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아브람 시절 일어난 일 : 아브람과 롯

 

 

7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And there was strife between the herdmen of Abram’s cattle and the herdmen of Lot’s cattle; and the Canaanite and the Perizzite were then dwelling in the land.8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And Abram said unto Lot, Let there be no contention, I pray, between me and thee, and between my herdmen and thy herdmen, for we are men brethren. 9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Is not the whole land before thee? Separate, I pray, from me; if to the left hand, then I will go to the right; or if to the right hand, then I will go to the left. 10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And Lot lifted up his eyes, and saw all the plain of Jordan, that it was all well watered, before Jehovah destroyed Sodom and Gomorrah, like the garden of Jehovah, like the land of Egypt in coming to Zoar. 11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And Lot chose him all the plain of Jordan; and Lot journeyed from the east; and they were separated, a man from his brother. (창13:7-11)

 

※ 개역 성경에는 롯이 ‘동으로 옮기니’로 되어 있고, KJV나 NIV 번역에도 ‘toward’, 또는 ‘eastward’로 되어 있지만, 영적 의미에 맞는 번역은 ‘from the east’, 즉 ‘동쪽으로부터’입니다.

 

사람의 겉 사람을 이루는 세 가지 능력이 있는데, 그것은 합리성과 기억의 지식과 외면의 감각적인 것이다. 합리성은 안쪽에 있고, 기억의 지식은 바깥쪽에 있으며 감각적인 것은 가장 바깥쪽에 있다. 합리성을 통해서 속 사람은 겉 사람과 결합해 하나가 된다. (천국의 비밀 1589, 이순철 역) There are three faculties which constitute the external man, namely, the rational, that of memory-knowledge, and the external sensuous. The rational is interior, the faculty of memory-knowledge is exterior, and this sensuous is outermost. It is the rational by means of which the internal man is conjoined with the external; and such as is the rational, such is the conjunction. (AC.1589, Clowes 역)

 

※ 이는 오늘 본문 창13: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중 ‘소알까지 애굽 땅과 같았더라’(Like the land of Egypt in coming to Zoar)에 관한 AC 주석 내용 일부입니다.

 

 

오늘은 아브람(Abram)과 롯(Lot)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아브람은 아브라함의 예전 이름이고, 롯은 아브람의 형제 하란의 아들, 그러니까 그의 조카입니다.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창11:27)

 

오늘 본문 창13은 주님의 겉 사람을 다루는데요, 이는 나중에 주님의 속 사람과 결합하게 되지요. 겉 사람은 인간 본질(the human essence)이고, 속 사람은 신(神) 본질(the Divine essence)입니다. 여기서 전자는 롯으로, 후자는 아브람으로 표상(表象, representative)됩니다. 아브람은 인성 가운데 계시는 주님(the Lord as to his human essence)을 표상합니다. 참고로 창12부터 이어지는 아브람,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주님의 영유아 아주 어린 시절부터 청년기까지의 상태를 표상합니다.

 

새 교회에서는 사람에게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는 두 마음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속 사람은 무엇이고 겉 사람은 무엇일까요? 속 사람은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마음으로 주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반면 겉 사람은 속 사람보다는 바깥쪽에 있는 마음이며, 그곳에는 인간의 자아가 있습니다. 사람이 주님과 주님의 나라 같은 영적인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속 사람으로부터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이나 귀 같은 감각을 통해 세상과 만나고 교제하는 것은 겉 사람으로부터 하는 것이고요. 주님이 우리 인간을 지으실 때, 이렇게 속 사람과 겉 사람을 만들어 주신 이유는, 속 사람을 통해 주님의 생명이 끊임없이 겉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오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살지 못하고,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정말로 ‘산다’ 할 수 있으려면 말입니다. 이 ‘산다’는 상태는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해 주님과 연결된 상태를 말하는데 인류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며, 특히 소위 신앙인이라 하는 자들 역시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별반 다르지 않다’ 한 이유는, 그 주된 관심사와 그로 인한 사고방식이 다분히 ‘’에 기반한, 세상을 더 중시하는 가치관이기 때문입니다. ‘’이 아니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신앙생활을 해도 자신의 노후나 자녀의 미래를 위해서이지 주님을 사랑하고 천국을 사모해서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말씀처럼 우선순위가 분명해야 비로소 ‘산다’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연결되고, 그렇게 해서 하나가 되는 것은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질서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거듭나기 전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떨어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겉 사람의 자아가 속 사람 안에 계신 주님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듭나기 전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즉 사람이 이런 상태에 있다는 것은, 그가 아직 거듭나지 못했거나 거듭나고 있는 중이라는 말입니다. 그가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녔어도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대개 속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천국의 비밀’ 1594번 글에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첫째는 사람들이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삶 가운데 있기(he lives in corporeal and sensuous things) 때문이며, 둘째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 빠져 있기(he lives in no charity, and when he is living in no charity it cannot be apparent to him that a life of the love of self and its yearnings is so contrary to heavenly love)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종교를 가지고 있거나 가지고 있지 않거나 물질적인 사람들은 대부분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은 믿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사람들은 영적인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속 사람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또 물질적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섬기지 않습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을 섬길 때는 오로지 자기에게 도움이 될 때뿐입니다. 그들은 심지어 주님도 자신을 섬기기를 바랍니다. 참된 진리 안에 있다가 일이 뜻대로 안 되면 진리를 떠나는 분들이 있는데 그런 분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진리를 떠나는 까닭은 대개 진리를 섬기기보다 진리가 자신을 섬기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내면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 둘은 사람이 영적으로 거듭날 때마다 점점 가까워지고 결국 하나가 됩니다. 사람 안에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는 것처럼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주님 안에도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에게 있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갈등하고 그 갈등을 극복하느냐에 대한 말씀입니다. 본문 7절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문자적 의미, 그러니까 기록된 글자의 뜻 그대로만 보면, 아브람과 롯은 삼촌과 조카 사이입니다. 그러나 속뜻으로 보면, 그러니까 거기에 담긴 영적인 뜻, 영적 존재인 천사들이 읽는 방식으로 보면, 아브람은 주님의 내면에 있는 속 사람을 뜻하고, 롯은 겉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는 것은 주님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다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속 사람은 선과 진리에 따라 살려 하고, 겉 사람은 세상 욕망과 쾌락을 좇아 살려는 것입니다. 그때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아브람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이 그 땅에 거주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모두 주님 안에 있는 악하고 거짓된 것을 뜻합니다. 즉 가나안 사람은 주님이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로부터 받은 유전 악을 뜻하고, 브리스 사람은 유전 악에 바탕을 둔 거짓된 생각들을 뜻하는 것이지요. 주님이 그런 악하고 거짓된 것을 가지고 태어나신 것은, 그것들을 통해 지옥의 시험을 불러들이고, 그 불러들인 시험을 이기심으로 해서 지옥을 완전히 정복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 이런 근본적인 것들을 교통 정리하신 후라야, 곧 정하신 선을 벗어나 천지 분간 못하고 날뛰던 지옥을 원래 자리로 돌아가게 하신 후라야 영계를 포함, 이 피조 세계 전체가 균형을 되찾고, 그래야 인간 구원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2차 세계 대전 때, 먼저 베를린을 점령당한 독일의 항복에 이어 마지막까지 발악하던 일본마저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두 곳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항복, 전 세계 온 유럽과 아프리카에 이어 아시아에도 종전이 오고, 드디어 우리 대한민국에도 광복의 날이 온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은 그런 방법으로 세상에 오실 때 입으셨던 불완전한 인간을 신성한 인간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8절입니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아브람이 롯에게 말하는 것은 주님의 속 사람이 겉 사람을 향해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또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이 말은 겉 사람과 속 사람은 하나가 되어야 하며, 그러므로 다투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주님도 처음에는 당신 안에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면의 갈등을 경험하면서 비로소 당신 안에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들이 원하는 바가 서로 다르다는 것, 그리고 결국에는 둘이 하나로 결합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으셨습니다. 그것을 깨닫는 때가 앞에서 아브람이 롯에게 말하는 순간입니다. 아브람이 계속해서 롯에게 말합니다. 9절,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주님의 속 사람이 겉 사람에게 ‘나를 떠나가라’고 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주님의 겉 사람 안에 속 사람을 대적하는 악하고 거짓된 것들이 있는데 그것이 떠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던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들이 바로 그 악하고 거짓된 것들입니다. 그들이 떠나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결합해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것들에게 떠나가라고 명령하십니다.

