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The Word)에 대해 알고 나서는 이제는 바울 서신을 비롯, 그 안에 아르카나(arcana, inner sense)가 들어있지 않다는 신구약 성경들은 잘 읽지도, 그걸 가지고 주일설교 본문을 삼지도, 더 나아가 가급적 인용도 안 하고 있습니다. 저의 이런 태도가 건강한 건가요? 스베덴보리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목사님, 제 생각에는 이것은 ‘건강하다’ 혹은 ‘건강하지 않다’라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스베덴보리를 읽는 사람들이 거의 반드시 한 번은 통과하게 되는 단계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말씀(The Word)에 대한 가르침을 처음 깊이 접하면 충격이 있습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시편, 선지서, 복음서, 계시록 안에는 천국과 주님에 관한 연속적인 속뜻이 들어 있는데, 다른 성경책들에는 그런 의미의 아르카나가 없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렇다면 굳이 바울 서신을 읽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생깁니다. 사실 목사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서양의 스베덴보리 독자들 가운데서도 비슷한 과정을 거친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할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울 서신이 ‘말씀’이 아니라고는 했지만, ‘쓸모없다’거나 ‘권위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울을 사도 중 한 사람으로 존중했고, 바울의 글 안에도 교회를 위한 유익한 가르침이 많다고 보았습니다. 다만 그것이 창세기나 복음서처럼 천국과 지상을 연결하는 내적 구조를 가진 ‘말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스베덴보리에게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은 주님께서 직접 지으신 성전과 같고, 바울 서신은 그 성전을 설명하고 적용하는 훌륭한 신학서와 같습니다. 둘은 중요성이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신학서를 버리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제가 목사님의 경우를 생각하면, 지금 약간 반대 방향의 위험도 있어 보입니다.

 

과거 개신교 안에서는 너무 많은 설교가 바울 중심이었습니다. 창세기보다 로마서를 더 읽고, 복음서보다 갈라디아서를 더 읽고, 주님의 말씀보다 교리 체계를 더 읽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를 만나면 자연스럽게 그 반작용으로 ‘이제는 복음서와 창세기만 보겠다’는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 자신은 언제나 균형을 유지했습니다.

 

그는 모든 진리를 결국 주님께로부터 보았고, 모든 성경을 주님의 섭리 아래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단지 중심과 주변을 구분했을 뿐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말씀을 중심에 두어라. 그러나 다른 성경도 경시하지 말라.’

 

복음서를 태양으로 삼아라. 그러나 다른 책들을 어둠으로 취급하지 말라.’

 

내적 의미가 없는 책이라 하여 주님께서 그것을 헛되이 허락하신 것은 아니다.’

 

특히 주일설교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목사님께서 수년 동안 AC를 번역하고 해설하시면서 이미 체험하셨듯이, 창세기 한 절 속에는 바울 서신 한 장보다 훨씬 깊은 영적 세계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 중심 설교로 이동하신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어쩌면 스베덴보리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앞으로 ‘바울은 거의 인용하지 않는다’, ‘바울은 별로 읽지 않는다’, ‘바울은 중요하지 않다’는 방향으로 굳어지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편향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가 가장 경계한 것 중 하나가 ‘부분 진리를 전체 진리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히려 궁금한 것은 목사님께서 지금 바울 서신을 멀리하게 된 이유가 ‘말씀이 아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미 수십 년 동안 너무 많이 들어서 더 이상 영혼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인지입니다.

 

사실 후자의 비중도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목사님은 이미 수십 년 동안 바울 중심 설교를 들었고 하셨습니다. 반면 AC와 ‘말씀’의 속뜻은 이제야 발견한 거대한 대륙입니다. 그러니 영혼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끌리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현재의 상태 자체는 건강하지 않다고 보기보다, 오히려 매우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보입니다.

 

다만 장기적으로는 ‘말씀을 중심에 두되, 나머지 성경도 주님의 섭리 아래 있는 귀한 증언으로 존중하는 태도’가 가장 스베덴보리다운 균형일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스베덴보리가 목사님의 강단에 직접 올라온다면 아마 바울을 거의 설교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바울을 폄하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는 아마 창세기와 복음서와 계시록을 중심으로 설교하면서도, 필요한 순간에는 바울을 인용하여 ‘보십시오. 바울도 같은 진리를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라고 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아 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목사님이 ‘말씀’을 중심에 두게 된 것은 건강한 변화일 수 있습니다. 다만 ‘중심에 둔다’와 ‘나머지를 멀리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전자를 권했을 것이고, 후자에 대해서는 아마 조금 더 넓은 시야를 권했을 것 같습니다.

 

참고로, 아래는 신구약 66권 중 스베덴보리가 말씀’으로 소개하고 있는 성경 목록입니다.

 

 

SC.94, ‘AC.10325를 읽는 가장 바람직스러운 태도’

The books of the Word are all those which have an internal sense; and those which have not an internal sense are not the Word. The books of the Word in the Old Testament are the five books of Moses, the book of Joshua, the book of Judges, the two books of

bygrace.kr

 

 

 

SC.93, ‘바울 서신을 가까이하지 않으려는 이유’

‘제가 오히려 궁금한 것은 목사님께서 지금 바울 서신을 멀리하게 된 이유가 ‘말씀이 아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미 수십 년 동안 너무 많이 들어서 더 이상 영혼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

bygrace.kr

 

SC.91, ‘성령이 내주하시는데 어떻게 악한 영이?’

‘모든 사람에게는 천사 둘, 악한 영 둘이 와 있다’는 말에 ‘구원받아 성령이 내주하시는데 어떻게 악한 영이 같이 있을 수 있나?’ 하시는 경우 그 질문은 사실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모든 사람에게는 천사 둘, 악한 영 둘이 와 있다는 말에 구원받아 성령이 내주하시는데 어떻게 악한 영이 같이 있을 수 있나?’ 하시는 경우

 

 

그 질문은 사실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특히 칼빈주의나 복음주의 배경에서는 ‘성령이 내주하시는 사람 안에 악한 영이 함께 있다’는 말을 거의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때는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먼저 설명하기보다, 성경 자체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목사님, 저는 악한 영이 사람 속에 들어가 산다는 의미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은 늘 선과 악의 영향 사이에 놓여 있다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는 주님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한 직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주님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또 바울도 로마서 7장에서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악을 행한다고 말합니다. 신자라 해도 영적 긴장과 시험 가운데 있다는 사실 자체는 성경도 인정하는 것 아닐까요?’

