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56에는 비슷한 문장이 세 번 반복됩니다.천적 인간은 천적인 것들로 기뻐하며 그것들이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천적음식’이라고 하고,영적 인간은 영적인 것들로 기뻐하며 그것들이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영적음식’이라고 합니다.자연적 인간도 자연적인 것들로 기뻐하며 그것들이 그의 삶에 속하기 때문에‘음식’이라고 합니다.
처음 읽으면‘삶과일치한다’는 말이 조금 막연합니다.단순히 내가 좋아하는 것은 모두 내 삶과 일치한다는 뜻일까요?맛있는 음식을 좋아하면 자연적 인간이고,말씀 읽기를 좋아하면 영적 인간이며,남을 돕는 것을 좋아하면 천적 인간이라는 뜻일까요?그렇게 단순하게 읽어서는 곤란합니다.
먼저AC.56이 직접 말하는 것부터 붙들어야 합니다.스베덴보리는 각각의 인간이 자기 삶과 일치하는 것들로‘기뻐한다’고 합니다.그리고 바로 그 일치 때문에 그것들을‘음식’이라고 부릅니다.따라서 여기서 기쁨은 음식이라는 표현을 이해하게 하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삶’이라는 말도 단순히 하루 동안 무엇을 많이 하느냐는 뜻으로 좁힐 필요는 없습니다.어떤 사람은 직업 때문에 하루 종일 숫자를 보고,어떤 사람은 집안일을 하고,어떤 사람은 설교를 준비합니다.그런 외적인 활동 자체만으로 그 사람의 천적·영적·자연적 삶을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AC.56이 말하는 삶은 그 사람에게 속하며 그와 일치하는 생명의 성질과 관계하여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이해하는 데 깊은 기쁨을 느낀다고 해봅시다.이것은 영적인 기쁨을 설명하는 하나의 예가 될 수 있습니다.그러나‘성경공부가재미있다’는 감정 하나만으로 그 사람이 영적 인간이라고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지식을 좋아하는 것 자체는 자연적 차원의 기억 지식에 대한 즐거움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도우면서 기뻐한다고 해서 그 기쁨을 곧바로 천적 기쁨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사람은 칭찬받는 것이 좋아서 도울 수도 있고,자기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느끼고 싶어서 도울 수도 있으며,실제로 이웃의 선을 사랑하여 도울 수도 있습니다.외적으로 같은 행동이라도 그것이 어떤 삶에서 나오는지는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무엇을할때기분이좋은가?’만 묻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AC.56의 표현에서 더 중요한 것은‘무엇이그의삶과일치하는가?’입니다.기쁨은 그 일치에서 나옵니다.어떤 것이 그 사람의 생명과 어울리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음식이라는 비유와도 잘 맞습니다.자연적인 음식도 몸이 받아들여 자기 생명을 유지하는 데 사용합니다.AC.56에서 영적인 것들을‘음식’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것들이 단순히 사람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삶과 일치하여 그에게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내가불편하게느끼는진리는내삶과일치하지않으니나에게음식이아니다’라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거듭남 가운데 있는 사람은 자기 악을 드러내는 진리 앞에서 불편함과 저항을 느낄 수 있습니다.진리는 때때로 우리가 현재 사랑하고 있는 것과 충돌하기 때문입니다.따라서 순간적인 편안함이나 불편함을AC.56의‘일치’와 그대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특히 중요합니다.현재 심화에서는‘정직하게사는사람은정직이중요하다는말을들으면편안하고,속이는데익숙한사람은불편해한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이해를 돕는 예로는 가능하지만 항상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습니다.정직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도 자기의 실제 부정직을 지적받으면 아플 수 있고,부정직한 사람도 정직에 관한 아름다운 설교를 듣고 감동할 수 있습니다.순간적인 감정과 삶의 실제 성질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AC.56의‘기뻐한다’를 심리 테스트처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말씀읽기가좋으니영적인간이다’, ‘나는봉사가즐거우니천적인간이다’, ‘나는공부가좋으니자연적인간이다’와 같은 판정은 이 글이 의도하는 바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표현은 우리에게 아무런 실제적인 의미가 없을까요?그렇지는 않습니다.오히려 장기간에 걸쳐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삶의 양식으로 삼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좋은 질문이 될 수 있습니다.내가 반복해서 찾는 것은 무엇인가,무엇을 받아들일 때 내 삶이 살아난다고 느끼는가,무엇을 위해 시간과 마음을 사용하는가 하는 질문은 자기 삶의 방향을 살피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의 목적은 자기에게‘나는영적인간이다’, ‘나는아직자연적인간이다’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데 있지 않습니다.오히려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으로 내 생명을 채우고 있는지를 주님 앞에서 살피는 데 있습니다.
자연적인 기쁨도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닙니다.좋은 음식을 먹고 기뻐하고,가족과 함께 있는 것을 즐거워하고,공부와 일에서 성취를 느끼며,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을 모두 버려야 영적 인간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AC.56은 자연적인 것들을 악이라고 하지 않습니다.자연적 인간의 음식이 자연적인 것들이며 주로 기억 지식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할 뿐입니다.
따라서 천적·영적·자연적 기쁨을 서로 경쟁하는 세 종류의 감정처럼 볼 필요도 없습니다.한 사람이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동안 여러 차원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중요한 것은AC.56이 각각의 인간에게‘그의삶과일치하는’음식이 있다고 구별한다는 점입니다.
앞의AC.51-53에서 보았듯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도 단순히 초급자와 고급자의 차이로만 볼 수 없습니다.따라서‘거듭나면자연적인기쁨→영적인기쁨→천적인기쁨순으로바뀐다’고AC.56을 단계표로 만드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스베덴보리는 이번 글에서 그런 시간 순서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AC.56의 문장을 그대로 기억하는 편이 좋습니다. ‘천적인간은천적인것들로기뻐한다.그것들이그의삶과일치하기때문이다.영적인간은영적인것들로기뻐한다.그것들이그의삶과일치하기때문이다.’음식과 기쁨과 삶이 이렇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후 스베덴보리가 천국과 사후세계에서 사람의 사랑과 기쁨을 설명하는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바탕이 됩니다.사람이 무엇을 참으로 사랑하는가와 무엇에서 기쁨을 느끼는가는 서로 무관하지 않습니다.다만 그 더 넓은 교리를AC.56한 문장 안에 모두 집어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기억하면 충분합니다.AC.56에서‘그의삶과일치하기때문에기뻐한다’는 말은 단순히‘내기분에맞아서좋다’는 뜻이 아닙니다.어떤 것이 그 사람에게 속한 삶의 성질과 어울리기 때문에 그것이 그의 기쁨이 되고,그래서 그의‘음식’이라고 불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읽으며 가장 좋은 질문은‘나는천적인간인가,영적인간인가,자연적인간인가?’가 아니라 어쩌면 이것일 것입니다. ‘나는무엇을내삶의음식으로삼고있는가?’그리고 그 질문 역시 자기 판정을 위한 것이 아니라,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가 실제로 내 삶의 양식이 되어 가고 있는지를 살피기 위한 질문이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And God said, Behold, I give you every herb bearing seed which is upon the faces of all the earth, and every tree in which is fruit; the tree yielding seed, to you it shall be for food.(창1:29)
AC.56
천적인간은오직천적인것들로기뻐하는데,이것들은그의삶과일치하기때문에이르기를‘천적음식’(celestialfood)이라합니다.영적인간은영적인것들로기뻐하며,이것들역시그의삶과일치하므로이르기를‘영적음식’(spiritualfood)이라합니다.자연적인간도마찬가지로자연적인것들로기뻐하는데,이것들은그의삶에속하므로이르기를‘음식’(food),곧‘먹을거리’라하며,주로기억지식으로이루어져있습니다.여기서는영적인간을다루고있기때문에,그의영적음식을표상으로설명하고있습니다.곧‘씨맺는채소’(herbbearingseed)와‘열매맺는나무’(treeinwhichisfruit)로묘사되며,이것들은일반적으로‘씨가진나무’(treeyieldingseed)라합니다.그의자연적음식은다음절에서설명됩니다. The celestial man is delighted with celestial things alone, which being in agreement with his life are called celestial food.The spiritual man is delighted with spiritual things, and as these are in agreement with his life they are called spiritual food.The natural man in like manner is delighted with natural things, which, being of his life, are called food, and consist chiefly of memory-knowledges.As the spiritual man is here treated of, his spiritual food is described by representatives, as by the “herbbearingseed,” and by the “treeinwhichisfruit,” which are called, in general, the “treeyieldingseed.”His natural food is described in the following verse.
해설
AC.56은 창1:29의 ‘먹을거리’를 설명하면서 매우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천적 음식이 있고, 영적 인간에게는 영적 음식이 있으며, 자연적 인간에게는 자연적 음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음식은 육체가 먹는 자연적인 음식이 아니라 각각의 인간이 무엇으로 기뻐하며, 무엇이 그의 삶과 일치하는가를 나타내는 영적인 의미의 음식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가장 먼저 말하는 것은 천적 인간입니다. 천적 인간은 ‘오직천적인것들로기뻐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천적인 것들이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 ‘천적음식’이라고 부릅니다. 이어 영적 인간은 영적인 것들로 기뻐하며, 그것들이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 ‘영적음식’이라고 합니다. 자연적 인간 역시 자연적인 것들로 기뻐하고, 그것들이 그의 삶에 속하기 때문에 ‘음식’이라고 하며, 그것은 주로 기억 지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먼저 주의할 것은 천적·영적·자연적 인간을 단순히 ‘높음→중간→낮음’이라는 세 칸짜리 단계표로 읽지 않는 것입니다. AC.56의 직접적인 관심은 세 부류의 서열을 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각각의 삶에는 그 삶과 일치하여 기쁨을 주는 것이 있고, 그래서 그것을 ‘음식’이라고 부른다는 점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기뻐하는것’을 음식이라고 부를까요? AC.56은 음식의 상응에 대한 전체 교리를 여기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문장 자체에서 중요한 단서를 줍니다. 천적인 것들은 천적 인간의 ‘삶과일치’하고, 영적인 것들은 영적 인간의 ‘삶과일치’하며, 자연적인 것들은 자연적 인간의 ‘삶에속하기’ 때문에 음식이라고 불립니다. 따라서 여기서 음식은 단순히 머리로 알고 있는 정보가 아니라 그 사람의 삶에 맞으며 그가 기쁨을 얻는 것과 관계됩니다.
