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2026/10/11)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7, ‘사랑의 하나님’, 찬130, ‘찬란한 주의 영광은’입니다.

 

오늘은 창5 절별 주석 그 첫 번째, 1절로 5절, AC 글 번호로는 469번에서 495번입니다. 먼저 창세기 본문입니다.

 

 

1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1-5)

 

 

제목은

 

하나님의 형상에서 모양으로, 그리고 시작된 변화

 

 

이며, 다음은 ‘3분 요약’입니다. 이 요약은 새로 오신 분들, 그리고 그동안 함께해오신 분들 모두를 위한, 지난 2월부터 시작한 이 특별한 주일예배를 위한, 그 흐름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시간입니다.

 

오늘 리딩에 들어가기 전에 지금까지의 큰 흐름을 잠깐 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 그러니까 겉 글자의 뜻을 존중하면서,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천국의 비밀, 창, 출 속뜻 주석)를 따라 그 속뜻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창1에서는 천지창조를 거듭남의 과정으로, 창2에서는 에덴동산을 천적 상태로, 창3에서는 사람이 주님보다 자기 감각과 proprium을 따르면서 그 질서가 무너지는 과정으로 읽었습니다.

 

창4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냈으며,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서 아벨이 죽임을 당하고 그 계열은 라멕에 이르러 황폐해졌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가인의 표’를 통해 신앙을 보존하시고, 마침내 셋과 에노스를 통하여 신앙이 다시 체어리티와 결합되고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가 시작되게 하셨습니다. 인간의 황폐보다 주님의 섭리와 회복이 더 깊다는 것이 창4의 마지막 메시지였습니다.

 

오늘부터는 창5로 들어갑니다. 창5는 겉으로는 아담에서 노아까지 이어지는 족보이지만, 속뜻으로는 태고교회로부터 여러 교회가 어떻게 이어지고 변화되어 갔는지를 보여 줍니다. 오늘 첫 다섯 절에서는 그 출발점인 태고교회의 본래 모습을 먼저 살펴봅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영적으로 창조하시고 천적으로 만드시며, 신앙과 사랑을 하나로 결합하셨을 때 비로소 그들을 ‘사람’이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셋에 이르면서 아주 미세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셋 교회에서도 신앙은 여전히 사랑과 결합되어 있었지만, 태고교회에서처럼 ‘사랑이 그만큼 주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창5의 ‘날과 해’는 교회의 여러 상태를, ‘아들들과 딸들’은 그 안에서 생겨나는 진리와 선을 나타냅니다. 마침내 ‘죽었더라’는 말씀은 태고교회의 고유한 생명이었던 ‘퍼셉션’, 곧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알아차리던 상태가 점차 사라져 갔음을 보여 줍니다.

 

오늘은 이것을 마음에 두고 읽겠습니다. ‘교회의 생명은 신앙이 사랑과 어떤 관계를 이루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나왔고, 그 둘이 하나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 질서에 작은 변화가 시작되면서 교회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오늘은 창5의 첫 리딩을 통해 주님께서 이루신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와, 그 질서 안에서 시작되는 변화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다음은 오늘 리딩 범위인 AC.469-495 요약입니다. 그전에 오늘부터는 그동안 창 각 장 앞뒤로 소개하던 ‘영계 체험’ 및 각 장이나 단락의 ‘개요’는 생략, 바로 각 장 본문으로 들어가기로 하였습니다만, 그러나 이 첫 요약에서만큼은 그 내용 역시 요약 버전으로 조금 언급하는 것이 그 연결성 면에서 적절할 것 같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AC.449-468을 리딩하시면 되겠습니다.

 

창세기 5장은 ‘아담 자손의 계보’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겉으로 보면 아담에서 노아까지 이어지는 사람들의 이름과 나이, 그리고 죽음이 반복되는 족보입니다. 그러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이 장을 단순히 오래전 사람들의 혈통을 기록한 족보로만 읽지 않습니다. 그 속뜻에서는 태고교회로부터 여러 교회가 어떻게 이어지고, 그 내적 상태가 어떻게 변화되어 마침내 노아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교회의 영적 역사’로 읽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5장 본문을 해설하기에 앞서, AC.449-459에서는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한 영계 경험을 먼저 소개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5장의 각 절을 직접 풀이하는 부분은 아니지만, 이어질 태고교회와 그 후대 교회들의 상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사람들은 흔히 천국을 세상에서 경험하는 가장 좋은 것들이 끝없이 계속되는 곳으로 생각합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 부족한 것 없이 풍요롭게 사는 것, 찬란한 빛 가운데 있는 것, 아무런 수고 없이 평안히 쉬는 것, 혹은 영원히 주님을 찬양하는 것 등을 천국의 행복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만난 영들은 그러한 생각만으로는 천국의 참된 기쁨을 알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먼저 어떤 ‘장소’가 아니라, 사람 안에 형성된 사랑과 체어리티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AC.450은 천국을 높은 곳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관념을 다룹니다. 세상에서는 높은 자리에 오르고 다른 사람보다 위에 서는 것이 행복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려는 욕망 자체가 천국의 질서와 반대됩니다. 천국의 기쁨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의 행복을 기뻐하고 그 행복을 위하여 섬기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체어리티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AC.452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천국에서 ‘큰 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을 높이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행복을 원하며 그들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다만 그 섬김 역시 자신이 인정받거나 보상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 자체에서 나와야 합니다. 여기서 천국의 기쁨이 무엇인지가 드러납니다. 천국의 기쁨은 자기 자신을 위한 만족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이웃을 향하여 흘러가는 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AC.454는 천사들의 삶을 ‘쓰임’과 연결합니다. 천사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영원히 평안만 누리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새로 영계에 들어온 영들을 가르치고, 사람들을 섬기며, 악한 영들의 영향을 억제하고, 사람들에게 선한 것을 불어넣으며, 이 세상을 떠난 영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일으키고, 준비된 영들을 천국으로 인도합니다. 천사들의 행복은 이러한 쓰임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쓰임 안에서, 쓰임으로부터, 그리고 쓰임에 따라 행복을 누립니다.

 

찬란한 빛을 보는 것만으로도 천국의 행복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놀라운 외적인 광경이라도 그것만 계속된다면 결국 익숙해집니다. 주님을 찬양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의 삶은 끝없이 입술로 찬양만 하는 삶이 아닙니다. 참된 찬양은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에서 나오는 결과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단지 입술의 찬양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사랑이 실제로 이웃을 향한 선과 쓰임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천국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양성이 있습니다. 모든 천사가 똑같이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수많은 천국 사회가 있고, 그 안에서도 각자의 사랑과 신앙에 따라 무수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모든 다양성은 하나를 이룹니다. 그 하나 됨의 근원은 ‘오직 주님’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서로 다른 존재들을 조화롭게 연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하나 됨은 모두가 똑같아지는 획일성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들이 주님 안에서 사랑으로 조화를 이루는 하나 됨입니다.

 

AC.459에서는 이러한 천국의 질서를 ‘천적’과 ‘영적’이라는 구분으로 마무리합니다. 천적인 존재는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신앙을 받으며, 영적인 존재는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받습니다. 이 차이는 이제 창세기 5장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5장의 출발점인 태고교회는 바로 ‘천적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먼저 사랑이 있었고, 그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나왔습니다. 진리를 먼저 배운 뒤 그것을 사랑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 안에서 무엇이 참인지 알았습니다.

 

이러한 배경 위에서 AC.460-468은 창세기 5장 전체의 지도를 먼저 보여 줍니다. 창세기 5장의 족보는 속뜻에서 태고교회로부터 홍수에 이르기까지 여러 교회가 차례로 이어지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사람’, 곧 아담은 천적 교회였던 태고교회 자체를 나타내고, 셋은 그 뒤를 잇는 두 번째 교회, 에노스에서 므두셀라까지는 그 뒤를 이어 나타나는 여러 교회를 나타냅니다. 라멕은 아홉 번째 교회이며, 노아는 열 번째 교회로서 홍수 이후의 새로운 교회로 이어지는 출발점이 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이름들을 속뜻에서 읽을 때 중요한 것은 각각의 인물을 단순히 개인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나타내는 ‘교회의 상태’를 보는 것입니다. 각 교회는 앞선 교회로부터 무엇인가를 이어받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았습니다. 특별히 그 차이는 ‘퍼셉션’의 차이에서 나타났습니다. 태고교회가 지녔던 퍼셉션이 후대의 교회들로 이어지면서 조금씩 달라지고 약해졌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에녹은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알아차리는 퍼셉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모든 것을 교리로 정리하여 배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퍼셉션이 점차 사라질 것을 대비하여, 태고교회에서 받은 계시와 퍼셉션을 교리의 형태로 모아 보존하는 일이 필요해졌습니다. 이것을 나타내는 교회가 에녹입니다. 당시에는 아직 그 교리가 크게 필요하지 않았지만, 훗날을 위하여 보존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는 말씀도 이러한 보존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마침내 노아에 이르게 됩니다. 태고교회의 고유한 퍼셉션은 거의 사라졌지만 모든 것이 완전히 없어져 버린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셨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5장의 마지막에서 노아로 이어지는 중요한 의미이며, 여기서 ‘리메인스’라는 주제가 나타납니다. 주님께서는 교회가 쇠퇴하는 가운데서도 다음 교회를 위하여 필요한 선과 진리를 남겨 두십니다. 한 사람의 거듭남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살아오면서 주님께 받은 선과 진리, 순진함과 체어리티의 상태들을 주님께서 보존하시고, 훗날 거듭남을 위하여 사용하십니다.

 

따라서 창세기 5장 전체에는 두 흐름이 함께 있습니다. 하나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점차 쇠퇴하는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그 쇠퇴 속에서도 주님께서 필요한 것을 보존하시며 다음 교회를 준비하시는 흐름입니다. 인간의 상태만 보면 점점 내려가는 역사처럼 보이지만, 주님의 섭리에서 보면 그 안에서도 끊임없이 보존과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실제 본문인 창세기 5장 1절에서 5절, AC.469-495로 들어갑니다. 첫 말씀은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입니다. AC.469는 여기서 ‘계보를 적은 책’이 태고교회에 속했던 교회들을 열거하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나오는 이름과 숫자를 단순한 족보의 정보로만 읽지 않고,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지는 교회의 여러 상태를 나타내는 말씀으로 읽게 됩니다.