 

그러면 대화가 ‘악한 영이 있느냐 없느냐’에서 ‘신자가 어떻게 시험을 받는가’라는 성경적 주제로 옮겨집니다.

 

그다음에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소개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과정을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 항상 천국의 영향과 지옥의 영향 사이에 놓여 있으며, 그래서 선을 선택할 수도 있고, 악을 선택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천사 둘과 악한 영 둘은 숫자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핵심은 ‘사람은 영적으로 중립 지대에 서 있으며, 자유를 유지하기 위해 양쪽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상대가 ‘성령이 내주하시는데 악한 영이 어떻게 함께 있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되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신자는 왜 여전히 유혹을 받습니까? 왜 죄와 싸웁니까? 왜 바울은 육체와 성령의 싸움을 말합니까?’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 싸움이 가능한 이유가 바로 인간이 천국과 지옥의 영향이 만나는 지점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절대로 ‘목사님은 틀렸습니다’라는 식으로 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특히 교수급 신학자는 반론을 준비하는 데 익숙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구절들을 읽으며 이런 설명도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하면 대화가 계속됩니다.

 

그리고 사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가장 강력한 논거는 따로 있습니다.

 

만약 거듭난 사람 안에 더 이상 악의 영향이 전혀 없다면, 왜 우리는 죽을 때까지 회개해야 합니까? 왜 성화가 평생 계속됩니까?’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질문에 답하려고 천사들과 영들의 지속적인 동행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과 악령이 한 집에 함께 산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거듭남의 과정을 설명하는 영적 구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마 칼빈주의 교수님이라면 ‘악한 영 둘, 천사 둘’이라는 표현 자체에는 동의하지 않으실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평생 영적 전쟁 가운데 있으며,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신다’는 지점까지는 의외로 상당 부분 공감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독특한 표현을 먼저 내세우기보다, 그 표현이 설명하려는 ‘자유와 시험의 원리’를 먼저 이야기하는 편이 훨씬 유익할 것입니다.

 

 

 

SC.92, ‘그 안에 아르카나가 없는 성경들에 대한 태도’

‘말씀’(The Word)에 대해 알고 나서는 이제는 바울 서신을 비롯, 그 안에 아르카나(arcana, inner sense)가 들어있지 않다는 신구약 성경들은 잘 읽지도, 그걸 가지고 주일설교 본문을 삼지도, 더 나아

bygrace.kr

 

SC.90, ‘스베덴보리는 기독교가 아니다?’

스베덴보리 이야기를 하면서 ‘스베덴보리는 어떤 면에서는 사실 기독교가 아닙니다’라는 말을 해도 될까요? 목사님, 그 표현은 매우 조심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어떤 면에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스베덴보리 이야기를 하면서 스베덴보리는 어떤 면에서는 사실 기독교가 아닙니다라는 말을 해도 될까요?

 

 

목사님, 그 표현은 매우 조심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어떤 면에서는 사실 기독교가 아닙니다’라는 말은 듣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목사님이 말씀하시려는 뜻이 ‘스베덴보리는 현재의 개신교나 가톨릭, 정교회가 이해하는 전통적 기독교와는 상당히 다릅니다’라는 의미라면,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 삼위일체 이해, 이신칭의, 대속 개념, 예정론, 성경 해석 방식, 사후 세계 이해 등에서 전통 기독교와 매우 다른 길을 갑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스베덴보리는 기존 기독교의 한 분파라기보다, 기독교를 근본부터 다시 해석한 체계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기독교가 아닙니다’라고 단정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 자신은 평생 자신을 기독교 밖에 있는 사람으로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야말로 주님께서 세우신 참된 기독교의 본래 의미를 회복하는 일에 부름받았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대표 저작 제목 자체가 ‘True Christian Religion’, 곧 ‘참된 기독교’입니다. 그는 새 종교를 만들겠다고 말한 적이 없고, 오히려 기독교 안에 잃어버린 진리를 회복한다고 보았습니다.

 

아마 교수님 같은 칼빈주의자 앞에서는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

 

목사님, 스베덴보리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개신교 신학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어떤 면에서는 같은 기독교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다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 자신은 오히려 참된 기독교를 회복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표현은 사실을 말하면서도 불필요한 오해를 줄입니다.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칼빈주의 교수님은 이미 스베덴보리를 ‘기독교 밖’으로 분류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입에서 먼저 ‘사실 기독교가 아닙니다’라고 말해 버리면, 그 순간 대화는 끝나 버릴 수 있습니다. 상대는 ‘그렇다면 더 들을 이유가 없군요’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식 접근은 이런 것입니다.

 

목사님,저는 오히려 스베덴보리를 읽으면서 주님, 거듭남, 천국, 사랑, 삶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그 해석이 우리가 배워 온 신학과는 매우 다릅니다.’

 

이렇게 말하면 상대는 최소한 ‘얼마나 다른데?’ 하고 들어 볼 여지는 남깁니다.

 

실제로 목사님이 오랫동안 AC를 번역하시며 느끼셨듯이, 스베덴보리의 핵심은 ‘기독교를 버리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기독교를 더 깊이 이해하자’입니다. 다만 그 결과가 기존 교회 신학과 너무 달라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아니다’보다는 ‘전통적 기독교 이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형태의 기독교 해석이다’ 정도가 훨씬 정확하고 생산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SC.91, ‘성령이 내주하시는데 어떻게 악한 영이?’

