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70-471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 시대의 사람들이 ‘집안’(house), ‘일가’(family), ‘민족’(nation)으로 구별되어 살았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이 세 표현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가족 개념과 조금 다릅니다. 하나의 ‘집안’은 남편과 아내와 그 자녀들, 그리고 그 집안에 속하여 섬기는 몇몇 사람들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 집안이 서로 멀리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한 집에 함께 살지는 않으면서 하나의 ‘일가’를 이루었고, 다시 여러 일가가 하나의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따라서 이 구조는 ‘집안-일가-민족’으로 점차 확대되는 공동체의 질서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이 구조를 설명하는 이유는 단순히 태고 시대의 사회생활을 알려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AC.471은 그들이 이렇게 구별되어 살았던 이유가 ‘교회가온전하게보존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밝힙니다. 각 집안과 일가가 자기 부모에게 의존함으로써 부모로부터 이어진 사랑과 참된 예배 안에 머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혈연을 따라 집안과 일가가 구별되어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사랑과 신앙과 예배의 고유한 성격을 보존하는 교회적 질서와도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이 각 집안의 ‘고유한성향’(genius)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녀뿐 아니라 먼 후손들에게까지 부모로부터 어떤 특정한 성향이 이어졌으며, 그 특징이 얼굴과 여러 고유한 특성에서도 드러날 정도였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집안과 일가가 서로 무분별하게 뒤섞이지 않고 각각의 고유성을 유지하는 것은 단순한 혈통의 보존을 넘어, 그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공유하던 사랑과 신앙과 예배의 성격을 보존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구별’과 ‘분열’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 집안과 일가는 서로 달랐지만, 그 다름 자체가 교회의 분열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질서가 천국의 모습을 살아 있게 나타내는 것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천국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동체가 있으며, 각 공동체는 사랑과 신앙의 차이에 따라 다른 공동체와 구별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공동체가 주님을 중심으로 하나의 천국을 이룹니다. 태고교회의 여러 집안과 일가와 민족 역시 서로 고유한 성격을 가지면서 하나의 교회를 이루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의나라를살아있게표상’하였습니다.
이것은 태고교회를 하나의 획일적인 집단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단서를 줍니다. 태고교회라는 큰 틀 안에는 여러 집안과 일가와 민족이 있었고, 각각의 공동체에는 서로 구별되는 고유한 성향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어느 한 공동체에서 교리나 예배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해서 태고교회에 속한 모든 공동체가 동시에 똑같은 변화를 겪었다고 전제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집단이 기존의 사랑과 신앙의 질서에서 벗어나더라도 다른 집안과 일가들은 자신들에게 전해진 교회적 성격을 계속 보존할 수 있는 구조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은 우리가 창4와 창5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창4에서는 ‘가인’과 그 후손들의 이름 아래 태고교회 안에서 일어난 교리적 변화와 분파들의 전개가 묘사되고, 창5에서는 태고교회 자체와 그 후대의 여러 교회가 이어지는 과정이 묘사됩니다. 그렇다면 가인으로 표상되는 어떤 교회 계열이 태고교회의 원래 질서에서 분리되거나 변질되었다고 해서, 태고교회에 속한 다른 모든 집안과 일가와 민족까지 함께 사라졌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AC.470-471이 보여 주는 공동체 구조는 같은 넓은 태고교회 시대 안에서 서로 다른 교회 상태와 계열이 존재할 수 있었음을 이해하게 하는 중요한 배경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은 남겨 두어야 합니다. AC.470-471만으로 창4의 가인 계열과 창5의 계열이 정확히 같은 시기에 나란히 진행되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두 번호가 직접 밝히는 것은 태고 시대의 교회가 여러 집안과 일가와 민족으로 구별되어 있었으며, 그 구별이 교회를 보존하고 천국의 여러 공동체를 표상하는 질서였다는 사실입니다. 창4와 창5의 구체적인 관계는 관련 AC의 설명을 더 종합하여 판단해야 합니다. 다만 ‘한계열이등장하면이전의모든공동체가사라지고다음하나의교회로통째로교체된다’는 단선적인 그림만으로 태고교회의 역사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결국 태고교회의 하나 됨은 모든 집안과 일가가 똑같아지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각 공동체가 주님께 받은 고유한 사랑과 신앙의 질서를 보존하면서도 모두가 주님을 중심으로 하나의 교회를 이루는 데 있었습니다. 천국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동체가 서로 다르면서도 주님 안에서 하나의 천국을 이루듯, 태고교회의 집안과 일가와 민족도 서로 구별되면서 하나의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태고교회의 공동체 질서는 바로 이러한 ‘다양성안의하나됨’이라는 천국의 질서를 지상에서 살아 있게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AC.469-474심화1)
AC.468에는 매우 강한 표현이 나옵니다. ‘주님께서모든사람안에리메인스를보존하지않으신다면그는필연적으로영원히멸망할수밖에없습니다.영적생명과천적생명이리메인스안에있기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리메인스가 무엇이기에 인간의 영원한 생명과 이처럼 직접 연결되는 것일까요?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리메인스를 단순히 어린 시절의 좋은 기억이나 과거에 배운 종교적 지식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리메인스는 주님께서 사람의 내면에 저장하고 보존하시는 선과 진리, 그리고 그것들과 연결된 순진함, 사랑, 자비, 체어리티 등의 상태입니다. 특히 사람이 아직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완전히 사로잡히기 전, 부모를 신뢰하고 이웃에게 호의를 품으며 주님과 천국에 관한 선한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주님은 그러한 상태들을 사람의 내면에 보존하십니다. 사람은 나중에 그것을 의식적으로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주님은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리메인스는 사람이 스스로 쌓아 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쓰는 영적 저축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그의 내면에 보존하시는 것입니다.
왜 이것이 그렇게 중요할까요? 사람이 성장하면서 프로프리움(proprium), 곧 자기 자신의 것에 깊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만으로는 사람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욕망과 거짓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만일 사람 안에 이것과 다른 근원에서 온 것이 전혀 없다면, 주님께서 그에게 역사하실 접점도 남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존하신 리메인스 안에는 사람이 한때 받아들였던 선과 진리, 순진함과 체어리티의 상태가 있습니다. 주님은 거듭남의 과정에서 바로 이것들을 사용하여 사람을 자기중심적인 생명에서 돌이키고 선과 진리를 다시 받아들일 수 있게 하십니다.
