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15의 마지막 인용인 렘6:3은 앞서 나온 양 떼와 목초지의 말씀들과 분위기가 다릅니다. 렘23:3에서는 주님께서 흩어진 양 떼를 모으시고, 겔34:14에서는 좋은 꼴로 먹이십니다. 그러나 렘6장은 예루살렘을 향한 위협을 선포하는 문맥입니다. 그 가운데 목자들과 가축 떼가 ‘딸시온’에게 와서 그 주위에 장막을 치고 각기 자기 자리를 차지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인용한 뒤 ‘딸시온’은 천적 교회를 나타내며, ‘장막’과 ‘가축떼’가 그 교회에 관하여 사용되는 표현이라고 설명합니다. 심판을 알리는 장면이 어떻게 사랑의 거룩한 것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밝히는 근거가 될 수 있습니까?
먼저 렘6:3의 문자적 문맥을 지워서는 안 됩니다. 이 장에서 예루살렘은 위협을 받고 있으며, 목자들이 양 떼를 데리고 와 장막을 치는 모습도 그 위협의 흐름 안에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장면을 ‘목자들이시온을보호하려고모여들었다’거나 ‘가축떼가평화롭게먹으므로천국의안식이이루어졌다’고 풀이하면 본문의 방향이 바뀌어 버립니다. 말씀의 속뜻을 살핀다는 이유로 문자적 장면을 그 반대의 이야기로 고쳐 읽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들이 실제 성경을 펼쳐 읽었을 때에도 설명이 본문과 충돌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에서 직접 밝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의 설명은 짧고 분명합니다. ‘딸시온’은 천적 교회를 나타내며, ‘장막’과 ‘가축떼’가 그 교회에 관하여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목자들의 정체를 선한 인도자로 풀이하지도 않고, 장막을 치는 행위를 교회의 보호라고 설명하지도 않으며, 각기 자기 자리를 차지하는 일을 천국에서 각자의 수용 능력에 따라 선을 받는 상태라고 풀이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AC.415를 해설하는 우리도 그가 직접 밝힌 범위를 먼저 지켜야 합니다.
이 구절이 인용된 이유를 이해하려면 AC.415의 질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증명하려는 것은 야발의 ‘가축’이 사랑의 거룩한 것에서 나오는 선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위해 그는 말씀에서 가축과 그에 관련된 표현들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살펴왔습니다. 렘6:3에는 ‘딸시온’, ‘장막’, ‘가축떼’가 한 구절 안에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교회를 나타내는 시온과 관련하여 장막과 가축 떼가 함께 언급된다는 점을 근거로 삼습니다. 그 구절의 문자적 장면 전체가 평화롭기 때문에 인용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사용된 표현들이 그의 논증과 관련되기 때문에 인용한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의 속뜻을 읽을 때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어떤 구절에서 특정 표현의 속뜻을 밝힌다고 해서, 그 구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과 행동을 같은 방향의 긍정적인 뜻으로 풀이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렘6:3의 문자적 장면은 경고의 문맥에 그대로 두면서, 스베덴보리가 그 가운데서 주목한 ‘딸시온’, ‘장막’, ‘가축떼’의 관계를 살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장막은사랑의거룩한것’이라는 설명만 붙들고 그 장막을 치는 모든 행동까지 거룩한 행위로 단정하면, 상응을 읽는 일이 본문을 이해하는 일이 아니라 본문 위에 다른 이야기를 덧씌우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기존 심화의 몇몇 설명은 수정되어야 합니다. ‘장막을친다’는 것을 곧바로 ‘교회가사랑안에서보호되고질서를이루는상태’라고 하거나, ‘각기그처소에서먹인다’는 것을 ‘각사람이자기상태에따라선과진리를공급받는것’이라고 한 부분이 그렇습니다. 그러한 설명이 다른 저작이나 다른 문맥에서 논의될 여지는 있더라도, AC.415는 이 구절을 그렇게 풀이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렘6장의 문자적 문맥까지 고려하면, 이 해석들을 이번 번호의 직접적인 결론으로 제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말한 것과 우리가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 충실한 해설의 출발점입니다.
그렇다고 렘6:3이 AC.415에서 어색하게 끼어든 인용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앞의 AC.414에서 장막의 의미를 밝힌 뒤, 이번 번호에서 가축의 의미를 밝히는 흐름을 생각하면 이 구절의 위치가 분명해집니다. 장막과 가축 떼가 천적 교회를 나타내는 시온과 관련하여 함께 등장한다는 사실은, 야발의 ‘장막에거주하며가축을치는자의조상’이라는 표현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장막은 사랑의 거룩한 것을, 가축은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나타냅니다. 렘6:3은 이 두 표현이 천적 교회와 관련하여 함께 사용되는 말씀의 한 사례로 제시된 것입니다.
성도들이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상응의 낱말 뜻만이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을 읽을 때에는 먼저 문자적 문맥을 정직하게 살피고, 이어서 스베덴보리가 그 문맥에서 실제로 무엇을 풀이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직접 풀이하지 않은 부분을 그럴듯한 설명으로 채워 넣는 일은 신중해야 합니다. 렘6:3은 심판의 장면이라는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 등장하는 장막과 가축 떼가 AC.415의 논증에 어떤 근거를 제공하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읽기가 말씀의 문자적 의미와 속뜻을 서로 경쟁시키지 않으면서 함께 존중하는 길입니다. (AC.415심화2)
AC.414의 마지막 부분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이 장막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렸으며, 이를 기억하게 하는 절기로 초막절이 제정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레23:42-43은 이스라엘 자손이 초막에 거주해야 하는 이유를 분명히 밝힙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 그들을 초막에 거주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대대로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초막절은 출애굽과 광야 생활을 기억하는 절기입니까, 아니면 태고교회의 사랑의 예배를 기억하는 절기입니까? 이 질문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와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표상적 의미를 어떻게 함께 읽을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먼저 레위기가 직접 밝히는 초막절의 기념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땅의 소산을 거두어들인 뒤 초막절을 지켰으며, 일정 기간 초막에 거주했습니다. 레23:42-43은 그 이유를 출애굽 때의 초막 생활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초막절의 문자적 의미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받아들인다는 이유로 ‘초막절은사실출애굽과관계가없다’거나 ‘레위기가밝힌기념이유는겉으로만내세운설명이다’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와 절기의 규례는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왜 태고교회를 말합니까? AC.414에서 그는 초막절의 문자적 제정 이유를 다시 설명하기보다, ‘장막’이라는 표상이 지닌 더 오래된 의미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태고교회 사람들은 각자의 가족 안에서 살면서 장막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장막은 그 사랑의 예배와 연결되어 천적인 것과 사랑의 거룩한 것을 표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후대의 이스라엘 백성이 초막에 거주하는 절기를 지킬 때, 그 행위는 출애굽의 역사를 기억하는 동시에 장막이 오래전부터 지녀 온 거룩한 의미와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하나의 표상에 문자적 역사와 속뜻이 함께 있다는 설명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려면 ‘무엇을기념하라고명령하셨는가?’와 ‘그기념에사용된장막은무엇을표상하는가?’를 나누어 생각하면 도움이 됩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레위기가 직접 답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뒤 초막에 거주했던 일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AC.414가 답합니다. 장막은 태고교회의 거룩한 예배와 연결되어 사랑의 거룩한 것을 표상한다는 것입니다. 