시작되거나형성되기시작한가르침(instructionsobegunorinitiated)을의미하기때문입니다.That it was a heresy with all its doctrinal or heretical teaching that was called “Enoch” is in some measure evident from this name,which means the instruction so begun or initiated.
해설
AC.401은 앞의 AC.399-400에서 설명한 ‘에녹’의 의미를 그 이름 자체에서 다시 확인합니다. AC.399에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열 또는 이단이 자기 자신에게서 또 다른 분열 또는 이단을 산출했고 그것이 ‘에녹’이라 불렸으며, 가인이 쌓은 성읍은 거기서 나온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AC.400에서는 이것을 더 일반화하여 교회든 이단이든 서로 잉태하고 낳으면서 하나의 영적 계보를 형성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401은 왜 그 새로운 상태가 하필 ‘에녹’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지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에녹이라는 이름이 ‘그렇게시작되거나형성되기시작한가르침’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번 에녹은 단순히 가인 다음에 등장한 또 하나의 이단이라는 의미만을 갖지 않습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이제 자기에게서 새로운 교리적 가르침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분리가 단순한 주장이나 태도로 머무르지 않고 가르칠 수 있는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399의 ‘성읍’과 AC.401의 ‘에녹’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에녹은 새롭게 산출된 분열 또는 이단이며, 성읍은 거기서 나온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의 분열된 원리가 생겨나고, 그 원리가 가르침으로 형성되며, 그 가르침에서 여러 교리적인 것들이 조직되어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흐름입니다. AC.399에서 ‘교리체계’라는 표현을 조심스럽게 사용할 수 있었던 이유가 AC.401에서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이제 단순한 분열을 넘어 실제로 ‘가르침’이 형성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계보에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처음 가인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는 하나의 교리적 원리를 표상했습니다. AC.398에서는 그 결과 사랑 대신 신앙이, 의지 대신 이해가 지배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그렇게 독립한 이해와 신앙은 자기 나름의 가르침을 만들어 내기 시작합니다. ‘에녹’은 바로 그 단계와 관련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르침’자체가 악하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가르침의 존재가 아니라 그 가르침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번 문맥에서 에녹의 가르침은 가인, 곧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산출되었습니다. 따라서 그 가르침 역시 그 최초의 분리라는 성격을 품고 있습니다. 교리가 정리되고 가르침이 체계화되었다고 해서 그 근원의 문제가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AC.400의 마지막 문장과 연결하면 그 위험이 더 잘 보입니다. ‘하나의이단이잉태되면거기에서수많은이단이태어납니다.’처음에는 하나의 잘못된 원리였지만 그것이 가르침으로 형성되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고, 그 가르침으로부터 다시 새로운 결론들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의 분리가 다음 분리를 낳고, 그것이 다시 가르침과 교리를 낳으면서 계보가 이어집니다.
이것은 교리의 ‘근원’을 살피는 일이 왜 중요한지도 보여 줍니다. 어떤 가르침이 매우 논리적이고 정교하며 많은 성경 구절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참된 교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가르침의 중심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진리가 선을 섬기고 신앙이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도록 가르치는지, 아니면 신앙을 삶과 사랑에서 분리하여 그 자체로 구원의 본질인 것처럼 만드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원리를 다른 교회나 사람에게 ‘이단’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이번 본문의 목적과 거리가 있습니다. 오히려 가인의 계보를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는 편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서도 어떤 잘못된 생각 하나가 받아들여지면 그것은 홀로 머물지 않습니다. 그 생각을 정당화하기 위한 다른 생각들이 생기고, 그것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하나의 자기 논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그 논리를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고 가르칠 정도로 확신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가인에게서에녹이태어나고성읍이세워지는’과정은 인간 마음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영적 과정입니다.
AC.401은 또한 같은 이름이 언제나 같은 상응을 갖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게 합니다. 창4의 가인 계열에도 에녹이 있고, 창5의 셋 계열에도 에녹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에서 ‘에녹’이라는 이름이 가르침의 시작과 관련된다는 사실만으로 두 에녹의 영적 질이 같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어떤 가르침이 시작되었느냐는 그 가르침이 속한 계열과 문맥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점은 나중에 두 에녹을 비교할 때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가인 계열의 에녹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교리적 가르침이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반면 셋 계열의 에녹에서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에 속한 것들이 수집되고 교리적인 형태로 보존되는 전혀 다른 기능이 나타납니다. 같은 ‘에녹’과 ‘가르침’이라는 요소가 있어도 그것이 어느 계열에서 무엇을 보존하고 무엇을 전개하는가에 따라 영적 의미의 질은 달라집니다.
따라서 AC.401의 짧은 설명은 AC.399-400을 한 문장으로 묶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가인이라는 분열에서 또 다른 분열인 에녹이 태어났고, 그 분열은 단순한 생각으로 끝나지 않고 ‘가르침’으로 시작되고 형성되었으며, 그로부터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가 성읍으로 나타났습니다. ‘분리된신앙’이 이제 ‘가르쳐지는분리된신앙’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결국 AC.401에서 중요한 질문은 ‘우리는교리를가지고있는가?’가 아니라 ‘그교리는무엇으로부터시작되었는가?’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진리를 이해하고 가르치는 것인지, 아니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 위에 가르침을 세우는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가인의 에녹은 하나의 분리가 가르침으로 형성되기 시작할 때 그것이 더 넓은 교리적 세계를 만들어 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리의 생명은 단지 올바른 문장과 정교한 체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교리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에 뿌리를 두고 그것을 섬기는 데 있습니다. (AC.401해설)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창4:17)
AC.400
‘가인이그의아내와동침하매그가임신하여에녹을낳았다’(Cainknewhiswife, andsheconceived, andbareEnoch)는이분열또는이단이자기자신에게서또다른분열또는이단을산출하였음을의미합니다.이것은앞에서말한것으로부터분명하며,또한1절에서사람과그의아내하와가가인을낳았다고한것으로부터도분명합니다.그러므로이제이어지는것들은교회의것이든이단들의것이든이와유사한잉태와출생들입니다.그들은이것들로하나의계보를이루었는데,이는이러한것들도서로이와같은방식으로관련되어있기때문입니다.하나의이단이잉태되면거기에서수많은이단이태어납니다.That “Cainknewhiswife,andsheconceived,andbareEnoch” signifies that this schism or heresy produced another from itself,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previously said,as well as from what is stated in the first verse,that the man and Eve his wife produced Cain;so that the things which now follow are similar conceptions and births,whether of the church,or of heresies,whereof they formed a genealogy,for these are similarly related to each other. From one heresy that is conceived there are born a host of them.
해설
AC.400은 AC.399에서 제시한 ‘가인이에녹을낳았다’는 속뜻을 확증하면서, 창세기의 족보를 읽는 매우 중요한 원리를 제시합니다. 가인이 에녹을 낳았다는 것은 단순히 한 사람이 아들을 낳았다는 가족사의 의미에 머물지 않고,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열 또는 이단이 자기 자신에게서 또 다른 분열 또는 이단을 산출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부터 이어지는 잉태와 출생과 계보가 교회와 이단들의 영적 관계를 나타낸다고 밝힙니다.
그 근거로 스베덴보리는 창4:1로 다시 돌아갑니다. 거기서 ‘사람과그의아내하와’가 가인을 낳았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러한 잉태와 출생은 단순한 생물학적 출산을 넘어 교회 안에서 새로운 교리와 상태가 발생하는 것을 표상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이 다시 에녹을 낳는 것도 같은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교회의 어떤 상태에서 가인이 산출되었고, 이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열에서 다시 에녹이라는 새로운 분열이 산출됩니다. 이것이 영적 계보입니다.
여기서 ‘잉태’와 ‘출생’을 구별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 번호 자체는 둘의 세부 상응을 따로 정의하지 않지만, 적어도 하나의 영적 원리가 안에서 형성되고 그것이 다시 어떤 교리나 상태로 드러나는 과정을 ‘잉태와출생’이라는 언어로 표현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계보에서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표현은 속뜻에서 단순히 시간적으로 다음 세대가 등장했다는 것보다, 앞의 상태에서 뒤의 상태가 어떻게 산출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관계가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교회의것이든이단들의것이든’이라고 말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잉태와 출생이라는 상응이 악한 것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선하고 참된 새로운 상태가 생겨나는 것도 잉태와 출생으로 표현될 수 있고, 반대로 잘못된 원리에서 새로운 분열과 이단이 생겨나는 것도 같은 언어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상응 자체가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 잉태되고 무엇이 태어나는가에 따라 그 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의 상응을 기계적인 일대일 암호표처럼 읽어서는 안 된다는 점과도 연결됩니다. ‘출생은언제나이것하나를뜻한다’는 식으로 고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루고 있는 주제와 계열을 보아야 합니다. 가인의 계보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최초의 원리가 계속 파생되고 있으므로 그 잉태와 출생은 분열과 이단의 발생을 나타냅니다. 다른 계보에서는 같은 출생의 언어가 새로운 교회의 발생이나 선하고 참된 것의 전승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 관계 때문에 ‘계보’가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계보는 이름들의 단순한 목록이 아닙니다. 앞의 것이 뒤의 것을 낳고, 뒤의 것은 다시 그다음 것을 낳는 인과적·영적 연속성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창4의 가인 계보를 읽을 때 각각의 이름을 서로 고립시켜 해석하기보다, ‘앞의상태에서무엇이나왔으며그것이다시무엇을낳았는가?’라는 흐름을 계속 따라가야 합니다.
