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에는 앞의 경우와는 상당히 다른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이단이니까연을끊어도돼’가 관계를 끊을 성경적 근거를 찾는 쪽이라면, ‘이단이지만그래도나는내할도리는다하고싶은데그게잘안돼’는 관계를 지키고 싶지만 신앙의 차이와 감정의 상처 때문에 마음과 행동이 따라주지 않는 경우입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보면 저는 오히려 이 두 번째 고민 속에 체어리티(charity)가 시작될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이 있다고 봅니다. 아직 충분히 사랑하지 못하더라도 ‘그래도내가해야할선은하고싶다’는 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먼저 ‘할도리’를 너무 감정적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댁이나 처가를 좋아해야만 도리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신앙에 동의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종교적인 이야기를 즐겁게 나눌 수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상대방에게 따뜻한 감정을 느끼는 것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체어리티는 실제 삶에서 선하고 올바른 것을 행하는 것과 깊이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불편해도 필요한 안부를 묻고, 아플 때 살피고, 부모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존중을 드리고, 도움이 필요할 때 가능한 범위에서 돕고, 명절이나 중요한 가족 행사에서 해야 할 책임을 감당한다면 그것 역시 체어리티의 실제적인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마음이내키지않는데하는선행은위선아닌가?’라는 생각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거듭남(regeneration)은 선한 감정이 완전히 생긴 다음 선을 행하는 과정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감정이 따라오지 않더라도 ‘이것이주님앞에서옳다’고 판단하여 행동하는 가운데 우리의 사랑 자체가 조금씩 변화합니다. 속에서는 ‘가기싫다’, ‘전화하기싫다’, ‘왜내가먼저해야하나’ 하는 마음이 올라오는데도 ‘그래도이것은내가해야할일이다’라고 판단하여 행한다면, 바로 앞에서 이야기했던 ‘합리성’(rationality)과 ‘자유’(freedom)가 작동하는 장면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자기 감정에 끌려가는 대신 무엇이 선한지를 보고 그것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참고 모든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체어리티는 아닙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시댁이나 처가에서 ‘우리신앙을인정하라’, ‘우리예배나종교행위에참여하라’, ‘아이들에게도이것을가르치게하라’고 요구한다면 거절할 수 있습니다. 반복적으로 신앙을 조롱하거나 모욕한다면 ‘이런대화는더하지않겠습니다’라고 경계를 세울 수도 있습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것과 그들의 신앙에 동조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앞서 요한이서를 살펴보면서 말씀드린 것처럼 ‘거짓과의연합을끊는것’과 ‘체어리티를끊는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신앙에는동의할수없습니다. 그러나부모님으로서제가해야할일은하겠습니다.’ 이 두 문장은 얼마든지 함께 성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어려운 것은 바로 그다음입니다. 머리로는 ‘도리를해야한다’고 아는데 마음에서는 분노와 불쾌감과 억울함이 계속 올라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프로프리움’(proprium)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실제 잘못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갈등을 ‘내가교만해서그렇다’고 자기 탓으로 돌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잘못이 분명하더라도 그 잘못을 붙잡고 ‘그러므로나는저사람에게선을행하지않아도된다’고 자신을 정당화하기 시작하면 상대방의 악이 어느 순간 내 안의 악을 정당화하는 재료가 됩니다. 그때부터 문제는 ‘그들이무엇을했는가?’만이 아니라 ‘그들의행동때문에지금내안에서무엇이자라고있는가?’가 됩니다.
바로 여기서 체어리티는 감정보다 깊어집니다. 상대방을 좋아하지 않아도 미워하지 않는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가까이 지내기 어렵더라도 필요한 선은 행할 수 있습니다. 신앙에는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으로서는 존중할 수 있습니다. 만나면 불편하더라도 일부러 모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관계를 어느 정도 제한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상대방의 불행을 바라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작은 차이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상당히 큰 차이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단지 ‘가족관계를유지했는가?’가 아니라 그 관계를 통하여 ‘내가어떤사랑의사람이되어가고있는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할도리를다한다’는 것을 ‘예전처럼친밀하게지내야한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가족관계에도 적절한 거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만남의 횟수를 줄이면서도 예의를 지킬 수 있고, 종교 이야기는 하지 않으면서 식사를 함께할 수 있으며, 중요한 일이 생겼을 때 도울 수도 있습니다. 전화 한 통, 병문안, 필요한 도움, 부모에 대한 기본적인 책임이 모두 가능합니다. ‘친밀함’과 ‘체어리티’는 반드시 같은 정도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어떤 관계에서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선을 행하는 것이 오히려 더 지혜로운 체어리티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게잘안돼’라는 말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신앙의 실패라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바로 그곳에서 거듭남의 싸움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정말 아무 갈등도 없는 사람에게 친절한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신앙을 부정하거나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에게 ‘그래도내가해야할선은하겠습니다’라고 선택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너희원수를사랑하며너희를박해하는자를위하여기도하라’고 하신 말씀도 결국 감정적으로 원수를 좋아하라는 명령이라기보다, 상대의 악 때문에 나까지 악의 질서로 내려가지 말라는 말씀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더욱이 앞에서 살펴본 사울과 스데반을 생각하면 한 가지 중요한 태도가 더 생깁니다. 내가 상대방의 교리를 명백한 오류라고 판단하더라도 그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까지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의 사울 안에서 주님께서는 훗날의 바울을 보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나는정통이고저사람은이단이다’라고 확신하는 내 안에 사울의 종교적 프로프리움이 숨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리는 분별하되 사람의 영원한 상태는 주님께 남겨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리를 흐리지 않으면서도 체어리티를 잃지 않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도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주님, 저사람들이잘못했으니변화시켜주십시오’만 기도하기보다 ‘주님, 제가거짓에는동조하지않으면서도사람에게해야할선은버리지않게해주십시오. 저들의잘못때문에제안에미움이지배적사랑(rulinglove)으로자리잡지않게해주십시오. 제가해야할것은하되할수없는것까지억지로떠맡지않게하시고, 어디까지사랑하고어디서경계를세워야하는지분별하게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상대방의 잘못을 없던 일로 만드는 기도가 아니라, 그 잘못 때문에 내 영혼까지 함께 흐트러지지 않도록 구하는 기도입니다.
