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1

 

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부터 말하게 되고, 이로 인해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게 되는 상태입니다. 그때 그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은 생기를 갖게 되는데, 말씀에서는 이것들을 ‘바다의 물고기’(fish of the sea), ‘하늘의 새’(birds of the heavens)라고 합니다. The fifth state is when the man discourses from faith, and thereby confirms himself in truth and good: the things then produced by him are animate, and are called the “fish of the sea,” and the “birds of the heavens.”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state)를 설명하면서, 이전 단계들과는 또 다른 질적 전환이 일어났음을 분명히 합니다. 네 번째 상태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불붙기 시작했다면, 다섯 번째 상태에서는 그 신앙이 이제 ‘말과 사고의 직접적인 근원’이 됩니다. 즉, 사람은 더 이상 외적 규범이나 압박, 혹은 막연한 경건 감정에 의해 말하지 않고, 신앙 그 자체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신앙이 단순한 지식이나 교리가 아니라, 사고를 이끄는 살아 있는 원리가 되었음을 뜻하지요.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신앙으로 말한다’고 표현하는데, 이는 사람이 진리를 말할 때 그것이 외부에서 빌려 온 언어가 아니라, 내면에서 확신한 이해에서 흘러나온다는 의미입니다. 이로 인해 사람은 자신이 받아들인 진리와 선을 삶 속에서 점점 더 확증하게 되는데, 여기서 ‘확증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스스로를 설득한다는 뜻이 아니라, ‘삶의 경험 속에서 진리와 선이 참됨을 확인해 간다’는 의미입니다. 신앙은 이제 머릿속의 동의가 아니라, 살아 보면서 검증되는 삶의 기준이 됩니다. 그러니까 앉은뱅이 신앙이 아니라 걸어 다니는 신앙이 되는 것이지요.

 

이 단계에서 중요한 변화는, 사람이 산출하는 것들, 곧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이 ‘생기를 가진 것들’이 된다는 점입니다. 이전 단계들에서도 선한 행위와 진리의 말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아직 생명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다섯 번째 상태에 이르면, 주님의 생명이 신앙과 함께 작용, 그 말과 행위에 실제적인 영적 생명력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의 신앙은 이제 살아 있으며, 그가 말하는 진리와 행하는 선도 살아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생기 있는 산출물들을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들’이라는 상징으로 설명합니다. ‘바다’는 지식과 기억의 차원을 가리키며, 그 안의 ‘물고기’는 지식적 차원에서 살아 움직이는 진리들을 뜻합니다. 이는 사람이 신앙 안에서 지식들을 단순히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유기적으로 이해하고 활용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반면 ‘하늘의 새들’은 더 높은 차원의 이해, 곧 사고와 사유의 영역에서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진리들을 가리킵니다. 이는 신앙이 지식의 차원을 넘어, 통찰과 분별의 차원으로 확장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 두 상징은 다섯 번째 상태가 단지 지식이 늘어나는 단계가 아니라, ‘지식과 이해가 함께 살아 움직이는 단계’임을 분명히 합니다. 물고기와 새는 서로 다른 차원에 속하지만, 모두 생명을 지니고 있으며, 각각 바다와 하늘이라는 자기 영역 안에서 자유롭게 활동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단계의 사람은 외적 지식과 내적 이해를 모두 갖추고, 그것들을 신앙 안에서 질서 있게 사용합니다.

 

이 상태는 또한 신앙의 책임성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단계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고, 그로써 진리와 선을 확증하기 시작하면, 그는 더 이상 무지나 미숙함을 변명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신앙은 이제 삶을 이끄는 원리이므로, 말과 행동이 그것과 일치하지 않을 때 스스로 그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 점에서 다섯 번째 상태는 자유와 책임이 함께 커지는 단계입니다.

 

그러나 이 상태 역시 거듭남의 완성은 아닙니다. 신앙이 살아 있고, 진리와 선이 생기를 갖고 작용하고 있지만, 여전히 중심에는 신앙이 있으며, 사랑과 완전한 결합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다음 단계, 곧 여섯 번째 상태에서 신앙과 사랑이 동시에 작용하며 하나로 결합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다섯 번째 상태는 그 결합을 위한 성숙 단계로서, 신앙이 충분히 살아 있고 견고해져야만 사랑이 전면적으로 주도권을 잡을 수 있습니다.