따라서 리메인스가 구원한다는 말은 리메인스 자체가 주님과 별도로 어떤 구원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리메인스가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주님께서 친히 사람 안에 보존하신 것이며, 훗날 그 사람을 거듭나게 하실 때 사용하시는 기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리메인스의 교리는 결국 인간의 공로에 관한 교리가 아니라 주님의 선행하시는 자비와 섭리에 관한 교리입니다. 사람이 아직 자신의 거듭남을 생각하지도 못하던 때부터 주님은 이미 훗날 그를 살리실 것을 준비하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주님은 사람을 강제로 선하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선과 악, 참과 거짓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어야 하며, 그래야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자신의 의지와 이성으로 받아들여 마치 자기 것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리메인스는 이러한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하도록 사람의 내면에 보존된 천국적인 기반이 됩니다. 악과 거짓의 영향만 있고 그 반대편에 주님께서 보존하신 선과 진리의 상태가 전혀 없다면 참된 영적 선택과 거듭남의 가능성도 성립할 수 없습니다.
AC.468이 개인의 리메인스와 교회 전체의 리메인스를 나란히 설명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한 사람 안에서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는 것처럼, 인류 전체 안에서도 주님은 참된 교회와 신앙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언제나 어떤 사람들을 남겨 두십니다. 홍수 직전의 ‘노아’가 바로 그 원리를 보여 줍니다. 온 땅이 부패했다고 표현될 만큼 교회가 황폐해졌지만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보존하신 마지막 리메인스가 있었고,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고대교회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개인의 거듭남과 인류 가운데 교회가 다시 일어나는 일이 같은 영적 원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서에서 ‘남은자’가 반복해서 등장하고, ‘십’과 ‘십분의일’이 리메인스를 표상합니다. 사6:13의 모든 것이 베임을 당한 뒤에도 남아 있는 ‘거룩한씨’, 암5:3의 백 명 가운데 남은 열 명, 창18:32의 소돔에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멸하지 않겠다는 말씀은 모두 ‘완전히사라진것처럼보이는가운데서도주님께서보존하시는것’이라는 원리를 보여 줍니다. 중요한 것은 숫자의 크기가 아니라 주님께서 남겨 두신 선과 진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리메인스가없으면영원히멸망한다’는 AC.468의 말씀은 사람을 두렵게 하기 위한 표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인간의 구원이 얼마나 철저하게 주님의 선행하시는 역사에 의존하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언제 어떤 선을 받아들였으며 그것이 자신의 내면 어디에 보존되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알고 계시며, 사람이 훗날 거듭남의 길에 들어설 때 그것을 불러내어 사용하십니다.
이 점에서 ‘노아’는 우리 각 사람의 거듭남을 비추는 매우 깊은 표상이 됩니다. 우리 안의 상태가 아무리 황폐해지고 선과 진리가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여도, 주님께서 보존하신 것은 인간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은 곳에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지키시고 때가 되었을 때 사용하시며,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영적 생명을 시작하십니다. 그러므로 리메인스는 단순히 ‘남아있는것’이 아니라, 인간이 다시 주님께 돌아가고 거듭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오래전부터 그의 내면에 준비하고 보존해 두신 생명의 씨앗입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AC.468은 ‘영적생명과천적생명이리메인스안에있다’고 말합니다. (AC.468심화)
AC.464는 ‘에녹’이라 하는 교회가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그 교회가 퍼셉션한 것들로부터 교리를 형성했으며, 그 교리가 당시에는 쓸모가 없었지만 ‘후대의쓰임을위해’ 보존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에녹이 정돈하여 보존한 교리가 훗날 고대교회에 전해지고, 더 나아가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할 때 사용한 고대의 자료가 된 것일까요? 큰 흐름에서는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에녹의교리=고대말씀=모세오경’이라고 곧바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에녹의 역할부터 정확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태고교회는 천적 교회였으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서 선과 진리를 퍼셉션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후대처럼 체계적인 교리를 먼저 배우고 그것을 통해 무엇이 참인지를 판단하는 방식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상태가 변하면서 이러한 퍼셉션이 계속 유지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에녹’이라 하는 교회가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퍼셉션된 것들을 모아 교리의 형태로 정돈했습니다. 살아 있는 내적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것이 후대에도 전달될 수 있는 형태로 보존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그를데려가셨다’는 창5:24의 속뜻과 연결됩니다. 에녹의 교리가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즉시 필요한 것이어서 널리 사용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당시에는 쓰이지 않으면서도 훗날 필요할 때를 위하여 보존되었다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사라질 것을 주님께서 아셨기 때문에, 그 안에 있던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까지 함께 사라지도록 두지 않으시고 다른 형태로 보존하신 것입니다. AC.464의 에녹은 이런 의미에서 ‘퍼셉션에서교리로’ 넘어가는 중요한 전환점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에녹이 정돈한 교리를 곧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말씀’ 전체와 동일시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고대교회에 하나의 ‘고대말씀’(AncientWord)이 있었으며, 그것이 후대에는 소실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민21:14의 ‘여호와의전쟁기’와 수10:13및 삼하1:18에 언급되는 ‘야살의책’ 등을 그 고대 말씀과 관련하여 설명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로부터 내려온 상응과 표상의 지식이 고대교회에서 말씀과 교리의 형태로 발전하고 보존되었던 더 넓은 전승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에녹의 교리화는 이 긴 전승의 매우 초기적이고 중요한 단계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모세와의 관계에서도 같은 주의가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앞부분의 기록이 모세 시대에 처음 아무 자료도 없이 생겨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태고교회와 고대교회에서 내려오던 고대의 기록과 전승이 있었으며, 모세가 그러한 자료를 사용했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창세기 원역사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태고교회와 고대교회로부터 전해 내려온 매우 오래된 교회적 전승이 상응적 서술의 형태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고대의 말씀과 상응 지식 자체는 후대에 상당 부분 소실되었지만, 그 내용과 표현의 일부는 섭리 가운데 후대의 말씀 안에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와 에녹의 교리 보존 사이에는 ‘고대의계시와퍼셉션이후대를위해보존되고전승되었다’는 큰 연속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연속성을 ‘에녹이책을한권써두었고그것이그대로전해져모세오경이되었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464는 그런 직접적인 문헌 계보를 말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모세오경 전체가 에녹의 교리에서 유래했다고 할 근거도 없습니다. 