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세 가지를 한 문장 안에서 연결합니다. 사랑과 신앙에 관한 이 아르카나가 특히 마지막 시대에 가려져 있다는 것, 지금이 세대의 종말이라는 것, 그리고 이때에는 사랑이 거의 없으며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 읽으면 ‘사랑이적은것과아르카나가가려지는것이무슨관계가있는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 문장을 이해하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AC.32가 말하는 ‘아르카나’의 내용을 먼저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감추어져 있었다는 아르카나는 추상적인 비밀 지식 전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앞에서 말한 사랑과 신앙의 질서입니다. 사랑과 신앙을 처음에는 함께 ‘큰광명체들’이라 하고, 사랑을 더 큰 광명체, 신앙을 더 작은 광명체라 하며, 사랑은 낮을, 신앙은 밤을 다스린다는 것이 그 아르카나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질서를 이해하려면 신앙을 사랑과 독립된 별도의 종교적 능력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AC.30부터 계속되는 논리는 신앙이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더 큰 광명체이고 신앙이 더 작은 광명체인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이 살아 있을 때 신앙도 살아 있으며,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본래의 생명을 잃습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사랑 자체가 거의 사라지면 ‘신앙은사랑에서생명을얻는다’는 진리도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 신앙을 교리의 인정, 지적 동의, 종교적 주장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쉬워지고, 사랑은 신앙과 나란히 놓이는 하나의 덕목 정도로 밀려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랑이더큰광명체이고신앙이그사랑에서생명을얻는다’는 질서 자체가 보이지 않게 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아르카나가가려져있음’과 ‘사랑이거의없음’이 연결됩니다. 아르카나가 말씀 안에서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랑과 신앙의 참된 관계가 교회 안에서 더 이상 알려지거나 인정되지 않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마지막 시대에 가려져 있던 것을 이제 주님의 신적 자비로 설명하도록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랑이거의없고,그결과신앙도거의없다’는 표현에서 순서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없어서사랑이없다’고 하지 않고, 사랑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AC.30부터 이어진 광명체의 질서와 정확히 같습니다. 사랑이 더 큰 광명체이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 더 작은 광명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32에서 세 가지는 하나의 흐름입니다. 세대의 종말에는 사랑이 거의 없어졌고, 사랑이 거의 없으므로 살아 있는 신앙도 거의 없어졌으며, 그 결과 사랑과 신앙의 본래 질서 자체가 교회에서 가려졌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시대에 ‘해는사랑이고달은신앙이며,신앙은사랑에서생명을얻는다’는 아르카나를 다시 밝혀야 했다는 것이 AC.32의 논리입니다. (AC.32심화2)
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시대를 가리켜 ‘지금이세대의종말(theconsummationoftheage)’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AC가 쓰인 때로부터 이미 수백 년이 지났는데도 세계와 기독교회는 계속 존재하고 있으니, 이 표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이 질문은 ‘세대의종말’을 현대적인 시간 개념으로 읽을 것인가, 아니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교회의 영적 상태로 읽을 것인가와 관계됩니다.
우선 AC.32자체가 ‘세대의종말’을 무엇과 연결하는지를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이때에는사랑이거의없고,그결과신앙도거의없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문맥에서 ‘종말’의 핵심은 몇 년 뒤 세상이 사라진다는 시간표가 아니라, 한 교회가 그 본래의 사랑과 신앙을 거의 잃어버린 영적 상태에 있습니다.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살아 있는 신앙도 거의 없는 상태를 스베덴보리는 ‘세대의종말’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세대’(age)를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한 인간 세대, 곧 20년이나 30년 정도의 기간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복음서의 ‘consummationoftheage’역시 한 사람의 세대가 끝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의 종교적·교회적 시대의 완결과 관계된 표현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18세기에 ‘세대의종말’이라고 말했다고 해서 ‘몇십년안에지상세계가끝난다’는 예언을 한 것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종말’이라는 말을 어떤 상태가 마지막 단계에 이른 것으로 이해하면 시간이 오래 흐른다는 사실 자체가 곧 모순이 되지는 않습니다. 한 교회가 그 본래의 사랑과 신앙을 잃었다고 해서 지상의 조직과 제도, 예배와 교리, 교회 건물과 이름이 그 즉시 모두 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외적인 형태는 남아 있으면서도 그 교회의 내적 생명은 크게 쇠퇴한 상태가 있을 수 있습니다. AC.32의 관심은 바로 그 내적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2026년이라는 현재 시점에서 ‘왜아직종말이끝나지않았는가?’라고 묻기 전에,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종말’이라고 불렀는지를 먼저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AC.32에서 그는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는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계의 물리적 소멸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라 교회의 영적 질서가 소진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이 단락의 문맥에 가장 잘 맞습니다.
물론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에서는 최후의 심판과 새 교회에 관하여 훨씬 더 구체적인 설명을 합니다. 그러나 그 후 수백 년의 교회사를 정확히 어떤 단계의 ‘과도기’라고 이름 붙일 것인지, 또는 현재가 그 과정의 어느 지점인지를 AC.32만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스베덴보리가 자기 시대의 교회를 ‘사랑이거의없고그결과신앙도거의없는종말상태’로 보았다는 사실까지만 분명히 붙드는 것이 안전합니다.
따라서 ‘세대의종말’이 수백 년 동안 계속된다고 생각하기보다, 먼저 ‘종말’이 달력상의 짧은 기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영적 상태를 뜻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AC.32에서 그 상태를 판단하는 기준은 매우 분명합니다. 사랑이 살아 있는가, 그리고 그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 신앙이 살아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AC.32심화1)
AC.31 [3]에서 스베덴보리는 유대교회에 ‘저녁부터아침까지항상타는등불’을 두도록 명하신 규례를 언급합니다. 출27:20-21에는 순수한 감람유를 가져다가 등불을 켜고 회막 안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그것을 보살피도록 하는 명령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등불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질문이 생깁니다. 유대교회의 사람들은 이러한 규례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실제로 지켰지만, 그 규례가 표상하는 천국의 내적 의미까지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이 자기가 하는 행위의 내적 의미를 알지 못하면서도 그 행위를 통하여 거룩한 것을 표상할 수 있었을까요?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먼저 ‘표상’과 ‘그표상을행하는사람의내적상태’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거룩한 것을 표상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람 자신도 그 거룩한 상태 안에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유대교회의 제사, 절기, 성막과 성전, 제사장 직무와 의복 등은 주님과 천국과 교회에 속한 것들을 표상하도록 정해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표상의 거룩함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얼마나 깊은 영적 이해를 가지고 있었느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제도와 말씀에 부여하신 표상적 질서에서 나왔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제사장이 등불의 내적 의미를 충분히 알지 못했다고 해서 등불의 표상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그 제물과 제단과 불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한다고 해서 주님께서 정하신 표상적 의미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표상의 의미는 사람의 주관적인 해석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표상이제대로기능하려면그것을행하는사람이반드시그의미를몰라야했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상응과 표상의 의미를 아는 것 자체가 표상을 파괴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더 오래된 교회들에서는 자연계의 사물들이 무엇을 상응하고 표상하는지에 관한 지식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므로 ‘무지해야표상이가능하다’는 것이 영적 원리는 아닙니다.
