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14 심화

1. 장막·성막·성전은 같은 의미라면서 서로 다른 시대에 세워졌는가?’

 

AC.414를 읽으면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장막과 성막과 성전이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말하면서도, 고대에는 장막에서 예배를 드렸고 그 장막이 모독되기 시작하자 성막이 세워졌으며, 그 후에는 성전이 세워졌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세 가지가 같은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무엇이며, 예배의 장소가 바뀌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을 풀려면 무엇을 표상하는가?어떤 역사적 상태에서 사용되었는가?를 구별해야 합니다.

 

먼저 같은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세 건축물이 문자적으로 동일하다거나, 그 안에서 행해진 예배의 모든 절차가 같다는 뜻이 아닙니다. 장막은 가족이 거주할 수 있는 처소이고,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 가운데 세워진 예배의 처소이며, 성전은 이후에 세워진 건축물입니다. 이 차이는 문자적인 역사에서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공통된 의미는 이 서로 다른 처소들이 모두 주님에게 속한 거룩함을 표상한다는 데 있습니다. 외적인 형태는 달라져도 그 형태가 가리키는 거룩함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표상하게 된 이유를 태고교회의 예배에서 찾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각자의 가족 안에서 살며 장막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여기서 장막은 단지 비바람을 막아 주는 생활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삶과 예배가 이루어지는 처소였고, 스베덴보리는 그 예배를 사랑의 거룩함과 연결합니다. 따라서 장막의 의미를 이해할 때에는 천막이라는 물건 자체보다, 그 안에서 주님을 향하여 드려졌던 예배와 그 예배에 속한 사랑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AC.414는 사람들이 장막에서 불경한 예배를 행하며 그것을 모독하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장막이라는 물건이 더러워졌으므로 하나님께서 좋은 건물을 요구하셨다는 식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문제는 천막의 재료나 구조가 아니라 예배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거룩한 예배를 위해 사용되던 처소가 그와 반대되는 예배에도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와 관련하여 성막이 세워지고, 그 후에는 성전이 세워졌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예배 장소의 변화가 단순한 건축 기술의 발전만으로 설명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성막과 성전은 장막보다 더 높은 수준의 거룩함을 지닌 것입니까? AC.414는 오히려 태고교회의 장막이 후에 모독된 성전보다 더 거룩하게 여겨졌다고 말합니다.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합니다. 건물이 더 크고 견고해졌다는 사실이 그 안에서 드리는 예배까지 더 거룩해졌다는 증거는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의 장막을 특별히 언급하는 이유는 그 장막이 연결되어 있던 사랑의 예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장막·성막·성전의 순서를 외적인 규모나 화려함에 따라 영적 우열을 매기는 순서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27:4-6은 이 세 표현의 공통된 의미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근거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집에 살기를 구하고 성전에서 주님을 사모하며, 환난 날에는 초막과 장막 안에서 보호받고 장막에서 제사를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는 여러 이름의 거룩한 처소가 등장하지만, 다윗이 구하는 중심은 하나입니다. 그는 주님 가까이에 머물며 그분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그분의 보호 안에서 예배드리기를 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러한 문맥을 통해 장막과 성막과 성전이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합니다. 각각의 건축물을 따로 떼어 놓고 이름만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무엇을 구하고 누구에게 나아가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AC.414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장 높은 의미에서 주님께서 그분의 인성의 본질에 관하여 장막이시며 성막이시고 성전이시라고 말합니다. 이 설명에 이르면 세 처소가 공통으로 가리키는 중심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거룩함은 장막이나 성막이나 성전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거룩함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표상하는 처소가 거룩한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또한 천적 사람을 주님의 장막이나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사람이 독립적으로 거룩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거룩함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장막과 성막과 성전은 역사적으로 서로 다른 처소이고, 그것들이 사용된 예배의 상태도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속뜻에서 그 처소들은 모두 주님과 그분에게서 오는 거룩함을 표상한다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따라서 같은 의미라는 말은 역사적 차이를 지우는 말이 아니며, ‘서로 다른 시대에 세워졌다는 사실도 그 공통된 속뜻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이 말씀에서 붙들어야 할 것은 어느 시대의 건물이 가장 거룩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예배가 외적인 처소에 머무르지 않고 그 처소가 가리키는 주님과 그분의 사랑을 향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AC.414 심화 1)

 

 

 

AC.414 심화 2, ‘초막절은 출애굽의 광야 생활을 기억하는 절기인데 왜 태고교회의 사랑의 예배와

AC.414 심화2. ‘초막절은 출애굽의 광야 생활을 기억하는 절기인데 왜 태고교회의 사랑의 예배와 연결되는가?’ AC.414의 마지막 부분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이 장막에서 거룩한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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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4, 창4:20, ‘장막에 거주한다는 것은 왜 사랑의 거룩한 것을 뜻하는가? - 말씀의 장막과 성막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4‘장막에 거주한다’(dwell in tents)는 것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말씀에서 ‘장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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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4:20)

 

AC.414

장막에 거주한다(dwell in tents) 것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말씀에서 장막들(tents) 뜻하는 바를 보면 분명해집니다. 다윗의 시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That todwell in tentssignifies what is holy of lov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tentsin the Word. As in David:

 

1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누구오니이까 2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15:1, 2) Jehovah, who shall abide in thy tent? Who shall dwell in the mountain of thy holiness? He that walketh upright, and worketh righteousness, and speaketh the truth in his heart, (Ps. 15:12)

 

말씀에서는 장막에 거주한다(dwell in the tent) , 또는 성산에 거주한다(in the mountain of holiness) 것이 무엇인지를 사랑의 거룩한 것들, 정직하게 행하고 공의를 실천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다른 시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in which passage, what it is todwell in the tentorin the mountain of holinessis described by holy things of love, namely, the walking uprightly, and working righteousness. Again:

 

그의 소리가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19:4) Their line is gone out through all the earth, and their discourse to the end of the world. In them hath he set a tent for the sun, (Ps. 19:4)

 

여기서 (sun) 사랑을 나타냅니다. 다른 시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where thesundenotes love. Again: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61:4) I will abide in thy tent to eternities, I will trust in the covert of thy wings, (Ps. 61:4)

 

여기서 장막(tent) 천적인 것을, 날개 아래의 그늘(covert of wings)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것을 나타냅니다. 이사야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where thetentdenotes what is celestial, and thecovert of wingswhat is spiritual thence derived. In Isaiah:

 

다윗의 장막에 인자함으로 왕위가 굳게 것이요 위에 앉을 자는 충실함으로 판결하며 정의를 구하며 공의를 신속히 행하리라 (16:5) By mercy the throne has been made firm, and one hath sat upon it in truth, in the tent of David, judging and seeking judgment, and hasting righteousness, (Isa. 16:5)

 

여기서도 장막(tent) 사랑의 거룩한 것을 나타냅니다. 이는 공의로 판결함(judging judgment) 공의를 신속히 행함(hasting righteousness) 언급되는 데서 있습니다. 다른 곳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where also thetentdenotes what is holy of love, as may be seen by the mention ofjudging judgment,andhasting righteousness.Again:

 

우리 절기의 시온성을 보라 눈이 안정된 처소인 예루살렘을 보리니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33:20) Look upon Zion, the city of our appointed feast; thine eyes shall see Jerusalem a quiet habitation, a tent that shall not be moved away, (Isa. 33:20)

 

이는 하늘의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입니다. speaking of the heavenly Jerusalem.

 

[2] 예레미야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In Jeremiah: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야곱 장막의 포로들을 돌아오게 것이고 거처들에 사랑을 베풀 것이라 성읍은 폐허가 언덕 위에 건축될 것이요 (30:18) Thus said Jehovah, Behold, I bring again the captivity of Jacobs tents, and will have mercy on his dwelling places, and the city shall be builded upon her own heap; (Jer. 30:18)

 

장막의 포로 (captivity of tents) 천적인 , 사랑의 거룩한 것들이 황폐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아모스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thecaptivity of tentssignifies the vastation of what is celestial, or of the holy things of love. In Amos:

 

그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9:11) In that day will I raise up the tabernacle of David which is fallen; and will fence up the breaches thereof, and I will raise up its ruins, and I will build it as in the days of eternity, (Amos 9:11)

 

여기서도 성막(tabernacle) 천적인 것과 거기에 속한 거룩한 것들을 나타냅니다. 예레미야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where thetabernaclein like manner denotes what is celestial and the holy things thereof. In Jeremiah:

 

패망에 패망이 연속하여 땅이 탈취를 당하니 나의 장막과 휘장은 갑자기 파멸되도다 (4:20) The whole land is laid waste, suddenly are my tents laid waste, and my curtains in a moment. (Jer. 4:20)

 

장막이 무너지고 나의 모든 줄이 끊어졌으며 자녀가 나를 떠나가고 있지 아니하니 장막을 세울 자와 휘장을 자가 다시 없도다 (10:20) My tent is laid waste, and all my cords are plucked out, my sons are gone forth from me, and they are not; there is none to stretch my tent anymore, and to set up my curtains, (Jer. 10:20)

 

여기서 장막(tent) 천적인 것들을, 휘장들(curtains) 줄들(cords)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다른 곳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where thetentsignifies celestial things, andcurtainsandcordsspiritual things thence derived. Again:

 

너희는 그들의 장막과 떼를 빼앗으며 휘장과 모든 기구와 낙타를 빼앗아다가 소유로 삼고 (49:29) Their tents and their flocks shall they take; they shall carry off for themselves their curtains, and all their vessels, and their camels, (Jer. 49:29)

 

이는 아라비아와 동방의 자손들에 관한 말씀인데, 이들은 천적인 또는 거룩한 것을 지닌 사람들을 표상합니다. 다른 곳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speaking of Arabia and the sons of the east, by whom are represented those who possess what is celestial or holy. Again:

 

시온의 장막에 그의 노를 불처럼 쏟으셨도다 (2:4) Into the tent of the daughter of Zion the Lord hath poured out his wrath like fire, (Lam. 2:4)

 

이는 신앙의 천적인 또는 거룩한 것들이 황폐해지는 상태에 관한 말씀입니다. speaking of the vastation of the celestial or holy things of faith.

