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5:13, 14)

 

AC.509

 

여기서 단지 주목해야 할 것은, 모든 것들이 교회의 상태와의 관계에 따라 규정된다는 점입니다. It is here only to be remarked, that all things are determined by their relation to the state of the church.

 

 

해설

 

이 글은 분량은 짧지만, 스베덴보리의 성경 해석 전체를 떠받치는 아주 중요한 원리를 담고 있어요. 그는 어떤 사물이나 사건, 표현도 그 자체로 의미가 고정되어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언제나 교회의 상태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따라 의미가 정해진다고 봅니다. 이 점을 놓치면, 성경은 쉽게 평면적인 기록으로 보이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의 상태란 제도나 조직의 외형을 뜻하지 않아요. 그 안에 살아 있는 퍼셉션이 어떤 성격을 띠고 있는지를 말합니다. 같은 말씀이 주어져도, 교회의 퍼셉션이 살아 있고 분명할 때와, 퍼셉션이 일반화되었을 때는 그 말씀이 작동하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언제나 표현 자체보다 상태와의 관계를 먼저 보라고 말하는 거예요.

 

이 원리는 창세기 5장을 읽을 때 특히 중요합니다. 이름들, 날과 해의 숫자들, 자녀들, 그리고 죽음에 대한 표현까지도, 교회의 상태와 연결되지 않으면 그 의미가 잘 드러나지 않아요. 상태를 보지 않고 읽으면 그저 족보처럼 보이지만, 상태를 중심에 두고 읽으면 교회의 생명이 어떻게 이동했는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말해 보자면, 성경에 나오는 어떤 표현도 단독으로 선이나 진리, 생명이나 소멸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언제나 교회의 상태에 따라 달라져요. 같은 ‘’이라는 말도 어떤 상태에서는 새 생명의 시작을 가리키고, 다른 상태에서는 쇠퇴나 끝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의미는 표현 안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태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원리는 아주 실제적인 기준이 됩니다. 같은 본문을 설교하더라도, 회중의 상태가 다르면 강조점과 적용이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그것은 설교자가 임의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상태에 따라 다르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성경 해석의 예외가 아니라, 오히려 정상적인 방식으로 봅니다.

 

개인의 신앙에서도 이 원리는 그대로 적용돼요. 같은 말씀을 읽어도 어떤 날에는 위로로 다가오고, 어떤 날에는 마음을 찌르는 경고로 들립니다. 말씀의 내용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말씀을 받는 사람의 상태가 달라졌기 때문이에요. 모든 것은 상태와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갖습니다.

 

그래서 AC.509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표현을 붙잡고 씨름하기보다, 지금 교회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그리고 내가 어떤 상태로 이 말씀을 듣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보라는 초대입니다. 이 관점을 붙들 때, 성경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서 상태에 따라 말하는 말씀이 됩니다.

 

 

 

AC.508, 창5:13-14, ‘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십 세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Kenan lived after he begat Mahalalel eight hundred and forty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K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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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Kenan lived after he begat Mahalalel eight hundred and forty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Kenan were nine hundred and ten years, and he died. (5:13, 14)

 

AC.508

 

여기서도 ‘날’(days)과 ‘해’(years)의 숫자들은 앞에서와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또한 ‘자녀들’(sons and daughters)은 교회의 구성원들이 퍼셉션하던 진리와 선들을 의미하는데, 다만 더 일반적인 방식으로 그러합니다. 그가 ‘죽었더라’(died)는 말 역시 이와 같이 그러한 퍼셉션의 상태가 더 이상 지속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The “days” and numbers of “years” have the same signification here as before. “Sons and daughters” here also signify truths and goods, whereof the members of the church had a perception, but in a more general manner. That he “died” signifies in like manner the cessation of such a state of perception.

 

 

해설

 

이 글은 AC.507에서 제시된 변화의 흐름을 한 단계 더 분명하게 확인해 줍니다. ‘(days)과 ‘(years)의 숫자들이 앞에서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다시 말하는 것은, ‘게난(Kenan) 이후의 교회 상태에서도 시간의 개념이 아니라 상태의 개념으로 읽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태고교회의 전개는 언제나 상태의 변화로 이해되어야 하며, 연대기적 숫자 계산만으로는 본질인 각 교회의 상태 변화, 곧 퍼셉션의 성격과 그 변화를 읽어낼 수 없습니다.

