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의 속뜻

 

 

1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2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3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4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17:1-4) And all the assemblage of the sons of Israel journeyed from the wilderness of Sin, after their journeys according to the mouth of Jehovah, and they encamped in Rephidim; and there was no water for the people to drink. And the people quarreled with Moses, and they said, Give ye us water and we will drink. And Moses said to them, Why quarrel ye with me? why do ye tempt Jehovah? And the people thirsted there for the waters; and the people murmured against Moses, and said, Wherefore is this, that thou hast made us come up out of Egypt, to make me die, and my sons, and my cattle, with thirst? And Moses cried unto Jehovah, saying, What shall I do to this people? a little more and they stone me (Exdo. 17:1-4).

 

 

오늘은 제가 37년 전인 198868일, 당시 삼성그룹 공채 29기에 합격, 아침에 서울 소공동 삼성물산 앞 주차장에 모여 수십 대 버스에 나눠타고, 용인 자연농원 내 삼성종합연수원으로 들어가던 날입니다. 거의 4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그날의 기억이 마치 영상 보듯 생생한데요, 요단을 건너기 전, 지난 40년 광야 세월을 회상하며 광야에서 새롭게 태어난 이스라엘에게 거듭 여호와의 말씀을 신명(申命)하는 모세의 심경을 조금 알듯도 합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개인적으로는 지난 37년간의 저의 지난날을 조금 회상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신 광야(the wilderness of Sin)를 떠난다는 것은 두 번째 시험인 선과 관련된 시험이 끝났다는 것이며,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가까이 가는 과정, 즉 거듭나는 과정은 이렇게 하나의 시험이 끝나면 다시 다른 시험이 시작됩니다. 보통은 한번은 선(good)에 관한, 한번은 진리(truth)에 관한 시험이 옵니다.

 

※ 진리 안에 있다 보면 그 진리와 관련된 선이 필요해져서이고요, 선을 행하다 보면 이번엔 관련된 진리가 필요해져서입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보완, 공급,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영적 성장입니다.

 

여호와의 명령대로(according to the mouth of Jehovah)라는 말씀은 이러한 일들이 주님의 섭리(Divine Providence)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생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섭리하시는 대로 따라간다는 것이지요. 섭리는 진리와는 조금 다릅니다. 물론 하나님의 섭리는 기본적으로는 진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만, 그러나 진리가 삶의 아주 미세한 국면을 좌우하는 것이라면, 섭리는 인간의 구원 전체를 바라보시는 역사입니다. 주님의 섭리는 영원부터 영원까지를 내다보시는 주님의 통찰, 예지를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인간은 진리는 이해할 수 있어도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그 대강의 흐름과 원칙 정도만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섭리로 이루어지는 일은 항상 앞으로만 가지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한발 물러서기도 하고요, 또 가까운 길을 두고 멀리 돌아가기도 합니다. 여기 지금 가나안까지 해안을 따라 일주일이나 열흘 정도로 질러갈 수 있는 지름길이 있음에도 불구, 주님은 그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40년 광야 길로 돌아가게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17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18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대열을 지어 나올 때에 (13:17, 18)

 

주님은 그렇게 각 사람의 성품이나 영적인 특성들을 모두 내다보십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사람의 인생 전체와 심지어는 조상부터 후손까지를 모두 내다보시고 섭리하시는지도 모릅니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저도 주님의 섭리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라는 책에서는 섭리의 원칙에 대해서는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시면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짐작하실 수 있습니다.

 

※ 보통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하다면 이 정도의 가이드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어른들처럼 무슨 점이나 사주(四柱) 같은 거 없이 오직 부모의 인도만으로도 행복해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저런 걸 찾는 자는 안전하지 않습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 ‘하나님의 섭리’는 스베덴보리 저, ‘Angelic Wisdom about Divine Providence’(1764, 라틴)를 말하며, 이는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Angelic Wisdom concerning Divine Love and Wisdom, 1763, 라틴)의 속편입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은 인간의 삶과 모든 피조물을 어떻게 살피시는가, 어떻게 감독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섭리는 이렇게 가까운 길을 두고 먼 길을 돌아가게도 하시는데요, 그것은 우리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때로는 극심한 고통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섭리인 것은 분명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주님의 섭리 따라가는 걸 1절 말씀에서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라고 한 것입니다.

