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64 심화

‘에녹이 보존한 교리는 후대의 고대 말씀과 모세의 창세기 기록에 어떻게 이어졌는가?’

 

 

AC.464는 ‘에녹’이라 하는 교회가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그 교회가 퍼셉션한 것들로부터 교리를 형성했으며, 그 교리가 당시에는 쓸모가 없었지만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존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에녹이 정돈하여 보존한 교리가 훗날 고대교회에 전해지고, 더 나아가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할 때 사용한 고대의 자료가 된 것일까요? 큰 흐름에서는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에녹의 교리 = 고대 말씀 = 모세오경’이라고 곧바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에녹의 역할부터 정확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태고교회는 천적 교회였으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서 선과 진리를 퍼셉션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후대처럼 체계적인 교리를 먼저 배우고 그것을 통해 무엇이 참인지를 판단하는 방식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상태가 변하면서 이러한 퍼셉션이 계속 유지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에녹’이라 하는 교회가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퍼셉션된 것들을 모아 교리의 형태로 정돈했습니다. 살아 있는 내적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것이 후대에도 전달될 수 있는 형태로 보존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는 창5:24의 속뜻과 연결됩니다. 에녹의 교리가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즉시 필요한 것이어서 널리 사용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당시에는 쓰이지 않으면서도 훗날 필요할 때를 위하여 보존되었다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사라질 것을 주님께서 아셨기 때문에, 그 안에 있던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까지 함께 사라지도록 두지 않으시고 다른 형태로 보존하신 것입니다. AC.464의 에녹은 이런 의미에서 ‘퍼셉션에서 교리로’ 넘어가는 중요한 전환점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에녹이 정돈한 교리를 곧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 말씀’ 전체와 동일시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고대교회에 하나의 ‘고대 말씀’(Ancient Word)이 있었으며, 그것이 후대에는 소실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민21:14의 ‘여호와의 전쟁기’와 수10:13 및 삼하1:18에 언급되는 ‘야살의 책’ 등을 그 고대 말씀과 관련하여 설명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로부터 내려온 상응과 표상의 지식이 고대교회에서 말씀과 교리의 형태로 발전하고 보존되었던 더 넓은 전승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에녹의 교리화는 이 긴 전승의 매우 초기적이고 중요한 단계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모세와의 관계에서도 같은 주의가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앞부분의 기록이 모세 시대에 처음 아무 자료도 없이 생겨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태고교회와 고대교회에서 내려오던 고대의 기록과 전승이 있었으며, 모세가 그러한 자료를 사용했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창세기 원역사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태고교회와 고대교회로부터 전해 내려온 매우 오래된 교회적 전승이 상응적 서술의 형태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고대의 말씀과 상응 지식 자체는 후대에 상당 부분 소실되었지만, 그 내용과 표현의 일부는 섭리 가운데 후대의 말씀 안에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와 에녹의 교리 보존 사이에는 ‘고대의 계시와 퍼셉션이 후대를 위해 보존되고 전승되었다’는 큰 연속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연속성을 ‘에녹이 책을 한 권 써 두었고 그것이 그대로 전해져 모세오경이 되었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464는 그런 직접적인 문헌 계보를 말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모세오경 전체가 에녹의 교리에서 유래했다고 할 근거도 없습니다. 보다 정확한 그림은 ‘태고교회의 계시와 퍼셉션 → 에녹이라 하는 교회의 교리화와 보존 → 고대교회에서의 전승과 발전 → 고대의 말씀과 여러 기록 및 전승 → 모세가 사용한 고대 자료’라는 긴 흐름입니다. 이 과정에는 여러 시대와 여러 형태의 전승이 놓여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에녹의 의미가 더욱 깊어집니다. 주님은 한 시대의 사람들이 누리던 특별한 영적 상태가 사라질 때 그들과 함께 모든 진리가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사라졌지만, 그 퍼셉션으로 알았던 것 가운데 후대에 필요한 것은 교리와 전승의 형태로 보존되었습니다. 그리고 훗날 사람들이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직접 퍼셉션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보존된 진리는 다른 형태로 그들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AC.464가 ‘후대의 쓰임’이라고 한 말에는 바로 이러한 주님의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에녹에서 모세까지의 관계를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에녹이 정돈한 교리가 그대로 모세오경이 된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계시와 퍼셉션을 후대에 전달하기 위해 보존한 에녹의 사역이 고대교회의 오랜 전승을 거쳐 훗날 말씀의 기록으로 이어지는 큰 섭리적 흐름의 한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영적 상태가 변할 때마다 진리를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가 받을 수 있는 형태로 보존하고 전달하십니다. 에녹의 ‘들려감’은 바로 그 보존의 섭리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AC.464 심화)

 

 

 

AC.464, 창5, ‘에녹은 태고교회의 계시와 퍼셉션으로부터 교리를 형성한 교회이다’

개요 AC.464‘에녹’(Enoch)이라 하는 교회는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그 교회가 퍼셉션한 것들로부터 교리를 형성한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 교리는 당시에는 쓸모가 없었지만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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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9 심화

1. ‘왜 홍수 전 에노스가 벌써 영적 인간인가?’

 