유대교회의 특별한 점은 다른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교회의 많은 사람이 내적인 것보다 외적인 것에 강하게 기울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매우 구체적인 율법과 규례를 주셨고, 그 외적 예배가 천국의 것들을 표상하도록 질서 지으셨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내적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정해진 규례를 수행하는 동안 그 외적 행위는 주님께서 정하신 표상으로서 기능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의미를모르면서어떻게그렇게철저하게지킬수있었는가?’라는 질문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명령의 모든 깊은 의미를 알아야만 그것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여호와께서 명하신 율법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따라서 내적 의미를 이해하는 것과 외적 명령을 준수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유대인들의 무지를 그 자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그들은의미를몰랐기때문에오히려더좋은표상교회가될수있었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내적인 것을 알지 못하고 외적인 것에만 머무는 것은 그 자체로 더 높은 영적 상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러한 인간의 상태 속에서도 당신의 질서를 보존하시고, 외적인 예배를 통하여 천국의 것들이 표상되도록 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주님의 섭리를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상태가 이상적이어야만 주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처한 상태를 아시고, 그 상태에 맞추어 당신의 질서를 보존하십니다. 유대교회의 외적 예배 역시 그런 의미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내적 이해가 충분하지 않았음에도,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주신 율법과 규례를 통하여 주님과 천국에 관한 표상들이 역사 속에 계속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AC.31에서 말하는 ‘항상타는등불’은 무엇을 표상했을까요? 여기서는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힌 만큼만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는 ‘광명체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표상하고 뜻했기 때문에 유대교회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명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규례가 주님께서 속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을 불붙이고 빛나게 하시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 안에서도 그렇게 하시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상의 세부적인 의미는 ‘적절한곳에서’설명하겠다고 여기서 유보합니다. 그러므로 AC.31만을 가지고 ‘저녁은반드시이런상태이고,등불이밤새타는것은반드시이런교회사적보존을뜻한다’는 식으로 세부 상응을 미리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를 읽을 때에는 스베덴보리가 밝힌 만큼과 우리가 그 원리를 따라 추론한 것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심화의 질문으로 돌아가면 답은 이렇습니다. 유대교회의 사람들이 모든 규례의 내적 의미를 알아야만 그 규례가 표상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표상의 근거는 인간의 이해가 아니라 주님께서 정하신 영적 질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들이 의미를 몰랐다는 사실 자체가 표상을 가능하게 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내적인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외적 예배까지 사용하여 천국의 것들을 표상하고 보존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항상타는등불’은 유대인들이 그 의미를 얼마나 잘 이해했느냐보다, 그 규례를 통하여 주님께서 무엇을 표상하도록 하셨느냐에 초점을 맞추어 읽는 것이 좋습니다. AC.31에서는 그것이 바로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신앙이며, 주님께서 그것들을 속 사람 안에서 불붙이고 빛나게 하시고 다시 겉 사람의 삶에까지 나타나게 하시는 질서입니다. (AC.31심화3)
AC.31 [2]에서 스베덴보리는 사60:1-3, 20을 인용하면서 이 말씀이 ‘주님의강림과이방인들의밝아짐,따라서새교회와,특히어둠가운데있다가빛을받아거듭나는모든사람’에 관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새교회’라는 표현을 보면 자연스럽게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에서 말하는 ‘새교회’(NewChurch), 곧 새 예루살렘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1의 이 한 문장만 놓고 그것을 곧바로 특정한 역사적 교회나 교단으로 한정하는 것은 조심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 이유는 스베덴보리 자신이 같은 문장에서 범위를 함께 밝혀 주기 때문입니다. 그는 먼저 ‘주님의강림과이방인들의밝아짐’을 말하고, 그 결과로 ‘새교회’를 언급한 뒤, 곧바로 ‘특히어둠가운데있다가빛을받아거듭나는모든사람’을 덧붙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중심은 어떤 조직의 명칭보다 ‘어둠가운데빛이임하고,주님으로말미암아새로운영적상태가시작되는것’에 있습니다.
사60의 본문 자체도 이 문맥과 잘 맞습니다. ‘일어나라빛을발하라이는네빛이이르렀고’, ‘어둠이땅을덮을것이며캄캄함이만민을가리려니와’, 그리고 ‘여호와가네영원한빛이된다’는 말씀은 어둠에서 빛으로의 전환을 묘사합니다. AC.31에서 이 구절이 중요한 이유는 해와 달의 ‘밝아짐’을 통해 사랑과 신앙이 주님에게서 다시 살아나는 상태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서 ‘새교회’는 우선 주님의 오심과 빛의 유입으로 새롭게 세워지는 교회의 상태를 뜻한다고 읽는 것이 안전합니다. 동시에 스베덴보리는 그와 같은 질서가 한 개인의 거듭남에도 적용된다고 직접 말합니다. 어둠 가운데 있던 사람이 주님의 빛을 받아 사랑과 신앙이 살아나기 시작할 때, 그 사람 안에서도 일종의 새로운 교회의 상태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교회를 단순히 건물이나 조직의 이름으로만 보지 않는다는 점과도 연결됩니다. 교회가 참으로 교회가 되려면 그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 곧 사랑과 신앙의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새교회’라는 말의 핵심도 외적 명칭의 새로움보다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빛과 생명이 들어오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고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에서 말하는 ‘새예루살렘’과 전혀 관계없다고 미리 선을 그을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AC.31은 여기서 그 역사적·교회사적 동일성을 논증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단락을 읽을 때에는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힌 범위에 머무는 것이 좋습니다. 곧 사60은 주님의 강림으로 어둠 가운데 빛이 임하고, 그로 인해 새 교회가 일어나며, 개별적으로는 어둠 가운데 있던 사람이 빛을 받아 거듭나는 상태를 묘사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60의새교회가어느교회인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하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AC.31에서는 특정한 후대 교단명을 먼저 가리키는 표현으로 읽기보다, 주님의 강림과 빛의 유입으로 새롭게 세워지는 교회의 상태를 뜻하며, 그와 같은 새로움은 거듭나는 각 사람 안에서도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이 자리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하고 있는 범위입니다. (AC.31심화2)
AC.31에서 스베덴보리는 바로와 애굽에 관하여 ‘단지감각과단지기억지식의원리’(theprincipleofmeresenseandofmereknowledge)를 뜻하며, 여기서는 그것들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었음을 말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표현을 읽을 때 먼저 조심해야 할 것은 감각이나 기억 지식 자체를 나쁜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은 감각을 통하여 자연세계를 접하고, 기억 지식을 통하여 배우고 생각합니다. 앞의 AC.24-29에서도 기억 지식은 거듭남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다루어졌습니다. 문제는 감각과 기억 지식이 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만’을 최종 기준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눈으로확인되지않는것은믿을수없다’고 하면서 영적인 모든 것을 감각적 증거 아래에 두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 천국, 영혼, 주님의 섭리와 같은 것을 오직 눈에 보이는 결과가 있는지 없는지로만 판단하는 것입니다. 질문하고 검토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자연적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을 실재의 전부로 정하고, 그 범위를 넘어서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할 수 없다고 판단하는 태도입니다. 감각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섬기는 자리가 아니라 영적인 것의 재판관이 될 때 질서가 뒤집힙니다.
