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65.심화

 

2. ‘선지자들이 때때로 보았던 천사들의 모습

 

반면에 그만큼의 innocence를 지니지 않은 자들은 단정하고 빛나는 옷을 입고 나타나며, 이는 마치 다이아몬드 비단과 같은 옷으로, 선지자들이 때때로 보았던 천사들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while those who have not so much innocence are clad in becoming and shining garments (of diamond silk as you might say), as the angels were occasionally seen by the prophets. (AC.165)

 

선지자들에게 가장 innocent한 천사들을 보내신 게 아니군요!

 

 

하하, 목사님 반응이 너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사실 스베덴보리 흐름으로 보면, 목사님 말씀이 상당 부분 맞습니다. AC.165를 자세히 보면, 가장 완전한 innocence 상태는 오히려 ‘벌거벗음’으로 표현되고, 옷은 innocence가 조금 덜한 상태에서 등장합니다. 즉 옷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미 어떤 매개와 외적 표현 단계가 들어간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옷(garments)은 거의 언제나 진리(truth), 특히 외적으로 표현된 진리를 상징합니다. 반면 벌거벗음은 진리가 아직 옷처럼 외적으로 덧입혀지기 이전의 순수한 innocence 상태와 연결됩니다. 그래서 가장 높은 천적 천사들은 때때로 거의 ‘빛 자체’처럼 보이며, innocence 자체가 그들의 보호와 아름다움이 됩니다.

 

반면 선지자들이 본 천사들은 대개 인간에게 전달될 메시지와 계시의 역할을 가진 존재들이었습니다. 즉 이미 진리의 전달과 표현이라는 외적 기능이 강하게 들어간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종종 매우 빛나는 옷을 입고 나타납니다. 다니엘서나 에스겔서, 복음서 변화산 장면 등을 보면, 천사나 주님의 옷이 번개 같고 눈처럼 희다고 표현되는 경우가 많지요. 스베덴보리적으로는 이것이 Divine Truth의 외적 발현을 뜻합니다.

 

그래서 AC.165의 ‘diamond silk’ 같은 표현도 흥미롭습니다. 다이아몬드는 빛을 굴절시키고 반사합니다. 비단은 부드럽고 아름다운 외적 표현입니다. 즉 이것은 단순 패션 묘사가 아니라, innocence 안에서 나오는 진리가 아름답게 표현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반대로 가장 깊은 innocence 상태는 오히려 ‘아무것도 숨기거나 덧입힐 필요가 없는 상태’입니다. 창2의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다’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AC.165 흐름에서는, 선지자들에게 나타난 천사들은 매우 높은 천사들이었지만, 그래도 계시 전달이라는 목적상 이미 진리의 옷을 입은 상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것도 굉장히 아름다운 구조입니다. innocence가 낮아질수록 반드시 더 추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innocence가 진리를 통해 아름답게 표현되면서 ‘옷 입은 아름다움’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천국에는 naked innocence의 아름다움도 있고, shining garments의 아름다움도 있습니다. 다만 AC.165는 그 가운데 가장 깊은 중심에는 여전히 innocence 자체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AC.165, 창2:25, innocence를 의미하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창2:25) AC.165 그들이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벌거벗음’(nakedness of wh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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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5, 심화 1,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AC.165.심화 1.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영들이 자신을 변호하고 무죄함을 증명하려 할 때, 그들은 자신의 innocence를 증언하기 위해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for when spirits wish to 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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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5.심화

 

1.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영들이 자신을 변호하고 무죄함을 증명하려 할 때, 그들은 자신의 innocence를 증언하기 위해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for when spirits wish to exculpate themselves and prove their guiltlessness, they present themselves naked in order to testify their innocence. (AC.165)

 

이건... 질문 자체가 참 민망한데요... 혹시 저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타날 때, 생식기도 함께 나타나나요? 아이고...

 

 

민망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AC를 읽다 보면 실제로 누구나 한 번쯤은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영계 묘사는 종종 너무 구체적이어서, 이런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에게 영들은 완전한 ‘인간 형상’을 가지고 나타납니다. 즉 얼굴만 있는 추상적 존재가 아니라, 몸 전체를 가진 인간 형태로 보입니다. 그래서 원칙적으로는 생식기 역시 포함됩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 여러 저작에서 천사들과 영들이 완전한 인간 형상(human form)을 가지고 있으며, 몸의 모든 부분이 상응에 따라 존재한다고 설명합니다.

 

다만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영계에서의 ‘벌거벗음’은 오늘날 인간이 느끼는 육욕적 노출 개념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입니다. AC.165에서 innocence와 연결되는 ‘벌거벗음’은, 자기 안에 숨김과 위선과 자기 의가 없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즉 영적으로 투명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천국적 상태에서의 nakedness는 수치보다 innocence와 연결됩니다. 이것이 바로 창2 마지막의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다’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타락 이전 인간은 자기 proprium 중심 의식이 아직 강하게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몸 자체를 자기 과시나 육욕 대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몸 전체가 단순히 생명의 질서와 상응의 표현이었습니다.

 

반면 타락 이후에는 nakedness shame과 연결됩니다. 왜냐하면 이제 인간 안에 자기 사랑과 육욕과 proprium 중심 의식이 강하게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같은 ‘벌거벗음’도 천국에서는 innocence 상징이 되고, 타락 상태에서는 수치와 노출 공포가 됩니다.