AC.439를 읽다 보면 한 가지 뜻밖의 표현을 만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에노스’(Enosh)라는 이름 역시 ‘사람’(man)을 뜻한다고 하면서, 그 사람이 ‘천적 인간’(celestial man)이 아니라 ‘영적 인간’(spiritual man)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지금까지 창1과 창2를 따라온 독자에게 자연스럽게 질문을 일으킵니다. 창1에서는 거듭남의 여섯 날을 거쳐 영적 인간이 형성되고, 창2에서는 일곱째 날과 함께 천적 인간이 다루어지며, 그 천적 상태가 태고교회의 고유한 상태로 설명되었습니다. 반면 홍수 후에 나타나는 고대교회는 영적 성격의 교회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아직 홍수 이전인 창4에서 에노스가 벌써 ‘영적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먼저 ‘영적 인간’이라는 표현을 곧바로 ‘홍수 후 고대교회에 속한 사람’이라는 역사적 명칭과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천적’과 ‘영적’은 서로 다른 교회 시대를 가리킬 때도 사용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서로 다른 질서와 상태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나 교회가 홍수 이전에 존재한다고 해서 그 상태가 언제나 천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영적 인간’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고 해서 곧 홍수 후 고대교회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AC.439 자체도 에노스의 교회를 ‘영적 교회’라고 하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에노스라는 이름이 나타내는 ‘사람’을 ‘천적 인간이 아니라 영적 인간’이라고 합니다. 이 구별을 그대로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왜 태고교회의 시대 안에서 이런 영적 상태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창2에서 보았던 태고교회의 처음 상태와 창4에서 다루는 상태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창2의 태고교회는 사랑이 먼저이고 그 사랑으로부터 신앙과 진리를 지각하는 천적 질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창3과 창4로 진행하면서 인간은 점차 자기 자신에게 기울었고, 마침내 가인으로 나타나는 신앙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습니다. 아벨이 나타내는 체어리티가 소멸된 뒤에도 주님께서는 신앙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지 않으시고 ‘가인의 표’를 통해 보존하셨으며, 이후 라멕에 이르러서는 그렇게 보존되어 있던 신앙마저 황폐해지는 상태가 나타났습니다. 따라서 창4 마지막의 회복은 창2의 최초 천적 상태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대로 되돌아오는 장면으로 볼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셋과 에노스가 중요해집니다. AC.436에 따르면 셋은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신앙’을 뜻하고, 에노스는 ‘신앙을 통해 심어진 체어리티’를 뜻합니다. AC.438에서는 이를 교회의 차원에서 다시 설명하여, 셋은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을, 에노스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긴 교회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창2의 천적 인간과는 다른 질서가 보입니다. 최초의 천적 상태에서는 사랑과 체어리티로부터 신앙이 나왔지만, 여기서는 이미 무너진 상태 가운데 보존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지는 회복의 과정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에노스를 ‘영적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적어도 이 새로운 상태가 최초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와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과 잘 맞습니다.

 

이 때문에 ‘셋은 신앙, 에노스는 체어리티’라는 표현도 조심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을 인간의 정상적인 영적 질서가 언제나 ‘먼저 신앙을 얻고 그다음 체어리티를 얻는 것’이라는 보편 공식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이미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발생했고,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으며, 그 가운데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신 뒤 그것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특별한 회복의 과정이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셋에서 에노스로 이어지는 ‘신앙을 통한 체어리티’는 태고교회 본래의 천적 질서를 설명한다기보다, 그 질서가 무너진 뒤 주님께서 다시 교회를 일으키시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므로 에노스에서 이미 영적 교회가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현재 본문보다 앞서 나갑니다. AC.439가 분명히 말하는 것은 에노스로 나타나는 사람이 ‘천적 인간이 아니라 영적 인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AC.438은 에노스를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긴 교회라고 하며, AC.441은 이전 교회가 소멸된 뒤 나타난 ‘새 교회’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새 교회를 훗날 홍수 후에 나타나는 고대교회와 같은 의미의 ‘영적 교회’라고 AC.439가 직접 규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영적 인간’이라는 표현과 ‘영적 교회’라는 역사적·교회적 구분을 성급하게 하나로 합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오히려 이 대목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주님의 회복이 언제나 과거 상태의 단순한 복원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창2의 천적 상태가 무너진 뒤 주님께서는 인간을 버려 두지 않으시고,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시며 그 상태에서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십니다. 에노스는 바로 그러한 과정에서 나타나는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홍수 전에 ‘영적 인간’이 등장한다는 사실 자체를 이상하게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영적’이라는 말이 반드시 홍수 후의 특정 교회 시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상태를 나타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왜 스베덴보리가 이 시점의 에노스를 특별히 ‘영적 인간’이라고 규정했으며, 이것이 이후 홍수와 고대교회의 영적 질서와 정확히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AC.439만으로 모두 밝혀지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현재까지의 설명 안에서 가장 안전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에노스가 홍수 전에 ‘영적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홍수 후 고대교회가 벌써 시작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창2에서 나타난 태고교회 본래의 천적 상태가 이미 크게 무너진 뒤, 주님께서 보존하신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시는 새로운 회복의 상태가 나타났으며, 에노스는 그 과정에서 ‘천적 인간이 아니라 영적 인간’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창4 마지막은 단순히 최초의 천적 상태로 되돌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깊이 무너진 인간을 그 상태에 맞게 다시 붙드시고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 줍니다. 이후 AC에서 이 영적 상태의 성격이 더 구체적으로 밝혀진다면, 그때는 여기서 확인한 기초 위에서 한 단계 더 깊이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AC.439 심화 1)

 

 

 

AC.439, 창4:26, ‘에노스는 왜 천적 인간이 아닌 영적 인간을 의미하는가?’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39‘셋’(Seth)이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을 뜻한다는 것은 앞 절에서 설명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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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창4:9)

 

AC.371

‘여호와께서 말씀하심’(speaking of Jehovah)으로 태고교회 사람들은 퍼셉션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에게 지각하는 능력을 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퍼셉션은 사랑이 주된 것이었던 동안에만 계속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그치고, 그 결과 이웃을 향한 사랑도 그치자 퍼셉션은 소멸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남아 있는 만큼 퍼셉션도 남아 있었습니다. 이 퍼셉션의 능력은 태고교회에 고유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홍수 후 사람들에게서처럼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고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지게 되었을 때에는 양심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양심 역시 딕테이트를 주지만 그 방식은 다르며, 이에 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양심이 딕테이트를 줄 때에도 말씀에서는 이와 마찬가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Jehovah speaks)고 합니다. 양심은 계시된 것들과 지식들, 그리고 말씀으로부터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말하거나 딕테이트를 줄 때에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양심이나 신앙에 관한 일을 말할 때 ‘주님께서 말씀하신다’(the Lord says)고 하는 것보다 더 흔한 표현은 없습니다. By the “speaking of Jehovah” the most ancient people signified perception, for they knew that the Lord gave them the faculty to perceive. This perception could continue no longer than while love was the principal. When love to the Lord ceased, and consequently love toward the neighbor, perception perished; but insofar as love remained, perception remained. This perceptive faculty was proper to the most ancient church, but when faith became separated from love, as in the people after the flood, and charity was given through faith, then conscience succeeded, which also gives a dictate, but in a different way, of which, by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When conscience dictates, it is in like manner said in the Word that “Jehovah speaks”; because conscience is formed from things revealed, and from knowledges, and from the Word; and when the Word speaks, or dictates, it is the Lord who speaks; hence nothing is more common, even at the present day, when referring to a matter of conscience, or of faith, than to say, “the Lord says.”