어쩌면 이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관계를얼마나많이유지했는가?’가 아닐 것입니다. ‘나는이관계안에서주님의사람으로행동했는가?’입니다. 때로는 찾아뵙는 것이 그 답일 수 있고, 때로는 거리를 두는 것이 답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침묵해야 하고, 때로는 분명하게 ‘그것에는동의할수없습니다’라고 말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상대방을 벌주기 위해 행동하지 않고, 선과 진리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행동한다면 방향은 달라집니다.
그래서 ‘시댁이, 처가가이단이지만그래도나는내할도리는다하고싶은데그게잘안돼’라는 말은 이렇게 바꾸어 볼 수 있겠습니다. ‘나는그들의신앙에는동의할수없지만, 그것때문에내가사랑까지버리는사람이되고싶지는않습니다. 감정은아직따라오지않더라도주님앞에서내가해야할선은행하고싶습니다.’
저는 이 문장을 한 줄로 압축한다면 이렇게 하겠습니다. ‘체어리티는상대방의모든것을인정하는것이아니라, 인정할수없는것이있어도내가해야할선까지포기하지않는것입니다.’
그리고 앞의 요한이서 이야기와 연결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거짓에는참여하지않되사람에게는선을행하는것, 경계는세우되미움으로절연하지않는것.’ 아마 바로 그 어려운 중간 지점에서 ‘선과진리의결합’이 실제 삶의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시댁이, 처가가이단이니까연을끊어도돼. 요한이서에보면인사도하지말라고했잖아.’ 실제로 요한이서 1장 10-11절은 상당히 강하게 들립니다. ‘누구든지이교훈을가지지않고너희에게나아가거든그를집에들이지도말고인사도하지말라그에게인사하는자는그악한일에참여하는자임이라.’ 이 말씀만 떼어 놓으면 ‘잘못된교리를가진사람과는집안의관계까지끊어야한다’는 결론이 가능해 보입니다. 특히 가족이나 시댁, 혹은 처가를 ‘이단’이라고 판단한 경우에는 이 말씀이 절연을 정당화하는 매우 강력한 근거처럼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서 전체의 문맥과 성경의 다른 말씀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렌즈’를 함께 놓고 보면 그렇게 단순하게 적용하기 어렵습니다.
먼저 요한이서가 경계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보아야 합니다. 요한은 ‘미혹하는자가세상에많이나왔나니이는예수그리스도께서육체로오심을부인하는자라’(요이1:7)고 대상을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이어 ‘그리스도의교훈안에거하지아니하는자’(9절), 그리고 바로 다음에 ‘이교훈을가지지않고너희에게나아가거든’(10절)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직접적인 상황은 단순히 ‘나와교리가다른혈육,혈연,친척’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거짓 가르침을 가지고 신앙공동체 안으로 들어와 그것을 전파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11절의 이유도 중요합니다. ‘그에게인사하는자는그악한일에참여하는자임이라.’ 핵심은 사람과 인간적인 접촉을 했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의 ‘악한일’에 참여하고 그것을 지지하는 데 있습니다.
당시의 ‘집에들인다’는 표현도 오늘날 누군가를 집에 잠깐 방문하게 하는 것과 완전히 동일하게 읽기는 어렵습니다. 초기 교회는 가정집을 중심으로 모였고 순회 교사와 전도자들이 신자들의 집에서 숙식을 제공받으며 가르쳤습니다. 그런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은 단순한 개인적 친절을 넘어 그의 사역을 후원하고 그에게 활동 기반을 제공하는 의미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요한의 명령에는 ‘거짓교사를교회의교사로받아들이고그의활동을지원하지말라’는 매우 실제적인 목적이 들어 있습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바꾸면 ‘거짓가르침을전하는사람의사역을교회가공식적으로받아들이고후원하지말라’에 훨씬 가깝습니다.
특히 ‘인사도하지말라’는 말씀을 ‘그러므로그사람과인간관계를완전히끊어라’로 확대할 때는 성경 전체와 충돌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주님께서는 ‘너희원수를사랑하며너희를박해하는자를위하여기도하라’(마5:44)고 하셨습니다. 바울도 불신자와 모든 관계를 끊으라는 뜻으로 자신의 말을 오해하지 말라고 설명하면서 ‘그리하려면너희가세상밖으로나가야할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5:10). 더구나 부모와 가족을 공경하고 돌보아야 한다는 말씀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이서 한 구절을 근거로 ‘이단으로판단되는사람에게는일반적인인간적사랑과가족으로서의모든책임까지중단해도된다’는 보편적 원칙을 만들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에서 ‘교제’와 ‘동조’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그의 교리를 인정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족으로 만나고 안부를 묻고 어려울 때 돕는다고 해서 그의 신학적 주장을 승인하는 것도 아닙니다. 반대로 그 사람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고 판단된다고 해서 그 사람 자체를 미워하거나 가족관계에서 제거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거짓에참여하지않는것’과 ‘그사람에게체어리티(charity)를행하지않는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구별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체어리티는 상대방이 믿는 모든 것을 옳다고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상대방 안의 선을 사랑하고 그의 참된 유익,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유익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가르침에는 ‘그것은진리가아니다’라고 분명히 말하면서도 그 사람에게 인간적인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교리가틀렸으므로그사람에게는사랑을베풀필요가없다’고 한다면 진리를 지키려다가 체어리티를 잃는 역설이 생길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단’이라는 판단 자체에도 주의가 필요합니다. 앞에서 사울과 스데반을 살펴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하나님 편에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스데반과 그리스도인들이 위험한 잘못에 빠져 있다고 생각했고, 그들을 제거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길에서 주님께서는 ‘네가어찌하여나를박해하느냐’(행9:4)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이단 판정이 잘못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거짓 교리는 실제로 존재하며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진리를가지고있고저사람은이단이다’라는 확신이 그 사람에게 무엇을 해도 된다는 허가증이 되는 순간, 사울의 이야기는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특히 가족관계에서는 더욱 신중해야 합니다. ‘저사람의신앙을받아들일수없다’와 ‘그러므로저사람과가족으로서의관계도끊어야한다’ 사이에는 상당히 큰 거리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댁의 종교적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 집의 종교활동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고, 자녀에게 그 교리를 가르치지 못하도록 경계를 세울 수도 있으며, 반복적인 개종 압박이나 모욕이 있다면 만남의 방식과 빈도를 조정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경계’입니다. 그러나 단지 ‘이단’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부모·자녀·형제의 인간적 관계 자체를 끊는 것을 요한이서 10절이 명령한다고 말한다면, 본문의 적용 범위를 상당히 넘어설 가능성이 큽니다.
