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24 심화

1. ‘놋뱀은 왜 주님의 감각적·자연적 선을 표상하는가?’

 

민21:9에서 모세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았습니다. 뱀에게 물린 사람이 그 놋뱀을 바라보면 살아났습니다. 스베덴보리는 AC.425의 마지막에서 이 사건을 언급하며, 놋뱀이 주님의 ‘감각적·자연적 선’을 표상했다고 밝힙니다. 이번 번호는 그 이유를 다시 설명하지 않고 앞선 해설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가 직접 밝힌 의미를 중심으로, 민수기의 기록과 주님께서 이 사건을 언급하신 말씀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놋뱀은 뱀에게 물린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표징이었습니다. 민21장의 문자적 기록에서 백성들은 뱀에게 물려 죽어 갔고,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고 명하셨습니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달자, 뱀에게 물린 사람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이 기록에서 놋뱀은 단순히 사람이 만들어 낸 치료법이 아니라, 주님께서 명하신 표징으로 등장합니다.

 

주님께서는 요3:14-15에서 이 사건을 자신에게 연결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놋뱀을 바라보고 생명을 얻은 민수기의 사건은, 주님께서 들리시는 일과 그분을 믿는 자가 영생을 얻는 일에 연결됩니다. 이 연결은 우리가 임의로 만들어 낸 비유가 아니라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왜 놋뱀을 특별히 주님의 ‘감각적·자연적 선’이라고 설명했을까요? AC.425에서 놋은 자연적 선을 뜻합니다. 또한 그는 놋뱀 전체가 주님의 감각적·자연적 선을 표상한다고 밝힙니다. 여기서 ‘감각적’이라는 말은 인간의 가장 외적인 차원과 관련된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번 번호만을 근거로 뱀과 놋의 의미를 각각 분리한 뒤, 주님의 인성이 영화롭게 되는 전 과정을 상세히 재구성해서는 안 됩니다. 그에 관한 설명은 스베덴보리가 앞에서 다룬 해당 번호와 함께 확인해야 합니다.

 

특히 놋뱀이 주님을 표상한다는 사실과,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뱀이 언제나 주님을 뜻한다는 주장은 다릅니다. 창3장의 뱀과 민21장의 놋뱀은 서로 다른 문맥에 놓여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AC.425에서 일반적인 뱀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가 만든 ‘놋뱀’이 주님의 감각적·자연적 선을 표상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의미를 다른 모든 뱀의 기록에 그대로 적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자연적인 것이 주님과 무관한 낮은 영역이 아니라는 점도 생각하게 합니다. AC.425는 자연적 선을 나타내는 놋을 설명하다가 마지막에 주님의 감각적·자연적 선을 언급합니다. 자연적인 것에 관한 설명이 주님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우리의 일상적인 선행이 주님의 신적 선과 동일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밝힌 것은 놋뱀이 주님의 감각적·자연적 선을 ‘표상한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놋뱀은 AC.425에서 놋의 의미를 확인하는 마지막 사례이면서, 그 의미가 주님께까지 이어진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민수기의 백성들은 놋뱀을 바라보고 살았고, 주님께서는 이 사건을 인자가 들리시는 일과 영생에 연결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놋뱀이 주님의 감각적·자연적 선을 표상한다고 밝힙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자연적 선의 의미를 살피는 일이 단순한 재료의 상응을 아는 데서 끝나지 않고, 주님께서 말씀 안에서 어떻게 표상되시는지를 이해하는 데까지 이어짐을 보게 됩니다. (AC.425 심화 1)

 

 

 

AC.425, 창4:22, ‘놋은 왜 자연적 선을 의미하는가?’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5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놋’(brass)이 자연적 선을 뜻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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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도올은 강의 시작부터 종교가 무엇인지를 아주 단호하게 규정합니다. 하나님을 믿어서 죽은 뒤 천당에 가려는 신앙을 ‘도피세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종교의 목적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진리와 예수의 말씀대로 살고, 사랑을 베풀고, 이웃을 보살피며, 아름다운 윤리가 실현되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점에서는 기독교든 불교든 유교든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더 나아가 종교란 인간에게 어떤 별도의 초월적 세계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깨달음과 각성’을 통해 삶의 자세를 변화시키는 메시지라고 규정합니다.

