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89에서 스베덴보리는 창2부터 나타나는 한 가지 중요한 변화를 지적합니다. 앞에서 영적 인간을 다루는 구절들에서는 주님을 단지 ‘하나님’이라고 하였는데, 이제 천적 인간을 다루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여호와하나님’이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에서 ‘여호와하나님’으로 호칭이 달라지는 것일까요?
먼저 AC.89가 실제로 말하는 범위를 정확히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이 호칭의 변화를 분명히 지적하고, 이것을 지금부터 앞에서 다루었던 영적 인간과는 다른 사람, 곧 천적 인간이 다루어진다는 증거 가운데 하나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AC.89자체에서는 왜 영적 인간을 다룰 때에는 ‘하나님’이라 하고 천적 인간을 다룰 때에는 ‘여호와하나님’이라 하는지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한 번호만으로 ‘여호와는언제나사랑을의미하고하나님은언제나진리를의미한다’거나, ‘여호와하나님은언제나사랑과진리의결합을의미한다’는 식으로 고정해서 설명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곳에서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차이를 설명하는 내용들을 찾을 수 있더라도, 그것을 확인하지 않은 채 AC.89의 짧은 언급만으로 전체 호칭 체계를 먼저 완성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이 질문을 계기로 ‘예수’, ‘그리스도’, ‘주’, ‘구주’, ‘아버지’, ‘아들’, ‘하나님의아들’, ‘인자’, ‘성령’등 주님에 관한 모든 호칭을 한꺼번에 설명하는 것도 AC.89의 독자가 지금 필요로 하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이러한 호칭들은 매우 중요한 주제이지만, 각각 성경의 문맥과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그 호칭을 설명하는 곳에서 살펴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여러 호칭이 나온다고 해서 먼저 각 호칭에 하나씩 고정된 ‘기능’이나 ‘작용’을 배정해 놓고 이후의 본문을 그 틀에 맞추어 읽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AC.89의 호칭 변화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 자신이 이것을 천적 인간의 형성이 새롭게 다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로 제시했으므로 반드시 주목해야 합니다. 창1에서 영적 인간이 형성되는 동안에는 ‘하나님’이라고 하였는데, 창2에서 천적 인간의 형성을 다루면서 ‘여호와하나님’이라는 호칭이 등장합니다. 독자는 우선 이 변화가 우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AC를 읽는 방법에서도 중요한 원칙을 보여 줍니다. 말씀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달라질 때 그 차이를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이름 하나를 발견하자마자 미리 만든 의미표를 기계적으로 대입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그 이름의 차이를 실제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따라가야 합니다. AC.89에서는 우선 ‘하나님’에서 ‘여호와하나님’으로의 변화가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주제가 전환되었음을 보여 주는 하나의 표지라는 데까지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왜하나님에서여호와하나님으로바뀌는가?’라는 질문은 여기서 완전히 닫기보다 가지고 가는 편이 좋습니다. AC.89가 우리에게 확실히 알려 주는 것은 호칭의 변화가 의미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변화의 더 깊은 이유는 스베덴보리가 이후의 본문에서 하나님의 이름들을 직접 설명할 때 하나씩 확인하면 됩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가 먼저 만든 주님의 호칭 체계로 AC를 읽는 것이 아니라, AC자체가 주님의 여러 이름을 어떻게 열어 가는지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AC.89심화1)
AC.85의 첫 문장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천적 인간이‘일곱째날’이고 그 때문에 일곱째 날이 거룩하게 구별되어 안식일이라 하였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아르카나라면,왜 이것은 처음부터 좀 더 분명하게 알려지지 않았을까요?말씀에 이 정도의 설명이라도 함께 주어졌다면 안식일과 창조의 날들을 둘러싼 많은 혼란을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 수 있습니다.
이 질문에 답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AC.85가 실제로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스베덴보리는 이 아르카나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이유를 곧바로 설명합니다.‘천적인간의본성을아는사람이아무도없었고,영적인간의본성을아는사람도거의없었기때문’이라고 합니다.그리고 이러한 무지 때문에 사람들은 둘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음에도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같은 것으로 여겨 왔다고 합니다.
따라서 적어도AC.85가 직접 주는 첫 번째 답은 분명합니다.‘일곱째날’과‘안식일’의 속뜻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데,바로 그것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를 모르면 왜 영적 인간의 형성이 여섯째 날과 연결되고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 또는 안식일과 연결되는지도 알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앞의AC.67에서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속뜻 안에는‘다른삶의본성이무엇인지알지못하면결코알수없는’아르카나들이 있다고 한 것과도 닮아 있습니다.어떤 속뜻은 단어 하나의 암호를 알아내듯 풀리는 것이 아니라,그 속뜻이 가리키는 영적 실재 자체를 알아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AC.85의 안식일도 그런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천적 인간이라는 영적 상태를 알지 못하면 일곱째 날이 왜 천적 인간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그렇다면주님께서는왜천적인간의본성을처음부터모든사람에게명백하게설명하지않으셨는가?’라고 물으면,AC.85한 번호만으로는 충분한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AC.85는‘왜이아르카나가알려지지않았는가’에 관하여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본성이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왜주님께서그것을더일찍명시적으로계시하지않으셨는가’라는 더 큰 섭리의 문제까지 여기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자유,인간의 수용 상태,말씀의 문자와 속뜻의 관계,속뜻의 보존,신적 섭리와 계시의 때 같은 스베덴보리의 다른 가르침들을 곧바로AC.85의 확정적인 해답으로 끌어오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그러한 주제들은 이 질문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지만,각각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그 문제를 다루는 곳에서 확인하면서 연결해야 합니다.
