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2023/4/2)

 

1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2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 5또 이르시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눅6:1-5)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출20:10)

 

십계명, 즉 십성언(十聖言)에 따라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가 구전 율법으로 아주 상세하게 규정되어 왔는데요...

 

먼저, ‘안식일’(the Sabbath)의 속뜻은, 가장 높은 뜻(the supreme sense)으로는, 신성 그 자체(the Divine Itself)와 주님의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 of the Lord) 간 하나 됨(the union)을, 내적 의미(the internal sense)로는, 신적 인성과 천국들, 즉 천국 간 결합(the conjunction)을, 그래서 그곳 선과 진리 간 결혼(the marriage of good and truth)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말씀은 쉼과 평화, 천국 상태에 있으라는 말씀이며, 이는 곧 모든 염려, 불안, 근심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 그러므로 복된 상태에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이는 곧 자아로 말미암은 일체의 것들은 금하고, 대신 오직 주님 뜻에 부합, 합당한 것들을 하라는 말씀이지요. 사람이 이 상태에 있을 때가 바로 참 ‘안식일’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속뜻을 몰랐던 유대인들은 그 수많은 ‘하지 말라’는 규례, 규정들을 지키느라 진정 안식일에도 도무지 쉴 수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이지 싶습니다.

 

천국은 시공간의 나라가 아닌, 상태와 그 변화의 나라입니다. 즉 지상의 춘하추동, 그리고 아침, 낮, 오후와 저녁 등 일상의 변화가 있는 것처럼 천국에도 열과 빛의 변화, 즉 주님의 선인 열과, 진리인 빛은 늘 영원불변하시지만, 각 구성원의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변화, 즉 주님의 선과 진리에 대한 각 구성원의 변화에 따라 저들 각 개인이 느끼는 상태의 변화가 있습니다.

 

사람은 영과 육으로 되어 있어, 영으로는 천국과 지옥, 육으로는 지상과 연결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여기 ‘천국과 지옥’이라 함은 천국과 지옥에서 각각 파견된 천사들과 악한 영들이 모든 사람에게 와 있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가 외적인 것, 곧 세상을 생각하고, 감각적인 것에서 기쁨을 찾고자 할 때, 그것이 천국에선 어두움이요, 추위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아와 세상에서 돌이켜 오직 주님 향해 시선 고정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부디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신 주님 말씀 꼭 기억하고, 주일뿐 아니라 평일에도 늘 ‘안식일’ 상태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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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레위(마태)더러 나를 따르라 하신 이유’ (2023/3/30)

 

27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29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있는지라... (눅5:27-39)

 

레위’라는 이름의 속뜻은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Charity toward the Neighbor)이고, ‘세리’라는 직업의 속뜻은 이방인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 곧 주님으로 말미암는 선과 진리를 그 자체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속한 사람이라 하여 저절로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사람인 것도, 교회에 속하지 않았다 하여 무조건 자아 사랑, 세상 사랑의 사람인 것도 아닙니다.

 

주님이 레위더러 나를 따르라 하신 그 속뜻은 교회 밖 이방인 가운데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을 택하셔서 제자를 삼으심입니다.

 

일상의 삶 가운데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가령 예를 들면, 자기 직업과 관련된 일을 그 자체의 목적으로 정직하고 성실, 근면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유익보다도 먼저 말입니다.

 

쓰임새’(use)와도 통하는데요, 주님께 쓰임 받는다는 생각, 이 쓰임을 통해 더 큰 어떤 주님의 공공선에 기여한다는 생각, 또 이 쓰임, 이 직업과 관련된 모든 것 안에 주님이 계신다는 생각, 그래서 아주 사소한 하나라도 소홀함이 없으며, 관련된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는 생각 등등...

