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교회의 퀄러티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언급할 게 없습니다. 퍼셉션 역량 역시 그저 일반적이고 흐릿했음은 노아라는 교회에 관한 설명을 보시면 분명한데요, 그 결과, 완벽함의 감소와 함께 지혜와 지성 역시 그랬습니다.

 

25절,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And Methuselah lived a hundred eighty and seven years, and begat Lam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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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회의 퀄러티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언급할 게 없습니다. 퍼셉션 역량 역시 그저 일반적이고 흐릿했음은 ‘노아’라는 교회에 관한 설명을 보시면 분명한데요, 그 결과, 완벽함의 감소와 함께 지혜와 지성 역시 그랬습니다. Nothing is mentioned concerning the quality of this church; but that its perceptive faculty was general and obscure, is evident from the description of the church called “Noah”; so that perfection decreased, and with perfection wisdom and intellig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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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두셀라, 여덟 번째 교회, ‘라멕, 아홉 번째 교회

 

25절,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And Methuselah lived a hundred eighty and seven years, and begat Lamech.

 

523

므두셀라’는 여덟 번째 교회, ‘라멕’은 아홉 번째 교회라는 뜻입니다. By “Methuselah” is signified an eighth church, and by “Lamech” a nin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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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이라 하는 사람들이 가진 퍼셉션의 상태와 퀄러티가 제게 경험된 적이 있었는데요, 그것은 일종의 무슨 별다른 특징이 없는 일반적인 뿌연 퍼셉션이었습니다. 그럴 경우, 마음은 자기 외부에 보이는 것들을 교리적인 것들로 정하기 때문입니다.

 

23-24절,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And all the days of Enoch were three hundred sixty and five years. And Enoch walked with God, and 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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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에녹’이라 하는 사람들이 가진 퍼셉션의 상태와 퀄러티가 제게 경험된 적이 있었는데요, 그것은 일종의 무슨 별다른 특징이 없는 일반적인 뿌연 퍼셉션이었습니다. 그럴 경우, 마음은 자기 외부에 보이는 것들을 교리적인 것들로 정하기 때문입니다. The state and quality of the perception with those who were called “Enoch” have also been made known to me. It was a kind of general obscure perception without any distinctness; for in such a case the mind determines its view outside of itself into the doctrinal th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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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의 경우는 이미 말씀드린 대로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태고교회에서 퍼셉션에 속한 것을 교리 수준으로 낮아지게 했는데, 이것은 그 시대 교회에는 허용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퍼셉션으로 아는 것은 교리를 가지고 학습하는 것하고는 아주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퍼셉션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교리 형태로 정리해서 굳이 따로 학습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다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퍼셉션으로 배우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선하고 참된 것을 내적 방법으로 알게 하십니다. 그러나 교리로 배우는 사람들에게는 지식이 외적 방식, 혹은 육체적 감각으로 주어지는데, 이 둘의 차이는 마치 빛과 어두움 간 차이와도 같습니다.

 

23-24절,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And all the days of Enoch were three hundred sixty and five years. And Enoch walked with God, and 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

 

521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의 의미는 그 교리를 후손들이 사용하도록 보존하신다는 뜻이며, 이에 관해 에녹의 경우는 이미 말씀드린 대로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태고교회에서 퍼셉션에 속한 것을 교리 수준으로 낮아지게 했는데, 이것은 그 시대 교회에는 허용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퍼셉션으로 아는 것은 교리를 가지고 학습하는 것하고는 아주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퍼셉션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교리 형태로 정리해서 굳이 따로 학습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다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잘 생각하는 법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은 생각하는 법을 예술 수준으로까지 올린 무슨 규칙들을 가지고 굳이 배울 필요는 없습니다. 이렇게 하면 오히려 그의 잘 생각하는 타고난 재능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스콜라 철학의 먼지를 스틱으로 빠르게 찌르고 있는 사람들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퍼셉션으로 배우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선하고 참된 것을 내적 방법으로 알게 하십니다. 그러나 교리로 배우는 사람들에게는 지식이 외적 방식, 혹은 육체적 감각으로 주어지는데, 이 둘의 차이는 마치 빛과 어두움 간 차이와도 같습니다. 또한 천적 인간의 퍼셉션은 도무지 어떻게 설명을 할 수가 없다는 점도 고려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가장 작고 특별한 것들 속으로 상태들과 환경들에 따라 온갖 다양성을 가지고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퍼셉션 능력이 사라질 것과, 그후 인류는 참되고 선한 것을 교리를 가지고 배우게 될 것을, 즉 어두움 후에 빛으로 나아오게 될 것을 미리 아시고, 여기 이르시기를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 즉 후대의 사용을 위해 그 교리를 보존하셨다 하신 것입니다. As to the words “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 signifying the preservation of that doctrine for the use of posterity, the case with Enoch, as already said, is that he reduced to doctrine what in the most ancient church had been a matter of perception, and which in the time of that church was not allowable; for to know by perception is a very different thing from learning by doctrine. They who are in perception have no need to learn by formulated doctrine that which they know already. For example: he who knows how to think well, has no occasion to be taught to think by any rules of art, for in this way his faculty of thinking well would be impaired, as is the case with those who stick fast in scholastic dust. To those who learn by perception, the Lord grants to know what is good and true by an inward way; but to those who learn from doctrine, knowledge is given by an external way, or that of the bodily senses; and the difference is like that between light and darkness. Consider also that the perceptions of the celestial man are such as to admit of no description, for they enter into the most minute and particular things, with all variety according to states and circumstances. But as it was foreseen that the perceptive facul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ould perish, and that afterwards mankind would learn by doctrines what is true and good, or by darkness would come to light, it is here said that “God took him,” that is, preserved the doctrine for the use of poste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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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하나님과 동행’,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의 속뜻