 

[3] 말씀에서 장막(tent)이라는 말을 천적인 것과 사랑의 거룩한 것들을 표상하는 사용하는 이유는, 고대에 사람들이 장막에서 거룩한 예배 의식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불경한 종류의 예배로 장막을 모독하기 시작하자 성막이 세워졌고, 후에는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따라서 장막은 후에 성막이, 그리고 그다음에는 성전이 나타내게 모든 것을 표상했습니다. 같은 이유로 거룩한 사람도 주님의 장막(tent), 성막(tabernacle), 성전(temple)이라고 불립니다. 장막(tent) 성막(tabernacle) 성전(temple) 같은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은 다윗의 시편에서 분명해집니다. The reason why the termtentis employed in the Word to represent the celestial and holy things of love is that in ancient times they performed the holy rites of worship in their tents. But when they began to profane the tents by profane kinds of worship, the tabernacle was built, and afterwards the temple, and therefore tents represented all that was subsequently denoted first by the tabernacle, and afterwards by the temple. For the same reason a holy man is called atent,atabernacle,and atempleof the Lord. That atent,atabernacle,and atemplehave the same signification, is evident in David:

 

4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가지 그것을 구하리니 내가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5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6이제 머리가 나를 둘러싼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27:4-6) One thing have I asked of Jehovah, that will I seek after, that I may remain in the house of Jehovah all the days of my life, to behold Jehovah in sweetness, and to visit early in his temple; for in the day of evil he shall hide me in his tabernacle; in the secret of his tent shall he hide me; he shall set me up upon a rock. And now shall my head be lifted up against mine enemies round about me, and I will offer in his tent sacrifices of shouting. (Ps. 27:46)

 

[4] 가장 높은 의미에서 주님은 그분의 인성의 본질에 관하여 장막(tent)이시며, 성막(tabernacle)이시고, 성전(temple)이십니다. 여기서 모든 천적 사람도 그렇게 불리며, 천적이고 거룩한 모든 역시 그렇게 불립니다. 태고교회는 뒤를 이은 교회들보다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며, 당시 사람들은 각자 자기 가족 안에서 따로 살면서 장막에서 그토록 거룩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장막은 후에 모독된 성전보다 거룩하게 여겨졌습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초막절이 제정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땅의 소산을 거두어들일 초막절을 지켰으며, 기간에는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장막에서 거주했습니다. (23:39-44, 16:13, 12:9) (AC.414) 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as to his human essence is thetent,” thetabernacle,” and thetemple”; hence every celestial man is so called, and also everything celestial and holy. Now as the most ancient church was better beloved of the Lord than the churches that followed it, and as men at that time lived alone, that is, in their own families, and celebrated so holy a worship in their tents, therefore tents were accounted more holy than the temple, which was profaned. In remembrance thereof the feast of tabernacles was instituted, when they gathered in the produce of the earth, during which, like the most ancient people, they dwelt in tents. (Lev. 23:3944; Deut. 16:13; Hosea 12:9)

 

해설

AC.414는 앞의 AC.412-413에서 제시한 야발의 속뜻을 말씀의 여러 구절로 뒷받침합니다. 야발은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고, 스베덴보리는 그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당연히 장막에 사는 일이 사랑의 거룩함과 관계됩니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이번 번호는 바로 그 질문에 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장막이라는 물건의 모양이나 용도만으로 뜻을 정하지 않고, 말씀에서 장막이 어떤 말들과 함께 등장하며 어떤 상태를 묘사하는지를 여러 본문에 걸쳐 살핍니다. 이 번호를 읽을 때 중요한 것은 인용 구절의 수를 따라가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구절들이 어떤 공통된 의미를 드러내는지 이해하는 것입니다.

 

먼저 시15:1-2주의 장막에 머무를 가 누구인지 묻고,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고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라고 답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말씀을 첫 근거로 제시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장막에 거한다는 것이 단순히 거룩한 장소에 들어가는 일이라면, 시편의 대답은 건물에 출입할 자격이나 예배 절차에 관한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 사람의 삶을 말합니다. 정직하게 행하고 공의를 실천하며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것은 사랑이 실제 삶에서 선으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장막에 거주한다는 속뜻은 거룩한 공간을 소유하거나 그 안에 머무는 외적인 행위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 그 사랑에 따라 살아가는 상태와 관련됩니다. 이것이 야발을 사랑의 거룩한 것들에 관한 교리와 연결하는 첫 번째 근거입니다.

 

다른 인용 구절들은 장막이 사랑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여러 방향에서 보여 줍니다. 19:4에서는 해를 위하여 장막을 베푸셨다고 하는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해가 사랑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61:4에서는 주의 장막에 머무는 것과 주의 날개 아래 피하는 것이 함께 나오며, 그는 장막을 천적인 것, 날개 아래의 그늘을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것으로 구별합니다. 16:5에서는 다윗의 장막 안에서 인자함으로 굳게 선 왕위와 공의로운 판결이 나타납니다. 33:20에서는 시온과 예루살렘을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으로 묘사합니다. 이 구절들이 모두 같은 장면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장막이 사랑과 거룩함, 그리고 그 사랑에 속한 삶과 연결된다는 점에서는 서로를 비추어 줍니다. 특히 장막과 날개 아래의 그늘을 구별한 시61:4는 천적인 것과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것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예레미야서와 아모스서의 인용은 장막의 의미를 반대 방향에서도 보여 줍니다. 30:18은 야곱의 장막이 포로 된 상태에서 돌아오는 일을 말하고, 9:11은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다시 세우는 일을 말합니다. 반면 렘4:20과 렘10:20에서는 장막이 무너지고 휘장과 줄이 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장막의 포로 됨을 사랑의 거룩한 것들이 황폐해진 상태로 설명하며, 장막은 천적인 것들을, 휘장과 줄은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것들을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이때 장막의 회복과 파괴를 단순히 천막의 재건이나 손실로만 읽지 않는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나타내므로, 장막이 무너지는 말씀은 교회 안에서 그 사랑에 속한 것들이 황폐해지는 상태를 이해하는 근거가 되고, 장막을 다시 세우는 말씀은 그와 반대되는 회복의 모습을 생각하게 합니다. 다만 이번 번호가 인용된 모든 물건과 인물의 속뜻까지 각각 풀이하는 것은 아니므로, 휘장··자녀·낙타 등의 의미를 이 자리에서 임의로 세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왜 하필 장막이 그러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는지 역사적인 이유를 설명합니다. 고대 사람들은 장막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장막이 불경한 예배로 모독되기 시작하자 성막이 세워졌고, 그 뒤에는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장막은 나중에 성막과 성전이 표상하게 된 거룩한 것들을 먼저 나타내는 표상이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장막이라는 재료나 건축 방식 자체가 성막이나 성전보다 거룩하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장막의 거룩함은 그것이 태고교회의 사랑의 예배와 연결되어 있다는 데 있습니다. 예배 장소가 장막에서 성막과 성전으로 바뀌어도, 그 장소들이 가리켜야 할 중심은 주님과 그분에게서 오는 거룩함입니다.

 

27:4-6은 이러한 연결을 한 본문 안에서 보여 줍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집에 살기를 구하고, 성전에서 사모하며, 환난 날에는 초막과 장막 안에서 보호받고, 장막에서 제사를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근거로 장막과 성막과 성전이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문자적인 건축물들이 동일하거나 말씀의 모든 문맥에서 각 표현의 세부 의미까지 언제나 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본문에서는 서로 다른 이름의 거룩한 처소들이 모두 주님께 나아가고 그분의 보호 안에 머무르며 예배드리는 일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느 건물이 거룩한가?보다 건물이 나타내는 거룩함은 어디에서 오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그 거룩함의 근원은 건물 자체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이번 번호의 마지막 부분은 그 의미를 가장 높은 차원까지 끌어올립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장 높은 의미에서 주님께서 그분의 인성의 본질에 관하여 장막이시며 성막이시고 성전이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천적 사람과 천적이고 거룩한 모든 것도 그렇게 불린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사람을 주님의 장막이나 성전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사람이 스스로 거룩함의 근원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거룩함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야발의 장막에 거주하는 라는 표현도 단순히 옛사람들의 생활 방식에 관한 기록을 넘어섭니다. 그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거룩한 것들에 관한 교리가 새 교회 안에 존재한다는 설명으로 이어집니다.

 

끝으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이 각자의 가족 안에서 살며 장막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렸고, 이를 기억하게 하는 절기로 초막절이 제정되었다고 설명합니다. 23:39-44와 신16:13은 수확 후 초막절을 지키는 일을 말하며, 12:9는 다시 장막에 거주하게 하시겠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레위기 본문은 출애굽 때 이스라엘 자손이 초막에 거주했던 일을 기억하게 한다고도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문자적인 절기의 기념 내용과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태고교회의 사랑의 예배에 관한 표상적 의미를 서로 지워 버리지 않고 함께 읽어야 합니다. AC.414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장막은 그 자체가 거룩함의 근원이어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그 사랑 안에서 드리는 거룩한 예배를 표상하기 때문에 사랑의 거룩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야발의 속뜻을 이해하기 위해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여러 장막을 길게 살펴본 이유입니다. (AC.414 해설)

 

심화

1. 장막·성막·성전은 같은 의미라면서 서로 다른 시대에 세워졌는가?’

 

AC.414 심화 1, ‘장막·성막·성전은 같은 의미라면서 왜 서로 다른 시대에 세워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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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4:19)

 

AC.407

교회 전체의 상태는 이와 같습니다. 교회는 시간이 흐르면서 참된 신앙에서 떠나 마침내 신앙이 완전히 없어지는 이르며, 이때 교회가 황폐해졌다(vastated) 합니다. 태고교회에서 가인파(Cainites) 불린 사람들에게도 그러했고, 홍수 고대교회에도 그러했으며, 유대교회에도 그러했습니다. 주님께서 강림하실 당시 유대교회는 이처럼 황폐한 상태에 있었으므로, 주님께서 자신들의 구원을 위하여 세상에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고, 주님을 믿는 신앙에 관해서는 더욱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강림 후에 존재했던 초기 기독교회도 그러했으며, 오늘날에는 신앙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을 만큼 완전히 황폐해졌습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언제나 어떤 핵심(nucleus) 남아 있으며, 신앙에 관하여 황폐해진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태고교회에서도 그러했습니다. 교회의 남은 부분(remnant) 홍수 때까지 존속했고, 사건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교회의 남은 부분을 노아(Noah)라고 부릅니다. The state of a church in general is thus circumstanced. In process of time it departs from the true faith until at last it comes to be entirely destitute of faith, when it is said to bevastated.This was the case with the most ancient church among those who were called Cainites, and also with 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 as well as with the Jewish church. At the time of the Lords advent this last was in such a state of vastation that they knew nothing about the Lord, that he was to come into the world for their salvation, and they knew still less about faith in him. Such was also the case with the primitive Christian church, or that which existed after the Lords advent, and which at this day is so completely vastated that there is no faith remaining in it. Yet there always remains some nucleus of a church, which those who are vastated as to faith do not acknowledge; and thus it was with the most ancient church, of which a remnant remained until the time of the flood, and continued after that event. This remnant of the church is calledNoah.

