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48. 지금부터 이어지는 주제는 그 속뜻으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천국에서 나오는 신적 진리에 관한 계시(the revelation of truth Divine from the Lord out of heaven)이며, 이 장에서는 그것을 받을 준비에 관한 것입니다.In what now follows, the subject treated of in the internal sense is the revelation of truth Divine from the Lord out of heaven, and in this chapter the preparation for receiving it.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52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눅12:49-53)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교회 안에 거짓과 악밖에 없어서 분쟁이 없었다. 그러나 주님에 의해 진리와 선이 밝혀지자 비로소 분쟁이 일어났다. 진리와 거짓, 선과 악 간의 분쟁이 없으면 개혁이 이루어질 수 없다 (계시록 해설 504:31) for before the Lord came into the world there were in the church nothing but falsities and evils, consequently there was no combat between these and truths and goods; but when truths and goods had been unveiled by the Lord, then it was possible for combats to exist, and without combats between these there can be no reformation; (AE.504:31)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는 가나안 원주민들, 즉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그리고 여부스 족속이 이미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들을 그 땅에서 모두 몰아내라 하셨지요. 그러나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가나안 도착과 함께 주님 명하신 대로 처음 땅 분배를 받아 흩어진 후, 자기 땅에 있는 가나안 사람들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완전히는 몰아내지들을 못했습니다.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고 그동안 너무 지쳤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유야 어떻든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었고, 사람이 주님을 끝까지 의뢰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였는데요,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후 끊임없이 이 남은 가나안 원주민들에게 괴롭힘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 신앙인들도 악과 타협할 때가 있는데요, 그렇게 악과 타협할 때는 일시적으로는 평화를 얻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곧 전보다 더 큰 악에 시달리게 되는데요, 그리고 그렇게 시달릴 대로 시달리고 나서야 진리와 거짓, 선과 악은 절대 타협할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영적 전쟁에서는 어느 한쪽이 살기 위해서는 다른 한쪽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이며, 그래서 둘 사이에는 싸움이 그치지를 않습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누구나 다 이렇게 내적 싸움을 하는데요, 그런데 이런 내적 싸움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진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경우인데요,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자아와 세상의 욕망을 좇아 사는 것이 악이며 거짓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라면 내적 싸움이 없다는 게 오히려 참 씁쓸한 케이스가 되겠네요. 그런가 하면 진리를 알면서도 내적 싸움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 유혹을 이기지 못해 습관적으로 악을 행하는 사람의 경우인데요, 죄를 반복해서 짓다 보면 나중에는 죄를 지으면서도 수치심이나 굴욕감, 죄의식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들은 거짓을 진실이라 하고 진실을 거짓이라 뒤집기도 합니다. 내적 싸움이 없기 때문에, 겉으로 보면 자유롭고 평온해 보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평화도 아니고 자유도 아닙니다. 지옥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 뿐이지요.