 

23-24절,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And all the days of Enoch were three hundred sixty and five years. And Enoch walked with God, and 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

 

520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는 그들이 아주 적은 수였음을 의미합니다. 그의 ‘하나님과 동행’은 위에서처럼, 신앙 관련 교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는 후손들의 사용을 위해 이 교리를 보존하신다는 뜻입니다. By “all the days of Enoch being three hundred sixty and five years” is signified that they were few. By his “walking with God” is signified, as above, doctrine concerning faith. By “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 is signified the preservation of that doctrine for the use of poste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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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교회와 그 후속 교회들 전반에 걸쳐 그중 퍼셉션과 관련된 것들로부터 교리들을 추출, 뼈대를 세우며 조직하던 사람들이 그때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한 이유는, 이걸 기준으로 무엇이 선이요, 진리인지를 알게 하려는 것이었지요. 이 사람들이 바로 에녹입니다.

 

22절,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Enoch walked with God after he begat Methuselah three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519

태고교회와 그 후속 교회들 전반에 걸쳐 그중 퍼셉션과 관련된 것들로부터 교리들을 추출, 뼈대를 세우며 조직하던 사람들이 그때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한 이유는, 이걸 기준으로 무엇이 선이요, 진리인지를 알게 하려는 것이었지요. 이 사람들이 바로 ‘에녹’입니다. ‘그리고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라는 표현이 상징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며, 그래서 그들은 그걸 가리켜 교리라 하였는데, 이것은 ‘에녹’이라는 이름이 상징하는 바와 비슷합니다. 이 이름의 뜻이 ‘가르치다’이기 때문입니다. ‘동행하다’라는 표현 역시 같은 걸 상징하는데요, 그를 일컬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라 하지 ‘여호와와 동행하였다’라고는 하지 않는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신앙의 교리를 따라 가르치며 사는 것이지만, ‘여호와와 동행하는 것’은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行)하다, 걷다, 살다’라는 표현은 살아가는 걸 상징하는 일상적인 말투입니다. 예를 들면, ‘법대로 살다’, ‘규범 가운데 살다’, ‘진실하게 살다’처럼 말입니다. ‘행하는 것’은 어떤 길이나 삶, 방식에 대한 적절한 레퍼런스를 갖는 것인데, 이 레퍼런스는 진리, 결과적으로는 신앙이나 신앙의 교리와 관련됩니다. 말씀에서 ‘행함’이 상징하는 바는 이어지는 구절들을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There were some at that time who framed doctrines from the things that had been matters of perception in the most ancient and succeeding churches, in order that such doctrine might serve as a rule whereby to know what was good and true: such persons were called “Enoch.” This is what is signified by the words, “and Enoch walked with God”; and so did they call that doctrine; which is likewise signified by the name “Enoch,” which means to “instruct.” The same is evident also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expression to “walk,” and from the fact that he is said to have “walked with God,” not “with Jehovah”; to “walk with God” is to teach and live according to the doctrine of faith, but to “walk with Jehovah” is to live the life of love. To “walk” is a customary form of speaking that signifies to live, as to “walk in the law,” to “walk in the statutes,” to “walk in the truth.” To “walk” has reference properly to a way, which has relation to truth, consequently to faith, or the doctrine of faith. What is signified in the Word by “walking,” may in some measure appear from the following passages.

