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앞의 영상을 부부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강하게 남는 질문은 ‘우리는 정말 한 팀인가?’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선을 조금 옮겨 부모의 자리에서 바라보겠습니다. 그러면 질문도 달라집니다. ‘결혼한 내 자녀와 그 배우자가 한 팀이 되도록 나는 얼마나 잘 물러나 주고 있는가?’입니다. 영상에는 시어머니의 말, 장모의 개입, 명절 방문 순서, 음식 준비, 용돈, 육아, 제사와 친척 관계 등 수많은 문제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켜고 부모의 자리에서 보면 이 모든 문제의 밑바닥에는 하나의 영적인 문제가 숨어 있습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것’과 ‘자녀를 내 삶의 연장으로 붙들고 있는 것’은 같은가 하는 문제입니다.

 

성경은 결혼에 관하여 매우 놀라운 순서를 제시합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 여기에는 ‘떠남’이 먼저 있고 ‘합함’이 있으며 그 결과 ‘한 몸’이 됩니다. 물론 이것은 부모와 관계를 끊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부모 공경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혼이 이루어지는 순간 관계의 질서에는 분명한 변화가 생깁니다. 이전까지 부모와 자녀가 하나의 가정이었다면 이제 그 자녀는 배우자와 새로운 가정을 이루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창2:24의 ‘떠남’은 자녀에게만 요구되는 일이 아닙니다. 자녀가 부모를 떠나야 한다면 부모 역시 자녀가 떠날 수 있도록 놓아주어야 합니다. 어쩌면 후자가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결혼애’(Conjugial Love, 1768, CL)에서 스베덴보리는 참된 결혼의 본질을 두 마음의 결합에서 찾습니다. 두 사람이 단순히 한집에서 사는 것을 넘어 점차 하나의 삶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하나가 되고자 하는 의지’가 있습니다(CL.215). 그렇다면 결혼한 자녀를 둔 부모가 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사랑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 결합을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아들과 며느리 사이, 딸과 사위 사이에 형성되고 있는 ‘우리’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 어린 시절에는 보호하고 가르치고 개입하는 사랑이었다면, 결혼 이후에는 상당 부분 ‘물러남으로써 보호하는 사랑’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것이 어려운 까닭은 부모에게는 자녀의 결혼보다 부모-자녀 관계가 훨씬 오래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며느리를 만나기 수십 년 전부터 내 아들이었고, 딸은 사위를 만나기 수십 년 전부터 내 딸이었습니다. 부모에게는 수많은 기억과 희생과 애착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서는 결혼 후에도 ‘내 아들’, ‘내 딸’이라는 감각이 가장 먼저 작동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결혼한 자녀에게는 이제 또 하나의 매우 중요한 정체성이 생겼습니다. ‘누군가의 남편’, ‘누군가의 아내’입니다. 부모가 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악의가 전혀 없어도 자녀의 결혼생활에 끊임없이 압력을 가할 수 있습니다.

 

명절은 이 질서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때입니다. ‘이번에는 언제 오니?’, ‘몇 시에 올 거니?’, ‘자고 갈 거지?’, ‘큰아버지가 오시는데 얼굴은 보고 가야지’, ‘명절인데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니?’ 각각의 말만 떼어 놓으면 크게 잘못된 말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실제로 부모 입장에서는 오랜만에 자녀를 보고 싶은 마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요구가 양가에서 동시에 들어오면 자녀 부부는 그 사이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부모에게는 ‘조금만 더 있다 가라’는 한마디이지만, 자녀의 배우자에게는 ‘우리 친정보다 시댁이 항상 우선이다’ 또는 그 반대의 메시지로 경험될 수도 있습니다. 영상이 보여 주는 갈등의 상당 부분은 바로 이런 작은 요구들이 반복되면서 생겨납니다.

 

여기서 부모가 특별히 살펴야 할 것은 ‘나는 요구하지 않았다’는 자기평가입니다. 직접 ‘우리 집부터 와라’고 말하지 않았더라도 서운한 표정, 반복되는 질문, 다른 집 자녀와의 비교, ‘옛날에는 다 그랬다’는 말, 늦게 왔을 때의 냉랭함으로 충분히 압력을 줄 수 있습니다. 자녀는 부모를 잘 알기 때문에 부모가 명시적으로 요구하지 않아도 무엇을 원하는지 압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거듭남은 말만 조심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어야 사랑받는다고 느끼는 마음’ 자체를 살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proprium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proprium은 노골적인 이기심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선한 외형을 입을 때 분별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가족인데 이 정도는 해야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당연하지’, ‘우리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명절에 가족이 모이는 게 뭐가 나쁘니?’ 모두 그 자체로 틀린 말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말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입니다. 자녀의 자유와 새 가정을 존중하는 사랑이 들어 있을 수도 있고, ‘내가 부모이니 이 정도는 받을 권리가 있다’는 자기성이 들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외적 행동만 보면 둘은 비슷하지만 내적 동기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영상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은 ‘아들이 효도하고 싶은데 며느리가 일을 하고, 딸이 효도하고 싶은데 사위가 비용을 부담한다’는 지적입니다. 부모의 입장에서도 이것은 깊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며느리가 차린 명절상을 받으면서 ‘우리 아들이 참 효자다’라고 생각한다면 실제로 그 효도의 상당 부분을 누가 감당하고 있는지 보아야 합니다. 반대로 딸이 부모에게 좋은 선물을 해왔을 때도 그 비용과 준비가 사위에게 어떤 부담이 되었는지 부모는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녀의 효도를 기쁘게 받는 것과 자녀 배우자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때로는 부모가 먼저 ‘너희가 무리하면서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는 것이 오히려 더 깊은 가족 사랑일 수 있습니다.