그러면 진정한 평화,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와 관련해 오늘 본문 49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주님께서는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 하십니다. 불은 무슨 뜻일까요? 선과 악, 진실과 거짓 사이에 벌어지는 내적 싸움을 뜻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개인이든 사회든 거듭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실과 거짓, 선과 악 사이에 싸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 오시기 전 이 세상에는 그런 내적 싸움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참된 진리가 없었기 때문인데요, 진리라는 게 있어야 거짓을 볼 수 있고, 그것과 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세상은 악과 거짓으로 가득했고, 그러므로 구원받을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붙잡혀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지요. 그때 참된 진리이신 주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의미가 있는데요, 첫째는, 인간의 인식을 초월해 존재하셨던 여호와께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같은 논리로, 그동안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내적 진리가 주님이 오심으로써 이해할 수 있는 진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통해 누구나 내적 진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인데요, 왜냐하면 아래 요한복음 1장 3절 이하의 증언처럼 주님은 곧 말씀이시며, 그러므로 주님의 인성과 신성이 하나가 되었을 때 말씀의 문자적 의미 안에 내적 진리가 충만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3-14)
그러니까 주님의 인성이 문자로 된 성경이라면 내적 진리는 주님 안의 신성, 곧 문자 안에 담긴 영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신 세 번째 의미는, 인간에게 거듭남의 모범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세상에서 인성과 신성을 하나로 만드시는 과정은 사실은 인간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결합하여 하나 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치열한 내적 싸움 없이는 거듭남도 없다는 것인데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주님께서는 내가 받을 세례가 있다 하십니다. 말씀에서 세례는 거듭남을 의미하는데요, 그렇다면 주님이 받을 세례는 어떤 것입니까?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로부터 받으신, 유전된 인성(human)을 벗으시고, 당신 안의 여호와께서 주시는 거룩한 인성으로 갈아입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옥과의 치열한 싸움과 승리로만 이루어지는데요, 그래서 인간이 거듭나는 모습과 흡사하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받으실 세례는 주님의 인성과 신성이 하나 되는 것임과 동시에, 주님에 의해 인간이 거듭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시공간 속에서 주님 자신에게 일어나는 세례임과 동시에, 시간을 초월해 모든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세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하신 것입니다.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라고 말씀하신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분쟁하는 것은 곧 내적 싸움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적 싸움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그것에 대해 52절과 53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52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주님이 오신 다음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둘과 셋으로 나뉘어 싸운다고 합니다. 여기서 숫자 셋은 진리는 진리인데 선이 없는 진리를, 그리고 숫자 둘은 선은 선인데 진리가 없는 선을 말합니다. 선 없는 진리나 진리 없는 선은 둘 다 온전한 것이 아니며, 둘 다 진정한 진리와 선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진리는 이웃을 화합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분열시키는데요, 교회 안에서, 아니면 개인의 마음속에서 이렇게 진리를 가장한 거짓, 또는 선을 가장한 악이 사람들의 마음을 갈라놓을 때가 아주 많습니다. 이것이 한 집에 다섯 사람이 둘과 셋으로 나뉘어 싸우는 것입니다.
언젠가 어떤 분이 제게 성경이 우선이냐 성문서, 즉 스베덴보리가 쓴 글이 우선이냐 라는 질문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답하기를, 성경의 문자적 의미는 주님의 인성에 해당하고, 성문서에서 밝히는 말씀의 내적 의미는 주님 안에 있는 신성과 통합니다. 주님의 인성과 신성이 하나이듯 그 둘은 하나이며, 똑같이 중요합니다 라고 말이지요. 만약 교회 안에서 어떤 이는 성경이 우선이라 하고, 어떤 이는 성문서가 우선이라 한다면 그런 것이 바로 둘과 셋으로 나뉘어 싸우는 것이며, 그러므로 그런 생각은 진리를 가장한 거짓입니다.
또 한 번은 새 교회에서는 진리 진리 하는데 진리보다는 사랑이 먼저가 아니냐고 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먼저이지만 진리를 알아야 올바른 사랑을 할 수 있으니 진리나 사랑이나 똑같이 소중합니다 말씀드렸는데요,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말씀드려도 듣지 않는 분은 안 듣습니다. 사소한 것 같지만 교회 안에 이런 분쟁이 가끔 생기는데요, 이걸 잘 관리하지 못하면 자칫 교인들 간 분열이 일어나고 맙니다.