 

해설

AC.407은 앞의 AC.405-406에서 설명한 라멕의 황폐를 교회 전체의 역사라는 더 넓은 관점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라멕은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의미하며, 그가 사람과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씀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을 나타냅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황폐가 가인의 계보에서만 일어난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교회가 시간이 흐르면서 참된 신앙에서 떠날 때 반복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황폐(vastation)는 이번 문맥에서 교회가 참된 신앙을 잃어 마침내 신앙이 전혀 남아 있지 않게 된 상태입니다. 따라서 황폐를 단순히 교회의 외적인 쇠퇴나 건물과 제도의 소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외적으로 존속하더라도 그 안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과 체어리티에 결합된 참된 신앙이 사라진다면, 스베덴보리의 설명에서는 황폐한 상태에 이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인 규모가 작아졌다는 사실만으로 그 교회가 황폐해졌다고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이번 번호가 다루는 것은 교회의 내적인 신앙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황폐의 사례로 태고교회에서 가인파라 불린 사람들, 홍수 후 고대교회, 유대교회, 그리고 초기 기독교회를 차례로 언급합니다. 여기서 태고교회 전체와 가인파를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처음 사례로 지목하는 것은 태고교회에 속했던 사람들 가운데 가인파라 불린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계열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을 태고교회의 모든 사람이 처음부터 가인과 같은 상태였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홍수 후 고대교회와 유대교회에 관한 언급도 같은 논지를 이어 갑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가 처음의 참된 신앙에서 점차 떠나 황폐에 이르는 일이 여러 교회에서 반복되었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주님의 강림 당시 유대교회가 주님께서 구원을 위하여 세상에 오실 것을 알지 못했고 주님을 믿는 신앙에 관해서는 더욱 알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그 교회의 영적 상태를 해석하는 방식으로 읽어야 합니다. 당시 모든 유대인이 주님에 관한 동일한 지식과 태도를 가졌다는 역사적·사회적 일반화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초기 기독교회에 관한 설명에서도 시점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강림 후에 존재했던 초기 기독교회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황폐에 이르렀으며, 자신의 시대에는 신앙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을 만큼 황폐해졌다고 진술합니다. 여기서 오늘날AC가 집필되던 스베덴보리의 시대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별도의 검토 없이 오늘날의 모든 기독교회와 모든 신자에 대한 현재적 사실 판단으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스베덴보리가 교회의 황폐를 어떻게 이해했는지에 집중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의 쇠퇴를 설명한 직후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전환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언제나 어떤 핵심이 남아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nucleus)은 교회가 황폐해졌다고 해서 교회에 속한 모든 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황폐해진 사람들은 그 핵심을 인정하지 않지만, 그들의 인정 여부와 관계없이 교회의 남은 부분은 존속합니다. 따라서 교회의 황폐와 교회의 완전한 소멸을 동일하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 점에서 이번 번호의 핵심(nucleus)남은 부분(remnant)은 서로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교회에 언제나 어떤 핵심이 남는다고 말한 뒤, 태고교회에서도 그 교회의 남은 부분이 홍수 때까지 존속했고 홍수 이후에도 계속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남은 부분을 노아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노아는 이번 문맥에서 단순히 홍수 이야기의 한 인물을 넘어, 황폐해진 태고교회로부터 보존되어 이어지는 교회의 남은 부분을 나타냅니다.

 

다만 여기서 남은 부분을 곧바로 개인의 거듭남에서 말하는 기술적 의미의 리메인스와 동일시하지는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번 번호는 교회 전체의 황폐와 그 가운데 보존되는 교회의 핵심을 다루고 있습니다. 개인 안에 보존되는 리메인스와 연결하여 생각할 여지는 있지만, 그 관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려면 관련 AC 본문을 더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번에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사용한 핵심교회의 남은 부분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살리는 편이 정확합니다.

 

이제 가인의 계보와 노아의 관계도 조금씩 드러납니다. 가인으로 시작된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는 라멕에게서 신앙마저 남아 있지 않은 황폐에 이릅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역사는 그 황폐로 완전히 끝나지 않습니다. 그 교회의 남은 부분이 보존되어 홍수를 지나서도 계속되며, 그 남은 부분이 노아라는 이름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계보에서 라멕으로 이어지는 흐름과 노아로 이어지는 흐름은 교회의 황폐와 보존이라는 두 측면에서 함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섭리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참된 신앙에서 떠나 황폐해지더라도 주님께서는 교회의 모든 것이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새로운 교회로 이어질 수 있는 핵심을 보존하십니다. 물론 이번 번호는 그 핵심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로 이루어졌는지, 어떤 방식으로 보존되었는지, 홍수 이후의 교회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 내용은 노아와 홍수에 관한 이어지는 AC에서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황폐 가운데에서도 교회의 남은 부분이 존속한다는 사실만큼은 이번 번호에서 분명하게 제시됩니다.

 

따라서 AC.407을 읽을 때에는 교회의 황폐에 관한 진술만큼이나 그 뒤에 나오는 그러나에 주목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교회의 황폐를 열거한 뒤에도 교회에는 언제나 어떤 핵심이 남는다고 말합니다. 황폐해진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핵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태고교회의 남은 부분은 홍수를 지나서도 계속되었고, 그 교회의 남은 부분을 노아라고 부릅니다. 결국 AC.407은 한 교회의 쇠퇴를 설명하면서도, 그 쇠퇴를 넘어 계속되는 교회의 보존을 함께 보여 주는 번호입니다. (AC.407 해설)

 

 

 

AC.408, 창4:19, ‘교회가 황폐해진 뒤에야 새 아침이 밝는 이유 - 거룩한 것의 모독과 새로운 시작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8 교회가 더 이상 아무런 신앙도 남아 있지 않을 만큼 황폐해졌을 때, 그때 비로소, 그 이전이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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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6, 창4:19, ‘라멕은 왜 신앙의 황폐를 의미하는가? - 사람은 신앙을,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6‘라멕’(Lamech)이 황폐(vastation), 곧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뒤에 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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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4:17)

 

AC.403

이제 우리는 성읍(city)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부분 전체가 역사 형식(historical form)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문자적 의미(sense of the letter)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가인이 성읍을 세우고 그것을 에녹이라 불렀던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문자적 의미로부터 그들은 또한 가인이 아담의 장자에 불과했음에도 이미 땅에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없지만 말입니다. 역사적 연속(historical series)에는 이러한 것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태고인들(most ancient people) 모든 것을 표상적 유형들(representative types) 아래 역사 형식(form of a history)으로 배열하는 익숙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에게 지극히 즐거운 일이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것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We have now seen what acitysignifies. But as all this part of Genesis is put into a historical form, to those who are in the sense of the letter it must seem that a city was built by Cain, and was called Enoch, although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they must also suppose that the land was already populous, notwithstanding that Cain was only the firstborn of Adam; the historical series has this in it. But as we observed above, the most ancient people were accustomed to arrange all things in the form of a history, under representative types, and this was to them delightful in the highest degree, for it made all things seem to be alive.

 

해설

AC.403은 창세기 4장을 읽는 데서만 중요한 번호가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초반부 전체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해석 원리입니다. 앞의 AC.402에서는 성읍이 실제 성읍 자체보다 교리적인 것 또는 이단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왜 창세기 본문은 마치 실제 인물들이 태어나고, 성읍을 세우고, 그 성읍에 이름을 붙인 것처럼 역사 이야기의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AC.403은 바로 그 질문에 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창세기의 부분 전체가 역사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문자적 의미만을 따라 읽으면 가인이 실제로 성읍을 세우고 그 이름을 에녹이라 불렀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본문이 그렇게 보이도록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역사 형식을 문자 그대로만 밀어붙일 때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아담의 장자에 불과한데도 이미 성읍을 세울 만큼 많은 사람이 땅에 살고 있었다고 생각해야 하는 난점이 생긴다고 지적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단순히 가인의 아내는 어디에서 왔는가? 같은 역사적 난제를 해결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이야기는 처음부터 실제 사건들의 연대기적 기록만을 목적으로 쓰인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의 답은 그렇지 않다는 쪽입니다. 창세기 초반의 이 부분은 영적인 실재를 역사적인 형식 아래 배열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역사적 연속(historical series)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가인이 태어나고, 아벨을 죽이고, 놋 땅에 거하고, 에녹을 낳고, 성읍을 쌓는 일련의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하나의 연속된 역사처럼 전개됩니다. 그러나 그 속뜻에서는 교회의 상태들이 서로 이어지고, 하나의 교리적 상태가 다음 상태를 산출하며, 사랑과 신앙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하고 쇠퇴하는지가 하나의 영적 연속으로 펼쳐집니다. 문자적 역사 형식은 그 영적 연속을 담는 외적 그릇인 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태고인들의 사고방식에서 찾습니다. 태고인들은 모든 것을 표상적 유형들 아래 역사 형식으로 배열하는 익숙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표상적 유형들(representative types)이란 자연적인 인물, 장소, 사건, 사물 등을 통하여 영적이고 천적인 실재를 나타내는 형식을 말합니다. 곧 추상적인 교리나 영적 상태를 직접 개념적으로 설명하기보다 사람과 장소와 사건의 형태로 살아 있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적 성격과도 잘 연결됩니다. 태고인들은 영적인 것을 자연적인 것과 분리된 추상 개념으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자연계의 모든 것 속에서 영적인 의미를 느끼고 보았으며, 자연적인 형상들을 통해 천적이고 영적인 실재를 지각하는 데 익숙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영적 진리를 이야기와 인물과 장소의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 단순한 문학적 장식이 아니라 매우 자연스러운 사고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방식이 그들에게 지극히 즐거운 이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모든 것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AC.403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영적 진리를 단지 추상적인 명제와 정의로만 전달하면 개념으로 머물 수 있지만, 그것을 사람과 사건과 장소의 형식으로 표현하면 진리가 움직이고 관계를 맺으며 살아 있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가인과 아벨, 에덴과 놋, 에녹과 성읍은 단순한 추상어가 아니라 영적 상태들이 살아 움직이는 하나의 이야기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창세기 초반의 서술은 일종의 살아 있는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교리적 오류가 파생된다고 한 문장으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것을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고, 놋 땅에 거하고, 에녹을 낳고, 성읍을 쌓는 이야기로 펼쳐 보여 줍니다. 그러면 하나의 교리적 명제가 인간의 선택과 관계와 결과를 가진 살아 있는 서사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AC.403을 근거로 창세기 초반은 역사적 의미가 전혀 없고 순전히 만들어 이야기다라고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강조하는 것은 역사 형식표상적 유형들입니다. 그의 관심은 문자적 형식 뒤에 있는 속뜻을 밝히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에서 우리가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부분을 단순한 문자적 연대기로만 읽지 않고, 영적인 실재를 역사 형식 아래 배열한 말씀으로 읽는다는 정도입니다.