이것은 ‘사람이무엇을좋아하느냐만보면그사람의영적수준을정확히판정할수있다’는 간단한 진단법을 주려는 말은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동시에 여러 종류의 기쁨이 있고, 자연적인 기쁨 자체가 악한 것도 아닙니다. AC.56의 요점은 훨씬 제한적입니다. 천적·영적·자연적 인간에게 각각 그 삶과 일치하는 것들이 있고, 그것들이 그들에게 음식이라고 불린다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이 ‘천적인것들로기뻐한다’고 할 때에도 이를 곧바로 ‘사랑자체만으로기뻐하며더이상진리의매개가필요없다’고 풀 필요는 없습니다. 앞의 AC.51-53에서 천적 인간이 의지에 속한 사랑에서 출발한다는 설명을 보았지만, AC.56은 여기서 천적 음식의 세부 성질을 정의하지 않습니다. 그저 천적 인간은 자기 삶과 일치하는 천적인 것들로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영적 인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영적인 것들로 기뻐한다고 해서 ‘아직사랑에도달하지못하고진리만먹는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앞의 AC.48에서 영적 인간은 이미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글의 ‘영적음식’을 사랑과 분리된 진리나 교리 지식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에서 ‘음식’과 단순한 ‘정보’를 구별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영적인 사실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그의 영적 음식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AC.56은 음식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그것이 ‘그의삶과일치하기때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지식의 보유량보다 그 사람이 어떤 종류의 삶 안에 있으며 무엇으로 기뻐하는지가 이번 표현의 중심에 더 가깝습니다.
자연적 인간의 경우에는 스베덴보리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그의 음식은 자연적인 것들이며 ‘주로기억지식으로이루어져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기억 지식은 앞의 AC.40에서도 만났습니다. 외부에서 배우고 기억에 저장하는 지식들입니다. 이런 지식 자체를 낮거나 악한 것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자연적 인간의 삶에 속하는 중요한 재료이며, 이후 영적인 것들이 받아들여지는 데에도 쓰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연적음식=세상적성공과쾌락’이라고 단순화하는 것은 AC.56보다 좁습니다. 본문이 직접 예로 드는 것은 오히려 기억 지식입니다. 자연적 인간은 자연적 차원에 속하는 것들로 기뻐하며, 그 음식은 주로 기억 지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선하게 사용되는지 악하게 사용되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며, AC.56은 여기서 그것을 논하지 않습니다.
이번 글에서 특히 중요한 문장은 ‘여기서는영적인간을다루고있기때문에’입니다. 창1의 현재 문맥이 영적 인간을 다루고 있으므로, 창1:29에 나오는 음식도 영적 인간의 음식으로 해석됩니다. 그리고 그 음식이 ‘씨맺는채소’와 ‘열매맺는나무’라는 표상으로 묘사된다고 합니다.
여기서 서둘러 ‘씨맺는채소’와 ‘열매맺는나무’의 세부 속뜻을 만들어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AC.56은 아직 그것들을 각각 무엇이라고 해석하지 않고, 영적 인간의 음식이 이 두 가지 표상으로 묘사된다고만 합니다. 바로 다음 AC.57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두 표현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므로 그 해석은 다음 글의 몫으로 남겨 두는 것이 좋습니다.
따라서 ‘풀은생명이있지만오래지속되지않는상태’, ‘나무는더안정되었지만아직천적사랑에는이르지못한상태’, ‘씨는앞으로더높은생명으로발전할잠재력’이라고 이번 글에서 미리 정리하는 것은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런 설명은 AC.56의 직접 내용이 아니며, 다음 AC.57이 실제로 말하는 해석과도 어긋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씨맺는채소’와 ‘열매맺는나무’를 일반적으로 ‘씨가진나무’라고 부른다고 덧붙입니다. 이 표현 역시 이번 글에서 별도의 성장 단계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들이 영적 인간에게 주어진 영적 음식을 표상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창1:29의 ‘내가너희에게주노니너희의먹을거리가되리라’는 말은 단순히 최초 인간에게 채식을 명령하는 구절을 넘어, 속뜻에서는 영적 인간에게 주어지는 음식에 관한 말씀으로 읽힙니다. 다만 AC.56은 이 한 문장에서 음식의 모든 상응을 완성하지 않습니다. 천적·영적·자연적 음식의 차이를 간단히 제시하고, 현재 문맥에서 영적 인간의 음식이 무엇으로 표상되는지를 밝히는 데 그칩니다.
여기서 ‘주신다’는 표현도 눈여겨볼 수 있지만, 이번 AC가 그 단어의 속뜻을 따로 해설하지 않으므로 지나치게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앞의 AC.39이후의 큰 흐름을 기억하면, 참된 선과 진리와 생명의 근원이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원리는 그대로 유지됩니다. 영적 음식 역시 인간이 자기 안에서 스스로 만들어 내는 생명의 근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56에서 처음 읽는 독자에게 가장 흥미로운 표현은 아마 ‘그의삶과일치하기때문에’일 것입니다. ‘내삶과일치하는것이음식이고,그래서그것으로기뻐한다는것은구체적으로무슨뜻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이번 문장의 표현을 넘어 사람의 기쁨과 삶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좋은 질문이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다만 여기서부터 곧바로 ‘내가무엇에서기뻐하는지만보면내가자연적인간인지영적인간인지천적인간인지알수있다’고 자기 진단을 시작할 필요는 없습니다. 순간적인 즐거움 하나와 한 사람의 삶 전체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AC.56이 말하는 것은 각각의 인간에게 그의 ‘삶과일치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기쁨은 한순간의 감정이라기보다 삶의 성질과 관계하여 읽는 편이 안전합니다.
또 자연적인 것에서 기뻐한다고 해서 그것 자체로 자연적 인간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영적 인간도 자연계에서 살며 음식, 휴식, 학문, 가족, 일과 같은 자연적인 선을 기쁘게 누릴 수 있습니다. AC.56의 구별을 ‘무엇을조금이라도즐기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그 사람의 삶에 속하고 그 삶과 일치하는가의 문제로 읽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AC.56의 핵심을 ‘천적인간은사랑을먹고,영적인간은진리를먹고,자연적인간은지식을먹는다’는 세 문장으로만 압축하면 너무 단순해집니다. 어느 정도 기억을 돕는 표현은 될 수 있지만, 본문이 강조하는 ‘삶과일치함’이라는 중요한 조건이 빠지기 때문입니다.
또 ‘거듭남이란먹는음식이자연적음식에서영적음식으로,다시천적음식으로바뀌는과정’이라고 정리하는 것도 AC.56이 직접 말하는 범위를 넘어갑니다. 특히 앞에서 보았듯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관계를 모든 사람이 차례로 통과하는 하나의 직선 단계표로만 보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AC.56은 훨씬 단순하면서도 깊은 사실을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그의 삶과 일치하여 그가 기뻐하는 것들이 있고, 말씀은 그것을 ‘음식’이라는 언어로 표현합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천적 음식이, 영적 인간에게는 영적 음식이, 자연적 인간에게는 자연적 음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창1에서 다루는 것은 영적 인간이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씨맺는채소’와 ‘열매맺는나무’가 그의 영적 음식으로 제시됩니다.
그 두 음식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바로 다음 AC.57에서 밝혀집니다. 따라서 AC.56은 그 해석을 미리 완성하기보다 ‘사람에게도영적인음식이있으며,그음식은그의삶과일치하여그를기쁘게하는것’이라는 기본 원리를 붙들고 다음 글로 넘어가게 하는 짧은 연결 글로 읽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창1:28)
AC.55
태고의사람들은이해와의지,곧신앙과사랑의결합을결혼이라했기때문에,그결혼에서생겨나는선의모든것은‘생육’(fruitfulness)이라했고,진리의모든것은‘번성’(multiplications)이라했습니다.그래서예언자들가운데서도이런표현들이사용되는데요,예를들어에스겔입니다. As the most ancient people called the conjunction of the understanding and the will, or of faith and love, a marriage, everything of good produced from that marriage they called “fruitfulness,” and everything of truth, “multiplications.”Hence they are so called in the prophets, as for instance in Ezekiel:
여기서‘사람’(man)은이스라엘이라하는영적인간을뜻하고,‘전지위’(ancienttimes)는태고교회를,‘처음’(beginnings)은홍수이후의고대교회를뜻합니다.이본문에서진리에속한‘수가많음’(multiplication)이먼저언급되고,선에속한‘번성’(fruitfulness, 앞에서는multiplications을‘번성’으로번역, 서로다른영어를같은한글단어로번역한바람에헷갈릴수있으니주의해야)이그다음에언급되는이유는,이미거듭난사람이아니라이제거듭나게될사람을다루고있기때문입니다. By “man” is here meant the spiritual man who is called Israel; by “ancienttimes,” the most ancient church; by “beginnings,” 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The reason why “multiplication,” which is of truth, is first mentioned, and “fruitfulness,” which is of good, afterwards, is that the passage treats of one who is to become regenerated, and not of one who is already regenerated.
[2] 이해가의지와결합하거나,신앙이사랑과결합할때,주님께서는그사람을‘결혼한땅’(amarriedland)이라하십니다.이사야입니다. When the understanding is united with the will, or faith with love, the man is called by the Lord “amarriedland,” as in Isaiah:
이결합에서나오는진리의열매들을‘아들’(sons)이라하고,선의열매들을‘딸’(daughters)이라하는데,이는말씀전반에서매우자주나타나는표현입니다. The fruits thence issuing, which are of truth, are called “sons,” and those which are of good are called “daughters,” and this very frequently in the Word.
[3] 땅이‘가득차게된다’(replenished)는것은진리와선이많아진다는뜻입니다.주님께서사람에게복을주시고말씀하실때,곧그에게역사하실때,선과진리는헤아릴수없이증가합니다.주님께서마태복음에서이렇게말씀하신것처럼말입니다. The earth is “replenished,” or filled, when there are many truths and goods; for when the Lord blesses and speaks to man, that is, works upon him, there is an immense increase of good and truth, as the Lord says in Matthew:
‘겨자씨한알’(grainofmustardseed)은사람이영적인간이되기전의선을뜻하는데,그것이‘모든씨가운데가장작다’(theleastofallseeds)고들하는이유는,그가자기가하는선을자기한테서난거라여기기때문입니다.자기한테서나는건실상악밖에없는데도말입니다.그러나아직거듭남의상태중에있기때문에,그안에는선이있습니다.비록그것이가장작은선,보잘것없어보이는선일지라도말입니다. A “grainofmustardseed” is man’s good before he becomes spiritual, which is “theleastofallseeds,” because he thinks that he does good of himself, and what is of himself is nothing but evil.But as he is in a state of regeneration, there is something of good in him, but it is the least of all.
[4] 마침내신앙이사랑과결합하면그것은크게자라‘풀’(herb)이되고,결합이완성되면‘나무’(tree)가됩니다.그리고이나무의가지에‘공중의새들’(birdsoftheheavens),곧진리들,지적인것들이깃드는데(buildtheirnestsinitsbranches),이가지들은기억지식(memory-knowledges)입니다.사람이영적인간일때,그리고영적인간이되어가는동안에는전투상태에있기때문에,‘땅을정복하라,모든생물을다스리라’(subduetheearthandhavedominion)는말씀이덧붙여집니다. At length as faith is joined with love it grows larger, and becomes an “herb”; and lastly, when the conjunction is completed, it becomes a “tree,” and then the “birdsoftheheavens” (in this passage also denoting truths, or things intellectual) “buildtheirnestsinitsbranches,” which are memory-knowledges.When man is spiritual, as well as during the time of his becoming spiritual, he is in a state of combat, and therefore it is said, “subduetheearthandhavedominion.”