 

자녀들’, 곧 ‘아들들과 딸들(sons and daughters)이 여기서도 진리와 선들을 뜻한다는 점은 동일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하나 덧붙여집니다. 그것은 이 진리와 선들이 이제는 더 일반적인 방식으로 퍼셉션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앞선 교회들에서는 진리와 선이 보다 개별적이고 분명하게 인식되었지만, 이 단계에 이르면 그러한 인식은 점차 포괄적이고 덜 세밀한 형태를 띠게 됩니다.

 

이 일반화는 퍼셉션의 상실이 아니라, 퍼셉션의 성격 변화입니다. 여전히 교회 안에는 진리와 선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즉각적이거나 생생하지 않습니다. 대신 더 많은 매개와 해석을 필요로 하며, 개별 상황에 대한 분별보다는 전체적인 틀 속에서 이해되는 경향이 강해집니다. 이 변화는 게난의 교회에서 시작되어 이후의 교회들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 위 볼드체 문장은 이 해설 끝을 참조하세요.

 

그가 ‘죽었다’는 표현은 이러한 상태 변화의 종결을 가리킵니다. 이는 개인의 생물학적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 상태를 특징짓던 퍼셉션 방식이 더 이상 유지되지 않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의 퍼셉션 양식이 역할을 마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간 것입니다.

 

이 글은 태고교회의 쇠퇴가 단계적이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퍼셉션은 먼저 분명함을 잃고 일반화되며, 그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의 상태로서 끝에 이릅니다. AC.508은 이 과정을 간결하게 요약하면서, 독자가 이미 익숙해진 해석 틀을 계속 유지하도록 돕습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신앙의 변화가 언제나 급격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교회 안에 여전히 진리와 선이 말해지고, 그것들이 일정한 쓰임새를 지니고 있을지라도, 퍼셉션의 성격은 이미 달라졌을 수 있습니다. 이 미묘한 차이를 분별하지 못하면, 상태의 변화를 단순한 지속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또한 이 글은 교회가 진리와 선을 어떻게 인식하는지가 그 교회의 생명 상태를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임을 보여 줍니다. 같은 진리와 선이라도, 분명하게 퍼셉션되는지, 아니면 일반적으로만 인식되는지에 따라 교회의 상태는 크게 달라집니다. AC.508은 이 차이를 짧은 문장 안에 분명히 담아냅니다.

 

개인의 신앙에서도 이 흐름은 그대로 나타납니다. 어떤 시기에는 진리와 선이 매우 구체적으로 마음에 와닿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것들이 점차 원칙이나 개념의 수준으로 인식될 수 있습니다. 이때 신앙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지만, 퍼셉션의 방식은 이미 바뀌어 있습니다. AC.508은 이러한 변화를 자연스러운 상태의 이동으로 이해하도록 이끕니다.

 

결국 이 글은 태고교회의 흐름 속에서 하나의 퍼셉션 상태가 어떻게 일반화되고, 그 상태가 마침내 끝에 이르는지를 간결하게 보여 줍니다. 이 반복을 통해 독자는 창세기 5장을 읽는 눈을 더욱 안정적으로 갖추게 되며, 이후에 이어질 더 외적인 교회 상태들을 준비된 마음으로 맞이하게 됩니다.

 

 

※ 아래는 위 ‘대신 더 많은 매개와 해석을 필요로 하며, 개별 상황에 대한 분별보다는 전체적인 틀 속에서 이해되는 경향이 강해집니다’에 대한 설명입니다. 더 깊은 이해를 위해 제공합니다.