 

이 대목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참 묘합니다. 상당히 가까이 다가왔다가 결정적인 지점에서 갈라지기 때문입니다. 우선 ‘죽어서 천국 가는 것’만을 신앙의 목적으로 삼고 현재의 삶을 소홀히 하는 태도에 대한 비판은 스베덴보리에게도 상당 부분 통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죽은 뒤 갑자기 들어가는 보상 장소가 아닙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자신의 지배적 사랑을 형성하고, 그 사랑에 따라 사후 자신의 영원한 상태가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를 믿으니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고백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 따라 산다면, 그 고백 자체가 천국을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특히 도올이 말하는 ‘사랑을 베풀고 이웃을 보살피며 아름다운 윤리가 실현되는 공동체’라는 표현은 외형만 놓고 보면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와 상당히 가까워 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종교를 단순한 신조의 동의로 보지 않습니다. 참된 신앙은 삶 안에서 나타나야 하며, 선을 행하는 삶과 분리된 신앙은 살아 있는 신앙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는 도올이 한국 기독교를 향해 던지는 질문을 굳이 방어적으로 거부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당신의 신앙이 실제 이웃을 향한 삶으로 나타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기독교가 계속 들어야 할 질문입니다.

 

그러나 도올이 ‘기독교라고 말한들, 불교라고 말한들, 유교라고 말한들 다 똑같다’고 넘어가는 순간 스베덴보리와는 갈라집니다. 선한 삶이 중요하다고 해서 모든 종교의 진리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선과 진리는 서로 결합해야 합니다. 선만 있고 진리가 필요 없다거나, 어떤 진리를 믿든 착하게 살기만 하면 모두 같다는 식으로 갈 수 없습니다. 더욱이 주님은 단순히 훌륭한 윤리적 스승 가운데 한 분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인성을 입고 오신 분이라는 것이 스베덴보리 신학의 중심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아주 미세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도올에게 예수의 말씀은 인간을 ‘깨닫게 하고 변화시키는 위대한 말씀’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말씀은 인간에게 단순히 깨달음을 제공하는 가르침을 넘어 ‘생명을 주는 신적 진리’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면서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잠시 뒤 도올이 사용하는 ‘트랜스포메이션’(transformation)이라는 말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도올은 도마복음의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하면 ‘나라는 존재가 트랜스포메이션을 일으킨다’고 말하고, 그것을 불교의 ‘대각’이나 ‘해탈’과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여기서 ‘변화’라는 현상 자체에는 동의하면서도 그 변화의 근원을 완전히 다르게 설명할 것입니다. 인간이 말씀을 깨달아 스스로 높은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의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을 질서 안으로 가져오시는 과정, 곧 ‘거듭남’입니다.

 