보다 정확한 그림은 ‘태고교회의계시와퍼셉션→에녹이라하는교회의교리화와보존→고대교회에서의전승과발전→고대의말씀과여러기록및전승→모세가사용한고대자료’라는 긴 흐름입니다. 이 과정에는 여러 시대와 여러 형태의 전승이 놓여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에녹의 의미가 더욱 깊어집니다. 주님은 한 시대의 사람들이 누리던 특별한 영적 상태가 사라질 때 그들과 함께 모든 진리가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사라졌지만, 그 퍼셉션으로 알았던 것 가운데 후대에 필요한 것은 교리와 전승의 형태로 보존되었습니다. 그리고 훗날 사람들이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직접 퍼셉션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보존된 진리는 다른 형태로 그들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AC.464가 ‘후대의쓰임’이라고 한 말에는 바로 이러한 주님의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에녹에서 모세까지의 관계를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에녹이정돈한교리가그대로모세오경이된것이아니라,태고교회의계시와퍼셉션을후대에전달하기위해보존한에녹의사역이고대교회의오랜전승을거쳐훗날말씀의기록으로이어지는큰섭리적흐름의한중요한출발점이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영적 상태가 변할 때마다 진리를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가 받을 수 있는 형태로 보존하고 전달하십니다. 에녹의 ‘들려감’은 바로 그 보존의 섭리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AC.464심화)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5
여기서‘사람’(man)과그의‘아내’(wife)가앞에서아다와씰라로나타낸새교회를뜻한다는것은누구도문자적의미만으로는알수도,추론할수도없습니다.왜냐하면‘사람과그의아내’(manandhiswife)는앞에서는태고교회와그후손을뜻했기때문입니다.그러나이것은속뜻으로는매우분명하며,또한바로다음장인창5:1-4에서사람과그의아내,그리고그들이셋을낳는일이다시언급되면서도전혀다른말로기록되어있다는사실에서도분명합니다.그경우에는태고교회의첫후손이뜻해집니다. 만일지금다루는이구절이그와다른것을뜻하지않는다면,같은일을여기서다시말할필요가없었을것입니다.이와마찬가지로창세기1장에서는사람의창조와땅의열매들과짐승들의창조가다루어지고,이어2장에서그것들이다시다루어집니다.그이유는앞에서말했듯이1장에서는영적인간의창조를다루는반면,2장에서는천적인간의창조를다루기때문입니다. 이처럼동일한사람이나동일한것이반복하여언급될때에는언제나의미의차이가있습니다.그러나무엇이뜻해지는지는속뜻을통하지않고서는도저히알수없습니다. 여기서는문맥의연결자체가앞에서제시한의미를확증합니다.여기에더하여‘사람’[homo]과‘아내’(wife)는지금다루고있는모교회(parentchurch)를뜻하는일반적인용어라는점도고려해야합니다. That the “man” and his “wife” here mean the new church signified above by Adah and Zillah no one could know or infer from the literal sense, because the “manandhiswife” had previously signified the most ancient church and its posterity; but it is very evident from the internal sense, as well as from the fact that immediately afterwards, in the following chapter (verses 1–4), the man and his wife, and their begetting Seth, are again mentioned, but in entirely different words, and in this case there is signified the first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If nothing else were signified in the passage before us, there would be no need to say the same thing here: in like manner as in the first chapter the creation of man, and of the fruits of the earth, and of the beasts, is treated of, and then in the second chapter they are treated of again, for the reason, as has been said, that in the first chapter it is the creation of the spiritual man that is treated of, whereas in the second chapter the subject is the creation of the celestial man.Whenever there is such a repetition in the mention of one and the same person or thing, it is always with a difference of signification, but what it is that is signified cannot possibly be known except from the internal sense.Here, the connection itself confirms the signification that has been given, and there is the additional consideration that man [homo] and wife are general terms which signify the parent church that is in question.
AC.435는 창4:25의 ‘사람과그의아내’를 왜 앞의 아다와 씰라로 나타낸 ‘새교회’로 해석해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이들은 당연히 아담과 하와입니다. 더구나 바로 다음 장인 창5:1-4에서도 다시 아담과 그의 아내, 그리고 셋의 출생이 나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창4:25과 창5:1-4의 기록이 속뜻으로는 서로 다른 교회를 다룬다고 말합니다. 창4:25에서는 아다와 씰라로 앞서 나타낸 새 교회를, 창5:1-4에서는 태고교회의 첫 후손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이것은 문자적 의미만으로는 ‘알수도,추론할수도없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것은 중요한 대목입니다. 독자가 창4:25의 ‘사람과그의아내’를 이전부터 등장한 아담과 하와로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실제로 앞에서는 같은 표현이 태고교회와 그 후손을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말씀의 속뜻은 동일한 인물이나 표현에 언제나 하나의 고정된 의미만을 부여하지 않습니다. 지금 어떤 교회와 어떤 상태가 다루어지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가 이 사실을 밝히는 중요한 단서가 말씀의 ‘반복’입니다. 창4:25에서 이미 사람과 그의 아내가 셋을 낳았다고 했는데, 창5:1-4에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와 셋의 출생이 다시 기록됩니다. 만일 두 기록이 속뜻으로도 완전히 같은 내용을 말한다면 같은 이야기를 다시 기록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반복은 단순한 중복이 아니라, 겉으로 비슷한 기록을 통해 서로 다른 내적 내용을 다루고 있음을 알려 주는 표지가 됩니다.