 

신 광야를 떠난 이스라엘은 ‘르비딤’(Rephidim)이라는 곳에 장막을 쳤습니다. 르비딤이라는 곳 역시 광야에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르비딤도 또 하나의 시험이겠구나 짐작할 수 있는데요, 왜냐하면 광야는 시험(temptation)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신 광야에서의 시험이 선에 관한 시험이었다면, 이번 시험은 진리에 관한 시험입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에게 마실 물이 없었다고 했기 때문이며, 물의 속뜻은 진리이기 때입니다.

 

그런데 말씀에는 이스라엘이 거기서 장막을 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장막을 친다는 것은 시험을 대비, 각 사람의 내면에 있는 선과 진리를 주님이 질서 있게 배치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전쟁을 앞두고 군대가 진을 치는데, 군사들이나 병기를 일정한 모양으로 배치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왜 선과 진리를 자연스럽게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질서에 맞춰 서로 유기적으로 묶으실까요? 그 이유는, 그래야만 시험 중에 지옥으로부터 오는 악과 거짓들을 막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축구 같은 운동경기를 할 때도 선수 각각의 포지션이 있고, 얼핏 보면 서로 따로 떨어져 아무렇게나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아도 사실은 마치 어떤 보이지 않는 줄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전략에 따라 매우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마 상대방의 공격에 수시로 방어선이 무너질 것입니다. 그것처럼 주님도 우리 안에 있는 선과 진리를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하셔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어디를 가든지 장막을 쳤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 우리가 시험 중에 힘들어 비록 불평과 불만, 원망을 하더라도 주님 주신 어떤 선 안에서, 어떤 울타리 안에서 한다면 말입니다. 안 그러면 주님은 우리 안에 장막을 치실 수 없으시고, 그러면 우리는 내면에 준비된 뭐가 없어 굉장히 힘든 시간들을 보내게 됩니다. 그래서 평소 싸울 수 있는 무기, 곧 말씀 생활을 많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2절입니다.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이스라엘이 모세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 것은 주님에게 진리를 구하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백성이 모세와 다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일상생활에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위해 어떤 일을 할 때, 그것이 오히려 상대를 불편하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진리가 상대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때 우리는 자기의 진리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하는데요, 회의를 느끼는 것이죠.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약간 화가 나기도 합니다. 이렇게 자기가 믿었던 진리에 대해 회의를 느끼거나 갈등하는 것이 모세와 다투는 것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시험이 깊어질수록 진리에 대한 갈등이나 회의는 점점 더 커집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비로소 냉정을 되찾고, 자신의 행동을 돌아봅니다. 그때 우리는 아! 이 행동이 진리와 거리가 먼 것이었구나! 깨닫게 되지요. 그때 우리는 자신에게 진리가 없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 아마 스베덴보리를 통한 주님의 계시를 이웃이나 친지, 지인에게 전할 때 경험하는 걸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경우, 거의 예외 없이 방금 말씀하신 저런 단계를 밟게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행함 없이 전할 경우, 더욱 그렇지요.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는 진리에 대한 원칙론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으로는 삶의 구체적인 상황, 즉 인간관계라든지, 그 밖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때 우리는 아, 나는 진리에 대해 사실은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곧 주님에게 진리를 구하게 되지요. 이 일련의 과정이 이스라엘이 물이 부족하다고 모세에게 아우성을 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일이 왜 생길까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신앙인들이 본격적으로 이웃사랑의 삶을 살기 시작할 때, 내면에서 선에 대한 애정이 점점 커집니다. 그런데 선에 대한 애정이 커지면 그만큼 다시 진리를 원하게 됩니다. 마치 남자가 장성하면 이성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선이 자기 짝이 될 진리를 그리워하는 것인데요, 그때 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리의 부족을 느낍니다. 그때의 시험이 바로 진리 시험입니다. 이와 같이 이웃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진리가 충족되지 않을 때 이런 영적 시험이 오는데, 그것이 바로 이 르비딤에서의 시험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이 말씀은 시험 가운데서 진리에 대해 불평을 하더라도 도를 넘어서면, 곧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본질적으로 주님이시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진리에 대해 회의를 느끼거나 불평하더라도 선을 넘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성에 대해 불경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물론 시험이 깊어지면 자기도 모르게 자포자기하는 마음도 들고요, 내가 이 진리를 왜 알았을까? 차라리 몰랐더라면... 하고 후회하기도 합니다. 심하게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더라도 선을 넘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모세는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라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3절입니다.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백성들이 목이 말라서 물을 찾게 되는 것은 진리에 대한 갈증이 점점 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만큼 시험의 고통이 심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는 중에 백성들이 모세에게 우리를 왜 애굽에서 인도해 냈느냐고 따지듯이 말합니다. 그 말은 차라리 우리가 애굽에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진리 가운데로 들어온 것을 후회하는 것입니다. 애굽에 있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진리를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자기 욕심대로 사는 것입니다. 세속적 욕심, 돈과 소유, 명예와 권력 등에 대한 욕심 같은 그런 욕망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자유로운 삶이 아니며, 그 실체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사는 삶입니다. 애굽에서 산다는 것이 이런 건데도 불구, 그러나 시험이 깊어지면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차라리 내가 진리를 몰랐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영적 싸움, 영적 전쟁은 치열합니다. 그리고 또 시험이 깊어지면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러다가 내 안에 그나마 있는 선하고 진실한 것들이 모두 사라지는 건 아닐까? 말이지요. 선하고 진실한 것들이 있어야 우리는 최소한의 인간 모습으로 살 수 있는데, 그마저 없어지면 속으로는 짐승과 같은 모습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것이 두려워지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to make me die, and my sons, and my cattle, with thirst?)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우리(me), 자녀(my sons), 가축(my cattle)’은 우리 내면에 있는 영적 자산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와 자녀와 가축이 죽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영적 자산인 선하고 진실한 것들이 죽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이 많아지면 그에 따라 새로운 진리가 계속 주님으로부터 공급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공급되지 않으면 다른 영적 자산들, 곧 선이라든가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든가 그런 것들마저 위축됩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이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라고 모세를 원망하는 것입니다.

