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날, 리메인스’의 속뜻 (1:1-5)

 

 

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3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1:1-5) 1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2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3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4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And God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he called night.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Gen. 1:1-5)

 

 

오늘부터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강해를 시작합니다. 창세기 50장, 출애굽기 40장, 총 90장을 달에 한 장씩 하면 살짝 여유롭게 8년 걸립니다. 가끔 절기 설교도 해야 하니 말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라틴, 창, 출 속뜻 주석) 마지막 글 번호가 10,837이니 매주 평균 30여 개의 글을 읽어야 합니다. 마칠 때쯤이면 제 나이 7학년 초중반이 될 테니 아예 할 때 번역도 병행해야 하고 말입니다. 이런 걸 스베덴보리는 8년에 걸쳐 기록했군요. 신기하네요. 기록도 8년, 번역 및 설교도 8년... 컴퓨터도 없던 시절, 오직 종이와 펜으로만 모든 걸 해야만 했던 시절,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풀이를 딕테이션하느라 보냈을 스베덴보리의 8년의 일상이 어땠을지가 눈에 선합니다. 그의 나이 61세에 시작한 일입니다. 더더욱 그는 거의 매일 주님의 부르심으로 영계 체험을 병행하는 가운데 절대적으로 시간도 많이 부족했을 텐데... 하루하루 정말 치열한 삶을 살았음을 안 보고도 알겠습니다. 주님이 250년 전 스베덴보리와 함께하신 것처럼, 오늘 제게도 그리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바로 창세기 11절로 5절, 첫째 날 본문으로 들어가지만, 아무래도 당분간은 전반적인 배경 이야기를 중간중간 좀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도 마치 하얀 백지 위에 점과 선 그려나가듯 처음엔 매우 조금씩, 가급적 자세한 설명, 깊은 배경 이야기는 자제하면서 살살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저도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시작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에 대한 속뜻입니다.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주님은 맨 처음, 아직 거듭남도 시작되지 않은 사람에게 그의 안에 속 사람을 지으시며, 거듭남의 전 과정을 시작하십니다.

 

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아직 거듭남이 시작되지 않은 사람의 상태는 그의 안에 선도 진리도 전혀 파종되지 않은 상태이며, 그래서 어리석은 상태가 되어 주님 신앙(faith in the Lord), 곧 영적 천적인 모든 것(all things belonging to spiritual and heavenly life)에 아주 무지합니다. 이 상태에 있는 사람은 탐욕과 거기서 나오는 거짓에 완전히 잠겨 있는데, 그래서 빛이라는 게 전혀 없어 매우 어둡습니다. 천사들이 이런 사람을 보면 그냥 까만 덩어리로만 보입니다. 천사들은 내적 존재라 사람의 내면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의 어린 시절부터 그가 모르게 ‘리메인스’(remains), 혹은 ‘남은 자’(a remnant)라고도 하는, 곧 그의 안에 참과 선에 관한 지식(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of the good), 그러니까 주님의 것을 차곡차곡 소중히 쌓아 보관해 오셨는데, 이런 것이 바로 주님의 자비입니다. 이 리메인스라고 하는 것은 그의 겉의 삶이 황폐해질 때까지는, 그러니까 죽은 것 같은 상태가 될 때까지는 쉽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3, 4절, 3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거듭남이 시작되어 그 첫 번째 상태 가운데 있는 사람의 첫 번째 변화는 그가 비로소 참과 선을 인식, 이것이 뭔가 더 높은 것이라는 걸 알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그는 자기 사랑(the love of self)과 세상 사랑(the love of the world)에 속한 걸 선으로, 그리고 이런 사랑에 우호적인 걸 진리로 여기는 뒤집힌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이랬던 그가 주님을 향해 몸을 돌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수록 그는 빛 가운데로 들어가 비로소 자기가 알던 선은 선이 아닌 악이며, 진리 역시 진리가 아닌 거짓이라는 사실에 눈을 뜹니다. 주님은 선 그 자체, 곧 생명이시며, 진리 그 자체, 곧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4, 5절, 4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빛’(light)은 주님으로 말미암으며, 주님은 선(good) 그 자체이신 분입니다. 반면, ‘어둠’(darkness)은 사람이 새롭게 잉태되어 태어나기 전, 그동안 빛처럼 보여 그런 줄 알았던 모든 것입니다. 빛은 주님으로, 어둠은 사람으로 말미암습니다. 주님에게 속하는 건 ‘낮’(day)이지만, 사람에게 속하는 것, 사람의 본성(own, proprium)과 관련되는 건 모두 ‘밤’(night)입니다. ‘저녁’(evening)은 모든 선행 상태(every preceding state)를 말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그늘 상태, 즉 거짓의 상태, 불신앙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아침’(morning)은 모든 이후 상태(every subsequent state)입니다. 빛이나 진리, 그리고 신앙 지식에 속하는 상태이지요. ‘저녁’은 사람의 본성에 속한 모든 걸, ‘아침’은 무엇이든지 다 주님에게 속한 것을 의미합니다. ‘저녁’은 불신앙의 때요, ‘아침’은 신앙의 때이기 때문에, 주님이 세상에 오심은 ‘아침’, 주님의 떠나심, 그때는 불신앙의 때이므로, ‘저녁’이라 합니다.

