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5

여기서 ‘셋’(Seth)이 앞에서 묘사된 교회(창4:25)와는 다른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AC.435에서 볼 수 있습니다. That a different church is here meant by “Seth” from that which was described above (Gen. 4:25), may be seen at n. 43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서로 다른 교리를 가진 교회들이 같은 이름으로 일컬어졌다는 것은 앞 장에서(창4:17-18) ‘에녹’(Enoch)과 ‘라멕’(Lamech)이라 한 교회들과,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에녹’과 ‘라멕’이라 하는 다른 교회들(창5:21, 30)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That churches of different doctrine were called by the same name, is evident from those which in the foregoing chapter (Gen. 4:17–18) were called “Enoch” and “Lamech,” while here other churches are in like manner called “Enoch” and “Lamech” (Gen. 5:21, 30).

 

17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18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창4:17, 18)

 

21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30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21, 30)

 

해설

AC.485는 창4와 창5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글입니다. 문자적 족보만 따라 읽으면 창4:25의 셋과 창5:3의 셋은 당연히 동일 인물이며, 창5는 창4 끝부분에서 등장한 셋의 족보를 다시 이어 가는 것으로 읽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속뜻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명시합니다. 창4의 ‘셋’과 창5의 ‘셋’은 ‘서로 다른 교회’를 의미합니다.

 

AC.485가 직접 참조하라고 한 AC.435를 보면 그 차이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창4:25의 ‘사람과 그의 아내’는 앞에서 아다와 씰라로 표상된 ‘새 교회’를 의미하고, 거기서 태어난 ‘셋’은 체어리티가 심어질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신앙을 의미합니다. 반면 창5:1-4에서 다시 등장하는 ‘사람과 그의 아내’와 ‘셋을 낳음’은 ‘태고교회의 첫 후대’를 의미한다고 스베덴보리는 명시합니다. 그는 같은 사람과 사건이 다시 언급되는 것처럼 보여도 속뜻에서는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반복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AC.435)

 

따라서 창4와 창5를 하나의 단순한 직선적 계보로 이어 붙이면 속뜻에서 중요한 차이를 놓치게 됩니다. 창4는 가인으로 표상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발생과 그로부터 나온 여러 이단과 교리적 계열, 그리고 그 과정의 끝에서 새 교회가 일어나는 흐름을 다룹니다. 그 마지막에 등장하는 셋은 바로 그 문맥 안에서 ‘체어리티가 심어질 수 있게 하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반면 창5는 태고교회 자체와 그 후대의 여러 교회가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다루며, 여기의 셋은 태고교회에 이어지는 두 번째 교회입니다. AC.460-463의 장 전체 개요와 AC.481-484의 설명도 이 흐름을 일관되게 보여 줍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현상이 ‘셋’ 하나에만 해당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창4에도 ‘에녹’과 ‘라멕’이 나오고 창5에도 ‘에녹’과 ‘라멕’이 나옵니다. 그러나 AC.485는 이들도 각각 서로 다른 교회들이라고 명시합니다. 따라서 같은 이름이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속뜻에서 같은 교회라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서로 다른 교리를 가진 교회들이 같은 이름을 가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름 자체보다 그 이름이 놓인 문맥과 그 교회가 표상하는 내적 상태가 더 중요합니다.

 