 

※ 여기 나를 떠나가라’의 앞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와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에 대한 내용 역시 주석에는 있으나 제가 그걸 쉽게 풀어드리지를 못하겠어서 부득이 뺐습니다. 나중에 좀더 준비가 되면 그때 싣겠습니다.

 

그러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봅니다. 그 모습을 10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롯이 눈을 들었다는 것은 속 사람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영적인 빛으로 인해 주님의 겉 사람의 눈이 밝아졌다는 뜻입니다. 그때 주님은 무엇을 보셨을까요? 요단 지역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말씀의 표현을 빌리면,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요단 지역의 이런 모습은 주님의 겉 사람 안에 있는 악들이 사라지고, 그렇게 해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결합했을 때 주님의 겉 사람의 모습입니다. 물이 넉넉한 요단 지역은 겉 사람 안에 있는 교회에 선과 진리들이 많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첫째는 요단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영적으로는 주님의 교회, 또는 교회를 이루는 선과 진리들을 뜻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개인의 내면에 있는 교회는 궁극적으로는 겉 사람 안에 세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겉 사람의 말과 행동이 곧 교회를 이루는 진리요 선이기 때문입니다. 또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라고 했는데 이것은 주님의 겉 사람 안에 세워지는 교회가 태고교회처럼 순수하고 지혜롭다는 뜻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의 여호와의 동산은 에덴동산을 가리키는 말이며, 에덴동산의 영적 의미는 태고교회의 순수한 지혜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또 ‘소알까지 애굽 땅과 같았더라’라고 했는데 이 말은 그 교회의 지식들 속에 선이 들어있다는 뜻입니다. 소알이라는 지역은 선에 대한 애정을 뜻하고, 애굽은 지식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지식 안에 선이 들어있다는 것은, 그들의 지식이 세상을 위한 지식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요단 지역의 이러한 모습은 주님의 겉 사람 안에서 속 사람에 대항하는 것들이 물러났을 때의 겉 사람의 아름답고 순수한 모습입니다. 11절입니다.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여기서 롯은 주님의 겉 사람 전체를 의미하지 않고, 겉 사람 안에서 속 사람에게 대적하는 악들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롯이 떠나는 것은 주님이 겉 사람 안에 있는 악들과 결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이 결별이 속 사람과 겉 사람에 대한 주님의 분명한 인식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무엇이고, 겉 사람 안의 악이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인식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까닭은, 속 사람과 겉 사람에 대해 모르면 선을 행하거나 악을 행하거나 모두 자기가 하는 것인 줄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거듭남에 있어 치명적인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선은 속 사람 안에 계신 주님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는 일이고, 모든 악은 겉 사람을 통해 들어오는 지옥의 영들의 사주(使嗾, 남을 부추겨 좋지 않은 일을 시킴)로 이루어지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분명히 알 때 신앙인들은 교만해지지 않고, 또한 지나친 자기 비하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33장, ‘천국과 인류는 결합되어 있다’(291-302) 292번 글입니다. 위 ‘겉 사람을 통해 들어오는 지옥의 영들’에 대한 이해를 돕는 글입니다.

