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57.심화

 

4. ‘삼하5:1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 (삼하5:1) Behold, we are thy bone and thy flesh. (2 Sam. 5:1) (AC.157)

 

 

이 구절이 AC.157에 인용된 이유 역시, ‘뼈와 살’이라는 표현이 단순 혈연 확인이 아니라, 같은 생명과 같은 질서 안에 속한 결합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삼하5:1에서 이스라엘 지파들이 다윗에게 ‘우리는 왕의 한 골육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같은 민족이라는 뜻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는 당신과 같은 생명 안에 속하며, 당신의 통치 질서와 하나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선언에 가깝습니다.

 

AC.157의 문맥에서 스베덴보리는 ‘’와 ‘’을 영적 상응으로 읽습니다. ‘’는 인간 안의 외적 진리 구조, 곧 지탱하고 형태를 유지하는 것을 뜻하고, ‘’은 그 안에 흐르는 살아 있는 선과 affection을 뜻합니다. 따라서 ‘뼈와 살’은 단순 육체가 아니라, 진리와 선이 결합된 살아 있는 인간 전체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우리는 왕의 뼈와 살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 정치적 충성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다윗은 자주 주님, 특히 왕 되신 주님과 그분의 신적 진리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영적으로 보면, 교회가 주님의 통치 아래 하나 되기를 인정하는 장면처럼 읽힙니다. 즉, 같은 선과 진리 안에 속한 결합의 고백입니다.

 

또 여기에는 ‘통치’의 성격도 드러납니다. 세상 통치는 강압과 외적 권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지만, 천국적 통치는 같은 생명 안의 결합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지파들은 다윗을 단순 힘 있는 지도자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본질적으로 연결된 존재’로 받아들입니다. 말씀에서 이런 ‘골육’의 표현은 언제나 단순 친족 이상의 깊은 결합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이 구절은 창2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와도 흐름이 이어집니다. 거기서 그것은 남자와 여자, 곧 진리와 선의 결합을 뜻했다면, 여기서는 왕과 백성, 곧 주님과 교회의 결합을 나타냅니다. 결국 AC.157에서 이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 ‘뼈와 살’이라는 표현이 말씀 전체에서 같은 생명, 같은 선과 진리, 같은 영적 질서 안의 결합을 뜻하는 상징이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AC.157, 창2:23,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 - own 관련 여러 구절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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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7, 심화 3, ‘삿9:2’

AC.157.심화 3. ‘삿9:2’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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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7.심화

 

3. ‘9:2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 하니 (9:2) Remember that I am your bone and your flesh. (Judges 9:2) (AC.157)

 

 

이 구절이 AC.157에 인용된 이유도, 말씀에서 뼈와 살’이라는 표현이 단순 혈연관계를 넘어, 같은 본성과 같은 생명 질서 안에 속함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9:2에서 아비멜렉은 세겜 사람들에게 나는 너희의 골육이다’라고 말하면서 자신과 그들 사이의 친밀성과 동일성을 강조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정치적 지지를 얻기 위한 혈연 호소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런 표현을 영적 상응의 관점에서 읽습니다.

 

AC.157의 문맥에서 ’는 보다 외적이고 지탱하는 진리 구조를, ‘’은 살아 있는 선과 affection을 뜻합니다. 그래서 뼈와 살’은 단순 육체 조합이 아니라, 진리와 선이 결합된 살아 있는 인간 전체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너는 내 뼈요 살이다’라는 말은, ‘너와 나는 같은 생명 안에 속한다’, ‘같은 사랑과 같은 질서 안에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사기 9장의 경우는 조금 더 의미심장합니다. 아비멜렉은 이 표현을 이용해 사람들의 affection과 결속감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려 합니다. 다시 말해, ‘같은 골육’이라는 표현은 원래는 생명의 친밀한 결합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그것이 자연적, 정치적 목적에 사용됩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보면 이것은 외적 결합이 내적 결합을 흉내 내는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말씀에서 뼈와 살’이라는 표현 자체는 본래 선과 진리, 사랑과 이해의 결합을 뜻하는 깊은 상징인데, 인간은 그것을 자연적 유대나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 혈연 언급이 아니라, 인간이 같은 생명’의 언어를 어떻게 자기편 만들기의 수단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 구절은 창2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과 연결됩니다. 2에서는 그것이 주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본질적 결합을 뜻했다면, 여기서는 그 표현이 겉 사람 수준으로 내려와 정치적 설득과 자연적 연대의 언어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런 경우에도 여전히 그 표현 속의 본래 영적 의미를 읽어 냅니다. 곧, 인간은 본능적으로 같은 생명 안에 속하고 싶어 하는 존재’이며, 진짜 천국적 결합은 혈연이 아니라 같은 선과 진리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AC.157, 심화 4, ‘삼하5:1’

