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창4:16)

 

AC.398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는 것’(go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이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14절의 해설에서 볼 수 있습니다. ‘놋 땅에 거하는 것’(dwell in the land of Nod)이 진리와 선 밖에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놋’(Nod)이라는 말의 의미에서 분명한데, 그것은 유리하며 피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리하며 피하는 자’(wanderer and fugitive)가 되는 것이 진리와 선을 빼앗긴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에덴 동쪽’(toward the east of Eden)이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intellectual mind) 가까이, 그리고 전에 체어리티가 지배하던 합리적 마음(rational mind) 가까이를 의미한다는 것은 ‘에덴 동쪽’의 의미에 관하여 앞에서 말한 것으로부터 분명합니다. 곧 ‘동쪽’(east)은 주님을, ‘에덴’(Eden)은 사랑을 의미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서는 의지와 이해로 이루어진 마음이 하나였습니다. 의지가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기 때문에 이해는 의지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의지에 속한 사랑과 이해에 속한 신앙을 구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고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와 같이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후에는 더 이상 의지가 지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서 의지 대신 이해가, 곧 사랑 대신 신앙이 지배하게 되었으므로, 그가 ‘에덴 동쪽에 거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방금 말한 것처럼 신앙이 구별되었기 때문입니다. 곧 신앙에 ‘표가 주어져’ 인류의 쓰임을 위하여 보존되게 하신 것입니다. That to “go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the good of the faith of love may be seen in the explication of verse 14; that to “dwell in the land of Nod” signifies outside of truth and goo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word “Nod,” which is to be a wanderer and a fugitive; and that to be “a wanderer and a fugitive” is to be deprived of truth and good, may be seen above. That “toward the east of Eden” signifies near the intellectual mind, where love had previously reigned, and also near the rational mind, where charity had previously reigned,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said of the signification of “the east of Eden,” namely, that “the east” is the Lord, and “Eden” love. With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e mind, consisting of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was one; for the will was the all in all, so that the understanding was of the will. This was because they made no distinction between love, which is of the will, and faith, which is of the understanding, because love was the all in all, and faith was of love. But after faith was separated from love, as was the case with those who were called “Cain,” no will reigned any longer, and as in that mind the understanding reigned instead of the will, or faith instead of love, it is said that he “dwelt toward the east of Eden”; for as was just now observed, faith was distinguished, or “had a mark set upon it,” that it might be preserved for the use of mankind.

 

해설

AC.398은 앞의 AC.397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변화가 인간 마음의 구조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보여 줍니다. 처음 두 표현은 앞에서 이미 설명된 의미를 다시 확인합니다.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는 것’은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는 것이고, ‘놋 땅에 거하는 것’은 진리와 선 밖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의 중심은 세 번째 표현인 ‘에덴 동쪽’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의지와 이해,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설명한 뒤, 가인에게서 그 주도권이 어떻게 뒤바뀌었는지를 밝힙니다.

 

먼저 ‘놋’이라는 이름 자체가 ‘유리하며 피하는 자’의 상태와 연결됩니다. 앞의 AC.380, AC.382, AC.388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는 무엇이 진리이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이 놋 땅에 거했다는 것은 단순히 에덴을 떠나 다른 지역에 정착했다는 지리적 진술에 머물지 않습니다. 속뜻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진리와 선의 살아 있는 질서 밖에 놓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에덴 동쪽’은 그보다 훨씬 미묘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동쪽’은 주님을, ‘에덴’은 사랑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인이 에덴 동쪽에 거했다는 것을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이며 동시에 ‘전에 체어리티가 지배하던 합리적 마음 가까이’라고 설명합니다. AC.397에서는 이해의 마음만 언급했는데, 이번 번호에서는 합리적 마음까지 덧붙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상태를 이해하려면 ‘사랑-신앙’뿐 아니라 ‘의지-이해’라는 인간 마음의 구조까지 함께 보아야 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서는 의지와 이해가 하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였다’는 것은 두 기능을 개념적으로 전혀 구별할 수 없었다는 뜻이라기보다, 서로 대립하거나 독립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의지가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기 때문에 이해가 의지에 속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즉 의지가 중심이었고 이해는 그 의지의 질서 안에서 움직였습니다.

 

그 이유는 다시 사랑과 신앙의 관계에서 설명됩니다. 사랑은 의지에 속하고 신앙은 이해에 속합니다. 그런데 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과 신앙을 서로 독립된 두 가지로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고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AC.393에서 ‘태고교회는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는 어떠한 신앙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신앙을 따로 언급하려 하지도 않았다’고 한 설명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따라서 태고교회의 질서는 ‘의지에서 이해로’, 그리고 ‘사랑에서 신앙으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인간 자신의 의지가 본래 선했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사랑과 선의 근원도 주님이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의지를 채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랑 안에서 이해가 진리를 퍼셉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심은 인간의 의지 자체가 아니라 그 의지를 지배하던 주님으로부터의 사랑입니다.

 

가인에게서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후에는 더 이상 의지가 지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변화를 매우 대칭적인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의지 대신 이해가, 곧 사랑 대신 신앙이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인의 분리가 가져온 마음의 구조적 변화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를 단순히 ‘신앙을 너무 강조했다’는 정도로 이해해서는 부족합니다. 문제는 주도권의 역전입니다. 본래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고 이해는 의지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면서 이해가 독립적인 지배 위치에 올라섰습니다. 진리가 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진리라고 여기는 것이 선 위에 서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체어리티를 판단하고 지배하려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앞의 AC.362-363에서 설명한 가인의 교리와도 정확히 맞닿습니다. 거기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교리는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으며,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AC.398에서는 그 문제가 더 깊은 인간 마음의 차원에서 설명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 중 무엇이 먼저인가?’라는 교리적 논쟁의 배후에는 ‘이해와 의지 중 무엇이 지배하는가?’라는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AC.393에서 스베덴보리는 홍수 후의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오고, 그 지식을 통하여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AC.398의 ‘이해가 지배하게 되었다’는 말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말은 서로 다른 차원을 말합니다. 영적 인간에게 신앙의 지식이 ‘먼저 온다’는 것은 배우고 거듭나는 순서에 관한 것이며, 신앙이 사랑보다 ‘지배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식은 먼저 올 수 있지만 체어리티가 신앙에서 주된 것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 차이를 놓치면 가인의 신앙과 홍수 후 영적 교회의 신앙을 동일하게 만들어 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여 이해가 의지 대신 지배하게 만든 상태입니다. 반면 주님께서 섭리하신 영적 교회의 질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주어지더라도 그 신앙이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되고, 마침내 체어리티가 신앙에서 주된 것이 되는 질서입니다. 따라서 ‘신앙이 먼저 온다’와 ‘신앙이 지배한다’는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이 구별 때문에 AC.398 마지막의 ‘가인의 표’가 다시 중요해집니다. 주님께서는 사랑 대신 신앙이 지배하게 된 잘못된 질서를 승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해와 신앙을 완전히 소멸시키지도 않으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구별되었고, 곧 신앙에 표가 주어져 인류의 쓰임을 위하여 보존되었다’고 다시 말합니다. 여기서 ‘for the use of mankind’, 곧 ‘인류의 쓰임을 위하여’라는 표현이 AC.395의 설명을 더욱 분명하게 해 줍니다.

 

왜 신앙을 보존해야 했습니까? AC.393에서 이미 답을 보았습니다. 인간이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사랑으로부터 직접 진리를 퍼셉션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람에게는 진리를 먼저 듣고 배우는 길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므로 이해와 신앙에 속한 지식이 보존되어야 했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주님께서 다시 체어리티를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신앙은 잘못된 분리에서 시작되었지만, 주님께서는 그 안에서 앞으로 인류에게 쓰임이 될 수 있는 것을 구별하여 보존하셨습니다.

 

이제 ‘에덴 동쪽에 거하였다’는 표현도 훨씬 선명해집니다. 가인은 에덴 안에 있지 않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며 신앙이 사랑에 속해 있던 본래의 천적 질서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덴과 아무 관계도 없는 완전한 소멸 상태로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그는 ‘에덴 동쪽’, 곧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과 전에 체어리티가 지배하던 합리적 마음 가까이에 있습니다. 분리는 일어났지만 이해와 신앙이 보존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가까이’라는 표현은 AC.397에 이어 여전히 중요합니다. 그것은 가인의 상태가 선하고 정상적이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서 신앙이 앞으로 다시 선과 결합될 수 있는 쓰임을 위해 보존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사랑과 신앙의 본래적 하나 됨은 깨어졌지만, 신앙 자체가 제거되지는 않았습니다. 인간은 이제 그 보존된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다른 길로 인도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AC.398은 태고교회에서 가인으로 넘어가는 변화와, 다시 홍수 후 영적 교회의 질서가 가능해지는 배경을 한꺼번에 보여 주는 중요한 번호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의지와 이해가 하나였고,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으며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습니다. 가인에게서는 그 결합이 깨져 이해가 의지 대신, 신앙이 사랑 대신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신앙을 없애지 않고 인류의 쓰임을 위해 구별하여 보존하셨습니다.

 

결국 가인의 문제는 ‘이해가 존재한다’거나 ‘신앙이 존재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해가 의지에서,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스스로 지배하려 한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섭리는 그 뒤집힌 질서를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도 이해와 신앙을 보존하여 다시 선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수단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인이 진리와 선 밖의 ‘놋 땅’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에덴 동쪽’, 곧 전에 사랑과 체어리티가 지배하던 마음 가까이에 거한다고 한 깊은 이유입니다. (AC.398 해설)

 

 

 

AC.399, 창4:17, ‘가인이 에녹을 낳고 성을 쌓다 - 분리된 신앙이 새로운 교리 체계를 낳다’ (AC.399-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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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7, 창4:16, ‘가인이 에덴 동쪽 놋 땅에 거하다 -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에 남은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 (창4:16) AC.397‘가인이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갔다’(Cain 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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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4 심화

1. ‘천상의 결혼’이란 무엇인가?

 

AC.54에는 매우 중요한 표현 하나가 등장합니다. ‘천상의 결혼’(heavenly marriage)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자기들의 결혼이 주는 행복이 이 천상의 결혼에서 온다고 퍼셉션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천상의 결혼’은 무엇일까요? 천국에 간 남자와 여자가 이루는 결혼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이해와 의지의 결합을 말하는 것일까요?

 

먼저 AC.54가 직접 말하는 것부터 구별해야 합니다. 이 글은 태고교회 사람들의 실제 결혼이 그들에게 행복과 기쁨의 주된 근원이었고, 그들이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을 보았기 때문에 자기들의 결혼을 통해 ‘천상의 결혼’을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결혼의 행복이 그 천상의 결혼에서 온다고 퍼셉션했다고 합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 안의 이해를 ‘남자’, 의지를 ‘여자’라고 불렀으며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고 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AC.54 안에서만 보아도 결혼이라는 말은 자연적인 남녀 관계에만 머물지 않고 인간 내면의 두 기능이 하나로 작동하는 관계까지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천상의 결혼 = 이해와 의지의 결합’이라고 완전히 동일시하는 것도 조금 조심해야 합니다. AC 전체에서 ‘천상의 결혼’이라는 개념은 여러 층위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해와 의지의 결합, 진리와 선의 결합, 신앙과 사랑의 결합 등이 서로 연결되며, 궁극적으로 모든 참된 결합의 근원은 주님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천상의 결혼’을 하나의 평면적인 등식으로 외우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참된 결합이 여러 차원에서 나타나는 질서’라는 방향으로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다만 이 표현 역시 AC.54 자체의 문장을 넘어선 전체 AC의 관점에서 정리한 설명이라는 점은 구별해야 합니다.

 

AC.54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형태는 이해와 의지의 결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해를 남자, 의지를 여자라고 하고 ‘이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는 이해이고 의지는 의지인 채로, 둘이 하나로 작동합니다.