또 하나 조심할 것은‘속뜻이처음부터명백하게쓰여있었다면교회사적혼란이없었을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입니다.그렇게 생각할 충분한 인간적인 이유는 있습니다.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낳았을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명백한 설명이 언제나 명백한 수용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따라서 이 문제는 주님의 계시 방식에 대한 우리의 추측보다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히는 설명을 따라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렇다고 처음의 질문을 접어 둘 필요는 없습니다.오히려 매우 중요한 질문으로 남겨 둘 가치가 있습니다.AC를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가‘지금까지알려지지않았다’,‘밝히는것이허락되었다’,‘이것은아르카나이다’라고 말하는 곳들을 계속 만나게 됩니다.그때마다‘왜이제야밝혀지는가?’라는 질문이 다시 생길 수 있습니다.그런 본문들이 충분히 쌓이면 우리는 한 번호의 추측이 아니라 스베덴보리 자신의 여러 설명을 서로 대조하면서 더 신중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AC.85에서 지금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데까지 먼저 가는 것이 좋습니다.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며 안식일이라는 아르카나가 알려지지 않았던 직접적인 이유는 천적 인간의 본성이 알려져 있지 않았고 영적 인간의 본성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그보다 더 깊은 질문,곧‘왜이러한영적실재가오랫동안알려지지않도록허용되었는가?’는 여기서 성급하게 닫지 않고,앞으로AC가 그 답을 열어 줄 때까지 가지고 가야 할 질문입니다.(AC.85심화1)
AC.71에서 스베덴보리는 다른 삶에 관한 내용들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떤 순서대로 덧붙이는 것이‘허락되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AC.67부터 이러한 표현은 반복해서 나타납니다.말씀의 속뜻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고,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었으며,듣고 본 것을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합니다.이제AC.71에서는 그 내용들을 어떤 순서로 배치하는 것까지 허락의 언어로 표현합니다.그렇다면 이‘허락’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요?주님께서 직접‘이제이것을기록하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AC.71자체가 그 방법을 설명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이 번호에는 어떤 음성을 들었다는 말도 없고,천사가 지시했다는 말도 없으며,퍼셉션이나 유입을 통해 알았다는 설명도 없습니다.따라서‘허락되었습니다’라는 표현만 가지고 그 전달 방식을 하나로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은 오히려 중요합니다.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영들과 천사들과 실제로 말하고 함께 있었다고 매우 구체적으로 증언할 때에는 그렇게 말합니다.AC.67에서는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었다고 했고,AC.70에서는 육체 안에서 알고 지냈던 사람들이 죽은 뒤에도 그들과 말하고 함께 있었다고 했습니다.그런데‘허락’자체가 어떤 방식으로 알려졌는가에 대해서는 적어도AC.71까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우리가 모르는 부분은 모르는 채로 두는 것이 그의 기록에 더 충실합니다.
그렇다고 이 표현을 단순히‘스베덴보리가그렇게느꼈다’는 정도로 낮추어 읽는 것도 적절하지 않습니다.AC.67부터 반복되는 표현을 보면 그는 말씀의 속뜻을 알게 된 것,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게 된 것,그동안 듣고 본 것을 밝히는 것,그리고 그것들을 일정한 순서로 기록하는 것까지 자신의 독자적인 결정이나 성취로 제시하지 않습니다.그는 일관되게‘주님의신적자비’와‘허락’이라는 언어를 사용합니다.적어도 스베덴보리 자신은 이 모든 일을 자신에게서 시작된 것으로 이해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가장 안전한 답은 두 가지를 함께 붙드는 것입니다.첫째,스베덴보리는 자신이 기록하고 있는 일을 주님의 신적 자비 아래 허락된 일로 이해했습니다.둘째,그 허락이 매번 어떤 구체적인 방식으로 그에게 전달되었는지는AC.71이 말하지 않습니다.직접적인 말씀인지,영적 교통 가운데 주어진 인식인지,다른 어떤 방식인지 이 한 문장만으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읽으면‘허락되었습니다’라는 말을 신비화할 필요도 없고,반대로 단순한 문학적 겸손의 표현으로 축소할 필요도 없습니다.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그렇게 표현했다는 사실입니다.그리고 그 표현은 독자에게 그의 자기 이해를 보여 줍니다.그는 자신을 말씀의 아르카나와 다른 삶의 실상을 스스로 발견하여 발표하는 독립적인 탐구자로 제시하지 않고,그것들을 알고 보고 밝히도록 허락받은 사람으로 제시합니다.
앞으로 그의 기록을 더 읽으면서 이러한‘허락’의 성격을 밝혀 주는 직접적인 설명을 만나게 된다면 그때 우리의 이해를 더 넓힐 수 있습니다.그러나AC.71의 독자는 아직 거기까지 갈 필요가 없습니다.지금은 스베덴보리가 분명히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을 함께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그는‘허락되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그러나‘어떻게허락되었는가’는 여기서 말하지 않았습니다.이 구별을 지키는 것이 오히려 그의 증언을 가장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입니다.(AC.71심화1)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창2:19, 20)
AC.145
말씀에서도‘이름’(name)은어떤것의본질을의미하고,‘보고이름으로부르는것’(seeingandcallingbyname)은그성질을아는것을의미합니다.이사야에서는, In the Word also by “name” is signified the essence of a thing,and by “seeingandcallingbyname” is signified to know the quality. As in Isaiah:
이구절에서‘이름으로부르는것’(callbyname)과‘칭호를주는것’(surname)은그성질을미리아는것을의미합니다.또, In this passage,to “callbyname” and to “surname” signifies to foreknow the quality.Again:
라고합니다.이구절들에서‘이름들’(names)은결코이름자체를의미하는것이아니라성질들을의미합니다.또한천국에서는누구의이름도알려지는것이아니라그의성질이알려집니다. By “names” in these passages are by no means meant names,but qualities;nor is the name of anyone ever known in heaven,but his quality.