 

특히 며느리와 사위를 ‘우리 집 사람이 되었으니 우리 집 방식에 따라야 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결혼은 한 사람이 다른 집안으로 편입되어 그 집안의 관습에 복종하는 사건만은 아닙니다. 두 사람이 새로운 가정을 이루는 사건입니다. 따라서 ‘우리 집은 원래 이렇다’는 말은 생각보다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이 새로운 가족에게 과거의 질서를 그대로 강요하는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통은 소중하지만 사람보다 높을 수는 없습니다. 전통이 사랑을 돕는다면 보존할 가치가 있지만, 전통 때문에 한 사람이 지속적으로 고통받는다면 부모 역시 그 전통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부모가 자녀 부부에게 아무 말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 역시 반대 극단입니다. 자녀가 결혼했다고 부모의 지혜와 경험이 무가치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는 조언할 수 있고 걱정할 수 있으며 잘못된 것을 잘못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조언’과 ‘지배’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조언은 상대에게 자유를 남겨 둡니다. 지배는 내가 원하는 결론을 상대가 선택해야 마음이 놓입니다. ‘내 생각은 이렇지만 결정은 너희 둘이 잘 의논해서 해라’라고 말하고 실제로 다른 결정을 했을 때도 그것을 존중할 수 있다면 조언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알아서 해라’라고 말해 놓고 다른 선택을 하면 서운함과 냉대로 대한다면 사실상 선택권을 준 것이 아닙니다.

 

또 하나 부모가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은 부부 사이의 갈등에 들어가는 방식입니다. 자녀가 배우자에 대한 불만을 부모에게 털어놓을 때 부모의 본능은 자기 자녀를 보호하는 쪽으로 움직입니다. 그러나 부부싸움은 화해하면 끝날 수 있어도 부모의 마음에 새겨진 며느리나 사위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은 오래 남을 수 있습니다. 자녀는 다음 날 배우자와 화해했는데 부모는 몇 년 전 들은 이야기를 아직 기억하는 일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결혼한 자녀가 배우자를 흉볼 때 무조건 함께 분노해 주는 것이 반드시 사랑은 아닙니다. 때로는 ‘많이 힘들었겠구나. 그래도 그 문제는 너희 둘이 잘 이야기해 보아라’ 하고 자녀를 다시 배우자에게 돌려보내는 것이 그 결혼을 보호하는 부모의 지혜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매우 깊은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참된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내 것’으로 만들려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는 것처럼, 사랑은 상대가 자기 자리에서 바르게 설 수 있도록 돕습니다. 자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녀의 모든 선택을 대신하고, 자녀의 배우자와 경쟁하고, 자녀가 자신보다 배우자를 우선할 때 배신당했다고 느낀다면 그 사랑 안에는 소유하려는 자기성이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부모에게도 거듭남이 필요하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자녀를 키우는 동안에는 붙잡아 주는 것이 사랑이었다면 어느 시점부터는 놓아주는 것이 사랑이 됩니다.

 

그래서 결혼한 자녀가 ‘이번 명절에는 처가부터 가겠습니다’, ‘이번에는 여행을 가려고 합니다’, ‘제사는 이렇게 간소화했으면 합니다’, ‘이번에는 오래 있지 못합니다’라고 말할 때 부모의 마음에 서운함이 생기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감정은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그 서운함을 자녀에게 죄책감으로 돌려줄 것인가, 아니면 주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살필 것인가입니다. ‘왜 나는 아이들이 오지 않으면 이렇게 섭섭한가? 내가 원하는 가족의 모습을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이들이 나를 사랑한다는 증거를 특정한 방식으로 확인받으려 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런 질문이 부모 자신의 거듭남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부모에게는 또 하나의 어려운 시험이 있습니다. 자녀의 배우자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입니다. 부모의 눈에는 분명 부족한 점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기억해야 할 것은 그 사람이 ‘내 며느리’, ‘내 사위’이기 이전에 자녀가 평생을 함께 살아갈 배우자라는 사실입니다. 부모가 며느리나 사위를 지속적으로 깎아내리면 결국 자녀에게 두 충성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요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녀가 배우자를 보호하면 ‘결혼하더니 변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2:24의 질서에서 보면 어느 정도의 변화는 오히려 당연합니다. 부모를 버린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결혼적 결합을 보호하기 위해 경계를 세우는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가장 아름다운 말 가운데 하나는 어쩌면 ‘우리 때문에 너희 둘이 싸우지는 마라’일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일은 우리가 감당할 테니 너희 가정을 먼저 잘 세워라’라고 말할 수 있다면 더욱 깊은 사랑일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를 중요하지 않은 존재로 만드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모가 자신의 자리를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자녀의 사랑을 붙잡아야만 안심하는 부모가 아니라 자녀가 배우자와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기뻐할 수 있는 부모, 이것은 결코 작은 영적 성숙이 아닙니다.

 

여기서 부모 공경의 의미도 새롭게 볼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효도를 요구하는 것과 자녀가 자유롭게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전혀 다른 열매를 맺습니다. 강요된 효도는 외적 행동을 얻을 수는 있지만 마음까지 얻기는 어렵습니다. 반대로 부모가 자녀 부부의 자유와 경계를 존중하면 오히려 자녀가 기쁜 마음으로 부모를 찾을 가능성이 커집니다. 사랑은 붙잡을수록 멀어지고 자유를 줄수록 가까워지는 역설적인 면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강제로 사랑을 받아내지 않으시는 이유와도 통하는 지점입니다.

 

명절 역시 이런 의미에서는 부모에게 하나의 거울이 됩니다. ‘아이들이 몇 시에 왔는가’, ‘얼마짜리 선물을 가져왔는가’, ‘며느리가 음식을 얼마나 했는가’, ‘사위가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는가’를 평가하는 시간이 아니라, ‘나는 이들의 결혼을 평안하게 해주는 부모인가?’를 돌아보는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며느리가 부엌에서 일하고 있을 때 ‘너도 앉아서 쉬어라’라고 말하고, 사위가 불편하게 앉아 있을 때 자연스럽게 쉴 자리를 만들어 주고, 자녀 부부가 다음 일정 때문에 일어나려 할 때 ‘그래, 얼른 가 봐라’ 하고 보내 줄 수 있다면 그것도 매우 실제적인 체어리티입니다. 거창한 신앙 고백보다 이런 작은 행동 속에서 사랑의 질서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결국 부모의 입장에서 이 영상의 핵심 질문은 ‘왜 요즘 자녀들은 명절을 힘들어하는가?’가 아닐 것입니다. 더 깊은 질문은 ‘나는 자녀가 결혼한 뒤에도 여전히 부모-자녀 관계가 그들의 삶에서 가장 우선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입니다. 그리고 ‘내가 섭섭하지 않기 위해 자녀의 배우자가 희생하도록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입니다. 이 질문은 부모에게 결코 편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언제나 이런 불편한 자기 발견을 통과합니다.