 

이것은 결혼이라는 상응의 중요한 성질을 보여 줍니다. 참된 결합은 차이를 없애는 동일화가 아니라 구별된 것들이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해와 의지가 결합한다고 해서 이해가 의지가 되거나 의지가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다른 두 기능이 하나의 생명을 이루어 작동합니다.

 

앞의 AC.53과 연결하면 신앙과 사랑의 관계도 여기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AC.53은 이해에 속한 신앙과 의지에 속한 사랑을 구별했습니다. 따라서 이해와 의지의 결혼은 자연스럽게 신앙과 사랑의 결합과도 연결됩니다. 이후 AC.475-476에서도 스베덴보리는 ‘남자와 여자’가 신앙과 사랑의 결혼을 뜻한다고 다시 설명합니다.

 

여기서 신앙과 사랑의 결혼은 ‘교리를 많이 알면서 사랑도 조금 더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과 사랑이 참으로 결합한다는 것은 사람이 아는 진리와 그가 실제로 사랑하고 원하는 선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은 상태와 관계됩니다. 이해가 한 방향을 보고 의지가 정반대 방향을 향한다면 둘이 하나로 작동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곧바로 ‘아는 대로 완벽하게 살아야만 결혼이 이루어진다’는 도덕적 완전주의로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거듭남은 진행되는 과정이며, AC.54는 그 과정의 세부 단계를 설명하는 글이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참된 영적 질서가 이해와 의지의 분리에 있지 않고 그 결합에 있다는 것입니다.

 

‘천상의 결혼’이라는 말을 선과 진리의 관계에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해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기능과, 의지는 선을 사랑하고 행하는 기능과 깊이 관계되므로 이해와 의지의 결합은 진리와 선의 결합과 분리되어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술 전체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은 천국과 거듭남을 이해하는 매우 근본적인 원리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남자 = 진리’, ‘여자 = 선’이라는 하나의 기계적인 공식으로 모든 성경 구절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상응은 문맥을 따라 보아야 합니다. AC.54가 직접 말하는 것은 영적 인간 안에서 ‘남자 = 진리’, ‘여자 = 선’이며,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관련된 더 넓은 대응은 이후의 AC 설명과 함께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태고교회 사람들의 실제 결혼은 이 내적인 결혼과 어떤 관계였을까요? AC.54의 표현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결혼에서 누리는 행복이 ‘천상의 결혼’에서 온다고 퍼셉션했습니다. 즉 자연적인 결혼 자체를 행복의 최종 근원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 결합의 행복 안에서 더 높은 결합의 질서를 보았고, 그 근원을 천적인 것과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찾았습니다.

 

그렇다고 자연적인 결혼을 단순한 그림자나 중요하지 않은 외피로 취급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결혼이 행복과 기쁨의 주된 근원이었다고 AC.54가 직접 말합니다.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을 참으로 표상할 때 외적인 것은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을 담고 드러내는 귀한 형식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태고교회 사람들이 무엇이든 결혼에 비유할 수 있으면 결혼에 비유했던 이유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그들에게 결혼은 단순히 사회제도 하나가 아니라 서로 구별되는 것들이 하나를 이루는 행복을 경험하게 하는 매우 깊은 표상이었습니다.

 

또 이 때문에 말씀에서 교회 자체도 ‘딸’, ‘처녀’, ‘아내’라는 결혼의 언어로 표현됩니다. AC.54는 그 이유를 교회의 ‘선에 대한 애정’에서 찾습니다. 이후 말씀에서 주님과 교회의 관계가 혼인과 부부의 언어로 나타날 때에도 이 천상의 결혼이라는 큰 주제가 배경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면 천국에서의 실제 남녀 결혼과 ‘천상의 결혼’은 아무 관계가 없을까요? 그렇다고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저술에서 천국의 결혼과 결혼애를 별도로 매우 깊게 다룹니다. 다만 AC.54의 ‘천상의 결혼’을 처음부터 사후세계의 부부생활만을 뜻하는 용어로 제한하면 이번 글의 중심을 놓치게 됩니다. 여기서는 자연적인 결혼의 행복이 더 내적인 천상의 결합에서 온다는 방향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결합의 궁극적인 근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AC.54에서 태고교회 사람들의 생각은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내적인 것에서 천적인 것으로,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모든 것’이신 주님께로 향했습니다. 따라서 천상의 결혼도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내는 완전한 조화가 아닙니다. 모든 참된 선과 진리와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앞의 AC.39 이후의 원리는 여기에서도 그대로 유지됩니다.

 

그래서 ‘천상의 결혼’을 가장 안전하게 기억하는 방법은 하나의 단단한 등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 질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서로 구별되는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가 주님에게서 오는 질서 안에서 하나로 결합하여 작동하는 것입니다. AC.54에서는 그 가운데 특별히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작동하는 것을 ‘결혼’이라고 부릅니다.

 

결국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실제 결혼의 행복은 그 자체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더 내적인 결합을 비추었고, 그 결합은 다시 천적인 것으로, 궁극적으로 주님께 시선을 돌리게 했습니다. 이것이 AC.54에서 ‘남자와 여자’의 속뜻을 설명하면서 굳이 태고교회의 결혼의 행복과 천상의 결혼을 함께 이야기하는 이유입니다.

 

 

 

AC.54, 창1:27, ‘남자와 여자’ :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작동하는 결혼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AC.54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속뜻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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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5

셋째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Un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고 하였는데, 이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음을 뜻하며, 이것은 질서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신앙이 주도권을 가지려 하는 동안에는 신앙이 아니며,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 비로소 신앙이 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의 본질적인 것(the principal of faith)이기 때문인데, 이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체어리티는 불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불꽃은 열과 빛의 본질적인 것으로, 열과 빛은 불꽃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분리된 상태의 신앙은 불꽃의 열이 없는 빛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빛은 있지만 그것은 겨울의 빛이며, 그 안에서는 모든 것이 굳어지고 죽게 됩니다. In the third place it is said, “Un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by which is signified that charity is desirous to abide with faith, but cannot do so because faith wishes to rule over it, which is contrary to order. So long as faith seeks to have the dominion, it is not faith, and only becomes faith when charity rules; for charity is the principal of faith, as was shown above. Charity may be compared to flame, which is the essential of heat and light, for heat and light are from it; and faith in a state of separation may be compared to light that is without the heat of flame, when indeed there is light, but it is the light of winter in which everything becomes torpid and dies.

 

해설

AC.365는 창4:7의 마지막 말씀,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의 속뜻을 본격적으로 설명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온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매우 선명하게 결론짓습니다. 앞의 AC.361에서는 이 말씀이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할 수 없다는 뜻이라고 개괄했고, AC.363에서는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65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앙이 주도권을 가지려 하는 동안에는 신앙이 아니며,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 비로소 신앙이 된다’고까지 말합니다. 이것은 창4의 가인과 아벨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선언입니다.

 

먼저 ‘그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에 해당하는 ‘Unto thee is his desire’를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머물기를 원하는 것으로 풀이합니다. 여기에는 가인과 아벨의 관계에 관한 중요한 사실이 담겨 있습니다. 아벨, 곧 체어리티는 가인, 곧 신앙을 밀어내려 하지 않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 하지도 않고 신앙과 경쟁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본래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분리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가르치고, 체어리티는 그 진리를 사랑하고 삶으로 행하게 합니다. 둘은 한 생명을 이루어야 합니다.

 

문제는 가인이 그 관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너는 그를 다스릴지니라’는 말씀을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는 상태로 읽습니다. 여기서 가인의 근본적인 질서 전도가 드러납니다. 가인은 체어리티 자체가 필요 없다고 처음부터 주장한 것이 아닙니다. 체어리티를 인정하되 그것을 신앙 아래에 두려고 합니다. 신앙을 첫째로 세우고, 사랑과 체어리티를 그 뒤에 따라오는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질서에 어긋난다’(contrary to order)고 단언합니다.

 

이 ‘질서’가 무엇인지는 앞의 글들을 통해 이미 드러났습니다. 사랑에서 체어리티가 나오고, 체어리티 안에서 신앙이 생명을 얻습니다. AC.362에서는 체어리티를 ‘사랑의 자손’(the offspring of love)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질서는 ‘사랑 → 체어리티 →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신앙이 이 질서에서 벗어나 자기 스스로 첫째가 되려 하면 그 순간 신앙은 자기 생명의 근원에서 떨어져 나갑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의 길입니다.

 

그래서 AC.365의 ‘신앙이 주도권을 가지려 하는 동안에는 신앙이 아니다’라는 표현은 매우 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신앙은 조금 부족한 신앙이다’라거나 ‘불완전한 신앙이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신앙이 아니다’(it is not faith)라고 합니다. 그리고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 비로소 신앙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의 정체성이 단순히 어떤 교리를 참이라고 인정하는 데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체어리티를 섬기는 진리라야 비로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여기서 ‘체어리티는 신앙의 본질적인 것(the principal of faith)’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principal’을 단순히 ‘중요한 요소’ 정도로 이해하면 약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에 부가되는 여러 덕목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하나라는 뜻이 아니라,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 중심적이고 본질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를 제거하고도 신앙 자체는 그대로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인의 오류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이름은 신앙일 수 있어도 그 안에 신앙의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추상적인 설명을 스베덴보리는 아주 아름다운 자연의 비유로 풀어냅니다. ‘체어리티는 불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불꽃에서 열과 빛이 나옵니다. 여기서 불꽃은 근원이며, 열과 빛은 그 불꽃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불꽃에서 열을 떼어내고 빛만 남긴다면 겉으로는 여전히 밝아 보일 수 있지만, 생명을 살리는 따뜻함은 사라집니다.

 

이 비유에서 체어리티와 신앙의 관계가 아주 선명해집니다. 체어리티는 불꽃과 같고, 신앙은 그 불꽃에서 나오는 빛과 같습니다. 참된 신앙에는 빛이 있습니다. 진리를 보고 이해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빛이 살아 있는 빛이 되려면 불꽃의 열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곧 진리를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 함께 있어야 하고, 진리를 이해하는 것과 그 진리에 따라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반대로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불꽃의 열이 없는 빛’과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런 상태에도 ‘실제로 빛은 있다’고 인정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분리된 신앙이라고 해서 아무런 진리도 없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많이 알 수도 있고,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도 있으며, 매우 논리적인 신학 체계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빛은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빛에 열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겨울의 빛’(the light of winter)이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가인의 신앙을 설명하는 데 대단히 적절합니다. 겨울에도 태양은 빛납니다. 사물을 볼 수도 있고 길을 분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빛에는 생명을 일으키는 따뜻함이 없습니다. 땅은 얼어 있고 나무는 굳어 있으며 씨앗은 싹트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 안에서는 모든 것이 굳어지고 죽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앞의 AC.348-349와도 놀랍도록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 나온 행위는 ‘죽은 행위’였고,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예배는 ‘죽은 예배’였습니다. 이제 AC.365에서는 왜 그것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지를 ‘겨울의 빛’으로 보여 줍니다. 빛은 있는데 열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지식과 교리는 있는데 체어리티의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니 행위에도 생명이 없고 예배에도 생명이 없습니다.

 

이 비유를 조금 더 깊이 보면 ‘빛을 없애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도 분명해집니다. 겨울의 문제는 빛이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열이 없는 데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스베덴보리는 신앙이나 진리, 교리를 낮추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본래의 생명을 되찾기를 원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하면 겨울의 빛은 생명을 살리는 빛이 됩니다.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고, 이해가 의지와 결합하며, 아는 것이 삶과 결합될 때 신앙은 비로소 본래의 기능을 합니다.