물론 반대편의 극단도 피해야 합니다. ‘가족이니까무조건만나야한다’는 것도 성경적 원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실제 폭력이나 학대, 지속적인 모욕, 강압적인 종교행위, 자녀에게 심각한 해를 끼치는 행동이 있다면 적절한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상당히 강한 관계 제한도 정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저들은이단이니까요한이서가절연하라고했다’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발생하는 악과 해로부터 자신과 가족을 보호하고 그 악에 참여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해야 합니다. ‘교리적불일치’와 ‘실제적인해악’을 구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이 문제에는 ‘프로프리움’(proprium)의 위험도 있습니다. 종교적인 프로프리움은 ‘내가싫다’를 ‘하나님이싫어하신다’로, ‘나는만나고싶지않다’를 ‘성경이만나지말라고한다’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실제로 신앙 때문에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정말진리를지키기위해이관계를제한하는가, 아니면내불편함과분노와상처를하나님의명령으로정당화하고있는가?’ 이것은 상대방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해야 할 분별입니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살펴본 사울의 이야기가 여기서 다시 의미를 갖습니다. ‘사람들이너희를출교할뿐아니라때가이르면무릇너희를죽이는자가생각하기를이것이하나님을섬기는일이라하리라’(요16:2). 종교적 확신은 때로 인간에게 가장 강력한 정당화 장치가 됩니다. ‘하나님을위해서’라는 말이 붙으면 평소에는 하지 못할 냉혹한 행동까지 의로운 행동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행동이 정말 주님의 뜻인지 판단할 때에는 ‘내가성경구절하나를가지고있는가?’뿐 아니라 그 해석이 말씀 전체의 선과 진리, 특히 주님의 사랑과 체어리티의 질서에 합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요한이서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오히려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사랑이라는이름으로거짓까지받아들이지말라’는 경고입니다. 사람은 사랑하되 거짓을 후원하지 말고, 관계는 유지하더라도 악한 일에는 참여하지 말며, 체어리티를 행하되 진리를 희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과 ‘진리’가 결합되어야 한다는 스베덴보리의 원리와도 잘 맞습니다. 사랑만을 내세워 모든 거짓을 용인하는 것도 잘못이고, 진리를 내세워 사람을 미워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따라서 ‘시댁이, 처가가이단이니까연을끊어도돼. 요한이서에인사도하지말라고했잖아’라는 말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겠습니다. ‘요한이서는거짓가르침을전하는사람의사역을받아들이고후원하여그의악한일에참여하지말라고경고하는말씀이지, 교리가다르다고판단되는가족과모든인간적·가족적관계를끊으라는일반적인절연명령으로읽기는어렵습니다.’
한 문장으로 더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요한은거짓과의연합을끊으라고했지, 체어리티까지끊으라고한것은아닙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렌즈’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진리를지킨다는이유로사랑을버리지말고, 사랑한다는이유로거짓을받아들이지도않는것, 바로그둘을함께지키는것이선과진리의결합입니다.’
‘나는하나님의자녀인데왜하나님은내편이아니실때가있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상당히 절실하게 생기는 질문입니다. 열심히 기도했는데 일이 내가 바라던 방향과 정반대로 흘러갈 때,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도 상대방이 잘되고 내가 손해를 볼 때, 분명 좋은 뜻으로 시작했다고 생각했는데 길이 막힐 때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나는하나님의자녀인데하나님은왜저사람을막아주시지않지? 왜내기도를들어주시지않지? 하나님이라면적어도내편은되어주셔야하는것아닌가?’ 그러나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보면 여기에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주 쉽게 혼동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이나를사랑하신다’는 것과 ‘하나님이언제나내가원하는쪽을지지하신다’는 것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여호수아 5장에는 이 문제를 놀랍도록 선명하게 보여 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여리고를 앞둔 여호수아가 칼을 든 존재를 만나 ‘너는우리를위하느냐우리의적들을위하느냐’고 묻습니다. 쉽게 말하면 ‘당신은우리편입니까, 저쪽편입니까?’라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뜻밖에도 ‘아니라나는여호와의군대대장으로지금왔느니라’입니다(수5:13-14). 여호수아는 ‘하나님이우리편인가?’를 물었지만, 질문의 방향 자체가 바뀝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하나님이내편인가?’가 아니라 ‘내가하나님의질서안에서있는가?’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어느 편에 서느냐에 따라 그쪽에 합류하시는 분이 아니라, 선과 진리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자녀’라는 말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특별히 우선 처리해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버지가 자녀를 정말 사랑한다면 자녀가 원하는 것을 무조건 들어주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어린아이는 사탕을 더 달라고 하고 위험한 곳에도 가고 싶어 하지만, 부모는 때로 ‘안된다’고 합니다. 아이의 눈에는 그 순간 부모가 자기 편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거절이 사랑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섭리 역시 우리가 당장 원하는 행복보다 훨씬 더 깊은 것을 바라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의 섭리가 궁극적으로 향하는 것은 사람이 세상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얻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유 안에서 영원한 생명에 적합한 사람으로 거듭나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간절히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주님께서내편이아니시다’고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실제로 나에게 선한 것인지 나는 완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하나님의뜻’이라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이일이잘되어야하나님의영광이지’, ‘저사람이잘못했으니하나님께서반드시저사람을꺾으셔야해’, ‘나는옳으니까하나님께서내억울함을풀어주셔야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진실한 정의감과 함께 자기 사랑, 인정받고 싶은 욕망, 상대방이 패배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섞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프로프리움’(proprium)은 신앙의 언어까지 사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때때로 내가 원하는 ‘승리’를 주시는 것보다 내 안에 숨어 있는 것을 보게 하시는 쪽을 택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반드시 ‘하나님께서이사건을일으켜나를훈련시키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에서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악을 허용하시는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인간의 자유 때문에 주님께서 허용하시는 고통과 악이 있으며, 주님께서 그 악 자체를 원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일단 허용된 상황 속에서도 주님은 끊임없이 사람을 선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실패나 고난을 당했다고 해서 ‘하나님이일부러이것을보내셨다’고 단정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하나님이나를버리셨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방향으로 쉬지 않고 역사합니다.
