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5

태고교회가 어떻게 쇠퇴하였는지는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을 가진 교회였으며, 오늘날에는 그러한 교회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퍼셉션은 그 구성원들이 천사들처럼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주님으로부터 퍼셉션하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과 진리는 시민 사회에서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가 하는 것이라기보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주님을 믿는 신앙의 선과 진리입니다. 삶으로 확증되는 신앙고백으로부터 퍼셉션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존재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How the most ancient church decreased cannot appear unless it be known what perception is, for it was a perceptive church, such as at this day does not exist. The perception of a church consists in this, that its members perceive from the Lord what is good and true, like the angels; not so much what the good and truth of civic society is, but the good and truth of love to the Lord and of faith in him. From a confession of faith that is confirmed by the life it can be seen what perception is, and whether it has any existence.

 

해설

AC.495는 창5:5의 마지막 해설이면서, 앞으로 태고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앞의 AC.492와 AC.494는 ‘죽었다’는 것이 그 교회를 특징짓던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도대체 퍼셉션이 무엇이기에 그것이 사라진 것을 교회의 죽음이라고 하는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AC.495는 바로 그 질문에 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태고교회를 ‘퍼셉션을 가진 교회’라고 규정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단지 지식이 많거나 판단력이 뛰어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퍼셉션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주님으로부터 퍼셉션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외부에서 어떤 교리를 듣고 논증을 거쳐 그것이 옳다고 결론 내리는 것보다 훨씬 내적인 방식으로, 주님으로부터 유입되는 선과 진리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들의 퍼셉션을 ‘천사들처럼’(like the angels)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퍼셉션을 막연한 직감이나 느낌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왠지 이것이 맞는 것 같다’고 느끼는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은 아닙니다. 자신의 욕망이나 선입견도 매우 강한 확신으로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AC.495가 퍼셉션의 내용을 ‘주님을 향한 사랑과 주님을 믿는 신앙의 선과 진리’라고 한 것은 바로 이 점에서 중요합니다. 퍼셉션의 근원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며, 그 내용 역시 자기 욕망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믿는 삶에 관한 선과 진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또 여기서 시민 사회의 선과 진리를 구별합니다. 이것은 사회생활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주로 사회적 규범이나 세상사의 옳고 그름을 알아내는 특별한 능력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것이었으며,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 속한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지각하는 능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퍼셉션은 일종의 초자연적인 정보 획득 능력이나 미래를 알아맞히는 능력과도 다릅니다.

 

특히 마지막 문장이 중요합니다. ‘삶으로 확증되는 신앙고백’(a confession of faith that is confirmed by the life)으로부터 퍼셉션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존재하는지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을 단순한 내적 느낌에 맡겨 두지 않습니다. 입으로 고백하는 신앙과 실제 삶이 서로 일치할 때, 그 삶을 통하여 그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어떠함이 드러납니다. 참된 퍼셉션은 말로만 ‘나는 이것이 진리라고 느낀다’고 주장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진리가 사랑과 선의 삶으로 나타나는 데서 확인됩니다.

 

