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

 

27. 9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Verse 9. 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

 

자기 안에 속 사람과 겉 사람, 두 종류의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리고 진리들과 선들이 속 사람으로부터(from), 혹은 속 사람을 통해서(through) 겉 사람 안으로 주님으로부터, 비록 그렇게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흘러들어 온다는 사실이 알려질 때, 그때, 거듭나는 중인 사람 안에서는 그 진리들과 선들, 혹은 참된 것과 선한 것에 관한 지식들이 그의 기억 안에 쌓이게 되며, 그 지식들 가운데로 분류되어 들어가게 됩니다. 겉 사람의 기억 안으로 밀어넣어지고 있는 게 무엇이든, 그게 자연적이든, 아니면 영적, 혹은 천적이든, 그것은 기억-지식으로 거기에 머무르다가, 나중에 주님에 의해 꺼내어지기 때문입니다. When it is known that there is both an internal and an external man, and that truths and goods flow in from, or through, the internal man to the external, from the Lord, although it does not so appear, then those truths and goods, or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the good in the regenerating man, are stored up in his memory, and are classed among its knowledges [scientifica]; for whatsoever is insinuated into the memory of the external man, whether it be natural, or spiritual, or celestial, abides there as memory-knowledge, and is brought forth thence by the Lord.

 

이 지식들이 바로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즉, 한곳으로 모인 물이며, 이걸 ‘바다’라 하는 것입니다. 한편, 겉 사람 자신을 가리켜서는 ‘’이라 하고, 이어지는 10절에서는 ‘’이라 하고 있습니다. These knowledges are the “waters gathered together into one place,” and are called “seas,” but the external man himself is called the “dry [land],” and presently “earth,” as in what follows.

 

AC.27, 창1,9,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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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dptfqFtBg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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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

 

24. 6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Verse 6.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and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 혹은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가 날(day) 안에 참과 선에 속한 지식을 낳으시고(has brought forth), 빛을 처음으로 주십니다(has given). 이 빛은 곧 주님이시며, 선 자체이시고, 진리 자체이십니다. 주님은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그 어떤 선과 진리도 있을 수 없는 그런 분이십니다. 그런 후에, 주님은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어떤 구별을 두시는데(makes), 그 결과,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들(the knowledges, [cognitiones])과 겉 사람에게 속한 기억-지식들(the memory-knowledges, [scientifica]) 사이에 일종의 구별이 생깁니다. After the spirit of God, or the Lord’s mercy, has brought forth into day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of the good, and has given the first light, that the Lord is, that he is good itself, and truth itself, and that there is no good and truth but from him, he then makes a distinction betwee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consequently between the knowledges [cognitiones] that are in the internal man, and the memory-knowledges [scientifica] that belong to the external man.

 

속 사람은 ‘궁창’(穹蒼, an expanse),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은 ‘궁창 위의 물’, 겉 사람에게 속한 기억-지식은 ‘궁창 아래의 물’이라 합니다. The internal man is called an “expanse”; the knowledges which are in the internal man are called “the waters above the expanse”; and the memory-knowledges of the external man are called “the waters beneath the expanse.”

 

[2] 사람은 거듭남이 진행되기 전에는 무슨 속 사람 같은 게 있는지조차도 모릅니다. 속 사람 같은 내면세계는커녕 오히려 겉 사람의 본성과 퀄리티 같은 거에 더 익숙해져 있지요. Man, before he is being regenerated, does not even know that any internal man exists, much less is he acquainted with its nature and quality.

 

그는 생각하기를, ‘속 사람, 겉 사람은 서로 구분할 수 있는 게 아니야!’ 합니다. He supposes the internal and the external man to be not distinct from each other.

 

그 자신 이미 감각적이고 세속적인 일에 푹 잠겨 있으므로, 속 사람 같은 내면의 일들 역시 그런 식으로, 혼란스럽고 모호한 그 어떤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For, being immersed in bodily and worldly things, he has also immersed in them the things that belong to his internal man, and has made of things that are distinct a confused and obscure unit.

 

그런 까닭으로, 먼저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으라’ 하시고, 이어서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십니다. 그리고 좀 더 구체적으로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라’ 하십니다. 뒤에 나오는 구절들에서 말이지요. Therefore it is first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and then,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but not,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which a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are above the expanse,” as is afterwards said in the next verses: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창1:7-8) And God made the expanse, and made a distinction between the waters which we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were above the expanse, and it was so.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Gen.1:7–8)

 

[3] 그래서 전체 거듭남의 과정 가운데 사람이 이제 다음으로 관찰하게 되는 사실은, 먼저 속 사람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 그리고 그 속 사람에게 속한 일들은 선과 진리이며, 그것은 오직 주님께만 속한 것이라는 사실 등입니다. The next thing therefore that man observes in the course of regeneration is that he begins to know that there is an internal man, or that the things which are in the internal man are goods and truths, which are of the Lord alone.

 

그런데 이렇게 거듭나고 있는 가운데 재미있는 사실은, 겉 사람의 경우, 그 본성상 사람은 지금 자기가 행하는 선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줄로 여전히 안다는 것입니다.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자기가 말하는 진리가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줄로 여전히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거듭남이 시작되었어도 사람은 처음에는 자기가 잘 나서 그런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모든 것을 주님은 처음부터 감안하고 계십니다. 그는 자기 것으로 이렇게 하는 줄 알지만 주님은 그 사람의 이런 착각까지도, 그의 겉 사람에 속한 모든 것을 다 사용하셔서 결국은 그를 주님 쪽으로 이끄십니다. 이것이 바로 ‘궁창 아래의 물’이 먼저 언급되고, ‘궁창 위의 물’이 뒤를 따르는 이유입니다. Now as the external man, when being regenerated, is of such a nature that he still supposes the goods that he does to be done of himself, and the truths that he speaks to be spoken of himself, and whereas, being such, he is led by them of the Lord, as by things of his own, to do what is good and to speak what is true, therefore mention is first made of a distinction of the waters under the expanse, and afterwards of those above the expanse.

 

이것이 바로 하늘의 신비입니다. 사람의 미련함, 어리석음, 연약함과 그에 따른 오류 같은 것들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인도되어 선과 진리의 일들로 구부려지는 신비, 거듭남의 모든 움직임과 순간들이 저녁부터 아침까지, 전체적이든 세부적이든, 겉 사람에게서 속 사람까지, ‘땅’에서 ‘하늘’까지 주님의 섭리 아래 한 사람의 거듭남으로 인도된다는 사실은 참으로 신비 중 신비입니다. It is also an arcanum of heaven, that man, by things of his own, as well by the fallacies of the senses as by cupidities, is led and bent by the Lord to things that are true and good, and thus that every movement and moment of regeneration,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proceeds from evening to morning, thu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or from “earth” to “heaven.” Therefore the expanse, or internal man, is now called “heaven.”

 

 

25. ‘하늘을 폈으며 땅을 펼쳤고’라는 표현은 사람의 거듭남을 다룰 때, 예언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공통구와 같은 것입니다. To “spread out the earth and stretch out the heavens,” is a common form of speaking with the prophets, when treating of the regeneration of man.

