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4:15)

 

AC.393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말씀의 속뜻을 계속 밝혀 나가기 전에, 신앙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태고교회는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는 어떠한 신앙도 인정하지 않는 성격의 교회였으며, 심지어 신앙을 따로 언급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통하여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퍼셉션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한 천적 천사들도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인류가 계속 이러한 성격으로 있을 없고,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여 신앙을 자체로 하나의 교리로 만들 것이 예견되었으므로, 그것들이 실제로 분리되도록 허용하시되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섭리하셨습니다. 신앙을 통하여, 다시 말해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통하여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체어리티를 받을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식(cognitio), 듣는 것이 먼저 오고, 지식 또는 들음을 통하여 체어리티,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가 주님으로부터 주어지게 하셨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분리될 없어야 아니라 신앙에서 주된 것을 이루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태고교회에 있었던 퍼셉션을 대신하여,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을 통하여 얻어지는 양심이 뒤를 이었습니다. 양심은 무엇이 진리인지를 딕테이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딕테이트하였는데, 이는 주님께서 말씀에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홍수 후의 교회들은 대부분 이러한 성격이었으며, 주님의 강림 원시교회 또는 초대교회도 그러했습니다. 천적 천사들과 영적 천사들이 구별되는 것도 바로 이것에 의해서입니다. Before we proceed to elucidate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s before us, it is necessary to know how the case is with faith. The most ancient church was of such a character as to acknowledge no faith except that which is of love, insomuch that they were unwilling even to mention faith, for through love from the Lord they perceived all things that belong to faith. Such also are the celestial angels of whom we have spoken above. But as it was foreseen that the human race could not be of this character, but would separate faith from love to the Lord, and would make of faith a doctrine by itself, it was provided that they should indeed be separated, but in such a way that through faith, that is, through the knowledges of faith, men might receive from the Lord charity, so that knowledge [cognitio] or hearing should come first, and then through knowledge or hearing, charity, that is, love toward the neighbor, and mercy, might be given by the Lord, which charity should not only be inseparable from faith, but should also constitute the principal of faith. And then instead of the perception they had in the most ancient church, there succeeded conscience, acquired through faith joined to charity, which dictated not what is true, but that it is true, and this because the Lord has so said in the Word. The churches after the flood were for the most part of this character, as also was the primitive or first church after the Lords advent, and by this the spiritual angels are distinguished from the celestial.

 

해설

AC.393은 가인의 표에 대한 설명을 잠시 멈추고 신앙의 역사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번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말씀의 속뜻을 계속 밝혀 나가기 전에, 신앙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어질 가인의 표를 이해하려면 먼저 태고교회에서 신앙과 사랑이 어떤 관계에 있었고, 이후 그 관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AC.393은 단순한 삽입 설명이 아니라 AC.392에서 말한 분리된 신앙의 보존을 이해하는 교리적 열쇠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에 속한 신앙외에는 어떠한 신앙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이 신앙을 따로 언급하려 하지도 않았다는 설명입니다. 그들에게 사랑과 신앙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두 개의 별도 항목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 있으면서 그 사랑을 통하여 신앙에 속한 것들을 퍼셉션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어떤 교리를 배우고 그것이 참이라고 믿은 다음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내적으로 퍼셉션했습니다. 그래서 사랑과 신앙을 따로 떼어 나는 이것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 자체가 그들의 본래적 질서와 맞지 않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천사들도 이와 같다고 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상태와 천적 천사의 상태 사이에 깊은 상응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천적 상태에서는 사랑이 중심이며 진리는 그 사랑 안에서 퍼셉션됩니다. 진리를 먼저 지적으로 확보하고 그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 나아가는 질서가 아니라, 선 안에서 진리를 보는 질서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천적 인간은 사랑에서 신앙으로라고 정리해 온 이유입니다.

 

그러나 인류가 계속 그러한 상태에 머물 수 없을 것이 예견되었습니다. 인간은 결국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고’, 신앙을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교리로 만들게 됩니다. 이것이 가인으로 표상된 분리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 분리를 원하셨다고 이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분리는 인간의 타락에서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이 그렇게 될 것을 예견하시고, 이미 낮아진 상태에서도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섭리하셨습니다.

 

그 새로운 길이 바로 신앙에 관한 지식들에서 체어리티로나아가는 질서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퍼셉션했다면, 이후의 인간에게는 먼저 신앙에 관한 지식이 주어집니다. 사람은 말씀을 듣고 배우며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지식과 들음을 통하여 주님께서 체어리티, 곧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를 주십니다. 따라서 순서는 달라집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것을 퍼셉션했다면, 이후의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오고 그 지식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형성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먼저 지식만 충분히 쌓으면 나중에 자동으로 체어리티가 생긴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393은 체어리티가 주님으로부터 주어진다고 두 번이나 강조합니다. 지식 자체가 체어리티를 생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진리를 듣고 배우는 것은 주님께서 사람에게 체어리티를 주실 수 있는 수단과 길이 됩니다. 사람이 그 진리를 받아들이고 삶으로 행하려 할 때 주님께서 그 안에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를 형성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질서에서도 생명의 근원은 여전히 주님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주어진 체어리티가 신앙과 분리될 없어야 아니라 신앙에서 주된 것을 이루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순서와 주도권을 명확히 구별합니다. 시간적·교육적 순서에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질서와 주도권에서는 체어리티가 주된 것입니다. 이것은 AC.363에서 살펴본 원리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신앙이 먼저 배워질 수 있지만, 신앙이 지배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여 나아가야 하며,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과 주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이 먼저다라는 말을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사람이 말씀을 듣고 진리를 배우는 교육적 순서에서 신앙의 지식이 먼저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본질적이고 우월하다는 뜻입니다. AC.393은 첫 번째 의미는 인정하지만 두 번째 의미는 분명히 부정합니다. 지식과 들음은 먼저 올 수 있지만, 그것을 통해 주님께서 주시는 체어리티가 신앙의 주된 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퍼셉션과 양심의 차이가 등장합니다. 태고교회에는 퍼셉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는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을 통하여 얻어지는 양심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습니다. 이 양심은 퍼셉션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매우 정밀하게 양심은 무엇이 진리인지를 딕테이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딕테이트한다고 말합니다.

 

이 차이는 처음에는 미묘해 보이지만 매우 큽니다. 퍼셉션을 가진 태고교회 사람은 사랑으로부터 어떤 것이 선하고 참된지를 내적으로 알아차렸습니다. 반면 양심을 가진 영적 인간은 먼저 말씀을 통해 진리를 배웁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에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것은 진리이다라는 내적인 딕테이트를 받습니다. 즉 양심이 독립적으로 새로운 진리를 발견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계시되고 배운 진리를 진리로 인정하고 그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앞의 AC.359AC.370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AC.359에서는 가인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conscience dictated’,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했습니다. 반면 AC.370에서는 같은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체어리티에 관하여 그들에게 어떤 딕테이트를 주는, 내면에서 오는 어떤 퍼셉션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두 표현을 억지로 하나로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AC.393은 태고교회에 고유한 퍼셉션과 이후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을 통해 형성되는 양심이 서로 다른 영적 기능임을 분명히 합니다. 따라서 앞의 표현 차이도 그대로 보존하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과도기적 상태 안에서 퍼셉션의 어떤 흔적과 양심이라는 표현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조심스럽게 읽어야 합니다.

 

특히 AC.393홍수 후의 교회들은 대부분 이러한 성격이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홍수 후 고대교회의 양심을 시대적으로 무분별하게 섞어서는 안 됩니다. 홍수 후의 영적 교회에서는 말씀과 신앙의 지식이 먼저 주어지고, 그것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며, 그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으로부터 양심이 형성됩니다. 이것이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와 구별되는 영적 교회의 질서입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강림 후 원시교회 또는 초대교회도 이러한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히 홍수 직후 어느 고대 종교집단만의 특수한 구조가 아닙니다. 사람이 말씀의 진리를 먼저 듣고 배우며, 그 진리를 삶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주님에게서 체어리티를 받고, 그 결과 양심이 형성되는 것은 영적 교회의 기본적인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차이가 천적 천사와 영적 천사를 구별한다고 말합니다. 천적 천사는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하고, 영적 천사는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 인도되며 양심의 질서 안에서 살아갑니다. 둘 가운데 하나가 천국이고 다른 하나가 열등하여 천국이 아니라는 뜻은 아닙니다. 둘 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지만 그 받아들이는 방식과 질서가 다릅니다. 이것이 천적과 영적의 중요한 구별입니다.

 

이제 AC.392가인의 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이 사랑으로부터 직접 신앙에 속한 것을 퍼셉션하는 태고교회의 상태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시키기 시작했을 때, 주님께서는 단순히 그 신앙을 없애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신앙의 지식이 보존되게 하시고, 훗날 그 지식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분리된 신앙을 보존하셨다는 것은 분리를 승인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에게도 다시 체어리티가 주어질 수 있도록 신앙의 지식을 구원의 수단으로 보존하셨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인의 표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것은 타락이지만, 그렇다고 신앙에 관한 모든 지식을 파괴해 버리면 이후의 인간은 무엇을 통하여 체어리티로 인도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인간의 상태가 낮아진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길을 마련하십니다. 사랑에서 직접 진리를 퍼셉션할 수 없게 된 사람에게 말씀을 듣게 하시고, 신앙의 지식을 배우게 하시며, 그 지식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시고,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으로부터 양심을 형성하십니다.

 

따라서 AC.393은 단순히 옛날에는 퍼셉션이 있었고 나중에는 양심이 생겼다는 교회사적 설명이 아닙니다.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길을 계속 이어 가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 줍니다. 인간이 더 이상 천적 방식으로 주님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을 때 주님께서는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더 외적인 길을 통하여 다시 내적인 사랑과 체어리티로 인도하십니다.

