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거듭남의 시작, 첫째 날, 리메인스(remains)(1:1-5, AC.6-23)

 

 

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3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1:1-5) 1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2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3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4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And God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he called night.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Gen. 1:1-5)

 

 

오늘부터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강해를 시작합니다. 창세기 50장, 출애굽기 40장, 총 90장을 달에 한 장씩 하면 살짝 여유롭게 8년 걸립니다. 가끔 절기 설교도 해야 하니 말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라틴, 창, 출 속뜻 주석) 마지막 글 번호가 10,837이니 매주 평균 30여 개의 글을 읽어야 합니다. 마칠 때쯤이면 제 나이 7학년 초중반이 될 테니 아예 할 때 번역도 병행해야 하고 말입니다. 이런 걸 스베덴보리는 8년에 걸쳐 기록했군요. 신기하네요. 기록도 8년, 번역 및 설교도 8년... 컴퓨터도 없던 시절, 오직 종이와 펜으로만 모든 걸 해야만 했던 시절,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풀이를 딕테이션하느라 보냈을 스베덴보리의 8년의 일상이 어땠을지가 눈에 선합니다. 그의 나이 61세에 시작한 일입니다. 더더욱 그는 거의 매일 주님의 부르심으로 영계 체험을 병행하는 가운데 절대적으로 시간도 많이 부족했을 텐데... 하루하루 정말 치열한 삶을 살았음을 안 보고도 알겠습니다. 주님이 250년 전 스베덴보리와 함께하신 것처럼, 오늘 제게도 그리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바로 첫째 날 본문으로 들어가지만, 아무래도 당분간은 전반적인 배경 이야기를 중간중간 좀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도 마치 하얀 백지 위에 점과 선 그려나가듯 처음엔 매우 조금씩, 가급적 자세한 설명, 깊은 배경 이야기는 자제하면서 살살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저도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시작합니다.

 


창세기 속뜻 강해, 오늘은 1장 첫 번째 시간으로, 1절로 5절, ‘첫째 날, 리메인스’의 속뜻 시간입니다. 먼저 그 개요 및 배경 설명입니다. (AC.6-15)

 

6

6일이라는 기간은, 사람의 거듭남 전 과정 가운데 연이어 일어나는 수많은 상태를 말하는데, 보통은 다음과 같습니다.

7

첫 번째 상태는, 유아기 상태와 거듭남이 시작되기 직전 상태 둘 다를 포함하는 선행 상태입니다. 이것을 ‘혼돈’(void), ‘공허’(emptiness), ‘흑암’(thick darkness)이라고 하며, 그 첫 번째 움직임이, 곧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인데요,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the spirit of God moving upon the faces of the waters)입니다.

 

8

두 번째 상태는, 주님에게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것들 사이 구별이 생기는 때입니다. 주님에게 속한 것들을 ‘리메인스’(remains, 남은 자)라 하는데, 여기서는 특별히 신앙 관련 지식들, 그러니까 유아기 때부터 배워 온, 그리고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그러나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를 때까지는 드러나지 않는, 그런 신앙 지식들을 말합니다. 오늘날엔 이 상태는 쉽게 보기 어려운데요,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그러니까 인간한테나 어울리는 이런 일시적인 것들에 푹 빠져 정신 못 차리고 살다가 인생의 큰 시험이나 불행, 혹은 큰 슬픔을 만나면 그제서야 그런 삶이 마치 죽어버리기라도 한 듯 멈추고, 정신이 번쩍 들기 때문입니다. 이때 겉 사람(the external man)에게 속한 것들이 속 사람(the internal man)에게 속한 것들로부터 분리됩니다. 즉 일시적인 것, 썩어 없어질 물질적인 것들의 정체를 깨닫게 되는 때이지요. 이 속 사람 안에 앞서 말한 리메인스가 있는데, 이것은 주님이 이때, 그러니까 이 두 번째 상태 때 쓰시려고 그의 속 사람 안에 차곡차곡 보관하신 것들입니다.

9

세 번째 상태는, 회개(repentance)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속 사람으로 말미암아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 같은 선을 행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 거기에는 생명이 없는데, 그 이유는 그가 이 모든 걸 자기가 하는 걸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그 공을 자신에게 돌리기 때문이지요. 이런 선을 ‘풀’(tender grass),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 그리고 나중에는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라고 합니다.