 

 

퍼셉션이 분명하던 상태에서 일반화된 상태로 옮겨갈 때, 가장 먼저 달라지는 것은 인식의 직접성입니다. 태고교회의 초기 상태에서는 선과 진리가 거의 설명 없이 즉각적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어떤 상황이 주어지면, 그 안에서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사랑에 속하는지가 자연스럽게 느껴졌어요. 이때의 퍼셉션은 판단 이전에 이미 방향을 알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퍼셉션이 일반화되기 시작하면 이러한 직접성이 점차 약해집니다. 이제는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판단하기 위해 생각하고, 기억해 둔 기준을 떠올리고, 말씀이나 교훈을 적용하며,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해져요. 이것이 위 해설에서 말한 ‘더 많은 매개와 해석을 필요로 한다’는 뜻입니다. 진리가 바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말과 개념, 규칙과 교리 같은 것들이 판단의 중간 단계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 변화는 곧 인식의 초점이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퍼셉션이 분명할 때는 각 상황이 고유하게 보였습니다. 이 사람에게 지금 필요한 선이 무엇인지, 이 선택에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이 무엇인지가 상황마다 다르게 분별되었어요. 같은 원칙이라도 적용 방식은 매번 달랐고, 그 차이가 자연스럽게 인식되었습니다. 마치 다음 주님에 대한 말씀처럼 말입니다.

 

24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25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2:24, 25)

 

하지만 퍼셉션이 일반화되면, 개별 상황을 세밀하게 분별하기보다 이미 형성된 이해의 틀 안에서 상황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때 판단은 ‘이건 원칙적으로 옳다’, ‘이건 성경적으로 맞다’, ‘이건 교리와 어긋난다’와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쉬워요. 이런 판단이 잘못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 공동체와 질서를 위해 필요합니다. 다만 이 방식은 상황 고유의 미묘함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경향을 지니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전체적인 틀 속에서 이해된다’는 표현은 바로 이 점을 가리킵니다. 진리와 선이 더 이상 살아 있는 분별로 즉각 인식되기보다, 이미 갖추어진 틀 안에서 해석되고 적용되는 경향이 강해진다는 뜻이에요. 이는 퍼셉션이 사라졌다는 말이 아니라, 퍼셉션의 작동 방식이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설명은 매우 현실적입니다. 신앙의 초기에는 어떤 분들이 ‘이건 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이건 마음이 불편해요’라고 말합니다. 설명은 잘 못 하지만 방향은 분명한 경우지요. 시간이 지나면 표현은 달라집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원칙상으로는’, ‘교리적으로는’이라는 말이 더 많이 등장합니다. 이는 신앙이 약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퍼셉션이 일반화된 상태로 옮겨갔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변화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문제는 이 변화를 자각하지 못한 채, 틀과 원칙 자체를 생명으로 착각할 때 생깁니다. 틀은 필요하지만, 틀만 남고 살아 있는 분별이 사라지면 퍼셉션은 점점 더 멀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지점을 조심스럽게 짚어 주고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퍼셉션이 일반화된 상태에서는 선과 진리를 인식하는 방식이 직접적 분별에서 매개와 해석을 거치는 방식으로 바뀌고, 그 결과 개별 상황의 고유함보다는 이미 형성된 전체적인 이해 틀 안에서 판단하는 경향이 강해집니다. 이 설명은 태고교회의 변화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신앙 상태를 비추는 매우 실제적인 통찰이기도 합니다.

 

 

 

AC.509, 창5:13-14, ‘모든 것은 언제나 교회의 상태에 따라’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13, 14) AC.509 여기서 단지 주목해야 할 것은, 모든 것들이 교회의 상태와의 관계에 따라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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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7, 창5:12, ‘게난’, 퍼셉션의 성격이 달라지기 시작한 상태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창5:12) AC.507 ‘게난’(Kenan)이라 하는 교회는, 앞의 세 더 완전한 교회들 가운데에 그렇게 많이 포함시킬 수는 없는데, 이는 이전의 교회들에서는 분명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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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5:12)

 

AC.507

 

‘게난’(Kenan)이라 하는 교회는, 앞의 세 더 완전한 교회들 가운데에 그렇게 많이 포함시킬 수는 없는데, 이는 이전의 교회들에서는 분명하던 퍼셉션이 이제는 일반적인 것이 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열매나 씨앗의 알맹이에 비해 처음의 부드러운 막질들이 차지하는 위치와 같은데, 이러한 상태는 여기서는 직접적으로 묘사되지는 않지만, 뒤따르는 내용, 곧 ‘에녹’(Enoch)과 ‘노아’(Noah)라 하는 교회들에 대한 설명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The church called “Kenan” is not to be so much reckoned among those three more perfect ones, inasmuch as perception, which in the former churches had been distinct, began now to become general, comparatively as are the first and softer membranes relatively to the kernel of fruits or seeds; which state is not indeed described, but still is apparent from what follows, as from the description of the churches called “Enoch” and “Noah.”

