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66에는 처음 읽는 독자를 상당히 놀라게 할 만한 문장이 있습니다. ‘창조,에덴동산등에관한이모든내용,곧아브람시대까지의기록을모세는태고교회의후손들로부터전해받았습니다.’우리는 흔히 창세기를‘모세가기록한책’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이 문장을 읽으면 곧 여러 질문이 생깁니다. ‘그러면스베덴보리는창세기1장부터아브람이전까지의내용을모세가직접계시받아기록한것이아니라고보는가?’, ‘그렇다면그내용은실제역사가아니라전승된이야기일뿐이라는뜻인가?’
먼저AC.66의 문장을 약화시키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스베덴보리는 분명히 창조와 에덴동산 등을 포함하여 아브람 시대까지의 내용을 모세가‘태고교회의후손들로부터’받았다고 말합니다.따라서 적어도 스베덴보리 자신의 설명에서는 이 부분의 자료가 모세에게서 처음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것입니다.이것은AC.66이 직접 말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바로 앞의‘첫째스타일’설명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태고교회 사람들은 땅과 세상의 것을 말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생각했고,그러한 표상들을‘일종의역사적연속’으로 엮었다고 했습니다.그리고 바로 그 설명 뒤에 한나와 시편을 인용한 다음,창조와 에덴동산 등의 내용을 모세가 태고교회 후손들로부터 받았다고 합니다.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전승은 단순히 후대 사람들이 꾸며 낸 민담이라는 뜻이 아니라,태고교회의 표상적 표현 방식과 연결된 오래된 자료입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이어지는 둘째 스타일과의 구별입니다.아브람 이후의 모세오경과 여호수아,사사기,사무엘기,열왕기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가‘역사적사실들은문자적의미에나타난그대로’라고 명시합니다.반면 아브람 이전의 첫째 스타일에 대해서는 표상들을‘일종의역사적연속’으로 만들었다고 표현합니다.스베덴보리가 두 부분을 의도적으로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아브람이전은역사가아니고아브람이후부터만역사이다’라고 한 줄로 정리해도 될까요?AC.66하나만으로 그렇게까지 단정하는 것도 조심하는 편이 좋겠습니다.이 글은 첫째 스타일과 둘째 스타일의 차이를 분명히 하지만,창세기 앞부분의 각각의 인물과 사건이 어느 의미에서 역사적이며 어느 의미에서 표상적 구성인지를 세세하게 판정하지는 않습니다. ‘아담은실제개인이아니었다’, ‘노아홍수는실제사건이아니었다’같은 결론을AC.66한 문장에서 바로 끌어내는 것은 본문보다 앞서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 문장을 없었던 것처럼 만들어‘창1부터모든내용은아브람이후와똑같은의미에서문자그대로의역사라고스베덴보리도가르친다’고 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AC.66은 분명히 서로 다른 두 스타일을 구별하고 있습니다.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익숙한 선입견에 맞추어 그 구별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앞으로 스베덴보리가 아담,노아,홍수,족보 등을 실제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따라가면서 조금씩 구체화하는 것입니다.
또 이것을 곧 현대 성서학의 문서설이나 구전 전승론과 동일시할 필요도 없습니다.현대 성서학도 모세오경의 자료와 전승을 연구하지만,그 학문적 이론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태고교회후손들로부터받은표상적역사’는 출발점과 목적이 다릅니다.용어상‘전승된자료’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해서 같은 이론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AC.66은 현대적인 문헌비평을 제시하는 글이 아니라 말씀의 네 가지 스타일과 그 속뜻을 설명하는 글입니다.
그러면 모세가 이전 자료를 받았다는 것이 말씀의 신적 권위를 약화시키는 것일까요?반드시 그렇다고 볼 이유는 없습니다.성경의 권위가 성경의 모든 문장이 기록자의 머릿속에 아무 선행 자료 없이 직접 받아쓰기처럼 들어왔다는 방식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적어도AC.66에서 중요한 것은 모세 이전부터 태고교회의 표상들이 전해졌고,그것이 말씀의 창세기 앞부분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입니다.스베덴보리의 관심은 자료의 인간적 전달 경로를 밝혀 말씀을 낮추는 데 있지 않고,그 오래된 표상적 기록 속에 영적이고 천적인 의미가 들어 있음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이 설명은 지금까지 창세기1장을 왜 그렇게 읽었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빛과 궁창과 물,식물과 광명체,물고기와 새와 짐승,사람의 창조를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의 상태로 읽은 것은 후대의 문자 기록에 임의로 상징을 붙인 것이라고 그 자신은 생각하지 않습니다.AC.66에 따르면 바로 이런 방식으로 자연적인 것을 말하면서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생각하던 태고교회의 표현 방식이 창세기 앞부분의 배경에 있습니다.
또 하나 기억할 것은 모세가‘태고교회사람들’에게 직접 받은 것이 아니라‘태고교회의후손들’에게서 받았다고 한다는 점입니다.즉 매우 오래된 표상적 자료가 후손들을 통해 보존되어 모세에게 전해졌다는 그림입니다.그 구체적인 전승 과정이 몇 세대를 거쳤고 어떤 형태의 문헌이었는지AC.66은 설명하지 않습니다.따라서 그 빈칸을 우리가 상상으로 채울 필요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설명이 성경에 대한 익숙한 생각을 흔드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그러나AC를 읽는 과정에서는 바로 이런 곳에서‘스베덴보리가실제로무엇을말하는가’를 먼저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우리가 미리 가지고 있던 성경관에 맞지 않는다고 문장을 약화시키지도 않고,반대로 한 문장을 가지고AC가 아직 말하지 않은 결론까지 확대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가장 정확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스베덴보리는 창조와 에덴동산 등을 포함하여 아브람 시대까지의 기록을 모세가 태고교회 후손들로부터 받았다고 실제로 말합니다.그는 그 부분을 태고교회의 표상적 스타일과 연결하며,아브람 이후의 역사적 스타일과 구별합니다.그러나 이 한 문장만으로 창세기 앞부분의 개별 인물과 사건의 역사성 여부를 모두 결정하지는 않습니다.그것은 앞으로 관련AC들이 직접 설명하는 내용을 따라가며 판단해야 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이 문장은 말씀의 권위를 낮추기보다 오히려 창세기1장을 지금까지 왜‘거듭남의아르카나’를 담은 표상적 연속으로 읽어 왔는지를 이해하게 해 줍니다.그리고 동시에 우리에게 중요한 독법 하나를 가르쳐 줍니다.성경의 권위를 존중하는 것과 스베덴보리가 성경의 형성과 스타일에 대해 실제로 한 말을 정직하게 읽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일이 아닙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지적인것들이속사람에속한다면,앞의이성적인것들은겉사람에속한다는뜻인가?’
먼저 문장 자체가 무엇을 분명하게 말하는지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rationalandintellectualthings’라는 두 가지를 말한 뒤‘thelatter’,곧‘후자’가 속 사람에 속한다고 합니다.따라서 여기서‘후자’는‘intellectualthings’,곧‘지적인것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AC.40이 직접 말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적인것들은속사람에속한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반대편 명제까지 만들어‘그러므로이성적인것들은겉사람에속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AC.40은 그렇게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이것은 짧은 문장이지만AC를 읽을 때 상당히 중요한 원칙을 보여 줍니다.스베덴보리가 어떤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말하고 다른 것에 대해서는 아직 말하지 않았다면,우리가 빈자리를 대칭적으로 채워 넣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왜 스베덴보리는‘새들’이 일반적으로‘이성적이고지적인것들’을 뜻한다고 하면서 그 가운데 특별히 지적인 것들이 속 사람에 속한다고 덧붙였을까요?
AC.40의 문맥에서 먼저 분명한 것은‘물들이번성하게하는것들’과‘새들’사이의 차이입니다.물에서 번성하는 것들은 겉 사람에 속한 기억 지식을 뜻합니다.반면 새들은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합니다.그러므로 물고기와 새의 차이를 통해 단순히 기억 속에 저장된 지식과,그것을 넘어서 생각하고 이해하는 인간의 더 높은 능력이 구별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 구절 하나를 외우고 있다는 것과 그 구절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앞의 것은 기억 지식으로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뒤의 것은 이성적·지적인 활동과 관계됩니다.물론 이것은AC.40의 대응을 이해하기 위한 쉬운 예이지,rational과intellectual을 각각 이렇게 정의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특히‘지적인것들은속사람에속한다’는 말은 중요합니다.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참된 영적 이해는 단순히 외부에서 정보를 많이 축적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겉 사람의 기억 지식은 필요하지만,기억에 저장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곧 속 사람의 지적인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AC.40은 적어도 이 둘의 층위가 같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rational’과‘intellectual’의 차이를 현대 심리학의 두 가지 사고 기능처럼 간단히 정의하려고 하면 오히려 조심해야 합니다.예를 들어‘rational은논리적으로계산하는능력이고intellectual은마음깊이진리를직관하는능력이다’라고 고정하면 이해하기는 쉬워 보이지만,AC.40은 그런 정의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rational은겉사람과속사람사이의중간영역이다’라고 이번 한 문장만으로 확정하는 것도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스베덴보리는 이후 여러 글에서 인간의rational과intellectual,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훨씬 더 세밀하게 다룹니다.그 전체 설명을 따라가야 두 용어의 관계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AC.40에서는 먼저 본문이 말하는 만큼을 정확하게 붙드는 것이 좋겠습니다.물고기는 겉 사람의 기억 지식을 나타냅니다.새들은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나타냅니다.그리고 그 가운데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합니다.