 

속뜻을 몇 줄 문장으로만 적으면 좀 어리둥절하실 것 같아 설명과 함께 풀어 적어보았습니다.

 

오늘 전할 메시지들이 이미 이 풀어쓴 속뜻 안에 다 들어있는데요, 저는 오늘 특별히 이 ‘리메인스(remains)라는 것에 주목했으면 합니다.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인 주님의 자비가 바로 이 ‘리메인스’ 안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원본에 영어 ‘remains’를 그냥 일반명사화해서 그대로 명명하는 게 좀 특이했는데요, 다음은 이와 관련, 전에 제가 정리한 글들이 있어 그대로 인용합니다.

 

AC.8 설명, ‘리메인스(remains)에 관하여 (2024/6/1)

 

그러니까 유형(有形), 즉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만이 진짜라 믿고, 그런 삶을 추구하던 사람이 어떤 일을 계기로 ‘아, 무형(無形), 즉 보다 가치로운 삶, 윤리, 도덕, 사람다움, 더 나아가 영적인 삶이라는 게 있구나!’ 깨닫는 걸 말합니다.

 

저의 경우는 그 첫 계기가 고3 때 모친 교통사고 별세가 아니었나 합니다. 저는 그전까지는 아인슈타인처럼 대학교수가 되어 캠퍼스 내 교수 사택에서 살며, 평생 학자의 길을 걷는 걸 목표로 하였었으나, 어머니의 갑작스런 사별(死別)로, 그동안 추구하던 삶에 대해 ‘아, 내게 있는 이 모든 것, 내가 꽉 쥐고 있는 이것들은 언제든 갑자기 나를 떠날 수 있는 것들이구나!’ 깨닫게 되었고, 이후 그전까진 한 사람의 흔한 모태(母胎) 신앙인, 그러니까 교회를 그냥 일종의 문화생활, 써클 활동 정도로만 다니던 신앙생활에 변화가 생기게 되었는데요, 곧 관점의 변화, 전엔 내 삶의 행복을 위해 신앙은 그저 선택할 수 있는 한 가지 옵션이었다면, 이후엔 신앙을 이용해서 행복을 추구하는, 그러니까 신앙이라는 옵션을 선택한 후, 그 안에서 내 행복을 추구하는 모습으로 한 단계 올라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표현들이 살짝 좀 이상하지요? ‘신앙을 이용해서 행복을 추구하는 모습’이라... 그러니까 신앙도 내가 천국 가기 위해서이고, 말씀 가까이하는 것도 내가 병 낫고, 복 받고, 내 삶의 형통과 핏줄들을 위해서, 그리고 교회 내 두드러진 활동, 우아하고 세련된 매너 등을 통해서 사람들의 이목과 관심받는 걸 좋아하면서 하는 신앙생활 말입니다. 물론, 이런 게 다 조금씩은 필요한 거긴 하지만, 뭔가 좀 이상하지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신앙생활을 사후를 대비한 일종의 보험 정도로 여긴 것입니다.

 

네, 아직 이런 상태가 바로 한 사람의 거듭남 초기 상태이며, 기특하게도 신앙생활이라는 걸 시작은 했지만, 아직은 머리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가슴 신앙으로 가려면 아직 한참 멀었죠. 그러나 주님은 모든 사람이 다 그 연약함으로 인해 이런 순서로밖에는 진행될 수 없음을 아시기 때문에 이런 잘난 체와 실수를 허락하십니다. 제가 선을 넘지 않도록 보살피시면서 말이죠...

 

3, 대1 때 시작된 이런 상태변화가 6학년 3반이 된 지금 돌아보면 몇 번 더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때그때 혹시 필요하면 더 나누겠습니다.