 

해설

AC.371은 지금까지 태고교회와 가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계속 부딪혀 온 ‘퍼셉션과 양심은 어떻게 다른가?’라는 문제를 스베덴보리 자신이 매우 명료하게 정리하는 중요한 단락입니다. 특히 바로 앞 AC.370에서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내면에서 오는 어떤 퍼셉션’이라고 했는데, 이제 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는 표현이 퍼셉션을 의미할 수 있는지 설명합니다. 동시에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사라진 뒤 왜 양심이 그 뒤를 잇게 되었으며, 양심을 통해서도 ‘주님께서 말씀하신다’고 표현할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AC.371은 단순한 한 구절의 어휘 풀이를 넘어, 태고교회와 홍수 후 고대교회의 내적 영적 구조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 주는 핵심 단락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심’이 퍼셉션을 의미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에게 ‘지각하는 능력’을 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퍼셉션은 단순한 직감이나 느낌이 아닙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주님을 향한 사랑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참된지를 내적으로 지각했습니다. 먼저 어떤 교리를 외부에서 배운 뒤 그것이 옳은지 논리적으로 판단하여 선을 행하는 방식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 자체가 그들의 내면을 질서 있게 하고 있었으므로 그 사랑 안에서 선과 진리를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반드시 외부에서 들려오는 음성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참된지를 내적으로 지각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퍼셉션의 조건을 매우 분명하게 밝힙니다. ‘이 퍼셉션은 사랑이 주된 것이었던 동안에만 계속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핵심입니다. 퍼셉션은 인간이 독립적으로 소유한 초자연적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그들의 생명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주님의 선물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랑이 사라지면 퍼셉션도 유지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그치고, 그 결과 이웃을 향한 사랑도 그치자 퍼셉션은 소멸되었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사랑이 남아 있는 만큼 퍼셉션도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중요한 원리입니다. 퍼셉션이 어느 날 갑자기 주님에 의해 회수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사랑에서 멀어진 만큼 사랑으로부터 오는 퍼셉션도 함께 약해지고 소멸된 것입니다.

 

이 설명은 가인의 계열을 이해하는 데 특히 중요합니다. 가인은 태고교회와 전혀 관계없는 후대의 교회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 안에서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 가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에게 태고교회 전성기의 순수한 퍼셉션이 온전히 있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퍼셉션이 처음부터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AC.371이 ‘사랑이 남아 있는 만큼 퍼셉션도 남아 있었다’고 직접 말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AC.370에서 스베덴보리가 ‘a certain perceptivity from within’, 곧 ‘내면에서 오는 어떤 퍼셉션’이라고 표현한 이유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가인의 상태에서는 사랑이 크게 훼손되고 체어리티가 소멸되어 가고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퍼셉션의 흔적까지 한순간에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AC.371은 결정적인 역사적·영적 전환을 설명합니다. ‘이 퍼셉션의 능력은 태고교회에 고유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홍수 후 사람들에게서처럼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고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지게 되었을 때에는 양심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계속 구별해 온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과 홍수 후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 사이의 차이입니다. 태고교회의 질서는 사랑이 먼저이고 그 사랑 안에서 신앙과 진리를 지각하는 질서였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상실된 뒤에는 인간이 먼저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이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면서 체어리티로 인도되는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내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말해 주는 것이 양심입니다.

 

그렇다고 양심이 퍼셉션의 낮은 복제품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양심 역시 딕테이트를 주지만 그 방식은 다르다’고 명시합니다. 퍼셉션과 양심은 모두 인간에게 내적으로 무엇인가를 알려 준다는 점에서는 비슷해 보이지만 그 근거와 작용 방식이 다릅니다. 퍼셉션은 사랑의 선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지각하는 태고교회의 천적 방식이고, 양심은 계시된 진리와 신앙의 지식, 특히 말씀으로부터 형성되어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내적으로 말해 주는 영적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서 어떤 강한 느낌이 든다’는 것을 모두 퍼셉션이나 양심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특히 양심은 개인의 주관적인 감정 자체가 아니라 사람이 참되다고 받아들인 선과 진리를 토대로 형성됩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양심은 계시된 것들과 지식들, 그리고 말씀으로부터 형성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장입니다. 양심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완성된 형태로 가지고 있는 독립적인 내적 음성이 아닙니다. 무엇이 선이고 참된지를 배우고 받아들이며 그것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 가운데 형성됩니다. 특히 말씀으로부터 받은 진리가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고 그 진리에 반하는 일을 하려고 할 때 내적으로 제지하고, 그 진리에 따라 행하려 할 때 이끄는 것이 양심의 작용입니다. 따라서 잘못된 것을 진리라고 확신하면 왜곡된 양심이 형성될 가능성도 있으며, 참된 양심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진리를 배우는 것과 그 진리에 따라 살려는 의지가 함께 중요합니다.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는 표현이 왜 양심에도 사용될 수 있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이 말하거나 딕테이트를 줄 때에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양심이 말씀과 계시된 진리로부터 형성되어 있다면, 그 양심을 통하여 말씀의 진리가 인간에게 내적으로 말할 때 그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태고교회에서는 퍼셉션을 두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할 수 있었고, 후대의 영적 인간에게서는 말씀으로 형성된 양심의 딕테이트를 두고도 ‘주님께서 말씀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표현은 같지만 내적 방식은 다릅니다.

 

이 설명은 바로 앞 AC.359-360에서 생겼던 난제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그곳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conscience dictated’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당시 가인이 태고교회 문맥에 있으므로 이것을 곧바로 홍수 후 고대교회의 완성된 양심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조심했습니다. AC.371은 그 조심스러운 태도가 필요했음을 확인해 주면서도 한 가지를 더 밝혀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퍼셉션과 양심의 차이를 분명히 알고 있으며 바로 이 단락에서 직접 구별합니다. 따라서 AC.359-360의 ‘conscience’를 단순한 실수라고 보거나 임의로 ‘perception’으로 고칠 이유는 없습니다. 반대로 그것만을 근거로 가인에게 후대 영적 인간과 동일한 양심이 있었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AC.370-371이 보여 주듯 가인의 시대는 사랑과 함께 퍼셉션이 쇠퇴해 가는 과정 안에 있으며, 스베덴보리는 그 내적 딕테이트를 설명하면서 문맥에 따라 퍼셉션과 양심에 관련된 표현을 사용합니다. 정확한 관계를 본문 이상으로 체계화하기보다 그가 직접 밝힌 구별을 보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AC.371은 또한 거듭남의 질서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사랑으로부터 직접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는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배우고, 진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삶의 기준으로 받아들이며, 주님께서 그 진리를 통하여 우리의 양심을 형성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해야 한다’는 외적인 순종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에 따라 살면서 주님께서 그 진리를 선과 결합시키시면, 점차 단순히 규칙을 지키는 데서 벗어나 선 자체를 사랑하고 행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진다’는 말도 신앙 자체가 체어리티의 근원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사랑과 선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시며, 신앙의 진리는 인간이 그 사랑과 선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수단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오늘날 신앙생활과 직접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양심이나 신앙에 관한 일을 말할 때 ‘주님께서 말씀하신다’고 하는 것이 지금도 매우 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음속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곧바로 ‘주님이 내게 말씀하셨다’고 신성화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AC.371은 그 반대의 기준을 줍니다. 양심은 ‘계시된 것들과 지식들, 그리고 말씀으로부터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내적 음성이나 확신이 정말 주님의 진리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말씀에 비추어 살펴야 합니다. 자기 욕망이나 두려움이나 proprium에서 나온 생각을 주님의 음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위험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근거는 인간 자신의 주관적 확신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이며, 오늘날 우리에게 그 중심적인 토대는 말씀입니다.