 

결국 AC.393의 핵심은 순서는 바뀌었지만 목적은 바뀌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나왔습니다. 이후 영적 교회에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오고 그것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독립하여 생명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분리될 수 없으며 신앙에서 주된 을 이루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가인의 신앙을 보존하신 것도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입니다. 분리된 신앙 자체를 영구히 존속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가 주어지고 신앙과 사랑의 결합이 회복될 수 있도록 길을 남겨 두신 것입니다.

 

 

 

AC.394, 창4:15, ‘가인의 표와 천국의 결혼 - 분리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4이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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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2, 창4:15,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시다 - 분리된 신앙까지 보존하시는 이유’ (AC.392-39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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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4:9)

 

AC.371

여호와께서 말씀하심(speaking of Jehovah)으로 태고교회 사람들은 퍼셉션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에게 지각하는 능력을 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퍼셉션은 사랑이 주된 것이었던 동안에만 계속될 있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그치고, 결과 이웃을 향한 사랑도 그치자 퍼셉션은 소멸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남아 있는 만큼 퍼셉션도 남아 있었습니다. 퍼셉션의 능력은 태고교회에 고유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홍수 사람들에게서처럼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고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지게 되었을 때에는 양심이 뒤를 이었습니다. 양심 역시 딕테이트를 주지만 방식은 다르며, 이에 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양심이 딕테이트를 때에도 말씀에서는 이와 마찬가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Jehovah speaks) 합니다. 양심은 계시된 것들과 지식들, 그리고 말씀으로부터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말하거나 딕테이트를 때에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양심이나 신앙에 관한 일을 말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the Lord says) 하는 것보다 흔한 표현은 없습니다. By the speaking of Jehovah the most ancient people signified perception, for they knew that the Lord gave them the faculty to perceive. This perception could continue no longer than while love was the principal. When love to the Lord ceased, and consequently love toward the neighbor, perception perished; but insofar as love remained, perception remained. This perceptive faculty was proper to the most ancient church, but when faith became separated from love, as in the people after the flood, and charity was given through faith, then conscience succeeded, which also gives a dictate, but in a different way, of which, by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When conscience dictates, it is in like manner said in the Word that Jehovah speaks; because conscience is formed from things revealed, and from knowledges, and from the Word; and when the Word speaks, or dictates, it is the Lord who speaks; hence nothing is more common, even at the present day, when referring to a matter of conscience, or of faith, than to say, the Lord says.

 

해설

AC.371은 지금까지 태고교회와 가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계속 부딪혀 온 퍼셉션과 양심은 어떻게 다른가?라는 문제를 스베덴보리 자신이 매우 명료하게 정리하는 중요한 단락입니다. 특히 바로 앞 AC.370에서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내면에서 오는 어떤 퍼셉션이라고 했는데, 이제 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는 표현이 퍼셉션을 의미할 수 있는지 설명합니다. 동시에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사라진 뒤 왜 양심이 그 뒤를 잇게 되었으며, 양심을 통해서도 주님께서 말씀하신다고 표현할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AC.371은 단순한 한 구절의 어휘 풀이를 넘어, 태고교회와 홍수 후 고대교회의 내적 영적 구조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 주는 핵심 단락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심이 퍼셉션을 의미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에게 지각하는 능력을 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퍼셉션은 단순한 직감이나 느낌이 아닙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주님을 향한 사랑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참된지를 내적으로 지각했습니다. 먼저 어떤 교리를 외부에서 배운 뒤 그것이 옳은지 논리적으로 판단하여 선을 행하는 방식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 자체가 그들의 내면을 질서 있게 하고 있었으므로 그 사랑 안에서 선과 진리를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반드시 외부에서 들려오는 음성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참된지를 내적으로 지각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퍼셉션의 조건을 매우 분명하게 밝힙니다. ‘ 퍼셉션은 사랑이 주된 것이었던 동안에만 계속될 있었습니다.바로 이것이 핵심입니다. 퍼셉션은 인간이 독립적으로 소유한 초자연적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그들의 생명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주님의 선물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랑이 사라지면 퍼셉션도 유지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그치고, 결과 이웃을 향한 사랑도 그치자 퍼셉션은 소멸되었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사랑이 남아 있는 만큼 퍼셉션도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중요한 원리입니다. 퍼셉션이 어느 날 갑자기 주님에 의해 회수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사랑에서 멀어진 만큼 사랑으로부터 오는 퍼셉션도 함께 약해지고 소멸된 것입니다.

 

이 설명은 가인의 계열을 이해하는 데 특히 중요합니다. 가인은 태고교회와 전혀 관계없는 후대의 교회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 안에서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 가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에게 태고교회 전성기의 순수한 퍼셉션이 온전히 있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퍼셉션이 처음부터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AC.371사랑이 남아 있는 만큼 퍼셉션도 남아 있었다고 직접 말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AC.370에서 스베덴보리가 a certain perceptivity from within’, 내면에서 오는 어떤 퍼셉션이라고 표현한 이유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가인의 상태에서는 사랑이 크게 훼손되고 체어리티가 소멸되어 가고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퍼셉션의 흔적까지 한순간에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AC.371은 결정적인 역사적·영적 전환을 설명합니다. ‘ 퍼셉션의 능력은 태고교회에 고유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홍수 사람들에게서처럼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고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지게 되었을 때에는 양심이 뒤를 이었습니다.이것이 우리가 계속 구별해 온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과 홍수 후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 사이의 차이입니다. 태고교회의 질서는 사랑이 먼저이고 그 사랑 안에서 신앙과 진리를 지각하는 질서였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상실된 뒤에는 인간이 먼저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이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면서 체어리티로 인도되는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내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말해 주는 것이 양심입니다.

 

그렇다고 양심이 퍼셉션의 낮은 복제품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양심 역시 딕테이트를 주지만 방식은 다르다고 명시합니다. 퍼셉션과 양심은 모두 인간에게 내적으로 무엇인가를 알려 준다는 점에서는 비슷해 보이지만 그 근거와 작용 방식이 다릅니다. 퍼셉션은 사랑의 선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지각하는 태고교회의 천적 방식이고, 양심은 계시된 진리와 신앙의 지식, 특히 말씀으로부터 형성되어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내적으로 말해 주는 영적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안에서 어떤 강한 느낌이 든다는 것을 모두 퍼셉션이나 양심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특히 양심은 개인의 주관적인 감정 자체가 아니라 사람이 참되다고 받아들인 선과 진리를 토대로 형성됩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양심은 계시된 것들과 지식들, 그리고 말씀으로부터 형성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장입니다. 양심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완성된 형태로 가지고 있는 독립적인 내적 음성이 아닙니다. 무엇이 선이고 참된지를 배우고 받아들이며 그것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 가운데 형성됩니다. 특히 말씀으로부터 받은 진리가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고 그 진리에 반하는 일을 하려고 할 때 내적으로 제지하고, 그 진리에 따라 행하려 할 때 이끄는 것이 양심의 작용입니다. 따라서 잘못된 것을 진리라고 확신하면 왜곡된 양심이 형성될 가능성도 있으며, 참된 양심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진리를 배우는 것과 그 진리에 따라 살려는 의지가 함께 중요합니다.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는 표현이 왜 양심에도 사용될 수 있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이 말하거나 딕테이트를 때에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이라고 합니다. 양심이 말씀과 계시된 진리로부터 형성되어 있다면, 그 양심을 통하여 말씀의 진리가 인간에게 내적으로 말할 때 그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태고교회에서는 퍼셉션을 두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할 수 있었고, 후대의 영적 인간에게서는 말씀으로 형성된 양심의 딕테이트를 두고도 주님께서 말씀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표현은 같지만 내적 방식은 다릅니다.

 

이 설명은 바로 앞 AC.359-360에서 생겼던 난제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그곳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conscience dictated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당시 가인이 태고교회 문맥에 있으므로 이것을 곧바로 홍수 후 고대교회의 완성된 양심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조심했습니다. AC.371은 그 조심스러운 태도가 필요했음을 확인해 주면서도 한 가지를 더 밝혀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퍼셉션과 양심의 차이를 분명히 알고 있으며 바로 이 단락에서 직접 구별합니다. 따라서 AC.359-360conscience를 단순한 실수라고 보거나 임의로 perception으로 고칠 이유는 없습니다. 반대로 그것만을 근거로 가인에게 후대 영적 인간과 동일한 양심이 있었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AC.370-371이 보여 주듯 가인의 시대는 사랑과 함께 퍼셉션이 쇠퇴해 가는 과정 안에 있으며, 스베덴보리는 그 내적 딕테이트를 설명하면서 문맥에 따라 퍼셉션과 양심에 관련된 표현을 사용합니다. 정확한 관계를 본문 이상으로 체계화하기보다 그가 직접 밝힌 구별을 보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AC.371은 또한 거듭남의 질서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사랑으로부터 직접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는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배우고, 진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삶의 기준으로 받아들이며, 주님께서 그 진리를 통하여 우리의 양심을 형성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해야 한다는 외적인 순종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에 따라 살면서 주님께서 그 진리를 선과 결합시키시면, 점차 단순히 규칙을 지키는 데서 벗어나 선 자체를 사랑하고 행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진다는 말도 신앙 자체가 체어리티의 근원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사랑과 선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시며, 신앙의 진리는 인간이 그 사랑과 선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수단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오늘날 신앙생활과 직접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양심이나 신앙에 관한 일을 말할 때 주님께서 말씀하신다고 하는 것이 지금도 매우 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음속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곧바로 주님이 내게 말씀하셨다고 신성화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AC.371은 그 반대의 기준을 줍니다. 양심은 계시된 것들과 지식들, 그리고 말씀으로부터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내적 음성이나 확신이 정말 주님의 진리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말씀에 비추어 살펴야 합니다. 자기 욕망이나 두려움이나 proprium에서 나온 생각을 주님의 음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위험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근거는 인간 자신의 주관적 확신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이며, 오늘날 우리에게 그 중심적인 토대는 말씀입니다.

