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13, 창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AC.306-313) - '아담', 사람이 아닌 상태에서 시작, 주님으로 말미암아 거듭나 사람이 되었다

 

24절,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And he cast out the man; and he made to dwell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cherubim, and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to keep the way of the tree of lives.

 

313

여기서 말씀드리고 있는 내용이 첫 사람(the first man)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로부터 분명한 것은, 오늘날 존재하는 모든 유전 악은 그(him)로 말미암은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정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여기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이 교회를 아담이라 하면서 상징하는 것은, 사람은 땅으로 말미암았다는 것,  사람이 아닌(nonman) 상태에서 시작, 주님으로 말미암아 거듭나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From what is here said of the first man, it is evident that all the hereditary evil existing at the present day did not come from him, as is falsely supposed. For it is the most ancient church that is here treated of under the name of “man”; and when it is called “Adam,” it signifies that man was from the ground, or that from being nonman he became man by regeneration from the Lord.

 

※ 겉모습이 사람이라고 사람이 되는 게 아닙니다. 그 안에 주님의 신성이 깃들어야 비로소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이름의 기원과 상징입니다. 유전 악에 대해서는 그 경우는 이런데요, 실제 죄를 짓는 사람마다 자신에게 그로 인한 어떤 본성(a nature)을 초래하며, 그로 인한 악이 그의 어린 자녀들에게 심겨 유전 악이 되는 것입니다. This is the origin and signification of the name. But as to hereditary evil, the case is this. Everyone who commits actual sin thereby induces on himself a nature, and the evil from it is implanted in his children, and becomes hereditary.

 

※ 내가 범하는 낱낱의 죄로 인해 실제로 나의 본성이 손상되며, 영향을 받는다는 말이며, 어렸을 때부터 곁에서 이를 지켜보며 자란 자녀들 또한 결정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 주님과 동거한 열두 제자들, 프란치스코와 함께한 열두 형제들, 이현필 선생과 함께한 동광원 사람들, 공용복 선생과 함께한 핵심진리의 사람들 등 ‘동거’, ‘공동생활’의 비밀과 유익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중심인물이 주님께 사로잡힌 바만 확실하다면 말입니다.

 

유전악은 그렇게 모든 부모로부터,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 및 가계를 따라 그들의 선조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며, 그렇게 각각의 이어지는 후손들 안에서 배가하고 늘어납니다. 유전악은 각 사람 안에 머무르며, 각자 실제 짓는 죄로 인해 증가하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절대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저절로 소멸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주의 깊게 관찰하시는 모든 분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통해 이 말이 맞다는 것을 분명히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부모의 악한 경향은 자녀들 안에 눈에 보이도록 남아 한 가계, 심지어 그 종족 전체가 그로 인해 다른 모든 가계나 종족들하고 구별될 수도 있을 정도라는 걸 말입니다. It thus descends from every parent, from the father, grandfather, great-grandfather, and their ancestors in succession, and is thus multiplied and augmented in each descending posterity, remaining with each person, and being increased in each by his actual sins, and never being dissipated so as to become harmless except in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 by the Lord. Every attentive observer may see evidence of this truth in the fact that the evil inclinations of parents remain visibly in their children, so that one family, and even an entire race, may be thereby distinguished from every 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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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312, 창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AC.306-313) - 설명이 불가능한, 오직 천사들에게만 이해가 되는, 이런 일련의 아르카나

 

24절,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And he cast out the man; and he made to dwell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cherubim, and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to keep the way of the tree of lives.

 

312

본 절에서, 이들 홍수 전 시대를 산 사람들의 상태가 아주 충분히 설명되었는데요, 그들은 ‘쫓겨났다’, 즉 천적 선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룹들이 동쪽에서부터 에덴동산을 향하여 있었다’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 표현, ‘동쪽에서부터(from) 에덴 동산을 향하여(toward)라는 표현은 그들에게만 쓸 수 있는 표현입니다. 그후를 산 사람들 관련해서는 쓸 수 없는데, 이들의 경우라면 에덴 동산에서부터(from) 동쪽을 향하여(toward)라고 했을 겁니다. In this verse, the state of these antediluvians is fully described, in that they were “cast out,” or separated from celestial good, and in that “cherubim were placed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This expression,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is applicable only to them, and could not be used in relation to those who lived afterwards, of whom it would have been said, “from the garden of Eden toward the east.”