 

[2] 미가입니다. In Micah: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6:8) He hath showed thee, O man, what is good, and what doth Jehovah require of thee, but to do judgment and the love of mercy, and to humble thyself by walking with thy God? (Micah 6:8)

 

여기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상징하는 바는 여기서 가리키는 것들을 따라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는 표현에 대해서, 에녹에 대한 다른 성경(히브리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함께로부터(from with God)를 상징하고 있는데, 이 표현은 좀 애매합니다. where to “walk with God” signifies to live according to the things here indicated; here, however, it is said “with God,” while of Enoch another word is used which signifies also “from with God,” so that the expression is ambiguous.

 

시편입니다. In David: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시56:13) Thou hast delivered my feet from impulsion, that I may walk before God in the light of the living, (Ps. 56:13)

 

여기 ‘하나님 앞에서 다니는 것’은 신앙의 진리, 곧 ‘생명의 빛’ 가운데 다니는 것입니다. where to “walk before God” is to walk in the truth of faith, which is the “light of the living.”

 

이사야에서도 같습니다. In like manner in Isaiah: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9:2) The people that walk in darkness see a great light. (Isa. 9:1)

 

그래서 주께서 모세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So the Lord says by Moses: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 (레26:12) I will walk in the midst, and will be your God, and ye shall be my people, (Lev. 26:12)

 

율법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야 할 것을 상징합니다. signifying that they should live according to the doctrine of the law.

 

[3] 예레미야입니다. In Jeremiah:

 

그들이 사랑하며 섬기며 뒤따르며 구하며 경배하던 해와 달과 하늘의 뭇 별 아래에서 펼쳐지게 하리니 (렘8:2) They shall spread them before the sun, and the moon, and to the armies of the heavens, whom they have loved, and whom they have served, and after whom they have walked, and whom they have sought, (Jer. 8:2)

 

여기 보면, 사랑에 속한 것들과 신앙에 속한 것들 사이 뚜렷한 차이를 두는데요, 전자는 ‘사랑하며’와 ‘섬기며’로, 후자는 ‘뒤따르며’와 ‘구하며’로 각각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든 예언서들을 보면, 모든 표현들을 아주 정교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용어가 다른 것의 자리에 대신 사용되는 일조차 절대 없습니다. 말씀에서 ‘여호와와 함께 걷다’나 ‘여호와 앞에’라는 표현은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where a manifest distinction is made between the things of love, and those of faith; the things of love being expressed by “loving” and “serving”; and those of faith by “walking” and “seeking.” In all the prophetical writings every expression is used with accuracy, nor is one term ever used in the place of another. But to “walk with Jehovah,” or “before Jehovah,” signifies, in the Word, to live the life of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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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동행’, 자녀들을 낳았다’의 속뜻

 

22절,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Enoch walked with God after he begat Methuselah three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518

하나님과 동행’은 신앙에 관한 교리를 상징합니다. 그가 ‘자녀들을 낳았다’는 것은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적인 것들을 상징합니다. To “walk with God” signifies doctrine concerning faith. That he “begat sons and daughters” signifies doctrinal matters concerning truths and goo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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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이라는 교회의 퀄러티

 

21절,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And Enoch lived sixty and five years, and begat Methuselah.

 

517

에녹’이라는 교회의 퀄러티는 이어지는 절들에서 설명합니다. The quality of the church “Enoch” is described in the following ver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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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 일곱 번째 교회, ‘므두셀라, 여덟 번째 교회

 

21절,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And Enoch lived sixty and five years, and begat Methuselah.

 

516

전에 말씀드린 대로, ‘에녹’은 일곱 번째 교회를, ‘므두셀라’는 여덟 번째 교회를 상징합니다. By “Enoch,” as before said, is signified a seventh church; and by “Methuselah” an eigh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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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 말씀드리지만, 이 햇수들은 어떤 개인의 수명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해당 교회의 때와 상태들을 상징합니다.

 

19-20절, 19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Jared lived after he begat Enoch eight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Jared were nine hundred sixty and two years; and he died.

 

515

이들 말씀들의 상징들 또한 위 비슷한 말씀들의 것들과 유사합니다. 야렛이 구백육십이 세를 살았다, 므두셀라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았다 하여 대홍수 이전 사람들이 실제로 이렇게 엄청나게 오래 살았었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아야 하며, 이 사실은 다음 장 3절,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창6:3)라는 말씀을 통해 특별히 주님의 신적 자비로 모두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 햇수들은 어떤 개인의 수명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해당 교회의 때와 상태들을 상징합니다. The signification of these words also is similar to that of the like words above. That the ages of the antediluvians were not so great, as that of Jared nine hundred and sixty-two years, and that of Methuselah nine hundred and sixty-nine years, must appear to everyone, especially from what of the Lord’s Divine mercy will be said at verse 3 of the next chapter, where we read, “Their days shall be a hundred and twenty years”; so that the number of the years does not signify the age of any particular man, but the times and states of the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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