이 점은 태고교회가 왜 쇠퇴했는지를 이해하는 열쇠가 됩니다. 그들의 교회적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는 데 있었으므로, 사랑의 상태가 변질될수록 퍼셉션 역시 온전하게 유지될 수 없었습니다. 앞의 AC.494에서 설명한 것처럼 악이 반복되고 세대를 거쳐 유전적 악이 증가하면서 태고교회의 처음 상태가 점차 손상되었습니다. 사랑이 변하면 그 사랑에서 나오는 지각도 변합니다. 마침내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던 상태가 사라졌을 때, 말씀은 그것을 그 교회가 ‘죽었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창5에서 각 교회가 퍼셉션의 차이에 따라 구별된다는 AC.483의 설명과도 연결됩니다. 셋, 에노스, 게난 등은 단순히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각각 다른 상태의 교회들을 나타내며, 그 차이의 중심에는 퍼셉션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창5의 계보를 따라간다는 것은 단순히 세대가 바뀌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에 있던 퍼셉션이 여러 교회를 거치면서 어떻게 변화하고 마침내 소멸해 가는지를 따라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독자에게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오늘날에는 그러한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읽다가 어떤 진리를 깊이 깨닫거나, 기도 중에 무엇이 옳은지를 강하게 느끼거나, 양심을 통해 어떤 행동을 해야 한다고 깨닫는다고 해서 그것을 곧바로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후대의 영적 인간에게 주님은 주로 말씀의 진리와 신앙, 그리고 그 진리로 형성된 양심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그와 구별되는 천적 교회의 고유한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퍼셉션이라는 개념이 오늘날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신앙의 본래 목적이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진리는 단지 머릿속에 저장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삶 안에서 선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AC.495가 퍼셉션을 설명하면서 마지막에 ‘삶으로 확증되는 신앙고백’을 제시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태고교회와 같은 퍼셉션을 가지고 있지는 않더라도,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가르치시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제 삶에서 살아갈수록 신앙은 단순한 지식이나 주장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내면과 삶을 변화시킵니다.

 

결국 창5:5의 ‘죽었더라’를 이해하려면 먼저 무엇이 죽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AC.495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고유한 생명이었던 퍼셉션이 사라져 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퍼셉션의 본질은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신앙의 선과 진리를 알아차리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의 쇠퇴는 단순한 조직의 쇠퇴나 교리 지식의 감소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던 내적 생명의 쇠퇴였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창5의 ‘죽음’을 통해 보여 주는 교회의 죽음이며, 동시에 모든 시대의 교회가 자신의 생명이 과연 어디에서 오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AC.495 해설)

 

 

 

창5:5, AC.492-496 심화 1, ‘유전적 악은 어떻게 대대로 누적되며, 우리는 조상의 죄까지 책임져야

창5:5, AC.492-496 심화1, ‘유전적 악은 어떻게 대대로 누적되며, 우리는 조상의 죄까지 책임져야 하는가?’ AC.494는 태고교회가 쇠퇴한 주된 원인을 설명하면서 ‘유전적 악’(hereditary evil)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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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2-495 심화 2,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오늘날의 양심은 어떻게 다른가?’

창5:5, AC.492-495 심화2.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오늘날의 양심은 어떻게 다른가?’ AC.495는 태고교회가 ‘퍼셉션을 가진 교회’였으며 ‘오늘날에는 그러한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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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6, AC.496, ‘셋으로부터 이어진 또 하나의 교회 에노스’(AC.496-498)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And Seth 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 and begat Enosh. (창5:6) AC.496‘셋’(Seth)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두 번째 교회로서, 그 부모인 태고교회보다는 덜 천적이었지만,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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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4, ‘퍼셉션의 죽음과 유전적 악의 누적’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4그가 ‘죽었다’(died)는 것이 그러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죽다’(die)라는 말의 의미에서 분명합니다.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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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4

그가 ‘죽었다’(died)는 것이 그러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죽다’(die)라는 말의 의미에서 분명합니다. 곧 어떤 것이 이전에 그러했던 것과 같은 상태이기를 그치는 것입니다. 계시록에서는, That he “died” signifies that there was no longer such perception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word “die,” which is, that a thing ceases to be such as it has been. Thus in John:

 

1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계3:1, 2) Unto the angel of the church in Sardis write, These things saith he that hath the seven spirits, and the seven stars; I know thy works, that thou art said to live, but art dead; be watchful, and strengthen the things which remain, that are ready to die; for I have not found thy works perfect before God. (Rev. 3:1–2)

 

라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에서는, In Jeremiah:

 

내가 너와 너를 낳은 어머니를 너희가 나지 아니한 다른 지방으로 쫓아내리니 너희가 거기에서 죽으리라 (렘22:26) I will cast out thy mother that bare thee, into another country where ye were not begotten, and there shall ye die, (Jer. 22:26)

 