 

결국 AC.371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는 한 표현 속에 서로 다른 두 시대의 영적 질서를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주된 것이었고, 그 사랑으로부터 퍼셉션이 있었습니다. 사랑이 사라진 만큼 퍼셉션도 사라졌습니다. 홍수 후에는 인간의 상태가 달라졌고, 말씀과 계시된 진리로부터 형성되는 양심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퍼셉션도 양심도 인간 자신의 독립적인 능력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을 선과 진리로 이끄시는 방식입니다. 다만 그 방식이 서로 다릅니다. 이 차이를 붙들면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고대교회의 양심을 혼동하지 않으면서도, 두 경우 모두에서 왜 말씀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표현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70, 창4:9,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 체어리티를 완전히 거부하게 된 신앙’ (AC.370-3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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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4:9)

 

AC.37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Jehovah said unto Cain) 것은 체어리티, 아우 아벨(brother Abel) 관하여 그들에게 어떤 딕테이트를 주는, 내면에서 오는 어떤 퍼셉션(a certain perceptivity from within) 의미합니다. 가인의 대답인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신앙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겼으며, 체어리티에 종속되기를 원하지 않았고, 결과 신앙이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을 완전히 거부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교리는 이와 같이 되었습니다. “Jehovah said unto Cain signifies a certain perceptivity from within that gave them a dictate concerning charity or the brother Abel.Cains reply,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signifies that faith considered charity as nothing, and was unwilling to be subservient to it, consequently that faith altogether rejected everything of charity. Such did their doctrine become.

 

해설

AC.370은 창4: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와 가인의 대답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를 설명합니다. 앞의 창4:6-8에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이 체어리티와의 올바른 질서를 거부하다가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제 아벨이 죽은 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문자적으로는 살인한 가인에게 아벨의 행방을 묻는 장면이지만, 속뜻에서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신앙에게 다시 체어리티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는 장면입니다. 그러므로 AC.370은 앞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한 단계 더 깊은 교리적 상태로 끌고 갑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에 대한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체어리티, 아우 아벨에 관하여 그들에게 어떤 딕테이트를 주는, 내면에서 오는 어떤 퍼셉션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AC.359-360과 함께 읽으면 특히 흥미롭습니다. 거기서는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conscience dictated’,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a certain perceptivity from within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 자신이 이 가인 계열의 내적 경고를 설명하면서 양심퍼셉션에 관련된 표현을 모두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두 용어의 교리적 구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 특징적인 것은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지각하는 퍼셉션이고, 홍수 후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에게 특징적인 것은 배운 진리와 선으로부터 형성되는 양심입니다. 그러므로 AC.370의 표현은 가인 계열에게 후대 고대교회의 양심이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는 증거로 읽기보다, 태고교회의 질서가 크게 훼손된 상태에서도 체어리티에 관하여 내면에서 무엇인가를 알리고 지시하는 퍼셉션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벨은 이미 죽었습니다. 속뜻으로는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이것은 인간이 체어리티를 거부했다고 해서 주님께서 즉시 그를 완전히 버리시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내면에서는 여전히 아벨이 어디 있느냐’, 체어리티는 어디에 있느냐는 딕테이트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모르셔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알 수 있도록 내면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앞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 전에도 주님께서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고 말씀하셨듯이, 체어리티를 실제로 소멸시킨 뒤에도 주님의 말씀은 계속됩니다. 인간의 상태가 변한다고 해서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먼저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가인의 대답은 이제 그들의 상태가 얼마나 깊이 굳어졌는지를 보여 줍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스베덴보리는 이 짧은 대답을 세 단계로 풉니다. 첫째, 신앙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겼습니다.둘째, 신앙은 체어리티에 종속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셋째, 그 결과 신앙은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을 완전히 거부했습니다.앞의 번호들에서 진행되어 온 가인의 타락이 여기에서 하나의 완성된 교리적 태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구별하는 데서 시작했지만, 신앙을 사랑에서 독립된 것으로 여기면서 둘의 분리가 생겼고, 그 결과 체어리티 없는 행위와 예배가 나타났습니다. 이어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주도권을 가지려 했고, 마침내 아벨을 죽였습니다.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아벨을 지켜야 하는가?라고 말합니다. 체어리티 자체를 신앙과 무관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체어리티에 종속되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표현은 특별히 주의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가 신앙을 억압하거나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열등하여 없어져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과 체어리티가 결합될 때 각각의 기능이 온전해진다는 뜻입니다. 신앙의 진리는 무엇이 선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밝혀 주지만, 그 진리를 사랑하고 실제로 행하게 하는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체어리티 아래 있다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기며 그것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앞의 AC.361-365에서 스베덴보리가 강조했듯이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면 질서가 뒤집힙니다.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야 하며, 체어리티는 신앙을 통하여 자신이 어떻게 선을 행해야 하는지를 알아갑니다. 둘은 서로를 필요로 하지만 그 생명의 근원과 주도권은 사랑과 체어리티에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는 말은 단순한 책임 회피보다 훨씬 깊은 뜻을 갖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아우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본래 서로 완전히 무관한 두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의 문자 자체가 보존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둘은 형제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이제 내가 그를 지켜야 하는가?라고 묻습니다. 속뜻으로 읽으면 신앙이 체어리티를 돌보아야 하는가? 신앙이 체어리티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는 말이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신앙은 자기 존재의 목적을 잃어버립니다. 신앙의 모든 진리는 궁극적으로 인간을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인도하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선을 실제 삶으로 행하게 하기 위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선언한다면 자신에게 생명을 주는 목적과 결합을 거부하는 셈입니다.

 

마지막의 그들의 교리는 이와 같이 되었습니다라는 한 문장도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가인이라는 한 개인이 순간적으로 거짓말하고 책임을 회피했다는 심리적 설명에 머물지 않습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의 교리가 이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지만, 그것이 반복되고 확증되면서 하나의 교리가 되었습니다. 신앙을 그 자체로 구원의 본질적인 것으로 높이고,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낮추며, 마침내 체어리티에 속한 것을 신앙에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는 체계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단지 사람들이 이웃 사랑을 잘 실천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이라는 사실 자체를 교리적으로 거부하기에 이른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교리가 왜 중요한지도 역으로 보여 줍니다. 교리는 단순히 머릿속에 저장된 신학적 문장이 아닙니다. 무엇을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느냐에 따라 사람의 사랑과 삶의 방향도 영향을 받습니다. 체어리티를 신앙의 생명으로 인정하는 교리는 사람이 내가 믿는 진리가 어떻게 이웃의 선으로 나타나야 하는가?를 묻게 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를 신앙과 무관한 것으로 만드는 교리는 결국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는 태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오늘날 특정 교파나 특정 신학적 표어를 가진 모든 사람에게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다루는 것은 신앙이 실제로 사랑과 삶에서 분리되어 체어리티를 무가치한 것으로 만드는 내적 원리입니다. 사람의 실제 영적 상태는 그가 사용하는 교리적 명칭만이 아니라 그가 무엇을 사랑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AC.370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함께 놓으면 더욱 깊은 대비가 나타납니다. 한쪽에서는 내면으로부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퍼셉션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그들이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대답하는 교리를 만들어 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내적 딕테이트와 인간이 스스로 확증한 교리가 서로 맞서는 것입니다. 내면에서는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임을 알리고 있는데, 인간은 신앙이 체어리티 아래 있기를 거부하는 교리를 세웁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는 단순히 진리를 몰랐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체어리티에 관한 어떤 내적 퍼셉션이 있었음에도 그것을 거부하고 반대되는 것을 교리로 굳혔다는 데 있습니다.

 

결국 AC.370은 창4:9의 질문을 우리에게도 돌려놓습니다. ‘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이것은 단지 가인에게 죽은 동생의 행방을 묻는 질문이 아니라,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람에게 신앙 안에서 체어리티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는 질문이 됩니다. 우리가 알고 고백하는 진리가 실제로 이웃의 참된 선을 구하게 하는지, 우리의 신앙이 사랑과 자비와 쓰임의 삶으로 이어지는지, 아니면 신앙의 정확성을 주장하면서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참된 신앙은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홀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비로소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AC.371, 창4:9, ‘퍼셉션에서 양심으로 -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의 속뜻’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창4:9) AC.371‘여호와께서 말씀하심’(speaking of Jehovah)으로 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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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9, 창4:8, ‘가인이 아벨을 죽이다 -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신앙’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9그러므로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그들이 함께 들에 있을 때에’(Cain r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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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9 심화

1. ‘양심은 홍수 후 고대교회부터인데, 왜 가인에게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하는가?

AC.359를 읽다가 상당히 중요한 의문을 만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를 설명하면서 아주 분명하게 conscience dictated’,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AC를 읽으며 배운 교회의 영적 역사를 생각하면 이 표현이 선뜻 이해되지 않습니다. 태고교회의 특징은 양심(conscience)이 아니라 퍼셉션(perception)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양심은 홍수 이후 노아로 표상되는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에게서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아직 홍수 이전인 가인에게 어떻게 양심’이 있을 수 있을까요?

 

먼저 가장 분명한 원칙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태고교회와 고대교회의 내적 구조는 같지 않습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사랑의 선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했습니다.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가 오늘날 사람처럼 분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선을 사랑하면 그 선으로부터 무엇이 진리인지를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반면 홍수 이후의 사람들은 이 천적 구조를 잃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AC.310에서 홍수 후 사람들에게는 천적 씨가 아니라 영적 씨가 있으며, 이들에게 주님께서는 진리의 지식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선에 기초하여 양심을 심어 주심으로써 체어리티에 이를 수 있도록 하신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홍수 이전과 이후의 인간 구조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매우 중요한 설명입니다.