 

각 사람에게는 선한 영들과 악한 영들이 와있다. 선한 영들을 통해서는 사람은 천국과 결합되고, 악한 영들을 통해서는 지옥과 결합된다. 이 영들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놓여 있는 중간 영계에 있다. 이곳에 대해서는 앞으로 특별히 다룰 것이다. 이 영들이 사람에게 오면 사람의 기억 전체 안으로 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생각 전체에 들어간다. 이때 악한 영은 사람의 악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선한 영은 선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들어간다. 이 영들은 자기들이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그들이 사람과 같이 있을 때, 그 사람의 모든 기억과 생각이 자기 것인 줄 안다. 또 그들에게는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태양계 내의 것은 아무 것도 그들 시각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204 주께서는 영들이 자기가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도록 각별히 배려하신다. 만일 그들이 알아차리면 사람에게 말을 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악한 영의 경우, 사람을 파괴하려 들기 때문이다. 악한 영들은 지옥과 결합되어 있으므로, 그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바로 사람의 영혼을, 즉 그의 신앙과 사랑을 파괴하고, 사람의 몸까지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들이 사람과 대화를 하지 않으면 그런 일이 없다. 이 경우, 그들은 자기의 말과 생각이 사람에게서 온 것임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서로 나누는 말도 사람에게서 온 것인데도 그들은 자기가 하는 생각과 말이 자기 것인 줄 믿는다. 그리고 누구나 자기 것은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영들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도록 그들이 모르는 제재를 받는다. 나는 여러 해 동안 계속되는 경험의 결과로 사람과 영들과의 이러한 결합에 대해 너무도 잘 알게 되었다. 내가 이보다 더 잘 아는 것이 없을 정도이다. (HH.292)

 

그리고 아래는 위 ‘주204’ 내용입니다.

 

204. 각 사람에게 와있는 천사들과 영들이 있다. 그들로 인해 사람은 영계와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것이다. (AC.697, 2796, 2886, 2887, 4047, 4048, 5846–5866, 5976–5993) 자기에게 와있는 영들이 없으면 사람은 살 수 없다. (AC.5993) 사람은 영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영들 또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AC.5862) 영들은 자기들이 말하고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사람에게 속한, 우리 태양계 내 그 어떤 것도 볼 수 없다. (AC.1880)

 

그러므로 부언하면, 우리는 우리의 오감(五感, 다섯 감각, 시, 청, 후, 미, 촉)을 조심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자칫 악한 영들을 통해 지옥과 연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아브람과 롯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아브람과 롯은 각각 주님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을 뜻합니다. 주님이 이렇게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자세히 설명하신 이유는, 주님은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을 가르치시며, 그러므로 속 사람과 겉 사람은 하나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처음에는 당신 안에 속 사람이 있고, 겉 사람이 있다는 것을 모르셨습니다. 그래서 당신 안에 계신 여호와를 사모하거나, 또는 그와는 반대로 세상으로 마음이 기울어질 때 그것이 모두 같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 줄 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당신 안에 여호와가 주장하시는 마음이 있고, 지옥이 주장하는 마음이 있어 서로 다툰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러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주님이 겉 사람의 악과 결별하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일 뿐이고, 이것은 앞으로 주님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치열한 전쟁을 예고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11절에서 롯은 요단 지역을 택해 떠났다고 합니다. 요단 지역은 영적으로는 주님의 교회가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롯이 요단 지역을 택했다는 것은 주님께서 당신의 겉 사람 안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허용하셨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개인의 내면에 세워지는 교회는 궁극적으로 겉 사람 안에 세워져야 하는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겉 사람의 허락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겉 사람이 스스로 교회가 되기를 결심할 때, 신앙인들의 내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동안 속 사람을 대적하던 악과 거짓들이 겉 사람의 중심으로부터 주변으로 옮겨가기 시작합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롯이 ‘동으로’(from the east) 옮겨가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동쪽은 주님과 주님의 교회가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롯은 동쪽 즉 주님의 교회가 설 자리인 겉 사람의 중심을 속 사람에게 양보하고 떠나가는 것입니다. 롯의 선택과 떠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도 주님과 같은 결단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결단이란 각자의 겉 사람 안에 교회를 세워야겠다는 결단입니다. 그런 결단이 설 때 속 사람을 대적하던 모든 악과 거짓들이 겉 사람의 중심으로부터 떠나갑니다. 새 교회 모든 성도에게 주님의 그런 은혜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사51:3)

 

아멘

 

 

2020-10-14(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5-03-30(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3-30(D1)-주일예배(2591, 창13,7-11), '주님의 아브람 시절 일어난 일, 아브람과 롯'.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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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5-03-30(D1)-주일예배(2591, 창13,7-11), '주님의 아브람 시절 일어난 일, 아브람과 롯'.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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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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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목자들에게 전하신 이유

 

 

8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눅2:8-14)

 

 

지난 시간에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을 당시에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한 역사적 사건만이 아니고요, 우리 신앙인들이 거듭나는 동안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는 것도 말씀드렸습니다. 내적 의미로 볼 때, 주님의 탄생은 신앙인들의 신앙 가운데로 주님이 가장 순수한 진리로 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믿는다, 신앙한다고 해서 모두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 안에 이웃에 대한 사랑, 곧 체어리티(charity)의 삶이 있어야, 그래야 진짜 신앙입니다. 그래서 사랑 없는 신앙은 껍질만 있고 과육은 없는 열매와 같으며, 그러므로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 없는 신앙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진리를 믿는다고 하면서 행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또 진리를 행하더라도 진리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사로운 목적, 개인의 사사로움을 위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많은 신앙인이 이런 신앙 가운데 있습니다. 왜 우리는 아직도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걸까요? 자기를 내려놓는 일이 힘들어서이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 안에 아직 주님이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떤 사람에게 언제 오실까요? 8절입니다.