두 대답은 서로 다른 층위의 질문에 대한 것이므로, 하나를 인정하기 위해 다른 하나를 부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함께 인용한 신16:13도 이 관계를 살피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 말씀은 타작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거두어들인 뒤 초막절을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레23:39역시 땅의 소산을 거두어들인 뒤 절기를 지키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초막절에는 광야 생활을 기억하는 일뿐 아니라 수확을 마친 뒤 주님 앞에서 절기를 지키는 일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다만 AC.414는 타작마당이나 포도주 틀의 세부적인 속뜻을 여기서 풀이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심화에서는 그 물건들에 새로운 상응을 임의로 부여하기보다, 초막절이 출애굽의 기억과 수확의 기쁨을 함께 지닌 절기라는 문자적 문맥을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호12:9에서 주님은 다시 장막에 거주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도 AC.414가 초막절과 장막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인용한 본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장막 생활이 단지 과거의 불편한 생활 방식으로만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말씀은 장막에 거주하는 모습을 다시 불러오며,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표현들을 사랑의 거룩한 것에 관한 장막의 의미와 연결합니다. 그러나 호세아서의 구체적인 역사적 문맥과 AC.414가 밝히는 속뜻을 구별하여 읽어야 합니다. 이 한 구절만으로 태고교회의 모든 예배 방식이나 초막절의 세부 규례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목회적으로 중요한 질문은 ‘오늘우리도초막에서살아야더거룩한예배를드릴수있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AC.414의 설명은 그런 결론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장막의 재료나 생활 방식 자체가 거룩함을 만들어 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표상한다는 것은 그 장막과 연결된 예배의 내적인 의미를 살피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초막절을 읽는 성도는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주님의 역사를 기억하면서, 그 기억이 가리키는 주님의 사랑과 거룩함을 함께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외적인 절기의 형식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과 그 절기가 나타내는 거룩한 것을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결국 초막절의 문자적 기념 내용은 출애굽과 광야의 초막 생활이며, 스베덴보리가 AC.414에서 밝히는 표상적 의미는 장막에 담긴 태고교회의 사랑의 예배와 연결됩니다. 이 두 의미는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자적 역사를 통해 주님의 인도하심을 기억하고, 장막의 속뜻을 통해 그분에게서 오는 사랑의 거룩함을 생각하게 합니다. 초막절을 읽으며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어느시대의장막이더중요합니까?’라는 선택이 아니라, 말씀의 역사 속에서도 그 속뜻 안에서도 사람을 주님께로 이끄시는 분이 누구신가 하는 질문입니다. (AC.414심화2)
그러나여기서는죄책의고발을의미합니다. In the present passage it denotes accusation.
해설
AC.375는 바로 앞 AC.373에서 ‘피들이부르짖는것’이 ‘죄책의고발’을 의미한다고 한 해석을 보충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부르짖는소리’라는 표현 자체가 언제나 죄책이나 고발을 뜻한다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에서 ‘부르짖는소리’와 ‘부르짖음의소리’는 매우 넓게 사용되며, 소음이나 소동이나 혼란이 있을 때뿐 아니라 기쁜 일이 있을 때에도 사용된다고 먼저 밝힙니다. 그런 다음 ‘그러나여기서는죄책의고발을의미한다’고 범위를 한정합니다. 이것은 말씀의 상응과 속뜻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한 해석 원리를 보여 줍니다. 어떤 단어나 표현에 하나의 뜻을 기계적으로 대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 표현이 놓인 문맥과 그것이 결합하고 있는 다른 표상들을 함께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출32:17-18을 인용하는 이유는 ‘소리’가 반드시 한 종류의 영적 상태만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산에서 내려올 때 진영에서 들려오는 큰 소리가 있었고, 여호수아는 그것을 싸우는 소리로 생각했지만 모세는 승리하거나 패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아니라 ‘노래하는소리’라고 말합니다. 즉 ‘소리’는 어떤 집단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강한 상태가 외적으로 드러나는 표현입니다.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그 소리 자체만으로 결정되지 않고, 무엇 때문에 그 소리가 일어났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습1:9-10과 렘48:3에서는 소리가 재앙과 파괴와 혼란에 연결됩니다. 심판과 황폐의 상태가 ‘부르짖는소리’로 표현됩니다. 반면 사65:19에서는 정반대의 문맥이 나타납니다. 새롭게 된 예루살렘에서는 ‘우는소리와부르짖는소리가그가운데에서다시는들리지아니할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소리와 부르짖음은 어떤 내적 상태가 외부로 드러나는 것을 나타내지만, 그 구체적인 의미는 문맥에 따라 결정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이 네 구절을 인용하는 목적은 각각의 구절에 독립적인 새로운 교리를 붙이려는 것이 아니라, ‘소리’와 ‘부르짖음’이라는 표현이 말씀에서 여러 상태에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4:10의 ‘네아우의핏소리가땅에서부터내게호소하느니라’에서 ‘부르짖는소리’가 죄책의 고발을 의미하는 이유도 단어 하나만 떼어 내서는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 부르짖는 것은 바로 아벨의 ‘피들’입니다. 앞의 AC.374에서 보았듯이 ‘피들’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 특히 미움과 그 미움에서 솟아나는 온갖 불의하고 가증한 것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 ‘피들’이 부르짖는다는 것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이 그 자체로 죄책을 드러내고 고발한다는 뜻이 됩니다. 가인은 ‘내가알지못하나이다’라고 부인했지만, 그가 소멸시킨 아벨의 피들은 침묵하지 않습니다. 행해진 악의 영적 성질 자체가 그 죄책을 드러냅니다.
여기서 ‘고발’ 역시 주님께서 어떤 외부의 증언을 들어야 비로소 가인의 죄를 아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렇게 표현합니다. 주님 앞에서는 인간의 내적 상태가 이미 드러나 있으며,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은 그 자체의 결과와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들의부르짖음’은 주님께 새로운 정보를 전달하는 고발이라기보다, 가인이 부인하고 감추려 한 악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는 감추어질 수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인간은 말로 ‘알지못합니다’라고 할 수 있지만, 그가 사랑하고 의도하며 행한 것은 그의 영적 상태 안에 남아 있습니다.
AC.375는 짧지만 스베덴보리의 상응을 읽을 때 주의해야 할 중요한 점도 가르쳐 줍니다. ‘소리= 고발’, ‘부르짖음= 죄책’이라고 사전식으로 외워서는 안 됩니다. 같은 표현도 문맥에 따라 싸움이나 소동, 혼란, 슬픔, 기쁨 등 서로 다른 상태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상응은 단어와 뜻을 일대일로 기계적으로 치환하는 암호표가 아니라, 말씀 전체의 연결과 그 안에서 표현되는 영적 상태를 함께 살피는 것입니다. AC.375에서 스베덴보리 자신이 ‘말씀에서는여러경우에사용되지만여기서는죄책의고발을의미한다’고 구별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을 잘 보여 줍니다.
결국 AC.375의 핵심은 마지막 한 문장에 있습니다. ‘그러나여기서는죄책의고발을의미합니다.’ 창4:10에서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하여 흘리게 된 ‘아벨의피들’이 부르짖고 있기 때문입니다. AC.373이 ‘피들의부르짖음= 죄책의고발’이라는 뜻을 먼저 제시하고, AC.374가 ‘피들’이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했다면, AC.375는 이제 ‘부르짖는소리’가 왜 이 문맥에서 고발이 되는지를 확인합니다. 가인은 자신의 책임을 부인하지만,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결과 자체가 그의 죄책을 드러냅니다.