해설
AC.145는 AC.144에서 설명한 ‘이름’의 의미를 말씀의 여러 구절로 확증합니다. AC.144에서는 고대인들이 이름을 어떤 것의 본질과 관련하여 이해했고,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그 성질을 아는 것으로 이해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45에서는 이것이 단지 고대인의 언어 습관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자체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번에 연이어 인용되는 이사야와 요한계시록의 구절들은 모두 ‘이름’이 단순한 호칭을 넘어 그 사람이나 사물의 본질과 성질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 제시됩니다.
먼저 사45:3-4에서 여호와께서는 고레스를 ‘네이름을부르는자’라고 하시고, 그가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그의 이름을 불러 칭호를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이름으로부르는것’과 ‘칭호를주는것’이 그 성질을 미리 아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인용의 초점은 하나님께서 단순히 어떤 개인의 고유명사를 알고 계셨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성질과 그가 맡게 될 쓰임을 이미 알고 계신다는 의미가 이름을 부르는 표현 안에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사62:2의 ‘새이름’은 이 의미를 한층 더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새이름으로일컬음이될것’이라는 말씀을 다른 성질을 지니게 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름이 단순한 명칭이라면 새 이름은 호칭의 변경에 지나지 않겠지만, 이름이 성질을 함축한다면 새 이름은 상태와 성질의 변화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의미는 앞뒤 구절에서 분명하다고 덧붙이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름의 의미를 단어 하나에서 임의로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구절이 놓인 문맥을 통해 확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43:1과 사40:26도 같은 원리를 확인합니다. ‘내가너를지명하여불렀나니너는내것이라’는 말씀에서 이름으로 부르시는 것은 그들의 성질을 아시는 것을 의미하고, 하늘의 만상을 수효대로 이끌어 내시며 ‘그들의모든이름을부르신다’는 말씀 역시 그 모두를 아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도 핵심은 하나님께서 무수한 존재들의 명칭을 기억하신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각 존재가 어떠한지를 온전히 아신다는 의미가 ‘이름을부르다’라는 말씀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인용에서는 이 원리가 더욱 깊어집니다. 사데 교회 가운데 옷을 더럽히지 않은 ‘몇명’과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은 단순히 천국의 명부에 사람들의 지상 이름이 적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들에서 ‘이름들’(names)은 결코 이름 자체가 아니라 성질들을 의미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생명책에 이름이 있다는 표현 역시 사람의 외적인 신분이나 명칭보다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떠한 상태와 성질 가운데 있는가와 관련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이러한 인용들을 거친 뒤 나오는 마지막 문장은 AC.145전체의 결론입니다. ‘천국에서는누구의이름도알려지는것이아니라그의성질이알려집니다.’ 이것은 이름의 상응을 설명하기 위한 매우 강한 진술입니다. 자연계에서는 이름을 통해 사람을 식별하지만,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설명하는 천국의 관점에서는 사람을 규정하는 핵심이 지상에서 사용하던 이름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어떠한 사람인가 하는 성질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이름’이 본질과 성질을 나타내는 것은 단순한 문학적 장치가 아니라, 외적인 명칭보다 내적인 상태가 본질적인 영적 질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제 이것을 다시 창2:19-20으로 가져오면 AC.142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사람이 짐승들과 새들에게 이름을 주었다는 것은 단지 각각의 동물에게 명칭을 붙였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에게 주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이 어떠한 성질을 지니는지를 그가 알았다는 뜻입니다. AC.144가 고대인의 이름 짓는 관습을 통해 이것을 설명했다면, AC.145는 말씀 전체의 용례를 통해 같은 원리를 확증합니다. 따라서 AC.142-145는 하나의 연속된 설명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설명은 결국 다시 proprium의 문제로 돌아갑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단지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성질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AC.142가 말하듯 그는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련의 이름에 관한 설명은 흥미로운 성경 상징 하나를 알려 주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인간이 주님께 받은 선과 진리를 상당히 분명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느껴지는 삶을 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바로 그 상태에서 이제 갈빗대와 여자의 의미에 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AC.145)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창2:19-20)
AC.144
‘이름으로부르는것’(callbyname)이그성질을아는것을의미하는까닭은,고대인들이‘이름’(name)을어떤것의본질로이해했고,‘보고이름으로부르는것’(seeingandcallingbyname)을그성질을아는것으로이해했기때문입니다. 그까닭은그들이의미되는것들에따라아들과딸들에게이름을지어주었기때문입니다.모든이름에는그이름에고유한어떤것이들어있어서,그것으로부터그리고그것을통하여그들은자녀들의기원과성질을알수있었습니다.이에대해서는앞으로이저작에서주님의신적자비로야곱의열두아들을다루게될때살펴보게될것입니다. 그러므로이름들이그이름으로지칭되는것들의근원과성질을함축하고있었기때문에,‘이름으로부르는것’(callingbyname)으로다른어떤것도이해하지않았습니다.이것이그들사이에서관습적으로사용되던말하는방식이었지만,이것을이해하지못하는사람은그러한것들이이런의미를가진다는사실을이상하게여길수있습니다. That to “callbyname” signifies to know the quality,is because the ancients by the “name” understood the essence of a thing,and by “seeingandcallingbyname” they understood to know the quality. The reason was that they gave names to their sons and daughters according to the things which were signified,for every name had something peculiar in it,from which,and by which,they might know the origin and the nature of their children,as will be seen in a future part of this work,when,of the Lord’s Divine mercy,we come to treat of the twelve sons of Jacob. As therefore the names implied the source and quality of the things named,nothing else was understood by “callingbyname.”This was the customary mode of speaking among them,but one who does not understand this may wonder that such things should be signified.