 

창2:24의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라는 말씀은 그래서 자녀에게만 주어진 말씀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자녀에게는 ‘떠날 용기’를 요구하고 부모에게는 ‘보낼 사랑’을 요구합니다. 자녀가 떠나는 것이 거듭남이라면 부모가 보내는 것 역시 거듭남입니다. 어린 자녀에게는 손을 잡아 주는 부모가 필요하지만, 결혼한 자녀에게는 그 손을 조금씩 놓아주는 부모가 필요합니다. 붙잡고 싶은 마음이 올라올 때마다 ‘이 아이는 내 소유가 아니라 주님께 속한 한 사람이며, 이제 배우자와 함께 새로운 삶을 이루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부모의 가장 큰 성공은 자녀가 언제까지나 부모를 가장 먼저 찾게 만드는 데 있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아들과 며느리가 서로 사랑하고, 딸과 사위가 서로를 보호하며, 그들의 아이들이 평안한 가정 안에서 자라는 것을 기뻐하면서 자신은 한 걸음 뒤에서 그 결혼을 축복할 수 있게 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 집에 먼저 와라’보다 ‘너희 둘이 의논해서 편한 대로 해라’, ‘며느리가 이것도 안 하느냐’보다 ‘너희 둘이 행복하게 살아라’, ‘결혼하더니 자식이 변했다’보다 ‘이제 정말 자기 가정을 이루어 가는구나’라고 말할 수 있는 부모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이것은 단순한 세대 갈등 해결법이 아닙니다. 사랑의 질서를 배우는 일입니다. 부모의 사랑도 주님의 손 안에서 계속 변화하고 정화되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품는 사랑이었다가, 가르치는 사랑이 되고, 기다리는 사랑이 되며, 마침내 놓아주고 축복하는 사랑으로 성숙해 갑니다. 어쩌면 결혼한 자녀를 둔 부모에게 주어진 거듭남의 한 장면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내 자녀를 얼마나 붙잡고 있는가’가 아니라 ‘주님 안에서 얼마나 자유롭게 놓아줄 수 있는가.’ 자녀의 결혼을 지켜 주기 위해 기꺼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것, 그것 역시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매우 깊은 사랑입니다.

 

 

 