기억 지식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과 신학과 교리에 관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지식 자체는 귀중하며, 주님께서 거듭남 가운데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내가알고있는것만참이다’, ‘내이성이납득하지못하면주님의말씀도받아들일수없다’는 식으로 기억 지식을 가장 높은 자리에 놓으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지식이 사랑과 신앙을 섬기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과 신앙의 가능 여부를 판정하는 지배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실제 삶에서는 이런 모습이 아주 미묘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교리에는 매우 정확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는 사랑과 자비가 사라질 수 있고, 말씀의 구절을 많이 알면서도 그 지식을 상대방을 판단하고 이기는 데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식이많아서사랑이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같은 지식이라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쓰이면 매우 유익합니다. 문제는 지식이 자기 지성에 대한 신뢰와 결합하여 사랑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갈 때입니다.
감각적인 사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조 세계를 자세히 관찰하고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것 자체는 신앙의 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통하여 주님의 지혜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적 사실만을 전부라고 여기고 영적인 원인이나 목적 자체를 배제할 때, 감각은 더 이상 섬기는 도구가 아니라 지배하는 원리가 됩니다. AC.31에서 경고하는 것은 바로 이런 질서의 전도입니다.
그러므로 ‘감각과단지기억지식에의해사랑과신앙이소멸된다’는 말을 ‘과학이나지식이신앙을파괴한다’는 뜻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지식과 이해를 거듭남의 중요한 단계로 봅니다. 오히려 사람의 감각과 지식이 자기보다 높은 것, 곧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섬길 때에는 그것들이 거듭남에 매우 유용하게 사용됩니다.
AC.31의 표현은 결국 ‘무엇이무엇을다스리는가?’의 문제입니다. 사랑과 신앙이 중심이 되고 감각과 기억 지식이 그것들을 섬기면 질서가 바르게 서지만, 감각과 기억 지식만이 최종 기준이 되어 사랑과 신앙을 재단하기 시작하면 영적 빛은 점차 가려질 수 있습니다. 에스겔에서 해와 달과 별이 어두워지는 모습은 바로 이런 상태를 나타냅니다. 자연적인 것 자체가 악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영적인 것 위에 올라가 지배할 때 사랑과 신앙의 빛이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AC.31심화1)
AC.30 [3]의 ‘그러나그것들은태양의빛이그것을받는대상안에서보이듯이,의지와이해안에서그렇게나타날뿐입니다’라는 문장은 스베덴보리 인간론의 중요한 원리를 아주 압축해서 말합니다. 여기서 ‘그것들’은 바로 앞에서 말한 사랑과 신앙이며, 특히 중요한 표현은 ‘initsrecipientobjects’, 곧 ‘빛을받아들이는대상안에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의지와 이해가 사랑과 신앙의 근원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수용체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연적인 태양빛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태양빛이 물이나 나뭇잎, 창문이나 돌에 비치면 빛은 각각의 대상 안에서 여러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대상이 빛 자체의 근원은 아닙니다. 빛의 근원은 태양이고, 대상은 그 빛을 받아 그것이 나타나게 하는 자리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의지와 이해를 설명할 때 사용하는 비유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사람 안에서 사랑은 의지에, 신앙 또는 진리는 이해에 나타납니다. 그래서 사람은 ‘내가사랑한다’, ‘내가진리를이해한다’, ‘내가이것을믿는다’고 느낍니다. 실제로 그것들은 사람의 의지와 이해 안에서 일어나며, 사람은 자유 가운데 그것을 받아들이고 행합니다. 그러나 AC.30이 강조하는 것은 그 생명의 최초 근원이 사람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의지를 사랑으로 움직이게 하고 이해를 진리 또는 신앙으로 비추는 것은 ‘오직주님의자비’라고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태양의빛이그것을받는대상안에서보인다’는 말은 인간의 의지와 이해가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수용체는 실제로 받아들이며, 사람은 자유 가운데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습니다. 거듭남에서도 사람은 생각하고 선택하고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해야 합니다. 다만 그 모든 과정에서 참된 사랑과 참된 신앙의 생명 자체를 자기에게서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점은 앞에서 살핀 AC.29의 ‘생명없는’상태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사람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면서도 처음에는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은 자신이 실제로 행하고 선택하면서도 그 선과 진리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차 인정하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 자신의 것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의 근원을 올바르게 구별하게 합니다.
실제 삶에서도 이 원리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돕기로 결정했다고 해 보겠습니다. 그는 실제로 상황을 판단하고, 도울 것을 선택하며, 자신의 손과 시간과 재물을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나는아무것도하지않았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참된 선, 곧 이웃을 위하는 사랑의 생명까지 자기 자신에게서 만들어 냈다고 여기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태양빛이 물체 안에 실제로 나타나면서도 그 빛의 근원이 그 물체가 아닌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AC.30 [3]의 이 비유는 ‘사람에게나타나는것은가짜이고주님만모든것을하신다’는 식의 인간 부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이 실제로 살아 움직이면서도 그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심을 가르칩니다. 의지와 이해는 사랑과 신앙을 받아들이는 살아 있는 수용체이며,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그 수용체 안에 사랑을 일으키시고 진리로 비추십니다. 이것이 ‘태양의빛이그것을받는대상안에서보이듯이’라는 비유의 핵심입니다. (AC.30심화1)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삼상2:3)Speak what is high!high!Let what is ancient come out of your mouth(1 Sam. 2:3).
AC.66을 읽다가 가장 먼저 멈추게 되는 곳 가운데 하나가 삼상2:3입니다.개역개정은‘심히교만한말을다시하지말것이며오만한말을너희의입에서내지말지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그런데AC의 영어 인용은‘높은것을말하라,높은것을!옛것이네입에서나오게하라’는 식입니다.단어 몇 개가 다른 정도가 아니라 명령의 방향 자체가 거의 반대로 보입니다.그렇다면 어느 쪽이 맞는 것일까요?