 

10

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스럽고 애정 어린 사람이 되고, 신앙으로 빛나는 사람이 되었을 때입니다. 그는 이전에 실제로 경건한 담론도 하고, 선도 행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그가 수고한, 즉 자초한 시험과 엄격함의 결과이지, 신앙과 체어리티로 한 게 아닙니다. 하지만 이제는 사랑의 애정으로, 그리고 빛을 받은 신앙으로 하게 되었고, 그런 까닭에, 이제 신앙과 체어리티는 그의 속 사람 안에서 활활 불타오르는데, 이를 두 ‘광명체’(two luminaries)라고 합니다.

11

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의 담론을 하며, 그럼으로써 자신이 진리와 선 안에 있음을 확증하는 때입니다. 그때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이 살아 움직이는데, 이를 일컬어 ‘바다의 물고기’(fish of the sea), ‘하늘의 새’(birds of the heavens)라고 합니다.

 

12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일을 행하는 때입니다. 그때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을 일컬어 ‘생물’(living soul)과 ‘가축’(beast)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때 사람은 신앙과 사랑 둘 다를 가지고 바로 행동을 시작하기 때문에, 영적 인간(spiritual man)이 되며, 이런 그를 일컬어 ‘형상’(image)이라고 합니다. 그의 영적 삶(생활, 생명)은 신앙에 속한 지식과 체어리티에 속한 행위로 말미암아 기쁜 삶이 되며, 또 유지됩니다. 이런 지식과 행위를 일컬어 그의 ‘먹을거리’(food)라고 합니다. 반면, 그의 자연적 삶은 몸과 몸의 감각에 속한 것들로 말미암아 기쁜 삶이 되고 유지되는데, 바로 이 지점이 영적 전투가 벌어지는 곳입니다. 그의 안에서 사랑이 주(, the dominion)가 되며, 그가 천적 인간(天的, celestial man)이 될 때까지 말이지요.

13

거듭나는 중인 사람들이 모두 이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대부분은 첫 번째 상태까지만입니다. 그중 일부만 두 번째, 그 밖의 사람들이 세 번째, 네 번째와 다섯 번째, 그리고 아주 적은(few) 수가 여섯 번째에 이르고, 일곱 번째 상태에 도달하는 사람은 거의(scarcely) 없습니다.

 

14

이어지는 글 가운데서 ‘주님’(the Lord)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 의미합니다. 그분은 앞뒤 무슨 다른 이름을 덧붙이는 거 없이 오직 ‘주님’으로만 일컬음 받으십니다. 온 천국에 걸쳐 그분은 주님으로 인식되시며, 사랑과 공경을 받으십니다. 모든 천국과 지상에서 오직 그분만이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분은 제자들에게 친히 자신을 그렇게 부르라 명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3:13)

 

그래서 그분의 부활 후, 제자들은 그분을 오직 ‘주님’으로만 불렀습니다.

 

15

천국 전체가 오직 주님 외에 무슨 다른 아버지라는 건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과 아버지는 하나이시기 때문인데요, 이는 아래와 같이 그분 자신 친히 말씀하신 사실입니다.

 

6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8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4:6, 8-11)

 

 

아래부터 오늘 본문입니다.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16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 합니다. 선지서 여러 곳에서는 이때를 ‘옛날’(days of old, [antiquitatis])이라 하기도 하고, ‘영원’(days of eternity)이라 하기도 합니다. ‘태초’는 또한 거듭나는 중인 사람의 첫 번째 시기, 기간을 말하기도 하는데요, 이때 사람은 새롭게 태어나고, 생명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듭남 자체를 사람의 ‘새 창조’(new creation of man)라고도 하지요. 선지서들 가운데 거의 모든 곳에서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라는 표현들은 그 상징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지만, 다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이사야를 보면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43:7)

 

그리고 그래서 같은 선지서에서 주님은 ‘구속자’(redeemer), ‘태에서부터 지으신 이’(former from the womb), ‘만드신 이’(maker) 및 ‘창조자’(creator)라 일컬음을 받으십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43:15)

 

시편에서는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102:18)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104:30)

 

‘천’(, heaven)은 속 사람을, ‘지’(, earth)는 아직 거듭나기 전인 겉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들을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17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 상태에 있는 사람을 가리켜 ‘혼돈하고 공허한 땅’(earth void and empty), 또 거기에 선과 진리가 전혀 파종되지 않은 ‘지면’(ground)이라고도 합니다. 여기서 ‘혼돈’(void)은 선이 하나도 없는 상태를, ‘공허’(empty)는 진리가 하나도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 결과, ‘흑암’(thick darkness) 상태, 즉 어리석은 상태가 되며, 주님 신앙(faith in the Lord)에 속한 모든 것에,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영적 천적 생명(삶)(spiritual and heavenly life)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해 무지한 상태가 됩니다.