 

결국 AC.11에서 말하는 다섯 번째 상태는 거듭남의 여정에서 ‘신앙이 실제 생명이 되는 단계’입니다. 사람은 이제 신앙으로 말하고, 그 신앙으로 살아가며, 그 안에서 진리와 선이 살아 움직입니다. 물고기와 새가 생명력을 가지고 각자의 영역을 채우듯, 이 단계의 신앙은 사람의 지식과 이해 전반을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듭니다. 이는 이후에 올 더 깊은 변화, 곧 신앙과 사랑의 완전한 결합을 위한 필수적 성숙 단계입니다.

 

 

 

AC.12, 창1 개요, '여섯 번째 상태'

AC.12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은 ‘산 영’(living soul)과 ‘짐승’(beast)이라 불

bygrace.kr

 

AC.10, 창1, '네 번째 상태' (AC.6-15)

AC.10 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의 빛을 받게 되는 상태입니다. 사람은 그 이전에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한 일들을 행하였지만, 그것은 그가 겪는 시험과 곤궁 때문에 그러한 것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0

 

네 번째 상태(state)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의 빛을 받는 때입니다. 그는 이전에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한 것들을 행했으나, 그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가 겪고 있던 시험과 곤경의 결과, 마음에도 없이 하는, 그러니까 별로 기쁘지도 않은데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그의 속 사람(internal man) 안에서 불붙게 되었으며, 이것들을 가리켜 두 광명체(luminaries)라고 합니다. The fourth state is when the man becomes affected with love, and illuminated by faith. He indeed previously discoursed piously, and brought forth goods, but he did so in consequence of the temptation and straitness under which he labored, and not from faith and charity; wherefore faith and charity are now enkindled in his internal man, and are called two “luminaries.”

 

 

해설

 

이 단락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네 번째 ‘상태(state)를 이전 단계들과 질적으로 구별되는 전환점으로 제시합니다. 세 번째 상태에서 사람은 회개하며 경건하게 말하고 선한 일을 행하기 시작했지만, 그 모든 것은 여전히 외적 압박과 내적 곤경 속에서 나온 반응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선을 행했으나 그것을 기뻐서 행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몰려 있었고, 그 결과로 경건과 선행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 선은 아직 자유롭고 자발적인 생명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네 번째 상태에 들어서면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제 사람은 단지 선을 ‘행해야 해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선 자체에 감동되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사랑에 감동된다’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감정적 흥분이나 종교적 열정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의 애정이 사람의 속 사람 안에서 실제로 작용하기 시작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동시에 그는 신앙의 ‘빛을 받는데’, 이는 진리가 더 이상 외부에서 들려오는 규범이 아니라, 내면에서 이해되고 인식되는 빛이 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이 변화의 핵심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이제 ‘불붙게 되었다’라는 표현에 있습니다. 이전 단계들에서도 신앙의 지식과 선한 행위는 존재했지만, 그것들은 마치 꺼져 있는 숯처럼 잠재된 상태였습니다. 네 번째 상태에서 주님의 역사로 그것들이 실제로 불이 붙어, 속 사람 안에서 생명력 있게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이 불붙음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주님이 정하신 때에 주시는 은혜이며, 이전의 모든 준비 단계가 이 시점을 위해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두 ‘광명체(luminaries)라고 합니다. 이는 창세기 1장에서 해와 달이 창조되는 장면과 직접 연결됩니다. 해는 사랑, 특히 체어리티를 상징하고, 달은 신앙을 상징합니다. 이 둘이 하늘에 놓여 낮과 밤을 다스리듯, 이 단계에서 신앙과 체어리티는 사람의 내적 삶을 다스리는 중심 원리가 됩니다. 이전에는 겉 사람의 욕망과 두려움이 삶을 이끌었다면, 이제는 속 사람 안에서 타오르는 사랑과 빛나는 신앙이 삶의 방향을 결정하기 시작합니다.