 

※ 시험이 너무 극심하면 주님의 진리마저 즐겁지 않은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시험을 대비, 평소에 기도하게 됩니다. 주님, 비록 시험이 저를 영적으로 성장케 하는 순기능이 있다 하더라도 정작 시험 중에는 무척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부디 원하옵기는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살짝살짝 주님의 진리를 즐거워할 수 있도록 제 숨구멍을 열어주시옵소서...

 

4절, 오늘 본문 끝 절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모세는 진리이신 주님의 표상입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는다는 것은 진리가 주님과 인간 사이를 중재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선 자체이신 주님을 직접 만날 수는 없고, 오직 진리를 통해서만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과 우리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언제나 진리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중재(intercession)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인간을 대신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화해시켜 화목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 예루살렘교회를 사모하는 새 교회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새 교회에서 가르치는 중재는 다음과 같은데요,

 

주님한테서 나오는 신적 진리(the Divine truth)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중재합니다(continually intercedes). 그것은 신적 사랑(Divine love)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인데요, 세상에 계실 때 주님은 신적 진리이셨습니다(was the Divine truth)만, 그러나 부활을 통해 영화하신(was glorified) 후부터는 주님은 신적 선이십니다(is the Divine good). 말씀에 나오는 ‘아버지’(the Father)는 속뜻으로 신적 선이십니다. 그리고 ‘아들’(the Son)은 신적 진리시지요. 신적 진리는 신적 선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여기에 끊임없는 중재(continual intercession)가 있는데, 이걸 우리 식대로 표현, 아들이 인간을 위해 아버지께 간구하신다 하는 겁니다. 이런 설명은 우리한테 이해가 되나 저런 앞의 설명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천국의 비밀8573, 출17: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A secret that lies still more interiorly hidden in the word “intercession,” shall also be told. The Divine truth which proceeds from the Lord continually intercedes in the manner described, because it proceeds from the Divine love. When the Lord was in the world He was the Divine truth; but since He was glorified, which was effected when He rose again, He is the Divine good (n. 7499). It is the Divine good which is meant in the Word in the internal sense by “the Father,” and the Divine truth which is meant by “the Son” (n. 2803, 3704, 7499). And as in the Divine truth, which proceeds from the Divine good, there is continual intercession, therefore it is said that the Son entreats the Father, and intercedes for man. This latter idea could be apprehended by man, but the former with difficulty. (AC.8573)