먼저 우리의 성경을AC영어에 맞추어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삼상2:3의 히브리어 본문에는 금지를 나타내는 말이 있고,문맥 역시 한나가 교만과 오만을 경계하는 내용입니다.오늘날의 주요 영어 번역들도 대체로‘더이상그렇게교만하게말하지말라’, ‘오만한말이입에서나오지않게하라’는 방향으로 번역합니다.따라서 개역개정의‘심히교만한말을다시하지말것이며’는 히브리어 본문과 일반적인 번역 전통에 잘 맞습니다.
그러므로AC의 영어 문장을 보고‘개역개정번역자들이아르카나를몰라서잘못번역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더구나AC의 영어 인용을‘문자적번역보다더깊은내적의미의번역’이라고 부르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AC.66자체는‘이구절의문자적의미는사실높은것을말하라는뜻이다’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단지 태고교회의 스타일을 설명하면서 현재 우리가 보는 것과 매우 다른 형태로 삼상2:3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원칙 하나가 생깁니다.성경 본문과AC의 인용문이 현저하게 다를 때에는 두 문장을 억지로 하나로 만들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성경은 성경대로 정확하게 제시하고,AC가 어떤 형태로 그 말씀을 인용하는지도 그대로 보여 주며,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숨기지 않는 것입니다.그래서 이번AC.66의 한국어 본문에서도 삼상2:3은 개역개정 그대로‘심히교만한말을다시하지말것이며오만한말을너희의입에서내지말지어다’로 두는 것이 좋습니다.바로 뒤의 영어 원문에는 스베덴보리가 사용한 인용형이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독자는 차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왜 이처럼 다른 형태의 문장을 인용했을까요?그 정확한 문헌적 배경을 확인하지 않은 채‘스베덴보리가히브리어를영적으로다시번역했기때문이다’라고 설명하는 것은 위험합니다.스베덴보리가 사용한 당시의 성경 텍스트나 번역 전통,인용 관행을 문헌적으로 더 조사해야 할 문제입니다.현 단계에서 확실한 것은AC.66의 영어 인용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히브리어 본문에 따른 일반적인 번역과 크게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이런 차이가AC.66전체의 설명을 무너뜨리는 것일까요?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스베덴보리가 이 인용을 사용하는 목적은 태고교회의 스타일이‘높은것’과‘옛것’에 관계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따라서 이 특정 인용이 그의 설명에서 수행하는 역할은 분명합니다.다만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더 조심해야 합니다.인용된 성경의 실제 문자와AC가 사용하는 인용형을 같은 것처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성경과AC의 관계를 다루는 데 중요한 사례가 됩니다.AC를 존중한다는 것이 성경을AC의 표현에 맞추어 다시 번역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오히려 성경의 문자적 본문을 먼저 존중하고,스베덴보리가 그 말씀을 어떤 방식으로 인용하고 사용하는지를 그 다음에 정확하게 살피는 것이 좋습니다.의미 차이가 없다면 익숙한 성경 표현을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지만,이번 삼상2:3처럼 의미 차이가 너무 크다면 그 차이를 감추지 않고 설명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번 경우에는‘개역개정과AC가운데하나를선택해야한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성경 번역에서는 개역개정의 문구를 유지합니다.동시에AC의 원문을 읽을 때에는 스베덴보리가 실제로‘높은것을말하라’는 형태로 인용했다는 사실도 그대로 인정합니다.그리고 그 차이가 왜 생겼는지는 확인 가능한 문헌적 근거 이상으로 추측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이 사례가 성경보다AC를 높이는 방향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번역에는보이지않는진짜뜻을AC만알고있다’는 식으로 말하기 시작하면,말씀의 속뜻을 밝힌다는AC의 역할과 말씀 자체의 권위가 뒤집힐 수 있습니다.AC.66역시 결국‘말씀의네가지스타일’을 설명하는 글입니다.중심은AC의 문장이 아니라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가장 안전하게 처리하는 방법은 단순합니다.삼상2:3은 개역개정 그대로 읽습니다.AC가 그와 다른 형태로 인용한다는 사실은 숨기지 않습니다.그리고 그 차이를‘성경은낮은문자,AC는높은영적번역’이라는 구조로 만들지 않습니다.바로 이런 태도가 말씀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스베덴보리의 텍스트도 정직하게 읽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에는전반적으로네가지서로다른스타일이있습니다.첫째는태고교회의스타일입니다.그들의표현방식은이땅의것과세상의것을말할때,그것들이표상하는영적이고천적인것들을동시에생각하는것이었습니다.그래서그들은단지표상으로표현했을뿐아니라,그것들을일종의역사적연속으로엮어더욱생명력있게하였는데,이런방식은그들에게더없이큰기쁨이었습니다.이런스타일을가리켜한나는예언가운데이렇게말했습니다. There are in the Word, in general, four different styles.The first is that of the most ancient church.Their mode of expression was such that when they mentioned terrestrial and worldly things they thought of th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which these represented.They therefore not only expressed themselves by representatives, but also formed these into a kind of historical series, in order to give them more life; and this was to them delightful in the very highest degree.This is the style of which Hannah prophesied, saying:
심히교만한말을다시하지말것이며오만한말을너희의입에서내지말지어다(삼상2:3)Speak what is high!high!Let what is ancient come out of your mouth(1 Sam. 2:3).
창조와에덴동산등에관한이모든내용,곧아브람시대까지의기록을모세는태고교회의후손들로부터전해받았습니다. These particulars concerning the creation, the garden of Eden, etc., down to the time of Abram, Moses had from the descendants of the most ancient church.
[2] 둘째스타일은역사적스타일로,아브람이후의모세오경과여호수아,사사기,사무엘기,열왕기에나타납니다.이책들에서역사적사실들은문자적의미에나타난그대로입니다.그러나그모든것에는전체적으로도부분적으로도내적의미안에전혀다른것들이담겨있는데,이에대해서는주님의신적자비로이어지는글들에서그순서대로설명하겠습니다. 셋째스타일은예언적스타일입니다.이스타일은태고교회에서그토록높이존중되던스타일에서생겨났습니다.그러나태고교회의스타일처럼연결된역사적형식은아니고단절되어있으며,내적의미없이는거의이해할수없습니다.그내적의미안에는가장깊은아르카나가담겨있고,그것들은아름답게연결된질서를따라이어지며,겉사람과속사람,교회의여러상태,하늘자체를다루고,가장깊은의미에서는주님을다룹니다. 넷째스타일은다윗의시편에나타나는스타일로,예언적스타일과일상적인언어사이에놓여있습니다.그안에서는왕으로서의다윗이라는인격아래,내적의미에서는주님을다룹니다. The second style is historical, which is found in the books of Moses from the time of Abram onward, and in those of Joshua, Judges, Samuel, and Kings.In these books the historical facts are just as they appear in the sense of the letter; and yet they all contain, in both general and particular, quite other things in the internal sense, of which, by the Lord’s Divine mercy, in their order in the following pages.The third style is the prophetical one, which was born of that which was so highly venerated in the most ancient church.This style, however, is not in connected and historical form like the most ancient style, but is broken, and is scarcely ever intelligible except in the internal sense, wherein are deepest arcana, which follow in beautiful connected order, and relate to the external and the internal man; to the many states of the church; to heaven itself; and in the inmost sense to the Lord.The fourth style is that of the psalms of David, which is intermediate between the prophetical style and that of common speech.The Lord is there treated of in the internal sense, under the person of David as a king.