 

이사야에서처럼 말입니다. As in Isaiah:

 

24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사44:24) Thus saith Jehovah thy redeemer, and he that formed thee from the womb; I am Jehovah that maketh all things, that stretcheth forth the heavens alone, that spreadeth abroad the earth by myself. (Isa. 44:24)

 

또 주의 오심을 드러내어 말하는 아래와 같은 구절을 보면, And again, where the advent of the Lord is openly spoken of:

 

3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사42:3) A bruised reed shall he not break, and the smoking flax shall he not quench; he shall bring forth judgment unto truth. (Isa. 42:3)

 

즉, 주님은 사람들의 오류나 틀린 생각을 바로잡으시지도, 재산이나 권력 등에 대한 탐욕을 끄지도 않으시고 대신, 그것들을 진리와 선 쪽으로 방향을 구부러지게 하십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말이지요. 주님은 우리를 아프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것이 주님의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that is, he does not break fallacies, nor quench cupidities, but bends them to what is true and good; and therefore it follows:

 

5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사42:5) Jehovah God createth the heavens, and stretcheth them out; he spreadeth out the earth, and the productions thereof; he giveth breath unto the people upon it, and spirit to them that walk therein (Isa. 42:5)

 

내용이 같은 구절들은 반복해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Not to mention other passages to the same purport.

 

 

26.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econd day.

 

‘저녁’, ‘아침’, ‘날’의 의미는 앞서 5절에서 다룬 것과 같습니다. The meaning of “evening,” of “morning,” and of “day,” was shown above at verse 5.

 

AC.24-26, 창1,6-8,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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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6U5cQiazew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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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

 

22. 5절,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Verse 5.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저녁’이 의미하는 것과, ‘아침’이 의미하는 것을 이제 설명할 수 있습니다. What is meant by “evening” and what by “morning” can now be discerned.

 

저녁’은 모든 선행 상태, 앞서 있었던 모든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상태는 그늘진 상태, 거짓의 상태, 아무런 신앙이 없는 상태입니다. ‘아침’은 모든 후속 상태, 앞으로 진행될 상태를 말합니다. 빛의 상태, 진리의 상태, 신앙에 관한 지식의 상태입니다. Evening” means every preceding state, because it is a state of shade, or of falsity and of no faith; “morning” is every subsequent state, being one of light, or of truth and of the knowledges of faith,

 

저녁’은 일반적으로, 사람의 본성에 속한 모든 걸 의미합니다. 반면에, ‘아침’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모두 주님께 속한 것을 말합니다. 다윗을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Evening,” in a general sense, signifies all things that are of man’s own; but “morning,” whatever is of the Lord, as is said through David:

 

2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3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4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삼하23:2-4) The spirit of Jehovah spake in me, and his word was on my tongue; the God of Israel said, the rock of Israel spake to me. He is as the light of the morning, when the sun ariseth, even a morning without clouds, when from brightness, from rain, the tender herb springeth out of the earth. (2 Sam. 23:2–4)

 

아무 신앙이 없는 때를 ‘저녁’이라, 신앙의 때를 ‘아침’이라 하였으므로,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심이 ‘아침’이요, 주님이 떠나가실 때, 그때는 신앙이 없는 때이므로, ‘저녁’이라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에서처럼 말입니다. As it is “evening” when there is no faith, and “morning” when there is faith, therefore the coming of the Lord into the world is called “morning”; and the time when he comes, because then there is no faith, is called “evening,” as in Daniel:

 

14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 하였느니라 26이미 말한 바 주야에 대한 환상은 확실하니 너는 그 환상을 간직하라 이는 여러 날 후의 일임이라 하더라 (단8:14, 26) The holy one said unto me, Even unto evening when it becomes morning, two thousand and three hundred. (Dan. 8:14, 26)

 

같은 식으로, 말씀에서 ‘아침’은 모든 주님의 오심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며, 결과적으로는, 일종의 새 창조에 관한 표현입니다. In like manner “morning” is used in the Word to denote every coming of the Lord; consequently it is an expression of new creation.

 

 

23. 때 자체를 가리키는데 ‘’(day)이 사용되는데, 말씀에서 이보다 더 흔한 것은 없습니다. Nothing is more common in the Word than for “day” to be used to denote time itself.

 

이사야에서처럼, As in Isaiah:

 

6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9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 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13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분하여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22그의 궁성에는 승냥이가 부르짖을 것이요 화려하던 궁전에는 들개가 울 것이라 그의 때가 가까우며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 (사13:6, 9, 13, 22) The day of Jehovah is at hand. Behold, the day of Jehovah cometh. I will shake the heavens, and the earth shall be shaken out of her place in the day of the wrath of mine anger. Her time is near to come, and her days shall not be prolonged. (Isa. 13:6, 9, 13, 22)

 

7이것이 옛날에 건설된 너희 희락의 성 곧 그 백성이 자기 발로 먼 지방까지 가서 머물던 성읍이냐 15그 날부터 두로가 한 왕의 연한 같이 칠십 년 동안 잊어버린 바 되었다가 칠십 년이 찬 후에 두로는 기생의 노래 같이 될 것이라 (사23:7, 15) Her antiquity is of ancient days. And it shall come to pass in that day that Tyre shall be forgotten seventy years, according to the days of one king. (Isa. 23:7, 15)

 

’이 때를 가리키는데 사용되기 때문에, 이 표현은 또한 그 때의 상태를 가리키는 데에도 사용됩니다. 예레미야에서처럼 말입니다. As “day” is used to denote time, it is also used to denote the state of that time, as in Jeremiah:

 

너희는 그를 칠 준비를 하라 일어나라 우리가 정오에 올라가자 아하 아깝다 날이 기울어 저녁 그늘이 길었구나 (렘6:4) Woe unto us, for the day is gone down, for the shadows of the evening are stretched out. (Jer. 6:4)

 

20여호와의 진노가 내 마음의 뜻하는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그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끝날에 그것을 완전히 깨달으리라 25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에 내가 꿈을 꾸었다 꿈을 꾸었다고 말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렘23:20, 25) If ye shall make vain my covenant of the day, and my covenant of the night, so that there be not day and night in their season. (Jer. 23:20, also 25)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애5:21) Renew our days, as of old. (Lam. 5:21)

 

AC.22-23, 창1,5,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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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se8_HjwMRh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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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이야기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다음은 지난 2월 14일, 함께 나눈 내용입니다.

 

... 최근 창세기 1장 24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와, 이에 대한 AC.44번 내용 중에,

 

사람은, 땅처럼, 먼저 자기 안에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심어 무얼 믿고 무얼 행해야 하는지를 모르고서는 어떠한 선도 행할 수 없습니다. Man, like the earth, can produce nothing of good unless the knowledges of faith are first sown in him, whereby he may know what is to be believed and done.

 

하는 문장에 눈길이 갔더랬습니다. 특별히 땅을 사람의 마음으로 연결하는 표현에 말이지요.