이 점은 우리가 창4부터 계속 살펴 온 한 가지 질문에도 중요한 빛을 던집니다. 곧 ‘가인 계열이 태고교회에서 분리되어 나갔다면, 태고교회 자체와 그 후대는 어떻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AC.485와 AC.435는 적어도 창4의 셋과 창5의 셋을 하나의 동일한 교회 계열로 합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창4의 마지막은 그 장에서 전개된 교회적 흐름의 결론이고, 창5는 태고교회와 그 첫 후대로부터 다시 시작되는 별도의 교회적 계승을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창4와 창5의 모든 교회들이 역사적으로 정확히 같은 시기에 나란히 존재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485가 직접 확정하는 것은 ‘같은 이름이 서로 다른 교회를 가리킨다’는 사실이며, AC.435가 확정하는 것은 창4:25의 새 교회와 창5:1-4의 태고교회 첫 후대가 서로 다른 문맥에 속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만으로도 두 장을 단순히 하나의 직선적인 교회 계보로 읽는 것은 어렵습니다. 두 계열의 시간적 관계와 서로의 관계는 앞으로 나오는 설명들을 더 모아 보면서 판단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러한 구별은 창5의 셋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앞의 AC.484에서 보았듯이 이 셋 교회는 태고교회와 매우 비슷했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았습니다. 사랑이 태고교회에서처럼 그만큼 주된 것은 아니었으나 신앙은 여전히 사랑과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창5의 셋은 창4에서 사랑과 신앙의 분리와 회복이라는 문맥 가운데 나타난 셋과 달리, 태고교회 자체로부터 이어지면서 그 천적 질서가 조금씩 변화해 가는 과정 가운데 나타난 교회입니다.

 

결국 AC.485는 창4와 창5를 읽는 우리의 지도를 수정해 주는 글입니다. 같은 이름이 반복된다고 같은 교회가 아니며, 같은 ‘사람과 그의 아내가 셋을 낳았다’는 서술이 반복된다고 같은 교회적 사건을 단순히 되풀이한 것도 아닙니다. 말씀은 동일하거나 유사한 이름과 표현을 사용하면서도 서로 다른 교회와 서로 다른 내적 상태를 담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5를 읽을 때에는 창4의 이름들을 그대로 연결하기보다,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지는 새로운 교회적 계승의 흐름 안에서 각각의 이름과 상태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AC.485 해설)

 

 

 

창5:4, AC.486, '날들과 해들, 아들들과 딸들의 의미'(AC.486-491)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the days of man after he begat Seth were eight hundred years, and he begat sons and daughters. (창5:3) AC.486‘날들’(days)은 일반적인 시간과 상태를 의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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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3, AC.484, ‘사랑이 여전히 신앙과 결합되어 있었던 셋 교회’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4‘셋’(Seth)이라 하는 교회가 태고교회와 매우 비슷했다는 것은, 사람이 자기의 모양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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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4

‘셋’(Seth)이라 하는 교회가 태고교회와 매우 비슷했다는 것은, 사람이 자기의 모양대로 자기의 형상을 따라 낳고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고 한 데서 분명합니다. 여기서 ‘모양’(likeness)은 신앙과 관계되고, ‘형상’(image)은 사랑과 관계됩니다. 그러나 이 교회가 사랑과 거기서 비롯되는 신앙에 있어서 태고교회와 같지는 않았다는 것은 바로 앞에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다’고 한 데서 분명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여섯째 날의 영적 인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의 모양은 여섯째 날의 영적 인간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사랑이 그만큼 주된 것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신앙은 사랑과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That the church called “Seth” was very nearly like the most ancient church is evident from its being said that the man begat in his likeness, according to his image, and called his name Seth; the term “likeness” having relation to faith, and “image” to love; for that this church was not like the most ancient church with regard to love and its derivative faith, is plain from its being said just before,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and blessed them, and called their name man,” by which is signified the spiritual man of the sixth day, as was said above, so that the likeness of this man was to the spiritual man of the sixth day, that is, love was not so much the principal, but still faith was conjoined with love.

 

해설

AC.484는 앞의 AC.481에서 ‘셋’이라는 새 교회가 태고교회와 ‘아주 다르지는 않았다’고 한 말의 의미를 한층 정확하게 밝혀 줍니다. 셋 교회는 태고교회의 성격을 상당히 이어받았지만 태고교회와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차이는 바로 ‘사랑’과 ‘신앙’의 관계에 있었습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완전한 상태에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었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사람은 먼저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부터 무엇이 참인지를 퍼셉션했으며, 따라서 신앙은 사랑과 떨어져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앞의 AC.479에서도 천적 인간은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으로 말미암아 가장 탁월한 의미에서 ‘사람’이 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것이 태고교회의 본래적인 천적 질서입니다.