바로 여기서 이번 강의의 가장 흥미로운 대목이 등장합니다. 도올은 도마복음의 서문과 첫 번째 말씀 사이에 있는 ‘그리고 그가 말하였다’라는 표현을 세밀하게 분석합니다. 여기서 ‘그’가 예수일 수도 있고 기록자인 도마일 수도 있다고 본 뒤, 결국 자신은 도마라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유명한 문장, 곧 ‘이 말씀들의 해석을 발견하는 자는 누구든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를 도마가 독자에게 제시한 일종의 해석 원리로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도올이 강조하는 ‘해석을 발견한다’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도올은 단순히 교수에게 배우거나 책에서 뜻을 찾아내는 것이 해석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ChatGPT에게 물어서 얻는 해석 같은 것도 아니라며, ‘너의 삶 한가운데서 그것을 느껴야 한다’고 합니다. 말씀의 의미가 삶 속에서 발견되어야 하고, 그 발견이 자기 존재의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상당히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말씀을 지식으로만 아는 것과 그 말씀이 삶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은 분명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말씀의 진리를 단순히 기억 속에 저장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진리가 의지 안으로 들어가 삶이 될 때 비로소 사람의 것이 됩니다. 머릿속에 알고 있는 진리와 사랑하여 행하는 진리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말씀의 해석을 발견한다’는 것이 단순히 독자의 실존적 깨달음에서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 자체 안에 이미 신적 질서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문자적 의미 안에 영적, 천적 의미가 있으며, 그것들은 인간이 자유롭게 만들어 내는 의미가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 안에 두신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참된 해석은 ‘내 삶에서 나에게 어떤 의미가 되었는가?’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삶에서 발견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그 발견은 말씀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신적 진리에 의해 인도되어야 합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 자체에도 중요한 경계가 됩니다. 우리 역시 어떤 문장을 읽고 스베덴보리를 가져다가 자유롭게 의미를 붙이는 작업을 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그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보고,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힌 상응과 속뜻이 무엇인지 살피고, 그 다음 그것이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해석’이 어느 순간 본문을 듣는 일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본문에 집어넣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도올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를 매우 독특하게 해석합니다. 일반적인 기독교식으로 ‘영생을 얻는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도마복음에는 애초에 ‘영혼’이라는 카테고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대신 ‘맛본다’는 행위 자체에 주목합니다. 맛보는 것은 죽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이 하는 행위이므로, ‘죽음을 맛본다’는 것은 사후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으면서 죽음을 먹고 있는 상태’를 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올은 오염된 음식을 먹는 비유를 듭니다. 먹는 행위 자체는 생명을 유지하는 행위인데, 먹는 음식에 독이 들어 있으면 그 사람은 살아가기 위해 먹으면서 오히려 죽음을 먹게 됩니다. 그리고 이 비유를 한국 기독교에 적용합니다.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신앙생활을 하는데, 잘못된 성경 해석과 죄책감, 협박과 겁박의 종교를 계속 받아들이면서 오히려 인간이 정신적으로 죽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도올은 ‘죽음을 맛본다’고 해석합니다.

 

여기에는 도올 특유의 상당히 자유로운 해석이 들어 있습니다. ‘죽음을 맛보다’라는 고대 표현 자체를 이렇게까지 현대 한국 기독교의 정신적 경직과 직접 연결하는 것은 본문 자체에서 곧바로 나오는 결론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후반에 특정 정치적 집단까지 연결하여 ‘성경을 공부할수록 뇌가 경색되고 특정 정치세력이 된다’는 식으로 말하는 순간에는 신학적 해석과 도올 자신의 정치·사회적 평가가 뒤섞입니다. 이 부분은 구별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특정 정치적 성향을 가졌다는 사실 자체를 사람의 영적 죽음의 증거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반대편 정치 성향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해야 할 원칙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살아 있으면서 죽음을 먹는다’는 발상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세계에서는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당히 깊은 접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생명’과 ‘죽음’은 단순히 육체가 살아 있느냐 죽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생명이며,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비롯되는 악과 거짓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영적 죽음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육체적으로 멀쩡히 살아 있으면서도 영적으로는 죽음에 속한 것을 계속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육체의 죽음을 맞더라도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 안에 있다면 실제로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도올과 스베덴보리는 아주 가까이 왔다가 다시 갈라집니다. 도올은 ‘아무도 죽음을 체험할 수 없다. 인간은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 있다’고 말합니다. 육체적 경험의 차원에서는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경계 너머를 이야기합니다. 육체의 죽음은 인간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영으로서 삶이 계속되는 전환입니다. 사람은 육체를 벗은 뒤에도 보고, 듣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다른 영들과 관계하며 살아갑니다. 따라서 도올이 ‘영혼’과 사후세계의 문제를 제거하고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를 오직 현세적 삶의 질로 가져온다면, 스베덴보리는 그 현세적 의미를 인정하면서도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라면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를 훨씬 급진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은 사람에게 육체의 죽음은 존재의 종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는 말씀도 이런 관점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육체가 죽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악과 거짓이라는 영적 죽음에 빠지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 안에 거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도올이 ‘영생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고 밀어낸 바로 그 자리에서 스베덴보리는 ‘영생’이라는 말을 훨씬 더 깊게 되찾습니다. 영생은 ‘죽은 다음 끝없이 오래 사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지금 이 순간부터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 사는 상태이며,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그 상태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도올이 처음 비판한 ‘천당 가려고 예수 믿는 신앙’과도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천국을 미래의 보상 상품처럼 이해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먼저 사람 안에 형성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사람의 의지와 이해 안에 받아들여지고, 그것이 실제 삶에서 체어리티로 나타날 때 사람 안에 천국의 질서가 형성됩니다. 죽음은 그 사람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순간이 아니라, 이미 형성되어 있던 내적 상태가 외적으로 드러나는 문턱입니다.