 

AC.165에서 영들이 innocence를 증언하기 위해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말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것은 ‘나는 숨길 것이 없다’, ‘내 안에 위선적 가림이 없다’, ‘나는 주님 앞에서 투명하다’는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영계에서는 각 사람의 내면 상태가 외적 형상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어떤 영은 아름답고 빛나는 모습으로, 어떤 영은 왜곡되고 추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옷도 단순 천 조각이 아니라, 진리와 상태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벌거벗음 역시 단순 물리적 알몸 개념만으로 읽으면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핵심은 innocence transparency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님 질문에 아주 직접적으로 답하면, 원칙적으로는 인간 전체 형상이므로 생식기도 포함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날 육체적, 성적 시선 안에서의 노출 개념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천국적 innocence 안에서는 그것이 육욕 자극이나 수치 대상으로 경험되지 않고, 단지 완전한 인간 형상의 일부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AC.165, 심화 2, ‘선지자들이 때때로 보았던 천사들의 모습’

AC.165.심화 2. ‘선지자들이 때때로 보았던 천사들의 모습’ 반면에 그만큼의 innocence를 지니지 않은 자들은 단정하고 빛나는 옷을 입고 나타나며, 이는 마치 다이아몬드 비단과 같은 옷으로,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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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5, 창2:25, innocence를 의미하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창2:25) AC.165 그들이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벌거벗음’(nakedness of wh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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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2:25)

 

AC.165

 

그들이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벌거벗음(nakedness of which they were not ashamed)innocence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뒤에 이어지는 내용으로부터 분명히 증명됩니다. 무결함(integrity)innocence가 떠나자, 그들은 자기들의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하게 되었고, 그것이 수치스럽게 보였기 때문에 스스로 숨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동일한 사실은 영들의 세계에서 나타나는 표상들로부터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영들이 자신을 변호하고 무죄함을 증명하려 할 때, 그들은 자신의 innocence를 증언하기 위해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특히 천국에 있는 순진한 자들에게서 이 사실이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그들은 innocence의 성질에 따라 화관으로 장식된 벌거벗은 유아들처럼 보입니다. 반면에 그만큼의 innocence를 지니지 않은 자들은 단정하고 빛나는 옷을 입고 나타나며, 이는 마치 다이아몬드 비단과 같은 옷으로, 선지자들이 때때로 보았던 천사들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That the “nakedness of which they were not ashamed” signifies innocence is proved by what follows, for when integrity and innocence departed they were ashamed of their nakedness, and it appeared to them disgraceful, and they therefore hid themselves. The same is evident also from the representations in the world of spirits, for when spirits wish to exculpate themselves and prove their guiltlessness, they present themselves naked in order to testify their innocence. Especially is it evident from the innocent in heaven, who appear as naked infants decorated with garlands according to the nature of their innocence; while those who have not so much innocence are clad in becoming and shining garments (of diamond silk as you might say), as the angels were occasionally seen by the prophets.

 

 

해설

 

AC.165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창2:25의 표현을 ‘결정적으로 innocence와 동일시’하는 단락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더 이상 개념적 설명에 머물지 않고, ‘시간의 흐름과 상태의 변화’, 그리고 ‘영계의 실제 표상’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먼저, 성경 본문 자체가 그 증거입니다. innocenceintegrity가 떠난 이후, 동일한 ‘벌거벗음’이 갑자기 수치가 됩니다. 즉, 외형이 바뀐 것이 아니라 ‘내적 상태가 바뀐 것’입니다. 이것은 벌거벗음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벌거벗음을 감싸고 있던 innocence 사라졌을 때, 비로소 수치가 발생한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그러므로 ‘부끄러움’은 죄책감 이전에, ‘자기의 own에 대한 자각이 깨어난 상태’입니다.

 

이 원리는 영들의 세계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확인됩니다. 영들이 자신을 변호하고 무죄함을 보이기 위해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설명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벌거벗음이 수치의 표상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은폐가 없는 상태’, 곧 innocence의 표상이라는 뜻입니다. 자기 방어와 자기 정당화가 필요한 상태에서는 결코 벌거벗을 수 없습니다. 벌거벗음은, 숨길 것이 없다는 내적 상태의 외적 표현입니다.

 

천국의 순진한 자들이 ‘화관을 쓴 벌거벗은 유아’로 보인다는 묘사는, 스베덴보리 특유의 상응 언어가 가장 아름답게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벌거벗음은 결핍이 아니라 충만이며, 미숙함이 아니라 완전한 신뢰입니다. 화관은 그 innocence의 질과 종류를 나타내며, 모든 innocence가 동일하지 않고, 각기 다른 아름다움을 지닌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반면, innocence가 덜한 자들이 입고 있는 ‘빛나는 옷’은 위선이나 가림이 아니라, ‘보호된 선과 진리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옷이 있다는 것이 곧 열등함을 뜻하지는 않지만, 벌거벗음이 허락된 상태는 가장 깊은 innocence의 차원임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선지자들이 본 천사들의 옷 입은 모습은 바로 이 질서에 속합니다.