 

그런 사람에 관해 주님은 예레미야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2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4:22, 23)

 

18

‘깊음 위’(faces of the deep)는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사람의 탐욕(the cupidities of the unregenerate man)과 거기서 나오는 거짓인데, 그는 전적으로 이런 것들의 사람이며 이런 것들 안에 완전히 잠긴 사람입니다. 이 상태는 빛이라는 게 전혀 없는 상태로, 그는 무슨 ‘깊음’(deep)과도 같은, 뭔가 희미하고 혼란스러운 그런 상태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말씀 여러 곳에서는 표현하기를 ‘깊음’(deeps), ‘바다 깊은 곳’(depths of the sea)이라 하는데, 이는 ‘말리신’(dried up) 상태, ‘황폐해진’(wasted) 상태를 말합니다. 사람이 거듭나기 전 상태이지요.

 

이사야입니다.

 

9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10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11여호와께 구속받은 자들이 돌아와 노래하며 시온으로 돌아오니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고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 (51:9-11)

 

이런 사람은 또한 하늘에서 보면, 생기라고는 전혀 없는, 무슨 까만 덩어리로 보이는데요, 일반적으로 이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표현에는 인간의 황폐함(the vastation of man)이라는, 선지서에 자주 언급되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거듭남의 선행 상태입니다. 사람은 참된 것을 알 수 있기 전에, 그리고 선한 것으로 영향받기 전에, 먼저 이런 것의 유입을 방해하고 저항하는 것들을 제거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이런 이유로, 새 사람이 잉태될 수 있기 전에, 반드시 옛 사람이 먼저 죽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 위 ‘인간의 황폐함(the vastation of man)이라는 표현에 사용된 영어 ‘vastation’은 사어(死語)에 가까운 말인지 사전에도 잘 안 나옵니다. NCE(New Century Edition)역에서는 이를 ‘overall spiritual devastation’으로 번역했습니다.

 

19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은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를 의미하는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ove)라든지, 혹은 마치 암탉이 자기 알을 품듯 ‘품으시다’(brood)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는 주님이 사람 안에 숨겨 보석처럼 소중하게 보관해 오신 것들을 가리키는데요, 말씀 전반에 걸쳐 이것을 ‘리메인스’(remains), 혹은 ‘남은 자’(a remnant)라 합니다. 이는 참과 선에 관한 지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리메인스라는 것은 겉의 일들이 황폐해질 때까지는 결코 빛, 즉 낮 가운데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들 지식을 여기서는 ‘수면 위’(the faces of the waters)라 하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20

거듭남이 시작된 사람의 첫 번째 상태는 그가 선과 참이 뭔가 더 높은 것이라는 걸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거의 외적이기만 한 사람들, 그러니까 겉이기만 한 겉의 사람들은 선과 진리라는 게 무엇인지조차 모르는데요, 그들은 자기 사랑(the love of self)과 세상 사랑(the love of the world)에 속한 모든 것이 선이며, 그런 사랑들한테 호의적인 게 진리라는 이상한, 뒤집힌 환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선은 악이며, 그런 진리는 거짓임을 그들은 깨닫지를 못하기 때문인데요, 그러나 사람이 새롭게 잉태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 곧 자기의 선은 선이 아니며, 또한 그가 빛 가운데 더욱 들어갈수록, 이 빛은 주님이신데요, 주님은 선과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라는, 이런 사실들을 그는 처음으로 알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이 계시다(the Lord exists)는 사실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고 주님은 요한복음에서 친히 가르치셨습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8:24)

 

또 주님은 선 그 자체, 즉 생명이시며, 진리 그 자체, 즉 빛이시라는 사실과, 그 결과,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은 그 어떤 것도 선도, 진리도 아니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선언하십니다.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1, 3-4, 9)

 

4, 5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21

빛을 ‘선’(good)이라고 합니다. 빛은 주님으로 말미암으며, 주님은 선 그 자체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둠’(darkness)은 모든 것, 곧 사람이 새롭게 잉태되어 태어나기 전, 그동안 빛처럼 보여 그런 줄 알았던 모든 걸 말하는데요, 사람이 새롭게 태어나기 전에는 악은 선처럼 보이고, 거짓은 진리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실상은 이들 악과 거짓은 어둠, 곧 사람한테나 어울리는, 그래서 여전히 사람 안에 있는 걸로만 구성되는 어둠입니다. 주님에게 속하는 건 그게 뭐든지 다 ‘낮’(day)과 비교됩니다. 빛에 속하기 때문이지요. 반면, 사람의 본성(own, proprium, 자아, 고유 속성)은 뭐든지 다 ‘밤’(night)과 비교됩니다. 어둠에 속하기 때문인데요, 이런 비교는 말씀에서 자주 나옵니다.