 

8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킬 때라고 합니다. 말씀에서 ‘지역’은 본래, 그러니까 그 속뜻은 이웃을 뜻합니다. 얼핏 전혀 다른 뜻이지요. 아마 사람이 어떤 지역에 사는 모습이 그 지역 이웃들과 함께 사는 모습처럼 보이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지역은 교회를 뜻합니다. 지역이 이웃을 뜻하면서, 또한 교회를 뜻하는 이유는, 우리가 가장 사랑해야 할 이웃이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목자는 누구일까요? ‘목자’는 사람들을 진리로 가르치고, 선한 삶으로 이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의미에서 목자는 성직자를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성직자나 목회자가 아니고요, 신앙인 중에 마음속에 양을 키우는 사람들입니다. ‘’은 무슨 뜻입니까? 순진함, 또는 순수한 선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양은 진리 배우기를 좋아하고, 그 진리에 따라 살고자 하는 순진한 애정을 말합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하는 ‘그 지역에 목자들’이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진리를 사랑하는 순수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수시로 변하는 영적 상황 속에서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과 끊임없이 싸웁니다. 그것을 본문에서는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로 표현했습니다.

 

※ 여기서 잠깐, 본문 중 ‘밖에서’라는 표현 관련, 매우 흥미로운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류모세 저, ‘열린다 성경, 절기 이야기’ 15장, ‘예수님은 언제 태어나셨을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에는 과연 크리스마스를 유추해 낼 수 있는 근거가 있을까? 다행히 직접적인 언급은 아니지만 크리스마스를 유추해 낼 수 있는 가장 설득력 있는 말씀이 누가복음에 나온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눅2:8)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가 탄생했을 때 이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은 사람은 밤에도 성실하게 양들을 돌보던 목자들이었다. 예수님 탄생 당시에 목자들은 농사를 지으며 정착생활을 하는 농경 문화의 주류 사회에 들지 못하고, 그때까지도 양과 염소에게 먹일 풀밭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으로서 최하류 계층이었다.

 

예수님 탄생 당시 유대 땅은 헤롯 왕이 통치하고 있었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마2:1)

 

우리에게 헤롯은 악한 왕의 대명사로 통하지만, 역사적으로 그의 통치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를 잇는 유대 땅의 지정학적 이점을 잘 살려 상업이 발달하고 인구가 증가했다.

 

집 지을 땅과 농사지을 농경지가 점점 부족해지자 목자들은 황량한 광야로 밀려나야 했다. 비록 돌과 바위가 많은 광야라지만 비가 오는 6개월의 우기 동안에는 작은 풀들이 돋아나 그런대로 양과 염소에게 풀을 뜯길 수 있었다. 하지만 비가 오지 않는 나머지 6개월간의 건기는 어떻게 버틸 것인가, 그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가축들과 함께 광야로 쫓겨난 목자들에게도 죽으란 법은 없었다. 건기가 시작되는 유월절부터 7주 동안만 잘 버티면, 이후 목자들이 가축들과 함께 농경지로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었던 것이다. 보리 추수기인 유월절과 그로부터 7주 후인 칠칠절은 밀 추수기였다. 밀 추수가 끝난 칠칠절 이후부터 다음 해 농경 사이클이 시작되어 쟁기질을 해야 하는 초막절 전후까지는 농경지가 목자들에게 오픈되었던 것이다.

 

목자들은 칠칠절 이후 가축들을 데리고 농경지에 들어갔고, 그곳에는 밀 추수가 끝난 후 남아 있는 밀 밑동이 있었다. 이것을 가축들에게 먹이며, 목자들은 밀밭 사이에서 난 뽕나무를 배양해 주어 밀밭 주인에게 상응하는 보답을 했다. 성서 시대 목자들의 라이프 사이클을 이해할 때 자신을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 소개한 아모스 선지자의 알쏭달쏭한 직업이 이해된다.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암7:14)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당시에 목자들이 밖에서 양들을 지키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눅2:8)

 

아기 예수 탄생과 관련된 크리스마스 시즌의 비밀은 바로 ‘밖에서’란 단어에 있다. 과연 ‘밖에서’라는 말은 뭘까? 집 바깥을 말하는 걸까? 양들을 집 안에서 칠 수 없으므로, 단순히 바깥(outside)을 의미한다고 볼 수 없다.

 

우리말 성경에 ‘밖에서’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아그라울레오’(ἀγραυλέω)인데, 이는 단순한 바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농경지의 들판’(agricultural field)을 의미한다. 즉 아기 예수가 탄생할 때 목자들은 황량한 광야가 아니라 농경지에서 가축을 돌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당시 목자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감안하면, 크리스마스 시즌의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난다. 목자들이 가축을 데리고 농경지로 들어갈 수 있는 기간, 측 칠칠절(6월경) 이후부터 초막절(10월경) 사이의 기간이 되는 것이다.