해설
AC.55는 앞의 AC.54에서 설명한 ‘결혼’에서 무엇이 나오는지를 다룹니다. AC.54에서 태고교회 사람들은 영적 인간 안의 이해를 남자, 의지를 여자라 했고, 이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제 AC.55에서는 그 결혼을 이해와 의지의 결합, 또는 신앙과 사랑의 결합이라고 다시 말하면서, 그 결합에서 산출되는 선과 진리를 창1:28의 ‘생육하고번성하라’와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의 사람들이 이 결혼에서 생겨나는 선에 속한 모든 것을 ‘생육’(fruitfulness)이라 하고, 진리에 속한 모든 것을 ‘번성’ 또는 ‘증가’(multiplications)라고 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생육=질,번성=양’과 같은 일반적인 구별이 아닙니다. AC.55가 직접 제시하는 대응은 선과 진리입니다. 결혼에서 선이 산출되는 것을 생육이라 하고, 진리가 산출되는 것을 번성이라 한 것입니다.
이것은 앞의 AC.43과도 연결됩니다. 거기에서도 ‘생육하다’는 사랑에 속한 것들에, ‘번성하다’는 신앙에 속한 것들에 적용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55는 갑자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이미 제시된 생육과 번성의 의미를 이제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의 ‘결혼’과 연결하여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결혼에서선과진리가나온다’는 표현도 자연적인 출산을 그대로 영적인 과정에 옮겨 놓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이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의 결합을 결혼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 결합에서 산출되는 것들도 결혼에서 생겨나는 열매의 언어로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결합은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선과 진리를 산출하는 살아 있는 결합으로 묘사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보여 주기 위해 먼저 겔36:11-12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사람’은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영적 인간을 뜻하고, ‘전지위’는 태고교회를, ‘처음’은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를 뜻한다고 직접 설명합니다. 그리고 특히 ‘증가’(multiplication)가 먼저 나오고 ‘생육’(fruitfulness)이 뒤에 나오는 순서에 주목합니다.
왜 진리에 속한 증가가 먼저이고 선에 속한 생육이 뒤에 나올까요? AC.55의 답은 분명합니다. 이 구절이 ‘이미거듭난사람’이 아니라 ‘거듭나게될사람’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의 AC.52-53에서도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이 먼저이고 사랑에 속한 것이 뒤따른다는 설명을 보았습니다. 여기에서도 그 질서와 연결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거듭남의모든초기단계에서는반드시지식의양이먼저늘어나고나중에선이들어온다’는 세밀한 공식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AC.55가 직접 밝히는 것은 겔36의 이 문맥에서 진리에 속한 증가가 먼저 언급되는 이유입니다. 말씀의 순서에 의미가 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 한 문장을 모든 사람의 거듭남에 대한 획일적인 시간표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어지는 사62:4에서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해가 의지와 결합하거나 신앙이 사랑과 결합할 때 사람을 주님께서 ‘결혼한땅’이라고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땅을쁄라라하리니’,곧 ‘결혼한땅’이라고 부르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땅은언제나인간을뜻한다’고 고정적으로 정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AC.55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이 결합한 상태가 말씀에서 ‘결혼한땅’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이 인용은 앞의 AC.54에서 시작된 ‘결혼’이라는 주제를 이어 줍니다.
그 결합에서 나오는 열매들 가운데 진리에 속한 것은 ‘아들’, 선에 속한 것은 ‘딸’이라고 한다는 설명도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말씀 전반에서 매우 자주 나타난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우선 AC.55가 말하는 만큼만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아들=진리에속한열매’, ‘딸=선에속한열매’입니다. 이를 곧바로 현실의 남성과 여성의 성질에 대한 설명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대목은 바로 앞 AC.54에서 교회가 선에 대한 애정 때문에 ‘딸’, ‘처녀’, ‘아내’라고 불린다고 했던 설명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말씀에서 가족과 결혼의 언어는 단순히 자연적인 혈연관계를 넘어 인간 안의 선과 진리 및 그 결합과 산출을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다만 각각의 표현이 등장할 때에는 그 문맥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무엇을 뜻한다고 설명하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다음 창1:28의 ‘땅에충만하라’가 설명됩니다. 땅이 ‘가득차는것’은 진리와 선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말씀하신다는 것은 곧 그에게 역사하시는 것이며, 그때 선과 진리는 헤아릴 수 없이 증가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생육과 번성의 주체를 인간 자신의 능력으로 돌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증가의 근원은 주님의 복과 역사입니다.
이것은 앞의 AC.39이후 계속 이어진 원리와도 일치합니다. 사람에게 참으로 살아 있는 선과 진리가 있다면 그것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AC.43에서도 주님에게서 생명을 가진 것은 생육하고 번성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55에서는 같은 원리가 ‘땅에충만하라’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주님께서 역사하실 때 사람 안의 선과 진리가 풍성해집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마13:31-32의 겨자씨 비유를 인용합니다. 여기서 특히 주의할 것은 AC.55가 겨자씨를 무엇이라고 해석하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겨자씨한알’을 ‘사람이영적인간이되기전의선’이라고 직접 말합니다. 따라서 이것을 곧바로 ‘처음주어진작은진리’라고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왜 그 선이 ‘모든씨가운데가장작은것’일까요? 사람은 그때 자신이 선을 자기에게서 행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은 악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 사람이 거듭남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 안에는 어떤 선이 있으며,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가장작은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대목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상당히 어려울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서나오는것은악밖에없다면,어떻게그사람안에선이있을수있는가?’ 하는 질문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핵심은 선의 근원과 사람이 그것을 자기 것으로 느끼는 상태를 구별하는 데 있습니다. 사람은 아직 선을 자기에게서 행한다고 생각하지만, 거듭남 가운데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그 안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앞의 AC.39에서 사람이 처음에는 선과 진리를 자기에게서 나온 것처럼 생각하도록 허용된다는 설명과 함께 읽으면 이해하기가 조금 쉬워집니다.
그 후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사랑과 결합함에 따라 그것이 자라 ‘풀’이 되고, 마지막으로 그 결합이 완성되면 ‘나무’가 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AC.55가 직접 제시한 진행입니다. 처음에는 매우 작은 선으로 표현된 겨자씨가 있고,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서 자라 풀이 되며, 그 결합이 완성될 때 나무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씨=진리’, ‘풀=삶으로나타나기시작한진리’, ‘나무=완전히안정된영적구조’라는 별도의 단계표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이번 문맥에서 겨자씨는 스베덴보리가 명시적으로 ‘선’이라고 했습니다. ‘풀’에 대해서도 AC.55는 식물 자체의 성질을 하나하나 영적인 특징과 대응시키지 않습니다. 풀이 부드럽고 잘 흔들린다는 자연적 특징에서 겸손이나 유연성을 끌어내는 것은 흥미로운 묵상이 될 수는 있지만 AC.55의 해설로 제시할 근거는 없습니다.
나무가 되었을 때 ‘공중의새들’이 그 가지에 깃듭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새들이 진리들 또는 지적인 것들을 뜻하고, 가지들은 기억 지식이라고 직접 설명합니다. 따라서 작은 선에서 시작된 것이 신앙과 사랑의 결합 가운데 성장하면서, 마침내 진리와 지적인 것들이 기억 지식이라는 가지에 깃들 수 있는 상태가 묘사됩니다.
이것을 보면 AC.55에서 지식과 기억 지식은 결코 무가치한 것이 아닙니다. 앞의 AC.40에서도 기억 지식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주님에게서 오는 신앙으로 살아 있게 되는가가 중요했습니다. 여기에서도 기억 지식은 나무의 ‘가지’가 되어 진리와 지적인 것들이 깃드는 자리가 됩니다. 문제는 지식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생명과 결합하여 어떤 질서 안에 놓이는가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새로운 주제를 엽니다. ‘사람이영적인간일때, 그리고영적인간이되어가는동안에는전투상태에있기때문에, ‘땅을정복하라,모든생물을다스리라’는 말씀이 덧붙여진다.’ 여기서 창1:28의 ‘정복하라’와 ‘다스리라’가 거듭남의 전투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정복하고다스린다’는 말을 자연계나 다른 사람에 대한 지배욕의 정당화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55의 속뜻에서는 영적 인간의 전투 상태와 관계됩니다. 다만 이 한 문장만으로 전투의 대상과 방식, 시험의 전체 구조를 세세하게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직접 밝히는 것은 영적 인간에게 전투가 있으며, 그 때문에 ‘정복하라’와 ‘다스리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이 전투를 단순히 ‘아직천적인간이되지못했기때문에생기는싸움’이라고 정리하는 것도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AC.55의 직접 표현은 ‘영적인간일때’와 ‘영적인간이되어가는동안’ 전투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과의 관계는 이후 AC가 더 설명하도록 남겨 두는 것이 좋습니다.
AC.55전체를 다시 보면 하나의 흐름이 보입니다. 먼저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의 결합이라는 ‘결혼’이 있습니다. 그 결혼에서 선과 진리가 산출되어 ‘생육’과 ‘번성’이 일어납니다. 주님께서 복을 주시고 역사하실 때 그 선과 진리는 크게 증가하여 ‘땅에충만’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적 인간은 그 과정에서 전투를 겪기 때문에 ‘땅을정복하고다스리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창1:28의 ‘생육하고번성하여땅에충만하라’는 속뜻에서 단순히 무엇인가가 많아진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의 결합 안에서 선과 진리를 산출하고 풍성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풍성함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내는 성취가 아니라 주님께서 복을 주시고 말씀하실 때, 곧 사람 안에 역사하실 때 이루어지는 증가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7)
AC.54
남자와여자를창조하시고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남자와여자’(maleandfemale)가속뜻으로무엇을의미하는지를태고교회는잘알고있었습니다.그러나말씀의속뜻이그들의후손들가운데서사라지자,이아르카나역시함께사라졌습니다.그들의결혼은행복과기쁨의주된근원이었고,그래서그들은비교할수있는것이있으면,무엇이든결혼에비유했습니다.그렇게함으로써그들은그안에담긴행복을느끼고인식할수있었기때문입니다.그들은또한내적인사람들이었기때문에,그들은오직내적인것들,즉속의것들로만기뻐했습니다.겉의것들은눈으로보기만했고,그것들이무엇을나타내는지를생각했습니다.그래서이겉의것들은그것들이그들의생각을속의것들,곧내적인것들로,그리고거기서천적인것들로,결국에는그들의모든것되신주님께로돌이키게해줄때에만의미가있었습니다.그리고그렇게천상의결혼을생각했으며,그들은자기들의결혼이누리는행복이바로거기에서온다고퍼셉션했습니다.그래서그들은영적인간안에있는이해(understanding)를남자라불렀고,의지(will)를여자라불렀으며,이둘이하나로작동할때,그것을결혼(marriage)이라불렀습니다.그교회로부터이런식으로말하는방식이전해져내려왔는데,그로인해선에대한애정으로교회를가리켜‘딸’(daughter)과‘처녀’(virgin),곧‘시온의처녀’(virginofZion),‘예루살렘의처녀’(virginofJerusalem)라하였고,또한‘아내’(wife)라부르게되었습니다.이주제들에대해서는다음장23절과3장15절에서더보게될것입니다. What is meant by “maleandfemale,” in the internal sense, was well known to the most ancient church, but when the interior sense of the Word was lost among their posterity, this arcanum also perished.Their marriages were their chief sources of happiness and delight, and whatever admitted of the comparison they likened to marriage, in order that in this way they might perceive its felicity.Being also internal men, they were delighted only with internal things.External things they merely saw with the eyes, but thought of what was represented.So that outward things were nothing to them, save as these could in some measure be the means of causing them to turn their thoughts to internal things, and from these to celestial things, and so to the Lord who was their all, and consequently to the heavenly marriage, from which they perceived the happiness of their marriages to come.The understanding in the spiritual man they therefore called male, and the will female, and when these acted as a one they called it a marriage.From that church came the form of speech which became customary, whereby the church itself, from its affection of good, was called “daughter” and “virgin”—as the “virginofZion,” the “virginofJerusalem”—and also “wife.”But on these subjects see the following chapter, at verse 23, and chapter 3, verse 15.