 

이 상태는 또한 선의 근원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하는 시점입니다. 사람은 점차 자신이 행하는 선과 이해하는 진리가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온 것임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이 깨달음은 아직 완전히 확립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이전처럼 선을 자기 공로로 붙잡지는 않게 됩니다. 이는 이후 다섯 번째 상태에서 신앙에서 말하고, 진리와 선을 더 깊이 확증할 수 있는 기초가 됩니다.

 

결국 AC.10에서 말하는 네 번째 상태는 거듭남의 과정에서 ‘내적 빛의 시대’가 열리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빛이 되고, 체어리티는 의무가 아니라 사랑이 됩니다. 이 상태가 없이는 이후의 모든 생기 있는 영적 활동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네 번째 상태는 거듭남의 여정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며, 주님이 인간의 속 사람 안에 실제로 거처를 마련하시기 시작하는 시점입니다.

 

 

 

AC.11, 창1, '다섯 번째 상태' (AC.6-15)

AC.11 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부터 말하게 되고, 이로 인해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게 되는 상태입니다. 그때 그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은 생기를 갖게 되는데, 말씀에서는

bygrace.kr

 

AC.9, 창1, '세 번째 상태' (AC.6-15)

AC.9 세 번째 상태는 회개(repentance)의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진지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행위 같은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이 선들을 자신에게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9

 

세 번째 상태(state)는 회개의 상태로서, 이때 사람은 속 사람(internal man)으로부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과,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들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여전히 생기가 없는데, 그가 그것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걸로 여기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선들을 (tender grass),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라 하고, 나중에는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라고 합니다. The third state is that of repentance, in which the man, from his internal man, speaks piously and devoutly, and brings forth goods, like works of charity, but which nevertheless are inanimate, because he thinks they are from himself. These goods are called the “tender grass,” and also the “herb yielding seed,” and afterwards the “tree bearing fruit.”

 

 

해설

 

이 단락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세 번째 ‘상태(state)를 ‘회개의 상태’로 규정하며, 인간의 내적 변화가 처음으로 의식적 삶의 형태를 띠기 시작하는 단계를 설명합니다. 앞선 두 상태에서 사람은 아직 수동적인 위치에 있었고, 주님의 자비가 어둠 위에서 운행하거나, 주님께 속한 것과 자기에게 고유한 것이 구별되기 시작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상태에 이르면, 사람은 비로소 자신의 삶과 말, 행동에서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며, 이것이 회개라는 이름으로 드러납니다.

 

이 회개는 겉 사람의 형식적 변화가 아니라, ‘속 사람(internal man)에서 비롯된 반응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이 단계에서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말하며, 신앙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이전과는 다른 삶의 태도를 보입니다. 또한 실제로 체어리티의 행위들과 같은 선한 일들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거듭남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진전이며, 신앙이 단지 생각이나 감정 차원에 머물지 않고 삶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단계의 선들을 ‘생기 없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여전히 그 선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선한 일을 하면서도 그것이 주님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결심, 자신의 경건, 자신의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로 인해 이 단계의 선은 참된 영적 생명을 갖지 못하며, 아직은 자연적 차원의 선에 머뭅니다. 이것은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는 평가가 아니라, 선의 근원에 대한 인식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의 선을 설명하기 위해 창세기 111절의 식물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먼저 ‘(tender grass)입니다. 이 풀은 막 돋아난 초기의 선을 가리키며, 매우 연약하고 쉽게 상할 수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는 회개 초기에 나타나는 선의 특징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다음으로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는 이 선 안에 진리의 씨앗이 들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즉, 비록 아직 생기는 없지만, 이후에 성장할 가능성과 번식의 능력을 이미 내포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마지막으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는 이 초기적 선이 장차 성숙하여 지속적이고 안정된 선으로 발전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비유는 회개의 상태가 단번에 완성되는 단계가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사람은 회개를 시작했다고 해서 곧바로 참된 영적 선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성장과 성숙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주님은 이 단계에서 나타나는 미숙한 선조차도 소중히 여기시며, 그것을 제거하지 않으시고 보호하시며 자라게 하십니다. 이는 주님의 자비가 인간의 불완전함을 고려하여 단계적으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또한 이 단락은 인간의 협력과 한계를 동시에 드러냅니다. 세 번째 상태에서 사람은 실제로 선을 행하며, 말과 행동에서 책임 있는 주체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아직 선의 근원을 오해하고 있으며, 이 오해가 바로 다음 상태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교정되어야 할 지점입니다. 이 때문에 이 상태는 매우 중요하면서도, 동시에 위험을 내포한 단계입니다. 사람이 이 선을 자기 의로 고착시키면 더 나아가지 못하지만, 주님의 인도에 따라 이 선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배우게 되면, 이후의 깊은 변화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결국 AC.9에서 말하는 회개의 상태는 거듭남의 여정에서 최초로 인간의 삶이 눈에 띄게 변하는 시점이지만, 아직은 시작에 불과한 단계입니다. 이 상태의 선은 생기가 없으나, 성장할 모든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연한 풀을 자라게 하시고, 씨를 맺게 하시며, 마침내 열매를 맺는 나무로 이끄시기 위해 다음 단계들을 준비하십니다. 그래서 세 번째 상태는 인간의 진지한 응답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단계이자, 주님의 더 깊은 역사가 이어지기 위한 중요한 발판이 됩니다.