 

※ 전자는 천적인 반면, 후자는 영적이기 때문입니다. 천적인 것은 주님, 곧 ‘동쪽’에서부터, 사랑과 선에서부터 시작하지만, 영적인 것은 지성, 곧 ‘동산’에서부터, 신앙과 진리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말씀 ‘스스로 도는 검의 화염’이라는 표현을 오늘날 사람들에게 쓰고자 하였다면, ‘스스로 도는 화염의 검’이라고 했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생명들의 나무 역시 생명의 나무라 했을 것입니다. 설명이 불가능한, 오직 천사들에게만 이해가 되는, 주님이 이들에게는 계시를 드러내시는데요, 이런 일련의 것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모든 상태마다 무한한 아르카나가 들어있는데 심지어 그 중 사람들에게 알려진 단 하나의 아르카나조차 그렇기 때문입니다. In like manner, had the words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been applied to the people of the present day, they would have been “the sword of a flame turning itself.” Nor would it have been said the “tree of lives,” but the “tree of life”; not to mention other things in the series that cannot possibly be explained, being understood only by the angels, to whom the Lord reveals them; for every state contains infinite arcana, not even one of which is known to men.

 

※ 내면이 닫힌 우리와 달리 그만큼 천사들의 내면은 열려있는 것입니다. 내면이 열린 만큼 아르카나에 담긴 계시를 지각, 곧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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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311, 창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AC.306-313) - 홍수로 사라진 사람들의 내세에서의 상태

 

24절,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And he cast out the man; and he made to dwell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cherubim, and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to keep the way of the tree of l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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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로 사라진 사람들의 내세에서의 상태는 이렇습니다. 그들은 영들의 세계(the world of spirits) 그 어디에도 있을 수 없습니다. 다른 영들과 함께 할 수 없다는 말이지요. 대신 마치 어떤 산 아래인 것 같은 데에 있어 다른 지옥들하고는 분리된 그런 지옥에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무시무시한 환상과 들러붙은 신념들의 결과, 마치 중간에 떠억 하니 가로막는 산처럼 보입니다. 그들이 가진 이런 남다른 고약한 능력은 다른 영들을 아주 중증(重症) 인사불성 상태에 이르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지금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게 하는 그런 건데, 이것은 그들이 다른 영들한테서 진리를 이해하는 모든 능력을 빼앗아 그들로 하여금 아무것도 지각하지 못 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있을 동안에도 그들의, 사람의 혼을 쏙 빼놓는 능력은 그랬습니다. 내세에서도 그들은 다른 영들을 이런 일종의 죽음에 이르게 하지 않고는 다른 영들과 도저히 함께할 수 없는 자들임이 예견되었고, 그래서 결국 그들은 모두 소멸되었습니다. 주님의 신적 자비로 홍수 후를 살았던 사람들은 이들과는 다른 상태들로 인도되었습니다. In the other life, the state of those who perished by the flood is such that they cannot be in the world of spirits, or with other spirits, but are in a hell separated from the hells of others, and as it were under a certain mountain. This appears as an intervening mountain in consequence of their direful fantasies and persuasions. Their fantasies and persuasions are such as to produce so profound a stupor in other spirits that they do not know whether they are alive or dead, for they deprive them of all understanding of truth, so that they perceive nothing. Such also was their persuasive power during their abode in the world; and because it was foreseen that in the other life they would be incapable of associating with other spirits without inducing on them a kind of death, they all became extinct, and the Lord of his Divine mercy induced other states on those who lived after the fl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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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310, 창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AC.306-313) - 24절은 다루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가장 깊고, 또 중요한 아르카나가 정말 많이 담긴 구절

 