 

이 모든 것이 주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베드로처럼 레위도 그 즉시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랐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어안이 벙벙한 따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도 레위처럼 자신의 일터에서 주님 눈에 들어 제자로 부르심 받는 큰 축복의 하루하루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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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앞에 침상째 달아 내려진 한 중풍병자’ (2023/3/29)

 

...18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눅5:17-26)

 

나병’의 속뜻, 그 영적 의미가 ‘영적 모독’, 즉 마음으로 시인하고 인정한 주님 말씀을 버젓이 범하고 있는 것이라면, ‘중풍병자’는 진리를 따라 살고자 애는 쓰나 살아낼 능력이 없는 사람, 즉 악을 멀리하려 해도 잘 안되고, 선을 행하려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상태 가운데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말씀을 따라 살지 못하며, 그래서 좌절하는 경우들이 많은데요, 그 이유는 주님, 주님은 하지만 실제로는 주님과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학습해서 아는 진리와는 달리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는 그 안에 선이 들어있는 진리, 선을 동반한 진리, 선을 행할 능력이 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주님 사이 연결을 가로막는 벽을 오늘 본문에서는 ‘무리’로 표현했습니다.

 

주님과 연결되기 위해서는 아주 사소해 보이는, 그리고 직접적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선일지라도 일단 행하여 습관 들이는 것이 필요하며, 안 하던 걸 하려니 그 쉽지 않음이 마치 지붕을 뜯는 것과 같아 본문에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처럼 표현한 것입니다.

 

중보기도 하기, 이웃에게 먼저 인사하기, 직장 동료들을 친절하게 대하기, 부부간에, 그리고 부모-자식 간에 선한 말, 사랑의 말로 대화하기 등등...

 

선 안에는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가 크고 작은 선을 통해 그 물꼬를 트면, 그때부터 우리 안에 주님의 능력이 흘러들어와 우리를 고치시고,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아멘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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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에 나병 들린 사람’ (2023/3/28)

 

12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13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떠나니라... (눅5:12-16)

 

다음 주님 말씀은 사실 굉장히 엄중한 말씀입니다.

 

28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29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막3:28-29)

 

사람은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로 되어 있으며, 그래서 선이든 악이든 자신의 의지로 행한 것만, 즉 본인이 원해서 한 것만 그 사람 자신, 곧 그 사람의 영이 되며, 그래서 사람의 사후, 사람의 영을 조사하는 천사들이 중점적으로 보는 것도 바로 이 부분입니다.

 

위 ‘성령’은 진리로 세상에 오신 주님 자신, 또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를 말하며, 그래서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진리로 오신 주님을 모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알면서, 즉 시인하고 인정했으면서도 진리를 어기거나 부인하는 것이 곧 진리를 모독하는 것,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이 모독 이야기를 먼저 좀 말씀드리는 이유는, 오늘 본문의 ‘나병’이 그 속뜻으로는 바로 이런 ‘영적 모독’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는 나병 들린 사람들입니다. 우리 안에 우리 육신의 연약함으로 우리도 어쩌질 못하고 늘 반복하는 불순종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처럼 말입니다.

 

40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마26:40-41)

 

이런 우리도 오늘 본문, ‘온몸에 나병 들린 사람’처럼 주님께 나아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간구, 주님의 안수를 받고 고침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우리도 주님 명령하신 세 가지를 실행, 일상 속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것들을 가지고 주님을 모독하는 일이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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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2023/3/27)

 

...4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눅5:1-11)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은 선(善, The Divine Good)과 진리(眞理, The Divine Truth)가 하나 된 상태, 즉 결혼한 상태이며, 그래서 천국은 두 나라, 곧 천적 나라(천적, The Celestial Kingdom)와 영적 나라(영적, The Spiritual Kingdom)로 되어 있습니다.

 

천적 나라는 주님의 신성 중 선에 더 끌리는 천사들로, 영적 나라는 진리에 더 끌리는 천사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래서 천적 나라는 사랑에, 영적 나라는 신앙에 더 두드러진 반응을 보입니다.