AC.66에는 처음 읽는 독자를 상당히 놀라게 할 만한 문장이 있습니다. ‘창조,에덴동산등에관한이모든내용,곧아브람시대까지의기록을모세는태고교회의후손들로부터전해받았습니다.’우리는 흔히 창세기를‘모세가기록한책’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이 문장을 읽으면 곧 여러 질문이 생깁니다. ‘그러면스베덴보리는창세기1장부터아브람이전까지의내용을모세가직접계시받아기록한것이아니라고보는가?’, ‘그렇다면그내용은실제역사가아니라전승된이야기일뿐이라는뜻인가?’
먼저AC.66의 문장을 약화시키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스베덴보리는 분명히 창조와 에덴동산 등을 포함하여 아브람 시대까지의 내용을 모세가‘태고교회의후손들로부터’받았다고 말합니다.따라서 적어도 스베덴보리 자신의 설명에서는 이 부분의 자료가 모세에게서 처음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것입니다.이것은AC.66이 직접 말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바로 앞의‘첫째스타일’설명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태고교회 사람들은 땅과 세상의 것을 말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생각했고,그러한 표상들을‘일종의역사적연속’으로 엮었다고 했습니다.그리고 바로 그 설명 뒤에 한나와 시편을 인용한 다음,창조와 에덴동산 등의 내용을 모세가 태고교회 후손들로부터 받았다고 합니다.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전승은 단순히 후대 사람들이 꾸며 낸 민담이라는 뜻이 아니라,태고교회의 표상적 표현 방식과 연결된 오래된 자료입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이어지는 둘째 스타일과의 구별입니다.아브람 이후의 모세오경과 여호수아,사사기,사무엘기,열왕기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가‘역사적사실들은문자적의미에나타난그대로’라고 명시합니다.반면 아브람 이전의 첫째 스타일에 대해서는 표상들을‘일종의역사적연속’으로 만들었다고 표현합니다.스베덴보리가 두 부분을 의도적으로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아브람이전은역사가아니고아브람이후부터만역사이다’라고 한 줄로 정리해도 될까요?AC.66하나만으로 그렇게까지 단정하는 것도 조심하는 편이 좋겠습니다.이 글은 첫째 스타일과 둘째 스타일의 차이를 분명히 하지만,창세기 앞부분의 각각의 인물과 사건이 어느 의미에서 역사적이며 어느 의미에서 표상적 구성인지를 세세하게 판정하지는 않습니다. ‘아담은실제개인이아니었다’, ‘노아홍수는실제사건이아니었다’같은 결론을AC.66한 문장에서 바로 끌어내는 것은 본문보다 앞서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 문장을 없었던 것처럼 만들어‘창1부터모든내용은아브람이후와똑같은의미에서문자그대로의역사라고스베덴보리도가르친다’고 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AC.66은 분명히 서로 다른 두 스타일을 구별하고 있습니다.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익숙한 선입견에 맞추어 그 구별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앞으로 스베덴보리가 아담,노아,홍수,족보 등을 실제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따라가면서 조금씩 구체화하는 것입니다.
또 이것을 곧 현대 성서학의 문서설이나 구전 전승론과 동일시할 필요도 없습니다.현대 성서학도 모세오경의 자료와 전승을 연구하지만,그 학문적 이론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태고교회후손들로부터받은표상적역사’는 출발점과 목적이 다릅니다.용어상‘전승된자료’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해서 같은 이론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AC.66은 현대적인 문헌비평을 제시하는 글이 아니라 말씀의 네 가지 스타일과 그 속뜻을 설명하는 글입니다.
그러면 모세가 이전 자료를 받았다는 것이 말씀의 신적 권위를 약화시키는 것일까요?반드시 그렇다고 볼 이유는 없습니다.성경의 권위가 성경의 모든 문장이 기록자의 머릿속에 아무 선행 자료 없이 직접 받아쓰기처럼 들어왔다는 방식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적어도AC.66에서 중요한 것은 모세 이전부터 태고교회의 표상들이 전해졌고,그것이 말씀의 창세기 앞부분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입니다.스베덴보리의 관심은 자료의 인간적 전달 경로를 밝혀 말씀을 낮추는 데 있지 않고,그 오래된 표상적 기록 속에 영적이고 천적인 의미가 들어 있음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이 설명은 지금까지 창세기1장을 왜 그렇게 읽었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빛과 궁창과 물,식물과 광명체,물고기와 새와 짐승,사람의 창조를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의 상태로 읽은 것은 후대의 문자 기록에 임의로 상징을 붙인 것이라고 그 자신은 생각하지 않습니다.AC.66에 따르면 바로 이런 방식으로 자연적인 것을 말하면서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생각하던 태고교회의 표현 방식이 창세기 앞부분의 배경에 있습니다.
또 하나 기억할 것은 모세가‘태고교회사람들’에게 직접 받은 것이 아니라‘태고교회의후손들’에게서 받았다고 한다는 점입니다.즉 매우 오래된 표상적 자료가 후손들을 통해 보존되어 모세에게 전해졌다는 그림입니다.그 구체적인 전승 과정이 몇 세대를 거쳤고 어떤 형태의 문헌이었는지AC.66은 설명하지 않습니다.따라서 그 빈칸을 우리가 상상으로 채울 필요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설명이 성경에 대한 익숙한 생각을 흔드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그러나AC를 읽는 과정에서는 바로 이런 곳에서‘스베덴보리가실제로무엇을말하는가’를 먼저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우리가 미리 가지고 있던 성경관에 맞지 않는다고 문장을 약화시키지도 않고,반대로 한 문장을 가지고AC가 아직 말하지 않은 결론까지 확대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가장 정확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스베덴보리는 창조와 에덴동산 등을 포함하여 아브람 시대까지의 기록을 모세가 태고교회 후손들로부터 받았다고 실제로 말합니다.그는 그 부분을 태고교회의 표상적 스타일과 연결하며,아브람 이후의 역사적 스타일과 구별합니다.그러나 이 한 문장만으로 창세기 앞부분의 개별 인물과 사건의 역사성 여부를 모두 결정하지는 않습니다.그것은 앞으로 관련AC들이 직접 설명하는 내용을 따라가며 판단해야 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이 문장은 말씀의 권위를 낮추기보다 오히려 창세기1장을 지금까지 왜‘거듭남의아르카나’를 담은 표상적 연속으로 읽어 왔는지를 이해하게 해 줍니다.그리고 동시에 우리에게 중요한 독법 하나를 가르쳐 줍니다.성경의 권위를 존중하는 것과 스베덴보리가 성경의 형성과 스타일에 대해 실제로 한 말을 정직하게 읽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일이 아닙니다.
AC.65에서 특히 눈에 띄는 표현 가운데 하나가‘가장가까운내적의미’(the nearest interior sense)입니다.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읽고 있을 때 하늘의 첫 입구 뜰까지 들려 올라간 이들은 말씀의 단어나 글자를 이해하지 못하고‘오직가장가까운내적의미에서뜻하는것’만을 이해했다고 합니다.그렇다면 왜 그냥‘내적의미’라고 하지 않고‘가장가까운’이라고 했을까요?이 말은 말씀 안에 여러 층의 내적 의미가 있다는 뜻일까요?
먼저AC.65가 직접 말하는 범위부터 분명히 하는 것이 좋습니다.이 글은‘가장가까운내적의미’가 정확히 몇 번째 층이며 그보다 더 안쪽에 어떤 의미들이 몇 단계로 존재하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따라서 이 표현 하나만 가지고‘문자적의미→영적의미→천적의미’라는 완성된 층위표를 만들고,AC.65의 사람들이 그 가운데 정확히 어느 단계에 있었다고 확정하는 것은 본문보다 앞서가는 설명입니다.
