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7 주인이 와서 깨어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39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0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눅12:35-40)
영적 생명이 없는 자연적 생명은 자체로 잠든 것이지만, 영적 생명이 있는 자연적 생명은 깨어있는 것이다. 영적 생명이 있는 자연적 생명은 사람이 각자의 빛 안에서 진리를 깨닫고 그것에 따른 삶을 살 때 얻을 수 있다. Natural life, considered in itself, or without spiritual life, is nothing else but sleep; but natural life, in which there is spiritual life, is watchfulness; and this cannot be acquired otherwise than by truths, which are in their own light and in their own day, when man is in the life according to them. (AR.158)
마태복음 26장에는 주님께서 십자가의 시험을 앞두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들어가시는 모습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기도하러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셨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몸을 입으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어떤 시험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 시험을 결국 완벽하게 이기실 것도 아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제자들에게 내가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나와 함께 깨어있자 하셨을까요? 십자가의 고통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십자가를 지기까지 유대인들로부터 받을 폭행과 모욕이 두려워서였을까요? 물론 그러한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계실 때 주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육신을 입으신 인간이기도 하셨으니까요. 주님도 보통의 인간들처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 마지막 기도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이신 주님이 당신 안의 여호와를 향해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님의 고민이 육신의 생명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겟세마네 동산과 십자가의 시험은 주님 자신의 싸움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인간 개개인의 시험에서 주님이 그들과 함께 싸우시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죽게 되었다고 하신 것은 주님 자신이 죽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시험 가운데서 죽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시험이 올 때 인간은 주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수단으로 스스로 싸워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그를 위해 싸우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싸워보려고도 않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시험이 오더라도 담대히 맞서 싸울 수 있고 그때 주님이 그 싸움에 관여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인간이 시험 가운데서 넘어질 때 그렇게 죽을 것 같은 아픔을 느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내가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 하신 것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에서 비롯한 연민과 안타까움의 표현입니다. 제자들에게 깨어있으라 당부하신 주님께서 본문 3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허리는 무슨 뜻일까요? 고대의 사람들은 부부의 사랑이 허리에서 나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허리의 영적 의미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등불은 진리 또는 믿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라는 것은 주님을 믿고 또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입으로만 주님을 믿고 행동은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며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사랑이 있는 믿음, 행동하는 믿음이라야 악을 밀어내고 선을 가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하시는 것은 깨어있으라는 말씀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36절에서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여기서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혼인집은 세상 혼인집이 아니라 영적인 혼인집인 천국을 의미합니다. 천국은 선과 진리 또는 믿음과 사랑의 결혼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볼 때,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오는 것은 주님이 천국을 통해 각 사람에게 오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문을 두드리신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진리와 선의 유입(influx)을 뜻합니다. 주님은 선과 진리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항상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지만 정작 우리는 그 문을 열지 않습니다. 마음의 문을 열어야 주님으로부터 모든 선하고 진실한 것이 흘러들어오고 지옥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께 문을 열어드리는 것일까요? 그것에 대해 37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7 주인이 와서 깨어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깨어있는 사람이 되라 하십니다. 그래야 마음을 열고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깨어있는 것’에 대해 계시록 해설 187:3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깨어있는 사람은 영적으로 깨어있어 주님으로부터 영적 생명을 받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진리에 속한 지혜와 지성의 빛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영적 생명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진리에 관한 한 캄캄한 어둠 속에 있다. 그러므로 전자는 깨어있는 것이고 후자는 잠자는 것이다.
