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원년(2013년) 창립예배 때 특송 : https://youtu.be/pYYoLdKLOK8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자
41 베드로가 여짜오되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42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43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45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46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리니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눅12:41-48)
사람이 복수와 증오, 간통, 간음, 사기, 속임수, 신성모독, 거짓말이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그 일을 한다면 그는 보다 중한 모독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누가복음 12장 47절에서 주님은 주인의 뜻을 알면서도 그 뜻에 따라 행하지 않는 종은 많은 매를 맞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Divine Providence 231:2) Thus if one acknowledges that revenge and hatred, adultery and fornication, fraud and deceit, blasphemy and lying are sins against God and yet commits them, he is therefore in the more grievous of this kind of profanation. For the Lord says: The servant who knows his lord’s will and does not do it, shall be beaten with many strokes (Luke 12:47).
※ 오늘은 우리 한결같은 교회가 지난 2013년 9월 1일 주일에 시작된 지 만 10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지난 한 주, 개인적으로는 지난 10년 치 일지를 대략 뒤적이며, 어떤 일이 있었고,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해오셨는지를 살폈는데요,
아주 짧게 요약하면... 처음 얼마 동안은 좀 여러 다양한 세미나, 집회 및 프로그램들 같은 외적인 걸 기웃거리다가 서서히 내적인, 즉 영적인 것들, 곧 헤븐 교회 정원 목사를 비롯, 서사라 목사의 천국 체험 쪽으로 방향이 잡히더니 충주봉쇄수도원(강문호 원장) 수도학교를 통해 수도사와 수도원 세계에 들어가 다양한 수도사, 성인들을 접하면서, 동시에 시흥영성수련원(박희진 원장)의 핵심진리(공용복 선생) 및 책으로는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 그리고 ‘성 프란체스코’ 등을 통해 수도원 목회 쪽으로, 그리고 이윽고 지금의 스베덴보리를 만나게 하셨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수년 전부터는 일반목회를 내려놓고 스베덴보리를 통해 계시하신 여러 저작들 번역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지요. 지난 십 년의 여정, 살짝 방황처럼 보이기도 했던 시간이 그러나 사실은 차근차근 스베덴보리를 만나게 하시려는 주님의 섭리였구나 싶고, 한 마디로, 기존 개신교, 기독교에서 벗어나 주님의 새로운 교회로 저를 초대하시는 과정들, 마치 한 마리의 아름다운 나비가 되기 위해 그 긴 유충과 번데기, 그리고 그 껍질을 찢고 나오는 몸부림의 과정들이 있었구나 싶습니다. 저와 같은 사람은 저런 순서로 흐르지 않았다면 절대로 스베덴보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겉(external) 신앙에서 속(internal) 신앙으로 들어간 것이죠.
제가 스베덴보리 쪽으로 방향을 확정한 때가 2018년 12월인데요, 그래서 저는 오늘은 명목상의 십 주년이고, 제대로 된 십 주년은 2028년 12월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끝으로, 그러나 이 환골탈태의 과정, 곧 천국을 향한, 주님을 향한 내면의 창문이 열리기까지 저와 가족, 그리고 교회가 겪어야 했던 일들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거절과 세상 관계의 단절, 그리고 외면을 맛보았으며, 특히 우리 가족이 겪어야 했던 교리적 혼란과 흩어짐 등은 오직 주님만이 아시며, 그래서 더욱 주님이 이 모든 일을 기억하시고, 저희 사모와 자녀들에게 하늘의 상인 내면을 확 열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네, 그럼 이 정도로 나누고요, 오늘 말씀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매 순간 자기 스스로의 생각과 의지로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 저,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주석인 ‘Arcana Coelestia’ 5846번 글에서 5866번 글까지를 보면, 모든 사람에게는 보통 두 명의 천사 또는 지옥의 영들이 함께 있으며, 그러므로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은 그와 함께 있는 천사나 영들이 생각하고 의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고 의도하고 행동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 모든 것은 천사, 또는 지옥의 영들이 불어넣는 생각과 의도에 따른 것이라는 겁니다. 인간이 그렇게 천사와 영들의 영향을 받는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천사와 영들을 보내 인간을 이끄시는 것은 자유의지를 제한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의지를 지켜주시기 위한 것인데요, 왜냐하면 천국과 지옥의 힘이 인간에게 동등하게 미칠 때, 인간은 비로소 자유로운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내면으로 천사들을 통해서는 천국이 흘러들어오고, 지옥의 영들을 통해서는 지옥이 흘러들어와야 천국과 지옥이 균형을 이루게 되고 그때 사람은 어느 한쪽으로도 쏠리지 않고 자유롭게 천국 또는 지옥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유의 상태에서 자신의 자아를 부정하고 주님을 선택하는 사람은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주님을 멀리하고 자아의 욕구를 따르는 사람은 지옥의 영들에게 사로잡히게 되고, 결국 그가 가지고 있던 진리와 선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지난주 말씀에서는 그러한 상태를 잠이 든 사이에 도둑이 들어 벽을 뚫는 것으로 비유했습니다. 도둑은 지옥의 영들을 뜻하고, 벽을 뚫는 것은 지옥의 영들이 진리의 울타리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항상 깨어있으라고 당부하셨지요.