 

특별히 세계테마기행 최근 편 가운데 ‘벼랑 끝을 걷다, 협곡 기행’인 시리즈를 보는 중, 오... 정말 지구 상 어마어마한 협곡들을 소개하는데, 비록 영상으로지만, 감탄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인도양 프랑스령 레위니옹 살라지 협곡, 실라오스 협곡, 그리고 중국의 시링협곡, 언스대협곡, 그리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블라이드리버캐니언 등입니다.

 

이 장엄, 광대, 광활한 장면들을 또 드론으로 말미암아 기가 막힌 영상으로 보여주는데요, 정말 엄청났습니다. 그렇게 계속 감탄에 감탄을 계속하다가...

 

오, 할렐루야! 이 모든 광경, 곧 땅의 모습 이 모든 장관이 주님 보시기에 사람의 마음이겠구나 싶은 겁니다. 주님이 우리 인간의 마음을 보실 때, 저렇게 보이시는가 보다 싶은 순간, 엄청난 전율이 일며, 말할 수 없는 큰 감동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면서 반짝이는 말씀 구절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대하16:9)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8:36)

 

주님이 내 안에 조성하신 마음의 어떠함에 대해 조금, 아주 조금, 그러나 엄청난 무슨 발견을 한 것 같은 아주 흥분된 순간이었습니다...

 

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입니다.

 

이 세상은 천국의 모판입니다. 모형이요, 모델하우스입니다. 세상 모든 것이 오직 사람을 위함이며, 오직 사람의 구원을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그럴 듯한 무엇이라 해도 사람을 하찮게 여기는 일체의 것은 천국으로 말미암은 게 아니며, 아무리 사람을 그럴 듯하게 여긴다 해도 사람의 구원, 곧, 천국으로 인도함이 아니면 여전히 천국으로, 주님으로 말미암은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경 전체, 말씀(The Word) 전체가 단 한 가지 목적, 곧, 사람의 거듭남에 관한 것이며, 그래서 창세기도, 그리고 창세기 1장도 결국은 한 사람의 거듭남의 전 과정을 아름다운 천지창조 이야기로 스토리텔링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거듭남의 첫 단계부터 여섯 번째 단계 가운데 있는 사람, 즉, 아직 거듭남 중에 있는 영적(靈的, spiritual) 인간한테는 주님은 아직 ‘하나님’이셔서 창세기 1장엔 ‘하나님’으로, 그리고 드디어 일곱 번째 단계인 일곱째 날 안식의 상태에 들어간 사람, 즉, 천적(天的, celestial) 인간한테는 주님은 비로소 ‘여호와’이셔서 창세기 2장에서는 ‘여호와’로 각각 호칭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자연계 모든 만물은 사람의 거듭남에 관련되며, 구원에 기여할 때에만 무슨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시작되는 바로 그때가 그 사람한테는 ‘태초’(太初, the beginning)가 되는 것입니다.

 

천지’(天地, the heavens and the earth)는 사람 안의 속 사람, 겉 사람을 말합니다. 이 속 사람, 겉 사람 이야기는 앞으로 대하(大河)처럼 계속 됩니다.

 

말씀에 나오는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는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거듭남을 가리킵니다. (cf. 사43:7)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할렐루야!

 

2021-11-29(D2)-창세기이야기(5),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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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3

 

1579. 9절,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Verse 9. Is not the whole land before thee? Separate, I pray, from me; if to the left hand, then I will go to the right; and if to the right hand, then I will go to the left.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모든 선을, Is not the whole land before thee?” signifies all good.

 

나를 떠나가라’, 그 선은 하나 되지 못하는 것들(what is discordant), 함께 할 수 없는 것들, 어울릴 수 없는 것들이 전부 사라지지 않는 한, 나타날 수 없음을,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분리(separation), 헤어짐을 각각 의미합니다. Separate, I pray, from me,” signifies that the good cannot appear unless what is discordant is made none; “if to the left hand, then I will go to the right; and if to the right hand, then I will go to the left,” signifies separation.

 

 

1580.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Is not the whole land before thee?

 

이 표현의 의미가 모든 선(all good)이라는 것은 ‘’(land)이 가지는 어떤 좋은 뜻(a good sense)과, 여기서는 가나안 땅의 의미, 곧, 천적이며, 그래서 또한 선한, 그런 의미임을 볼 때 분명히 그렇습니다. (※ 관련 글은 저 위 566, 620, 636, 662번 글 참조) That this signifies all goo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land” in a good sense, and here of the land of Canaan, which is the celestial, and therefore also good (concerning which see above, n. 566, 620, 636, 662).

 

※ ‘가나안 땅’은 좋은 뜻으로는 천적인 것, 선, 천국과 교회, 더 나아가 주님 자신을 의미합니다.

 

※ 말씀(the Word)에서는 하나의 용어가 완전히 정반대의 의미를 가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좋은 뜻으로는’이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속 사람은 겉 사람, 특히 겉 사람 안에 있는, 하나 되지 못하는 것들에게 말을 걸고 있습니다. 마치 사람이 자기 안에 좀 털어버렸으면 하는 무슨 악이 있음을 지각할 때나 시험(temptations) 중, 혹은 갈등(combats) 중일 때 보이는 경향과 같지요. The internal man here addresses the external, but those things in the external man which disagree; as a man is wont to do when he perceives some evil in himself from which he desires to be separated, as is the case in temptations and combats.

 

이런 것은 시험 또는 갈등 가운데 있어 본 적이 있는 사람들, 자기 안에 하나 되지 못하는 것들이 있음을 지각하는 사람들은 다 아는 얘깁니다. 사람들이 이런 영적 갈등, 전투(combats) 중에 있는 한은, 비록 그런 것들로부터 분리될 수는 없지만, 여전히 분리되길 원하며, 종종 그 악에 대하여 분노, 아주 쫓아내 버리길 원하는 정도까지 가기 때문입니다. For it is known to those who have been in temptations and combats, that they perceive in themselves things which disagree; from which, so long as there is combat, they cannot be separated; but still they desire separation, and sometimes to such a degree that they are angry with the evil, and desire to expel it.

 

※ 자기한테서 수시로 나타나거나 끈질기게 안 고쳐지는 어떤 악한 습관, 반복된 언행, 태도, 부정적인 사고 등에 대해 사람들이 힘들어 하는 걸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다 겉 사람에 있는 것들이며, 그 중에서도 속 사람과 같이 갈 수 없는 것들입니다.

 

여기서 의미하는 게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These are the things that are here signified.

 

 

1581. 나를 떠나가라 Separate, I pray, from me.

 

이 표현은, 선은 자기와 어울리지 못하는 것(what is discordant)이 쥐죽은 듯이 가만히 있지(quiescence) 않는 한, 나타날 수 없다는 의미인데요, 이는 방금까지 말씀드린 내용, 곧, 속 사람은 겉 사람 안에 있는, 속 사람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이 자신한테서 분리되기를 원한다는, 왜냐하면, 그것이 완전히 분리되기 전까지는, 속 사람으로부터, 즉,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해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는 선은 결코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라는 내용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 good cannot appear unless what is discordant is made null is evident from what has just been said; namely, that the internal man desires that which disagrees, in the external man, should separate itself; for until it has been separated, the good which continually flows in from the internal man, that is, from the Lord through the internal man, cannot appear.