 

또한 역사 형식이라고 해서 내용이 임의적이거나 무질서하게 꾸며졌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역사적 연속이라고 부른 것처럼, 사건들의 순서와 관계 자체가 영적 상태들의 질서와 진행을 담고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보다 먼저 나오고, 아벨을 죽인 뒤 놋 땅에 거하며, 그 뒤 에녹과 성읍이 나오는 순서는 임의적인 배열이 아닙니다. 각각이 앞의 상태에서 다음 상태로 이어지는 영적 연속을 표현합니다.

 

이 점은 AC.399-402의 흐름을 다시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가인이라는 분열에서 에녹이라는 새로운 분열이 산출되고, 그것이 가르침으로 형성되며, 다시 성읍이라는 교리적 전체가 만들어졌습니다. 만일 이것을 추상적인 교리 설명으로만 기록했다면 매우 건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것을 출생과 이름과 성읍 건설이라는 이야기로 표현했습니다. 바로 이렇게 함으로써 영적 변화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따라서 AC.403은 우리가 창세기 초반을 읽는 태도에도 중요한 기준을 줍니다. 문자적 이야기를 무시하고 곧바로 속뜻으로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 이야기의 흐름을 충분히 따라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역사 형식 자체가 속뜻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먼저 나오고, 누가 누구를 낳고, 어디로 이동하며, 무엇을 세우고, 무엇이라 이름하는지가 모두 영적 연속을 담는 표상적 형식입니다.

 

동시에 문자적 이야기에서만 멈추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말씀의 깊이는 그 역사 형식 안에 교회의 상태, 인간의 거듭남, 사랑과 신앙의 관계, 선과 진리의 질서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자적 의미와 속뜻은 경쟁하는 두 층위라기보다, 외적 형식과 그 안에 담긴 내적 생명의 관계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AC.403의 마지막 표현, 모든 것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말은 우리가 왜 말씀의 표상과 상응을 공부하는지까지 생각하게 합니다. 상응을 공부하는 목적은 단어마다 뜻을 붙여 놓는 일종의 암호 해독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 속 인물과 사건과 장소가 영적 실재와 연결되면서 다시 살아 움직이도록 보는 데 있습니다. 가인 = 신앙, 아벨 = 체어리티, 성읍 = 교리라고 대응표만 외운다면 아직 태고인들이 느꼈던 그 생명성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그 관계들이 하나의 살아 있는 영적 서사로 움직이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AC.403은 창세기 초반의 속뜻을 읽는 하나의 중요한 안내문입니다. 태고인들은 영적 실재를 표상적 유형들 아래 역사 형식으로 배열했고, 그 방식은 모든 것을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인물과 장소와 사건들은 단순한 이름과 지명이 아니라 교회의 상태와 인간 마음의 변화를 살아 있는 역사처럼 보여 주는 표상적 형식입니다.

 

결국 AC.403이 말하는 것은 역사를 버리고 상징만 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의 역사적 형식이 왜 그렇게 구성되었는지를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그 형식 안에서 영적 실재가 인물과 사건과 장소를 통하여 살아 움직입니다. 가인의 성읍도 바로 그렇게 읽어야 합니다. 단순히 고대의 한 사람이 세운 도시가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어떻게 가르침을 낳고 교리적 세계를 형성해 갔는지를 살아 있는 역사 형식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태고인들이 즐겨 사용했던 표상적 서술 방식이며,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초반의 속뜻을 읽는 기본 관점입니다. (AC.403 해설)

 

 

 

AC.404, 창4:18, ‘가인의 계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 최초의 이단에서 파생된 여러 이단들’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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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2, 창4:17, ‘성읍은 왜 교리를 의미하는가? - 거룩한 예루살렘에서 가인의 성읍까지’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2가인이 ‘쌓은 성읍’(city that was built)이 그 이단에서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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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2 심화

1.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

 

AC.162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뜻밖에 느껴지는 문장이 있습니다. ‘ 천국은 하나의 천적 인간인데, 이는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창1과 창2에서 천적 인간이라는 표현은 거듭남의 가장 깊은 상태에 이른 사람이나 태고교회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데 여러 차례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갑자기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앞에서 천적 인간이라 했던 사람들은 무엇이며, 왜 여기서는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AC.162가 무엇을 설명하려는지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이 천적 기원들’, 곧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흘러나온다고 말합니다. 이어 온 천국이 하나의 천적 인간이라고 하고, 그 이유를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며 주님께서 천국의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시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강조점은 누가 천적 상태에 이를 수 있는가보다 천적인 것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에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창2에서 계속 배워 온 질서와도 같습니다. 지혜와 지성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고 주님에게서 옵니다. 선과 진리도 인간이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AC.149에서는 더 나아가 오직 주님만이 본래적으로 자기 자신의 것, 곧 주님의 proprium을 가지고 계시며, 주님의 proprium은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proprium은 그 자체로 생명이 아니지만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된다는 것은 인간 자신이 천적인 것의 근원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인 생명을 받아 그 질서 안에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라는 말과 태고교회의 사람들이 천적 인간이었다는 말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천적인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본래적으로 천적 인간이십니다. 반면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만큼 천적 인간이 됩니다. AC.155에서 천사들이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퍼셉션한다고 한 것도 같은 질서를 보여 줍니다. 천사가 천사인 까닭도, 천적 인간이 천적 인간인 까닭도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AC.162  천국은 하나의 천적 인간이라고 한 뒤 곧바로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천국의 모든 천사를 하나의 거대한 사람으로 상상하라는 데 우선적인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맥에서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천국의 천적인 성질 자체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입니다. 본문도 주님께서 천국과 천적 인간의 모든  안에서 모든 것이시므로, 천국과 천적 인간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천적이라 한다고 설명합니다. 천국은 스스로 천적인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 말미암아 천적입니다.

 

이 점은 이어지는 혼인의 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지상의 혼인이 천적 혼인으로부터 파생되어야 한다고 할 때, 그 천적 혼인의 가장 깊은 중심에도 한 분 주님이 계십니다. AC.162가 천적 혼인을   주님과 하나의 천국,  머리가 주님이신 하나의 교회라고 설명하는 이유입니다. 혼인의 하나 됨도 인간 둘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독립적인 하나 됨이 아니라, 그 본과 질서를 한 분 주님에게서 받습니다.

 

따라서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라는 문장은 인간이나 천사의 천적 상태를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천적인 모든 것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밝히는 말입니다.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고 천국이 천적 천국이 되는 것은 주님과 별도로 천적인 무엇을 소유하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생명과 질서를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짧은 문장은 지금까지 창2가 계속 가르쳐 온 한 가지 질서를 다시 가장 깊은 곳에서 확인합니다. ‘생명의 근원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AC.162 심화 1)

 

 

 

AC.162, 창2:24, ‘혼인의 법’(the law of marriages)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2:24) AC.162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은 천적 기원들, 곧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온 천국은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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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4:15)

 

AC.393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말씀의 속뜻을 계속 밝혀 나가기 전에, 신앙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태고교회는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는 어떠한 신앙도 인정하지 않는 성격의 교회였으며, 심지어 신앙을 따로 언급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통하여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퍼셉션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한 천적 천사들도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인류가 계속 이러한 성격으로 있을 없고,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여 신앙을 자체로 하나의 교리로 만들 것이 예견되었으므로, 그것들이 실제로 분리되도록 허용하시되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섭리하셨습니다. 신앙을 통하여, 다시 말해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통하여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체어리티를 받을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식(cognitio), 듣는 것이 먼저 오고, 지식 또는 들음을 통하여 체어리티,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가 주님으로부터 주어지게 하셨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분리될 없어야 아니라 신앙에서 주된 것을 이루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태고교회에 있었던 퍼셉션을 대신하여,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을 통하여 얻어지는 양심이 뒤를 이었습니다. 양심은 무엇이 진리인지를 딕테이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딕테이트하였는데, 이는 주님께서 말씀에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홍수 후의 교회들은 대부분 이러한 성격이었으며, 주님의 강림 원시교회 또는 초대교회도 그러했습니다. 천적 천사들과 영적 천사들이 구별되는 것도 바로 이것에 의해서입니다. Before we proceed to elucidate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s before us, it is necessary to know how the case is with faith. The most ancient church was of such a character as to acknowledge no faith except that which is of love, insomuch that they were unwilling even to mention faith, for through love from the Lord they perceived all things that belong to faith. Such also are the celestial angels of whom we have spoken above. But as it was foreseen that the human race could not be of this character, but would separate faith from love to the Lord, and would make of faith a doctrine by itself, it was provided that they should indeed be separated, but in such a way that through faith, that is, through the knowledges of faith, men might receive from the Lord charity, so that knowledge [cognitio] or hearing should come first, and then through knowledge or hearing, charity, that is, love toward the neighbor, and mercy, might be given by the Lord, which charity should not only be inseparable from faith, but should also constitute the principal of faith. And then instead of the perception they had in the most ancient church, there succeeded conscience, acquired through faith joined to charity, which dictated not what is true, but that it is true, and this because the Lord has so said in the Word. The churches after the flood were for the most part of this character, as also was the primitive or first church after the Lords advent, and by this the spiritual angels are distinguished from the celestial.