 

따라서 태고교회 = 퍼셉션, 고대교회 = 양심’이라는 기본 구별은 그대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앞서 AC.224를 해설하면서도 이 문제를 한 번 만났습니다. 3의 타락한 아담과 하와를 두고 양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표현하면 시대가 뒤섞인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도 양심의 흔적’보다는 퍼셉션의 잔재’, ‘남아 있는 지각’, ‘약해진 퍼셉션’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정리했습니다.

 

그렇다면 AC.359에서는 왜 스베덴보리 자신이 conscience’라고 했을까요? 여기서 첫 번째로 주의할 것은 가인’을 태고교회의 처음 상태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4에서 다루는 것은 이미 타락이 시작된 이후의 태고교회 후손들과 거기서 파생된 교리적 상태들입니다. 가인은 본래 사랑 안에 하나로 존재하던 신앙에 속한 것들이 점차 독립된 것으로 여겨지고, 마침내 사랑과 분리된 신앙의 교리가 되어 가는 과정을 표상합니다. 즉 가인은 퍼셉션이 가장 충만했던 태고교회의 전성기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천적 질서가 해체되어 가는 과정 안에 있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AC.359 conscience’는 노아 이후 영적 인간의 양심이 이미 가인에게 완성되어 있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곤란합니다. 그렇게 읽으면 AC.310에서 스베덴보리가 매우 분명하게 설정한 홍수 이전과 이후의 차이가 무너집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가 실수로 conscience라고 썼으니 사실 perception이라고 읽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AC.359의 문장은 분명히 conscience dictated’입니다. 따라서 두 진술을 모두 보존하면서 그 관계를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실마리가 앞의 AC.224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곳에서 자비, 평화, 그리고 모든 ,  여호와의 얼굴들’이 퍼셉션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딕테이트(dictate) 원인이 되며, 비록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양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라고 설명합니다. 즉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시지만 그 내적 딕테이트가 받아들여지는 방식은 인간의 영적 상태에 따라 다릅니다. 퍼셉션을 가진 천적 인간에게는 퍼셉션의 방식으로, 양심을 가진 영적 인간에게는 양심의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을 AC.359에 비추어 보면, 여기서 핵심은 conscience’라는 단어 하나를 시대 구분의 기술적 용어로만 읽기보다 Jehovah said’, 곧 주님에게서 오는 내적 딕테이트가 아직 가인에게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왜 여기서 특별히 perception dictated’가 아니라 conscience dictated’라고 표현했는지에 대해서는 AC.359 자체가 더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는 본문이 말하는 것 이상을 단정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전체 문맥에서 한 가지는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가인은 이미 태고교회의 순수한 천적 상태에서 상당히 멀어지고 있습니다.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독립되기 시작했고, 그 분리가 교리로 굳어지고 있으며, 체어리티 없는 행위와 예배가 생겨났습니다. 이제 체어리티가 받아들여지고 자기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노하고 그의 내적인 것들까지 변합니다. 따라서 AC.359의 가인은 태고교회의 온전한 퍼셉션을 가진 사람의 상태를 보여 주는 인물이 아닙니다.

 

이 점에서 가인은 오히려 매우 흥미로운 과도기적 상태’를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 가인에게 퍼셉션이 양심으로 바뀌기 시작했다’고까지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홍수 후 인간에게 마련된 새로운 영적 구조와 양심의 형성을 명백히 구별하기 때문입니다. AC.310에 따르면 홍수 후 사람들에게는 사랑이나 선한 의지가 본래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진리를 이해하고 신앙할 능력은 남아 있으며, 주님께서는 바로 그 진리의 지식에 기초하여 양심을 심어 주십니다. 이것이 고대교회와 오늘날 영적 인간에게 속하는 본격적인 양심의 질서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conscience’와 홍수 후 영적 인간의 conscience’를 완전히 동일한 구조라고 단정하는 것보다는, AC.359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멀어져 가는 가인에게도 아직  잘못을 내적으로 알리는 딕테이트가 있었다’는 데 초점을 두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가인은 이미 분노했습니다. 그의 내적인 것들도 변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에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AC.359가 강조하는 결정적인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의 가인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아무런 경고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고, 그 분리에서 죽은 행위와 예배가 생기고, 체어리티가 떠나면서 분노가 일어나고, 내적인 것들이 변했을 때에도 주님의 내적 딕테이트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그 말씀을 따라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하는 길로 돌아서지 않았고, 결국 다음 단계에서 아벨, 곧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라는 더 깊은 원리도 담겨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강제하시지 않습니다. 강제로 선하게 만든다면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이 사라지고, 따라서 진정한 거듭남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이 악을 행하기 전에 끊임없이 선과 진리를 통하여 경고하시고, 돌이킬 수 있는 길을 마련하십니다. 가인에게  네가 분하여 하느냐?’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러한 장면입니다. 강제가 아니라 딕테이트이고, 심판에 앞선 경고이며, 자유 안에서 다시 선을 선택하도록 하시는 자비입니다.

 

이제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할 때에는 다시 시대를 건너와야 합니다. 우리는 가인 시대의 홍수 이전 인간이 아닙니다. AC.310이 설명하듯 우리는 홍수 이후의 영적 인간 구조에 속하며, 주님께서는 말씀에서 배운 진리를 통하여 우리 안에 양심을 형성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내가 이렇게 분노하는가?’, ‘이것이 정말 진리를 위한 분노인가, 아니면  proprium 상처받았기 때문인가?’, ‘내가 옳음을 주장하는 동안 체어리티가 떠나고 있지는 않은가?’라고 내적으로 살피게 될 때, 그 양심의 딕테이트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AC.359는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엄중한 경고가 됩니다. 양심의 소리를 반복해서 거스르면 처음에는 잘못인  알면서 하는 ’이었던 것이 점차 잘못이라고 느끼지 않는 ’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가인의 경우에도 분노 그 자체가 마지막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분노에서 돌이키지 않자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영적으로는 체어리티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은 단순히 죄를 지은 뒤 우리를 괴롭히는 기능이 아니라, 악이 아직 행위와 습관과 지배적 사랑으로 굳어지기 전에 주님께서 우리를 돌이키시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결국 AC.359의 이 작은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인간론 전체를 다시 보게 합니다. 태고교회에는 퍼셉션이 있었고, 그 퍼셉션은 교회가 타락하면서 점차 쇠퇴했습니다. 홍수 후에는 인간의 구조가 달라졌으며, 주님께서는 진리의 지식을 통하여 양심을 형성하시는 새로운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따라서 AC.359 conscience dictated’를 이 두 시대의 구별을 무시한 채 단순하게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표현을 지워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구별을 하고 나면 AC.359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중요한 것은 가인의 내적 딕테이트를 정확히 어느 시대의 기술적 범주에 넣을 것인가만이 아닙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가인의 얼굴이 떨어진 , 그러니까 안색이 변한 뒤에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체어리티가 떠나고 내적인 것들이 변하기 시작했어도 주님의 자비는 먼저 떠나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악을 향하여 가는 바로 그 길목에서 주님께서는 여전히 말씀하시고, 보게 하시고, 돌이킬 기회를 주십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든, 후대 영적 인간의 양심이든, 그 모든 선한 내적 딕테이트의 궁극적인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거듭남의 중요한 순간은 바로 그 말씀을 들었을 때 가인처럼 자기 분노를 붙드는가, 아니면 주님 앞에서 자기 상태를 보고 체어리티로 돌아서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AC.359,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 양심을 통한 주님의 부르심’(AC.359-36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is thine anger kindled?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창4:6) AC.35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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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4:1)

 

AC.34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라는 말은 가인(Cain)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 신앙이 자체로 하나의 으로 인식되고 인정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장의 처음에서 말한 것으로 분명합니다. 이전에는 그들이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퍼셉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마치 알지 못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신앙에 관한 구별된 교리를 만들기 시작했을 , 이전에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것들을 가져다가 교리로 정리하였고, 그것을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마치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라도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하여 이전에는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이제는 단지 지식으로 아는 것이 되었습니다. 고대에는 새로운 것이 생길 때마다 그것에 이름을 붙였으며, 이런 식으로 이름 안에 담긴 것들을 나타냈습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라는 말로 설명되고(16:11), That the wordsI have gotten a man, Jehovahsignify that with such as are calledCainfaith is recognized and acknowledged as a thing by itself, is evident from what was said at the beginning of this chapter. Previously, they had been as it were ignorant of what faith is, because they had a perception of all the things of faith. But when they began to make a distinct doctrine of faith, they took the things they had a perception of and reduced them into doctrine, calling itI have gotten a man, Jehovah,” as if they had found out something new; and thus what was before inscribed on the heart became a mere matter of knowing. In ancient times they gave every new thing a name, and in this way set forth the things involved in the names. Thus the signification of the name Ishmael is explained by the saying, “Jehovah hath heard her affliction;” (Gen. 16:11)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6:11)

 

르우벤은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므로(Jehovah hath looked upon my affliction)라는 말로(29:32), that of Reuben, by the expression, “Jehovah hath looked upon my affliction;” (Gen. 29:32)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29:32)

 

시므온은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Jehovah hath heard that I was less dear)라는 말로(29:33), the name Simeon, by the saying, “Jehovah hath heard that I was less dear;” (Gen. 29:33)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29:33)

 

유다는 이번에는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This time will I praise Jehovah)라는 말로 설명됩니다(29:35). and that of Judah by, “This time will I praise Jehovah;” (Gen. 29:35)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29:35)

 

또한 모세는 자신이 세운 제단을 여호와 닛시’, 여호와는 나의 깃발(Jehovah my banner)이라고 불렀습니다(17:15). and an altar built by Moses was called, “Jehovah my banner.” (Exod. 17:15)

 

모세가 제단을 쌓고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17:15)

 

이와 같은 방식으로 여기서는 신앙의 교리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 가인(Cain)이라고 것입니다. In like manner the doctrine of faith is here denominatedI have gotten a man, Jehovah,orCain.