 

결국 AC.371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는 한 표현 속에 서로 다른 두 시대의 영적 질서를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주된 것이었고, 그 사랑으로부터 퍼셉션이 있었습니다. 사랑이 사라진 만큼 퍼셉션도 사라졌습니다. 홍수 후에는 인간의 상태가 달라졌고, 말씀과 계시된 진리로부터 형성되는 양심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퍼셉션도 양심도 인간 자신의 독립적인 능력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을 선과 진리로 이끄시는 방식입니다. 다만 그 방식이 서로 다릅니다. 이 차이를 붙들면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고대교회의 양심을 혼동하지 않으면서도, 두 경우 모두에서 왜 말씀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표현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70, 창4:9,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 체어리티를 완전히 거부하게 된 신앙’ (AC.370-3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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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9 심화

1. ‘양심’은 홍수 후 고대교회부터인데, 왜 가인에게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하는가?

AC.359를 읽다가 상당히 중요한 의문을 만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4:6의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를 설명하면서 아주 분명하게 ‘conscience dictated’, 곧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AC를 읽으며 배운 교회의 영적 역사를 생각하면 이 표현이 선뜻 이해되지 않습니다. 태고교회의 특징은 ‘양심’(conscience)이 아니라 ‘퍼셉션’(perception)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양심은 홍수 이후 노아로 표상되는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에게서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아직 홍수 이전인 가인에게 어떻게 ‘양심’이 있을 수 있을까요?

 

먼저 가장 분명한 원칙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태고교회와 고대교회의 내적 구조는 같지 않습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사랑의 선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했습니다.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가 오늘날 사람처럼 분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선을 사랑하면 그 선으로부터 무엇이 진리인지를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반면 홍수 이후의 사람들은 이 천적 구조를 잃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AC.310에서 홍수 후 사람들에게는 천적 씨가 아니라 영적 씨가 있으며, 이들에게 주님께서는 ‘진리의 지식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선에 기초하여 양심을 심어 주심으로써’ 체어리티에 이를 수 있도록 하신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홍수 이전과 이후의 인간 구조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매우 중요한 설명입니다.

 

따라서 ‘태고교회 = 퍼셉션, 고대교회 = 양심’이라는 기본 구별은 그대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앞서 AC.224를 해설하면서도 이 문제를 한 번 만났습니다. 창3의 타락한 아담과 하와를 두고 ‘양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표현하면 시대가 뒤섞인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도 ‘양심의 흔적’보다는 ‘퍼셉션의 잔재’, ‘남아 있는 지각’, ‘약해진 퍼셉션’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정리했습니다.

 

그렇다면 AC.359에서는 왜 스베덴보리 자신이 ‘conscience’라고 했을까요? 여기서 첫 번째로 주의할 것은 ‘가인’을 태고교회의 처음 상태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창4에서 다루는 것은 이미 타락이 시작된 이후의 태고교회 후손들과 거기서 파생된 교리적 상태들입니다. 가인은 본래 사랑 안에 하나로 존재하던 신앙에 속한 것들이 점차 독립된 것으로 여겨지고, 마침내 사랑과 분리된 신앙의 교리가 되어 가는 과정을 표상합니다. 즉 가인은 퍼셉션이 가장 충만했던 태고교회의 전성기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천적 질서가 해체되어 가는 과정 안에 있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AC.359의 ‘conscience’는 ‘노아 이후 영적 인간의 양심이 이미 가인에게 완성되어 있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곤란합니다. 그렇게 읽으면 AC.310에서 스베덴보리가 매우 분명하게 설정한 홍수 이전과 이후의 차이가 무너집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가 실수로 conscience라고 썼으니 사실 perception이라고 읽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AC.359의 문장은 분명히 ‘conscience dictated’입니다. 따라서 두 진술을 모두 보존하면서 그 관계를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실마리가 앞의 AC.224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곳에서 ‘자비, 평화, 그리고 모든 선, 곧 여호와의 얼굴들’이 ‘퍼셉션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딕테이트(dictate)의 원인이 되며, 비록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양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라고 설명합니다. 즉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시지만 그 내적 딕테이트가 받아들여지는 방식은 인간의 영적 상태에 따라 다릅니다. 퍼셉션을 가진 천적 인간에게는 퍼셉션의 방식으로, 양심을 가진 영적 인간에게는 양심의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을 AC.359에 비추어 보면, 여기서 핵심은 ‘conscience’라는 단어 하나를 시대 구분의 기술적 용어로만 읽기보다 ‘Jehovah said’, 곧 주님에게서 오는 내적 딕테이트가 아직 가인에게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왜 여기서 특별히 ‘perception dictated’가 아니라 ‘conscience dictated’라고 표현했는지에 대해서는 AC.359 자체가 더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는 본문이 말하는 것 이상을 단정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전체 문맥에서 한 가지는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가인은 이미 태고교회의 순수한 천적 상태에서 상당히 멀어지고 있습니다.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독립되기 시작했고, 그 분리가 교리로 굳어지고 있으며, 체어리티 없는 행위와 예배가 생겨났습니다. 이제 체어리티가 받아들여지고 자기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노하고 그의 내적인 것들까지 변합니다. 따라서 AC.359의 가인은 태고교회의 온전한 퍼셉션을 가진 사람의 상태를 보여 주는 인물이 아닙니다.