 

말씀에서 ‘고기’는 지식들(knowledges), 인식들(cognitions)을 말하며, ‘어부’는 그런 지식들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 그들을 새롭게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깊은 데’는 높은 곳, 곧 천적 상태를 말하며, 그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시는 주님 말씀은 진리를 구하되 사랑으로, 곧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Charity toward the Neighbor)으로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어부들이 그물 씻는 것을 보셨는데, 이것은 사람이 자기 내면의 어떤 것을 깨끗하게 하는 것, 곧 진리에 대한 애정을 키우며, 더욱 순결하게 하는 걸 말합니다. 자기 내면, 진리에 대한 애정을 순수한 상태로 힘쓰는 사람들을 주님은 찾으신 것입니다.

 

그 애정과 동기가 순수해야만 그 내면이 천국을 향해 열려 천국을 통한 주님의 사랑과 지혜, 모든 힘과 능력이 쏟아져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이라는 상태는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이 전혀 없는 상태, 곧 자아 사랑, 세상 사랑에 깊이 잠긴 상태이며, 이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애를 써도 주님의 진리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베드로가 말한,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의 속뜻입니다.

 

부디 베드로(信仰, faith)처럼, 야고보(仁愛, charity)와 요한(仁愛의 삶, life of charity)처럼 주님의 참 제자의 삶을 사는 우리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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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말한 우리, 나’ (2023/3/24)

 

33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34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35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눅4:33-35)

 

거듭남(regeneration)의 첫 번째는 진리를 아는 것(to know)이고, 두 번째는 진리를 인정하는 것(to acknowledge), 세 번째는 믿는 것(to have faith)이다. 진리를 아는 것과 인정하는 것, 그리고 믿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다음의 사실로 알 수 있는데, 즉 최악의 사람들도 진리를 알 수는 있지만, 그러나 인정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유대인이나 그럴듯한 논리로 교리를 파괴하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다음은 불신자들도 인정은 할 수 있다는 사실. 어떤 경우에 그들은 진리를 강론하고, 입증하며 열정적으로 설득하기도 한다. 그러나 세 번째인데 바로 신앙인이 아니면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AC.896)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 사람 안에 와 있는 더러운 지옥의 영들을, ‘’는 이 사람 본인을 말합니다. 본문의 ‘귀신’은 진리를 왜곡하는 영들을 말합니다.

 

비록 왜곡의 영들에게 사로잡혀 끌려다니고 있지만, 그러나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첫 고백이 터지자 주님은 즉시 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십니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 안에 조성된 온갖 왜곡을 바로잡으실 수 있습니다. 그런 주님을 일상 가운데 고백, 시인, 인정하시고, 주님의 강력하신 보호 가운데 머무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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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에게 화를 낸 나사렛 사람들’ (2023/3/23)

 

여기서 잠깐, 겉 사람, 속 사람 등의 용어 정리를 좀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저 역시 이 부분이 아직 명확하진 않지만... 아직은 육(肉)을 입고 살아가는 상태이기에 ^^

 

지금까지 이해하고 있는 바로는, 간단하게는 inmost(사람 안 주님의 영역), internal(속 사람), external(겉 사람), body(몸) 등 이 네 가지를 이해하시면 되며, 좀 더 명확성을 위해 영어를 그대로 쓰겠습니다. 여기서 앞의 세 개까지가 영, 나머지인 body가 육, 우선은 이렇게 이해하고 계시라 권하고 싶습니다. 참고로, 이들 네 가지는 사람 생전엔 모호하지만 일단 사후, 영이 되면 그때는 아주 명료해지는 그런 것입니다.

 

일단 사람이 죽으면, 영과 육의 분리가 일어나고요, 그때 제일 먼저 body가 분리됩니다. 즉 body를 제외한 나머지 세 가지를 그대로 가지고 영계에서 깨어나게 되지요.

 

사후 첫 번째 상태는 준비상태로, 그동안 body와 internal 사이에서 수고한 external이 정리, 휴면상태에 들어갈 준비를, 그리고 internal이 전면에 드러날 준비를 하는 상태입니다. 천국이든 지옥이든 영계의 영원한 삶은 이 internal로 살아가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 첫 번째 상태 때는 아직은 생전 식구들이나 친구, 지인들이 서로를 알아봅니다. 알아보고 아주 반가워들 하지요.