해설
AC.66은 창세기 1장에 대한 해설을 마친 자리에서 말씀의 문체와 속뜻의 관계를 한층 넓게 보여 주는 글입니다. 바로 앞 AC.64-65에서는 말씀에 문자적 의미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속뜻이 있으며, 천사들은 문자와 이름이 아니라 그것들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66은 말씀 전체를 모두 똑같은 외적 형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전반적으로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첫째는 태고교회의 스타일, 둘째는 역사적 스타일, 셋째는 예언적 스타일, 넷째는 다윗의 시편에 나타나는 스타일입니다. 네 스타일은 겉으로 나타나는 방식이 서로 다르지만, AC.66의 관심은 결국 그 서로 다른 외적 형식 안에 어떻게 내적 의미가 담겨 있는가에 있습니다.
첫째인 태고교회의 스타일은 지금까지 우리가 읽어 온 창세기 앞부분과 직접 관계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교회 사람들은 땅과 세상에 속한 것들을 말할 때 동시에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후대 사람이 자연물 하나를 보고 의도적으로 ‘이것은무엇을상징할까?’ 하고 해석한 것과는 조금 다르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외적인 것을 말하면서 그것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함께 생각하는 표현 방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표상들을 단순히 하나씩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일종의역사적연속’으로 만들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한 이유를 그것들에 더 큰 생명력을 주기 위해서였다고 하며, 그런 방식이 그들에게 가장 큰 기쁨이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창조와 에덴동산을 비롯한 앞부분을 읽을 때, AC가 그것을 단순한 상징 목록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표상의 이야기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서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바로 이 문맥에서 한나의 삼상2:3이 인용되는데, 여기서는 잠시 주의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읽는 개역개정은 ‘심히교만한말을다시하지말것이며오만한말을너희의입에서내지말지어다’라고 되어 있는 반면, AC의 영어 인용은 ‘높은것을말하라,높은것을!옛것이네입에서나오게하라’는 식으로 전혀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본문과 오늘날의 일반적인 번역은 개역개정과 마찬가지로 교만한 말을 금하는 방향입니다. 그러므로 AC의 영어 인용을 근거로 개역개정이 잘못되었다거나, AC가 그 구절의 ‘진짜번역’을 제공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한국어 본문에서는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여 개역개정 문구를 그대로 두되, 스베덴보리가 여기에서 사용하는 인용 형태가 우리가 읽는 성경 번역과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지와 AC.66의 논증에서 이 인용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는 심화에서 따로 살펴보겠습니다.
이어 시78:2-4의 ‘내가입을열어비유로말하며예로부터감추어졌던것을드러내려하니’라는 말씀이 인용됩니다. AC.66은 특별히 이러한 표상들을 다윗이 ‘예로부터감추어졌던것’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여기서 굳이 시편의 모든 세부 표현을 하나씩 새로운 상응으로 풀 필요는 없습니다. 이 인용의 역할은 첫째 스타일의 표상들이 ‘예로부터’ 내려온 것이라는 설명을 뒷받침하는 데 있습니다. 특히 바로 다음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조와 에덴동산 등의 내용, 곧 아브람 시대까지의 기록을 모세가 태고교회 후손들로부터 받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시78의 인용과 다음 문장은 함께 읽는 것이 좋습니다. ‘예로부터감추어졌던것’이라는 표현과 태고교회로부터 내려온 표상적 전승이라는 설명이 서로 연결됩니다.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라면 상당히 큰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스베덴보리는창세기1장부터아브람이전까지의내용을모세가직접계시받아처음기록한것이아니라,앞선세대에게서전해받은자료라고보는것인가?’ AC.66의 문장은 분명히 그렇다고 말합니다. ‘창조와에덴동산등에관한이모든내용,아브람시대까지의기록을모세는태고교회의후손들로부터전해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AC.66이 직접 제시하는 상당히 중요한 주장입니다. 다만 여기서 곧바로 현대 성서학의 문서설이나 구전 전승론과 동일시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그러므로창1-11은허구이다’라고 결론 내릴 수도 없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어지는 둘째 스타일에서 아브람 이후의 역사적 사실들은 문자에 나타난 그대로라고 분명하게 구별합니다. 이 문제는 AC의 창세기 앞부분 이해에 매우 중요하므로 별도 심화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둘째 스타일은 ‘역사적스타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범위를 아브람 이후의 모세오경과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기, 열왕기로 명시합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아주 중요한 말을 덧붙입니다. ‘역사적사실들은문자적의미에나타난그대로’라는 것입니다. 즉 이 둘째 스타일에서 스베덴보리는 내적 의미가 있다는 이유로 외적 역사를 지우지 않습니다. 문자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은 그대로이면서, 동시에 그 모든 것에는 전체적으로도 부분적으로도 내적 의미 안에 ‘전혀다른것들’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AC.66의 둘째 스타일에서는 ‘역사인가상징인가?’라는 양자택일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역사적 사실이면서 동시에 속뜻을 갖습니다.
이 구별은 창세기 앞부분을 읽을 때 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아브람 이후의 역사적 스타일에 대해서는 ‘사실들이문자그대로’라고 명시하는 반면, 그 이전 태고교회 스타일에 대해서는 표상들을 ‘일종의역사적연속’으로 엮었다고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문장을 구별해서 읽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AC.66하나만 가지고 창1부터 창11까지 각 인물과 사건의 역사성 여부를 세세하게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현재 확실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첫째와 둘째 스타일을 서로 다르게 설명하며, 아브람 이후의 둘째 스타일에 대해서는 문자적 역사성을 명시적으로 확인한다는 사실입니다.