AC.54는 창1:27의 마지막 표현인 ‘남자와여자를창조하시고’를 설명합니다. 자연적인 뜻에서는 물론 남성과 여성의 창조를 말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속뜻에서 ‘남자와여자’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태고교회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아르카나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태고교회 사람들이 결혼과 자연계의 외적인 것들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길게 설명합니다.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가 주의할 것은 AC.54가 자연적인 남녀나 실제 결혼을 부정하고 그것을 단지 인간 심리의 비유로 바꾸려는 글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실제 결혼이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매우 큰 행복과 기쁨의 근원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결혼이라는 자연적 현실을 통해 더 내적인 결합을 보았습니다. 자연적인 결혼과 그 속뜻 가운데 하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것 안에서 내적인 것을 보았다는 것이 이번 글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의 결혼이 그들에게 ‘행복과기쁨의주된근원’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엇이든 결혼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결혼에 비유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결혼의 행복을 지각했습니다. 오늘날 독자에게는 조금 낯선 표현이지만, 이 문장은 태고교회가 ‘결합’을 얼마나 중요하게 보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그들이 결혼을 바라보는 방식은 외적인 모습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AC.54는 그들을 ‘내적인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외적인 것들을 눈으로 보았지만, 생각으로는 그것들이 무엇을 표상하는지를 보았습니다. 외적인 것 자체가 그들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는 말은 자연계의 사물이나 삶을 무가치하게 여겼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의 요점은 외적인 것이 그 자체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것을 보면 그들의 생각은 그것이 표상하는 내적인 것으로 향했고, 내적인 것에서 다시 천적인 것으로,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모든것’이신 주님께로 향했습니다. 이 흐름은 AC를 처음 읽는 사람에게 상응과 표상이라는 것이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좋은 사례입니다. 자연적인 것을 버리고 영적인 것만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 안에서 더 내적인 것을 보았고 궁극적으로 주님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자연계는 막다른 곳이 아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이 생각을 그 자체에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실재를 향하게 했습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들의 결혼을 경험하면서 그들은 그보다 더 내적인 ‘천상의결혼’을 생각했고, 자기들의 결혼에서 누리는 행복이 바로 그 천상의 결혼에서 온다고 퍼셉션했습니다.
여기서 ‘천상의결혼’이라는 말이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이것을 곧바로 ‘천국에가면이루어지는남녀의결혼’만으로 이해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실제 남녀의 결혼과 아무 관계가 없는 추상적인 심리 현상으로만 이해해서도 곤란합니다. AC.54자체에서는 이 용어의 전체 교리를 아직 펼치지 않습니다. 다만 태고교회 사람들이 자연적인 결혼의 행복을 더 높은 결합에서 오는 것으로 퍼셉션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 개념은 앞으로도 AC에서 매우 중요하게 등장하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이 설명을 거쳐 스베덴보리는 마침내 창1:27의 ‘남자와여자’가 속뜻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힙니다. ‘그들은영적인간안에있는이해를남자라불렀고,의지를여자라불렀으며,이둘이하나로작동할때그것을결혼이라불렀다.’ 이것이 AC.54의 핵심 문장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남자=이해’, ‘여자=의지’라는 대응이 나옵니다. 다만 이것을 곧바로 현실의 모든 남성은 이해를 대표하고 모든 여성은 의지를 대표한다는 심리적 성별론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AC.54가 직접 말하는 것은 ‘영적인간안에있는’ 이해와 의지입니다. 한 인간 안에 있는 두 기능을 남자와 여자라는 결혼의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남성에게는 이해만 있고 여성에게는 의지만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AC.54의 속뜻에서 한 영적 인간 안에 이해와 의지가 있고, 그 둘의 관계가 남자와 여자의 관계로 표현됩니다. 따라서 이 글을 현실 남녀의 지적 능력이나 감정적 성향을 분류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본문의 범위를 벗어납니다.
또 ‘남자=이해’, ‘여자=의지’라는 대응을 지나치게 기계적인 사전처럼 사용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창1:27의 속뜻을 설명하면서 태고교회의 결혼에 대한 인식과 영적 인간 안의 이해와 의지의 결합을 연결합니다. 이후 다른 문맥에서 ‘남자’, ‘여자’, ‘남편’, ‘아내’ 등이 등장할 때에는 그 문맥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다시 보아야 합니다.
AC.54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이해와 의지가 각각 따로 있다는 사실보다 ‘이둘이하나로작동할때’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그것을 ‘결혼’이라고 불렀습니다. 이해와 의지의 구별은 결합을 위한 구별입니다. 둘이 없어져 하나의 기능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서로 구별되면서 하나로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53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AC.53에서는 이해에 속한 신앙과 의지에 속한 사랑을 구별했습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뒤따르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앞선다고 했습니다. 이제 AC.54에서는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작동할때’ 그것을 결혼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앞에서는 둘의 질서를 구별했다면 이번에는 둘의 결합에 시선이 놓입니다.
그렇다고 ‘이해에들어온진리가의지로내려가사랑이되면그것이곧결혼이다’라는 하나의 고정된 거듭남 공식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특히 영적 인간의 진행을 설명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표현일 수 있지만, 앞의 AC.52-53에서 천적 인간은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AC.54의 더 근본적인 요점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로 변한다는 데 있지 않고,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작동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 구별은 우리가 앞에서 보아 온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적 생명은 한쪽 기능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AC.54자체는 ‘이해=진리=신앙’, ‘의지=선=사랑’이라는 모든 대응 관계를 한꺼번에 체계화하는 글은 아닙니다. 지금 이 글이 직접 말하는 만큼을 붙들면 충분합니다. 영적 인간의 이해를 남자, 의지를 여자라 했고,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 했습니다.
그런 다음 스베덴보리는 이 태고교회에서 하나의 언어 습관이 비롯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교회 자체가 선에 대한 애정 때문에 ‘딸’과 ‘처녀’, 예를 들어 ‘시온의처녀’, ‘예루살렘의처녀’라고 불렸으며 또한 ‘아내’라고도 불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에서 교회가 여성적 표현으로 등장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여기서도 ‘교회=여자’라는 하나의 고정된 공식만 기억하기보다 왜 그런 표현이 사용되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AC.54가 직접 밝히는 이유는 ‘선에대한애정’입니다. 교회가 선에 대한 애정과 관련되기 때문에 딸·처녀·아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주제에 대해서는 창2:23과 창3:15에서 더 보게 될 것이라고 직접 예고합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 ‘아내로서의교회’, ‘여자와여자의후손’, ‘남편과아내의모든상응’을 미리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AC자체가 뒤에서 다시 다루겠다고 하므로 그때까지 남겨 두는 것이 오히려 전체 흐름을 따라가는 좋은 독법입니다.
AC.54에서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태고교회의 상태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상응에 관한 지식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대로라면 외적인 것을 보면서 그것이 표상하는 내적인 것을 생각했고, 거기서 천적인 것으로, 마침내 주님께로 생각이 향했습니다. 상응은 그들에게 외워 둔 상징 사전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관계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 AC를 읽으며 상응을 공부할 때에도 중요한 주의를 줍니다. ‘남자=이해’, ‘여자=의지’라고 외우는 것만으로 태고교회의 인식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AC.54에서 태고교회의 시선은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내적인 것에서 천적인 것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주님께 향합니다. 상응의 목적은 자연적인 상징 자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더 내적인 것과 주님을 보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선 안에서 결혼은 특별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그들의 실제 결혼은 행복과 기쁨의 주된 근원이었고, 그 행복의 근원을 더 높은 천상의 결혼에서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작동하는 것도 ‘결혼’이라고 불렀습니다. 서로 다른 둘이 각자의 성질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구별된 채 하나로 작동하는 것이 결혼이라는 표현 속에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AC.54의 중심을 ‘남자는이성적이고여자는감정적이다’라는 자연적 성별 구분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실제 결혼은 중요하지 않고 인간 내면의 이해와 의지만 중요하다고 읽어서도 안 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자연적인 결혼은 더 내적인 결합을 비추는 귀한 표상이었고, 그들은 자기들의 결혼의 행복이 천상의 결혼에서 온다고 퍼셉션했습니다.
결국 AC.54는 창1:27의 ‘남자와여자’를 통해 인간 안의 두 기능이 어떻게 하나를 이루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해와 의지는 구별되지만 하나로 작동할 때 ‘결혼’이라 불립니다. 그리고 이 결혼의 언어는 인간 개인 안에서 끝나지 않고 교회를 ‘딸’, ‘처녀’, ‘아내’라고 부르는 말씀의 표현으로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결합의 시선은 더 깊이 들어가면 천적인 것으로, 마침내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모든것’이셨던 주님께 향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And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created he him;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창1:27)
AC.53
여기서‘형상’(image)이두번언급되는이유는,이해에속한신앙을‘자기형상’(hisimage)이라하며,의지에속한사랑을‘하나님의형상’(imageofGod)이라하기때문입니다.이사랑은영적인간에게서는뒤따르지만,천적인간에게서는앞서나옵니다. The reason why “image” is here twice mentioned is that faith, which belongs to the understanding, is called “hisimage”; whereas love, which belongs to the will, and which in the spiritual man comes after, but in the celestial man precedes, is called the “imageofGod.”
해설
AC.53은 매우 짧습니다. 그러나 바로 앞 AC.51-52에서 설명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 신앙과 사랑, 이해와 의지의 관계를 창1:27의 문장 자체와 연결하는 중요한 글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번에 주목하는 것은 ‘형상’이라는 말이 한 절 안에서 왜 두 번 반복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창1:27은 ‘하나님이자기형상곧하나님의형상대로사람을창조하시되’라고 합니다. 영어로도 ‘AndGodcreatedmaninHisownimage,intheimageofGodcreatedHehim’이라고 하여 image가 두 번 나옵니다. 우리는 이것을 같은 뜻을 강조하기 위한 단순한 반복으로 읽기 쉽지만, 스베덴보리는 두 번의 ‘형상’을 서로 구별하여 읽습니다.
첫 번째 ‘형상’, 곧 ‘자기형상’(His image)은 ‘이해에속한신앙’을 가리키고, 두 번째 ‘하나님의형상’(image of God)은 ‘의지에속한사랑’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이것이 AC.53이 직접 말하는 중심입니다.