해설
AC.144는 AC.142에서 사람이 짐승들과 새들에게 이름을 주었다는 것이 왜 그들의 성질을 알았다는 뜻이 되는지를 직접 설명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름은 대개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다른 것과 구별하여 지칭하는 명칭으로 먼저 이해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고대인들에게 이름은 단순한 호칭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름’(name)을 어떤 것의 본질과 관련하여 이해했고, 그래서 ‘보고이름으로부르는것’(seeingandcallingbyname)을 그 대상의 성질을 아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 배경에는 고대인들의 실제 이름 짓는 방식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들과 딸들에게 임의로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의미하는 것에 따라 이름을 지었습니다. 따라서 이름에는 그 사람에게 고유한 어떤 것이 담겨 있었고, 그 이름을 통하여 자녀의 기원과 성질을 알 수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를 지금 모두 설명하지 않고, 앞으로 야곱의 열두 아들을 다룰 때 자세히 살펴보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현재 독자는 우선 ‘고대인의이름은그사람의기원과성질을드러내는의미를지니고있었다’는 정도를 붙들면 충분합니다.
이 설명은 AC.142의 창2:19-20해석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주님께서 짐승들과 새들을 사람에게로 이끌어 그가 무엇이라 하는지를 보셨고, 사람이 그것들에게 이름을 주었다는 것은 단순히 최초의 인간이 동물들의 명칭을 정했다는 장면만을 속뜻에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주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의 성질을 알게 하셨고, 사람이 그것들의 성질을 알았다는 것이 ‘이름을주는것’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AC.144는 바로 이 해석의 언어적·고대적 배경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름’, ‘본질’, ‘근원’, ‘성질’을 서로 긴밀하게 연결한다는 점입니다. 어떤 것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단지 그것을 가리키는 소리를 기억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되며 어떤 성질을 가진 것인지를 아는 것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이름이 중요하게 사용될 때에는 오늘날의 명칭 개념만 가지고 읽기보다, 그 이름이 그 대상에 관하여 무엇을 드러내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성경에나오는모든이름은하나의고정된뜻을가지고있다’는 식으로 기계적인 규칙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AC.144가 말하는 핵심은 이름이 본질과 근원과 성질을 함축한다는 것이지, 이름 하나마다 문맥과 관계없이 언제나 동일한 한 가지 의미만 적용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말씀의 표현은 현재 다루는 주제와 문맥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름의 의미를 살필 때에도 그 이름이 누구에게 주어졌는지, 어떤 사건 가운데 등장하는지, 그리고 말씀에서 무엇을 드러내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AC.143과 AC.144를 나란히 놓으면 고대인들의 언어가 조금 더 선명하게 보입니다. AC.143에서는 고대인들이 천국적인 관념 안에 있었기 때문에 동물들을 말하면서 인간 안의 애정들을 의미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44에서는 그들이 이름을 통하여 사물과 사람의 본질과 성질을 이해했다고 설명합니다. 자연적인 대상과 그 이름이 단순히 외적인 사물과 호칭에 머물지 않고 그 안에 담긴 성질을 드러내는 언어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독자에게는 낯설지만, 고대인들에게는 관습적인 말하는 방식이었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따라서 AC.144는 창2에서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짓는 장면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직접적인 해설인 동시에, 앞으로 말씀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명과 지명을 읽는 데 필요한 하나의 기본 원리를 제공합니다. ‘이름으로부르는것’은 그저 명칭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의 성질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AC.142에서 사람은 주님께 받은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의 성질을 알고 있었다고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proprium으로 기울었다는 사실은 더욱 의미심장해집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proprium을 원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성질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었던 것입니다. (AC.144)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창2:19-20)
AC.143
고대에‘짐승들’(beasts)과‘동물들’(animals)이인간안의애정들과그와같은것들을의미했다는사실은오늘날에는이상하게보일수있습니다.그러나그시대사람들은천국적인관념안에있었고,또그러한것들이영계에서는동물들로,실제로는그것들과닮은그러한동물들로표상되기때문에,그들이그런식으로말할때에는다른어떤것도의미하지않았습니다.말씀에서도짐승들이일반적으로또는구체적으로언급되는곳에서는다른어떤것도의미하지않습니다.예언서전체가그러한것들로가득하기때문에,각각의짐승이구체적으로무엇을의미하는지알지못하는사람은말씀이속뜻에무엇을담고있는지를도저히이해할수없습니다.그러나앞에서살펴본것처럼짐승들은두종류가있는데,악하거나해로운짐승들과선하거나해롭지않은짐승들입니다.선한짐승들은선한애정들을의미하는데,예를들면양과어린양과비둘기가그러합니다.그리고여기서는천적인간,곧천적영적인간을다루고있으므로이러한짐승들을의미합니다.‘짐승들’(beasts)이일반적으로애정들을의미한다는것은앞에서말씀의몇몇구절들을통해확증한바있으므로(AC.45-46),여기서는더이상확증할필요가없습니다. That by “beasts” and “animals” were anciently signified affections and like things in man,may appear strange at the present day;but as the men of those times were in a celestial idea,and as such things are represented in the world of spirits by animals,and in fact by such animals as they are like,therefore when they spoke in that way they meant nothing else.Nor is anything else meant in the Word in those places where beasts are mentioned either generally or specifically.The whole prophetic Word is full of such things,and therefore one who does not know what each beast specifically signifies,cannot possibly understand what the Word contains in the internal sense.But,as before observed,beasts are of two kinds— evil or noxious beasts,and good or harmless ones—and by the good beasts are signified good affections,as for instance by sheep,lambs,and doves;and as it is the celestial,or the celestial spiritual man,who is treated of,such are here meant.That “beasts” in general signify affections may be seen above,confirmed by some passages in the Word(n.45–46),so that there is no need of further confirmation.