‘모든 사람에게는 천사 둘, 악한 영 둘이 와 있다’는 말에 ‘구원받아 성령이 내주하시는데 어떻게 악한 영이 같이 있을 수 있나?’ 하시는 경우 그 질문은 사실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bygrace.kr

 

SC.89, ‘캘빈주의자 침례교 목사님 앞에서’

침례교 목사님이시면서도 자신을 캘빈주의자라며, 그의 5대 교리(TULIP)를 굳게 믿는다 자랑스러워 하기까지 하시는, 신학교에서 교수도 하시는 분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스베덴보리 이야기를 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침례교 목사님이시면서도 자신을 캘빈주의자라며, 그의 5대 교리(TULIP)를 굳게 믿는다 자랑스러워 하기까지 하시는, 신학교에서 교수도 하시는 분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스베덴보리 이야기를 하게 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목사님, 그런 경우에는 무엇보다 ‘상대를 설득하려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특히 그분이 단순한 평신도가 아니라 침례교 목사이면서 신학교 교수이고, 더 나아가 자신을 칼빈주의자라고 공개적으로 밝히며, TULIP를 신학적 정체성으로 삼고 계신 분이라면, 스베덴보리의 핵심 사상은 그분이 평생 쌓아온 신학 체계와 거의 모든 중요한 지점에서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칼빈주의의 중심에는 인간의 전적 타락, 불가항력적 은혜, 예정,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관점이 있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인간 안에 주님께서 보존하신 리메인스가 있으며, 인간은 자유 가운데 선과 악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고, 거듭남은 일생의 과정이며, 신앙과 체어리티는 분리될 수 없고, 천국과 지옥은 각자의 사랑에 따라 스스로 선택되는 상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교리 차이가 아니라 인간관, 구원관, 하나님 이해 자체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였다면 아마 교리 논쟁부터 시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생전에 수많은 루터교 성직자들과 학자들을 만났지만, 상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진리를 억지로 밀어 넣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반복해서 ‘사람은 자기 상태에 따라 진리를 받아들인다’고 말했습니다. 천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는 먼저 사랑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그다음 이해에 의해 받아들여집니다.

 

따라서 그분과 대화하게 된다면 ‘예정론이 틀렸습니다’, ‘이신칭의는 잘못입니다’, ‘칼빈은 오해했습니다’ 같은 접근은 거의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오히려 ‘목사님, 저는 요즘 성경을 읽으며, 한 가지를 많이 생각합니다. 사람이 죽은 뒤 천국에서 실제로 어떤 삶을 살게 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혹은 ‘신앙과 삶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처럼 상대가 공감할 수 있는 주제에서 시작하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흥미롭게도 스베덴보리는 선한 삶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큰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 사람이 루터교인이든, 가톨릭 신자든, 심지어 다른 종교인이든 간에 진실하게 선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려 한다면 사후에 더 깊은 진리로 인도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칼빈주의 교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분의 최종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나는 칼빈주의자다’라는 고백 자체가 아니라, 그분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며, 어떻게 살았는가입니다.

 

오히려 목사님께서 그분 앞에서 취하실 수 있는 가장 스베덴보리적인 태도는 ‘교리를 이기려는 사람’이 아니라 ‘천국을 증언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 저작을 오래 읽다 보면 결국 중심은 예정론 반박도 아니고, 칼빈주의 비판도 아닙니다. 중심은 ‘주님은 모든 사람을 천국으로 이끄신다’, ‘사람은 사랑하는 것이 된다’, ‘천국은 상태의 나라다’, ‘거듭남은 실제 삶의 변화다’라는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지금까지 창세기 AC 번역과 해설을 수년 동안 해 오시면서 얻으신 가장 큰 힘도 사실 논박 능력이 아니라 ‘천국을 바라보는 시야’였을 것입니다. 그런 시야를 가진 사람이 차분히 말하면 상대가 당장 동의하지 않더라도 무엇인가를 느끼게 됩니다. 반대로 아무리 논리가 뛰어나도 상대를 꺾으려는 마음이 들어가면 문은 닫혀 버립니다.

 

그래서 그런 분을 만나게 되면 저는 스베덴보리의 원칙에 따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내가 이분을 스베덴보리주의자로 만들 필요는 없다. 주님께서 이분을 사랑하시고 이끄신다. 나는 다만 내가 본 빛을 겸손하게 증언하면 된다.’ 아마 그것이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취했을 태도에 가장 가까울 것입니다.

 

아래는 참조 글입니다.

 

 

SC.23, '스베덴보리와 바울, 루터, 캘빈 비교'

스베덴보리와 바울, 루터, 캘빈을 비교할 때, 무엇보다 먼저 조심해야 할 점은, 이들을 ‘누가 옳고 그르다’는 식으로 재단하기보다, 각자가 교회 역사 속에서 맡았던 고유한 사명과 시대적 위

bygrace.kr

 

 

 

SC.90, ‘스베덴보리는 기독교가 아니다?’

스베덴보리 이야기를 하면서 ‘스베덴보리는 어떤 면에서는 사실 기독교가 아닙니다’라는 말을 해도 될까요? 목사님, 그 표현은 매우 조심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어떤 면에

bygrace.kr

 

SC.88, ‘식사 초대를 받을 때’

자신의 글이나 생각, 사상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거리를 두지는 않으시는 분의 식사 초대가 있을 시,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했나요? 스베덴보리의 생애 기록을 보면, 그는 자신의 가르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자신의 글이나 생각, 사상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거리를 두지는 않으시는 분의 식사 초대가 있을 시,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했나요?

 

 

스베덴보리의 생애 기록을 보면, 그는 자신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과도 상당히 폭넓게 교류했습니다. 오히려 그가 교류했던 사람들 가운데는 그의 저작에 깊이 공감한 사람보다, 호기심을 가진 사람, 일부만 동의하는 사람, 심지어 비판적인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는 정치가, 학자, 성직자, 귀족, 외교관들과 식사하고 대화했는데, 그들 모두가 스베덴보리의 신학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단순히 ‘내 교리를 믿느냐’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사람의 이해력보다 의지를 더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이 아직 자신의 저작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진리를 사랑하려는 마음이 있고, 선하게 살고자 하며,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존중할 가치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실제로 그의 저작 전반에는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살 때 평가받는다’는 사상이 반복됩니다.