여기서 먼저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이 ‘자기형상’이라는 우리말 표현입니다. 한국어만 보면 ‘자기’가 사람 자신을 가리키는 것처럼 읽힐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형상은아직사람이자기이해와판단을중심으로살아가는상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영어 원문은 ‘Hisimage’이며 여기서 His는 사람(man)이 아니라 하나님(God)을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이사람을그분자신의형상으로창조하셨다’는 문장입니다. 따라서 첫 번째 ‘자기형상’을 인간의 자기중심성이나 proprium과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왜 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리키는 표현 안에서 스베덴보리는 첫 번째를 신앙, 두 번째를 사랑과 연결할까요? 바로 앞 AC.51-52의 설명이 배경이 됩니다. AC.51에서는 영적 인간을 ‘형상’, 천적 인간을 ‘모양’이라고 구별했고, AC.52에서는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이 먼저이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라고 설명했습니다. AC.53은 그 구별을 창1:27의 두 번 반복되는 ‘형상’에 적용합니다.
첫 번째는 ‘이해에속한신앙’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계속 보아 온 영적 인간의 질서와 관계됩니다. AC.52에서 영적 인간을 나타내는 창1:26의 순서에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하는 물고기와 새가 먼저 나오고, 의지와 애정에 관계되는 짐승이 뒤에 나왔습니다. 이제 AC.53도 같은 질서를 이어서, 이해에 속한 신앙을 첫 번째 ‘형상’과 연결합니다.
두 번째는 ‘의지에속한사랑’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 사랑이 ‘영적인간에게서는뒤따르지만,천적인간에게서는앞선다’고 합니다. 이 한 문장은 AC.52의 설명을 거의 압축해서 다시 말한 것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이 먼저이고 사랑이 뒤따르며,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앞섭니다.
여기서 ‘뒤따른다’와 ‘앞선다’는 표현을 정확하게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영적 인간에게 사랑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AC.48에서 이미 영적 인간은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영적 인간을 ‘신앙만있는사람’, 천적 인간을 ‘사랑만있는사람’으로 나누어서는 안 됩니다. 둘의 차이는 신앙과 사랑 가운데 하나가 있고 하나가 없다는 데 있지 않고 그 둘의 질서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간단하게 ‘영적인간=신앙→사랑’, ‘천적인간=사랑→신앙’이라고 적으면 어느 정도 기억에는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스베덴보리의 완전한 정의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AC.53이 직접 말하는 것은 ‘사랑이영적인간에게서는뒤따르고천적인간에게서는앞선다’는 것입니다. 신앙과 사랑의 관계 전체는 이후 AC에서 더욱 세밀하게 설명됩니다.
현재 해설에서는 첫 번째 ‘자기형상’을 ‘아직중심이사람쪽에있는상태’, 두 번째 ‘하나님의형상’을 ‘중심이하나님쪽으로옮겨진상태’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AC.53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첫 번째의 ‘자기’ 역시 하나님을 가리키므로, ‘자기형상→하나님의형상’을 ‘인간중심→하나님중심’의 변화로 읽는 것은 본문의 문법과도 맞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두 번의 ‘형상’을 ‘하나의형상이미완성에서완성으로발전하는두단계’라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AC.53은 ‘형상이둘인가하나인가’를 논하려는 글이 아니라, 두 번 반복된 표현이 각각 이해에 속한 신앙과 의지에 속한 사랑을 가리킨다고 설명하는 글입니다. 따라서 이 짧은 문장에서 ‘형상의완성’이라는 별도의 교리를 만들어 내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제시한 구별을 따라가는 편이 좋습니다.
그렇다고 신앙과 사랑이 서로 무관하게 떨어져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바로 앞 AC.48에서 영적 인간은 신앙과 사랑으로 함께 행동하는 사람으로 설명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AC.54에서는 ‘남자와여자’를 이해와 의지의 결합, 곧 일종의 결혼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AC.53은 신앙과 사랑을 둘로 갈라놓기 위한 글이라기보다, 서로 결합될 두 요소의 질서를 구별하여 보여 주는 글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이 점에서 AC.53은 다음 글로 넘어가는 매우 자연스러운 다리이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이해에 속한 신앙과 의지에 속한 사랑을 구별합니다. 이어지는 AC.54에서는 창1:27의 ‘남자와여자’를 통해 이해와 의지의 결합을 설명합니다. 즉 먼저 둘을 구별하고, 이어 그 둘이 어떻게 하나를 이루는지를 보여 주는 흐름입니다.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사랑이신앙보다더중요하다는뜻인가?’ AC.53만으로 두 가지를 경쟁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어느 하나를 버리고 다른 하나를 택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질서와 결합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먼저이고 사랑이 뒤따르며,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앞섭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 중요합니다.
또 ‘천적인간은사랑이앞서므로진리를배우거나신앙이필요없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앞의 AC.52에서도 천적 인간을 나타내는 순서에서 짐승 뒤에 새와 물고기가 계속 존재했습니다. 사랑이 앞선다는 것은 이해와 신앙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그 질서가 다르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영적 인간에게 신앙이 먼저라고 해서 그의 신앙이 단순한 지식이나 지적 동의라는 뜻도 아닙니다. AC.48에서 이미 그가 신앙과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하는 살아 있는 영적 인간임을 보았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신앙’은 거듭남과 분리된 죽은 지식이 아니라 이해에 속하면서 사랑과 결합되어 가는 신앙입니다.
AC.53은 이런 점에서 앞의 여러 글을 단 한 문장에 압축합니다.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이라는 구별이 창1:27의 두 번 반복되는 ‘형상’ 안에 담겨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첫 번째 ‘형상’은 이해에 속한 신앙과, 두 번째 ‘하나님의형상’은 의지에 속한 사랑과 관계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영적 인간에게서는 뒤따르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앞섭니다.
따라서 이번 글의 핵심을 ‘자기형상에서하나님의형상으로발전한다’거나 ‘신앙중심에서사랑중심으로이동하면서형상이완성된다’고 정리하기보다, 원문 그대로 기억하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이해에속한신앙’과 ‘의지에속한사랑’이 있으며, 두 번의 ‘형상’은 이 둘과 관계됩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먼저이고 사랑이 뒤따르며,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앞섭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AC.54에서 이 두 요소는 ‘남자와여자’라는 표현을 통해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AC.53은 어떤 완성의 종착점이라기보다,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이 어떻게 구별되고 다시 결합되는지를 보여 주는 다음 아르카나로 들어가는 짧고 중요한 연결점입니다.
AC를 처음 읽는 독자에게‘영적인간’이라는 표현은 비교적 익숙하지만‘천적인간’이라는 말은 상당히 낯설 수 있습니다.일상적인 한국어에서‘천적’이라고 하면 흔히‘서로잡아먹는관계의천적(天敵)’을 먼저 떠올리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스베덴보리 번역에서 사용하는‘천적’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영어celestial을 옮긴 말로, ‘하늘의’, ‘천국적인’,더 정확하게는 스베덴보리가 구별하는 천적 차원에 속한 성질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celestial과spiritual을 매우 자주 구별합니다.우리말로는 각각‘천적’과‘영적’이라고 옮깁니다.둘 다 자연적·세속적인 것과 대비되는 넓은 의미에서는 영적인 것에 속하지만,스베덴보리의 전문적인 용법에서는 서로 같은 말이 아닙니다. ‘천적’은 특히 사랑과 선,의지에 속한 것과 깊이 관계되고, ‘영적’은 신앙과 진리,이해에 속한 것과 깊이 관계됩니다.
AC.52는 이 차이를 매우 간결하게 보여 줍니다.영적 인간을 설명할 때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물고기’와‘새’가 먼저 언급되고 그다음에‘짐승’이 나옵니다.반면 천적 인간을 설명하는 시8에서는‘짐승’이 먼저 나오고 그다음에‘새’와‘물고기’가 나옵니다.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천적 인간이‘의지에속한사랑에서출발하기때문’이라고 직접 밝힙니다.
따라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이해하는 첫 번째 열쇠는‘어느쪽에는사랑이있고어느쪽에는사랑이없다’가 아니라‘무엇이먼저인가’입니다.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이 먼저 나타나고,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 나타납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영적 인간을‘머리로만믿는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바로 앞AC.48에서 스베덴보리는 여섯째 상태의 영적 인간이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한다고 말했습니다.따라서 영적 인간에게 사랑이나 선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그는 이미 거듭난 인간이며AC.48에서는‘하나님의형상’이라고 불립니다.
마찬가지로 천적 인간을‘생각이나진리가필요없는사람’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AC.52에서 천적 인간을 나타내는 순서에도 새와 물고기는 여전히 존재합니다.다만 짐승이 먼저입니다.이것은 이해와 진리가 없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이고 이해에 속한 것들이 그 뒤에 놓이는 질서를 보여 줍니다.
이 차이는 앞의AC.51에서도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었습니다.영적 인간은 주님의‘형상’이고 천적 인간은 주님의‘모양’,곧 닮음이라고 했습니다.또 영적 인간은‘빛의아들’과‘친구’라고 불리고,천적 인간은‘하나님의자녀’라고 불린다고 했습니다.그러나 이 호칭들을 곧바로 높고 낮은 신분표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그것들은 두 상태의 성질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천적 인간의 특징은 무엇일까요?AC.52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그는‘사랑으로선을행하며’, ‘의지에속한사랑에서출발한다’는 것입니다.그리고 그 때문에 그의 다스림은 속 사람에서 겉 사람을 향합니다.이것은 영적 인간의 다스림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을 향한다는 것과 대비됩니다.
이 대목을 쉽게 설명하려고‘영적인간은옳기때문에선을행하고천적인간은좋아서선을행한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어느 정도 방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은 됩니다.그러나 이것을 스베덴보리의 정확한 정의로 굳히면 곤란합니다.영적 인간 역시 사랑으로 행동하며,천적 인간 역시 진리와 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두 인간의 차이는 단순히‘의무대자발성’보다 더 깊은 내적 질서의 차이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이후 설명까지 넓혀 보면 이 차이는 더욱 분명해집니다.천적 인간에게는 선과 사랑에서 진리를 지각하는‘퍼셉션’이 중요한 특징으로 나타나고,영적 인간에게는 진리를 배우고 그것에 따라 형성되는‘양심’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그래서 태고교회를 설명할 때는 천적 인간과 퍼셉션이 특별히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천적인간은생각하지않고직감으로안다’고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퍼셉션은 단순한 감이나 느낌이 아닙니다.또한 양심이 퍼셉션보다 가치가 낮은 가짜 영적 기능이라는 뜻도 아닙니다.스베덴보리는 서로 다른 인간 상태에서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시는 서로 다른 질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천적’이라는 말 자체도 여기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이것은 한국어의‘천적’(天敵)이 아니라celestial을 번역한 전문 용어입니다.스베덴보리에게 천국 자체에도 천적 왕국과 영적 왕국의 구별이 있으며,천적 천사와 영적 천사의 차이가 있습니다.따라서‘천적’은 단순히‘아주영적인’, ‘영적보다한단계높은’이라는 정도 표현이 아니라 독특한 성질을 가진 범주입니다.