 

해설

AC.340은 바로 앞 AC.338에서 말한 신앙이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었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주의할 것은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전혀 새로운 거짓 신앙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그들이 교리로 정리한 것은 이전부터 태고교회 안에 있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이었습니다. 달라진 것은 진리의 내용 자체라기보다 그것을 알고 받아들이는 방식이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서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퍼셉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역설적으로 그들이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마치 알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고 합니다. 신앙에 무지했다는 뜻이 아니라, 신앙이 사랑과 분리된 하나의 독립적인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을 따로 떼어 정의하고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에게 신앙에 속한 것은 이미 사랑과 생명 안에 들어 있었고, 말하자면 마음에 새겨져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전에는 사랑 안에서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하나씩 따로 꺼내어 구별하고, 그것들을 신앙에 관한 교리로 정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변화를 이전에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이제는 단지 지식으로 아는 것이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그들이 정리한 모든 내용이 갑자기 거짓이 되었다는 뜻도 아니고, 교리를 만들었다는 행위 자체가 악이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문제는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에서 본래 사랑 안에 살아 있던 신앙이 점차 사랑으로부터 구별되고, 마침내 자체로 하나의 처럼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AC.338에서 보았듯 가인의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사랑 안에 있어야 할 신앙을 사랑과 별개로 성립할 수 있는 무엇으로 세우기 시작한 데 있습니다. AC.340은 그 분리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퍼셉션으로 알던 지식으로 알게 의 대비를 통하여 보여 줍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한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에 전혀 몰랐던 진리를 처음 발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사랑 안에서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것을 따로 꺼내어 교리적으로 정리하고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는 말로 표현됩니다. 무엇인가를 새로 얻었다고 여겼고, 그렇게 얻었다고 여긴 신앙의 교리를 가인이라 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미묘한 역설이 있습니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전에 가지고 있던 더 내적인 앎의 방식을 잃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진리를 사랑 안에서 살아서 알았는데 이제는 그것을 자기 앞에 하나의 대상으로 세워 지식으로 알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이 생명 안에서 알려지는 것에서 신앙에 관하여 아는 것으로 옮겨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퍼셉션은 좋고 지식은 나쁘다’, 또는 교리가 없는 신앙이 교리가 있는 신앙보다 높다는 일반적인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특수한 천적 상태를 설명하는 문맥이기 때문입니다. AC.337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에게서는 사랑이 먼저였고 그 사랑을 통하여 신앙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퍼셉션이 주어졌다고 설명하면서, 곧이어 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고 했습니다. 후대의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며,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말씀을 배우고 교리를 공부하며 선과 진리를 구별하여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거듭남에 필요한 과정입니다. 문제는 그 진리가 지식에만 머물러 체어리티와 결합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단지 지식이 되어 가는 방향으로 쇠퇴가 나타났다면, 후대 인간에게서는 주님께서 지식과 신앙으로 받아들인 진리를 다시 사랑과 삶 안으로 이끄셔서 체어리티와 결합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두 시대의 질서를 단순히 같은 공식으로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AC.340 후반에 이스마엘, 르우벤, 시므온, 유다, 그리고 여호와 닛시가 차례로 인용되는 이유도 바로 이 가인이라는 이름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마엘은 여호와께서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는 말과 함께 이름이 주어지고(16:11), 르우벤은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므로라는 말과 연결되며(29:32), 시므온은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라는 말과 연결됩니다(29:33). 유다는 이번에는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말에서 그 이름이 주어지고(29:35), 모세가 세운 제단에는 여호와 닛시라는 이름이 붙습니다(17:15).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인용한 것은 여기서 이스마엘이나 르우벤, 시므온, 유다의 속뜻을 각각 해설하거나 여호와 닛시의 상응을 따로 밝히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 모든 예가 보여 주는 공통점은 고대에는 어떤 상태나 사건의 성질을 이름 안에 담아 나타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역시 단순한 호칭으로만 읽을 것이 아니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말로 표현된 교회적, 교리적 상태를 담고 있는 이름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바로 앞 AC.339와도 정확히 이어집니다. AC.339에서는 태고인들이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으로 어떤 것들을 의미하게 하였으며, 교회에 속한 것들이 자연적인 출생처럼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잉태되고 태어나는관계를 이루기 때문에 그러한 이름들로 계보를 구성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340에서는 그 원리를 실제 성경의 여러 이름을 통하여 확인합니다. 그러므로 이 다섯 인용구절은 각각 독립된 다섯 가지 주제를 여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설명을 여러 사례로 뒷받침합니다. ‘이스마엘’, ‘르우벤’, ‘시므온’, ‘유다’, ‘여호와 닛시가 각각 그 이름과 관련된 상태와 의미를 담고 있듯이, ‘가인이라는 이름에도 태고교회 안에서 일어난 특정한 변화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AC.339AC.340은 서로 떨어진 설명이 아니라, ‘교회에 속한 것들이 어떻게 이름과 계보로 표현되는가를 설명하는 하나의 연속된 해석 원리가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가인의 시작이 얼마나 미묘한지를 다시 보게 됩니다. 처음부터 사랑은 필요 없다’, ‘체어리티는 중요하지 않다고 선언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신앙에 속한 것을 따로 구별하여 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본래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것을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신앙은 점차 사랑으로부터 독립된 위치를 갖게 됩니다. 이후 창4의 흐름에서 이 분리는 더 분명해져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곧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AC.340은 단순히 옛사람들은 이름을 어떻게 지었는가?를 설명하는 글이 아닙니다. 가인이라는 교리적 상태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번호입니다. 마음에 새겨져 있던 신앙이 지식의 대상이 되고, 그 지식이 사랑 안에 다시 머물지 않고 그 자체로 하나의 것이 될 때 신앙과 사랑의 본래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이 대목은 AC를 읽고 공부하는 우리에게도 매우 실제적인 경고가 됩니다. 우리는 상응’, ‘퍼셉션’, ‘리메인스’, ‘ 사람과 사람’,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같은 개념을 배우면서 이전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이 아는 것과 그 진리가 우리 안에서 살아 있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적 지식이 많아질수록 그것을 내가 얻은 으로 여기고, 그 지식 때문에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더 밝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위험도 생길 수 있습니다. 진리는 우리가 소유하여 자신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수단입니다. 배운 진리를 통하여 자기 안의 악을 보고 그것을 죄로 여겨 피하며, 주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는 체어리티와 쓰임으로 나아갈 때 그 진리는 비로소 우리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그러므로 AC.340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는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가?보다 더 깊습니다. ‘내가 아는 진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머리에만 있는가, 아니면 주님의 역사하심으로 마음과 삶에도 새겨지고 있는가?바로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가인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 살아 있는지를 살피게 하는 말씀으로 읽게 됩니다.

 

 

 

AC.341, 창4: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AC.341-345)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창4:2) AC.341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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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9, 창4:1, ‘창4의 계보를 읽는 매우 중요한 해석 원리’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39앞의 세 장에서 ‘아담과 그의 아내’(man and his wife)가 태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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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Jehovah(4:1)

 

AC.338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the man and Eve his wife) 지금까지 밝혀진 것처럼 태고교회를 의미합니다. 교회의 번째 자손, 처음 것은 신앙이며, 여기서는 그것을 가인(Cain)이라 합니다. 하와가 말한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 것은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 신앙이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By the man and Eve his wife is signified the most ancient church, as has been made known; its first offspring, or firstborn, is faith, which is here called Cain; her saying I have gotten a man, Jehovah, signifies that with those called Cain, faith was recognized and acknowledged as a thing by itself.

 

해설

AC.338부터 스베덴보리는 창4:1의 각 표현을 본격적으로 풀이하기 시작합니다. 앞의 AC.324-337이 창4 전체의 속뜻을 미리 보여 주는 개요였다면, 이제부터는 본문을 한 구절씩 따라가며 그 안에 담긴 교회적 상태를 자세히 해설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를 다시 단순한 두 개인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들이 태고교회를 의미한다고 분명히 밝힙니다. 그리고 그 태고교회의 번째 자손, 처음 을 신앙이라고 하며, 그것을 여기서는 가인이라고 합니다. 이 표현은 처음 읽으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앞의 개요에서 가인을 계속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라고 읽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AC.338에서는 그를 단순히 신앙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서로 모순되는 설명이 아닙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생겨났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태고교회에도 당연히 신앙에 속한 것이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의 신앙은 사랑과 나란히 독립적으로 서 있는 무엇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퍼셉션으로 알았고, 그 앎이 바로 그들의 신앙이었습니다. AC.337에서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는 어떠한 신앙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 것도 바로 이 뜻입니다. 그들에게 신앙은 사랑 안에 살아 있었고, 사랑으로부터 주님께 받은 퍼셉션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AC.338에서 중요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 신앙이 자체로 하나의 으로 인식되고 인정되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사랑과 별개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신앙이 사랑 안에서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성립할 수 있는 무엇처럼 인식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가인의 성격을 드러냅니다.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은 필요 없다고 노골적으로 선언하는 상태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신앙에 속한 것을 사랑 안에서 떼어 내어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보기 시작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 분리가 이후 체어리티보다 신앙을 더 높이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따라서 가인을 처음에는 좋은 신앙이었는데 나중에 나쁜 신앙으로 변했다고 단순히 시간적으로 나누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AC.338에서 이미 신앙을 자체로 하나의 으로 인정하는 데서 가인의 고유한 분리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신앙이라는 참된 것을 가진 상태이면서 동시에 그 신앙을 본래의 사랑의 질서에서 떼어 내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이 점에서 신앙을 구별하는 신앙을 분리하는 을 반드시 구별해야 합니다. 사랑과 신앙을 개념적으로 구별하여 설명하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오히려 그렇게 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 무엇이고 체어리티가 무엇인지, 진리와 선이 어떻게 관계하는지 분명히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구별된 것을 서로 떨어져도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순간 문제가 달라집니다. 신앙이 사랑 없이도 참된 신앙일 수 있다고 여기고, 나아가 사랑과 체어리티보다 신앙을 더 본질적인 것으로 높이면 구별분리가 됩니다. 가인의 문제는 바로 이 분리입니다. 앞에서 사용했던 부부의 비유도 여기에 도움이 됩니다. 서로 깊이 사랑하는 부부에게 존중과 배려와 신실함은 사랑 안에서 자연스럽게 살아 있습니다. 그 원칙들을 글로 정리하는 것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사랑이 없어도 규칙만 정확히 지키면 좋은 부부다라고 생각한다면 원칙이 사랑에서 독립하여 사랑을 대신하기 시작합니다. 신앙과 사랑의 관계도 이와 비슷합니다.