 

 

 

AC.10, 창1, '네 번째 상태' (AC.6-15)

AC.10 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의 빛을 받게 되는 상태입니다. 사람은 그 이전에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한 일들을 행하였지만, 그것은 그가 겪는 시험과 곤궁 때문에 그러한 것

bygrace.kr

 

AC.8, 창1, '두 번째 상태' (AC.6-15)

AC.8 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 사이에 구별이 일어나는 상태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 불리는데, 여기서 리메인스란 특히 유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8

 

두 번째 상태(state)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구별되는 때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고 하는 건데, 여기서는 특별히 유아기부터 배워 온 신앙의 지식들을 뜻하며, 그것들은 저장되어 있다가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르기 전까지는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상태는 시험, 불행, 또는 슬픔 없이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이를 통해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곧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여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속 사람에 속한 것들로부터 분리됩니다. 속 사람 안에는 주님께서 이때까지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가 있으며, 바로 이 목적을 위해 보존되어 온 것입니다. The second state is when a distinction is made between those things which are of the Lord, and those which are proper to man. The things which are of the Lord are called in the word “remains,” and here are especially knowledges of faith, which have been learned from infancy, and which are stored up, and are not manifested until the man comes into this state. At the present day this state seldom exists without temptation, misfortune, or sorrow, by which the things of the body and the world, that is, such as are proper to man, are brought into quiescence, and as it were die. Thus the things which belong to the external man are separated from those which belong to the internal man. In the internal man are the remains, stored up by the Lord unto this time, and for this use.

 

 

해설

 

이 단락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state)를 첫 번째 상태와 분명히 구별합니다. 첫 상태가 전적으로 주님의 자비가 어둠 위에서 운행하는 준비 단계였다면, 두 번째 상태는 인간 안에서 ‘구별이 처음으로 일어나는 단계’입니다. 이 구별이란 선과 악의 윤리적 분별 이전에, 무엇이 주님께 속한 것이고 무엇이 사람 자신에게서 나온 것인지를 구별하는 인식의 시작을 뜻합니다. 이 구별 없이는 거듭남은 결코 진행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선과 진리로 착각하는 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 속한 것들을 ‘리메인스(remains)라고 합니다. 리메인스는 사람이 살아오면서 스스로 축적한 종교 지식이나 도덕적 자산이 아니라, ‘주님이 유아기부터 사람 안에 조용히 저장해 두신 것들’입니다. 여기에는 신앙의 기초적 지식들, 선한 감정의 흔적들, 순수한 애정, 주님을 향한 어린 마음의 인상들이 포함됩니다. 중요한 점은, 이 리메인스가 평소에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오랫동안 그것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며, 오직 이 두 번째 상태에 이르러서야 그것들이 작동할 준비를 갖춥니다.

 

이 상태가 오늘날에는 거의 항상 시험, 불행, 슬픔과 함께 온다고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이유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주님이 고통을 기뻐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잠잠해지지 않고서는 속 사람이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고유한 것, 곧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된 욕망과 판단은 평소에는 매우 활발하여, 속 사람의 미세한 움직임을 완전히 덮어 버립니다. 그래서 주님은 섭리 안에서 외적 삶이 흔들리거나 제한되는 상황을 허용하시는데, 이로 인해 겉 사람의 활동은 약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조용해집니다.