 

이 점에서 가인은 오히려 매우 흥미로운 ‘과도기적 상태’를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 ‘가인에게 퍼셉션이 양심으로 바뀌기 시작했다’고까지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홍수 후 인간에게 마련된 새로운 영적 구조와 양심의 형성을 명백히 구별하기 때문입니다. AC.310에 따르면 홍수 후 사람들에게는 사랑이나 선한 의지가 본래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진리를 이해하고 신앙할 능력은 남아 있으며, 주님께서는 바로 그 진리의 지식에 기초하여 양심을 심어 주십니다. 이것이 고대교회와 오늘날 영적 인간에게 속하는 본격적인 양심의 질서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conscience’와 홍수 후 영적 인간의 ‘conscience’를 완전히 동일한 구조라고 단정하는 것보다는, AC.359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멀어져 가는 가인에게도 아직 그 잘못을 내적으로 알리는 딕테이트가 있었다’는 데 초점을 두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가인은 이미 분노했습니다. 그의 내적인 것들도 변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에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AC.359가 강조하는 결정적인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의 가인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아무런 경고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고, 그 분리에서 죽은 행위와 예배가 생기고, 체어리티가 떠나면서 분노가 일어나고, 내적인 것들이 변했을 때에도 주님의 내적 딕테이트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그 말씀을 따라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하는 길로 돌아서지 않았고, 결국 다음 단계에서 아벨, 곧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라는 더 깊은 원리도 담겨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강제하시지 않습니다. 강제로 선하게 만든다면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이 사라지고, 따라서 진정한 거듭남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이 악을 행하기 전에 끊임없이 선과 진리를 통하여 경고하시고, 돌이킬 수 있는 길을 마련하십니다. 가인에게 ‘왜 네가 분하여 하느냐?’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러한 장면입니다. 강제가 아니라 딕테이트이고, 심판에 앞선 경고이며, 자유 안에서 다시 선을 선택하도록 하시는 자비입니다.

 

이제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할 때에는 다시 시대를 건너와야 합니다. 우리는 가인 시대의 홍수 이전 인간이 아닙니다. AC.310이 설명하듯 우리는 홍수 이후의 영적 인간 구조에 속하며, 주님께서는 말씀에서 배운 진리를 통하여 우리 안에 양심을 형성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왜 내가 이렇게 분노하는가?’, ‘이것이 정말 진리를 위한 분노인가, 아니면 내 proprium이 상처받았기 때문인가?’, ‘내가 옳음을 주장하는 동안 체어리티가 떠나고 있지는 않은가?’라고 내적으로 살피게 될 때, 그 양심의 딕테이트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AC.359는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엄중한 경고가 됩니다. 양심의 소리를 반복해서 거스르면 처음에는 ‘잘못인 줄 알면서 하는 것’이었던 것이 점차 ‘잘못이라고 느끼지 않는 것’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가인의 경우에도 분노 그 자체가 마지막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분노에서 돌이키지 않자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영적으로는 체어리티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은 단순히 죄를 지은 뒤 우리를 괴롭히는 기능이 아니라, 악이 아직 행위와 습관과 지배적 사랑으로 굳어지기 전에 주님께서 우리를 돌이키시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결국 AC.359의 이 작은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인간론 전체를 다시 보게 합니다. 태고교회에는 퍼셉션이 있었고, 그 퍼셉션은 교회가 타락하면서 점차 쇠퇴했습니다. 홍수 후에는 인간의 구조가 달라졌으며, 주님께서는 진리의 지식을 통하여 양심을 형성하시는 새로운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따라서 AC.359의 ‘conscience dictated’를 이 두 시대의 구별을 무시한 채 단순하게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표현을 지워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구별을 하고 나면 AC.359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중요한 것은 가인의 내적 딕테이트를 정확히 어느 시대의 기술적 범주에 넣을 것인가만이 아닙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가인의 얼굴이 떨어진 뒤, 그러니까 안색이 변한 뒤에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체어리티가 떠나고 내적인 것들이 변하기 시작했어도 주님의 자비는 먼저 떠나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악을 향하여 가는 바로 그 길목에서 주님께서는 여전히 말씀하시고, 보게 하시고, 돌이킬 기회를 주십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든, 후대 영적 인간의 양심이든, 그 모든 선한 내적 딕테이트의 궁극적인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거듭남의 중요한 순간은 바로 그 말씀을 들었을 때 가인처럼 자기 분노를 붙드는가, 아니면 주님 앞에서 자기 상태를 보고 체어리티로 돌아서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AC.359,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 양심을 통한 주님의 부르심’(AC.359-36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is thine anger kindled?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창4:6) AC.35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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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뜻

 

AC.468

앞 장에서 말하고 보여 준 것으로부터, 이름들이 이단과 교리를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장의 이름들이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들을 뜻하며, 여기서는 교리들 또는 교회들을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교리들 또는 교회들은 여러 변화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태고교회 때부터 ‘노아’(Noah)에 이르기까지 보존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교회는 시간이 흐르면서 쇠퇴하여 마침내 소수에게만 남게 됩니다. 홍수 때 그것이 남아 있던 그 소수를 ‘노아’(Noah)라 하였습니다. From what has been said and shown in the foregoing chapter, it is evident that by names are signified heresies and doctrines. Hence it may be seen that by the names in this chapter are not meant persons, but things, and in the present instance doctrines, or churches, which were preserved, notwithstanding the changes they underwent, from the time of the most ancient church even to “Noah.” But the case with every church is that in course of time it decreases, and at last remains among a few; and the few with whom it remained at the time of the flood were called “Noah.”

 

[2] 참된 교회가 쇠퇴하여 소수에게만 남게 된다는 것은 이와 같이 쇠퇴해 온 다른 교회들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와 ‘남은 자’(remnant)라 하며, ‘땅의 가운데’ 또는 ‘중앙에’ 있다고 합니다. 전체적인 경우가 그러한 것처럼 개별적인 경우도 그러합니다. 즉 교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각 사람에게도 그러합니다. 주님께서 모든 사람 안에 리메인스를 보존하지 않으신다면 그는 필연적으로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 생명과 천적 생명이 리메인스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 또는 보편적인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또는 참된 신앙이 남아 있는 사람들이 언제나 얼마간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류는 멸망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몇 사람을 위하여 한 성읍이, 때로는 한 나라 전체가 구원받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교회는 인체와 같습니다. 심장이 건강한 동안에는 그 주변의 내장들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지만, 심장이 쇠약해지면 신체의 다른 부분들이 영양을 공급받지 못하여 사람이 죽습니다. 마지막 리메인스가 바로 ‘노아’(Noah)가 의미하는 것입니다. 창6:12과 다른 여러 곳에서 알 수 있듯 온 땅이 부패하였기 때문입니다. That the true church decreases and remains with but few, is evident from other churches which have thus decreased. Those who are left are in the Word called “remains,” and a “remnant,” and are said to be “in the midst,” or “middle,” “of the land.” And as this is the case in the universal, so also it is in the particular, or as it is with the church, so it is with every individual man; for unless remains were preserved by the Lord in everyone, he must needs perish eternally, since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are in the remains. So also in the general or universal—if there were not always some with whom the church, or true faith, remained, the human race would perish; for, as is generally known, a city, nay, sometimes a whole kingdom, is saved for the sake of a few. It is in this respect with the church as it is with the human body; so long as the heart is sound, life is possible for the neighboring viscera, but when the heart is enfeebled, the other parts of the body cease to be nourished, and the man dies. The last remains are those which are signified by “Noah”; for (as appears from Gen. 6:12, as well as from other places) the whole earth had become corrupt.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창6:12)