AC.157.심화 4. ‘삼하5:1’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 (삼하5:1) Behold, we are thy bone and thy flesh. (2 Sam. 5:1) (AC.157) 이 구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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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7, 심화 2, ‘겉 사람과 속 사람의 결합’

AC.157.심화 2. ‘겉 사람과 속 사람의 결합’ 야곱은 이후 교회의 외적 차원과 연결되는 인물인데, ‘뼈와 살’이라는 표현은 겉 사람과 속 사람 사이에도 결합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AC.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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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겉 사람과 속 사람의 결합

 

야곱은 이후 교회의 외적 차원과 연결되는 인물인데, ‘뼈와 살이라는 표현은 겉 사람과 속 사람 사이에도 결합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AC.157 심화 1)

 

 

스베덴보리에게서 창세기의 인물들은 단순 역사 인물이 아니라, 인간 안의 여러 영적 상태들과 교회의 여러 차원을 표상합니다. 그 가운데 야곱은 특별히 ‘겉 사람’ 혹은 교회의 외적 차원과 깊이 연결되는 인물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보다 천적인 상태, 이삭은 내적, 합리적 차원, 야곱은 실제 삶과 행위, 자연적 인간의 차원과 많이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야곱은 ‘삶의 현장 속 인간’을 대표합니다. 아직 완전히 속 사람과 하나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주님의 질서 안으로 이끌릴 수 있는 겉 사람입니다.

 

그래서 라반이 야곱에게 ‘너는 참으로 내 뼈요 살이다’라고 말하는 장면은 단순 친척 확인 이상의 뜻을 가집니다. AC.157의 흐름 속에서 ‘’는 외적 진리 구조를, ‘’은 그 안에 살아 있는 선과 affection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뼈와 살’이라는 표현은 단순 혈연이 아니라, 서로 같은 생명 질서 안에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뜻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야곱이 완전히 천적 인간도 아니고, 아직 많은 자연성과 자기 중심성을 가진 상태라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버려진 존재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겉 사람 자체를 악으로만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겉 사람은 속 사람과 결합될 때 비로소 살아납니다. 문제는 겉 사람이 자기 자신만으로 독립하려 할 때입니다.

 

그래서 ‘뼈와 살’이라는 표현은, 야곱 같은 겉 사람 안에도 속 사람과 연결될 수 있는 구조가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겉 사람은 ‘’처럼 비교적 단단하고 외적인 구조를 가집니다. 반면 속 사람은 ‘’처럼 생명과 affection을 공급합니다. 둘은 서로 다른 차원이지만, 결합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듭남(regeneration)이란 바로 이 결합 과정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진리를 머리로만 아는 상태는 아직 겉 사람 수준에 머무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사랑과 결합해 실제 삶이 되기 시작하면, 속 사람의 생명이 겉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때 겉 사람은 더 이상 단순 껍데기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 구조가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야곱 이야기를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대부분 인간은 처음부터 천적 상태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야곱처럼 자연적이고 계산적이며, 자기 보호적인 상태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그런 겉 사람까지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점차 속 사람과 결합시키십니다.

 

따라서 ‘뼈와 살’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우리는 친척이다’라는 말이 아니라, 겉 사람도 속 사람과 연결될 수 있고, 자연적 삶도 주님의 생명을 담는 그릇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의 표현으로 읽힙니다. 이것이 AC.157에서 이 표현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AC.157, 심화 3, ‘삿9:2’

AC.157.심화 3. ‘삿9:2’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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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6, 심화 1, ‘창29:14’

AC.156.심화 1. ‘창29:14’ 라반이 이르되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주하더니 (창29:14) Surely thou art my bone and my flesh. (Gen. 29:14) (AC.157) 이 구절이 AC.157에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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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7.심화

 

1. ‘29:14

 

라반이 이르되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주하더니 (29:14) Surely thou art my bone and my flesh. (Gen. 29:14) (AC.157)

 

 

이 구절이 AC.157에 인용된 이유는, 말씀에서 내 혈육(my bone and my flesh)이라는 표현이 단순 혈연관계를 넘어, 같은 본성과 같은 생명에 속한 결합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AC.157의 흐름에서 스베덴보리는 ‘’와 ‘’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계속 설명하고 있는데, 특별히 ‘’는 보다 외적이고 지탱하는 진리 구조를, ‘’은 그 안에 살아 있는 선과 affection을 뜻합니다. 따라서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는 말은 단순 친척 확인이 아니라, ‘너와 나는 같은 생명 질서 안에 있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29:14에서 라반은 야곱을 단순 외부 손님으로 대하지 않고, 자기와 같은 혈육, 곧 자기 생명권 안에 속한 자로 인정합니다. 스베덴보리식 속뜻에서는 이것이 단순 가족 관계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야곱은 이후 교회의 외적 차원과 연결되는 인물인데, ‘뼈와 살’이라는 표현은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 사이, 곧 겉 사람과 속 사람 사이에도 결합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특히 AC.149 이후 스베덴보리는 계속 ‘’와 ‘’을 영적 상징으로 사용합니다. 에스겔의 마른 뼈 환상에서는 죽은 상태의 인간이 주님의 breath로 살아나는 모습이 나오고, 주님의 부활 장면에서는 ‘영은 살과 뼈가 없다’고 하심으로써, 신적 인성의 실제성과 충만함을 보여줍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뼈와 살’은 단순 육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 전체 구조를 뜻합니다.