 

반대로 그는 교리적으로는 동의한다고 말하지만, 내심은 비웃거나 악의를 품고 접근하는 경우를 훨씬 더 조심스럽게 보았습니다. 주님께서도 세리와 죄인들의 식사 초대에는 기꺼이 응하셨지만, 바리새인들의 초대에는 늘 그들의 내적 상태를 보시고 응하셨습니다. 응하시더라도 그 자리에 끌려가신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진리를 증언하셨습니다.

 

따라서 질문하신 경우처럼 ‘동의하지는 않지만, 거리를 두지도 않고, 인간적인 존중과 호의를 가지고 식사를 청하는 사람’이라면, 스베덴보리가 굳이 거절했을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입니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식사하며 대화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왜냐하면 그런 만남 자체가 주님의 섭리 가운데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 다투는 일은 거의 하지 않았지만, 상대가 진지하게 묻는다면 기꺼이 설명했습니다.

 

목사님의 경우에도 저는 비슷한 원칙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대가 ‘스베덴보리를 그만두게 하려고’, 혹은 ‘논쟁해서 이겨 보려고’ 초청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오랜 인간적 관계 속에서 존중과 호의를 가지고 식사를 청하는 것이라면, 굳이 피하실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 자리에서 무슨 말을 할 것인가보다도, 그 사람을 어떤 애정으로 대할 것인가가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스베덴보리가 천국을 설명하면서, 천사들은 먼저 상대의 교리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선의와 진실성을 본다고 여러 차례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상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 사람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가?’보다 ‘그 사람이 진실하고 선한 마음으로 나를 대하는가?’가 먼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의하지는 않지만, 거리를 두지 않는 사람의 식사 초대’라면, 스베덴보리라면 아마도 상당히 편안한 마음으로 응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그 만남의 목적이 사랑의 교류인지, 아니면 끝없는 논쟁인지 정도는 분별했을 것입니다. 그는 사람을 피하기보다, 악한 목적을 가진 상태를 조심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SC.89, ‘캘빈주의자 침례교 목사님 앞에서’

침례교 목사님이시면서도 자신을 캘빈주의자라며, 그의 5대 교리(TULIP)를 굳게 믿는다 자랑스러워 하기까지 하시는, 신학교에서 교수도 하시는 분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스베덴보리 이야기를 하

bygrace.kr

 

SC.87, ‘몸의 부활’에 대한, 가톨릭, 정교회, 전통 개신교의 입장

기독교 안에서 ‘몸의 부활’에 대한 입장은 생각보다 다양하지만, 큰 틀에서는 대부분의 전통 교회들이 ‘최종적인 몸의 부활’ 자체는 믿고 있습니다. 다만 그 몸이 어떤 몸인가, 현재 죽은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기독교 안에서 ‘몸의 부활’에 대한 입장은 생각보다 다양하지만, 큰 틀에서는 대부분의 전통 교회들이 ‘최종적인 몸의 부활’ 자체는 믿고 있습니다. 다만 그 몸이 어떤 몸인가, 현재 죽은 자들은 어떤 상태에 있는가, 그리고 부활이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는가에 대해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가톨릭은 전통적으로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경’에 따라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 그러나 흔히 오해하듯이 ‘지금의 육체가 그대로 복원된다’고 단순하게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가톨릭 신학에서는 죽은 뒤 영혼이 먼저 하느님 앞에 가며, 마지막 심판 때 ‘영화된 몸’과 다시 결합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몸은 현재의 육체와 연속성은 있지만, 썩지 않고 죽지 않으며 제한을 받지 않는 상태입니다. 가톨릭의 대표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도 부활체를 ‘동일한 인격의 몸이지만 변화되고 완성된 몸’으로 설명했습니다.

 

동방정교회 역시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 다만 법적 구원론보다는 ‘신화(神化, Theosis)의 관점에서 이해합니다. 인간 전체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 구원이므로, 영혼만이 아니라 몸도 구원의 대상입니다. 따라서 최후에 몸이 부활한다는 점에서는 가톨릭과 비슷하지만, 이를 더 신비적이고 존재론적인 변화로 이해합니다. 정교회 신학자들은 종종 예수님의 변화산 사건이나 부활 후의 영광스러운 몸을 예로 듭니다.

 

루터교, 개혁교회, 장로교, 감리교 등 전통 개신교 역시 기본적으로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 다만 현대에 올수록 ‘현재의 원자와 세포가 그대로 재조립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신학자는 많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존 칼빈은 부활체가 현재 몸과 동일 인격의 몸이지만, 전혀 새로운 영광의 상태를 입는다고 설명했습니다. 많은 현대 개신교 신학자들도 고린도전서 15장의 ‘육의 몸’과 ‘신령한 몸’을 구분하며, 부활체를 변형된 존재로 이해합니다.

 

성공회는 전통 신조를 유지하면서도 해석의 폭이 비교적 넓습니다. 몸의 부활을 고백하지만, 그것을 물질적 복원으로 이해할지 영광스러운 존재의 변형으로 이해할지는 신학자들마다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반면 일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몸의 부활을 역사적 사건이라기보다 상징으로 이해합니다. 그들에게 부활은 ‘하나님 안에서 인격이 보존된다’거나 ‘그리스도의 생명이 공동체 안에서 계속된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가톨릭, 정교회, 보수 개신교 모두로부터 전통적 신앙에서 벗어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실제로는 전통 교회들 사이에도 스베덴보리와 부분적으로 만나는 지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톨릭과 정교회도 사람이 죽은 뒤 의식 없는 상태로 수천 년을 기다린다고 보지 않습니다. 죽는 즉시 영혼이 살아 있다고 봅니다. 또한 부활체가 현재의 육체와 전혀 동일한 물질 구조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즉 ‘죽은 뒤 곧바로 영적 상태로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스베덴보리와 어느 정도 접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는 여기 있습니다. 전통 교회들은 ‘죽은 뒤 영혼이 살아 있다’는 것과 ‘마지막 때 몸도 다시 부활한다’는 것을 둘 다 믿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후자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이 이미 완전한 인간 형상을 가진 영적 몸으로 부활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추가적인 육체 부활은 필요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고 봅니다.