 

※ 다음은 ‘본성(own, proprium)에 대한 원전(原典, 라틴) 설명입니다.

 

라틴어 proprium은 원전에서 사용된 용어로, 여기와 다른 여러 곳에서 own이라는 표현으로 번역되어 온 말입니다. propius의 사전적 의미는 형용사로서는 ‘one’s own,’ ‘proper,’ ‘belonging to one’s self alone,’ ‘special,’ ‘particular,’ ‘peculiar’입니다. 이 proprium은 중성인데 명사로 사용되면, ‘possession,’ ‘property’를 의미하며, 또 ‘a peculiarity,’ ‘characteristic mark,’ ‘distinguishing sign,’ ‘characteristic’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영어 형용사 ‘own’은 웹스터에 ‘belonging to,’ ‘belonging exclusively or especially to,’ ‘peculiar’를 의미하는 걸로 봐서,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이 ‘own’이라는 말은 proprius와 매우 정확히 일치하며, 라틴 proprium에 맞는 어떤 명사를 만들면, 아주 가까운 번역 효과를 얻지 싶습니다.

 

5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22

‘저녁’(evening)이 의미하는 바와 ‘아침’(morning)이 의미하는 바를 이제 알 수 있는데요, ‘저녁’은 모든 선행 상태(every preceding state)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그늘 상태, 즉 거짓의 상태, 불신앙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아침’은 모든 이후 상태(every subsequent state)입니다. 빛이나 진리, 그리고 신앙 지식에 속하는 상태이지요. ‘저녁’은 일반적으로 인간의 본성(own)에 속한 모든 걸 의미하는 반면, ‘아침’은 아래 다윗을 통해 하신 말씀처럼, 무엇이든지 다 주님에게 속한 것을 의미합니다.

 

2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3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4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삼하23:2-4)

 

‘저녁’은 불신앙의 때요, ‘아침’은 신앙의 때이기 때문에, 주님이 세상에 오심은 ‘아침’, 주님의 떠나심, 그때는 불신앙의 때이므로, ‘저녁’이라 합니다. 다니엘입니다.

 

14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 하였느니라, 26이미 말한 바 주야에 대한 환상은 확실하니 너는 그 환상을 간직하라 이는 여러 날 후의 일임이라 하더라 (8:14, 26)

 

같은 식으로, 말씀에서 ‘아침’은 모든 주님의 오심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곤 하는데, 결과적으로는 새 창조에 관한 표현입니다.

 

23

말씀에서 ‘날’(day)을 가지고 때(time)를 가리키곤 하는 것만큼 더 흔한 것은 없는데요,

 

이사야입니다.

 

6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9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13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분하여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22그의 궁성에는 승냥이가 부르짖을 것이요 화려하던 궁전에는 들개가 울 것이라 그의 때가 가까우며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 (13:6, 9, 13, 22)

 

7이것이 옛날에 건설된 너희 희락의 성 곧 그 백성이 자기 발로 먼 지방까지 가서 머물던 성읍이냐, 15그날부터 두로가 한 왕의 연한 같이 칠십 년 동안 잊어버린 바 되었다가 칠십 년이 찬 후에 두로는 기생의 노래 같이 될 것이라 (23:7, 15)

 

‘날’을 가지고 때를 가리키곤 하기 때문에 이는 또 그때 상태를 가리키는 데에도 사용되곤 합니다. 예레미야입니다.

 

너희는 그를 칠 준비를 하라 일어나라 우리가 정오에 올라가자 아하 아깝다 날이 기울어 저녁 그늘이 길었구나 (6:4)

 

20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능히 낮에 대한 나의 언약과 밤에 대한 나의 언약을 깨뜨려 주야로 그때를 잃게 할 수 있을진대, 25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주야와 맺은 언약이 없다든지 천지의 법칙을 내가 정하지 아니하였다면 (33:20, 25)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5:21)

 

 

주석은 여기까지입니다. 저는 오늘 특별히 이 ‘리메인스(remains)라는 것에 주목했으면 합니다.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인 주님의 자비가 바로 이 ‘리메인스’ 안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원본에 영어 ‘remains’를 그냥 일반명사화해서 그대로 명명하는 게 좀 특이했는데요, 다음은 이와 관련, 전에 제가 정리한 글들이 있어 그대로 인용합니다. 원고가 길어져 아래 링크로 대신합니다.