이렇게 이해하면‘새’가 왜 물고기와 함께 다섯째 날에 등장하는지도 조금 보이기 시작합니다.사람 안에는 단순히 기억에 저장된 지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그것을 가지고 생각하고 이해하는 더 높은 차원의 활동도 있습니다.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이러한 인간의 여러 능력도 살아 있는 질서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이 문장은 앞으로AC를 계속 읽게 만드는 작은 예고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이성적인것은정확히어디에속하는가?’, ‘이성적인것과지적인것은정확히어떻게다른가?’라는 질문에AC.40한 문장으로 성급하게 답을 만들어 넣기보다,스베덴보리가 뒤에서 인간의 내적 구조를 더 펼쳐 보일 때까지 따라가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면 답은 간단합니다.
‘지적인것들이속사람에속한다고했으므로이성적인것들은곧겉사람에속한다는뜻인가?’
AC.40만 놓고 보면‘그렇게까지말할수는없습니다.’본문이 명시적으로 말하는 것은 후자,곧‘지적인것들이속사람에속한다’는 사실입니다.이성적인 것의 정확한 위치와 역할은 더 넓은AC의 설명 속에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처럼 본문이 말하는 것과 우리가 거기서 추론하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AC를 오래 읽어 가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때로는 조금 덜 설명하는 것이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말한 것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는 길이 됩니다.
창1:14-19의 넷째 날에 해당하는AC.30-38을 여기까지 읽고 나면 여러 내용이 한꺼번에 등장해서 조금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해와 달과 별,사랑과 신앙,의지와 이해,순종,교대와 다양함,낮과 밤,빛과 어둠이 연이어 나오기 때문입니다.그래서 넷째 날이 끝나는 이 지점에서 전체 흐름을 한 번 묶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넷째 날은‘빛이처음생기는날’이라고 이해하면 정확하지 않습니다.빛은 이미 첫째 날에 등장했습니다.넷째 날에 새롭게 등장하는 것은‘광명체들’입니다.AC.30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사랑과 신앙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말할 수 있을 뿐 아니라,이제 사랑과 신앙이 사람 안에서 빛을 비추고 삶을 이끌게 되는 상태를 설명합니다.그래서 큰 광명체는 사랑,작은 광명체는 신앙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앙이 사랑과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AC.31-34를 지나면서 이 점이 점점 분명해집니다.사람은 처음에는 말씀과 교리를 배우고 신앙에 속한 것들을 알게 됩니다.그러나 참된 영적 생명에서는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 홀로 서는 것이 아닙니다.스베덴보리가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를 말하면서 사랑을 더 큰 것으로 두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신앙의 생명은 사랑에서 옵니다.
이것은‘사랑만있으면진리나신앙은필요없다’는 뜻도 아닙니다.사랑과 신앙은 하나를 이루어야 합니다.다만 그 질서에서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받습니다.넷째 날의 해와 달은 바로 이 관계를 보여 줍니다.그러므로 신앙을 많이 알고 말하는 것만으로 영적 생명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그 신앙이 사랑과 결합되어 삶 안에서 살아 있어야 합니다.
별들도 등장합니다.별은 신앙에 속한 여러 지식과 진리들을 나타냅니다.해와 달과 별을 함께 보면 넷째 날의 모습이 조금 더 선명해집니다.사람 안에 단지 하나의 막연한‘종교적느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사랑과 신앙과 그것에 속한 여러 진리가 서로 관계를 이루면서 영적 삶을 비추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AC.33에서는 이 빛의 근원이 더욱 깊이 설명됩니다.사람의 생각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생명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랑과 관계되어 있습니다.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달라집니다.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사랑은 단순한 감정 하나가 아니라 인간 생명의 중심과 관계된 것입니다.넷째 날에 큰 광명체인 사랑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도 이 흐름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4에서는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 다시 강조됩니다.사랑 없는 신앙,곧 삶과 분리된 신앙은 참된 의미의 살아 있는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여기서 넷째 날의 핵심 가운데 하나가 분명해집니다.거듭남은 사람이 진리를 머릿속에 많이 저장하는 과정만이 아니라,그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여 살아 있는 신앙이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AC.35에서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인간의 두 능력인‘의지’와‘이해’가 등장합니다.사람은 의지하고 이해하는 존재이며,이 두 능력은 본래 하나의 생명을 이루도록 되어 있습니다.그러나 타락한 인간에게서는 의지와 이해의 관계가 크게 손상되었습니다.주님의 자비로 사람이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이 보존되기 때문에,사람은 자신의 악한 의지가 원하는 것과 다른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일 수 있으며,이를 통해 거듭남의 길이 열립니다.
이 대목은 넷째 날의 사랑과 신앙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사랑과 신앙이 하나가 된다는 말을 단순히‘내가원하는것을옳다고믿으면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타락한 인간의 의지는 처음부터 선하지 않습니다.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진리를 통해 사람을 가르치시고,사람은 그 진리를 받아들이며 점차 의지와 삶이 새로워져야 합니다.참된 결합은 악한 의지와 거짓된 생각의 일치가 아니라,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하나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AC.36은 그래서 신앙을‘순종’과 연결합니다.스베덴보리는 신앙이 단순히 무엇을 알고 인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특별히 순종이라고 말합니다.그리고 그 순종의 중심에‘주님사랑’과‘이웃사랑’을 둡니다.여기서도 신앙과 삶이 분리되지 않습니다.무엇을 신앙한다고 말하는가만이 아니라,그 신앙이 어떤 사랑과 삶으로 나타나는가가 중요합니다.
AC.37에서는 창1:14의‘징조와계절과날과해’로부터 영적·천적 상태의‘교대와다양함’이라는 중요한 원리를 설명합니다.자연계에 아침과 낮과 저녁과 밤이 있고,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있듯이 영적 생명에도 서로 다른 상태들이 있습니다.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교대와 다양함이 없다면 삶이 획일적이 되어 생명이 없게 되고,선과 진리도 분별되거나 구별되거나 퍼셉션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다만 이것을‘영적으로성장하려면반드시침체와혼란과악을경험해야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AC.37이 말하는 것은‘영적인것들과천적인것들의교대와다양함’입니다.따라서 모든 영적 후퇴나 악한 상태를 주님께서 성장시키기 위해 주신 필수적인 계절이라고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중요한 것은 영적 생명이 변화 없는 정지 상태가 아니라 교대와 다양함을 가진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사실입니다.
마지막AC.38에서는 넷째 날을 마무리하면서 네 가지 대응을 매우 간결하게 제시합니다. ‘낮’은 선, ‘밤’은 악, ‘빛’은 진리, ‘어둠’은 거짓입니다.그래서 선한 것들은‘낮의일’,악한 것들은‘밤의일’이라고 합니다.스베덴보리는 요3:19, 21을 인용하여 빛과 어둠이 인간이 받아들이는 진리와 거짓,그리고 그의 삶과 관계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AC.37의‘밤’과AC.38의‘밤’을 기계적으로 똑같이 읽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AC.37에서는 하루의 변화 전체가 상태의 교대와 다양함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지만,AC.38에서는 낮과 밤의 대조를 통해 선과 악을 나타냅니다.말씀의 상응은 단어 하나에 언제나 하나의 뜻만 붙여 놓은 고정된 암호표가 아니라,문맥 안에서 그 의미를 살펴야 합니다.