이 점에서 AC.399의 ‘성읍’도 다시 의미가 생깁니다. 가인이라는 분열에서 에녹이라는 또 다른 분열이 나오고, 그 에녹이라는 이름을 가진 성읍, 곧 그로부터 나온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가 형성되었습니다. 이제 AC.400은 이것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나의 이단적 원리가 형성되면 그것은 다시 새로운 결론과 교리를 산출하고, 그것들이 다시 다른 것을 산출하면서 하나의 계보를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인 ‘하나의이단이잉태되면거기에서수많은이단이태어납니다’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역사적으로 이단들이 많이 생겼다는 관찰이 아닙니다. 하나의 잘못된 근본 원리가 받아들여지면 그 원리 안에 이미 여러 후속 결론의 씨앗이 들어 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처음의 작은 분리가 그 자체의 논리를 따라 전개되면서 점차 여러 형태의 분리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가인의 경우 그 최초의 원리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것이었습니다.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 속하여 그것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오히려 체어리티를 지배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이 최초의 분리가 받아들여지면 그 뒤에는 신앙의 본질, 선한 삶의 중요성, 이웃 사랑의 위치, 교리와 삶의 관계 등에 관한 여러 후속적인 왜곡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하나의 근본적인 분리가 여러 교리적 분리를 낳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오늘날 어떤 특정 교파나 교리적 차이를 곧바로 ‘가인의이단계보’에 대입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번 번호에서 제시하는 핵심은 다른 사람에게 ‘이단’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데 있지 않고, 하나의 잘못된 영적 원리가 어떻게 자기 자신에게서 계속 새로운 오류를 산출하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먼저 우리 자신의 신앙 안에서 진리를 체어리티와 분리하거나, 아는 것을 사는 것보다 높이 두거나, 교리적 옳음을 이웃 사랑보다 앞세우는 원리가 자라고 있지는 않은지를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또한 ‘하나의이단에서수많은이단이태어난다’는 말을 모든 교리적 발전이 나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교회 역시 잉태하고 낳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받아들여지고 그것이 삶 속에서 새로운 이해와 쓰임을 낳는다면 그것 역시 영적 출생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무언가를낳는다’는 데 있지 않고 무엇으로부터 무엇이 태어나는가에 있습니다.
이것은 AC.398과도 매우 깊게 연결됩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고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에게서는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사랑 대신 신앙이, 의지 대신 이해가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AC.399-400은 바로 그 뒤집힌 질서가 이제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해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스스로 중심이 되면, 자기 전제에서 계속 새로운 교리적 결론을 만들어 내며 그것들이 하나의 계보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신 섭리가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AC.393-398에서 보았듯이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신 것은 분리 자체를 승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후의 인류가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보존된 신앙은 인간의 자유 안에 놓입니다. 그것을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시킬 수도 있고, 자기 지성과 proprium을 따라 또 다른 분열을 산출하는 데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가인의 계보는 후자의 전개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AC.400은 앞으로 이어질 가인의 족보를 읽는 하나의 안내문과 같습니다. 이후 등장하는 이름들을 단순히 여러 사람의 세대로만 읽지 않고, 서로 관련된 교회적·교리적 상태들의 연속으로 읽어야 합니다. ‘누가누구를낳았다’는 것은 앞의 영적 상태가 뒤의 상태를 산출했다는 것이며, 그 연속적인 산출이 하나의 계보를 형성합니다.
결국 AC.400은 매우 짧은 번호이지만 하나의 강력한 원리를 남깁니다. ‘하나의이단이잉태되면거기에서수많은이단이태어납니다.’신앙과 체어리티 사이의 작은 분리가 단지 한 가지 교리 문제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최초의 원리가 계속 새로운 생각과 판단과 교리를 낳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받아들여져 서로 결합될 때에도 거기에서 새로운 선과 진리의 열매들이 계속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많이 만들어 내느냐가 아니라, 그 모든 잉태와 출생의 처음에 어떤 사랑과 어떤 원리가 자리 잡고 있느냐입니다. (AC.400해설)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led the name of the city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 (창4:17)
AC.399
‘가인이그의아내와동침하매그가임신하여에녹을낳았다’(Cainknewhiswife, andsheconceivedandbareEnoch)는이분열또는이단이자기자신에게서또다른분열또는이단을산출하였고,그것이‘에녹’(Enoch)이라불렸음을의미합니다.‘그가쌓은성읍’(thecitywhichhebuilt)은거기서나온교리적인것과이단적인것전체를의미합니다.그리고그분열또는이단이‘에녹’(Enoch)이라불렸기때문에,‘그성읍의이름을그의아들의이름을따라에녹이라하였다’(thenameofthecitywascalledafterthenameofhisson,Enoch)고한것입니다. The words “Cainknewhiswife,andsheconceivedandbareEnoch” signify that this schism or heresy produced another from itself that was called “Enoch.”By “thecitywhichhebuilt” is signified all that was doctrinal and heretical therefrom,and because the schism or heresy was called “Enoch,” it is said that “thenameofthecitywascalledafterthenameofhisson,Enoch.”
해설
AC.399부터 가인 계열의 계보가 시작됩니다. 문자적 의미에서는 가인이 아내와 동침하여 에녹을 낳고 성읍을 건설하여 아들의 이름을 따라 그 성읍을 에녹이라고 부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계보를 단순한 가족사의 기록으로 읽지 않습니다. ‘가인’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하나의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했듯이, 가인에게서 태어난 ‘에녹’은 그 분열이 자기 자신에게서 다시 산출한 또 다른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낳는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하나의 교리적 원리가 받아들여지면 그것은 그 상태에 머물지 않고 그 원리에서 다시 다른 결론과 교리를 산출합니다. 가인의 최초 문제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체어리티와분리되어도그자체로신앙일수있다’는 원리가 일단 자리 잡으면, 거기에서 여러 후속적인 생각과 교리들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러한 파생을 계보의 ‘출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인이에녹을낳았다’는 것은 단순히 한 이단 뒤에 우연히 또 다른 이단이 나타났다는 뜻보다 더 깊습니다. 원문은 ‘producedanotherfromitself’, 곧 ‘자기자신에게서또다른것을산출하였다’고 합니다. 새로운 분열은 이전 분열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 있던 원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최초의 원리가 새로운 형태로 전개되고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어 ‘성읍’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쌓은 성읍을 ‘거기서나온교리적인것과이단적인것전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발전입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분열된 원리였던 것이 이제 여러 교리적인 내용들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 단순한 생각이나 주장 하나가 아니라, 서로 연결된 가르침들이 형성되면서 하나의 체계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읍’은 분리된 신앙이 교리적으로 조직되고 정착된 상태를 나타낸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AC.399의 원문이 직접 ‘교리체계’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원문은 ‘allthatwasdoctrinalandhereticaltherefrom’, 곧 ‘거기서나온교리적인것과이단적인것전체’라고 합니다. 따라서 ‘성읍=교리체계’는 이 표현을 이해하기 쉽게 요약한 말로 사용할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가 이번 번호에서 직접 그렇게 정의했다고까지 말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여러 교리적·이단적 내용이 산출되고 그것들이 하나의 성읍으로 표상된다는 데 초점을 두면 충분합니다.
