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교회의 퍼셉션 역량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각만이 아닌, 나아가 그걸 가지고 선을 실천함으로써 맛보는 행복과 기쁨으로 되어 있었다.

 

9절,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And Enosh lived ninety years, and begat Kenan.

 

503

태고교회의 퍼셉션 역량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각만이 아닌, 나아가 그걸 가지고 선을 실천함으로써 맛보는 행복과 기쁨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선을 행할 때 맛보는 이런 행복과 기쁨 없는 그런 퍼셉션 역량에는 아무런 생명이 없습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이런 행복과 기쁨으로 말미암아 퍼셉션 역량은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태고교회가 즐겁게 누렸던 것과 같은 것이 바로 사랑과 사랑에서 오는 신앙의 생명인데요, 이것이 곧 쓰임새의 삶, 즉 쓰임새의 선과 진리 안에 있는 동안 허락되는 생명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생명은 쓰임새로부터, 쓰임새에 의해, 그리고 쓰임새를 따릅니다. 쓸모없는 것 안에는 생명이 없는데요, 쓸모가 없는 것은 버림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태고인들은 주님의 모양들(likenesses of the Lord)이었고, 그래서 퍼셉션 능력(perceptive powers) 가운데서 그들은 주님의 형상들(images of him)이 되었습니다. 퍼셉션 능력은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를, 그 결과 신앙이란 무엇인가를 아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아는 것으로만 기뻐하지 않고, 선과 진리를 행하는 것, 즉 쓰임새의 사람이 되는 것으로 기뻐합니다. The perceptive facul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consisted not only in the perception of what is good and true, but also in the happiness and delight arising from well doing; without such happiness and delight in doing what is good the perceptive faculty has no life, but by virtue of such happiness and delight it receives life. The life of love, and of the derivative faith, such as the most ancient church enjoyed, is life while in the performance of use, that is, in the good and truth of use: from use, by use, and according to use, is life given by the Lord; there can be no life in what is useless, for whatever is useless is cast away. In this respect the most ancient people were likenesses of the Lord, and therefore in perceptive powers they became images of him. The perceptive power consists in knowing what is good and true, consequently what is of faith: he who is in love is not delighted in knowing, but in doing what is good and true, that is, in being use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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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교회가 어떻게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는 퍼셉션이 무엇인지를 알기 전까지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5절,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that man lived were nine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he died.

 

495

태고교회가 어떻게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는 퍼셉션이 무엇인지를 알기 전까지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이 있었던 교회였고, 오늘날엔 그런 교회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교회의 퍼셉션은 이런 것으로 구성됩니다. 곧 그 교회의 구성원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마치 천사들처럼 선악을 구별합니다. 이 선악은 사람들 사는 시민 사회의 선악과 같은 것이 아니고, 주님 사랑과 주님 신앙에 속한 선악을 말합니다. 생활로 확인되는 신앙고백을 통해 퍼셉션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존재하는지 여부를 알 수 있는, 그런 것입니다. How the most ancient church decreased cannot appear unless it be known what perception is, for it was a perceptive church, such as at this day does not exist. The perception of a church consists in this, that its members perceive from the Lord what is good and true, like the angels; not so much what the good and truth of civic society is, but the good and truth of love to the Lord and of faith in him. From a confession of faith that is confirmed by the life it can be seen what perception is, and whether it has any existence.

 

※ 즉 실천, 생활, 삶이 따라주는, 받쳐주는 신앙이 진짜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선은 실천에 옮겨진 진리이며, 진리는 실천할 때 선이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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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장 4, 7, 10, 13, 16, 19, 26  30절 등에 나오는 자녀들’’(sons and daughters)의 속뜻 선과 진리이며, 이는 그 시절, 퍼셉션으로 지각되었고, 태고교회는 이 퍼셉션으로만 설명 가능한 교회였으며, 이 퍼셉션은 이후 이어지는 모든 교회의 원리요, 부모였다.

 

4절,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the days of man after he begat Seth were eight hundred years; and he begat sons and daughters.