 

따라서 ‘체어리티가 주도한다’는 말도 ‘사랑만 있으면 진리는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불꽃에는 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빛도 있습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진리를 밀어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리와 함께 있습니다. 선은 진리를 통하여 어떻게 선을 행해야 하는지를 알고, 진리는 선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문제는 둘 가운데 하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을 올바른 질서 안에서 결합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AC.362의 이단에 관한 설명도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신앙이라는 참된 것을 붙잡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하나의 참된 것을 질서 밖으로 끌어내어 첫째 자리에 놓자, 그 진리 자체가 생명의 근원에서 분리되었습니다. 빛을 붙잡았지만, 불꽃에서 떼어낸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사랑과 거기서 나온 환상이 그 빛을 계속 확증했습니다. 그래서 점점 더 밝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점점 더 추운 겨울의 빛이 되어 갔습니다.

 

이 점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빛’을 많이 가질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교리를 공부하고, AC를 읽고, 상응과 속뜻을 이해하고, 신학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상당히 정확하게 분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빛 때문에 이웃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판단하고 낮추며, 자기 지식을 자랑하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미워하게 된다면 그 빛에는 열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밝아 보여도 그것은 ‘겨울의 빛’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체어리티가 주도한다는 것은 진리를 적게 알고 대충 믿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깊이 진리를 배우되 ‘이 진리가 나를 어떻게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끄는가?’를 끊임없이 묻는 것입니다. AC를 읽는 목적도 AC에 관한 지식을 많이 축적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진리를 통하여 주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을 더 지혜롭게 사랑하며, 실제 삶에서 더 선한 쓰임을 행하게 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때 진리의 빛에는 체어리티의 열이 함께 있게 됩니다.

 

이제 AC.361-365 전체를 돌아보면 흐름이 아주 선명해졌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가인은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려 합니다.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고, 자기 사랑으로 그것을 확증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체어리티가 주도하는 본래의 질서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체어리티가 없으면 악이 마음의 문 앞에 있게 되지만,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그 악을 물리칩니다. 그리고 이제 AC.365에서는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에야 신앙이 참으로 신앙이 된다고 결론짓습니다.

 

그래서 가인과 아벨의 문제는 결국 ‘신앙이냐 체어리티냐’의 양자택일이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어떤 질서로 결합되어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아벨은 가인을 없애려 하지 않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 위에 서려고 할 때 둘의 결합은 깨집니다. 그리고 그 결합이 깨지면 신앙은 불꽃에서 떨어져 나온 겨울의 빛처럼 되어, 결국 그 안의 모든 것을 굳게 하고 죽게 합니다.

 

그러므로 AC.365의 겨울빛 비유는 창4의 가인 이야기를 아주 간결하게 압축합니다. ‘빛이 있는가?’만 물어서는 안 됩니다. ‘그 빛에 열이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진리를 알고 있는가?’만이 아니라 ‘그 진리가 내 안에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따뜻함으로 살아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체어리티의 불꽃에서 나오는 빛이라야 살아 있는 신앙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심화

1. 왜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하는가? - 겨울의 빛과 살아 있는 신앙

 

AC.365, 심화 1, ‘왜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하는가? - 겨울의 빛과 살아 있는 신앙’

AC.365.심화 1. 왜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하는가? - 겨울의 빛과 살아 있는 신앙 AC.361-365를 따라오면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단순히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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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6, 창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이다 -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다’(AC.366-3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spake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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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4, 창4:7,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 악을 물리치는 것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4 둘째로, ‘네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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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3

‘기름’(fat)은 천적인 것 자체를 의미하며,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천적인 것은 사랑에 속한 모든 것입니다. 신앙 역시 사랑에서 비롯될 때에는 천적입니다. 체어리티는 천적인 것입니다. 체어리티의 모든 선도 천적인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희생 제사에서 여러 종류의 기름으로 표상되었는데, 구체적으로는 간을 덮는 기름 또는 간에 붙은 꺼풀, 콩팥 위의 기름, 내장을 덮는 기름과 내장 위의 기름으로 표상되었습니다. 이것들은 거룩한 것이었으며 제단 위에서 번제로 드려졌습니다. (출29:13, 22; 레3:3-4, 14; 4:8-9, 19, 26, 31, 35; 8:16, 25) By “fat” is signified the celestial itself, which is also of the Lord. The celestial is all that which is of love. Faith also is celestial when it is from love. Charity is the celestial. All the good of charity is the celestial. All these were represented by the various kinds of fat in the sacrifices, and distinctively by that which covered the liver, or the caul; by the fat upon the kidneys; by the fat covering the intestines, and upon the intestines; which were holy, and were offered up as burnt offerings upon the altar. (Exod. 29:13, 22; Lev. 3:3, 4, 14; 4:8–9, 19, 26, 31, 35; 8:16, 25)

 

13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간 위에 있는 꺼풀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 불사르고, 22또 너는 그 숫양의 기름과 기름진 꼬리와 그것의 내장에 덮인 기름과 간 위의 꺼풀과 두 콩팥과 그것들 위의 기름과 오른쪽 넓적다리를 가지라 이는 위임식의 숫양이라 (출29:13, 22)

 

3그는 또 그 화목제의 제물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4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 14그는 그중에서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레3:3-4, 14)

 

8또 그 속죄 제물이 된 수송아지의 모든 기름을 떼어낼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9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내되, 19그것의 기름은 다 떼어 제단 위에서 불사르되, 26그 모든 기름은 화목제 제물의 기름 같이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같이 제사장이 그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31그 모든 기름을 화목제물의 기름을 떼어낸 것 같이 떼어내 제단 위에서 불살라 여호와께 향기롭게 할지니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35그 모든 기름을 화목제 어린 양의 기름을 떼 낸 것 같이 떼 내어 제단 위 여호와의 화제물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같이 제사장이 그가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레4:8-9, 19, 26, 31, 35)

 

16또 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간 꺼풀과 두 콩팥과 그 기름을 가져다가 모세가 제단 위에 불사르고, 25그가 또 그 기름과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간 꺼풀과 두 콩팥과 그 기름과 오른쪽 뒷다리를 떼어내고 (레8:16, 25)

 

그러므로 이것들을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의 음식’(bread of the offering by fire for a rest unto Jehovah)이라 했습니다. (레3:14, 16) They were therefore called the “bread of the offering by fire for a rest unto Jehovah.” (Lev. 3:14, 16)

 

14그는 그중에서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16제사장은 그것을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드리는 음식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레3:14, 16)

 

같은 이유로 유대 백성은 짐승의 어떤 기름도 먹지 못하도록 금지되었으며, 이것을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a perpetual statute throughout your generations)라 하였습니다. (레3:17; 7:23, 25) For the same reason the Jewish people were forbidden to eat any of the fat of the beasts by what is called “a perpetual statute throughout your generations.” (Lev. 3:17; 7:23, 25)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이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레3:17)

 

23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소나 양이나 염소의 기름을 먹지 말 것이요, 25사람이 여호와께 화제로 드리는 제물의 기름을 먹으면 그 먹는 자는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레7:23, 25)

 

그 이유는 그 교회가 내적인 것조차 인정하지 않았으며, 천적인 것은 더더욱 인정하지 않는 그러한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This was because that church was such that it did not even acknowledge internal, much less celestial things.

 

[2] ‘기름’(fat)이 천적인 것들과 체어리티의 선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선지서에서도 분명합니다.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That “fat” signifies celestial things, and the goods of charity, is evident in the prophets; as in Isaiah: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사55:2) Wherefore do ye weigh silver for that which is not bread, and your labor for that which satisfieth not? Attend ye diligently unto me, and eat ye that which is good, and let your soul delight itself in fatness. (Isa. 55:2)

 

예레미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And in Jeremiah: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며 내 복으로 내 백성을 만족하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31:14) I will fill the soul of the priests with fatness, and my people shall be satiated with my good, (Jer. 31:14)

 

여기서 ‘기름진 것’이 문자 그대로의 기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천적·영적 선을 뜻한다는 것은 매우 분명합니다. 시편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where it is very evident that fatness is not meant, but celestial spiritual good. So in David:

 

8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 9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시36:8-9) They are filled with the fatness of thy house, and thou makest them drink of the river of thy deliciousnesses. For with thee is the fountain of lives; in thy light we see light. (Ps. 36:8–9)

 

여기서 ‘살진 것’(fatness)과 ‘생명의 원천’(fountain of lives)은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을 의미하고, ‘복락의 강물’(river of deliciousnesses)과 ‘빛’(light)은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에 속한 영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Here “fatness” and the “fountain of lives” signify the celestial, which is of love; and the “river of deliciousnesses,” and “light,” the spiritual, which is of faith from love. Again in David: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시63:5) My soul shall be satiated with marrow and fatness, and my mouth shall praise thee with lips of songs, (Ps. 63:5)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기름진 것’(fat)은 천적인 것을, ‘찬송하는 입술’(lips of songs)은 영적인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영혼을 만족하게 한다고 하였으므로 천적인 것을 뜻한다는 것이 매우 분명합니다. 같은 이유로 땅의 처음 난 것인 첫 열매들도 ‘기름’(fat)이라고 합니다. (민18:12) where in like manner “fat” denotes the celestial, and “lips of songs” the spiritual. That it is what is celestial is very evident, because it will satiate the soul. For the same reason the first fruits, which were the firstborn of the earth, are called “fat.” (Num. 18:12)

 

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첫 소산 곧 제일 좋은 기름과 제일 좋은 포도주와 곡식을 네게 주었은즉 (민18:12)

 

[3] 천적인 것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와, 그보다도 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부 종류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모세가 백성 앞에서 읊은 노래에서는 그것들을 다음과 같이 총괄적으로 묘사합니다. As celestial things are of innumerable genera, and still more innumerable species, they are described in general in the song which Moses recited before the people:

 

소의 엉긴 젖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도다 (신32:14) Butter of kine, and milk of the flock, with fat of lambs and of rams, the sons of Bashan, and of goats, with the fat of the kidneys of wheat; and thou shalt drink the blood of the grape, unmixed. (Deut. 32:14)

 

이러한 표현들의 의미는 속뜻을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속뜻이 없다면 ‘소의 엉긴 젖’(butter of kine), ‘양의 젖’(milk of sheep), ‘어린 양의 기름’(fat of lambs), ‘숫양과 염소의 기름’(fat of rams and goats), ‘바산의 아들들’(sons of Bashan), ‘밀의 콩팥의 기름’(fat of the kidneys of wheat), ‘포도의 피’(blood of the grape)와 같은 표현들은 단지 말들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표현 하나하나는 천적인 것들의 종류와 세부 종류를 의미합니다. It is impossible for anyone to know the signification of these expressions except from the internal sense. Without the internal sense, such expressions as the “butter of kine,” the “milk of sheep,” the “fat of lambs,” the “fat of rams and goats,” the “sons of Bashan,” the “fat of the kidneys of wheat,” and the “blood of the grape,” would be words and nothing more, and yet they all and each signify genera and species of celestial things.

 

해설

AC.353은 앞의 AC.350에서 아벨이 드린 ‘기름진 것’이 ‘천적인 것 자체이며,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다’고 한 내용을 자세히 풉니다. 첫 문장부터 핵심은 분명합니다. ‘천적인 것은 사랑에 속한 모든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기름’은 단순히 풍요롭고 좋은 것을 막연하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속한 천적인 선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앞 AC.352의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인간에게서 오는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라는 선언과 연결됩니다. 아벨이 드린 ‘기름’의 생명도 인간 자신의 선함이나 공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선에 있습니다.

 

그런데 곧이어 매우 중요한 말이 나옵니다. ‘신앙 역시 사랑에서 비롯될 때에는 천적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인과 아벨을 통하여 살펴본 신앙과 사랑의 관계를 정확하게 정리해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신앙을 낮추거나 배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반대로 신앙이 사랑에서 비롯되고 사랑과 결합되어 있다면 그 신앙 역시 천적인 성질을 가집니다. 이어 ‘체어리티는 천적인 것입니다. 체어리티의 모든 선도 천적인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사랑,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 체어리티, 체어리티의 선은 서로 경쟁하는 별개의 종교 요소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 안에서 서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문제는 ‘신앙을 가졌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그 생명인 사랑에서 떼어 내어 독립적인 것으로 만든 데 있습니다.