이렇게AC.30-38을 한 흐름으로 놓고 보면 넷째 날의 중심이 보입니다.앞선 과정에서 사람이 선과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였다면,이제 사랑과 신앙이 사람 안에서 광명체처럼 세워지고 영적 삶을 비추며 다스리기 시작합니다.그리고 사랑과 신앙은 서로 분리된 두 생명이 아니라 하나를 이루어야 하며,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받고 순종과 삶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넷째 날을 단순히‘해와달과별의창조’라고만 읽으면 그 속뜻의 중심을 놓치게 됩니다.이 날은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신앙이 점차 살아 있는 빛으로 자리 잡고,선과 악,진리와 거짓이 더욱 분명히 구별되며,영적 생명이 그 빛 아래서 질서를 이루어 가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위AC.37본문에‘이말속에는지금당장다펼쳐보일수없을만큼많은아르카나가담겨있지만’(In these words are contained more arcana than can at present be unfolded)이라는내용이있습니다.아마우리의현역량과상태가,펼쳐보여도아직은이해할수없는,감당할수없는역량이어서그런것같은데...그럼에도혹시한두가지만좀보여주실수있나요?‘징조와계절과날과해를이루게하라’(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는말씀과,‘땅이있을동안에는심음과거둠과추위와더위와여름과겨울과낮과밤이쉬지아니하리라’라는창8:22말씀을좀더와닿게이해하고싶어서입니다.
창1:14에는‘징조’(signs), ‘계절’(seasons), ‘날’(days), ‘해’(years)라는 네 표현이 한꺼번에 나옵니다.AC를 읽는 독자라면 자연스럽게 궁금해집니다. ‘그렇다면징조는무엇을뜻하고,계절은무엇이며,날과해는각각어떤영적상태를뜻할까?’
그런데 뜻밖에도AC.37은 이 네 단어를 하나씩 풀어 주지 않습니다.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여기에‘현재로서는말할수있는것보다더많은아르카나가들어있다’고 말합니다.그리고 곧바로 네 단어의 개별적인 의미가 아니라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에 존재하는‘교대’(alternations)와‘다양함’(varieties)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AC.37을 읽으면서‘징조는이것,계절은이것,날은이것,해는이것’이라는 네 개의 고정된 정의를 당장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적어도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오히려 그는 먼저 이 네 표현을 이해하기 위한 더 큰 배경을 보여 줍니다.영적 생명에는 상태의 변화가 있으며,그 변화는 자연계에서 날과 해가 변하는 모습에 비유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연계에서는 아침,낮,저녁,밤이 교대하고,봄,여름,가을,겨울이 교대합니다.그에 따라 빛과 열이 달라지고 자연의 모습도 달라집니다.스베덴보리는 영적·천적인 것들에도 이와 같은‘교대’가 있다고 말합니다.물론 이것은 영적 상태가 자연계의 하루나 계절과 정확히 같은 시간표에 따라 움직인다는 뜻은 아닙니다.자연의 변화가 영적 상태의 변화를 이해하도록 보여 주는 상응적 모습이라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렇다면‘날’과‘해’는 각각 짧은 영적 주기와 긴 영적 주기를 뜻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이해를 돕는 하나의 추측이나 비유로는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AC.37이 그렇게 정의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이 글이 직접 말하는 것은 영적·천적 상태의 교대가‘날과해의교대에비유된다’는 데까지입니다.그러므로 여기서는 그 정도의 경계를 지키는 것이 좋습니다.
‘계절’역시 곧바로‘하나의영적상태에서다음상태로넘어가는정해진시점’이라고 정의할 필요는 없습니다.자연계에서 계절이 변화와 교대를 보여 주는 것은 분명하지만,AC.37은`seasons`의 속뜻을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스베덴보리가‘지금말할수있는것보다더많은아르카나’가 있다고 한 이상,오히려 독자가 성급하게 하나의 뜻으로 고정하지 않는 것이 본문을 존중하는 태도입니다.
‘징조’도 마찬가지입니다.이것을‘내가현재어느영적상태에있는지를알려주는표시’라고 설명하면 이해하기는 쉽지만,그것 역시AC.37의 직접적인 정의는 아닙니다.더구나 성경에서‘징조’라는 말은 문맥에 따라 여러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으므로,창1:14의`signs`를 하나의 심리적인 자기진단 표지로 좁혀 버리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AC.37은 왜 굳이‘징조와계절과날과해’를 언급하면서 그 뜻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을까요?여기서 우리는AC를 읽는 한 가지 중요한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스베덴보리는 언제나 한 글에서 모든 것을 다 설명하지 않습니다.어떤 표현을 먼저 제시하고 그 의미의 큰 틀만 보여 준 뒤,말씀의 다른 부분에 이르러 다시 돌아와 더 깊이 설명하기도 합니다.
실제로AC.37마지막에서 그는 이 주제가 창8:22에서 다시 다루어질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땅이있을동안에는심음과거둠과추위와더위와여름과겨울과낮과밤이쉬지아니하리라’는 말씀입니다.따라서 지금AC.37에서 모든 세부를 확정하기보다,앞으로 말씀의 다른 곳에서 같은 주제가 어떻게 다시 펼쳐지는지를 기다리는 것이AC를 읽는 좋은 방법입니다.
그렇다고AC.37이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오히려 아주 중요한 원리를 분명하게 알려 줍니다.영적 생명은 하나의 상태에 영원히 고정되어 있는 생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에는 교대와 다양함이 있으며,스베덴보리는 그런 변화가 없으면 삶은 획일적이 되어 생명이라 할 만한 것이 없고,선과 진리도 분별되고 구별되거나 퍼셉션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원리를 먼저 붙들면‘징조와계절과날과해’를 성급하게 네 개의 공식으로 외우지 않아도 됩니다.오히려 이 네 표현 전체가 우리에게‘영적생명에는상태와상태의변화가있다’는 더 큰 세계를 열어 주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를 처음 읽을 때 이런‘미완성된설명’을 만나면 답답할 수도 있습니다. ‘왜여기서정확히뜻을말해주지않지?’싶을 수 있습니다.그러나 이것도‘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의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말씀의 속뜻은 하나의 단어에 하나의 뜻을 붙인 사전처럼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같은 표현들이 말씀의 여러 곳에서 다시 나타나고 서로 연결되면서 점차 더 풍성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AC.37에서‘징조,계절,날,해’의 뜻을 묻는 가장 안전한 답은 이렇습니다.이 네 표현에는 많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아직 그것들을 각각 상세히 밝히지 않습니다.지금 그가 먼저 가르치는 것은 영적·천적 생명에‘교대와다양함’이 있으며,그것이 자연계의 날과 해의 변화에 비유된다는 사실입니다.세부적인 뜻을 서둘러 채우기보다,스베덴보리가 앞으로 그것을 어떻게 펼쳐 가는지를 따라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위AC.35본문,‘만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if it were not that the Lord has mercy on him.)말인데요,우리를 지으신 신(神)이 이런 자비의 신이시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AC.35마지막의 ‘만일주님께서그사람을자비로붙들어주지않으신다면’이라는 말은 짧지만 참으로 큰 위로를 줍니다.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이해는 하늘을 향하면서도 의지는 지옥을 향할 수 있으며, 모든 행위에서 실제로 행하는 쪽은 의지이므로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사람 전체가 지옥으로 곤두박질할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절망적인 문장의 끝에 ‘주님의자비’가 등장합니다. 인간의 상태에 대한 마지막 말이 인간의 악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인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자비’라고 하면 죄를 지은 사람을 불쌍히 여겨 용서해 주시는 것을 먼저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자비에 포함됩니다. 그러나 AC.35의 문맥에서 자비는 조금 더 근본적인 의미로 다가옵니다. 사람이 자기 악한 의지에 따라 끝까지 떨어지도록 버려 두지 않으시는 주님의 자비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님께서그사람을자비로붙들어주지않으신다면’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매우 엄중한 진단과 주님에 대한 그의 신뢰가 함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인간의 악을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 사람이 조금 노력하면 자기 힘으로 충분히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깊이 자기 사랑과 악으로 기울 수 있는지를 매우 강하게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자비가 더욱 크게 드러납니다. 사람이 여전히 돌이킬 수 있고, 진리를 들을 수 있고, 선을 향하여 움직일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인간 자신의 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붙들어주신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여기서는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AC.35은 그 작동 방식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생각이 갑자기 떠오르는 것, 어떤 일이 뜻밖에 막히는 것, 고통이나 시험을 겪는 것 등을 하나하나 가리켜 ‘이것이바로그때주님께서붙드신것이다’라고 AC.35만을 근거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와 거듭남에 관한 다른 가르침을 함께 살펴보면 주님의 인도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지만, 이 글에서는 우선 ‘인간이자기악에완전히내맡겨져있지않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가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자비로 붙드신다고 해서 사람을 강제로 선하게 만드시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여전히 진리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으며, 악과 싸울 수도 있고 그것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인간의 자유를 없애는 방식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유 안에서 선과 진리를 향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길을 열어 주시는 자비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점에서 주님의 자비를 ‘공의라면벌해야하지만자비가그것을눈감아주는것’처럼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신적 질서와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을 악이 아니라고 하거나 거짓을 진리라고 인정해 주시는 것이 자비가 아닙니다. 오히려 악 가운데 있는 사람을 그대로 버리지 않고, 그가 악에서 돌이켜 선을 선택할 수 있도록 구원을 향해 이끄시는 것이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자비는 인간의 악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악에서 건져 내고자 합니다.