해설
AC.143은 AC.142에서 ‘짐승들’(beasts)이 천적 애정들을, ‘하늘의새들’이 영적 애정들을 의미한다고 한 해석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설명합니다. 오늘날 독자에게 ‘짐승이왜인간의애정을의미하는가?’라는 해석은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도 바로 그 점을 인정하면서 설명을 시작합니다. 고대에 ‘짐승들’(beasts)과 ‘동물들’(animals)이 인간 안의 애정들과 그와 같은 것들을 의미했다는 사실은 오늘날에는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제시하는 첫 번째 이유는 그 시대 사람들이 ‘천국적인관념’ 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108에서 고대인들의 말하는 방식에 관하여 설명한 내용과 연결됩니다. 그들에게 자연계의 사물과 인간 안의 영적인 상태를 연결하여 말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는 비유와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연적인 것들을 보면서 그것과 관련된 영적인 것을 함께 생각할 수 있었고, 그러한 관념 속에서 말했습니다. 따라서 동물을 말하면서 인간의 애정을 의미하는 표현도 그들에게는 낯선 언어가 아니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더욱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애정과 같은 것들이 영계에서 실제로 동물들로 표상되며, 그것도 그 애정의 성질과 닮은 동물들로 표상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짐승과 애정의 관계는 단순히 고대인이 동물의 성격을 관찰하고 ‘양은온순하니선한마음을상징한다고하자’는 식으로 만들어 낸 비유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 안에서는 영적인 상태와 그것을 표상하는 형상 사이에 실제적인 질서가 있고, 고대인들은 천국적인 관념 안에서 그 관계에 따라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말씀에서 동물들이 속뜻을 담을 수 있는 배경이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에 나오는 짐승들도 같은 원리로 읽습니다. 짐승이 일반적으로 언급되든 특정한 종류가 언급되든 그 안에는 인간의 애정과 관련된 속뜻이 있으며, 특히 예언서에는 이러한 표현이 매우 많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각각의 짐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면 예언서의 속뜻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AC.117에서 역사적인 말씀에도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했던 설명과 함께, 스베덴보리가 말씀 전체를 어떻게 읽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말씀의 자연적인 표현 안에는 인간의 내적 상태와 천국적인 실재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동물은곧애정’이라는 하나의 공식만 만들어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143자체가 이미 짐승들을 악하거나 해로운 것과 선하거나 해롭지 않은 것으로 구별합니다. 선한 짐승들은 선한 애정을 의미하며, 그 예로 양과 어린양과 비둘기를 듭니다. 반대로 악하거나 해로운 짐승들이 있다면 그것들은 다른 성질의 애정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동물이 등장했다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하나의 의미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 동물의 성질과 그것이 놓인 말씀의 문맥, 그리고 현재 다루는 주제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AC.142의 짐승들은 선한 애정들을 의미합니다. 지금 다루고 있는 사람은 천적 인간, 곧 천적 영적 인간이며, 주님께서 그에게 주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시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 등장하는 짐승들의 의미도 현재 다루는 인간의 상태에 맞추어 이해됩니다. AC.103에서 어떤 표현의 의미는 그것이 놓인 주제에 따라 이해해야 한다고 했던 원리가 여기서 다시 실제로 적용되고 있는 셈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짐승들’(beasts)이 일반적으로 애정들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이미 AC.45-46에서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확인했으므로 여기서 다시 증명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 인용은 단순한 참고 번호가 아닙니다. 창1에서 동물들을 다룰 때 제시했던 상응의 원리가 이제 창2의 짐승들에게도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동시에 창1과 창2의 해설이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같은 말씀의 속뜻 안에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해 줍니다.
따라서 AC.143의 핵심은 ‘짐승은애정을뜻한다’는 대응 하나를 외우는 데 있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왜 그러한 의미가 가능한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고대인들은 천국적인 관념 안에서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함께 보았고, 영계에서도 인간의 애정은 그 성질에 상응하는 동물의 형상으로 표상됩니다. 말씀의 동물 표상도 이러한 질서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상응은 사람이 성경의 사물에 임의로 영적 의미를 붙이는 방식이 아니라, 자연적인 표현과 영적인 실재 사이의 관계를 말씀 안에서 읽어 내는 방식이라는 점이 AC.143에서 한층 분명해집니다. (AC.143)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창2:9)
AC.103
여기서‘나무들’(trees)이퍼셉션을의미하는이유는천적인간을다루고있기때문입니다.그러나영적인간을다룰때는그렇지않습니다.주어의성격에따라술어의성격이달라지기때문입니다. The reason why “trees” here signify perceptions is that the celestial man is treated of, but it is otherwise when the subject is the spiritual man, for on the nature of the subject depends that of the predicate.