 

이 때문에 희생 제사에서는 여러 종류의 기름이 특별히 거룩한 것으로 구별되어 제단 위에서 불살라졌습니다. 출29장과 레3장, 4장, 8장에는 간을 덮는 기름, 콩팥 위의 기름, 내장을 덮는 기름 등이 매우 세밀하게 규정되어 있습니다. 문자만 보면 왜 이런 신체 부위의 기름까지 세세하게 구별하는지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53은 그 기름들이 천적인 것과 체어리티의 선을 표상했기 때문에 거룩하게 여겨졌다고 설명합니다. 다만 이 번호만을 근거로 간의 기름은 정확히 어떤 사랑이고 콩팥의 기름은 또 어떤 선이라고 세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직접 밝히는 범위는 여러 종류의 기름이 천적인 것들을 표상했으며, 그것들이 거룩하여 제단 위에 드려졌다는 데 있습니다.

 

그 기름들이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의 음식’이라고 불린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자연적인 음식이나 기름을 필요로 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외적인 제사가 내적인 사랑과 선을 표상하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된 것입니다. AC.349에서 이미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고, 그것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제단 위 기름의 거룩함은 물질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표상하는 천적인 사랑과 선에 있습니다. 자연적인 제물은 그 내적 실재를 담아 보여 주는 표상적 그릇입니다.

 

같은 이유로 유대 백성이 기름을 먹지 못하도록 한 규례도 설명됩니다. AC.353은 그 이유를 매우 강하게 말합니다. 그 교회가 ‘내적인 것조차 인정하지 않았으며, 천적인 것은 더더욱 인정하지 않는’ 성격의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모든 유대인 개인의 내면을 일률적으로 단정하는 말로 확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표상교회로서의 그 교회의 일반적 성격과 기능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장 내적인 사랑의 선을 표상하는 기름을 인간이 자기 것으로 취하는 대신 여호와께 속한 것으로 구별한 규례는, 표상적으로 보아 천적인 선이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속한다는 질서를 보존합니다.

 

[2]에서 스베덴보리는 제사법에서 선지서와 시편으로 이동하여 ‘기름진 것’이 천적인 선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여러 말씀으로 확인합니다. 사55:2에서는 ‘기름진 것’으로 영혼이 즐거움을 얻고, 렘31:14에서는 제사장의 마음이 ‘기름’으로 흡족해지는 것이 주님의 선으로 백성이 만족하는 것과 나란히 놓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기름은 문자적인 지방이나 풍성한 음식만을 뜻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연이어 인용하는 목적은 각각의 구절에 별개의 교리를 붙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씀 안에서 ‘기름’과 ‘기름진 것’이 영혼을 만족시키는 천적·영적 선을 의미한다는 것을 하나의 논증으로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시36:8-9은 그 관계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살진 것’과 ‘생명의 원천’을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으로, ‘복락의 강물’과 ‘빛’을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에 속한 영적인 것으로 풀이합니다. 여기서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서로 끊어진 두 세계가 아닙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비롯되는 질서 안에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라는 말씀은 이 문맥에서 인간의 신앙과 진리의 빛이 독립적인 자기 지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신앙 역시 사랑에서 비롯될 때에는 천적’이라는 AC.353 첫머리의 선언과도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시63:5에서도 ‘기름진 것’은 영혼을 만족시키는 천적인 것을, ‘찬송하는 입술’은 영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민18:12에서는 땅의 첫 열매까지 ‘기름’이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앞의 AC.352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처음 난 것이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을 의미했고, 여기서는 기름이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아벨이 ‘양 떼의 처음 난 것과 그 기름진 것’을 드렸다는 짧은 표현 안에는 두 가지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거룩한 것도 주님께 속하고, 그 거룩함 안에 있는 사랑의 선과 생명도 주님께 속합니다. 아벨의 예배는 인간이 자기 안에서 만들어 낸 선을 주님께 자랑스럽게 내놓는 예배가 아니라, 자기 안의 모든 참된 선과 사랑의 근원이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예배입니다.

 

[3]에서 신32:14가 인용되면서 AC.353은 한 단계 더 넓은 원리를 밝힙니다. ‘천적인 것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와, 그보다도 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부 종류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노래에는 ‘소의 엉긴 젖’, ‘양의 젖’, ‘어린 양의 기름’, ‘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 ‘밀의 콩팥의 기름’, ‘포도의 피’와 같이 매우 다양한 자연적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각각이 천적인 것들의 서로 다른 종류와 세부 종류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다만 AC.353은 각각이 정확히 어느 종류의 천적 선을 뜻하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소의 엉긴 젖은 이것’, ‘양의 젖은 저것’, ‘바산의 숫양은 이것’이라는 식으로 우리가 상응표를 더 만들어 붙이는 것은 스베덴보리보다 앞서 나가는 해석이 됩니다.

 

오히려 여기서 붙들어야 할 더 큰 원리는 천적인 사랑과 선의 헤아릴 수 없는 다양성입니다. 우리는 ‘사랑’, ‘선’, ‘체어리티’라는 말을 하나의 단순한 성질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실제 삶에서 무수한 형태와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한 사람을 위로하는 선과 잘못을 바로잡아 주는 선, 어린아이를 돌보는 선과 공동체의 질서를 지키는 선, 진리를 가르치는 선과 말없이 필요한 일을 감당하는 선은 모두 선에 속하면서도 그 질과 쓰임은 서로 다릅니다. 이것은 AC.353이 직접 각각의 사례를 열거한 것은 아니지만, ‘천적인 것들의 헤아릴 수 없는 종류와 세부 종류’라는 원리를 우리의 삶에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예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획일적인 하나의 행동 양식이 아니라 각 사람과 공동체의 상태와 쓰임에 따라 무수한 형태로 받아들여집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상응을 읽는 방법에도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기름 = 사랑’, ‘빛 = 신앙’과 같은 기본적인 대응을 아는 것은 유익하지만, 상응을 단순한 암호표처럼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AC.353 자체가 기름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천적인 것에는 헤아릴 수 없는 종류와 세부 종류가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자연물이 어떤 문맥에서, 어떤 다른 표상들과 함께, 어떤 교회적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상응은 자연물에 영적 단어 하나를 기계적으로 붙이는 방식이 아니라, 천국의 무수한 질서와 인간의 내적 상태가 자연계의 형상 안에 표현되는 살아 있는 관계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신32:14의 표현들을 두고 ‘속뜻이 없다면 단지 말들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밀의 콩팥의 기름’이나 ‘포도의 피’와 같은 표현은 문자적으로만 보면 매우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53은 그러한 낯선 세부조차 말씀 안에서 무의미하게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천적인 실재의 종류와 세부 종류를 담고 있다고 봅니다. 이것이 문자적 의미가 무가치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의 문자 안에 속뜻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 문자적 형상 하나하나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말씀의 속뜻은 문자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문자 안에 담긴 천국의 실재를 열어 보여 줍니다.

 

다시 창4:4의 아벨에게 돌아오면 이 긴 설명의 목적이 선명해집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양 떼의 처음 난 것’은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이며, ‘기름’은 역시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 곧 사랑에 속한 선입니다. 따라서 아벨의 제물은 ‘내가 좋은 것을 만들어 주님께 드린다’는 인간 중심의 예배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모든 참된 사랑과 선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예배를 나타냅니다. 가인에게도 소산과 제물이 있었지만 그것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행위와 예배였습니다. 반면 아벨의 제물에는 체어리티와 사랑의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의 근원이 주님께 있다는 인정이 있습니다. 두 제물의 차이는 자연적인 재료가 아니라 내적 생명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AC.353의 핵심을 단지 ‘기름은 천적인 것을 의미한다’는 상응 하나로만 기억해서는 부족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천적인 것이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이며, 그 사랑의 근원이 오직 주님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신앙도 사랑에서 비롯될 때 살아 있고 천적이며, 체어리티와 체어리티의 모든 선 역시 그 사랑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과 예배와 행위 안에 ‘기름’이 있는가를 묻는다는 것은, 그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의 생명이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진리를 많이 알고 예배를 충실히 드리며 많은 일을 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 안에서 주님의 사랑이 이웃을 향한 선과 쓰임으로 살아 움직이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아벨이 드린 ‘기름’은 바로 그 살아 있는 사랑의 생명을 보여 줍니다.

 

 

 

AC.354, 창4:4, ‘주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신 이유 -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4‘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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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2, 창4:4, ‘왜 장자가 거룩했는가 -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2‘양 떼의 처음 난 것’(firstlings of the flock, ‘양의 첫 새끼’)이 오직 주님께만 속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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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2

‘양 떼의 처음 난 것’(firstlings of the flock, ‘양의 첫 새끼’)이 오직 주님께만 속한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표상교회에서 처음 난 것, 곧 장자에 관한 규례에서 분명합니다. 처음 난 것은 모두 거룩했는데, 이는 그것들이 오직 홀로 ‘장자’(firstborn)이신 주님을 가리켰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신앙이 ‘장자’입니다.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인간에게서 오는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주님만이 ‘장자’이십니다. 이것은 고대교회들에서 사람과 짐승의 처음 난 것을 여호와께 거룩한 것으로 드림으로써 표상되었습니다(출13:2, 12, 15). That the “firstlings of the flock” signify that which is of the Lord alone is evident from the firstlings or firstborn in the representative church, which were all holy, because they had relation to the Lord, who alone is the “firstborn.”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are the “firstborn.” All love is of the Lord, and not one whit of it is of man, therefore the Lord alone is the “firstborn.” This was represented in the ancient churches by the firstborn of man and of beast being sacred to Jehovah; (Exod. 13:2, 12, 15)

 

2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12너는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과 네게 있는 가축의 태에서 처음 난 것을 다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15그때에 바로가 완악하여 우리를 보내지 아니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모든 것은 사람의 장자로부터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다 죽이셨으므로 태에서 처음 난 모든 수컷은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려서 내 아들 중에 모든 처음 난 자를 다 대속하리니 (출13:2, 12, 15)

 

또한 속뜻으로 사랑을 의미하는 레위 지파가, 비록 속뜻으로 신앙을 의미하는 르우벤과 시므온보다 나중에 태어났지만, 모든 장자를 대신하여 받아들여지고 제사장직을 맡게 된 것으로도 표상되었습니다(민3:40-45; 8:14-20). and by the tribe of Levi, which in the internal sense signifies love—though Levi was born after Reuben and Simeon who in the internal sense signify faith—being accepted instead of all the firstborn, and constituting the priesthood. (Num. 3:40–45; 8:14–20)

 

40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태어난 남자를 일 개월 이상으로 다 계수하여 그 명수를 기록하라 41나는 여호와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에 레위인을 내게 돌리고 또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 중 모든 처음 태어난 것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내게 돌리라 42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를 계수하니 43일 개월 이상으로 계수된 처음 태어난 남자의 총계는 이만 이천이백칠십삼 명이었더라 4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45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에 레위인을 취하고 또 그들의 가축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취하라 레위인은 내 것이라 나는 여호와니라 (민3:40-45)

 

14너는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구별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내게 속할 것이라 15네가 그들을 정결하게 하여 요제로 드린 후에 그들이 회막에 들어가서 봉사할 것이니라 16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게 온전히 드린 바 된 자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초태생 곧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 내가 그들을 취하였나니 17이스라엘 자손 중에 처음 태어난 것은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내게 속하였음은 내가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태어난 자를 치던 날에 그들을 내게 구별하였음이라 18이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 레위인을 취하였느니라 19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취하여 그들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주어 그들로 회막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봉사하게 하며 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성소에 가까이 할 때에 그들 중에 재앙이 없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20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께서 레위인에 대하여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다 따라 레위인에게 행하였으되 곧 이스라엘 자손이 그와 같이 그들에게 행하였더라 (민8:14-20)

 

주님께서 그분의 인성에 관하여 모든 것의 장자이심을 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Of the Lord as the firstborn of all, with respect to his human essence, it is thus written in David:

 

26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27내가 또 그를 장자로 삼고 세상 왕들에게 지존자가 되게 하며 (시89:26-27) He shall call me, my Father, my God, and the rock of my salvation. I will also make him my firstborn, high above the kings of the earth. (Ps. 89:26–27)

 

또 계시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And in John: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계1:5) Jesus Christ the firstborn of the dead, and the prince of the kings of the earth. (Rev. 1:5)

 

예배에서 처음 난 것들은 주님을 의미하고, 교회의 처음 난 것은 신앙을 의미한다는 것을 유의해야 합니다. Observe that the firstborn of worship signify the Lord, and the firstborn of the church, faith.