 

이 단락은 창2의 마지막 장면을 완전히 정리해 줍니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말은, 인간이 아직 자기의 own을 자기 생명으로 주장하지 않았고, innocence가 그 모든 것을 감싸고 있던 상태를 가리킵니다. AC.165는 그 상태가 단지 상징적 표현이 아니라, ‘영계의 실제 질서와 완전히 일치하는 상태’임을 보여 주며, 곧이어 등장할 창3의 ‘부끄러움’과 ‘숨음’을 위한 대비를 완성합니다.

 

 

심화

 

1.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AC.165, 심화 1,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AC.165.심화 1.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영들이 자신을 변호하고 무죄함을 증명하려 할 때, 그들은 자신의 innocence를 증언하기 위해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for when spirits wish to 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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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지자들이 때때로 보았던 천사들의 모습

 

 

AC.165, 심화 2, ‘선지자들이 때때로 보았던 천사들의 모습’

AC.165.심화 2. ‘선지자들이 때때로 보았던 천사들의 모습’ 반면에 그만큼의 innocence를 지니지 않은 자들은 단정하고 빛나는 옷을 입고 나타나며, 이는 마치 다이아몬드 비단과 같은 옷으로,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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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6, 창2:25, ‘여기에서 제시된 것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창2:25) AC.166 이 장의 말씀 안에는 이러한 것들이 담겨 있으나,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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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4, 창2:25, ‘charity와 innocence로 선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own’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창2:25) AC.164 사람의 own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순전히 악이며, 그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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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4.심화

 

3. ‘마치 그것을 제거해 버린 것처럼

 

체어리티와 순진함은 own, 곧 사람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을 단지 용인하거나 덮어 두는 데 그치지 않고, 마치 그것을 제거해 버린 것처럼 작용합니다. Charity and innocence not only excuse the own (that is, what is evil and false in man), but as it were abolish it, (AC.164)

 

 

AC.164의 이 문장은 스베덴보리 인간론과 구원론에서 가장 놀랍고도 위로가 되는 문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여기서 인간의 own이 본질적으로 evil and false라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주님의 체어리티와 innocence가 그 own 안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체어리티와 innocence own 자체를 본질적으로 없애 버린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as it were abolish it’, 곧 ‘마치 그것을 제거한 것처럼 작용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인간의 proprium 자체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인간은 여전히 자기 자신처럼 느끼고, 여전히 자기 중심으로 기울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과 innocence가 그 안에 들어오면, 그 악과 거짓이 더 이상 중심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게 됩니다.

 

비유하자면 어두운 방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빛이 들어오면, 어둠은 더 이상 방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식으로 체어리티와 innocence를 이해합니다. 그것은 인간 안의 evil을 단순 법적으로 ‘못 본 척’하는 것도 아니고, 표면만 덮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더 깊고 강한 생명이 들어와, 이전의 악한 proprium이 중심 권력을 잃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기서 innocence가 왜 중요한지도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innocence는 단순 순진함이 아닙니다. ‘나는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상태입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독립 생명 근원으로 여기지 않을 때, 자기 proprium은 점점 절대 권력을 잃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체어리티, 곧 이웃 사랑과 주님 사랑이 중심이 됩니다.

 

그래서 이 문장은 사실 매우 실존적인 위로를 줍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거듭난 인간조차 자기 안에 여전히 own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조차 자기 자신만 두면 지옥으로 떨어질 존재라고 그는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런데도 천사들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이유는, 자기 own이 완전히 annihilated(전멸)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innocence가 그 안을 다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두 층위로 봅니다. 자기 자신만 보면 인간은 여전히 evil and false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influx 안에서 보면, 그 인간 안에 새로운 생명이 살아 움직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원래 인간성 삭제’가 아니라, 중심 통치권의 변화입니다. 이전에는 proprium이 왕좌에 앉아 있었다면, 이제는 주님의 체어리티와 innocence가 중심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왜 ‘용인하거나 덮는 것 이상’인지도 중요합니다. 단순 용인은 악을 그대로 놔두는 것입니다. 단순 덮음은 외형만 감추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사랑은 실제로 인간 안의 질서를 바꿉니다. 악은 여전히 가능성으로 존재하지만, 더 이상 인간 존재 중심과 delight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마치 잡초가 완전히 뽑히지 않았어도 건강한 나무가 자라면 더 이상 정원을 지배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AC.164는 인간 구원을 단순 법적 선언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것은 실제 생명 질서의 변화입니다. 체어리티와 innocence가 인간 own 안으로 흘러들어와, 이전에는 악과 거짓 중심으로 움직이던 인간을 점점 다른 중심 아래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evil은 여전히 인간 안에 남아 있지만, 주님의 사랑 안에서는 마치 제거된 것처럼 힘을 잃게 됩니다.

 

 

 

AC.164, 창2:25, ‘charity와 innocence로 선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own’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창2:25) AC.164 사람의 own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순전히 악이며, 그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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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4, 심화 2, ‘체어리티와 순진함이 own 안에 주입될 때’

AC.164.심화 2. ‘체어리티와 순진함이 own 안에 주입될 때’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체어리티와 순진함이 own 안에 주입될 때에는, 그것이 선하고 아름답게 보이게 됩니다. but when charity and innocence fr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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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4.심화

 

2. ‘체어리티와 순진함이 own 안에 주입될 때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체어리티와 순진함이 own 안에 주입될 때에는, 그것이 선하고 아름답게 보이게 됩니다. but when charity and innocence from the Lord are instilled into the own, it then appears good and beautiful. (AC.164)

 

여기서 체어리티와 이노센스를 주입하시는 것과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시는 것 간 무언가 충돌은 없나요? 그러니까 주입 전 먼저 본인의 동의를 구하지 않아도 되나요?