 

해설

AC.393은 가인의 표에 대한 설명을 잠시 멈추고 신앙의 역사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번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말씀의 속뜻을 계속 밝혀 나가기 전에, 신앙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어질 가인의 표를 이해하려면 먼저 태고교회에서 신앙과 사랑이 어떤 관계에 있었고, 이후 그 관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AC.393은 단순한 삽입 설명이 아니라 AC.392에서 말한 분리된 신앙의 보존을 이해하는 교리적 열쇠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에 속한 신앙외에는 어떠한 신앙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이 신앙을 따로 언급하려 하지도 않았다는 설명입니다. 그들에게 사랑과 신앙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두 개의 별도 항목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 있으면서 그 사랑을 통하여 신앙에 속한 것들을 퍼셉션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어떤 교리를 배우고 그것이 참이라고 믿은 다음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내적으로 퍼셉션했습니다. 그래서 사랑과 신앙을 따로 떼어 나는 이것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 자체가 그들의 본래적 질서와 맞지 않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천사들도 이와 같다고 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상태와 천적 천사의 상태 사이에 깊은 상응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천적 상태에서는 사랑이 중심이며 진리는 그 사랑 안에서 퍼셉션됩니다. 진리를 먼저 지적으로 확보하고 그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 나아가는 질서가 아니라, 선 안에서 진리를 보는 질서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천적 인간은 사랑에서 신앙으로라고 정리해 온 이유입니다.

 

그러나 인류가 계속 그러한 상태에 머물 수 없을 것이 예견되었습니다. 인간은 결국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고’, 신앙을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교리로 만들게 됩니다. 이것이 가인으로 표상된 분리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 분리를 원하셨다고 이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분리는 인간의 타락에서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이 그렇게 될 것을 예견하시고, 이미 낮아진 상태에서도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섭리하셨습니다.

 

그 새로운 길이 바로 신앙에 관한 지식들에서 체어리티로나아가는 질서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퍼셉션했다면, 이후의 인간에게는 먼저 신앙에 관한 지식이 주어집니다. 사람은 말씀을 듣고 배우며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지식과 들음을 통하여 주님께서 체어리티, 곧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를 주십니다. 따라서 순서는 달라집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것을 퍼셉션했다면, 이후의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오고 그 지식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형성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먼저 지식만 충분히 쌓으면 나중에 자동으로 체어리티가 생긴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393은 체어리티가 주님으로부터 주어진다고 두 번이나 강조합니다. 지식 자체가 체어리티를 생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진리를 듣고 배우는 것은 주님께서 사람에게 체어리티를 주실 수 있는 수단과 길이 됩니다. 사람이 그 진리를 받아들이고 삶으로 행하려 할 때 주님께서 그 안에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를 형성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질서에서도 생명의 근원은 여전히 주님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주어진 체어리티가 신앙과 분리될 없어야 아니라 신앙에서 주된 것을 이루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순서와 주도권을 명확히 구별합니다. 시간적·교육적 순서에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질서와 주도권에서는 체어리티가 주된 것입니다. 이것은 AC.363에서 살펴본 원리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신앙이 먼저 배워질 수 있지만, 신앙이 지배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여 나아가야 하며,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과 주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이 먼저다라는 말을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사람이 말씀을 듣고 진리를 배우는 교육적 순서에서 신앙의 지식이 먼저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본질적이고 우월하다는 뜻입니다. AC.393은 첫 번째 의미는 인정하지만 두 번째 의미는 분명히 부정합니다. 지식과 들음은 먼저 올 수 있지만, 그것을 통해 주님께서 주시는 체어리티가 신앙의 주된 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퍼셉션과 양심의 차이가 등장합니다. 태고교회에는 퍼셉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는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을 통하여 얻어지는 양심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습니다. 이 양심은 퍼셉션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매우 정밀하게 양심은 무엇이 진리인지를 딕테이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딕테이트한다고 말합니다.

 

이 차이는 처음에는 미묘해 보이지만 매우 큽니다. 퍼셉션을 가진 태고교회 사람은 사랑으로부터 어떤 것이 선하고 참된지를 내적으로 알아차렸습니다. 반면 양심을 가진 영적 인간은 먼저 말씀을 통해 진리를 배웁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에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것은 진리이다라는 내적인 딕테이트를 받습니다. 즉 양심이 독립적으로 새로운 진리를 발견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계시되고 배운 진리를 진리로 인정하고 그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앞의 AC.359AC.370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AC.359에서는 가인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conscience dictated’,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했습니다. 반면 AC.370에서는 같은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체어리티에 관하여 그들에게 어떤 딕테이트를 주는, 내면에서 오는 어떤 퍼셉션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두 표현을 억지로 하나로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AC.393은 태고교회에 고유한 퍼셉션과 이후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을 통해 형성되는 양심이 서로 다른 영적 기능임을 분명히 합니다. 따라서 앞의 표현 차이도 그대로 보존하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과도기적 상태 안에서 퍼셉션의 어떤 흔적과 양심이라는 표현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조심스럽게 읽어야 합니다.

 

특히 AC.393홍수 후의 교회들은 대부분 이러한 성격이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홍수 후 고대교회의 양심을 시대적으로 무분별하게 섞어서는 안 됩니다. 홍수 후의 영적 교회에서는 말씀과 신앙의 지식이 먼저 주어지고, 그것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며, 그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으로부터 양심이 형성됩니다. 이것이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와 구별되는 영적 교회의 질서입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강림 후 원시교회 또는 초대교회도 이러한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히 홍수 직후 어느 고대 종교집단만의 특수한 구조가 아닙니다. 사람이 말씀의 진리를 먼저 듣고 배우며, 그 진리를 삶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주님에게서 체어리티를 받고, 그 결과 양심이 형성되는 것은 영적 교회의 기본적인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차이가 천적 천사와 영적 천사를 구별한다고 말합니다. 천적 천사는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하고, 영적 천사는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 인도되며 양심의 질서 안에서 살아갑니다. 둘 가운데 하나가 천국이고 다른 하나가 열등하여 천국이 아니라는 뜻은 아닙니다. 둘 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지만 그 받아들이는 방식과 질서가 다릅니다. 이것이 천적과 영적의 중요한 구별입니다.

 

이제 AC.392가인의 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이 사랑으로부터 직접 신앙에 속한 것을 퍼셉션하는 태고교회의 상태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시키기 시작했을 때, 주님께서는 단순히 그 신앙을 없애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신앙의 지식이 보존되게 하시고, 훗날 그 지식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분리된 신앙을 보존하셨다는 것은 분리를 승인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에게도 다시 체어리티가 주어질 수 있도록 신앙의 지식을 구원의 수단으로 보존하셨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인의 표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것은 타락이지만, 그렇다고 신앙에 관한 모든 지식을 파괴해 버리면 이후의 인간은 무엇을 통하여 체어리티로 인도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인간의 상태가 낮아진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길을 마련하십니다. 사랑에서 직접 진리를 퍼셉션할 수 없게 된 사람에게 말씀을 듣게 하시고, 신앙의 지식을 배우게 하시며, 그 지식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시고,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으로부터 양심을 형성하십니다.

 

따라서 AC.393은 단순히 옛날에는 퍼셉션이 있었고 나중에는 양심이 생겼다는 교회사적 설명이 아닙니다.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길을 계속 이어 가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 줍니다. 인간이 더 이상 천적 방식으로 주님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을 때 주님께서는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더 외적인 길을 통하여 다시 내적인 사랑과 체어리티로 인도하십니다.

 

결국 AC.393의 핵심은 순서는 바뀌었지만 목적은 바뀌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나왔습니다. 이후 영적 교회에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오고 그것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독립하여 생명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분리될 수 없으며 신앙에서 주된 을 이루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가인의 신앙을 보존하신 것도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입니다. 분리된 신앙 자체를 영구히 존속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가 주어지고 신앙과 사랑의 결합이 회복될 수 있도록 길을 남겨 두신 것입니다.

 

 

 

AC.394, 창4:15, ‘가인의 표와 천국의 결혼 - 분리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4이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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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2, 창4:15,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시다 - 분리된 신앙까지 보존하시는 이유’ (AC.392-39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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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4:9)

 

AC.371

여호와께서 말씀하심(speaking of Jehovah)으로 태고교회 사람들은 퍼셉션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에게 지각하는 능력을 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퍼셉션은 사랑이 주된 것이었던 동안에만 계속될 있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그치고, 결과 이웃을 향한 사랑도 그치자 퍼셉션은 소멸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남아 있는 만큼 퍼셉션도 남아 있었습니다. 퍼셉션의 능력은 태고교회에 고유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홍수 사람들에게서처럼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고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지게 되었을 때에는 양심이 뒤를 이었습니다. 양심 역시 딕테이트를 주지만 방식은 다르며, 이에 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양심이 딕테이트를 때에도 말씀에서는 이와 마찬가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Jehovah speaks) 합니다. 양심은 계시된 것들과 지식들, 그리고 말씀으로부터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말하거나 딕테이트를 때에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양심이나 신앙에 관한 일을 말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the Lord says) 하는 것보다 흔한 표현은 없습니다. By the speaking of Jehovah the most ancient people signified perception, for they knew that the Lord gave them the faculty to perceive. This perception could continue no longer than while love was the principal. When love to the Lord ceased, and consequently love toward the neighbor, perception perished; but insofar as love remained, perception remained. This perceptive faculty was proper to the most ancient church, but when faith became separated from love, as in the people after the flood, and charity was given through faith, then conscience succeeded, which also gives a dictate, but in a different way, of which, by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When conscience dictates, it is in like manner said in the Word that Jehovah speaks; because conscience is formed from things revealed, and from knowledges, and from the Word; and when the Word speaks, or dictates, it is the Lord who speaks; hence nothing is more common, even at the present day, when referring to a matter of conscience, or of faith, than to say, the Lord says.