 

해설

AC.352는 앞의 AC.350에서 ‘양 떼의 처음 난 것’이 왜 ‘오직 주님께만 속한 것’을 의미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합니다. 처음 난 것, 곧 장자가 거룩한 까닭은 자연적인 출생 순서에서 첫째라는 사실 자체에 어떤 신성함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표상교회에서 처음 난 것은 궁극적으로 오직 홀로 ‘장자’이신 주님을 가리켰기 때문에 거룩했습니다. 그래서 출13:2, 12, 15에서는 사람과 짐승의 처음 난 것을 여호와께 거룩히 구별하여 돌리라고 합니다. ‘이는 내 것이니라’라는 말이 반복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처음 난 것의 거룩함은 인간이나 짐승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표상하는 실재, 곧 모든 거룩함과 생명과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에게 있습니다.

 

이 번호의 중심 문장은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신앙이 장자입니다’라는 말과 그 뒤에 이어지는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인간에게서 오는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라는 선언입니다. 여기서 ‘거기서 비롯된’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에서 신앙은 사랑과 독립된 별개의 생명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 안에서 신앙에 속한 것들을 퍼셉션으로 알았으며, 그러므로 신앙은 사랑에서 비롯되고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인을 통하여 살펴본 문제와도 정확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 자체가 존재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신앙을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하고 점차 사랑에서 분리하여 독립적인 것으로 만든 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말을 인간에게 실제 사랑이나 체어리티가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실제로 이웃을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며 선을 행합니다. 다만 그 사랑의 최초 근원과 생명이 인간의 proprium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사랑과 선을 끊임없이 주시며, 인간은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 마치 자기에게서 사랑하고 행하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참된 체어리티는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수동성이 아니라, 실제로 사랑하고 선을 행하면서도 그 선의 생명을 자기 공로로 돌리지 않는 상태입니다. ‘내가 이만큼 사랑했고 이만큼 선을 행했다’는 자기 의보다 ‘이 선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라는 인정이 깊어지는 것이 참된 질서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아벨이 ‘양 떼의 처음 난 것’을 드렸다는 말도 단순히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바쳤다는 도덕적 교훈보다 훨씬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의미하고, 그가 드린 처음 난 것은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체어리티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 안의 참된 사랑과 선을 자기 고유의 것으로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주신 것을 우리가 소유했다가 다시 주님께 돌려드린다는 식으로 이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선을 실제로 행하면서도 그 선의 생명과 근원이 처음부터 주님께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처음 난 것은 여호와의 것’이라는 표상이 가르치는 중요한 내적 질서입니다.

 

AC.352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레위 지파에 관한 설명입니다. 자연적인 출생 순서에서 야곱의 장자는 르우벤이고, 그다음이 시므온이며, 레위는 셋째입니다. 그런데 속뜻에서는 레위가 사랑을, 르우벤과 시므온이 신앙에 속한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주님께서는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 레위인을 취하시고 그들에게 성막 봉사의 직무를 맡기셨습니다(민3:40-45; 8:14-20). AC.352가 이 말씀들을 인용하는 이유는 단순히 레위 지파의 제사장직 기원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자연적인 출생 순서와 영적인 내적 질서가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내적인 생명의 질서에서는 사랑이 신앙의 생명과 근원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사랑이 먼저다’라는 말을 시간적인 순서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언제 사랑을 느끼고 언제 신앙의 진리를 배우는가 하는 시간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후대의 영적 인간에게는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중요한 길이 됩니다. 그러나 진리가 먼저 의식에 들어온다고 해서 진리가 선보다 본질적으로 우위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적·생명적 질서에서는 선과 사랑이 진리에 생명을 줍니다. 이것이 르우벤과 시므온보다 나중에 태어난 레위가 모든 장자를 대신하는 표상을 통하여 드러나는 핵심입니다. 여기서는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와 후대 영적 인간의 거듭남 순서를 하나의 시간 공식으로 섞기보다, ‘외적으로 먼저 나타나는 것’과 ‘내적으로 생명을 주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앞의 AC.342와도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르우벤이 신앙을, 시므온이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을, 레위가 체어리티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순서를 ‘신앙 → 행위 → 체어리티’라는 자동적인 세 단계 공식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AC.352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연적인 출생에서는 르우벤과 시므온이 먼저이지만, 사랑을 의미하는 레위가 모든 장자를 대신합니다. 이것은 신앙이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신앙이 참된 신앙으로 살아 있으려면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랑과 신앙은 서로 경쟁하여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제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을 이루어야 합니다. 다만 신앙이 사랑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신앙에 생명을 주고, 신앙의 진리는 그 사랑이 무엇이 참된 선인지를 알고 바르게 행하도록 섬깁니다.

 

이제 AC.352 마지막의 중요한 주의 사항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예배에서 처음 난 것들은 주님을 의미하고, 교회의 처음 난 것은 신앙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상응을 고정된 암호표처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좋은 예이기도 합니다. ‘장자’라는 말이 나온다고 언제나 기계적으로 하나의 의미만 대입할 수 없습니다. 예배에서 처음 난 것을 여호와께 거룩하게 드리는 표상에서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주님을 가리킵니다. 반면 교회에서 생겨나는 ‘처음 난 것’이라는 측면에서는 신앙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AC.338에서 가인을 태고교회의 첫 번째 자손, 곧 신앙이라고 한 것도 이 두 번째 의미와 연결됩니다. 그러나 교회의 처음 난 것이 신앙이라고 해서 신앙이 사랑보다 독립적이거나 우월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로 그 오해가 가인의 길입니다.

 

시89:26-27과 계1:5의 인용은 이 모든 ‘처음 난 것’의 표상이 궁극적으로 누구를 향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특히 주님의 인성에 관하여 그분이 모든 것의 장자이심을 말합니다. 시편은 ‘내가 또 그를 장자로 삼고 세상 왕들에게 지존자가 되게 하며’라고 하고,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분이라고 부릅니다. 이 두 말씀은 각각 별도의 장자론을 전개하기 위해 인용된 것이 아니라, 예배에서 처음 난 것이 왜 궁극적으로 주님을 표상하는지를 확증합니다. 따라서 출13장, 민3장과 8장, 시89편, 계1장의 여러 인용은 모두 ‘처음 난 것의 거룩함은 주님에게서 비롯된다’는 하나의 중심을 향합니다.

 

이렇게 보면 AC.352는 가인과 아벨의 대조를 한층 더 깊게 합니다. 가인의 길은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을 사랑과 분리하여 그 자체로 독립시키는 길이었습니다. 반면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그가 드리는 것은 ‘양 떼의 처음 난 것’, 곧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입니다. 따라서 아벨의 제물에는 ‘내 안에 있는 참된 사랑과 선의 근원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다’라는 내적 인정이 들어 있습니다. 가인이 신앙을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붙들었다면, 아벨의 예배는 선과 사랑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질서를 인정합니다. 그래서 두 제물의 차이는 단지 체어리티가 있느냐 없느냐뿐 아니라, 영적 생명의 근원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이 원리는 우리의 AC 공부와 신앙생활에도 매우 직접적입니다. 말씀의 속뜻을 알고 상응을 이해하며 신앙과 체어리티, 퍼셉션과 거듭남의 질서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지식 때문에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깊은 진리를 알고 있다고 여기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자기 것으로 붙들 위험에 놓입니다. 반대로 진리를 알수록 자신의 선함과 지혜를 자기에게 돌리지 않고, 모든 참된 사랑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께 있음을 더 깊이 인정하게 된다면 그 지식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참된 지식은 인간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더욱 바라보게 합니다.

 

결국 AC.352의 중심은 매우 분명합니다. ‘왜 처음 난 것이 거룩한가?’ 그것이 자연적인 첫째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 속한 것을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왜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신앙이 장자인가?’ 모든 사랑의 근원이 주님이시며 참된 신앙은 그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왜 장자가 아닌 레위가 모든 장자를 대신하는가?’ 자연적인 출생 순서보다 사랑과 신앙의 내적 질서가 더 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왜 주님만이 참으로 장자이신가?’ 모든 사랑과 선과 거룩함의 처음과 근원이 오직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이 양 떼의 처음 난 것을 드리는 장면은 결국 인간 안에 있는 모든 참된 선의 생명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고 주님께 인정하는 예배를 보여 줍니다. AC.352가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도 여기에 있습니다. ‘내 안에서 발견하는 선과 사랑의 근원을 나는 누구에게 돌리고 있는가?’

 

 

 

AC.353, 창4:4, 아벨이 드린 ‘기름’은 무엇을 뜻하는가 -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3‘기름’(fat)은 천적인 것 자체를 의미하며,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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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1, 창4:4, ‘체어리티란? - 이웃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여기는 사랑’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1‘아벨’(Abel)이 체어리티를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체어리티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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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7

‘세월이 지난 후에’(end of days, ‘날들의 끝에’)가 ‘시간이 흐른 뒤’를 뜻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합니다. 처음에는, 그리고 그 교리 안에 단순함이 있었을 때에는, 여기서 ‘가인’(Cain)이라 하는 교리가 후에 그렇게 된 것만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그들이 자기들의 자손을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a man Jehovah, ‘여호와인 사람’)라고 했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합니다. 따라서 처음에는 신앙이 ‘날들의 끝에’, 곧 시간이 흐른 뒤에 이르렀을 때만큼 사랑에서 멀리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참된 신앙의 모든 교리에서 흔히 일어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That by the “end of days” is signified in process of time, is evident to all. At first, and while there was simplicity in it, the doctrine here called “Cain” does not appear to have been so unacceptable as it became afterwards, as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y called their offspring a “man Jehovah.” Thus at first faith was not so far separated from love as at the “end of days,” or in process of time; as is wont to be the case with every doctrine of true faith.