그 예가 바로 창1과 창2입니다. 두 장 모두 사람과 창조 세계를 다루기 때문에 문자적으로 보면 같은 창조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 창1은 영적 인간의 창조를, 창2는 천적 인간의 창조를 다룹니다. 동일하거나 비슷한 사람과 사물이 다시 등장하더라도 속뜻으로는 서로 다른 상태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원리를 창4:25과 창5:1-4에도 적용합니다.
이 설명은 창4의 가인 계열과 창5의 셋 계열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도 중요한 단서를 줍니다. 문자적인 족보만 따라가면 아담과 하와에게서 가인으로 이어지는 계열과 셋으로 이어지는 계열이 서로 나란히 진행된 두 혈통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창4에는 가인의 후손들이 이어지고, 창5에는 셋을 통한 아담의 계보가 이어지기 때문에 그렇게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AC.435는 이러한 문자적 계보 관계를 그대로 속뜻의 교회 역사에 옮겨 놓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창4:25의 사람과 아내와 셋을 설명하면서도, 곧이어 창5:1-4에 다시 등장하는 사람과 아내와 셋은 ‘태고교회의첫후손’을 뜻한다고 명시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문자적으로는 같은 아담과 하와와 셋의 이야기라 하더라도, 속뜻으로는 서로 다른 교회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창4의 가인 계열과 창5의 셋 계열을 단순히 ‘한쪽은악한계열,다른한쪽은선한계열이며두계열이처음부터병행했다’는 식으로만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생깁니다.
그렇다고 반대로 창4의 모든 교회 상태가 시간적으로 완전히 끝난 다음 창5의 교회가 시작되었다고 이 글 하나만으로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AC.435가 직접 밝히는 것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원리입니다. 곧 말씀의 족보와 반복되는 인물들은 단순한 시간 순서나 혈통 관계를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서로 다른 교회와 그 교회의 상태들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4와 창5의 관계 역시 문자적인 계보의 선후 관계만으로 결정하기보다, 각 장에서 스베덴보리가 어떤 교회와 어떤 상태를 다루고 있는지를 따라가며 이해해야 합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이를 한 번 더 정리합니다. ‘사람’[homo]과 ‘아내’는 지금 다루고 있는 ‘모교회’(parentchurch)를 뜻하는 일반적인 용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과아내’라는 표현 자체가 언제나 특정한 하나의 교회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창4:25에서는 아다와 씰라로 나타낸 새 교회가 지금 다루는 모교회이고, 창5:1-4에서는 태고교회의 첫 후손이 다루어집니다. 같은 표현이라도 문맥과 속뜻에서 다루는 대상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결국 AC.435는 창4:25을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창세기 초반 전체를 읽는 중요한 원리를 보여 줍니다. 말씀에서 같은 사람과 사건이 반복된다고 해서 반드시 같은 영적 내용을 반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창1과 창2가 각각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창조를 다루듯, 창4:25과 창5:1-4의 사람과 아내와 셋도 속뜻으로는 서로 다른 교회적 내용을 다룹니다. 따라서 가인과 셋의 계보 역시 문자적인 두 혈통의 병행이라는 틀만으로 이해하기보다, 태고교회와 그 후손 가운데 일어난 여러 교회의 형성과 변화라는 더 큰 흐름 속에서 읽어야 합니다. AC.436-437은 이제 그 가운데 ‘셋’과 ‘다른씨’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나타내는지를 더 밝혀 줄 것입니다. (AC.435해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창5:2)
AC.479
말씀에서‘이름을부르다’(callinganame)또는‘이름으로부르다’(callingbyname)는사물의어떠함을아는것을의미한다는것은앞에서보여준바있습니다.여기서는태고교회의어떠함과관련되는데,곧사람이흙에서취해졌다는것,다시말해주님에의해거듭났다는것을나타냅니다.‘아담’(Adam)이라는말이‘흙’(ground)을의미하기때문입니다.그리고그후그가천적인간이되었을때에는주님을향한사랑에서비롯된신앙으로말미암아가장탁월한의미에서‘사람’이되었습니다.By “callinganame,” or “callingbyname,” is signified in the Word to know the quality of things, as was shown above, and in the present case it has relation to the qual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denoting that man was taken from the ground, or regenerated by the Lord, for the word “Adam” means “ground”; and that afterwards when he was made celestial he became most eminently “man,” by virtue of faith originating in love to the Lord.
해설
AC.479는 창5:2의 ‘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더라’에서 왜 ‘이름’이 중요한지를 설명합니다. 말씀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단순히 그 대상을 다른 대상과 구별하기 위한 호칭을 붙인다는 뜻에 그치지 않습니다. 속뜻으로는 그 대상의 ‘어떠함’, 곧 그 본질과 상태가 어떠한지를 알고 나타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하셨다는 것은 단순한 명명이 아니라 태고교회가 어떤 교회였는지를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그 첫 번째 어떠함은 ‘흙에서취해졌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흙’은 단순한 물질적 흙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이 주님에 의해 거듭나는 상태와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아담’이라는 말이 ‘흙’(ground)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면서, 사람이 흙에서 취해졌다는 것을 ‘주님에의해거듭났다’는 의미로 풀이합니다. 따라서 ‘아담’이라는 이름 자체에 태고교회의 거듭남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 ‘흙’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연 상태 그대로의 인간을 뜻한다고 보기보다, 주님께서 거듭남의 역사를 행하실 수 있도록 준비된 사람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씨가 땅에 떨어져 싹을 내고 열매를 맺듯이, 주님께서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자라게 하실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흙에서취해졌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새롭게 만들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를 새롭게 하시고 거듭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과정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AC.479는 ‘그후그가천적인간이되었을때’ 가장 탁월한 의미에서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앞의 AC.472-476에서 계속 살펴본 흐름과 연결됩니다. 처음에는 영적 인간으로 창조되어 진리와 신앙을 통하여 선과 사랑으로 나아가지만, 마침내 신앙과 사랑이 결혼을 이루면 천적 인간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상태에서 그는 더욱 온전한 의미의 ‘사람’이 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그가 무엇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AC.479는 그것을 ‘주님을향한사랑에서비롯된신앙’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신앙이 사랑과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이 근원이고 신앙은 그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바로 이러한 질서가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를 이루었습니다. 따라서 참된 사람됨은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이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나오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 점은 창4에서 다루었던 가인의 상태와 다시 선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가인은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표상했습니다. 반면 창5에서 ‘사람’이라 하는 태고교회의 본래 상태는 ‘주님을향한사랑에서비롯된신앙’입니다. 신앙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신앙이 어디에서 나오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사랑에서 나온 신앙은 사람을 참된 ‘사람’으로 이루지만, 사랑에서 분리되어 독립하려는 신앙은 본래의 천적 질서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결국 AC.479에서 ‘아담’, ‘흙’, ‘거듭남’, ‘사람’은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됩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흙’과 같은 상태에서 새롭게 하시고 거듭나게 하시며, 그를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이끄시고, 마침내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신앙이 흘러나오는 질서를 이루실 때 그는 가장 온전한 의미에서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다’는 말씀은 태고교회의 이름을 알려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주님께서 그 교회 안에 이루신 거듭남의 어떠함 전체를 압축하여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AC.479해설)
AC.478은 창세기 초반의 ‘아담’을 스베덴보리가 어떻게 읽는지를 매우 직접적으로 밝히는 대목입니다. 핵심은 히브리어 ‘아담’(Adam)이 본래 ‘사람’을 뜻한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이 대목의 ‘아담’을 처음부터 한 개인의 고유명사로 읽기보다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읽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속뜻으로는 태고교회를 가리킨다고 봅니다.