 

이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라고 합니다. 여기서 ‘창조하다’와 ‘만들다’는 비슷해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AC.472에 따르면 ‘창조하다’는 사람이 새롭게 창조되어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 곧 거듭나는 것을 뜻합니다. 반면 ‘만들다’는 그 사람이 더욱 완전해져 천적인 사람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우리가 이미 살펴본 거듭남의 질서와 연결됩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완성된 천적 존재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면서 먼저 영적인 사람이 되게 하시고, 더 나아가 천적인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영적인 사람은 주님의 ‘형상’이고, 천적인 사람은 주님의 ‘모양’입니다. 형상에서 모양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더 많은 진리를 알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알고 믿는 진리가 사랑 안으로 들어가고, 마침내 사랑으로부터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에게는 아직 신앙이 먼저 보입니다. 진리를 배우고, 그것이 옳기 때문에 믿으며, 그 진리를 따라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천적인 사람에게서는 사랑이 먼저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이 참인지 알고, 그 사랑에서 신앙이 나옵니다. 이것이 태고교회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신앙과 사랑은 서로 떨어진 두 가지가 아니라, 사랑 안에 신앙이 살아 있는 하나의 생명이었습니다.

 

그래서 AC.473은 ‘하나님의 모양’을 천적인 사람과 연결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영적인 사람과 연결합니다. 형상은 모양으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에게 진리를 주시는 목적도 단지 많은 것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진리를 통하여 사람의 의지와 삶이 변화되고, 마침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 안에서 살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어 2절에서는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고 합니다. 여기서 ‘남자’와 ‘여자’ 역시 단순히 성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AC.475-476에 따르면 ‘남자’는 이해와 신앙을, ‘여자’는 의지와 사랑을 나타냅니다.

 

사람이 아직 영적인 상태에 있을 때에는 이해와 신앙이 앞서고 의지와 사랑이 뒤따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어 천적인 상태에 이르면 신앙과 사랑, 이해와 의지가 하나의 결혼을 이룹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다’고 합니다. 신앙만 따로 있어도 온전한 사람이 아니고, 사랑을 말하면서 진리를 떠나 있어도 온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와 선, 신앙과 사랑, 이해와 의지가 하나를 이룰 때 비로소 속뜻에서의 ‘사람’이 됩니다.

 

여기서 ‘사람’이라는 말은 매우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가장 높은 의미에서 오직 주님만이 참으로 ‘사람’이십니다. 교회가 ‘사람’이라 불릴 수 있는 것도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 주님의 모양과 형상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참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를 받아 그것들이 자기 안에서 하나를 이룰 때 참된 의미에서 사람이 되어 갑니다.

 

그러므로 ‘아담’이라는 이름 역시 이 속뜻에서는 한 남성 개인만을 가리키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AC.478-479는 ‘아담’이 ‘사람’을 뜻하며, 여기서는 특별히 태고교회를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다’는 표현 자체가 남자와 여자 모두를 함께 ‘사람’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본문의 중심이 한 개인의 전기가 아니라, 신앙과 사랑이 결합되어 하나를 이루었던 교회의 상태임을 보여 줍니다.

 

AC.480은 ‘그들이 창조되던 날’이라는 표현도 설명합니다. 여기서 ‘날’은 단순한 24시간의 하루가 아니라 하나의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창세기 1장의 여섯째 날 끝에서 사람은 ‘사람’이 되고, 이어지는 일곱째 날, 곧 안식일의 상태에서 천적인 사람이 됩니다. 결국 창세기 5장의 첫 두 절은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다루었던 거듭남의 전체 과정을 아주 압축된 형태로 다시 보여 주고 있는 셈입니다.

 

이제 3절에서 새로운 변화가 시작됩니다.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라고 합니다. 여기서 ‘백삼십 년’은 단순히 세속적인 시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교회가 일어나기까지의 하나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교회가 ‘셋’입니다.

 

셋 교회는 태고교회와 전혀 다른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AC.484는 셋 교회가 태고교회와 ‘매우 비슷했다’고 설명합니다. 신앙도 여전히 사랑과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아주 중요한 차이가 하나 나타납니다. ‘사랑이 그만큼 주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겉으로 보면 매우 작아 보입니다. 신앙과 사랑이 아직 분리된 것도 아니고, 사랑이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가장 본래적인 질서에서는 사랑이 모든 것의 중심이었고 신앙은 그 사랑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셋 교회에서도 둘은 여전히 결합되어 있지만, 사랑의 중심성이 이전과 완전히 같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교회의 상태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이 점은 창세기 4장에서 보았던 셋과도 구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름은 같지만 속뜻에서 언제나 같은 교회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AC.485는 창세기 5장의 셋 교회가 창세기 4장 25절의 셋과는 다른 교회라고 분명히 설명합니다. 같은 이름이 사용되더라도 문맥과 계열에 따라 서로 다른 교리와 교회의 상태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4절에서는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라고 합니다. 여기서부터 창세기 5장을 읽을 때 반복해서 만나게 될 중요한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바로 ‘날’, ‘해’,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입니다.

 

AC.482와 AC.486 이하에서는 이러한 ‘해’와 숫자들이 교회의 상태를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시간은 상태와 연결됩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몇 년 동안 지속되었는지를 생각하지만, 천사들은 말씀의 속뜻에서 그러한 시간보다 그 기간이 나타내는 영적 상태와 그 변화를 지각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5장의 긴 수명과 숫자들은 단순한 연대 계산을 넘어, 각 교회가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를 담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문자적 의미의 역사성을 단순히 지워 버린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가 여기서 집중하는 것은 말씀의 속뜻입니다. 속뜻에서 천사들은 세상의 시간과 숫자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들이 나타내는 상태를 지각합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이 장을 읽으면서 ‘몇 년을 살았는가?’만이 아니라 ‘그 숫자를 통하여 어떤 교회의 상태가 표현되고 있는가?’를 보게 됩니다.

 

‘아들들과 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AC.489-491에서 ‘아들들’은 진리를, ‘딸들’은 선을 나타냅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교회가 살아 있으면 그 안에서 무엇인가가 태어납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신앙과 사랑이 결합되어 있으면 그 결합으로부터 새로운 진리와 선이 생겨납니다.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그 진리가 삶에서 선한 행위와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영적인 의미에서 ‘아들들과 딸들을 낳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들과 딸들의 상태는 그들을 낳는 교회의 상태와 관계됩니다. 교회가 어떠한가에 따라 그 교회가 받아들이고 산출하는 진리와 선도 달라집니다. 사랑이 중심에 있는 교회가 받아들이는 진리와, 자기 자신이나 세상을 중심에 둔 교회가 받아들이는 진리는 겉으로 같은 말처럼 보여도 그 내적인 생명은 다를 수 있습니다. 진리의 생명은 그것이 어떤 사랑에서 나오는가와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개인의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같은 성경 말씀을 알고 같은 교리를 고백하더라도, 그것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려는 마음에서 받아들여지는지 아니면 자신을 높이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위하여 사용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열매를 낳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진리를 많이 가지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그 진리가 어떤 사랑과 결합되어 있으며 어떤 선을 낳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침내 5절은 ‘그는 죽었더라’는 말로 끝납니다. 창세기 5장에서는 앞으로 이 표현이 계속 반복됩니다. 문자적으로는 한 사람의 생애가 끝났다는 뜻이지만, AC.492 이하에서는 이것을 교회의 내적 상태와 관련하여 설명합니다. 여기서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태고교회가 가지고 있던 것과 같은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독특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퍼셉션’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머리가 좋아서 진리를 빨리 이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AC.495에 따르면 퍼셉션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참인지를 ‘주님으로부터’ 지각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주님을 향한 사랑의 선과 그분을 향한 신앙의 진리를 주님으로부터 내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가 어떤 문제를 놓고 먼저 교리를 찾아보고 논리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선과 진리를 지각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사랑과 신앙이 깊이 하나 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랑으로부터 무엇이 참인지 지각하는 내적인 능력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천적 교회의 고유한 퍼셉션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대를 거치면서 이러한 퍼셉션은 점차 쇠퇴합니다. AC.494는 그 배경에서 유전적인 악을 다룹니다. 인간의 실제적인 악이 계속되면서 그것이 후대에 영향을 미치고, 인간의 내적 상태는 점점 더 이전의 순수한 상태에서 멀어집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아담 한 사람의 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악해졌다’는 식으로만 이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이 실제로 선택하고 행하는 악이 쌓이고 이어지면서 유전적인 악의 경향도 더욱 강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AC.494는 여기서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유전적인 악이 있다고 해서 인간이 거듭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심으로 그 악을 억제하고 약화시키십니다. 사람 자신의 힘으로 악의 뿌리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보존하신 선과 진리를 통하여 그를 새롭게 하십니다. 이것은 앞서 창세기 5장 전체 개요에서 살펴본 ‘리메인스’와도 연결됩니다.

 

이렇게 보면 이번 주에 읽는 모든 내용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먼저 천국의 참된 기쁨은 자기 자신을 위한 행복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체어리티가 이웃을 위한 쓰임이 되는 데 있음을 보았습니다. 천국의 모든 다양성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서 하나를 이룹니다. 그리고 천적인 존재에게서는 바로 그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나옵니다.

 

그러한 천적 질서를 지상에서 가장 온전히 나타냈던 교회가 태고교회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영적으로 창조하시고, 더 나아가 천적인 사람으로 완성해 가십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에서 ‘하나님의 모양’으로 나아가며, 그 과정에서 신앙과 사랑, 이해와 의지가 하나를 이룹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함께 ‘사람’이라 부르셨습니다. 참된 사람은 진리만 가진 사람도 아니고 사랑만 말하는 사람도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진리와 선, 신앙과 사랑이 하나의 생명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결합으로부터 ‘아들들과 딸들’, 곧 진리와 선이 계속 태어납니다. 살아 있는 교회는 진리와 선을 낳습니다. 살아 있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믿는 것이 실제 사랑으로 이어지고, 그 사랑이 다시 삶의 선과 쓰임으로 나타날 때 신앙은 살아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창세기 5장 앞의 ‘천국의 기쁨은 쓰임에 있다’는 가르침과 오늘 본문의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는 말씀이 서로 만납니다.