셋째는 예언적 스타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스타일이 태고교회에서 매우 높이 존중되던 스타일에서 생겨났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태고교회 스타일처럼 연결된 역사 형식은 아니고 ‘단절되어’ 있으며, 내적 의미 없이는 거의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예언서는문자적으로아무뜻이없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원문은 ‘scarcelyeverintelligibleexceptintheinternalsense’, 곧 내적 의미 없이는 거의 이해할 수 없다고 강하게 말하지만, 그 목적은 문자 자체를 폐기하는 데 있지 않고 그 단절된 표현들의 내적 의미 안에 깊은 아르카나와 아름답게 연결된 질서가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 있습니다. AC.65에서 말씀의 내적 의미가 ‘연속의질서’를 가진다고 했던 설명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예언적 스타일의 내적 의미가 무엇을 다루는지도 직접 열거합니다. 겉 사람과 속 사람, 교회의 여러 상태, 하늘 자체를 다루며 ‘가장깊은의미에서는주님’을 다룹니다. 여기서 특히 마지막 표현은 앞으로 말씀의 속뜻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그러나 이 한 문장을 곧 ‘모든성경구절은무조건주님의지상생애에대한암호이다’라는 공식으로 바꿔서는 안 됩니다. AC.66은 예언적 스타일의 내적 의미가 여러 차원을 다루며 가장 깊은 의미에서 주님을 다룬다고 말합니다. 그 구체적인 관계는 실제 예언서 인용을 해설하는 과정에서 하나씩 확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넷째는 다윗의 시편 스타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예언적 스타일과 일상적인 언어 사이의 중간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왕으로서의다윗이라는인격아래에서내적의미로는주님을다룬다’고 합니다. 이 표현도 매우 중요합니다. 시편을 읽을 때 다윗의 역사적 인격과 개인적 언어를 곧 지워 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그 외적 형식 아래 내적 의미에서는 주님을 다룬다는 것이 AC.66의 설명입니다. 따라서 시편의 ‘나’를 만날 때 곧바로 모든 문장을 독자의 개인 감정으로만 읽는 것도, 반대로 문자적 화자를 아무 의미 없다고 하는 것도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직접 밝힌 것은 왕 다윗의 인격 아래 주님이 내적 의미에서 다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 네 가지 스타일을 보면 말씀의 속뜻이 언제나 똑같은 외적 방식으로 감추어져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스타일에서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생각하면서 자연적인 표상들을 역사적 연속으로 엮었습니다. 역사적 스타일에서는 실제 역사적 사실들 안에 전체와 세부에 내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언적 스타일에서는 외적으로 단절되어 보이는 표현들 안에 깊은 아르카나가 아름다운 질서로 연결되고, 시편에서는 왕 다윗의 인격 아래 내적 의미로 주님이 다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속뜻이있다’는 하나의 원칙만 붙들고 모든 성경 본문을 동일한 방법으로 기계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AC.66은 보여 줍니다.
그러나 네 스타일의 차이보다 더 중요한 통일성도 있습니다. 모두 말씀이며, 외적으로 서로 다른 형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안에는 문자에 다 드러나지 않는 내적 내용이 있습니다. 앞 AC.64에서 말씀의 속뜻을 ‘말씀의가장참된생명’이라고 했고, AC.65에서는 그 내적 의미의 아름다움과 연속의 질서가 천사들에게 ‘영광’이라고 불렸습니다. AC.66은 이제 그 속뜻이 말씀의 서로 다른 외적 스타일 안에서 어떻게 담겨 있는지를 큰 윤곽으로 보여 줍니다.
또 한 가지 조심할 것은 이 네 가지 스타일을 ‘낮은단계에서높은단계로발전한네계시수준’처럼 읽는 것입니다. AC.66은 그런 서열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태고교회 스타일이 그들에게 가장 큰 기쁨이었다고 하며, 예언적 스타일은 그 스타일에서 생겨났고, 시편은 예언적 스타일과 일상 언어 사이에 있다고 설명하지만, 이것을 ‘첫째가가장높고둘째는낮고셋째가다시높다’는 등급표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각각 말씀 안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는 스타일입니다.
AC.66은 그래서 창세기 1장을 마치는 글이면서 동시에 앞으로 AC를 읽는 방법을 준비시키는 글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주로 첫째 스타일에 속하는 창조의 표상적 연속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 이후로 가면 둘째인 역사적 스타일을 만나게 되고, AC가 그 실제 역사 속의 모든 것에서 어떻게 내적 의미를 밝히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예언서와 시편이 인용될 때도 그들의 서로 다른 스타일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에는속뜻이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모든 본문을 똑같은 상징 해독법으로 읽는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의 서로 다른 외적 형식을 존중하면서 그 안의 영적이고 천적인 내용을 밝힌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성경과 AC의 순서는 바뀌지 않습니다. 먼저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 안에는 태고교회의 표상적 스타일도, 실제 역사의 스타일도, 예언의 스타일도, 시편의 스타일도 있습니다. AC는 그 차이를 없애거나 성경의 표현을 자기 체계에 맞게 바꾸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말씀 안에 어떤 내적 의미가 담겨 있는지를 밝히려 합니다. 따라서 AC.66이 가르치는 좋은 독법은 ‘문자를버리고속뜻으로가자’가 아니라, ‘말씀의외적형식을정확히읽으면서그안에주님께서두신더깊은뜻을따라가자’는 방향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AC.65를 읽으면 성경을 깊이 공부해 온 독자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이 생깁니다.천사들은 하늘에서 말씀 속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이해할 수 없고 오직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에서 뜻하는 것만을 이해한다면,우리가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연구하고 단어 하나의 뜻과 문법을 세밀하게 살피는 일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하면AC.65에서 그런 결론은 나오지 않습니다.이 글은 천사들이 말씀을 어떻게 지각하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지,자연계의 인간에게 말씀의 문자를 연구하지 말라고 말하는 글이 아닙니다.천사와 인간은 말씀을 동일한 방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우리에게 말씀은 실제로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비롯한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어 전해졌고,우리는 번역된 성경의 단어와 문장을 통하여 그것을 읽습니다.그러므로 원어와 문법과 문맥을 정확히 연구하는 일은 인간이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 분명히 유익합니다.
