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5
태고교회가 어떻게 쇠퇴했는지는, 퍼셉션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는데요, 왜냐하면 태고교회는 퍼셉션의 교회였고, 그런 교회는 오늘날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퍼셉션은, 그러니까 곧 그 구성원들이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를 주님으로부터, 마치 지금도 천사들이 천국에서 퍼셉션으로 아는 것처럼 아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민 사회의 선과 진리가 무엇인가를 본인 힘으로 공부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선과 주님을 믿는 신앙의 진리를 주님으로 말미암아 지각, 곧 퍼셉션으로 아는 것입니다. 삶으로 확증된 신앙 고백을 통해, 퍼셉션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여부를 볼 수 있습니다. How the most ancient church decreased cannot appear unless it be known what perception is, for it was a perceptive church, such as at this day does not exist. The perception of a church consists in this, that its members perceive from the Lord what is good and true, like the angels; not so much what the good and truth of civic society is, but the good and truth of love to the Lord and of faith in him. From a confession of faith that is confirmed by the life it can be seen what perception is, and whether it has any existence.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쇠퇴를 설명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전제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퍼셉션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태고교회가 왜 쇠퇴했는지조차 이해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는 단순한 서론이 아니라, 태고교회 이해의 관문과도 같은 선언입니다. 태고교회는 제도나 교리의 교회가 아니라, ‘퍼셉션의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가 오늘날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유형의 교회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는 태고교회를 이상적으로 그리거나 낭만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교회의 본질이 오늘날의 신앙 형태와는 질적으로 달랐음을 분명히 합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주로 가르침과 교리, 학습과 이해를 통해 진리를 접하지만, 태고교회는 그러한 과정을 거치기 이전에, ‘주님으로부터 직접 퍼셉션하는, 즉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으로 직접 아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가 말하는 퍼셉션은 감정이나 직관과 같은 모호한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를 즉각적으로 아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스스로 판단하여 선과 진리를 정하지 않았고, 사회적 합의나 관습을 기준으로 삼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과의 내적 연결 안에서,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진리인지를 퍼셉션으로 직접 알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하나 제시됩니다. 퍼셉션의 대상은 시민 사회의 선과 진리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정치적 정의나 사회적 윤리 차원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더 깊은 차원, 곧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선과 주님을 믿는 신앙의 진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무엇이 주님께 속한 선인지, 무엇이 주님으로부터 온 진리인지를 살아 있는 현실로 퍼셉션, 즉 주님으로 말미암는 퍼셉션으로 직접 알았습니다.
이 점에서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천사들의 상태에 비유됩니다. 천사들은 선과 진리를 추론하거나 토론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그것들을 곧바로 인식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천사적 상태와 유사한 방식으로 살았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태고교회가 ‘하늘과 가장 가까운 교회’로 불리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퍼셉션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설명합니다. 그는 그 기준을 ‘삶으로 확증된 신앙 고백’에서 찾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진술입니다. 퍼셉션은 말이나 지식으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무엇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그 고백이 실제 삶과 일치하는지를 보면, 그 안에 퍼셉션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퍼셉션은 삶을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는 사람은 그것들을 단순히 알고 끝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살아 냅니다. 태고교회의 쇠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세대를 거치며 퍼셉션은 점차 약화되었고, 신앙은 점점 더 말과 형식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삶으로 확증되는 신앙 고백이 줄어들었고, 퍼셉션의 교회는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은 오늘날의 교회를 향해 매우 직접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신앙을 얼마나 많이 말하고, 얼마나 잘 설명하는가 이전에, 그것을 얼마나 살아 내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퍼셉션은 과거의 신화적 능력이 아니라, 주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 안에서 여전히 가능한 상태입니다. 다만 그 방식은 태고교회와 다를 뿐입니다.
결국 AC.495는 태고교회의 쇠퇴를 설명하는 동시에, 모든 시대의 교회를 향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교회의 생명은 제도나 전통, 지식 축적에 있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며 살아 내는 삶’에 있습니다. 이 기준을 잃을 때, 교회는 겉으로는 여전히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본질에서는 이미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AC.494, 창5:5, '죽었더라', 해당 교회의 퍼셉션이 끝난 상태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4 그가 ‘죽었다’(died)는 말의 의미가 그러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임은, ‘죽다’(die)라는 말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집니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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