 

 

해설

 

이 글은 태고교회의 내부 구분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짚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게난의 교회를 앞선 세 교회와 동일한 수준으로 취급하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해서 태고교회의 흐름에서 배제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게난의 교회를 태고교회 내부에 남아 있으되, 이미 ‘퍼셉션의 성격이 달라지기 시작한 상태’로 봅니다.

 

앞선 세 교회에서는 퍼셉션이 분명했습니다. 선과 진리는 거의 즉각적으로 인식되었고, 그 인식은 삶의 방향과 선택을 자연스럽게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게난이라는 교회에 이르러서는 퍼셉션이 더 이상 그렇게 분명하지 않고, 점차 일반적인 형태를 띠기 시작합니다. 이는 퍼셉션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작동 방식이 바뀌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다시 열매와 씨앗의 비유를 사용합니다. 앞선 세 교회는 알맹이에 가까웠다면, 게난의 교회는 알맹이를 둘러싼 첫 번째이자 비교적 부드러운 막질에 해당합니다. 이 막질은 알맹이보다 덜 본질적이지만, 여전히 생명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알맹이를 보호하고, 바깥으로의 전개를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상태가 여기서는 자세히 설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일부러 게난의 교회를 길게 묘사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독자가 뒤에 나올 에녹과 노아에 대한 설명을 통해, 게난의 상태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는지를 스스로 파악하도록 합니다. 이는 성경 해석이 항상 즉각적인 설명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앞뒤 맥락 속에서 점차 분명해지는 과정’임을 보여 줍니다.

 

이 글은 태고교회의 쇠퇴가 단번에 일어난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퍼셉션은 먼저 분명함을 잃고 일반화되며, 그 다음 단계에서야 보다 뚜렷한 변화가 드러납니다. 게난의 교회는 바로 그 초기 단계에 해당합니다. 아직은 알맹이와의 연결이 유지되고 있지만, 중심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신앙의 변화를 섬세하게 분별하도록 요구합니다. 신앙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고, 교회의 형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해서, 그 상태가 이전과 동일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퍼셉션이 분명한 상태에서 일반적인 상태로 옮겨가는 변화는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글은 교회의 평가 기준을 다시 한번 조정합니다. 게난의 교회는 더 이상 ‘가장 완전한 교회’로 불리지는 않지만, 여전히 태고교회의 흐름 안에 있으며, 나름의 쓰임새를 지닙니다. 모든 교회 상태가 동일한 역할을 수행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상태는 중심이 되고, 어떤 상태는 보호와 연결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도 이 글은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어떤 시기에는 신앙의 퍼셉션이 매우 분명하여 거의 망설임 없이 선을 선택하지만, 어떤 시기에는 그 분명함이 줄어들고 더 일반적인 기준과 생각에 의존하게 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 변화가 곧바로 신앙의 상실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다만 상태가 달라졌을 뿐입니다.

 

결국 AC.507은 태고교회 내부에서 일어난 미세한 변화의 시작을 가리킵니다. 게난의 교회는 더 이상 알맹이에 해당하지는 않지만, 알맹이를 둘러싼 첫 막질로서 여전히 생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연결이 유지되는 한, 이후에 나타날 더 외적인 교회 상태들도 그 근원을 잃지 않게 됩니다.

 

 

 

AC.508, 창5:13-14, ‘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십 세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Kenan lived after he begat Mahalalel eight hundred and forty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K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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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6, 창5:12,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And Kenan lived seventy years, and begat Mahalalel. (창5:12) AC.506 ‘게난’(Kenan)은 네 번째 교회를 의미하고, ‘마할랄렐’(Mahalalel)은 다섯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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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And Kenan lived seventy years, and begat Mahalalel. (5:12)

 

AC.506

 

‘게난’(Kenan)은 네 번째 교회를 의미하고, ‘마할랄렐’(Mahalalel)은 다섯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By “Kenan” is signified a fourth church, and by “Mahalalel” a fifth.

