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로 이어지는 이름들은 매우 많은 교회들을 의미하는데, 그중 첫 번째, 제일의 교회를 사람이라 하였다. 이들 교회들의 가장 주된 특징은 퍼셉션이었고, 그런 이유로, 그 시절 교회들 간의 차이는 주로 퍼셉션의 차이였다.

 

3절,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And man lived a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into his likeness, after his image, and called his name Se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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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과 같은 이름들, 곧, ‘’,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로 이어지는 이름들은 매우 많은 교회들을 의미하는데, 그중 첫 번째, 제일의 교회를 ‘사람’이라 하였습니다. 이들 교회들의 가장 주된 특징은 퍼셉션이었고, 그런 이유로, 그 시절 교회들 간의 차이는 주로 퍼셉션의 차이였습니다. 이쯤에서 퍼셉션에 관한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천국 그 어디에서든 천국을 다스리는 건 선과 진리에 관한 퍼셉션 말고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퍼셉션은 어느 두 커뮤니티도 유사한 퍼셉션을 누리고 있지 않을 정도로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며, 도저히 설명 불가한 것인데요, 그 이유는 천국에 존재하는 퍼셉션들은 (Genus) 종(, Species)으로 분류되며, 속만으로도 셀 수가 없는데, 그 각각의 속에 속하는 종 역시 헤아릴 수 없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적 자비, 곧 주님의 허락을 받아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AC.1383-1400, 1504-1520) By the names which follow: “Seth,” “Enosh,” “Kenan,” “Mahalalel,” “Jared,” “Enoch,” “Methuselah,” “Lamech,” “Noah,” are signified so many churches, of which the first and principal was called “man.” The chief characteristic of these churches was perception, wherefore the differences of the churches of that time were chiefly differences of perception. I may here mention concerning perception, that in the universal heaven there reigns nothing but a perception of good and truth, which is such as cannot be described, with innumerable differences, so that no two societies enjoy similar perception; the perceptions there existing are distinguished into genera and species, and the genera are innumerable, and the species of each genus are likewise innumerable; but concerning these,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셀 수 없이 많은 속이 존재하고, 그 각 속에 딸린 종 또한 셀 수 없이 많으며, 더욱이 개별 종 안에서도 셀 수 없는 다양함이 있기 때문에, 분명한 사실은 천적, 영적인 것들에 관해 오늘날 세상이 알고 있다는 게 얼마나 미미한지, 미미하다 못해 거의 없을 정도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심지어 퍼셉션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며, 만일 들어도 무슨 그런 것이 존재하느냐 하며 안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다른 것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태고교회는 주님의 천적 나라를 표현했습니다. 퍼셉션의 일반적, 구체적 아주 미세한 차이들에서조차 말이지요. 하지만 오늘날은 퍼셉션의 본성에 관해 가장 대충으로도 전혀 알려진 바 없기 때문에, 이들 교회들의 퍼셉션 그 속과 종 어떤 경우에 대해서도 그저 어둡고 이상하게만 보일 것입니다. 그 시절 그들은 가족, 가문 및 민족들로 구분되었으며, 결혼도 가족과 가문 내에서만 했습니다. 퍼셉션의 속, 종의 보존 및 종족 고유특성의 대물림처럼 부모를 통한 정확한 대물림을 위해서였지요. 이런 이유로, 과거 태고교회였던 사람들은 지금도 천국에서 함께 지냅니다. Since then there are innumerable genera, and innumerable species in each genus, and still more innumerable varieties in the species, it is evident how little—so little that it is almost nothing—the world at this day knows concerning things celestial and spiritual, since they do not know even what perception is, and if they are told, they do not believe that any such thing exists; and so with other things also. The most ancient church represented the celestial kingdom of the Lord, even as to the generic and specific differences of perception; but whereas the nature of perception, even in its most general aspect, is at this day utterly unknown, any account of the genera and species of the perceptions of these churches would necessarily appear dark and strange. They were at that time distinguished into houses, families, and nations, and contracted marriage within their houses and families, in order that genera and species of perceptions might exist, and be derived from the parents precisely as are the propagations of native character; wherefore those who were of the most ancient church dwell together in hea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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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이나 영에 대해 가졌던 생각에 관하여 그들을 만나보고 쓴 몇 가지 사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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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삶(the other life)에서는 사람들이 혼(soul), 영(spirit) 및 사후 삶(life after death)에 관해 몸 안에서 살 동안 품었던 견해들을 더욱 명료하게 지각하게 되는데요, 그 이유는 몸 안에 있었을 때와 비슷한 상태에 놓이게 되면, 그들은 그때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는데, 그때 그들의 생각이 마치 큰 소리로 말하는 것처럼 명료하게 서로 소통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 이야기입니다. 그는 죽은 지 얼마 안 된 사람이었는데, 제가 그에게서 지각한 건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혼자 중얼거린 겁니다) 그는 생전에 영의 존재를 정말로 믿었던 사람이지만, 속으로는 나는 사후 무슨 안개 같은 생명으로 살게 될 거야. 왜냐하면, 몸의 생명이 그치면 남는 것은 안개같이 희미한 것밖에 없을 테니까...라고 생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생명이라는 것을 몸 안에 있는 것으로만 보았고, 영은 일종의 유령처럼 생각했었기 때문인데, 그는 사람들이 가진 생명과 거의 같은 생명을 짐승들도 갖고 있는 걸 보고, 이런 생각을 스스로 확신했던 겁니다. 그랬던 그가 이제는 경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영들과 천사들이 가장 밝은 빛 가운데 살며, 또 너무나 완벽하여 도저히 말로 설명하기가 정말 쉽지 않은 그런 퍼셉션(perception)을 가지고, 가장 놀라운 지성과 지혜, 그리고 행복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었으며, 그 결과 그들의 삶은 모호함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가장 완벽한 명료함과 확실함 가운데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In the other life it is given to perceive clearly what opinions people had entertained while they lived in the body concerning the soul, the spirit, and the life after death; for when kept in a state resembling that of the body they think in the same way, and their thought is communicated as plainly as if they spoke aloud. In the case of one person, not long after his decease, I perceived (what he himself confessed) that he had indeed believed in the existence of the spirit, but had imagined that it must live after death an obscure kind of life, because if the life of the body were withdrawn there would remain nothing but what is dim and obscure; for he had regarded life as being in the body, and therefore he had thought of the spirit as being a phantom; and he had confirmed himself in this idea from seeing that brutes also have life, almost as men have it. He now marveled that spirits and angels live in the greatest light, and in the greatest intelligence, wisdom, and happiness, attended with a perception so perfect that it can scarcely be described; consequently that their life, so far from being obscure, is most perfectly clear and distin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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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태고인들의 퍼셉션, 홍수 후 양심으로 대체됨. 양심 역시 일종의 딕테이션이지만 방식이 다름