 

(중략)

 

레위기 23장에 나오는 ‘절기’들이 단지 유대인들의 명절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제정하신 ‘여호와의 절기’이고, 그 안에 하나님의 인류 구속의 계획들이 암호화되어 있다면, 예수님의 탄생일인 크리스마스는 분명 레위기 23장에 나오는 7개의 절기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칠칠절 이후부터 초막절 사이에 들어가는 절기는 단지 두 개뿐이다. 바로 신년(나팔절)과 대 속죄일이다. 그러면 두 절기 가운데 크리스마스와 가장 부합하는 절기는 무엇일까? 바로 신년일 것이다. 신년은 영광의 나팔을 불며 새로운 해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다. 나팔을 불며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년! 이 신년이야말로 영원 전에 계신 하나님이 이 땅에 아기의 몸으로 탄생함으로써 인류 구속의 역사를 위한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알리는 영광의 나팔을 불기에 가장 합당한 날이 아니겠는가! 바로 그날 하늘의 천군 천사들이 영광의 팡파르를 울리며 하나님을 찬송한 것이다. //

 

하루 중에도 낮이 있고, 밤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우리의 영적 상태도 수시로 변합니다. 늘 같지가 않은 것이죠. 낮은 어떤 때입니까? ‘’은 진리의 빛 안에 있는 때입니다. 진리의 빛 안에 있기 때문에, 말씀을 읽으면 이해가 잘 됩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가 이해한 진리로 늘 자신을 비춰볼 수 있습니다. 그때가 낮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은 빛이 없는 때입니다. 그래서 그때는 말씀을 읽어도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안 되고, 또 진리가 없기 때문에 자신을 비춰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때가 밤입니다. 그래서 밤을 다른 말로는 시험의 기간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시험 가운데서도 주님이 주신 선과 진리를 잃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해 자신과 싸우는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들이 밤에 자기 양을 지키기 위해 깨어 있는 목자들입니다. 이런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고 있는데 갑자기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9절입니다.

 

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말씀에서 ‘주의 사자’(the angel of the Lord), 곧 천사는 진리를 뜻합니다. 천사가 왜 진리를 뜻할까요?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받을 뿐 아니라 그것을 삶으로 온전히 표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사는 자기 생각을 말하지 않고 오직 주님이 주시는 말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에서 천사는 진리를 뜻하며, 가장 높은 의미로는 진리 자체이신 주님을 뜻합니다.

 

※ 아래는 위 ‘그들, 즉 천사들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라는 문장에 대한 보충 설명입니다.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35장, ‘천국과 지옥은 인류로 말미암는다’(Heaven and Hell Are from the Human Race, 311-317) 311번 글입니다.

 

기독교계에서는 천국과 지옥이 인류로 구성되어 있음을 전혀 모르고 있다. 처음부터 천사는 천사로 창조되어 천국을 이루고 있었다고, 마귀 또는 사탄도 빛의 천사였다가 반역하여 그 일당과 함께 내쫓겨 지옥을 형성했다고들 믿기 때문이다. 기독교계에서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에 천사들은 무척 놀라고, 천국이야말로 교회 교리의 근본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천국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는 데 더욱 경악한다. 그러나 또한 그런 무지가 만연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주님의 뜻에 따라 천국과 지옥에 대한 많은 사실이 기독교 사회의 사람들에게 밝혀지게 되었고, 기독교가 종말을 맞아 어둠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는데, 이 계시로 인해 그 어둠이 가능한 한 많이 걷히게 되었다고 천사들은 진심으로 기뻐한다. In the Christian world it is wholly unknown that heaven and hell are from the human race, for it is believed that in the beginning angels were created and heaven was thus formed; also that the devil or satan was an angel of light, but having rebelled he was cast down with his crew, and thus hell was formed. The angels never cease to wonder at such a belief in the Christian world, and still more that nothing is really known about heaven, when in fact that is the primary principle of all doctrine in the church. But since such ignorance prevails they rejoice in heart that it has pleased the Lord to reveal to mankind at this time many things about heaven and about hell, thereby dispelling as far as possible the darkness that has been daily increasing because the church has come to its end.

 

[2] 그래서 천사들은 내가 그들의 다음 말을 증언해 주기를 원했다. ‘천국 전체에 처음부터 천사로 창조된 천사는 단 한 명도 없다. 지옥에도 빛의 천사로 창조되었다가 쫓겨난 악마는 없다. 천국이나 지옥이나 전부 인류가 가서 이룬다. 천국은 세상에서 천국의 사랑과 신앙으로 산 사람들로, 지옥은 지옥적 사랑과 신조로 산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또 마귀나 사탄은 지옥을 통칭하는 말이다. 마귀는 악마들이 모여 사는 뒤쪽 지옥을, 사탄은 악령들이 모여 사는 앞쪽 지옥을 말한다. 각 지옥의 속성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룰 것이다. They wish for this reason that I should declare from their lips that in the entire heaven there is not a single angel who was created such from the beginning, nor in hell any devil who was created an angel of light and cast down; but that all, both in heaven and in hell, are from the human race; in heaven those who lived in the world in heavenly love and belief, in hell those who lived in infernal love and belief, also that it is hell taken as a whole that is called the devil and satan—the name devil being given to the hell that is behind, where those are that are called evil genii, and the name satan being given to the hell that is in front, where those are that are called evil spirits. The character of these hells will be described in the following pages.

 

[3] 천사들은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 사회가 천국과 지옥의 구성에 대해 잘못 믿는 것은, 해당 구절들을 오로지 글자 그대로 이해했을 뿐, 말씀에서 이끌어 낸 참된 교리로 깨우침이나 설명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씀의 문자 상의 의미는 참된 교리로 설명되지 않으면, 사람의 마음을 오도하고, 이것이 무지한 견해와 이설과 오류를 낳는 것이다.’ The angels said that the Christian world had gathered such a belief about those in heaven and those in hell from some passages in the Word understood according to the mere sense of the letter not illustrated and explained by genuine doctrine from the Word; yet the sense of the letter of the Word until illuminated by genuine doctrine, draws the mind in different directions, and this begets ignorance, heresies, and errors. (HH.311) //

 

