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5:3)

 

AC.484

 

‘셋’(Seth)이라는 교회가 태고교회와 매우 유사하였다는 건, 사람, 곧 아담이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셋이라 불렀다고 한 데를 보면 분명합니다. 여기서 ‘모양’(likeness)은 신앙과 관련되고, ‘형상’(image)은 사랑과 관련됩니다. 그러나 이 교회가 사랑과 그로부터 나오는 신앙에 관하여 태고교회와 같지 않았다는 사실은, 바로 앞에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다’(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and blessed them, and called their name man)한 데를 보면 분명합니다. 이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여섯째 날의 영적 인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의 모양은 여섯째 날의 영적 인간에 대한 것이며, 다시 말해 사랑이 그다지 주된 것이 아니었으나, 여전히 신앙은 사랑과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That the church called “Seth” was very nearly like the most ancient church is evident from its being said that the man begat in his likeness, according to his image, and called his name Seth; the term “likeness” having relation to faith, and “image” to love; for that this church was not like the most ancient church with regard to love and its derivative faith, is plain from its being said just before,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and blessed them, and called their name man,” by which is signified the spiritual man of the sixth day, as was said above, so that the likeness of this man was to the spiritual man of the sixth day, that is, love was not so much the principal, but still faith was conjoined with love.

 

 

해설

 

스베덴보리는 AC.484에서 ‘’의 교회가 태고교회와 ‘거의 같았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분명한 차이가 있었음을 조심스럽게 짚어 줍니다. 이 교회가 태고교회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은, ‘그의 모양대로, 그의 형상대로’ 낳았다고 표현된 데서 드러납니다. 이는 단절이 아니라 계승이었고, 붕괴가 아니라 연속이었음을 뜻합니다. 주님께서는 태고교회의 선과 진리를 완전히 잃어버리게 두지 않으셨고, 그 흔적을 따라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중요한 구분을 덧붙입니다. ‘모양’은 신앙과 관련되고, ‘형상’은 사랑과 관련된다는 점입니다. 이 표현은 셋의 교회가 태고교회의 구조를 그대로 반복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 구조의 강조점이 달라졌음’을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었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습니다. 그러나 셋의 교회에서는 신앙이 이전보다 더 전면에 등장하며, 사랑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더 이상 즉각적 인식의 중심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이 차이는 바로 앞 구절에서 언급된 ‘남자와 여자’의 창조,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부르셨다’는 표현과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여섯째 날의 영적 인간’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여섯째 날은 형성이 거의 완성된 단계이지만, 아직 안식일, 곧 일곱째 날의 천적 상태에는 이르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 영적 인간은 진리와 신앙을 통해 선을 향해 나아가며, 사랑과 신앙이 결합되어 있지만, ‘사랑이 지배적 중심은 아닌 상태’입니다.

 

따라서 셋의 교회가 닮은 ‘사람’은 태고교회의 완전한 천적 인간이 아니라, ‘여섯째 날의 영적 인간이었습니다. 이것이 ‘거의 같다’는 표현의 정확한 의미입니다. 사랑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고, 신앙이 사랑과 분리된 것도 아니었지만, 사랑이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인도하는 상태는 더 이상 아니었습니다. 대신 신앙이 의식적으로 보존되고, 그 신앙을 통해 사랑이 유지되는 질서가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이 변화는 타락이라기보다, ‘주님의 섭리에 따른 조정’이었습니다. 태고교회의 순수한 인식의 상태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게 되었을 때, 주님께서는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의 교회를 마련하셨습니다. 그 교회는 여전히 사랑과 신앙을 지녔지만, 즉각적 인식 대신 ‘신앙을 통한 인도’를 받는 교회였습니다. 셋의 교회는 바로 이 전환점에 서 있는 교회였습니다.

 

AC.484는 교회의 ‘퇴보’와 ‘보존’을 함께 보여 줍니다. 한편으로는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가 더 이상 유지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께서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셨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사랑이 덜 중심이 되었을지라도, 신앙은 여전히 사랑과 결합되어 있었고, 그 결합이 교회의 생명을 지탱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 상태를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태고교회의 즉각적 인식에는 이르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 여전히 살아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랑이 주도하지 못하는 상태일지라도, 신앙이 사랑과 결합되어 있다면, 그곳에는 여전히 교회의 생명이 흐르고 있습니다.

 

결국 AC.484는 셋의 교회를 통해 한 가지 중요한 원리를 보여 줍니다. 교회는 언제나 동일한 형태로 유지되지 않지만, ‘주님의 섭리 안에서는 항상 이어진다’는 원리입니다. 형태와 강조점은 달라질 수 있으나,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 유지되는 한, 교회는 여전히 교회입니다. 셋의 교회는 태고교회의 그림자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그림자조차도 주님께서 의도하신 빛의 방향 안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 관점을 붙들 때, 창세기 5장의 계보는 단순한 쇠퇴의 기록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과 함께 걸어오신 인내의 역사’로 읽히게 됩니다.