 

 

AC.8 설명, '리메인스'(remains, 남은 자)에 관하여

AC.8 설명, '리메인스'(remains, 남은 자)에 관하여 (2024/6/1) 그러니까 유형(有形), 즉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만이 진짜라 믿고, 그런 삶을 추구하던 사람이 어떤 일을 계기로 ‘아,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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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글입니다.

 

 

‘십일조’의 속뜻

‘십일조’의 속뜻 ...오늘은 특별히 우리의 헌금생활 중 십일조에 대하여, 그 아르카나(arcana, 秘義, 속뜻)에 대하여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십일조에 관한 거의 첫 본문이라 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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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오늘 본문 중 리메인스가 나오는 부분은 2절,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입니다.  

 

창세기 1장을 이렇게 푸는 설교는 아마 처음이시지들 싶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1장을 주로 천지창조의 관점으로만 보고 싶어 하지만, 주님은 말씀을 그런 무슨 역사 다큐로 기록하는 거는 관심 없으시고, 대신 사람의 거듭남의 여러 단계를 당시 고대인들의 언어 습관을 따라 재미있게 표상, 상징하기를 원하셔서 오직 상응으로만 기록하셨습니다. 즉 우리가 아는 천지창조의 육일을 사람의 거듭남의 여섯 단계로 그리신 것이지요. 우리의 관심과 주님의 관심이 참 다릅니다.

 

말씀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았으며, 그래서 거기엔 주님의 주된 관심, 즉 주님과 천국, 교회, 그리고 종교적 신앙에 관한 것들이 들어있습니다. 말씀은 그 일점일획조차도 모두 그 안에 이런 내적 의미들이 들어있는데 이것을 아르카나(arcana, 라틴, secret, 秘義)라 합니다. 아르카나는 오직 주님으로만 말미암기 때문에 신성(Divine)하며, 생명이 있고, 그래서 아르카나가 들어있는 성경만 말씀입니다. 성경 66권 중, 구약은 창, 출, 레, 민, 신, 수, 삿, 삼상, 삼하, 왕상, 왕하, 시, 사, 렘, 애, 겔, 단, 호, 욜, 암, 옵, 욘, 미, 나, 합, 습, 학, 슥, 말 (29), 신약은 마, 막, 눅, 요, 계 (5) (AC.10325), 이렇게 34권만 말씀입니다.

 

사람이 영과 육으로 되어 있는 줄은 알지만, 실제로 자기 영을 보신 분은 없으신 것처럼, 말씀 또한 그렇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지으신 것처럼 말씀 또한 그렇게 영과 육으로, 곧 속뜻과 겉뜻으로 기록하셨습니다. 우리가 자기의 영을 처음 보면 무척 낯설 것 같은데, 그런 것처럼 말씀 또한 그 속뜻이 이렇게 낯선 건 어쩌면 당연하지 싶습니다. 주님의 은혜와 본인의 간절함, 그리고 사모함으로 이 간격이 빠르게 좁혀질 줄 믿습니다.

 

참고로, 우리가 말씀을 속뜻으로 읽고자 하는 이유는, 첫째는, 우리가 곧 가게 될 본향 언어로 읽고 싶어서입니다. 천사들처럼 말입니다. 둘째는, 오리지날 주님의 마음을 알고, 남은 삶을 그렇게 살고 싶어서입니다. 말씀을 겉뜻으로 읽어온 지난날은 끝없이 원어가 어떠니, 누가 이걸 어떻게 풀었니 하는 연속이었습니다. 말씀은 세상 지식으로 푸는 게 아닙니다.

 

창세기를 시작하게 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설교

2025-07-20(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7-20(D1)-주일예배(2607, 창1,1-5, AC.16-23), ‘첫째 날, 리메인스’의 속뜻.pdf
0.56MB
영문 원본, 창1,1-5, AC.6-23.pdf
0.08MB

 


아래 링크는 오늘 설교의 유튜브 오디오입니다.