여기서 ‘내편’이라는 말의 의미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만일 ‘내편’이라는 것이 ‘내가옳든그르든나를지지해주는것’을 뜻한다면, 주님은 결코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편이 아니십니다. 내가 거짓을 말하면 상대방이 아무리 나쁜 사람이어도 주님께서 내 거짓을 진리라고 해주시지 않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저사람은악인이니까하나님도내미움을인정하시겠지’라고 생각해도 주님께서는 미움을 선으로 바꾸어 주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편을 들어 진리를 바꾸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을 진리의 편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내편’이라는 말을 ‘나의영원한선을바라시고끝까지나를구원으로이끄시는분’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주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철저하게 우리 편이십니다. 내가 잘못된 길을 선택할 때조차 즉시 버리지 않으시고, 나의 자유와 ‘합리성’, 곧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이해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보존하시면서 계속 돌아올 길을 마련하십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것보다 내가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바로 그것 때문에 주님이 내 편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것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아이 둘이 싸우는데 한 아이가 부모에게 ‘엄마는누구편이야?’라고 묻는다면 좋은 부모는 무조건 자기 아이의 행동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자기 아이가 잘못했다면 오히려 자기 아이를 바로잡습니다. 그렇다고 그 아이를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를사랑하기때문에네잘못까지사랑할수는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이것보다 훨씬 완전합니다. 주님은 ‘나’를 사랑하시지만 ‘내악’을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나를 구원하기 원하시기 때문에 오히려 내가 붙들고 있는 악과 거짓에는 반대하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주님이 ‘나를반대하시는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사실은 주님께서 ‘내안의나를파괴하는것’을 반대하고 계시는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기도의 의미도 바꾸어 놓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내편으로끌어오는일’이 아닙니다. 내가 세운 계획을 하나님께 설명하고 승인을 받아내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는 점점 내가 주님의 뜻과 질서에 맞추어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겟세마네에서 보여 주신 기도의 질서는 깊습니다. ‘내원대로마시옵고아버지의원대로하옵소서’라는 고백은 자신의 뜻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의 뜻을 아버지의 뜻 아래 두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 제편이되어주십시오’에서 조금씩 ‘주님, 제가주님의편에서게해주십시오’로 변화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앞에서 나눈 여러 질문과도 하나로 이어집니다. ‘나는하나님의자녀니까하나님이알아서하시겠지’, ‘나는전도를많이했으니구원받을거야’, ‘나는주님께헌신했으니큰상을받을거야’, ‘나는죽으면곧주님품에안기겠지’라는 말들에는 공통적으로 ‘나’를 중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위험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됨도, 전도도, 헌신도, 천국의 소망도 모두 귀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중심이 ‘주님께서나에게무엇을해주실것인가?’에 머물면 신앙의 중심에 여전히 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거듭남’(regeneration)은 그 중심이 서서히 바뀌어 가는 과정입니다. ‘주님께서내뜻을이루어주시는가?’에서 ‘나는주님의뜻을사랑하게되었는가?’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하나님의자녀인데왜하나님은내편이아니실때가있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언제나나를사랑하시지만, 언제나내욕망의편을드시는것은아닙니다. 오히려나를사랑하시기때문에내안의거짓과악에는반대하시며, 내가선과진리의편에서도록이끄십니다.’
조금 더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주님은내가옳기때문에내편이되시는분이아니라, 나를사랑하시기때문에내가옳은것의편에서도록이끄시는분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질문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을 하나만 남긴다면 이것을 택하겠습니다. ‘신앙이깊어진다는것은하나님을내편으로만드는것이아니라, 내가점점하나님의편이되어가는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자녀’라는 말을 특권에서 거듭남으로, 보호받을 권리에서 아버지를 닮아 가는 삶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성경은 결혼을 매우 귀하게 말합니다. 창세기 2장 18절에서 주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이혼자사는것이좋지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시고, 남자와 여자가 ‘한몸’을 이루는 질서를 세우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2:18)
스베덴보리 역시 결혼을 단순히 인간 사회를 유지하거나 자녀를 낳기 위한 제도로 보지 않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결합에는 더 깊은 영적 원형이 있으며, 그것은 ‘선’(good)과 ‘진리’(truth)의 결합이고, 가장 높은 차원에서는 주님과 교회의 결합에 그 근원을 둡니다. 이런 의미에서 결혼은 창조 질서 안에 놓인 매우 깊고 거룩한 결합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결혼이창조질서에속한다’는 것과 ‘모든사람이이세상에서반드시결혼해야한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성경 자체가 모든 개인에게 결혼을 의무로 부과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19장 12절에서 여러 이유로 결혼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음을 말씀하셨고, 바울도 고린도전서 7장에서 독신의 삶을 인정합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마19:12)
그러므로 결혼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선하고 귀한 질서이지만, 결혼 여부 자체가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결혼애’(Conjugial Love, 1768)를 통해 보면 이 문제는 더욱 깊어집니다. 참된 결혼 사랑은 지상에서 일정 기간 함께 사는 법적·사회적 제도에 그치지 않고 영원한 삶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결혼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결혼 사랑의 가능성이 영원히 닫히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을 향한 내적 삶을 살며 참된 결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면, 사후에도 자신과 내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배우자를 만나 결합할 수 있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현세의 미혼은 영원한 독신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반드시결혼해야한다’는 압박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자신과 내적으로 맞는 배우자를 만나지 못했는데도 ‘하나님께서결혼하라고하셨으니누구하고든결혼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혼의 본질을 오히려 거꾸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결혼의 핵심이 두 사람의 참된 결합이라면, 결혼이라는 외적 형식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잘못된 관계를 억지로 결혼이라는 형식 안에 넣는 것이 독신으로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보다 더 영적인 삶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결혼하지않아도된다’는 말을 ‘결혼은별로중요하지않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도 안 됩니다. 특히 ‘혼자가편하기때문에’, ‘내자유를침해받기싫기때문에’, ‘누군가에게맞추며살고싶지않기때문에’ 모든 깊은 결합을 거부한다면 그 내면의 동기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참된 결혼 사랑에는 자기중심성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처럼 여기며 두 사람이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질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프로프리움’(proprium)을 지키기 위해 타인과의 결합 자체를 거부하는 독신과, 자신의 형편과 소명 안에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독신은 겉으로는 같아 보여도 내적으로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반대로 결혼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참된 결혼 사랑 안에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법적으로는 부부이면서 서로를 지배하고 이용하고 상처 입히며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혼인신고가 두 사람의 영혼을 자동으로 결합시키지는 않습니다. 반면 결혼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정결과 책임, 이성에 대한 존중, 다른 사람을 자기 자신처럼 배려하는 사랑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서 더 근본적인 질문은 ‘결혼했는가, 하지않았는가?’가 아니라 ‘어떤사랑을가진사람으로살아가고있는가?’입니다.