그래서 AC.35의 이 한마디는 거듭남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에도 중요한 위로를 줍니다.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다 보면 ‘나는왜아직도이렇지?’, ‘왜알고있는것과실제삶이이렇게다르지?’ 하고 낙심할 수 있습니다. 특히 AC.35처럼 이해는 하늘을 향하면서 의지는 그 반대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말씀을 읽으면 자기 안의 모순이 더욱 크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이 문장의 끝까지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러므로인간에게는희망이없다’고 끝내지 않습니다. ‘만일주님께서그사람을자비로붙들어주지않으신다면’이라고 말합니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는 주님의 자비로 붙들려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우리의 의지가 이미 완전해졌다는 데 있지 않고, 그런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는 주님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어차피주님께서붙드시니나는아무렇게나살아도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자비를 알수록 우리는 그 자비에 응답하여 악에서 돌아서고,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 삶으로 옮기며, 주님께서 이끄시는 방향을 자유롭게 선택해야 합니다. 자비는 거듭남을 대신해 주는 면허가 아니라 거듭남이 가능하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를지으신신이이런자비의신이시라는사실이얼마나다행인지모르겠습니다’라는 고백은 AC.35을 읽고 충분히 나올 수 있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우리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주님의 자비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AC.35은 그 자비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든 방식으로 역사하는지를 설명하는 글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것만큼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인간이 자기 악한 의지의 무게만을 따라 끝없이 떨어지도록 버려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짧은 한마디 때문에,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그렇게 엄중하게 말한 AC.35도 결국 절망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를 바라보며 끝납니다.
창세기의처음세장은전체적으로태고교회를다루는데,이교회는그처음시기부터멸망한마지막시기에이르기까지‘사람’(man)[homo]이라합니다.이장의앞부분은태고교회가천적인간이었던가장번성한상태를다루며,여기서는이제proprium으로기울어진사람들과그후손들을다룹니다.The first three chapters of Genesis treat in general of the most ancient church,which is called“man”[homo]from its first period to its last,when it perished;the preceding part of this chapter treats of its most flourishing state,when it was a celestial man;here it now treats of those who inclined to their own,and of their posterity.
해설
AC.137은 지금까지 읽어 온 창세기 1장과 2장,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3장을 하나의 큰 역사로 묶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의 처음 세 장이 전체적으로 태고교회를 다룬다고 밝힙니다. 그리고 그 태고교회를 그 처음 시기부터 마침내 멸망하는 마지막 시기에 이르기까지 ‘사람’(man) [homo]이라고 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사람’은 단지 한 개인을 가리키는 표현으로만 읽을 수 없습니다. 창1-3의 속뜻에서는 태고교회와 그 교회를 이루었던 사람들의 상태가 하나의 연속적인 역사로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 설명은 지금까지 우리가 창1과 창2를 읽어 온 흐름도 다시 정리해 줍니다. 창1에서는 사람이 거듭나는 과정이 단계적으로 묘사되었고, 창2앞부분에서는 그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된 상태가 다루어졌습니다. AC.137은 이 장의 앞부분을 태고교회의 ‘가장번성한상태’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번성했다는 것은 외적인 세력이나 물질적 풍요가 절정에 이르렀다는 뜻이 아니라, 태고교회가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께 인도받고 퍼셉션으로 선과 진리를 알며, 모든 지혜와 지성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질서 안에 있었던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제 창2안에서 중요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AC.131에서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proprium으로 기울기 시작했다고 했고, AC.132-136은 창2:18-25가 바로 그 문제를 다룬다는 전체 개요를 제시했습니다. AC.137은 이 전환을 태고교회 전체 역사 속에 놓아 줍니다. 앞부분이 태고교회의 가장 번성한 천적 상태였다면, 이제부터는 proprium으로 기울어진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 다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창2후반부는 창3의 타락 이야기와 단절된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라, 태고교회의 상태가 변화해 가는 과정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여기서 ‘그후손들’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한 사람의 어느 순간의 심리 변화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대를 따라 변화해 가는 태고교회의 상태를 보고 있습니다. AC.127에서도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려는 욕망이 태고교회 후손들의 타락의 원인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37은 창2후반부에서 시작되는 proprium으로의 기울어짐과 그 후손들의 상태가 결국 창3까지 이어지는 큰 흐름 속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그 변화가 구체적으로 어떤 단계를 거쳐 멸망에 이르게 되는지는 앞으로의 본문을 따라가며 확인해야 합니다.
또한 AC.137은 ‘태고교회’라는 말을 읽을 때 한 시점의 고정된 상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같은 태고교회 안에도 ‘가장번성한상태’가 있었고, 이후 proprium으로 기울어진 사람들과 그 후손들의 상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창1-3전체가 그 처음 시기부터 마지막 멸망에 이르기까지의 흐름을 다룬다고 합니다. 따라서 ‘태고교회사람들은모두천적인간이었다’는 식으로 모든 시기를 동일하게 묶어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 자체에도 시작과 절정, 변화와 쇠퇴의 과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창3을 읽을 때에도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창3의 뱀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타락을 갑자기 등장한 한 개인의 단회적인 사건으로만 읽기보다, 이미 창2후반부에서 시작된 태고교회 후손들의 proprium으로의 기울어짐이 어떻게 더 진행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AC.137은 아직 그 구체적인 과정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창1-3전체가 태고교회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를 다루며, 바로 이 지점부터 이야기의 초점이 ‘가장번성한천적상태’에서 ‘proprium으로기울어진사람들과그후손들’로 이동한다는 큰 구조를 붙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AC.137은 짧지만 창1-3전체의 독법을 결정하는 중요한 안내문입니다. 창1의 거듭남, 창2앞부분의 천적 인간, 창2후반부에서 시작되는 proprium으로의 기울어짐, 그리고 앞으로 창3에서 전개될 태고교회의 쇠퇴와 멸망은 서로 떨어진 이야기들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적인 영적 역사 안에 놓여 있습니다. 이 큰 틀을 기억하면 이제부터 상세히 설명될 창2:18-25도 단순히 최초 남녀의 창조와 결혼에 관한 이야기로만 읽지 않고, 태고교회가 가장 번성한 천적 상태에서 proprium으로 기울어 가기 시작하는 중대한 전환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AC.137)
말씀에는전반적으로네가지서로다른스타일이있습니다.첫째는태고교회의스타일입니다.그들의표현방식은이땅의것과세상의것을말할때,그것들이표상하는영적이고천적인것들을동시에생각하는것이었습니다.그래서그들은단지표상으로표현했을뿐아니라,그것들을일종의역사적연속으로엮어더욱생명력있게하였는데,이런방식은그들에게더없이큰기쁨이었습니다.이런스타일을가리켜한나는예언가운데이렇게말했습니다. There are in the Word, in general, four different styles.The first is that of the most ancient church.Their mode of expression was such that when they mentioned terrestrial and worldly things they thought of th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which these represented.They therefore not only expressed themselves by representatives, but also formed these into a kind of historical series, in order to give them more life; and this was to them delightful in the very highest degree.This is the style of which Hannah prophesied, saying:
심히교만한말을다시하지말것이며오만한말을너희의입에서내지말지어다(삼상2:3)Speak what is high!high!Let what is ancient come out of your mouth(1 Sam. 2:3).
창조와에덴동산등에관한이모든내용,곧아브람시대까지의기록을모세는태고교회의후손들로부터전해받았습니다. These particulars concerning the creation, the garden of Eden, etc., down to the time of Abram, Moses had from the descendants of the most ancient church.
[2] 둘째스타일은역사적스타일로,아브람이후의모세오경과여호수아,사사기,사무엘기,열왕기에나타납니다.이책들에서역사적사실들은문자적의미에나타난그대로입니다.그러나그모든것에는전체적으로도부분적으로도내적의미안에전혀다른것들이담겨있는데,이에대해서는주님의신적자비로이어지는글들에서그순서대로설명하겠습니다. 셋째스타일은예언적스타일입니다.이스타일은태고교회에서그토록높이존중되던스타일에서생겨났습니다.그러나태고교회의스타일처럼연결된역사적형식은아니고단절되어있으며,내적의미없이는거의이해할수없습니다.그내적의미안에는가장깊은아르카나가담겨있고,그것들은아름답게연결된질서를따라이어지며,겉사람과속사람,교회의여러상태,하늘자체를다루고,가장깊은의미에서는주님을다룹니다. 넷째스타일은다윗의시편에나타나는스타일로,예언적스타일과일상적인언어사이에놓여있습니다.그안에서는왕으로서의다윗이라는인격아래,내적의미에서는주님을다룹니다. The second style is historical, which is found in the books of Moses from the time of Abram onward, and in those of Joshua, Judges, Samuel, and Kings.In these books the historical facts are just as they appear in the sense of the letter; and yet they all contain, in both general and particular, quite other things in the internal sense, of which, by the Lord’s Divine mercy, in their order in the following pages.The third style is the prophetical one, which was born of that which was so highly venerated in the most ancient church.This style, however, is not in connected and historical form like the most ancient style, but is broken, and is scarcely ever intelligible except in the internal sense, wherein are deepest arcana, which follow in beautiful connected order, and relate to the external and the internal man; to the many states of the church; to heaven itself; and in the inmost sense to the Lord.The fourth style is that of the psalms of David, which is intermediate between the prophetical style and that of common speech.The Lord is there treated of in the internal sense, under the person of David as a king.