해설
AC.103은 바로 앞 AC.102에서 나무들이 퍼셉션을 의미한다고 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나무가 퍼셉션을 의미한다고 한 것을 모든 말씀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고정된 상응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나무들이 퍼셉션을 의미하는 것은 지금 창2에서 다루고 있는 사람이 천적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영적 인간을 다룰 때에는 그렇지 않다고 곧바로 덧붙입니다.
이것은 상응을 이해할 때 매우 중요한 원칙입니다. 말씀에 같은 자연적 대상이나 같은 단어가 나온다고 해서 언제나 똑같은 속뜻을 가진다고 기계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 대상이 누구에게 또는 무엇에 관하여 서술되고 있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주어의성격에따라술어의성격이달라진다’고 한 것은 바로 이 점을 말합니다. 무엇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지가 달라지면 그것에 관하여 서술되는 것의 의미도 그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AC.102에서 나무들이 퍼셉션을 의미하는 까닭은 나무라는 자연물이 말씀 어디에서나 오직 퍼셉션만을 의미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창2에서는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고,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싸움이 그치며,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지성이 흘러드는 상태를 설명해 왔습니다. 특히 AC.99에서는 천적 인간이 자신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주님께서 흘러드신다는 것을 지각한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천적 인간의 에덴동산에 있는 나무들이므로 여기서는 퍼셉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원칙은 상응을 자연물의 특징만으로 추론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일깨워 줍니다. 어떤 자연적 대상의 성질을 관찰한 뒤 그것이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할 것이라고 임의로 정해서는 안 되며, 앞의 어느 구절에서 특정한 의미로 해석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이후의 모든 구절에 그 의미를 그대로 적용해서도 안 됩니다.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려면 현재 무엇을 다루고 있는지, 그 표현이 어떤 문맥 안에 놓여 있는지, 그리고 주변의 다른 표현들과 어떤 관계를 이루고 있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특히 AC.103은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가 같은 표현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지금 다루는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신앙이 그 사랑에서 나오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퍼셉션으로 지각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천적 인간을 다루는 현재 문맥에서는 동산의 나무들이 퍼셉션에 관계됩니다. 그러나 영적 인간을 다루는 문맥에서는 그 사람의 생명과 질서가 다르므로, 나무라는 동일한 표현도 그 주제에 맞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AC를 읽으면서 각각의 상응을 발견하더라도 그것을 문맥에서 떼어 내어 고정된 대응표처럼 축적하는 데에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어떤 곳에서 동산이 지성을 의미했다고 해서 모든 동산이 언제나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고 단정하거나, 여기서 나무가 퍼셉션을 의미한다고 해서 말씀에 나오는 모든 나무를 곧바로 퍼셉션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상응에는 일관된 질서가 있지만, 그 구체적인 의미는 현재 다루는 주제와 문맥 안에서 밝혀져야 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AC.102에서 나무들의 의미를 제시한 직후 AC.103에서 곧바로 덧붙이는 중요한 주의사항입니다.
따라서 AC.103은 짧은 한 문장이지만 앞으로 AC전체를 읽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중요한 번호입니다. 말씀의 어떤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물을 때에는 그 단어만 따로 떼어 보지 않고, ‘지금말씀은누구에관하여,어떤상태에관하여말하고있는가?’를 함께 물어야 합니다. 여기서 나무들이 퍼셉션을 의미하는 것은 천적 인간과 그의 에덴동산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원칙을 기억하면 앞으로 같은 표상이 다른 문맥에서 서로 다른 의미로 설명되더라도 그것을 모순으로 보지 않고, ‘주어의성격에따라술어의성격이달라진다’는 말씀의 속뜻의 질서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103)
이구절에서‘광야’(wilderness),‘기뻐함’(joy),‘감사함’(confession)은신앙의천적인것들,곧사랑에관계되는것들을표현하며,‘사막’(desert),‘즐거워함’(gladness),‘창화하는소리’(thevoiceofsinging)는신앙의영적인것들,곧이해에속한것들을표현합니다.전자는‘에덴’(Eden)에,후자는‘동산’(garden)에관계됩니다.이선지서에서는같은것에관하여두표현이계속해서함께나오는데,하나는천적인것을,다른하나는영적인것을의미합니다.‘에덴의동산’(gardeninEden)이그밖에무엇을의미하는지는뒤의10절에서볼수있습니다. In this passage, “wilderness,” “joy,” and “confession” are terms expressive of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or such as relate to love; but “desert,” “gladness,” and “thevoiceofsinging,” of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or such as belong to the understanding. The former have relation to “Eden,” the latter to “garden”; for with this prophet two expressions constantly occur concerning the same thing, one of which signifies celestial, and the other spiritual things. What is further signified by the “gardeninEden,” may be seen in what follows at verse 10.