 

오늘 내용대로라면, 저 유명한 누가복음 15장, 돌아온 탕자의 비유 앞부분,

 

11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15:11-19)

 

에서, ‘스스로 돌이켜’ 부분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하는 부분들이 바로 이 사람 안에 주님이 넣어두신 리메인스를 주님이 이때 꺼내쓰신 예가 아닐까 싶고,

 

또, 스베덴보리를 통해 주님이 알려주신 바에 의하면, 아담으로 시작, 나중에 므두셀라, 라멕으로 이어지는 태고교회, 이 교회의 변질과 타락, 황폐화로 인한, 자기 사랑, 세상 사람의 광풍 한 가운데 종말의 때에 등장하는 ‘노아’ 말인데요, 이 ‘노아’가 바로 첫 교회시대인 태고교회의 리메인스라고 합니다. 한 개인에 있어 리메인스가 하는 저런 역할처럼 말입니다.

 

참고로, 창세기 아브라함 전까지는 그 등장하는 모든 인물명은 사실은 신앙명, 교리명, 교회명을 말하는데요, 그러니까 ‘아담’하면 ‘아담’이라는 신앙을 가진 교회, ‘’하면 ‘’이라는 신앙을 가진 교회 등등 말이죠. ‘노아’ 역시 그 당시 정말 희귀했던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신앙을 끝까지 붙든 사람들과 그 교회, 그 신앙을 말합니다. 그런 신앙의 사람들, 그런 교회를 ‘노아’라는 이름으로 부른 것이지요. //

 

두 번째 글입니다.

 

십일조’의 속뜻 (2025/3/11)

 

오늘은 특별히 우리의 헌금 생활 중 십일조에 대하여, 그 아르카나(arcana, 秘義, 속뜻)에 대하여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십일조에 관한 거의 첫 본문이라 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창세기 14장, 아브람이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 드린 부분입니다.

 

17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로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18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 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14:17-20)

 

여기 20절,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 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에 나오는 이 ‘십 분의 일’에 관하여, 창세기 주석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38번 글을 보면 이렇게 풀이하고 있습니다.

 

십일조(tithes)가 리메인스(remains)를 상징한다, 가리킨다는 사실은 앞에서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리메인스라는 것은 사랑과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 선행, 인애)의 모든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 사랑의 모든 상태, 이웃 사랑의 모든 상태를 말하며,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순진함(innocence)과 평화(peace)의 모든 상태, 곧 천국의 모든 상태이며, 주님은 이런 상태, 이런 리메인스를 거듭남의 과정을 걷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이 상태들이 사람에게 그 유아기 때부터 주어져 어른이 되면서 점점 줄어들지만, 그러다가 거듭남이 시작되면 사람은 다시 이번에는 새로운 리메인스를 받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주님이 주시는 새 생명입니다. 사람이 진정 사람이 되는 것은 바로 이 리메인스로부터, 또는 리메인스에 의해서이며, 만약 사람에게 이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상태가 없다면, 그래서 결국 순진함의 상태가 없다면 사람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며, 그때는 오히려 짐승보다도 더 최악이 됩니다. 사람은 순진함이 있어 자기도 모르게 점점 더 생명의 다른 상태들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본문에서 말하는 리메인스는 시험을 이김으로써 얻는 리메인스입니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싸워 이긴 후, 멜기세덱에게 바친 십일조를 가지고 이 리메인스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 리메인스는 사랑의 모든 상태, 곧 사랑의 모든 천적인 것들인데, 주님도 마리아로 유전한 인성을 입고 계신 동안은 지속적인 싸움과 이김을 통해서 힘들게 습득하신 것입니다. 이것으로 주님은 끊임없이 주님의 신적 본성과 결합하셨고, 같은 방식으로 주님의 인성이 사랑, 곧 생명 그 자체, 곧 여호와가 되실 때까지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스베덴보리의 글들은 천계(天界), 초월적 지혜의 나라의 일을 매우 제한적인 지상의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는지, 원문은 사실 이보다 더 간략하고 문장과 문장 사이, 글과 글 사이 무슨 배경지식이 없으면 한 번에 이해하기가 다소 좀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위 주석을 아래 제가 이해한 바로 좀 쉽게 풀어보았습니다.