 

사후 두 번째 상태가 되면, 이제 external은 휴면상태로 들어가고, internal 상태가 되어 예를 들면, 살아생전 한 식구였던 사람들끼리도 서로 못 알아보게 됩니다. 본인은 물론, 식구들 역시 생전, 서로의 영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지요. 생전 식구들이 본 서로의 모습은 external이지 internal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말이, 지상 혈연은 지상으로 끝, 영계로까지 이어지지 않는다 그동안 말씀드린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inmost는 주님의 영역입니다. 네, 우선은 이 정도로만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사렛’의 속뜻은 external, 즉 겉 사람입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곳이며, 심지어 주님을 배척하는 곳,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우리 속 사람 안에 교회를 세우시는 주님은 궁극적으로 우리 겉 사람 안에도 교회를 세우시기 원하며, 우리 겉 사람 안에도 주님의 참 교회가 세워지는 그때가 바로 우리의 겉과 속이 하나 되는, 곧 거듭남의 완성, 속을 통해 말씀하시는 주님께 겉이 복종, 순종하는 때입니다. 속이 기뻐하며 사랑하는 것을 겉도 즐거워하는 때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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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말씀(the Word)에 따로 속뜻(내적 의미, 말씀의 이면, this part of the Word)이라는 게 있을까?’ (2023/4/29)

 

사람의 내적 시야(內的, interior sight), 즉 영안(靈眼, the sight of his spirit)이 열리면 내세에 있는 만물이 눈 앞에 펼쳐지는데요, 이는 외적 시야, 즉 육안으로는 절대 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선지자들이 본 것이 바로 이런 것인데요, 천국에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과 그분의 왕국에 관한 끊임없이 계속 연결되는 표상들(表象, representations)과 그리고 상징들(things that are significative)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천사들의 시야에 펼쳐지는 모든 것은 전부 표상이요 상징들뿐이며, 이런 이유로 말씀에도 이런 표상과 상징이 깃든 것입니다. 말씀은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AC.1691)

 

구약 말씀을 단순히 그 겉 글자로만(the mere letter of the Word), 즉 겉으로만 읽어서는 아무도 다음과 같은 사실들, 곧 말씀의 이면(裏面, this part of the Word)에는 천국의 깊은 비밀들(deep secrets of heaven)이 들어있다라든지, 그리고 이 비밀들은 모두 일반적이든 구체적이든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 믿음, 그리고 이와 관련된 모든 것을 가리킨다라든지 등, 이런 사실들에 대해 심지어 알아차리는 것조차 쉽지 않으실 텐데요, 그 이유는 겉 글자나 글자의 뜻만 가지고 살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그저 유대교회의 외적 의식들과 규례들(the external rites and ordinances of the Jewish church)에 관한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모든 말씀 안에는 내적인 것들(internal things)이 들어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아주 몇 군데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계시하시고 설명하신 데들을 제외하고는 외적인 것들(external things)에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 것인데요, 예를 들어, 희생제물이라는 것은 주님을 의미한다라든지, 가나안 땅과 예루살렘은 천국을 의미하며, 그래서 이들을 일컬어 천국의 가나안, 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것이라든지, 또 낙원도 유사한 의미를 갖는다는, 네, 이러한 예들을 들 수 있겠습니다. (AC.1)

 

※ 그러니까 쉽게 말씀드리면, 사람이 육과 영으로 되어 있듯, 말씀 역시 겉과 속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며, 육이 영을 담는 그릇이듯 말씀의 겉 글자 역시 속뜻을 담는 그릇이라는 것입니다.

 

※ ‘속뜻’(arcana)이란 천사들이 말씀을 읽는 방식입니다. 천국은 내적 나라, 내면 상태와 그 변화의 나라로서, 그래서 그곳 천사들 역시 말씀을 내적 의미인 속뜻으로만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AC’라는 약자는, ‘Arcana Coelestia’를 말하는데요, 이는 라틴어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즉 ‘천국의 비밀’이라는 뜻입니다. 이 책은 스베덴보리가 옮긴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주석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여기 ‘지은’이라 안 하고, ‘옮긴’이라 한 까닭은, 그가 이 책을 1749년 시작, 1756년, 총 10,837개의 글로 마칠 때까지 그의 곁에서 주님이 직접 풀어 주시는 것을 그냥 받아적었기 때문입니다.