 

[3] 각 사람 안에 존재하는 리메인스뿐 아니라 교회 전체 안에 존재하는 리메인스에 관해서도 선지서에서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에서는, Of remains as existing in each individual as well as in the church in general, much is said in the prophets; as in Isaiah:

 

3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 안에 생존한 자 중 기록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 4이는 주께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기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중에서 청결하게 하실 때가 됨이라 (사4:3, 4) He that is left in Zion, and he that remaineth in Jerusalem, shall be called holy to him, even everyone that is written unto lives in Jerusalem, when the Lord shall have washed the filth of the daughters of Zion, and shall have washed away the bloods of Jerusalem from the midst thereof, (Isa. 4:3–4)

 

이 말씀에서 거룩함은 리메인스에 관하여 서술되며, 이 리메인스는 교회의 리메인스뿐 아니라 교회에 속한 사람의 리메인스도 의미합니다. 시온과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those left)이 단지 ‘남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거룩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이사야에서는, in which passage holiness is predicated of the remains, by which are signified the remains of the church, and also of a man of the church; for “those left” in Zion and Jerusalem could not be holy merely because they were “left.” Again:

 

20그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21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사10:20, 21) It shall come to pass in that day, that the remains of Israel, and such as are escaped of the house of Jacob, shall no more again stay upon him that smote them, but shall stay upon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 in truth. The remains shall return, the remains of Jacob, unto the mighty God. (Isa. 10:20–21)

 

예레미야에서는, In Jeremiah:

 

그날 그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찾아내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남긴 자를 용서할 것임이라 (렘50:20) In those days, and in that time, the iniquity of Israel shall be sought for, and there shall be none; and the sins of Judah, and they shall not be found; for I will pardon him whom I shall make a remnant. (Jer. 50:20)

 

미가에서는, In Micah:

 

야곱의 남은 자는 많은 백성 가운데 있으리니 그들은 여호와께로부터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 같아서 (미5:7) The remains of Jacob shall be in the midst of many peoples, as the dew from Jehovah, as the showers upon the grass. (Micah 5:7)

 

[4] 사람 또는 교회의 남은 것, 곧 리메인스는 또한 십분의 일로 표상되었으며, 그것은 거룩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을 포함하는 수도 거룩하였으며, 따라서 ‘십’(ten)은 리메인스에 관하여 서술됩니다. 이사야에서는, The residue or remains of a man, or of the church, were also represented by the tenths, which were holy; hence also a number with ten in it was holy, and “ten” is therefore predicated of remains; as in Isaiah:

 

12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13그중에 십 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사6:12, 13) Jehovah shall remove man, and many things [shall be] left in the midst of the land; and yet in it [shall be] a tenth part, and it shall return, and shall be for exterminating; as an oak, and an ilex, when the stock is cast forth from them, the holy seed is the stock thereof; (Isa. 6:12–13)

 

여기서 남은 것은 ‘거룩한 씨’(seed of holiness)라 불립니다. 아모스에서는, where the residue is called a “seed of holiness.” And in Amos: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 중에서 천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암5:3) Thus saith the Lord Jehovah, The city that goeth forth a thousand shall have a hundred left, and that which goeth forth a hundred shall have ten left to the house of Israel. (Amos 5:3)

 

이 말씀들과 다른 많은 구절에서 속뜻으로는 지금까지 말해 온 ‘리메인스’(remains)가 의미됩니다. 교회의 리메인스로 말미암아 한 성읍이 보존된다는 것은 소돔에 관하여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에서도 분명합니다. In these and many other passages, in the internal sense are signified the “remains” of which we have been speaking. That a city is preserved for the sake of the remains of the church, is evident from what was said to Abraham concerning Sodom: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18:32) Abraham said, Peradventure ten may be found there; and he said, I will not destroy it for ten’s sake. (Gen. 18:32)

 

해설

AC.468은 창5의 ‘장 개요’를 마무리하면서 지금까지 제시된 이름들의 의미를 매우 분명하게 확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의 이름들이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교리 또는 교회를 뜻한다고 명시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우리가 조심스럽게 유보해 두었던 문제에 대해서도 중요한 기준을 줍니다. 적어도 창5의 속뜻을 해설하는 이 자리에서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는 개인들의 일대기를 설명하기 위한 이름들이 아니라,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지며 변화해 온 교리와 교회들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창5의 족보 형식은 속뜻으로는 교회의 영적 역사가 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교회들이 ‘여러 변화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태고교회로부터 노아에 이르기까지 보존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앞의 AC.462-467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 줍니다. 처음에는 천적인 태고교회가 있었고, 이후 그 상태가 점차 달라졌으며, 라멕에 이르러서는 태고교회가 누렸던 퍼셉션이 전혀 남아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홍수 때까지 참된 교회가 남아 있던 소수가 있었고, 바로 그들을 ‘노아’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노아’는 이 문맥에서 단지 열 번째 교회의 명칭만이 아니라, 이전 교회가 거의 사라진 가운데 주님께서 보존하신 ‘마지막 리메인스’를 나타냅니다.

 

[2]에서 이 ‘리메인스’의 원리는 교회 전체에서 한 사람의 내면으로 확대됩니다. 이것이 AC.468의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교회 전체에 참된 것과 선한 것이 소수에게 남아 있어 인류 전체가 보존되는 것처럼, 한 사람 안에도 주님께서 보존하시는 리메인스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과거의 좋은 기억 정도로 말하지 않습니다. 영적 생명과 천적 생명이 바로 이 리메인스 안에 있다고 합니다. 사람이 살아오는 동안 주님께서 그의 내면에 보존하신 선과 진리,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들이 훗날 거듭남의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모든 사람 안에 리메인스를 보존하지 않으신다면 그는 필연적으로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까지 말합니다.