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어머니’(mother)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교회는 점차 쇠퇴하고 타락하여 처음의 온전함을 잃게 되는데, 그 주된 이유는 유전적 악의 증가입니다. 뒤를 잇는 모든 부모는 자신이 물려받은 악에 새로운 악을 더하기 때문입니다. 부모 안의 모든 실제적인 악(actual evil)은 일종의 본성을 띠게 되고, 그것이 자주 반복되면 그들에게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 그들의 유전적 악에 더해지며, 자녀들에게 그리고 그렇게 후손들에게 전달됩니다. 이런 식으로 유전적 악은 후손들 안에서 엄청나게 증가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자녀들의 악한 성향이 그 조상들의 악한 성향과 아주 흡사하다는 사실에서 분명합니다. 우리 안에 아담으로부터 심어졌다고 주장되는 것 외에는 유전적 악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견해는 전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AC.313 참조). 진실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실제적인 죄들(actual sins)로 유전적 악을 만들고, 자신이 물려받은 악들에 그것을 더하며, 이런 식으로 그것이 축적되어 모든 후손 안에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에 의해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만 감소합니다. 모든 교회에서 이것이 타락의 주된 원인이며, 태고교회에서도 그러하였습니다. where “mother” signifies the church. For as we have said, the case with the church is that it decreases and degenerates, and loses its pristine integrity, chiefly by reason of the increase of hereditary evil, for every succeeding parent adds new evil to that which he has inherited. All the actual evil in the parents puts on a kind of nature, and when it often recurs, becomes natural to them, and is added to their hereditary evil, and is transmitted into their children, and so to posterity. In this way the hereditary evil is immensely increased in the descendants. That this is so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evil dispositions of children are exactly like those of their progenitors. Quite false is the opinion of those who think that there is no hereditary evil except that which they allege to have been implanted in us from Adam (see n. 313). The truth is that everyone makes hereditary evil by his own actual sins, and adds it to the evils that he has inherited, and in this way it accumulates, and remains in all the descendants, nor is it abated except in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 by the Lord. In every church this is the principal cause of degeneration, and it was so in the most ancient church.

 