 

그러므로 도올이 ‘죽어서 천국 가려고 하지 말고 지금 이 땅에서 사랑하며 살아라’고 말한다면, 스베덴보리는 상당 부분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중요한 말을 덧붙일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렇게 살아 형성된 사랑이 죽음 이후에도 당신의 삶이 된다.’ 현세와 내세는 서로 경쟁하는 두 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연속선 위에 있습니다.

 

이번 강의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그래서 도올이 너무 좋은 문제를 제기하고도 그것을 결국 인간의 ‘깨달음’으로 수렴시킨다는 데 있습니다. ‘해석을 발견하라 → 삶에서 깨달아라 → 인격의 트랜스포메이션을 이루어라 → 죽음을 맛보지 말라.’ 아름다운 구조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여기에는 한 분이 빠져 있습니다.

 

‘주님’입니다.

 

거듭남은 자기계발의 최고 단계가 아닙니다. 인간이 말씀의 비밀을 깨달아서 스스로 고양되는 과정도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의 proprium으로부터 자신을 거듭나게 할 수 없습니다. 선도 진리도 생명도 인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흘러들어옵니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 유입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배운 진리를 실제 삶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변화의 주체는 궁극적으로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도올의 ‘해석을 발견하라’는 말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조금 바꾸어 보면 이렇게 될 것 같습니다. ‘말씀의 속뜻을 알고 거기서 끝나지 말라. 그 진리가 삶 안으로 들어오게 하라. 그러나 그 진리를 발견한 내가 나를 변화시킨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 진리를 통하여 나를 변화시키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도마복음과 정경 복음서 사이의 차이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도올은 도마복음이 서술을 제거하고 ‘살아 있는 예수의 말씀’만 남겼기 때문에 더 순결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반드시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행하심’을 떼어 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시험받으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제자들과 함께하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고, 십자가의 마지막 시험을 통과하시고, 인성을 영화롭게 하신 그 모든 과정 역시 계시입니다.

 

그러므로 도마복음의 어록에서 귀한 것을 발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서사가 없기 때문에 더 순결하다’는 결론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뒤집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서사가 불순물을 첨가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 ‘서사’ 안에 주님의 구속과 영화라는 가장 깊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강의를 들으면서 저는 도올에게서 상당히 좋은 질문 하나를 받게 됩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나는 생명을 먹고 있는가, 죽음을 먹고 있는가?’ 이것은 충분히 간직할 만한 질문입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교리를 많이 알고, 심지어 스베덴보리를 많이 읽는 것 자체가 우리를 천국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자신을 높이며 자기 지성을 자랑하게 된다면, 진리의 지식조차 proprium을 강화하는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도올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생명을 주는 것은 ‘내가 발견한 탁월한 해석’이 아닙니다.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서 옵니다. 말씀의 속뜻도 결국 우리를 지적으로 놀라게 하기 위해 열린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주님께 연결하고 우리의 사랑과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강의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저는 이렇게 정리하고 싶습니다.

 

‘도올은 말씀의 해석을 삶에서 발견함으로써 죽음을 맛보지 않는 인간을 말하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말씀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 거듭나는 인간을 말합니다.’