 

해설

AC.371은 지금까지 태고교회와 가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계속 부딪혀 온 퍼셉션과 양심은 어떻게 다른가?라는 문제를 스베덴보리 자신이 매우 명료하게 정리하는 중요한 단락입니다. 특히 바로 앞 AC.370에서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내면에서 오는 어떤 퍼셉션이라고 했는데, 이제 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는 표현이 퍼셉션을 의미할 수 있는지 설명합니다. 동시에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사라진 뒤 왜 양심이 그 뒤를 잇게 되었으며, 양심을 통해서도 주님께서 말씀하신다고 표현할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AC.371은 단순한 한 구절의 어휘 풀이를 넘어, 태고교회와 홍수 후 고대교회의 내적 영적 구조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 주는 핵심 단락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심이 퍼셉션을 의미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에게 지각하는 능력을 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퍼셉션은 단순한 직감이나 느낌이 아닙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주님을 향한 사랑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참된지를 내적으로 지각했습니다. 먼저 어떤 교리를 외부에서 배운 뒤 그것이 옳은지 논리적으로 판단하여 선을 행하는 방식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 자체가 그들의 내면을 질서 있게 하고 있었으므로 그 사랑 안에서 선과 진리를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반드시 외부에서 들려오는 음성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참된지를 내적으로 지각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퍼셉션의 조건을 매우 분명하게 밝힙니다. ‘ 퍼셉션은 사랑이 주된 것이었던 동안에만 계속될 있었습니다.바로 이것이 핵심입니다. 퍼셉션은 인간이 독립적으로 소유한 초자연적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그들의 생명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주님의 선물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랑이 사라지면 퍼셉션도 유지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그치고, 결과 이웃을 향한 사랑도 그치자 퍼셉션은 소멸되었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사랑이 남아 있는 만큼 퍼셉션도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중요한 원리입니다. 퍼셉션이 어느 날 갑자기 주님에 의해 회수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사랑에서 멀어진 만큼 사랑으로부터 오는 퍼셉션도 함께 약해지고 소멸된 것입니다.

 

이 설명은 가인의 계열을 이해하는 데 특히 중요합니다. 가인은 태고교회와 전혀 관계없는 후대의 교회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 안에서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 가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에게 태고교회 전성기의 순수한 퍼셉션이 온전히 있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퍼셉션이 처음부터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AC.371사랑이 남아 있는 만큼 퍼셉션도 남아 있었다고 직접 말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AC.370에서 스베덴보리가 a certain perceptivity from within’, 내면에서 오는 어떤 퍼셉션이라고 표현한 이유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가인의 상태에서는 사랑이 크게 훼손되고 체어리티가 소멸되어 가고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퍼셉션의 흔적까지 한순간에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AC.371은 결정적인 역사적·영적 전환을 설명합니다. ‘ 퍼셉션의 능력은 태고교회에 고유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홍수 사람들에게서처럼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고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지게 되었을 때에는 양심이 뒤를 이었습니다.이것이 우리가 계속 구별해 온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과 홍수 후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 사이의 차이입니다. 태고교회의 질서는 사랑이 먼저이고 그 사랑 안에서 신앙과 진리를 지각하는 질서였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상실된 뒤에는 인간이 먼저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이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면서 체어리티로 인도되는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내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말해 주는 것이 양심입니다.

 

그렇다고 양심이 퍼셉션의 낮은 복제품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양심 역시 딕테이트를 주지만 방식은 다르다고 명시합니다. 퍼셉션과 양심은 모두 인간에게 내적으로 무엇인가를 알려 준다는 점에서는 비슷해 보이지만 그 근거와 작용 방식이 다릅니다. 퍼셉션은 사랑의 선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지각하는 태고교회의 천적 방식이고, 양심은 계시된 진리와 신앙의 지식, 특히 말씀으로부터 형성되어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내적으로 말해 주는 영적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안에서 어떤 강한 느낌이 든다는 것을 모두 퍼셉션이나 양심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특히 양심은 개인의 주관적인 감정 자체가 아니라 사람이 참되다고 받아들인 선과 진리를 토대로 형성됩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양심은 계시된 것들과 지식들, 그리고 말씀으로부터 형성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장입니다. 양심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완성된 형태로 가지고 있는 독립적인 내적 음성이 아닙니다. 무엇이 선이고 참된지를 배우고 받아들이며 그것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 가운데 형성됩니다. 특히 말씀으로부터 받은 진리가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고 그 진리에 반하는 일을 하려고 할 때 내적으로 제지하고, 그 진리에 따라 행하려 할 때 이끄는 것이 양심의 작용입니다. 따라서 잘못된 것을 진리라고 확신하면 왜곡된 양심이 형성될 가능성도 있으며, 참된 양심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진리를 배우는 것과 그 진리에 따라 살려는 의지가 함께 중요합니다.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는 표현이 왜 양심에도 사용될 수 있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이 말하거나 딕테이트를 때에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이라고 합니다. 양심이 말씀과 계시된 진리로부터 형성되어 있다면, 그 양심을 통하여 말씀의 진리가 인간에게 내적으로 말할 때 그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태고교회에서는 퍼셉션을 두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할 수 있었고, 후대의 영적 인간에게서는 말씀으로 형성된 양심의 딕테이트를 두고도 주님께서 말씀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표현은 같지만 내적 방식은 다릅니다.

 

이 설명은 바로 앞 AC.359-360에서 생겼던 난제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그곳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conscience dictated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당시 가인이 태고교회 문맥에 있으므로 이것을 곧바로 홍수 후 고대교회의 완성된 양심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조심했습니다. AC.371은 그 조심스러운 태도가 필요했음을 확인해 주면서도 한 가지를 더 밝혀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퍼셉션과 양심의 차이를 분명히 알고 있으며 바로 이 단락에서 직접 구별합니다. 따라서 AC.359-360conscience를 단순한 실수라고 보거나 임의로 perception으로 고칠 이유는 없습니다. 반대로 그것만을 근거로 가인에게 후대 영적 인간과 동일한 양심이 있었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AC.370-371이 보여 주듯 가인의 시대는 사랑과 함께 퍼셉션이 쇠퇴해 가는 과정 안에 있으며, 스베덴보리는 그 내적 딕테이트를 설명하면서 문맥에 따라 퍼셉션과 양심에 관련된 표현을 사용합니다. 정확한 관계를 본문 이상으로 체계화하기보다 그가 직접 밝힌 구별을 보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AC.371은 또한 거듭남의 질서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사랑으로부터 직접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는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배우고, 진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삶의 기준으로 받아들이며, 주님께서 그 진리를 통하여 우리의 양심을 형성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해야 한다는 외적인 순종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에 따라 살면서 주님께서 그 진리를 선과 결합시키시면, 점차 단순히 규칙을 지키는 데서 벗어나 선 자체를 사랑하고 행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진다는 말도 신앙 자체가 체어리티의 근원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사랑과 선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시며, 신앙의 진리는 인간이 그 사랑과 선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수단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오늘날 신앙생활과 직접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양심이나 신앙에 관한 일을 말할 때 주님께서 말씀하신다고 하는 것이 지금도 매우 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음속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곧바로 주님이 내게 말씀하셨다고 신성화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AC.371은 그 반대의 기준을 줍니다. 양심은 계시된 것들과 지식들, 그리고 말씀으로부터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내적 음성이나 확신이 정말 주님의 진리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말씀에 비추어 살펴야 합니다. 자기 욕망이나 두려움이나 proprium에서 나온 생각을 주님의 음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위험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근거는 인간 자신의 주관적 확신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이며, 오늘날 우리에게 그 중심적인 토대는 말씀입니다.

 

결국 AC.371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는 한 표현 속에 서로 다른 두 시대의 영적 질서를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주된 것이었고, 그 사랑으로부터 퍼셉션이 있었습니다. 사랑이 사라진 만큼 퍼셉션도 사라졌습니다. 홍수 후에는 인간의 상태가 달라졌고, 말씀과 계시된 진리로부터 형성되는 양심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퍼셉션도 양심도 인간 자신의 독립적인 능력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을 선과 진리로 이끄시는 방식입니다. 다만 그 방식이 서로 다릅니다. 이 차이를 붙들면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고대교회의 양심을 혼동하지 않으면서도, 두 경우 모두에서 왜 말씀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표현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70, 창4:9,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 체어리티를 완전히 거부하게 된 신앙’ (AC.370-3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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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6 심화

2. 모세가 창조와 에덴동산의 기록을 태고교회 후손들에게서 받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66에는 처음 읽는 독자를 상당히 놀라게 할 만한 문장이 있습니다. ‘창조, 에덴동산 등에 관한  모든 내용,  아브람 시대까지의 기록을 모세는 태고교회의 후손들로부터 전해 받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창세기를 모세가 기록한 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문장을 읽으면 곧 여러 질문이 생깁니다. ‘그러면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부터 아브람 이전까지의 내용을 모세가 직접 계시받아 기록한 것이 아니라고 보는가?’, ‘그렇다면  내용은 실제 역사가 아니라 전승된 이야기일 뿐이라는 뜻인가?

 

먼저 AC.66의 문장을 약화시키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창조와 에덴동산 등을 포함하여 아브람 시대까지의 내용을 모세가 태고교회의 후손들로부터 받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스베덴보리 자신의 설명에서는 이 부분의 자료가 모세에게서 처음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것입니다. 이것은 AC.66이 직접 말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바로 앞의 첫째 스타일 설명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땅과 세상의 것을 말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생각했고, 그러한 표상들을 일종의 역사적 연속으로 엮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설명 뒤에 한나와 시편을 인용한 다음, 창조와 에덴동산 등의 내용을 모세가 태고교회 후손들로부터 받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전승은 단순히 후대 사람들이 꾸며 낸 민담이라는 뜻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표상적 표현 방식과 연결된 오래된 자료입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이어지는 둘째 스타일과의 구별입니다. 아브람 이후의 모세오경과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기, 열왕기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가 역사적 사실들은 문자적 의미에 나타난 그대로라고 명시합니다. 반면 아브람 이전의 첫째 스타일에 대해서는 표상들을 일종의 역사적 연속으로 만들었다고 표현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두 부분을 의도적으로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아브람 이전은 역사가 아니고 아브람 이후부터만 역사이다라고 한 줄로 정리해도 될까요? AC.66 하나만으로 그렇게까지 단정하는 것도 조심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이 글은 첫째 스타일과 둘째 스타일의 차이를 분명히 하지만, 창세기 앞부분의 각각의 인물과 사건이 어느 의미에서 역사적이며 어느 의미에서 표상적 구성인지를 세세하게 판정하지는 않습니다. ‘아담은 실제 개인이 아니었다’, ‘노아 홍수는 실제 사건이 아니었다 같은 결론을 AC.66 한 문장에서 바로 끌어내는 것은 본문보다 앞서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 문장을 없었던 것처럼 만들어 1부터 모든 내용은 아브람 이후와 똑같은 의미에서 문자 그대로의 역사라고 스베덴보리도 가르친다고 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AC.66은 분명히 서로 다른 두 스타일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익숙한 선입견에 맞추어 그 구별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스베덴보리가 아담, 노아, 홍수, 족보 등을 실제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따라가면서 조금씩 구체화하는 것입니다.