 

 

 

AC.483, 창5:3, ‘퍼셉션’(perception), 창5 이름들의 비밀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3 이어서 나오는 ‘셋’(Seth), ‘에노스’(Enosh), ‘게난’(Kenan), ‘마할랄렐’(Mahalale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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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5:3)

 

AC.483

 

이어서 나오는 ‘셋’(Seth), ‘에노스’(Enosh), ‘게난’(Kenan), ‘마할랄렐’(Mahalalel), ‘야렛’(Jared), ‘에녹’(Enoch), ‘므두셀라’(Methuselah), ‘라멕’(Lamech), ‘노아’(Noah)라는 이름들은 그만큼 많은 교회들을 의미하며, 그 가운데 첫째이자 주된 교회를 ‘사람’(man)이라 하였습니다. 이 교회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퍼셉션’(perception, 지각, 통찰력, 인식)이었으며, 그러므로 그 시대 교회들의 차이는 주로 이 퍼셉션의 차이였습니다. 여기서 퍼셉션에 관하여 덧붙이자면, 온 하늘, 천국 전체에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 말고는 지배적인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퍼셉션은 말로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그야말로 설명 불가한 것이며, 그 차이는 헤아릴 수 없어 어느 두 천국 공동체도 동일한 퍼셉션을 누리지 않습니다. 그곳에 있는 퍼셉션들은 ‘속’(, genera)과 ‘종’(, species)으로 구분되는데, 그 속은 무수하며, 각 속에 속한 종들 또한 무수합니다. 이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뒤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By the names which follow: “Seth,” “Enosh,” “Kenan,” “Mahalalel,” “Jared,” “Enoch,” “Methuselah,” “Lamech,” “Noah,” are signified so many churches, of which the first and principal was called “man.” The chief characteristic of these churches was perception, wherefore the differences of the churches of that time were chiefly differences of perception. I may here mention concerning perception, that in the universal heaven there reigns nothing but a perception of good and truth, which is such as cannot be described, with innumerable differences, so that no two societies enjoy similar perception; the perceptions there existing are distinguished into genera and species, and the genera are innumerable, and the species of each genus are likewise innumerable; but concerning these,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이와 같이 속이 무수하고, 또 각 속 안에 종이 무수하며, 그 종들 안에는 더욱 무수한 변종들이 있으므로, 이런 영계, 천국의 실상을 감안할 때, 오늘날 세상이 이런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에 관하여 얼마나 아는 게 없는지가 분명합니다. 곧 그들은 퍼셉션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며, 설령 그것을 설명해 주어도 그러한 것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많은 것들도 이와 같습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의 속과 종의 차이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천적 나라를 대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퍼셉션의 본질이 전혀, 그것도 가장 일반적인 차원에서조차 전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이 교회들의 퍼셉션의 속과 종에 대해 말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어둡고 낯설게 들릴 것입니다. 난생처음 듣는 얘기들이니까요! 그들은 그 당시 집과 가족과 민족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집과 가족 안에서만 결혼하였는데, 이는 퍼셉션의 속과 종이 존재 및 타고난 성향이 전해지는 것처럼 부모로부터 정확히 계승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에 속했던 자들은 하늘에서도 함께 거합니다. Since then there are innumerable genera, and innumerable species in each genus, and still more innumerable varieties in the species, it is evident how little—so little that it is almost nothing—the world at this day knows concerning things celestial and spiritual, since they do not know even what perception is, and if they are told, they do not believe that any such thing exists; and so with other things also. The most ancient church represented the celestial kingdom of the Lord, even as to the generic and specific differences of perception; but whereas the nature of perception, even in its most general aspect, is at this day utterly unknown, any account of the genera and species of the perceptions of these churches would necessarily appear dark and strange. They were at that time distinguished into houses, families, and nations, and contracted marriage within their houses and families, in order that genera and species of perceptions might exist, and be derived from the parents precisely as are the propagations of native character; wherefore those who were of the most ancient church dwell together in heaven.

 

 

해설

 

스베덴보리는 AC.483에서 창세기 5장에 나열된 이름들을 다시 한번 분명히 정리합니다. 셋에서 노아에 이르는 모든 이름들은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각각 하나의 ‘교회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교회들 가운데 첫째이자 중심이 되는 교회를 ‘사람’이라 했습니다. 이는 앞서 여러 차례 보았듯이, 태고교회가 주님의 모양과 형상을 가장 온전하게 반영했던 교회였기 때문이지요. 이후에 나오는 모든 교회들은 이 ‘사람’의 상태에서 파생된 변형들이었습니다.