 

하와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는 말도 이 문맥에서 중요합니다. 영어 표현은 I have gotten a man, Jehovah인데, 스베덴보리는 이 말에서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에게 신앙이 하나의 독립된 실재처럼 인식되고 인정되었다는 의미를 읽습니다. 중요한 점은 그들이 신앙을 거짓이라고 여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을 참되고 중요한 것으로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의 위험을 더욱 미묘하게 만듭니다. 명백한 거짓 하나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참된 것 하나가 본래 그것이 결합되어 있어야 할 사랑의 질서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성을 주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단이나 교리의 왜곡도 언제나 처음부터 모든 진리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것 하나를 전체보다 높이고 다른 진리와 선의 살아 있는 관계에서 떼어 내는 데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처음 ’, 곧 첫 번째 자손이라는 표현 역시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단순히 태고교회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먼저 태어난 한 개인이라는 뜻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관심을 두는 것은 태고교회로부터 어떤 교리적 상태가 처음 파생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따라서 창4의 계보를 단순한 시간표로만 읽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인과 그의 후손들은 개인들의 전기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 안에서 생겨난 교리적, 교회적 상태들이 어떻게 파생되고 변화했는지를 표상합니다. 또한 AC.338은 가인의 타락이 이미 완성된 상태만을 보여 주는 번호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분리가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자체로 하나의 으로 보기 시작한 변화가 나중에는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는 신앙으로 진행하고,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상태까지 이어집니다. 겉으로는 미세해 보이지만 사랑과 신앙의 본래 질서를 바꾸는 결정적인 방향 전환입니다.

 

AC.337과 함께 읽으면 이 점이 더욱 선명합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과 신앙이 퍼셉션 안에서 하나였기 때문에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따로 세우는 것 자체가 당시에는 매우 심각한 왜곡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신앙과 체어리티를 개념적으로 구별하여 배우는 것은 그 자체로 가인의 상태가 아닙니다. 후대의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며,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배우고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 자체는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고 사랑과 삶에서 분리된 채 자기 자신을 최종적인 것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AC.338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단지 내가 믿는 교리가 옳은가?가 아닙니다. ‘ 교리가 무엇과 결합되어 있는가?도 함께 물어야 합니다. 아무리 참된 교리라도 자기 확신과 자기 우월성을 강화하는 데만 사용된다면 그 진리는 본래의 질서를 잃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진리를 더 알수록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자기 악을 더 분명히 보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실제 체어리티와 쓰임으로 나아가게 된다면 그 신앙은 자신의 참된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생명은 신앙 자체를 높이는 데 있지 않고, 주님께서 그것을 통하여 선과 체어리티를 이루시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38의 핵심은 단순히 가인은 신앙이다가 아닙니다. ‘가인은 본래 사랑 안에 있어야 신앙을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정하기 시작한 상태다라는 데 있습니다. 가인의 분리는 체어리티에 대한 노골적인 공격으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본래 하나로 있어야 할 것을 따로 세우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창4의 상세 해설은 이제 바로 그 분리가 어떻게 점차 교회의 질서를 바꾸고,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며, 결국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가는지를 하나씩 보여 줄 것입니다.

 

심화

1. 가인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AC.338 심화 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AC.338 심화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AC.338을 읽다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질문이 생깁니다. 앞의 개요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을 분명히 ‘사랑에서 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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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님께서는 가인의 분리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을까?

 

AC.338 심화 2, 주님께서는 왜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을까?

AC.338 심화2. 주님께서는 왜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을까? AC.338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질문이 있습니다. 태고교회 안에서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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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9, 창4:1, ‘창4의 계보를 읽는 매우 중요한 해석 원리’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39앞의 세 장에서 ‘아담과 그의 아내’(man and his wife)가 태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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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7, 창4, ‘참된 태고교회를 알아야 가인의 왜곡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37이 장은 태고교회의 퇴보, 곧 그 교리의 왜곡과, 그 결과 생겨난 이단들과 분파들을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름 아래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참된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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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7 심화

3. 72:1, 3, 5, 7  인용되었는가?

 

1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3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5그들이 해가 있을 동안에도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도 대대로 그리하리로다, 7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72:1, 3, 5, 7) Give the king thy judgments, and thy righteousness to the kings son. The mountains shall bring peace to the people, and the hills in righteousness. They shall fear thee with the sun, and toward the faces of the moon, generation of generations. In his days shall the righteous flourish, and abundance of peace, until there be no moon. (Ps. 72:1, 3, 5, 7)

 

AC.337에서 스베덴보리가 시72:1, 3, 5, 7을 인용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가인으로 의미되는 신앙의 분리를 설명하기에 앞서, 그 분리가 일어나기 전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가 어떠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참된 교회가 어떠했는지를 알지 못하면 그 교리가 어떻게 왜곡되었는지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먼저 시72를 통하여 천적 인간의 상태를 보여 줍니다. 이 시편에서 그는 주님을 으로, 천적 인간을 왕의 아들로 보고, ‘’, ‘’, ‘산들’, ‘작은 산들’, ‘대대로라는 표현의 속뜻을 설명합니다.

 

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태고교회는 천적 교회였고 그 중심은 주님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신앙은 사랑에서 떨어져 독립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참된지를 주님으로부터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은 신앙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해와 달이 각각 별개의 두 종교 원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이 사랑과 결합된 질서 안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사랑이 중심이고 신앙은 그 사랑 안에 살아 있었습니다.

 

자연계에서 달이 해의 빛을 받아 비춘다는 사실을 하나의 보조적인 비유로 생각하면 이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37의 직접적인 논점은 물리적인 천문 현상을 설명하는 데 있지 않고, ‘=사랑’, ‘=신앙이라는 상응을 통하여 사랑과 신앙의 천적 질서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산들 작은 산들은 태고교회를 의미합니다. 이것 역시 그 교회의 중심이 높은 사랑, 곧 주님을 향한 사랑에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72의 장면 전체는 태고교회를 단순히 올바른 교리를 많이 가진 교회로 묘사하지 않고, 사랑을 중심으로 선과 진리가 살아 있는 교회로 보여 줍니다.

 

특히 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달이 다할 때까지라고 한 이유를 신앙이 사랑이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신앙과 진리가 없어져 버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더 이상 사랑과 떨어진 별개의 것으로 존재하지 않고 사랑 안에서 생명이 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진리를 단지 참이라고 인정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사랑하고 살아가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평강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AC.337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단어의 상응을 따로 해설하지는 않으므로 세부 의미를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시편 전체의 흐름에서 사랑과 신앙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하나를 이루는 상태와 잘 어울리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대대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홍수 이후의 교회들이라고 직접 설명합니다. 따라서 시72의 표상은 태고교회만 보여 주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태고교회 이후에도 교회가 계속 이어질 것을 함께 보여 줍니다.

 

그러나 홍수 이후 교회들의 질서는 태고교회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AC.337 [3]에서 스베덴보리는 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고 하며,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고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있었고, 후대 인간에게서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지는 방식이 나타납니다. 길은 다르지만 주님의 목적은 여전히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의 결합입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영원히 분리되어 독립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이제 왜 이 시편이 가인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지가 분명해집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과 신앙이 하나의 천적 질서 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인으로 의미된 사람들은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내어 따로 고백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은 단순히 새로운 교리 하나를 만들어 낸 이름이 아니라, 태고교회를 교회답게 하던 근본 질서를 깨뜨린 상태를 나타냅니다.

 

72는 바로 그 깨뜨리기 전의 상태를 보여 주는 기준점입니다. 해는 사랑을, 달은 신앙을 나타내고, 그 둘은 태고교회 안에서 분리된 경쟁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분리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알려면 먼저 해와 달이 하나의 질서 안에 있었던 상태를 알아야 합니다.

 

달이 다할 때까지라는 말도 이 점을 가장 깊게 보여 줍니다. 신앙의 완성은 사랑과 떨어져 더욱 독립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 안에 완전히 살아 들어가는 데 있습니다. 신앙이 사랑이 된다는 것은 진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37의 시72 인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이렇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무엇을 깨뜨렸는지를 설명하기 전에, 해와 달과 산들을 통하여 태고교회에서 사랑과 신앙이 본래 어떠한 천적 질서 안에 있었는지를 먼저 보여 줍니다. 그 기준이 있어야 가인의 분리가 왜 당시에는 그렇게 엄청난 악이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37 심화 2, ‘가인의 분리를 이해하는 부부의 비유’

AC.337 심화2. 가인의 분리를 이해하는 부부의 비유 가인이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했다는 말을 처음 들으면 이것이 왜 그렇게 심각한 문제였는지 쉽게 와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신앙을 중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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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7 심화

1.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을 따로 고백하는 조차 엄청난 악이었을까?

 

AC.337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신앙고백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무엇을 믿는지 분명하게 고백하고 올바른 교리를 배우는 것은 오히려 신앙생활의 중요한 일부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을 따로 고백하는 것이 교리의 왜곡이었고, 심지어 엄청난 으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신앙고백 역시 잘못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AC.337 자체가 그 답을 줍니다. 태고교회와 오늘날 인간의 영적 상태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는 천적 인간이었고, 사랑으로부터 주님께 받은 퍼셉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고 하며, 지금은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고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신다고 말합니다.