 

둘 사이에는 상당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다 죽은 교리를 경계하고, 삶 없는 신앙을 경계하며, 말씀을 실제 삶으로 가져오려고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중심은 다릅니다. 한쪽에는 ‘깨닫고 변화하는 인간’이 있고, 다른 쪽에는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도올을 보는 일은 바로 그 차이를 발견하면서도, 도올에게서 발견되는 진리의 조각을 버리지 않는 일이겠습니다. 그의 모든 말을 받아들일 필요도 없고, 그의 몇몇 과장 때문에 모든 말을 버릴 필요도 없습니다. ‘말씀을 삶에서 발견하라’, ‘신앙이 사랑과 이웃 돌봄으로 나타나야 한다’, ‘성경을 읽으면서 오히려 사람이 굳어질 수도 있다’는 그의 경고는 충분히 들을 만합니다. 다만 그 모든 것을 받아 들고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묻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일관됩니다.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리고 아마 그 한마디가 이번 도올 강의와 ‘스베덴보리의 렌즈’ 사이의 가장 깊은 접점이면서, 동시에 가장 결정적인 갈림길일 것입니다.

 

 

 

SY.88, 도올 김용옥, ‘예수가 역사적으로 진짜 있었던 사람인가? - 바울의 레토릭은 근본적으로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 강의에서 도올 김용옥이 처음 던지는 질문은 매우 근본적입니다. ‘예수는 정말 살았는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사람인가?’입니다. 도올은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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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0 심화

2.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임종, 그러니까 지상에서 숨을 거두는, 정말 수없이 다양한 케이스가 있습니다. 평안한,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쓸쓸히 홀로 고독사하는 사람도 있고...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편안하게 떠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교통사고 등 갑작스런 사고사나 전쟁이나 강도, 감옥 형장의 이슬, 혹은 자살 등... 제가 말씀드리고픈 것은 저는 고등학생 때 모친을 교통사고로 잃은 경험이 있는데요, 그러니까 이런 사별의 경험은 정말 선 굵은 인생의 자국을 남기더라는 거죠. 아마 숨을 거두시는 분도 그러지 싶은데... 그런데 어떻게 사후 자기가 죽은지조차 모를 수가 있는 건가요? 모든 게 이어진다면서 말이죠...

 

 

임종, 곧 지상에서 숨을 거두는 모습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안히 숨을 거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도 곁에 없는 가운데 홀로 생을 마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오랜 치료 끝에 떠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교통사고나 재난, 전쟁이나 범죄처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 역시 고등학생 때 모친을 교통사고로 잃은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 갑작스러운 사별은 남겨진 사람의 삶에 아주 깊고 오래가는 자국을 남깁니다.

 

그래서 AC.320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죽음의 모습이 이렇게 다양하고, 어떤 죽음은 너무나 갑작스럽고 충격적인데, 어떻게 죽은 사람이 처음에는 자신이 죽은 사실조차 모를 수 있을까요? 더구나 스베덴보리는 죽음 이후에도 삶과 의식이 이어진다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이어진다면 사고나 죽음의 순간에 대한 의식도 그대로 이어져야 하는 것 아닐까요?

 

여기서 먼저 구별할 것은 ‘의식의 연속’과 ‘자신이 처한 새로운 상태에 대한 인식’입니다. AC.320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사람이 죽은 뒤에도 자신이 여전히 감각하고, 원하고, 생각하는 한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연속성이 너무나 자연스럽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알지 못합니다. 자신에게는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흔히 ‘의식이 끊어지는 사건’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이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즉시 알아야 할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AC.320의 설명은 그 반대입니다. 육체의 생명은 끝났지만 사람 자신은 계속 살아 있기 때문에, 그는 오히려 ‘나는 죽지 않았는데 왜 내가 죽었다고 하는가?’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누군가 자신에게 영이라고 말해 주었을 때 놀라고 경이로워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자신은 여전히 감각과 욕구와 생각을 가진 온전한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교통사고나 전쟁, 범죄와 같은 갑작스러운 죽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AC.320만으로 각각의 경우에 죽은 사람이 정확히 무엇을 경험하는지까지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항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증언하는 것은 죽음의 방식에 따른 세부 과정이 아니라, 사람이 저세상에 들어가도 자신의 존재와 의식이 계속되기 때문에 처음에는 자신이 저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일반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특정한 임종의 경우를 상상하여 그 사람이 반드시 이런 순서로 경험할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지상에서 남겨진 사람이 경험하는 ‘죽음’과, 죽은 사람 자신이 경험하는 ‘계속되는 삶’은 서로 다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겨진 사람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 순간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나 큰 단절입니다. 특히 갑작스러운 사별은 그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AC.320에서 스베덴보리가 전하는 죽은 사람의 경험은 ‘나는 없어졌다’가 아니라 오히려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입니다.