 

※ 저 하늘의 해처럼, 그러니까 해가 변함없이 지상에 열과 빛을 말없이 공급하는 것처럼 주님의 중재는 그런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처럼,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처럼,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처럼, 부모를 사랑하는 자녀처럼, 자기 이웃과 친구를 사랑하는, 즉 이 모든,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는 모든 체어리티의 사람들처럼 은은히 말없이 조용히 끝까지 사랑과 자비를 거두지 않는, 이런 게 중재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라는 말은 시험이 좀 더 깊어지면 신앙인들이 진리를 모독하는 상황에까지 갈지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진리를 모독한다는 것은 시험 가운데서 자포자기의 상태가 되는 것이고, 그러므로 진리에 따라 살고자 하는 의지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알면서도 죄를 짓습니다. 그럴 때 진리를 모독하게 되는데요, 모독이란 알면서 범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요9:41)

 

주님은 지금 그것을 염려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모세는 여호와께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모세의 말 속에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 그리고 관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중재하는 진리 안에 들어 있는 인간에 대한 주님의 자비와 연민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리가 부족하다는 것은 선을 행하기는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입니다. 그때 지옥은 진리가 충족되는 것을 방해하고 공격하는데 주님은 그 시험을 오히려 이용하세요. 그래서 시험 가운데서 선이나 진리의 부족을 절실히 깨닫게 하시고요, 또 그것을 간절히 원하게 하십니다. 방해가 크면 클수록 간절함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시험을 극복할 때, 우리 안에 선과 진리는 더 풍부해지며, 한 차원 더 높아집니다. 주님은 그런 식으로 우리를 한 단계 한 단계 주님 자신에게로 끌어 올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시험이라는 것은 그냥 단순한 시련이 아니고,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이 올 때는 그것을 나의 부족함을 깨닫고 채워나가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사실 오늘 말씀처럼 그렇게 극심한 시험을 경험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죽을 것 같은 고비, 앞이 안 보이는 시기를 계속 걸어가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우리의 모든 시험 가운데 주님의 목적이 매번 이루어지시기를 바랍니다.

 

※ 이 사실들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는, 주님은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다. 또 하나는, 모든 시험은 주님이 허락하시는 것이며, 그걸 통해 나로 하여금 거듭남을 향해 나아가게 하시는 도구일 뿐이다!

 

 

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 우렛소리의 은밀한 곳에서 네게 응답하며 므리바 물가에서 너를 시험하였도다 (81:7)

 

아멘

 

원본

2016-07-03(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5-06-08(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6-08(D1)-주일예배(2601, 출17,1-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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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사십 일 광야 시험 (1)

 

 

1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눅4:1-4)

 

 

모든 시험은 사람의 사랑에 대한 공격이며, 시험은 그 사랑과 같은 정도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사랑이 공격받지 않으면 시험은 없다. 어떤 사람의 사랑을 파괴하는 것은 그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곧 생명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생명은 전 인류에 대한 사랑이었다. 주님의 그 생명에 대해 시험이 허용되었고, 그것은 주님이 아주 어릴 때부터 세상에서의 마지막 시간에까지 계속되었다. (AC.1690)

 

※ AC(Arcana Coelestia, 천국의 비밀) 1690번 글에 대한 Clowes 영역본은 아래와 같습니다.