 

모든 사람은 거듭남의 유무와 관계없이 일단은 주님으로부터 첫 번째 리메인스라는 것을 선물로 받습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어떻게든 결국 선 쪽으로 기울어지는데요, 물론 사람들 중에는 끝까지 주님을 거절하여 선보다는 악을, 천국보다는 지옥을 선택, 결국 멸망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말입니다. 주님의 이 첫 번째 선물로 말미암아 사람은 여러 우여곡절 끝에 거듭남의 여정을 시작하며, 일단 거듭남이 시작되면 이제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두 번째 리메인스를 또 선물로 받습니다. 이 선물로 말미암아 사람은 생명, 곧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발자국을 떼는 것이지요. 사람은 주님의 선물, 주님의 호의, 주님의 돌보심 없이는 결코 거듭남의 여정을 시작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탐욕과 거짓의 덩어리, 곧 악의 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 아, 그리고 참고로, 우리 특히 개신교인들은 사람의 거듭남의 시작을 그가 예수님 영접 기도를 따라 했을 때부터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거 아닙니다. 어떤 사람의 거듭남이 언제 시작되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오직 주님만이 아십니다. 우리 주변에 교회를 안 다니는 데도 선한 사람들, 법 없이도 살 사람들이 있는 걸 보면 말입니다. 그러니 함부로 판단하시면 안 됩니다.

 

이것입니다. 사람 안에 주님이 넣어 두신, 주님으로 말미암은 이 리메인스라는 것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십 분의 일’로 표현된,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십일조’라 일컫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무슨 이쁜 짓을 하고, 무슨 기특한 행실을 보일 수 있는 것도 다 우리 안에 넣어 두신 이 리메인스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이것으로 멜기세덱, 곧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주님을 공경하였습니다. ‘주님, 이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이것으로 제가 롯을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사례한 것입니다. 이것이 십일조의 아르카나입니다.

 

이 멜기세덱 본문을 보다 더 온전히 이해하려면 그돌라오멜, 소돔왕, 그리고 롯과 아브람의 속뜻, 그 아르카나가 무엇이며, 그들 간 전쟁과 그 결과, 그리고 멜기세덱과 그가 들고 온 ‘떡과 포도주’의 아르카나가 무엇인지 등을 알아야 하지만, 그것은 내용이 깊어지므로 다음에 기회 있을 때 정식으로 다루기로 하고요, 여기서는 간략히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님도 인성을 입고 오셔서 처음에는 외견상의 선과 진리(apparent good and truth), 겉으로 보기엔 선이요, 진리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닌 것, 가짜인 것들과 끊임없이 싸우셨습니다. 그것이 아브람과 그돌라오멜 간 전쟁입니다. 아브람은 주님의 합리성(合理性, rationality)을, 그돌라오멜은 외견상 진리를, 롯은 주님의 겉 사람을 각각 가리킵니다. 겉 사람과 합리성은 같이 있어야 하는데 겉 사람이 합리성을 떠나 가짜 진리에게 사로잡힌 것을 롯이 아브람을 떠나 소돔에 있다가 그돌라오멜에게 사로잡힌 것으로 본문은 말씀하고 있는 것이며, 주님이 이 가짜들과 싸워 이기신 후, 주님의 겉 사람이 속 사람이신 여호와 하나님께로 온전히 인도된 것을 아브람이 롯을 데리고 멜기세덱을 만난 것과 그의 ‘떡과 포도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네, 여기서는 이 정도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렇게 간략하게라도 소개를 하고 넘어가는 것은, 말씀(The Word)은 정말 철저하게 상응(相應, correspondence)으로 기록되었다는 것과, 그래서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깊은 아르카나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신명기 1428, 29절입니다.

 

28매 삼 년 끝에 그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29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 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14:28-29)

 

십 분의 일’을 가지고 주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를 말씀하시는 본문입니다. 주님은 이 ‘십 분의 일’을 가지고 레위인과 객,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십니다. 이들은 겉뜻으로도 그렇지만 속뜻으로도 영적 결핍을 뜻합니다. 주님은 거듭남을 시작한 사람들이 주님이 주시는 두 번째 리메인스를 가지고 이런 영적 결핍 해결하기를 원하십니다. 거듭남의 여정 가운데 있는 우리는 정말 그래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우리의 이웃들에게 있는 이 영적 결핍들을 돌아보고 채워주는 일에 이 두 번째 리메인스를 열심히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아브라함의 십일조 본문을 통해, 그리고 오늘 주님 말씀 마태복음 본문을 통해 우리가 확인하는 사실들이 있습니다.