24절,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And he cast out the man; and he made to dwell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cherubim, and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to keep the way of the tree of l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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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 각각의 표현들에는 제시, 곧 다루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가장 깊은, 그리고 중요한 아르카나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들 아르카나는 홍수로 사라진 지금 이 사람들의 천성(天性, genius)에나 적용할 수 있는 것으로, 이 천성은 홍수 후 일어나 살았던 노아 이후 사람들의 천성하고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다음은 간략히 보시게 될 내용인데요, 그들의 첫 부모 세대는 태고 교회를 형성한, 천적인 사람들이었고, 그 결과, 자기들 안에 천적 씨가 심긴 사람들이었으며, 자연히 그 후손들 역시 그들 안에 천적 기원을 가진 씨를 갖게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씨의 기원이 천적이라는 것은 사랑이 온 마음을 다스려 하나가 되게 하는 그런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두 가지, 의지와 이해로 구성되기 때문입니다. 사랑 혹은 선은 의지에, 신앙 혹은 진리는 이해에 속합니다. 태고인들은 사랑 혹은 선을 가지고 신앙 혹은 진리에 속한 것을 지각하였고, 그렇게 해서 그들의 마음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Each particular expression in this verse involves so many arcana of deepest import (applicable to the genius of this people who perished by the flood, a genius totally different from that of those who lived subsequent to the flood), that it is impossible to set them forth. We will briefly observe that their first parents, who constituted the most ancient church, were celestial men, and consequently had celestial seeds implanted in them; whence their descendants had seed in them from a celestial origin. Seed from a celestial origin is such that love rules the whole mind and makes it a one. For the human mind consists of two parts,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Love or good belongs to the will, faith or truth to the understanding; and from love or good those most ancient people perceived what belongs to faith or truth, so that their mind was a one.

 

※ 사랑으로 신앙에 속한 것을, 선으로 진리에 속한 것을 지각한다는 게 어떤 것일까요? 누가 입만 열면 신앙, 신앙, 진리, 진리 해도 그저 사랑으로, 선으로 품어버리고 마는... ‘무슨 사연이 있겠지... 무슨 속사정이 있겠지...’ 하며, 따뜻하게 대하고, 판단하거나 맞대응하지 않는 그런 것이 아닐까요?

 

이들 후손과 함께, 즉 후손들을 통해 같은 천적 기원을 가진 씨가 필연적으로 남습니다. 즉 유전됩니다. 이렇게 천적 씨를 유전한 태고 교회 후손들한테는 그래서 진리와 선 사이 무슨 틈이 벌어지는 것만으로도 아주아주 위험합니다. 저세상에서는 이 정도의 변화만으로도 마음 전체가 거의 복구불능일 정도로 왜곡되기 때문입니다. 한편, 천적인 씨 대신 영적인 씨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홍수 후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하며, 오늘날 사람들도 해당합니다. 이들에겐 전혀 사랑이 없고, 결과적으로 선한 의지도 없습니다만 그러나 신앙 혹은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은 여전히 있어 이걸로 어느 정도는 체어리티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비록 다른 식, 즉 진리에 속한 지식 및 거기서 나오는 선에 기반, 주님으로 말미암은 양심의 암시라는 방식이지만 말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 사람들의 상태는 홍수 전 사람들의 상태와 아주 다른데요, 이 상태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 즉 이후 허락하실 때 다루겠습니다. 이들 아르카나는 현세대에게는 정말 낯선 아르카나입니다. 그 이유는 오늘날은 아무도 천인(天人, the celestial man,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심지어 영인(靈人, the spiritual man, 영적 인간)에 대해서조차 아는 사람이 없고, 더 나아가 그로 인한 사람의 마음과 생명, 삶의 퀄러티라는 게 무엇인지, 그로 인한 사후 상태라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역시 그렇기 때문입니다. With the posterity of such a race, seed of the same celestial origin necessarily remains, so that any falling away from truth and good on their part is most perilous, since their whole mind becomes so perverted as to render a restoration in the other life scarcely possible. It is otherwise with those who do not possess celestial but only spiritual seed, as did the people after the flood, and as also do the people of the present day. There is no love in these, consequently no will of good, but still there is a capability of faith, or understanding of truth, by means of which they can be brought to some degree of charity, although by a different way, namely, by the insinuation of conscience from the Lord grounded in the knowledges of truth and the derivative good. Their state is therefore quite different from that of the antediluvians, concerning which state,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These are arcana with which the present generation are utterly unacquainted, for at the present day none know what the celestial man is nor even what the spiritual man is, and still less what is the quality of the human mind and life thence resulting, and the consequent state after de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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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309, 창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AC.306-313) - '두루 도는 불 칼'의 속뜻

 