특히 번역에서는 원어 연구가 매우 중요합니다.같은 히브리어나 헬라어 단어라도 문맥에 따라 뜻의 범위가 달라질 수 있고,번역 과정에서 한 언어의 뉘앙스를 다른 언어로 완전히 옮기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원어를 살피면 번역자가 왜 특정 표현을 선택했는지 이해할 수 있고,서로 다른 번역을 비교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따라서‘천사는글자를보지않으니인간도원어를연구할필요가없다’는 것은AC.65가 말하는 바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 자신도 말씀의 특정 단어나 표현에 매우 세밀하게 주목합니다.AC를 읽다 보면 어떤 단어가 왜 사용되었는지,단수와 복수가 왜 달라지는지,같은 듯 보이는 표현이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근거로 속뜻을 설명하는 경우를 계속 만나게 됩니다.이것만 보아도 말씀의 문자가 중요하지 않다는 식으로AC.65를 읽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AC.65가 우리에게 주는 경계는 무엇일까요?원어 연구 자체가 곧 말씀의 속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히브리어 단어의 어근과 문법을 완벽하게 분석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천사들이 지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의미에 도달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AC.65의 사람들은 스베덴보리가 읽는 말씀의 단어나 글자를 이해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뜻하는 것을 지각했습니다.따라서 문자 연구와 내적 의미는 동일한 차원의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둘을 서로 적으로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문자연구는낮은것이고속뜻만높은것이다’라고 생각하면 말씀의 질서를 거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우리에게 속뜻은 말씀의 문자와 무관하게 떠오르는 별도의 영적 생각이 아닙니다. ‘말씀의속뜻’입니다.따라서 우리가 자연계에서 말씀을 읽는 출발점은 여전히 주어진 문자입니다.문자를 정확하게 읽는 일과 그 안에 있는 더 깊은 의미를 인정하는 일은 서로 대립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기준이 생깁니다.원어 연구를 통해 개역개정의 익숙한 표현과 다른 원문의 뉘앙스를 발견했다고 해서 곧바로‘우리성경은틀렸고원어를아는내가진짜뜻을안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번역은 언제나 여러 요소를 고려한 결과이고,표현의 차이가 실제 의미 차이를 만드는지 먼저 살펴야 합니다.반대로 스베덴보리의 해석이 특정 히브리어나 헬라어 표현의 차이에 실제로 의존한다면 그때는 그 차이를 숨기지 말고 독자에게 설명해야 합니다.원어는 말씀을 교정하기 위한 권위 경쟁의 도구라기보다,주어진 말씀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돕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 원어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영적 수준을 비교해서도 안 됩니다.원어를 많이 안다고 해서 자동으로 말씀의 속뜻을 더 깊이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원어를 모른다고 해서 말씀을 깊이 받을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AC.65는 그런 사람의 등급을 매기는 글이 아닙니다.천사들이 말씀을 지각하는 방식이 인간의 문자 이해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는 글입니다.
따라서 목회와 설교에서도 원어는 매우 유용할 수 있지만 그것 자체가 설교의 권위를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닙니다. ‘헬라어로보면진짜뜻은이것입니다’라는 표현을 반복하면서 번역 성경을 읽는 회중이 마치 불완전한 말씀만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정말 원어의 차이가 본문 이해에 중요할 때 그 이유를 차분히 설명하면 충분합니다.
반대로 원어 연구를 경시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중요한것은영적의미니까단어의정확한뜻은중요하지않다’고 한다면 독자의 주관적인 연상을 속뜻이라고 부르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말씀의 속뜻은 우리가 문자를 넘어 마음대로 만들어 내는 뜻이 아니라,스베덴보리의 주장에 따르면 주님께서 주신 바로 그 말씀 안에 있는 뜻입니다.그렇기 때문에 말씀의 문자 자체도 소중히 다루어야 합니다.
결국AC.65가 보여 주는 것은‘원어연구냐속뜻이냐’라는 선택이 아닙니다.인간에게는 말씀의 문자가 주어져 있고 우리는 그것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읽어야 합니다.동시에 말씀은 그 문자적 의미로 다 소진되지 않으며,천사들에게는 그 안에서 뜻하는 내적 의미가 지각됩니다.원어 연구는 전자를 돕는 귀한 도구일 수 있지만 그 자체가 후자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가장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원어 연구는 필요 없지 않습니다.오히려 말씀의 문자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매우 유익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원어를 안다는 것 자체가 말씀의 속뜻을 안다는 뜻은 아닙니다.AC.65는 문자를 버리라고 하지 않고,우리가 읽는 그 문자 안에 천사들이‘영광’이라고 부를 만큼 아름답고 질서 있는 내적 의미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제가말씀을읽고있을때,어떤이들이하늘의첫입구뜰까지들려올라갔고,그곳에서저와대화를나누었습니다.그들은그곳에서는말씀속의어떤단어나글자도전혀이해할수없고,오직가장가까운내적의미에서뜻하는것만을이해할수있다고말했습니다.그리고그내적의미가너무도아름답고,연속의질서가너무도완전하며,그들을너무도깊이감동시켜서,그들은그것을‘영광’(glory)이라고불렀다고하였습니다. Certain ones were taken up to the first entrance court of heaven, when I was reading the Word, and from there conversed with me.They said they could not there understand one whit of any word or letter therein, but only what was signified in the nearest interior sense, which they declared to be so beautiful, in such order of sequence, and so affecting them, that they called it glory.
해설
AC.65는 바로 앞 AC.64와 함께 읽어야 가장 잘 이해됩니다. AC.64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에는 문자적 의미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속뜻이 있으며, 천사들은 말씀의 문자와 이름이 아니라 그것들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고 설명했습니다. AC.65에서는 이제 그 설명을 하나의 경험으로 이어 갑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읽고 있을 때 어떤 이들이 ‘하늘의첫입구뜰’까지 들려 올라갔고, 그곳에서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거기에서 말씀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이해할 수 없었고, 오직 ‘가장가까운내적의미에서뜻하는것’만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 아름답고, 연속의 질서가 너무 완전하며, 자신들을 너무 깊이 감동시켰기 때문에 그것을 ‘영광’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먼저 이 글은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실제 영적 경험으로 제시하는 기록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AC.65는 비유를 만들어 ‘천사라면아마이렇게말씀을읽을것이다’라고 상상하는 글이 아닙니다. 저자는 자신이 말씀을 읽고 있을 때 실제로 어떤 이들이 하늘의 첫 입구 뜰까지 들려 올라갔고 그들과 대화했다고 기록합니다. 따라서 이 글을 해설할 때에는 한편으로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실제 경험으로 제시한다는 사실을 존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독자에게도 반드시 같은 경험이 일어나야 한다거나 우리가 그 영적 경험의 세부 구조를 본문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처럼 설명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하늘의첫입구뜰’이라는 표현도 그런 경우입니다. 처음 읽으면 ‘천국의어느층인가?첫째천국보다더낮은곳인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65는 여기서 천국의 지도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것을 곧 ‘비교적낮은단계의하늘영역’이라고 확정하기보다, 본문 그대로 ‘하늘의첫입구뜰’이라고 두고 이 경험의 핵심에 집중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곳에 들려 올라간 이들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씀 속의 ‘어떤단어나글자도전혀이해할수없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AC.64에서 천사들이 말씀의 문자와 역사적 이름을 지각하지 않고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을 지각한다고 했던 설명과 직접 이어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천사에게는단어가전혀없고오직추상적인의미만있다’는 일반적인 언어 이론까지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AC.65가 직접 말하는 것은 그들이 그곳에서 스베덴보리가 읽고 있던 말씀의 단어나 글자를 이해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장가까운내적의미에서뜻하는것’을 이해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가장가까운내적의미’라는 표현은 특히 중요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문자바로안쪽의영적의미이며그보다더깊은곳에는천적의미가있다’는 식으로 층위를 확정하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과 뒤의 설명들을 함께 보면 말씀의 여러 의미에 관한 더 풍부한 교리가 나오지만, AC.65자체는 여기서 그 구조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번에는 원문이 말하는 그대로 ‘가장가까운내적의미’라고 두고, 그 의미조차 천사들에게 얼마나 아름답고 질서 있게 지각되었는지를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표현 자체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초보 독자에게도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이므로 별도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각한 내적 의미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아름다움’이고 다른 하나는 ‘연속의질서’입니다. 특히 ‘insuchorderofsequence’라는 표현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가 서로 관계없는 상징들의 모음처럼 지각된 것이 아니라 어떤 연속적인 질서 가운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창1을 읽으면서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빛에서 궁창으로, 식물에서 광명체로, 생물에서 사람으로 이어지는 설명은 각 단어의 뜻을 하나씩 풀어 놓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하나의 흐름을 이루었습니다. 다만 이 창1의 사례는 AC.65의 ‘연속의질서’를 이해하기 위한 좋은 예이지, 이 한 구절만으로 말씀의 모든 내적 의미가 어떤 구조로 연결되는지를 다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의미는 또한 그들을 깊이 감동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영광’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에서도 먼저 본문이 실제로 말하는 만큼만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AC.65는 그들이 왜 ‘glory’라는 단어를 사용했는지에 관한 상응론을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영광은언제나신적진리가사랑과결합되어나타나는상태이므로여기서도정확히그것을뜻한다’고 이번 한 문장에 완성된 정의를 가져오기보다, 그들이 말씀의 내적 의미의 아름다움과 완전한 연속의 질서에 깊이 감동되어 그것을 ‘영광’이라고 불렀다는 사실부터 받아들이면 충분합니다.