여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성경적 난제가 따라옵니다. 주님은 부활에 관하여 ‘장가도아니가고시집도아니가고하늘에있는천사들과같으니라’(마22:30)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마22:30)
그렇다면 천국에는 결혼이 없다는 뜻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천국에서 남녀의 결합 자체가 사라진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지상의 혈통을 이어가기 위한 자연적 혼인과 천국에서 이루어지는 영적 결합을 구별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별도로 충분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천국에도결혼이있는가?’라는 질문은 스베덴보리의 결혼관을 이해하는 중요한 다음 단계입니다.
결국 ‘결혼을꼭해야하는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결혼은 주님께서 세우신 매우 귀한 창조 질서이지만, 모든 사람이 지상에서 반드시 결혼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 여부가 사람의 구원을 결정하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결혼이라는 외적 상태보다 그 사람 안에서 어떤 사랑이 형성되고 있는가입니다. 결혼한 사람에게는 배우자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며 참된 결합을 이루어 가는 길이 있고, 결혼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장차 참된 결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는 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질문을 조금 바꾸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반드시결혼해야하는가?’보다 더 깊은 질문은 ‘나는누군가와참으로하나될수있는사람으로거듭나고있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결혼의 궁극적인 의미는 단순히 배우자를 ‘얻는것’에 있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랑에서 벗어나 선과 진리가 결합하듯 서로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는 데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것은 무조건 지상에서 배우자를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결혼사랑을이룰수있는사람으로준비되어가는것’입니다.
※오늘(2026/10/18)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8, ‘성도들아찬양하자’, 찬131, ‘다나와찬송부르세’입니다.
오늘은창5절별 주석 그 두 번째, 6절로 14절, AC글 번호로는 496번에서 509번입니다. 먼저 창세기 본문입니다.
6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7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9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2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창5:6-14)
AC.495는 태고교회가 ‘퍼셉션을가진교회’였으며 ‘오늘날에는그러한교회가존재하지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읽으면 질문이 생깁니다. 오늘날에도 사람은 기도하거나 말씀을 읽는 가운데 ‘이것은옳다’, ‘이것은해서는안된다’는 내적인 깨달음을 경험합니다. 어떤 때에는 이유를 길게 따져 보지 않아도 무엇이 선하고 진실한지를 깊이 확신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도 태고교회의 ‘퍼셉션’(perception)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그렇지 않습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후대 영적 인간의 양심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에 관계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질서가 서로 다릅니다.
그 차이를 가장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천적 인간은 ‘선으로부터진리를퍼셉션’하지만, 영적 인간은 ‘배운진리로부터양심이형성되어선으로인도’됩니다. AC.2831은 이 차이를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천적 인간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주님으로부터 일종의 내적인 지각으로 즉시 알아차립니다. 그들이 주님과 사랑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영적 인간에게는 그러한 퍼셉션이 없으며 그 대신 양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양심은 부모와 스승에게서 배우고, 교리와 말씀을 통하여 받아들인 선과 진리로부터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퍼셉션은 단순히 ‘양심이아주강해진상태’가 아닙니다. 둘은 주님께서 인간을 이끄시는 서로 다른 질서에 속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는 사랑의 선이 먼저 있었고 그 선으로부터 무엇이 진리인지 퍼셉션되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외부에서 먼저 배우고 논증하여 ‘이것이참이므로믿겠다’고 하는 방식이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선 안에서 무엇이 진리인지 내적으로 알아차렸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계속 살펴온 ‘천적질서’, 곧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는 질서입니다.
반대로 영적 인간은 진리를 먼저 배웁니다. 말씀을 읽고, 가르침을 받고, 무엇이 주님의 뜻인지 배운 뒤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삶에서 행합니다. 이렇게 받아들인 진리가 사람의 속 사람에 깊이 새겨지고 삶으로 확증되면 그것이 양심을 형성합니다. AC.7935는 영적 교회 사람들의 양심이 그들이 어려서부터 배우고 이후 삶으로 확증한 교회의 진리들로부터 ‘태어나고형성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렇게 진리가 내면에 자리 잡으면 사람은 그것에 따라 생각하고 원하고 행동하도록 내적으로 이끌립니다. 이것이 영적 인간에게 있는 양심입니다.
예를 들어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이 어떤 일을 마주했을 때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의 선으로부터 그것이 선인지 아닌지를 퍼셉션했습니다. 반면 오늘날 영적 질서 안에 있는 사람은 ‘주님께서말씀에서어떻게가르치셨는가’, ‘이웃을사랑하라는진리에비추어이것은옳은가’, ‘내가알고믿는진리에따라어떻게행동해야하는가’를 통하여 양심의 인도를 받습니다. 처음에는 배운 진리를 기억하여 판단하지만, 그 진리에 따라 오래 살아가면 그것이 내면에 깊이 자리 잡아 일일이 논리를 펼치지 않아도 ‘이것은해서는안된다’는 내적인 요구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양심 역시 단순한 사회적 죄책감이나 심리적 불편함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AC.2831은 시민 생활에서의 정의와 공정함을 지각하는 것, 도덕생활에서 명예로운 것을 지각하는 것과 신앙의 선과 진리에 관한 영적 퍼셉션을 구별합니다. 또한 사람의 양심은 그가 받아들인 선과 진리에 의해 형성되므로, 그가 배운 것이 충분히 참되지 않다면 양심 역시 불완전하게 형성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내양심이그렇게말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판단이 언제나 절대적으로 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양심도 말씀의 진리에 의해 계속 밝혀지고 바로잡혀야 합니다.