 

그러나 동시에 변화도 시작됩니다. 셋 교회에서도 신앙과 사랑은 아직 결합되어 있지만 사랑의 중심성은 태고교회와 조금 달라집니다. 교회가 계속 이어지면서 상태가 변하고, 마침내 태고교회가 지녔던 고유한 퍼셉션도 점차 쇠퇴합니다. ‘그는 죽었더라’는 짧은 한마디 안에 한 사람의 죽음뿐 아니라, 한 교회의 고유한 내적 생명이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게 되는 깊은 변화가 담겨 있습니다.

 

그럼에도 창세기 5장의 이야기는 단순한 쇠퇴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회가 달라지고 퍼셉션이 사라져 가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는 필요한 것을 보존하십니다. 태고교회의 계시와 퍼셉션은 에녹을 통하여 교리로 보존되고, 마지막에는 노아라는 새로운 교회를 준비하십니다. 인간에게서 무엇인가가 사라질 때마다 주님의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붙드시고 그것을 통하여 다음 단계를 준비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읽으며 우리는 ‘나는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가?’만을 묻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내가 알고 믿는 진리는 어떤 사랑에서 나오고 있는가?’, ‘내 신앙과 사랑은 서로 결합되어 있는가?’, ‘내가 받은 진리는 실제 삶에서 선을 낳고 있는가?’, 그리고 ‘그 선은 이웃을 위한 쓰임으로 이어지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오늘날 우리에게 그대로 주어져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퍼셉션의 근원은 여전히 같습니다.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옵니다. 우리의 거듭남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신앙과 사랑을 하나 되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시며, 우리 안에서 진리와 선의 열매가 태어나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상태가 약해지고 이전에 가졌던 것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남겨 두신 것을 보존하시며 다시 거듭남의 길을 여십니다.

 

이것이 오늘 창세기 5장 첫 다섯 절을 통해 보게 되는 큰 그림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자신의 형상에서 모양으로 이끄십니다. 그 과정에서 신앙과 사랑을 하나 되게 하시고, 그 결합으로부터 진리와 선이 삶 가운데 태어나게 하십니다. 교회의 상태가 변하고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점차 쇠퇴하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는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시며 다음 교회를 준비하십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5장의 족보는 단지 ‘누가 누구를 낳고 몇 년을 살다가 죽었다’는 반복되는 기록이 아닙니다. 그 이름과 날과 해, 아들들과 딸들, 그리고 ‘죽었더라’는 말씀 속에는 사람과 교회의 내적 상태가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 그리고 그 모든 변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어떻게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며 구원의 역사를 계속 이어 가시는지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다시 주님을 바라봅니다. 우리의 신앙이 사랑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시고, 우리가 아는 진리가 삶의 선으로 이어지게 하시며, 그 선이 이웃을 위한 쓰임이 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 안의 좋은 것들이 약해지고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에도,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깊은 곳에서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며 다시 생명의 길을 준비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창세기 5장은 바로 그 주님의 오래 참고 보존하시며 이어 가시는 섭리 속에서 이제 첫걸음을 시작합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469, 창5:1, '계보의 책, 영적으로 창조되어 천적으로 된 태고교회'(AC.469-474)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This is the book of the births of man. In the day that God created man, in the likeness of God made he him. (창5:1) AC.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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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0, 창5:1, ‘이름들은 사람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들을 뜻한다’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0‘계보의 책’(book of the births)이 태고교회에 속했던 사람들을 열거한 것이라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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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1, 창5:1, ‘집과 가족과 민족으로 구별되어 살았던 이유’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1그들이 이처럼 따로 떨어져 살면서 오직 집과 가족과 민족으로 구별되어 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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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2, 창5:1, ‘창조함과 만드심,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2‘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날’(day in which God created man)이 그가 영적으로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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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3, 창5:1, ‘하나님의 형상에서 하나님의 모양으로’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3‘하나님의 모양’(likeness of God)이 천적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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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4, 창5:1,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나아간 태고교회’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4그러므로 여기서 다루는 주제는 태고교회의 출생 또는 번성(birth or propagation)이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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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5, 창5:2, ‘신앙과 사랑의 결혼을 이룬 교회’(AC.475-480)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and blessed them, and called their name man, in the day when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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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6, 창5:2, ‘남자와 여자에서 하나의 사람으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6‘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신앙과 사랑 사이의 결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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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7, 창5:2, ‘오직 주님만이 참된 사람이시며, 교회는 그분의 형상과 모양’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7‘사람’(man)이 태고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자주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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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8, 창5:2, ‘아담이라는 한 사람이 아니라 태고교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8그를 ‘아담’(Adam)이라 하는 이유는 히브리어 ‘아담’(Ad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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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9, 창5:2, ‘흙에서 취하여 거듭나고 참된 사람이 된 태고교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9말씀에서 ‘이름을 부르다’(calling a name) 또는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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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80, 창5:2, ‘여섯째 날의 끝과 안식일의 시작에 이른 사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80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사람’이라 일컬어졌다는 것은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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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3, AC.481, '태고교회와 닮은 새 교회 셋(Seth)'(AC.481-485)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And man lived a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into his likeness, after his image, and called his name Seth. (창5:3) AC.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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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3, AC.482, ‘해(years)와 연수(numbers of years)는 교회의 상태를 의미’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2이 장에 나오는 ‘해’(years)와 ‘연수’(numbers of years)가 속뜻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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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3, AC.483, ‘퍼셉션(perception)의 차이로 구별된 태고교회의 여러 교회’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3뒤이어 나오는 ‘셋’(Seth), ‘에노스’(Enosh), ‘게난’(Kenan), ‘마할랄렐’(Mahalalel),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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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3, AC.484, ‘사랑이 여전히 신앙과 결합되어 있었던 셋 교회’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4‘셋’(Seth)이라 하는 교회가 태고교회와 매우 비슷했다는 것은, 사람이 자기의 모양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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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3, AC.485, ‘창4의 셋과 창5의 셋은 서로 다른 교회’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5여기서 ‘셋’(Seth)이 앞에서 묘사된 교회(창4:25)와는 다른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AC.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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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86, '날들과 해들, 아들들과 딸들의 의미'(AC.486-491)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the days of man after he begat Seth were eight hundred years, and he begat sons and daughters. (창5:3) AC.486‘날들’(days)은 일반적인 시간과 상태를 의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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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87, ‘날들과 해들에 기록된 교회의 상태 변화’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7‘날들’(days)이 일반적인 시간과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1장에서 보여 주었습니다. 거기서 창조의 ‘날들’은 다른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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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88, ‘천사들에게 시간은 상태와 그 변화’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8‘날들’(days)이 일반적인 상태를, ‘해들’(years)이 특별한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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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89, ‘교회가 낳는 아들들과 딸들, 진리와 선’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9‘아들들과 딸들’(sons and daughters)이 그들이 퍼셉션한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하며, 특히 ‘아들들’(sons)은 진리들을,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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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90, ‘딸들이 의미하는 사랑과 신앙의 선’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90말씀에서 ‘딸들’(daughters)은 자주 선들을 의미합니다. 시편에서는, In the Word “daughters” frequently denote goods; as in David: 9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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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91, ‘교회의 어떠함에 따라 달라지는 아들들과 딸들’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91이 장에서 ‘아들들’(sons)과 ‘딸들’(daughters)(4, 7, 10, 13, 16, 19, 26, 30절)도 같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어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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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2, ‘사라진 퍼셉션을 의미하는 사람의 죽음’(AC.492-49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that man lived were nine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he died. (창5:5) AC.492여기서 ‘날들’(days)과 ‘해들’(years)은 위에서와 같이 시대들과 상태들을 의미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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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3, ‘시간과 척도를 넘어 상태를 나타내는 말씀의 숫자’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3‘날들’(days)과 ‘해들’(years)이 시대들과 상태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세상에서는 시간들과 척도들이 반드시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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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4, ‘퍼셉션의 죽음과 유전적 악의 누적’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4그가 ‘죽었다’(died)는 것이 그러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죽다’(die)라는 말의 의미에서 분명합니다.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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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5, ‘태고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열쇠, 퍼셉션’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5태고교회가 어떻게 쇠퇴하였는지는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을 가진 교회였으며, 오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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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아래는 오늘 범위 창5:1-5, AC.469-495 중 리딩 필독 3편 링크입니다. 혹시 몹시 바쁘신 분들은 꼭 이 3개 링크만이라도 읽으시기 바랍니다.

 

 

AC.473, 창5:1, ‘하나님의 형상에서 하나님의 모양으로’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3‘하나님의 모양’(likeness of God)이 천적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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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6, 창5:2, ‘남자와 여자에서 하나의 사람으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6‘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신앙과 사랑 사이의 결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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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5, ‘태고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열쇠, 퍼셉션’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5태고교회가 어떻게 쇠퇴하였는지는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을 가진 교회였으며, 오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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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이며, 다음은 다음 주 본문 소개입니다.

 

다음 주에는 창5:6-14, AC.496-509를 읽습니다. 셋에서 에노스로, 다시 에노스에서 게난으로 이어지는 족보를 통해, 이 이름들이 단순한 개인들이 아니라 태고교회 이후 차례로 이어진 서로 다른 교회들을 나타냄을 살펴보겠습니다. 특히 한 교회가 다음 교회로 이어지면서도 ‘본질적인 것들’은 점차 감소해 가는 모습과, 그럼에도 그 흐름을 끊지 않으시고 교회를 계속 이어 가시는 주님의 섭리를 살펴보겠습니다.