 

그런데 셋 교회에 이르러서는 미묘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사랑이 더 이상 이전처럼 압도적으로 ‘주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AC.484의 마지막 말 그대로 ‘여전히 신앙은 사랑과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셋 교회는 태고교회의 완전한 천적 상태와는 차이가 있었지만,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라는 본질적인 질서는 아직 보존하고 있었습니다.

 

이 점은 창4의 가인과 비교하면 더욱 선명해집니다. 가인으로 표상된 것은 사랑 또는 체어리티로부터 분리된 신앙이었습니다. 반면 창5의 셋 교회에서는 사랑이 이전만큼 주된 위치에 있지는 않았어도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두 경우 모두 태고교회의 최초 상태와 차이가 있지만 그 방향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는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분리되는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의 우위가 약해지면서도 신앙과 사랑의 결합 자체는 유지되는 방향입니다. 이 차이는 앞으로 창4의 계열과 창5의 계열을 함께 이해할 때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셋 교회를 ‘여섯째 날의 영적 인간’과 연결한다는 점입니다. 창1의 거듭남의 질서에서 여섯째 날은 사람이 신앙과 사랑의 결합에 이른 상태이지만, 완전한 천적 상태를 의미하는 일곱째 날, 곧 안식일과는 구별됩니다. AC.480에서는 여섯째 날의 끝에서 일곱째 날이 시작되며, 일곱째 날이 천적 인간을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AC.484가 셋 교회를 여섯째 날의 영적 인간과 연결하는 것은, 셋 교회가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를 그대로 되풀이한 교회가 아니라 그보다 한 단계 다른 상태에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AC.481의 ‘모양’과 ‘형상’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여기서는 ‘모양’이 신앙에, ‘형상’이 사랑에 관계됩니다. 중요한 것은 두 요소가 모두 셋 교회 안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이 사라지고 신앙만 남은 것이 아니라 사랑과 신앙이 여전히 함께 있었습니다. 다만 그 관계에서 사랑이 태고교회의 가장 완전한 상태에서처럼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셋 교회를 단순히 ‘태고교회와 비슷한 또 하나의 교회’라고만 이해하면 이 글의 핵심을 놓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매우 비슷하지만 같지는 않은’ 그 차이를 정확히 짚고 있습니다. 사랑과 신앙의 결합은 유지되었으나 사랑의 주도성이 약해졌습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후대 교회들이 어떻게 최초의 천적 상태에서 점차 다른 퍼셉션과 영적 상태로 옮겨 가는지를 보여 주는 첫 중요한 변화 가운데 하나입니다.

 

결국 AC.484에서 셋은 단절보다는 ‘계승 속의 변화’를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앞선 교회의 모든 상태가 그대로 반복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 안에 있던 선과 진리를 다음 교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이어지게 하십니다. 셋 교회에서는 태고교회의 가장 높은 천적 상태가 그대로 유지되지는 않았지만, 가장 중요한 질서 하나, 곧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떨어져 독립하지 않고 여전히 사랑과 결합되어 있는 질서는 보존되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셋 교회는 창4의 가인으로 표상된 길과 뚜렷이 구별됩니다. (AC.484 해설)

 

 

 

창5:3, AC.485, ‘창4의 셋과 창5의 셋은 서로 다른 교회’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5여기서 ‘셋’(Seth)이 앞에서 묘사된 교회(창4:25)와는 다른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AC.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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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3, AC.483, ‘퍼셉션(perception)의 차이로 구별된 태고교회의 여러 교회’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3뒤이어 나오는 ‘셋’(Seth), ‘에노스’(Enosh), ‘게난’(Kenan), ‘마할랄렐’(Mahalalel),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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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3