해설

AC.494는 창5:5의 ‘죽었더라’를 설명하다가 매우 중요한 주제인 ‘유전적 악’으로 들어갑니다. 먼저 ‘죽다’의 속뜻부터 분명히 합니다. 죽음은 ‘어떤 것이 이전에 그러했던 것과 같은 상태이기를 그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아담으로 표상된 태고교회가 ‘죽었다’는 것은 그 사람들의 육체적 죽음 자체가 속뜻의 중심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 교회를 특징짓던 퍼셉션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상태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계3:1-2의 사데 교회가 좋은 예입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는 말씀은 육체적으로 죽었다는 뜻일 수 없습니다. 교회로서 외적인 이름과 형태는 남아 있지만 그 안의 영적 생명이 쇠퇴한 상태를 ‘죽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고 하신 것을 보면, 죽음과 생명이 한 사람이나 교회의 내적 상태를 가리킬 수 있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렘22:26에서 ‘어머니’(mother)가 교회를 의미한다는 설명도 같은 맥락입니다. 말씀은 교회의 발생과 쇠퇴와 종결을 가족의 출생과 죽음이라는 언어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왜 교회가 죽어 가는가?’라는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나아갑니다. 그가 제시하는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유전적 악의 증가’입니다. 사람은 앞선 세대로부터 악에 기울어지는 성향을 물려받는데, 거기에 자신의 삶에서 실제로 행하고 반복한 악을 더합니다. 반복된 악은 점차 그 사람에게 일종의 본성처럼 자리 잡으며, 이렇게 형성된 것이 다시 후대에 유전적 성향으로 전달된다는 설명입니다. 따라서 세대가 거듭되면서 악에 대한 기울어짐이 누적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유전적 악’과 ‘실제적인 악’(actual evil)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려받은 악은 자신이 직접 행하여 만든 악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악으로 기울어지는 여러 성향을 물려받지만, 그것을 자신의 자유 안에서 실제로 받아들이고 행할 때 그것은 자신의 실제적인 악이 됩니다. 그리고 그 악을 반복하여 삶의 일부로 만들면 다음 세대에 전달되는 유전적 악에 다시 무언가를 더하게 됩니다. AC.494가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세대 간 누적입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유전적 악을 오직 아담 한 사람의 범죄에서 모든 인류에게 전달된 것으로 보는 견해를 명시적으로 부정합니다. AC.313에서도 그는 유전적 악이 부모에게서 자녀에게 전해지고 세대를 거치며 축적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창3의 타락을 한 개인이 범한 최초의 죄가 법적 책임의 형태로 모든 후손에게 전가된 사건으로만 이해하는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유전되는 것은 조상의 죄에 대한 개인적 죄책 자체라기보다 악을 향하여 기울어지는 성향이며, 각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 안에서 그것을 실제 악으로 만들 수도 있고 주님에 의해 거듭나면서 그 지배에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AC.494의 마지막 문장이 중요합니다. 유전적 악은 ‘주님에 의해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감소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여러 세대에 걸쳐 축적된 악의 경향을 뿌리째 제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으시면서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사람이 악을 악으로 인정하여 물리치고 주님께로 향하도록 이끄십니다. 거듭남은 단지 개인의 도덕적 개선이 아니라 세대를 거쳐 내려온 악의 흐름이 한 사람 안에서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지배하지 못하게 되는 주님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이 설명은 태고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태고교회가 처음부터 갑자기 악한 교회였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들은 매우 깊은 퍼셉션을 가진 천적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세대가 지나면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악한 방향으로 사용하고 그것을 반복하면서 악의 성향이 누적되었고, 그 결과 후대의 사람들은 앞선 세대보다 더 강한 유전적 악의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점차 변질되고 마침내 사라져 간 배경에 이러한 인간의 세대적 변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후대 사람은 앞선 세대보다 무조건 더 악하다’는 단순한 공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494 자체가 동시에 거듭남이라는 반대 방향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악이 세대를 따라 축적될 수 있는 것처럼, 주님은 각 세대의 각 사람에게 새롭게 역사하시며 그 악의 힘을 감소시키십니다. 인간에게는 유전적 성향이 있지만 그것이 그의 운명을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 사람에게 주어진 구체적인 상태 안에서 거듭남의 길을 여십니다.

 

따라서 창5:5의 ‘죽었더라’는 한 교회의 종결을 알리는 짧은 표현이면서 동시에 인간과 교회가 왜 쇠퇴하는가를 보여 주는 깊은 진단이 됩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것이 아니라 세대를 지나며 인간의 악이 반복되고 누적되는 가운데 점차 그 처음의 온전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AC.494의 결론은 쇠퇴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그 누적된 흐름을 거슬러 사람을 다시 살리시는 분은 주님이시며, 그 역사가 바로 거듭남입니다. ‘죽음’의 역사가 아무리 오래 누적되어도 주님은 그 가운데서 다시 생명으로 향하는 길을 여십니다. (AC.494 해설)

 

 

 

창5:5, AC.495, ‘태고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열쇠, 퍼셉션’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5태고교회가 어떻게 쇠퇴하였는지는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을 가진 교회였으며, 오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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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3, ‘시간과 척도를 넘어 상태를 나타내는 말씀의 숫자’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3‘날들’(days)과 ‘해들’(years)이 시대들과 상태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세상에서는 시간들과 척도들이 반드시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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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3