해설
AC.66은 창세기 1장에 대한 해설을 마친 자리에서 말씀의 문체와 속뜻의 관계를 한층 넓게 보여 주는 글입니다. 바로 앞 AC.64-65에서는 말씀에 문자적 의미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속뜻이 있으며, 천사들은 문자와 이름이 아니라 그것들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66은 말씀 전체를 모두 똑같은 외적 형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전반적으로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첫째는 태고교회의 스타일, 둘째는 역사적 스타일, 셋째는 예언적 스타일, 넷째는 다윗의 시편에 나타나는 스타일입니다. 네 스타일은 겉으로 나타나는 방식이 서로 다르지만, AC.66의 관심은 결국 그 서로 다른 외적 형식 안에 어떻게 내적 의미가 담겨 있는가에 있습니다.
첫째인 태고교회의 스타일은 지금까지 우리가 읽어 온 창세기 앞부분과 직접 관계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교회 사람들은 땅과 세상에 속한 것들을 말할 때 동시에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후대 사람이 자연물 하나를 보고 의도적으로 ‘이것은무엇을상징할까?’ 하고 해석한 것과는 조금 다르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외적인 것을 말하면서 그것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함께 생각하는 표현 방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표상들을 단순히 하나씩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일종의역사적연속’으로 만들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한 이유를 그것들에 더 큰 생명력을 주기 위해서였다고 하며, 그런 방식이 그들에게 가장 큰 기쁨이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창조와 에덴동산을 비롯한 앞부분을 읽을 때, AC가 그것을 단순한 상징 목록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표상의 이야기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서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바로 이 문맥에서 한나의 삼상2:3이 인용되는데, 여기서는 잠시 주의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읽는 개역개정은 ‘심히교만한말을다시하지말것이며오만한말을너희의입에서내지말지어다’라고 되어 있는 반면, AC의 영어 인용은 ‘높은것을말하라,높은것을!옛것이네입에서나오게하라’는 식으로 전혀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본문과 오늘날의 일반적인 번역은 개역개정과 마찬가지로 교만한 말을 금하는 방향입니다. 그러므로 AC의 영어 인용을 근거로 개역개정이 잘못되었다거나, AC가 그 구절의 ‘진짜번역’을 제공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한국어 본문에서는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여 개역개정 문구를 그대로 두되, 스베덴보리가 여기에서 사용하는 인용 형태가 우리가 읽는 성경 번역과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지와 AC.66의 논증에서 이 인용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는 심화에서 따로 살펴보겠습니다.
이어 시78:2-4의 ‘내가입을열어비유로말하며예로부터감추어졌던것을드러내려하니’라는 말씀이 인용됩니다. AC.66은 특별히 이러한 표상들을 다윗이 ‘예로부터감추어졌던것’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여기서 굳이 시편의 모든 세부 표현을 하나씩 새로운 상응으로 풀 필요는 없습니다. 이 인용의 역할은 첫째 스타일의 표상들이 ‘예로부터’ 내려온 것이라는 설명을 뒷받침하는 데 있습니다. 특히 바로 다음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조와 에덴동산 등의 내용, 곧 아브람 시대까지의 기록을 모세가 태고교회 후손들로부터 받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시78의 인용과 다음 문장은 함께 읽는 것이 좋습니다. ‘예로부터감추어졌던것’이라는 표현과 태고교회로부터 내려온 표상적 전승이라는 설명이 서로 연결됩니다.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라면 상당히 큰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스베덴보리는창세기1장부터아브람이전까지의내용을모세가직접계시받아처음기록한것이아니라,앞선세대에게서전해받은자료라고보는것인가?’ AC.66의 문장은 분명히 그렇다고 말합니다. ‘창조와에덴동산등에관한이모든내용,아브람시대까지의기록을모세는태고교회의후손들로부터전해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AC.66이 직접 제시하는 상당히 중요한 주장입니다. 다만 여기서 곧바로 현대 성서학의 문서설이나 구전 전승론과 동일시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그러므로창1-11은허구이다’라고 결론 내릴 수도 없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어지는 둘째 스타일에서 아브람 이후의 역사적 사실들은 문자에 나타난 그대로라고 분명하게 구별합니다. 이 문제는 AC의 창세기 앞부분 이해에 매우 중요하므로 별도 심화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둘째 스타일은 ‘역사적스타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범위를 아브람 이후의 모세오경과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기, 열왕기로 명시합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아주 중요한 말을 덧붙입니다. ‘역사적사실들은문자적의미에나타난그대로’라는 것입니다. 즉 이 둘째 스타일에서 스베덴보리는 내적 의미가 있다는 이유로 외적 역사를 지우지 않습니다. 문자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은 그대로이면서, 동시에 그 모든 것에는 전체적으로도 부분적으로도 내적 의미 안에 ‘전혀다른것들’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AC.66의 둘째 스타일에서는 ‘역사인가상징인가?’라는 양자택일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역사적 사실이면서 동시에 속뜻을 갖습니다.
이 구별은 창세기 앞부분을 읽을 때 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아브람 이후의 역사적 스타일에 대해서는 ‘사실들이문자그대로’라고 명시하는 반면, 그 이전 태고교회 스타일에 대해서는 표상들을 ‘일종의역사적연속’으로 엮었다고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문장을 구별해서 읽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AC.66하나만 가지고 창1부터 창11까지 각 인물과 사건의 역사성 여부를 세세하게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현재 확실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첫째와 둘째 스타일을 서로 다르게 설명하며, 아브람 이후의 둘째 스타일에 대해서는 문자적 역사성을 명시적으로 확인한다는 사실입니다.
셋째는 예언적 스타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스타일이 태고교회에서 매우 높이 존중되던 스타일에서 생겨났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태고교회 스타일처럼 연결된 역사 형식은 아니고 ‘단절되어’ 있으며, 내적 의미 없이는 거의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예언서는문자적으로아무뜻이없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원문은 ‘scarcelyeverintelligibleexceptintheinternalsense’, 곧 내적 의미 없이는 거의 이해할 수 없다고 강하게 말하지만, 그 목적은 문자 자체를 폐기하는 데 있지 않고 그 단절된 표현들의 내적 의미 안에 깊은 아르카나와 아름답게 연결된 질서가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 있습니다. AC.65에서 말씀의 내적 의미가 ‘연속의질서’를 가진다고 했던 설명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예언적 스타일의 내적 의미가 무엇을 다루는지도 직접 열거합니다. 겉 사람과 속 사람, 교회의 여러 상태, 하늘 자체를 다루며 ‘가장깊은의미에서는주님’을 다룹니다. 여기서 특히 마지막 표현은 앞으로 말씀의 속뜻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그러나 이 한 문장을 곧 ‘모든성경구절은무조건주님의지상생애에대한암호이다’라는 공식으로 바꿔서는 안 됩니다. AC.66은 예언적 스타일의 내적 의미가 여러 차원을 다루며 가장 깊은 의미에서 주님을 다룬다고 말합니다. 그 구체적인 관계는 실제 예언서 인용을 해설하는 과정에서 하나씩 확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넷째는 다윗의 시편 스타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예언적 스타일과 일상적인 언어 사이의 중간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왕으로서의다윗이라는인격아래에서내적의미로는주님을다룬다’고 합니다. 이 표현도 매우 중요합니다. 시편을 읽을 때 다윗의 역사적 인격과 개인적 언어를 곧 지워 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그 외적 형식 아래 내적 의미에서는 주님을 다룬다는 것이 AC.66의 설명입니다. 따라서 시편의 ‘나’를 만날 때 곧바로 모든 문장을 독자의 개인 감정으로만 읽는 것도, 반대로 문자적 화자를 아무 의미 없다고 하는 것도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직접 밝힌 것은 왕 다윗의 인격 아래 주님이 내적 의미에서 다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 네 가지 스타일을 보면 말씀의 속뜻이 언제나 똑같은 외적 방식으로 감추어져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스타일에서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생각하면서 자연적인 표상들을 역사적 연속으로 엮었습니다. 역사적 스타일에서는 실제 역사적 사실들 안에 전체와 세부에 내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언적 스타일에서는 외적으로 단절되어 보이는 표현들 안에 깊은 아르카나가 아름다운 질서로 연결되고, 시편에서는 왕 다윗의 인격 아래 내적 의미로 주님이 다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속뜻이있다’는 하나의 원칙만 붙들고 모든 성경 본문을 동일한 방법으로 기계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AC.66은 보여 줍니다.