 

그러나 이 분리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이것은 분리가 아닌, 쥐죽은 듯이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알려진 것입니다. But as regards this separation, it is to be known that it is not separation, but quiescence.

 

주님 말고 그 어느 누구도 겉 사람 안에 있는 악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With no one, except the Lord, can the evil that is in the external man be separated.

 

사람은 일단 한번 접한 것은 그게 무엇이든 그의 안에 남습니다. 단지 그게 쥐죽은 듯 조용히 있을 때는 마치 그게 분리된 것처럼 여겨지는데, 그것은 그게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가만히 있기 때문입니다. Whatever a man has once acquired, remains; but it seems to be separated when it is quiescent, for thus it appears to be none.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면, 쥐죽은 듯이 있는 상태가 되는 것도,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 보이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주님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그런 상태가 되면, 비로소 주님으로부터 선이 흘러들어오며, 이 선이 겉 사람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Neither does it become quiescent so as to appear as none, except from the Lord; and when it does thus become quiescent, then for the first time do goods flow in from the Lord, and affect the external man.

 

이런 상태가 천사들의 상태입니다. 그들이 아는 건 그저 악이 자기들한테서 분리되어 왔다는 것뿐입니다. 사실은 악으로부터 일종의 보류 상태, 그래서 악이 아무 활동도 안 하는 상태에 있을 뿐이고, 그래서 없는 것처럼 보일 뿐인데 말이지요. 결과적으로는, 이것이 겉으로 보이는 양상, 곧 겉으로 볼 땐, 마치 악과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천사들이 곰곰 생각하면 아는 것입니다. Such is the state of the angels; nor do they know otherwise than that evil has been separated from them; whereas there is only a withholding from the evil, thus a quiescence, so that it appears as none; consequently this is an appearance, as also the angels know when they reflect.

 

 

1582.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If to the left hand, then I will go to the right; and if to the right hand, then I will go to the left.

 

이 표현이 분리를 의미함은 ‘’(右, the right)와 ‘’(左, the left)의 의미에서 옵니다. That this signifies separation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right” and “the left.

 

우와 좌는 그저 상대적인 용어들입니다. Right and left are merely relative terms.

 

이 용어들은 어떤 고정된 방위나 어떤 장소를 콕집어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서와 동, 북과 남, 어느 쪽도 사람이 어디를 바라보고 서 있느냐에 따라 우 또는 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They do not designate a fixed quarter, or a definite place; as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east as well as the west, the south as well as the north, may be on the right or on the left, according to the way in which one is looking.

 

이건 장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The same is true also of place.

 

가나안 땅을 가리켜 오른쪽이다, 왼쪽이다 할 수 없습니다.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The land of Canaan could not be said to be on the right or on the left, except relatively.

 

주님이 계신 곳, 그곳이 어디이든 거기가 중심입니다. 오른쪽, 왼쪽은 거기를 중심으로 해서 정해집니다. Wherever the Lord is, there is the center; and the right and the left are determined from that.

 

그래서 주님을 표상하는 아브람이 이쪽 혹은 저쪽, 어느 쪽으로 물러나든 그는 여전히 주님을 표상하며, 그렇게 또한 땅(land)도 표상합니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 안에 있든 어디 다른 데 있든 마찬가지, 같은 것, 곧, 아브람은 주님을 표상합니다. 식탁에 계신 분이 가장 높은 위엄을 가지신 분인 것처럼, 가장 높은 자리는 그 분이 앉는 자리요, 오른쪽, 왼쪽은 그때 정해지는 것입니다. Thus whether Abram, by whom the Lord was represented, withdrew this way or that way, still the representation was with him, and so also was the land; so that it was the same thing whether Abram was in the land of Canaan, or was elsewhere; just as it is with the one at table who is of the highest dignity, the highest place is wherever he sits, and the places to the right and the left are reckoned from that.

 

그래서 우냐 좌냐 하는 것은 선택하라는 한 형태요, 그래서 분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To go to the right or the left, was therefore a form of offering the choice by which there was signified separation.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3장 9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속뜻)

주님의 모든 선은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가는데, 이때 겉 사람 안에 이 흐름을 막는 일체의 것, 곧, 주님의 선과 함께 할 수 없는 악이 있으면, 즉, 활동하면 안 됩니다. 주님의 선이 내 생활 속에 나타나게 하고 싶으면 나는 악에서 물러나야 하며, 악이 내 안에서 쥐죽은 듯이 가만히 있게 해야 합니다.

 

※ 주님 말고는 그 어떤 사람도 자기 안에 한번 자리한 악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천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그 악이 고개를 들지 못하게, 쥐죽은 듯이 가만히 있게 할 수는 있습니다. 내가 그때마다 꾹꾹 누르거나 그때마다 물러나 악이 내 안에서 활동하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이 주님으로 말미암는 선이 내 삶에 나타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아멘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2021-11-28(D1)-주일예배(2243, AC.1579-1582, 창13,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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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HDA76AAMY4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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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28(D1)-제9권48호통431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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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이야기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지상의 혈연관계가 천국까지도 이어지는 걸까?’ 1편입니다. 쓰다보니 분량이 많아져 할 수 없이 1, 2편 둘로 나누게 되었습니다.

 

전에 한번 다룬 것 같아 찾아보니 지난 8월 3일에 간략하게 다루었네요 ^^ 오늘은 원래 생각해 둔 다른 주제가 있었는데, 이번 주, 친인척 부고(訃告) 소식 및 저희 친형님의 25주기 기일도 찾아와 고민하다가 이 주제로 변경했습니다.

 

이 주제를 입체적으로 살필 수 있으려면 대략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먼저 좀 선행학습을 해야 합니다.

 

- 사후(死後), 영이 된다는 것

- 영의 외면과 내면

- 천국을 이루는 수많은 공동체

- 천국의 결혼

- 부모와 자녀의 영적 의미

- 천국과 지상의 상응

- 천국을 이루는 주님의 신성

 

등등...

 

네, 그만큼 쉬운 주제가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그렇다고, 이 주제에 대한 답이 꼭 무슨 저런 걸 다 알고 열심히 추론해야만 알 수 있는, 그런 건 아닙니다. 우리가 사후 천국에 가면 바로(?)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지금 이 지상에서는 이 주제에 대한 답조차도 그걸 이해하려면 위와 같은 사전 이해들이 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다음은 지난 8월 3일, 나눈 글의 시작 부분입니다.

 

...어렸을 때,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천국에 가면...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까마득한 조상을 찾아가 인사를 드려야 하나? 또 나중에,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까마득한 후손이 찾아와 나한테 인사를 하게 되나?’...