 

 

네, 이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10-11(D1)

 

2672, 1, 창5.1, 2026-10-11(D1)-주일예배(창5,1-5, AC.469-495), ‘하나님의 형상에서 모양으로, 그리고 시작된 변화’.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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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10/04, 창4:25-26, AC.434-442), ‘보존된 신앙에서 체어리티의 예배로’

※ 오늘(2026/10/04)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6, ‘은혜로신 하나님 우리 주 하나님’, 찬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 찬96, ‘예수님은 누구신가’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일곱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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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2026/10/04)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6, ‘은혜로신 하나님 우리 주 하나님’, 찬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 찬96, ‘예수님은 누구신가’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일곱 번째, 25절로 26절, 창4 마지막, AC 글 번호로는 434번에서 442번입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25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5-26)

 

제목은

 

보존된 신앙에서 체어리티의 예배로

 

 

이며, 다음은 ‘3분 요약’입니다. 새로 오신 분들, 그리고 그동안 함께해오신 분들 모두를 위한, 지난 2월부터 시작, 이 특별한 주일예배를 위한, 그 흐름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시간입니다.

 

오늘 리딩에 들어가기 전에 지금까지의 큰 흐름을 잠깐 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를 존중하면서,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따라 그 속뜻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창1에서는 천지창조를 거듭남의 과정으로, 창2에서는 에덴동산을 천적 상태로, 창3에서는 사람이 주님보다 자기 감각과 proprium을 따르면서 그 질서가 무너지는 과정으로 읽었습니다.

 

창4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읽고 있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뒤에도 주님께서는 ‘가인의 표’를 통해 신앙을 보존하셨습니다. 지난주에는 그 계열이 라멕에게 이르러 황폐해지는 한편, 바로 그 자리에서 새 교회의 질서가 준비되는 것을 읽었습니다.

 

오늘은 창4의 마지막 두 절, 셋과 에노스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 ‘다른 씨’인 셋을 주십니다. 셋은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을, 에노스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기는 교회’를 나타냅니다. 가인에게서 분리되었던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올바른 관계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인류 최초의 예배가 아니라, 새 교회에서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가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체어리티에서 나오지 않는 예배가 입술의 예배라면,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는 마음의 예배입니다.

 

오늘은 이것을 마음에 두고 읽겠습니다. ‘주님께서 보존하시는 것은 회복을 향합니다.’ 가인의 표로 보존된 신앙은 셋을 거쳐 에노스에 이르며 다시 체어리티와 결합되고, 마침내 마음에서 주님을 예배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오늘은 창4를 마무리하면서, 인간의 황폐보다 더 깊은 주님의 섭리와 회복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다음은 오늘 리딩 범위인 AC.434-442 요약입니다.

 

AC.434-442는 지난번 AC.405-433에서 가인으로부터 시작된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가 라멕에 이르러 신앙과 체어리티 모두의 소멸이라는 황폐에 이른 바로 다음부터 시작합니다. 지난 범위에서 우리는 그 황폐 가운데서도 아다와 씰라를 통하여 새 교회가 준비되고, 야발·유발·두발가인을 통하여 사랑의 거룩한 것과 선, 신앙의 영적인 것, 자연적 선과 진리가 다시 나타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창4의 마지막 두 절에서는 이 모든 흐름이 하나의 결론에 도달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벨 대신 ‘다른 씨’인 셋을 주시고, 셋에게서 에노스가 태어나며, 마침내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황폐로 끝날 것 같았던 창4가 체어리티의 회복과 참된 예배의 시작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AC.434에서 ‘사람과 그의 아내’는 앞에서 아다와 씰라로 나타냈던 새 교회를 뜻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태어난 ‘셋’은 ‘체어리티를 얻을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신앙’을 뜻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셋은 단순히 가인을 대신하는 또 하나의 신앙이 아닙니다. 가인이 나타낸 신앙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었지만, 셋이 나타내는 신앙은 체어리티로 이어지고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질 수 있게 하는 신앙입니다. 같은 신앙이라 하더라도 체어리티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냈고,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것을 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 ‘다른 씨’를 주십니다. 이것은 인간이 잃어버린 체어리티를 스스로 되살렸다는 뜻이 아니라, 가인에 의해 소멸되었던 체어리티가 다시 존재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셋은 바로 그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질 수 있는 통로가 되는 신앙입니다.

 

AC.435는 여기서 ‘사람과 그의 아내’를 왜 다시 아담과 하와 개인으로만 읽어서는 안 되는지를 설명합니다. 바로 다음 창5에서도 아담과 그의 아내와 셋이 다시 등장하지만, 스베덴보리는 동일한 인물과 사건이 반복된다고 해서 속뜻에서도 반드시 같은 교회와 같은 상태를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창1과 창2가 모두 인간의 창조를 다루면서도 각각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창조를 다루듯이, 창4:25과 창5:1-4 역시 문자적으로 비슷한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서로 다른 교회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말씀의 반복은 단순한 중복이 아니라 서로 다른 내적 상태를 드러내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4의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을 이해할 때에도 중요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서로 다른 두 혈통의 계보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속뜻에서는 그 족보를 그대로 교회사의 시간표처럼 옮겨 놓을 수 없습니다. 각 이름은 서로 다른 교리와 교회의 상태를 나타내며, 중요한 것은 누가 누구와 역사적으로 동시에 살았는가보다 그 이름들을 통해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창4의 속뜻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발생과 쇠퇴, 그 가운데서의 보존, 그리고 새로운 교회의 형성이라는 하나의 영적 흐름을 보여 줍니다.

 

이 전체 흐름을 가장 선명하게 정리해 주는 것이 AC.436입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무도 가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표’를 주셨습니다. 그 이유가 이번 범위에서 마침내 분명해집니다. 주님께서 가인의 신앙을 보존하신 것은 분리된 신앙 자체를 영구히 유지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장차 ‘체어리티가 그 신앙을 통해 주님에 의해 심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앞에서 오래 살펴보았던 ‘가인의 표’의 의미가 여기서 완성됩니다. 가인의 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승인하신 표시가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아직 남아 있는 신앙을 완전히 파괴되지 않게 보존하시고, 언젠가 바로 그것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시기 위한 섭리였습니다. 인간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했지만, 주님께서는 그 실패 속에서도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시고 그것을 새로운 시작의 통로로 사용하셨습니다.

 

그 사이 야발·유발·두발가인을 통하여 사랑의 거룩한 것과 선, 신앙의 영적인 것, 자연적 선과 진리가 차례로 준비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셋에 이르러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통로가 되는 신앙’이 나타납니다. AC.436은 창4의 마지막 두 절을 ‘이 모든 것의 결론, 따라서 그 요약’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므로 셋의 등장은 앞의 이야기를 지워 버리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가인 이후 창4 전체를 통해 이어져 온 주님의 보존과 회복의 섭리가 결실을 향해 나아가는 지점입니다.

 

AC.437은 이것을 창4:25의 ‘다른 씨’라는 표현으로 더욱 분명히 합니다. 말씀은 단순히 다시 ‘씨’를 주셨다고 하지 않고 ‘다른 씨’를 주셨다고 합니다. ‘씨’는 신앙을 뜻하며, ‘다른 씨’는 가인으로 나타났던 신앙과 다른 종류의 신앙, 곧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입니다. 가인의 신앙은 사랑에서 분리되어 체어리티를 죽였지만, 셋의 신앙은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질 수 있는 통로가 됩니다. 따라서 ‘다른’이라는 한 단어 안에 신앙의 질서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아벨과 셋의 관계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벨이 체어리티를 뜻한다면 ‘아벨 대신’ 주어진 셋 역시 체어리티를 뜻해야 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셋은 체어리티 자체가 아니라 체어리티가 다시 주어질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신앙입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에서 등장하는 에노스가 ‘신앙을 통해 심어진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아벨 대신 다른 씨를 주셨다’는 것은 체어리티를 곧바로 다른 체어리티로 바꾸셨다는 뜻이 아니라, 소멸된 체어리티를 다시 세우기 위한 새로운 질서를 주님께서 시작하셨다는 뜻입니다.

 

AC.438에서 마침내 에노스가 등장합니다. 셋이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이라면, 그의 아들 에노스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긴 교회’를 뜻합니다. 여기서 셋과 에노스의 차이가 중요합니다. 셋은 체어리티가 심어질 수 있는 신앙이고, 에노스는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실제로 교회의 중심에 자리 잡은 상태입니다. 가인에게서 뒤집혔던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가 이제 다시 바로잡히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때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람들이 처음으로 ‘여호와’라는 이름을 입으로 부르기 시작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주님께 드리는 예배를 뜻하며, 여기서는 특별히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를 뜻합니다. 따라서 셋에서 새로운 신앙이 나타나고, 에노스에서 체어리티가 신앙의 으뜸이 되며, 그 체어리티에서 마침내 참된 예배가 나옵니다. 신앙의 회복이 향하는 최종 목적이 어디인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AC.439는 에노스의 이름에 또 하나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밝힙니다. ‘에노스’ 역시 ‘사람’을 뜻하지만, 여기서의 사람은 천적 인간이 아니라 ‘영적 인간’입니다. 이것은 창2의 태고교회가 누렸던 최초의 천적 상태가 그대로 복원된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나오는 천적 질서였습니다. 그러나 그 질서가 무너지고 가인과 라멕을 거쳐 깊은 황폐에 이른 뒤, 주님께서는 보존된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십니다. 따라서 에노스에서 나타나는 회복은 과거로의 단순한 원상복귀가 아니라, 무너진 인간의 상태에 맞추어 주님께서 새롭게 일으키시는 회복입니다.