그러나 네 스타일의 차이보다 더 중요한 통일성도 있습니다. 모두 말씀이며, 외적으로 서로 다른 형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안에는 문자에 다 드러나지 않는 내적 내용이 있습니다. 앞 AC.64에서 말씀의 속뜻을 ‘말씀의가장참된생명’이라고 했고, AC.65에서는 그 내적 의미의 아름다움과 연속의 질서가 천사들에게 ‘영광’이라고 불렸습니다. AC.66은 이제 그 속뜻이 말씀의 서로 다른 외적 스타일 안에서 어떻게 담겨 있는지를 큰 윤곽으로 보여 줍니다.
또 한 가지 조심할 것은 이 네 가지 스타일을 ‘낮은단계에서높은단계로발전한네계시수준’처럼 읽는 것입니다. AC.66은 그런 서열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태고교회 스타일이 그들에게 가장 큰 기쁨이었다고 하며, 예언적 스타일은 그 스타일에서 생겨났고, 시편은 예언적 스타일과 일상 언어 사이에 있다고 설명하지만, 이것을 ‘첫째가가장높고둘째는낮고셋째가다시높다’는 등급표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각각 말씀 안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는 스타일입니다.
AC.66은 그래서 창세기 1장을 마치는 글이면서 동시에 앞으로 AC를 읽는 방법을 준비시키는 글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주로 첫째 스타일에 속하는 창조의 표상적 연속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 이후로 가면 둘째인 역사적 스타일을 만나게 되고, AC가 그 실제 역사 속의 모든 것에서 어떻게 내적 의미를 밝히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예언서와 시편이 인용될 때도 그들의 서로 다른 스타일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에는속뜻이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모든 본문을 똑같은 상징 해독법으로 읽는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의 서로 다른 외적 형식을 존중하면서 그 안의 영적이고 천적인 내용을 밝힌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성경과 AC의 순서는 바뀌지 않습니다. 먼저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 안에는 태고교회의 표상적 스타일도, 실제 역사의 스타일도, 예언의 스타일도, 시편의 스타일도 있습니다. AC는 그 차이를 없애거나 성경의 표현을 자기 체계에 맞게 바꾸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말씀 안에 어떤 내적 의미가 담겨 있는지를 밝히려 합니다. 따라서 AC.66이 가르치는 좋은 독법은 ‘문자를버리고속뜻으로가자’가 아니라, ‘말씀의외적형식을정확히읽으면서그안에주님께서두신더깊은뜻을따라가자’는 방향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1:31)
AC.63
그동안주님은계속해서인간을위하여악과거짓에맞서싸우시며,여러싸움을통해그를진리와선안에굳게세우십니다.이싸움의시간은곧주님께서역사하시는시간이며,그래서예언자들가운데서는거듭난인간을하나님의손가락의일(theworkofthefingersofGod)이라고도부릅니다.그리고사랑이주된원리가되어작용하기전까지주님은쉬지않으십니다.일이이만큼진전되어신앙이사랑과결합하게되면,그상태를‘심히좋았더라’(verygood)라고합니다.이는그때에주님께서그를자신의모양으로움직이시기때문입니다.여섯째날의끝에서악한영들은떠나가고선한영들이그자리를대신하며,인간은하늘,곧천적낙원으로인도되는데,이에대해서는다음장에서다루겠습니다. Meanwhile the Lord continually fights for him against evils and falsities, and by combats confirms him in truth and good.The time of combat is the time of the Lord’s working; and therefore in the prophets the regenerate man is called the work of the fingers of God. Nor does he rest until love acts as principal; then the combat ceases.When the work has so far advanced that faith is conjoined with love, it is called “verygood”; because the Lord then actuates him, as his likeness.At the end of the sixth day the evil spirits depart, and good spirits take their place, and the man is introduced into heaven, or into the celestial paradise; concerning which in the following chapter.
해설
AC.63은 창1:31의 ‘하나님이지으신그모든것을보시니보시기에심히좋았더라’라는 말씀에 대한 설명을 마무리하면서, 지금까지 진행된 거듭남의 전투에서 실제로 누가 일하고 계셨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밝힙니다. 바로 앞 AC.62는 사람이 ‘조금씩조금씩’ 나아가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AC.63은 그 과정의 이면에서 ‘주님은계속해서인간을위하여악과거짓에맞서싸우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의 거듭남을 인간 자신의 영적 성취 과정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에게 전투가 있고 그가 그 전투를 실제로 겪지만, 그를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고 그 전투들을 통해 그를 진리와 선 안에 굳게 세우시는 분은 주님입니다.
이것은 AC.59와도 직접 연결됩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악한 영들이 사람의 욕정을 자극하도록 허용되지만, 그것들을 선을 향해 기울이시는 분은 주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사람을 매 순간, 심지어 매 순간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 보호하지 않으신다면 사람은 즉시 멸망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AC.63은 이제 그 흐름을 ‘전투의시간은주님께서일하시는시간’이라고 압축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시험과 전투를 겪는다는 것과 주님께서 그를 위하여 싸우신다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은 실제로 전투를 겪지만, 그 전투 가운데 그를 붙드시고 진리와 선 안에 굳게 세우시는 능력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여기서 ‘전투의시간은주님께서일하시는시간’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 실패, 질병, 갈등을 곧바로 ‘지금주님께서특별한영적전투를하고계신증거’라고 해석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AC.63의 문맥은 거듭남 가운데 악과 거짓에 맞서는 전투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을 모든 인생의 어려움을 설명하는 만능 공식으로 확대하기보다, 거듭남의 전투 가운데 주님께서 사람을 버려 두지 않으시고 계속 일하신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에게는 싸움으로 경험되는 그 시간이 동시에 주님께서 그를 진리와 선 안에 굳게 세우시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래서 예언자들 가운데 거듭난 인간을 ‘하나님의손가락의일’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여기서 ‘손가락’이라는 단어 자체를 가지고 곧바로 ‘가장미세하고정교한섭리’를 뜻한다고 별도의 상응을 만들어 낼 필요는 없습니다. AC.63이 이 표현을 사용하는 문맥의 핵심은 ‘일’의 주체입니다. 거듭난 인간은 자기 손으로 자기 자신을 만들어 낸 작품이 아니라 ‘하나님의손가락의일’입니다. 거듭남이 인간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라는 앞 문장을 다시 강조하는 표현으로 읽으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사랑이주된원리가되어작용하기전까지’ 쉬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사랑이주된원리가된다’는 것은 단순히 사랑이라는 감정이 많아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앞 AC.60-61에서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가 되고,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것은 이해에,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속한 것은 의지에 속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63은 그 사랑이 ‘주된원리’로 작용할 때까지 주님께서 쉬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무엇보다 원문 자체가 이어서 ‘그때전투가그친다’고 하므로, 사랑이 주가 되는 것과 전투가 그치는 것이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사랑이주가되면모든선한행동이아무노력없이자동으로흘러나온다’거나 ‘그뒤로는내적갈등이나시험이전혀존재하지않는다’고까지 확대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AC.63이 직접 말하는 것은 이 여섯째 날의 거듭남의 전투가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작용할 때 그친다는 것입니다. 이 상태가 이후의 모든 영적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지속되는지는 뒤의 설명을 더 따라가야 합니다.
일이 이만큼 진전되어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 그 상태를 ‘심히좋았더라’라고 합니다. 이것은 AC.60의 설명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AC.60에서는 앞선 상태들이 ‘좋았더라’였던 것과 달리 이 상태가 ‘심히좋았더라’인 이유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AC.63은 같은 사실을 다시 말하면서 그 이유를 하나 더 덧붙입니다. ‘그때에주님께서그를자신의모양으로움직이시기때문’입니다.
이 표현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상당히 낯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사람을움직이신다’고 하면 마치 사람이 자기 의지와 자유를 잃고 주님께 조종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AC.63의 문맥에서 그런 뜻으로 읽을 이유는 없습니다. 앞에서는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고 사랑이 주된 원리로 작용한다고 했고, 그 상태에서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모양으로’ 움직이신다고 합니다. 즉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그 사람의 생명에서 주된 것이 된 상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자유와 정확히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는 별도의 큰 주제이므로, 이번 글에서는 ‘움직이신다’를 곧 강제나 조종이라고 이해하지 않는 정도로 충분하겠습니다.