 

 

해설

 

이 글은 매우 짧지만, 태고교회의 전개 방식에 대해 중요한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게난(Kenan)과 ‘마할랄렐(Mahalalel)을 개인 이름으로 취급하지 않고, 앞선 경우들과 동일하게 각각 하나의 교회 상태로 이해합니다. 이는 창세기 5장의 이름들이 일관되게 교회들의 연속을 가리킨다는 해석 원리가 여기서도 흔들림 없이 적용된다는 뜻입니다.

 

게난으로 상징되는 네 번째 교회는, 에노스 이후에 나타난 상태를 대표합니다. 앞선 글들에서 이미 밝혀졌듯이, 태고교회의 흐름은 퍼셉션이 점차 덜 분명해지고 더 일반화되는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게난의 교회 역시 이 흐름 안에 있으며, 여전히 태고교회의 범주에 속하지만, 퍼셉션의 즉각성과 선명함은 앞선 교회들보다 더 약화된 상태에 해당합니다.

 

마할랄렐로 상징되는 다섯 번째 교회는 그 다음 단계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더 이상의 설명을 덧붙이지 않는 이유는, 이미 충분히 확립된 해석 틀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들은 이전 교회의 상태로부터 연속적으로 나타나며, 각 단계는 퍼셉션의 정도와 작동 방식에 차이를 가질 뿐, 동일한 생명 흐름 안에 있습니다.

 

이 간결한 진술은 태고교회의 쇠퇴가 급격한 단절이나 붕괴가 아니라, 매우 점진적인 변화였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줍니다. 네 번째, 다섯 번째 교회라는 표현은 단순한 번호 매김이 아니라, 퍼셉션이 중심에서 바깥으로 이동해 가는 과정을 표시하는 표지와 같습니다. 각 교회는 이전 교회가 지니고 있던 생명의 흔적을 여전히 품고 있으며, 다만 그것이 더 외적인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이 글은 짧지만 분명한 메시지를 줍니다. 신앙과 교회의 변화는 어느 순간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서서히 진행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어느 번호의 교회에 속해 있는가가 아니라, 그 상태 안에서 퍼셉션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 있는가입니다.

 

또한 이 글은 창세기 5장을 읽을 때 성급하게 의미를 과도하게 채워 넣지 말라는 암묵적인 가르침도 담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떤 이름들에 대해서는 길게 설명하고, 어떤 이름들에 대해서는 한 문장으로만 처리합니다. 이는 모든 교회 상태가 동일한 비중으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각 상태가 전체 흐름 안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관점을 드러냅니다.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도 이 구조는 그대로 적용됩니다. 어떤 상태는 삶의 방향을 크게 바꾸는 전환점이 되지만, 어떤 상태는 그 전환 이후의 지속과 정착을 보여 주는 단계일 수 있습니다. 게난과 마할랄렐은 바로 그러한 지속과 진행의 상태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AC.506은 태고교회의 연속성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음을 아주 간결하게 확인해 줍니다. 네 번째 교회와 다섯 번째 교회가 등장했다는 사실 자체가, 태고교회의 생명이 여전히 다양한 형태로 유지되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 짧은 글은 그 연속성을 놓치지 말라는 조용하지만 분명한 안내입니다.

 

 

 

AC.507, 창5:12, ‘게난’, 퍼셉션의 성격이 달라지기 시작한 상태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창5:12) AC.507 ‘게난’(Kenan)이라 하는 교회는, 앞의 세 더 완전한 교회들 가운데에 그렇게 많이 포함시킬 수는 없는데, 이는 이전의 교회들에서는 분명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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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5, 창5:10-11, ’에노스‘, '셋', '사람'(아담)의 퍼셉션 차이

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10, 11) AC.505 ‘에노스’(Enosh)는 앞서 관찰한 바와 같이 세 번째 교회를 의미하는데, 여전히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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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5:10, 11)

 

AC.505

 

‘에노스’(Enosh)는 앞서 관찰한 바와 같이 세 번째 교회를 의미하는데, 여전히 태고교회들 가운데 하나이지만 ‘셋’(Seth)의 교회보다 덜 천적이며, 그 결과 퍼셉션도 더 적습니다. 또한 이 셋의 교회 역시 ‘사람’(man)이라 불리는 부모 교회만큼 천적이지도 않고 퍼셉션이 풍성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세 교회가 태고교회를 이루는 것들이며, 이들은 뒤이어 나타난 교회들에 비하면 열매나 씨앗의 알맹이와 같고, 그 이후의 교회들은 이에 비해 막질로 된 부분들과 같습니다. Enosh,” as before observed, is a third church, yet one of the most ancient churches, but less celestial, and consequently less perceptive, than the church “Seth”; and this latter was not so celestial and perceptive as the parent church, called “man.” These three are what constitute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relatively to the succeeding ones, was as the kernel of fruits, or seeds, whereas the succeeding churches are relatively as the membranaceous parts of these.