 

해설

AC.347은 바로 앞 AC.346의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표현을 설명하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의 분리가 한순간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심해졌다는 사실을 밝혀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처음에 그 교리 안에 ‘단순함’이 있었을 때에는 여기서 ‘가인’이라 하는 교리가 후에 그렇게 된 것만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처음에는 신앙이 시간이 흐른 뒤에 이르렀을 때만큼 사랑에서 멀리 분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가인 해석을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 줍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의미하지만, 그 분리가 처음부터 마지막 상태와 똑같은 정도였던 것은 아닙니다. 이미 신앙을 사랑 안에 있는 것으로만 보지 않고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구별하여 인식하는 방향이 시작되었지만, 처음에는 사랑과의 거리가 아직 그렇게 멀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거리가 더욱 벌어졌고, 결국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행위와 예배가 나타나는 상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단순함’(simplicity)을 단순히 지식이 적거나 사고가 미숙한 상태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47의 문맥에서는 아직 신앙에 관한 교리가 자기 자신을 독립적인 것으로 강하게 세우면서 사랑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초기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이 초기 상태를 곧 ‘가인은 처음에는 온전한 참된 신앙이었다’고 표현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AC.338에서 이미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신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기 시작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AC.340에서도 이전에는 사랑 안에서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꺼내어 구별된 교리로 만들기 시작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성격은 처음부터 이미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다만 AC.347이 새롭게 알려 주는 것은 그 분리가 처음부터 최종적인 형태로 완성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점차 심화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서 ‘구별’과 ‘분리’를 다시 정확히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과 사랑을 개념적으로 구별하여 이해하는 것 자체가 악은 아닙니다. 특히 후대의 인간에게는 진리를 배우고 신앙에 관한 교리를 분명하게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구별된 신앙이 사랑과 결합되어 있어야 한다는 본래 질서를 잃고, 점차 사랑과 별개로 존재할 수 있는 독립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데 있습니다. AC.347의 표현을 빌리면 문제는 신앙이 사랑에서 점점 ‘멀리 분리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간격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신을 사랑과 체어리티에 의해 살아 있게 되는 것으로 보지 않고 그 자체로 충분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하면, 그 거리는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커질 수 있습니다. 결국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밀어내는 상태에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표현은 바로 이 점에서 중요합니다. AC.346에서는 이 말을 우선 단순하게 ‘시간이 흐른 뒤’라고 설명했습니다. AC.347은 이제 그 시간이 흐르는 동안 신앙과 사랑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신앙이 후대만큼 사랑에서 멀리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분리가 심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창4:3에서 가인은 ‘땅의 소산’을 여호와께 제물로 가져옵니다. AC.346에서 이것은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와 거기에서 나온 예배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세월이 지난 후에’는 단순히 달력상의 어느 기간이 지나갔다는 사실만을 알려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이 문맥에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의 상태가 시간이 흐르면서 어떻게 더 멀리 사랑에서 분리되었는지를 이해하게 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초기 상태가 후대만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는 아니었다는 근거로 그들이 자기들의 자손을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했다는 사실을 듭니다. 이것은 앞의 AC.338과 AC.340에서 이미 자세히 살펴본 창4:1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표현을 근거로 ‘초기의 가인은 완전한 신앙이었다’고 되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직 신앙이 사랑에서 아주 멀리 떨어지지 않았고, 그들이 신앙에 속한 것을 주님과 관련하여 인식하는 상태가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상태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한 덩어리의 완성된 악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신앙을 따로 인식하기 시작한 작은 분리가 있었고, 그 분리가 점차 깊어져 나중에는 신앙이 체어리티와 멀리 떨어지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AC.347의 마지막 문장은 이 문제를 가인이라는 특정 교리에만 한정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참된 신앙의 모든 교리에서 흔히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엄중한 경고입니다. 참된 교리는 처음부터 거짓이기 때문에 타락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신앙에 속한 것을 담고 있는 교리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사람들의 상태에 따라 본래의 사랑과 생명에서 점점 멀어질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주님을 더 잘 알고, 말씀을 더 바르게 이해하며, 이웃에게 선을 행하도록 돕기 위해 교리를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관심이 ‘이 진리에 따라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누가 이 교리를 더 정확하게 알고 고백하는가?’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 교리가 자기 집단의 우월성을 증명하거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용된다면, 교리의 문장은 그대로 남아 있어도 그것을 움직이는 사랑의 성질은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교리가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타락한다거나, 교리를 명료하게 정리하고 보존하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문제는 교리 그 자체보다 그것과 사랑의 관계입니다. 참된 교리를 보존한다는 것은 문장을 정확하게 전승하는 것과 함께 그 교리가 지향하는 생명도 보존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고, 자기 안의 악을 죄로 보아 피하게 하며,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와 실제 쓰임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교리를 정확하게 보존하면서도 그 교리가 체어리티와 결합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리적 정확성을 지키는 일과 사랑을 지키는 일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 함께 가야 합니다. 진리는 선을 보호하고 방향을 주며, 선은 진리에 생명을 줍니다.

 

이 원리는 개인의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경고가 됩니다. 처음 말씀을 배우거나 AC를 공부할 때에는 ‘주님을 더 알고 싶다’, ‘내 삶을 고치고 싶다’, ‘말씀의 속뜻을 통하여 주님의 뜻을 더 잘 따르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식이 쌓이고 익숙해지면서 어느 순간 관심이 ‘나는 이것을 안다’는 데로 옮겨 갈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가진 지식을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자신의 영적 우월성을 확인하는 데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리 자체가 거짓으로 변한 것은 아니지만, 그 진리와 우리의 사랑 사이의 관계가 달라진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AC.347은 다른 교회나 다른 시대의 교리 타락을 분석하는 도구가 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의 신앙을 살피는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AC 번역과 해설 작업에도 이 원리는 매우 직접적입니다. 처음에는 말씀의 속뜻을 더 정확하게 알고 그것을 삶과 목회에 사용하기 위해 시작한 공부가 시간이 지나면서 ‘정확한 번역’, ‘정확한 상응’, ‘정확한 교리’를 갖추는 것 자체에만 만족하게 될 위험은 언제든 있습니다. 물론 정확성은 중요하며 결코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정확성이 우리를 주님께 더 가까이 이끌고, 자기 안의 proprium을 더 분명히 보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는 체어리티와 쓰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AC.344에서 말한 신앙의 목적을 놓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진리를 보존하는 일과 그 진리의 생명을 보존하는 일을 함께 붙들어야 합니다.

 

결국 AC.347이 보여 주는 것은 ‘처음의 상태가 끝의 상태를 자동으로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은 처음부터 후대와 똑같이 사랑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을 사랑과 별개의 것으로 세우는 방향이 계속되면서 그 거리는 점점 커졌습니다. 그래서 ‘세월이 지난 후에’ 이르러서는 체어리티가 없는 행위와 예배가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신앙의 생명을 한 번 얻고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진리는 계속 사랑을 향하고, 신앙은 계속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AC.347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는 처음에 무엇을 믿었는가?’에 머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흐른 지금, 내가 가진 신앙은 사랑과 더 가까워지고 있는가, 아니면 점점 멀어지고 있는가?’입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짧은 표현 속에 바로 이 엄중한 자기 성찰이 담겨 있습니다.

 

 

 

AC.348, 창4:3, 가인의 ‘땅의 소산’ - 체어리티 없는 죽은 행위와 살아 있는 열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8‘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이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분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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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6, 창4:3,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도 행위와 예배는 나올 수 있습니다’(AC.346-349)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창4:3) AC.346‘날들의 끝에’(end of days)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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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창4:2)

 

AC.341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은 체어리티이며, ‘아벨’(Abel)과 ‘형제’(brother)가 이를 의미합니다. ‘양 치는 자’(shepherd of the flock)는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을 나타내고, ‘농사하는 자’(tiller of the ground)는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비록 그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아무리 깊이 있다 하더라도 그러하며,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The second offspring of the church is charity, signified by “Abel” and “brother”; a “shepherd of the flock” denotes one who exercises the good of charity; and a “tiller of the ground,” is one who is devoid of charity, however much he may be in faith separated from love, which is no faith.

 

해설

AC.341은 매우 짧지만 가인과 아벨을 이해하는 핵심 구조를 한 문장 안에 압축하고 있습니다. 바로 앞 AC.338-340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첫 번째 자손을 ‘신앙’이라고 하고 그것을 ‘가인’으로 나타냈습니다. 이제 창4:2로 넘어오면서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은 ‘체어리티’이며, 그것을 ‘아벨’과 ‘형제’가 의미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속뜻에서 처음부터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특히 눈여겨볼 것은 스베덴보리가 체어리티를 ‘아벨’뿐 아니라 ‘형제’도 의미한다고 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이는 사건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본래 서로 남남인 두 가지가 아니라 함께 있어야 하는 것들이며, 체어리티는 신앙의 ‘형제’입니다. 따라서 가인이 자기 형제 아벨을 죽인다는 것은 결국 신앙이 자신과 결합되어 있어야 할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첫 번째 자손은 신앙이고 두 번째 자손은 체어리티’라는 말을 시간적 또는 영적 우선순위로 곧바로 바꾸어 읽어서는 안 됩니다. 마치 태고교회에서 먼저 신앙이 생긴 뒤 나중에 체어리티가 생겼다는 뜻이 아닙니다. AC.337에서 이미 살펴보았듯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먼저이고, 그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퍼셉션을 받는 질서였습니다. AC.338의 ‘첫 번째 자손’과 AC.341의 ‘두 번째 자손’은 그 본래의 천적 질서를 뒤집어 신앙이 본질적으로 체어리티보다 먼저라는 교리를 세우기 위한 표현이 아닙니다. AC.339에서 설명한 것처럼 교회에 속한 것들이 서로 어떻게 파생되고 관계를 이루는지를 출생과 계보의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도 태고교회의 고유한 퍼셉션의 질서와 후대 영적 인간의 거듭남의 질서를 뒤섞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벨은 ‘양 치는 자’였는데, 스베덴보리는 이를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풀이합니다. 여기에는 체어리티의 매우 중요한 성격이 담겨 있습니다. 체어리티는 단순히 마음속에서 이웃에게 좋은 감정을 품는 데 머물지 않고 실제로 선을 행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그렇다고 체어리티를 단순한 외적 선행과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어떤 행동이 겉으로 선해 보인다는 것만으로 그것이 곧 체어리티인 것은 아닙니다. 체어리티의 선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받아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실제 쓰임을 행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양 치는 자’라는 표현에서 AC.341이 직접 강조하는 것은 양이나 목축에 관한 세부 상응보다 ‘체어리티의 선을 행한다’는 사실입니다. 체어리티는 살아 움직이고 실제 삶으로 나타나는 선입니다.

 

반면 가인은 ‘농사하는 자’인데, 스베덴보리는 이를 매우 강하게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을 농사 자체가 부정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에서 ‘땅’은 문맥에 따라 좋은 의미로도 사용되며, 이후 AC에서는 그 의미가 훨씬 세밀하게 설명됩니다. AC.341에서 중요한 것은 ‘농사하는 자’라는 표현이 가인이라는 상태와 결합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가인은 앞에서 보았듯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구별하여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정하기 시작한 교리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제 그 신앙이 체어리티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아무리 깊이 들어가 있더라도 체어리티가 없다면 결국 체어리티 없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AC.341의 가장 중요한 문장이 나옵니다.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단순히 ‘불완전한 신앙’이나 ‘조금 부족한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신앙의 본질적인 생명을 잃기 때문에 그것은 더 이상 참된 의미에서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문제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AC.340에서는 본래 마음에 새겨져 있던 신앙에 속한 것을 따로 구별하여 교리로 정리하고, 그것을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상태를 보았습니다. 그때에는 아직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지 쉽게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41은 그 분리의 본질을 이미 드러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고 여기는 순간, 사람이 붙들고 있는 것은 이름으로는 신앙일 수 있어도 생명을 가진 참된 신앙은 아닙니다.