‘날들’(days)과 ‘해들’(years)이 시대들과 상태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세상에서는 시간들과 척도들이 반드시 있어야 하며, 그것들은 자연의 가장 바깥 차원에 있기 때문에 거기에 숫자들이 적용될 수밖에 없다는 점만 말해 두고자 합니다. 그러나 시간들과 척도들이 말씀에 사용될 때에는 언제나 날들과 해들의 숫자들뿐 아니라 척도의 숫자들까지도, 그 숫자의 의미에 따라 시간과 척도에서 추상된 의미를 갖습니다. 이를테면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은 거룩하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위에서 설명하였습니다. 또한 희년은 마흔아홉째 해마다 선포하여 쉰째 해에 지키도록 하였고, 이스라엘의 지파들은 열둘이었으며 주님의 사도들도 같은 수였고, 장로들은 일흔이었으며 주님의 제자들도 그와 같은 수였습니다. 이 밖에도 많은 경우에 숫자들은 그것들이 적용된 대상에서 추상된 고유한 의미를 가지며, 이처럼 추상될 때 그 숫자들이 의미하는 것은 상태들입니다. That by “days” and “years” a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needs no further explication, except to say that in the world there must needs be times and measures, to which numbers may be applied because they are in the ultimates of nature; but whenever they are applied in the Word, the numbers of the days and years, and also of the measures, have a signification abstractedly from the times and measures, in accordance with the signification of the number; as where it is said that there are six days of labor, and that the seventh is holy, of which above; that the jubilee should be proclaimed every forty-ninth year, and should be celebrated in the fiftieth; that the tribes of Israel were twelve, and the apostles of the Lord the same; that there were seventy elders, and as many disciples of the Lord; and so in many other instances where the numbers have a special signification abstractedly from the things to which they are applied; and when thus abstracted, then it is states that are signified by the numbers.

 

해설

AC.493은 앞의 AC.487에서 시작된 말씀의 숫자에 관한 설명을 한 단계 더 분명하게 합니다. 핵심은 ‘말씀에 숫자가 나오면 시간이나 수량은 아무 의미가 없고 오직 상징적인 뜻만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자연계에서는 시간과 척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인정합니다. 자연계는 ‘자연의 가장 바깥 차원’(ultimates of nature)에 있기 때문에 날과 해, 길이와 수량처럼 측정할 수 있는 형태가 필요하고, 거기에 숫자가 붙습니다. 문제는 말씀이 그 자연적인 숫자를 사용하면서 동시에 그 안에 더 깊은 의미를 담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AC.493에서 중요한 표현은 ‘적용된 대상에서 추상된’(abstractedly from the things to which they are applied)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일곱’이라는 숫자가 날에 붙으면 일곱 날이 되고, 해에 붙으면 일곱 해가 되며, 어떤 사람이나 사물의 수에 붙으면 일곱 사람 또는 일곱 사물이 됩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에서는 그 외적인 대상에서 숫자를 추상하여 그 숫자 자체가 나타내는 영적인 의미를 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추상되었을 때 숫자가 궁극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상태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때문에 말씀에서 어떤 숫자가 반복되는 것은 우연한 수치의 일치로만 볼 수 없습니다.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는 것, 마흔아홉째 해 뒤에 쉰째 해를 희년으로 지키는 것, 이스라엘의 지파가 열둘이고 주님의 사도도 열둘인 것, 장로가 일흔이고 주님께서 보내신 제자들도 일흔인 것은 서로 전혀 다른 역사적 사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같은 숫자가 서로 다른 대상에 적용되면서도 그 숫자에 고유한 영적 의미를 유지하기 때문에, 말씀 전체 안에서 일정한 질서와 상응을 이루게 됩니다.

 

여기서 숫자의 의미를 기계적인 암호 풀이로 바꾸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7은 언제나 이것, 12는 언제나 저것’이라는 식으로 숫자 하나에 하나의 한국어 뜻을 붙이는 방식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말씀의 숫자를 지나치게 단순화할 수 있습니다. 숫자는 고유한 기본 의미를 지니지만, 실제로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지는 그 숫자가 사용된 문맥과 대상에 따라 살펴야 합니다. 특히 AC.487이 말했듯이 800이나 930 같은 합성된 큰 숫자에는 여러 상태와 그 변화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단순한 숫자 하나처럼 곧바로 풀어서는 안 됩니다.