 

그래서 AC.157에서 이 구절이 인용되는 이유는, 참된 결합은 단순 외적 접촉이 아니라 같은 선과 진리, 같은 생명 질서 안에 속하는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만 있으면 차갑고 딱딱한 구조에 불과하지만, ‘’이 함께할 때 거기에 살아 있는 affection과 생명이 들어옵니다. 즉, 진리와 선의 결합이 완전한 인간을 이룹니다.

 

또 이 표현은 앞선 창2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와도 연결됩니다. 거기서도 핵심은 단순 육체적 동일성이 아니라, 서로 같은 생명과 본질 안에서 결합된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라반의 말 역시, 말씀 전체의 상응 체계 안에서는 ‘같은 생명 안에 속함’, ‘같은 affection과 진리 안에서 연결됨’을 뜻하는 표현으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AC.157, 심화 2, ‘겉 사람과 속 사람의 결합’

AC.157.심화 2. ‘겉 사람과 속 사람의 결합’ 야곱은 이후 교회의 외적 차원과 연결되는 인물인데, ‘뼈와 살’이라는 표현은 겉 사람과 속 사람 사이에도 결합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AC.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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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7, 창2:23,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 - 고대 세계에 통용되던, own 관련 언어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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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use she was taken out of man [vir]. (2:23)

 

AC.157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이 그 안에 속 사람이 들어 있는, 겉 사람의 own을 뜻하였기 때문에, 고대에는 자기의 사람들, 곧 같은 집이나 같은 가족에 속한 사람들이나, 어떤 정도로든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라반은 야곱에게 말하기를, Inasmuch as “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 signified the own of the external man in which was the internal, therefore in ancient times all those were called “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 who could be called their own [proprii], and were of one house, or of one family, or in any degree of relationship. Thus Laban said of Jacob,

 

라반이 이르되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주하더니 (29:14) Surely thou art my bone and my flesh. (Gen. 29:14)

 

아비멜렉도 자기 어머니의 형제들과 외조부 집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And Abimelech said of his mother’s brethren, and of the family of the house of his mother’s father,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 하니 (삿9:2) Remember that I am your bone and your flesh. (Judges 9:2)

 

또한 이스라엘 지파들이 다윗에게 말하기를, The tribes of Israel also said of themselves to David,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 (삼하5:1) Behold, we are thy bone and thy flesh. (2 Sam. 5:1)



해설

 

AC.157은 앞 절의 선언, 곧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 ‘시적 표현이나 개인적 감정의 언어가 아니라’, 고대 세계 전체에 통용되던 ‘영적, 사회적 인식의 언어’였음을 보여주는 단락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성경 안의 실제 역사적 용례들을 통해, 이 표현이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분명히 합니다.

 

핵심은 이 표현이 ‘자기의 사람들(their own, [proprii])을 가리키는 말이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단순한 친근감이나 애정 표현이 아니라, ‘같은 생명권, 같은 소속, 같은 정체성 안에 있다는 인식’을 뜻합니다. 즉 ‘너는 나와 하나의 own에 속한다’는 선언입니다.

 

라반이 야곱에게 한 말은 혈연적 사실을 넘어, 야곱을 자기 집안의 일부로 완전히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아비멜렉의 말 역시 정치적 설득의 언어이지만, 그 근거는 혈연적 자기 동일성에 있습니다. 다윗에게 한 이스라엘 지파들의 말도 마찬가지로, 왕과 백성이 단순한 계약 관계가 아니라 ‘하나의 몸과 같은 관계’임을 선언하는 말입니다.

 

이 모든 용례에서 공통적인 것은, ‘뼈와 살’이라는 표현이 ‘분리될 수 없는 결속’을 뜻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외적 연합이 아니라, own으로 묶인 연합입니다. 그래서 이 표현은 매우 강력합니다. 한편으로는 보호와 충성의 언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비판적 거리두기가 불가능한 상태’를 뜻하기도 합니다.