 

네, 지금 생각하면 지극히 비천적(非天的), 비영적(非靈的) 사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천국을 무슨 이 세상의 연장이요, 확장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지요 ^^

 

답부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지상 혈연관계는 지상에서 끝, 천국까지 이어지지 않는다. 천국에선 전혀 새로운 관계가 시작된다.’입니다.

 

다음과 같은 순서로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① 임종 및 깨어남

② 영의 외면(exteriors)의 상태변화

③ 영의 내면(interiors)의 상태변화

④ 천국 올라가기 전 오리엔테이션

⑤ 자신의 영원한 공동체에 합류

⑥ 우리가 지상에서 혈연관계로 살아가게 하신 이유

 

자, 그럼 먼저, ① 임종 및 깨어남입니다.

 

임종(臨終)은 말 그대로 ‘죽음을 맞이함’입니다. 산 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죽음’이겠지만, 천사들의 입장에서 보면, ‘신참 영의 깨어남’입니다. 같은 장소(?)에서 가족들은 슬피 울고 있지만, 영계에서는 마치 신생아실의 돕는 간호사들처럼 천사들의 극진한 돌봄이 시작됩니다.

 

주님은 신참 영들이 깨어날 때, 마치 지상 신생아 무균실 환경처럼 일체 악한 영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제일 먼저 가장 높은 천사들인 삼층천 내적 천사들을 보내십니다. 이 천적 천사들이 오면 어떤 향기가 진동하는데요, 이 향기로 인해 일체 악한 영들의 접근이 금지됩니다.

 

세간, 가령, 호스피스 등에 종사하시는 분들을 통해 임종을 앞둔 분들의 경우, 무슨 저승사자를 보시곤 한다는 말들을 듣는데요, 그것은,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분 안에 있는 악한 영들이 본 삼층천 천사들이 아닐까 합니다. 그들의 관점에서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테니까요 ^^

 

이 ‘깨어남’(resuscitation, 소생, 부활)의 과정과 관련된 이야기가 또 많지만... 네, 하여튼 영계에서 막 깨어나는 신참 영은 천적, 영적 천사들의 도움과 보살핌으로 이후 영계에서 첫 생활을 시작할 수 있는 준비를 마치게 됩니다.

 

다음은, ② 영의 외면(exteriors)의 상태변화입니다.

 

’하면 그냥 ‘’이지 무슨 ‘영의 외면, 내면’이 있다 하나 어리둥절하시지요? ^^ ‘영의 외면’이란 다름 아닌, ‘영의 내면’과 육체(肉, body, 살과 뼈로 된) 사이에서 둘을 연결시켜 주는, 영의 바깥, 겉 부분을 말합니다.

 

우리의 이 살과 뼈로 된 몸은 사실은 우리의 영이 입고 있는 옷입니다. 옷 자체에 무슨 생명이 없듯 사실 우리의 이 몸은 영과 분리된 후엔 그냥 물질일 뿐이어서 바로 썩고 부패하지요. 우리의 모든 기억과 경험, 감각과 감정 중에서, ‘영의 내면’, 즉, 속 사람(internal man)에 속하지는 않는데, 그렇다고 또 몸은 아닌, 그런 일체가 바로 이 ‘영의 외면’에 속합니다. ‘영의 내면’에 대해서는 요 바로 다음인 ③번 항목에서 다루겠습니다.

 

영은 사후 몇 차례의 상태변화를 겪으면서 천국, 또는 지옥 갈 준비를 하게 되는데요, 그 첫 번째 상태변화가 바로 이 ‘영의 외면’의 상태변화입니다.

 

영의 외면’이 바로 저런 거여서 사후 신참 영들의 모습은 임종 직전 모습, 즉, 생전 모습과 거의 똑같습니다. 그래서 아직 이 외면의 상태에서는 생전에 알던 가족과 친지 등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다 만나게 됩니다. 그들이 생각하던 모습이 아직은 남아있어 알아볼 수 있으니까요. 무척 반가워들 하지요. 모든 게 낯설고 어리둥절한 신참 영들을 이들 고참들(?)이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구경도 시켜주고 이런저런 걸 알려줍니다.

 

여기서 잠깐, 사람 안의 ‘천국’이 무엇이며, 또 ‘지옥’이 무엇인지를 잠깐 생각해야 합니다. 그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가 하나 된 상태가 천국’이며, 이런 사람은 천국의 해당 공동체로 올라갑니다. 마찬가지로, 사람 안에서 ‘악과 거짓이 하나 된 상태가 지옥’이며, 이 사람 역시 지옥의 해당 공동체로 떨어집니다.

 

여기서 ‘해당 공동체’라는 것은, 사람은 생전에 이미 그 사람의 ‘중심 사랑’에 의해서, 자기는 모르지만, 그 영은 천국 또는 지옥의 어느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며, 또 ‘중심 사랑’이란, 그가 무엇을 하든 결국 그의 모든 행위의 근본 동기가 되는 하나의 사랑이 있는데, 이 사랑을 가리켜 ‘중심 사랑’(ruling love)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 ‘중심 사랑’이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이면 천국으로, 자기 사랑, 세상 사랑이면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 첫 번째 상태변화 때, 일어나는 가장 중요 포인트는, 이 영의 ‘중심 사랑’을 통해 형성된 ‘영의 내면’을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즉, 선과 진리의 하나 됨, 또는 악과 거짓의 하나 됨이 진행되는 동안, 천국에 갈 사람한테서는 천국에서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악과 거짓을, 반면, 지옥 갈 사람한테서는 역시 지옥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선과 진리를 각각 떼어내는 일이 이때 일어납니다. 이 과정이 진행되면서, 이 영의 모습은 점점 달라지며, 이 첫 번째 과정이 마칠 즈음이면, 즉, 그의 ‘영의 내면’이 본모습을 드러내면, 그 모습은 ‘영의 외면’일 때와 너무도 달라 아무도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이 영의 외면은 휴면 상태로 들어갑니다.

 

주님의 허락으로 영안이 열려 다른 사람들의 영을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의 말씀에 의하면, 어떤 할머니는 등도 굽고, 흰머리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참 볼품없는 외모이지만, 그 영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인 반면, 어떤 젊은 여자는 정말 많은 남자들의 이목을 한 몸에 받을 정도로 매혹적이지만 그 영은 거의 괴물 수준이더라라고 합니다. 이때 이분들이 본 저들의 영은 사실은 저들의 ‘영의 내면’, 곧, 본모습을 본 것입니다.

 

영의 외면, 내면’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내키지는 않지만 어떤 사정이 있어 누굴 만나거나 할 때, 예의 상, 얼굴이나 태도에 내 속마음을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이나 표정, 행동을 하거나 정 그럴 수 없다면, 그저 무난하게라도 있다 옵니다. 사회생활이라는 게 있고, 도덕과 윤리, 상식과 정서라는 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내 속이 들키지 않게 가려주는 것, 이것이 바로 ‘영의 외면’이며, 그렇다면, ‘영의 내면’은 아무도 안 볼 때, 누구 신경 쓸 일도 없고, 눈치 볼 것도 없을 때, 그때 나타나는 내 본 모습, 그것이 ‘영의 내면’입니다. 즉, ‘코람데오’, ‘하나님 앞에서 내 모습’, 그것이 ‘영의 내면’입니다.