이 때문에‘영적인간이계속성장하면모두천적인간이되는가?’라는 질문에도 조심해서 답해야 합니다.창세기1장에서2장으로 이어지는 현재의 설명에서는 영적 인간 다음에 천적 인간이 등장하므로 하나의 더 깊어지는 흐름이 분명히 있습니다.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전체 저술에서는 영적 천국과 천적 천국,영적 천사와 천적 천사가 지속적으로 구별됩니다.그러므로 모든 사람을‘영적단계졸업후천적단계로승급한다’는 하나의 직선 과정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두 상태를 완전히 관계없는 두 종류의 인간으로 떼어 놓는 것도 현재 창세기 해설의 흐름을 놓칠 수 있습니다.창1의 거듭남에서 창2의 더 내적인 상태로 이어지는 진행이 있기 때문입니다.따라서 지금 단계에서는‘둘은분명히구별되지만,그관계의모든세부를하나의간단한단계표로만들지않는다’는 태도가 가장 안전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어느 상태든 생명의 근원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AC.49-50에서 반복해서 본 것처럼 선과 진리와 생명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영적 인간이 이해와 신앙에서 출발한다고 해서 자기 지성으로 거듭나는 것도 아니며,천적 인간이 사랑에서 출발한다고 해서 자기 사랑에서 선을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닙니다.두 경우 모두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서로 다른 질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AC에서‘영적’과‘천적’을 만나면 단순히‘낮은단계와높은단계’라고 번역해 읽기보다 먼저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살펴보면 좋습니다.대체로‘영적’은 진리·신앙·이해와, ‘천적’은 선·사랑·의지와 특별히 연결됩니다.그러나 이것 역시 기계적인 일대일 사전처럼 적용해서는 안 되고 각 문맥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AC.52에서 가장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이 먼저이고,그의 다스림은 겉 사람에서 속 사람을 향합니다.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이고,그의 다스림은 속 사람에서 겉 사람을 향합니다.둘 다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거듭난 인간이지만,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질서를 이루는 방식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천적’이라는 낯선 용어는 바로 그 차이를 보존하기 위해 필요한 말입니다.앞으로 태고교회,퍼셉션,창세기2장,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을 읽어 갈수록 이 구별은 점점 더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1:26)
AC.52
사람이영적일동안에는,그의다스림이겉사람에서속사람을향해이루어집니다.그래서여기서이렇게말하는것입니다.‘그들로바다의물고기와하늘의새와가축과온땅과땅에기는모든것을다스리게하자’(Letthemhavedominionoverthefishofthesea, andoverthefowloftheheavens, andoverthebeast, andoveralltheearth, andovereverycreepingthingthatcreepethupontheearth)그러나사람이천적이되어사랑으로선을행하게되면,그의다스림은속사람에서겉사람을향해이루어집니다.주님이시편에서자신을,그리고그분의모양인천적인간을이렇게묘사하신것처럼말입니다. So long as man is spiritual, his dominion proceed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as is here said: “Letthemhavedominionoverthefishofthesea,andoverthefowloftheheavens,andoverthebeast,andoveralltheearth,andovereverycreepingthingthatcreepethupontheearth.”But when he becomes celestial, and does good from love, then his dominion proceeds from the internal man to the external, as the Lord, in David, describes himself, and thereby also the celestial man, who is his likeness:
그러므로여기에서는먼저‘짐승’(beasts)이언급되고,그다음에‘새’(fowl),그리고그뒤에‘바다의물고기’(fishofthesea)가언급됩니다.이는천적인간이의지에속한사랑에서출발하기때문입니다.이점에서그는영적인간과다릅니다.영적인간을설명할때에는이해와신앙에속한‘물고기’(fishes)와‘새’(fowl)가먼저언급되고,그다음에‘짐승’(beasts)이언급됩니다. Here therefore “beasts” are first mentioned, and then “fowl,” and afterwards the “fishofthesea,” because the celestial man proceeds from love, which belongs to the will, differing herein from the spiritual man, in describing whom “fishes” and “fowl” are first named, which belong to the understanding, and this to faith; and afterwards mention is made of “beasts.”
해설
AC.52는 바로 앞 AC.51에서 제시한 ‘영적인간은형상이고,천적인간은모양이다’라는 구별을 한 단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이번에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다스림이어느방향으로이루어지는가’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겉 사람에서 속 사람을 향해 다스림이 이루어지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그 반대로 속 사람에서 겉 사람을 향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처음 읽으면 상당히 낯선 표현입니다. 우리는 보통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무조건 ‘겉에서속으로들어간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AC.52는 오히려 두 방향을 구별합니다. 사람이 영적일 동안에는 겉 사람에서 속 사람을 향하고, 사람이 천적이 되어 사랑으로 선을 행하게 되면 속 사람에서 겉 사람을 향합니다. 따라서 이 글에서 ‘겉→ 속’과 ‘속→ 겉’은 어느 하나가 무조건 옳고 다른 하나가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서로 다른 질서를 설명하는 표현입니다.
영적 인간에 대해서는 창1:26의 순서가 그 증거가 됩니다. ‘그들로바다의물고기와하늘의새와가축과온땅과땅에기는모든것을다스리게하자.’ 여기서는 물고기와 새가 먼저 언급되고 짐승이 뒤에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순서를 중요하게 봅니다. 물고기와 새는 이해에 속하며, 따라서 신앙과 관계되고, 짐승은 의지에 속한 것과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들이 먼저 언급되는 순서는 영적 인간의 질서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앞의 AC.40과 AC.44이후의 설명을 기억하면 이해하기가 조금 쉬워집니다. 물고기와 새는 기억 지식 및 이성적·지적인 것들과 관계되었고, 짐승들은 의지와 애정에 속한 것들과 관계되었습니다. 이제 AC.52에서는 그 각각의 상응을 다시 설명하는 데 머물지 않고, 왜 그것들이 그 순서로 배열되어 있는지를 봅니다. 즉 말씀의 피조물 목록 자체가 영적 인간의 내적 질서를 표현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적 인간을 설명할 때는 순서가 반대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시8:6-8을 인용합니다. 거기서는 ‘모든소와양과들짐승’, 그다음에 ‘공중의새’, 마지막에 ‘바다의물고기’가 나옵니다. 창1:26에서는 물고기와 새가 짐승보다 먼저였는데, 시8에서는 짐승이 먼저이고 새와 물고기가 뒤따릅니다. AC.52가 이 시편을 인용하는 핵심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직접 설명합니다. 천적 인간은 ‘의지에속한사랑에서출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지와 애정에 관계되는 짐승들이 먼저 언급되고, 그 뒤에 새와 물고기가 나옵니다. 반면 영적 인간을 설명할 때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물고기와 새가 먼저 나오고 짐승이 뒤에 나옵니다. 이처럼 두 성경 구절의 배열 차이를 통해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질서 차이를 읽어 냅니다.
여기서 ‘천적인간은사랑에서출발한다’는 말을 ‘천적인간은진리를생각하거나이해할필요가없다’는 뜻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AC.52가 말하는 것은 이해가 없어지거나 진리가 필요 없어지는 상태가 아니라 무엇이 출발점이 되는가 하는 질서의 차이입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도 새와 물고기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짐승이 먼저 언급되고 그 뒤에 새와 물고기가 옵니다. 따라서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라는 것이지 이해에 속한 것들이 제거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반대로 영적 인간을 ‘사랑없이머리로만신앙생활하는사람’이라고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바로 앞 AC.48에서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이 이미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한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를 ‘한쪽은이성만있고다른쪽은사랑만있다’는 식으로 나눌 수 없습니다. AC.52의 구별은 훨씬 섬세합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이 먼저이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입니다.
이 점은 기존 해설에서처럼 ‘영적인간은옳기때문에하고,천적인간은좋아서자연스럽게한다’는 예로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두 인간의 정확한 정의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영적 인간도 사랑으로 선을 행할 수 있으며, 천적 인간이라고 해서 모든 선택에서 아무런 분별도 필요 없이 자동적으로 선을 행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AC.52가 직접 말하는 것은 ‘어디에서출발하는가’와 ‘다스림의방향’입니다.
그렇다면 ‘다스림’은 무엇을 뜻할까요? 창1:26에는 사람이 물고기와 새와 짐승과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게하자’고 되어 있습니다. AC.52는 이것을 자연계 동물에 대한 인간의 통치 문제로만 읽지 않고, 지금까지 물고기·새·짐승이 나타내 온 인간 안의 것들과 연결하여 읽습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다스림은 거듭난 사람 안에서 이해와 의지에 속한 것들이 어떤 질서 아래 놓이는가 하는 문제와 관계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스림=강압이아니라질서’라고 한 문장으로 정의한 뒤, 시8의 ‘발아래’를 감각·습관·기억·행동까지 모두 통제되는 상태라고 세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AC.52는 ‘발’의 상응이나 ‘발아래둔다’의 세부 속뜻을 해설하지 않습니다. 이 시편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주목하는 것은 ‘짐승→ 새→ 물고기’라는 순서입니다. 따라서 인용 구절은 그 목적에 맞게 읽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서 앞의 AC.47과 흥미로운 연결도 생깁니다. AC.47에서도 스베덴보리는 창1:24와 25에서 생물들이 언급되는 순서가 달라진 것을 그냥 문체상의 변화로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거기서는 그 순서 변화가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속 사람으로 진행되는 것과 관계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52에서도 다시 단어의 ‘배열’이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질서를 드러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속뜻은 단어 하나하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문맥 속 배열과 순서에도 관계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다만 여기서 ‘성경의모든단어순서는각각반드시별도의상응을가진다’고 일반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AC.52에서 창1:26과 시8:6-8의 서로 다른 배열을 의도적으로 비교하고, 그것을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로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AC.51과 함께 읽으면 이 차이는 더 중요해집니다. 앞에서는 영적 인간을 ‘형상’, 천적 인간을 ‘모양’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52는 그 차이의 한 측면을 보여 줍니다. 영적 인간의 다스림은 겉 사람에서 속 사람을 향하고, 천적 인간의 다스림은 속 사람에서 겉 사람을 향합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들이 먼저 나타나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 나타납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곧바로 ‘모든개인은먼저영적인간이되었다가반드시천적인간으로바뀐다’는 일직선 단계표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바로 앞 AC.51에서도 보았듯이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분명히 구별하며, 이후 AC에서도 이 구별은 계속 중요하게 유지됩니다. 창세기 1장에서 2장으로 이어지는 현재의 서술에는 더 내적인 상태로 나아가는 흐름이 있지만, 그것과 모든 사람의 영적 유형을 하나의 승급 과정으로 보는 것은 같은 문제가 아닙니다.
AC.52가 천적 인간에 대해 특별히 덧붙이는 표현은 ‘사랑으로선을행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천적 인간의 출발점은 의지에 속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다스림이 속 사람에서 겉 사람을 향하고, 그에 따라 말씀의 배열에서도 애정과 의지에 관계되는 짐승들이 먼저 나옵니다. 뒤이어 이해에 관계되는 새와 물고기가 놓입니다.
그러므로 이 글의 핵심을 단순히 ‘이해에서사랑으로발전한다’고만 정리하는 것보다, 두 질서의 방향을 함께 기억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이 먼저이며 다스림은 겉 사람에서 속 사람을 향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이며 다스림은 속 사람에서 겉 사람을 향합니다. 창1:26과 시8:6-8의 피조물 순서가 바로 그 차이를 보여 줍니다.