 

이 과정은 스베덴보리가 자주 말하는 ‘황폐(vastation)의 초기 형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겉 사람의 것들이 약화되고 무력해질 때, 비로소 사람은 자신의 힘과 지혜에 의존할 수 없음을 느끼게 됩니다. 바로 이때 속 사람 안에 저장되어 있던 리메인스가 깨어날 수 있는 공간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이 상태에서 겪는 슬픔이나 시험은 거듭남을 방해하는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거듭남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입니다.

 

이 단락의 핵심 결과는 겉 사람과 속 사람의 분리입니다. 이는 인간이 둘로 쪼개진다는 뜻이 아니라, 내적 질서가 처음으로 형성된다는 의미입니다. 이전에는 겉 사람의 사고와 욕망이 인간 전체를 지배했다면, 이제는 속 사람이라는 또 하나의 중심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속 사람 안에 바로 리메인스가 있으며, 그것들은 주님께서 오랫동안 이 시점을 위해 보존해 오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두 번째 상태는 주님이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해 두신 것이 실제로 사용되기 시작하는 전환점입니다.

 

이 상태는 또한 인간의 신앙이 본격적으로 현실성을 갖기 시작하는 단계이기도 합니다. 이전까지 신앙이 있었다면 그것은 주로 외적 습관이나 전통, 혹은 지적 동의에 머물렀지만, 이제 신앙은 내면에서 삶과 연결될 가능성을 갖습니다. 그러나 이 가능성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라, 오직 구별의 시작일 뿐입니다. 무엇이 주님께 속한 것인지, 무엇이 자기에게 고유한 것인지에 대한 이 구별은 이후의 모든 상태를 관통하는 기준이 됩니다.

 

결국 AC.8은 거듭남이 감정적 각성이나 도덕적 결심으로 진행되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거듭남은 먼저 ‘구별의 눈이 열리는 사건’이며, 이 구별은 종종 고통과 침묵, 상실의 시간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언제나 주님의 섭리가 있으며, 속 사람 안에 저장된 리메인스를 사용하여 인간을 새롭게 하시려는 오랜 준비가 놓여 있습니다. 두 번째 상태는 그래서 고통의 단계이면서 동시에, 주님의 오랜 인내가 처음으로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 거룩한 전환의 단계입니다.

 

 

 

AC.9, 창1, '세 번째 상태' (AC.6-15)

AC.9 세 번째 상태는 회개(repentance)의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진지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행위 같은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이 선들을 자신에게

bygrace.kr

 

AC.7, 창1, '첫 번째 상태' (AC.6-15)

AC.7 첫 번째 상태는, 거듭남에 앞서 존재하는 상태인데, 여기에는 어린 시절(유아기) 부터의 상태와, 거듭남 직전에 있는 바로 그 상태가 모두 포함됩니다. 이 상태는 ‘혼돈’, ‘공허’, 그리고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7

 

첫 번째 ‘상태’(state)는 앞서는 상태로서, 유아기에서부터의 상태와 거듭남 바로 직전에 있는 상태를 모두 포함합니다. 이 상태를 ‘혼돈’(void), ‘공허’(emptiness), 그리고 ‘흑암’(thick darkness)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첫 번째 움직임은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인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the spirit of God moving upon the faces of the waters)입니다. The first state is that which precedes, including both the state from infancy, and that immediately before regeneration. This is called a “voi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And the first motion, which is the Lord’s mercy, is “the spirit of God moving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해설

 

이 단락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첫 번째 ‘상태(state)를 정의하면서, 인간의 영적 삶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지를 매우 솔직하고도 철저하게 드러냅니다. 이 첫 상태는 거듭남 이후의 어떤 성취나 빛의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이전의 모든 상태를 포괄하는 단계입니다. 여기에는 유아기의 상태와, 성인이 되어 거듭남 직전에 이르는 상태가 함께 포함됩니다. 이 점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유아기를 무죄의 상태로 보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이미 거듭난 상태로 보지는 않습니다. 유아기는 악을 의식적으로 행하지 않지만, 동시에 선과 진리를 의식적으로 인식하지도 못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아기와 거듭남 직전의 상태는 서로 다른 모습이지만, 모두 아직 영적 생명이 실제로 형성되기 이전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첫 상태로 묶입니다.