그러면 아버지와 아들이, 어머니와 딸이 분쟁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아버지는 자아의 악을 뜻하고 아들은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이 분쟁하는 것은 자아의 악이 진리를 대적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 어머니는 자아의 욕망을 뜻하고 딸은 진리에 대한 애정을 뜻합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딸이 싸우는 것은 자아의 욕망과 진리에 대한 애정이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진리에 따라 살려고 할 때, 언제나 이런 내적 갈등을 경험합니다. 자아가 원하는 것들은 대개 세상 물질과 쾌락, 명예 같은 것인데 하나님의 진리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적 싸움이 있어야 우리는 영적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 오시기 전 당시 세상은 암흑 상태였습니다. 그때는 모든 사람이 자기 욕심껏 사는 것이 선이며 정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웃에게 악을 행하거나 거짓말을 하면서도 양심의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상태로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완전한 진리의 능력으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이 당신의 인성을 거룩하게 만드셨을 때, 말씀의 문자적 의미 또한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자연계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기까지는 몇 가지 과정이 필요했는데요, 먼저, 문자로 된 신구약 성경이 인류에게 주어졌고, 그 다음에 말씀의 내적 의미가 밝혀진 것입니다. 그래야 온전한 말씀이신 주님이 오신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전자의 일은 주님이 부활하신 후 1500년이 지난 후, 가톨릭 사제들에 의해 독점되었던 성경이 평신도에게 돌아옴으로써 이루어집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그때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후자의 일은 그로부터 250년 후에 주님의 종 스베덴보리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250년이 흘러 극동의 한 작은 나라인 대한민국에까지 이 말씀의 내적 의미가 전해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인류가 완전한 진리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참된 기독교’ 508번 글은 지금은 누구나 신앙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시대라고 선언합니다.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내적 의미로 인해 이제 완전하고 거룩한 말씀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진리가 바로 그 완전하고 거룩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주님이 주신 이 진리를 가지고 각자 내면의 악과 싸워야 할 때입니다. 주님이 인성을 거룩하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4)
8641. 이 장에서 다루는 주제는 속뜻으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연속적인 순서, 질서를 보이는 진리들이며, 신적 선(good Divine)에 의한 순서, 질서로 되어 있습니다. 맨 첫 단계 진리는 모세이며, 그로부터 연속적으로 파생된 진리들이 천부장과 백부장, 오십부장과 십부장입니다. 그리고 신적 선은, 이 신적 선으로 말미암아 순서, 질서가 세워졌는데요, 바로 모세의 장인 이드로입니다.The subject treated of in the internal sense in this chapter is truths in successive order from the First to the last, and that they are set in order by good Divine. Truth in the first degree is represented by Moses; the truths derived therefrom in successive order are represented by the princes of thousands, of hundreds, of fifties, and of tens. And good Divine, by which the setting in order is effected, is represented by Jethro, Moses’ father-in-law.
8554. 속뜻으로 앞 장에서는 세 번째 시험, 즉 선의 부족(a lack of good)을 다루었다면, 이제 이 장에서는 네 번째 시험, 즉 진리의 부족(a lack of truth)을 다룹니다. ‘물이 없어 이스라엘 자손이 하는 원망’이 바로 이 네 번째 시험을 의미하며, 그 결과 주님은 이들에게 신앙의 진리를 공급하시는데, ‘호렙 반석에서 나오는 물’이 바로 이를 의미합니다.In the preceding chapter, in the internal sense, the third temptation was treated of—that there was a lack of good. This having been given them, in the internal sense in this chapter the fourth temptation is treated of—that there was a lack of truth. This temptation is signified by “the murmuring of the sons of Israel because they had no water”; and therefore the truth of faith was given them by the Lord, which is signified by “the water out of the rock of Horeb.”
8555. 그리고 이어서 신앙의 진리와 선을 대항하는, 악으로 말미암는 거짓과의 전투(combat)가 나오는데요, 이 전투를 이스라엘을 대항하는 아말렉(Amalek)과의 싸움(fighting)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진리와 선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주님을 바라볼 때 이기고, 아래를 내려다볼 때 진다는 것을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가 손을 들고 있는 한 이기고, 그가 손을 내렸을 때 지는 걸로 표현하고 있습니다.Then follows the combat of the falsity that is from evil against the truth and good of faith, which combat is represented by the fighting of Amalek against Israel. That they who are in the truth and good of faith conquer when they look upward to the Lord, and that they yield when they look downward, is represented by the sons of Israel conquering so long as Moses kept his hands raised, and by their yielding when he let them down.