AC.52는 그래서 아주 짧지만 중요한 글입니다. ‘물고기,새,짐승’이라는 익숙한 상응을 다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서를 바꾸어 놓았을 때 인간의 내적 질서까지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바로 이 차이가 앞의 ‘형상’과 ‘모양’,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구별을 한 단계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합니다.
AC.51의 첫 문장은 간단해 보이면서도 상당히 어렵습니다. ‘형상은모양자체가아니라모양에따른것이다.’그리고 곧이어‘영적인간은형상이고,천적인간은모양,곧닮음이다’라고 합니다.그러면 자연스럽게 묻게 됩니다. ‘형상과모양이도대체어떻게다른것인가?형상은조금닮은것이고모양은완전히닮은것이라는뜻인가?’
먼저AC.51이 직접 말하는 범위를 분명히 하는 것이 좋습니다.이 글은‘형상’과‘모양’이 같지 않다고 분명히 구별합니다.영적 인간을 형상,천적 인간을 모양이라고 하고,창세기1장은 영적 인간을,창세기2장은 천적 인간을 다룬다고 합니다.따라서 두 말이 단순히 같은 뜻을 강조하기 위해 반복된 것이라고 보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해석과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형상은70퍼센트닮은상태이고모양은100퍼센트닮은상태’처럼 정도의 차이로만 이해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는 단순한 성숙도의 숫자 차이보다 더 깊습니다.AC가 앞으로 진행되면서 그는 두 인간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방식,신앙과 사랑의 관계,양심과 퍼셉션 등의 차이를 점차 설명합니다.
AC.51에서 가장 먼저 주어진 단서는‘형상은모양자체가아니라모양에따른것’이라는 표현입니다.즉 형상에는 분명 원형을 따르고 닮는 관계가 있지만,그것이 곧 모양 자체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그리고 그 차이를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에 대응시킵니다.
이것을 앞의AC.48과 연결하면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여섯째 상태에 이른 영적 인간은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하며‘하나님의형상’이라고 불립니다.따라서‘형상’은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나 단순히 진리를 머리로만 아는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이미 살아 있는 영적 인간입니다.
그러므로‘형상은아직미완성이고모양만완성이다’라고 단순화하면 문제가 생깁니다.영적 인간도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살아가는 참된 거듭남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형상’이라는 말 자체를 결함이나 실패의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천적 인간을‘모양’이라고 한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같아진다는 뜻도 아닙니다. ‘닮음’은‘동일함’이 아닙니다.인간은 아무리 높은 천적 상태에 있어도 생명의 근원이 되지 않습니다.AC.39이후 반복해서 본 것처럼 모든 선과 진리와 생명의 근원은 주님입니다.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따라서‘모양’역시 피조물이 창조주와 본질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핵심적인 차이는 무엇일까요?이 질문에 대해서는AC.51보다 뒤의 설명들이 더 많은 빛을 줍니다.스베덴보리는 계속해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구별하며,영적 인간은 진리와 신앙을 통해 선으로 인도되고,천적 인간은 사랑과 선에서 진리를 지각하는 성질을 가진 것으로 설명합니다.특히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를 설명할 때‘퍼셉션’이라는 개념이 매우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설명을‘영적인간은머리로살고천적인간은가슴으로산다’는 식으로 단순화해서도 안 됩니다.앞의AC.48에서 이미 영적 인간도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행동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영적 인간에게 사랑이 없고 천적 인간에게만 사랑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차이는 사랑의 유무보다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어떤 질서와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고 결합되는가에 더 깊이 관계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면영적인간이계속거듭나면결국천적인간이되는가?’현재AC.51만으로 그렇게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이 글은 창세기1장의 영적 인간과 창세기2장의 천적 인간을 구별하지만,모든 개인의 거듭남을‘영적단계졸업후천적단계진입’이라는 하나의 직선 과정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의 이후 저술에서는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천적 천사와 영적 천사가 서로 구별되어 지속적으로 설명됩니다.따라서‘영적’과‘천적’을 단순한 초급과 고급의 관계로만 생각하면 그의 전체 체계를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한편 창세기1장과2장의 연속된 설명 안에서는 분명 더 내적인 상태가 이어지는 흐름도 있습니다.이 두 측면을 모두 고려해야 하므로AC.51한 문장만으로‘모든영적인간은결국천적인간이된다’거나 그 반대를 확정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그렇다면 왜AC.51은 영적 인간을‘빛의아들’과‘친구’,천적 인간을‘하나님의자녀’라고 부를까요?이 호칭들은 두 상태의 차이를 보여 주는 성경적 증거로 제시됩니다.그러나 이것들을 곧바로‘친구보다자녀가한단계높은신분’이라는 인간관계의 서열로 바꾸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AC.51의 직접적인 목적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에게 서로 다른 호칭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특히‘빛의아들’이라는 표현에는 영적 인간과 진리의 빛 사이의 관계가 드러납니다.반면‘하나님의자녀’에 관해 인용된 요1:13은‘오직하나님께로부터난자들’이라고 말합니다.이것들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성질을 이해하는 단서가 될 수 있지만,AC.51은 이 한 글에서 그 차이를 모두 체계화하지 않습니다.따라서 앞으로의 설명을 기다리면서 이 구별을 열어 두는 것이 좋습니다.
이 점에서‘형상’과‘모양’을 가장 안전하게 이해하는 방법은 이렇습니다.둘 다 주님을 닮는 인간의 영적 상태를 가리키지만 동일한 상태는 아닙니다. ‘형상’은 영적 인간에게, ‘모양’은 천적 인간에게 해당하며,스베덴보리는 후자를 전자와 구별되는 더 내적인 성질로 설명합니다.그러나 그 차이를 단순히‘미완성대완성’, ‘낮은단계대높은단계’, ‘친구대아들’이라는 하나의 서열표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AC를 계속 읽으면서 이 차이는 점점 더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입니다.특히 창세기2장의 천적 인간,태고교회의 퍼셉션,그리고 이후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의지와 이해의 질서를 살펴보면AC.51의 짧은 구별이 왜 중요한지 더 분명해집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이렇게 기억하면 충분합니다. ‘영적인간은주님의형상이며,천적인간은주님의모양이다.형상은모양자체는아니지만모양을따른다.둘은모두주님에게서생명을받는거듭난인간의상태이지만,스베덴보리는그둘의내적성질을분명히구별한다.’이것이AC.51이 앞으로의 긴 설명을 위해 놓아 두는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1:26)
AC.51
‘형상’(image)에대해말하자면,형상은닮음(likeness)그자체가아니라닮음에따른것입니다.그래서‘우리의형상을따라우리의모양대로우리가사람을만들자’(Letusmakemaninourimage, afterourlikeness)라고말합니다.영적인간은‘형상’(image)이고,천적인간은‘모양’(likeness),곧닮음(similitude)입니다.이장에서는영적인간을,다음장에서는천적인간을다룹니다.‘형상’(image)인영적인간을주님은‘빛의아들’(sonoflight)이라하십니다.요한복음입니다. As regards the “image,” an image is not a likeness, but is according to the likeness; it is therefore said, “Letusmakemaninourimage,afterourlikeness.”The spiritual man is an “image,” and the celestial man a “likeness,” or similitude.In this chapter the spiritual man is treated of; in the following, the celestial.The spiritual man, who is an “image,” is called by the Lord a “sonoflight,” as in John:
주4, 헬라어는ἐξαἱμάτων입니다. 아래AC.374 [3]번단락을보세요. [편집자] The Greek is ex haimat¯on. See below, at n. 374[3]. [Reviser]
해설
AC.51은 창1:26의 ‘우리의형상을따라우리의모양대로’라는 표현에서 ‘형상’과 ‘모양’을 구별합니다. 일반적으로는 두 말을 거의 같은 뜻의 반복처럼 읽기 쉽지만, 스베덴보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첫 문장에서부터 ‘형상은모양자체가아니라모양에따른것’이라고 말하고, 곧바로 영적 인간은 ‘형상’, 천적 인간은 ‘모양’, 곧 닮음이라고 구별합니다.
처음 읽으면 ‘형상이모양자체는아니지만모양을따른다’는 말이 상당히 난해합니다. 여기서 너무 빨리 ‘형상은닮아가는과정이고모양은완성된상태’라는 식으로 공식을 만들어 버리기보다, 우선 AC.51이 직접 제시하는 구별을 그대로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영적 인간은 주님의 ‘형상’이고, 천적 인간은 주님의 ‘모양’입니다. 형상은 모양과 동일하지 않지만 모양을 따릅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창세기 1장과 2장의 주제 차이와도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장’, 곧 창세기 1장에서는 영적 인간을 다루고, ‘다음장’, 곧 창세기 2장에서는 천적 인간을 다룬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앞으로 창1과 창2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한 안내입니다. 창세기 2장을 단순히 창세기 1장의 자연계 창조 이야기를 다른 순서로 다시 기록한 것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AC의 속뜻에서는 서로 다른 인간 상태를 다루는 것으로 읽는다는 뜻입니다.
바로 앞 AC.48에서는 여섯째 상태의 사람이 ‘영적인간’이며 ‘하나님의형상’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AC.51의 ‘영적인간은형상이다’라는 말은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주장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을 따라 설명해 온 거듭남이 영적 인간, 곧 ‘형상’에 이르는 데까지 온 것입니다. 반면 ‘모양’인 천적 인간은 다음 장에서 다루겠다고 미리 알려 줍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영적인간은미완성단계이고천적인간은완성단계다’, 또는 ‘모든영적인간은계속거듭나면반드시천적인간으로승급한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51은 그런 체계를 여기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앞으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를 더 자세히 설명할 것이므로, 지금은 그가 제시하는 ‘형상’과 ‘모양’의 구별을 먼저 받아들이는 편이 안전합니다.
이어서 AC.51은 매우 흥미롭게도 이 두 인간을 복음서의 서로 다른 호칭과 연결합니다. 먼저 ‘형상’인 영적 인간은 주님께서 ‘빛의아들’이라고 부르신다고 하면서 요12:35-36을 인용합니다. ‘빛이있을동안에빛을믿으라그리하면빛의아들이되리라.’ 이 인용의 직접적인 목적은 요한복음의 ‘빛’과 ‘어둠’에 관한 모든 상응을 자세히 해설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영적 인간이 ‘빛의아들’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 이 말씀을 인용합니다.