해설
AC.100은 AC.98에서 제시한 ‘동산’과 ‘에덴’의 의미를 이사야의 말씀으로 확증합니다. AC.98에서는 ‘동산’이 지성을, ‘에덴’이 사랑을 의미한다고 했고, 그 결과 ‘동쪽에덴의동산’이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천적 인간의 지성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사51:3에서 ‘광야를에덴같게’ 하고 ‘사막을여호와의동산같게’ 한다는 두 표현을 함께 제시함으로써, 에덴과 동산이 각각 사랑과 지성에 관계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사51:3은 황폐해진 시온을 여호와께서 다시 위로하시고 회복시키시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광야가 에덴처럼 되고 사막이 여호와의 동산처럼 되며, 그곳에 다시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게 됩니다. 문자적으로는 황폐한 곳이 풍요롭고 기쁜 곳으로 회복되는 모습이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안에서 인간의 내적인 회복을 봅니다. 황폐했던 인간 안에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지성이 다시 살아나고, 그에 따라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함께 회복되는 상태가 묘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사야의 표현들을 두 계열로 구별한다는 점입니다. ‘광야’, ‘기뻐함’, ‘감사함’은 신앙의 천적인 것들, 곧 사랑에 관계되는 것들을 표현하고, ‘사막’, ‘즐거워함’, ‘창화하는소리’는 신앙의 영적인 것들, 곧 이해에 속한 것들을 표현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자는 ‘에덴’과 관계되고 후자는 ‘동산’과 관계됩니다. 에덴이 사랑을 의미하고 동산이 지성을 의미한다는 AC.98의 설명이 이사야의 병행 표현 안에서도 확인되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각각의 단어를 문맥과 관계없이 언제나 같은 뜻으로 대응시키는 상응 사전처럼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100에서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이사야가 같은 하나의 일을 말하면서 서로 짝을 이루는 두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두 표현 가운데 하나는 천적인 것, 곧 사랑에 관계되고, 다른 하나는 영적인 것, 곧 이해에 관계됩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개별 단어를 따로 떼어 외우는 것보다, 말씀 안에서 사랑에 속한 것과 이해에 속한 것이 서로 구별되면서도 하나의 전체를 이루어 표현된다는 구조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의 AC.99와도 잘 연결됩니다. AC.99에서는 천적 인간에게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통하여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이해는 서로 단절된 두 영역이 아닙니다.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그 사랑으로부터 이해에 속한 것들이 생명을 받을 때 본래의 질서가 회복됩니다. AC.100에서 에덴과 동산이 한 구절 안에서 서로 대응하여 나타나는 것도 이러한 질서를 보여 줍니다. 사랑을 의미하는 에덴과 지성을 의미하는 동산은 구별되지만, ‘에덴의동산’ 안에서는 하나의 질서 안에 함께 있습니다.
또한 ‘이선지서에서는같은것에관하여두표현이계속해서함께나온다’는 설명은 이사야를 비롯한 말씀의 표현 방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줍니다. 겉으로 보면 비슷한 말을 되풀이하는 시적 병행법처럼 보일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속뜻에서는 그 두 표현이 완전히 같은 말을 중복하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하나가 사랑과 선에 관계되는 천적인 것을 표현한다면 다른 하나는 이해와 진리에 관계되는 영적인 것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말씀의 반복처럼 보이는 표현에도 속뜻에서는 구별과 질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AC.100은 마지막으로 ‘에덴의동산’의 의미가 창2:10이하에서 더 밝혀질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이것은 지금 모든 의미를 한꺼번에 완성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합니다. 현재까지는 동산이 지성이고 에덴이 사랑이며, 이 둘이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관계 속에서 이해된다는 데까지 밝혀졌습니다. 앞으로 강과 네 갈래의 물줄기에 관한 설명이 이어지면서 에덴동산의 구조는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은 AC.98-100이 세워 놓은 기본 질서,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그 사랑으로부터 지성이 생명을 받는다는 구조를 붙들고 다음 설명을 따라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AC.98-100)
그러나이러한내용들을말씀본문에들어있는것들사이에끼워넣는다면흩어지고서로연결되지않게될것이므로,주님의신적자비로말미암아그것들을각장의처음과끝에어떤순서대로덧붙이는것이허락되었습니다.이와별도로부수적으로삽입되는것들도있습니다. But as these matters would be scattered and disconnected if inserted among those contained in the text of the Word,it is permitted,of the Lord’s Divine mercy,to append them in some order,at the beginning and end of each chapter;besides those which are introduced incidentally.
해설
AC.71은 AC.67부터 시작된 다른 삶에 관한 기록을 앞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안에서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를 설명하는 짧은 안내문입니다. AC.70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갈 때의 상태를 말하기 시작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들을 말씀 본문의 해설 사이에 계속 끼워 넣으면 서로 흩어지고 연결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들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떤 순서대로 덧붙이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밝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어떤순서대로’라고 한 점입니다. 다른 삶에 관한 기록들은 그때그때 생각나는 경험을 무작위로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될 수 있도록 일정한 순서 안에서 제시됩니다. 따라서 독자는 앞으로 창세기 본문의 속뜻에 관한 해설과 함께, 각 장의 처음과 끝에서 다른 삶과 영계에 관한 별도의 연속된 설명을 만나게 됩니다.
다만 이것을 현행 해설처럼 ‘장의처음은독자의인식을열어주는자리이고,장의끝은그인식을가라앉히고확장하는자리’라고까지 설명할 근거는 AC.71에 없습니다. 또한 본문 해설의 중심부에는 ‘철저히말씀의문자와그내적의미만이놓인다’고 절대화하기도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바로 이어서 ‘부수적으로삽입되는것들도있다’고 덧붙이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인 배치 원칙은 각 장의 처음과 끝이지만, 필요에 따라 다른 곳에 부수적으로 들어가는 내용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영적 경험보다 말씀을 우위에 놓기 위해 이러한 구성을 선택했다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물론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전체가 말씀의 속뜻을 밝히는 저작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AC.71에서 그가 직접 밝힌 배치 이유는 이러한 내용들이 말씀 본문의 내용들 사이에 삽입될 경우 ‘흩어지고서로연결되지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직접 설명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여기서 다시 등장하는 ‘주님의신적자비로말미암아’와 ‘허락되었습니다’라는 표현도 눈에 띕니다. AC.67에서도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씀의 속뜻을 아는 것이 자신에게 허락되었다고 했고, 자신이 듣고 본 것을 밝히는 것도 허락의 언어로 표현했습니다. AC.70에서도 여러 해 동안 듣고 본 것을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1에서는 내용뿐 아니라 그것을 어떤 순서로 덧붙일 것인가에 대해서도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 ‘허락’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전달되었는지는 이 번호에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 점은 별도로 물어볼 만한 중요한 질문입니다.