 

그러므로 셋에서 에노스로 이어지는 ‘신앙을 통한 체어리티’를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순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곧 ‘먼저 신앙을 얻고 그다음 체어리티를 얻는 것이 언제나 정상적인 영적 질서’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이미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생겨났고 체어리티가 소멸된 뒤, 주님께서 그 가운데 남아 있던 신앙을 보존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특별한 회복의 과정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AC.440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라는 표현을 더욱 깊이 설명합니다. 이것은 말씀에서 주님께 드리는 모든 예배를 나타내는 일반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모든 외적인 예배가 참된 예배인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매우 분명하게 ‘주님은 체어리티가 아니고서는 예배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체어리티에 속하지 않은 신앙에서 나오는 예배는 ‘입술의 것’일 뿐 ‘마음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된 예배를 결정하는 것은 예배의 외적인 형식만이 아니라 그 예배가 어떠한 내적 사랑에서 나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씀들과 이사야의 번제·제물·유향에 관한 말씀이 인용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단지 한 가지 기도 행위가 아니라 주님께 드리는 예배 전반을 포괄합니다. 그러나 제단과 제물과 향이 있어도 체어리티가 없다면 참된 예배가 되지 못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가 신앙의 으뜸이 될 때 그 마음에서 나오는 기도와 찬송과 예배가 참된 예배가 됩니다. 참된 예배는 입술에서 시작하여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있는 마음에서 나와 입술과 삶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AC.441은 그렇다면 왜 말씀에서 ‘그때에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이것은 그때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예배가 생겼다는 뜻이 아닙니다. 태고교회는 이미 주님을 경배했고, 아벨 역시 양 떼의 첫 새끼를 제물로 드렸습니다. 여기서 ‘비로소’ 시작된 것은 예배 자체가 아니라 ‘새 교회의 예배’입니다. 가인과 라멕으로 나타나는 이전 교회가 소멸된 뒤, 셋과 에노스로 나타나는 새 교회가 형성되었고 이제 그 새 교회에서 체어리티로부터 나오는 예배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창4의 마지막은 매우 놀라운 반전을 보여 줍니다. 가인으로 시작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아벨이 나타내는 체어리티를 소멸시켰고, 라멕에 이르러서는 보존되어 있던 신앙마저 황폐해졌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실패가 창4의 마지막 말은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시고, 새로운 신앙인 셋을 주시며,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시고, 에노스로 나타나는 새 교회를 일으키십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서 다시 체어리티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일이 시작됩니다. 이전 교회의 죽음 뒤에 주님께서 새로운 교회와 새로운 예배를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AC.442는 창4 전체를 뒤돌아보며 태고 시대에도 교회에서 분리된 많은 교리와 이단들이 있었고, 각각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창4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름들은 단순한 개인들의 계보만이 아니라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서로 다른 교리와 교회 상태들을 나타냅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그 분리된 교리와 이단들이 오늘날의 어떤 것보다도 ‘훨씬 더 깊은 사고’에서 나왔다는 설명입니다. 깊이 생각한다고 해서 반드시 참된 것은 아니며, 정교한 교리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살아 있는 교회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창4 전체의 핵심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이 너무 단순하거나 지식이 부족했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깊은 사고와 정교한 교리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교회의 생명을 잃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셋과 에노스에서 다시 제시되는 길은 단순히 더 많은 진리를 알고 더 깊은 교리를 갖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다시 체어리티를 향하고 체어리티가 신앙의 으뜸이 되며, 그 체어리티에서 주님께 대한 예배가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AC.434-442를 창4 전체와 함께 놓고 보면 매우 긴 하나의 흐름이 완성됩니다. ‘가인의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 아벨인 체어리티의 소멸 → 가인의 표를 통한 신앙의 보존 → 보존된 신앙을 통한 새 교회의 준비 → 라멕에서 이전 교회의 황폐 → 셋이라는 다른 씨, 곧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 → 에노스, 곧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기는 새 교회 →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여호와께 대한 참된 예배’입니다. 창4의 처음에 무너졌던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마지막 두 절에서 주님의 섭리 가운데 새로운 형태로 다시 세워지는 것입니다.

 

특히 이번 범위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가인의 표’를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그때에는 왜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죽인 가인을 보호하시며 신앙을 보존하시는지가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AC.436에 이르면 그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주님께서는 그 신앙 자체를 최종적인 것으로 인정하신 것이 아니라, 언젠가 그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시기 위해 보존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표’에서 시작된 주님의 섭리는 셋에서 새로운 신앙으로 나타나고, 에노스에서 체어리티로 결실하며, 마침내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로 완성됩니다.

 

이것은 AC를 읽는 우리에게도 매우 직접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말씀의 속뜻을 배우고, 상응을 알고, 수많은 아르카나를 알아 갑니다. 그러나 AC.442가 보여 주듯 깊은 사고 자체가 참된 신앙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는 진리가 무엇과 결합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진리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자기 지식과 자기 확신을 세우는 데 쓰인다면 가인의 길이 다시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우리를 주님께로 이끌고, 이웃을 사랑하게 하며,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삼게 한다면 셋과 에노스의 질서가 우리 안에서도 시작될 수 있습니다.

 

결국 AC.434-442의 중심에는 인간의 회복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인간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고, 보존된 신앙마저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이 무너뜨린 것 가운데서도 남은 것을 보존하시고, ‘다른 씨’를 주시며, 그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시고, 마침내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가 가능하도록 새 교회를 일으키십니다. 인간의 실패보다 주님의 섭리가 더 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4의 마지막 메시지는 단순히 ‘셋이 태어났다’거나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아무리 깊은 황폐에 이르더라도 주님께서는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시며, 마침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예배로 이끄신다는 데 있습니다. ‘보존된 신앙 →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 → 체어리티를 으뜸으로 여기는 새 교회 →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참된 예배’, 바로 이것이 가인과 아벨로 시작된 창4의 긴 이야기가 셋과 에노스에서 도달하는 결론입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434, 창4:25, ‘셋은 왜 새로운 신앙을 의미하는가?’ (AC.434-437)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homo]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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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5, 창4:25, ‘같은 사람과 아내가 다시 나오는데 왜 다른 교회를 의미하는가?’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5여기서 ‘사람’(man)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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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6, 창4:25, ‘가인에서 셋과 에노스까지, 신앙과 체어리티는 어떻게 다시 이어지는가?’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6그 여자의 ‘아들’(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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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7, 창4:25, ‘다른 씨는 왜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을 의미하는가?’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7여기서 ‘셋’(Seth)이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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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8, 창4:26, ‘에노스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긴 교회를 의미한다’ (AC.438-442)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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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9, 창4:26, ‘에노스는 왜 천적 인간이 아닌 영적 인간을 의미하는가?’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39‘셋’(Seth)이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을 뜻한다는 것은 앞 절에서 설명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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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0, 창4:26, ‘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를 의미하는가?’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40방금 인용한 말씀이 그 교회의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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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1, 창4:26,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은 새 교회의 예배가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41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이때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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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2, 창4:26, ‘태고 시대에도 교회에서 분리된 많은 교리와 이단이 있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42앞에서 설명한 이 장의 내용으로부터, 태고 시대에도 교회에서 분리된 많은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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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아래는 창4 뒤에 이어지는 영계 경험입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 그리고 지금까지 AC를 계속해서 연속으로 읽어오신 분들을 위해 링크를 제공합니다.

 

 

AC.443, 창4 뒤, ‘육체의 생명이 사라지면 영의 삶도 희미해질 것이라는 생각’ (AC.443-448)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Some Examples Drawn from Experience with Spirits Concerning What They Had Thought during Their Life in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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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4, 창4 뒤, ‘영은 단지 생각일 뿐이며 아무런 형체도 없는가?’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4이 세상에 살 때 영은 아무런 연장(extension)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믿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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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5, 창4 뒤, ‘영혼을 추상적 생각으로만 여길 때 생기는 문제’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5더 나아가 이런 말도 했습니다. 학자들은 죽은 뒤에도 살아갈 영혼, 곧 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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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6, 창4 뒤,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영의 실재를 부정하는 오류’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6나는 오늘날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견해, 곧 영은 눈으로 볼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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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7, 창4 뒤, ‘감각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 사람 안의 영이다’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7어떤 초보 영(novitiate spirit)이 내가 영에 관해 말하는 것을 듣고는 자신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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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8, 창4 뒤, ‘육체의 삶보다 더 밝고 분명하게 이어지는 사후의 삶’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8나는 이 세상에서 알고 지냈던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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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공지입니다. 오늘로 창4 AC 리딩을 마칩니다. 다음 주 창5부터는 각 장 앞뒤의 영계 경험 및 장 또는 단락 개요는 전체 AC 원고에는 그대로 유지하되, 주일예배 AC 리딩 본문으로는 빼겠습니다. 장 또는 단락이 바뀔 때 바로 1절이나 해당 절로 들어간다는 말씀입니다. 전체 개요가 필요하시거나 AC 연속 리딩 중이신 분들은 교회 블로그(https://bygrace.kr/)를 방문하시면 되겠습니다.

 

한 가지 더, 오늘부터는 그 주 리딩을 마치기 전, 그 다음 주 리딩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드리겠습니다. 아래처럼 말입니다.

 

다음 주부터 창5를 시작합니다. 창5의 족보는 단순히 아담의 후손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로부터 여러 교회가 어떻게 이어지고 변화되어 갔는지를 보여 줍니다. 첫 시간에는 창5:1-5, AC.469-495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에서 ‘하나님의 모양’으로 나아가는 거듭남, 신앙과 사랑의 결합, 그리고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후대의 교회들 가운데 어떻게 변화되고 보존되어 갔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네, 이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다음은 성찬입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10-04(D1)

 

2671, 8, 창4.8, 2026-10-04(D1)-주일예배(창4,25-26, AC.434-442, 성찬), ‘보존된 신앙에서 체어리티의 예배로’.pdf
0.69MB
성찬.pdf
0.12MB

 

 

 

주일예배(2026/10/11, 창5:1-5, AC.469-495), ‘하나님의 형상에서 모양으로, 그리고 시작된 변화’

※ 오늘(2026/10/11)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7, ‘사랑의 하나님’, 찬130, ‘찬란한 주의 영광은’입니다. 오늘은 창5 절별 주석 그 첫 번째, 1절로 5절, AC 글 번호로는 469번에서 495번입니다.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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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9/27, 창4:19-24, AC.405-433), ‘황폐의 끝에서 다시 시작되는 새 교회’

※ 오늘(2026/09/27)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5, ‘하나님의 크신 사랑’, 찬95,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여섯 번째, 19절로 24절, AC 글 번호로는 405번에서 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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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6 심화

1. ‘비손은 지성을 뜻하는데 왜 첫째 강은 의지에 관계한다고 하는가?’