 

태고교회 사람에게 사랑과 신앙은 아직 분리된 두 체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무엇이 선이고 참된지를 주님으로부터 퍼셉션으로 지각했습니다. 따라서 사랑 안에 신앙이 있었고,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이 그 사랑으로부터 살아 있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어떤 부모가 자기 아이를 깊이 사랑할 때 나는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과 나는  아이가 소중하다고 믿는다를 두 개의 별도 체계로 만들 필요가 없는 것과 어느 정도 비슷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 가치를 알고 있으며, 그 앎이 사랑과 함께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이를 사랑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이가 소중하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면 질서가 달라집니다. 원래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앎을 사랑에서 떼어 내어 독립시킨 것입니다. 태고교회에서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다는 것은 이보다 훨씬 깊은 영적 차원에서 그러한 전도를 의미했습니다.

 

가인의 시작도 사랑을 버리자는 노골적인 선언이 아니었습니다.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세우는 데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도 온전한 신앙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다음에는 신앙이 사랑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고, 마침내 체어리티가 없어도 신앙만 있으면 된다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4에서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가인 계열의 진행은 바로 이러한 분리의 결과를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였지만, 결국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교리가 왜곡되며,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고 신앙과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하는 상태에까지 이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에게 신앙을 따로 배우고 고백하는 것은 그 자체로 가인의 분리가 아닙니다. AC.337은 이 점을 분명하게 구별합니다. 오늘날에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며,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십니다. 따라서 말씀을 배우고 교리를 이해하며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 분명히 하는 것은 후대 인간에게 필요한 과정입니다.

 

여기서 신앙이 앞선다는 것은 신앙이  중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체어리티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고 말합니다. 신앙의 진리는 인간을 체어리티로 이끌기 위해 주어지고, 주님께서 그 진리를 통하여 인간 안에 선을 형성하실 때 신앙은 자신의 참된 목적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신앙고백이 가인적으로 되는 지점은 신앙을 말한다는 사실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그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할 때입니다. 교리를 정확히 안다는 사실이 삶에서의 선을 대신하고, 올바른 신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악을 피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할 필요를 약화시킨다면 가인의 원리가 다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정확한 교리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악을 더 분명하게 보게 하고, 주님을 의지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쓰임을 행하게 한다면 그 신앙은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따라서 태고교회에서는 신앙고백이 악이었다는 말을 오늘날 모든 신앙고백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그때라고 한 것을 중요하게 보아야 합니다. 사랑과 신앙이 퍼셉션 안에서 하나였던 천적 교회에서는 그것을 처음 분리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적인 질서를 깨뜨리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시대와 상태에 따라 주님의 거듭남의 질서가 어떻게 달리 적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과 후대의 영적 인간을 같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둘 모두를 관통하는 목적은 같습니다. 진리와 선이 결합되고 신앙과 체어리티가 살아 있는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AC.337이 오늘 우리에게 묻는 질문은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가?가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깊은 질문은 내가 고백하는 신앙은 어디로 나를 이끌고 있는가?입니다. 그 신앙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신앙은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된 채 자기 자신만을 높인다면 태고교회의 가인에게서 나타난 영적 위험이 오늘 우리 안에서도 반복될 수 있습니다.

 

 

 

AC.337 심화 2, ‘가인의 분리를 이해하는 부부의 비유’

AC.337 심화2. 가인의 분리를 이해하는 부부의 비유 가인이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했다는 말을 처음 들으면 이것이 왜 그렇게 심각한 문제였는지 쉽게 와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신앙을 중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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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7, 창4, ‘참된 태고교회를 알아야 가인의 왜곡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37이 장은 태고교회의 퇴보, 곧 그 교리의 왜곡과, 그 결과 생겨난 이단들과 분파들을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름 아래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참된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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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7

장은 태고교회의 퇴보, 교리의 왜곡과, 결과 생겨난 이단들과 분파들을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름 아래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 가지 주의해야 것이 있습니다. 참된 교회가 어떠했는지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않고서는 교리가 어떻게 왜곡되었는지, 또한 교회의 이단들과 분파들이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지를 이해할 없다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에 관해서는 위에서 충분히 설명했습니다. 태고교회는 천적 인간이었으며,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는 어떠한 신앙도 인정하지 않았다는 , 그들은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신앙, 신앙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퍼셉션을 가지고 있었다는 ,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될까 하여 신앙을 언급하는 것조차 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위에서 설명했습니다. (AC.200, 203) As this chapter treats of the degeneration of the most ancient church, or the falsification of its doctrine, and consequently of its heresies and sects, under the names of Cain and his descendants, it is to be observed that there is no possibility of understanding how doctrine was falsified, or what was the nature of the heresies and sects of that church, unless the nature of the true church be rightly understood. Enough has been said above concerning the most ancient church, showing that it was a celestial man, and that it acknowledged no other faith than that which was of love to the Lord and toward the neighbor. Through this love they had faith from the Lord, or a perception of all the things that belonged to faith, and for this reason they were unwilling to mention faith, lest it should be separated from love, as was shown above. (n. 200, 203)

 

[2] 천적 인간은 이와 같으며, 시편에서도 표상을 통하여 이와 같이 묘사됩니다. 거기서는 주님을 으로, 천적 인간을 왕의 아들 말합니다. Such is the celestial man, and such he is described by representatives in David, where the Lord is spoken of as the king, and the celestial man as the kings son:

 

1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3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5그들이 해가 있을 동안에도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도 대대로 그리하리로다, 7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72:1, 3, 5, 7) Give the king thy judgments, and thy righteousness to the kings son. The mountains shall bring peace to the people, and the hills in righteousness. They shall fear thee with the sun, and toward the faces of the moon, generation of generations. In his days shall the righteous flourish, and abundance of peace, until there be no moon. (Ps. 72:1, 3, 5, 7)

 

(sun) 사랑을, (moon) 신앙을, 산들(mountains) 작은 산들(hills) 태고교회를, 대대로(generation of generations) 홍수 이후의 교회들을 각각 의미합니다. 달이 다할 때까지(until there be no moon)라고 것은 신앙이 사랑이 것이기 때문입니다. (30:26에서 말한 것도 참조) By thesunis signified love; by themoon,” faith; bymountainsandhills,” the most ancient church; bygeneration of generations,” the churches after the flood; “until there be no moonis said because faith shall be love. (See also what is said in Isaiah 30:26.)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30:26)

 

[3] 태고교회와 교리는 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 지금은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지만,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시며, 그때 체어리티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됩니다. 이로부터 태고 시대에 사람들이 신앙을 따로 고백하여 그것을 사랑에서 분리했을 교리가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있습니다. 이와 같이 교리를 왜곡한 사람들,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거나 신앙만을 따로 고백한 사람들을 당시에 가인(Cain)이라 불렀으며, 이러한 일은 그때 엄청난 악으로 여겨졌습니다. Such was the most ancient church, and such was its doctrine. But the case is far different at this day, for now faith takes precedence over charity, but still through faith charity is given by the Lord, and then charity becomes the principal. It follows from this that in the most ancient time doctrine was falsified when they made confession of faith, and thus separated it from love. Those who falsified doctrine in this way, or separated faith from love, or made confession of faith alone, were then calledCain”; and such a thing was then regarded as an enormity.

 

해설

AC.337은 창4의 가인과 그 후손들을 더 자세히 해설하기 전에 잠시 멈추어, 태고교회의 본래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다시 확인하는 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해석 원칙을 먼저 제시합니다. ‘무엇이 왜곡되었는지를 알려면 먼저 왜곡되기 전의 참된 모습이 무엇이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인과 그의 후손들로 의미되는 이단들과 분파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알려면, 먼저 태고교회에서 사랑과 신앙이 본래 어떤 관계 안에 있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교회는 천적 인간이었습니다. 이들에게 교회의 중심은 신앙을 별도로 고백하고 교리를 체계화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먼저였고, 그 사랑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참된지를 퍼셉션으로 지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신앙은 사랑과 나란히 서 있는 독립된 무엇이 아니라 사랑 안에 살아 있는 진리였습니다.

 

이 때문에 AC.337그들은 신앙을 언급하는 것조차 원하지 않았다는 표현도 문자적인 금기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이 신앙이라는 낱말 자체를 싫어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랑 안에 하나로 있던 것을 따로 떼어 신앙이라고 세우는 순간 그것이 사랑에서 분리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신앙은 독립된 종교적 영역이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주님께 받은 퍼셉션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바로 이 기준에서 볼 때 가인의 문제가 얼마나 근본적이었는지가 드러납니다. 가인은 신앙을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독립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상태에서는 신앙을 따로 말하고 고백하는 것이 그렇게 심각한가?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신앙이 본래 하나로 있었던 천적 인간에게서 그 둘을 분리하는 것은 단순한 표현상의 구별이 아니라 교회의 생명 질서를 뒤집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먼저 참된 태고교회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기준이 사랑과 신앙의 하나 이라면 가인의 죄는 단순히 하나의 교리적 오류를 주장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랑으로부터 오는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내어 별개의 것으로 세웠다는 데 있습니다. 그 첫 분리가 뒤의 모든 변질의 출발점이 됩니다.

 

72의 인용은 이 천적 질서를 표상으로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를 사랑으로, ‘을 신앙으로 설명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자연계의 달이 자기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해의 빛을 받아 비춘다는 점을 기계적인 상응으로 확대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AC.337이 직접 밝히는 핵심은 사랑이 중심이고 신앙이 그 사랑과 결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생명과 빛을 받았습니다.

 

산들작은 산들은 태고교회를 의미합니다. 말씀에서 산과 높은 곳이 사랑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으며, 여기에서도 태고교회의 천적 성격을 보여 줍니다. 그들에게 가장 높은 것은 신앙고백 자체가 아니라 주님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으로부터 이웃 사랑과 신앙에 속한 퍼셉션이 나왔습니다.