앞의 창조 과정과 연결하면 이 표현이 낯설지 않습니다. 창세기 1장의 거듭남에서 빛과 광명체는 이미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AC.51은 여기서 ‘빛의아들’이라는 말을 근거로 영적 인간의 모든 심리적 특성을 상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빛의아들은아직의식적으로선택하고분별해야하는단계다’, ‘빛이주어질때따르지않으면반드시사라진다’는 등의 구체적인 영적 법칙을 이 인용에서 만들어 낼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형상인영적인간을주님께서빛의아들이라부르신다’는 연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을 또한 ‘친구’라고 한다면서 요15:14-15을 인용합니다. ‘너희는내가명하는대로행하면곧나의친구라.’ 이 말씀 역시 AC.51에서는 영적 인간을 ‘친구’라고 부를 수 있다는 근거로 사용됩니다. 물론 본문 자체에서 주님은 친구와 종을 구별하시고, 친구에게 아버지께 들은 것을 알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AC.51은 여기서 ‘종=외적순종,친구=내적일치’라는 완성된 상응 체계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친구이기때문에아직아들은아니며,주님의뜻을이해하지만완전히하나가되지는않은상태’라고 단계화하는 것도 조심하는 편이 좋습니다. AC.51은 영적 인간을 ‘빛의아들’과 ‘친구’라는 두 표현으로 가리키고, 이어 천적 인간을 다른 표현과 연결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 호칭들 사이의 모든 관계를 이 짧은 글에서 계급이나 단계처럼 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반면 ‘모양’, 곧 닮음인 천적 인간은 ‘하나님의자녀’라고 한다면서 요1:12-13을 인용합니다. ‘영접하는자곧그이름을믿는자들에게는하나님의자녀가되는권세를주셨으니...오직하나님께로부터난자들이니라.’ AC.51에서 이 구절을 가져오는 핵심은 분명합니다. 천적 인간이 ‘하나님의자녀’라고 불린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현재 해설처럼 ‘자녀란아버지의뜻이자기안에서자연스럽게살아있는존재이고,사랑의근원이완전히바뀐상태’라고 자세한 거듭남 메커니즘을 만들어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요1:13의 ‘하나님께로부터난자들’이라는 표현이 천적 인간과 연결된다는 사실 자체가 지금은 중요합니다. 그 상태의 내적 성질은 다음 창세기 2장과 이후 AC에서 훨씬 더 자세히 펼쳐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을 ‘형상’, 천적 인간을 ‘모양’이라고 구별하는 것일까요? AC.51의 첫 문장은 분명히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말하지만 그 차이를 여기서 충분히 해설하지는 않습니다. ‘형상은모양자체가아니라모양에따른것’이라는 짧은 표현만 줍니다. 그러므로 처음 읽는 독자가 ‘둘이도대체얼마나다른것인가?’, ‘형상은덜닮고모양은더많이닮았다는뜻인가?’, ‘영적인간이나중에천적인간이된다는뜻인가?’라고 궁금해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이 문제는 AC.51자체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하면서 이후의 영적·천적 구별을 계속 읽는 데도 필요하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형상’이라고 해서 가치 없는 불완전한 복제품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바로 앞 AC.48에서 스베덴보리는 여섯째 상태에 이른 영적 인간을 분명히 ‘하나님의형상’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하는 거듭난 사람입니다. 따라서 ‘형상’은 아직 영적 생명이 시작되지 않은 낮은 상태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모양’을 인간이 하나님과 동일해지는 상태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앞의 AC.49-50에서 모든 선과 진리와 생명의 근원이 주님 한 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주님의 형상이나 모양이 된다는 것은 인간이 신적인 존재가 되거나 주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해진다는 뜻일 수 없습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주님에게서 생명과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이 점에서 AC.51은 앞의 세 글과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AC.48에서는 영적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고, AC.49에서는 최고의 뜻에서 참 사람은 주님이시며 인간 안의 참된 사람됨도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에 있다고 했습니다. AC.50에서는 사람의 생명과 거듭남의 실제 주체 역시 주님 한 분임을 강조했습니다. 이제 AC.51은 그 주님의 ‘형상’과 ‘모양’ 사이에도 구별이 있음을 밝히면서, 창세기 1장의 영적 인간에서 창세기 2장의 천적 인간으로 시선을 옮길 준비를 합니다.
따라서 AC.51의 중심을 ‘형상에서모양으로올라가는거듭남의단계’라고 너무 빨리 정리하기보다는, 먼저 스베덴보리가 의도적으로 구별한 두 인간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영적 인간은 ‘형상’이며 ‘빛의아들’, ‘친구’라고 불립니다. 천적 인간은 ‘모양’, 곧 닮음이며 ‘하나님의자녀’라고 불립니다. 창세기 1장은 전자를, 창세기 2장은 후자를 다룹니다. 그리고 형상은 모양 자체는 아니지만 모양을 따릅니다. 이 짧은 구별이 앞으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를 이해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됩니다.
AC.50을 처음 읽으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문장 가운데 하나가‘사람마다적어도두영과두천사가함께있다’는 말입니다.그러면 자연스럽게 몇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두영은악한영을말하는가?’, ‘두천사는우리가흔히말하는수호천사인가?’, ‘거듭난사람에게는악한영들이없어지는가?’,그리고 무엇보다‘왜하필둘씩인가?’
AC.50자체에서는 이 모든 질문을 상세히 풀어 주지 않습니다.그러나‘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뒤쪽으로 가면 스베덴보리가 같은 문제를 다시 다루며 훨씬 구체적인 설명을 합니다.따라서 이번 심화에서는AC.50이 직접 말하는 것과 뒤의AC에서 보충되는 내용을 구별하여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AC.50은‘모든사람에게적어도두영과두천사가있다’고 말합니다.그리고 영들을 통해 사람은 영들의 세계와 소통하며,천사들을 통해 천국과 소통한다고 합니다.이어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는‘악한영들이그와함께있다’고 하고,거듭난 상태에서는 천사들이 다스린다고 설명합니다.여기까지만 보아도AC.50의‘영들’은 천사들과 대비되어 영들의 세계와 사람을 연결하는 존재들이며,거듭나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는 영들은 악한 영들로 묘사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AC.5848-5849에서 훨씬 명시적으로 다시 등장합니다.스베덴보리는 사람에게 계속해서 천사들과 영들이 있으며, ‘천사들은천국에서,영들은지옥에서’온다고 말하고,모든 사람에게 두 영과 두 천사가 있다고 다시 설명합니다.그리고 두 영은 사람으로 하여금 지옥과 소통하게 하고,두 천사는 천국과 소통하게 한다고 합니다.따라서AC.50의‘두영’을 단순히 선악이 정해지지 않은 일반적인 영 둘이라고 이해하는 것보다는,뒤의 설명까지 함께 볼 때 지옥 쪽과의 소통을 담당하는 영들로 이해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다고‘사람옆에지옥에서올라온악한영둘과천국의천사둘이몸으로서서늘따라다닌다’는 식으로 자연계의 공간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스베덴보리가 말하는‘함께있음’은 영적 결합과 소통의 문제입니다.그가 실제 영계의 공간과 가까움에 관해 어떻게 설명하는지는 별도의 큰 주제이므로,AC.50의‘함께있다’를 자연계의 몇 미터 거리처럼 상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거듭난사람에게는악한영들이완전히없어지고천사들만남는가?’AC.50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2]에서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 악한 영들이 지배하고 천사들은 그 지배를 막는다고 하며, [3]에서는 사람이 거듭나면 천사들이 다스린다고 합니다.즉AC.50이 직접 대비하는 것은‘천사와악한영의존재여부’라기보다 어느 쪽의 작용이 지배적인가 하는 상태의 차이입니다.그러나 이 문장만으로‘거듭난뒤에도정확히같은영들이같은방식으로계속머문다’거나‘악한영들은일정거리밖으로물러난다’는 세부까지 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왜둘인가?’라는 질문으로 가 보겠습니다.이것은AC.50에는 답이 없지만,뒤의AC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설명합니다.AC.5977-5978에서는 인간에게 의지와 이해라는 두 기능이 있으며,천국에는 이에 대응하는 두 종류의 천사들이 있고 지옥에도 이에 반대되는 두 종류의 영들이 있기 때문에 둘이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천사 가운데 한 종류는 사람의 의지에 속한 것들에 작용하고,다른 종류는 이해에 속한 것들에 작용합니다.의지에 작용하는 천사들은 사람의 사랑과 목적,따라서 선에 속한 것들과 관계되고,이해에 작용하는 천사들은 신앙과 원리,따라서 진리에 속한 것들과 관계됩니다.그는 앞의 천사들을 천적 천사,뒤의 천사들을 영적 천사라고 부릅니다.
지옥 쪽에도 이에 반대되는 두 종류가 있다고 설명합니다.한 종류는 의지에 속한 것들에 작용하고,다른 종류는 이해에 속한 것들에 작용합니다.따라서‘두영과두천사’라는 숫자는 단순히 네 명이라는 기이한 숫자 정보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인간의 의지와 이해라는 두 기본 기능에 대응하는 영적 소통의 질서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조심해야 합니다.그렇다고 사람 안의 모든 생각 하나에는‘이해담당천사한명’,모든 애정 하나에는‘의지담당천사한명’이 기계적으로 붙어 있다고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스베덴보리가 밝히는 것은 인간의 두 기본 기능과 천국·지옥의 두 종류 사이의 상응 관계입니다.이것을 현대적인 조직도나 신경회로처럼 지나치게 세밀한 기계 구조로 바꾸면 오히려 그의 설명을 왜곡할 수 있습니다.
또‘두천사와두영이있으므로내마음속에서좋은생각하나와나쁜생각하나가항상동시에들려온다’는 식으로 단순화해서도 안 됩니다.AC.50과 뒤의 관련 글들은 인간이 천국과 지옥 양쪽과 소통한다는 큰 구조를 설명하지만,개별적인 생각과 느낌 하나하나를 우리가 어느 영의 직접 발언으로 판별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오히려 그런 식의 영적 존재 판별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이 점은 인간의 책임 문제에서도 중요합니다. ‘악한생각은악한영에게서왔으니내것이아니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악을 남에게 돌릴 수 없습니다.스베덴보리의 더 넓은 가르침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유입되는가만이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삼는가 하는 문제입니다.AC.50에서는 그 자유의 전체 메커니즘까지 설명하지 않으므로 여기서 더 자세히 들어갈 필요는 없지만,최소한‘영들이영향을주므로인간에게책임이없다’는 결론은 피해야 합니다.
그러면 두 천사와 두 영은 각각 독립적으로 자기 힘으로 사람을 움직이는 존재일까요?이것 역시AC.50이 단호하게 막습니다.천사들은‘사역자들’일 뿐이며 실제로 사람을 다스리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입니다.천사들도 자기들에게 어떤 능력도 없고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힘으로 일한다고 고백한다고 합니다.지옥 쪽의 영들이 작용하는 경우에도 인간의 존재와 생명 전체가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따라서AC.50의‘두영과두천사’를 읽는 중심은 신비한 호위 존재 넷에 대한 호기심이 아닙니다.인간이 스스로 고립되어 존재하는 생명이 아니라 천국과 지옥이라는 영적 세계와 연결되어 있고,인간의 의지와 이해라는 두 기능 역시 그 영적 질서 안에서 작용하며,그 모든 것 위에서 주님 한 분이 섭리 가운데 사람의 생명을 보존하고 거듭남을 이루신다는 것이 더 중요한 핵심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AC.50은 모든 사람에게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있다고 말하며,뒤의AC.5848-5849는 두 영을 지옥과의 소통,두 천사를 천국과의 소통과 연결합니다.그리고AC.5977-5978은 그들이 왜 둘씩인지에 대해 인간의 의지와 이해라는 두 기능에 각각 대응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그러므로‘두영과두천사’는 임의적인 숫자가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이해,그리고 천국과 지옥과의 영적 소통이라는 더 큰 질서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