SY.102, 존버의 경제학, ‘명절 이혼이 많은 진짜 이유’ (20260922)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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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의 기본 설정은 흥미롭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IT 개발자로 살던 한 남자가 갑자기 수인들이 살아가는 원시 세계로 이동합니다. 그곳에서는 불을 피우는 기술조차 ‘샤먼’이라는 특별한 존재가 독점하고 있으며, 불씨가 꺼지면 다른 부족에게 많은 식량을 바치고 다시 얻어 와야 합니다. 질병이 생겨도 원인을 알지 못하고, 사냥은 주로 힘과 머릿수에 의존하며, 깨끗한 물과 배설물 처리 같은 기본적인 위생 개념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현대 문명의 지식을 가진 주인공이 등장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그는 불을 직접 피우고, 열병을 치료하고, 창을 만들고, 사냥을 조직화하며, 물을 끓여 마시게 하고, 배설물과 쓰레기를 주거지에서 분리합니다. 한 사람이 가진 ‘지식’이 부족 전체의 생존 방식을 바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지식의 해방’입니다. 불을 피우는 방법은 원래 샤먼만 알고 있으며 그 지식은 후계자에게만 전수됩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그것을 모든 부족민에게 가르치겠다고 합니다. 이 장면은 의외로 상당히 좋은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지식을 권력의 근거로 독점하지 않고 공동체 전체의 유익을 위해 나누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지식 자체는 목적이 아닙니다. 모든 진리는 결국 삶을 향해야 하며, 더 정확히 말하면 ‘쓰임’(use)을 향해야 합니다. 무엇을 많이 아느냐보다 그것을 가지고 누구를 살리고 무엇을 유익하게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불 피우는 지식이 한 사람의 신비한 권위를 높이는 데 사용될 때 그것은 권력이 되지만, 부족 전체가 혹한을 견디게 하는 데 사용될 때 그것은 쓰임이 됩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주인공이 공동체를 강하게 만드는 방식입니다. 처음 부족민들은 강함을 거의 육체적인 힘으로 이해합니다. 강한 종족은 큰 짐승을 잡고, 많은 전사를 가진 부족은 더 많은 먹이를 차지합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전혀 다른 원리를 가르칩니다. ‘정보를 수집하라. 환경을 이용하라. 퇴로를 확보하라. 각자의 장점을 살려라. 무기를 개선하라. 역할을 나누어라.’ 특히 ‘너희가 약했던 게 아니라 사냥 방식이 잘못됐던 거였어’라는 대목은 이 이야기 전체를 압축하는 문장처럼 들립니다. 힘이 부족해서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와 지혜가 없어서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의 질서와도 묘하게 접점이 있습니다. 천국 역시 모두가 똑같은 능력을 가진 사회가 아니라 서로 다른 기능과 쓰임을 가진 존재들이 하나의 목적 아래 조화를 이루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조금 더 깊이 들이대야 합니다. 이 콘텐츠에서 문명 발전의 방향은 거의 일관되게 ‘더 많이 알고, 더 효율적으로 생산하고, 더 강한 무기를 만들고, 더 잘 조직하고, 더 강한 부족이 되는 것’으로 향합니다. 그래서 보다 강한 적을 물리치고 영토를 확보하며, 식량을 저장하고, 방어벽과 초소를 세우고, 다른 부족보다 우월한 생존 체계를 갖추는 과정이 곧 ‘진보’로 그려집니다. 여기에서 목사님이 느끼신 중국적 색채도 어느 정도 이해됩니다. 다만 이것을 곧바로 ‘중화사상’이라고 단정하기보다는, ‘혼란한 주변 세계를 뛰어난 지식과 질서를 가진 중심 인물이 조직하고 교화하여 더 큰 질서 안으로 편입시킨다’는 서사 구조에 주목하는 편이 정확하겠습니다. 중국 역사문화에서 오래 반복되어 온 ‘문명과 주변’, ‘질서와 혼란’, ‘교화와 편입’의 상상력과 닮은 부분이 분명히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특히 주인공은 단순히 좋은 아이디어를 하나씩 제공하는 조언자가 아닙니다. 시간이 갈수록 그는 ‘무엇이 옳은지를 아는 사람’이 되고, 공동체는 그가 제시하는 방식을 받아들일수록 강해집니다. 처음에는 ‘저 사람 말이 맞을까?’라고 의심하던 이들이 결국 그의 지식과 성과를 경험하면서 그를 신뢰하고 따르게 됩니다. 여기에는 매우 오래된 인간의 꿈이 숨어 있습니다. ‘현명하고 유능한 한 사람이 올바른 지식으로 공동체를 이끈다면 세상은 훨씬 좋아질 것이다.’ 이것은 중국만의 생각도 아닙니다. 플라톤의 철인정치에서 현대의 기술관료주의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끊임없이 품어 온 꿈입니다. 문제는 스베덴보리에게 인간 사회의 근본 문제는 ‘지식 부족’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가 뒤집힌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인간은 무엇이 좋은지 몰라서만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와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보다 위에 있기 때문에 자신이 아는 진리마저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합니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가장 조심해서 보아야 할 것은 바로 ‘지식→문명→힘→선’이라는 연결입니다. 깨끗한 물을 마시게 하고, 병자를 치료하고, 식량을 저장하고, 혹한에서 살아남을 집을 짓는 것은 분명 좋은 쓰임입니다. 반면 더 치명적인 창을 만들고, 독을 이용하고, 더 효과적으로 적을 죽이고, 더 넓은 영역을 확보하는 능력 역시 동일한 ‘지식’에서 나옵니다. 지식은 그 자체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을 움직이는 사랑이 무엇인가에 따라 천국적인 쓰임이 될 수도 있고 지옥적인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지성과 지혜의 차이도 바로 여기에서 드러납니다. 많이 아는 사람이 반드시 지혜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진리를 사용하고, 그 진리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 점에서 저는 오히려 이 중국 AI 이야기가 의도하지 않은 중요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고 봅니다. 주인공이 부족에게 불을 주고, 의술을 주고, 무기를 주고, 위생을 주고, 조직을 주고, 정착지를 주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그는 그들에게 ‘더 좋은 사람’이 되는 법도 주었을까요? 기술이 발전하면 시기와 탐욕도 사라질까요? 식량이 풍부해지면 이웃 부족을 사랑하게 될까요? 무기가 강해지면 그것을 약자를 보호하는 데만 사용할까요? 바로 이 지점에서 자연적 문명과 영적 거듭남은 갈라집니다. 외적인 삶은 놀라울 정도로 문명화되었는데 내면은 여전히 지배욕과 소유욕과 자기 우월감에 붙들려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으로는 매우 소박하게 살아도 이웃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천국의 질서에 훨씬 가까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작품을 보면 문명의 진정한 척도 자체가 달라집니다. ‘얼마나 강한 부족인가?’가 아니라 ‘그 힘을 무엇을 위해 사용하는가?’입니다.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그 지식이 누구를 살리는가?’입니다. ‘얼마나 잘 조직되어 있는가?’가 아니라 ‘그 질서의 중심에 자기 집단의 우월함이 있는가, 아니면 공동의 선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는가?’입니다. 주인공이 불 피우는 방법을 독점하지 않고 모두에게 가르쳐 주는 순간에는 천국적인 원리가 비칩니다. 병든 사람을 살리고, 부족원 가운데 단 한 명도 다치지 않기를 바라며 사냥법을 개선하는 순간에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지식과 기술이 ‘우리 부족을 가장 강하게 만드는 것’으로 중심을 옮기는 순간, 같은 지식 안으로 인간의 proprium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어쩌면 그래서 이 작품은 단순한 중국식 문명 우월 판타지로만 읽기에는 조금 아깝습니다. 그 안에는 인간 문명의 오래된 모순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불을 발견한 인간은 추위를 이겼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의 집을 불태울 수도 있게 되었고, 금속을 다루게 된 인간은 농기구와 칼을 동시에 만들었으며, 현대 과학은 질병을 치료하는 기술과 대량살상 기술을 함께 만들어 냈습니다. 결국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더 많은 지식’ 자체가 아닙니다. 지식을 움직이는 사랑이 바뀌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은 바로 그 중심의 변화입니다. ‘나와 우리를 위해 무엇을 더 가질 것인가’에서 ‘주님께 받은 것을 가지고 누구에게 어떤 쓰임이 될 것인가’로 삶의 중심이 이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을 보면서 느껴지는 ‘중화사상’의 흔적보다 더 근원적인 것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중국인의 문제라기보다 인간 proprium의 보편적인 꿈입니다. ‘내가 더 많이 알고, 더 강해지고, 더 잘 조직하면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꿈입니다. 주님은 그것보다 훨씬 깊은 곳을 보십니다. 세상을 바꾸기 전에 사랑의 방향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식이 많아지는 것이 문명의 시작이라면, 그 지식을 자기 자신보다 이웃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사용하는 것은 천국의 시작입니다. 이 콘텐츠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어쩌면 거대한 짐승을 쓰러뜨리는 순간이 아니라, 한 사람이 자신이 알고 있는 ‘불 피우는 법’을 더 이상 자기만의 힘으로 붙잡지 않고 모두에게 가르쳐 주겠다고 말하는 순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는 직접 피우면 되니까 불씨를 얻으려고 음식을 바칠 필요 없어.’ 바로 그때 지식은 권력에서 쓰임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가진 불은 누구를 따뜻하게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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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11 심화

3. ‘왜 부정한 짐승의 주검은 만지기만 해도 부정해졌을까?’