뒤이어 나오는 ‘셋’(Seth), ‘에노스’(Enosh), ‘게난’(Kenan), ‘마할랄렐’(Mahalalel), ‘야렛’(Jared), ‘에녹’(Enoch), ‘므두셀라’(Methuselah), ‘라멕’(Lamech), ‘노아’(Noah)라는 이름들은 그만큼 많은 교회들을 의미하며, 그 가운데 첫째이자 으뜸이 되는 교회는 ‘사람’(man)이라 하였습니다. 이 교회들의 주된 특징은 퍼셉션이었으므로, 당시 교회들 사이의 차이는 주로 퍼셉션의 차이였습니다. 여기서 퍼셉션에 관하여 한 가지 언급하자면, 보편 천국에는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 외에는 아무것도 다스리지 않으며, 그 퍼셉션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고 무수한 차이가 있어서 서로 같은 퍼셉션을 누리는 두 공동체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곳에 존재하는 퍼셉션들은 유와 종으로 구별되는데, 유는 무수하며 각 유에 속한 종들 역시 무수합니다. 그러나 이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By the names which follow: “Seth,” “Enosh,” “Kenan,” “Mahalalel,” “Jared,” “Enoch,” “Methuselah,” “Lamech,” “Noah,” are signified so many churches, of which the first and principal was called “man.” The chief characteristic of these churches was perception, wherefore the differences of the churches of that time were chiefly differences of perception. I may here mention concerning perception, that in the universal heaven there reigns nothing but a perception of good and truth, which is such as cannot be described, with innumerable differences, so that no two societies enjoy similar perception; the perceptions there existing are distinguished into genera and species, and the genera are innumerable, and the species of each genus are likewise innumerable; but concerning these,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이처럼 무수한 유가 있고, 각 유 안에도 무수한 종이 있으며, 그 종들 안에는 더욱 무수한 변이들이 있으므로, 오늘날 세상이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에 관하여 얼마나 적게 알고 있는지, 실로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고 할 만큼 적게 알고 있는지가 분명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퍼셉션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며, 그것에 관하여 들어도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의 유와 종의 차이에 있어서까지 주님의 천적 나라를 표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퍼셉션의 본질이 가장 일반적인 면에서조차 완전히 알려져 있지 않으므로, 이 교회들의 퍼셉션의 유와 종에 관하여 설명한다면 필연적으로 어둡고 낯설게 보일 것입니다. 당시 그들은 집안(houses), 일가(families), 민족(nations)으로 구별되어 있었고, 퍼셉션의 유와 종이 존재하며 부모로부터 타고난 성향이 전해지는 것과 꼭 같이 이어지도록 하기 위하여 자기들의 집안과 일가 안에서 혼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에 속했던 이들은 천국에서도 함께 거주합니다. Since then there are innumerable genera, and innumerable species in each genus, and still more innumerable varieties in the species, it is evident how little—so little that it is almost nothing—the world at this day knows concerning things celestial and spiritual, since they do not know even what perception is, and if they are told, they do not believe that any such thing exists; and so with other things also. The most ancient church represented the celestial kingdom of the Lord, even as to the generic and specific differences of perception; but whereas the nature of perception, even in its most general aspect, is at this day utterly unknown, any account of the genera and species of the perceptions of these churches would necessarily appear dark and strange. They were at that time distinguished into houses, families, and nations, and contracted marriage within their houses and families, in order that genera and species of perceptions might exist, and be derived from the parents precisely as are the propagations of native character; wherefore those who were of the most ancient church dwell together in heaven.

 

해설

AC.483은 창5에 나오는 이름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밝혀 줍니다.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는 속뜻에서 단순히 한 가문의 아홉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많은 교회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교회들의 첫째이자 으뜸은 ‘사람’이라 하는 태고교회였습니다. 따라서 창5의 계보는 태고교회로부터 여러 후대 교회가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보여 주는 교회적 계보입니다.