이것은 AC.397-398과도 매우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가인은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 놋 땅에 거했으며,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과 전에 체어리티가 지배하던 합리적 마음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AC.398에서는 사랑 대신 신앙이, 의지 대신 이해가 지배하게 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399에서는 바로 그 이해와 신앙이 독립적으로 지배하는 상태에서 새로운 교리적 산물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중요한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이해가 사랑과 선을 섬길 때에는 진리가 삶을 인도하는 수단이 됩니다. 그러나 이해가 사랑에서 분리되어 스스로 지배하려 하면, 사람은 자신이 세운 전제에서 계속 새로운 논리와 교리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처음의 전제가 잘못되어 있어도 그 위에 매우 정교하고 일관된 체계를 세울 수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정교하다는 사실 자체가 그 교리가 살아 있는 진리라는 보증은 아닙니다. 그것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는지를 함께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교리’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도 분명히 구별해야 합니다. 문제는 교리가 존재한다는 데 있지 않고, 어떤 근원에서 그 교리가 산출되었느냐에 있습니다. 선과 체어리티에서 나온 진리의 교리는 사람을 주님과 이웃에게로 이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원리에서 산출된 교리는 아무리 정교하게 조직되어도 그 최초의 분리를 계속 품을 수 있습니다. AC.399의 성읍은 바로 후자의 문맥에 있습니다.
이 점에서 ‘그성읍의이름을그의아들의이름을따라에녹이라하였다’는 표현도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분열 또는 이단 자체가 에녹이라고 불렸기 때문에 그로부터 나온 교리적·이단적 전체도 에녹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즉 그 성읍의 성격은 그것을 낳은 원리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성읍을 구성하는 여러 교리가 아무리 많아져도 그 전체를 규정하는 것은 그것들의 근원이 된 ‘에녹’이라는 분열의 성격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반드시 구별해 두어야 할 것이 ‘가인계열의에녹’과 훗날 창5에 등장하는 ‘셋계열의에녹’입니다. 이름은 같지만 스베덴보리의 속뜻에서는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번 AC.399의 에녹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파생된 분열 또는 이단입니다. 반면 창5의 에녹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에 속한 것들을 모아 교리적인 형태로 보존한 것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성경에 같은 이름이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동일한 상응을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두 에녹을 나중에 함께 보면 매우 흥미로운 대조가 생깁니다. 가인 계열에서는 교리화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전개하고 굳히는 방향으로 나타나는 반면, 셋 계열의 에녹에서는 쇠퇴해 가는 퍼셉션의 지혜를 보존하기 위한 교리화가 나타납니다. 하나는 생명에서 분리된 교리의 발전이고, 다른 하나는 잃어 가는 생명의 지혜를 보존하기 위한 교리의 형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창5의 해당 AC번호에 이르렀을 때 충분히 다루는 편이 좋겠습니다.
AC.399는 또한 ‘가인의표’가 왜 신앙의 모든 문제를 즉시 해결한 것이 아니었는지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셨다는 것은 그 신앙이 곧바로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보존된 신앙은 여전히 인간의 자유 안에서 사용될 수 있었고, 가인의 계열에서는 오히려 새로운 분열과 교리적 체계를 산출하는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주님의 보존 섭리는 인간의 자유를 없애는 강제적인 교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신앙을 보존하신 것은 필요했습니다. 앞의 AC.393-398에서 반복해서 보았듯이, 인간이 태고교회와 같은 퍼셉션을 잃은 뒤에는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길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이해 능력과 신앙의 지식이 한편으로는 분리된 교리 체계를 만들어 낼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께서 사람을 체어리티로 이끄시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결정적인 것은 신앙의 지식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사랑과 결합되고 무엇을 섬기느냐입니다.
따라서 AC.399는 가인의 후손들을 단순한 고대 족보로 읽기보다, 하나의 잘못된 영적 원리가 어떻게 자기에게서 또 다른 원리를 낳고, 그것이 다시 교리적인 것들을 형성하면서 발전하는지를 보여 주는 출발점입니다. ‘가인이에녹을낳았다’는 것은 분열이 또 다른 분열을 산출한 것이며, ‘성을쌓았다’는 것은 그로부터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가 형성된 것입니다.
결국 이번 번호가 던지는 질문은 ‘교리가얼마나정교한가?’보다 더 깊습니다. ‘그교리는어디에서태어났는가?’입니다.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나온 신앙인가, 아니면 사랑에서 분리되어 스스로 지배하려는 신앙인가 하는 것입니다. 가인의 에녹과 성읍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도 자기 나름의 후손을 낳고 교리를 만들며 하나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의 생명은 교리의 규모나 논리적 정교함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이 다시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에 결합되어 있느냐에 있습니다. (AC.399해설)
‘여호와의얼굴앞에서나가는것’(gooutfromthefacesofJehovah)이사랑의신앙에속한선에서분리되는것을의미한다는것은14절의해설에서볼수있습니다.‘놋땅에거하는것’(dwellinthelandofNod)이진리와선밖에있음을의미한다는것은‘놋’(Nod)이라는말의의미에서분명한데,그것은유리하며피하는자가되는것입니다.그리고‘유리하며피하는자’(wandererandfugitive)가되는것이진리와선을빼앗긴상태를의미한다는것은앞에서볼수있습니다.‘에덴동쪽’(towardtheeastofEden)이전에사랑이지배하던이해의마음(intellectualmind)가까이,그리고전에체어리티가지배하던합리적마음(rationalmind)가까이를의미한다는것은‘에덴동쪽’의의미에관하여앞에서말한것으로부터분명합니다.곧‘동쪽’(east)은주님을,‘에덴’(Eden)은사랑을의미합니다.태고교회사람들에게서는의지와이해로이루어진마음이하나였습니다.의지가모든것중의모든것이었기때문에이해는의지에속해있었습니다.이것은그들이의지에속한사랑과이해에속한신앙을구별하지않았기때문입니다.사랑이모든것중의모든것이었고신앙은사랑에속해있었기때문입니다.그러나‘가인’이라하는사람들에게서와같이신앙이사랑에서분리된후에는더이상의지가지배하지않았습니다.그리고그마음에서의지대신이해가,곧사랑대신신앙이지배하게되었으므로,그가‘에덴동쪽에거하였다’고한것입니다.방금말한것처럼신앙이구별되었기때문입니다.곧신앙에‘표가주어져’인류의쓰임을위하여보존되게하신것입니다. That to “gooutfromthefacesofJehovah” 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the good of the faith of love may be seen in the explication of verse 14; that to “dwellinthelandofNod” signifies outside of truth and goo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word “Nod,” which is to be a wanderer and a fugitive; and that to be “awandererandafugitive” is to be deprived of truth and good, may be seen above. That “towardtheeastofEden” signifies near the intellectual mind, where love had previously reigned, and also near the rational mind, where charity had previously reigned,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said of the signification of “theeastofEden,” namely, that “theeast” is the Lord, and “Eden” love. With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e mind, consisting of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was one; for the will was the all in all, so that the understanding was of the will. This was because they made no distinction between love, which is of the will, and faith, which is of the understanding, because love was the all in all, and faith was of love. But after faith was separated from love, as was the case with those who were called “Cain,” no will reigned any longer, and as in that mind the understanding reigned instead of the will, or faith instead of love, it is said that he “dwelttowardtheeastofEden”; for as was just now observed, faith was distinguished, or “hadamarksetuponit,” that it might be preserved for the use of mankind.
해설
AC.398은 앞의 AC.397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변화가 인간 마음의 구조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보여 줍니다. 처음 두 표현은 앞에서 이미 설명된 의미를 다시 확인합니다. ‘여호와의얼굴앞에서나가는것’은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는 것이고, ‘놋땅에거하는것’은 진리와 선 밖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의 중심은 세 번째 표현인 ‘에덴동쪽’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의지와 이해,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설명한 뒤, 가인에게서 그 주도권이 어떻게 뒤바뀌었는지를 밝힙니다.
먼저 ‘놋’이라는 이름 자체가 ‘유리하며피하는자’의 상태와 연결됩니다. 앞의 AC.380, AC.382, AC.388에서 ‘피하며유리하는자’는 무엇이 진리이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이 놋 땅에 거했다는 것은 단순히 에덴을 떠나 다른 지역에 정착했다는 지리적 진술에 머물지 않습니다. 속뜻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진리와 선의 살아 있는 질서 밖에 놓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에덴동쪽’은 그보다 훨씬 미묘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동쪽’은 주님을, ‘에덴’은 사랑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인이 에덴 동쪽에 거했다는 것을 ‘전에사랑이지배하던이해의마음가까이’이며 동시에 ‘전에체어리티가지배하던합리적마음가까이’라고 설명합니다. AC.397에서는 이해의 마음만 언급했는데, 이번 번호에서는 합리적 마음까지 덧붙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상태를 이해하려면 ‘사랑-신앙’뿐 아니라 ‘의지-이해’라는 인간 마음의 구조까지 함께 보아야 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서는 의지와 이해가 하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였다’는 것은 두 기능을 개념적으로 전혀 구별할 수 없었다는 뜻이라기보다, 서로 대립하거나 독립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의지가모든것중의모든것이었기때문에이해가의지에속해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즉 의지가 중심이었고 이해는 그 의지의 질서 안에서 움직였습니다.