그러나‘가장가까운’이라는 말이 아무 의미 없이 붙은 것도 아닙니다.적어도 이 표현은 그들이 지각한 내적 의미를 말씀의 문자와의 관계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즉 스베덴보리는 단순히‘내적의미’라고 하지 않고‘가장가까운내적의미’라고 구체적으로 말합니다.그러므로 말씀의 내적 의미에 더 깊은 차원이나 질서가 있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하는 표현인 것은 분명합니다.
바로 앞AC.64에서도 천사들은 말씀의 말과 이름에서 완전히 떠나 그것들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고 했습니다.따라서AC.64-65를 함께 보면 말씀의 문자적 의미와 천사들이 지각하는 내적 의미가 구별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그러나 그 내적 의미 안의 세부적인 층위와 서로의 관계는 스베덴보리가 그것을 직접 설명하는 다른 본문들을 함께 보아야 정확합니다.
이 점은AC를 읽을 때 중요한 독법 하나를 보여 줍니다.스베덴보리의 한 단어가 더 큰 교리를 암시한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우리가 그 교리 전체를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가장가까운’이라는 말을 발견하면‘아,그렇다면내적의미에도더깊은질서가있을수있겠구나’하고 기억해 두고,뒤에서 스베덴보리가 그 질서를 직접 설명할 때 연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이 지각한 것은 문자 자체가 아니라‘가장가까운내적의미’였을까요?AC.65가 직접 알려 주는 것은 그 결과입니다.그 의미는 너무 아름다웠고,연속의 질서가 너무 완전했으며,그들을 깊이 감동시켰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영광’이라고 불렀습니다.즉 이번 글의 초점은 그 의미가 내적 의미의 몇 번째 층인가를 분류하는 데 있기보다,문자에서 드러나지 않는 그 의미가 천사적 지각에서 얼마나 아름답고 질서 있는 것이었는가에 있습니다.
특히‘연속의질서’라는 표현과 함께 읽으면 도움이 됩니다.내적 의미는 단어마다 임의의 상징 하나를 붙여 놓은 사전처럼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서로 이어지는 질서 가운데 지각됩니다.창세기1장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읽어 온 것도 좋은 예가 됩니다.빛,궁창,식물,광명체,생물,사람이라는 각각의 표현이 따로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이라는 연속된 흐름 안에서 설명되었습니다.
그러므로‘가장가까운내적의미’를 단순히‘문자바로밑에숨어있는첫번째암호’처럼 상상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내적 의미는 비밀 암호를 해독하듯 단어 하나를 다른 단어 하나로 바꾸는 작업보다 훨씬 깊습니다.AC.65의 표현대로 아름다움과 연속의 질서를 가지고 천사들을 깊이 감동시키는 의미입니다.
또 이것을 인간이 노력하면 곧 천사처럼 직접 지각할 수 있는 어떤 단계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AC.65는 그곳에 들려 올라간 이들이 무엇을 이해했는지를 말하는 것이지,독자에게‘가장가까운내적의미를직접지각하는훈련법’을 가르치는 글이 아닙니다.우리는 자연계에서 말씀의 문자를 읽고,AC를 통하여 스베덴보리가 밝힌다고 주장하는 속뜻을 배우며,그 말씀을 삶에서 받아들입니다.천사적 지각 자체를 재현하려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가장가까운내적의미’라는 표현 때문에 말씀의 문자를 낮추어서도 안 됩니다. ‘가장가까운내적의미’는 바로‘무엇의’내적 의미인가 하면 말씀의 내적 의미입니다.문자와 아무 관계 없이 따로 존재하는 영적 지식이 아닙니다.인간에게 주어진 말씀의 문자 안에 이러한 깊이가 있다는 것이AC.65의 놀라운 주장입니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가장 안전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가장가까운내적의미’라는 표현은 말씀의 문자와 구별되는 내적 의미 가운데 문자에 가장 가까운 어떤 의미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지만,AC.65는 그보다 더 깊은 의미들의 수나 정확한 구조를 설명하지 않습니다.그 문제는 관련 본문에서 더 분명해질 때까지 열어 두는 것이 좋습니다.
오히려AC.65가 우리에게 먼저 보여 주려는 것은 그 내적 의미의‘위치’보다 그‘성질’입니다.그것은 아름답고,완전한 연속의 질서를 가지며,천사들을 깊이 감동시키는 것이어서 그들이‘영광’이라고 불렀습니다.이 한 장면만으로도 스베덴보리가 왜 바로 앞AC.64에서 속뜻을‘말씀의가장참된생명’이라고 불렀는지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이유는그교회가내적인것조차인정하지않았으며,천적인것은더더욱인정하지않는그러한교회였기때문입니다. This was because that church was such that it did not even acknowledge internal, much less celestial things.
[2] ‘기름’(fat)이천적인것들과체어리티의선들을의미한다는것은선지서에서도분명합니다.이사야에서는다음과같이말합니다. That “fat” signifies celestial things, and the goods of charity, is evident in the prophets; as in Isaiah:
여기서‘기름진것’이문자그대로의기름을뜻하는것이아니라천적·영적선을뜻한다는것은매우분명합니다.시편에서도다음과같이말합니다. where it is very evident that fatness is not meant, but celestial spiritual good.So in David:
여기서‘살진것’(fatness)과‘생명의원천’(fountainoflives)은사랑에속한천적인것을의미하고,‘복락의강물’(riverofdeliciousnesses)과‘빛’(light)은사랑에서비롯된신앙에속한영적인것을의미합니다.다시시편에서는다음과같이말합니다. Here “fatness” and the “fountainoflives” signify the celestial, which is of love; and the “riverofdeliciousnesses,” and “light,” the spiritual, which is of faith from love.Again in David:
[3] 천적인것들은헤아릴수없이많은종류와,그보다도더헤아릴수없이많은세부종류로이루어져있기때문에,모세가백성앞에서읊은노래에서는그것들을다음과같이총괄적으로묘사합니다. As celestial things are of innumerable genera, and still more innumerable species, they are described in general in the song which Moses recited before the people:
이러한표현들의의미는속뜻을통하지않고서는누구도알수없습니다.속뜻이없다면‘소의엉긴젖’(butterofkine),‘양의젖’(milkofsheep),‘어린양의기름’(fatoflambs),‘숫양과염소의기름’(fatoframsandgoats),‘바산의아들들’(sonsofBashan),‘밀의콩팥의기름’(fatofthekidneysofwheat),‘포도의피’(bloodofthegrape)와같은표현들은단지말들에지나지않을것입니다.그러나이모든표현하나하나는천적인것들의종류와세부종류를의미합니다. It is impossible for anyone to know the signification of these expressions except from the internal sense.Without the internal sense, such expressions as the “butterofkine,” the “milkofsheep,” the “fatoflambs,” the “fatoframsandgoats,” the “sonsofBashan,” the “fatofthekidneysofwheat,” and the “bloodofthegrape,” would be words and nothing more, and yet they all and each signify genera and species of celestial things.
해설
AC.353은 앞의 AC.350에서 아벨이 드린 ‘기름진것’이 ‘천적인것자체이며,이것역시주님께속한다’고 한 내용을 자세히 풉니다. 첫 문장부터 핵심은 분명합니다. ‘천적인것은사랑에속한모든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기름’은 단순히 풍요롭고 좋은 것을 막연하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속한 천적인 선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앞 AC.352의 ‘모든사랑은주님에게서오는것이며,인간에게서오는것은조금도없습니다’라는 선언과 연결됩니다. 아벨이 드린 ‘기름’의 생명도 인간 자신의 선함이나 공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선에 있습니다.