 

 

스베덴보리 전체를 보면, 바로 그 질문 때문에 그는 ‘influx’와 ‘freedom’을 수없이 함께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목사님 질문처럼, ‘주님이 체어리티와 innocence를 주입하신다면, 인간 자유는 어디 있는가?’라는 문제가 반드시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주님은 인간 안으로 선을 ‘강제로 밀어넣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입(instilled)은 흔히 현대인이 상상하는 강제 프로그래밍 같은 개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끊임없는 생명 제공에 가깝습니다. 주님은 항상 선과 진리, 체어리티와 innocence를 인간 안으로 흘려보내십니다. 문제는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에게 인간 자유는 ‘무영향 상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인간은 항상 천국과 지옥 양쪽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완전히 중립 진공 상태는 없습니다. 오히려 자유란, 그 두 흐름 사이에서 자기 것으로 느끼며, 선택할 수 있도록 허락받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체어리티와 innocence influx하시지만, 인간이 그것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제하지는 않으십니다. 인간은 그것을 거부할 수도 있고, 자기 proprium 쪽으로 돌아설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대부분 유혹이 바로 거기서 일어납니다. 인간 안에는 ‘주님께 돌릴 것인가, 자기 자신에게 돌릴 것인가’ 하는 긴장이 계속 존재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랑은 본질적으로 자유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주님은 인간 자유를 절대로 파괴하지 않으십니다. 만약 주님이 인간 안에 선을 irresistible하게 강제 주입하신다면, 인간은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동 기계가 됩니다. 그러면 사랑도, 신앙도, 체어리티도 더 이상 인간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AC.164의 ‘체어리티와 innocence own 안에 주입된다’는 말도, 실제로는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끊임없이 제공된다는 뜻에 더 가깝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일 때, 원래 ugly하고 evil했던 proprium조차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물론 그 proprium 자체가 본질적으로 변해 독립 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생명은 주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러나 이제 인간은 그 생명을 자기 삶처럼 자유롭게 살아가게 됩니다.

 

목사님 질문에서 특히 중요한 표현은 ‘먼저 동의를 구하지 않아도 되나요?’인데, 스베덴보리식으로 보면 사실 인간 존재 전체가 이미 끊임없는 influx 안에 있습니다. 숨 쉬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것처럼, 이미 모든 순간 influx를 받고 있습니다. 문제는 influx 자체보다 ‘수용 여부’입니다. 주님은 문을 두드리시지만, 억지로 부수고 들어오시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천국적 innocence는 강제 순종 상태가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자유로운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이 상태에 있는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지 않고, 기쁨으로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가장 자유로운 천사들은 가장 독립적인 존재들이 아니라, 가장 깊이 주님의 influx와 조화를 이루는 존재들입니다.

 

결국 AC.164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주님은 항상 체어리티와 innocence를 흘려보내시지만, 인간 자유를 파괴하면서 그렇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그것을 받아들일 수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유 안에서 받아들여질 때만, 그것은 진짜 인간 자신의 체어리티와 innocence처럼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AC.164, 심화 3, ‘마치 그것을 제거해 버린 것처럼’

AC.164.심화 3. ‘마치 그것을 제거해 버린 것처럼’ 체어리티와 순진함은 own, 곧 사람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을 단지 용인하거나 덮어 두는 데 그치지 않고, 마치 그것을 제거해 버린 것처럼 작용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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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4, 심화 1, ‘막10:14-16’

AC.164.심화 1. ‘막10:14-16’ 14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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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4.심화

 

1. ‘10:14-16

 

14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10:14-16) Suffer the little children to come unto me, and forbid them not, for of such is the kingdom of God. Verily I say unto you, whosoever shall not receive the kingdom of God as a little child, he shall not enter therein. And he took them up in his arms, put his hands upon them, and blessed them. (Mark 10:14–16) (AC.164)

 

 

이 구절이 AC.164에 인용된 이유는, ‘어린아이’가 단순 연령이 어린 존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을 받을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인간 상태, 곧 innocence(순진무구)와 주님께 의존하는 상태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막10:14-16에서 주님은 단순히 아이들을 예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의 것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천국 전체의 가장 깊은 원리와 연결합니다.

 

AC.164의 흐름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proprium 안으로 내려오고, flesh 상태 안에 들어간 이후에도, 여전히 주님과 결합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 답 가운데 하나가 바로 ‘어린아이 상태’입니다. 여기서 어린아이는 단순 미성숙함이나 지식 부족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생명의 독립 근원으로 여기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innocence는 ‘자신이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기뻐하는 상태’와 깊이 연결됩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는 자기 힘과 자기 지혜를 절대화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신뢰하고 의지합니다. 이것이 천국의 본질과 연결됩니다. 천국은 자기 자신 중심 존재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주님의 생명을 받아 사는 존재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신 말씀은, 단순 겸손하라는 윤리 수준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proprium 중심 상태를 내려놓고, 다시 주님의 influx를 받아들이는 상태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천국은 자기 독립성의 극대화로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주님께 의존함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상태 안으로 들어가는 곳입니다.