 

성경 전 권을 주석 안 하고, 단지 이 맨 처음 두 권만 한 것은, 이 안에 나머지 말씀을 속뜻으로 읽을 수 있는 모든 원리가 남김없이 기술되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계시록까지 말이죠!

 

참고로, 스베덴보리는 이 계시록만큼은 나중에 따로 주석, 그의 사후에 사람들이 발견하였는데(a posthumous work), 각각 ‘Apocalypse Explained’(1,232개의 글), ‘Apocalypse Revealed’(962개의 글)라는 제목으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참고로, 스베덴보리는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은, 그래서 이 아르카나, 즉 속뜻이 들어있는 성경만 말씀임을 알려줍니다. 다음은 스베덴보리가 밝힌 말씀(the Word) 목록입니다.

 

구약은 , , , , , , , 삼상, 삼하, 왕상, 왕하, , , , , , , , , , , , , , , , , , (29권), 신약은 , , , , (5권) (AC.10325)

 

서신서들을 포함한 나머지 성경들은 주님의 아르카나가 담긴 말씀들을 환히, 그리고 겸손히 비추는 조명 역할로 쓰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 나머지 성경들의 경우, 천사들의 시야엔 그 안에 아무 내용도 없어 읽을 수가 없는데요, 말씀드린 대로 천사들은 오직 내적 의미, 곧 속뜻으로만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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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영적 의미, 속뜻’ (2023/4/10)

 

어제는 부활절이었습니다. 다들 참 감사하고 거룩한, 복된 주일이셨을 줄 믿습니다. 아멘 ^^

 

그래서 오늘은 이 ‘부활’ 이야기를 한 가지 가볍게(?) 나누고자 합니다.

 

지상 사는 우리한테는 부활이란,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되 죽기 전에 옷처럼 입고 지내던 몸으로, 육체로 다시 살아나는 걸 말합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사람의 사후, 사흘 만에 그가 영계에서 깨어나 일어나는 걸 부활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부활을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걸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육과 영, 곧 겉과 속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상 살 동안 영이 육 안에 담겨 지내는 걸, 즉 영이 육을 옷처럼 입고 돌아다니는 걸 ‘살아있다’ 하고, 이제 때가 되어 영과 육이 서로 분리되는 걸 ‘죽는다’고 하지요.

 

육과 분리된 영도 사실은 또 겉과 속이 있습니다. 즉 영의 겉이 있고, 영의 속이 있는데요, 놀라운 건, 이 영의 겉, 곧 ‘영체’가 사실은 지상의 몸과 똑같이 생겼고, 똑같이 오감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아니, 오히려 몇 배 더 뛰어나지요. 둔탁한 육을 벗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영체란, 영의 속과 사람의 몸을 서로 연결하여 주는 다리, 교량, 완충 역할을 하는, 영의 몸이라 생각하시면 되며, 그러니까, 사후 우리가 영계에서 처음 눈을 뜰 때, 아무 무슨 형체가 없는 흐늘흐늘, 투명한 무슨 연기처럼 눈 뜨는 게 아니라, 이런 영적 몸을 입고 뜨는 것입니다.

 

일단 이런 영체를 입고 다시 깨어나면 그때부터는 천국이든 지옥이든 영원히 살기 때문에, 천사들이 볼 땐 이것이 과연 진정한 부활인 것이며, 그래서 천사들이 볼 땐, 선인이든 악인이든 일단 모든 사람은 사후 누구나 영계에서 사흘만에 ‘부활’하는 것입니다.

 

부활 관련, 하나만 더 말씀드리면... 주님처럼 살과 뼈를 가진 몸으로 부활하는 것은 오직 주님한테만 일어나는 일이며, 또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 말고 다른 그 어떤 사람도 주님처럼 살과 뼈로 부활하는 게 아니며, 절대로 그래서도 안 되는데요...