 

레11에서는 ‘먹지 말라’는 명령만큼이나 ‘만지지 말라’는 명령이 반복됩니다. 특히 부정한 짐승의 주검을 만지면 저녁까지 부정해지고, 그것을 옮기는 사람은 옷까지 빨아야 했습니다. 먹지도 않았는데 단지 접촉했다는 이유로 왜 부정해졌을까요?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94(창9:3)는 이 문제에 직접적인 단서를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기는 것’이 좋은 의미에서는 선한 애정 안에 있는 자연적 즐거움을 의미하지만, 반대 의미에서는 proprium과 악한 욕망에서 나오는 더러운 즐거움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레11:27, 29-33의 부정한 기는 것들을 직접 언급하면서, 이런 것들이 악한 욕망에서 나오는 더러운 즐거움을 표상했기 때문에 당시 표상교회에서는 그것을 만지는 것까지 부정하게 여겼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접촉’입니다. 인간은 어떤 악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고 해서 그 악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악한 욕망이나 거짓을 마음 가까이에 두고 반복해서 바라보고 즐기다 보면 그것이 점차 우리의 애정과 생각에 영향을 줍니다. 처음에는 단지 접촉하는 것처럼 보여도 계속 가까이하면 어느 순간 그것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특히 AC.994가 강조하는 것은 그 안의 ‘즐거움’입니다. 악은 언제나 처음부터 무섭고 혐오스러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재미있고 달콤하고 만족스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험담을 듣는 즐거움, 복수하는 장면을 상상하며 느끼는 만족, 음란한 생각의 쾌감,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낫다는 것을 확인할 때의 기쁨도 처음에는 작은 즐거움처럼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 즐거움 안에 어떤 애정이 들어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원하지 않는 악한 생각이 순간적으로 떠오르거나 유혹을 받는 것 자체가 곧 그 악을 자기 것으로 삼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유혹은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받아들여 즐기고 의도하느냐, 아니면 그것이 악임을 알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거절하느냐입니다. 악이 문 앞에 오는 것과 문을 열어 안으로 들이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또한 이 말씀을 사람 자체에 적용해서 ‘부정한 사람과 접촉하면 나도 더러워진다’고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영적으로 피해야 할 것은 사람이 아니라 악과 거짓입니다. 오히려 체어리티는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가까이 가면서도 그 사람을 지배하는 악을 악으로 분별할 수 있게 합니다.

 

레11에서 부정해진 사람이 영원히 부정한 채 남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옷을 빨고 저녁까지 기다린 뒤 다시 정하게 됩니다. 이것은 악과 거짓의 영향이 인간에게 들어올 수 있지만 주님의 진리를 통해 다시 정결하게 될 수 있다는 큰 원리와 잘 어울립니다. 거듭남은 한 번도 더러워지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더러움을 깨닫고 계속 씻김을 받는 삶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레11의 접촉 규정은 인간의 마음이 무엇과 가까이하고 무엇을 즐기는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줍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생각과 욕망과 정보와 영상과 이야기에 접촉합니다. 그 모든 것을 마음 안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것은 접촉하는 순간부터 그것이 내 애정을 어디로 끌고 가는지 살펴야 합니다.

 

거듭남에는 ‘먹지 않는 것’뿐 아니라 ‘만지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어떤 악은 충분히 경험해 본 뒤 판단하겠다고 가까이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 지혜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분별은 무엇을 사랑하고 받아들일 것인가뿐 아니라 무엇과 마음의 접촉을 끊을 것인가까지 포함합니다. 레11의 ‘만지지 말라’는 말씀은 바로 그 마음의 경계까지 거룩하게 하시는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SWC.레11 심화 3)

 

 

 

SWC.레11,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절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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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11 심화2, ‘왜 기어 다니는 곤충 중 메뚜기 종류는 먹을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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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10 심화

4. ‘나답과 아비후는 왜 진영 밖으로 옮겨졌을까?’

 

나답과 아비후가 죽은 뒤 모세는 미사엘과 엘사반에게 그들을 ‘성소 앞에서 진영 밖으로’ 메고 나가라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시신 처리 이상의 표상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324(계5:8)는 레10:1-5를 직접 인용하며 나답과 아비후가 진영 밖으로 옮겨진 의미를 설명합니다. 그들의 예배가 천국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예배는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으며, 이스라엘의 진영은 천국과 교회를 표상했습니다.

 

따라서 ‘진영 밖’은 단순히 공동체에서 추방당했다는 의미보다 더 깊습니다. 다른 불에서 나온 예배는 천국의 질서에 속하지 않으므로 천국을 표상하는 진영 안에 머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레4와 레6에서 보았던 ‘진영 밖’과도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만 각 제사의 문맥이 다르므로 모든 ‘진영 밖’을 완전히 같은 세부 상응으로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큰 원리는 천국과 교회의 질서에 속하지 않는 것이 분리되고 제거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거듭남의 중요한 면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흔히 주님께서 우리 안에 새로운 것을 넣어 주시는 것만 생각하지만, 거듭남에는 ‘밖으로 옮겨지는 것’도 있습니다. 이전에는 내 신앙이라고 생각했던 자기 의, 내 열심이라고 생각했던 자기애, 진리라고 확신했던 거짓이 주님의 빛 가운데 드러나면 그것은 더 이상 마음의 중심에 머물 수 없습니다.

 

특히 나답과 아비후가 표상한 것은 노골적인 세상 악이 아니라 ‘종교적 형태를 가진 잘못된 예배’였습니다. 그래서 더 중요합니다. 인간은 세속적인 욕심보다 종교적인 proprium을 더 오래 붙들 수도 있습니다. ‘나는 주님을 위해 이렇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이 자기애라는 사실을 발견하기가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불이 비추면 그 근원이 드러납니다. 주님에게서 온 사랑인지 자기에게서 나온 다른 불인지 분명해지고, 다른 불에 속한 것은 천국의 질서 밖으로 옮겨져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다른 사람을 교회 밖으로 몰아내는 근거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레10의 내적 의미가 먼저 향하는 곳은 다른 사람의 신앙을 심판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내면입니다. ‘내 안에서 진영 밖으로 옮겨져야 할 다른 불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먼저입니다.

 

거듭남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천국에 속하지 않는 것을 분리하는 과정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의 모든 종교적 열심을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그 열심 가운데 자기애에서 나온 것을 드러내어 밖으로 옮기시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만이 예배의 불로 남게 하십니다. (SWC.레10 심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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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10 심화

1. 나답과 아비후의 ‘다른 불’은 정확히 무엇이었을까?