24절,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And he cast out the man; and he made to dwell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cherubim, and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to keep the way of the tree of l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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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 도는 불 칼(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이 광적 탐욕과 들러붙은 신념, 곧 신앙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기를 무척 원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육적, 세속적인 것들을 향해 휩쓸려 버리고 마는, 그런 자아 사랑을 상징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페이지들을 가득 채울 수도 있을 만큼 많은 인용 구절들을 가지고 확인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에스겔에 나오는 몇 구절 가지고만 하고자 합니다. That by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is signified self-love with its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 which are such that they desire to enter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ut are carried away to corporeal and earthly things, might be confirmed by so many passages from the Word as would fill pages; but we will cite only these from Ezekiel:

 

9인자야 너는 예언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이같이 말하라 칼이여 칼이여 날카롭고도 빛나도다 10그 칼이 날카로움은 죽임을 위함이요 빛남은 번개 같이 되기 위함이니 우리가 즐거워하겠느냐 내 아들의 규가 모든 나무를 업신여기는도다 14그러므로 인자야 너는 예언하며 손뼉을 쳐서 칼로 두세 번 거듭 쓰이게 하라 이 칼은 죽이는 칼이라 사람들을 둘러싸고 죽이는 큰 칼이로다 15내가 그들이 낙담하여 많이 엎드러지게 하려고 그 모든 성문을 향하여 번쩍번쩍하는 칼을 세워 놓았도다 오호라 그 칼이 번개 같고 죽이기 위하여 날카로웠도다 (겔21:9-10, 14-15) Prophesy and say, Thus saith Jehovah, Say a sword, a sword, it is sharpened, and also burnished to make a sore slaughter; it is sharpened that it may be as lightning. Let the sword be doubled the third time, the sword of his slain; the sword of a great slaughter,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 that their heart may melt, and their offenses be multiplied, I have set the terror of the sword in all their gates. Alas! it is made as lightning. (Ezek. 21:9–10, 14–15)

 

여기 ‘(A sword)은 사람의 황폐함, 곧 선과 진리는 전혀 못 보고, 대신 ‘많이 엎드러지게 하다(multiplying offenses)라는 표현이 가리키는 대로, 그저 매사를 거짓과 거꾸로만 볼 뿐인 상태, 황폐함을 상징합니다. 또 나훔에도 보면, 거기 신앙의 신비들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자들을 가리켜,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 당한 자의 떼(The horseman mounting, and the flame of the sword, and the flash of the spear, and a multitude of the slain.)(3:3)라 하고 있습니다. A “sword” here signifies the desolation of man such that he sees nothing that is good and true, but mere falsities and things contrary, denoted by “multiplying offenses.” It is also said in Nahum, of those who desire to enter into the mysteries of faith, “The horseman mounting, and the flame of the sword, and the flash of the spear, and a multitude of the slain.” (Nahum 3:3)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 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훔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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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308, 창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AC.306-313) - '그룹'(cherubim)의 속뜻

 

24절,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And he cast out the man; and he made to dwell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cherubim, and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to keep the way of the tree of lives.

 