 

이 점이 창2의 문맥에서는 결정적으로 중요해집니다. 앞 절에서 ‘여자’가 ‘아내’로 불리고, 이제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언어가 등장함으로써, 인간의 own은 더 이상 외부에 있는 어떤 것으로 취급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 자신’, 나의 집, 나의 몸, 나의 생명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이것이 바로 다음 절(AC.158-159)로 이어지는 논리적, 영적 다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는 말은, 단순히 결혼제도의 기원이 아니라, ‘자기의 own과의 결합이 최종적으로 정당화되는 단계’를 뜻합니다. AC.157은 그 결합이 왜 그렇게 강력하고 되돌리기 어려운지를, 고대 언어의 실제 사용을 통해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심화

 

1. ‘29:14

 

 

AC.156, 심화 1, ‘창29:14’

AC.156.심화 1. ‘창29:14’ 라반이 이르되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주하더니 (창29:14) Surely thou art my bone and my flesh. (Gen. 29:14) (AC.157) 이 구절이 AC.157에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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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겉 사람과 속 사람의 결합

 

 

AC.157, 심화 2, ‘겉 사람과 속 사람의 결합’

AC.157.심화 2. ‘겉 사람과 속 사람의 결합’ 야곱은 이후 교회의 외적 차원과 연결되는 인물인데, ‘뼈와 살’이라는 표현은 겉 사람과 속 사람 사이에도 결합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AC.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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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9:2

 

 

AC.157, 심화 3, ‘삿9:2’

AC.157.심화 3. ‘삿9:2’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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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삼하5:1

 

 

AC.157, 심화 4, ‘삼하5:1’

AC.157.심화 4. ‘삼하5:1’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 (삼하5:1) Behold, we are thy bone and thy flesh. (2 Sam. 5:1) (AC.157) 이 구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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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8, 창2:23, ‘man [vir]’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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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6, 창2:23,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AC.156-159)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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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use she was taken out of man [vir]. (2:23)

 

AC.156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은 겉 사람의 own을 뜻합니다. 여기서 (bone)는 아직 그다지 살아나지 않은 own을 뜻하고, ‘(flesh)은 살아난 own을 뜻합니다. 또한 남자(Man)는 속 사람을 뜻하며, 이어지는 다음 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이 속 사람이 겉 사람과 결합되었기 때문에, 이전에 여자(woman)라 했던 own을 여기서는 아내(wife)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Now)라는 말은 상태가 변화되었기 때문에 이때에 이렇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 signify the own of the external man; “bone,” this own not so much vivified, and “flesh,” the own that is vivified. Man, moreover, signifies the internal man, and from his being so coupled with the external man as is stated in the subsequent verse, the own which was before called “woman” is here denominated “wife.” “Now” signifies that it was thus effected at this time because the state was changed.



해설

 

AC.156은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라는 선언이 단순한 감탄이나 결혼 서약의 시초가 아니라, ‘인간 내적 구조의 변화가 언어로 표출된 장면’임을 밝히는 단락입니다. 이 말은 인식의 언어가 아니라, 상태의 언어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을 철저히 ‘own’의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는 여전히 생명이 적은 own이며, ‘’은 주님에 의해 살아난 own입니다. 즉 이 문장은 own이 완전히 제거되었음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own이 ‘살아난 정도의 차이’를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적 상태에서 이미 벗어나,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섰음을 보여주는 미묘한 징표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전환은 명칭의 변화입니다. 이전까지 ‘여자’라 하던 것을 이제는 ‘아내’라고 합니다. 이 변화는 역할이나 위계의 변화가 아니라, ‘결합 방식의 변화’를 뜻합니다. ‘남자’, 즉 ‘사람’은 여전히 속 사람을 뜻하고, ‘아내’는 겉 사람의 own입니다. 이제 이 둘은 분리된 상태가 아니라, 상호 결합된 상태로 인식됩니다. own이 더 이상 외부에 있는 어떤 것으로 보이지 않고, ‘나 자신’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합니다.

 

이제’라는 말은 이 모든 것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상태의 변화에 따른 필연적 결과’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전 상태에서는 own이 ‘여자’로서 어느 정도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 own이 속 사람과 하나의 몸처럼 인식됩니다. 이것이 바로 이후에 나타날 더 큰 위험의 전조입니다. own이 살아나되, 너무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AC.156은 따라서 중립적인 진술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매우 긴장된 지점에 서 있습니다. 주님에 의해 살아난 own이 ‘아내’로 불리며 결합되었으나, 이 결합은 아직 ‘시험을 거치지 않은 결합’입니다. 그래서 바로 다음 단락들에서는 이 결합이 어떻게 사랑의 언어로 정당화되고, 동시에 질서의 한계를 넘게 되는지가 이어서 드러나게 됩니다.