 

이 원리는 창5의 긴 연수들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아담이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라는 말씀에서 930이라는 숫자는 문자적으로는 연수에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속뜻에서는 그 숫자를 자연적인 ‘930년’이라는 시간 단위에서 추상하여 그 안에 담긴 교회의 상태를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AC.492가 ‘날들과 해들’을 시대와 상태로 설명한 데 이어 AC.493은 그 상태가 말씀의 숫자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 글은 우리가 왜 창5의 숫자들을 성급하게 하나씩 해독하지 말아야 하는지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AC.487에서 800과 930을 비롯한 뒤의 숫자들에는 너무 많은 상태 변화가 들어 있어 여기서 하나하나 설명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독자에게 필요한 것은 먼저 각 숫자의 암호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숫자가 자연적인 시간과 척도를 통하여 영적인 상태를 표현한다는 원리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결국 AC.493은 자연계와 영계가 서로 무관한 두 세계가 아니라 상응을 통하여 연결되어 있음을 숫자의 경우를 통해 보여 줍니다. 자연계에서는 상태가 시간과 척도와 수량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말씀은 바로 그 자연적인 형식을 사용하여 영적인 상태를 담아냅니다. 따라서 말씀의 문자에 기록된 숫자를 무시할 수도 없고, 반대로 문자적인 수량에만 붙잡혀서도 안 됩니다. 문자에 있는 숫자를 존중하면서 그 숫자를 통해 주님께서 어떤 영적 상태와 질서를 나타내시는지를 살피는 것, 이것이 AC.493이 제시하는 말씀의 숫자를 읽는 기본 원리입니다. (AC.493 해설)

 

 

 

창5:5, AC.494, ‘퍼셉션의 죽음과 유전적 악의 누적’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4그가 ‘죽었다’(died)는 것이 그러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죽다’(die)라는 말의 의미에서 분명합니다.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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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2, ‘사라진 퍼셉션을 의미하는 사람의 죽음’(AC.492-49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that man lived were nine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he died. (창5:5) AC.492여기서 ‘날들’(days)과 ‘해들’(years)은 위에서와 같이 시대들과 상태들을 의미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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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that man lived were nine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he died. (창5:5)

 

AC.492

여기서 ‘날들’(days)과 ‘해들’(years)은 위에서와 같이 시대들과 상태들을 의미하며, ‘사람이 죽음’(man’s dying)은 그러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By “days” and “years” are he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as above; by “man’s dying” is signified that such perception no longer existed.

 

해설

AC.492는 창5:5의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라는 말씀의 속뜻을 아주 간결하게 밝힙니다. 앞의 AC.486-488에서 ‘날들’과 ‘해들’이 단순한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교회의 시대와 상태를 의미한다고 설명했다면, 이제 ‘죽었더라’ 역시 한 개인의 육체적 죽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교회를 특징짓던 특정한 내적 상태의 종결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단순히 ‘교회가 없어졌다’고 하지 않고 ‘그러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창5에서 태고교회와 그 후대 교회들을 구별하는 핵심적인 특징이 퍼셉션이었기 때문입니다. 앞의 AC.483과 AC.491에서 보았듯이 이 교회들은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퍼셉션했으며, 각각의 교회는 그 퍼셉션의 어떠함에 따라 서로 구별되었습니다. 따라서 한 교회의 ‘죽음’은 그 교회를 그 교회 되게 하던 고유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창5의 반복되는 ‘죽었더라’를 읽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문자적으로는 한 사람이 오랜 세월을 살다가 죽고 다음 세대로 넘어가는 족보처럼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한 교회의 상태가 일정한 과정을 거친 뒤 끝나고 다른 교회적 상태로 넘어가는 역사가 펼쳐집니다. 그러므로 ‘낳았으며’가 교회의 계승과 그 안에서 산출된 선과 진리를 보여 준다면, ‘죽었더라’는 그 교회의 고유한 퍼셉션이 마침내 소멸한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여기서 ‘죽음’을 곧바로 모든 선과 진리의 완전한 소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한 교회의 특정한 퍼셉션이 끝났다고 해서 주님의 교회에 관한 모든 것이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앞의 AC.491이 태고교회를 ‘다른 모든 후대 교회들의 으뜸이며 어버이인 교회’라고 한 것처럼, 한 교회의 상태가 끝나면서도 그로부터 이어지는 것이 다음 교회에 전달됩니다. 창5의 ‘낳음’과 ‘죽음’이 함께 기록되는 것은 바로 이 계승과 변화의 두 측면을 보여 줍니다.