 

다음 순서들인,

 

③ 영의 내면(interiors)의 상태변화

④ 천국 올라가기 전 오리엔테이션

⑤ 자신의 영원한 공동체에 합류

⑥ 우리가 지상에서 혈연관계로 살아가게 하신 이유

 

는 2편으로 미루어야 하겠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는 미니 결론을 미리 좀 말씀드리자면...

 

천국에서는 지상과 같은 ‘생육하고 번성함’이 없고, 대신 ‘주님의 선과 진리의 생겨남’이 있습니다. 지상은 천국의 상응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지상의 혈연, 혈육도 이런 관점, 곧 주님의 선과 진리의 관점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자녀에 대한, 부모에 대한, 남편이나 아내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탈선하거나 오버하지 않을 수 있으며, 지상에서 보내는 시간을 통해 ‘주님 사랑’이라는 ‘중심 사랑’을 연습하고 훈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 사랑은 자녀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계신 ‘주님 사랑’이며, 부모 사랑 또한 부모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계신 ‘주님 사랑’이며, 남편 또는 아내에 대한 사랑도 남편 또는 아내의 모습으로 내 곁에 계신 ‘주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아멘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2021-11-26(D6)-천국이야기(5), '지상의 혈연관계가 천국까지도 이어지는 걸까?(1)'.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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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

 

21. 4, 5절,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Verses 4, 5.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And God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he called night.

 

빛을 일컬어, ‘좋았더라’, 곧, ‘’(good)이라 합니다. 이 빛이 주님으로 말미암기 때문인데, 주님은 선 그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Light is called “good,” because it is from the Lord, who is good itself.

 

어둠’은 그동안 빛인 줄 알았던 모든 걸 의미합니다. 사람에게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말이지요. 그동안 악은 선인 것처럼, 거짓은 진리인 것처럼 행세해 왔습니다만, 이제 보니 그것들은 그저 어둠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것들은 그저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그런 것들이었고, 여전히 남아 있는 어둠일 뿐입니다. The “darkness” means all those things which, before man is conceived and born anew, have appeared like light, because evil has appeared like good, and the false like the true; yet they are darkness, consisting merely of the things proper to man himself, which still remain.

 

※ 사람은 자기가 이해하고 그에 따라 생각하는 모든 것을 진리로 여기며, 또 자기가 의도하고 그에 따라 생각하는 모든 것을 선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든 그것이 주님께 속한 것이면, 그것은 ‘’으로 비교됩니다. 낮은 빛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든 그것이 사람의 본성에 속한 것이면, 그것은 ‘’으로 비교됩니다. 밤은 어둠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Whatsoever is of the Lord is compared to “day,” because it is of the light; and whatsoever is man’s own is compared to “night,” because it is of darkness.

 

이런 비교, 이런 대비가 말씀에는 아주 자주 나옵니다. These comparisons frequently occur in the Word.

 

AC.21, 창1,4-5,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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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k1DgfdRrxF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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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3

 

1575. 8절,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Verse 8. And Abram said unto Lot, Let there be no contention, I pray, between me and thee, and between my herdmen and thy herdmen, for we are men brethren.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는 속 사람이 겉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의미입니다. Abram said unto Lot” signifies that the internal man said thus to the external.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는 둘 사이 하나 되지 못함이 있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한 친족이라’는 그들 가운데 하나 됨이 있었음을 각각 의미합니다. Let there be no contention, I pray, between me and thee, and between my herdmen and thy herdmen” signifies that there ought to be no disagreement between the two; “for we are men brethren” signifies that in themselves they were united.

 

 

1576.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Abram said unto Lot.

 

이 말의 의미가 속 사람이 겉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라는 의미임은 여기 아브람은 속 사람을, 롯은 겉 사람을 각각 표상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분명합니다. 이 겉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곧 분리되게 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 internal man said thus to the external is evident from the representation of Abram, as being here the internal man; and from the representation of Lot, as being the external man that was to be separated.

 

아브람이 속 사람을 표상한다는 것은 그가 롯과 관련되어 언급되기 때문인데, 롯은 겉 사람 안에 있는, 곧 분리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That Abram represents the internal man is because he is spoken of relatively to Lot, who is that in the external man which was to be separated.

 

전에 말씀드린 대로, 겉 사람 안에는 함께 할 수 있는 것들과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There are in the external man, as before said, things that agree, and things that disagree.

 

여기서 ‘’은 함께 할 수 없는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반대로 겉 사람 안에 있는 것들을 포함해서,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 이유는, 이들은 속 사람과 함께 하나를 이루며, 속 사람에게 속하기 때문입니다. By “Lot” are here meant the things that disagree; by “Abram,” therefore, are meant those which agree, including those which are in the external man; for these together with the internal man constitute one thing, and they belong to the internal man.

 

 

1577. 나나 너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Let there be no contention, I pray, between me and thee.

 

이 말의 의미가 둘 사이 하나 되지 못함이 있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의미라는 것은 이미 드린 말씀으로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re ought to be no disagreement between the two is evident from what has already been said.

 

속 사람과 겉 사람 간 함께 함 또는 하나 됨에 관한 아케이나는 지금까지 들을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The arcana relating to the agreement or union of the internal man with the external are more than can ever be told.

 

속 사람과 겉 사람 간 하나 된 적이 있는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나가 될 수도, 하나로 있을 수도 말이지요. 오직 주님만이 그러셨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With no man have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ever been united; nor could they be united, nor can they be, but with the Lord only, for which cause also he came into the world.

 

거듭난 사람들의 경우는 마치 이 둘이 하나 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함께 하는 것들은 주님의 것이고, 함께 하지 않는 것들은 사람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With men who have been regenerated, it appears as if they were united; but these belong to the Lord; for the things which agree are the Lord’s, but those which disagree are man’s.

 

※ 즉, 주님이 허락하셔서, 주님이 도우셔서 거듭날 수 있었다는 것이지, 절대 그들이 잘나서, 그들의 무슨 공로로 그런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겉과 속의 하나 됨은 오직 주님으로만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2] 속 사람 안에는 두 가지, 곧,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있어 이 둘이 하나를 이룹니다. 영적인 것이 천적인 것으로부터 올 경우엔 말입니다. 같은 말이지만, 속 사람 안엔 두 가지, 선과 진리가 있어 이 둘이 하나를 이룹니다. 진리가 선으로부터 올 경우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역시 같은 얘깁니다만, 속 사람 안엔 두 가지, 사랑과 신앙이 있어 이 둘이 하나를 이룹니다.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올 경우엔 말입니다. 계속해서 같은 말입니다만, 속 사람 안엔 두 가지, 의지와 이해가 있어 이 둘이 하나를 이룹니다. 이해가 의지로부터 올 경우엔 말입니다. There are two things in the internal man, namely, the celestial and the spiritual, which two constitute a one when the spiritual is from the celestial; or what is the same, there are two things in the internal man, good and truth; these two constitute a one when the truth is from good; or what is also the same, there are two things in the internal man, love and faith; these two constitute a one when the faith is from love; or what is again the same, there are in the internal man two things,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and these two constitute a one when the understanding is from the will.