 

지금 이 절은 창2의 정서적 정점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전환의 경고등’과도 같은 자리입니다. 이 긴장을 품은 채로 AC.157-159로 넘어가게 되면, ‘버리고 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는 말이 왜 그토록 결정적인 문장이 되는지가 더욱 또렷해질 것입니다.

 

 

 

AC.157, 창2:23,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 - 고대 세계에 통용되던, own 관련 언어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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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5, 창2:22, ‘말씀 자체의 가장 깊은 핵심을 직접적으로 열어 보이는 단락’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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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5.심화

 

1. ‘31:22

 

반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 (31:22) Jehovah hath created a new thing in the earth, a woman shall compass a man. (Jer. 31:22) (AC.155)

 

 

이 구절이 AC.155에 인용된 이유는, ‘여자(woman)로 상징되는 proprium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상태가 아니라, 주님께 속한 선과 진리를 감싸고 결합하는 방향으로 새롭게 변화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155의 흐름은, 인간의 proprium 자체는 본래 악으로 기울지만, 주님께서 그것을 완전히 버려두지 않으시고, 다시 질서 안으로 돌이키실 수 있다는 데로 이어집니다. 렘31:22의 ‘새 일’은 바로 이 역설적 회복을 상징하는 말씀으로 읽힙니다.

 

31:22의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만 보면 매우 난해합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도 여러 해석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상응으로 읽습니다. 여기서 ‘여자’는 이전 창세기 해석들에서처럼 인간의 proprium, 곧 자기처럼 느껴지는 의지와 애정의 구조를 뜻하고, ‘남자(man)는 보다 내적이고 주님께 속한 진리와 지성의 원리를 뜻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둘러싼다(compass)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단순 지배나 공격의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감싸고 결합하고 보호하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즉, 이전에는 proprium이 진리를 자기 자신 아래 두고 왜곡하려 했지만, 여기서는 반대로 proprium 자체가 주님의 질서 안에서 재형성되어, 진리와 선을 둘러싸고 섬기는 방향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일’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AC 초반부 전체 흐름 속에서 매우 희망적인 전환처럼 등장합니다. 앞에서는 계속 proprium의 위험성과 타락 가능성이 강조되었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믿는 순간 악과 거짓으로 기울어졌고, 여자라는 proprium은 뱀의 유혹을 받아들이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바로 그 proprium이 완전히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재형성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열립니다.

 

즉, 주님은 인간을 proprium 없는 존재로 되돌리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 안의 자기감과 자유 구조 자체를 새롭게 하십니다. 이전에는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돌던 proprium이, 이제는 주님의 선과 진리를 감싸며 움직이는 상태로 변화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에게서 ‘천사적 proprium’ 혹은 ‘주님께 열린 proprium’의 방향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새 일’이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이것은 단순 외적 개혁이 아니라, 인간 존재 구조 안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창조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원래 타락의 통로였던 proprium이, 이제는 사랑과 진리를 담는 그릇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AC.155에서 이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 인간의 proprium이 단순히 제거될 대상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 안에서 새롭게 재형성될 수 있으며, 그 결과 원래는 타락의 통로였던 ‘여자’가 이제는 진리와 선을 감싸고 섬기는 구조로 변화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AC.155, 창2:22, ‘말씀 자체의 가장 깊은 핵심을 직접적으로 열어 보이는 단락’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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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2:22)

 

AC.155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a rib was built into a woman)라는 말 속에는, 문자로부터는 누구도 결코 다 헤아릴 수 없는 더 깊은 것들이 가장 안쪽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 가장 안쪽 내용이 언제나 주님 자신과 그의 나라를 바라보고 있으며, 말씀의 모든 생명은 바로 거기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이 본문에서도, 그 가장 안쪽에서는 천적 혼인(heavenly marriage)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천적 혼인은 이러한 성질을 지니는데, 곧 그것은 own 안에 존재하며,own이 주님에 의해 살아나게 될 때, 주님의 신부와 아내(bride and wife)라 불리게 됩니다. 이렇게 살아난 사람의 own은 사랑의 모든 선과 신앙의 모든 진리에 대한 퍼셉션을 지니며, 그 결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과 결합된 모든 지혜와 지성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에 의해 살아난 이 own,주님의 신부와 아내라 불리는 것의 성질은 간결하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이 정도만 말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천사들은 자신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지각하고 있으나, 그 일에 대해 깊이 숙고하지 않을 때에는 자신들이 자기로부터 사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그들 안에는 이러한 성질의 보편적 애정이 있어서,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서 아주 조금만 벗어나도 곧바로 변화를 지각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보편적 퍼셉션 안에 머무는 동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와 행복을 누립니다. 이와 같은 own도 예레미야서에서 뜻해지는데, The words “a rib was built into a woman” have more things inmostly concealed in them than it is possible for anyone ever to discover from the letter; for the Word of the Lord is such that its inmost contents regard the Lord himself and his kingdom, and from this comes all the life of the Word. And so in the passage before us, it is the heavenly marriage that is regarded in its inmost contents. The heavenly marriage is of such a nature that it exists in the own, which, when vivified by the Lord, is called the “bride and wife” of the Lord. Man’s own thus vivified has a perception of all the good of love and truth of faith, and consequently possesses all wisdom and intelligence conjoined with inexpressible happiness. But the nature of this vivified own, which is called the “bride and wife” of the Lord, cannot be concisely explained. Suffice it therefore to observe that the angels perceive that they live from the Lord, although when not reflecting on the subject they know no other than that they live from themselves; but there is a general affection of such a nature that at the least departure from the good of love and truth of faith they perceive a change, and consequently they are in the enjoyment of their peace and happiness, which is inexpressible, while they are in their general perception that they live from the Lord. It is this own also that is meant in Jeremiah, where it is said:

 

반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 (렘31:22) Jehovah hath created a new thing in the earth, a woman shall compass a man. (Jer. 31:22)

 

이 말씀 역시 천적 혼인을 뜻하며, 여기서 여자(woman)는 주님에 의해 살아난 own을 의미합니다. 이 여자에 대해 두르다(to compass)라는 표현이 사용된 이유는,own이 갈빗대가 살이 되어 심장을 두르는 것처럼, 사랑의 중심을 둘러싸는 성질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It is the heavenly marriage that is signified in this passage also, where by a “woman” is meant the own vivified by the Lord, of which woman the expression “to compass” is predicated, because this own is such that it encompasses, as a rib made flesh encompasses the heart.



해설

 

AC.155는 창세기 2장 전체, 더 나아가 ‘말씀 자체의 가장 깊은 핵심을 직접적으로 열어 보이는 단락’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더 이상 인간의 상태만을 말하지 않고, 그 모든 구조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밝힙니다. 그것이 바로 ‘천적 혼인’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원리를 다시 한번 선언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 가장 안쪽이 언제나 ‘주님 자신과 그의 나라’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창2의 이 본문도 인간의 기원이나 결혼제도의 설명이 아니라, 주님과 인간, 더 정확히는 주님과 ‘주님에 의해 살아난 인간의 own’ 사이의 관계를 다룹니다.

 

여기서 천적 혼인은 인간 밖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own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점이 결정적입니다. 앞 단락들에서 반복해서 강조되었듯이, 인간의 own은 본질상 죽어 있으나, 주님에 의해 살아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살아난 own이 ‘주님의 신부와 아내’가 됩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인간의 own을 제거하지 않으시고, 그것을 당신과의 결합의 자리로 삼으십니다.

 

이렇게 살아난 own은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 대한 퍼셉션을 지니게 되며, 그 결과 모든 지혜와 지성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 지혜와 지성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형언할 수 없는 행복과 결합된 상태’입니다. 이는 앞서 AC.92, AC.154에서 말한 ‘평화의 고요’와 같은 계열의 상태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천사들조차도 자신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사실을 항상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는 설명입니다. 그들은 일상적 상태에서는 마치 자기로부터 사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그들 안에는 ‘보편적 애정’이 있어서, 사랑과 진리에서 아주 조금만 벗어나도 즉각적인 변화를 지각합니다. 이 민감한 퍼셉션이 그들을 다시 질서로 이끌며, 그 안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평화와 행복이 유지됩니다.

 

이 설명은 인간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참된 상태란, 끊임없이 ‘나는 주님으로부터 산다’를 의식적으로 되뇌는 상태가 아니라, ‘벗어날 때 곧바로 알 수 있는 상태’, 곧 중심이 살아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살아난 own의 표지입니다.

 

마지막으로 렘31:22의 말씀, ‘여자가 남자를 두르리라’는 구절이 인용됩니다. 이는 매우 상징적인 표현으로, 살아난 own이 사랑의 중심을 둘러싸 보호하고 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갈빗대가 살이 되어 심장을 두르는 것처럼, 주님에 의해 살아난 own은 더 이상 분열과 반항의 근원이 아니라, ‘결합과 보호의 자리’가 됩니다.

 

 

심화

 

1. ‘31:22

 

 

AC.155, 심화 1, ‘렘31:22’

AC.155.심화 1. ‘렘31:22’ 반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 (렘31:22) Jehovah hath created a new thing in the earth, a woman sh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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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6, 창2:23,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AC.156-159)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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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4, 창2:22, own에 대한 ‘가장 급진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단락’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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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4.심화

 

1. ‘사람의 own은 악 그 자체

 

사람의 own은 곧 악 그 자체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사람은 악과 거짓 외의 다른 것이 아닙니다. for the own of man is evil itself, and consequently man is nothing but evil and falsity. (AC.154)

 

주님은 왜 이런 걸 사람의 own으로 주셨나요? 그리고 위 결과적으로라는 말은 왜 나왔나요? 모든 사람이 같은 출발선,  여자라는 새로운 own에서 삶을 시작하는 게 아니었나요? 왜 누구는 흉측하고, 누구는 소년, 소녀’, 그리고 벌거벗은 어린아이처럼 보이나요?