※ 그리고 하나 더, 여기 목자들이 천사들을 본 걸로 나오는데, 과연 자연계, 물질계의 존재가 영계의 존재를 육안(肉眼)으로 볼 수 있는지, 이런 궁금점에 관한 아랫글을 참고하세요.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은 육신의 눈으로는 천사를 볼 수 없고, 사람 안에 있는 영의 눈으로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영은 영계에 있고, 육신은 물질계에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자기와 동질의 것 밖에는 볼 수 없다. 게다가 잘 알려진 대로, 눈이라는 신체 기관은 조야(粗野)해서 확대경 없이는 물질계의 미세한 것들도 볼 수 없다. 하물며 물질의 영역을 초월한 영계를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육안에서 떠나 그 영안이 열리면 영계를 볼 수 있다. 주님이 영계를 보여주시고자 하면 언제든지 즉시 보게 된다. 그러나 그때 사람은 자기 육안(肉眼)으로 보고 있다고 여긴다. 아브라함, 롯, 마노아(삿13, 삼손의 아비) 등 선지자들이 천사를 봤을 때도 그랬고,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봤을 때나 내가 천사들을 본 것도 마찬가지다. 선지자들이 이런 식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보는 사람들’(seers)이라 하고, ‘그들의 눈이 열렸다’(to have their eyes opened)고 했으며(삼상9:9, 민24:3), 또 이렇게 영계를 보게 하시는 것을 ‘그 눈을 여신다’(opening their eyes)라고 표현한 것이다. 엘리사의 사환에 대한 기록이 그 예이다. But it must be remembered that a man cannot see angels with his bodily eyes, but only with the eyes of the spirit within him, because his spirit is in the spiritual world, and all things of the body are in the natural world. Like sees like from being like. Moreover, as the bodily organ of sight, which is the eye, is too gross, as everyone knows, to see even the smaller things of nature except through magnifying glasses, still less can it see what is above the sphere of nature, as all things in the spiritual world are. Nevertheless these things can be seen by man when he has been withdrawn from the sight of the body, and the sight of his spirit has been opened; and this can be effected instantly whenever it is the pleasure of the Lord that man should see these things; and in that case man does not know but what he is seeing them with his bodily eyes. Thus were angels seen by Abraham, Lot, Manoah, and the prophets; and thus, too, the Lord was seen by the disciples after the resurrection; and in the same way angels have been seen by me. Because the prophets saw in this way they were called “seers,” and were said “to have their eyes opened” (1 Sam. 9:9; Num. 24:3); and enabling them to see thus was called “opening their eyes,” as with Elisha’s servant, of whom we read: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왕하6:17) Elisha prayed and said, Jehovah, I pray Thee open his eyes that he may see; and Jehovah opened the eyes of the young man and he saw, and behold the mountain was full of horses and chariots of fire round about Elisha (2 Kings 6:17). (HH.76, 김은경 역) //

 

또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라고 했는데 그것은 주님의 임재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임재하실 때,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성한 진리가 마치 밝은 영광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천사가 빛과 함께 목자들에게 나타난 것은 그 속뜻으로는, 진리이신 주님이 선한 신앙인들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자들이 크게 무서워했습니다. 말씀에는 주님을 만나는 사람들이 두려워 떠는 모습이 여러 곳에 나옵니다. 예를 들면, 다니엘이 그랬고요, 사가랴도, 마리아도 주님을 만날 때, 그러니까 주님이 보내신 천사 가브리엘을 만날 때에 그랬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신성이 사람의 내면으로 흘러 들어올 때에는 누구나 마음이 크게 동요되고요, 심지어 전율 같은 것을 느낀다고 합니다.

 

※ 저는 아직 이 정도의 체험은 아니지만, 나름 충격적인 영적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정원 목사의 저서, ‘대적기도’를 읽고, 잠자리에 누워 ‘귀신아!’ 따라 해 보다가 내 안에 숨어든 악령을 어렴풋이 보게 된 체험이었습니다. 지난 2013년 12월 15일 주일 밤에 있었던 일인데, 다음은 그날의 일지에 적힌 내용입니다.

 

자정 즈음, 다시 치통 시작, 잠결에 ‘귀신아!’ 하였더니 갑자기 온몸에 전율이 오래도록 지속, 정원 목사님이 대적기도 책에서 기술한 그대로의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 내 안에 뭔가가 숨어 있다가 들켜 어쩔 줄 몰라 하는 듯한 느낌 받음,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가라’ 하는데 혀가 꼬여서 발음이 잘 안됨, 아내, 내가 잠꼬대를 하는 줄 알고 대적기도 중인 나를 계속 흔들어 댐... 전율이 잦아들 즈음, 치통도 사라짐, 책의 내용 그대로여서 너무 신기, 아내에게 자초지종 설명

 