 

이 점에서 ‘죽음’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육체가 살아 있느냐 죽었느냐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말씀은 사람과 교회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생명이 살아 있는지를 묻습니다. 태고교회의 경우 그 생명의 대표적인 형태가 퍼셉션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퍼셉션이 사라졌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지식이나 특별한 능력을 잃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 교회를 특징짓던 주님과의 내적 교통 방식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형태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짧은 글은 앞으로 창5에서 반복될 ‘죽었더라’를 단순한 족보의 마침표가 아니라 교회의 상태 변화로 읽도록 준비시킵니다. 교회에는 시작과 성장뿐 아니라 쇠퇴와 종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변화 가운데서도 주님은 다음 교회를 준비하시고 선과 진리가 완전히 끊어지지 않도록 보존하십니다. 그러므로 창5의 계보는 교회들이 단순히 생겨났다 사라지는 기록이라기보다, 한 상태가 끝나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다음 상태를 이어 가시는 섭리의 역사로 읽을 수 있습니다. (AC.492 해설)

 

 

 

창5:5, AC.493, ‘시간과 척도를 넘어 상태를 나타내는 말씀의 숫자’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3‘날들’(days)과 ‘해들’(years)이 시대들과 상태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세상에서는 시간들과 척도들이 반드시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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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91, ‘교회의 어떠함에 따라 달라지는 아들들과 딸들’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91이 장에서 ‘아들들’(sons)과 ‘딸들’(daughters)(4, 7, 10, 13, 16, 19, 26, 30절)도 같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어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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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91

이 장에서 ‘아들들’(sons)과 ‘딸들’(daughters)(4, 7, 10, 13, 16, 19, 26, 30절)도 같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어떠한가에 따라 ‘아들들과 딸들’(sons and daughters)도 그러하며, 다시 말해 선들과 진리들도 그러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들과 선들은 분명하게 퍼셉션된 것들인데, 이는 그것들이 태고교회, 곧 다른 모든 후대 교회들의 으뜸이며 어버이인 교회에 관하여 서술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The same things are signified by “sons” and “daughters” in this chapter (verses 4, 7, 10, 13, 16, 19, 26, 30), but such as is the church, such are the “sons and daughters,” that is, such are the goods and truths; the truths and goods here spoken of are such as were distinctly perceived, because they are predicated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e principal and parent of all the other and succeeding churches.

 

해설

AC.491은 AC.486-490에서 설명한 ‘아들들과 딸들’의 의미를 창5 전체에 적용하면서 한 가지 중요한 원리를 덧붙입니다. ‘아들들’은 진리를, ‘딸들’은 선을 의미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교회에서 그 진리와 선의 질이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가 어떠한가에 따라 아들들과 딸들도 그러하다’고 말합니다. 즉 어떤 교회가 어떤 내적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그 교회가 받아들이고 산출하는 진리와 선의 어떠함도 달라집니다.

 

이것은 상응을 기계적인 대응표처럼 이해해서는 안 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입니다. ‘아들 = 진리’, ‘딸 = 선’이라는 기본적인 상응은 같더라도, 그 진리가 어떤 진리이며 그 선이 어떤 선인지는 그것들이 속한 교회의 상태에 따라 달라집니다. 같은 ‘아들’이라는 표현도 태고교회에 관하여 사용될 때와 후대의 다른 교회에 관하여 사용될 때 그 진리의 내적 질은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상응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단어의 기본 의미뿐 아니라 그 단어가 놓인 교회적 상태와 문맥까지 함께 보아야 합니다.