그런데 곧이어 매우 중요한 말이 나옵니다. ‘신앙역시사랑에서비롯될때에는천적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인과 아벨을 통하여 살펴본 신앙과 사랑의 관계를 정확하게 정리해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신앙을 낮추거나 배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반대로 신앙이 사랑에서 비롯되고 사랑과 결합되어 있다면 그 신앙 역시 천적인 성질을 가집니다. 이어 ‘체어리티는천적인것입니다.체어리티의모든선도천적인것입니다’라고 합니다. 사랑,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 체어리티, 체어리티의 선은 서로 경쟁하는 별개의 종교 요소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 안에서 서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문제는 ‘신앙을가졌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그 생명인 사랑에서 떼어 내어 독립적인 것으로 만든 데 있습니다.
이 때문에 희생 제사에서는 여러 종류의 기름이 특별히 거룩한 것으로 구별되어 제단 위에서 불살라졌습니다. 출29장과 레3장, 4장, 8장에는 간을 덮는 기름, 콩팥 위의 기름, 내장을 덮는 기름 등이 매우 세밀하게 규정되어 있습니다. 문자만 보면 왜 이런 신체 부위의 기름까지 세세하게 구별하는지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53은 그 기름들이 천적인 것과 체어리티의 선을 표상했기 때문에 거룩하게 여겨졌다고 설명합니다. 다만 이 번호만을 근거로 간의 기름은 정확히 어떤 사랑이고 콩팥의 기름은 또 어떤 선이라고 세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직접 밝히는 범위는 여러 종류의 기름이 천적인 것들을 표상했으며, 그것들이 거룩하여 제단 위에 드려졌다는 데 있습니다.
그 기름들이 ‘여호와께향기로운화제의음식’이라고 불린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자연적인 음식이나 기름을 필요로 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외적인 제사가 내적인 사랑과 선을 표상하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된 것입니다. AC.349에서 이미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고, 그것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제단 위 기름의 거룩함은 물질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표상하는 천적인 사랑과 선에 있습니다. 자연적인 제물은 그 내적 실재를 담아 보여 주는 표상적 그릇입니다.
같은 이유로 유대 백성이 기름을 먹지 못하도록 한 규례도 설명됩니다. AC.353은 그 이유를 매우 강하게 말합니다. 그 교회가 ‘내적인것조차인정하지않았으며,천적인것은더더욱인정하지않는’ 성격의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모든 유대인 개인의 내면을 일률적으로 단정하는 말로 확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표상교회로서의 그 교회의 일반적 성격과 기능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장 내적인 사랑의 선을 표상하는 기름을 인간이 자기 것으로 취하는 대신 여호와께 속한 것으로 구별한 규례는, 표상적으로 보아 천적인 선이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속한다는 질서를 보존합니다.
[2]에서 스베덴보리는 제사법에서 선지서와 시편으로 이동하여 ‘기름진것’이 천적인 선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여러 말씀으로 확인합니다. 사55:2에서는 ‘기름진것’으로 영혼이 즐거움을 얻고, 렘31:14에서는 제사장의 마음이 ‘기름’으로 흡족해지는 것이 주님의 선으로 백성이 만족하는 것과 나란히 놓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기름은 문자적인 지방이나 풍성한 음식만을 뜻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연이어 인용하는 목적은 각각의 구절에 별개의 교리를 붙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씀 안에서 ‘기름’과 ‘기름진것’이 영혼을 만족시키는 천적·영적 선을 의미한다는 것을 하나의 논증으로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시36:8-9은 그 관계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살진것’과 ‘생명의원천’을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으로, ‘복락의강물’과 ‘빛’을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에 속한 영적인 것으로 풀이합니다. 여기서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서로 끊어진 두 세계가 아닙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비롯되는 질서 안에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히 ‘주의빛안에서우리가빛을보리이다’라는 말씀은 이 문맥에서 인간의 신앙과 진리의 빛이 독립적인 자기 지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신앙역시사랑에서비롯될때에는천적’이라는 AC.353첫머리의 선언과도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시63:5에서도 ‘기름진것’은 영혼을 만족시키는 천적인 것을, ‘찬송하는입술’은 영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민18:12에서는 땅의 첫 열매까지 ‘기름’이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앞의 AC.352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처음 난 것이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을 의미했고, 여기서는 기름이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아벨이 ‘양떼의처음난것과그기름진것’을 드렸다는 짧은 표현 안에는 두 가지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거룩한 것도 주님께 속하고, 그 거룩함 안에 있는 사랑의 선과 생명도 주님께 속합니다. 아벨의 예배는 인간이 자기 안에서 만들어 낸 선을 주님께 자랑스럽게 내놓는 예배가 아니라, 자기 안의 모든 참된 선과 사랑의 근원이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예배입니다.
[3]에서 신32:14가 인용되면서 AC.353은 한 단계 더 넓은 원리를 밝힙니다. ‘천적인것들은헤아릴수없이많은종류와,그보다도더헤아릴수없이많은세부종류로이루어져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노래에는 ‘소의엉긴젖’, ‘양의젖’, ‘어린양의기름’, ‘바산에서난숫양과염소’, ‘밀의콩팥의기름’, ‘포도의피’와 같이 매우 다양한 자연적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각각이 천적인 것들의 서로 다른 종류와 세부 종류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다만 AC.353은 각각이 정확히 어느 종류의 천적 선을 뜻하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소의엉긴젖은이것’, ‘양의젖은저것’, ‘바산의숫양은이것’이라는 식으로 우리가 상응표를 더 만들어 붙이는 것은 스베덴보리보다 앞서 나가는 해석이 됩니다.
오히려 여기서 붙들어야 할 더 큰 원리는 천적인 사랑과 선의 헤아릴 수 없는 다양성입니다. 우리는 ‘사랑’, ‘선’, ‘체어리티’라는 말을 하나의 단순한 성질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실제 삶에서 무수한 형태와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한 사람을 위로하는 선과 잘못을 바로잡아 주는 선, 어린아이를 돌보는 선과 공동체의 질서를 지키는 선, 진리를 가르치는 선과 말없이 필요한 일을 감당하는 선은 모두 선에 속하면서도 그 질과 쓰임은 서로 다릅니다. 이것은 AC.353이 직접 각각의 사례를 열거한 것은 아니지만, ‘천적인것들의헤아릴수없는종류와세부종류’라는 원리를 우리의 삶에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예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획일적인 하나의 행동 양식이 아니라 각 사람과 공동체의 상태와 쓰임에 따라 무수한 형태로 받아들여집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상응을 읽는 방법에도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기름= 사랑’, ‘빛= 신앙’과 같은 기본적인 대응을 아는 것은 유익하지만, 상응을 단순한 암호표처럼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AC.353자체가 기름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천적인 것에는 헤아릴 수 없는 종류와 세부 종류가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자연물이 어떤 문맥에서, 어떤 다른 표상들과 함께, 어떤 교회적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상응은 자연물에 영적 단어 하나를 기계적으로 붙이는 방식이 아니라, 천국의 무수한 질서와 인간의 내적 상태가 자연계의 형상 안에 표현되는 살아 있는 관계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신32:14의 표현들을 두고 ‘속뜻이없다면단지말들에지나지않을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밀의콩팥의기름’이나 ‘포도의피’와 같은 표현은 문자적으로만 보면 매우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53은 그러한 낯선 세부조차 말씀 안에서 무의미하게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천적인 실재의 종류와 세부 종류를 담고 있다고 봅니다. 이것이 문자적 의미가 무가치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의 문자 안에 속뜻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 문자적 형상 하나하나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말씀의 속뜻은 문자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문자 안에 담긴 천국의 실재를 열어 보여 줍니다.