 

또 이 구절은 AC.160-162 흐름과도 연결됩니다. 인간은 flesh 상태 안으로 내려오며, 자기 자신처럼 느끼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상태 안에서 다시 천국으로 돌아가는 길은, 아이처럼 자기 생명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가장 높은 천사들이 오히려 가장 어린아이처럼 보인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그들은 가장 많이 알지만, 동시에 가장 깊이 ‘모든 것은 주님께로부터 온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어린아이들을 안고 안수하시며 축복하시는 장면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안수’는 단순 의식 행위가 아니라 influx와 전달을 뜻합니다. 즉 주님의 사랑과 생명이 그들에게 흘러 들어가는 것을 상징합니다. 다시 말해, 천국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채우는 곳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사는 상태입니다. 어린아이는 바로 그 receptivity, 곧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아주 깊은 역설도 있습니다. 인간은 성장할수록 자기 지혜와 자기 판단을 강하게 붙들게 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오히려 다시 ‘어린아이 상태’로 돌아가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유치함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를 잃는 것이 아니라, 가장 깊은 지혜 끝에서 다시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innocence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가장 높은 wisdom은 가장 깊은 innocence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AC.164에서 이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 천국의 본질이 자기 독립성과 자기 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innocence 안에 있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창2-3에서 proprium 문제를 지나온 인간이 다시 회복되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영적 상태이기도 합니다.

 

 

 

AC.164, 심화 2, ‘체어리티와 순진함이 own 안에 주입될 때’

AC.164.심화 2. ‘체어리티와 순진함이 own 안에 주입될 때’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체어리티와 순진함이 own 안에 주입될 때에는, 그것이 선하고 아름답게 보이게 됩니다. but when charity and innocence fr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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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4, 창2:25, ‘charity와 innocence로 선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own’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창2:25) AC.164 사람의 own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순전히 악이며, 그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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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2:25)

 

AC.164

 

사람의 own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순전히 악이며, 그것이 눈앞에 드러날 때에는 극도로 흉측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체어리티와 이노센스가 own 안에 주입될 때에는, 그것이 선하고 아름답게 보이게 됩니다. 이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습니다 (AC.154). 체어리티와 이노센스는 own, 곧 사람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을 단지 용인하거나 덮어 두는 데 그치지 않고, 마치 그것을 제거해 버린 것처럼 작용합니다. 이는 어린아이들에게서 관찰할 수 있는데, 그들에게는 악과 거짓이 단지 숨겨져 있을 뿐 아니라, 부모를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동안에는 오히려 사랑스럽게까지 보입니다. 그들의 유아적 이노센스가 그렇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어느 정도의 이노센스를 지니지 않고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The own of man, as before stated, is mere evil, and when exhibited to view is most deformed, but when charity and innocence from the Lord are instilled into the own, it then appears good and beautiful (as before observed, n. 154). Charity and innocence not only excuse the own (that is, what is evil and false in man), but as it were abolish it, as may be observed in little children, in whom what is evil and false is not merely concealed, but is even pleasing, so long as they love their parents and one another, and their infantile innocence shows itself. Hence it may be known why no one can be admitted into heaven unless he possesses some degree of innocence; as the Lord has said:

 

14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10:14-16) Suffer the little children to come unto me, and forbid them not, for of such is the kingdom of God. Verily I say unto you, whosoever shall not receive the kingdom of God as a little child, he shall not enter therein. And he took them up in his arms, put his hands upon them, and blessed them. (Mark 10:14–16)

 

 

해설

 

AC.164는 인간의 own에 대한 논의를, ‘정죄가 아니라 구원의 관점에서 완성’하는 단락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다시 한번 분명히 합니다. own은 본질상 악이며, 그대로 드러나면 가장 흉측한 모습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그 own이 ‘어떻게 천국에 합당한 상태로 전환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 전환의 열쇠가 바로 체어리티와 이노센스입니다.

 

이 단락에서 특히 중요한 표현은, 체어리티와 이노센스가 own을 ‘용서한다’거나 ‘덮는다’가 아니라, ‘마치 없애 버린 것처럼 작용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악과 거짓이 실제로 제거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들이 더 이상 본질로 작동하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중심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own이 중심에 있을 때에는 모든 것이 그 방향으로 왜곡되지만, 체어리티와 이노센스가 중심이 되면 동일한 own이 전혀 다른 성질을 띱니다.

 

스베덴보리가 어린아이의 예를 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린아이 안에도 악과 거짓의 씨앗은 존재하지만, 그것이 아직 자기 주장이나 방어의 형태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부모를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상태, 그리고 이노센스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 악과 거짓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아이 전체를 사랑스럽게 보이게 합니다. 이는 악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노센스가 악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는 천국에 대한 조건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완전함이나 무결함이 아니라, ‘이노센스의 정도’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는 지식의 단순함이나 판단력의 미성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own을 자기의 생명으로 붙들지 않는 태도, 곧 ‘주님께로부터 받는 생명에 자신을 여는 상태’를 말합니다.

 

2:25에서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말은, 바로 이 상태를 가리킵니다. own이 있었지만, 그것이 아직 자기 주장이나 분리의 근거가 되지 않았고, 이노센스가 그것을 감싸고 있었기 때문에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AC.164는 그 이유를 가장 명확하게 설명해 줍니다.

 

이 단락을 통해 창2는 완전히 닫힙니다. own → 주님의 허락 → 체어리티와 이노센스의 주입 → 아직 보호된 상태.