 

이 상태를 ‘혼돈(void)과 ‘공허(emptiness)라 하는 이유는, 사람 안에 아직 참된 선과 참된 진리가 심기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혼돈’은 선의 부재를, ‘공허’는 진리의 부재를 가리킵니다. 이는 도덕적으로 나쁘다는 평가라기보다, 영적 구조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는 존재론적 진술입니다. 사람은 이 상태에서 생각하고 느끼며 살아가지만, 그것은 모두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라는 자연적 근원에서 나온 것들이며, 주님의 선과 진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상태를 ‘흑암(thick darkness)이라고도 합니다. 이 어둠은 단순한 무지나 지식 부족이 아니라, 신앙에 속한 것들, 곧 주님과 천적, 영적 삶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나 이 단락의 핵심은 인간의 상태를 어둡게 묘사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바로 그 어둠 속에서 ‘첫 번째 움직임’이 일어난다는 선언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첫 움직임이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님에게서 나온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자비이며,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는 표현으로 묘사됩니다. 여기서 ‘운행하다’라는 말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보호하고 품으며 생명을 준비하는 움직임을 뜻합니다. 이는 마치 어미 새가 알 위에 머물며 그 안에서 생명이 형성되도록 따뜻함을 전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이때 주님의 자비가 운행하는 대상은 ‘수면’, 곧 ‘물들의 얼굴’입니다. 이 ‘물들’은 이후에 밝혀지듯이, 주님이 사람 안에 미리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remains), 곧 선과 진리의 지식들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의식적으로는 완전히 공허하고 어두운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내면 깊은 곳에는 주님이 유아기부터 보존해 오신 선한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첫 상태에서 사람은 이것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지만, 주님의 자비는 이미 그 위에서 조용히 움직이며 거듭남의 가능성을 준비합니다. 이 점에서 첫 상태는 절망의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주님의 창조 사역이 막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이 단락은 또한 거듭남이 인간의 결단이나 종교적 열심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사람은 첫 상태에서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고, 심지어 자신이 어둠 속에 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듭남은 시작되는데, 그것은 오직 주님의 자비가 먼저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첫 상태는 인간 쪽에서 보면 수동적이고 무력한 상태이지만, 주님 쪽에서 보면 가장 적극적인 창조의 출발점입니다.

 

결국 AC.7은 거듭남의 출발을 인간의 빛이나 선에서 찾지 않고, 철저히 주님의 자비에서 찾도록 시선을 돌려줍니다. 인간의 영적 여정은 언제나 ‘혼돈’과 ‘공허’, ‘흑암’에서 시작되지만, 그 어둠 위로 주님의 영이 먼저 운행하십니다. 이 질서는 이후의 모든 상태에서도 반복됩니다. 그래서 첫 상태는 단지 과거의 한 단계가 아니라, 사람이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갈 때마다 다시 경험하게 되는 근원적 상태이며, 주님의 자비가 언제나 먼저이고 인간의 응답은 그 다음이라는 영적 질서의 원형을 보여 줍니다.

 

 

 

AC.8, 창1, '두 번째 상태' (AC.6-15)

AC.8 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 사이에 구별이 일어나는 상태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 불리는데, 여기서 리메인스란 특히 유

bygrace.kr

 

AC.6, 창1, '창1 개요' (AC.6-15)

창1 개요 AC.6 사람의 거듭남의 연속적인 상태들인 여섯 ‘날’(days), 곧 여섯 ‘시기’(periods)는, 전반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The six days, or periods, which are so many successive states of the regeneration of man,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1 개요

 

AC.6

 

사람의 거듭남의 연속적인 상태들인 여섯 (days), 곧 여섯 시기(periods), 전반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The six days, or periods, which are so many successive states of the regeneration of man, are in general as follows.