그 근거 가운데 하나가 단수와 복수의 변화입니다. 창1:26에서 하나님은 ‘사람을만들고’라고 단수로 말씀하신 뒤 곧이어 ‘그들로...다스리게하자’고 복수로 말씀하십니다. 창5:2에서도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뒤 ‘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다’고 합니다. 따라서 본문 자체에서 ‘사람’은 어느 한 남성 개인만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남자와 여자를 함께 포괄하는 말로 사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문법적 특징을 태고교회라는 집단적 의미를 보여 주는 중요한 단서로 봅니다.
이것은 바로 앞의 AC.475-477과도 이어집니다. 남자와 여자는 각각 신앙과 사랑을 의미하고, 이 둘이 결혼을 이루었을 때 더 이상 둘을 따로 ‘남자와여자’라고 하지 않고 하나의 ‘사람’(homo)이라 합니다. 그리고 AC.477에서는 가장 높은 의미로 오직 주님 자신만이 사람이시며, 천적 교회는 주님의 ‘모양’으로서, 영적 교회는 주님의 ‘형상’으로서 사람이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창5:2의 ‘사람’은 단순한 종(種)으로서의 인간이라는 뜻을 넘어, 주님의 형상과 모양을 받아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AC.478의 마지막 문장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다루는주제는인류최초의어떤한사람의창조가아니라태고교회’라고 명시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초반의 속뜻을 읽는 그의 기본 원리를 다시 확인해 줍니다. ‘아담’이라는 이름 아래 한 개인의 생애를 중심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최초의 사람들을 어떻게 교회로 세우시고 그 교회를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이끄셨는가를 읽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할 점이 있습니다. AC.478의 논점은 창세기 본문의 역사성 전체를 한 문장으로 부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가 분명히 밝히는 것은 말씀의 속뜻에서 ‘아담’이 인류 최초의 한 개인을 주제로 삼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 역시 ‘실제로아담이라는개인이존재했는가?’라는 문제로 곧바로 옮겨가기보다, 왜 주님께서 말씀에서 하나의 교회를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내셨는가를 이해하는 데 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보면 창5:1의 ‘아담계보의책’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것은 속뜻으로 한 개인 아담의 생물학적 후손 명단을 제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 하는 태고교회로부터 여러 후대 교회가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보여 주는 교회의 계승에 관한 기록입니다. AC.469에서 ‘계보의책’을 태고교회에 속한 사람들의 열거라고 한 것과 AC.470에서 이어지는 이름들이 실제적인 것들, 곧 교회적 실재를 의미한다고 한 설명이 여기서 서로 연결됩니다.
결국 AC.478은 ‘아담’이라는 이름을 통하여 다시 한번 창5를 읽는 관점을 정리해 줍니다. 문자에서는 한 사람의 이름과 그의 후손들의 계보가 이어지지만, 속뜻으로는 ‘사람’이라 하는 태고교회와 그 교회로부터 이어지는 여러 교회의 역사가 펼쳐집니다. 그러므로 창5의 계보를 따라간다는 것은 단순히 누가 누구를 낳았는지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가 여러 세대를 거치며 어떤 영적 상태들을 지나 노아에 이르게 되는지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AC.478해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창5:2)
AC.477
‘사람’(man)이태고교회를의미한다는것은앞에서자주말하고보여주었습니다.가장높은의미로는오직주님자신만이사람이시기때문입니다.이로부터천적교회는주님의모양이므로사람이라하고,이후영적교회도주님의형상이므로사람이라합니다.그러나일반적인의미로는인간다운이해(humanunderstanding)를가진모든이를사람이라합니다.사람은이해하는능력으로말미암아사람이기때문이며,그능력에따라어떤사람은다른사람보다더사람답습니다.그러나사람과사람사이의구별은마땅히주님을향한사랑에기초한그의신앙에따라이루어져야합니다.That “man” is the most ancient church has been often said and shown above; for 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himself alone is man.From this the celestial church is called man, as being a likeness, and from this the spiritual church is afterwards so called because it was an image.But in a general sense everyone is called a man who has human understanding; for man is man by virtue of understanding, and according thereto one person is more a man than another, although the distinction of one man from another ought to be made according to his faith as grounded in love to the Lord.
[2]태고교회와모든참된교회,그리고그로부터교회에속한사람들,곧주님을향한사랑과주님을믿는신앙으로살아가는사람들이특별히‘사람’이라일컬어지는것은말씀으로부터분명합니다.에스겔에서는,That the most ancient church, and every true church, and hence those who are of the church, or who live from love to the Lord and from faith in him, are especially called “man,” is evident from the Word, as in Ezekiel:
하였습니다.여기서‘옛적’(antiquities)은태고교회를,‘처음’(beginnings)은고대교회들을의미하며,‘이스라엘족속’과‘내백성이스라엘’은초대교회,곧이방인들의교회를의미합니다.이모든교회를‘사람’이라합니다.where by “antiquities” is signified the most ancient church; by “beginnings,” the ancient churches; by the “houseofIsrael” and “peopleIsrael,” the primitive church, or church of the Gentiles; all which churches are called “man.”