 

AC.110에서는 첫째 강 ‘비손’을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AC.116에 이르면 마음은 의지와 이해로 이루어져 있으며 ‘첫째 강에 관하여 말한 것은 의지에 관계하고, 이 둘째 강에 관하여 말한 것은 이해에 관계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의문이 생깁니다. 지성은 일반적으로 이해와 관계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왜 비손은 지성을 뜻하면서도 의지에 관계한다고 하는 것일까요? 얼핏 보면 AC.110과 AC.116의 설명이 서로 어긋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먼저 AC.110이 비손을 단순히 ‘지성’이라고 하지 않았다는 점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확한 표현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입니다. 여기서 지성이라는 한 단어만 떼어 내어 곧바로 이해에 배정하면, 스베덴보리가 앞에서부터 설명해 온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를 놓치게 됩니다. 비손의 지성은 사랑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지성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에 속한 지성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천적 인간을 설명한 내용과 그대로 연결됩니다. AC.99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며,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신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에게 지성과 신앙이 있다고 해서 그것들이 사랑과 별개의 근원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주된 것이고, 신앙과 지성은 그 사랑에서 생명을 받습니다. 비손이 ‘지성’을 뜻하면서도 첫째 강에 관한 것이 의지에 관계한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천적 인간의 질서 안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AC.110-115의 흐름도 이 점을 더욱 분명하게 해 줍니다. 금은 사랑의 선을 뜻하고, 보석들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에 속한 것들을 표상합니다. 그리고 AC.115에서는 아론의 에봇에 있는 호마노가 금테로 둘러싸여 있는 것에서 ‘사랑의 선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흘러들어야 한다’는 것을 퍼셉션한다고 했습니다. 즉 첫째 강을 설명하는 전체 문맥의 중심에는 사랑의 선이 있으며, 신앙의 진리는 그 사랑의 선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의 유입을 받습니다. 따라서 비손이 나타내는 지성도 그 근원을 사랑의 선에 두고 있습니다.

 

반면 둘째 강 기혼에 이르면 강조점이 달라집니다. AC.116은 기혼을 ‘선과 진리, 또는 사랑과 신앙에 속한 모든 것에 관한 앎’이라고 설명한 뒤, 이러한 앎들은 이해에 속한다고 직접 말합니다. 여기서는 선과 진리에 관한 것들을 알고 이해하는 능력 자체가 전면에 나옵니다. 그래서 둘째 강에 관한 것은 이해에 관계합니다. 첫째 강과 둘째 강의 차이는 단순히 ‘첫째는 감정이고 둘째는 지성’이라는 식의 구분이 아니라, 하나의 마음 안에서 의지와 이해가 각각 어떤 방식으로 사랑과 신앙의 생명을 받아 나타내는가 하는 차이로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렇게 보면 AC.111의 설명도 중요해집니다. 의지와 이해는 ‘하나의 마음’을 이루지만 서로 같은 것이 아니라 ‘참으로 가장 뚜렷하게 구별’됩니다. 따라서 첫째 강이 의지에 관계하고 둘째 강이 이해에 관계한다고 해서 둘 사이에 아무런 연결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의 마음 안에서 서로 구별되면서 결합되어 있습니다. 첫째 강에서 설명되는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 그리고 둘째 강에서 설명되는 선과 진리에 관한 앎은 서로 단절된 두 영역이 아니라 하나의 천적 인간 안에서 질서 있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의지에 관계한다’는 말을 ‘비손 자체가 곧 의지이다’라고 바꾸어 읽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AC.116의 표현은 첫째 강에 관하여 말한 것이 의지에 ‘관계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둘째 강에 관한 것이 이해에 관계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비손이라는 상응의 의미를 AC.110에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이라고 해 놓고 AC.116에서 그것을 ‘의지’로 변경한 것이 아닙니다. 첫째 강을 둘러싼 전체 설명이 마음의 두 능력 가운데 어느 쪽에 관계하는지를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인정하면 두 번호 사이의 겉보기 모순은 상당 부분 풀립니다.

 

그리고 이 모든 질서의 근원에는 다시 주님이 계십니다. 천적 인간에게 사랑이 주된 것이라고 해서 그 사랑의 근원이 인간의 의지 자체라는 뜻은 아닙니다. 앞의 AC.105는 모든 사랑과 신앙과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나온다고 했고, AC.112는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 역시 결국 모두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그러므로 첫째 강이 의지에 관계하고 둘째 강이 이해에 관계한다는 것은 인간 안에 서로 독립된 두 생명의 근원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에덴에서 하나의 강이 흘러나온 뒤 여러 강으로 갈라지는 것처럼, 하나의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인간 안에서 서로 구별되는 의지와 이해의 질서 안에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손은 지성을 뜻하는데 왜 의지에 관계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핵심은 비손의 ‘지성’만을 떼어 보지 않는 데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이며,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고 신앙과 지성이 그 사랑에서 생명을 받습니다. 그래서 첫째 강에 관한 전체 설명은 의지에 관계할 수 있습니다. 반면 기혼은 선과 진리에 관한 앎들을 나타내며, 그 앎들은 이해에 속하므로 둘째 강은 이해에 관계합니다. 이렇게 읽을 때 AC.110과 AC.116은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마음 안에서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가 서로 구별되면서도 하나의 생명 질서를 이루는 모습을 서로 다른 측면에서 보여 줍니다. (AC.116 심화 1)

 

 

 

AC.116, 창2:13, ‘기혼은 선과 진리에 속한 모든 것에 관한 앎을 뜻함’ (AC.116-117)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And the name of the second river is Gihon; the same is it that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Cush. (창2:13) AC.116‘둘째 강’(second river), 곧 ‘기혼’(Gihon)은 선과 진리,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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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1 심화

1.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무엇이며, 왜 거기서 지혜와 지성이 나오는가?’

 

AC.111에서 스베덴보리는 오늘날에는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 무엇인지,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지혜와 지성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까지 말합니다. 처음 읽는 독자에게도 이 표현은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통 어떤 진리를 먼저 배우고 그것을 믿은 뒤, 그 믿음에 따라 사랑하고 살아가는 순서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오히려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고, 거기서 다시 지혜와 지성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사랑에서 신앙과 지혜와 지성이 나올 수 있는 것일까요?

 

먼저 이것은 창2에서 지금까지 설명해 온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며,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신다고 했습니다(AC.99). 또 생명나무를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이라고 했으며(AC.102), 그 생명나무는 궁극적으로 ‘주님의 자비’를 뜻한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랑과 신앙, 따라서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AC.105). 그러므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라는 표현은 AC.111에서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개념이 아니라, 창2의 천적 인간을 설명해 온 중심 질서입니다.

 

여기서 ‘사랑이 먼저’라는 것은 사람이 먼저 어떤 감정적인 사랑을 만들어 낸 다음 거기서 교리나 신앙을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사랑 자체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가 받아들여지며, 그 사랑에서 신앙이 나옵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에게 신앙은 사랑과 분리된 채 머리 안에 먼저 자리 잡고 있다가 나중에 사랑과 결합하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처음부터 사랑의 생명 안에서 나오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라고 거듭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놓치면 AC.111에서 왜 기억지식을 지성과 지혜와 신앙이라고 부르는 겉 사람을 문제 삼는지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많은 사실을 알고 교리를 정확히 기억하며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여기서 말하는 지혜와 지성은 아닙니다. 기억지식은 필요하고 유용하지만, 그것 자체가 영적인 생명의 근원은 아닙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천적 인간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도 주님의 유입을 받습니다(AC.99). 그러므로 문제는 기억지식의 존재가 아니라 생명의 방향입니다. 기억지식에서 출발하여 신앙과 사랑을 만들어 내는가, 아니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생명이 신앙과 지혜와 지성 안으로 흘러드는가 하는 차이입니다.

 

AC.112는 이 질서를 더욱 간결하게 정리합니다. ‘사랑에서 나오지 않는 지혜는 없으며,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지혜는 없다.’ 그리고 ‘신앙에서 나오지 않는 지성도 없으며,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지성도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지혜와 지성의 차이를 지나치게 공식화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스베덴보리가 그것들을 단순한 지적 능력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혜에는 사랑의 생명이 있고, 지성에는 신앙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신앙의 근원이 주님이시므로 참된 지혜와 지성의 근원 역시 주님이십니다.

 

이렇게 보면 AC.110에서 비손을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이라고 한 말도 조금 더 선명해집니다. 에덴은 사랑이고, 에덴에서 강이 흘러나오며, 그 강은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입니다(AC.107). 그 강이 동산을 적셔 지성을 주고, 이제 첫째 강 비손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서로 무관한 상응들을 차례로 늘어놓은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서 지혜가 나오고,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며, 그 신앙에 지성이 있는 하나의 생명의 흐름을 여러 이미지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AC.113-115에서 금과 보석을 설명하는 것도 같은 질서 안에 있습니다. 금은 지혜 또는 사랑의 선을 뜻하고, 보석들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에 속한 것들을 표상합니다. 특히 AC.115에서는 호마노를 둘러싼 금테에서 ‘사랑의 선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흘러들어야 한다’는 것을 퍼셉션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랑과 신앙이 단순히 나란히 놓여 있다는 것보다 더 깊은 관계를 보여 줍니다. 사랑의 선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흘러들어 그것을 살아 있게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진리는 사랑과 분리되어 홀로 생명을 가진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진리입니다.

 

여기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단순히 ‘사랑이 중요하고 신앙은 덜 중요하다’는 말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AC.111은 의지와 이해가 하나의 마음을 이루면서도 ‘참으로 가장 뚜렷하게 구별된다’고 했고, 천국 전체도 무수히 많은 사랑과 신앙의 차이에 따라 주님께서 가장 뚜렷하게 질서 지으신다고 했습니다. 사랑이 주된 것이라고 해서 신앙의 고유한 성질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과 신앙이 각각의 고유한 자리를 가지면서도 올바른 질서 안에서 하나를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신앙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어디에서 생명을 얻는지를 밝혀 줍니다.