 

나답과 아비후 이야기를 읽으면 가장 먼저 드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도대체 다른 불이 무엇이었기에 두 사람이 즉시 죽어야 했을까?’ 성경 본문은 그들이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향로에 담아 분향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불이 물리적으로 정확히 어디에서 온 불이었는지보다 스베덴보리는 그 사건이 표상한 영적 의미를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375(출24:1)는 나답과 아비후를 직접 다룹니다. 그들은 아론의 아들들이므로 말씀에서 나오는 교리를 표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른 불’을 가지고 분향한 것은 ‘말씀 이외의 다른 근원에서 나온 교리로 예배를 세우는 것’을 표상했다고 설명합니다. 불은 사랑의 선을, 향은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AC.9965(출28:43)는 더욱 직접적입니다. 제단의 불은 신적 사랑, 곧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표상했지만 ‘다른 불’은 지옥에서 나오는 사랑을 표상했다고 설명합니다. AC.10244(출30:20) 역시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로 향을 피운 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이 아닌 다른 사랑에서 나온 예배’를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다른 불’의 핵심은 불의 종류가 아니라 사랑의 근원입니다. 외적으로는 똑같이 향을 피웁니다. 똑같은 성소이고 똑같은 제사장이고 똑같은 향로입니다. 그러나 예배를 움직이는 사랑이 주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온다면 영적으로는 전혀 다른 예배가 됩니다.

 

이것은 매우 무서운 동시에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거룩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일을 움직이는 사랑까지 거룩하다고 보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하면서 명예를 사랑할 수 있고, 봉사하면서 인정받기를 사랑할 수 있으며, 진리를 변호하면서 자기 우월감을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겉의 향은 거룩하지만 속의 불은 다른 불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레9 마지막 장면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레9에서 불은 ‘여호와 앞에서 나왔습니다.’ 인간이 만든 불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불이 번제물과 기름을 사릅니다. 참된 예배의 생명인 사랑은 주님에게서 인간에게 오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 사랑을 받아 다시 주님을 예배합니다.

 

그런데 레10에서 나답과 아비후는 자기들이 불을 가져옵니다. 바로 이 대비가 두 장을 연결합니다. 레9은 ‘주님의 불’이고 레10은 ‘다른 불’입니다. 하나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 아닌 다른 근원에서 오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불’을 단순히 현대 예배 방식의 차이나 예전의 형식 문제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찬양 형식이나 예배 순서가 익숙하지 않다고 그것을 ‘다른 불’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본문의 내적 의미와 거리가 멉니다. 핵심은 외적 형식보다 훨씬 깊은 곳, 곧 그 예배를 움직이는 사랑의 근원입니다.

 

레10은 그래서 우리에게 ‘얼마나 뜨겁게 예배하는가?’보다 더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그 뜨거움은 어디에서 오는가?’입니다. 자기애도 뜨겁고 종교적 열광도 뜨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불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입니다. 참된 거듭남은 내 안의 모든 불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불이 주님의 불이고 어떤 불이 proprium의 다른 불인지를 분별하여,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으로 예배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SWC.레10 심화 1)

 

 

 

SWC.레10 심화2, 왜 같은 ‘여호와 앞의 불’이 제물은 받고 나답과 아비후는 삼켰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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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10,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 - 거룩한 예배를 움직이는 사랑은 어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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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9 심화

2. ‘왜 아론은 백성을 위한 제사보다 자기 속죄제를 먼저 드려야 했을까?’

 

아론은 이미 레8에서 제사장으로 위임되었습니다. 물로 씻었고 거룩한 옷을 입었으며 관유를 받았고, 귀와 손과 발에 위임식 숫양의 피까지 발랐습니다. 그런데 레9에서 실제 사역을 시작하려 하자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 또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모세는 아론에게 ‘네 속죄제와 네 번제를 드려서 너를 위하여,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라’고 합니다. 실제 순서도 아론 자신의 제사가 먼저이고 그 후 백성의 제사가 이어집니다. 이것은 제사장이라는 직분이 인간 자신을 자동으로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님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레4에서 보았듯 속죄제는 악과 거짓에서의 정결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위해 거룩한 쓰임을 행하는 사람도 계속해서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주님 앞에서 살펴야 합니다. 직분은 거듭남을 대신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영적 쓰임을 많이 맡을수록 이 원리는 더 중요해집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를 다루다 보면 자기 문제를 보지 못하기 쉽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적용하다 보면 그 말씀이 먼저 자기 자신에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회개를 말하면서 자기 분노와 교만과 자기애는 정당화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쓰임은 아주 미묘하게 proprium의 도구가 됩니다. ‘나는 가르치는 사람이다’, ‘나는 돕는 사람이다’, ‘나는 영적인 사람이다’라는 자기상이 오히려 자기 악을 보지 못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레9의 첫 실제 제사장 사역은 남을 위한 제사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속죄제로 시작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완벽하게 깨끗해진 뒤에야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도 계속 주님의 정결을 필요로 하는 사람임을 인정하면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 인정은 오히려 체어리티를 깊게 합니다. 내가 주님의 자비 없이는 설 수 없는 사람임을 알수록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쉽게 정죄하기 어렵습니다. 자기 속죄제를 먼저 드린 제사장이 백성의 속죄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9의 순서는 모든 영적 쓰임에 하나의 원리를 줍니다. ‘먼저 네 자신을 주님 앞에 세우라.’ 남의 악을 보기 전에 자기 악을 보고, 남에게 말씀을 적용하기 전에 자신에게 적용하며, 다른 사람을 정결하게 하려 하기 전에 자신도 주님의 정결하심 아래 있는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때 쓰임은 자기 의가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흘러나올 수 있습니다. (SWC.레9 심화 2)

 

 

 

SWC.레9 심화3,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SWC.레9 심화3.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레9에는 같은 약속이 두 번 나옵니다. 6절에서 모세는 ‘여호와의 영광이 너희에게 나타나리라’고 말하고, 23절에서는 모든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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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레9 심화1, 왜 제사장 위임식이 끝난 다음 날을 ‘여덟째 날’이라고 했을까?

SW.레9 심화1. 왜 제사장 위임식이 끝난 다음 날을 ‘여덟째 날’이라고 했을까? 레9은 단순히 ‘다음 날’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여덟째 날에’라고 시작합니다. 앞 장에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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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8 심화

4. ‘왜 제물을 제사장의 손에 올려놓고 흔들었을까?’