 

먼저, 십일조를 드린다, 십일조 헌금을 한다는 것은 단순한 헌금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주님이 넣어주신 선한 능력, 리메인스를 잘, 그리고 열심히 사용하여 더욱 주님으로부터 더욱더 많은 리메인스가 우리 속 사람 안에 공급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드리는 개념이 아닌, 주님의 것이 우리 안에 쌓이는 개념입니다.

 

말라기 말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3:10)

 

여기 ‘시험하여’는 ‘증명하여(prove, verify)라는 뜻입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 자신의 신앙을 입증하라, 증명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때, 주님은 우리 안에 더욱더 넘치게 주님의 리메인스를 공급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넘치는 리메인스로 우리는 더욱더 쉽게 거듭남의 여정, 곧 영적 싸움을 싸울 수 있습니다.

 

또 하나, 내 것을 드리는 게 아니라 사실은 주님의 것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리메인스라는 것을 우리는 두 번 다 거저 받았습니다. 우리가 악을 이겨 낼 근본 능력을 우리도 모르게 주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것으로 살며, 영적 전투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사실은 모두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 사실을 시인하며 사는 삶은 복된 삶이며,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게 되며, 우리가 드리는 것이 사실은 우리 안에 리메인스로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오늘 본문, 주님 말씀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3:23)

 

박하와 회향, 근채의 십일조는 외적인 십일조입니다. 정의와 긍휼, 믿음의 십일조는 내적인 십일조입니다. 이 둘은 같이 갑니다. 외적 십일조는 내적 십일조가 겉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는 사람의 신앙이 온전할 수 없고, 반대로 온전한 신앙의 사람이 십일조 헌금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

 

참고로, 오늘 본문 중 리메인스가 나오는 부분은 2절,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입니다.  

 

창세기 1장을 이렇게 푸는 설교는 아마 처음이시지들 싶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1장을 주로 천지창조의 관점으로만 보고 싶어 하지만, 주님은 말씀을 그런 무슨 역사 다큐로 기록하는 거는 관심 없으시고, 대신 사람의 거듭남의 여러 단계를 당시 고대인들의 언어 습관을 따라 재미있게 표상, 상징하기를 원하셔서 오직 상응으로만 기록하셨습니다. 즉 우리가 아는 천지창조의 육일을 사람의 거듭남의 여섯 단계로 그리신 것이지요. 우리의 관심과 주님의 관심이 참 다릅니다.

 

말씀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았으며, 그래서 거기엔 주님의 주된 관심, 즉 주님과 천국, 교회, 그리고 종교적 신앙에 관한 것들이 들어있습니다. 말씀은 그 일점일획조차도 모두 그 안에 이런 내적 의미들이 들어있는데 이것을 아르카나(arcana, 라틴, secret, 秘義)라 합니다. 아르카나는 오직 주님으로만 말미암기 때문에 신성(Divine)하며, 생명이 있고, 그래서 아르카나가 들어있는 성경만 말씀입니다. 성경 66권 중, 구약은 창, 출, 레, 민, 신, 수, 삿, 삼상, 삼하, 왕상, 왕하, 시, 사, 렘, 애, 겔, 단, 호, 욜, 암, 옵, 욘, 미, 나, 합, 습, 학, 슥, 말 (29), 신약은 마, 막, 눅, 요, 계 (5) (AC.10325), 이렇게 34권만 말씀입니다.

 

사람이 영과 육으로 되어 있는 줄은 알지만, 실제로 자기 영을 보신 분은 없으신 것처럼, 말씀 또한 그렇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지으신 것처럼 말씀 또한 그렇게 영과 육으로, 곧 속뜻과 겉뜻으로 기록하셨습니다. 우리가 자기의 영을 처음 보면 무척 낯설 것 같은데, 그런 것처럼 말씀 또한 그 속뜻이 이렇게 낯선 건 어쩌면 당연하지 싶습니다. 주님의 은혜와 본인의 간절함, 그리고 사모함으로 이 간격이 빠르게 좁혀질 줄 믿습니다.

 

참고로, 우리가 말씀을 속뜻으로 읽고자 하는 이유는, 첫째는, 우리가 곧 가게 될 본향 언어로 읽고 싶어서입니다. 천사들처럼 말입니다. 둘째는, 오리지날 주님의 마음을 알고, 남은 삶을 그렇게 살고 싶어서입니다. 말씀을 겉뜻으로 읽어온 지난날은 끝없이 원어가 어떠니, 누가 이걸 어떻게 풀었니 하는 연속이었습니다. 말씀은 세상 지식으로 푸는 게 아닙니다.