 

 

주일예배(2025/7/27, 창1:6-8), ‘둘째 날, 궁창’의 속뜻

‘둘째 날, 궁창’의 속뜻 (창1:6-8)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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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 서문, '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을 시작하며'(AC.1-5)

1구약 말씀을 단순히 그 겉 글자로만(the mere letter of the Word of the Old Testament), 즉 기록된 글자로만 읽어서는 아무도 다음과 같은 사실들, 곧 말씀의 이면(裏面, this part of the Word)에는 천국의 깊은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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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리메인스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배경

 

561

그러면 리메인스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리메인스는 사람이 유년기부터 주님의 말씀을 통해 배워 그의 기억에 강한 인상을 심어준 선과 진리뿐 아니라, 거기서 기원한 모든 상태, 가령, 영유아기 순진무구한 상태, 부모, 형제, 선생님과 친구를 향한 사랑의 상태,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 및 가난한 자, 빈궁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상태 등, 한 마디로, 선과 진리에 속한 모든 상태 또한 가리킵니다. 선과 진리와 함께 기억에 각인된 이런 상태를 일컬어 리메인스라 합니다. 이것은 주님에 의해 사람 안에 보관되는데, 이때 주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조금도 눈치 못 채게 조심조심 그의 속사람 안에 쌓아가십니다. 이것은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즉, 악과 거짓에 관련된 것들하고는 철저히 격리됩니다. 이 모든 상태는 그 가운데 아주 작은 것조차 잃는 것이 없도록 주님에 의해 사람 안에 보존됩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도록 전에 이런 경험을 했는데요, 사람의 모든 상태는 그의 영유아 때부터 아주 늙었을 때까지 내세에 그대로 보존될 뿐만 아니라 다시 체험되기도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실제로 사람의 상태는 그가 현세에 살면서 처음 겪었던 상태 그대로 정확히 다시 체험됩니다. 우리 기억에 아로새겨진 선과 진리뿐 아니라, 우리가 경험한 모든 이노센스나 체어리티도 마찬가지, 즉, 하나도 잃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악과 거짓의 상태가 재발될 때, 곧, 이들 악과 거짓이 개별적이든 전체적이든, 심지어 아주 작은 것조차 역시 고스란히 남아 있고, 다시 체험되는데요, 이때는 주님에 의해 선한 상태로 누그러뜨려집니다. 이 모든 사실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에게 리메인스가 전혀 남아 있지 않게 되면, 그는 반드시 영원한 지옥살이, 곧, 영원히 지옥에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AC.468번 글을 보시기 바랍니다.) But what are remains? They are not only the goods and truths that a man has learned from the Lord’s Word from infancy, and has thus impressed on his memory, but they are also all the states thence derived, such as states of innocence from infancy; states of love toward parents, brothers, teachers, friends; states of charity toward the neighbor, and also of pity for the poor and needy; in a word, all states of good and truth. These states together with the goods and truths impressed on the memory, are called remains, which are preserved in man by the Lord and are stored up, entirely without his knowledge, in his internal man, and are completely separated from the things that are proper to man, that is, from evils and falsities. All these states are so preserved in man by the Lord that not the least of them is lost, as I have been given to know from the fact that every state of a man, from his infancy to extreme old age, not only remains in the other life, but also returns; in fact his states return exactly as they were while he lived in this world. Not only do the goods and truths of memory thus remain and return, but also all states of innocence and charity. And when states of evil and falsity recur—for each and all of these, even the smallest, also remain and return—then these states are tempered by the Lord by means of the good states. From all this it is evident that if a man had no remains he must necessarily be in eternal damnation. (See what was said before at n. 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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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진도를 나가기 전에 먼저, 홍수 이전 교회의 상황은 어땠는지를 좀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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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0