이 점은 퍼셉션과 개인적인 직감을 구별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마음속에어떤생각이강하게떠오르는것’, ‘내적으로어떤음성을듣는것’, ‘설명하기어렵지만확신이드는것’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강한 느낌은 자기애, 욕망, 두려움, 선입견에서도 나올 수 있습니다. AC.2515는 퍼셉션에서 나오는 생각, 양심에서 나오는 생각, 양심 없이 욕망과 환상에서 나오는 생각을 분명히 구별합니다. 따라서 확신의 강도가 그 근원이 주님이라는 보증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퍼셉션과 양심에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둘의 근원은 궁극적으로 주님이며, 둘 다 인간을 선과 진리로 이끄시는 방식입니다. 차이는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질서에 있습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사랑의 선이 의지 안에 자리 잡아 그 선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하는 질서가 있었고, 영적 인간에게는 진리가 먼저 이해 안에 받아들여지고 그 진리에 따라 새로운 의지가 형성되면서 양심이 생기는 질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퍼셉션과 양심은 서로 무관한 두 능력이 아니라 주님께서 서로 다른 상태의 인간을 이끄시는 서로 다른 방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차이를 알면 왜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사라지는 것이 그렇게 중대한 ‘죽음’이었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교회의 생명은 주님을 향한 사랑 안에서 선과 진리를 직접 퍼셉션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의지가 악으로 물들면서 그 질서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선에서 진리를 퍼셉션하던 통로가 변질되면, 자기 욕망을 주님의 뜻으로 오인하는 훨씬 위험한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타락한 인간에게 옛 퍼셉션을 그대로 유지시키시는 대신 진리를 외적으로 배우고 그것으로 새로운 내면을 형성하는 영적 질서, 곧 신앙과 양심의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억지로 회복하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도주님으로부터직접무엇이진리인지느끼고싶다’며 특별한 내적 감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말씀의 진리를 겸손히 배우고 그것을 삶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삶으로 확증될수록 그것은 단순히 머릿속에 기억된 지식으로 머물지 않고 우리의 내면을 형성하며, 마침내 양심을 통하여 생각과 의지와 행동을 이끄는 살아 있는 진리가 됩니다.
그렇다고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모든 신앙생활이 계속 외적인 규칙 확인에만 머문다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더 높은 형태의 양심과 선으로부터의 지각도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성급하게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특별한체험을했는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가르치신 진리가 우리의 삶 안에서 선과 결합되고 있는가입니다. AC.495가 퍼셉션을 설명하면서 마지막에 ‘삶으로확증되는신앙고백’을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퍼셉션과 양심의 차이는 창세기 초반 전체를 관통하는 ‘천적인간과영적인간의차이’를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에서 신앙으로, 선에서 진리로 나아갔고, 영적 인간은 진리를 받아들여 신앙으로 삼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선으로 인도됩니다. 방식은 다르지만 두 경우 모두 생명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태고교회의 상태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과 신앙과 양심의 길을 따라 주님께서 우리를 이끄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리가 삶이 되고 신앙이 사랑과 결합될 때, 주님은 우리를 영적 인간에서 더욱 온전한 사랑의 질서로 계속 이끌어 가십니다. (AC.492-495심화2)
스베덴보리의 묘사를 종합하면 ‘둘다아니고, 훨씬더내적인방식’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천사와 악령이 마치 육체를 가진 병사들처럼 칼을 들고 1:1로 싸우는 것이 기본적인 모습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천사의아우라가강해서악령이접근하지못한다’ 정도도 아닙니다. 핵심은 ‘선과진리의입류(influx)를통한영적전투’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영계에서 천사와 영들은 모두 자신들의 사랑과 사고에 따른 ‘스피어(sphere, 영역·기운)’를 발산합니다. 천사에게서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의 스피어가 나오고, 악령에게서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 거짓과 악의 스피어가 나옵니다. 그래서 서로 반대되는 스피어가 가까워지면 실제적인 충돌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영계에서는 사랑과 생각이 자연계의 물리적 힘보다 훨씬 직접적인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천사들이 악령과 싸울 때 중요한 것은 ‘천사자신의힘으로싸우는것이아니다’라는 점입니다. 천사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전달합니다. 악령은 그 진리를 견디지 못합니다. 자기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진리를 말하거나 천사의 스피어가 임하면 악령이 고통을 느끼고 물러가거나 도망치는 일이 생깁니다. 어떤 경우에는 가까이 접근하는 것 자체를 견디지 못합니다. 목사님이 말씀하신 두 번째 그림, 즉 ‘천사들의아우라범위를악령들이침범하기어렵다’는 표현이 1:1 칼싸움보다는 훨씬 가깝습니다. 다만 ‘보이지않는방어막’처럼 이해하면 조금 다릅니다. 그것은 천사 개인의 초능력 같은 것이 아니라 ‘그천사를통해임하는주님의선과진리의질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영계의 전투를 때때로 ‘전쟁’, ‘무기’, ‘칼’, ‘방패’ 같은 모습으로 묘사한다는 점입니다. 영계에서는 내적인 것이 외적인 형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들이 실제로 싸우는 것처럼 보이는 표상적 장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형상의 실체는 물리적인 근육과 철제 무기의 충돌이 아니라 ‘진리와거짓, 선과악의충돌’입니다. 성경에서 ‘칼’이 진리를, 반대 의미에서는 거짓을 뜻하는 것도 이 상응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영계에서 칼싸움 같은 장면이 보인다 해도 ‘천국에는실제무기고가있고천사들이칼을차고출동한다’고 이해하면 스베덴보리의 영계론과는 상당히 멀어집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천사들은 악령을 ‘죽이는것’을 목표로 싸우지 않습니다. 영은 죽일 수도 없습니다. 천사들의 역할은 악령의 공격을 억제하고, 공격받는 사람이나 영을 보호하며, 악령이 주입하는 거짓에 맞서 진리를 불어넣는 것입니다. 특히 인간이 시험(temptation)을 겪을 때 이 구조가 선명합니다. 악령들은 인간 안의 악과 거짓, 과거의 기억과 욕망을 자극하고, 천사들은 그 반대편에서 선과 진리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그 싸움이 ‘내생각과내갈등’처럼 느껴집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시험의 놀라운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이런 모습이 가장 가깝습니다.