8395. 앞 장에서는 영적 교회에 속한 사람들의 두 번째 유혹에 대해 다루었는데요, 이는 진리라는 게 썩 좋아 보이지 않는, 그런 지각으로부터 오는 시험이었습니다. 이 장에서는 그 속뜻으로는 세 번째 시험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선의 부족(the lack of good)에서 오는 시험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원망했던 떡과 고기의 부족이 바로 이걸 의미합니다. 시험 후 그들이 받은 위로는 그들에게 공급된 만나와 메추라기인데요, 여기서 만나는 영적 선(spiritual good)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주님에 의해 그들에게 늘 공급되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이걸 얻기 위해 무슨 케어나 주님을 도운 것도 없는데 말이지요, 이런 사실은 그들이 매일 만나를 공급받았다는 것과 그들이 만일 정량을 초과, 욕심을 부리면 바로 그 안에 번식하는 벌레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The preceding chapter treated of the second temptation of those who were of the spiritual church, which was from truth being perceived as undelightful. In this chapter in the internal sense a third temptation is treated of, which is from the lack of good. By the lack of bread and of flesh, at which the sons of Israel murmured, is signified a lack of good. Consolation after temptation is signified and described by the manna which they received, and by the quail. Manna denotes spiritual good. That this was given to them by the Lord continually, and without any care and aid of theirs, is signified by their receiving the manna daily, and by the worm breeding in it if they gathered more.
8258. 이 장에 관한 속뜻은 찬양받으시는 주님이신데요, 주님이 주님의 인성(His Human)을 영화롭게 하신 후, 주님은 저세상에서(in the other life) 선한 사람들을 감염시키던 악한 자들은 지옥으로 내쫓으신 반면, 이미 감염되었던 선한 사람들은 천국으로 올리셨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이런 점들이 이 예언적 노래에 담긴 것들의 속뜻입니다.In the internal sense of this chapter the Lord is celebrated, in that after He had glorified His Human, He cast down into the hells the evil who were infesting the good in the other life; and raised into heaven the good who had been infested. These are the things which are contained in this prophetic song in the internal sense.
8259. 그 후 영적 교회에 속한 사람들의 두 번째 시험이 속뜻으로 다루어지는데요, 바로 물이 쓴 마라에서 있었던 사람들의 원망(the murmuring of the people at Marah)입니다. 그 후에는 위로(consolation)인데요, 이를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 엘림(Elim)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Afterward the second temptation of those who were of the spiritual church is treated of in the internal sense, which is described by the murmuring of the people at Marah, where the waters were bitter; and after this, consolation is treated of, which is signified by the encampment at Elim, where were twelve springs and seventy palm trees.
8125. 이 장에서 다루는 주제는 그 속뜻으로는 영적 교회에 속한 사람들의 첫 번째 시험과 그들을 지옥 한가운데로 인도하기, 그리고 그때 그들을 향하신 주님의 보호와, 또한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지옥으로 가라앉는 것인데요, 거기는 악으로 말미암는 거짓이 있는 곳입니다. 영적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이스라엘 자손’(the sons of Israel)으로,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애굽 사람들’(the Egyptians)로 표현하고 있고요, 첫 시험은 이스라엘 자손이 바로의 군대를 보고 원망하는 것으로, 지옥은 이스라엘 자손은 안전하게 인도된 반면, 이집트인들은 수장되고만 ‘숲 바다’(the sea Suph)로, 악으로 인한 거짓은 저들을 덮은 물로 각각 상징하고 있습니다.In this chapter, in the internal sense, the subject treated of is the first temptation of those who are of the spiritual church, and the conducting of them through the midst of hell, and their protection then by the Lord; and also the immersion of those who were in faith separate from charity in hell, where are falsities from evils. They who are of the spiritual church are represented by the sons of Israel; they who are in faith separate from charity by the Egyptians. The first temptation is described by the murmuring of the sons of Israel when they saw the army of Pharaoh. Hell is signified by the “sea Suph” through which the sons of Israel were conducted in safety, and in which the Egyptians were immersed. Falsities from evils are signified by the waters which covered the latter.
8038. 이 장에서 다루는 주제는 그 속뜻으로는 주님 신앙(faith in the Lord)과 주님에 의해 저주에서 해방된 것을 영원히 기억하는 것(the perpetual remembrance of having been liberated by Him from damnation)입니다. 주님 신앙은 처음 난 것에 관한 신성화(the sanctification of the firstborn)로, 주님에 의한 해방을 영원히 기억하는 것은 유월절 축제(the celebration of the passover)로 각각 상징합니다.In this chapter the subject treated of in the internal sense is faith in the Lord, and the perpetual remembrance of having been liberated by Him from damnation. Faith in the Lord is signified by the sanctification of the firstborn, and the perpetual remembrance of liberation by the Lord is signified by the celebration of the passover.