 

이는 주님의 이 ‘신령, 신성한 몸’의 의미, 곧 영화(Glorification)하신 몸, 그 ‘신적 인성’(Divine Human)의 의미를 정확히, 그리고 온전히 아시게 되면, 누구나 다 한입으로 증거하시게 될 영광스런 진리입니다.

 

주님은 영화하신 이 신령한 몸으로 지옥을 방문, 당시 영계의 질서를 흔들던 지옥의 광기를 수습하시는 등 피조세계에 닥친 보다 더 엄중한 영계의 질서를 회복하셨기 때문인데요, 이런 일을 과연 주님 말고 누가 또 대신 한단 말입니까? 절대 할 수도 없으려니와 그래서도 절대 안 되지요!

 

그러므로 가령, 바울의 말한 바,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살전4:16-17)

 

와 같은 권면도 위와 같은 신적 진리 안에서 올바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이 몸은 사후 지상에 버려두고, 남기고 가는 겁니다. 결코 다시 찾아 걸치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각자 주님의 신성을 받아들인 만큼 더 신령한 영체, 영의 몸을 입고, 아름답고 찬란한 영원한 천국에서 열심히 거룩한 그곳 쓰임새의 삶을 영원히 살게 되며, 천국에서 영원히 더욱더 젊음의 상태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아멘!

 

 

※ 아래는 제가 참고한 글입니다.

 

10591. Man has been so created that he cannot die in respect to his internal, because he is able to believe in God and also to love God, and thus to be conjoined with God in faith and love; and to be conjoined with God is to live forever.

 

10592. This internal is in every man who is born. His external is that by means of which he brings into effect the things that belong to faith and love, thus that belong to the internal. The internal is what is called the “soul” and the external is what is called the “body.

 

10593. The external which man carries about in the world has been accommodated to uses in the world. This external is what is laid aside when the man dies; but the external which has been accommodated to uses in the other life does not die. This latter external together with the internal is called a “spirit”; a good spirit and an angel if the man had been good in the world; and an evil spirit if he had been evil.

 

10594. In the other life the spirit of man appears in the human form absolutely as in the world. He also enjoys the capability of seeing, of hearing, of speaking, and of feeling, as in the world; and is endowed with every capability of thinking, of willing, and of acting, as in the world. In a word, he is a man in respect to each and all things, except that he is not encompassed with that gross body with which he was encompassed in the world. This he leaves behind when he dies, nor does he ever resume it.

 

10595. It is this continuation of life which is meant by resurrection. The reason why men believe that they will not rise again until the last judgment, when also every visible thing of the world will perish, is that they have not understood the Word, and that sensuous men place the very life itself in the body, and believe that unless this were to live again it would be all over with man.

 

10596. The life of man after death is the life of his love, and the life of his faith; consequently such as has been his love, and such as has been his faith, during his life in the world, such his life remains forever. The life of hell is for those who have loved themselves and the world above all things; and the life of heaven for those who have loved God above all things and the neighbor as themselves. These are they who have faith; but the former are they who have not faith. The life of heaven is what is called eternal life; and the life of hell is what is called spiritual death.

 

10597. The Word teaches that man lives after death, as where it is said that “God is not the God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Matt 22:32); that after death Lazarus was taken up into heaven, but the rich man was cast into hell (Luke 16:22–23); that Abraham, Isaac, and Jacob are there (Matt. 8:11; 22:32; Luke 16:23–25, 29); that Jesus said to the thief, “This day shalt thou be with me in paradise” (Luke 23:43); and in other pla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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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빼앗기리라’ (2023/2/23)

 

※ 21일(화) 설교입니다

 