 

All temptation is an assault upon the love in which the man is, and the temptation is in the same degree as is the love. If the love is not assaulted, there is no temptation. To destroy anyone’s love is to destroy his very life; for the love is the life. The Lord’s life was love toward the whole human race, and was indeed so great, and of such a quality, as to be nothing but pure love. Against this his life, continual temptations were admitted, as before said, from his earliest childhood to his last hour in the world. (n. 1690:3).

 

이는 창세기 14장 10절,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그들이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에 관한 주석 중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예배 인도를 담임이 하니까 마치 담임이 모든 일을 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성가대의 찬양이 있고, 기도해 주시는 목사님이 계시고, 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하시는 우리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역할을 할 때, 우리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 경건한 교회,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로 성장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진리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선이 있는 진리이어야 합니다. 우리 각자가 선이 있는 진리로서 묵묵히 헌신할 때, 그 진리는 이웃들의 마음에 조용히 젖어 들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로 성장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말씀을 시작하겠습니다.

 

창세기 12장 1, 2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12:1-2)

 

사람들 대부분은 이 말씀이 아브라함이 아브람 시절, 여호와를 처음 만나 하란을 떠나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속뜻으로 볼 때 이 말씀은, 주님께서 아주 어리실 때 당신 안에 계신 여호와를 처음 만나는 장면을 기술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고 주님이신 것이지요.

 

※ 말씀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은 주님의 표상입니다. 심지어 악인도 말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자기 인생을 살다 갔지만, 사실은 마치 무대 위 배우들처럼 주님을 연기한 것입니다.

 

주님도 처음에는 당신 자신이 보통의 어린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점점 지각이 생기면서 당신 안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와로부터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또 어떤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여기서는 아브라함의 이름을 ‘아브람’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은 거룩하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영어로 알파벳 ‘H’자가 그런 뜻이라고 합니다.

 

※ AC 1416번 글 두 번째 항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Concerning Abraham it is said: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창17:5) Thy name shall not any more be called Abram, and thy name shall be Abraham, for the father of a multitude of nations have I given thee (Gen. 17:5).

 

The letter h in “Abraham” was taken from the name Jehovah, on account of his representation of Jehovah or the Lord. In like manner it is said of Sarai:

 

15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16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창17:15-16) Thou shalt not call her name Sarai, but Sarah shall her name be. And I will bless her, and also give thee a son of her; thus I will bless her, and she shall become nations; kings of peoples shall be of her (Gen. 17:15–16);

 

where “nations” denote the celestial things of love, and “kings of peoples”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thence derived, which belong to the Lord alone.

 

이는 창세기 12장 2절,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에 관한 주석 중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에 나오는 내용으로, ‘아브라함’(Abraham)의 ‘h’는 아브라함이 여호와 혹은 주님을 표상하기 때문에 그 이름 여호와에서 취한 것이라고 합니다. //

 

반대로 ‘아브람’은 거룩하게 되시기 전의 주님을 나타냅니다. 주님이 거룩하지 않다고 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처음 세상에 오셨을 때, 그러니까 아주 어린 시절, 주님의 인성 가운데는 마리아로부터 받은 유전적 악이 그대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세겜으로 옮길 때 ‘그 땅에 가나안 사람이 거주하였다’라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에서 ‘가나안 사람’은 바로 주님 안에 있는, 마리아로부터 받은 유전적 악인 것입니다.

 