 

그래서 아주 단순하게 정리하면, 가톨릭, 정교회, 전통 개신교는 ‘죽은 뒤 영혼은 살아 있으며, 마지막 때 몸도 부활한다’고 믿고, 스베덴보리는 ‘죽은 뒤 즉시 영적 몸으로 부활하며, 그것이 이미 완전한 부활이다’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자연적 육체 자체가 신성으로 영화되어 부활했다고 가르칩니다. 바로 이 점이 스베덴보리의 부활론이 기독교 역사 전체에서 가장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입니다.

 

 

 

SC.88, ‘식사 초대를 받을 때’

자신의 글이나 생각, 사상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거리를 두지는 않으시는 분의 식사 초대가 있을 시,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했나요? 스베덴보리의 생애 기록을 보면, 그는 자신의 가르

bygrace.kr

 

SC.86, ‘몸의 부활은 오직 주님 한 분한테만’

개신교인들은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들, 곧 16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그 후에 우리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개신교인들은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들,

 

16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4:16, 17)

 

이나 고전15, 5:28-29 등을 근거로 자신들의 몸의 부활을 강력하게 믿고 있습니다만, 제가 스베덴보리 어느 글에선가 그런 부활은 오직 주님에게서만 가능하며, 또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고 본 것 같습니다. 아래는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입니다.

 

 

이 문제는 사실 스베덴보리 신학과 전통 개신교 신학이 가장 크게 갈라지는 지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개신교는 일반적으로 살전4:16-17, 고전15, 요5:28-29 등을 근거로 하여 장차 세상 끝날에 무덤 속 육체가 다시 살아나는 ‘육체의 부활’을 믿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죽은 직후 이미 영적인 몸으로 깨어난다고 보며, 따라서 수천 년 전에 흙으로 돌아간 육체가 다시 모여 부활한다는 생각은 성경의 문자에만 머문 이해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특별히 ‘천국과 지옥(HH.445-452)과 ‘최후의 심판(LJ)에서 이 문제를 매우 강하게 다룹니다. 그는 자신이 수십 년 동안 영계에서 수많은 영혼들을 만나 보았는데, 그 누구도 육체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죽는 순간 곧바로 영적 인간으로 살아나며, 자신이 여전히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얼굴도 있고, 몸도 있고, 감각도 있고, 생각도 있고, 기억도 있습니다. 다만 물질 몸이 아니라 영적 몸일 뿐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부활은 죽은 지 사흘 후도 아니고, 수천 년 후도 아니며, 사람이 죽음의 순간에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기억하신 ‘오직 주님만 육체의 부활이 가능하다’는 내용은 아마 주님의 영화(Glorification)와 관련된 가르침일 가능성이 큽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도 자신의 자연적 육체를 가지고 다시 살아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육체는 세상에 속한 가장 바깥 그릇이며, 죽음과 함께 해체되어 자연계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영만 가지고 영계로 갑니다. 그러나 주님은 달랐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어떤 인간과도 다르게 자신의 인성 전체를 신성으로 영화하셨습니다. 그래서 무덤에 묻힌 육체까지도 신성화되었고, 그 결과 무덤이 비어 있게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역사상 유일한 사건이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육체 자체가 부활한 분은 주님 한 분뿐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영으로 부활하지만, 주님은 몸까지 영화되어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11:25)라고 하신 것은 단순히 죽은 사람들을 다시 살려 내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부활의 근원이 주님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영계에 들어가는 모든 영혼은 자기 힘으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끊임없이 생명을 흘려보내시기 때문에 살아 있습니다. 즉 사람은 부활하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에 의해 부활되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핵심 사상입니다.

 

그렇다면 살전4:16-17은 어떻게 이해할까요? 스베덴보리는 여기서도 상응의 원리를 적용합니다. ‘주님의 강림’은 문자 그대로 구름을 타고 대기권에 내려오는 사건이 아니라 말씀의 내적 의미가 열리는 것을 뜻합니다.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은 진리가 크게 선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난다’는 것은 영적으로 죽어 있던 사람들이 먼저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한다’는 것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인 ‘구름’을 통하여 더 높은 진리의 상태로 들어가 주님과 결합하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공동묘지의 시신들이 일제히 일어나는 장면이 아니라 교회와 인간의 영적 상태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됩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는 만약 육체 부활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여러 모순이 생긴다고 지적합니다. 수천 년 전에 죽은 사람들의 몸은 이미 흙이 되었고, 어떤 원자는 수없이 다른 생물과 사람들의 몸을 거쳤습니다. 또한 팔을 잃고 죽은 사람, 화장된 사람, 바다에서 사라진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몸의 부활을 이해하면 이런 문제는 사라집니다. 사람의 진정한 형상은 육체가 아니라 영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개신교가 믿는 ‘육체의 부활’은 사실 주님께만 완전하게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인간은 주님처럼 육체까지 영화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부활은 육체의 재조립이 아니라 영적 인간의 각성입니다. 반면 주님은 무덤에 남겨진 육체까지 신성으로 변화시키셨기에, 참된 의미에서 ‘몸의 부활’은 오직 주님에게만 일어난 유일무이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주님으로부터 모든 인간의 부활이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부활의 중심은 ‘무덤에서 몸이 일어나는가?’가 아니라 ‘주님이 생명이시며, 모든 영혼은 그분으로 인해 살아 있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전통적 육체 부활론과 스베덴보리의 영적 부활론을 가르는 가장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SC.87, ‘몸의 부활’에 대한, 가톨릭, 정교회, 전통 개신교의 입장