다시 창4:4의 아벨에게 돌아오면 이 긴 설명의 목적이 선명해집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양떼의처음난것’은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이며, ‘기름’은 역시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 곧 사랑에 속한 선입니다. 따라서 아벨의 제물은 ‘내가좋은것을만들어주님께드린다’는 인간 중심의 예배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모든 참된 사랑과 선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예배를 나타냅니다. 가인에게도 소산과 제물이 있었지만 그것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행위와 예배였습니다. 반면 아벨의 제물에는 체어리티와 사랑의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의 근원이 주님께 있다는 인정이 있습니다. 두 제물의 차이는 자연적인 재료가 아니라 내적 생명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AC.353의 핵심을 단지 ‘기름은천적인것을의미한다’는 상응 하나로만 기억해서는 부족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천적인 것이 ‘사랑에속한모든것’이며, 그 사랑의 근원이 오직 주님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신앙도 사랑에서 비롯될 때 살아 있고 천적이며, 체어리티와 체어리티의 모든 선 역시 그 사랑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과 예배와 행위 안에 ‘기름’이 있는가를 묻는다는 것은, 그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의 생명이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진리를 많이 알고 예배를 충실히 드리며 많은 일을 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 안에서 주님의 사랑이 이웃을 향한 선과 쓰임으로 살아 움직이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아벨이 드린 ‘기름’은 바로 그 살아 있는 사랑의 생명을 보여 줍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창4:1)
AC.339
앞의세장에서‘아담과그의아내’(manandhiswife)가태고교회를의미한다는사실은충분히밝혀졌으므로,이에대해서는의심의여지가없습니다.이것을인정한다면,그교회로말미암아이루어진잉태와출생역시앞에서설명한것과같은성격의것이었음이분명합니다.태고인들에게는이름을붙이고,그이름으로어떤것들을의미하게하며,그렇게해서계보를구성하는것이관례였습니다.교회에속한것들은서로이러한관계를이루기때문입니다.곧자연적인출생에서하나가다른하나로부터잉태되고태어나는것처럼,교회에속한것들도하나가다른하나로부터잉태되고태어납니다.그러므로말씀에서는교회에속한것들을‘잉태’(conceptions),‘출생’(births),‘자손’(offspring),‘갓난아이’(infants),‘어린아이’(littleones),‘아들’(sons),‘딸’(daughters),‘청년’(youngmen)등으로부르는것이일반적입니다.말씀의예언적부분에는이와같은표현들이매우많이나옵니다. In the three foregoing chapters it has been sufficiently shown that by the“manandhiswife”is signified the most ancient church, so that it cannot be doubted, and this being admitted, it is evident that the conception and the birth effected by that church were of the nature we have indicated.It was customary with the most ancient people to give names, and by names to signify things, and thus frame a genealogy.For the things of the church are related to each other in this way, one being conceived and born of another, as in generation.Hence it is common in the Word to call things of the church“conceptions,”“births,”“offspring,”“infants,”“littleones,”“sons,”“daughters,”“youngmen,”and so on.The prophetical parts of the Word abound in such expressions.
해설
AC.339는 앞으로 이어질 창4의 이름과 계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매우 중요한 글입니다. 바로 앞 AC.338에서 스베덴보리는 ‘아담과그의아내’를 태고교회로, 그 교회의 ‘첫번째자손,곧처음난것’을 신앙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이 사랑 안에 머물지 않고 ‘그자체로하나의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기 시작한 상태를 ‘가인’으로 나타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태고교회가 어떻게 ‘잉태’하고 ‘낳으며’, 신앙이나 교리에 속한 것이 어떻게 그 교회의 ‘자손’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AC.339는 바로 이 문제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인들에게는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으로 어떤 것을 의미하게 하며, 그렇게 해서 계보를 구성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에속한것들’도 자연적인 혈연관계와 비슷한 발생 관계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자연적인 출생에서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서 잉태되고 태어나지만, 영적인 의미에서는 하나의 교회적 상태가 다른 상태에서 생겨나고, 하나의 교리적 원리가 또 다른 교리적 상태를 낳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교회에 속한 것들을 ‘잉태’, ‘출생’, ‘자손’, ‘갓난아이’, ‘어린아이’, ‘아들’, ‘딸’, ‘청년’ 등의 가족과 출생의 언어로 표현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마지막에 ‘말씀의예언적부분에는이와같은표현들이매우많이나온다’고 덧붙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 원리는 창4의 이름들을 읽는 데 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속뜻 해설에서 가인과 아벨, 에녹과 이랏, 므후야엘과 므드사엘, 라멕 등을 읽을 때 중심이 되는 것은 개인들의 가족사를 재구성하는 일이 아니라, 그 이름들이 의미하는 교리적, 교회적 상태와 그 상태들의 발생 관계를 살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4의 계보를 읽으면서 우리가 계속 물어야 할 것은 ‘이사람은역사적으로누구였는가?’만이 아니라 ‘이이름은무엇을의미하며,그것은앞의어떤상태로부터생겨났고다시무엇을낳는가?’입니다. 그렇다고 곧바로 ‘그러므로이것은실제역사가아니라지어낸비유다’라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AC.339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설명하려는 핵심은 역사성 여부를 논증하는 데 있지 않고, 말씀의 이름과 계보 안에 교회에 속한 것들의 영적 발생과 파생이 담겨 있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잉태’와 ‘출생’이라는 표현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39가 이 둘의 세부 상응을 각각 따로 정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핵심은 분명합니다. 교회에 속한 것들은 서로 아무 관계 없이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생겨납니다. 이 원리를 우리의 내적 상태에 적용해 보면, 어떤 생각이나 원리가 마음에서 받아들여지고 자라다가 마침내 하나의 확고한 신앙이나 삶의 형태로 나타나는 과정을 ‘잉태’와 ‘출생’의 이미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AC.339의 직접적인 단어별 정의라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제시한 ‘하나가다른하나로부터잉태되고태어난다’는 원리를 인간의 내적 삶에 적용하여 이해한 것입니다.
바로 앞 AC.338의 가인과 연결하면 이 원리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태고교회에는 본래 사랑 안에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앙을 사랑 안에 있는 것으로만 보지 않고 ‘그자체로하나의것’으로 인식하고 인정하는 교리적 상태가 생겨났으며, 그것이 ‘가인’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그 상태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원리가 자리 잡으면 그 원리에서 다시 다른 교리적 상태들이 파생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인에게서 에녹이 나오고, 다시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으로 계보가 이어집니다. AC.331에서 에녹을 이 이단의 ‘확장’이라고 했고, AC.332에서는 이 하나의 이단에서 여러 이단이 생겨났으며 그 마지막 라멕에게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AC.339는 바로 그러한 앞의 개요가 왜 ‘아버지-아들-후손’이라는 계보의 형식으로 기록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해석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우리가 앞서 창4와 창5의 관계를 살피면서 중요하게 구별했던 문제에도 빛을 줍니다.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을 단순히 두 집안의 연대기로 놓고 ‘가인계열이먼저진행된뒤셋계열이시작되었는가?’, ‘두가문은정확히어느시점에함께존재했는가?’와 같은 질문만으로 접근하면 스베덴보리가 이 계보에서 읽는 핵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이 계보들은 태고교회 안에서 나타난 교리적, 교회적 상태들의 계승과 파생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가인계열과셋계열이나란히이어진다’고 말할 때에도 두 실제 가문의 정확한 역사적 병행 연표를 우리가 알고 있다는 뜻으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은 각각의 계보를 통하여 서로 다른 교회적 상태와 그 흐름을 보여 주며, AC.339는 그 계보를 무엇보다 그러한 영적 발생 관계로 읽도록 가르칩니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원리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영적 원리는 대개 혼자 머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된 진리가 선과 결합되어 받아들여지면 그것으로부터 또 다른 선한 생각과 애정이 생겨나고, 그것들은 다시 선한 말과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의 거짓된 원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 안에서 정당화하기 시작하면 그 거짓을 유지하기 위해 또 다른 거짓이 필요해지고, 그것이 다시 다른 악과 거짓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잉태하고낳는’ 것입니다. 이것은 AC.339의 직접적인 역사 서술이라기보다, 이 번호가 제시하는 발생과 파생의 원리를 우리 자신의 영적 삶에 적용해 본 것입니다.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이시며, 반대로 악과 거짓은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proprium으로 돌이킬 때 서로 연결되고 증식합니다.