따라서 AC.71의 역할은 크지만 그 내용은 단순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으로 다른 삶에 관한 많은 내용을 기록할 것이며, 그것들이 서로 흩어지지 않고 연결되도록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떤 순서대로 배치합니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부수적으로 삽입되는 내용들도 있습니다. 이 짧은 설명을 기억하면 앞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으면서 왜 창세기 본문의 속뜻을 따라가다가 장의 경계에서 영계와 사후의 삶에 관한 긴 기록들이 등장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 무관한 자료가 우연히 한 책 안에 섞인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처음부터 밝힌 구성 방식에 따른 것입니다. (AC.71해설)
AC.67을 처음 읽는 독자는 거의 즉시 한 가지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 안에 들어 있는 가장 깊은 아르카나는‘다른삶의본성’을 알지 못하면 알 수 없다고 합니다.그렇다면‘다른삶’은 무엇이며,그‘본성’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AC.67은 아직 그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오히려 이제부터 자신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으면서 듣고 본 것을 밝히겠다고 예고합니다.그러므로 이 심화에서도 뒤에 나올 내용을 모두 앞당겨 설명하기보다,앞으로의 독서를 위해 꼭 필요한 정도만 먼저 짚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다른삶’은 이 세상의 육체적 삶과 구별되는 사후의 삶을 가리킵니다.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사후의 삶은 단지 죽은 뒤 어딘가에서 존재한다는 막연한 교리가 아닙니다.사람이 육체의 죽음 뒤에도 의식과 인격을 지닌 채 계속 살아가며,영들과 천사들이 실제로 살아가는 영적 세계가 있다는 것이 그의 증언의 중요한 전제입니다.AC.67에서 그가‘여러해동안영들과천사들과함께’있었다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다른 삶이 그에게 관념이나 추측이 아니라 듣고 볼 수 있도록 허락된 실제의 삶이었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AC.67은 단순히‘사후세계가존재한다’고 말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들이 그 삶을 향하고,그 삶에 속한 것들을 묘사하며,또한 그것들을 그 안에 포함한다고 말합니다.이것이 중요합니다.말씀의 문자에는 땅과 하늘,집과 성,사람과 짐승,올라감과 내려감,전쟁과 평화,삶과 죽음 같은 자연계의 언어가 등장합니다.그러나 속뜻에서는 그러한 표현들이 인간의 영적 생명과 주님의 나라에 속한 것들을 품고 있습니다.그러므로 자연계의 의미만 알고 영적 삶의 질서를 전혀 알지 못한다면,속뜻에서 말하는 많은 것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다른삶의본성’을 안다는 것을 영계에 관한 수많은 정보를 미리 외워 두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AC를 읽기 전에 천국과 지옥의 구조를 모두 알아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오히려AC.67부터 이어지는 글 자체가 독자에게 그 세계를 차례로 소개하기 시작합니다.중요한 것은 말씀의 속뜻이 자연계의 사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실제 영적 생명과 영적 세계의 질서를 향하고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고 읽는 것입니다.
또한‘다른삶’을 안다는 것은 단순한 사후세계 호기심과도 다릅니다.스베덴보리가 다른 삶을 말하는 이유는 죽은 뒤 무엇을 보고 어디를 돌아다니는지가 흥미롭기 때문만은 아닙니다.말씀의 속뜻과 연결되는 것은 그 세계가 인간의 내적 생명과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앞으로AC가 진행되면서 사랑과 신앙,의지와 이해,선과 진리,천국과 지옥,거듭남과 같은 주제들이 계속 등장하게 됩니다.다른 삶의 본성을 알아 가는 것은 결국 인간이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으며,이 세상에서 어떤 생명을 형성해야 하는지를 알아 가는 일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AC.67에서‘다른삶의본성’을 모르면 속뜻의 가장 깊은 아르카나를 알 수 없다고 한 말을 지나치게 부담스럽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이것은‘먼저영계를다알아야AC를읽을자격이있다’는 선언이 아닙니다.오히려 지금까지 자연계의 시야 안에서만 읽었던 말씀을 더 넓은 실재 안에서 읽도록 독자의 시선을 여는 말에 가깝습니다.눈에 보이는 세계만이 전부가 아니며,말씀의 속뜻은 인간의 영원한 생명과 주님의 나라에 속한 실재를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AC.67은 창2의 시작에 영계에 관한 이야기를 갑자기 끼워 넣은 것이 아닙니다.앞으로 창2의 속뜻을 읽기 위해 독자가 갖추어야 할 하나의 중요한 시야를 먼저 열어 주는 것입니다.스베덴보리가‘다른삶’에 관하여 보고 들은 것을 이제 밝히겠다고 한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독자는 앞으로 그의 증언을 따라가면서‘다른삶의본성’이 무엇인지 조금씩 배우게 되고,동시에 왜 그것을 알아야 말씀의 속뜻이 더 깊이 열리는지도 차츰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AC.67심화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