 

레8:25-28에서는 위임식의 뜻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숫양의 기름과 오른쪽 뒷다리, 무교병과 기름 섞은 떡과 전병을 모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손에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흔들어 요제로 삼습니다. 왜 위임식에서는 제물을 그냥 제단으로 가져가지 않고 굳이 제사장의 ‘손’에 올려놓았을까요?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매우 직접적으로 해설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82(출29:24)는 손바닥 위에 놓인 기름과 콩팥과 오른쪽 뒷다리와 떡들이 신적 선과 신적 진리를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손에 놓는 것은 ‘이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며 주님에게서 온다’는 인정을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위임’의 개념을 뒤집습니다. 세상에서 어떤 직책에 위임된다는 것은 권한을 자기 손에 넘겨받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레8의 위임식에서는 손이 채워지는 순간 오히려 그 손에 있는 것이 자기 것이 아님을 인정합니다. 손에 많은 것이 놓일수록 ‘이것은 주님에게서 왔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어 AC.10083(출29:24)은 그것을 흔드는 요제를 ‘생명을 부여하는 것’과 연결합니다. 특별히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인정’함으로써 신적 생명이 들어온다고 설명합니다. 지식만으로는 아직 생명이 아닙니다.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고 그것에 따라 살기 시작할 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그래서 손에 놓인 제물과 흔드는 동작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먼저 ‘주님에게서 왔다’고 인정하고, 그 인정으로부터 생명이 시작됩니다. 인간이 자기 지혜와 능력과 선을 자기 것이라고 붙들면 그것은 proprium 안에서 죽기 시작하지만, 그것의 근원을 주님께 돌릴 때 그 선과 진리는 인간 안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이것은 모든 쓰임에 적용됩니다. 설교하는 능력도, 가르치는 지혜도, 사람을 돌보는 따뜻함도, 돈을 벌고 사용하는 능력도,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도, 이웃을 섬길 기회도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받은 것입니다. 우리의 손은 그것을 실제로 행하지만 근원은 손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손을 채운다’는 위임의 히브리적 이미지와 스베덴보리의 해설은 아주 아름답게 만납니다. 빈손이 채워지지만 그 채움은 소유를 위한 것이 아니라 쓰임을 위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을 받아 다시 주님의 뜻에 따라 사용하는 것입니다.

 

참된 위임은 ‘이제 내가 권한을 가졌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내 손에 맡기셨다’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참된 요제는 ‘내가 이것을 이루었습니다’가 아니라 ‘이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왔습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8의 제사장은 손이 가득 찼지만 자기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입니다. 역설적으로 바로 그런 손이 주님의 쓰임을 가장 온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며 주님에게서 온다는 인정 안에서 인간의 손은 비로소 신적 생명의 도구가 됩니다. (SWC.레8 심화 4)

 

 

 

SW.레8 심화3, ‘왜 피를 오른쪽 귀와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에 발랐을까?’

SW.레8 심화3. ‘왜 피를 오른쪽 귀와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에 발랐을까?’ 레8:23-24는 제사장 위임식 가운데 가장 낯설면서도 인상적인 장면입니다. 모세는 위임식 숫양의 피를 아론과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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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7 심화

4. ‘왜 기름과 피는 먹지 말라고 거듭 명하셨을까?’

 

레3의 마지막 말씀은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였습니다. 그런데 레7:22-27에서는 같은 명령이 훨씬 더 길고 강하게 반복됩니다. 소나 양이나 염소의 기름을 먹지 말고, 어떤 피도 먹지 말라고 하며, 그것을 먹는 사람은 백성 가운데서 끊어진다고까지 합니다. 왜 기름과 피는 이처럼 특별하게 구별되었을까요?

 

여기에는 직접적인 원전이 있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5943(창45:18)은 레7:23-26을 직접 인용하면서 제사의 기름과 그것을 불사르는 것이 천적 신성 자체, 곧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선’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피 역시 제사의 핵심 상응입니다. 앞에서 여러 차례 보았듯이 스베덴보리는 제사의 피를 주님의 신적 인간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와 연결합니다. 그러므로 기름과 피는 제사의 두 중심인 선과 진리를 나타냅니다. 하나는 사랑의 선이고 다른 하나는 그 선에서 나오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왜 인간이 그것을 먹으면 안 될까요? ‘먹는다’는 것이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는 원리를 함께 놓으면 매우 깊은 의미가 드러납니다. 인간은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살아야 하지만 그것들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선과 진리는 인간에게 전달되고 인간 안에서 살아 움직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언제나 주님의 것입니다.

 

인간의 proprium은 바로 여기서 가장 미묘하게 개입합니다. 악한 일을 자기 것이라고 하는 것보다 오히려 선한 일을 자기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영적으로 더 발견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랑했다’, ‘내가 희생했다’, ‘내가 진리를 깨달았다’, ‘내가 사람을 변화시켰다’고 하면서 주님에게서 온 선과 진리를 자기 소유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름과 피를 먹지 않는 규례는 선과 진리를 거부하라는 뜻과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충분히 받아 살아가되 ‘그 근원은 주님에게 있습니다’라고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선은 인간 안에 있지만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며, 진리도 인간의 이해 안에 있지만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이 구별이 지켜질 때 인간은 주님의 선을 마치 자기 것처럼 자유롭게 행하면서도 공로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적 자유의 역설입니다. 천사들은 선을 자기 의지에서 하는 것처럼 행하지만 그 선의 근원이 주님임을 압니다.

 

그러므로 레7에서 기름과 피가 다시 한번 엄격하게 보호되는 것은 제사의 중심을 지키는 일입니다. 거듭남의 마지막까지 인간이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가 있습니다. ‘선과 진리는 주님의 것이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 자기 삶으로 삼되 그 근원을 proprium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바로 그 인정 안에서 주님과 인간의 참된 화목과 결합이 지속됩니다. (SWC.레7 심화 4)

 

 

 

SW.레7 심화5, ‘왜 가슴은 흔들고 오른쪽 뒷다리는 들어 올렸을까?’

SW.레7 심화5. ‘왜 가슴은 흔들고 오른쪽 뒷다리는 들어 올렸을까?’ 레7:30-34에는 레위기의 상응을 읽는 재미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면 가운데 하나가 있습니다. 화목제물을 가져온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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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레7 심화3, ‘왜 화목제 고기는 셋째 날에는 가증한 것이 되었을까?’

SW.레7 심화3. ‘왜 화목제 고기는 셋째 날에는 가증한 것이 되었을까?’ 레7:17-18은 매우 강한 말씀입니다. 화목제 고기가 셋째 날까지 남으면 불살라야 하고, 만일 셋째 날에 그것을 먹으면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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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7 심화

3. ‘왜 화목제 고기는 셋째 날에는 가증한 것이 되었을까?’