 

그런데 이 여러 교회를 서로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바로 ‘퍼셉션’입니다. 오늘날의 신앙생활에서는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성경의 가르침이나 교리, 양심적 판단 등을 통해 분별하는 것이 익숙하지만,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를 주님으로부터 내적으로 지각하는 퍼셉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태고교회가 똑같은 퍼셉션을 가진 것이 아니라, 각각의 교회마다 퍼셉션의 성격과 정도가 달랐습니다. 따라서 셋에서 노아까지 이어지는 교회의 차이를 이해하려면 단순히 교리의 차이보다 먼저 ‘퍼셉션의 차이’를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차이를 천국의 구조와 연결합니다. 천국 전체에는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 다스리지만, 그것은 획일적이지 않습니다. 서로 완전히 같은 퍼셉션을 가진 두 천국 공동체가 없을 만큼 다양하며, 그 차이는 유와 종, 그리고 다시 그 안의 무수한 변이로 펼쳐집니다. 따라서 천국의 하나 됨은 모두가 똑같아지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차이가 주님의 질서 안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는 데서 생깁니다.

 

태고교회도 바로 이러한 주님의 천적 나라를 표상했습니다. 하나의 태고교회 안에 집안과 일가와 민족이 있었고, 그 각각은 서로 다른 고유한 퍼셉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앞서 AC.470-471에서 살펴본 ‘집안-일가-민족’의 구조를 한층 더 깊게 설명해 줍니다. 그들의 구별은 단순히 생활 편의를 위한 사회적·행정적 구획이 아니었습니다. 서로 다른 퍼셉션의 유와 종이 보존되고 펼쳐지는 하나의 영적 질서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AC.483은 당시 사람들이 자기들의 집안과 일가 안에서 혼인했다고 설명합니다. 오늘날의 가족제도나 혼인관계를 그대로 이 시대에 투사하여 이해하면 매우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이 글의 초점은 혈연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당시의 퍼셉션이 부모에게서 자녀에게 타고난 성향이 전해지는 것처럼 이어졌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비슷한 내적 성향을 가진 집안과 일가 안에서 혼인이 이루어짐으로써 특정한 퍼셉션의 유와 종이 계속 보존되고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창5의 계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하나 더 줍니다. 셋, 에노스, 게난 등의 교회가 앞선 교회와 전혀 무관하게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앞선 교회로부터 어떤 내적 성향과 퍼셉션을 이어받으면서도 각각 고유한 상태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5의 ‘낳고’라는 표현 역시 단순한 생물학적 출산을 넘어, 한 교회로부터 다음 교회가 파생되고 그 교회의 고유한 퍼셉션이 형성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의 ‘태고교회에 속했던 이들은 천국에서도 함께 거주한다’는 말은 지상에서의 이러한 질서가 단순히 일시적인 사회 형태가 아니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들의 내적 성향과 퍼셉션이 서로 어울렸기 때문에 지상에서도 함께 살았고, 사후에도 서로 어울리는 이들이 하나의 천국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지상의 집안과 일가와 민족의 구별이 그대로 천국의 혈연집단으로 보존된다는 뜻이라기보다, 그들을 하나로 묶었던 내적 사랑과 퍼셉션의 유사성이 천국에서도 공동체를 이루게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AC.483은 창5를 단순한 장수 족보에서 ‘퍼셉션의 역사’로 바꾸어 읽게 합니다. 이름들은 서로 다른 교회들을, 연수는 그 교회들의 서로 다른 상태를 나타내며, 그 차이의 중심에는 퍼셉션이 있습니다. 하나의 태고교회로부터 서로 다른 퍼셉션을 가진 여러 교회가 생겨나고, 그 다양성이 다시 주님의 천적 나라의 무수한 다양성을 표상했습니다. 그러므로 창5의 계보는 단순히 ‘누가 누구를 낳았는가’를 기록한 목록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나의 교회 안에서 얼마나 다양하고 정교한 천적 질서를 이루셨는지를 보여 주는 기록이기도 합니다. (AC.483 해설)

 

 

 

창5:3, AC.484, ‘사랑이 여전히 신앙과 결합되어 있었던 셋 교회’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4‘셋’(Seth)이라 하는 교회가 태고교회와 매우 비슷했다는 것은, 사람이 자기의 모양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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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3, AC.482, ‘해(years)와 연수(numbers of years)는 교회의 상태를 의미’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2이 장에 나오는 ‘해’(years)와 ‘연수’(numbers of years)가 속뜻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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