하였습니다.여기서‘옛날’(daysofeternity)은태고교회를,‘역대’(generationandgeneration)는고대교회들을의미합니다.‘인종’(sonsofman)은주님을향한신앙안에있던사람들이며,이신앙이‘이스라엘자손의수효’입니다.거듭난사람을‘사람’이라하는것은예레미야에서도나타납니다.where by the “daysofeternity” is meant the most ancient church; by “generationandgeneration,” the ancient churches; the “sonsofman” are those who were in faith toward the Lord, which faith is the “numberofthesonsofIsrael.” That a regenerate person is called “man,” appears from Jeremiah:
하였습니다.여기서‘땅’은외적인간(externalman, 겉사람)을,‘하늘’은내적인간(internalman, 속사람)을,‘사람’은선에대한사랑을,‘공중의새’는진리에대한이해를의미합니다.where “earth” signifies the external man; “heaven” the internal; “man” the love of good; the “birdsoftheheavens” the understanding of truth.
하였습니다.여기서첫번째‘사람’에해당하는말은‘에노스’(Enosh)이고,두번째는‘아담’(Adam)입니다.where the word for man in the first place is “Enosh,” and in the second is “Adam.”
해설
AC.477의 출발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 교회를 ‘사람’이라 하는가 하는 질문에 스베덴보리는 가장 높은 곳에서부터 답합니다. ‘가장높은의미로는오직주님자신만이사람이시기때문’입니다. 즉 사람이 교회의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사람의 기준이십니다. 교회와 거듭난 사람이 ‘사람’이라 하는 까닭은 그들 자신에게서 참된 인간성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선과 진리를 받아 주님의 것을 닮아 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AC.473의 ‘형상’과 ‘모양’이 다시 연결됩니다. 천적 교회는 주님의 ‘모양’이므로 사람이라 하고, 영적 교회는 주님의 ‘형상’이므로 역시 사람이라 합니다. 따라서 창5:1-2에서 ‘하나님의모양’과 ‘사람’이라는 표현이 이어지는 것은 우연한 배열이 아닙니다. 태고교회가 주님의 모양을 이루는 천적 교회였기 때문에 말씀은 그 교회를 특별히 ‘사람’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사람은이해하는능력으로말미암아사람이다’라는 문장은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만 떼어 놓으면 지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더 참된 사람이라는 뜻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즉시 그 기준을 바로잡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참된 구별은 ‘주님을향한사랑에기초한신앙’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이해’(understanding)는 단순한 지능이나 지식의 양이 아니라 진리를 받아들이고 분별할 수 있는 인간의 내적 능력과 관계됩니다. 그리고 그 이해 역시 사랑과 결합될 때 비로소 참된 인간성을 이룹니다.
이어지는 수많은 성경 인용은 바로 이 사실을 여러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겔36:10-12에서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은 단순한 인구 증가만을 뜻하지 않고 교회가 회복되고 번성하는 것을 속뜻으로 포함합니다. 그래서 ‘옛적’은 태고교회, ‘처음’은 고대교회들을 가리키며, 이스라엘과 이방인 가운데 세워진 교회까지 모두 ‘사람’이라는 이름 아래 묶입니다. 시대와 외적 형태는 달라도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 살아 있는 교회라는 점에서는 모두 ‘사람’인 것입니다.
신32:7-8역시 같은 흐름을 보여 줍니다. ‘옛날’과 ‘역대’는 태고교회와 고대교회들을 가리키고, ‘인종’은 주님을 향한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반면 렘4:23, 25에서는 정반대의 상태가 나타납니다. ‘사람이없다’는 것은 단순히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속뜻으로는 ‘선에대한사랑’이 사라졌음을 의미합니다. 공중의 새가 날아갔다는 것은 ‘진리에대한이해’까지 사라진 상태입니다. 사랑의 선과 진리에 대한 이해가 사라지자 말씀은 그것을 ‘사람이없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사람’의 의미를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렘31:27의 ‘사람의씨와짐승의씨’에서는 ‘사람’이 내적 인간(internal man, 속사람)을, ‘짐승’이 외적 인간(external man, 겉사람)을 의미합니다. 사6:12와 사24:6에서는 선과 진리 또는 신앙이 사라지는 교회의 황폐함을 ‘사람’이 사라지는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결국 이 인용들은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킵니다. 말씀에서 ‘사람’이라는 말은 단지 생물학적 인간을 가리키는 데 머물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 참으로 살아 있는 내적 상태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33:8-9와 사13:12-13에서 ‘에노스’(Enosh)와 ‘아담’(Adam)이라는 히브리어가 구별되어 제시되는 것도 앞으로 창5의 이름들을 읽는 데 중요합니다. 창5의 이름들은 단순히 사람의 이름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서로 다른 상태를 담고 있으며, ‘사람’을 뜻하는 여러 표현 자체에도 서로 다른 내적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에노스’는 곧 창5에서 하나의 교회를 나타내는 이름으로 다시 다루어지므로, 여기서는 그 의미가 앞으로 더욱 구체적으로 밝혀질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AC.477은 ‘사람이란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주님으로부터 시작하여 교회와 개인에게로 내려옵니다. 가장 높은 의미로 참된 사람은 오직 주님이시며, 교회는 주님의 모양 또는 형상을 받아 ‘사람’이 되고, 개인 역시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를 받아 거듭날수록 참된 사람이 됩니다. 따라서 창5:2의 ‘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다’는 말씀은 단순히 남자와 여자를 통칭하여 인간이라고 이름 붙였다는 것보다 훨씬 깊습니다. 신앙과 사랑이 결혼을 이루고 주님의 모양을 나타내는 교회, 바로 그것이 말씀의 속뜻으로는 ‘사람’입니다. (AC.477해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창5:2)
AC.476