 

레7:17-18은 매우 강한 말씀입니다. 화목제 고기가 셋째 날까지 남으면 불살라야 하고, 만일 셋째 날에 그것을 먹으면 처음 드린 제사 자체가 기쁘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그 고기는 ‘가증한 것’이 된다고 합니다. 하루 차이인데 왜 이처럼 엄격할까요? 본문은 실제로 셋째 날의 고기를 명백하게 금합니다.

 

여기에서도 먼저 선을 하나 그어야 합니다. ‘셋째 날’이라는 말만 보고 곧바로 주님의 부활 셋째 날에 연결하거나, 숫자 3의 일반적인 상응을 그대로 대입하여 레7의 의미를 확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이번에 확인한 스베덴보리의 1차 원전에서는 레7:17-18을 직접 그렇게 해설하는 근거를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화목제 자체의 의미에서는 중요한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화목제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 누리며 그분과 교통하고 결합하는 제사입니다. ‘먹는 것’이 자기 것으로 삼음을 나타낸다면, 먹을 수 있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것은 그 선을 자기 것으로 삼는 데도 신적 질서가 있다는 뜻이 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살아 있는 선입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주님에게서 흘러오는 것이지 인간이 한 번 받아 창고에 넣어 두고 ‘이것은 이제 내 선이다’라고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선의 근원을 주님에게 돌리는 동안 그 선은 살아 있지만, 그것을 proprium의 공로나 소유로 붙잡으면 성질이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과거에 많은 선을 행한 사람이 어느 순간 ‘나는 평생 이렇게 선하게 살아왔다’는 자기 의에 머물 수 있습니다. 처음의 선은 실제로 주님에게서 받은 선이었을지라도, 그것을 자기 공로로 저장하여 현재의 악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하면 더 이상 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어제의 체어리티가 오늘의 자기 의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셋째 날의 고기를 ‘왜 정확히 셋째 날인가?’까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거룩한 선을 신적 질서 밖에서 붙들어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없다’는 큰 원리는 화목제의 전체 상응과 잘 맞습니다. 남은 것은 불살라야 합니다. 이미 그 상태의 쓰임을 다한 것을 proprium이 붙잡고 먹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 경험에도 적용됩니다. 오래전의 은혜 체험, 과거의 뜨거운 기도, 이전의 사역 성과가 오늘 주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감사할 기억이지만 오늘의 양식은 아닙니다. 오늘은 오늘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레7의 셋째 날 규례는 적어도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경계를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주신 선을 받아 기뻐하되 그것을 내 공로로 저장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듭남의 선은 언제나 현재 주님에게서 오는 살아 있는 선이어야 합니다. 화목은 과거의 선을 소유하는 상태가 아니라 지금 주님에게서 받고 지금 이웃과 나누는 살아 있는 결합입니다. (SWC.레7 심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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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3 심화

3. ‘왜 기름과 피는 먹지 말라 하셨을까?’

 

레위기 3장은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는 매우 강한 명령으로 끝납니다. 더구나 이것은 한 번의 제사에만 적용되는 임시 규정이 아니라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기름과 피를 특별히 먹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이 질문에는 스베덴보리가 놀랄 만큼 직접적인 답을 줍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33(출29:22)은 제사와 번제에서 모든 피를 제단에 붓고 모든 기름을 제단 위에서 불살랐던 이유를 설명하면서 ‘피’는 신적 진리를, ‘기름’은 신적 선을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 레3:17의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를 직접 인용합니다. 즉 레3 마지막 절의 의미를 추측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셈입니다.

 

피가 신적 진리를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상응입니다. 주님의 피 역시 가장 높은 의미에서 주님에게서 발출하는 신적 진리와 관계합니다. 기름은 신적 선, 곧 신적 사랑의 선과 관계합니다. 따라서 피와 기름은 제사의 수많은 요소 가운데서도 특별히 거룩하게 구별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먹지 말라’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실제 음식 규정이었지만 그 안의 영적 의미는 훨씬 깊습니다. 신적 선과 신적 진리는 인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 근원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 마치 자기 것처럼 자유롭게 생각하고 원하고 행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고유한 생명에서 나온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서 proprium의 문제가 나타납니다. 인간의 proprium은 선을 행하고 나면 ‘내가 했다’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 진리를 깨달으면 ‘내가 안다’고 생각하고 싶어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올바르게 살면 자신의 선함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신앙생활과 봉사와 체어리티까지 자기 공로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레3은 말합니다.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선은 네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고 합니다. 선도 주님의 것이며 진리도 주님의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교리에서는 인간이 자유롭게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해야 합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선을 행할 힘과 진리를 볼 수 있는 빛이 실제로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오니 나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도 잘못이고, ‘내가 선을 행했으니 이것은 내 선이다’라고 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인간은 전력을 다해 선을 행하되 그 선의 근원을 주님께 돌립니다. 진리를 열심히 배우고 이해하되 그 빛의 근원을 주님께 돌립니다.

 

그래서 기름과 피를 먹지 않는다는 규정은 매우 깊은 겸손을 가르칩니다. 겸손은 ‘나는 아무 가치가 없다’고 자신을 깎아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겸손은 내 안의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레3의 마지막 한 절이 장 전체를 닫는 완벽한 결론이 됩니다.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고, 내장과 콩팥과 간 주변의 기름을 떼어 제단 위에서 불사른 모든 과정이 결국 한 고백을 향합니다. ‘선은 주님의 것입니다. 진리도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인정 안에서 참된 화목이 이루어집니다. 내가 선의 주인이 되려는 욕망과 진리의 주인이 되려는 교만을 내려놓을수록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내 안에서 자유롭게 결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는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살아 있습니다. 선을 행하되 그 선을 먹어 자기 공로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닫되 그 진리를 먹어 자기 지혜의 소유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과 진리를 받아 삶으로 살되 언제나 그 근원을 주님께 돌리라는 것입니다.

 

레3의 마지막 고백은 그래서 아주 단순하면서도 깊습니다.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내가 행한 선 가운데 참으로 선한 것은 주님에게서 왔고, 내가 깨달은 진리 가운데 참으로 진리인 것은 주님에게서 왔습니다. 이것을 마음으로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주님과의 화목과 결합을 보존하는 깊은 겸손입니다. (SWC.레3 심화 3)

 

 

 

SW.5, 레3,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 화목제에 감추어진 선과 진리의 결합’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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