제 안에서 몰래 활동하던 악한 영이 그만 갑자기 들키는 바람에 저쪽 주방 정수기 쪽으로 황급히 숨는 무슨 다급함이었지요. 형체는 그냥 검은 그림자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비춰보면 좀 창피한(?) 체험이긴 한데, 이 일로 수년 후, 스베덴보리의 ‘천국과 지옥’에서 아랫글을 읽었을 때, 덕분에 별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각 사람에게는 선한 영들과 악한 영들이 와있다. 선한 영들을 통해서는 사람은 천국과 결합되고, 악한 영들을 통해서는 지옥과 결합된다. 이 영들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놓여 있는 중간 영계에 있다. 이곳에 대해서는 앞으로 특별히 다룰 것이다. 이 영들이 사람에게 오면 사람의 기억 전체 안으로 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생각 전체에 들어간다. 이때 악한 영은 사람의 악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선한 영은 선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들어간다. 이 영들은 자기들이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그들이 사람과 같이 있을 때, 그 사람의 모든 기억과 생각이 자기 것인 줄 안다. 또 그들에게는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태양계 내의 것은 아무 것도 그들 시각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영들이 자기가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도록 각별히 배려하신다. 만일 그들이 알아차리면 사람에게 말을 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악한 영의 경우, 사람을 파괴하려 들기 때문이다. 악한 영들은 지옥과 결합되어 있으므로, 그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바로 사람의 영혼을, 즉 그의 신앙과 사랑을 파괴하고, 사람의 몸까지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들이 사람과 대화를 하지 않으면 그런 일이 없다. 이 경우, 그들은 자기의 말과 생각이 사람에게서 온 것임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서로 나누는 말도 사람에게서 온 것인데도 그들은 자기가 하는 생각과 말이 자기 것인 줄 믿는다. 그리고 누구나 자기 것은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영들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도록 그들이 모르는 제재를 받는다. 나는 여러 해 동안 계속되는 경험의 결과로 사람과 영들과의 이러한 결합에 대해 너무도 잘 알게 되었다. 내가 이보다 더 잘 아는 것이 없을 정도이다. (HH.292, 김은경 역) With every individual there are good spirits and evil spirits. Through good spirits man has conjunction with heaven, and through evil spirits with hell. These spirits are in the world of spirits, which lies midway between heaven and hell. This world will be described particularly hereafter. When these spirits come to a man they enter into his entire memory, and thus into his entire thought, evil spirits into the evil things of his memory and thought, and good spirits into the good things of his memory and thought. These spirits have no knowledge whatever that they are with man; but when they are with him they believe that all things of his memory and thought are their own; neither do they see the man, because nothing that is in our solar world falls into their sight. The Lord exercises the greatest care that spirits may not know that they are with man; for if they knew it they would talk with him, and in that case evil spirits would destroy him; for evil spirits, being joined with hell, desire nothing so much as to destroy man, not alone his soul, that is, his faith and love, but also his body. It is otherwise when spirits do not talk with man, in which case they are not aware that what they are thinking and also what they are saying among themselves is from man; for although it is from man that they talk with one another, they believe that what they are thinking and saying is their own, and everyone esteems and loves what is his own. In this way spirits are constrained to love and esteem man, although they do not know it. That such is the conjunction of spirits with man has become so well known to me from a continual experience of many years that nothing is better known to me. (HH.292) //

 

말씀에서는 그 전율을 두려움이라고 표현합니다. 왜 그런 식으로 표현할까요? 그것에 대해서 ‘계시록 해설’ 677번 글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임재 시에 느끼는 공포는 지옥에서 오는 악과 거짓 때문에 내면의 영적 사람이 느끼는 두려움이다. 즉 악과 거짓들로 인해 그가 사랑하는 선과 진리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순철 역) Again, “terror” signifies in the spiritual sense terror on account of evils and falsities that are from hell, for these terrify the spiritual man, because they are the opposites of the goods and truths, which the spiritual man loves and the loss of which he fears. (AE.677)

 

※ 위 내용은 아래 계시록 말씀에 대한 주석이며, 영역은 Ager 역입니다.

 

그때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 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계11:13) //

 

그냥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두려워 떠는 것이 아니고요, 우리 내면의 속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떠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의 실체는 우리 속에 있는 악과 거짓들이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를 행여 더럽힐까? 하는 두려움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이 모두 아시는 것처럼 사람의 내면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속 사람이 겉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것이지요. 왜 그럴까요? 겉 사람이 얼마나 세상의 유혹에 잘 넘어갈 수 있는지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가장 순수한 진리로 오실 때 행여 주님을 더럽히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을 자기도 모르게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거룩한 두려움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10절에서 천사가 말했습니다.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천사가 목자들에게 ‘무서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사실은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이제 내가 너희를 지켜줄 터이니 더 이상 겁내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서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죽었던 생명의 소생을 의미합니다. 영적 의미로 생명의 소생은 어떤 것입니까? 그동안 세상 유혹에 자주 넘어지던 사람이 이제는 주님을 의지해서 다시는 넘어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죽었던 생명이 다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셨다고 해서 한순간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계시록 속뜻’ 56번 글에는 주님이 우리에게 오실 때 일어나는 변화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거룩한 공포가 사람을 덮을 때 주님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생명의 소생을 알리신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사람의 자아의 생명의 자리로 들어올 때, 거룩한 공포를 느끼는데, 그것은 가끔 마음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거룩한 전율이나 소름과 합쳐진다. 사람의 자아의 생명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지만,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는데, 그러나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렇게 하는 것처럼 한다. 사람이 후자의 생명 안에 있을 때 그는 자기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주님이 전부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계시록 속뜻 56, 이순철 역) And as a holy fear seized him, the Lord said, on his being resuscitated, “Fear not.” Holy fear, which sometimes is joined with a sacred tremor of the interiors of the mind, and sometimes with horripilation, supervenes, when life enters from the Lord in place of one’s own life. One’s own life is to look from one’s self to the Lord, but life from the Lord is to look from the Lord to the Lord and yet as if from himself. When man is in this latter life, he sees that he himself is not anything, but the Lord only. (AR.56)

 

※ 위 스베덴보리 저, ‘계시록 속뜻’(Apocalypse Revealed) 56번 글은 아래 계시록 1장 17절 말씀,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계1:17)

 

에 대한 주석이며, 영역은 Whitehead 역입니다. 참고하세요. //

 