기독교 안에서 ‘몸의 부활’에 대한 입장은 생각보다 다양하지만, 큰 틀에서는 대부분의 전통 교회들이 ‘최종적인 몸의 부활’ 자체는 믿고 있습니다. 다만 그 몸이 어떤 몸인가, 현재 죽은

bygrace.kr

 

SC.85, ‘BTS와 그들의 ARMY에 대하여’

BTS와 그들의 ARMY에 대하여 스베덴보리는 무슨 말을 할까요? 그들은 너 자신을 사랑하라 노래하며, 그 노래를 통해 치유 받은 전 세계 아미들은 전 세계 곳곳에서 선행을 펼치고 있거든요... BTS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BTS와 그들의 ARMY에 대하여 스베덴보리는 무슨 말을 할까요? 그들은 너 자신을 사랑하라 노래하며, 그 노래를 통해 치유 받은 전 세계 아미들은 전 세계 곳곳에서 선행을 펼치고 있거든요...

 

 

BTS의 음악과, 그들을 사랑하는 ‘ARMY’ 공동체에 대해 만일 Emanuel Swedenborg가 본다면, 아마 그는 먼저 ‘겉모습’보다 ‘그 안에 흐르는 정서와 의지’를 보려 했을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이름이나 형식 자체보다,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어디로 이끄는가 하는 점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그는 사람이 서로를 위로하고,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다시 살아갈 힘을 주며,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을 생각하게 되는 방향으로 움직일 때, 거기에는 천국적 요소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만일 어떤 음악이 ‘너는 사랑받을 존재다’, ‘다시 일어나라’, ‘서로를 미워하지 말라’, ‘상처 입은 사람을 돌보라’는 방향으로 사람들을 움직이고, 실제로 팬들이 세계 곳곳에서 기부와 봉사, 약자 돌봄 같은 선행으로 이어 간다면, 그는 그것을 단순한 대중문화 현상으로만 보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특히 [BTS LOVE MYSELF 캠페인]처럼 자기혐오와 폭력 대신, 자신과 타인을 존중하자는 흐름은, 스베덴보리 식으로 말하면 ‘자기 자신을 우상처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생명과 인간성을 함부로 짓밟지 않는 방향’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그는 참된 자기 사랑과 이기적 자기 사랑을 구분했는데, 전자는 자신을 돌보되 타인과 공동선을 향해 열려 있는 사랑이고, 후자는 자기만 높아지려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는 동시에 매우 조심스럽게 이런 말도 했을 것입니다. 인간은 어떤 대상이든 ‘궁극적 중심’으로 삼기 시작하면 위험해진다고 말입니다. 즉, 음악, 스타, 공동체가 사람을 더 선하고 따뜻하게 만드는 통로가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영혼의 최종 목적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모든 선과 진정한 치유의 근원은 결국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마 ‘이 젊은이들의 음악과 공동체 안에도 선한 정서와 상응하는 요소들이 있다. 다만 그것들이 사람들을 더 깊은 사랑과 진리, 그리고 이웃 사랑으로 계속 인도할 때에만 늘, 그리고 가장 아름답다는 걸 끝까지 기억했으면 좋겠다’ 정도로 말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실제로 많은 ARMY들이 단지 소비자 집단이 아니라, 서로의 우울과 상처를 이해하고, 기부와 봉사 활동을 조직하며, 타인을 위해 행동하는 공동체적 문화를 만들어 왔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을 ‘사랑의 질서 속에서 서로를 위해 사는 공동체’로 보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서로를 살리고 일으켜 세우려는 움직임 자체는 분명 긍정적으로 바라보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SC.86, ‘몸의 부활은 오직 주님 한 분한테만’

개신교인들은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들, 곧 16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그 후에 우리

bygrace.kr

 

SC.84, ‘살인적인 저작 활동 중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쉬었나?’

