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5:2, AC.475-480 심화

2, ‘아담은 한 사람인가, 태고교회인가?’

 

AC.478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여기서 다루는 주제는 인류 최초의 어떤 한 사람의 창조가 아니라 태고교회’라고 합니다. 창세기를 전통적인 방식으로 읽어 온 독자라면 여기서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아담을 인류 최초의 한 남성 개인으로 보지 않았다는 말인가?’

 

먼저 스베덴보리가 창세기의 ‘아담’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분명합니다. AC.478에서 그는 히브리어 ‘아담’(Adam)이 ‘사람’(man)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더욱이 창1:26에서는 ‘사람’을 단수로 말하면서 곧이어 ‘그들’이라는 복수로 받고, 창5:2에서는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뒤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사람’은 한 남성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남자와 여자를 함께 포함하는 말이며, 속뜻으로는 태고교회를 가리킵니다. AC.137에서도 창세기 처음 세 장은 ‘사람’(homo)이라 하는 태고교회를 그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룬다고 설명합니다.

 

이 점은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1764, DP) 241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밝혀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아담과 그의 아내’가 ‘세상에 창조된 최초의 인간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아담이라는 개인에게 태고교회라는 추가적인 상징적 의미도 있다’는 정도의 설명보다 훨씬 강합니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그의 아내’라는 형상으로 묘사된 대상 자체가 인류 최초의 두 개인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DP.328에서도 같은 원리가 다시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스라엘·유대교회 이전의 여러 교회가 역사적인 방식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민족들과 사람들의 이름 아래 묘사되었다고 설명하면서, 그 첫 번째인 태고교회가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의 이름 아래 묘사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AC.478 한 곳에서 우연히 등장하는 특이한 해석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초기 역사를 이해하는 일관된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역사적 개인 아담의 존재를 부정했는가?’라는 질문에는 어떻게 답해야 할까요? 여기서는 질문 자체를 조금 정밀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최초로 창조하신 한 남성 개인이며, 하와는 그와 함께 최초로 창조된 한 여성 개인이라고 스베덴보리가 보았는가?’라고 묻는다면, DP.241에 비추어 답은 분명합니다. 그는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는 최초로 창조된 두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직접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과 ‘인류 역사 전체를 통틀어 아담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떤 개인도 실제로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명제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후자의 문제를 입증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의 질문은 ‘아담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역사상 단 한 명도 없었는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라는 이름 아래 무엇을 계시하셨는가?’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은 명확합니다. ‘태고교회’입니다.

 

이 구별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시대 자체를 신화적이고 비역사적인 시대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AC.1114 이하에서는 ‘사람 또는 아담이라 했던 태고교회’에 속했던 이들과 사후세계에서 대화했다고 기록하며, 그 교회의 후대에 속했던 사람들도 언급합니다. 따라서 ‘아담 = 태고교회’라는 해석은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들은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 많은 사람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교회가 있었으며, 말씀은 그 교회와 그 상태를 ‘아담’, 곧 ‘사람’이라는 이름 아래 묘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5의 계보를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합니다. 창5의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등의 이름을 단순히 한 가족의 생물학적 족보로만 읽는다면 스베덴보리가 밝히려는 속뜻을 놓치게 됩니다. AC.470은 이 이름들이 실제적인 것들, 곧 여러 교회와 그 상태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AC.485는 창4의 셋과 창5의 셋이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어도 서로 다른 교회를 의미한다고까지 명시합니다. 따라서 창5의 계보는 태고교회에서 이어져 나온 여러 교회와 그 상태의 계승을 기록한 내적 역사로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스베덴보리가 ‘그러므로 역사적 개인 아담은 존재하지 않았다’라는 현대적인 문장으로 결론짓지 않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의 목적은 역사학적 논쟁을 벌이는 데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이름의 개인이 있었느냐 없었느냐가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의 ‘아담’이라는 이름 안에 어떤 신적 진리를 담으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담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대신, 훨씬 더 자신의 해석 원리에 맞는 방식으로 ‘아담과 그의 아내는 세상에 창조된 최초의 인간들을 의미하지 않고 태고교회의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DP.241).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입장을 가장 정확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는 인류 최초의 두 개인에 관한 전기적 기록의 주인공이 아니라 태고교회와 그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나타냅니다. 그렇다고 태고시대의 실제 사람들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실제 사람들로 이루어진 최초의 교회가 있었으며, 말씀은 그 교회를 ‘아담’, 곧 ‘사람’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아담을 읽을 때 중심 질문은 ‘최초의 한 남자가 누구였는가?’보다 ‘왜 주님께서는 최초의 교회를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내셨는가?’가 됩니다. 그 질문을 따라가면 창1의 창조, 창2의 에덴, 창3의 타락, 그리고 창5의 계보가 모두 한 개인의 전기를 넘어 태고교회의 형성과 천적 상태, 쇠퇴와 후대 교회들의 계승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내적 역사로 열리게 됩니다. (AC.475-480 심화 2)

 

 

 

AC.480, 창5:2, ‘여섯째 날의 끝과 안식일의 시작에 이른 사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80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사람’이라 일컬어졌다는 것은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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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5-480 심화 1, 왜 신앙과 사랑의 결혼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사람’이라 하는가?