8039. 이 장의 후반부와 그 이후 다루는 주제는 영적 교회에 속했던 사람들, 그리고 주님 오시기 전, 천국으로 인도될 때까지 더 낮은 땅에 억류되었던 사람들(who were detained in the lower earth)에 관한 더 많은 준비이며, 이를 위해 그들은 주님이 늘 함께하시는 가운데 먼저 안전하게 저주 한복판으로 보내졌고, 그러고 나서 시험을 받았습니다. 저주를 정면 돌파하는 것은 숲 바다(the sea Suph)를 통과하는 것으로, 시험은 그들이 인도된 광야 생활로, 그리고 주님의 임재는 낮에는 구름 기둥(the pillar of cloud), 밤에는 불기둥(the pillar of fire)으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In the latter portion of the chapter, and thereafter, the subject treated of is the further preparation of those who were of the spiritual church and who before the coming of the Lord were detained in the lower earth until they could be introduced into heaven, and that for the sake of this end they were first sent through the midst of damnation in safety, and after this underwent temptations, the Lord being continually present. Transmission through the midst of damnation is signified by the passage through the sea Suph; temptations are signified by that life in the wilderness to which they were led; and the presence of the Lord is signified by the pillar of cloud by day, and of fire by night.
7822. 이 장에서 다루는 주제는 그 속뜻으로는 영적 교회에 속한 사람들의 해방(the liberation of those who are of the spiritual church), 그리고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에 관한 저주(the damnation of those who are in faith separate from charity)입니다. 이들 후자에 관한 저주와 전자의 해방을 유월절로, 그리고 해방된 사람들의 체어리티와 신앙 관련 상태(the states in respect to charity and faith of those who are liberated)를 유월절에 지켜야 할 사항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The subject treated of in this chapter in the internal sense is the liberation of those who are of the spiritual church, and the damnation of those who are in faith separate from charity. The damnation of these latter and the liberation of the former are represented by the passover, and the states in respect to charity and faith of those who are liberated, by the things to be observed on the days of the passover.
7823. 가장 높은 뜻(the supreme sense)으로는 유월절은 신실하지 못한 사람들에 관한 저주(the damnation of the unfaithful)와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셨을 때 주님에 의한 신실한 사람들에 관한 해방(the liberation of the faithfulby the Lord, when he had been glorified)을 나타내는데요, 그때 신실한 사람들의 상태에 관한 퀄러티(The quality of the state of the faithful at that time)와, 또한 나중에 범보편적으로든 아주 특별한 경우든 그 퀄러티가 어떻게 될 것인지(what its quality would be afterward, both in the universal and in every particular)가 이 유월절 법령이 가리키는 가장 높은 뜻입니다. In the supreme sense by the passover is represented the damnation of the unfaithful and the liberation of the faithful by the Lord, when he had been glorified. The quality of the state of the faithful at that time, and also what its quality would be afterward, both in the universal and in every particular, is described in this supreme sense by the statutes of the passover.
7763. 이 장에서 다루는 주제는 그 속뜻으로는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의 저주(the damnation of faith separate from charity)인데, 이는 자정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 애굽의 장자들이 상징하는 것이며, 그리고 또한 영적 교회에 속한 사람들에게 전수되어야 할, 진리와 선에 관한 기억-지식(the memory-knowledges of truth and goodthat were to be transferred to those who are of the spiritual church)인데, 이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 사람들에게 요구해야 했던 은금 패물이 상징하는 것입니다.The subject treated of in this chapter in the internal sense is the damnation of faith separate from charity, which is signified by the firstborn of Egypt that were given up to death at midnight; and also the memory-knowledges of truth and good that were to be transferred to those who are of the spiritual church, which knowledges are signified by the vessels of silver and of gold that the sons of Israel were to ask from the Egyptia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