저는 하루 중 상당 시간을 ChatGPT를 통한 AC번역 및 해설, 그리고 심화 관련, 초벌 및 마무리 작업, 그리고 그걸 블로그에 게시하는 작업으로 보냅니다. 보통 매일 8개 전후의 글 작성을 하는데, 글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저는 하루 중 상당 시간을 ChatGPT를 통한 AC번역 및 해설, 그리고 심화 관련, 초벌 및 마무리 작업, 그리고 그걸 블로그에 게시하는 작업으로 보냅니다. 보통 매일 8개 전후의 글 작성을 하는데, 글 하나하나에 집중하다 보면 지쳐 중간중간 누워 쉬어야 하며, 그럴 때면, 하릴없이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나 웹툰을 보거나 들으며 시간을 보내곤 합니다. 문제는 이렇게 보내는 시간이 다 합치면 몇 시간씩 된다는 것이며, 더욱 심각한 건, 제 시야가 자꾸 세상사를 향하게 되어 흐려진다는 것입니다. AC, 그리고 천국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말이지요... 스베덴보리는 어땠나요? 그의 전체 저작량을 보면 하루하루가 거의 살인적인 시간 사용이었을 것 같은데, 그는 지치지 않았나요? 갈수록 6, 7, 8학년이 되어 심신이 예전 같지 않았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목사님 말씀을 읽으며, 지금 목사님이 단순히 ‘글을 많이 쓰느라 피곤한 상태’가 아니라, 실제로는 ‘두 세계 사이를 하루 종일 왕복하고 계시는 상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AC 본문을 붙들고 내적 의미를 따라가며, 그것을 번역하고 해설하고 심화까지 풀어낸다는 건, 단순 지적 노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각보다 훨씬 깊은 수준의 정신 집중과 내적 긴장을 요구합니다. 특히 목사님처럼 단순 번역이 아니라 ‘상태 안으로 들어가며’ 작업하는 경우에는 더 그렇습니다. 그러니 중간중간 몸이 꺼지듯 누워야 하는 것도, 정신이 자동적으로 가벼운 영상이나 웹툰 쪽으로 도피하려는 것도, 어느 정도는 자연스러운 반작용입니다. 사람이 높은 긴장 상태를 오래 유지하면, 낮은 감각 자극으로 균형을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목사님이 정확히 보신 것도 있습니다. 문제는 ‘쉬는 것 자체’보다, 그 쉬는 방식이 점점 시야를 세상으로 끌고 내려간다는 점입니다. 처음에는 단순 휴식이었는데, 어느 순간 마음의 초점 자체가 흐려지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스베덴보리도 인간이기에 피곤함 자체는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의 후기 저작들을 보면, 인간적 체력으로는 거의 설명이 안 될 정도의 작업량입니다. 특히 Arcana Coelestia는 단순 집필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절 단위로 따라가며 영적 의미를 풀어내는 작업이었으니, 오늘날 기준으로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노동입니다. 게다가 그는 50대 후반 이후 본격적으로 영계 체험과 저작에 들어갔고, 60대와 70대에 가장 방대한 책들을 써냈습니다. 그러니 육체적으로 지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오히려 비현실적입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에게는 목사님과 조금 다른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두 세계 중 어느 쪽이 실재인가’에 대한 확신이 너무 강했습니다. 우리처럼 ‘천국을 믿는 사람’ 수준이 아니라, 실제로 영적 세계가 더 실재적이라는 감각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니 그의 경우는 세상 자극이 지금 우리에게 스마트폰처럼 강한 흡인력을 갖기 어려웠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는 후기에 점점 더 세상 사교와 오락, 명예 경쟁, 학문적 과시에서 멀어집니다. 대신 아주 규칙적인 삶을 살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과식하지 않았고, 밤늦게까지 무리하지 않았으며, 산책과 휴식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즉, 그 엄청난 저작량은 ‘광적인 몰아치기’라기보다, 오히려 놀라울 정도의 규칙성과 집중의 반복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목사님은 지금 거의 ‘전투 모드’로 작업하고 계신 느낌이 강합니다. 하루 8개 전후의 글을 매일 생산한다는 건, 실제로는 일반적인 연구자나 목회자의 작업량을 이미 훨씬 넘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지금 목사님께 필요한 것은, ‘더 몰입해야 한다’보다, ‘내적 시야를 흐리지 않는 방식으로 오래 가는 법’을 배우는 것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목사님을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장거리 사역으로 부르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지금 목사님은 자꾸 ‘AC에 집중해도 모자랄 시간인데’라고 느끼시지만, 인간 정신은 계속 최고 긴장 상태를 유지할 수 없게 창조되었습니다. 문제는 휴식이 아니라 ‘휴식의 질서’입니다. 예를 들어 스베덴보리라면, 휴식을 완전히 세속적 감각의 홍수 속으로 던져 넣기보다, 정신의 결을 크게 흐리지 않는 방향을 택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조용한 산책, 가벼운 독서, 자연 관찰, 기도 속 멈춤 같은 것 말입니다. 반면 오늘날 스마트폰 알고리즘은 사람의 ‘주의력 자체’를 계속 밖으로 끌어당기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몇 시간 웹툰과 유튜브를 보고 나면, 단순히 시간이 아까운 게 아니라, 마음의 방향 자체가 아래로 끌려 내려간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목사님이 너무 자신을 정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목사님은 이미 상당 부분 ‘자기 own과 싸우며’ 이 작업을 하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왜 또 무너졌나’가 아니라, ‘어떻게 다시 방향을 돌리느냐’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인간 의지 자체를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이 끊임없이 아래로 흐르려는 존재라는 것을 너무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질서’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목사님도 지금부터는, ‘유튜브를 완전히 끊어야 한다’보다, ‘내 영의 초점을 크게 흐리지 않는 휴식 구조’를 만드는 게 더 현실적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완전히 감각적 영상 대신 자연 다큐, 조용한 클래식, 천국과 지옥 관련 지도, 미술, 역사 탐색, 혹은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눈 감고 쉬는 시간 같은 방향입니다. 인간 정신은 쉬어야 합니다. 문제는 ‘어디에서 쉬느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사님이 자꾸 ‘내가 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죄책감 속에만 머물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목사님이 하고 계신 AC 작업은, 사실상 한국어권에서는 거의 전례를 찾기 어려운 규모입니다. 당장은 조회수도 적고 반응도 미미하지만, 스베덴보리 자신도 생전에는 자기 저작이 이렇게 오래 읽힐 줄 인간적으로는 다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씨를 뿌렸고, 열매는 훨씬 뒤에 나타났습니다. 목사님 역시 지금 ‘즉각적 반응’보다 ‘미래 세대를 위한 길 닦기’에 가까운 일을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속도를 더 올리는 것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고 오래 가는 것입니다.

 

 

 

SC.85, ‘BTS와 그들의 ARMY에 대하여’

BTS와 그들의 ARMY에 대하여 스베덴보리는 무슨 말을 할까요? 그들은 너 자신을 사랑하라 노래하며, 그 노래를 통해 치유 받은 전 세계 아미들은 전 세계 곳곳에서 선행을 펼치고 있거든요... BTS의

bygrace.kr

 

SC.83, ‘스베덴보리와 개신교의 기도, 찬양, 금식, 방언, 전도’

혹시 스베덴보리도 기도 생활을 했나요? 찬양, 그러니까 일상 중 찬송가를 부르기도 했나요? 금식은? 방언, 그리고 전도, 선교는요? 제가 스베덴보리를 처음 접하던 시기, 뭔가 크게 달랐던 점이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혹시 스베덴보리도 기도 생활을 했나요? 찬양, 그러니까 일상 중 찬송가를 부르기도 했나요? 금식은? 방언, 그리고 전도, 선교는요? 제가 스베덴보리를 처음 접하던 시기, 뭔가 크게 달랐던 점이 기독교, 개신교인들에겐 일상적인 이런 기록이 거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아주 중요한 관찰이십니다. 사실 많은 개신교인들이 처음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를 접할 때 느끼는 가장 큰 낯섦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는가?’ 하는 감각 말입니다. 현대 개신교인에게 익숙한 신앙인의 모습은 보통 ‘기도 많이 하는 사람’, ‘찬송을 즐겨 부르는 사람’, ‘전도 열심히 하는 사람’, ‘금식과 철야를 하는 사람’, ‘성령 체험과 방언을 말하는 사람’ 같은 형태로 드러나는데, 스베덴보리에게서는 그런 기록이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기록이 빠져 있어서라기보다, 그의 신앙의 중심축 자체가 오늘날 복음주의적 경건 형태와 상당히 달랐기 때문입니다.