308

동쪽(the east)과 ‘에덴동산(the garden of Eden)에 관한 상징은 위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여기서 다시 이걸로 오래 머물 필요는 없습니다. 대신 ‘그룹(cherubim)이 주님의 섭리(the providence of the Lord), 곧 이 섭리가 없으면 사람은 자기 본성을 따라, 그리고 감각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을 따라, 광적으로 신앙의 신비들 안으로 들어가려 하고, 들어가서는 그것들을 신성모독(profane), 결국 스스로를 파괴하게 되는, 그런 섭리를 가리킨다는 것은 말씀 가운데 ‘그룹’이 나오는 데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유대인이라는 사람들은, 만일 그들이 주님의 오심, 유대교회의 표상들, 형식들이 주님을 상징한다는 것, 그리고 사후에도 계속되는 삶, 또한 속 사람과 말씀의 속뜻 등에 관하여 계시가 열려 어떤 지식을 갖게 되면, 그들은 반드시 그것을 모독하려 할 것이고, 결국엔 영원히 소멸되어 버리고 말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이 그들을 지키심을 궤 위(above) 속죄소 위(on), 성막 휘장들 위(upon), 성전 안 휘장 위(upon)그룹으로 상징하신 것입니다. (25:18-21; 26:1, 31; 왕상6:23-29, 32) 그 안에 증거판이 들어있었던 증거궤가 이 본문의 생명 나무와 같은 것을 상징, 즉 주님과 오직 주님에게 속한 천적인 것들을 상징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또한 주님은 자주 일컬음 받으시기를,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the God of Israel sitting on the cherubim)이라 하셨고, 그래서 주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두 그룹 사이에서(between the cherubim) 말씀하셨습니다. (25:22; 7:89) 이것은 에스겔, 그룹이 언급된 부분을 보면 아주 잘 나와 있습니다. As the signification of the “east” and of the “garden of Eden” were given above, it is needless to dwell longer on them; but that “cherubim” denote the providence of the Lord lest man should insanely enter into the mysteries of faith from his own, and from what is of the senses and of memory-knowledge, and should thus profane them, and destroy himself, is evident from all the passages in the Word where mention is made of “cherubim.” As the Jews were of such a quality that if they had possessed any clear knowledge concerning the Lord’s coming, concerning the representatives or types of the church as being significative of him, concerning the life after death, concerning the interior man and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they would have profaned it, and would have perished eternally; therefore this was represented by the “cherubim” on the mercy seat over the ark, upon the curtains of the tabernacle, upon the veil, and also in the temple; and it was signified that the Lord had them in keeping. (Exod. 25:18–21; 26:1, 31; 1 Kings 6:23–29, 32) For the ark, in which was the testimony, signified the same as the tree of lives in this passage, namely, the Lord and the celestial things which belong solely to him. Hence also the Lord is so often called the “God of Israel sitting on the cherubim,” and hence he spoke with Moses and Aaron “between the cherubim.” (Exod. 25:22; Num. 7:89)This is plainly described in Ezekiel, where it is said:

 

3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 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5그들에 대하여 내 귀에 이르시되 너희는 그를 따라 성읍 중에 다니며 불쌍히 여기지 말며 긍휼을 베풀지 말고 쳐서 6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이와 여자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하지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7그가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성전을 더럽혀 시체로 모든 뜰에 채우라 너희는 나가라 하시매 그들이 나가서 성읍 중에서 치더라 (겔9:3-7) The glory of the God of Israel was uplifted from upon the cherub whereon he was, to the threshold of the house. And he called to the man clothed with linen, and said unto him, Go through the midst of the city, through the midst of Jerusalem, and set a mark upon the foreheads of the men who groan and sigh for all the abominations done in the midst thereof. And to the others he said, Go ye after him through the city, and smite; let not your eye spare, neither have ye pity; slay to blotting out the old man, and the young man, and the virgin, the infant, and the women; defile the house, and fill the courts with the slain. (Ezek. 9:3–7)

 

2하나님이 가는 베 옷을 입은 사람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그룹 밑에 있는 바퀴 사이로 들어가 그 속에서 숯불을 두 손에 가득히 움켜 가지고 성읍 위에 흩으라 하시매 그가 내 목전에서 들어가더라 7그 그룹이 그룹들 사이에서 손을 내밀어 그 그룹들 사이에 있는 불을 집어 가는 베 옷을 입은 자의 손에 주매 그가 받아 가지고 나가는데 (겔10:2, 7) He said to the man clothed in linen, Go in between the wheel to beneath the cherub, and fill thy palms with coals of fire from between the cherubim, and scatter them over the city; the cherub put forth his hand from between the cherubim unto the fire which was between the cherubim, and took thereof, and put it into the palms of him that was clothed in linen, who took it and went out. (Ezek. 10:2, 7)

 

이 구절들에서 분명한 사실은, ‘그룹’의 상징이 사람들이 신앙의 신비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금하시는 주님의 섭리라는 것이며, 그래서 ‘성읍 위에 흩을 숯불(the fire that was to be scattered over the city) 및 ‘아무도 불쌍히 여기지 말라(none should be spared)의 상징이 그들은 자기들의 광적 탐욕들 가운데 버려졌다라는 것입니다. From these passages it is evident that the providence of the Lord in preventing men from entering into the mysteries of faith is signified by the “cherubim”; and that therefore they were left to their insane cupidities, here also signified by the “fire that was to be scattered over the city,” and that “none should be spared.”