 

그러므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라는 표현의 가장 깊은 초점은 결국 인간이 아니라 주님께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안에서 사랑을 만들어 내고, 그 사랑으로 신앙을 만들고, 다시 그 신앙으로 지혜와 지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AC.112가 계속해서 ‘따라서 주님으로부터’라고 반복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이 오고, 그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며, 거기서 지혜와 지성이 생명을 얻습니다. 에덴에서 강이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는 창2의 모습은 바로 이 생명의 질서를 그리고 있습니다. 천적 인간의 지혜와 지성이 살아 있는 까닭은 그가 자기 안에 특별한 영적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생명의 근원이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110-115를 읽으며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비손이나 하윌라, 금과 호마노의 개별 상응을 외우는 일이 아닙니다. 그 모든 상응을 하나로 연결하는 생명의 방향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이 오고,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며, 그 사랑과 신앙에서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가 생명을 얻습니다.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바로 이 질서의 중심에 있는 표현입니다. 이것을 이해할 때 비손은 더 이상 낯선 고대의 강 이름에 머물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생명이 신앙과 지성 안으로 흘러들어 사람을 살아 있게 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말씀이 됩니다. (AC.111 심화 1)

 

 

 

AC.111, 창2:11-12,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과 그 지혜와 지성을 오늘날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1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속뜻에 있는 그대로 설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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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5 심화

1.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고 단지 탐욕만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105에서 가장 강하게 들리는 문장은 아마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으며 단지 탐욕만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만 읽으면 인간에게는 의지 자체가 없으며, 우리가 무엇인가를 원하고 선택하고 결심하는 것은 모두 탐욕일 뿐이라는 뜻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와 책임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또한 거듭난 사람이 선을 원하고 행하는 것조차 실제로는 그의 의지가 아니라는 뜻일까요?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먼저 AC.105에서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설명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주제는 인간에게 선택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생명나무’가 왜 동산 ‘가운데’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동산 가운데’를 속 사람의 의지라고 설명하고, 말씀에서는 이 의지를 ‘마음’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무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을 행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의지 또는 마음은 사람에게 속한 것으로 말해지기는 하지만 실제 생명의 근원으로서 사람 자신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의지’는 단순히 일상적인 선택이나 결심의 능력만을 가리키는 말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문맥의 초점은 선을 사랑하고 원하는 생명의 중심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선한 의지의 생명이 인간 자신에게서 발생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반대로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을 자기 의지라고 부를 때, AC.105는 그것을 ‘탐욕’이라고 부릅니다. 매우 강한 표현이지만, 그 목적은 선의 근원을 인간 자신에게 돌리지 못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 구별을 놓치면 두 가지 반대 방향의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에게는 아무런 의지도 없으므로 인간은 아무것도 선택하거나 행하지 않는다’는 식의 수동적인 이해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선을 원했으므로 그 선은 나에게서 나왔다’는 자기 공로의 이해입니다. AC.105의 논지는 어느 쪽도 아닙니다. 이 번호가 직접 강조하는 것은 사람이 선을 행하더라도 그 선의 생명과 근원은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생명나무’가 중요해집니다. AC.105는 생명나무를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이라고 한 뒤, 마지막에는 그것을 ‘주님의 자비’라고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모든 사랑과 신앙이 나오고, 따라서 모든 생명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다’는 강한 표현만 따로 떼어 놓으면 인간에 대한 부정적인 선언처럼 보이지만, 전체 문맥에서 보면 강조점은 인간의 무가치함보다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께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105가 보여 주는 주님의 모습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은 인간에게 ‘네 안에서 선한 의지를 만들어 내어 그것으로 내게 오라’고 요구하시는 분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하고 믿고 선을 원할 수 있게 하는 생명 자체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인간이 생명을 만들어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생명을 주시기 때문에 인간이 사랑하고 믿고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의 중심에 있는 ‘생명나무’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일까요? AC.105 하나만으로 인간의 자유와 의지에 관한 스베덴보리의 전체 가르침을 완성해서는 안 됩니다. 이 번호가 직접 다루는 범위에서는 인간의 모든 선택과 책임의 구조를 설명하기보다, 참된 선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히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적어도 분명히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선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고백과 ‘그러므로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결론은 같은 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결국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으며 단지 탐욕만 있다’는 말을 이해하는 열쇠는 그 바로 뒤에 있습니다. ‘생명나무는 주님의 자비이며, 주님으로부터 모든 사랑과 신앙이 나오고, 따라서 모든 생명이 나온다.’ 스베덴보리가 인간에게서 선의 독립적인 근원을 거두어 가는 까닭은 인간을 생명 없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생명의 참된 근원을 주님께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에덴동산 한가운데 생명나무가 있다는 것은 인간의 가장 깊은 생명의 중심에 자기 자신이 아니라 모든 사랑과 신앙과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자비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AC.105 심화 1)

 

 

 

AC.105, 창2:9, ‘동산 가운데의 생명나무, 의지의 중심에 있는 주님의 자비’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5‘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사랑과 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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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3 심화

1. 상응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은가? ‘술어의 성질은 주제의 성질에 달려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AC.103에서 스베덴보리는 ‘나무들’이 퍼셉션을 뜻하는 이유가 여기서 천적 인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영적 인간을 주제로 할 때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술어의 성질은 주제의 성질에 달려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상응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은 것일까요? ‘나무는 이것을 뜻하고 물은 저것을 뜻한다’는 식으로 상응을 이해해 왔다면 이 문장은 다소 혼란스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먼저 AC.103은 상응이 아무 의미로나 자유롭게 바뀐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말씀의 속뜻에는 일정한 질서가 없고 해석하는 사람이 문맥에 따라 마음대로 뜻을 정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그런 자의적인 해석이 아니라, 어떤 자연적 대상이 영적인 것을 나타낼 때 그 의미의 구체적인 성질이 지금 말씀에서 다루는 ‘주제’에 의해 정해진다는 것입니다.

 

창2:9의 경우가 좋은 예입니다. 여기서는 천적 인간을 다루고 있으며, 천적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하여 생명을 받고 그것을 퍼셉션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에덴동산에서 자라는 ‘나무들’ 역시 그 생명의 질서 안에서 퍼셉션과 관계됩니다. ‘나무’라는 단어만 따로 떼어 놓고 사전에서 뜻을 찾듯 ‘퍼셉션’이라는 의미를 붙인 것이 아니라, 천적 인간이라는 주제와 에덴동산 전체의 문맥 안에서 그 의미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술어의 성질은 주제의 성질에 달려 있다’는 말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해 ‘밝다’고 말할 때 그 사람이 있는 방의 조명을 말할 수도 있고, 그의 표정을 말할 수도 있으며, 그의 이해력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밝다’라는 말이 아무 뜻으로나 변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가에 따라 그 구체적인 의미가 정해지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AC.103의 상응 원리를 완전히 설명하는 예는 아니지만, ‘주제’와 ‘술어’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됩니다.

 

따라서 상응을 공부하면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 가운데 하나는 상응을 고정된 암호표로 만드는 일입니다. ‘나무 = 퍼셉션’이라는 대응 하나를 알았다고 해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나무에 곧바로 퍼셉션을 대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그 본문에서 무엇을 다루는지, 그 대상이 어떤 관계 안에 놓여 있는지, 앞뒤의 말씀과 어떤 질서를 이루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AC.103은 바로 이 점을 짧지만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이 원리는 상응을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을 허용하기는커녕 오히려 제한합니다. 상응의 뜻을 아는 사람이 자기 지식으로 말씀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주제와 문맥이 그 상응의 성질을 결정하도록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상응에 관한 지식이 많아질수록 말씀을 더 쉽게 ‘풀어 버릴’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말씀이 실제로 무엇을 다루고 있는지 더욱 세심하게 살펴야 합니다.

 

이것은 말씀 앞에서 인간의 이해가 어떤 자리에 있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상응은 우리가 말씀을 장악하기 위한 해독 도구가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질서와 연결을 더 깊이 보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AC.103의 이 짧은 원리는 앞으로 AC를 읽는 동안 계속 기억할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의 상응을 발견했을 때 곧바로 그것을 공식화하기보다 ‘지금 이 말씀은 무엇을 다루고 있는가?’를 먼저 묻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상응은 인간이 말씀 위에 세운 공식이 아니라, 말씀 자체가 그 속뜻을 열어 보여 주는 질서 안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AC.103 심화 1)

 

 

 

AC.103, 창2:9, ‘나무가 퍼셉션을 뜻하는 것은 여기서 천적 인간을 다루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3여기서 ‘나무들’(trees)이 퍼셉션을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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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2 심화

1.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을 뜻하는가?

 

AC.102에서 스베덴보리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감각적인 것에서 나오는 신앙, 곧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이라고 설명합니다. 처음 읽으면 상당히 낯선 해석입니다. 성경 본문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되어 있는데, 왜 이것을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비롯되는 ‘신앙’의 문제로 해석하는 것일까요? 더구나 이렇게 읽으면 감각이나 지식 자체가 위험하거나 악하다는 뜻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문맥은 그렇게 읽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AC.99에서는 주님께서 천적 인간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신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감각과 기억지식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그것들이 생명의 질서 안에서 어디에 놓이며, 무엇이 무엇의 근원이 되느냐가 문제입니다.

 

이 점에서 AC.102의 두 나무를 함께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생명나무’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뜻합니다. 여기서는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이 거기서 나옵니다. 그리고 AC.105에 이르면 이 생명나무를 ‘주님의 자비’라고까지 설명합니다. 모든 사랑과 신앙과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생명나무가 나타내는 질서에서는 신앙의 생명과 근원이 인간의 감각이나 지식이 아니라 주님께 있습니다.