 

9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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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인들은 자신들의 퍼셉션을 ‘여호와의 스피킹’이라는 워딩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이런 퍼셉션 역량을 주신 분이 주님이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퍼셉션은 사랑이 주(主, the principal)일 동안은 계속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을 향한(to) 사랑이 식고 그 결과, 이웃을 향한(toward) 사랑 또한 식으면 퍼셉션은 사라졌습니다만, 그러나 아직 사랑이 남아 있는 한은 퍼셉션도 남아 있었습니다. 이러한 퍼셉션 역량은 태고교회에 맞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홍수 후 세대처럼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고,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해서 주어지자 양심이라는 게 그 뒤를 이었습니다. 이 양심이라는 것 또한 일종의 딕테이트를 주는 건데 방식은 다릅니다. 이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양심이 딕테이트할 때, 그것은 말씀에 나오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와 같은 식입니다. 양심은 계시와 지식, 그리고 말씀으로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말씀(the Word) 말씀하시거나(speaks) 딕테이트하실 때, 말씀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런 까닭에 심지어 오늘날에조차 양심, 혹은 신앙에 관한 걸 언급하면서 ‘주께서 말씀하십니다’라고 하는 것보다 더 일반적인 표현은 없습니다. By the “speaking of Jehovah” the most ancient people signified perception, for they knew that the Lord gave them the faculty to perceive. This perception could continue no longer than while love was the principal. When love to the Lord ceased, and consequently love toward the neighbor, perception perished; but insofar as love remained, perception remained. This perceptive faculty was proper to the most ancient church, but when faith became separated from love, as in the people after the flood, and charity was given through faith, then conscience succeeded, which also gives a dictate, but in a different way, of which, by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When conscience dictates, it is in like manner said in the Word that “Jehovah speaks”; because conscience is formed from things revealed, and from knowledges, and from the Word; and when the Word speaks, or dictates, it is the Lord who speaks; hence nothing is more common, even at the present day, when referring to a matter of conscience, or of faith, than to say, “the Lord s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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