‘악령 → 인간안의악·거짓·두려움·절망을자극 → 인간←선·진리·소망을일깨움←천사←주님’
그러나 이것조차 최종적으로는 ‘천사대악령’의 대등한 전쟁이 아닙니다. 천사의 모든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악령이 천사를 두려워하는 것도 천사라는 존재 자체가 무서워서라기보다 그 천사를 통하여 임하는 ‘주님의선과진리’를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자신의 힘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오히려 능력을 잃는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일관된 설명입니다.
이걸 조금 전 ‘시티즌비질란테’와 연결하면 아주 흥미로운 차이가 드러납니다. 비질란테의 방식은 ‘악인을파괴하여악을제거하려는방식’입니다. 반면 천국의 방식은 ‘악이더이상다른존재를해치지못하도록억제하고분리하여질서를회복하는방식’에 가깝습니다. 천사는 악령을 증오해서 두들겨 패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질서가 임하면 악이 그 질서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라’라는 표현을 조금 다듬는다면 ‘천사의스피어(sphere)’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더 정확하게는 ‘천사의스피어’조차 천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천사를통하여흘러드는주님의선과진리의스피어’입니다.
레9:22에서 아론은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모두 마친 뒤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합니다. 제사장으로 위임된 아론이 처음으로 실제 사역을 수행한 뒤 행한 마지막 행동이 ‘축복’이라는 점은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축복을 단순히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비는 종교적 인사로 보지 않습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422(창12:3)는 ‘축복’이 주님에게서 오는 모든 선과 진리, 곧 천적·영적·자연적 차원의 좋은 것들을 포괄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제사장이 백성을 축복한다는 것은 아론 자신이 복을 만들어 백성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제사장의 쓰임을 통해 백성에게 전달되는 것을 표상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레8의 장면을 기억하면 더욱 아름답습니다. 레8에서는 아론의 ‘손’에 위임식의 제물들이 놓였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것이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의 것이며 주님에게서 온다는 인정을 나타낸다고 설명했습니다. 그 손이 레9에서는 백성을 향해 올라갑니다.
즉 먼저 받아야 줄 수 있습니다. 레8에서는 손이 주님에게서 받고, 레9에서는 그 손이 백성을 향해 축복합니다. 이것이 쓰임의 질서입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자기 것으로 움켜쥐지 않고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영적 쓰임의 기준은 ‘내가얼마나많이가지고있는가?’가 아니라 ‘주님에게서받은것이나를통해얼마나선한쓰임으로흘러가는가?’입니다. 진리를 많이 알고 있다면 그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돕는 데 사용해야 하고, 물질을 받았다면 선한 쓰임에 사용하며, 경험과 지혜를 받았다면 다른 사람을 살리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론은 ‘손을들어’ 축복합니다. 손이 능력과 행함을 나타낸다는 스베덴보리의 일반적인 상응을 생각하면 축복은 말만의 행위가 아니라 선을 실제로 전달하는 쓰임과 잘 연결됩니다. 진정한 축복은 ‘복받으십시오’라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내가 가진 것을 통해 실제로 이웃에게 선이 전달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레9의 첫 제사장 사역은 자기 영광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아론이 제사를 성공적으로 마쳤으니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손이 백성을 향해 올라갑니다. 그리고 곧이어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주님의 쓰임에 부름받은 사람의 방향입니다. 주님에게서 받고 이웃에게 흘려보내며, 마지막에는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물지 않고 주님께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레8에서 채워진 손이 레9에서 축복하는 손이 되는 것, 이것이 위임에서 쓰임으로 나아가는 거듭남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SW.레9심화4)
레5:11은 레2를 이미 읽은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레2의 소제에서는 고운 가루에 반드시 기름을 붓고 유향을 놓았습니다. 그런데 레5에서는 형편이 어려워 비둘기조차 드릴 수 없는 사람이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속죄제로 가져오도록 하면서 정반대로 명령합니다. ‘이는속죄제인즉그위에기름을붓지말며유향을놓지말고.’ 같은 고운 가루인데 왜 소제에서는 기름과 유향을 더하고, 속죄제에서는 그것들을 의도적으로 빼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는 놀랍게도 스베덴보리가 거의 그대로 답한 대목이 있습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137(출29:40)은 여러 소제의 규정을 설명하다가 레5:11을 직접 인용합니다. 그리고 죄와 허물을 위한 제사의 소제에는 십분의 일 에바의 고운 가루를 사용하되 ‘그위에기름이나유향을두지않았다’고 한 뒤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기름’은 사랑의 선을, ‘유향’은 그 선에 속한 진리를 의미하지만, 속죄제와 속건제는 악과 거기에서 나오는 거짓으로부터의 ‘정결과속죄’를 의미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선 및 선에서 나오는 진리와 섞여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레5:11을 직접 다루는 원전이므로 이 부분의 상응은 매우 확실합니다.
이 설명을 이해하려면 레2를 잠시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레2에서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은 함께 있었습니다. 고운 가루는 선에서 나오는 진리와 연결되고, 기름은 사랑의 선을, 유향은 그 선에서 나오는 진리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소제는 주님께서 주신 선과 진리가 인간의 삶 안에서 결합되어 예배와 쓰임으로 나타나는 아름다운 상태를 보여 주었습니다. 거기에서는 기름과 유향이 빠질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함께 있어야 소제가 나타내는 영적 상태가 온전히 표현됩니다.