그 이유는 다시 사랑과 신앙의 관계에서 설명됩니다. 사랑은 의지에 속하고 신앙은 이해에 속합니다. 그런데 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과 신앙을 서로 독립된 두 가지로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이모든것중의모든것이었고신앙은사랑에속해있었기때문’입니다. 이것은 AC.393에서 ‘태고교회는사랑에속한신앙외에는어떠한신앙도인정하지않았으며심지어신앙을따로언급하려하지도않았다’고 한 설명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따라서 태고교회의 질서는 ‘의지에서이해로’, 그리고 ‘사랑에서신앙으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인간 자신의 의지가 본래 선했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사랑과 선의 근원도 주님이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의지를 채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랑 안에서 이해가 진리를 퍼셉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심은 인간의 의지 자체가 아니라 그 의지를 지배하던 주님으로부터의 사랑입니다.
가인에게서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신앙이사랑에서분리된후에는더이상의지가지배하지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변화를 매우 대칭적인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의지대신이해가,곧사랑대신신앙이지배하게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인의 분리가 가져온 마음의 구조적 변화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를 단순히 ‘신앙을너무강조했다’는 정도로 이해해서는 부족합니다. 문제는 주도권의 역전입니다. 본래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고 이해는 의지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면서 이해가 독립적인 지배 위치에 올라섰습니다. 진리가 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진리라고 여기는 것이 선 위에 서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체어리티를 판단하고 지배하려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앞의 AC.362-363에서 설명한 가인의 교리와도 정확히 맞닿습니다. 거기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교리는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으며,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AC.398에서는 그 문제가 더 깊은 인간 마음의 차원에서 설명됩니다. ‘신앙과체어리티중무엇이먼저인가?’라는 교리적 논쟁의 배후에는 ‘이해와의지중무엇이지배하는가?’라는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AC.393에서 스베덴보리는 홍수 후의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오고, 그 지식을 통하여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AC.398의 ‘이해가지배하게되었다’는 말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말은 서로 다른 차원을 말합니다. 영적 인간에게 신앙의 지식이 ‘먼저온다’는 것은 배우고 거듭나는 순서에 관한 것이며, 신앙이 사랑보다 ‘지배해야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식은 먼저 올 수 있지만 체어리티가 신앙에서 주된 것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 차이를 놓치면 가인의 신앙과 홍수 후 영적 교회의 신앙을 동일하게 만들어 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여 이해가 의지 대신 지배하게 만든 상태입니다. 반면 주님께서 섭리하신 영적 교회의 질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주어지더라도 그 신앙이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되고, 마침내 체어리티가 신앙에서 주된 것이 되는 질서입니다. 따라서 ‘신앙이먼저온다’와 ‘신앙이지배한다’는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이 구별 때문에 AC.398마지막의 ‘가인의표’가 다시 중요해집니다. 주님께서는 사랑 대신 신앙이 지배하게 된 잘못된 질서를 승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해와 신앙을 완전히 소멸시키지도 않으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구별되었고,곧신앙에표가주어져인류의쓰임을위하여보존되었다’고 다시 말합니다. 여기서 ‘fortheuseofmankind’, 곧 ‘인류의쓰임을위하여’라는 표현이 AC.395의 설명을 더욱 분명하게 해 줍니다.
왜 신앙을 보존해야 했습니까? AC.393에서 이미 답을 보았습니다. 인간이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사랑으로부터 직접 진리를 퍼셉션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람에게는 진리를 먼저 듣고 배우는 길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므로 이해와 신앙에 속한 지식이 보존되어야 했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주님께서 다시 체어리티를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신앙은 잘못된 분리에서 시작되었지만, 주님께서는 그 안에서 앞으로 인류에게 쓰임이 될 수 있는 것을 구별하여 보존하셨습니다.
이제 ‘에덴동쪽에거하였다’는 표현도 훨씬 선명해집니다. 가인은 에덴 안에 있지 않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며 신앙이 사랑에 속해 있던 본래의 천적 질서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덴과 아무 관계도 없는 완전한 소멸 상태로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그는 ‘에덴동쪽’, 곧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과 전에 체어리티가 지배하던 합리적 마음 가까이에 있습니다. 분리는 일어났지만 이해와 신앙이 보존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가까이’라는 표현은 AC.397에 이어 여전히 중요합니다. 그것은 가인의 상태가 선하고 정상적이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서 신앙이 앞으로 다시 선과 결합될 수 있는 쓰임을 위해 보존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사랑과 신앙의 본래적 하나 됨은 깨어졌지만, 신앙 자체가 제거되지는 않았습니다. 인간은 이제 그 보존된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다른 길로 인도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AC.398은 태고교회에서 가인으로 넘어가는 변화와, 다시 홍수 후 영적 교회의 질서가 가능해지는 배경을 한꺼번에 보여 주는 중요한 번호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의지와 이해가 하나였고,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으며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습니다. 가인에게서는 그 결합이 깨져 이해가 의지 대신, 신앙이 사랑 대신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신앙을 없애지 않고 인류의 쓰임을 위해 구별하여 보존하셨습니다.
결국 가인의 문제는 ‘이해가존재한다’거나 ‘신앙이존재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해가 의지에서,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스스로 지배하려 한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섭리는 그 뒤집힌 질서를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도 이해와 신앙을 보존하여 다시 선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수단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인이 진리와 선 밖의 ‘놋땅’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에덴동쪽’, 곧 전에 사랑과 체어리티가 지배하던 마음 가까이에 거한다고 한 깊은 이유입니다. (AC.398해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 (창4:16)
AC.397
‘가인이여호와의얼굴앞에서나갔다’(CainwentoutfromthefacesofJehovah)는신앙이사랑의신앙에속한선에서분리되었음을의미합니다.‘그가놋땅에거하였다’(hedweltinthelandofNod)는진리와선밖에있음을의미합니다.‘에덴동쪽’(towardtheeastofEden)은전에사랑이지배하던이해의마음(intellectualmind)가까이에있음을의미합니다.By the words “CainwentoutfromthefacesofJehovah” is signified that faith was separated from the good of the faith of love;“hedweltinthelandofNod” signifies outside of truth and good;“towardtheeastofEden” is near the intellectual mind,where love reigned before.
해설
AC.397부터 가인의 이야기는 새로운 단계로 들어갑니다. 앞의 AC.392-396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주님께서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신 것이 ‘가인의표’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창4:16에서는 그렇게 보존된 가인이 ‘여호와앞을떠나서에덴동쪽놋땅에거주’합니다. 속뜻에서는 분리된 신앙이 보존된 이후 어떤 상태에 놓이게 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첫째, ‘가인이여호와의얼굴앞에서나갔다’는 것은 신앙이 ‘사랑의신앙에속한선’에서 분리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여호와의얼굴’은 앞의 AC.387과 직접 연결됩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여호와의얼굴’이 주님의 자비를 의미하며, 그 자비로부터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이 나온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간다는 것은 주님께서 가인을 내쫓아 더 이상 자비를 베풀지 않으셨다는 뜻이 아니라,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이 사랑에 속한 선에서 스스로 분리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의 얼굴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 얼굴에서 돌아선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와 사랑은 변하지 않지만, 인간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신앙을 분리하면 그 자비에서 흘러오는 선을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여호와의얼굴앞에서나갔다’는 표현을 주님의 거절이나 버림으로 읽기보다 인간 쪽에서 일어난 영적 분리로 읽어야 합니다.