 

이제 창3에서는, 이 이노센스가 어떻게 상실되고, 벌거벗음이 어떻게 수치로 바뀌는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오늘 여기까지 오신 것은 창2의 마지막 보호막까지 정확히 짚어낸 매우 좋은 마무리입니다.

 

 

심화

 

1. ‘10:14-16

 

 

AC.164, 심화 1, ‘막10:14-16’

AC.164.심화 1. ‘막10:14-16’ 14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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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체어리티와 순진함이 own 안에 주입될 때

 

 

AC.164, 심화 2, ‘체어리티와 순진함이 own 안에 주입될 때’

AC.164.심화 2. ‘체어리티와 순진함이 own 안에 주입될 때’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체어리티와 순진함이 own 안에 주입될 때에는, 그것이 선하고 아름답게 보이게 됩니다. but when charity and innocence fr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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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치 그것을 제거해 버린 것처럼

 

 

AC.164, 심화 3, ‘마치 그것을 제거해 버린 것처럼’

AC.164.심화 3. ‘마치 그것을 제거해 버린 것처럼’ 체어리티와 순진함은 own, 곧 사람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을 단지 용인하거나 덮어 두는 데 그치지 않고, 마치 그것을 제거해 버린 것처럼 작용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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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5, 창2:25, innocence를 의미하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창2:25) AC.165 그들이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벌거벗음’(nakedness of wh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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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3, 창2:25,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AC.163-167)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창2:25) AC.163 그들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naked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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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2:25)

 

AC.163

 

그들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naked and not ashamed)는 그들이 순진함(innocent) 안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그들의 own안에 순진함을 주입하셔서, 그것이 못 받아들여지는 것이 되는 걸 막으셨기 때문입니다. Their being “naked and not ashamed” signifies that they were innocent, for the Lord had instilled innocence into their own, to prevent its being unacceptable.

 

 

해설

 

AC.163은 창2의 마지막 절을 여는 ‘결정적인 열쇠’를 제공합니다. 여기서 ‘벌거벗음’은 결핍이나 수치의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순진함의 표지’로 제시됩니다. 중요한 점은, 이 순진함이 인간에게서 자연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own 안에 주입하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앞 단락들에서 충분히 밝혀졌듯이, 인간의 own은 본질상 악하며, 그대로 두면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도 이 시점에서 그들의 own이 아직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이유는, 그 위에 ‘순진함이라는 보호막’이 덮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순진함은 own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해악이 드러나지 않도록 ‘완충 역할’을 합니다.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는, 아직 ownown으로 주장하거나 방어할 필요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즉, 그들은 own 안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생명의 근원으로 삼지 않았던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 점에서 AC.163은 앞선 AC.150의 ‘깊은 잠’과도 미묘하게 연결됩니다. 아직 완전히 깨어 있지는 않았지만, 동시에 아직 완전히 타락하지도 않은 상태입니다.

 

이 단락은 또한 창3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마지막 안전지대’를 보여 줍니다. 순진함이 주입되어 있는 동안에는, own이 살아나 있더라도 그것이 곧바로 파괴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순진함이 상실되는 순간, 벌거벗음은 더 이상 순진함이 아니라 ‘수치’로 바뀌게 됩니다. 바로 그 전환이 다음 장에서 일어납니다.

 

AC.163은 그래서 짧지만 매우 밀도가 높은 단락입니다. own + 순진함 = 아직 허용된 상태, own - 순진함 = 곧 드러날 위기

 

이제 이어질 AC.164-167에서는, 이 순진함이 어떤 성질의 것이었는지, 그리고 왜 그것이 유지되지 못했는지가 조금 더 정밀하게 설명되며, 창2가 완전히 마무리됩니다.

 

 

 

AC.164, 창2:25, ‘charity와 innocence로 선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own’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창2:25) AC.164 사람의 own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순전히 악이며, 그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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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2, 창2:24, ‘혼인의 법’(the law of marriages)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2 모든 진리와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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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24)

 

AC.162

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은 천적 기원들,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천국은 하나의 천적 인간인데, 이는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천국과 천적 인간의 모든 안에서 모든 것이시므로, 천국과 천적 인간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천적이라 합니다. 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이 천적 기원들,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내려오는 것처럼, 특별히 혼인의 (the law of marriages) 그러합니다. 지상의 모든 혼인은 천적 혼인(celestial marriage), 천국의 혼인으로부터, 그리고 혼인에 따라 파생되어야 합니다. 혼인은 주님과 하나의 천국, 머리가 주님이신 하나의 교회가 있는 그러한 혼인입니다. 여기서 파생되는 혼인의 (law of marriages) 남편과 아내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우 그들은 천적 혼인을 표상하며, 천적 인간의 본이 됩니다. 법은 태고교회의 사람들에게 계시되었을 아니라 그들의 사람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에는 남자가 오직 아내만을 두었고, 그들은 하나의 집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후손들이 사람이기를 그치고 사람이 되었을 때에는 여러 아내를 맞이하였습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그들의 혼인에서 천적 혼인을 표상했기 때문에, 부부의 사랑은 그들에게 일종의 천국이자 천국의 행복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쇠퇴했을 그들은 이상 부부의 사랑 안에서 행복을 퍼셉션하지 못하고, 다수에게서 오는 쾌락, 사람의 즐거움에서 행복을 퍼셉션했습니다. 이것을 주님께서는 마음의 완악함(hardness of heart)이라 하셨으며, 이로 말미암아 그들은 모세를 통하여 여러 아내를 두는 것을 허락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다음과 같이 가르치십니다. All the laws of truth and right flow from celestial beginnings, or from the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 For the whole heaven is a celestial man because the Lord alone is a celestial man, and as he is the all in all of heaven and the celestial man, they are thence called celestial. As every law of truth and right descends from celestial beginnings, or from the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 so in an especial manner does the law of marriages. It is the celestial (or heavenly) marriage from and according to which all marriages on earth must be derived; and this marriage is such that there is one Lord and one heaven, or one church whose head is the Lord. The law of marriages thence derived is that there shall be one husband and one wife, and when this is the case they represent the celestial marriage, and are an exemplar of the celestial man. This law was not only revealed to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but was also inscribed on their internal man, wherefore at that time a man had but one wife, and they constituted one house. But when their posterity ceased to be internal men, and became external, they married a plurality of wives. Because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in their marriages represented the celestial marriage, conjugial love was to them a kind of heaven and heavenly happiness, but when the church declined they had no longer any perception of happiness in conjugial love, but in pleasure from a number, which is a delight of the external man. This is called by the Lordhardness of heart,on account of which they were permitted by Moses to marry a plurality of wives, as the Lord himself teaches:

 

5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7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서 8 둘이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몸이니 9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10:5-9) For the hardness of your heart Moses wrote you this precept, but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God made them male and female. For this caus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twain shall be one flesh; wherefore they are no more twain but one flesh; what therefore God hath joined together let not man put asunder. (Mark 10:59)

 

해설

AC.162는 창2:24둘이 몸을 이룰지로다를 혼인 자체의 질서로 확장하여 설명합니다. 출발점은 지상의 혼인이 아니라 천국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이 인간 사회의 편의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천적 기원들’, 곧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내려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특별히 혼인의 법이 그러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혼인은 단순한 사회 제도나 생활 방식이 아니라 천국의 질서가 지상에서 표상되는 매우 중요한 형식입니다.

 

이 설명의 중심에는 천적 혼인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상의 모든 혼인이 천적 혼인으로부터, 그리고 그 혼인에 따라 파생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천적 혼인을 설명하면서 먼저 주님과 하나의 천국을 말하고, 이어 머리가 주님이신 하나의 교회를 말합니다. 따라서 혼인의 하나 됨을 이해하는 가장 깊은 기준은 두 인간이 서로에게만 집중하여 하나가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 됨의 근원이 한 분 주님에게 있다는 데 있습니다. 천국도 교회도 그분을 머리로 할 때 하나이며, 지상의 혼인도 이 천적 질서를 표상합니다.

 

바로 여기서 한 남편과 한 아내라는 혼인의 법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당시의 관습이나 인간이 만들어 낸 윤리 규정에서 도출하지 않고 천적 혼인으로부터 도출합니다. 한 남편과 한 아내가 혼인을 이룰 때 그들은 천적 혼인을 표상하고 천적 인간의 본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일부일처는 이 단락에서 단순히 허용된 여러 결혼 형태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천적 혼인에서 파생되는 혼인의 질서로 제시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이 법이 외적으로 계시되었을 뿐 아니라 속 사람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들이 한 남자와 한 여자로 하나의 집을 이루었던 것은 단지 외적인 명령을 지켰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내적 상태가 그 질서와 상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부부의 사랑은 일종의 천국이자 천국의 행복이었습니다. 혼인의 외적 형태와 그들의 내적 생명의 질서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후손들이 속 사람이기를 그치고 겉 사람이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변화를 혼인에서도 그대로 보여 줍니다. 그들은 더 이상 부부의 사랑 안에서 행복을 퍼셉션하지 못하고 다수에게서 오는 쾌락, 곧 겉 사람의 즐거움에서 그것을 퍼셉션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아내의 수가 바뀌었다는 외적 사실보다 행복을 어디에서 퍼셉션하게 되었는가 하는 내적 변화입니다. 혼인의 외적 변화는 이미 일어난 인간 내면의 변화를 드러내는 결과였습니다.

 

이 때문에 AC.162가 막10:5-9를 인용하는 이유도 분명합니다. 주님께서는 모세가 허용한 것을 곧바로 창조의 본래 질서와 동일시하지 않으시고,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그렇게 기록되었다고 말씀하신 뒤 창조 때로부터의 질서로 돌아가십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말씀을 인용한 핵심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복수의 아내가 허락되었다는 사실이 혼인의 본래 법을 바꾼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상태가 달라짐에 따라 허용된 것이 있었지만, 혼인의 기원과 기준은 여전히 천적 혼인에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마음의 완악함을 단순히 고집이 세거나 잔인하다는 뜻으로 좁힐 필요는 없습니다. AC.162 자체의 흐름에서 보면,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속 사람이기를 그치고 겉 사람이 되었으며, 부부의 사랑에서 누리던 천국의 행복을 더 이상 퍼셉션하지 못하게 된 상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막10장에서 모세의 허용을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창조의 처음을 다시 가리키신 것은, 인간의 변화된 상태와 혼인의 본래 질서를 구별하여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AC.162는 이렇게 창2:24를 천적 혼인에서 지상의 혼인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질서 안에 놓습니다. 한 분 주님, 하나의 천국과 교회, 한 남편과 한 아내, 그리고 하나의 집이라는 흐름의 중심에는 단순한 숫자상의 하나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질서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 됨이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부부의 사랑이 천국의 행복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혼인이 이 천적 질서를 표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락의 혼인의 은 결혼생활에 관한 하나의 규칙을 넘어, 지상의 혼인이 어디에서 그 본과 질서를 받아야 하는지를 밝히는 말씀입니다. (AC.162 해설)