 

 

해설

 

이 글은 태고교회의 내부 구성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정리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에노스, 셋, 사람(아담)이라는 이름을 통해 세 교회를 구분하지만, 동시에 이 셋이 함께 태고교회를 이룬다고 말합니다. 이는 태고교회가 하나의 동일한 상태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퍼셉션의 정도가 서로 다른 여러 상태들이 함께 존재하며 형성되었음을 뜻합니다. 마치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와 아들 부부, 딸 부부 세대, 그리고 손주 세대가 같이 사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람이라 불리는 부모 교회는 가장 천적인 상태였고, 퍼셉션이 가장 분명했습니다. 이 상태에서는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인식되었고, 그 인식은 삶 전반에 자연스럽게 스며 있었습니다. 셋의 교회는 여전히 태고교회의 범주에 속하지만, 이미 퍼셉션은 이전보다 덜 즉각적이 되었고, 조금 더 매개된 방식, 그러니까 뭔가 보조 설명이 필요한 방식으로 작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에노스의 교회에 이르러서는 퍼셉션이 더욱 일반적인 형태를 띠게 되었고, 선과 진리를 인식하는 분명함도 더 줄어들었습니다.

 

이 차이는 가치의 우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태의 차이를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느 교회도 부정하거나 배제하지 않습니다. 그는 각 교회가 주님의 섭리 안에서 허락된 고유한 위치를 지니며, 그 위치에 맞는 퍼셉션과 역할을 지녔다고 봅니다. 덜 천적이고 덜 퍼셉션적이라는 말은, 생명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생명이 작동하는, 즉 움직이는 방식이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열매와 씨앗의 비유를 다시 사용합니다. 태고교회의 세 교회는 이후 교회들과 비교할 때 알맹이에 해당합니다. 알맹이는 생명의 중심이 자리한 곳이며, 이후의 모든 전개는 이 중심으로부터 나옵니다. 반면, 이후에 나타난 교회들은 막질과 같은 부분으로 비유되는데, 이는 알맹이를 감싸고 보호하며 생명이 바깥으로 전개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지요. 여기에는 각기 다른 쓰임새가 있을 뿐, 우열의 판단은 없습니다.

 

이 비유는 교회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균형 있게 잡아 줍니다. 태고교회의 알맹이적 상태는 가장 분명한 퍼셉션을 지녔지만, 그것만으로 인류 전체의 영적 여정을 감당할 수는 없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더 많은 외적 구조와 매개가 필요해졌고, 그에 따라 교회의 형태도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타락의 이야기라기보다, 인간 상태에 맞추어진 섭리의 전개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볼 때, 이 글은 교회를 평가하는 기준을 다시 묻게 합니다. 교회가 알맹이에 해당하는 상태에 있느냐, 막질에 해당하는 상태에 있느냐가 핵심이 아니라, 그 막질이 여전히 알맹이를 품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외적인 제도와 형식이 중심이 되더라도, 그 안에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진 생명의 핵심이 살아 있다면, 그 교회는 여전히 주님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신앙에도 이 원리는 그대로 적용됩니다. 어떤 시기에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퍼셉션이 매우 분명하게 느껴질 수 있고, 어떤 시기에는 더 많은 생각과 규칙, 형식을 통해 신앙을 유지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 형식들이 여전히 안쪽의 생명을 보호하고 있는지, 아니면 형식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렸는지입니다.

 

결국 이 글은 태고교회의 세 교회를 하나의 연속된 생명 흐름으로 보게 합니다. 사람, 셋, 에노스는 서로 다른 퍼셉션의 정도를 지녔지만, 함께 태고교회를 이루었고, 이후 교회들의 생명적 근원이 되었습니다. 이 연결이 유지되는 한, 교회는 형태가 달라져도 생명을 잃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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