 

이것은 교리나 신앙고백 자체가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후대의 영적 인간에게는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앞의 AC.337에서도 오늘날에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며,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신앙이 먼저 배워지는가?’가 아니라 ‘그 신앙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입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고, 체어리티와 결합하며, 마침내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 역시 진리를 불필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주님의 진리를 통하여 무엇이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것인지를 배우고 분별합니다.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를 서로 경쟁시키면서 ‘신앙이 중요한가, 사랑이 중요한가?’라고 묻는 것 자체가 이 둘의 본래 관계를 놓치게 할 수 있습니다. 둘은 ‘형제’이며, 진리는 선을 섬기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서로 사랑하는 부부에게 약속과 원칙은 필요할 수 있습니다. 약속을 지키고 서로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하는 것은 사랑을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사랑 자체는 사라지고 ‘나는 정해진 규칙을 모두 지켔으므로 좋은 배우자다’라는 주장만 남는다면, 규칙의 외형은 남아 있어도 관계의 생명은 크게 훼손된 것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도 이와 비슷합니다. 교리를 알고 그것을 참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신앙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분리된 채 자기 완결적인 것으로 남는다면 교리적 형식은 유지되어도 신앙의 생명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341은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도 신앙이기는 하지만 조금 부족하다’고 하지 않고 단호하게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이 기준은 다른 사람의 신앙을 판정하기 위한 잣대보다 먼저 우리 자신의 신앙을 살피는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하며, 신학적인 오류를 잘 찾아내는 것 자체는 귀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참된 신앙인지는 그 진리가 우리 안에서 어떤 생명을 이루고 있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진리를 더 알수록 주님 앞에서 더 겸손해지고, 자기 안의 악을 더 분명히 보며 그것을 죄로 여겨 피하고,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며 실제 쓰임을 행하게 된다면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살아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진리를 많이 알면서도 이웃의 선에는 무관심하고, 그 지식을 자기 우월성과 정당성을 세우는 데 사용한다면 ‘나는 무엇을 믿는가?’뿐 아니라 ‘내 신앙은 지금 자기 형제인 체어리티와 함께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AC.341은 앞으로 펼쳐질 가인과 아벨의 비극을 이미 한 문장으로 예고합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형제’ 역시 체어리티이며, ‘양 치는 자’는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반면 가인은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후 가인이 아벨을 죽인다는 것은 단지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분리된 신앙이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때 죽는 것은 아벨만이 아닙니다.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신앙 역시 자기 생명을 잃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이 짧고 단호한 선언이 AC.341의 핵심이며, 앞으로 이어지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읽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AC.342, 창4:2, ‘신앙에서 행위로, 행위에서 체어리티로’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2교회의 두 번째 자손이 체어리티라는 것은, 교회가 잉태하고 낳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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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0, 창4:1,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40‘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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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4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라는 말은 ‘가인’(Cain)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 신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이 장의 처음에서 말한 것으로 분명합니다. 이전에는 그들이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퍼셉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마치 알지 못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신앙에 관한 구별된 교리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 이전에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것들을 가져다가 교리로 정리하였고, 그것을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마치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하여 이전에는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이제는 단지 지식으로 아는 것이 되었습니다. 고대에는 새로운 것이 생길 때마다 그것에 이름을 붙였으며, 이런 식으로 그 이름 안에 담긴 것들을 나타냈습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라는 말로 설명되고(창16:11), That the words “I have gotten a man, Jehovah” signify that with such as are called “Cain” faith is recognized and acknowledged as a thing by itself, is evident from what was said at the beginning of this chapter. Previously, they had been as it were ignorant of what faith is, because they had a perception of all the things of faith. But when they began to make a distinct doctrine of faith, they took the things they had a perception of and reduced them into doctrine, calling it “I have gotten a man, Jehovah,” as if they had found out something new; and thus what was before inscribed on the heart became a mere matter of knowing. In ancient times they gave every new thing a name, and in this way set forth the things involved in the names. Thus the signification of the name Ishmael is explained by the saying, “Jehovah hath heard her affliction;” (Gen. 16: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창16:11)

 

르우벤은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므로’(Jehovah hath looked upon my affliction)라는 말로(창29:32), that of Reuben, by the expression, “Jehovah hath looked upon my affliction;” (Gen. 29:32)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창29:32)

 

시므온은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Jehovah hath heard that I was less dear)라는 말로(창29:33), the name Simeon, by the saying, “Jehovah hath heard that I was less dear;” (Gen. 29:33)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창29:33)

 

유다는 ‘이번에는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This time will I praise Jehovah)라는 말로 설명됩니다(창29:35). and that of Judah by, “This time will I praise Jehovah;” (Gen. 29:35)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창29:35)

 

또한 모세는 자신이 세운 제단을 ‘여호와 닛시’, 곧 ‘여호와는 나의 깃발’(Jehovah my banner)이라고 불렀습니다(출17:15). and an altar built by Moses was called, “Jehovah my banner.” (Exod. 17:15)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출17:15)

 

이와 같은 방식으로 여기서는 신앙의 교리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 곧 ‘가인’(Cain)이라고 한 것입니다. In like manner the doctrine of faith is here denominated “I have gotten a man, Jehovah,” or “Cain.”

 

해설

AC.340은 바로 앞 AC.338에서 말한 ‘신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었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주의할 것은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전혀 새로운 거짓 신앙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그들이 교리로 정리한 것은 이전부터 태고교회 안에 있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이었습니다. 달라진 것은 진리의 내용 자체라기보다 그것을 알고 받아들이는 방식이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서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퍼셉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역설적으로 그들이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마치 알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고 합니다. 신앙에 무지했다는 뜻이 아니라, 신앙이 사랑과 분리된 하나의 독립적인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을 따로 떼어 정의하고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에게 신앙에 속한 것은 이미 사랑과 생명 안에 들어 있었고, 말하자면 ‘마음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전에는 사랑 안에서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하나씩 따로 꺼내어 구별하고, 그것들을 ‘신앙에 관한 교리’로 정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변화를 ‘이전에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이제는 단지 지식으로 아는 것이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그들이 정리한 모든 내용이 갑자기 거짓이 되었다는 뜻도 아니고, 교리를 만들었다는 행위 자체가 악이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문제는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에서 본래 사랑 안에 살아 있던 신앙이 점차 사랑으로부터 구별되고, 마침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처럼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AC.338에서 보았듯 가인의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사랑 안에 있어야 할 신앙을 사랑과 별개로 성립할 수 있는 무엇으로 세우기 시작한 데 있습니다. AC.340은 그 분리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퍼셉션으로 알던 것’과 ‘지식으로 알게 된 것’의 대비를 통하여 보여 줍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한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에 전혀 몰랐던 진리를 처음 발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사랑 안에서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것을 따로 꺼내어 교리적으로 정리하고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는 말로 표현됩니다. 무엇인가를 새로 ‘얻었다’고 여겼고, 그렇게 얻었다고 여긴 신앙의 교리를 ‘가인’이라 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미묘한 역설이 있습니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전에 가지고 있던 더 내적인 앎의 방식을 잃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진리를 사랑 안에서 살아서 알았는데 이제는 그것을 자기 앞에 하나의 대상으로 세워 지식으로 알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이 생명 안에서 알려지는 것에서 신앙에 관하여 아는 것으로 옮겨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퍼셉션은 좋고 지식은 나쁘다’, 또는 ‘교리가 없는 신앙이 교리가 있는 신앙보다 더 높다’는 일반적인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특수한 천적 상태를 설명하는 문맥이기 때문입니다. AC.337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에게서는 사랑이 먼저였고 그 사랑을 통하여 신앙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퍼셉션이 주어졌다고 설명하면서, 곧이어 ‘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고 했습니다. 후대의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며,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말씀을 배우고 교리를 공부하며 선과 진리를 구별하여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거듭남에 필요한 과정입니다. 문제는 그 진리가 지식에만 머물러 체어리티와 결합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단지 지식이 되어 가는 방향으로 쇠퇴가 나타났다면, 후대 인간에게서는 주님께서 지식과 신앙으로 받아들인 진리를 다시 사랑과 삶 안으로 이끄셔서 체어리티와 결합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두 시대의 질서를 단순히 같은 공식으로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AC.340 후반에 이스마엘, 르우벤, 시므온, 유다, 그리고 ‘여호와 닛시’가 차례로 인용되는 이유도 바로 이 ‘가인’이라는 이름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마엘은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는 말과 함께 이름이 주어지고(창16:11), 르우벤은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므로’라는 말과 연결되며(창29:32), 시므온은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라는 말과 연결됩니다(창29:33). 유다는 ‘이번에는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말에서 그 이름이 주어지고(창29:35), 모세가 세운 제단에는 ‘여호와 닛시’라는 이름이 붙습니다(출17:15).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인용한 것은 여기서 이스마엘이나 르우벤, 시므온, 유다의 속뜻을 각각 해설하거나 ‘여호와 닛시’의 상응을 따로 밝히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 모든 예가 보여 주는 공통점은 고대에는 어떤 상태나 사건의 성질을 이름 안에 담아 나타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 역시 단순한 호칭으로만 읽을 것이 아니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말로 표현된 교회적, 교리적 상태를 담고 있는 이름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바로 앞 AC.339와도 정확히 이어집니다. AC.339에서는 태고인들이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으로 어떤 것들을 의미하게 하였으며, 교회에 속한 것들이 자연적인 출생처럼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잉태되고 태어나는’ 관계를 이루기 때문에 그러한 이름들로 계보를 구성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340에서는 그 원리를 실제 성경의 여러 이름을 통하여 확인합니다. 그러므로 이 다섯 인용구절은 각각 독립된 다섯 가지 주제를 여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설명을 여러 사례로 뒷받침합니다. ‘이스마엘’, ‘르우벤’, ‘시므온’, ‘유다’, ‘여호와 닛시’가 각각 그 이름과 관련된 상태와 의미를 담고 있듯이, ‘가인’이라는 이름에도 태고교회 안에서 일어난 특정한 변화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AC.339와 AC.340은 서로 떨어진 설명이 아니라, ‘교회에 속한 것들이 어떻게 이름과 계보로 표현되는가’를 설명하는 하나의 연속된 해석 원리가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가인의 시작이 얼마나 미묘한지를 다시 보게 됩니다. 처음부터 ‘사랑은 필요 없다’, ‘체어리티는 중요하지 않다’고 선언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신앙에 속한 것을 따로 구별하여 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본래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것을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신앙은 점차 사랑으로부터 독립된 위치를 갖게 됩니다. 이후 창4의 흐름에서 이 분리는 더 분명해져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곧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AC.340은 단순히 ‘옛사람들은 이름을 어떻게 지었는가?’를 설명하는 글이 아닙니다. 가인이라는 교리적 상태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번호입니다. 마음에 새겨져 있던 신앙이 지식의 대상이 되고, 그 지식이 사랑 안에 다시 머물지 않고 그 자체로 하나의 것이 될 때 신앙과 사랑의 본래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이 대목은 AC를 읽고 공부하는 우리에게도 매우 실제적인 경고가 됩니다. 우리는 ‘상응’, ‘퍼셉션’, ‘리메인스’, ‘속 사람과 겉 사람’,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 같은 개념을 배우면서 이전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이 아는 것과 그 진리가 우리 안에서 살아 있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적 지식이 많아질수록 그것을 ‘내가 얻은 것’으로 여기고, 그 지식 때문에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더 밝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위험도 생길 수 있습니다. 진리는 우리가 소유하여 자신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수단입니다. 배운 진리를 통하여 자기 안의 악을 보고 그것을 죄로 여겨 피하며, 주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는 체어리티와 쓰임으로 나아갈 때 그 진리는 비로소 우리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그러므로 AC.340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는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가?’보다 더 깊습니다. ‘내가 아는 진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머리에만 있는가, 아니면 주님의 역사하심으로 마음과 삶에도 새겨지고 있는가?’ 바로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가인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 살아 있는지를 살피게 하는 말씀으로 읽게 됩니다.

 

 

 

AC.341, 창4: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AC.341-345)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창4:2) AC.341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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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9, 창4:1, ‘창4의 계보를 읽는 매우 중요한 해석 원리’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39앞의 세 장에서 ‘아담과 그의 아내’(man and his wife)가 태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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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8 심화

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AC.338을 읽다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질문이 생깁니다. 앞의 개요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을 분명히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라고 설명했는데, 여기서는 태고교회의 ‘첫 번째 자손, 곧 처음 난 것’을 단순히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가인은 신앙 자체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먼저 태고교회에도 신앙은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의 신앙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어떤 교리를 먼저 배우고 그것을 참이라고 인정하는 방식의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주님으로부터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신앙은 사랑과 나란히 서 있는 별개의 무엇이 아니었습니다. 사랑 안에서 살아 있었고,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것을 알았습니다. AC.337에서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설명한 것도 바로 이 뜻입니다.