 

또 이것을 곧 현대 성서학의 문서설이나 구전 전승론과 동일시할 필요도 없습니다. 현대 성서학도 모세오경의 자료와 전승을 연구하지만, 그 학문적 이론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태고교회 후손들로부터 받은 표상적 역사는 출발점과 목적이 다릅니다. 용어상 전승된 자료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해서 같은 이론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AC.66은 현대적인 문헌비평을 제시하는 글이 아니라 말씀의 네 가지 스타일과 그 속뜻을 설명하는 글입니다.

 

그러면 모세가 이전 자료를 받았다는 것이 말씀의 신적 권위를 약화시키는 것일까요? 반드시 그렇다고 볼 이유는 없습니다. 성경의 권위가 성경의 모든 문장이 기록자의 머릿속에 아무 선행 자료 없이 직접 받아쓰기처럼 들어왔다는 방식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AC.66에서 중요한 것은 모세 이전부터 태고교회의 표상들이 전해졌고, 그것이 말씀의 창세기 앞부분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자료의 인간적 전달 경로를 밝혀 말씀을 낮추는 데 있지 않고, 그 오래된 표상적 기록 속에 영적이고 천적인 의미가 들어 있음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이 설명은 지금까지 창세기 1장을 왜 그렇게 읽었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빛과 궁창과 물, 식물과 광명체, 물고기와 새와 짐승, 사람의 창조를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의 상태로 읽은 것은 후대의 문자 기록에 임의로 상징을 붙인 것이라고 그 자신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AC.66에 따르면 바로 이런 방식으로 자연적인 것을 말하면서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생각하던 태고교회의 표현 방식이 창세기 앞부분의 배경에 있습니다.

 

또 하나 기억할 것은 모세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직접 받은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후손들에게서 받았다고 한다는 점입니다. 즉 매우 오래된 표상적 자료가 후손들을 통해 보존되어 모세에게 전해졌다는 그림입니다. 그 구체적인 전승 과정이 몇 세대를 거쳤고 어떤 형태의 문헌이었는지 AC.66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빈칸을 우리가 상상으로 채울 필요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설명이 성경에 대한 익숙한 생각을 흔드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를 읽는 과정에서는 바로 이런 곳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가를 먼저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미리 가지고 있던 성경관에 맞지 않는다고 문장을 약화시키지도 않고, 반대로 한 문장을 가지고 AC가 아직 말하지 않은 결론까지 확대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가장 정확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조와 에덴동산 등을 포함하여 아브람 시대까지의 기록을 모세가 태고교회 후손들로부터 받았다고 실제로 말합니다. 그는 그 부분을 태고교회의 표상적 스타일과 연결하며, 아브람 이후의 역사적 스타일과 구별합니다. 그러나 이 한 문장만으로 창세기 앞부분의 개별 인물과 사건의 역사성 여부를 모두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관련 AC들이 직접 설명하는 내용을 따라가며 판단해야 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이 문장은 말씀의 권위를 낮추기보다 오히려 창세기 1장을 지금까지 왜 거듭남의 아르카나를 담은 표상적 연속으로 읽어 왔는지를 이해하게 해 줍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에게 중요한 독법 하나를 가르쳐 줍니다.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는 것과 스베덴보리가 성경의 형성과 스타일에 대해 실제로 한 말을 정직하게 읽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일이 아닙니다.

 

 

 

AC.66, 창1, 말씀의 네 가지 스타일 : 태고교회, 역사, 예언, 시편

AC.66말씀에는 전반적으로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태고교회의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방식은 이 땅의 것과 세상의 것을 말할 때,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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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4 심화

1. 천상의 결혼이란 무엇인가?

 

AC.54에는 매우 중요한 표현 하나가 등장합니다. ‘천상의 결혼(heavenly marriage)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자기들의 결혼이 주는 행복이 이 천상의 결혼에서 온다고 퍼셉션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천상의 결혼은 무엇일까요? 천국에 간 남자와 여자가 이루는 결혼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이해와 의지의 결합을 말하는 것일까요?

 

먼저 AC.54가 직접 말하는 것부터 구별해야 합니다. 이 글은 태고교회 사람들의 실제 결혼이 그들에게 행복과 기쁨의 주된 근원이었고, 그들이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을 보았기 때문에 자기들의 결혼을 통해 천상의 결혼을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결혼의 행복이 그 천상의 결혼에서 온다고 퍼셉션했다고 합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 안의 이해를 남자’, 의지를 여자라고 불렀으며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고 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AC.54 안에서만 보아도 결혼이라는 말은 자연적인 남녀 관계에만 머물지 않고 인간 내면의 두 기능이 하나로 작동하는 관계까지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천상의 결혼 = 이해와 의지의 결합이라고 완전히 동일시하는 것도 조금 조심해야 합니다. AC 전체에서 천상의 결혼이라는 개념은 여러 층위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해와 의지의 결합, 진리와 선의 결합, 신앙과 사랑의 결합 등이 서로 연결되며, 궁극적으로 모든 참된 결합의 근원은 주님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천상의 결혼을 하나의 평면적인 등식으로 외우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참된 결합이 여러 차원에서 나타나는 질서라는 방향으로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다만 이 표현 역시 AC.54 자체의 문장을 넘어선 전체 AC의 관점에서 정리한 설명이라는 점은 구별해야 합니다.

 

AC.54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형태는 이해와 의지의 결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해를 남자, 의지를 여자라고 하고  둘이 하나로 작동할  그것을 결혼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는 이해이고 의지는 의지인 채로, 둘이 하나로 작동합니다.

 

이것은 결혼이라는 상응의 중요한 성질을 보여 줍니다. 참된 결합은 차이를 없애는 동일화가 아니라 구별된 것들이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해와 의지가 결합한다고 해서 이해가 의지가 되거나 의지가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다른 두 기능이 하나의 생명을 이루어 작동합니다.

 

앞의 AC.53과 연결하면 신앙과 사랑의 관계도 여기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AC.53은 이해에 속한 신앙과 의지에 속한 사랑을 구별했습니다. 따라서 이해와 의지의 결혼은 자연스럽게 신앙과 사랑의 결합과도 연결됩니다. 이후 AC.475-476에서도 스베덴보리는 남자와 여자가 신앙과 사랑의 결혼을 뜻한다고 다시 설명합니다.

 

여기서 신앙과 사랑의 결혼은 교리를 많이 알면서 사랑도 조금 더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과 사랑이 참으로 결합한다는 것은 사람이 아는 진리와 그가 실제로 사랑하고 원하는 선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은 상태와 관계됩니다. 이해가 한 방향을 보고 의지가 정반대 방향을 향한다면 둘이 하나로 작동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곧바로 아는 대로 완벽하게 살아야만 결혼이 이루어진다는 도덕적 완전주의로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거듭남은 진행되는 과정이며, AC.54는 그 과정의 세부 단계를 설명하는 글이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참된 영적 질서가 이해와 의지의 분리에 있지 않고 그 결합에 있다는 것입니다.

 

천상의 결혼이라는 말을 선과 진리의 관계에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해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기능과, 의지는 선을 사랑하고 행하는 기능과 깊이 관계되므로 이해와 의지의 결합은 진리와 선의 결합과 분리되어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술 전체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은 천국과 거듭남을 이해하는 매우 근본적인 원리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남자 = 진리’, ‘여자 = 이라는 하나의 기계적인 공식으로 모든 성경 구절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상응은 문맥을 따라 보아야 합니다. AC.54가 직접 말하는 것은 영적 인간 안에서 남자 = 진리’, ‘여자 = 이며,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관련된 더 넓은 대응은 이후의 AC 설명과 함께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태고교회 사람들의 실제 결혼은 이 내적인 결혼과 어떤 관계였을까요? AC.54의 표현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결혼에서 누리는 행복이 천상의 결혼에서 온다고 퍼셉션했습니다. 즉 자연적인 결혼 자체를 행복의 최종 근원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 결합의 행복 안에서 더 높은 결합의 질서를 보았고, 그 근원을 천적인 것과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찾았습니다.

 

그렇다고 자연적인 결혼을 단순한 그림자나 중요하지 않은 외피로 취급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결혼이 행복과 기쁨의 주된 근원이었다고 AC.54가 직접 말합니다.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을 참으로 표상할 때 외적인 것은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을 담고 드러내는 귀한 형식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태고교회 사람들이 무엇이든 결혼에 비유할 수 있으면 결혼에 비유했던 이유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그들에게 결혼은 단순히 사회제도 하나가 아니라 서로 구별되는 것들이 하나를 이루는 행복을 경험하게 하는 매우 깊은 표상이었습니다.