둘째, ‘놋땅에거하였다’는 것은 ‘진리와선밖에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도 표현의 강도를 그대로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모든진리와선이완전히소멸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진리와선밖에있었다’고 합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은 보존되었지만,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기 때문에 참된 진리와 선의 질서 안에 거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앞의 AC.380-382에서 가인이 ‘피하며유리하는자’가 되어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게 되었다는 설명과 연결됩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될 때 그 참된 방향과 생명을 얻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진리에 관한 지식이 남아 있더라도 그것을 무엇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지, 무엇이 실제로 선인지 올바르게 분별하는 능력이 흐려집니다. 그러므로 ‘놋땅’은 단순한 지리적 망명지가 아니라 신앙이 선과 진리의 살아 있는 질서 밖에 놓인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세 번째 표현인 ‘에덴동쪽’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전에사랑이지배하던이해의마음가까이에있음’이라고 풀이합니다. 여기서 ‘전에’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에덴은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 곧 사랑이 지배하던 상태와 연결됩니다. 그 상태에서는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지 않았으며,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퍼셉션했습니다. AC.393에서 보았듯이 그들은 신앙을 따로 언급하려 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바로 그 질서를 깨뜨린 신앙입니다.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고 신앙을 하나의 독립된 교리로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가인은 더 이상 에덴 ‘안’에 있지 않습니다. 사랑이 지배하는 상태 안에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에덴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곳에 있다고 하지 않고, ‘전에사랑이지배하던이해의마음가까이에’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AC.393-396에서 설명한 신앙의 보존이 다시 연결됩니다. 분리된 신앙은 본래의 천적 질서를 잃었지만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인은 에덴 안에 있을 수는 없지만, 에덴과 아무 관계도 없는 곳으로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사랑이 지배했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에’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이후의 영적 인간에게 신앙의 지식이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지를 생각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직접 퍼셉션했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사라진 뒤에는 사람이 먼저 신앙의 지식을 배우고, 그 지식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체어리티를 받아야 했습니다. 따라서 신앙의 지식은 사랑 자체는 아니지만 다시 사랑과 결합될 수 있는 수단으로 보존되어야 했습니다. 가인이 에덴 동쪽 가까이에 있다는 표현은 바로 이러한 상태와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intellectualmind’, 곧 ‘이해의마음’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가인이 에덴 동쪽에 있다는 것은 단순히 옛 천적 상태의 지리적 경계 가까이에 있다는 뜻이 아니라, 전에 사랑이 지배했던 ‘이해의마음’가까이에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이해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기능과 관련됩니다. 태고교회에서는 그 이해가 사랑 아래 있었고 사랑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다시 말해 이해가 독립적으로 진리를 만들어 내거나 사랑을 지배한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보았습니다.
가인의 상태에서는 이 질서가 뒤집혔습니다. 신앙, 곧 진리에 속한 것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독립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이해의 기능과 신앙의 지식을 완전히 파괴하지 않으셨습니다. 훗날 그것이 다시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보존하셨습니다. 따라서 ‘에덴동쪽’이라는 위치에는 과거의 천적 질서와 현재의 분리된 신앙 사이의 거리와 연결 가능성이 동시에 표현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가까이에있다’는 말을 곧 ‘곧바로다시에덴으로돌아갈수있었다’거나 ‘가인의신앙이거의정상적인상태였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는 분명히 가인이 ‘진리와선밖에’있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상태의 단절은 실제적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단절이 완전한 소멸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사랑에서 분리되었고 진리와 선 밖에 있었지만, 주님의 섭리에 의해 보존되어 여전히 과거 사랑이 지배했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 점에서 AC.397은 앞의 ‘가인의표’설명과 이후의 가인 계보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합니다. 가인의 표를 통하여 신앙이 보존되었고, 이제 그 보존된 신앙이 에덴 밖 놋 땅에서 하나의 새로운 상태를 형성하기 시작합니다. 앞으로 에녹과 성읍, 그리고 가인의 후손들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 보존된 신앙이 점차 하나의 교리적 계보와 체계로 전개되는 과정으로 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AC.397자체에서는 아직 그 이후를 앞당겨 설명하기보다 ‘분리되었으나보존된신앙이어디에놓여있는가’를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결국 AC.397에는 매우 미묘한 긴장이 있습니다. 가인은 ‘여호와의얼굴앞에서나갔습니다.’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었습니다. 그는 ‘놋땅’에 거합니다. 진리와 선 밖에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에덴동쪽’에 있습니다.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에 있습니다. 완전히 에덴 안에도 아니고, 에덴과 아무 관계도 없는 완전한 소멸 상태에도 아닙니다.
바로 이 상태가 주님의 보존 섭리 아래 있는 가인의 신앙을 잘 보여 줍니다. 인간은 사랑과 신앙의 본래 질서를 무너뜨렸지만, 주님께서는 그 실패 때문에 진리에 속한 모든 것을 없애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신앙을 보존하시고, 그것이 다시 사랑과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수단이 될 가능성을 남겨 두셨습니다. 따라서 ‘에덴동쪽놋땅’은 단순한 추방의 장소가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되어 진리와 선 밖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과거 사랑이 지배했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에 보존되어 있는 신앙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AC.397해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6
‘여호와께서가인에게표를주사그를만나는모든사람에게서죽임을면하게하시니라’(JehovahsetamarkonCain,lestanyoneshouldsmitehim)는주님께서신앙을특별한방식으로구별하셔서그것이보존되게하셨음을의미합니다.이것은‘표’(mark)와어떤사람에게‘표를하는것’(settingamark)이구별하는수단을의미한다는데서분명합니다.에스겔에서는다음과같습니다. That “JehovahsetamarkonCain,lestanyoneshouldsmitehim” signifies that the Lord distinguished faith in a particular manner in order that it might be preserve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 “mark,” and of “settingamark” on anyone, as being a means of distinction.Thus in Ezekiel:
여기서‘이마에표를하는것’(markingouttheforeheads)은실제로그들의머리앞부분에어떤표나선을그린다는뜻이아니라,그들을다른사람들과구별하는것을의미합니다.이와같이계시록에서도where by “markingouttheforeheads,” is not meant a mark or line upon the front part of their heads, but to distinguish them from others.So in John, it is said that
같은것이유대교회에서는첫째이자큰계명을손과이마에매는것으로표상되었습니다.이에관하여신명기에서는다음과같이읽습니다. The same thing was 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by binding the first and great commandment on the hand and on the forehead, concerning which we read in Moses:
이것으로사랑에관한계명을다른모든계명보다구별해야한다는것이표상되었습니다.이로부터‘손과이마에표를하는것’(markingthehandandtheforehead)의의미가분명해집니다. By this was represented that they should distinguish the commandment respecting love above every other, and hence the signification of “markingthehandandtheforehead” becomes manifest.
이구절들로부터이제‘표’의의미가분명합니다.그러므로가인이라하는어떤특정한한사람에게실제로어떤표가주어졌다고생각해서는안됩니다.말씀의속뜻에는문자적의미에담긴것과는전혀다른것들이들어있기때문입니다. From these passages the meaning of a mark is now evident.Let no one therefore imagine that any mark was set upon a particular person called Cain, for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contains things quite different from those contained in the sense of the letter.
해설
AC.396은 ‘가인의표’가 무엇인지를 말씀의 여러 용례를 통해 확증합니다. 앞의 AC.392에서는 ‘여호와께서가인에게표를주셨다’는 것이 주님께서 신앙을 특별한 방식으로 구별하여 그것이 보존되게 하셨음을 의미한다고 먼저 밝혔습니다. AC.393-395에서는 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까지 보존되어야 했는지를 설명했습니다. 이제 AC.396에서는 ‘표’라는 말 자체가 말씀에서 실제로 ‘구별’을 의미하는지를 에스겔, 계시록, 신명기, 이사야, 시편을 통하여 보여 줍니다.
가장 먼저 인용되는 겔9:4는 이 의미를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예루살렘의 가증한 일들을 보고 탄식하며 우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하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실제 머리 앞부분에 어떤 선이나 표식을 그리는 것으로 읽지 않고, 그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는것’으로 풀이합니다. 중요한 것은 표의 외형이 아니라 그 표를 통하여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어 보존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창4장의 가인의 표 역시 같은 원리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계9:4의 ‘이마에하나님의인침을받지아니한사람들’도 같은 증거로 제시됩니다. 여기서도 이마에 있는 표는 사람을 영적으로 구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표’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표시라기보다 그 사람이 어떤 상태에 속해 있는지를 구별하는 표상입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가인의 표도 가인이라는 개인에게 붙은 특이한 신체 표식으로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2]에서는 계13:16의 ‘손과이마에표’가 언급되고, 이어 유대교회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손과 이마에 매도록 한 규례와 연결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그 표상을 ‘사랑에관한계명을다른모든계명보다구별하는것’이라고 해석한다는 점입니다. 신6장의 ‘마음을다하고뜻을다하고힘을다하여네하나님여호와를사랑하라’는 계명이 첫째이자 큰 계명으로 구별되어야 했으며, 그것을 손과 이마에 두는 행위가 바로 그 구별을 표상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가인 이야기 전체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가인의 문제는 사랑과 체어리티보다 신앙을 우위에 놓았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표’의 의미를 확증하면서 다시 ‘사랑에관한계명’을 모든 계명보다 구별하는 표상을 가져옵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신앙이 보존되는 목적은 신앙이 홀로 지배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결국 다시 사랑과 체어리티를 주된 것으로 인정하는 올바른 질서에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손’과 ‘이마’의 세부 상응을 이번 번호에서 지나치게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직접 증명하려는 것은 ‘표를한다=구별한다’는 명제이기 때문입니다. 손과 이마가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별도 심화로 펼치기보다, 사랑에 관한 첫째 계명을 다른 모든 것보다 구별하는 표상이었다는 본문의 논증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3]의 사66:18-19와 시86:16-17도 같은 목적을 가집니다. ‘표’를 세우거나 ‘은총의표적’을 보이는 것은 어떤 사람이나 상태가 다른 것과 구별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에 인용된 성경 구절들은 서로 다른 독립 주제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의 사실, 곧 말씀에서 ‘표’와 ‘표를하는것’이 구별을 의미한다는 것을 확증하는 하나의 인용군입니다.