 

그런데 AC.338에서 결정적인 변화가 나타납니다.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 신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그들이 갑자기 신앙을 버렸거나 처음부터 거짓된 신앙을 만들어 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본래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신앙을 사랑과 별개로 성립할 수 있는 하나의 것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38에서 ‘가인=신앙’이라고 한 말과 앞에서 ‘가인=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라고 한 말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가인은 참된 것인 신앙을 붙들고 있지만, 그 신앙을 본래의 사랑의 질서에서 떼어 독립적인 것으로 세우는 교리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점에서 ‘가인이 처음에는 완전히 정상적인 신앙이었다가 나중에 분리된 신앙으로 변했다’고 너무 선명하게 시간적 단계를 나누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AC.338의 바로 이 시점에서 이미 신앙을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정하는 분리의 성격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분리의 결과가 처음부터 모두 완성되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창4의 뒤를 따라가면 신앙이 점차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체어리티가 신앙의 질을 드러낸다는 질서를 거부하며, 결국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진행됩니다. 따라서 AC.338은 분리의 원리가 처음 드러나는 지점을 보여 주고, 후속 본문은 그 원리가 어디까지 발전하는지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이 ‘구별’과 ‘분리’의 차이입니다. 신앙과 사랑을 구별하여 설명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오히려 그렇게 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신앙이고 무엇이 체어리티인지, 진리와 선이 어떻게 관계하는지 분명히 배우는 것은 필요합니다. 문제는 구별된 신앙을 사랑 없이도 참된 신앙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여기는 데 있습니다. 신앙을 사랑과 구별하는 것과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전자는 이해를 위한 구별이지만 후자는 생명의 질서를 깨뜨리는 분리입니다.

 

부부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 차이를 조금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로 깊이 사랑하는 부부에게 배려와 존중과 신실함의 원칙은 사랑 안에서 살아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그 원칙을 글로 정리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사랑을 파괴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서로 사랑하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이 원칙들만 정확히 지키면 좋은 부부다’라고 생각한다면 원칙은 사랑을 섬기는 자리에서 벗어나 사랑을 대신하기 시작합니다. 원칙 자체가 거짓이어서가 아니라, 참된 것이 본래의 관계에서 분리된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중요하다’, ‘교리는 정확해야 한다’, ‘진리와 거짓을 분별해야 한다’는 말 자체는 모두 옳습니다. 그러나 그 신앙과 교리와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분리되어 자기 자신만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하기 시작하면 가인의 질서가 나타납니다.

 

이 때문에 가인의 문제는 매우 미묘합니다. 처음부터 노골적인 거짓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참된 것 하나를 전체의 질서에서 떼어 내어 그 자체로 높이는 데서 시작합니다. 이단 역시 반드시 처음부터 모든 진리를 부정하는 방식으로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것 하나를 지나치게 높이고 다른 선과 진리와의 살아 있는 결합을 끊을 때에도 왜곡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37의 ‘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는 설명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후대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며, 주님께서는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십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리를 배우고 신앙을 분명히 고백하는 것 자체를 가인의 상태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이 먼저 나타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고 사랑에서 분리된 채 독립적인 최종 목적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진리를 배우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 진리는 주님께서 우리 안에 선과 체어리티를 이루시는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AC.338의 핵심은 ‘가인은 신앙이다’와 ‘가인은 분리된 신앙이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의미하지만, 바로 그 신앙을 사랑 안에 있는 것으로 보지 않고 그 자체로 독립된 것으로 인정한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리고 창4의 뒤는 그 분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독립된 것으로 바라보았고, 나중에는 그것을 체어리티보다 높였으며,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AC.338은 분리가 처음 드러나는 아주 중요한 지점입니다. 신앙 자체는 참된 것이지만, 그것이 어디에 놓여 있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 살아 있는 신앙은 살아 있는 신앙이지만, 사랑에서 떨어져 자기 자신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신앙은 가인의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이 원리는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다른 사람의 신앙을 쉽게 ‘가인’이라고 판정하기보다 먼저 자신의 신앙을 살피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내가 진리를 더 알수록 주님 앞에서 더 겸손해지고, 악을 더 잘 보고 피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한다면 그 진리는 체어리티와 결합되고 있습니다. 반대로 진리를 더 알수록 자기 옳음을 증명하고 다른 사람을 낮추며, 사랑보다 교리적 승리를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된다면 우리는 신앙이 그 생명의 자리에서 분리되기 시작하지 않았는지 살펴야 합니다. 가인의 이야기는 남을 정죄하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신앙과 사랑이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를 살피게 하는 말씀입니다.

 

 

 

AC.338 심화 2, 주님께서는 왜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을까?

AC.338 심화2. 주님께서는 왜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을까? AC.338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질문이 있습니다. 태고교회 안에서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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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8, 창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AC.338-340)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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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Jehovah. (창4:1)

 

AC.338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the man and Eve his wife)는 지금까지 밝혀진 것처럼 태고교회를 의미합니다. 그 교회의 첫 번째 자손, 곧 처음 난 것은 신앙이며, 여기서는 그것을 ‘가인’(Cain)이라 합니다. 하와가 말한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는 것은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 신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By the “man and Eve his wife” is signified the most ancient church, as has been made known; its first offspring, or firstborn, is faith, which is here called “Cain”; her saying “I have gotten a man, Jehovah,” signifies that with those called “Cain,” faith was recognized and acknowledged as a thing by itself.

 

해설

AC.338부터 스베덴보리는 창4:1의 각 표현을 본격적으로 풀이하기 시작합니다. 앞의 AC.324-337이 창4 전체의 속뜻을 미리 보여 주는 개요였다면, 이제부터는 본문을 한 구절씩 따라가며 그 안에 담긴 교회적 상태를 자세히 해설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를 다시 단순한 두 개인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들이 태고교회를 의미한다고 분명히 밝힙니다. 그리고 그 태고교회의 ‘첫 번째 자손, 곧 처음 난 것’을 신앙이라고 하며, 그것을 여기서는 ‘가인’이라고 합니다. 이 표현은 처음 읽으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앞의 개요에서 가인을 계속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라고 읽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AC.338에서는 그를 단순히 ‘신앙’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서로 모순되는 설명이 아닙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생겨났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태고교회에도 당연히 신앙에 속한 것이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의 신앙은 사랑과 나란히 독립적으로 서 있는 무엇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퍼셉션으로 알았고, 그 앎이 바로 그들의 신앙이었습니다. AC.337에서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는 어떠한 신앙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 것도 바로 이 뜻입니다. 그들에게 신앙은 사랑 안에 살아 있었고, 사랑으로부터 주님께 받은 퍼셉션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AC.338에서 중요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 신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사랑과 별개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신앙이 사랑 안에서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성립할 수 있는 무엇처럼 인식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가인의 성격을 드러냅니다.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은 필요 없다’고 노골적으로 선언하는 상태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신앙에 속한 것을 사랑 안에서 떼어 내어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보기 시작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 분리가 이후 체어리티보다 신앙을 더 높이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따라서 가인을 ‘처음에는 좋은 신앙이었는데 나중에 나쁜 신앙으로 변했다’고 단순히 시간적으로 나누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AC.338에서 이미 신앙을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정하는 데서 가인의 고유한 분리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신앙이라는 참된 것을 가진 상태이면서 동시에 그 신앙을 본래의 사랑의 질서에서 떼어 내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이 점에서 ‘신앙을 구별하는 것’과 ‘신앙을 분리하는 것’을 반드시 구별해야 합니다. 사랑과 신앙을 개념적으로 구별하여 설명하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오히려 그렇게 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 무엇이고 체어리티가 무엇인지, 진리와 선이 어떻게 관계하는지 분명히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구별된 것을 서로 떨어져도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순간 문제가 달라집니다. 신앙이 사랑 없이도 참된 신앙일 수 있다고 여기고, 나아가 사랑과 체어리티보다 신앙을 더 본질적인 것으로 높이면 ‘구별’은 ‘분리’가 됩니다. 가인의 문제는 바로 이 분리입니다. 앞에서 사용했던 부부의 비유도 여기에 도움이 됩니다. 서로 깊이 사랑하는 부부에게 존중과 배려와 신실함은 사랑 안에서 자연스럽게 살아 있습니다. 그 원칙들을 글로 정리하는 것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사랑이 없어도 규칙만 정확히 지키면 좋은 부부다’라고 생각한다면 원칙이 사랑에서 독립하여 사랑을 대신하기 시작합니다. 신앙과 사랑의 관계도 이와 비슷합니다.

 

하와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는 말도 이 문맥에서 중요합니다. 영어 표현은 ‘I have gotten a man, Jehovah’인데, 스베덴보리는 이 말에서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에게 신앙이 하나의 독립된 실재처럼 ‘인식되고 인정되었다’는 의미를 읽습니다. 중요한 점은 그들이 신앙을 거짓이라고 여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을 참되고 중요한 것으로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의 위험을 더욱 미묘하게 만듭니다. 명백한 거짓 하나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참된 것 하나가 본래 그것이 결합되어 있어야 할 사랑의 질서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성을 주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단이나 교리의 왜곡도 언제나 처음부터 모든 진리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것 하나를 전체보다 높이고 다른 진리와 선의 살아 있는 관계에서 떼어 내는 데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처음 난 것’, 곧 첫 번째 자손이라는 표현 역시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단순히 태고교회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먼저 태어난 한 개인이라는 뜻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관심을 두는 것은 태고교회로부터 어떤 교리적 상태가 처음 파생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따라서 창4의 계보를 단순한 시간표로만 읽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인과 그의 후손들은 개인들의 전기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 안에서 생겨난 교리적, 교회적 상태들이 어떻게 파생되고 변화했는지를 표상합니다. 또한 AC.338은 가인의 타락이 이미 완성된 상태만을 보여 주는 번호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분리가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보기 시작한 변화가 나중에는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는 신앙으로 진행하고,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상태까지 이어집니다. 겉으로는 미세해 보이지만 사랑과 신앙의 본래 질서를 바꾸는 결정적인 방향 전환입니다.

 

AC.337과 함께 읽으면 이 점이 더욱 선명합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과 신앙이 퍼셉션 안에서 하나였기 때문에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따로 세우는 것 자체가 당시에는 매우 심각한 왜곡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신앙과 체어리티를 개념적으로 구별하여 배우는 것은 그 자체로 가인의 상태가 아닙니다. 후대의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며,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배우고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 자체는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고 사랑과 삶에서 분리된 채 자기 자신을 최종적인 것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AC.338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단지 ‘내가 믿는 교리가 옳은가?’가 아닙니다. ‘그 교리가 무엇과 결합되어 있는가?’도 함께 물어야 합니다. 아무리 참된 교리라도 자기 확신과 자기 우월성을 강화하는 데만 사용된다면 그 진리는 본래의 질서를 잃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진리를 더 알수록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자기 악을 더 분명히 보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실제 체어리티와 쓰임으로 나아가게 된다면 그 신앙은 자신의 참된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생명은 신앙 자체를 높이는 데 있지 않고, 주님께서 그것을 통하여 선과 체어리티를 이루시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38의 핵심은 단순히 ‘가인은 신앙이다’가 아닙니다. ‘가인은 본래 사랑 안에 있어야 할 신앙을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정하기 시작한 상태다’라는 데 있습니다. 가인의 분리는 체어리티에 대한 노골적인 공격으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본래 하나로 있어야 할 것을 따로 세우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창4의 상세 해설은 이제 바로 그 분리가 어떻게 점차 교회의 질서를 바꾸고,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며, 결국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가는지를 하나씩 보여 줄 것입니다.

 

심화

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AC.338 심화 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AC.338 심화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AC.338을 읽다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질문이 생깁니다. 앞의 개요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을 분명히 ‘사랑에서 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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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님께서는 왜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을까?

 

AC.338 심화 2, 주님께서는 왜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을까?

AC.338 심화2. 주님께서는 왜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을까? AC.338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질문이 있습니다. 태고교회 안에서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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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9, 창4:1, ‘창4의 계보를 읽는 매우 중요한 해석 원리’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39앞의 세 장에서 ‘아담과 그의 아내’(man and his wife)가 태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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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7, 창4, ‘참된 태고교회를 알아야 가인의 왜곡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37이 장은 태고교회의 퇴보, 곧 그 교리의 왜곡과, 그 결과 생겨난 이단들과 분파들을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름 아래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참된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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