 

이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심장의 비유를 사용합니다. 심장이 건강한 동안에는 주변의 장기들도 생명을 유지하지만, 심장이 쇠약해져 더 이상 영양을 공급하지 못하면 다른 부분들도 함께 죽게 됩니다. 교회 안의 리메인스가 이와 같습니다. 참된 교회가 외적으로 크게 쇠퇴하더라도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소수를 보존하시는 동안에는 인류와 교회가 완전히 끊어지지 않습니다. ‘노아’가 바로 홍수 직전 이러한 마지막 리메인스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노아의 보존은 단지 몇 사람이 재난에서 살아남는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인류 가운데 영적 생명이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주님께서 ‘교회 안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선과 진리, 곧 리메인스’를 보존하시는 섭리를 보여 줍니다.

 

[3]에서 인용되는 사4:3-4, 사10:20-21, 렘50:20, 미5:7은 바로 이 원리가 말씀 전체에 반복되어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남아 있는 자’, ‘남은 자’, ‘피한 자’가 중요한 것은 그들이 단순히 숫자상 살아남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시온과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이 단지 남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거룩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까닭도 이것입니다. 이들이 ‘거룩하다’고 일컬어지는 것은 속뜻으로는 주님께서 보존하신 선과 진리, 곧 리메인스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남은 자’의 주제는 AC의 리메인스 교리와 깊이 연결됩니다.

 

[4]에서는 이 리메인스가 왜 ‘십’이라는 수와 연결되는지가 설명됩니다. 십분의 일이 리메인스를 표상하였기 때문에 십을 포함하는 수가 거룩하게 사용되었고, ‘십’은 리메인스에 관하여 서술되었습니다. 그래서 사6:12-13에서는 모든 것이 황폐해진 뒤에도 ‘십분의 일’과 ‘거룩한 씨’가 남으며, 암5:3에서는 천 명 가운데 백 명, 백 명 가운데 열 명이 남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산술적인 비율 자체가 아니라, 황폐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무엇인가를 남겨 두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주님께서 보존하신 거룩한 씨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창18:32의 소돔 이야기가 인용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이라는 아브라함의 간구와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에서 ‘십’은 단순한 인원수를 넘어 리메인스를 표상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몇 사람을 위하여 한 성읍이, 때로는 한 나라 전체가 구원받기도 한다’는 설명과 연결됩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외적인 규모가 아니라 그 안에 아직 보존되어 있는 선과 진리입니다.

 

이렇게 AC.468은 창5의 장 개요 전체를 ‘리메인스’라는 놀라운 원리로 마무리합니다. 태고교회는 쇠퇴했고 퍼셉션도 마침내 사라졌지만, 주님은 모든 것을 소멸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마지막까지 보존된 것을 ‘노아’라 하셨고, 바로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고대교회를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이 질서는 교회의 역사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 사람의 거듭남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 안에서도 때로는 선과 진리가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주님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깊은 곳에 리메인스를 보존하시며 그것을 붙들고 다시 영적 생명을 일으키십니다. 그러므로 ‘노아’는 교회의 마지막 남은 자인 동시에, 인간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도록 끝까지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는 주님의 자비와 섭리를 보여 주는 이름입니다. (AC.468 해설)  

 

심화

‘리메인스가 없으면 왜 사람은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가?’

 

AC.468 심화, ‘리메인스가 없으면 왜 사람은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가?’

AC.468 심화‘리메인스가 없으면 왜 사람은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가?’ AC.468에는 매우 강한 표현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모든 사람 안에 리메인스를 보존하지 않으신다면 그는 필연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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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0-468 심화, ‘창5의 이름들은 왜 사람이 아니라 교리 또는 교회를 의미하는가?’

AC.460-468 심화 ‘창5의 이름들은 왜 사람이 아니라 교리 또는 교회를 의미하는가?’ 창5를 처음 읽으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족보입니다. ‘아담은 셋을 낳고, 셋은 에노스를 낳고, 에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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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9, 창5:1, '계보의 책, 영적으로 창조되어 천적으로 된 태고교회'(AC.469-474)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This is the book of the births of man. In the day that God created man, in the likeness of God made he him. (창5:1) AC.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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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7, 창5, ‘라멕에게서 퍼셉션이 사라지고 노아라는 새 교회가 시작된다’

개요 AC.467‘라멕’(Lamech)은 태고교회가 누렸던 퍼셉션을 전혀 간직하지 못한 것으로 묘사되며, ‘노아’(Noah)는 새 교회로 묘사됩니다. (29절) “Lamech” is described as retaining nothing of the perception w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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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AC.467

‘라멕’(Lamech)은 태고교회가 누렸던 퍼셉션을 전혀 간직하지 못한 것으로 묘사되며, ‘노아’(Noah)는 새 교회로 묘사됩니다. (29절) “Lamech” is described as retaining nothing of the perception which the most ancient church enjoyed; and “Noah” is described as a new church. (verse 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29절)

 

해설

AC.467은 앞의 AC.466에서 노아를 ‘고대교회’라고 한 이유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아홉 번째 교회인 ‘라멕’에 이르러서는 태고교회가 누렸던 퍼셉션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고, 그다음 ‘노아’는 ‘새 교회’로 묘사됩니다. 따라서 라멕에서 노아로 넘어가는 것은 단순히 아홉 번째 교회 다음에 열 번째 교회가 이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한 질서가 끝나고 새로운 교회의 질서가 시작되는 중요한 전환입니다.

 

여기서 ‘태고교회가 누렸던 퍼셉션’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태고교회의 특징은 주님에 대한 사랑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내적으로 퍼셉션하는 데 있었습니다. 이것은 외부에서 교리를 배우고 그것이 참인지 추론하여 받아들이는 방식과 달랐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 내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AC.467은 라멕에 이르러 그 퍼셉션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AC.462에서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져 온 변화가 어디에 이르렀는지를 보여 줍니다. ‘셋’은 처음의 태고교회만큼 천적이지 않았고, 이후 여러 교회가 계속 이어졌으며, 마침내 ‘라멕’에 이르러서는 태고교회가 누렸던 퍼셉션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창5의 여러 이름을 통하여 나타나는 변화는 단순히 교회의 명칭이 바뀌어 온 과정이 아니라, 태고교회를 특징짓던 내적 상태가 점차 달라져 마침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지속될 수 없게 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노아’가 등장합니다. AC.467은 노아를 단순히 라멕 다음의 교회라고 하지 않고 ‘새 교회’라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라멕에게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면, 다음 교회는 이전의 상태를 그대로 회복하거나 반복하는 방식으로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달라진 인간의 상태에 맞는 새로운 교회의 질서가 필요했고, 그 새 교회를 ‘노아’라고 한 것입니다. 앞의 AC.466에서 이 교회를 ‘고대교회’라고 한 것도 바로 이러한 전환과 연결됩니다.