바로 이 원리가 가인의 계보를 무겁게 만듭니다. AC.338에서 나타난 시작은 겉으로 보면 미세해 보입니다.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그자체로하나의것’으로 인식하고 인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AC.339가 보여 주는 계보의 원리에 따르면 하나의 교리적 상태는 그 자체로 고립되어 머무르지 않고 다른 상태들을 낳을 수 있습니다. 사랑과 신앙의 분리가 다시 그 분리를 설명하고 정당화하는 교리를 낳고, 그 교리가 다른 왜곡을 낳으며, 그렇게 파생이 계속될 수 있습니다. 창4의 계보는 바로 이러한 영적 발생의 연속을 보여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의 작은 분리를 ‘이정도는괜찮다’고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 라멕의 상태가 완성되어 있었다는 뜻은 아니지만, 처음 받아들인 원리 안에 그다음 상태들이 파생될 수 있는 방향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는 우리 각 사람의 삶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도 생각과 애정은 서로 아무 관계 없이 흩어져 있지 않습니다. 하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제 삶에서 살아가면 그 진리가 다른 선한 생각과 선택으로 이어질 수 있고, 반대로 하나의 거짓을 허용하고 자기 합리화하기 시작하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 또 다른 거짓을 받아들이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마음 안에서도 일종의 ‘계보’가 만들어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창4의 각 인물을 개인의 심리 단계와 기계적으로 일대일 대응시키는 방식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339의 직접적인 대상은 태고교회와 그 교회에 속한 것들의 발생 관계이며, 개인에게 적용할 때에는 ‘내가받아들이고사랑하는것이무엇을낳고있는가?’라는 영적 자기 성찰의 원리로 사용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따라서 AC.339는 창4의 낯선 이름들을 읽기 위한 단순한 사전 설명이 아닙니다. 앞으로 가인의 계보를 읽을 때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하나의 중요한 해석 열쇠입니다. 이름을 보면서 단지 사람을 찾는 데 머물지 않고 그 이름으로 의미된 교리적, 교회적 상태를 보고, 출생을 보면서 생물학적 혈통만을 따라가는 데 머물지 않고 무엇이 무엇으로부터 생겨났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AC.339를 읽고 난 뒤 창4의 계보 앞에서 계속 던질 수 있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것은무엇으로부터태어났으며,또무엇을낳고있는가?’ 이 질문을 붙들고 가인의 계보를 읽으면 창4는 더 이상 낯선 고대 이름들의 목록으로만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의 교회적 상태가 다른 상태를 낳고, 그 상태가 다시 또 다른 상태로 이어지는 영적 계보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우리 안에서 지금 어떤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또는 어떤 거짓을 허용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앞으로 무엇을 ‘낳게’ 될지를 주님 앞에서 살피게 됩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를 처음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왜이책은처음부터계속선과진리이야기인가?’선과 진리,사랑과 신앙,의지와 이해,그리고 이제AC.44에서는 듣는 것과 행하는 것까지 비슷한 구도가 계속 나타납니다.창세기에는 빛과 어둠,물과 땅,풀과 나무,해와 달,물고기와 새,짐승이 나오는데,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다시 인간 안의 선과 진리 이야기로 돌아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질문은AC를 처음 읽는 사람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입니다.그리고 사실 이 질문을 잘 이해하면 앞으로AC를 읽기가 훨씬 쉬워집니다.스베덴보리가 선과 진리를 수많은 교리 가운데 특별히 좋아하는 두 주제로 골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인간의 영적 생명과 거듭남을 설명할 때 이 둘의 관계가 매우 근본적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 인간을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사람에게는 무엇인가를 알고 생각하고 이해하는 면이 있고,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원하며 행하는 면이 있습니다.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크게 이해와 의지로 구별합니다.진리는 이해와 특별히 관계되고 선은 의지와 특별히 관계됩니다.그러나 이것을‘진리=이해,선=의지’라는 기계적인 공식으로만 외우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중요한 것은 사람이 참된 것을 알고 이해하는 것과,그것을 좋아하고 원하여 실제로 행하는 것이 하나의 삶을 이루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AC.44가 바로 그 문제를 매우 실제적인 언어로 보여 줍니다.말씀을‘듣는것’은 이해의 역할이고,그것을‘행하는것’은 의지의 역할입니다.사람은 들으면서 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무엇이 참인지 알면서도 그것을 원하지 않을 수 있고,신앙을 말하면서도 그 신앙에 따라 살지 않을 수 있습니다.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선과 진리의 문제는 추상적인 철학이 아니라‘내가아는진리가내가사랑하고행하는선과하나가되어있는가?’라는 삶의 문제입니다.
그러면 왜 창세기1장을 설명하면서 이 문제가 계속 나타날까요?지금 스베덴보리가 창조 이야기를 한 사람의 거듭남에 관한 속뜻으로 읽고 있기 때문입니다.거듭남은 한순간에 완성되지 않습니다.처음에는 진리가 비치고,서로 다른 것들이 구별되고,지식이 생기고,그 지식들이 살아나며,마침내 이해에 속한 것뿐 아니라 의지에 속한 것들도 새롭게 되어 갑니다.그러므로 창조의 날들이 진행될수록 선과 진리의 관계도 같은 모습으로 단순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점차 다른 단계에서 나타납니다.