 

이는 빛이 나오는 해를 보면 계속해서 더 잘 명료하게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This may be apprehended still more clearly by considering the sun, from which is light.

 

만일 해에서 나오는 빛 가운데 열과 광력(光力, illuminating power), 이 둘이 있으면, 봄철, 만물은 그로 인해 무럭무럭 생장(生長)합니다. 그러나 빛은 있는데 그 안에 해에서 나오는 열이 없으면, 겨울철, 만물은 쇠잔하여 죽게 됩니다. If in the light from the sun there are both heat and illuminating power, as in the springtime, all things are thereby made to vegetate and to live; but if there is not heat from the sun in the light, as in the time of winter, then all things become torpid and die.

 

[3] 이 모든 것으로 속 사람을 이루는 게 무엇인지가 분명하며, 그때 겉 사람을 이루는 것이 나타납니다. From all this it is evident what constitutes the internal man; and what constitutes the external thence appears.

 

겉 사람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자연적입니다. 겉 사람이라는 자체가 자연적인 사람이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In the external man all is natural; for the external man itself is the same as the natural man.

 

속 사람에게 속한 천적, 영적인 것이 겉 사람에게 속한 자연적인 것 안으로 흘러들어와 마치 하나가 된 듯 움직일 때, 이때 속 사람은 겉 사람과 하나가 되었다는 말을 듣습니다. The internal man is said to be united to the external when the celestial spiritual of the internal man flows into the natural of the external, and makes them act as a one.

 

그 결과, 자연적인 것은 또한 천적, 영적인 것이 되는데, 천적, 영적인 것의 입장에서 보면, 더 낮은 단계입니다. 같은 말이지만, 겉 사람 역시 천적, 영적인 것이 되는데, 천적, 영적인 것의 입장에서 보면, 더욱 겉, 바깥 단계가 됩니다. As a consequence of this the natural also becomes celestial and spiritual, but a lower celestial and spiritual; or what is the same, the external man becomes celestial and spiritual, but a more external celestial and spiritual.

 

[4] 속 사람과 겉 사람은 둘 다 뚜렷이 구별됩니다. 천적, 영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자연적인 것들은 겉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are altogether distinct, becaus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are what affect the internal man, but natural things are what affect the external.

 

뚜렷이 구별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여전히, 즉, 속 사람에게 속한 천적, 영적인 것이 겉 사람에게 속한 자연적인 것 안으로 흘러들어와 그것을 그 고유 본성으로 둘 때, 이들은 하나 된 상태에 있습니다. But though distinct, they are still united, namely, when the celestial spiritual of the internal man flows into the natural of the external, and disposes it as its own.

 

※ 즉, 마치 두 종류의 나무를 그 좋은 부분만 더욱 특화하기 위해 접붙이기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밀감나무를 탱자나무에 접을 붙여 병충해에도 강하고 씨 없는 귤을 생산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직 주님 안에서만 속 사람은 겉 사람과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이 둘 사이의 하나 됨은 주님이 그렇게 하셨거나 그렇게 하시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에게도 해당되는 일이 아닙니다. In the Lord alone the internal man was united to the external; this is not the case in any other man, except so far as the Lord has united and does unite them.

 

사랑과 체어리티만이, 혹은 선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랑과 체어리티, 즉, 어떠한 선도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결코 있을 수가 없습니다. Love and charity only, or good, is what unites; and there is never any love and charity, that is, any good, except from the Lord.

 

이것이 바로 아브람의 말,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는 말 속에 담긴 하나 됨입니다. Such is the union that is intended in these words of Abram: “Let there be no contention between me and thee, and between my herdmen and thy herdmen.

 

[5]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라고 말하는 건 이런 경우입니다. 속 사람 안에는 두 가지, 천적, 영적인 것, 전에 말씀드린 대로, 하나를 만드는 두 가지가 있는 것처럼, 그렇게 또 겉 사람 안에도 자연적 선이라고 하는 천적인 것과, 자연적 진리라고 하는 영적인 것, 두 가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It is said, “Between me and thee, and between my herdmen and thy herdmen,” for the case is thus: as there are two things in the internal man, namely, the celestial and the spiritual, which as before said make a one, so also are there in the external man, its celestial being called natural good, and its spiritual natural truth.

 

나나 너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는 말은 선과 관계가 있는 말입니다. 속 사람의 선은 겉 사람의 선과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라는 걸 의미하며,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는 말은 진리와 관계가 있는 말입니다. 속 사람의 진리는 겉 사람의 진리와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Let there be no contention between me and thee” has reference to good, meaning that the good of the internal man should not disagree with the good of the external man; and “Let there be no contention between my herdmen and thy herdmen” has reference to truth, meaning that the truth of the internal man should not disagree with the truth of the external man.

 

 

1578. 우리는 한 친족이라 For we are men brethren.

 

이 말의 의미가 둘이 함께 하나가 되어 있음이라는 것은, ‘친족’(man brother)의 의미가 하나 됨, 곧, 진리와 선의 하나 됨이라는 걸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y are united together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man brother,” as being union, and in fact the union of truth and good.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3장 8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속뜻)

속 사람이 겉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였으니 어떤 경우에도 이 하나 됨을 해치는 일이 없게 하자. 내 안에 있는 천적, 영적인 것들과 네 안에 있는 자연적 선과 진리들 사이에 늘 하나가 되게 하자.’

 

※ 겉 사람 안에도 두 종류, 곧 속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것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말에 주목하여, 주님으로 말미암은 속 사람, 곧 천적, 영적인 것과 함께 할 수 있는 겉 사람의 것은 더욱 힘쓰고, 함께 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는 물러서는 일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2021-11-24(D4)-매일예배(2241, AC.1575-1578, 창13,8),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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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kb1ZzcH8zx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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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이야기 네 번째 시간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예를 들어, ‘아담’ 하면 ‘아담’이라는 한 개인을, ‘하와’ 하면 ‘하와’라는 한 개인을, 그런 식으로, ‘아벨’도, ‘가인’도... 다 그렇게 그런 이름을 가진 한 개인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말씀(the Word)을 겉 글자의 뜻으로만 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마치 육이 영의 생각, 영의 사정을, 겉 사람이 속 사람의 생각과 사정을 도저히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뿐 아니라 지난 2천 년 기독교가 말씀의 속뜻에 관한 한, 이런 지독한 어두움 가운데 놓이게 된 데에는, 초대교회의 연약함을 비롯, 니케아 회의의 심의와 칙령(the deliberations and decrees of the council of Nice, 325년) 및 이후 전개된 교리의 역사 등 역사적 배경 이야기가 좀 있으며, 나중에 필요하면 다루겠습니다. (TCR.206)

 