여기서 ‘자신의모양’이라는 표현도 앞의 ‘하나님의형상’과 연결됩니다. AC.62는 여섯째 날에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고 했고, AC.63은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목적은 인간이 독립적으로 선해져서 주님 없이도 잘 살아가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 사람 안에서 점점 더 생명의 중심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고 인간 자체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본문은 여전히 ‘그를’ 움직이신다고 합니다. 주님과 인간을 동일시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거듭난 생명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AC.63은 여섯째 날의 끝에서 매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악한영들은떠나가고선한영들이그자리를대신한다’는 것입니다. AC.59에서 악한 영들이 오랫동안 사람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어 그의 욕정을 자극한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면, 처음 읽는 독자는 자연스럽게 ‘그러면이제악한영들과의관계가완전히끊어진다는뜻인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은 본문 이해에 직접 필요한 것이므로 심화에서 따로 살펴보겠습니다. 다만 메인에서는 원문이 말하는 사실을 그대로 붙들면 됩니다. 여섯째 날의 끝에서 악한 영들이 떠나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악한영들은여전히똑같이주변에있지만영향력만약해진다’는 식으로 바꾸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이후 영들과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충분한 근거와 함께 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은 ‘하늘,곧천적낙원으로인도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즉시 ‘이에대해서는다음장에서다루겠습니다’라고 덧붙입니다. 이 마지막 문장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도 여기서 너무 빨리 답을 만들어 내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늘’이라는 말을 보자마자 사후에 죽어서 천국으로 간다는 뜻이라고 단정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무조건 ‘살아있는동안마음속에형성되는천국상태일뿐’이라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다음 장에서 설명하겠다고 했으므로, 우선 이 표현이 창2의 일곱째 날과 이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의 설명을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 점은 앞 AC.62에서 우리가 일곱째 상태에 관한 질문을 서둘러 완성하지 않은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여섯째 날에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 되고, AC.63에서는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며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전투가 그칩니다. 악한 영들이 떠나고 선한 영들이 대신하며, 사람은 하늘 또는 천적 낙원으로 인도됩니다. 그러나 그 ‘천적낙원’이 정확히 무엇이며 일곱째 상태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이제 다음 장이 설명할 몫입니다. AC가 스스로 ‘다음장에서’라고 한 것을 우리가 이번 해설에서 미리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AC.63의 중심은 인간이 얼마나 열심히 싸워 높은 상태에 도달했느냐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입니다. 주님이 인간을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십니다. 주님이 전투를 통해 그를 진리와 선 안에 굳게 세우십니다.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작용할 때까지 주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다음 상태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창1:31의 ‘하나님이지으신그모든것을보시니보시기에심히좋았더라’라는 말씀에서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주어 역시 ‘하나님’입니다. AC.60-63은 ‘심히좋았더라’의 속뜻을 신앙과 사랑의 결합, 하나님의 형상, 그리고 거듭남의 전투와 연결하여 밝혔지만, 그 모든 과정의 주체를 인간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지으신’ 것입니다. AC.63은 여섯째 날의 마지막에서 바로 그 사실을 다시 한번 강하게 밝혀 줍니다. 거듭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 ‘하나님의손가락의일’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1:31)
AC.62
인간의거듭남에속한시간들과상태들은일반적으로도,그리고개별적으로도여섯단계로나눌수있으며,이것들을그의창조의날들(thedaysofhiscreation)이라고부릅니다.이는사람이전혀인간이라할수없는상태에서출발하여,처음에는겨우인간이라할만한어떤상태가되고,그렇게조금씩조금씩나아가마침내여섯째날에이르러하나님의형상(animageofGod)이되기때문입니다. The times and states of man’s regeneration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re divided into six, and are called the days of his creation; for, by degrees, from being not a man at all, he becomes at first something of one, and so by little and little attains to the sixth day, in which he becomes an image of God.
해설
AC.62는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을 지금까지 스베덴보리가 왜 인간의 거듭남의 여섯 상태로 읽어 왔는지를 한 문장으로 정리해 주는 글입니다. 말씀에는 ‘저녁이되고아침이되니이는여섯째날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AC.62는 이 ‘날들’을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이라고 하며, 그것들을 ‘그의창조의날들’이라고 부릅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를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속뜻으로 읽어 온 앞의 모든 설명이 여기에서 매우 간결하게 요약되는 셈입니다.
먼저 ‘인간의거듭남에속한시간들과상태들’이라는 표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섯 날을 단순히 여섯 개의 종교적 지식이나 여섯 가지 덕목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거듭나면서 지나가는 ‘상태들’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첫째 날에서 여섯째 날까지는 무엇을 여섯 가지 배운다는 목록이라기보다, 주님께서 한 사람을 새롭게 창조해 가시는 과정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AC.62는 이것을 ‘그의창조의날들’이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창세기 1장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는 이야기이고, AC는 그 말씀의 속뜻 안에서 인간의 거듭남 역시 하나의 창조라고 밝힙니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고쳐서 더 나은 사람이 되어 간다는 이야기와는 다릅니다. 앞에서 계속 살펴본 것처럼 거듭남의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창조의날들’이라는 말에서도 창조의 주체를 인간 자신에게 돌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어지는 표현은 처음 읽는 사람에게 상당히 충격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사람은 처음에 ‘전혀인간이라할수없는’ 상태에 있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육체적으로 사람이 아니라거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거듭남이라는 문맥에서 ‘사람’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AC.49에서도 참 사람은 오직 주님이시며, 인간은 주님에게서 받는 만큼 사람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전혀인간이라할수없다’는 강한 표현도 그 연장선에서 읽어야 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로 살아가는 참된 인간성이라는 관점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을 다른 사람을 낮추는 데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저사람은거듭나지않았으니사람이아니다’라는 식의 판단은 AC.62의 목적과 전혀 다릅니다. 이 말씀의 속뜻은 다른 사람의 인간 자격을 판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거듭남이 얼마나 근본적인 새 창조인지를 보여 줍니다. 자연적으로 태어난 것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AC.62에서 특히 아름다운 표현은 그 다음의 ‘조금씩조금씩’입니다. 사람은 ‘전혀인간이라할수없는’ 상태에서 단번에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겨우 인간이라 할 만한 어떤 상태가 되고, 그 뒤 ‘조금씩조금씩’ 나아가 마침내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이 됩니다. 거듭남이 점진적인 과정이라는 사실을 이보다 간결하게 보여 주는 표현도 드물 것입니다.
여기서도 원문이 말하는 만큼 정확하게 읽는 것이 좋습니다. ‘조금씩조금씩’이라고 했다고 해서 이번 한 문장만으로 거듭남의 모든 세부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단계에서 무엇이 먼저 일어나고, 얼마나 오래 걸리며, 반드시 어떤 후퇴를 몇 번 겪어야 하는지까지 AC.62가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 글이 직접 말하는 것은 사람이 단번에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bydegrees’, 곧 단계적으로, ‘bylittleandlittle’, 곧 조금씩 조금씩 거기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처음 AC를 접하는 독자에게도 중요한 균형을 줍니다.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을 거듭남의 상태로 읽는다고 해서 ‘나는지금셋째날인가,넷째날인가?’를 판정하는 영적 등급표로 사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AC.62는 사람에게 자기 단계를 측정하라고 하기보다, 거듭남이 주님의 창조이며 단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큰 질서를 보여 줍니다.
마침내 여섯째 날에 사람은 ‘하나님의형상’이 됩니다. 이 표현은 앞의 AC.26부터 이어져 온 창1:26-27의 설명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하나님의형상’이 된다는 것은 외모가 하나님과 비슷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람이 주님에게서 신앙과 사랑, 선과 진리를 받아 살아가게 되는 것과 관계됩니다. 특히 AC.51-53은 ‘형상’과 신앙, 이해의 관계를 설명했고, AC.60-61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는 여섯째 상태를 설명했습니다. AC.62는 그 흐름을 받아 여섯째 날에 사람이 ‘하나님의형상’이 된다고 정리합니다.
다만 여기서 ‘하나님의형상이되었다’는 것을 곧 ‘거듭남의모든것이최종적으로끝났다’는 뜻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창세기의 말씀은 여섯째 날 뒤에 일곱째 날로 이어지고, AC역시 일곱째 상태를 따로 설명합니다. AC.62가 지금 직접 말하는 것은 여섯째 날에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일곱째 날이 무엇이며 여섯째 날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그 내용을 직접 다루는 글에서 살펴보는 편이 안전합니다.