 

창세기를 시작하게 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설교

2025-07-20(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7-20(D1)-주일예배(2607, 창1,1-5, AC.16-23), ‘첫째 날, 리메인스’의 속뜻.pdf
0.56MB
창1,1-5, AC.16-23.pdf
0.39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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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리메인스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배경

 

561

그러면 리메인스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리메인스는 사람이 유년기부터 주님의 말씀을 통해 배워 그의 기억에 강한 인상을 심어준 선과 진리뿐 아니라, 거기서 기원한 모든 상태, 가령, 영유아기 순진무구한 상태, 부모, 형제, 선생님과 친구를 향한 사랑의 상태,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 및 가난한 자, 빈궁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상태 등, 한 마디로, 선과 진리에 속한 모든 상태 또한 가리킵니다. 선과 진리와 함께 기억에 각인된 이런 상태를 일컬어 리메인스라 합니다. 이것은 주님에 의해 사람 안에 보관되는데, 이때 주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조금도 눈치 못 채게 조심조심 그의 속사람 안에 쌓아가십니다. 이것은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즉, 악과 거짓에 관련된 것들하고는 철저히 격리됩니다. 이 모든 상태는 그 가운데 아주 작은 것조차 잃는 것이 없도록 주님에 의해 사람 안에 보존됩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도록 전에 이런 경험을 했는데요, 사람의 모든 상태는 그의 영유아 때부터 아주 늙었을 때까지 내세에 그대로 보존될 뿐만 아니라 다시 체험되기도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실제로 사람의 상태는 그가 현세에 살면서 처음 겪었던 상태 그대로 정확히 다시 체험됩니다. 우리 기억에 아로새겨진 선과 진리뿐 아니라, 우리가 경험한 모든 이노센스나 체어리티도 마찬가지, 즉, 하나도 잃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악과 거짓의 상태가 재발될 때, 곧, 이들 악과 거짓이 개별적이든 전체적이든, 심지어 아주 작은 것조차 역시 고스란히 남아 있고, 다시 체험되는데요, 이때는 주님에 의해 선한 상태로 누그러뜨려집니다. 이 모든 사실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에게 리메인스가 전혀 남아 있지 않게 되면, 그는 반드시 영원한 지옥살이, 곧, 영원히 지옥에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AC.468번 글을 보시기 바랍니다.) But what are remains? They are not only the goods and truths that a man has learned from the Lord’s Word from infancy, and has thus impressed on his memory, but they are also all the states thence derived, such as states of innocence from infancy; states of love toward parents, brothers, teachers, friends; states of charity toward the neighbor, and also of pity for the poor and needy; in a word, all states of good and truth. These states together with the goods and truths impressed on the memory, are called remains, which are preserved in man by the Lord and are stored up, entirely without his knowledge, in his internal man, and are completely separated from the things that are proper to man, that is, from evils and falsities. All these states are so preserved in man by the Lord that not the least of them is lost, as I have been given to know from the fact that every state of a man, from his infancy to extreme old age, not only remains in the other life, but also returns; in fact his states return exactly as they were while he lived in this world. Not only do the goods and truths of memory thus remain and return, but also all states of innocence and charity. And when states of evil and falsity recur—for each and all of these, even the smallest, also remain and return—then these states are tempered by the Lord by means of the good states. From all this it is evident that if a man had no remains he must necessarily be in eternal damnation. (See what was said before at n. 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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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진도를 나가기 전에 먼저, 홍수 이전 교회의 상황은 어땠는지를 좀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배경

 