주님 안에 악이 있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 악은 주님 자신이 저지른 악이 아니며, 모두가 마리아로부터 유전된 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왜 당신 안에 악이 있도록 허용하셨을까요? 그 첫 번째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의 몸을 입으실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악이 있어야 시험을 불러들일 수 있고요, 그리고 그 시험을 통해 지옥을 정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악이 없으면 시험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 안에 악을 허용하시고, 그것을 통해 시험을 불러들이셨습니다. 주님께서 당신 안에 악을 허용하신 세 번째 이유는, 주님은 당신이 시험을 당하고 거룩하게 되신 것처럼, 인간도 그렇게 거듭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스스로 거듭남의 모범이 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주님의 그런 사랑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면서 말씀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 주님은 천국보다 크시고 지옥보다 크셔서 신성 그 자체로 직접 오실 수 없으십니다.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나면 천국도 지옥도 그냥 소멸해 버리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주님은 천국이든 지옥이든 또는 이 세상이든 지으신 이 피조세계에 임하실 때는 피조물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일종의 보호장치를 사전에 마련하십니다. 그것이 예를 들면, 삼층천 천사들에게조차 투명한 얇은 겉옷을 입히신 것이고요, 인성을 입으시고 지옥을 찾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지옥, 즉 지옥에 있는 모든 비참한 영들조차 여전히 사랑하시기에 주님의 방문으로 그들이 소멸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1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셨다’라고 합니다. 요단강은 가나안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강입니다. 그래서 요단강을 건너거나, 또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영적인 의미로는 신앙의 진리를 처음 받아들일 때를 의미합니다.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여야 우리는 교회에 속한 사람이 될 수 있고요, 또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은 신앙의 진리를 처음 받아들일 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때는 마치 아기가 걸음마를 배우기도 전의 상태와 같아서 진리를 배우기는 하는데, 아직 행함은 없는 상태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만 있고, 아직 선은 없는 상태입니다. 주님도 처음에는 그런 과정을 거치셨습니다. 그러다 점차 진리를 뜨겁게 사랑하게 되셨을 것입니다. 진리를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자기가 배운 진리를 삶을 통해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진리는 더 이상 지식적인 진리가 아니라, 그 바탕에 선이 있는 진리로 변하게 됩니다. 본문에 주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님도 어린 시절에는 당신 안에 성령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지각할 뿐 아니라 뜨겁게 사랑하면서 성령이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계속되는 말씀에서 주님은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셨다’고 합니다. 광야는 시험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광야로 가신 것은 주님에게 시험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성령에 이끌리셨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께서 성령 충만할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시험을 불러들이셨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역사, 즉 선이 있는 진리의 역사가 없으면 시험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주님도 예외가 아니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령 충만할 정도로 영적으로 성장하실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시험을 불러들이신 것입니다. 주님은 단 한 번의 시험도 실패하시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십 일 동안’이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시험이 처음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전체 기간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볼 때, ‘사십 일’은 주님이 아주 어릴 적부터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기까지의 모든 기간을 의미합니다.

 

※ 말씀에서 이 ‘40’이라는 숫자는 여러 번 나옵니다. 노아의 홍수 때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창7:4)라든지, 모세가 호렙산에서 보낸 기간인, ‘모세가 사십 일 사십 야를 산에 있으니라’(출24:18)라든지,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서 보낸 기간인,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출16:15), 그리고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온, ‘사십 일 동안 땅을 정탐하기를 마치고 돌아와’(민13:25) 등을 볼 때,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이 ‘사십’이라는 숫자는 ‘전체’, ‘모두’를 의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성경 앱을 열고, ‘사십’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하시면 어마어마하게 나오는 걸 보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40일간의 시험은 그 속뜻으로는 말씀에 기록된 것처럼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직후에 있었던 일이 아닙니다. 즉 선과 진리에 대한 지각이 생기면서부터 주님은 끊임없이 시험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영적 성장은 보통의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빨랐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대해 누가복음 2장 5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눅2:52)

 

주님이 아주 빠른 속도로 거룩하게 되시는 모습을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음 2절과 3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2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이 말씀에서 주님을 시험하는 ‘마귀’는 지옥 전체를 의미합니다.

 

※ 다음은 이와 관련, ‘천국과 지옥’ 544번 글입니다.

 

지금까지 세상에는 지옥을 관장하는 한 악마가 있으며, 그는 빛의 천사로 지음 받았으나 반역하여 그 일당과 함께 지옥에 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믿음이 퍼져있는 것은 사람들이 성경 말씀에 마귀, 사탄, 루시퍼라는 이름이 언급되어 있는 구절들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귀’와 ‘사탄’은 지옥을 의미한다. ‘마귀’는 악마라고 불리는, 가장 악한 사람들이 있는 뒤쪽 지옥이다. ‘사탄’은 악령이라고 불리는 덜 악한 사람들이 있는 앞쪽 지옥이다. ‘루시퍼’는 바벨 또는 바빌론에 속한 사람들로, 천국까지도 지배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혼자서 지옥 전체를 주관하는 악마는 없다는 것은 다음의 사실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지옥은 천국과 마찬가지로 모두 사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311–317항), 그리고 창조 이래 지금까지 지옥에 간 사람은 무수히 많으며, 그 모두가 다 이 세상 삶에서 신성을 적대한 정도만큼 악마라는 사실이다(311, 312항). //