 

 

AC.154 AC 초반부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문장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히 ‘사람의 own은 악 그 자체이다’, ‘사람은 악과 거짓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같은 표현은 처음 읽으면 거의 절망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own’은 단순 개성이나 자기감 전체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자기 자신 안에서 생명을 가지려는 상태’를 뜻한다는 점을 먼저 붙들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첫 질문, “주님은 왜 이런 걸 사람의 own으로 주셨는가?”에 대해 말하면, 스베덴보리는 사실 주님께서 ‘악 자체’를 인간에게 창조해 넣으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것은 자유로운 자기감(as if from himself)입니다. 인간은 반드시 자기 삶처럼 느껴야 사랑도 자유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자기감을 점점 자기 독립 생명으로 굳히기 시작하면서, proprium은 주님께 열린 구조에서 자기 자신에게 닫힌 구조로 변질됩니다. 바로 그 닫힌 상태가 ‘악한 proprium’입니다.

 

즉, 원래 허락된 것은 살아 있는 자유의 가능성이었는데, 인간이 그것을 자기중심으로 돌려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proprium을 설명할 때 자꾸 방향성을 강조합니다. 주님께 열려 있는 proprium과 자기 자신에게 닫힌 proprium은 같은 단어를 쓰지만 전혀 다른 상태입니다. 천사에게도 proprium은 있지만, 그것은 주님의 생명이 흐르는 proprium입니다. 반면 지옥적 인간의 proprium은 자기 자신을 생명의 근원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짚으신 ‘결과적으로(consequently)라는 단어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냥 “사람은 악이다”라고 툭 던지지 않습니다. 그는 논리 흐름을 만들고 있습니다. 즉, 인간이 자기 자신 안에 생명의 근원을 둔다면, 결과적으로(consequently) 인간은 악과 거짓 안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안에는 본래 독립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오직 주님께 있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 자신만을 중심 삼는 순간 그는 점점 주님으로부터 분리되고, 그 결과 악과 거짓 안으로 기울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기 ‘결과적으로’는 단순 접속사가 아니라, 인간 존재 구조에 대한 결론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 “왜 모두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하지 않는가?” 하는 부분은 아주 깊은 문제입니다. 겉으로 보면 모두 ‘여자’라는 vivified proprium을 받은 것처럼 보이는데, 왜 어떤 영들은 흉측하고, 어떤 영들은 소년, 소녀처럼 보이며, 어떤 천사들은 벌거벗은 어린아이처럼 보이느냐는 것이지요.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인간은 모두 같은 ‘가능성 구조’ 안에서 시작하지만,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방향으로 proprium을 사용했는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상태로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에서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말하는 것처럼, 영계에서 외모는 단순 외형이 아니라 내면 사랑의 형태입니다. 자기 사랑과 지배욕 안에 굳어진 영은 점점 왜곡되고 흉측해집니다. 반면 주님께 열린 사랑 안에 있는 천사들은 순수와 생명이 살아 있기 때문에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여기 어린아이는 미성숙이 아니라, innocence, 곧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동일한 최종 상태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에게 자유와 자기감의 구조는 허락되지만, 그 자유를 어디로 돌리느냐에 따라 인간 존재 자체가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점점 자기 자신 안으로 굳어지고, 어떤 사람은 점점 주님께 열립니다. 그리고 그 방향성이 결국 영적 형상 전체를 만들어 냅니다.

 

즉, 같은 출발 구조는 주어졌지만, 같은 방향성과 같은 사랑은 자동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바로 그 자유 안에서 자기 영원을 형성해 가는 존재입니다.