계속해서 진도를 나가기 전에 먼저, 홍수 이전 교회의 상황은 어땠는지를 좀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는, 후에 일어난 교회들의 상황들과 같았다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 주님 강림 전 유대교회의 경우나, 주님 강림 후 기독교회의 경우처럼, 참 신앙 지식의 부패와 타락, 뒤집힘 및 불순물을 섞음 등이 되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세히는, 홍수 전 교회에 속한 사람의 경우, 그는 시간이 흐르면서 무서운 신념, 곧 소름 끼치는 망상을 품게 되었고, 신앙에 속한 선과 진리를 역겨운 갈망, 욕망에 철저히 잠기게 하여 그 결과, 그들 안에 리메인스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을 지경까지 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이 상태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사실은 스스로를 질식시킨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리메인스 없이는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AC.530), 사람을 짐승 수준의 삶에서 인간의 삶으로 고양하는 것이 바로 이 리메인스이기 때문입니다. 리메인스를 가지고, , 주님에게서 온 리메인스를 통해서, 사람은 사람이 될 수도, 무엇이 선이요, 진리인지를 알 수도, 온갖 종류의 일들을 생각할 수도,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리메인스 그 안에는 영적, 천적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Before proceeding further we may mention how the case was with the church before the flood. Speaking generally, it was as with succeeding churches, as with the Jewish church before the Lord’s advent, and the Christian church after his advent, in that it had corrupted and adulterated the knowledges of true faith; but specifically, as regards the man of the church before the flood, he in course of time conceived direful persuasions, and immersed the goods and truths of faith in foul yearnings, insomuch that there were scarcely any remains in them. When they came into this state they were suffocated as if of themselves, for man cannot live without remains; for, as we have said, it is in the remains that the life of man is superior to that of brutes. From remains, that is, through remains from the Lord, man is able to be as man, to know what is good and true, to reflect upon matters of every kind, and consequently to think and to reason; for in remains alone is there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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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아(Noah), 홍수 때까지 남은 몇 교회, 태고교회의 리메인스’(remains)

 

창5 개요

 

468

이전 장들을 통해 지금까지 말씀드리고 보여드린 내용들을 볼 때 분명한 건, 이름은 이교(異敎, heresy)나 교리(敎理, doctrine)를 의미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본 장에 나오는 이름들은 사람들이 아닌 어떤 것들, 현 맥락에서는 교리들이나 교회들, 곧 태고교회로부터 이 ‘노아’ 때까지 그들이 겪은 변화들에도 불구하고 보존된 교리나 교회들을 의미함을 보실 수 있습니다. 모든 교회의 경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줄어들다가 결국엔 몇 개 정도만 남게 되는데, 그 가운데 홍수 때까지 남은 이들 몇 교회를 가리켜 ‘노아’라 했던 것입니다. From what has been said and shown in the foregoing chapter, it is evident that by names are signified heresies and doctrines. Hence it may be seen that by the names in this chapter are not meant persons, but things, and in the present instance doctrines, or churches, which were preserved, notwithstanding the changes they underwent, from the time of the most ancient church even to “Noah.” But the case with every church is that in course of time it decreases, and at last remains among a few; and the few with whom it remained at the time of the flood were called “Noah.”

 

[2] 참된 교회가 줄어들다가 몇 안 남게 되는 건, 다른 교회들 역시 그렇게 줄어든 걸 보면 분명합니다. 남겨진 자들을 말씀에서는 ‘리메인스’(remains), ‘남은 자’(remnant)라 하고, 또 말하기를, ‘가운데’(in the midst), 혹은 ‘중간에’(middle), ‘땅에’(of the land) 있다고도 합니다. 이런 게 보편적이듯 특별한 경우 역시 그렇습니다. 즉 교회의 경우처럼 각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요. 각 사람 안에 있는 리메인스가 주님에 의해 보존되지 않으면 사람은 영원히 소멸하고 말기 때문인데, 영적, 천적 생명이 그의 리메인스 안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또한 일반적 혹은 보편적으로, 만일 교회, 즉 참 신앙이 몇 사람 안에라도 늘 남아있지 않으면 인류는 소멸됩니다. 잘 알려진 대로, 한 도시, 아니 간혹 한 나라 전체가 단지 몇 사람 덕분에 구원을 받곤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관련된 이런 일이 인체의 경우에도 있습니다. 심장이 괜찮은 한 이웃한 장기들 또한 괜찮을 수 있습니다만, 만일 심장이 약해지면 인체의 다른 장기들 역시 공급이 중단되어 그 사람은 죽습니다. 마지막 리메인스들이 바로 ‘노아’라고 하는 교회들입니다. (창6:12와 다른 구절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온땅이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That the true church decreases and remains with but few, is evident from other churches which have thus decreased. Those who are left are in the Word called “remains,” and a “remnant,” and are said to be “in the midst,” or “middle,” “of the land.” And as this is the case in the universal, so also it is in the particular, or as it is with the church, so it is with every individual man; for unless remains were preserved by the Lord in everyone, he must needs perish eternally, since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are in the remains. So also in the general or universal—if there were not always some with whom the church, or true faith, remained, the human race would perish; for, as is generally known, a city, nay, sometimes a whole kingdom, is saved for the sake of a few. It is in this respect with the church as it is with the human body; so long as the heart is sound, life is possible for the neighboring viscera, but when the heart is enfeebled, the other parts of the body cease to be nourished, and the man dies. The last remains are those which are signified by “Noah”; for (as appears from Gen. 6:12, as well as from other places) the whole earth had become corrupt.