 

491

본 장 4, 7, 10, 13, 16, 19, 26 및 30절 등에 나오는 ‘아들’과 ‘’은 같은 걸 상징합니다. 이런 것이 교회요, 이런 것이 ‘자녀들’’(sons and daughters), 즉 이런 것이 선과 진리입니다. 여기서 말씀드린 진리와 선은 뚜렷하게 지각된 것인데요, 태고교회가 바로 이것들로 설명이 되며, 다른 모든 이어지는 교회들의 원리요, 부모였기 때문입니다. The same things are signified by “sons” and “daughters” in this chapter (verses 4, 7, 10, 13, 16, 19, 26, 30), but such as is the church, such are the “sons and daughters,” that is, such are the goods and truths; the truths and goods here spoken of are such as were distinctly perceived, because they are predicated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e principal and parent of all the other and succeeding churc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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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보를 적은 책(The book of the births), 태고교회에 속했던 사람들의 일람(一覽, enumeration)

 

1절,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This is the book of the births of man. In the day that God created man, in the likeness of God made he him.

 

469

계보를 적은 책(The book of the births)은 태고교회에 속했던 사람들의 일람(一覽, enumeration)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in the day that God created man)는 그가 영적으로 지음 받았음을 가리키고,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in the likeness of God made he him)는 그가 천적으로 지음 받았음을 의미하는데요, 그래서 이 구절을 태고교회에 관한 설명으로 보는 것입니다. The “book of the births” is an enumeration of those who were of the most ancient church; “in the day that God created man” denotes his being made spiritual; and “in the likeness of God made he him” signifies that he was made celestial: thus it is a description of the most ancient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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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절, ’(Seth), 태고교회처럼 그렇게까지 천적이지는 않았던 두 번째 교회

 

창5 개요

 

462

태고교회처럼 그렇게까지 천적이지는 않았던 두 번째 교회를 ‘’(Seth)이라고 합니다. (2-3절) A second church which was not so celestial as the most ancient church is called “Seth.” (verses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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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태고교회 자체는 천적, ‘사람’(아담, man, [homo]), ‘하나님의 모양

 

창5 개요

 

461

태고교회 자체는, 천적이었는데, ‘사람’(아담, man, [homo])이라고도 하고, ‘하나님의 모양(a likeness of God)이라고도 합니다. (1절) The most ancient church itself, which was celestial, is what is called “man” [homo], and a “likeness of God.” (verse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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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는 곧 인류사인데, 점점 황폐해져 신앙이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때가 과거 몇 차례 있었음

 

19절,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407

보통 한 교회의 상태는 그래서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교회는 참 신앙으로부터 멀어지다가 결국 신앙이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는데, ‘황폐해졌다(vastated) 하는 것은 바로 그 지경,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일이 태고교회의 경우는 가인파(가인, Cainites)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또 홍수 후 고대교회의 경우 및 유대 교회의 경우에서도 있었습니다. 주의 강림(降臨, the Lord’s advent)의 때 종말의 상태가 바로 이런 황폐한 상태였는데요, 그들은 자기들을 구원하러 오시기로 예정되어 있던 주님에 관하여 아무것도 몰랐으며, 그분을 향한 신앙에 대해서도 아는 게 거의 없었습니다. 초대 기독교회, 곧 주님 강림 직후 있었던 교회 역시 그랬으며, 오늘날( 1750년대 즈음 유럽) 교회의 경우도 그 안에 아무런 신앙이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철저하게 황폐해졌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얼마간 핵들은 늘 남아 있는데, 이것은 신앙에 관해 황폐해진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의 경우가 그랬는데, 태고교회의 남은 자들은 홍수 때까지 있었고, 홍수 후에도 계속 있었습니다. 태고교회 내 이들 남은 자들을 노아라 하는 것입니다. The state of a church in general is thus circumstanced. In process of time it departs from the true faith until at last it comes to be entirely destitute of faith, when it is said to be “vastated.” This was the case with the most ancient church among those who were called Cainites, and also with 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 as well as with the Jewish church. At the time of the Lord’s advent this last was in such a state of vastation that they knew nothing about the Lord, that he was to come into the world for their salvation, and they knew still less about faith in him. Such was also the case with the primitive Christian church, or that which existed after the Lord’s advent, and which at this day is so completely vastated that there is no faith remaining in it. Yet there always remains some nucleus of a church, which those who are vastated as to faith do not acknowledge; and thus it was with the most ancient church, of which a remnant remained until the time of the flood, and continued after that event. This remnant of the church is called “No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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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에 한 사람(a man)으로 나타나셔서 그 교회 멤버들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하셨습니다. 그들은 아무한테도 ‘사람(man)이라 하지 않고, 오직 홀로 주님한테만, 그리고 주님에게 속한 것들에만 이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26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And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an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49