그렇다고 ‘영광’을 단순히 ‘정말아름다웠다’ 정도의 감탄사로 축소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들이 아름답고 완전한 질서 가운데 지각한 것은 바로 ‘말씀의내적의미’였습니다. 따라서 적어도 이 문맥에서 ‘영광’은 말씀의 내적 의미가 천사적 지각 안에서 얼마나 아름답고 질서 있고 감동적인 것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강한 표현입니다. 성경에서 ‘영광’이라는 말이 어떤 속뜻을 갖는지는 그 표현을 직접 해설하는 관련 AC에서 충분히 살펴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AC.65에서 또 하나 매우 중요한 것은 이 일이 ‘제가말씀을읽고있을때’ 일어났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계에서 말씀을 읽고 있었고, 그와 대화한 이들은 하늘의 첫 입구 뜰에서 그 말씀의 단어나 글자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에서 뜻하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이 장면은 AC.64에서 말한 인간의 문자와 천사적 지각 사이의 관계를 매우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 곧바로 ‘사람이성경을읽을때마다반드시특정천사들이동시에그내적의미를읽는다’는 식으로 모든 세부 작동 방식을 AC.65하나에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확실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읽는 동안 이러한 경험을 했다고 증언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은 말씀의 문자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는 중요한 질문으로도 이어집니다. ‘천사들은단어나글자를이해하지않는다니,그렇다면인간에게도단어와문법과원어는별로중요하지않은것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결론은 AC.65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천사들이 말씀을 지각하는 방식과 자연계의 인간이 말씀을 읽는 방식은 같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말씀은 실제로 단어와 문장으로 주어져 있으며, 우리는 그 문자를 통해 말씀을 읽습니다. 따라서 천사들이 문자에서 떠난 의미를 지각한다는 사실이 인간에게 문자를 소홀히 하라는 명령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말씀의 문자를 더욱 신중하게 대해야 할 이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읽는 바로 그 말씀 안에 천사들이 지각하는 내적 의미가 있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설명이기 때문입니다. 문자와 속뜻을 서로 경쟁시키는 대신, 주님께서 말씀을 문자로 우리에게 주셨고 그 안에 더 깊은 의미를 두셨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원어 연구나 정확한 번역도 그 자체로 속뜻은 아니지만 말씀의 문자를 정확하게 읽기 위한 귀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현재 연결된 심화에서 따로 살펴보겠습니다.
또 AC.65를 읽고 ‘나도천사들처럼말씀의내적의미를직접보고싶다’는 마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글 자체는 독자에게 그런 경험을 추구하라고 권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스베덴보리가 경험한 영적 개방과 우리가 말씀을 읽다가 깊은 깨달음이나 감동을 얻는 일을 곧 같은 종류의 경험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말씀을 읽다가 깊이 감동받고 삶이 변화되는 것은 귀한 일이지만, 그것을 곧 AC.65의 ‘하늘의첫입구뜰’에서 이루어진 경험과 동일시할 근거는 이번 글에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특별한 경험은 특별한 경험대로 존중하고, 우리의 말씀 읽기는 말씀 읽기대로 주님 앞에서 충실하게 이어 가는 것이 좋습니다.
무엇보다 AC.65는 독자의 관심을 신비 체험 자체보다 ‘말씀’으로 돌립니다. 이 경험에서 놀라운 것은 어떤 사람들이 하늘로 들려 올라갔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거기서 만난 것이 말씀의 내적 의미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 아름답고, 연속의 질서가 너무 완전하며, 그들을 너무 깊이 감동시켜 ‘영광’이라고 불릴 정도였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경험이 가리키는 중심도 결국 스베덴보리가 아니라 말씀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AC를 읽는 태도에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AC의 목적이 독자로 하여금 ‘나도스베덴보리처럼영계를보고싶다’는 데 머물게 한다면 중심이 옮겨진 것입니다. AC.65가 보여 주는 것은 오히려 우리가 매일 읽을 수 있는 말씀 안에, 인간의 눈에는 문자로 보이지만 천사들에게는 아름답고 완전한 질서 가운데 지각되어 ‘영광’이라 불리는 내적 의미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AC가 중요하다면 바로 그 말씀의 깊이를 열어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도 말씀과 AC의 순서를 분명히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읽었기 때문에 이 경험이 일어났고, 그들이 지각한 것도 말씀의 내적 의미였습니다. AC.65는 새로운 영적 체험을 말씀 위에 올려놓는 글이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내적 의미가 천사적 지각에서 얼마나 아름답고 질서 있는지를 자신의 경험을 통해 증언하는 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짧은 글은 AC.64의 설명을 한 장면으로 보여 줍니다. 인간에게는 말씀의 단어와 글자가 있고, 그 안에는 천사들이 지각하는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의 아름다움과 연속의 질서는 그들에게 ‘영광’이라 불릴 만큼 깊은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