 

그러니까 지옥 전체가 주님을 넘어뜨리기 위해 덤벼들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넘어뜨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님의 사랑, 즉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또 주님께서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셨다’고 했는데, 이 말씀은 음식을 드시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물론 주님께서 광야에서 음식을 드시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적 의미로 보면 그런 뜻이 아니고, 시험 가운데서 주님이 영적인 양식을 전혀 섭취하지 못하셨다는 뜻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영적 양식을 섭취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시험 중에 그런 경험을 합니다. 자신에게 진리와 선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주님의 보살핌이 없이 혼자 싸운다는 뜻입니다. 그때 지옥은 우리에게 있는 거짓과 악을 들춰내면서 계속 우리를 추궁합니다. ‘너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야’라고 하면서 우리를 절망 상태로 몰아넣습니다. 만약 그때 주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싸움을 이길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시험 중에 우리와 가장 가까이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그렇게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주님도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부르짖으시지 않았습니까!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27:46)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아무 것도 잡수시지 못한다는 것은 극한의 시험 속에서 여호와께서 당신을 버리시는 것 같이 느끼시는 것이고, 그래서 여호와로부터 진리와 선이 전혀 흘러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악을 끊고 선을 행하는 일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마음은 간절히 원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그런 어려움을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느끼시는 허기(虛飢)는 본질적으로는 선에 대한 갈증입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있습니다.

 

마귀가 주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은 진리를 의미하고, ‘’은 세상의 양식을 의미합니다. 본래 떡은 영적 양식인 선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반대로 쓰였습니다. 그렇다면 세상 양식은 어떤 것입니까? 음식이나 재물, 건강이나 명예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육신의 생명을 살찌울지는 몰라도 영을 살찌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유한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마귀는 돌을 떡이 되게 하라고 합니다. 썩어버릴 떡을 위해서 영원한 진리를 버리라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시험 중에 그런 유혹을 받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나 건강을 잃었을 때, 또는 어떤 욕망에 시달릴 때, 진리를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것이 모두 마귀의 시험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4절입니다.

 

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주님은 ‘기록된 바’라고 말씀하세요. 신명기 8장 3절에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8:3)

 

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이기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다른 것은 없습니다.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 안에는 반드시 선이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선이 있는 말씀을 소유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에게 있는 말씀 가운데 선이 깃들고 능력이 생깁니다. 주님은 그렇게 해서 첫 번째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서에는 주님께서 시험받으셨다는 기록이 별로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40일간 광야 시험과 겟세마네 동산의 시험, 그리고 십자가상에서의 마지막 시험, 그것이 거의 전부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조차도 당신의 시험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광야 40일간의 시험은 주님 생애에 잠깐 있었던 시험이 아닙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시작, 숨을 거두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지속되었던 모든 시험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시험은 인간의 시험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 시험의 강도는 인간에 대한 주님의 무한한 사랑에 비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험이 얼마나 지독하고 가혹한 것이었는지는 인간의 머리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 모든 시험을 묵묵히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계시는 동안의 모습으로도 주님이 얼마나 진실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마귀는 허기와 갈증을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주님을 시험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배고픔은 세상의 떡에 대한 갈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선에 대한 갈증이며 인간에 대한 끝없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귀에게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주님의 시험에 대한 것이지만 동시에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시험을 이기시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할 때 능력이 있습니다. 모든 새 교회 식구들과 또 이 진리 안에 있는 모든 형제자매께서는 이 말씀 가운데서 크고 작은 시험들을 이겨내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53:7)

 

아멘

 

원본

2017-05-28(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20(D2)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20. 2023-03-20(D2)-매일예배(2437, 눅4,1-4), '주님의 사십 일 광야 시험(1)'.pdf
0.47MB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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