이제 다시 가인에게 돌아오면 ‘여호와께서가인에게표를주셨다’는 말씀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표상합니다. 주님께서는 그 분리를 승인하신 것이 아니라, 그 상태에서도 신앙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셨습니다. AC.393-394에서 설명했듯이 인류는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사랑으로부터 직접 신앙에 속한 것을 퍼셉션할 수 없게 되었고, 이후에는 신앙의 지식을 먼저 듣고 배운 뒤 그것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체어리티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에 관한 지식이 완전히 사라져서는 안 되었습니다.
AC.395에서 그 보존이 왜 거룩한 문제였는지도 설명되었습니다. 가인을 죽이는 자에게 ‘칠배’의 벌이 있다고 한 것은 일곱이 거룩하고 침해해서는 안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분리된 신앙 자체가 거룩하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것을 이후의 구원을 위한 쓰임으로 구별하여 보존하셨기 때문에 함부로 파괴해서는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AC.396의 ‘표’는 바로 그 특별한 구별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가인의표’에는 ‘구별’과 ‘보존’이라는 두 요소가 함께 있습니다. 먼저 주님께서 신앙을 특별히 구별하시고, 그렇게 구별하신 목적은 그것이 보존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가인의 표를 단순히 ‘하나님이가인을벌하시면서동시에보호하셨다’는 도덕적 이야기로만 읽으면 이 구조를 놓치게 됩니다. 속뜻에서는 인류의 영적 상태가 낮아진 뒤에도 주님께서 앞으로 구원에 쓰일 수 있는 신앙의 지식을 보존하시는 섭리가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번호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하게 문자적 독법에 경계를 세웁니다. ‘가인이라하는어떤특정한한사람에게실제로어떤표가주어졌다고생각해서는안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가인의표가어떤모양이었는지알수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예 그런 질문 자체가 속뜻의 초점에서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해석하고 있는 가인은 한 개인의 전기적 인물이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교회적·영적 상태를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창1-11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을 때 매우 중요한 독법을 다시 확인해 줍니다. 문자적 이야기를 읽으면서 ‘가인의표가피부색이었을까,흉터였을까,어떤초자연적인표시였을까?’라고 추측하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 본문에서 찾는 아르카나와 관계가 없습니다. 그의 관심은 ‘어떤표였는가?’라는 외적 모양이 아니라 ‘왜표가주어졌는가?’라는 영적 기능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능은 신앙을 구별하여 보존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 마지막 문장을 근거로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아무 가치가 없다고 확대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말씀에는 문자적 의미와 구별되는 속뜻이 있으며, 지금 자신이 해설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속뜻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초점은 역사적·고고학적으로 가인의 몸에 어떤 표가 있었는지를 재구성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이야기를 통하여 주님께서 교회의 신앙을 어떻게 보존하셨는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AC.392-396을 한꺼번에 보면 이제 ‘가인의표’에 대한 설명이 상당히 완성됩니다. AC.392에서 가인을 죽이는 것이 모독이고 표는 신앙의 특별한 구별과 보존이라고 먼저 선언했습니다. AC.393에서는 인간이 천적 상태를 잃은 뒤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받아야 하는 새로운 질서를 설명했습니다. AC.394에서는 바로 인류가 영원한 죽음 가운데 멸망하지 않도록 신앙이 보존되었다고 밝혔고, AC.395에서는 ‘칠배’의 ‘일곱’이 그 보존의 거룩하고 침해할 수 없는 성격을 보여 준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396은 ‘표’ 자체가 말씀에서 구별을 의미한다는 것을 확증합니다.
결국 가인의 표는 ‘가인의죄를눈에보이게표시한낙인’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의 타락 가운데에서도 구원을 위한 수단을 완전히 소멸시키지 않으시고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신 섭리를 나타냅니다. 인간은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했지만, 주님께서는 그 분리 때문에 신앙 자체까지 사라지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훗날 사람이 신앙의 지식을 듣고 배우며 그것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도록 보존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의표’에서 궁극적으로 보아야 할 것은 가인의 몸에 새겨진 어떤 신비한 표시가 아니라, 인간의 실패 속에서도 구원의 길을 끊지 않으시는 주님의 보존 섭리입니다. (AC.396)
같은이유로‘일곱’이라는수는어디에서나타나든거룩하거나침해해서는안되는것을나타냅니다.그러므로시편에서는다음과같이말합니다. For the same reason, wherever it occurs, the number seven is accounted holy or inviolable.Thus we read in David:
여기서‘해’(sun)는사랑을,‘달’(moon)은사랑에서나오는신앙을의미하며,그신앙은사랑과같이되어야합니다.사람의거듭남의기간들이일곱째,곧천적인간에이르기전에여섯으로구분되는것처럼,황폐화의기간들도천적인것이아무것도남지않게될때까지그렇게구분됩니다.이것은유대인들의여러포로생활과,마지막포로생활인바벨론포로로표상되었는데,이포로생활은일곱번의십년,곧칠십년동안계속되었습니다.또한땅이그안식년들동안쉬어야한다는말도여러번나옵니다.같은것이다니엘서의느부갓네살로표상됩니다. where the “sun” denotes love, and the “moon” faith from love, which should be as love.As the periods of man’s regeneration are distinguished into six, before the seventh arrives, that is, the celestial man, so also are the periods of his vastation, up to the time when nothing celestial remains.This was represented by the several captivities of the Jews, and by the last or Babylonish captivity, which lasted seven decades, or seventy years.It is also said several times that the earth should rest on its sabbaths.The same is represented by Nebuchadnezzar, in Daniel:
같은이유로형벌의엄중함과그가중됨도‘일곱’이라는수로표현되었습니다.레위기에서는다음과같습니다. For the same reason the severities and augmentations of punishment were expressed by the number seven; as in Moses:
이제신앙에폭력을가하는것은모독이었습니다.앞에서말한것처럼신앙은쓰임이있어야했기때문입니다.그러므로‘가인을죽이는자는누구든지벌을칠배나받으리라’(whosoevershouldslayCain,vengeanceshouldbetakenonhimsevenfold)고한것입니다. Now as it was a sacrilege to do violence to faith—since as has been said it was to be of service—it is said that “whosoevershouldslayCain,vengeanceshouldbetakenonhimsevenfold.”