 

특히 여기서 말하는 진리들과 선들은 ‘분명하게 퍼셉션된 것들’입니다. 이 표현은 창5 초반부터 계속 강조되어 온 태고교회의 독특한 성격을 다시 확인해 줍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선과 진리는 주로 외부의 가르침을 배우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검토하여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내적으로 퍼셉션했습니다. 따라서 그 교회의 ‘아들들과 딸들’은 바로 그러한 퍼셉션에서 나온 진리들과 선들입니다.

 

이것은 앞의 AC.483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등 여러 교회가 주로 퍼셉션의 차이에 따라 구별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각각의 교회가 낳은 ‘아들들과 딸들’ 역시 똑같을 수 없습니다. 각 교회의 퍼셉션이 달랐으므로 그들이 퍼셉션한 진리와 선의 어떠함도 달랐습니다. 창5에 같은 표현인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으며’가 계속 반복되지만, 속뜻에서는 매번 똑같은 진리와 선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교회 상태에 고유한 진리와 선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를 ‘다른 모든 후대 교회들의 으뜸이며 어버이인 교회’(the principal and parent of all the other and succeeding churches)라고 합니다. ‘으뜸’이라는 말은 태고교회가 최초이면서 가장 근원적인 교회였음을, ‘어버이’라는 말은 이후의 교회들이 그 교회로부터 이어져 나왔음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창5에서 태고교회와 그 후대 교회들이 ‘낳음’의 언어로 연결되는 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앞선 교회의 선과 진리가 후대 교회에 전해지고, 후대 교회는 그것을 자신의 상태에 따라 받아들이면서 또 다른 형태의 선과 진리를 산출하는 교회의 계승을 보여 줍니다.

 

여기에는 지금 우리가 창5를 읽으며 계속 확인하고 있는 중요한 원리도 있습니다. ‘계승’은 ‘동일함’이 아닙니다. 셋 교회가 태고교회와 매우 비슷하면서도 동일하지 않았듯이, 이후의 교회들도 앞선 교회에서 이어지지만 각각 다른 퍼셉션과 다른 상태를 갖습니다. 따라서 창5의 계보는 동일한 교회가 이름만 바꾸어 계속되는 과정이라기보다, 앞선 교회로부터 받은 것을 다음 교회가 자신의 상태에 따라 이어받으면서 선과 진리의 어떠함도 함께 변화하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보면 ‘교회가 어떠한가에 따라 아들들과 딸들도 그러하다’는 AC.491의 짧은 문장은 매우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교회의 참된 상태는 이름이나 외적 형태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 교회 안에서 어떤 진리가 받아들여지고 어떤 선이 살아 움직이는가, 그리고 그 진리와 선이 주님으로부터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이 교회의 내적 어떠함은 결국 그 교회가 ‘낳는’ 진리와 선의 어떠함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창5:4의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으며’라는 짧은 표현 안에는 태고교회의 풍성한 영적 생명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이 낳은 것은 단순한 후손이 아니라 분명하게 퍼셉션된 진리와 선이었으며, 그 진리와 선은 다시 후대 교회들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교회들이 태고교회로부터 점차 멀어지면서 퍼셉션의 상태가 달라지는 만큼 그들이 받아들이는 진리와 선의 질도 달라집니다. 이것이 창5의 반복되는 ‘아들들과 딸들’을 단순한 족보의 반복이 아니라 교회의 생명과 계승의 역사로 읽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AC.491 해설)

 

 

 

창5:5, AC.492, ‘사라진 퍼셉션을 의미하는 사람의 죽음’(AC.492-49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that man lived were nine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he died. (창5:5) AC.492여기서 ‘날들’(days)과 ‘해들’(years)은 위에서와 같이 시대들과 상태들을 의미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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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90, ‘딸들이 의미하는 사랑과 신앙의 선’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90말씀에서 ‘딸들’(daughters)은 자주 선들을 의미합니다. 시편에서는, In the Word “daughters” frequently denote goods; as in David: 9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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