이 점을 지키면 ‘그러면여섯째날에완성되었는데왜일곱째날이또필요한가?’, ‘모든사람이결국천적인간이되어야하는가?’, ‘영적천국에갈사람과천적천국에갈사람은처음부터정해져있는가?’ 같은 질문을 이번 한 문장에서 억지로 모두 해결할 필요도 없어집니다. 이런 질문들은 AC전체를 읽으면서 충분한 근거가 모였을 때 다루어야 할 큰 주제들입니다. AC.62는 그것들을 한꺼번에 해결하는 글이 아니라 여섯 날의 의미를 요약하는 글입니다.
또 ‘일반적으로도,그리고개별적으로도’라는 표현도 너무 빨리 하나의 도식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적어도 이 표현을 통해 거듭남의 여섯 상태가 단 한 번의 피상적인 변화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인류전체의역사에도정확히여섯단계가있고,한사람의생애에서도같은여섯단계가계속반복된다’는 완성된 체계를 세우기보다는, 뒤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표현을 어떻게 펼치는지를 계속 확인하는 편이 좋습니다.
AC.62의 핵심은 오히려 아주 단순합니다.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은 속뜻에서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은 ‘그의창조의날들’이라고 불립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으로 완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새 창조 안에서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어 마침내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이 됩니다.
이렇게 읽으면 창1:31의 ‘저녁이되고아침이되니이는여섯째날이니라’라는 말씀도 지금까지의 모든 흐름을 품고 있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첫째 날의 빛에서 시작하여 여섯째 날의 ‘심히좋았더라’에 이르기까지, AC는 이 창조의 말씀 안에서 한 인간이 주님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어 가는 거듭남의 아르카나를 밝혀 왔습니다. 그리고 AC.62는 그 긴 흐름을 ‘조금씩조금씩’이라는 말과 ‘하나님의형상’이라는 말로 압축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글에서 가장 오래 기억해 둘 표현을 하나 고른다면 ‘조금씩조금씩’이어도 좋겠습니다. 거듭남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단번에 높은 상태에 뛰어오르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새롭게 창조해 가시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창조의 목적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더욱 크게 만드는 데 있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 마침내 ‘하나님의형상’이 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1:31)
AC.61
신앙에관한지식에속하는모든것은영적(靈的, spiritual)이라하고,주님과이웃을사랑하는데속한모든것은천적(天的, celestial)이라합니다.전자는인간의이해(understanding)에속하고,후자는그의의지(will)에속합니다. All things relating to the knowledges of faith are called spiritual, and all that are of love to the Lord and our neighbor are called celestial; the former belong to man’s understanding, and the latter to his will.
해설
AC.61은 매우 짧지만 앞으로 AC를 읽는 데 자주 만나게 될 두 용어, 곧 ‘영적’(spiritual)과 ‘천적’(celestial)을 이해하는 중요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에관한지식에속하는모든것’을 영적이라 하고, ‘주님과이웃을사랑하는데속한모든것’을 천적이라 합니다. 그리고 전자는 인간의 ‘이해’에, 후자는 ‘의지’에 속한다고 합니다.
바로 앞 AC.60에서는 창1:31의 ‘심히좋았더라’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고, 그 결과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지는 상태라고 설명했습니다. AC.61은 그 설명에 이어 ‘그러면영적인것이무엇이고천적인것이무엇인가?’를 아주 간결하게 밝혀 주는 글입니다.
먼저 ‘영적’이라는 말을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영적이다’라고 하면 세속적이지 않다거나, 신앙심이 깊다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관심이 많다는 뜻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AC.61에서 스베덴보리는 훨씬 구체적인 뜻으로 사용합니다. ‘신앙에관한지식에속하는모든것’을 영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인간의 ‘이해’에 속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해’는 단순히 ‘무슨말인지알아들었다’는 결과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무엇이 참인지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분별하는 능력과 관계된 말입니다. 이 점은 연결된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반면 ‘천적’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과이웃을사랑하는데속한모든것’입니다. 이것들은 인간의 ‘의지’에 속합니다. 여기서 의지도 단순히 ‘의지가강하다’, ‘무엇을해내려는의욕이있다’는 일상적인 의미보다 넓게 읽어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사랑하는가 하는 내적 생명의 한 능력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AC.61의 문장을 가장 단순하게 놓아 보면 이렇습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것들은 이해에 관계되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속하는 것들은 의지에 관계됩니다. 전자를 ‘영적’, 후자를 ‘천적’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영적인것은지식이고천적인것은사랑이니,영적인것은머리에만있고천적인것만실제생명이라는뜻인가?’ 그러나 AC.61을 그렇게 읽으면 곤란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두 종류의 것을 구별하고 있는 것이지, 영적인 것을 무가치한 지식으로 낮추고 천적인 것만 참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앞 AC.60에서도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서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결혼’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구별되지만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또 ‘신앙에관한지식’을 단순한 성경 상식이나 교리 암기로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물론 말씀과 교리를 배우고 아는 것이 포함되겠지만, AC에서 신앙에 관한 지식은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데 관계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이해’를 단순한 정보 저장소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과이웃을사랑하는것’을 단순한 따뜻한 감정으로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의지’에 속한다고 하는 데에는 사람이 무엇을 실제로 원하고 사랑하는가 하는 문제가 들어 있습니다. 사랑은 단순히 어떤 대상에 좋은 느낌을 갖는 것보다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너무 쉽게 ‘이해=머리’, ‘의지=가슴’이라고 바꾸는 것도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처음 설명하기에는 쉬운 비유지만, 이해와 의지는 신체 기관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내적 생명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두 근본적인 능력에 관한 말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웃을사랑해야한다’는 말씀을 알고 그것이 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에 관한 지식과 이해의 측면을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실제로 이웃의 선을 원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여기에는 의지와 사랑의 측면이 있습니다.
이 예는 AC.61의 구별을 이해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아는것은무조건영적이고행동하는것은무조건천적이다’라는 공식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행동의 근원이 어떤 사랑과 의지에 있는지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조심해야 할 것은 ‘영적’과 ‘천적’을 단순히 신앙의 낮은 단계와 높은 단계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AC전체에서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가 매우 중요한 주제로 발전하지만, AC.61자체는 ‘먼저영적인간이된다음더발전하면천적인간이된다’는 단계표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특히 앞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질서에 차이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천적’이라는 하나의 직선적인 승급 과정으로 이해하면 앞으로의 AC를 읽을 때 오히려 혼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AC.61이 말하는 만큼만 정확히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신앙에관한지식에속하는모든것은영적이고이해에속하며,주님과이웃을사랑하는데속한모든것은천적이고의지에속한다.’ 이것이 이 글의 직접적인 정의입니다.
그러면 왜 바로 앞 AC.60에서는 이 둘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진다고 했을까요? 이해와 의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서로 완전히 무관한 채 따로 존재하는 것이 거듭남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AC.60은 그것들이 하나를 이루는 상태를 말했고, AC.61은 그 결합을 이루는 두 종류의 것이 각각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주님과이웃을사랑하는데속한모든것’이라는 표현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천적인 것을 설명하면서 막연히 ‘사랑’이라고만 하지 않고 그 사랑의 방향을 분명히 합니다. ‘주님과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높이려는 사랑이나 세상을 지배하려는 사랑까지 단지 ‘사랑’이라는 이유로 천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AC.61이 천적이라고 부르는 사랑은 구체적으로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이 점은 처음 AC를 읽는 독자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사랑’을 강조한다고 해서 모든 종류의 사랑을 동일하게 선한 것으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사랑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바로 ‘주님과이웃을사랑하는데속한모든것’을 천적이라고 명시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의지에 속한다는 말은 신앙생활에서 사랑이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사람이 무엇을 실제로 원하고 사랑하는가는 그의 내적 생명과 깊이 관계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해를 버리고 사랑만 있으면 된다는 결론도 나오지 않습니다. 바로 앞 말씀의 속뜻은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이 ‘결혼’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이해와 의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서로 결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AC.60과 AC.61을 함께 읽으면 창1:31의 ‘심히좋았더라’가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AC.60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에 ‘심히좋았더라’라고 한다고 했고, AC.61은 그 가운데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것들은 영적이며 이해에 속하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속하는 것들은 천적이며 의지에 속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글을 읽으면서 ‘나는영적인간인가,천적인간인가?’부터 판정하려 하기보다 먼저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정확히 익히는 것이 좋습니다. 앞으로 AC에서 ‘영적’, ‘천적’, ‘이해’, ‘의지’라는 말이 계속 등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설명의 출발점은 여전히 창1:31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지으신그모든것을보시니보시기에심히좋았더라.’ AC.61은 말씀을 대신하여 인간에 관한 별도의 철학 체계를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앞 AC.60에 이어 이 말씀의 ‘심히좋았더라’ 안에 있는 신앙과 사랑,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의 결합을 좀 더 분명하게 밝혀 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