560

계속해서 진도를 나가기 전에 먼저, 홍수 이전 교회의 상황은 어땠는지를 좀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는, 후에 일어난 교회들의 상황들과 같았다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 주님 강림 전 유대교회의 경우나, 주님 강림 후 기독교회의 경우처럼, 참 신앙 지식의 부패와 타락, 뒤집힘 및 불순물을 섞음 등이 되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세히는, 홍수 전 교회에 속한 사람의 경우, 그는 시간이 흐르면서 무서운 신념, 곧 소름 끼치는 망상을 품게 되었고, 신앙에 속한 선과 진리를 역겨운 갈망, 욕망에 철저히 잠기게 하여 그 결과, 그들 안에 리메인스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을 지경까지 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이 상태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사실은 스스로를 질식시킨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리메인스 없이는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AC.530), 사람을 짐승 수준의 삶에서 인간의 삶으로 고양하는 것이 바로 이 리메인스이기 때문입니다. 리메인스를 가지고, , 주님에게서 온 리메인스를 통해서, 사람은 사람이 될 수도, 무엇이 선이요, 진리인지를 알 수도, 온갖 종류의 일들을 생각할 수도,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리메인스 그 안에는 영적, 천적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Before proceeding further we may mention how the case was with the church before the flood. Speaking generally, it was as with succeeding churches, as with the Jewish church before the Lord’s advent, and the Christian church after his advent, in that it had corrupted and adulterated the knowledges of true faith; but specifically, as regards the man of the church before the flood, he in course of time conceived direful persuasions, and immersed the goods and truths of faith in foul yearnings, insomuch that there were scarcely any remains in them. When they came into this state they were suffocated as if of themselves, for man cannot live without remains; for, as we have said, it is in the remains that the life of man is superior to that of brutes. From remains, that is, through remains from the Lord, man is able to be as man, to know what is good and true, to reflect upon matters of every kind, and consequently to think and to reason; for in remains alone is there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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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아(Noah), 홍수 때까지 남은 몇 교회, 태고교회의 리메인스’(remains)

 

창5 개요

 

468

이전 장들을 통해 지금까지 말씀드리고 보여드린 내용들을 볼 때 분명한 건, 이름은 이교(異敎, heresy)나 교리(敎理, doctrine)를 의미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본 장에 나오는 이름들은 사람들이 아닌 어떤 것들, 현 맥락에서는 교리들이나 교회들, 곧 태고교회로부터 이 ‘노아’ 때까지 그들이 겪은 변화들에도 불구하고 보존된 교리나 교회들을 의미함을 보실 수 있습니다. 모든 교회의 경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줄어들다가 결국엔 몇 개 정도만 남게 되는데, 그 가운데 홍수 때까지 남은 이들 몇 교회를 가리켜 ‘노아’라 했던 것입니다. From what has been said and shown in the foregoing chapter, it is evident that by names are signified heresies and doctrines. Hence it may be seen that by the names in this chapter are not meant persons, but things, and in the present instance doctrines, or churches, which were preserved, notwithstanding the changes they underwent, from the time of the most ancient church even to “Noah.” But the case with every church is that in course of time it decreases, and at last remains among a few; and the few with whom it remained at the time of the flood were called “Noah.”

 

[2] 참된 교회가 줄어들다가 몇 안 남게 되는 건, 다른 교회들 역시 그렇게 줄어든 걸 보면 분명합니다. 남겨진 자들을 말씀에서는 ‘리메인스’(remains), ‘남은 자’(remnant)라 하고, 또 말하기를, ‘가운데’(in the midst), 혹은 ‘중간에’(middle), ‘땅에’(of the land) 있다고도 합니다. 이런 게 보편적이듯 특별한 경우 역시 그렇습니다. 즉 교회의 경우처럼 각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요. 각 사람 안에 있는 리메인스가 주님에 의해 보존되지 않으면 사람은 영원히 소멸하고 말기 때문인데, 영적, 천적 생명이 그의 리메인스 안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또한 일반적 혹은 보편적으로, 만일 교회, 즉 참 신앙이 몇 사람 안에라도 늘 남아있지 않으면 인류는 소멸됩니다. 잘 알려진 대로, 한 도시, 아니 간혹 한 나라 전체가 단지 몇 사람 덕분에 구원을 받곤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관련된 이런 일이 인체의 경우에도 있습니다. 심장이 괜찮은 한 이웃한 장기들 또한 괜찮을 수 있습니다만, 만일 심장이 약해지면 인체의 다른 장기들 역시 공급이 중단되어 그 사람은 죽습니다. 마지막 리메인스들이 바로 ‘노아’라고 하는 교회들입니다. (창6:12와 다른 구절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온땅이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That the true church decreases and remains with but few, is evident from other churches which have thus decreased. Those who are left are in the Word called “remains,” and a “remnant,” and are said to be “in the midst,” or “middle,” “of the land.” And as this is the case in the universal, so also it is in the particular, or as it is with the church, so it is with every individual man; for unless remains were preserved by the Lord in everyone, he must needs perish eternally, since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are in the remains. So also in the general or universal—if there were not always some with whom the church, or true faith, remained, the human race would perish; for, as is generally known, a city, nay, sometimes a whole kingdom, is saved for the sake of a few. It is in this respect with the church as it is with the human body; so long as the heart is sound, life is possible for the neighboring viscera, but when the heart is enfeebled, the other parts of the body cease to be nourished, and the man dies. The last remains are those which are signified by “Noah”; for (as appears from Gen. 6:12, as well as from other places) the whole earth had become corrupt.