주님은 깨어있는 사람에게 오시며, 그때 허리에 띠를 두르고 그들에게 하늘의 양식을 먹여주십니다. 말씀에서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는 것은 그런 의미로 하신 말씀입니다. 38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말씀에서 숫자 3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 과정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이경에나 삼경에 오시는 것은, 주님은 개인의 영적 상태를 처음부터 끝까지 주시하시면서 깨어있을 때 가르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깨어있는 종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 여기 이경, 삼경하는 ‘경’(更)은 일몰부터 일출을 저녁 7시부터 두 시간씩 다섯으로 나눠 부르는 것으로, 각각 초경, 이경, 삼경... 식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경은 저녁 7시부터 밤 9시, 이경은 밤 9시부터 밤 11시, 삼경은 밤 11부터 새벽 1시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향해 항상 깨어있기란 쉽지 않습니다. 보통은 졸기도 하고 깊은 잠에 빠지기도 하지요. 신앙인들이 잠잘 때 주님은 수시로 그들의 마음을 두드리시며 깨어있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기도하시는 동안 세 번 내려오셔서 제자들이 깨어있는지 살피셨습니다. 그리고 깊이 잠든 것을 보시고는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며 안타까워하셨지요.
주님은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시는데 오래도록 잠에서 깨어나지 못할 때 신앙인들에게 시험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지옥의 영들에 의해 그동안 가지고 있던 선한 것, 진실한 것들이 파괴됩니다. 말씀에는 그것을 도둑이 들어 집을 뚫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도둑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데 우리는 잠만 잡니다. 그래서 본문 39절과 40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9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0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주님은 지옥의 도둑들이 언제 닥칠지 잘 아십니다. 그럼에도 말씀에는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하십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뭘까요? 주님은 계속 문을 두드리시는데 사람들은 아무 준비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맞으려면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 준비란 어떤 것입니까? 주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순진과 겸손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문을 열어도 여는 것이 아닙니다. 순진과 겸손의 정도가 주님이 원하시는 만큼 될 때 주님과 인간 사이 접점이 생기고 교류가 일어납니다. 그때가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그렇고 오늘 말씀에서도 그렇고 제자들에게 늘 깨어있으라 하셨습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믿음과 사랑을 잃지 않고 잘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말씀을 가까이하고, 한 편으로는 죄를 고백하고 악을 멀리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말씀을 읽기보다 세상 소식과 재미에 빠져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먼저 보는 신앙인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깨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을 때 주님으로부터 순진과 겸손을 비롯, 모든 종류의 선의와 근면, 순결한 부부 사랑이 흘러들어옵니다. 반대로 잠들어 있을 때는 자기를 높이는 마음과 미움과 나태와 온갖 종류의 정욕이 지옥으로부터 흘러들어옵니다. 매일 말씀을 읽고 반성을 하는데도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실수를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니 하물며 세상사에만 관심을 두고 자아의 욕심대로만 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영적 변화가 없습니다. 오히려 교회에 대한 처음 사랑과 이웃에 대한 순수한 정을 잃게 됩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도둑이 집을 뚫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우리의 그런 문제들에 대해 두 번 말씀하셨습니다. 한번은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무슨 일을 하든 속 사람으로부터 해야 하는데 겉 사람이 이런 속 사람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그들의 눈이 피곤하다 하셨습니다. 눈은 영적인 지성, 또는 분별력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눈이 피곤하다는 것은 영적인 분별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영적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자기는 옳은 일을 한다 하는데 그것이 남에게는 폐를 끼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잘못을 하고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깨어있음으로 해서 해결될 수 있습니다. 늘 말씀을 가까이하고 아는 만큼 행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영적 지성이 밝아지고,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게 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계3:3)
아멘
원본
2020-07-26(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8-27(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즐겨찾기 > 한결같은교회.예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일예배(2023/9/10, 눅12:49-53),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0) | 2023.09.10 |
---|---|
주일예배(2023/9/3, 눅12:41-48, 창립10주년),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자' (0) | 2023.09.03 |
주일예배(2023/8/13, 눅12:13-21),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라' (0) | 2023.08.13 |
주일예배(2023/8/6, 눅12:8-12),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의 속뜻' (0) | 2023.08.06 |
주일예배(2023/7/25, 눅12:1-7),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0) | 2023.07.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