16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17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18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19예수의 어머니와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로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 20어떤 이가 알리되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2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눅8:16-21)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사람으로부터 오는 게 아닙니다.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출발, 속 사람을 지나 겉 사람을 통해 표현되고 실행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사람이 선과 참, 신실과 공정을 오직 자신과 세상을 위해 말하고 실행할 경우, 그때 그는 자아로부터 그런 것들을 하는 것이며, 그때는 속 사람이 아닌 오직 겉 사람으로부터만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다면 그 모든 행위나 일들은 다 악하며, 만일 그가 하는 말이나 행동 안에 무슨 천국 어쩌구 저쩌구 하는 게 있어도(if heaven is regarded in them) 그건 다 공로 어쩌구 하는 것이며(meritorious), 그래서 그런 건 죄다 아주 사악한(iniquitous) 것입니다. (AE.794:3)

 

 

①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등불’은 진리에 순종하는 사람들의 믿음을, ‘그릇, 평상’은 진리의 지식만 있고, 실천하지는 않는 사람들의 믿음을 말합니다.

 

그릇’은 진리의 지식이며, ‘평상’은 교리의 지식입니다. ‘말씀’의 문자적 진리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속뜻, 즉 내적 진리가 담긴 ‘그릇’이기 때문이며, ‘평상’(bed, 침대)은, 신앙인들은 마치 침대에서 쉬는 것처럼 교리 안에서 쉬기 때문입니다.

 

순종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한테서는 빛, 진리의 빛이 나오는데, 주님은 이 빛을 통해 인류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주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때, 그 삶 가운데서 주님이 빛나십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주목하는 것은, 우리 안에 계신 아름다우신 주님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괜히 착각하시면 안 됩니다.

 

 

②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세상에선 등불 믿음과 그릇, 침상 믿음이 잘 구분이 안 됩니다. 겉보기엔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사후, 이 육신을 벗고 영이 되어 내면의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서면, 그땐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는데,

얼마나 생생하게 드러나는지는 아래 링크, 지난 1월 30일 나누었던,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 기억 전체를 유지하는 몇 가지 생생한 사례들’을 다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https://bygrace.kr/1424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 기억 전체를 유지하는 몇 가지 생생한 사례들’ (2023/1/30)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 기억 전체를 유지하는 몇 가지 생생한 사례들’ (2023/1/30) ※ 아래 사례들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48장, ‘두고 가는 것은 육체밖에 없다’ 462번 글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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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이는 사후 영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말씀하신 것인데요, 스베덴보리 창세기 주석 2449번 글에 보면,

 

사후에 영계로 오는 사람들은 육신으로 있을 때와 똑같은 삶으로 다시 들어간다. 그리고 그때 선한 사람에게서는 악과 거짓이 떨어져 나가고, 악한 사람에게서는 선과 진리가 떨어져 나간다. 그 이유는 선한 사람은 선과 진리를 통해 주님에 의해 천국으로 들어 올려지고, 악한 사람들은 악과 거짓을 통해 지옥으로 가기 위한 것이다.

 

천국은 요만큼의 악과 거짓도, 지옥 역시 요만큼의 선과 진리도 갖고 갈 수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천국도, 지옥도 아닌 중간 상태에서 이런 일을 하시는데요,

 

즉 천국 갈 사람에겐 부족한 만큼의 선과 진리를 보태 주시고, 지옥 갈 사람한텐 필요도 없는 선과 진리를 떼어내시는 등 양쪽 다 100% 순수한 상태가 되게 하신 후 가게 하십니다. 물론 이 보태시거나 떼어내시는 과정이 그렇게 즐겁지만은 않은 과정인 것은 다들 눈치채셨겠지요?

 

임종 후 눈뜨니 천국이요, 눈뜨니 지옥이더라 이런 거 아닙니다 ^^

 

※ 나머지 내용은 아래 원고를 꼭 필독하시기 바랍니다.

 

원고 : https://bygrace.kr/1457

 

매일예배(2023/2/21, 눅8:16-21),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빼앗기리라'

※ 원본은 서울 새 교회(http://seoul.newchurch.or.kr/) 이순철 목사님의 누가복음 속뜻 강해입니다. ※ 원고 중간중간 참고표시(※)는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보탠, 원본에는 없는 보조설명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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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https://youtu.be/11Y7iwp49d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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