주님이 오실 때 비로소 우리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는 것과 주님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는 것은 서로 어떻게 다를까요? 자기 자신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는 것은 자기 사랑으로 주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그렇지요. 신앙생활 하는 것도 자기를 위해서 하고, 교회에 오는 것도 자기를 위해서 옵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시면 주님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때는 자기는 온데간데없고, 오직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주님을 향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어떤 시련도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죽었던 생명이 다시 사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래서 주님은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천사는 또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말했습니다. 말씀에서 ‘좋은 소식’이란 주님이 오셔서 당신을 믿는 사람을 구원하신다는 진리를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진리입니다. 따라서 천사가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은 진리가 자기 스스로를 증거하는 모습입니다. 진리는 자기 스스로를 증거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저는 직업상 진리를 전하는 일을 하고는 있지만, 가끔 말로 진리를 증거하는 것에 대해 회의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잘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이 말하는 진리는 진리가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급적이면 진리가 스스로 증거하도록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진리가 스스로 증거하게 할 수 있을까요? 진리를 말함과 함께 그에 따라 살면 됩니다. 그때 각자의 삶을 통해 진리가 스스로를 증거합니다. 그리고 그때 진리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말이 아니라 진리에 따라 사는 모습을 볼 때 감동합니다. 왜 그럴까요? 진리의 능력이 전해지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주님은 진리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에 전혀 다릅니다. 주님의 말씀 자체에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라고 하셨는데요,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가 스스로 증거하는 모습입니다. 이제 ‘천사가 좋은 소식을 전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짐작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오실 때, 비로소 주님의 임재와 구원의 확신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계신 주님께서 스스로 증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어떻습니까? 주님이 오신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인정했지만 확신하지는 못했습니다. 주님이 과연 우리에게 오실까? 주님이 완고한 나의 성품을 바꾸어 주실까?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실 때 그러한 확신이 생깁니다. 안 되는 것이 되기 시작하니까요.

 

11절과 12절에서는 천사가 전하는 좋은 소식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기술합니다.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말씀에서 ‘다윗’은 주님을 나타냅니다. 주님이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베들레헴’의 속뜻은 무엇일까요? 베들레헴은 새로운 진리, 즉 선을 동반한 진리가 태어나는 곳입니다. 이전에 가지고 있던 진리가 선 없는 진리였다면 베들레헴에 태어나는 진리는 선을 동반한 진리라는 것이죠. 그 새로운 진리가 강보에 쌓여 누워계신 주님이세요. 지난 시간에도 설명드린 것처럼, ‘강보’는 순진무구의 진리를 나타냅니다. 즉 선과 하나가 된 진리 그 자체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베들레헴, 즉 다윗의 동네는 그 속뜻으로는 세상의 어떤 지역이 아니라 거듭나는 사람들의 내면에 있는 어떤 곳입니다. 베들레헴이 사람의 내면 어디쯤에 있는지는 천국의 비밀 4592번 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거기서는 베냐민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는데, 베냐민이 태어난 곳 베들레헴이 영적 사람과 천적 사람의 중간쯤에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내면에는 보통 자연적 사람이라고 하는 겉 사람이 있고요, 영적 사람이라고 불리는 속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쪽 더 깊은 곳에 천적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난다는 것은 이 세 가지 내면의 의식, 천적 의식과 영적 의식, 그리고 자연적 의식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왜 그것이 거듭나는 것이냐 하면, 그래야 주님의 생명인 선과 진리가 사람의 내면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가장 바깥쪽인 삶으로, 일상생활로 흘러나오고, 거기서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천적 사람과 영적 사람, 자연적 사람이 서로 소통하여 하나 되어야 합니다. 결론을 말하면, 베들레헴은 영적 사람과 천적 사람의 중간에 있으며, 그곳에 주님께서 선을 동반한 진리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으로 오셔야 영적 사람과 천적 사람 사이에 비로소 소통이 이루어지기 때문이지요. 그 전 상태는 어떻습니까? 영적 사람과 자연적 사람 간 연결만 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천적, 영적, 자연적 사람이 모두 통하기 시작하는데요, 이것이 바로 주님이 오셨을 때에 일어나는 변화들입니다.

 

※ 위 4592번 글은 아래 창세기 말씀에 대한 주석이며, 관련 영역은 Clowes 역입니다.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창35:18)

 

All men whatever are born natural, with the power of becoming either celestial or spiritual; but the Lord alone was born spiritual celestial, and for this reason he was born at Bethlehem, where is the boundary of the land of Benjamin, for by “Bethlehem” is signified the spiritual of the celestial, and by Benjamin is represented the spiritual of the celestial. The reason why the Lord alone was born spiritual celestial is that the Divine was in him. (AC.4592)

 

그러면 그 변화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사람마다 고질병처럼 해결되지 않는 영적 문제들이 있는데 그것이 해결됩니다. 그리고 전에는 그냥 지적 기쁨을 위해서 진리를 추구했다면, 이제는 지혜를 얻기 위해 진리를 추구합니다. 삶의 목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의 삶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우리가 자신에게 나타나는 그러한 변화를 느낄 때, 주님이 우리 내면에 오신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는 다윗의 동네에 강보에 쌓인 아기를 보았을 때 그것이 주님이 오신 표적이니라 말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믿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을 믿기 때문에 당하는 시련이 너무 많습니다. 시험 가운데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거나, 또 진리를 알게 된 것을 후회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이해하니, 그러한 모든 시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너무나 고마운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한 과정이 없다면 우리는 주님을 진실한 마음으로 찬송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 찬송 받기를 원하지 않으세요. 인간을 위해 찬송 받길 원하십니다. 주님을 찬송한다는 것은, 우리 자아에서 나온 것은 모두 악이며, 오직 주님만 선하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찬송을 주님께 드리기 위해서는 시험에 맞서 싸우다 넘어지고, 또 일어나 싸우는 그런 혹독한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냥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의 목자들은 그러한 시험들을 꿋꿋하게 버틴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가장 순수한 진리로 오십니다. 그때 우리 내면에 하늘이 열리고, 하늘과 땅이 비로소 하나 됩니다. 그리고 진정한 평화가 찾아옵니다. 평화가 무엇입니까? 시험에서 이길 때 자연히 찾아오는 상태, 그것이 평화입니다. 그래서

 

13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 모든 분께 주님의 그런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눅2:14)

 

아멘

 

 

원본

2016-09-04(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05(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09. 2023-03-06(D2)-매일예배(2426, 눅2,8-14),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목자들에게 전하신 이유'.pdf
0.67MB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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