 

심화

1.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

 

AC.162 심화 2,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

AC.162 심화1.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 AC.162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뜻밖에 느껴지는 문장이 있습니다. ‘온 천국은 하나의 천적 인간인데, 이는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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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1, 창2:24, ‘겉 사람의 proprium 안에 영적 천적인 것을 스며들게 하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1이 태고교회의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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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2:24)

 

AC.161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악하지 않았고 여전히 선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 안에서, 자기들의 proprium 안에서 살기를 원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것을 그들에게 허락하셨으며, 다만 영적 천적인 것을 자비롭게 안에 스며들게 하셨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서 활동하는지, 또는 어떻게 하나처럼 보이는지는 하나가 다른 하나 안으로 유입되는 것을 알지 못하면 없습니다. 이에 관하여 어떤 관념을 갖기 위해 하나의 행위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행위 안에 체어리티, 사랑과 신앙이 없고, 사랑과 신앙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행위는 체어리티의 행위 또는 신앙의 열매라고 없습니다.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not evil, but was still good; and because they desired to live in the external man or in their own, this was permitted them by the Lord; what is spiritual celestial, however, being mercifully instilled therein. How the internal and external act as a one, or how they appear as a one, cannot be known unless the influx of the one into the other is known. In order to conceive some idea of it, take for example an action. Unless in an action there is charity, that is, love and faith, and in these the Lord, that action cannot be called a work of charity, or the fruit of faith.

 

해설

AC.161에서 먼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 태고교회의 후손들을 악하지 않았고 여전히 선했다고 분명히 말한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이미 악에 빠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전의 천적 인간처럼 전적으로 속 사람의 질서 안에서 살기보다 겉 사람 안에서, 곧 자기들의 proprium 안에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proprium을 원했다는 사실만으로 곧바로 그들을 악한 상태라고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들의 이러한 상태를 허락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허락하셨다는 것은 그들을 proprium에 내버려 두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은 곧이어 주님께서 영적 천적인 을 자비롭게 그 안에 스며들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AC.151에서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는다고 한 것, AC.154에서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나타난다고 한 것과 이어집니다. 인간이 proprium 안에서 살아간다고 해도 그 생명의 근원이 proprium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서 활동하면서 하나처럼 보일 수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유입(influx)을 제시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둘이 실제로 하나의 것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AC.159에서 천적 인간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구별되며,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어떻게 다스려지는지를 퍼셉션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은 구별되지만 서로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유입을 통하여 하나로서 활동합니다.

 

이것은 앞서 AC.155에서 천사들의 상태를 설명한 것과도 연결됩니다. 천사들은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퍼셉션하지만, 그것을 특별히 의식하지 않을 때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으로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곧 생명의 근원이 주님께 있다는 사실과 그 생명을 자기 자신의 삶처럼 살아가는 경험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AC.161에서 겉 사람의 proprium 안에 영적 천적인 것이 스며든다는 설명도 같은 흐름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유입을 추상적인 설명으로 끝내지 않고 하나의 행위를 예로 듭니다. 어떤 행위가 겉으로 선하게 보인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체어리티의 행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행위 안에 체어리티, 곧 사랑과 신앙이 있어야 하며, 다시 그 사랑과 신앙 안에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여기서 행위는 겉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사랑과 신앙은 그 행위를 안에서 살아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신앙의 생명 역시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따라서 AC.161에서 말하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하나 됨은 둘 사이의 구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흘러들어 실제 삶과 행위 안에서 함께 활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둘이 몸을 이룰지로다를 해설하면서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된다고 한 내용도 더 분명하게 해 줍니다. 하나처럼 보이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 없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인간 안에서 질서 있게 받아들여져 하나의 삶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AC.161은 창2 후반부의 proprium에 관한 설명을 한 단계 더 깊게 만듭니다. 인간에게 proprium이 허락되었다는 것만으로 설명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proprium 안에 무엇이 스며들어 있으며, 무엇이 그 삶과 행위의 내적 근원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영적 천적인 것이 그 안에 있고, 그것이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 안으로 유입되어 실제 삶에서 나타날 때, 인간은 자기 삶을 자기 삶처럼 살아가면서도 그 생명의 근원은 주님에게 두게 됩니다. 이것이 AC.161이 유입이라는 개념을 통해 보여 주기 시작하는 중요한 질서입니다. (AC.161 해설)

 

심화

1. influx - 사람과 사람이 하나처럼 보이는 이유

 

AC.161 심화 1, ‘influx -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처럼 보이는 이유’

AC.161 심화1. ‘influx -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처럼 보이는 이유’ AC.161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말을 합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서 활동하는지, 또는 어떻게 하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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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2, 창2:24, ‘혼인의 법’(the law of marriages)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2:24) AC.162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은 천적 기원들, 곧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온 천국은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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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0, 창2:24,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루다 -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됨’ (AC.160-162)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0‘부모를 떠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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