 

또 이 때문에 말씀에서 교회 자체도 ’, ‘처녀’, ‘아내라는 결혼의 언어로 표현됩니다. AC.54는 그 이유를 교회의 선에 대한 애정에서 찾습니다. 이후 말씀에서 주님과 교회의 관계가 혼인과 부부의 언어로 나타날 때에도 이 천상의 결혼이라는 큰 주제가 배경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면 천국에서의 실제 남녀 결혼과 천상의 결혼은 아무 관계가 없을까요? 그렇다고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저술에서 천국의 결혼과 결혼애를 별도로 매우 깊게 다룹니다. 다만 AC.54 천상의 결혼을 처음부터 사후세계의 부부생활만을 뜻하는 용어로 제한하면 이번 글의 중심을 놓치게 됩니다. 여기서는 자연적인 결혼의 행복이 더 내적인 천상의 결합에서 온다는 방향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결합의 궁극적인 근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AC.54에서 태고교회 사람들의 생각은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내적인 것에서 천적인 것으로,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모든 이신 주님께로 향했습니다. 따라서 천상의 결혼도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내는 완전한 조화가 아닙니다. 모든 참된 선과 진리와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앞의 AC.39 이후의 원리는 여기에서도 그대로 유지됩니다.

 

그래서 천상의 결혼을 가장 안전하게 기억하는 방법은 하나의 단단한 등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 질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서로 구별되는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가 주님에게서 오는 질서 안에서 하나로 결합하여 작동하는 것입니다. AC.54에서는 그 가운데 특별히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작동하는 것을 결혼이라고 부릅니다.

 

결국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실제 결혼의 행복은 그 자체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더 내적인 결합을 비추었고, 그 결합은 다시 천적인 것으로, 궁극적으로 주님께 시선을 돌리게 했습니다. 이것이 AC.54에서 남자와 여자의 속뜻을 설명하면서 굳이 태고교회의 결혼의 행복과 천상의 결혼을 함께 이야기하는 이유입니다.

 

 

 

AC.54, 창1:27, ‘남자와 여자’ :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작동하는 결혼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AC.54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속뜻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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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9 심화

1. ‘양심은 홍수 후 고대교회부터인데, 왜 가인에게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하는가?

AC.359를 읽다가 상당히 중요한 의문을 만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를 설명하면서 아주 분명하게 conscience dictated’,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AC를 읽으며 배운 교회의 영적 역사를 생각하면 이 표현이 선뜻 이해되지 않습니다. 태고교회의 특징은 양심(conscience)이 아니라 퍼셉션(perception)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양심은 홍수 이후 노아로 표상되는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에게서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아직 홍수 이전인 가인에게 어떻게 양심’이 있을 수 있을까요?

 

먼저 가장 분명한 원칙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태고교회와 고대교회의 내적 구조는 같지 않습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사랑의 선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했습니다.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가 오늘날 사람처럼 분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선을 사랑하면 그 선으로부터 무엇이 진리인지를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반면 홍수 이후의 사람들은 이 천적 구조를 잃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AC.310에서 홍수 후 사람들에게는 천적 씨가 아니라 영적 씨가 있으며, 이들에게 주님께서는 진리의 지식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선에 기초하여 양심을 심어 주심으로써 체어리티에 이를 수 있도록 하신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홍수 이전과 이후의 인간 구조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매우 중요한 설명입니다.

 

따라서 태고교회 = 퍼셉션, 고대교회 = 양심’이라는 기본 구별은 그대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앞서 AC.224를 해설하면서도 이 문제를 한 번 만났습니다. 3의 타락한 아담과 하와를 두고 양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표현하면 시대가 뒤섞인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도 양심의 흔적’보다는 퍼셉션의 잔재’, ‘남아 있는 지각’, ‘약해진 퍼셉션’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정리했습니다.

 

그렇다면 AC.359에서는 왜 스베덴보리 자신이 conscience’라고 했을까요? 여기서 첫 번째로 주의할 것은 가인’을 태고교회의 처음 상태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4에서 다루는 것은 이미 타락이 시작된 이후의 태고교회 후손들과 거기서 파생된 교리적 상태들입니다. 가인은 본래 사랑 안에 하나로 존재하던 신앙에 속한 것들이 점차 독립된 것으로 여겨지고, 마침내 사랑과 분리된 신앙의 교리가 되어 가는 과정을 표상합니다. 즉 가인은 퍼셉션이 가장 충만했던 태고교회의 전성기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천적 질서가 해체되어 가는 과정 안에 있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AC.359 conscience’는 노아 이후 영적 인간의 양심이 이미 가인에게 완성되어 있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곤란합니다. 그렇게 읽으면 AC.310에서 스베덴보리가 매우 분명하게 설정한 홍수 이전과 이후의 차이가 무너집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가 실수로 conscience라고 썼으니 사실 perception이라고 읽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AC.359의 문장은 분명히 conscience dictated’입니다. 따라서 두 진술을 모두 보존하면서 그 관계를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실마리가 앞의 AC.224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곳에서 자비, 평화, 그리고 모든 ,  여호와의 얼굴들’이 퍼셉션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딕테이트(dictate) 원인이 되며, 비록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양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라고 설명합니다. 즉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시지만 그 내적 딕테이트가 받아들여지는 방식은 인간의 영적 상태에 따라 다릅니다. 퍼셉션을 가진 천적 인간에게는 퍼셉션의 방식으로, 양심을 가진 영적 인간에게는 양심의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을 AC.359에 비추어 보면, 여기서 핵심은 conscience’라는 단어 하나를 시대 구분의 기술적 용어로만 읽기보다 Jehovah said’, 곧 주님에게서 오는 내적 딕테이트가 아직 가인에게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왜 여기서 특별히 perception dictated’가 아니라 conscience dictated’라고 표현했는지에 대해서는 AC.359 자체가 더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는 본문이 말하는 것 이상을 단정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전체 문맥에서 한 가지는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가인은 이미 태고교회의 순수한 천적 상태에서 상당히 멀어지고 있습니다.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독립되기 시작했고, 그 분리가 교리로 굳어지고 있으며, 체어리티 없는 행위와 예배가 생겨났습니다. 이제 체어리티가 받아들여지고 자기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노하고 그의 내적인 것들까지 변합니다. 따라서 AC.359의 가인은 태고교회의 온전한 퍼셉션을 가진 사람의 상태를 보여 주는 인물이 아닙니다.

 

이 점에서 가인은 오히려 매우 흥미로운 과도기적 상태’를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 가인에게 퍼셉션이 양심으로 바뀌기 시작했다’고까지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홍수 후 인간에게 마련된 새로운 영적 구조와 양심의 형성을 명백히 구별하기 때문입니다. AC.310에 따르면 홍수 후 사람들에게는 사랑이나 선한 의지가 본래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진리를 이해하고 신앙할 능력은 남아 있으며, 주님께서는 바로 그 진리의 지식에 기초하여 양심을 심어 주십니다. 이것이 고대교회와 오늘날 영적 인간에게 속하는 본격적인 양심의 질서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conscience’와 홍수 후 영적 인간의 conscience’를 완전히 동일한 구조라고 단정하는 것보다는, AC.359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멀어져 가는 가인에게도 아직  잘못을 내적으로 알리는 딕테이트가 있었다’는 데 초점을 두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가인은 이미 분노했습니다. 그의 내적인 것들도 변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에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AC.359가 강조하는 결정적인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의 가인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아무런 경고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고, 그 분리에서 죽은 행위와 예배가 생기고, 체어리티가 떠나면서 분노가 일어나고, 내적인 것들이 변했을 때에도 주님의 내적 딕테이트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그 말씀을 따라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하는 길로 돌아서지 않았고, 결국 다음 단계에서 아벨, 곧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라는 더 깊은 원리도 담겨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강제하시지 않습니다. 강제로 선하게 만든다면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이 사라지고, 따라서 진정한 거듭남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이 악을 행하기 전에 끊임없이 선과 진리를 통하여 경고하시고, 돌이킬 수 있는 길을 마련하십니다. 가인에게  네가 분하여 하느냐?’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러한 장면입니다. 강제가 아니라 딕테이트이고, 심판에 앞선 경고이며, 자유 안에서 다시 선을 선택하도록 하시는 자비입니다.

 

이제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할 때에는 다시 시대를 건너와야 합니다. 우리는 가인 시대의 홍수 이전 인간이 아닙니다. AC.310이 설명하듯 우리는 홍수 이후의 영적 인간 구조에 속하며, 주님께서는 말씀에서 배운 진리를 통하여 우리 안에 양심을 형성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내가 이렇게 분노하는가?’, ‘이것이 정말 진리를 위한 분노인가, 아니면  proprium 상처받았기 때문인가?’, ‘내가 옳음을 주장하는 동안 체어리티가 떠나고 있지는 않은가?’라고 내적으로 살피게 될 때, 그 양심의 딕테이트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AC.359는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엄중한 경고가 됩니다. 양심의 소리를 반복해서 거스르면 처음에는 잘못인  알면서 하는 ’이었던 것이 점차 잘못이라고 느끼지 않는 ’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가인의 경우에도 분노 그 자체가 마지막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분노에서 돌이키지 않자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영적으로는 체어리티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은 단순히 죄를 지은 뒤 우리를 괴롭히는 기능이 아니라, 악이 아직 행위와 습관과 지배적 사랑으로 굳어지기 전에 주님께서 우리를 돌이키시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결국 AC.359의 이 작은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인간론 전체를 다시 보게 합니다. 태고교회에는 퍼셉션이 있었고, 그 퍼셉션은 교회가 타락하면서 점차 쇠퇴했습니다. 홍수 후에는 인간의 구조가 달라졌으며, 주님께서는 진리의 지식을 통하여 양심을 형성하시는 새로운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따라서 AC.359 conscience dictated’를 이 두 시대의 구별을 무시한 채 단순하게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표현을 지워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구별을 하고 나면 AC.359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중요한 것은 가인의 내적 딕테이트를 정확히 어느 시대의 기술적 범주에 넣을 것인가만이 아닙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가인의 얼굴이 떨어진 , 그러니까 안색이 변한 뒤에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체어리티가 떠나고 내적인 것들이 변하기 시작했어도 주님의 자비는 먼저 떠나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악을 향하여 가는 바로 그 길목에서 주님께서는 여전히 말씀하시고, 보게 하시고, 돌이킬 기회를 주십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든, 후대 영적 인간의 양심이든, 그 모든 선한 내적 딕테이트의 궁극적인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거듭남의 중요한 순간은 바로 그 말씀을 들었을 때 가인처럼 자기 분노를 붙드는가, 아니면 주님 앞에서 자기 상태를 보고 체어리티로 돌아서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AC.359,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 양심을 통한 주님의 부르심’(AC.359-36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is thine anger kindled?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창4:6) AC.35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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