한 마디로, 상응 지식(the knowledge of correspondences)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지식이 있어야 말씀의 영적 의미, 곧 속뜻에 접근할 수가 있는데요, 초대교회 이후, 위와 같은 이유로 인류에게 이 지식이 닫힌 것입니다. (TCR.206)

 

하지만 비록 말씀의 겉 글자의 뜻 가운데 살았더라도, 즉, 이런 걸 모르고 살았더라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선과 진리의 삶을 사신 분들에게는 주님의 은혜로 끊임없이 구원이 베풀어졌습니다. 즉, 천국의 대기인 신성(神性, the Divine) 호흡을 할 수 있게 되어 천국 생활이 가능했습니다. 천국 가는 길이 그렇게 어렵고, 문턱이 높은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주님의 자비로 지금 이 상응 지식이 계시되고(啓示, revealed), 즉, 드러나고 있고, 교회에 관한 신적 진리들(the Divine truths of the church)이 빛 가운데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진리들이 바로 말씀의 영적인 의미, 곧, 속뜻을 구성하는 진리들입니다. (TCR.207)

 

다시 ‘아담’이라는 이름 이야기로 돌아와서, 요점부터 말씀드리면, ‘아담’은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그 시대를 대표하는 교회의 이름이며, 신앙의 이름, 신학의 이름이요, ‘하와’ 같은 경우는 어떤 내적 의미라는 것입니다. ‘아벨’도, ‘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잘 아는,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 하면 ‘므두셀라’입니다. 창세기 5장 27절을 보면,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이때 이 ‘므두셀라’는 ‘므두셀라’라는 한 개인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대표된 어느 한 작은 단위의 교회 시대를 말하며, 또한 여기 이 ‘구백육십구 세’라는 기간 역시 우리가 이해하는 969세라는 정량적인 의미가 아닌, 장구한 세월을 뜻하는 어떤 영적인 의미라는 것이지요.

 

창세기 1장부터 11장 ‘에벨’의 때까지 모든 등장인물의 이름은 어느 한 개인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그 시대 교회와 신앙을, 그리고 어떤 영적 의미를 각각 그 이름으로 일컬었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12장 아브람부터가 비로소 실제 역사, 곧 이때부터 나오는 이름들이 비로소 실제 살았던 한 개인의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걸 이해하시려면 먼저 말씀의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며, 그래서 오늘은 이 이야기를 좀 해드리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는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모드는 이랬습니다. 그들은 땅에 속한, 이 세상의 것을 언급할 때, 그것이 표상하는(represented) 영적, 천적(天的, celestial)인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단지 그것을 무슨 대표성을 띤 것(representatives)으로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역사 시리즈물(historical series)로도 꾸몄습니다. 그렇게 하면, 보다 더 생생하니까요. 이렇게 하는 게 그들에겐 굉장히 차원 높은 즐거움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것이 한나의 다음과 같은 예언에 사용된 스타일입니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삼상2:3) Speak what is high! high! Let what is ancient come out of your mouth. (1 Sam. 2:3)

 

개역개정 번역과 영어가 상당히 달라 좀 당황스러운데요... 직역하면, ‘높고 높은 것을 말하며, 입을 벌려 고대의 것이 나오게 하라’가 되겠습니다.

 

이런 대표성을 가리켜 시편에서는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이라 하고 있습니다.

 

2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3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4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시78:2-4)

 

천지창조, 에덴동산 등 아브람의 때까지 이어지는 이들 하나하나에 대하여 모세는 태고교회 후손들에게서 얻었습니다.

 

두 번째는 역사기록물(historical) 스타일로서, 아브람의 때로부터 시작, 모세의 책들 및 여호수아, 사사들, 그리고 사무엘과 열왕들의 책에서 볼 수 있는 스타일입니다. 이들 책에서는 역사적인 사실들이 글자의 기록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전체가 일반적으로나 세부적으로나, 속뜻으로는 아주 다른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세 번째는 예언적(prophetical) 스타일인데, 이는 태고교회에서 아주 높은 공경을 받던 어떤 것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 스타일은 태고교회 스타일처럼 계속 연결되어 역사적 무슨 형태를 갖추지를 못하고 그만 끊어져, 가장 깊은 아르카나(arcana, 秘義)가 들어있는 속뜻을 제외하고는 오늘날은 거의 이해할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이 아르카나는 아름다운 순서로 연결되며, 거기에는 겉 사람과 속 사람에 관한 것, 교회의 수많은 상태들 및 천국 그 자체, 그리고 가장 내적으로는 주님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네 번째는 다윗의 시편(the psalms of David) 스타일로서, 예언적 스타일과 일상적 언어 스타일 간 중간 스타일입니다. 이 스타일에서 주님은 다윗이라는 사람으로 등장하지만, 속뜻으로는 왕이십니다. (AC.66)

 

어떠신가요? 좀... 어려우시죠? 네, 저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빛 환히 비추심을 구하며,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들 서술 스타일의 관점으로 보면,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는 태고교회 스타일로, 그리고 12장부터는 역사기록 스타일로 그 서술 스타일이 바뀌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창세기를 읽을 때,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저는 지구의 지질학적 연대를 받아들입니다. 대략 45, 6억 년 전후라 합니다. 이 장구한 연대 중 태고교회의 시작, 즉, 아담의 등장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그때부터 아브람의 때까지가 태고교회 스타일로 기록되었다고 봅니다. 즉, 일종의 역사 시리즈물로 기록되었다는 것이지요. 일종의 스토리텔링으로 이해가 됩니다.

 

말씀이 무슨 다큐멘터리나 일지도 아니고... 이 장엄, 장구한 수십억 년 역사를 실제 역사로 기록한다면 얼마나 많은 페이지가 필요하겠으며, 과연 그럴 필요가 있기나 할까요? 그런 기록이 사람을 거듭나게 하여 천국으로 데려가고자 하시는 일에 무슨, 그리고 얼마나 도움이 될까요?

 

이런 이유로, 고대의 역사를 이런 문체, 이런 이야기 스타일로 기록, 인류의 그간 있었던 총 네 번의 교회 시대, 즉, 태고교회, 고대교회, 유대교회(혹은 표상교회, 表象) 및 현 기독교회 중 앞 두 교회인 태고교회(혹은 아담교회)와 고대교회(일명 노아교회)를 창세기의 맨 앞부분 열한 개의 장으로 압축, 요약, 이야기체로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압축, 요약했다고는 하지만, 그 속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속뜻을 넣어두셔서 이 아르카나를 오직 상응(相應, correspondence)으로만 알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앞서 말씀드린 주님의 지혜의 5, 4, 3등급 지혜라 하겠습니다. 말씀은 6등급 지혜인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창세기의 이런 말씀 서술 스타일을 이해하신다면 비로소 창세기 첫 열한 장은 글자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또한 이해하실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이 또한 창세기 이야기를, 본문을 가지고 제대로 시작하기 앞서 제가 이토록(?) 뜸을 들이는 이유이기도 하며, 또 왜 우리의 모든 신앙의 출발을 창세기에서 해야 하는지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

 

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2021-11-22(D2)-창세기이야기(4), '말씀(the Word) 서술의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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