이 점에서‘사랑과신앙’, ‘의지와이해’, ‘선과진리’, ‘행함과들음’을 완전히 같은 말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각각은 서로 다른 것을 가리키며 사용되는 문맥도 다릅니다.그러나 서로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신앙은 진리와 관계되고 사랑은 선과 관계되며,이해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기능과 관계되고 의지는 선을 받아들이고 행하는 것과 관계됩니다.그래서AC를 읽다 보면 서로 다른 용어들이 계속 선과 진리의 관계를 중심으로 연결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천국을 설명할 때도 선과 진리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생명은 단순히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 상태도 아니고,막연히 좋은 감정을 많이 가지고 있는 상태도 아닙니다.천사들의 생명 역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그것들이 결합된 삶과 관계됩니다.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거듭남도 결국 천국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며,선과 진리의 결합은 그 설명에서 계속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말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인간의 거듭남과 천국,그리고 궁극적으로 주님을 다룬다고 봅니다.따라서 말씀 속의 수많은 자연물과 사건이 속뜻에서 선과 진리,그리고 그것들의 여러 상태와 관계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그렇다고 성경의 모든 단어를‘이것은선,저것은진리’라는 두 칸짜리 표에 넣어 해석한다는 뜻은 아닙니다.상응은 훨씬 다양하고 문맥에 따라 세밀하게 달라집니다.다만 그 다양한 상응들이 결국 사람의 사랑과 신앙,의지와 이해,선과 진리의 상태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선과진리는둘중어느것이더중요한가?’라는 경쟁 구도로 읽지 않는 것입니다.진리를 많이 아는 것만으로 거듭나는 것도 아니지만, ‘마음만착하면진리는별로중요하지않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사람은 무엇이 선인지 알기 위해 진리가 필요하고,알게 된 진리는 실제 선한 삶을 향해야 합니다.AC.44에서 신앙의 지식이 먼저 사람 안에 심겨야 한다고 한 뒤 곧바로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의 결합을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AC에서 선과 진리가 계속 등장하는 것을‘또같은이야기’라고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오히려‘이번에는선과진리의관계가거듭남의어느단계에서,어떤모습으로나타나는가?’라고 물으며 읽으면 좋습니다.창조 첫째 날의 빛에서 말하는 진리와 여섯째 날의 이해와 의지의 관계는 똑같은 상태가 아닙니다.거듭남이 진행됨에 따라 같은 근본 문제가 점점 더 깊은 차원에서 다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선과 진리를 계속 말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사람의 영적 생명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그것들이 서로 결합하여 하나의 삶을 이루는 것과 깊이 관계되기 때문입니다.그래서AC를 읽을 때 선과 진리가 또 나왔다고 생각하기보다, ‘이번에는이둘이어떻게만나고있으며,아직무엇이분리되어있고,거듭남이그것을어떻게하나로만들어가는가?’라고 살펴보면 글의 흐름이 훨씬 선명해집니다.
그러면‘처음부터끝까지선,진리이야기만한다’는 첫인상도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같은 두 단어를 되풀이하는 책이라기보다,인간의 내면이 주님에 의해 어떻게 새롭게 창조되어 가는지를 선과 진리의 관계를 통해 아주 오랫동안,여러 각도와 여러 단계에서 추적하는 책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AC.42를 처음 읽으면 놀라운 장면을 계속 만나게 됩니다.스베덴보리는 겔29:3의 바로와 큰 악어,겔32:2의 바다와 강을 휘젓는 악어,사27:1의 리워야단과 바다의 용,렘51:34의 삼키는 큰 뱀을 차례로 인용하면서 그것들이 기억 지식과 그 일반 원리,그리고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신앙의 신비에 들어가려는 상태와 관계된다고 설명합니다.그러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이것을어떻게알았을까?’
먼저 분명히 할 것은 스베덴보리 자신이‘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의 속뜻을 단순한 개인적 성경 연구의 결과라고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이 저작 전체의 전제 자체가 말씀에는 문자적 의미 안에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내적 의미가 있으며,그것이 주님의 자비로 밝혀졌다는 것입니다.따라서 그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면 적어도‘스베덴보리는자신이말씀의내적의미에관한계시를받았다고이해했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그러면주님이나천사가옆에서한문장씩불러주었고스베덴보리는받아적었는가?’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그의 저술에는 영들과 천사들과의 대화,영계에서 보고 들은 것,어떤 것의 의미를 지각하거나 알도록 허락받았다는 진술 등이 매우 많이 등장합니다.그러나 이것들을 모두 하나의 방식으로 묶어‘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는천사가구술한책이다’라고 말하면 그의 저술 방식 자체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게 됩니다.
반대로‘성경을펼치면속뜻이화면처럼눈앞에자동으로나타났다’고 말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실제로 보고 들었다고 기록한 경험과,말씀의 내적 의미를 해설하는 작업은 서로 깊이 관련되어 있지만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닙니다.그가 어떤 한 절의 속뜻을 알게 되는 모든 순간에 정확히 어떤 인식 과정이 일어났는지를 우리가 재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실제‘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를 읽으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일관된상응의연결’입니다.예를 들어AC.42에서 큰 물고기가 기억 지식의 일반적인 것을 뜻한다고 한 뒤,스베덴보리는 그 뜻을 한 구절에만 기대지 않습니다.여러 선지서의 서로 다른 구절을 가져와 같은 상징이 문맥에 따라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앞으로AC를 계속 읽으면 물,땅,씨,나무,빛,새,짐승,애굽,앗수르,바벨론 같은 표현들이 한 번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에서 서로 연결되어 해석되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속뜻을‘단어마다비밀암호하나가붙어있는것’처럼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물고기=기억지식’, ‘새=이성적인것’이라는 대응표를 외운 뒤 모든 성경 구절에 기계적으로 대입하는 방식이 아닙니다.같은 표현도 문맥과 그것이 놓인 관계,긍정적 또는 부정적 의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AC.42에서‘큰바다짐승’이 좋은 창조의 일부로 등장하면서도,선지서에서는 인간 자신의 지혜와 결합된 부정적인 상태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내적 의미를 인간이 임의로 만들어 내는 비유적 해석으로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그의 설명에서 상응은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주님께서 세우신 질서에 근거합니다.따라서 그에게 속뜻은‘이구절을오늘내삶에이렇게적용해볼수있겠다’는 설교적 적용과는 성격이 다릅니다.우리는 그의 해석에 동의할 것인지 검토할 수 있지만,적어도 그가 무엇을 주장하는지는 정확하게 구별해야 합니다.그는 자신이 성경에 재미있는 상징적 의미를 덧붙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스베덴보리의 속뜻 설명을 읽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가계시를받았다고했으니아무것도묻지말고받아들여야한다’고 할 필요도 없고,반대로 한 구절만 떼어 놓고‘문자만보면이런뜻은전혀나오지않는다’며 즉시 버릴 필요도 없습니다.오히려AC를 계속 읽으면서 그가 같은 상징을 말씀 전체에서 어떻게 사용하는지,서로 다른 구절의 해석이 일관되는지,앞뒤의 교리적 맥락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AC.42의 겔32:2가 좋은 사례입니다.그 한 절만 처음 보면‘기억지식을수단으로삼아자기자신으로부터신앙의신비속으로들어가려는사람’이라는 해석은 매우 갑작스럽게 느껴집니다.그러나AC.40-42에서 물고기와 큰 물고기,기억 지식과 그 일반적인 것,인간의 지혜와 지성이라는 연결을 차례로 읽고 나면 적어도 스베덴보리가 어떤 구조 안에서 그 구절을 읽고 있는지는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그리고AC전체를 더 읽을수록 그 연결이 다른 곳에서도 반복되는지 검토할 수 있습니다.
결국‘스베덴보리는이것을어떻게알았는가?’라는 질문에는 두 층의 답이 필요합니다.스베덴보리 자신의 주장에 따르면 말씀의 내적 의미는 인간의 독창적인 추론으로 발명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밝혀진 것입니다.그러나 그 계시가 매 구절마다 정확히 어떤 심리적·지각적 과정으로 전달되었는지를 우리가 하나의 공식으로 재구성해서는 안 됩니다.우리가 그의 저작에서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영계와의 열린 교통을 주장했고,말씀의 내적 의미가 주님으로부터 밝혀졌다고 증언했으며,그것을 방대한 성경 구절과 상응의 연결 속에서 체계적으로 설명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어떻게이런뜻이나오지?’라는 어리둥절함을 그대로 가지고 읽어도 괜찮습니다.오히려 그 질문을 가지고 계속 읽는 것이 좋습니다.한두 구절에서 모든 것을 납득하려 하기보다AC전체를 따라가면서 같은 상응이 어떻게 되풀이되고,문맥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며,전체 말씀의 내적 의미 안에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확인하는 것 자체가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검토하는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