 

이것은 제가 어린 시절 모친을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떠나보낸 경험을 생각할 때에도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남겨진 저에게 그 사건은 너무나 갑작스러운 단절이었지만, AC.320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어머니 자신의 생명까지 그 사고의 순간에 함께 끊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 이후 어머니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경험하셨는지를 제가 알 수 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육체의 죽음이 그분의 존재 자체를 소멸시킨 것은 아니라는 스베덴보리의 증언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말은 사람이 죽음이라는 사건을 부정하거나 혼란에 빠져 있다는 뜻으로만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AC.320의 초점은 삶의 놀라운 연속성에 있습니다. 사람은 죽었는데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는 죽었지만 사람 자신은 계속 살아 있기 때문에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결국 AC.320은 우리에게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어 줍니다. 지상에 남은 사람에게 죽음은 분명 슬프고 때로는 견디기 어려운 이별입니다. 그 슬픔을 가볍게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증언을 따른다면 그 이별의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육체의 죽음 너머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생각하고 느끼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AC.320이 들려주는 첫 번째 사후세계의 소식은 어쩌면 아주 단순합니다. ‘죽음 뒤에도 사람은 살아 있습니다.’

 

 

 

AC.320, 창4 앞,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AC.320-323)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On The Nature Of The Life Of The Soul Or Spirit AC.320 영혼(soul)으로서의 삶, 곧 죽은 뒤 처음 영계에 들어가는 신참, 신생 영들(novitiate spirits)의 삶에 관한 일반적인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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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0, 심화 1, ‘soul’과 ‘spirit’

AC.320.심화 1. ‘soul’과 ‘spirit’ ‘soul’과 ‘spirit’의 차이가 뭔가요? 그리고 적절한 우리말 번역은? AC.320에는 흥미롭게도 ‘soul’과 ‘spirit’이라는 두 단어가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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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On The Nature Of The Life Of The Soul Or Spirit

 

AC.320

영혼(soul)으로서의 삶, 곧 죽은 뒤 처음 영계에 들어가는 신참, 신생 영들(novitiate spirits)의 삶에 관한 일반적인 사항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저는 많은 경험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저세상(the other life)에 들어가면 그는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이 세상에 있으며, 심지어 아직도 육체 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상태는 매우 실제적이어서, 누군가 그에게 자신이 영이라고 말해 주면 그는 크게 놀라고 경이로워합니다. 이는 자신이 감각과 욕구, 생각에 있어서 전과 똑같이 한 인간으로 존재함을 발견하기 때문이며, 또한 세상에 살 때에는 영의 존재를 믿지 않았거나, 혹은 어떤 사람들처럼 영이 지금 자신이 경험하는 것과 같은 존재일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With regard to the general subject of the life of souls, that is, of novitiate spirits, after death, I may state that much experience has shown that when a man comes into the other life he is not aware that he is in that life, but supposes that he is still in this world, and even that he is still in the body. So much is this the case that when told he is a spirit, wonder and amazement possess him, both because he finds himself exactly like a man, in his senses, desires, and thoughts, and because during his life in this world he had not believed in the existence of the spirit, or, as is the case with some, that the spirit could be what he now finds it to be.