 

18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19한 그룹은 이 끝에, 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결할지며 20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21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출25:18-21)

 

1너는 성막을 만들되 가늘게 꼰 베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을 정교하게 수 놓은 열 폭의 휘장을 만들지니, 31너는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짜서 휘장을 만들고 그 위에 그룹들을 정교하게 수 놓아서 (출26:1, 31)

 

23내소 안에 감람나무로 두 그룹을 만들었는데 그 높이가 각각 십 규빗이라 24한 그룹의 이쪽 날개도 다섯 규빗이요 저쪽 날개도 다섯 규빗이니 이쪽 날개 끝으로부터 저쪽 날개 끝까지 십 규빗이며 25다른 그룹도 십 규빗이니 그 두 그룹은 같은 크기와 같은 모양이요 26이 그룹의 높이가 십 규빗이요 저 그룹도 같았더라 27솔로몬이 내소 가운데에 그룹을 두었으니 그룹들의 날개가 퍼져 있는데 이쪽 그룹의 날개는 이쪽 벽에 닿았고 저쪽 그룹의 날개는 저쪽 벽에 닿았으며 두 날개는 성전의 중앙에서 서로 닿았더라 28그가 금으로 그룹을 입혔더라 29내 외소 사방 벽에는 모두 그룹들과 종려와 핀 꽃 형상을 아로새겼고, 32감람나무로 만든 그 두 문짝에 그룹과 종려와 핀 꽃을 아로새기고 금으로 입히되 곧 그룹들과 종려에 금으로 입혔더라 (왕상6:23-29, 3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출25:22)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라 (민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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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307, 창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AC.306-313) -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신'의 속뜻

 

24절,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And he cast out the man; and he made to dwell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cherubim, and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to keep the way of the tree of lives.

 

307

여기서 다루는 후손들은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입니다. 이들은 홍수로 사라졌고, 모두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신(cast out of the garden of Eden), 즉 진리에 관한 모든 이해에서 박탈, 광적 탐욕(insane cupidities)과 들러붙은 신념(persuasions)만 남은, 그래서 도저히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는 그런 상태였습니다. It here treats of the sixth and seventh posterities, which perished by the flood, and were altogether “cast out of the garden of Eden,” that is, from all understanding of truth, and became as it were not men, being left to their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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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306, 창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AC.306-313) - 24절 속뜻 개요

 

24절,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And he cast out the man; and he made to dwell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cherubim, and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to keep the way of the tree of lives.

 

306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To cast out the man)는 그에게서 선에 관한 모든 의지와 진리에 관한 모든 이해, 이성을 깡그리 빼앗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로부터까지 분리가 되어 더는 사람이라 할 수 없을 지경이 되도록 말입니다. To “cast out the man” is to entirely deprive him of all the will of good and understanding of truth, insomuch that he is separated from them, and is no longer man.

 

※ 사람은 의지와 이해(will and understanding)가 있어 사람인데 이런 근본들하고도 분리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더는 ‘사람’이라 할 수 없는 지경, 곧 창세기 1장 2절, ‘혼돈과 공허, 흑암’의 상태까지 갔다, 원위치되었다는 말입니다.

 

동쪽에 그룹들을 두어(To make cherubim from the east to dwell)는 그가 무슨 신앙의 신비와 관련된 것 안으로 못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 동쪽(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은 천적(天的, the celestial)이요, 여기서 지성이 나오기 때문이며, ‘그룹들(cherubim)은 저런 상태에 있는 사람이 신앙과 관련된 것들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금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두루 도는 불 칼(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은 광적(狂的, insane) 욕망과 그로 인해 고착된(固着, persuasions) 자아 사랑을 말하며, 이것이 바로, 그는 정말 신앙의 신비,  에덴동산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지만, 곧바로 육적(肉的, corporeal)이고 세속적인 것들에 휩쓸려 버리고 마는, 그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는(keeping the way of the tree of lives) 목적, 즉 거룩한 것들에 대한 신성모독을 막으시는 목적입니다. To “make cherubim from the east to dwell” is to provide against his entering into any secret thing of faith; for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is the celestial, from which is intelligence; and by “cherubim” is signified the providence of the Lord in preventing such a man from entering into the things of faith. By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is signified self-love with its insane desires and consequent persuasions, which are such that he indeed wishes to enter, but is carried away to corporeal and earthly things, and this for the purpose of “keeping the way of the tree of lives,” that is, of preventing the profanation of holy th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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