해설
AC.395는 ‘가인을죽이는자는누구든지벌을칠배나받으리라’는 창4:15의 말씀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폭력을 가하는 것은 모독이 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 근거는 두 상응에 있습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고, ‘일곱’은 거룩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가인을죽이는자에게칠배의벌이있다’는 것은 단순히 가인을 해치면 일곱 배나 더 심한 형벌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보존하신 신앙을 함부로 파괴하는 일이 거룩한 것을 침해하는 일이 된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일곱’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가장 먼저 창조의 여섯 날과 일곱째 날로 돌아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창1에서 인간의 거듭남은 여섯 날의 과정을 거쳐 일곱째 날의 천적 인간에 이릅니다. 그 일곱째 날에는 평화와 쉼과 안식일이 있습니다. 따라서 일곱이라는 수가 거룩한 이유는 단순히 고대 사람들이 숫자 7을 신비하게 여겼기 때문이 아니라, 말씀의 가장 처음부터 그것이 거듭남의 완성과 천적 상태, 그리고 주님 안에서의 안식을 표상하는 수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유대교회의 여러 의식과 시간의 구분에도 일곱이 반복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메시아가 오기까지의 기간을 다루는 단9:24-25의 ‘이레들’을 들고, 창29:27-28에서 라반과 야곱이 칠 년을 한 ‘이레’라고 부른 것도 예로 듭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숫자 7을 현대적인 숫자 암호처럼 계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 안에서 일곱이라는 수가 반복적으로 거룩한 질서와 완결된 기간을 표상하는 방식으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시119:164의 ‘하루일곱번씩주를찬양하나이다’도 같은 의미에서 인용됩니다. 이것을 반드시 문자적으로 하루에 정확히 일곱 차례만 찬양해야 한다는 규정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상태에서 온전히 주님을 찬양하는 의미로 읽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수는 단순한 산술적 수량을 넘어 영적 상태의 질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사30:26은 이번 번호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달빛은햇빛같겠고햇빛은일곱배가되어일곱날의빛과같으리라’는 말씀에서 스베덴보리는 ‘해’를 사랑으로, ‘달’을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달이해와같이된다’는 것은 신앙이 사랑과 같이 되어야 함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가인 이야기 전체와 정확히 맞닿습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데 있었습니다. 참된 질서에서는 달이 해에서 빛을 받듯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사30:26의 인용은 단순히 ‘일곱이거룩하다’는 사실만 증명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이번 문맥에서는 사랑과 신앙의 올바른 관계까지 다시 보여 줍니다. ‘해=사랑’, ‘달=사랑에서나오는신앙’이라는 상응은 가인으로 표상된 분리된 신앙이 궁극적으로 회복되어야 할 방향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신 목적도 신앙이 영원히 사랑에서 분리된 채 존재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사랑과 결합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일곱’의 의미를 거듭남뿐 아니라 황폐화에도 적용합니다. 사람의 거듭남이 여섯 기간을 지나 일곱째의 천적 상태에 이르는 것처럼, 황폐화 역시 천적인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상태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기간을 거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같은 ‘일곱’이 언제나 즐겁고 긍정적인 사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일곱이 나타내는 것은 그 과정의 거룩한 질서 또는 완결된 상태이며, 문맥에 따라 거듭남의 완성과 황폐화의 완결 모두에 사용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여러 포로 생활과 칠십 년의 바벨론 포로가 이 맥락에서 언급됩니다. 칠십은 ‘일곱번의십년’으로서 황폐화의 기간을 표상합니다. 땅이 안식년 동안 쉬어야 한다는 말씀 역시 같은 일곱의 질서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안식과 황폐화가 표면적으로는 매우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둘 다 어떤 영적 기간이 주님의 질서 아래 그 정해진 상태에 이르는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에게 ‘일곱때’가 지나가는 단4장의 말씀도 같은 이유로 인용됩니다. 사람의 마음이 짐승의 마음으로 바뀌고 일곱 때를 지나는 것은 황폐화의 상태를 표상합니다. 계15장의 일곱 마지막 재앙, 계11장의 마흔두 달, 계5장의 일곱 인도 같은 계열에 놓입니다. 여기서도 숫자 자체를 산술적으로 해독하는 것보다, 일곱이라는 수가 말씀 안에서 거룩하고 침해할 수 없는 질서 및 어떤 상태의 충만한 기간을 나타낸다는 스베덴보리의 해석 원리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계11:2의 마흔두 달을 ‘여섯번의일곱’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창조의 여섯 날과도 연결하여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숫자 계산 자체를 독립적인 예언 연대표로 발전시키는 것은 이번 본문의 목적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모든 예를 드는 목적은 오직 ‘일곱’이 말씀에서 거룩한 것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확증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레26장의 ‘칠배의징벌’이나 시79:12의 ‘칠배나갚으소서’처럼 형벌의 강화에도 일곱이 사용됩니까?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이유 역시 일곱의 거룩함에서 찾습니다. 거룩한 것을 침해하는 일의 엄중함을 나타낼 때도 일곱이 사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칠배’는 단순히 형량을 일곱 배로 계산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행위가 거룩하고 침해해서는 안 되는 것과 관련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제 다시 가인에게 돌아오면 AC.395의 논리가 선명해집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그 신앙은 이미 본래의 천국적 질서를 잃었습니다. 그런데 AC.393-394에서 보았듯이 주님께서는 인류가 영원한 죽음 가운데 멸망하지 않도록 그 신앙을 보존하셨습니다. 인간이 더 이상 사랑으로부터 직접 진리를 퍼셉션할 수 없게 된 뒤에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주어지고, 그 지식을 통하여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주시는 새로운 길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점이 이번 번호 마지막의 ‘since...itwastobeofservice’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신앙은 ‘쓰임이있어야했습니다.’ 여기서 신앙의 쓰임은 체어리티와 분리된 상태를 영구히 유지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신앙의 지식이 훗날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수단이 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신앙을 완전히 파괴하면 주님께서 인간을 다시 체어리티로 인도하시는 하나의 중요한 수단까지 파괴하는 셈이 됩니다.
그래서 분리된 신앙임에도 그것에 폭력을 가하는 것이 ‘모독’이 됩니다. 이것은 잘못된 교리를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인의 오류는 이미 매우 분명하게 비판되었습니다.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우위에 두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나 그 오류를 바로잡는 것과 신앙 자체, 특히 주님께서 이후의 구원을 위해 보존하신 신앙의 지식까지 파괴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이 점은 ‘가인의표’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입니다. 주님께서 가인을 보호하신 것은 가인이 옳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타락 속에서도 앞으로 쓰임이 있을 것을 보존하십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것은 악한 일이지만, 신앙에 속한 지식은 이후의 인간이 말씀을 듣고 배우며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수단으로 쓰일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표는 오류의 승인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보존의 표입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섭리에 관한 매우 깊은 원리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것이 현재 불완전하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즉시 없애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 안에 앞으로 선을 위해 쓰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보존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더 나은 질서로 이끄십니다. 가인의 신앙도 그러했습니다. 그것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으므로 참된 질서를 잃었지만, 신앙의 지식이라는 측면에서는 이후 인간이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AC.395의 ‘일곱’은 단순한 성경 숫자 공부의 주제가 아닙니다. 일곱이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왜 가인의 신앙이 함부로 파괴되어서는 안 되었는지를 밝혀 줍니다. 주님께서 구원을 위해 구별하여 보존하신 것에는 거룩한 쓰임이 있었고, 그 쓰임을 파괴하는 것은 모독이 될 수 있었습니다. ‘칠배의벌’은 바로 그 거룩하고 침해해서는 안 되는 성격을 표현합니다.
결국 AC.395는 창1의 일곱째 날에서 창4의 가인의 표까지 하나의 긴 선을 연결합니다. 창1의 일곱째 날은 사랑과 신앙이 하나 된 천적 인간의 평화와 안식을 나타냈습니다. 창4에서는 그 결합이 깨어져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신앙을 완전히 소멸시키지 않고 표를 주어 보존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보존의 거룩함을 다시 ‘일곱’이라는 수로 표현하셨습니다. 결국 처음의 목적도 마지막의 목적도 같습니다. 신앙이 홀로 남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어, 인간이 주님과 결합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3
지금우리앞에있는말씀의속뜻을계속밝혀나가기전에,신앙이어떻게되어있는지를알아둘필요가있습니다.태고교회는사랑에속한신앙외에는어떠한신앙도인정하지않는성격의교회였으며,심지어신앙을따로언급하려하지도않았습니다.그들은주님으로부터오는사랑을통하여신앙에속한모든것을퍼셉션했기때문입니다.앞에서말한천적천사들도이와같습니다.그러나인류가계속이러한성격으로있을수없고,주님을향한사랑에서신앙을분리하여신앙을그자체로하나의교리로만들것이예견되었으므로,그것들이실제로분리되도록허용하시되다음과같은방식으로섭리하셨습니다.곧신앙을통하여,다시말해신앙에관한지식들을통하여사람들이주님으로부터체어리티를받을수있도록하신것입니다.그리하여지식(cognitio),곧듣는것이먼저오고,그후지식또는들음을통하여체어리티,곧이웃을향한사랑과자비가주님으로부터주어지게하셨습니다.이체어리티는신앙과분리될수없어야할뿐아니라신앙에서주된것을이루어야했습니다.그리고그때태고교회에있었던퍼셉션을대신하여,체어리티와결합된신앙을통하여얻어지는양심이뒤를이었습니다.이양심은무엇이진리인지를딕테이트하는것이아니라,그것이진리라는것을딕테이트하였는데,이는주님께서말씀에서그렇게말씀하셨기때문입니다.홍수후의교회들은대부분이러한성격이었으며,주님의강림후원시교회또는초대교회도그러했습니다.천적천사들과영적천사들이구별되는것도바로이것에의해서입니다. Before we proceed to elucidate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s before us, it is necessary to know how the case is with faith.The most ancient church was of such a character as to acknowledge no faith except that which is of love, insomuch that they were unwilling even to mention faith, for through love from the Lord they perceived all things that belong to faith.Such also are the celestial angels of whom we have spoken above.But as it was foreseen that the human race could not be of this character, but would separate faith from love to the Lord, and would make of faith a doctrine by itself, it was provided that they should indeed be separated, but in such a way that through faith, that is, through the knowledges of faith, men might receive from the Lord charity, so that knowledge [cognitio] or hearing should come first, and then through knowledge or hearing, charity, that is, love toward the neighbor, and mercy, might be given by the Lord, which charity should not only be inseparable from faith, but should also constitute the principal of faith.And then instead of the perception they had in the most ancient church, there succeeded conscience, acquired through faith joined to charity, which dictated not what is true, but that it is true, and this because the Lord has so said in the Word.The churches after the flood were for the most part of this character, as also was the primitive or first church after the Lord’s advent, and by this the spiritual angels are distinguished from the celestial.