그러나 레5의 상황은 다릅니다. 지금 인간은 이미 선과 진리가 조화롭게 결합된 상태를 표현하려고 제단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서 악과 거짓이 드러났고 그것으로부터 정결하게 되어야 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고운 가루를 가져오지만 거기에 기름과 유향을 넣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사람에게사랑의선과진리가전혀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이 제사가 표상하는 중심 사건이 ‘선과진리의결합’이 아니라 ‘악과거짓으로부터의정결’이라는 뜻입니다. 제사의 재료는 같아도 제사의 목적과 계열이 달라지면 상응의 배열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레위기의 상응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한 원칙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흔히 ‘기름=사랑’, ‘유향=진리’, ‘고운가루=진리’와 같이 대응표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기계적으로 대입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상응은 그렇게 단순한 암호풀이가 아닙니다. 무엇이 무엇과 함께 있는지, 어떤 제사 안에 놓여 있는지, 그 제사가 전체적으로 무엇을 표상하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AC.10137의 설명이 바로 그 좋은 예입니다. 기름과 유향 자체는 선한 것을 표상하지만, 속죄제에서는 바로 그 선한 것들을 ‘넣지않는것’까지 의미가 있습니다. 악과 거짓을 정결하게 하는 과정과 이미 정결해진 선과 진리의 상태를 뒤섞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거듭남에서도 매우 실제적입니다. 자기 안에서 악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너무 빨리 그것을 좋은 것으로 포장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화를 내고도 ‘정의를위한분노였다’고 하고, 사람을 지배하려 하고도 ‘그사람을사랑해서그랬다’고 하며, 인정받으려는 욕망을 ‘주님의영광을위한열심’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악을 악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속죄제의 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향을 넣지 않는 장면은 영적으로 이런 혼합을 경계하는 모습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정결해야 할 것은 먼저 정결해야 합니다. 악을 선이라고 부르거나 거짓을 좋은 의도라고 포장하지 않고 주님의 빛 앞에서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2와 레5의 차이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레2에서는 ‘고운가루에기름을붓고유향을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 주님께 드려지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레5에서는 ‘기름을붓지말며유향을놓지말라’고 하십니다. 지금은 악과 거짓으로부터 정결하게 되는 일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거듭남을 통해 이루어지는 선과 진리의 결합을 보여 주고, 다른 하나는 그 결합을 방해하는 악과 거짓을 제거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서로 반대되는 제사가 아니라 거듭남이라는 하나의 큰 역사 안에서 서로 다른 일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왜 레위기의 그토록 사소해 보이는 규정 하나까지 함부로 지나칠 수 없는지를 보여 줍니다. ‘기름을넣는다’와 ‘기름을넣지않는다’, ‘유향을놓는다’와 ‘유향을놓지않는다’의 차이 안에 인간의 거듭남에서 ‘정결’과 ‘결합’을 구별하는 아르카나가 숨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악과 거짓을 선과 진리로 위장하지 않고 드러내어 정결하게 하시며, 그렇게 깨끗하게 된 자리에서 비로소 선과 진리가 참으로 결합되게 하십니다. 레5:11의 비어 있는 고운 가루는 그래서 결핍의 표상이 아니라, 거듭남의 질서를 정확하게 보여 주는 제물입니다. (SWC.레5심화4)
‘화목제’라는 이름을 들으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과사이가나빠진인간이제물을드려하나님과다시사이좋게되는제사’를 떠올리기 쉽습니다. 더 강하게 표현하면 인간의 죄 때문에 분노하신 하나님께 제물을 드려 그분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제사처럼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391(출24:5)은 이스라엘 백성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장면을 해설하면서, 이것이 ‘선으로부터,그리고선에서나오는진리로부터드리는주님에대한예배’를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번제가 특별히 사랑의 선으로부터 드리는 예배를 의미한다면, 제사는 선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로부터 드리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화목제의 중심에도 선과 진리가 함께 있습니다.
레3의 의식 자체가 이것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제물의 피는 제단 사방에 뿌려지고 기름은 제단 위에서 불살라집니다. AC.10033(출29:22)은 피가 신적 진리를, 기름이 신적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화목제의 중심에는 ‘신적진리와신적선’이 함께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은 무엇일까요? 하나님 쪽에서 인간을 미워하시다가 제물을 보고 마음을 바꾸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변해야 하는 쪽은 인간입니다. 인간 안의 악과 거짓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그 결과 인간 스스로 주님과의 결합에서 멀어집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진리를 통해 인간에게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지를 보여 주십니다. 인간이 그 진리에 따라 악을 죄로 여겨 피하기 시작하면 주님께서 선을 심으실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진리가 선과 결합되면서 인간의 의지와 이해, 사랑과 신앙,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점차 하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런 의미에서 ‘화목’은 단순한 감정적 관계 회복보다 훨씬 깊습니다. 그것은 ‘결합’입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에게 받아들여지고,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가 서로 결합함으로써 인간이 주님과 결합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화목제에서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는 행위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AC.10047(출29:16)은 피를 제단 둘레에 뿌리는 것이 신적 진리와 신적 선의 결합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의 거듭남 역시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시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화목제를 ‘하나님의분노를달래는제사’로만 읽으면 레3의 가장 깊은 아름다움을 놓칠 수 있습니다. 화목제는 오히려 주님께서 인간을 다시 당신과 결합시키시는 거듭남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인간 안에서 악과 거짓이 물러가고, 주님의 진리가 받아들여지고, 그 진리가 선과 결합하며, 그 선이 삶의 가장 바깥쪽까지 내려올 때 인간은 점점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 결과가 ‘평화’입니다. 성경의 평화는 단순히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인간의 내면에서 서로 싸우던 것들이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와 하나가 되는 상태와 깊이 관계합니다. 진리와 선이 하나가 되고,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의 방향을 향하며, 인간의 뜻이 점차 주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게 될 때 평화가 옵니다.
따라서 화목제는 ‘내가무엇을드려하나님을내편으로만들것인가?’를 묻는 제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내안에서무엇을바로잡으셔야내가다시그분의생명을온전히받을수있는가?’를 묻게 하는 제사입니다.
화목은 하나님을 변화시키는 일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에 의해 변화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진리로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고, 그 진리를 선과 결합시키시며, 마침내 우리의 사랑과 생각과 행동이 하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게 하실 때 우리는 주님과의 결합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화목제의 깊은 중심입니다. (SWC.레3심화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