주님은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에 한 사람(a man)으로 나타나셔서 그 교회 멤버들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하셨습니다. 이와 관련된 더 많은 깊은 이야기가 있지만 아직은 나눌 때가 아닌 것 같고요, 이런 이유로, 그들은 아무한테도 ‘사람(man)이라 하지 않고, 오직 홀로 주님한테만, 그리고 주님에게 속한 것들에만 이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도 이 ‘사람들(men)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지요. 대신 다만 자기들한테 있는 것들 중, 모든 사랑의 선과 모든 신앙의 진리 같은, 주님으로 말미암았다고 지각된(perceived) 것들에 한해서만 사용했습니다. In the most ancient church, with the members of which the Lord conversed face to face, the Lord appeared as a man; concerning which much might be related, but the time has not yet arrived. On this account they called no one “man” but the Lord himself, and the things which were of him; neither did they call themselves “men,” but only those things in themselves—as all the good of love and all the truth of faith—which they perceived they had from the Lord.

 

※ 처음에 주님이 ‘사람’으로 나타나시는 걸 본 태고교회 사람들은 이후 자신들을 향해 감히 ‘사람’이라는 표현을 쓸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말한 이런 것들은 ‘사람에게 속한 것(of man)이었는데요, 그 이유는, 이런 것들은 오직 주님에게만 속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These they said were “of man,” because they were of the Lord.  

 

[2] 그래서 선지서들에 나오는 ‘사람(man),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은 가장 높은 뜻(the supreme sense)으로는 주님을, 속뜻(the internal sense)으로는 지혜와 지성을, 즉 거듭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예레미야입니다. Hence in the prophets, by “man” and the “son of man,” in the supreme sense, is meant the Lord; and in the internal sense, wisdom and intelligence; thus everyone who is regenerate. As in Jeremiah: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5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렘4:23, 25) I beheld the earth, and lo, it was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I beheld and lo there was no man, and all the birds of the heavens were fled. (Jer. 4:23, 25)

 

이사야에서 ‘사람’은 속뜻으로는 거듭난 사람을, 가장 높은 뜻으로는 한 사람(the one man)이신 주님 자신을 의미합니다. In Isaiah, where, in the internal sense, by “man” is meant a regenerate person, and 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himself, as the one man: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 12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 (사45:11-12) Thus saith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 and his former, I have made the earth, and created man upon it; I, even my hands, have stretched out the heavens, and all their army have I commanded. (Isa. 45:11–12)  

 

[3] 그래서 주님은 선지자들에게 사람으로(as a man)나타나셨습니다. 에스겔입니다. The Lord therefore appeared to the prophets as a man, as in Ezekiel: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겔1:26) Above the expanse, as the appearance of a sapphire stone, the likeness of a throne, and upon the likeness of the throne was the likeness as the appearance of a man above upon it. (Ezek. 1:26)

 

다니엘은 두 눈으로 보고 이르기를 ‘인자(人子, the son of man), 즉 같은 말인데, 사람(the man)이라 하였습니다. And when seen by Daniel he was called the “son of man,” that is, the man, which is the same thing:

 

13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단7:13-14) I saw, and behold, one like the son of man came with the clouds of heaven, and came to the ancient of days, and they brought him near before him; and there was given him dominion, and glory, and a kingdom, that all people, and nations, and languages should serve him. His dominion is an everlasting dominion, which shall not pass away, and his kingdom that which shall not be destroyed. (Dan. 7:13–14)  

 

[4] 또한 주님은 자주 자신을 가리켜 ‘인자(the son of man), 즉, 사람이라 하시고, 다니엘에서처럼 영광 가운데 오실 것을 예언하십니다. The Lord also frequently calls himself the “son of man,” that is, the man, and, as in Daniel, foretells his coming in glory: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24:30) Then shall they see the son of man coming in the clouds of heaven with power and great glory. (Matt. 24:30)

 

구름을 타고(The clouds of heaven)는 말씀(the Word)의 겉 글자의 뜻(the literal sense)인 반면, ‘능력과 큰 영광으로(power and great glory)는 말씀의 속뜻(the internal sense)인데요, 말씀의 모든 것은 그 속뜻으로는 일반적으로나 구체적으로나 오직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가리킵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능력과 영광이 나오는 것은 바로 이런 연유 때문이지요. The “clouds of heaven” are the literal sense of the Word; “power and great glory” are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which in all things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has reference solely to the Lord and his kingdom; and it is from this that the internal sense derives its power and gl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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