 

특히 달이 다할 때까지라는 표현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사랑이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을 진리나 신앙이 없어져 버린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이 사랑과 분리된 별개의 것으로 남지 않고 사랑 안에서 완전히 살아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진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생명이 됩니다.

 

30:26달빛은 햇빛 같겠고라는 말씀도 같은 설명을 보강합니다. AC.337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의 모든 세부 상응을 해설하는 것은 아닙니다. 직접적인 연결점은 달과 해, 곧 신앙과 사랑입니다. 신앙의 빛이 사랑의 빛과 하나 되는 천적 질서를 보여 주기 위해 이 말씀을 함께 인용합니다.

 

그런데 AC.337 [3]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이 문장을 놓치면 태고교회의 질서를 오늘의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시대를 포함한 후대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선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시며, 그 체어리티가 형성되면 체어리티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됩니다.

 

여기에서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선다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더 높거나 본질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어서 체어리티가 가장 중요한 이 된다고 말합니다. 후대의 영적 인간에게서는 진리와 신앙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먼저 의식적으로 주어질 수 있지만, 그 신앙의 목적은 주님께서 그것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형성하시는 데 있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며,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여기서 바로 앞 AC.335의 셋과 AC.336의 에노스를 조심해서 구별해야 합니다. 셋은 새로운 신앙’, 에노스는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라고 했지만, 셋과 에노스 자체는 여전히 태고교회 문맥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AC.337 [3]오늘날에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선다는 후대 영적 인간의 질서를 셋과 에노스에게 그대로 소급해서는 안 됩니다. AC.335-336은 태고교회 안에서 가인의 분리 이후 새로운 신앙과 체어리티가 형성된 것을 말하고, AC.337 [3]은 그것과 별도로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와 스베덴보리 시대의 후대 질서를 대비합니다.

 

이 구별을 해 두면 가인의 의미도 더욱 정확해집니다. 가인은 단순히 신앙이 먼저 오는 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후대의 영적 인간에게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는 것은 정상적인 거듭남의 질서가 될 수 있습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이 먼저 나타났다는 데 있지 않고,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그 자체로 독립시키고 높인 데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오늘날 신앙고백을 하거나 교리를 배우는 것 자체를 가인적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후대 인간에게는 말씀에서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서 끝날 때입니다. 신앙고백의 정확성이 삶에서의 선과 체어리티를 대신하게 되면 가인의 영적 원리가 다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37의 마지막 이러한 일은 그때 엄청난 악으로 여겨졌다는 말에서 그때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앙과 사랑이 하나였던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에서 신앙을 별도로 떼어 고백하는 것은 그 질서 자체의 붕괴를 뜻했습니다. 그러나 후대의 인간이 신앙을 명확히 배우고 고백하는 것은 그 자체로 같은 악이 아닙니다. 인간의 영적 상태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교리를 읽을 때 매우 중요한 원칙을 보여 줍니다. 어떤 질서를 무조건 모든 시대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천적 인간의 질서와 영적 인간의 질서를 구별해야 하고, 태고교회와 홍수 이후 교회의 상태도 구별해야 합니다. 사랑이 먼저였다는 태고교회의 질서를 오늘 사람에게 먼저 사랑이 생긴 다음에야 진리를 배워야 한다는 시간적 공식으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오늘날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선다는 말도 그러므로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중요하다는 교리적 우선권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하듯, 주님께서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시며 그때 체어리티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됩니다. 과정상의 선행과 본질상의 주도권은 서로 다릅니다.

 

AC.337은 이처럼 가인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기준점을 세워 줍니다. 참된 태고교회의 질서는 사랑 안에 신앙이 있었고,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것을 퍼셉션으로 지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인은 바로 그 질서를 깨뜨린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이후 가인의 후손들과 여러 이단적 상태를 읽을 때에도 무엇을 믿었는가?만이 아니라 신앙이 사랑과 어떤 관계에 놓였는가?를 계속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원리는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우리는 태고교회 사람처럼 퍼셉션으로 직접 진리를 아는 상태에 있지 않으며, 먼저 말씀에서 진리를 배우고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신앙의 목적은 여전히 같습니다. 주님께서 그 진리를 통하여 우리 안에 체어리티를 이루시고, 마침내 진리가 삶과 사랑 안에서 살아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37신앙보다 사랑이 중요하다는 단순한 구호보다 훨씬 정교한 질서를 가르칩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있었고, 후대 인간에게서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신앙과 사랑의 최종적인 분리가 주님의 질서는 아닙니다. 신앙은 사랑과 결합될 때 살아 있고, 진리는 선과 결합될 때 그 목적을 이룹니다.

 

심화

1.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을 따로 고백하는 조차 엄청난 악이었을까?

 

AC.337 심화 1, 왜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을 따로 고백하는 것’조차 엄청난 악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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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인의 분리를 이해하는 부부의 비유

 

AC.337 심화 2, ‘가인의 분리를 이해하는 부부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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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72:1, 3, 5, 7 인용되었는가?

 

AC.337 심화 3, ‘시72:1, 3, 5, 7은 왜 인용되었는가?’

AC.337 심화3. 시72:1, 3, 5, 7은 왜 인용되었는가? 1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3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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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30:26 달빛은 햇빛 같겠고

 

AC.337 심화 4, ‘사30:26의 달빛은 햇빛 같겠고’

AC.337 심화4. 사30:26의 달빛은 햇빛 같겠고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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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8, 창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AC.338-340)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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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6, 창4:26, ‘에노스’(Enosh)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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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1 심화

1. 4 에녹과 창5 에녹은 같은 의미인가?

 

AC를 처음 읽는 분에게는 여기서 매우 자연스러운 혼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4에도 에녹이 나오고 창5에도 에녹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4의 에녹은 가인의 아들이고, 5의 에녹은 야렛의 아들이며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기록된 인물입니다. 이름은 같지만 스베덴보리가 두 에녹에게 부여하는 속뜻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4의 에녹은 AC.331에서 매우 간단하게 정의됩니다. ‘ 이단의 확장을 에녹이라 합니다. 여기서  이단은 가인으로 표상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입니다. 따라서 창4의 에녹은 가인이라는 분리된 신앙의 교리적 상태가 더 전개되고 확장된 것을 나타냅니다.

 

반면 창5의 에녹은 전혀 다른 문맥에서 설명됩니다. 그곳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으로 알게 된 것들을 모아 교리적 지식으로 정리하고 보존한 상태와 에녹을 연결합니다. 그러므로 창4의 에녹과 창5의 에녹을 단지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같은 상응이나 같은 교회적 상태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은 말씀의 속뜻을 읽을 때 매우 중요한 원리를 보여 줍니다. 상응은 단순한 암호표가 아닙니다. ‘에녹이라는 이름은 언제나 하나의 ’, ‘성은 언제나 하나의 ’, ‘물은 언제나 하나의 이라고 기계적으로 대입하여 해독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어떤 인물과 사물과 장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그것이 놓인 전체 문맥과 계열, 그리고 그 앞뒤에서 설명되는 영적 상태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따라서 같은 이름이 두 번 등장한다고 해서 반드시 같은 상태를 뜻하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이름이 다르다고 해서 전혀 관계없는 상태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각각의 문맥에서 그 이름을 어떤 교회적 또는 영적 상태와 연결하는가입니다. 4의 에녹은 가인의 계열 안에서 읽어야 하고, 5의 에녹은 그 장에서 전개되는 태고교회의 계승과 퍼셉션의 변화라는 문맥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이 점은 창4와 창5의 계보를 읽는 방식에도 중요한 도움을 줍니다. 두 장을 단순히 하나의 시간표로 이어 붙여 누가 누구와 정확히 같은 시대에 살았는가를 재구성하는 데 초점을 두기보다, 각 계보가 어떤 교회와 교리의 상태 변화를 보여 주는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설에서 중심은 생물학적 연대 계산이 아니라 교회적 상태의 계승과 변화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창4와 창5의 두 계열이 역사적으로 정확히 어떻게 병행되었는지를 AC.331만으로 확정할 수도 없습니다. 속뜻에서 서로 다른 교회적 계열과 상태를 읽을 수 있다는 것과, 각각의 세대가 시간적으로 정확히 일대일 대응하여 동시에 존재했다고 말하는 것은 서로 다른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계열이 같은 태고교회 시대의 서로 다른 흐름을 보여 준다는 큰 그림은 가능하지만, 그것을 세밀한 연대표처럼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두 에녹의 차이를 가장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4의 에녹은 분리된 신앙의 교리가  확장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반면 창5의 에녹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으로 알려진 것들을 수집하여 교리적으로 보존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하나는 이미 일어난 분리가 더 전개되는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사라져 가는 퍼셉션의 지혜를 보존하는 방향입니다.

 

그러므로 두 에녹에게 공통적으로 교리적인 과 연결되는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교리의 성격과 기능은 매우 다릅니다. 4에서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더욱 발전하는 쪽이고, 5에서는 퍼셉션으로 받은 것을 잃지 않도록 모아 보존하는 쪽입니다. 같은 이름이지만 서로 다른 교회적 상태를 표상하는 좋은 사례입니다.

 

이 차이는 오늘 우리가 교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도 의미 있는 통찰을 줍니다. 교리화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교리화하며 무엇을 위해 보존하는가입니다. 생명에서 분리된 진리를 체계화할 수도 있고, 반대로 주님께 받은 선과 진리를 다음 상태를 위해 충실하게 보존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교리가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그 교리가 어떤 사랑과 결합되어 있으며 어떤 쓰임을 위해 존재하는가입니다.

 

따라서 창4와 창5의 두 에녹은 오히려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하나는 분리가 굳어지고 확장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 주고, 다른 하나는 사라져 가는 퍼셉션의 지혜를 교리적으로 보존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말씀의 속뜻을 읽을 때 이름 자체보다 문맥과 계열, 그리고 그 교리가 생명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 줍니다.

 

 

 

AC.331, 창4:17, 에녹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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