해설
AC.393은 가인의 표에 대한 설명을 잠시 멈추고 신앙의 역사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번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우리앞에있는말씀의속뜻을계속밝혀나가기전에,신앙이어떻게되어있는지를알아둘필요가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어질 가인의 표를 이해하려면 먼저 태고교회에서 신앙과 사랑이 어떤 관계에 있었고, 이후 그 관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AC.393은 단순한 삽입 설명이 아니라 AC.392에서 말한 ‘분리된신앙의보존’을 이해하는 교리적 열쇠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에속한신앙’ 외에는 어떠한 신앙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이 ‘신앙’을 따로 언급하려 하지도 않았다는 설명입니다. 그들에게 사랑과 신앙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두 개의 별도 항목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 있으면서 그 사랑을 통하여 신앙에 속한 것들을 퍼셉션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어떤 교리를 배우고 그것이 참이라고 믿은 다음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내적으로 퍼셉션했습니다. 그래서 사랑과 신앙을 따로 떼어 ‘나는이것을믿는다’고 고백하는 것 자체가 그들의 본래적 질서와 맞지 않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천사들도 이와 같다고 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상태와 천적 천사의 상태 사이에 깊은 상응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천적 상태에서는 사랑이 중심이며 진리는 그 사랑 안에서 퍼셉션됩니다. 진리를 먼저 지적으로 확보하고 그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 나아가는 질서가 아니라, 선 안에서 진리를 보는 질서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천적인간은사랑에서신앙으로’라고 정리해 온 이유입니다.
그러나 인류가 계속 그러한 상태에 머물 수 없을 것이 예견되었습니다. 인간은 결국 ‘주님을향한사랑에서신앙을분리하고’, 신앙을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교리로 만들게 됩니다. 이것이 가인으로 표상된 분리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 분리를 원하셨다고 이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분리는 인간의 타락에서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이 그렇게 될 것을 예견하시고, 이미 낮아진 상태에서도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섭리하셨습니다.
그 새로운 길이 바로 ‘신앙에관한지식들에서체어리티로’ 나아가는 질서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퍼셉션했다면, 이후의 인간에게는 먼저 신앙에 관한 지식이 주어집니다. 사람은 말씀을 듣고 배우며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지식과 들음을 통하여 주님께서 체어리티, 곧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를 주십니다. 따라서 순서는 달라집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것을 퍼셉션했다면, 이후의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오고 그 지식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형성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먼저지식만충분히쌓으면나중에자동으로체어리티가생긴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393은 체어리티가 ‘주님으로부터주어진다’고 두 번이나 강조합니다. 지식 자체가 체어리티를 생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진리를 듣고 배우는 것은 주님께서 사람에게 체어리티를 주실 수 있는 수단과 길이 됩니다. 사람이 그 진리를 받아들이고 삶으로 행하려 할 때 주님께서 그 안에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를 형성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질서에서도 생명의 근원은 여전히 주님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주어진 체어리티가 신앙과 ‘분리될수없어야할뿐아니라신앙에서주된것을이루어야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순서와 주도권을 명확히 구별합니다. 시간적·교육적 순서에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질서와 주도권에서는 체어리티가 주된 것입니다. 이것은 AC.363에서 살펴본 원리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신앙이 먼저 배워질 수 있지만, 신앙이 지배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여 나아가야 하며,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과 주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이먼저다’라는 말을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사람이 말씀을 듣고 진리를 배우는 교육적 순서에서 신앙의 지식이 먼저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본질적이고 우월하다는 뜻입니다. AC.393은 첫 번째 의미는 인정하지만 두 번째 의미는 분명히 부정합니다. 지식과 들음은 먼저 올 수 있지만, 그것을 통해 주님께서 주시는 체어리티가 신앙의 ‘주된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퍼셉션과 양심의 차이가 등장합니다. 태고교회에는 퍼셉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는 ‘체어리티와결합된신앙을통하여얻어지는양심’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습니다. 이 양심은 퍼셉션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매우 정밀하게 ‘양심은무엇이진리인지를딕테이트하는것이아니라,그것이진리라는것을딕테이트한다’고 말합니다.
이 차이는 처음에는 미묘해 보이지만 매우 큽니다. 퍼셉션을 가진 태고교회 사람은 사랑으로부터 어떤 것이 선하고 참된지를 내적으로 알아차렸습니다. 반면 양심을 가진 영적 인간은 먼저 말씀을 통해 진리를 배웁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말씀에서그렇게말씀하셨기때문에이것은진리이다’라는 내적인 딕테이트를 받습니다. 즉 양심이 독립적으로 새로운 진리를 발견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계시되고 배운 진리를 진리로 인정하고 그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앞의 AC.359와 AC.370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AC.359에서는 가인에게 ‘여호와께서말씀하셨다’는 것을 ‘consciencedictated’, 곧 ‘양심이말해주었다’고 했습니다. 반면 AC.370에서는 같은 ‘여호와께서가인에게말씀하셨다’를 ‘체어리티에관하여그들에게어떤딕테이트를주는,내면에서오는어떤퍼셉션’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두 표현을 억지로 하나로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AC.393은 태고교회에 고유한 퍼셉션과 이후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을 통해 형성되는 양심이 서로 다른 영적 기능임을 분명히 합니다. 따라서 앞의 표현 차이도 그대로 보존하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과도기적 상태 안에서 퍼셉션의 어떤 흔적과 양심이라는 표현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조심스럽게 읽어야 합니다.
특히 AC.393은 ‘홍수후의교회들은대부분이러한성격이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홍수 후 고대교회의 양심을 시대적으로 무분별하게 섞어서는 안 됩니다. 홍수 후의 영적 교회에서는 말씀과 신앙의 지식이 먼저 주어지고, 그것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며, 그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으로부터 양심이 형성됩니다. 이것이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와 구별되는 영적 교회의 질서입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강림 후 ‘원시교회또는초대교회’도 이러한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히 홍수 직후 어느 고대 종교집단만의 특수한 구조가 아닙니다. 사람이 말씀의 진리를 먼저 듣고 배우며, 그 진리를 삶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주님에게서 체어리티를 받고, 그 결과 양심이 형성되는 것은 영적 교회의 기본적인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차이가 천적 천사와 영적 천사를 구별한다고 말합니다. 천적 천사는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하고, 영적 천사는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 인도되며 양심의 질서 안에서 살아갑니다. 둘 가운데 하나가 천국이고 다른 하나가 열등하여 천국이 아니라는 뜻은 아닙니다. 둘 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지만 그 받아들이는 방식과 질서가 다릅니다. 이것이 천적과 영적의 중요한 구별입니다.
이제 AC.392의 ‘가인의표’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이 사랑으로부터 직접 신앙에 속한 것을 퍼셉션하는 태고교회의 상태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시키기 시작했을 때, 주님께서는 단순히 그 신앙을 없애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신앙의 지식이 보존되게 하시고, 훗날 그 지식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분리된 신앙을 보존하셨다는 것은 분리를 승인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에게도 다시 체어리티가 주어질 수 있도록 신앙의 지식을 구원의 수단으로 보존하셨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인의 표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것은 타락이지만, 그렇다고 신앙에 관한 모든 지식을 파괴해 버리면 이후의 인간은 무엇을 통하여 체어리티로 인도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인간의 상태가 낮아진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길을 마련하십니다. 사랑에서 직접 진리를 퍼셉션할 수 없게 된 사람에게 말씀을 듣게 하시고, 신앙의 지식을 배우게 하시며, 그 지식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시고,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으로부터 양심을 형성하십니다.
따라서 AC.393은 단순히 ‘옛날에는퍼셉션이있었고나중에는양심이생겼다’는 교회사적 설명이 아닙니다.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길을 계속 이어 가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 줍니다. 인간이 더 이상 천적 방식으로 주님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을 때 주님께서는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더 외적인 길을 통하여 다시 내적인 사랑과 체어리티로 인도하십니다.
결국 AC.393의 핵심은 ‘순서는바뀌었지만목적은바뀌지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나왔습니다. 이후 영적 교회에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오고 그것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독립하여 생명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분리될 수 없으며 ‘신앙에서주된것’을 이루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가인의 신앙을 보존하신 것도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입니다. 분리된 신앙 자체를 영구히 존속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가 주어지고 신앙과 사랑의 결합이 회복될 수 있도록 길을 남겨 두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