주님이 제자들에게 도둑이 들지 않도록 깨어있으라고 하시자 본문 41절에서 베드로가 주님께 묻습니다.
41 베드로가 여짜오되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베드로는 어쩌면 스스로, 즉 혼자서 주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고 항상 깨어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는 그와는 반대였습니다. 주님과 세상을 양손에 쥐고 저울질할 때가 많았고, 아주 작은 일을 하고도 보상받으려 했습니다. 자신의 허물은 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허물만을 봤습니다. 자신을 높이고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자신의 믿음에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 설마 제게 하신 말씀은 아니시지요’라는 뜻으로 주님께 물었고,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42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베드로처럼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주님을 따른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가장 참된 진리 안에 있다고 믿는 우리 같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라고 하십니다. 청지기는 어떤 사람입니까? 부잣집에 고용되어 주인 대신 재산이나 종들을 관리하고 또한 집안의 대소사를 맡아 처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의미로 보면 주님의 나라 청지기는 바로 우리 신앙인들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으로부터 천국의 재산인 선과 진리의 지식들을 맡아 잘 관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이 주신 선과 진리들을 삶에 적용하여 자신이 거듭나는 것은 물론 이웃에게 전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될 수 있을까요? 42절부터 43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42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43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
주님께서는 청지기의 가장 큰 일은 집안의 가족들에게 양식을 나누어주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집안의 가족들은 주님의 나라를 이루는 다양한 진리들을 뜻하고, 양식은 선을 뜻합니다. 따라서 청지기의 책무는 선을 가지고 진리들을 먹이는 일입니다. 선을 가지고 진리를 먹인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진리를 가지고만 있지 말고 삶에 적용해 선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진리와 선의 결합이 일어나고 그 진리는 살아있는 진리가 됩니다. 본문에는 또 양식을 나누어 주되 때를 따라 나누어 주라고 합니다. 이 말은 진리를 삶에 적용할 때는 상황에 맞게 적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한다고 해서 아무에게나 자선을 베풀면 안 됩니다. 때에 따라 우리가 베푸는 선이 상대에게 독이 될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상황에 따라 침묵하는 것이 더 좋은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때를 따라 진리에 선을 먹이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그렇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진리에 선을 먹일 때 주님께서는 복이 있다 하시고,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고 하십니다. 진리를 삶으로 실천할 때, 주님은 천사들을 통해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진리를 보내주신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나쁜 청지기도 있는데요, 그들의 운명에 대해 45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45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46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리니
많은 신앙인이 자기가 오래도록 살 거라 생각하고 청지기의 책무를 소홀히 합니다. 내일 하면 되지 하며 뒤로 미루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인이 더디 오리라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남녀 종을 때린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남자 종은 신앙인들이 가지고 있는 진리들을, 여자 종은 진리를 삶으로 옮기고자 하는 애정을 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남자 종을 때리는 것은 진리를 자기 입맛에 맞게 왜곡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왜곡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자기 생각에 맞으면 진리로 받아들이고, 맞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또는 진리를 마음대로 해석하는 일입니다. 이런 것이 모두 진리를 왜곡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사람의 인체가 그렇듯 유기적으로 서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온전한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의 일점일획도 더하거나 빼지 말라 하신 것은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진리에 대한 이런 잘못된 행동들이 진리에 폭행을 가하는 것이며, 남자 종을 때리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여자 종을 때리는 것은 진리에 대한 애정이 변질, 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한다 하면서 진리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이기적인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에 대한 애정이 변하는 것이고, 여자 종을 때리는 것입니다. 진리를 받아들이고 행동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진리와 선이 변질이 될 때, 신앙인들의 생명이 변합니다. 생명이 변한다는 것은 결국 의지가 변한다는 뜻입니다. 선하고 진실한 상태에서 악하고 거짓된 상태로 의지가 바뀌는 것입니다. 