 

[3] 보통, 교회뿐 아니라 각 개인 안에 있는 리메인스에 관하여 많은 말씀들이 예언서에 보면 나옵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입니다. Of remains as existing in each individual as well as in the church in general, much is said in the prophets; as in Isaiah:

 

3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 안에 생존한 자 중 기록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 4이는 주께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기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중에서 청결하게 하실 때가 됨이라 (사4:3-4) He that is left in Zion, and he that remaineth in Jerusalem, shall be called holy to him, even everyone that is written unto lives in Jerusalem, when the Lord shall have washed the filth of the daughters of Zion, and shall have washed away the bloods of Jerusalem from the midst thereof, (Isa. 4:3–4)

 

거룩함(holiness)으로 서술되고 있는 위 구절에서, 리메인스는 교회의 리메인스 및 교회에 속한 사람 또한 의미하고 있습니다. 시온과 예루살렘의 ‘남은 자들’을 단순히 그들이 ‘남겨졌다’는 이유 만으로 거룩하다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in which passage holiness is predicated of the remains, by which are signified the remains of the church, and also of a man of the church; for “those left” in Zion and Jerusalem could not be holy merely because they were “left.” Again:

 

20그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21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사10:20-21) It shall come to pass in that day, that the remains of Israel, and such as are escaped of the house of Jacob, shall no more again stay upon him that smote them, but shall stay upon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 in truth. The remains shall return, the remains of Jacob, unto the mighty God. (Isa. 10:20–21)

 

예레미야에서는 In Jeremiah:

 

그날 그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찾아내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남긴 자를 용서할 것임이라 (렘50:20) In those days, and in that time, the iniquity of Israel shall be sought for, and there shall be none; and the sins of Judah, and they shall not be found; for I will pardon him whom I shall make a remnant. (Jer. 50:20)

 

미가서입니다. In Micah:

 

야곱의 남은 자는 많은 백성 가운데 있으리니 그들은 여호와께로부터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 같아서 (미5:7) The remains of Jacob shall be in the midst of many peoples, as the dew from Jehovah, as the showers upon the grass. (Micah 5:7)

 

[4] 한 사람 혹은 교회의 잔여물 혹은 리메인스는 십 분의 일(the tenths)로도 표현되었는데, 이 십 분의 일은 거룩했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 십(10)을 가진 수 또한 거룩했고, 그래서 ‘’(10)은 리메인스를 서술하는데 쓰이고 있습니다. 이사야입니다. The residue or remains of a man, or of the church, were also represented by the tenths, which were holy; hence also a number with ten in it was holy, and “ten” is therefore predicated of remains; as in Isaiah:

 

12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13그중에 십 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사6:12-13) Jehovah shall remove man, and many things [shall be] left in the midst of the land; and yet in it [shall be] a tenth part, and it shall return, and shall be for exterminating; as an oak, and an ilex, when the stock is cast forth from them, the holy seed is the stock thereof; (Isa. 6:12–13)

 

여기 남아 있는 것을 가리켜 ‘거룩한 씨’라 하고 있습니다. 아모스에서 where the residue is called a “seed of holiness.” And in Amos: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 중에서 천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암5:3) Thus saith the Lord Jehovah, The city that goeth forth a thousand shall have a hundred left, and that which goeth forth a hundred shall have ten left to the house of Israel. (Amos 5:3)

 

이 구절들과 다른 많은 데에서 그 속뜻으로는 우리가 지금까지 말해온 ‘리메인스’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한 도시가 거기 있는 교회의 리메인스 덕분에 보존된다는 사실은 소돔 관련,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을 보면 분명합니다. In these and many other passages, in the internal sense are signified the “remains” of which we have been speaking. That a city is preserved for the sake of the remains of the church, is evident from what was said to Abraham concerning Sodom: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18:32) Abraham said, Peradventure ten may be found there; and he said, I will not destroy it for ten’s sake. (Gen. 18:32)

 

창6:12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창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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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4, 창1:6-7,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AC.24-25)

※ AC.24, 창1:6-7,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AC.24-25) 6-7절,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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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5, 창1:6-7,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AC.24-25)

※ AC.25, 창1:6-7,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AC.24-25) 6-7절,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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