 

 

해설

 

이 문장은 ‘Arcana Coelestia’ 전체의 해석 방향을 결정하는 핵심 선언으로서, 창세기 1장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한 문장으로 규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여섯 날(days)을 시간의 흐름이나 물리적 우주 창조의 단계로 보지 않고,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거듭남의 여섯 연속적 상태로 정의합니다. 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 그는 ‘’이라는 표현에 곧바로 ‘시기(periods)라는 설명을 덧붙이는데, 이는 창세기의 창조 기사가 시간표가 아니라 내적 상태의 변화에 대한 기록임을 명확히 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창세기 1장을 역사서나 자연과학적 기원 서술이 아니라, 인간 영혼의 재창조에 관한 계시로 읽도록 방향을 전환시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강조하는 핵심 개념 중 하나는 ‘연속적인(successive)이라는 표현입니다. 거듭남은 단번에 완결되는 사건이 아니라, 주님이 질서와 순서에 따라 사람 안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 가시는 과정입니다. 각 ‘(days), 각 ‘시기(periods)는 서로 분리된 독립적 단계가 아니라, 앞선 상태에 기초하여 다음 상태가 열리는 필연적 연속을 이룹니다. 이 질서는 영적 생명이 형성되는 데 본질적인 구조로, 어떤 단계를 건너뛰거나 임의로 재배열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 1장의 순서는 곧 거듭남의 질서이며, 이는 주님의 신적 질서 자체를 반영합니다.

 

이 문장은 또한 ‘창조’와 ‘거듭남’을 동일한 틀 안에서 이해하게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창조는 과거에 한 번 일어난 우주적 사건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거듭날 때, 그는 실제로 ‘새로 창조’되며, 그래서 거듭남은 새로운 창조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창세기 1장은 인류 최초의 사건을 기록한 문서가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사람 안에서 반복되는 영적 현실을 묘사한 말씀입니다. 각 사람이 거듭남을 시작할 때마다, 그 사람 안에서 창세기 1장의 여섯 ‘(days), 여섯 ‘시기(periods)가 다시 전개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 여섯 상태의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섯 ‘(days)을 인간의 자기 수련 단계나 심리적 성장 도식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전적으로 주님이 사람 안에서 역사하시는 상태들이며, 사람은 이 과정에서 협력할 수 있을 뿐, 그 질서와 생명을 만들어내는 존재가 아닙니다. 따라서 이 여섯 시기는 인간 중심적 영성의 단계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와 진리가 인간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어떻게 재구성하는지를 보여 주는 신적 사역의 단계들입니다.

 

문장 속 ‘전반적으로(in general)라는 표현 역시 의미심장합니다. 이는 여섯 ‘(days)의 질서가 보편적이라는 점을 말하면서도, 각 개인의 삶에서 그것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어떤 이는 특정 단계에 오래 머물고, 어떤 이는 중간 단계까지만 이르며, 또 어떤 이는 더 깊은 단계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거듭남의 기본 구조와 순서는 변하지 않습니다. 이 문장은 보편성과 개별성을 동시에 포괄하는 거듭남의 틀을 제시합니다.

 

이 한 문장은 이후에 이어질 모든 세부 해설의 문지방 역할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곧 이어서 빛의 창조, 궁창의 분리, 식물의 발아, 광명체의 배치, 생물의 생성, 사람의 창조를 차례로 설명하며, 이 모든 것이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영적 사건임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AC.6은 단순한 개요 문장이 아니라, 창세기 1장을 ‘거듭남의 지도’로 읽게 하는 해석의 출발점이며, 주님이 인간을 어떻게 어둠에서 빛으로, 혼돈에서 질서로, 자기중심에서 주님 중심으로 이끄시는지를 보여 주는 대서사의 첫 문장입니다.

 

 

 

AC.7, 창1 개요, '첫 번째 상태'

AC.7 첫 번째 ‘상태’(state)는 앞서는 상태로서, 유아기에서부터의 상태와 거듭남 바로 직전에 있는 상태를 모두 포함합니다. 이 상태를 ‘혼돈’(void), ‘공허’(emptiness), 그리고 ‘흑암’(thick da

bygrace.kr

 

AC.5, 서문,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

AC.5 이 모든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미리 말씀드릴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로 말미암아, 저는 이제 수년 동안 끊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