말씀에는 신앙인의 생명이 악하게 변하는 것을 청지기가 먹고 마시고 취하는 모습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주인이 들이닥쳐 그를 엄히 때리고 벌을 내린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사후에 영계에서 받을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청지기가 매를 맞는 것은 진리를 모독한 사람이 사후에 영계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선과 진리의 지식을 모두 빼앗기는 것을 뜻하며, 그러므로 악과 거짓만 가지고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끝으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주님은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죄를 크게 묻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알고 죄를 지은 사람들은 나중에 크게 벌을 받습니다. 진리를 아는 자의 책임이 그만큼 무겁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공부하면서 나는 과연 어떤 청지기인가 하는 자문을 하게 됩니다. 게으른 청지기는 아닌지, 또는 악한 청지기는 아닌지 하는 두려움 마음이 생겼습니다. 누구나 주님께로 불려가는 날이 아직 한참 남았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득 생각해 보니 그렇게 시간이 많이 남은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오늘 말씀의 베드로처럼 주님을 가까이 모신다는 자부심만 있을 뿐 진실한 청지기의 삶을 외면한 적이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주인의 뜻을 알고도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바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새로운 교회에서는 청지기의 책무를 게을리하는 것, 진리를 알고도 진리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신성모독의 죄를 짓는 일이라고 가르칩니다. ‘Divine Providence’ 231번 글은 신성모독의 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첫째는 진리를 받아들이고도 진리에 반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중한 죄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9장 41절에서 주님은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았다고 하더라도 바로 세상 유혹을 이기기는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주님의 능력에 의지해 세상 유혹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신성모독은 진심으로 겸손하지 않은 자에게 해당되는 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 번째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가지고 자신의 악과 거짓을 정당화하는 행동입니다. 자신의 악을 정당화하기 위해 말씀을 왜곡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으로 만드는 것이며, 그러므로 신성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세 번째는 말과 행동으로는 진리를 사랑하는 것 같이 하면서 내심으로는 전혀 진리를 믿지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들입니다. 주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위선자라 하시고 심판 날에 캄캄한 바깥에 쫓겨나 이를 갈 것이라 하셨습니다.
네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그의 신성은 부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만 믿고 하나님으로는 믿지 않는 것입니다. 심지어 기도할 때도 그들은 주님께 기도하지 않고 아버지에게 기도합니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말씀의 영적 의미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주님의 인성에 해당된다면 문자적 의미 안의 영적 의미는 주님의 신성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사람은 말씀의 영적 의미를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는 처음에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따라 살다가 나중에 진리를 부인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경우는 가장 큰 모독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그들이 진리를 부인하는 이유는 대개 주님보다는 세상의 영화를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3장 15절 이하에서는 신성을 모독하는 사람들에 대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말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미지근한 신앙이 바로 신성을 모독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평생을 병과 싸웠던 병자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병자가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했을 때 주님께서 직접 그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병을 고친 다음 다시 죄를 짓는 것은 주님을 모독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 앞에 진심으로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평생을 짊어지고 온 각자의 고질병을 고쳐주시며 다시는 같은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해주십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10:22)
아멘
원본
2020-08-23(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9-0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즐겨찾기 > 한결같은교회.예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일예배(2023/9/17, 눅12:54-59),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며,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0) | 2023.09.17 |
---|---|
주일예배(2023/9/10, 눅12:49-53),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0) | 2023.09.10 |
주일예배(2023/8/27, 눅12:35-40),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0) | 2023.08.27 |
주일예배(2023/8/13, 눅12:13-21),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라' (0) | 2023.08.13 |
주일예배(2023/8/6, 눅12:8-12),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의 속뜻' (0) | 2023.0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