 

 

 

AC.154, 창2:22, own에 대한 ‘가장 급진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단락’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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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2:22)

 

AC.154

 

악과 거짓은 언제나 사람의 own에서만 가능하며, 또한 사람의 own으로부터만 나옵니다. 사람의 own은 곧 악 그 자체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사람은 악과 거짓 외의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 사실은 영들의 세계에서 사람의 own에 속한 것들이 눈앞에 제시될 때, 그것들이 말로 묘사하기조차 불가능할 만큼 흉측하게 보인다는 점에서 나에게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다만 own의 성질에 따라 차이가 있어, own에 속한 것들이 눈에 보이게 드러난 사람은 공포에 사로잡혀, 마치 악마에게서 도망치듯 자기 자신에게서 달아나고자 합니다. 그러나 주님에 의해 살아난 사람의 own은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며, 주님의 천적인 것이 적용될 수 있는 삶의 성질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보입니다. 특히 체어리티로 말미암아 생명을 받은 사람들은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지닌 소년들과 소녀들처럼 보이며, 순진함 안에 있는 이들은 꽃으로 엮은 화환이 가슴을 두르고 머리에는 관이 씌워진 벌거벗은 어린아이들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다이아몬드 같은 분위기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뛰놀고,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행복에 대한 퍼셉션을 지니고 있습니다. Nothing evil and false is ever possible which is not man’s own, and from man’s own, for the own of man is evil itself, and consequently man is nothing but evil and falsity. This has been evident to me from the fact that when the things of man’s own are presented to view in the world of spirits, they appear so deformed that it is impossible to depict anything more ugly, yet with a difference according to the nature of the own, so that he to whom the things of the own are visibly exhibited is struck with horror, and desires to flee from himself as from a devil. But truly the things of man’s own that have been vivified by the Lord appear beautiful and lovely, with variety according to the life to which the celestial of the Lord can be applied; and indeed those who have been endowed with charity, or vivified by it, appear like boys and girls with most beautiful countenances; and those who are in innocence, like naked infants, variously adorned with garlands of flowers encircling their bosoms, and diadems upon their heads, living and sporting in a diamond-like aura, and having a perception of happiness from the very inmost.



해설

 

AC.154는 인간의 own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진술 가운데서도 ‘가장 급진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단락’에 속합니다. 이 단락은 인간론의 바닥을 끝까지 내려갔다가, 곧바로 구원의 가능성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한 치의 완화도 없이 선언합니다. 악과 거짓은 오직 사람의 own에서만 가능하다고 말입니다. 이는 인간의 행동 일부가 악하다는 정도가 아니라, ‘own 자체가 악의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은 악과 거짓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라는 극단적으로 들리는 문장을 서슴지 않습니다. 이는 인간을 비하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을 정확히 구분하기 위한 전제입니다.

 

이 전제는 영들의 세계에서의 시각적 경험으로 뒷받침됩니다. own이 그대로 드러날 때, 그것은 가장 흉측한 형태로 보이며, 그 모습을 본 당사자조차도 공포에 질려 자신에게서 도망치고 싶어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흉측함이 ‘’이나 ‘정죄’의 결과가 아니라, ‘own의 본질적 상태’라는 사실입니다. 즉, 주님의 생명이 덮이지 않은 own은 그 자체로 그렇게 보입니다.

 

그러나 단락의 후반부는 방향을 완전히 바꿉니다. 동일한 ‘own’이라 할지라도, ‘주님에 의해 살아나게 될 때’ 그 모습은 전혀 달라집니다. 그것은 더 이상 흉측하지 않고, 오히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 변화는 own이 제거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그 안에 적용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체어리티와 순진함의 상태가 묘사되는 방식은 주목할 만합니다. 체어리티로 살아난 이들은 소년과 소녀의 모습으로, 순진함 안에 있는 이들은 벌거벗은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무력함이나 결핍의 상징이 아니라, ‘아무것도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않는 상태’의 상징입니다. 그들이 벌거벗었음에도 부끄러움이 없는 이유는, own을 자기의 것으로 붙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이아몬드 같은 분위기’, ‘가장 깊은 곳에서의 퍼셉션’이라는 표현은, 이 상태가 감정적 만족이나 외적 평안이 아니라, ‘존재의 중심에서 오는 기쁨’임을 보여줍니다. 이는 앞서 AC.92에서 말한 ‘평화의 고요’와도 정확히 상응합니다.

 

AC.154는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인간의 own은 본질상 악이지만, 주님의 생명이 그것을 덮을 때, 동일한 own이 천국의 아름다움을 담는 그릇이 됩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핵심은 own을 부정하거나 파괴하는 데 있지 않고, ‘own을 주님께 내어드려 살아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 통찰은 이어지는 AC.155에서, 여자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언어로 넘어가며, 또 다른 긴장을 불러오게 됩니다.

 

 

심화

 

1. ‘사람의 own은 악 그 자체다

 

 

AC.154, 심화 1, ‘사람의 own은 악 그 자체다’

AC.154.심화 1. ‘사람의 own은 악 그 자체다’ 사람의 own은 곧 악 그 자체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사람은 악과 거짓 외의 다른 것이 아닙니다. for the own of man is evil itself, and consequently man is nothing b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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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5, 창2:22, ‘말씀 자체의 가장 깊은 핵심을 직접적으로 열어 보이는 단락’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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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3, 창2:22, 여자를 ‘만드시고’를 'build'라 하시는 이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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