 

이렇게 보면 앞의 에녹에 관한 AC.464도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에녹이라 하는 교회가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퍼셉션된 것들을 교리로 형성하여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존했던 것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영원히 같은 방식으로 지속되지 않을 것을 전제로 합니다. 이제 라멕에 이르러 그 퍼셉션이 사라지고 노아라는 새 교회가 시작된다는 AC.467의 설명은, 왜 앞선 시대에 그러한 교리의 보존이 필요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다만 그 보존된 교리가 새 교회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용되는지는 이후의 본문 해설을 따라가며 살펴보아야 합니다.

 

AC.467은 결국 태고교회에서 고대교회로 넘어가는 경계선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한쪽에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라멕’이 있고, 다른 쪽에는 ‘새 교회’인 ‘노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전 교회의 끝이 곧 주님의 역사의 끝은 아닙니다. 한 형태의 교회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을 때에도 주님은 인간의 달라진 상태에 맞추어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십니다. 그러므로 라멕과 노아 사이에는 단절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교회의 끝에서도 다음 교회를 준비하시고 이어 가시는 주님의 섭리가 함께 나타나 있습니다. (AC.467 해설)

 

 

 

AC.468, 창5, ‘노아는 교회에 남아 있던 마지막 리메인스를 가리킨다’

속뜻 AC.468앞 장에서 말하고 보여 준 것으로부터, 이름들이 이단과 교리를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장의 이름들이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들을 뜻하며, 여기서는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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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6, 창5, ‘노아는 홍수 후 세 교회의 모체가 된 열 번째 교회이다’

개요 AC.466열 번째 교회는 홍수 후 세 교회의 모체가 되었으며, 그 이름을 ‘노아’(Noah)라 하였습니다. 이 교회를 고대교회라 합니다. (28-29절) A tenth, the parent of three churches after the flood, was nam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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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AC.466

열 번째 교회는 홍수 후 세 교회의 모체가 되었으며, 그 이름을 ‘노아’(Noah)라 하였습니다. 이 교회를 고대교회라 합니다. (28-29절) A tenth, the parent of three churches after the flood, was named “Noah.” This church is to be called the ancient church. (verses 28–29)

 

28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29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28, 29절)

 

해설

AC.466은 AC.460부터 이어져 온 교회들의 계승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로부터 시작하여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으로 이어진 뒤, 열 번째 교회로 ‘노아’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노아를 단순히 그 연속 가운데 하나를 더 추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교회에 새로운 이름을 붙입니다. 바로 ‘고대교회’입니다. 따라서 노아는 태고교회의 이어지는 여러 교회가 끝나 가는 지점인 동시에, 새로운 교회의 시작을 보여 주는 이름입니다.

 

원문에서 특히 중요한 표현은 ‘홍수 후 세 교회의 모체’(the parent of three churches after the flood)입니다. 노아라 하는 교회로부터 홍수 후에 다시 세 교회가 이어져 나오게 된다는 뜻입니다. AC.466은 아직 그 세 교회가 무엇이며 각각 어떠한 상태인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우선 노아가 이전 교회의 마지막에만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홍수 이후에 이어질 교회들의 출발점이 된다는 사실을 밝혀 줍니다.

 

이 점에서 ‘노아’를 열 번째 교회라고 하는 것과 ‘고대교회’라고 하는 것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노아는 앞에서부터 이어져 온 순서로는 열 번째이지만, 그 성격에서는 새로운 교회의 시작입니다. 즉 교회의 역사가 완전히 끊어진 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새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앞선 시대에서 보존된 것을 통하여 다음 시대의 교회가 준비됩니다. 창5의 교회 계승이 노아에 이르면서 하나의 큰 전환점을 맞는 것입니다.

 

‘이 교회를 고대교회라 한다’는 말은 앞에서 계속 다루어 온 ‘태고교회’와도 분명히 구별됩니다. 태고교회와 고대교회는 단순히 시대가 앞서고 뒤선다는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교회의 상태와 방식에도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다만 AC.466은 아직 그 차이를 자세히 설명하는 곳이 아니므로, 여기서는 노아와 함께 ‘고대교회’라는 새로운 교회가 시작된다는 점을 붙들어 두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 구체적인 차이는 이후의 해설에서 차례로 밝혀집니다.

 

또한 AC.466은 앞에서 에녹에 관하여 살펴본 내용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에녹이라 하는 교회에서는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퍼셉션된 것들이 교리로 형성되어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존되었습니다. 이제 노아에 이르러서는 태고교회와는 다른 상태의 교회가 등장합니다. 따라서 앞선 교회에서 보존된 것이 후대에 쓰이도록 준비되었다는 AC.464의 설명은, 교회의 상태가 달라져도 주님께서 필요한 것을 보존하시며 다음 교회를 준비하신다는 큰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466은 그래서 창5 전체의 방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이정표입니다. 이 장은 태고교회에서 출발하여 여러 교회를 거쳐 단순히 쇠퇴와 종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노아’라는 열 번째 교회에 이르러 다음 시대를 준비합니다. 태고교회의 한 시대가 저물어 가는 가운데서도 주님은 다음 교회를 위한 것을 보존하시고, 홍수 이후 다시 교회가 이어질 길을 마련하십니다. ‘노아’는 바로 그 연속과 전환의 자리에 놓인 교회이며, 그 교회를 가리켜 스베덴보리는 ‘고대교회’라고 합니다. (AC.466 해설)

 

 

 

AC.467, 창5, ‘라멕에게서 퍼셉션이 사라지고 노아라는 새 교회가 시작된다’

개요 AC.467‘라멕’(Lamech)은 태고교회가 누렸던 퍼셉션을 전혀 간직하지 못한 것으로 묘사되며, ‘노아’(Noah)는 새 교회로 묘사됩니다. (29절) “Lamech” is described as retaining nothing of the perception w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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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5, 창5, ‘라멕은 아홉 번째 교회이다’

개요 AC.465 아홉 번째 교회를 가리켜 ‘라멕’(Lamech)이라 하였습니다. (25절) A ninth church was called “Lamech.” (verse 25) 25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25절) 해설AC.465는 앞에서 이어져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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