AC.475-480 심화1, 왜 신앙과 사랑의 결혼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사람’이라 하는가? 창5:2에는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라고 되어 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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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2 심화

1. 왜 주님은 ‘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라고 말씀하시는가?

사13:12에서 여호와께서는 ‘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인생을 오빌의 금보다 희귀하게 하리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사람이 주님에게서 멀어지고 참된 인간의 상태를 잃는 것이 인간의 악 때문이라면, 왜 말씀은 마치 주님께서 직접 사람을 희귀하게 만드시는 것처럼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표현하는 것일까요?

 

먼저 AC.82 자체가 이 질문에 직접 답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자리에서 사13:12-13을 인용한 직접적인 목적은 ‘하늘’과 ‘땅’이 사람에 대하여 서술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AC.82만 가지고 ‘내가 사람을 희귀하게 한다’는 표현의 속뜻을 완전히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AC를 계속 읽으면서 반복해서 만나게 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말씀에는 주님께서 노하시고, 벌하시고, 멸하시며, 때로는 인간에게 악한 결과를 직접 가져오시는 것처럼 표현되는 곳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들에서 이러한 표현들을 주님께서 실제로 악을 행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는 선과 진리만 나오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상태에 따라 그 결과가 전혀 다르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주님께서 하신다’는 표현을 만날 때에는 두 가지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말씀의 문자에 실제로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그 표현으로부터 ‘그러므로 악이나 파괴의 근원이 주님이다’라고 결론짓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서는 악과 거짓의 근원을 주님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문자에 기록된 ‘내가 하리라’는 표현을 임의로 지워 버려서도 안 됩니다. 왜 말씀이 인간에게 그렇게 나타나는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는지를 그 속뜻과 말씀의 표현 방식 안에서 살펴야 합니다.

 

이와 함께 ‘허용’이라는 문제도 나중에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원하시거나 만들어 내시는 분이 아니지만, 인간의 자유가 보존되는 질서 안에서 악이 일어나는 것을 허용하십니다. 그러나 ‘허용한다’는 것은 악을 승인하거나 단순히 방치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적 허용은 신적 섭리와 분리된 원리가 아니며, 주님께서는 허용되는 것 안에서도 가능한 한 선한 목적을 향하여 섭리하십니다.

 

다만 이러한 말씀의 나타남과 신적 허용에 관한 원리를 사13:12 한 절에 곧바로 대입하여 ‘이 구절의 뜻은 정확히 이것이다’라고 확정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 AC.82에서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 말씀을 ‘하늘’과 ‘땅’이 사람에게 서술될 수 있다는 증거로 인용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을 희귀하게 하며’라는 표현이 왜 이런 형식을 취하는가 하는 것은 여기서 생겨난 정당한 독자 질문이지만, 그 답은 AC 전체에서 말씀의 표현 방식과 신적 섭리를 더 배우면서 점차 분명해져야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먼저 기억할 원칙은 간단합니다. 말씀에서 주님께서 어떤 악한 결과를 직접 일으키시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고 해서 곧바로 그 악의 근원이 주님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문자에 기록된 표현을 임의로 ‘사실은 주님이 하지 않으셨다’고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먼저 말씀의 문자 그대로를 존중하여 읽고, 그 표현이 속뜻에서 어떻게 이해되는지는 스베덴보리 자신이 해당 원리를 설명하는 곳들을 따라 확인해야 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사13:12의 질문은 하나의 난해한 구절을 해결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왜 주님께서 이렇게 하신다고 기록되어 있을까?’라는 질문을 만날 때마다, 문자에 나타난 표현과 주님의 실제 본성, 그리고 인간의 자유와 신적 허용 및 섭리의 관계를 성급하게 혼합하지 않고 구별하여 읽게 하는 중요한 질문이 됩니다. (AC.82 심화 1)

 

 

 

AC.82, 창2:1, ‘하늘은 속 사람, 땅은 겉 사람’ (AC.82-83)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창2:1) AC.82이 말씀들은 사람이 이제 ‘여섯째 날’(sixth day)이 될 만큼 영적으로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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