 

반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신앙이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옵니다’. 이 차이가 핵심입니다. 사람이 보고 듣고 배우고 기억한 것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들을 출발점으로 삼아 신앙의 진실 여부를 스스로 세우려는 질서가 문제로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가?’, ‘내가 가진 지식으로 납득할 수 있는가?’가 신앙의 근원을 결정하는 자리에 놓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그러므로 생각하지 말라’, ‘이성을 사용하지 말라’, ‘증거를 살피지 말라’는 뜻으로 확대해서도 안 됩니다. AC.102-106은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은 계속 인간 안에 있으며 주님의 유입을 받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섬기는 자리에 있는가, 아니면 그것들 자체가 참과 선을 판정하는 궁극적인 근원이 되는가 하는 질서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이 해석은 반지성주의라기보다 신앙의 생명이 어디에서 시작되는가에 관한 설명으로 읽는 것이 적절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스베덴보리가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서로 다른 신앙의 질서와 연결하는지 조금씩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고 그 사랑과 신앙의 근원이 주님께 있는 질서이며, 다른 하나는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신앙을 끌어내는 질서입니다. 결국 두 나무의 차이는 단순히 ‘신앙 대 지식’이 아니라, 신앙이 어디에서 생명을 얻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다만 AC.106은 ‘지식의 나무’, 곧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비롯되는 신앙의 본성이 ‘뒤에 이어지는 글들에서 밝혀질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그 의미를 모두 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단계에서 분명히 해 둘 것은 감각과 기억지식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그것들로부터 신앙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생명의 질서라는 점입니다. 왜 그것이 인간의 타락과 연결되는지는 이어지는 설명을 따라가면서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AC.102 심화 1)

 

 

 

AC.102, 창2:9, ‘나무는 퍼셉션, 생명나무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 (AC.102-106)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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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9 심화

1. 영적 인간에게서 생명의 질서가 ‘뒤집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99에서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에게서 생명의 질서가 ‘뒤집혀 있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상당히 강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영적 인간 역시 주님에 의해 거듭나는 사람인데, 그의 생명의 질서가 뒤집혀 있다는 것은 그가 잘못된 상태에 있다는 뜻일까요? 더 나아가 천적 인간이 되기 전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뜻일까요?

 

먼저 AC.99 자체가 말하는 것을 정확히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에게도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신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뒤집혀 있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 아니라 사람 자신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 생명의 근원은 영적 인간에게도 주님입니다. 문제는 그 생명이 흘러드는 실제 질서와 사람이 그것을 경험하고 퍼셉션하는 방식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데 있습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과 싸웁니다. 이 때문에 실제로는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시는데도, 사람에게는 지성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 자신에게서 기억지식과 이성을 통하여 나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곧 ‘내가 배우고, 내가 생각하고, 내가 추론하여 이해하게 되었다’는 방향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AC.99이 말하는 ‘뒤집힘’은 우선 이 질서와 관련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이 관계가 달라집니다.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통하여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시며,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싸움이 없으므로 그는 이것이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 다시 말해 천적 인간은 이성과 기억지식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생명과 지성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그 질서대로 퍼셉션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에게서 뒤집혀 있던 질서가 천적 인간에게서 ‘회복’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단순히 ‘잘못된 사람’과 ‘올바른 사람’, 또는 ‘낮은 사람’과 ‘높은 사람’으로 나누라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AC.99가 강조하는 차이는 주님의 유입 자체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둘 다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습니다. 다만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앞서고 겉 사람과 속 사람 사이의 싸움이 아직 있기 때문에, 그 생명의 실제 근원이 사람 자신에게서 시작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싸움이 그치면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질서가 더 이상 거꾸로 보이지 않고 실제 그러한 것으로 퍼셉션됩니다.

 

따라서 ‘뒤집혀 있다’는 표현 때문에 영적 인간의 신앙과 이성, 기억지식의 삶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AC.99는 그것들 안에도 이미 주님께서 흘러들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다만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주된 질서 안에서 그 유입의 근원이 더욱 직접적으로 퍼셉션됩니다. 바로 이 회복된 생명의 질서, 곧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하여 지성이 흘러드는 사람을 스베덴보리는 ‘동쪽 에덴에 있는 동산’이라 합니다. (AC.99 심화 1)

 

 

 

AC.99, 창2:8, ‘영적 인간에게 뒤집혀 있던 생명의 질서가 천적 인간에게서 회복됨’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99영적 인간에게서 생명, 곧 생명의 질서는 이러합니다. 주님께서는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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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7 심화

1. 태고교회 사람들은 어떻게 사랑과 신앙의 상태를 ‘호흡의 상태’로 퍼셉션했는가?

 

AC.97에서 가장 놀라운 대목은 태고교회 사람들이 ‘사랑과 신앙의 상태들을 호흡의 상태들로 퍼셉션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의 독자라면 자연스럽게 ‘그것이 도대체 어떤 호흡이었는가?’라고 묻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질문 앞에서 스베덴보리 자신이 멈춥니다. 그는 ‘이 호흡에 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그러한 것들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합니다. 따라서 AC.97을 충실하게 읽으려면 먼저 이 한계를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이 번호만으로 태고교회 사람들이 어떤 속도나 방식으로 호흡했는지, 특정한 사랑이나 신앙의 상태에 어떤 호흡이 대응했는지를 재구성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이것을 오늘날의 명상 호흡법이나 복식호흡, 호흡 훈련 같은 것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AC.97은 태고교회 사람들이 어떤 호흡법을 훈련하여 영적 상태에 들어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방향은 반대에 가깝습니다. 그들의 사랑과 신앙의 상태와 호흡의 상태가 서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들은 그것을 퍼셉션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호흡은 영적 상태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기술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이 점은 지금까지 태고교회의 퍼셉션에 관하여 읽어 온 내용과도 어울립니다. 그들의 퍼셉션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막연한 직감이나 감정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인 퍼셉션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호흡의 상태를 퍼셉션했다는 말도 단순히 자신의 몸 상태를 예민하게 관찰했다는 뜻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호흡이 그들의 후손들에게서 점차 변화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독특한 내적 상태가 후대로 그대로 보존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 땅에서는 더 이상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하지만 ‘다른 삶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안다고 덧붙입니다. 따라서 이 호흡은 스베덴보리에게 단순한 고대인의 생리적 습관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상태와 관련된 현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AC.97에서 우리가 확실히 붙들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사랑과 신앙의 상태와 호흡의 상태 사이에 실제적인 관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 관계는 오늘날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셋째, 따라서 그것을 현대적인 호흡법으로 재현하거나 추측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넷째, 바로 이러한 배경 때문에 고대인들과 말씀에서 영 또는 생명이 ‘바람’과 ‘숨’으로 표현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대목의 가치는 잃어버린 태고교회의 호흡법을 복원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것보다 훨씬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엿보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왜 창2:7의 ‘생명의 숨’이 단순한 시적 표현이 아니라 그들에게 실제적인 의미를 가진 표현이었는지를 이해하게 합니다. 그 이상의 구체적인 내용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밝히지 않은 만큼 우리도 여기서는 밝히지 않는 것이 맞습니다. (AC.97 심화 1)

 

 

 

AC.97, 창2:7, '호흡과 숨이 생명을 뜻하는 이유, 태고교회의 퍼셉션'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7생명을 ‘숨을 내쉼’(breathing)과 ‘숨’(breath)으로 묘사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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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6 심화

1. 왜 ‘콧구멍’은 퍼셉션을 뜻하는가?

 

AC.96에서 스베덴보리는 고대와 말씀에서 ‘콧구멍’으로 냄새로 말미암아 기분 좋은 모든 것을 이해했으며, 이것이 퍼셉션을 뜻한다고 합니다.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는 다소 뜻밖의 상응입니다. 눈이 이해나 인식과 관계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지만, 왜 코와 냄새가 퍼셉션과 연결되는 것일까요?

 

우선 AC.96이 직접 제시하는 연결을 따라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콧구멍’에서 곧바로 퍼셉션으로 뛰어가는 것이 아니라 ‘콧구멍 - 냄새 - 기분 좋은 것 - 퍼셉션’이라는 흐름이 있습니다. 즉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코라는 신체기관 자체보다 냄새를 통하여 어떤 것을 기분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작용입니다.

 

이 점은 지금까지 설명된 천적 인간의 퍼셉션과 잘 연결됩니다. 퍼셉션은 단순히 어떤 명제를 논리적으로 추론하여 결론을 얻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천적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내적으로 퍼셉션합니다. AC.95에서 사랑의 생명이 그를 ‘사람’이 되게 한다고 했고, AC.96에서는 사랑과 신앙에 관한 것들이 주님께 가장 기분 좋은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퍼셉션은 사랑과 신앙의 생명과 분리된 지적 판단으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냄새의 특징을 생각해 보면 이 표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사람은 어떤 향기를 맡을 때 매번 논리적 추론을 거친 뒤에야 그것이 향기로운지 불쾌한지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냄새는 직접적으로 받아들여지고 그 성질이 감지됩니다. 물론 자연적인 후각과 영적인 퍼셉션이 동일하다는 뜻은 아니지만, 스베덴보리가 고대의 표현과 말씀에서 냄새와 퍼셉션을 연결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하나의 실마리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현대적인 의미의 ‘직감’이나 ‘느낌’을 곧바로 퍼셉션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어떤 것에 좋은 느낌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지금 다루는 것은 천적 인간의 상태이며, 그의 사랑과 신앙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질서 안에 놓여 있는 가운데 주어지는 퍼셉션입니다.

 

따라서 ‘콧구멍이 퍼셉션을 뜻한다’는 말을 신체기관 하나와 영적 개념 하나를 기계적으로 짝짓는 상응표로 이해하기보다, 말씀 안에서 냄새와 향기로움이 어떤 것을 받아들이고 그 성질을 퍼셉션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문맥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AC.96은 그 연결을 통하여 창2:7의 ‘콧구멍’이 단순한 해부학적 표현이 아니라 천적 인간의 생명과 퍼셉션에 관계된 표현임을 밝혀 줍니다. (AC.96 심화 1)

 

 

 

AC.96, 창2:7, ‘콧구멍과 향기와 퍼셉션, 사랑과 신앙의 생명을 불어넣으심’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6‘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셨다’(Jehovah God breathed into his nostri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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