‘남자와여자’(maleandfemale)가신앙과사랑사이의결혼을의미한다는것은앞에서밝히고입증하였습니다.거기서남자,곧남성(man[vir])은이해(understanding)와거기에속한모든것을의미하며,따라서신앙에속한모든것을의미하고,여자,곧여성은의지(will)또는의지에속한것들을의미하며,따라서사랑과관계되는모든것을의미한다는것을보여주었습니다.그러므로여자를‘하와’(Eve)라하였는데,이이름은생명을의미하며,생명은오직사랑에속한것이기때문입니다.그러므로앞에서보여준것처럼여자는또한교회를의미하고,남자는교회에속한사람(man[vir] ofthechurch)을의미합니다.여기서다루는것은교회가영적이었을때의상태와그후천적으로만들어진상태입니다.그러므로창1:26-27에서와같이‘여자’보다‘남자’가먼저언급됩니다.또한‘창조하다’(create)라는표현은영적인간과관련됩니다.그러나그후결혼이이루어졌을때,곧교회가천적으로만들어졌을때에는‘남자와여자’라고하지않고‘사람’(man[homo])이라고합니다.이‘사람’은그들의결혼으로말미암아둘모두를의미하기때문입니다.그러므로곧이어‘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다’고하며,이것은교회를의미합니다.That by “maleandfemale” is signified the marriage between faith and love was declared and proved above, where it was shown that the male or man [vir] signifies the understanding and whatever belongs to it, consequently everything of faith; and that the female or woman signifies the will, or the things appertaining to the will, consequently whatever has relation to love; wherefore she was called Eve, a name signifying life, which is of love alone.By the female therefore is also signified the church, as has been previously shown; and by the male, a man [vir] of the church.The subject here is the state of the church when it was spiritual, and which was afterwards made celestial, wherefore “male” is mentioned before “female,” as also in chapter 1:26–27.The expression to “create” also has reference to the spiritual man; but afterwards when the marriage has been effected, that is, when the church has been made celestial, it is not said “maleandfemale,” but “man” [homo], who, by reason of their marriage, signifies both; wherefore it presently follows, “andhecalledtheirnameman,” by which is signified the church.
AC.476은 ‘남자와여자’가 어떻게 ‘신앙과사랑의결혼’을 의미하는지를 이해(understanding)와 의지(will)의 관계를 통해 설명합니다. ‘남자’(vir)는 이해와 거기에 속한 것들을 의미하므로 신앙에 속한 것을 표상하고, ‘여자’는 의지와 거기에 속한 것들을 의미하므로 사랑에 속한 것을 표상합니다. 여기서 신앙은 단순히 어떤 교리를 믿는 행위가 아니라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쪽과 관계되고, 사랑은 그 진리를 원하고 기뻐하며 살아내는 의지의 쪽과 관계됩니다.
여자를 ‘하와’라 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와’는 생명을 의미하고, 스베덴보리는 생명이 본질적으로 사랑에 속한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따라 살고, 그 사랑이 그의 의지와 삶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자가 의지와 사랑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서로 연결됩니다. 교회의 생명 역시 단순히 진리를 알고 있는 데 있지 않고, 그 진리가 사랑과 의지 안에서 살아 있게 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특히 눈여겨볼 것은 ‘남자’가 ‘여자’보다 먼저 언급된 이유입니다. AC.476은 여기서 다루는 상태가 교회가 처음에는 ‘영적’이었다가 이후 ‘천적’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영적 상태에서는 진리와 신앙을 통하여 사랑과 선으로 나아가므로, 이해와 신앙을 의미하는 ‘남자’가 먼저 나옵니다. 이것은 창1:26-27에서도 동일합니다. 또한 AC.472에서 살펴본 것처럼 ‘창조하다’라는 표현 역시 영적 인간과 관련됩니다.
그러나 신앙과 사랑의 결혼이 이루어져 교회가 천적 상태에 이르면 표현이 달라집니다. 더 이상 ‘남자와여자’라고 각각 말하지 않고 둘을 하나로 묶어 ‘사람’(homo)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남자나 여자의 구별이 없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속뜻으로는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이 더 이상 서로 분리된 두 원리로 머물지 않고 하나의 생명을 이루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그의이름’이 아니라 ‘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다’고 합니다. 둘이 결혼을 이루었기 때문에 하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 점은 AC.472-473의 ‘형상’과 ‘모양’의 구별과도 정확히 이어집니다. 영적 인간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신앙을 통하여 선으로 나아가는 ‘하나님의형상’이며, 천적 인간은 신앙과 사랑, 이해와 의지가 결혼을 이루어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모양’입니다. 따라서 창5:1-2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가 영적 상태에서 출발하여 신앙과 사랑의 결혼을 이루는 천적 상태에 이른 과정을 압축하여 보여 줍니다.
결국 ‘남자와여자’에서 ‘사람’으로 표현이 바뀌는 것은 태고교회의 거듭남이 어디에 이르렀는지를 보여 줍니다. 진리를 이해하는 것과 선을 사랑하는 것, 신앙과 사랑이 따로 움직이는 동안에는 아직 결혼이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둘을 결합하시면 신앙은 사랑으로부터 나오고, 이해는 의지와 하나가 되어 움직이며, 사람의 내적 삶 전체가 하나의 질서를 이루게 됩니다. 바로 이 상태를 말씀은 ‘사람’(homo)이라 하고, AC.476은 이 ‘사람’이 곧 교회를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AC.476해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and blessed them, and called their name man, in the day when they were created.(창5:2)
AC.475
‘남자와여자’(maleandfemale)는신앙과사랑사이의결혼을의미하며,‘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다’(callingtheirnameman)는것은그들이교회였음을의미합니다.특별한의미로는교회를‘사람’(man[homo])이라하기때문입니다.By “maleandfemale,” is signified the marriage between faith and love; by “callingtheirnameman,” is signified that they were the church, which, in an especial sense, is called “man” [homo].