 

이 교회들의 가장 중요한 공통 특징은 바로 ‘퍼셉션(perception)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퍼셉션이란, 지식이나 판단 능력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를 즉각적으로 알아보는 내적 지각’을 의미합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선한지를 배워서 알지 않았고, 명령을 통해 분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랑 안에서 곧바로 퍼시브, 곧 지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시대 교회들 사이의 차이는 교리의 차이나 제도의 차이가 아니라, ‘퍼셉션의 차이’였습니다.

 

※ 특별히 이 ‘perception’이라는 영어를 ‘인식’이나 ‘지각’ 등으로 번역하지 않고 읽는 그대로 음역하는 이유는 이 단어가 가지는 고유 뉘앙스 때문입니다. 이런 게 몇 가지 있지요. ‘체어리티(charity)라든지 라틴어 ‘아르카나(arcana)라든지 등등... 이런 방식은 그냥 저 개인적 취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퍼셉션의 세계를 천국의 질서와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온 천국에는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 외에는 아무것도 지배하지 않으며, 이 퍼셉션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미묘하고 풍부합니다. 천국의 어떤 두 공동체도 동일한 퍼셉션을 누리지 않으며, 그 차이는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이 퍼셉션들은 속과 종으로 나뉘는데, 속 자체가 무수하고, 각 속 안의 종들도 무수합니다. 그리고 그 종들 안에는 다시 셀 수 없이 많은 변종들이 존재합니다.

 

※ 스베덴보리가 본인은 이미 동식물의 복잡한 분류체계를 알면서도 굳이 이 두 단계, ‘’과 ‘’만 언급하는 이유는, 천국의 질서는 이 둘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으로는 사랑의 방향을, ‘’으로는 그 퍼셉션을 알 수 있기 때문이지요. 천국은 이 정도로 충분한 것입니다.

 

이 설명은 오늘날 우리의 영적 무지를 날카롭게 드러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오늘날 세상이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퍼셉션’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기 때문이며, 심지어 그것이 존재한다는 설명을 들어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대 신앙은 이해와 분석에는 익숙하지만, 퍼셉션이라는 차원에는 매우 낯설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태고교회의 세계는 오늘날의 감각으로는 어둡고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내가 모르는 영역은 어둡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고교회는 바로 이 퍼셉션의 속과 종의 차이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천적 나라를 땅 위에서 살아 있는 방식으로 대표하고 있었습니다. 천국 수많은 공동체가 서로 다른 퍼셉션을 가지고 조화를 이루듯이, 태고교회의 교회들도 서로 다른 퍼셉션의 상태를 지니면서 하나의 질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5장에 여러 이름들이 나열되는 이유입니다. 그것은 분열이 아니라, ‘풍성한 차이 속의 하나됨’을 보여 주는 구조입니다.

 

이 질서를 보존하기 위해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집과 가족과 민족으로 구분되어 살았고, 집과 가족 안에서만 결혼했습니다. 이것은 폐쇄성이나 혈통 순수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퍼셉션의 속과 종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보존하기 위한 섭리적 질서’였습니다. 퍼셉션은 타고난 성향과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부모로부터 자녀에게 계승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타고난 성향의 전파’에 비유합니다. 마치 성격과 기질이 유전되듯이, 퍼셉션의 결도 그렇게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태고교회에 속했던 자들은 천국에서도 함께 거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땅에서 이미 퍼셉션의 속과 종에 따라 질서 있게 살았기 때문에, 하늘에서도 자연스럽게 같은 공동체로 모입니다. 하늘의 공동체는 임의로 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퍼셉션의 성질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땅에서의 삶은 하늘 삶의 예비이며, 태고교회의 삶은 이미 그 예비를 가장 온전하게 살았던 삶이었습니다.

 

AC.483은 교회의 차이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바꾸어 줍니다. 우리는 종종 차이를 분열로 여기지만, 주님의 나라에서는 차이가 곧 질서이며, 다양성이 곧 조화입니다. 문제는 차이가 아니라, 퍼셉션이 사라진 데 있습니다. 퍼셉션이 사라지면, 차이는 곧 충돌이 되지만, 퍼셉션이 살아 있을 때 차이는 서로를 완성하는 관계가 됩니다.

 

결국 AC.483은 태고교회를 하나의 이상적인 과거로만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늘의 질서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는 모형’이며, 오늘날 교회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퍼셉션을 잃어버린 시대에, 말씀은 우리를 다시 ‘퍼셉션이 지배하는 세계’로 초대합니다. 비록 태고교회의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 방향을 바라보는 것은 오늘날 신앙의 깊이를 회복하는 데 여전히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AC.484, 창5:3, '사람', 곧 '아담'과 '셋'의 차이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4 ‘셋’(Seth)이라는 교회가 태고교회와 매우 유사하였다는 건, 사람, 곧 아담이 ‘자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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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82, 창5:3, ‘세’(years), ‘년’(numbers of years)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2 이 장에 나오는 ‘세’(years, 백삼십 세, 구백삼십 세 같은)와 ‘연수’(numbers of years, 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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