 

먼저 기도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는 분명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그는 ‘기도의 외적 형식’보다 ‘삶 전체의 방향’을 더 본질적인 기도로 보았습니다. 그는 반복적 언어 자체보다, 사람이 주님 앞에서 자기 악을 보고 물러서며 선을 행하려는 상태를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의 저작들에는 ‘무릎 꿇고 몇 시간 통성기도했다’ 같은 기록은 거의 없지만, 대신 사람이 주님께 마음을 열고, 자기 own(proprium)을 경계하며, 진리를 따라 살기를 원할 때 그 자체가 살아 있는 기도라고 보는 흐름이 매우 강합니다. 실제로 그는 사람이 주기도문을 진심으로 이해하며 드릴 때, 천사들과 연결된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리고 유명한 일화 가운데 하나는, 그가 영계 체험 초기에 극심한 영적 공격과 혼란 속에서 오직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보호를 받았다는 기록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기도를 ‘집회 중심 행위’라기보다 ‘주님 앞에 영혼을 여는 상태’로 보았습니다.

 

찬양과 찬송 역시 비슷합니다. 스베덴보리 시대의 스웨덴 루터교회 예배에는 당연히 찬송이 있었고, 그 역시 평생 교회 사람이었으므로 찬송 자체를 멀리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복음주의처럼 ‘찬양 사역’, ‘은혜로운 찬양 시간’, ‘찬양 집회’ 같은 형태의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그의 관심은 음악적 감정 고양보다 ‘천국의 질서와 사랑의 상태’에 더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는 천국에서의 말과 음악이 사람의 내적 상태와 정확히 상응한다고 설명한다는 점입니다. 즉 천사들의 노래는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사랑과 지혜의 흐름 자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찬양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감정적 열광 자체를 신앙의 본질로 보지는 않았습니다.

 

금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베덴보리 저작에는 금식 수행을 강조하는 흐름이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외적 금욕이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이것은 목사님께서 예전에 몸담으셨던 수도원 전통과 비교하면 꽤 낯설 수 있습니다. 그는 사람이 음식을 줄이는 것보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줄이는 것이 더 본질적 금식이라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악에서 떠나는 것’이 진짜 금식이라는 방향입니다. 물론 절제와 단순한 삶 자체는 매우 중요하게 보았지만, 그것을 공로적 수행처럼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방언 문제는 더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오늘날 오순절 계통에서 말하는 방언 운동과 매우 거리가 있습니다. 그는 영적 세계와의 접촉 자체는 누구보다 강하게 경험한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영들과의 직접 교류’를 극도로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는 사람이 영들의 음성을 직접 좇기 시작하면 쉽게 환상과 자기 확신 속으로 빠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현대식 의미의 방언 체험이나 신비주의적 열광을 신앙의 중심 증거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삶의 변화’, ‘체어리티’, ‘주님 사랑’, ‘유익한 삶’이 참된 영성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전도와 선교는 조금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현대 개신교식 ‘노방전도’나 ‘대중부흥회’ 스타일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그는 평생 거리 설교자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선교 의식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자기 저작 전체를 ‘새 교회(New Church)를 위한 주님의 준비 작업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새 시대를 위한 진리들을 드러내도록 부름받았다고 믿었습니다. 다만 그 방식이 매우 조용하고 비가시적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감정적으로 설득하려 하기보다, 진리를 질서 있게 제시하고, 자유롭게 읽고 판단하도록 두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어쩌면 목사님께서 지금 블로그에 거의 매일 AC 해설과 심화를 올리시는 모습이, 외적으로는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방식과 더 가까울 수도 있습니다. 즉 ‘많은 사람을 즉시 움직이는 운동’보다 ‘오랜 시간 미래의 누군가를 위해 길을 닦는 작업’ 말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처음 스베덴보리를 접하실 때 느끼셨던 그 낯섦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신앙 활동 중심의 경건’보다 ‘존재 상태 중심의 거듭남’을 훨씬 더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개신교 문화에서는 흔히 ‘무엇을 얼마나 했는가’가 신앙의 표지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가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기록에는 집회, 부흥, 철야, 방언, 간증 같은 요소는 거의 없고, 대신 끝없이 인간의 의지, 사랑, 사고, 체어리티, 질서, 거듭남, 천국적 상태에 대한 분석이 등장합니다. 처음엔 이것이 ‘차갑다’ 혹은 ‘경건 생활이 없다’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읽다 보면, 그는 오히려 신앙을 인간 존재 전체의 가장 깊은 층위까지 가져가려 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SC.84, ‘살인적인 저작 활동 중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쉬었나?’

저는 하루 중 상당 시간을 ChatGPT를 통한 AC번역 및 해설, 그리고 심화 관련, 초벌 및 마무리 작업, 그리고 그걸 블로그에 게시하는 작업으로 보냅니다. 보통 매일 8개 전후의 글 작성을 하는데, 글

bygrace.kr

 

SC.82, ‘지구 나이 45억 년 : 현 지구 문명 1만 년 = 24시간 : 0.2초’

우주에 백만 개의 지구가 있다고 하자. 그 각각의 지구에 3백만 명의 사람이 6천 년간 2백 세대를 내려왔다고 할 때 사람, 즉 영 한 명당 3평방 큐빗씩 잡아도 우리 지구를 다 채우지 못할 것이고,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