해설
AC.475는 창5:2의 ‘남자와여자를창조하셨고...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더라’는 말씀을 태고교회의 내적 상태에 대한 묘사로 읽습니다. 여기서 ‘남자와여자’는 단순히 두 성별을 가리키는 데 머물지 않고 ‘신앙과사랑사이의결혼’을 의미합니다. 즉 태고교회 안에서 신앙과 사랑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하나를 이루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말하는 ‘결혼’은 두 가지가 단순히 함께 존재한다는 뜻보다 훨씬 깊습니다. 참된 신앙은 사랑으로부터 나오고, 참된 사랑은 신앙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냅니다. 사랑과 분리된 신앙은 살아 있는 신앙이 될 수 없으며, 신앙과 진리 없이 막연한 감정에 머무는 사랑 역시 온전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과 사랑의 결혼은 사람 안에서 진리와 선이 하나의 생명을 이루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것은 창4에서 우리가 보았던 가인의 문제와도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 가인이 표상한 것은 사랑 또는 체어리티로부터 분리된 신앙이었습니다. 반면 여기 창5:2에서 태고교회를 묘사하는 ‘남자와여자’는 신앙과 사랑이 결혼을 이루고 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창5는 처음부터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가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보여 줍니다. 신앙이 사랑과 경쟁하거나 사랑으로부터 독립하여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결합되어 하나의 생명을 이루는 질서입니다.
이어지는 ‘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다’는 말씀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사람’(homo)은 특별한 의미로는 ‘교회’를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말씀에서 참된 의미의 사람은 단지 인간의 외형을 가진 존재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신앙을 받아 그 둘이 하나를 이루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신앙과 사랑의 결혼이 이루어진 공동체를 ‘사람’이라 한다는 것은,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참된 인간성을 받아 살아가는 공동체임을 보여 줍니다.
더욱이 본문은 ‘그의이름’이 아니라 ‘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다’고 합니다. 남자와 여자를 함께 가리키면서 하나의 이름인 ‘사람’을 주신 것입니다. 속뜻으로는 이것이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신앙과 사랑은 서로 떨어져 각각 완전한 것이 아니라 결합될 때 하나의 교회를 이루며, 바로 그 결합된 상태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참된 정체성은 신앙만으로도, 사랑만으로도 설명되지 않고, 주님 안에서 신앙과 사랑이 결혼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결국 AC.475가 보여 주는 태고교회의 모습은 ‘사랑으로부터나오는신앙’과 ‘그신앙을통하여나타나는사랑’이 하나를 이루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교회를 ‘사람’이라 부르십니다. 창4에서 사랑과 신앙의 분리가 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렸다면, 창5:2는 그보다 먼저 있었던 본래의 질서를 다시 보여 줍니다. 참된 교회도 참된 인간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신앙이 서로 결혼을 이루는 곳에서 형성됩니다. (AC.475해설)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창5:1)
AC.474
그러므로여기서다루는주제는태고교회의출생또는번성(birthorpropagation)이므로,먼저이교회가영적상태에서천적상태로나아간것이묘사됩니다.이후의번성은바로이상태로부터이어지기때문입니다.Since therefore the subject here treated of is the birth or propagation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is is first described as coming from a spiritual to a celestial state, for the propagations follow from this.
해설
AC.474는 AC.469에서 시작된 창5:1의 해설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서, 왜 창5의 계보가 곧바로 셋과 그 후대의 교회들로 들어가지 않고 먼저 태고교회 자체의 상태를 설명하는지를 밝혀 줍니다. 창5가 다루려는 것은 태고교회의 ‘출생또는번성’입니다. 여기서 ‘번성’은 단순히 자녀가 태어나 인구가 늘어나는 생물학적 번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교회로부터 그 성격을 이어받은 후대의 교회들이 생겨나고 계속되는 교회적 번성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 후대의 교회들을 설명하려면 먼저 그들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밝혀야 합니다. 그래서 창5:1은 태고교회가 먼저 ‘영적상태에서천적상태로’ 나아간 것을 묘사합니다. AC.472와 AC.473에서 살펴본 ‘창조하다-영적인간-하나님의형상’과 ‘만들다-천적인간-하나님의모양’이라는 질서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이 창5의 여러 교회가 이어지는 출발점입니다.
특히 마지막의 ‘이후의번성은바로이상태로부터이어진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앞으로 등장할 셋, 에노스, 게난 등의 교회들은 아무 관계 없이 차례로 등장하는 독립된 교회들이 아니라, 먼저 이루어진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로부터 파생되고 계승되는 교회들입니다. 물론 후대로 내려가면서 처음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가 그대로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장 개요에서 보았듯이 그 상태는 점차 변화하고 쇠퇴하여 마침내 노아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계승의 출발점은 주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입니다.
이것은 ‘계보의책’이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문자적으로 계보에는 부모와 자녀의 출생이 기록되지만, 속뜻으로는 교회가 교회를 낳고 그 교회의 고유한 상태가 후대에 전달되는 과정이 기록됩니다. 그러므로 창5의 ‘낳았다’는 표현을 앞으로 만날 때에도 단순히 개인의 출생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어떤 교회 상태로부터 다음 교회 상태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AC.474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창4와 창5의 관계에도 하나의 중요한 기준을 더해 줍니다. 적어도 창5의 계열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가 그 출발점을 분명히 ‘영적상태에서천적상태가된태고교회’에 두고 있으며, 그 이후의 교회들이 ‘이상태로부터’ 번성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창5는 태고교회 자체의 천적 상태를 출발점으로 하여 그 후대 교회들의 계승과 변화를 추적하는 하나의 분명한 교회적 계열입니다. 이것이 창4의 계열과 정확히 어떤 관계를 이루는지는 계속 확인해야 하지만, 창5자체의 출발점과 진행 방향은 이제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결국 AC.469-474에서 창5:1은 앞으로 펼쳐질 교회사의 기준점을 세웁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여 영적 인간으로 만드시고, 다시 사랑으로부터 살아가는 천적 인간으로 완전하게 하셨으며, 그렇게 이루어진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로부터 이후의 여러 교회가 이어져 나갑니다. 그러므로 창5의 계보를 움직이는 가장 깊은 시작은 인간의 혈통이 아니라, 사람을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이끄시는 주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입니다. (AC.474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