 

[3] 보통, 교회뿐 아니라 각 개인 안에 있는 리메인스에 관하여 많은 말씀들이 예언서에 보면 나옵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입니다. Of remains as existing in each individual as well as in the church in general, much is said in the prophets; as in Isaiah:

 

3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 안에 생존한 자 중 기록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 4이는 주께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기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중에서 청결하게 하실 때가 됨이라 (사4:3-4) He that is left in Zion, and he that remaineth in Jerusalem, shall be called holy to him, even everyone that is written unto lives in Jerusalem, when the Lord shall have washed the filth of the daughters of Zion, and shall have washed away the bloods of Jerusalem from the midst thereof, (Isa. 4:3–4)

 

거룩함(holiness)으로 서술되고 있는 위 구절에서, 리메인스는 교회의 리메인스 및 교회에 속한 사람 또한 의미하고 있습니다. 시온과 예루살렘의 ‘남은 자들’을 단순히 그들이 ‘남겨졌다’는 이유 만으로 거룩하다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in which passage holiness is predicated of the remains, by which are signified the remains of the church, and also of a man of the church; for “those left” in Zion and Jerusalem could not be holy merely because they were “left.” Again:

 

20그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21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사10:20-21) It shall come to pass in that day, that the remains of Israel, and such as are escaped of the house of Jacob, shall no more again stay upon him that smote them, but shall stay upon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 in truth. The remains shall return, the remains of Jacob, unto the mighty God. (Isa. 10:20–21)

 

예레미야에서는 In Jeremiah:

 

그날 그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찾아내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남긴 자를 용서할 것임이라 (렘50:20) In those days, and in that time, the iniquity of Israel shall be sought for, and there shall be none; and the sins of Judah, and they shall not be found; for I will pardon him whom I shall make a remnant. (Jer. 50:20)

 

미가서입니다. In Micah:

 

야곱의 남은 자는 많은 백성 가운데 있으리니 그들은 여호와께로부터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 같아서 (미5:7) The remains of Jacob shall be in the midst of many peoples, as the dew from Jehovah, as the showers upon the grass. (Micah 5:7)

 

[4] 한 사람 혹은 교회의 잔여물 혹은 리메인스는 십 분의 일(the tenths)로도 표현되었는데, 이 십 분의 일은 거룩했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 십(10)을 가진 수 또한 거룩했고, 그래서 ‘’(10)은 리메인스를 서술하는데 쓰이고 있습니다. 이사야입니다. The residue or remains of a man, or of the church, were also represented by the tenths, which were holy; hence also a number with ten in it was holy, and “ten” is therefore predicated of remains; as in Isaiah:

 

12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13그중에 십 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사6:12-13) Jehovah shall remove man, and many things [shall be] left in the midst of the land; and yet in it [shall be] a tenth part, and it shall return, and shall be for exterminating; as an oak, and an ilex, when the stock is cast forth from them, the holy seed is the stock thereof; (Isa. 6:12–13)

 

여기 남아 있는 것을 가리켜 ‘거룩한 씨’라 하고 있습니다. 아모스에서 where the residue is called a “seed of holiness.” And in Amos: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 중에서 천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암5:3) Thus saith the Lord Jehovah, The city that goeth forth a thousand shall have a hundred left, and that which goeth forth a hundred shall have ten left to the house of Israel. (Amos 5:3)

 

이 구절들과 다른 많은 데에서 그 속뜻으로는 우리가 지금까지 말해온 ‘리메인스’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한 도시가 거기 있는 교회의 리메인스 덕분에 보존된다는 사실은 소돔 관련,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을 보면 분명합니다. In these and many other passages, in the internal sense are signified the “remains” of which we have been speaking. That a city is preserved for the sake of the remains of the church, is evident from what was said to Abraham concerning Sodom: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18:32) Abraham said, Peradventure ten may be found there; and he said, I will not destroy it for ten’s sake. (Gen. 18:32)

 

창6:12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창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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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4, 창1:6-7,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AC.24-25)

※ AC.24, 창1:6-7,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AC.24-25) 6-7절,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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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5, 창1:6-7,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AC.24-25)

※ AC.25, 창1:6-7,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AC.24-25) 6-7절,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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