 

해설

AC.320부터 AC.323까지는 창세기 4장의 속뜻으로 들어가기 전에 삽입된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라는 짧은 연속 기사입니다. 앞의 AC.314-319에서 사람이 영생에 들어가는 과정에 관한 여러 경험을 소개했다면, 여기서는 사람이 육체의 죽음 이후 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실제로 어떤 상태인지를 좀 더 일반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AC.320에서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사람이 죽은 뒤에도 자기 존재가 단절되었다고 느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저세상에 들어가면 처음에는 자신이 저세상에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여전히 이 세상에 있으며 심지어 육체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죽음 이후의 삶이 지상의 의식과 전혀 연결되지 않은 낯선 존재 상태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여전히 ‘나’라는 분명한 자각 가운데 계속된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를 스베덴보리는 매우 단순하게 설명합니다. 사람은 죽은 뒤에도 ‘감각과 욕구, 생각’에 있어서 자신이 이전과 똑같이 한 인간임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 계속되고 있음을 알고, 무엇인가를 원하고 사랑하며, 주변의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영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오히려 놀라게 됩니다. 지상에서는 영을 육체를 잃은 희미한 존재처럼 생각했는데, 실제로 영이 되고 보니 자신이 여전히 온전한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이해에서 매우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죽음으로 없어지는 것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자연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입고 있던 육체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애정, 곧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원하는가 하는 내적인 생명은 육체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죽음은 ‘존재하던 사람이 없어지고 전혀 다른 존재가 생기는 사건’이 아니라, 사람이 자연계의 육체를 벗고도 여전히 자기 자신으로 살아 있음을 발견하는 사건입니다.

 

특히 AC.320은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는 ‘영’에 대한 막연한 관념을 돌아보게 합니다. 사람은 영을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이나 의식만 남은 어떤 것으로 상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증언하는 영은 그렇게 막연한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죽은 사람 자신이 ‘나는 전과 똑같은 사람인데 무엇이 달라졌다는 것인가?’라고 생각할 만큼 자기 존재와 감각과 사고의 연속성을 경험합니다. 이어지는 AC.321-323에서는 이 점이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됩니다.

 

그러므로 AC.320이 우리에게 던지는 중요한 질문은 ‘죽으면 내가 없어지는가?’가 아니라 ‘육체를 벗은 뒤에도 계속 살아가는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입니다. 죽음 이후에도 생각하고 원하고 사랑하는 내가 계속된다면, 지금 무엇을 사랑하며 어떤 내적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는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AC.320 자체의 초점은 아직 사후의 심판이나 천국과 지옥의 결정에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먼저 확실하게 말하려는 것은 훨씬 기본적인 사실입니다. 육체의 죽음으로 인간의 의식과 인격이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으며 여전히 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AC.320은 이후 이어질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설명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문과 같습니다.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은 희미하고 추상적인 상태로 존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여전히 보고 느끼고 원하고 생각하는 ‘나’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삶의 소멸이 아니라, 사람이 육체를 벗은 뒤에도 자신의 생명이 계속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경계입니다.

 

심화

1. ‘soul’과 ‘spirit’

 

AC.320, 심화 1, ‘soul’과 ‘spirit’

AC.320.심화 1. ‘soul’과 ‘spirit’ ‘soul’과 ‘spirit’의 차이가 뭔가요? 그리고 적절한 우리말 번역은? AC.320에는 흥미롭게도 ‘soul’과 ‘spirit’이라는 두 단어가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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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AC.320, 심화 2,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AC.320.심화 2.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임종, 그러니까 지상에서 숨을 거두는, 정말 수없이 다양한 케이스가 있습니다. 평안한,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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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1, 창4 앞, 육체를 벗은 뒤 감각과 사고와 말의 능력은 더욱 뛰어납니다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1두 번째 일반적인 사실은 영이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뛰어난 감각 기능을 누리며, 생각하고 말하는 능력 또한 훨씬 더 탁월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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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9, 창3 뒤, ‘두 번째 사례’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AC.319 나는 또 다른 한 사람도 보았는데, 그는 천사들에 의해 곧바로 천국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는 주님께 받아들여졌고, 천국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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