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4
‘장막에 거주하는 것’(dwell in tents)은 사랑의 거룩함과 상응합니다. 말씀에서 ‘장막’(tents)의 상응을 보면 분명한데요, 시편입니다. That to “dwell in tents” signifies what is holy of lov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ents” in the Word. As in David:
1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2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시15:1, 2) Jehovah, who shall abide in thy tent? Who shall dwell in the mountain of thy holiness? He that walketh upright, and worketh righteousness, and speaketh the truth in his heart, (Ps. 15:1–2)
이 구절을 보면, ‘장막에 머무는 것’(dwell in the tent), 즉 ‘성산에’(in the mountain of holiness) 사는 걸 사랑의 거룩한 것들, 그러니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는 것(the walking uprightly, and working righteousness)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in which passage, what it is to “dwell in the tent” or “in the mountain of holiness” is described by holy things of love, namely, the walking uprightly, and working righteousness. Again: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시19:4) Their line is gone out through all the earth, and their discourse to the end of the world. In them hath he set a tent for the sun, (Ps. 19:4)
여기 ‘해’(sun)는 사랑을 가리킵니다. 계속해서 where the “sun” denotes love. Again: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시61:4) I will abide in thy tent to eternities, I will trust in the covert of thy wings, (Ps. 61:4)
여기 ‘장막’(tent)은 천적인 것을, ‘날개 아래’(covert of wings)는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이사야입니다. where the “tent” denotes what is celestial, and the “covert of wings” what is spiritual thence derived. In Isaiah:
다윗의 장막에 인자함으로 왕위가 굳게 설 것이요 그 위에 앉을 자는 충실함으로 판결하며 정의를 구하며 공의를 신속히 행하리라 (사16:5) By mercy the throne has been made firm, and one hath sat upon it in truth, in the tent of David, judging and seeking judgment, and hasting righteousness, (Isa. 16:5)
여기 또한 ‘장막’(tent)은 사랑의 거룩한 걸 가리킵니다. ‘충실함으로 판결함’(judging judgment), ‘공의를 신속히 행함’(hasting righteousness)이라는 언급을 보면 알 수 있듯 말입니다. 계속해서 where also the “tent” denotes what is holy of love, as may be seen by the mention of “judging judgment,” and “hasting righteousness.” Again:
우리 절기의 시온성을 보라 네 눈이 안정된 처소인 예루살렘을 보리니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 그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사33:20) Look upon Zion, the city of our appointed feast; thine eyes shall see Jerusalem a quiet habitation, a tent that shall not be moved away, (Isa. 33:20)
하늘의 예루살렘을 말씀하시면서 speaking of the heavenly Jerusalem.
[2] 예레미야입니다. In Jeremiah: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야곱 장막의 포로들을 돌아오게 할 것이고 그 거처들에 사랑을 베풀 것이라 성읍은 그 폐허가 된 언덕 위에 건축될 것이요 (렘30:18) Thus said Jehovah, Behold, I bring again the captivity of Jacob’s tents, and will have mercy on his dwelling places, and the city shall be builded upon her own heap; (Jer. 30:18)
‘장막의 포로’(captivity of tents)는 천적인 것, 즉 사랑의 거룩한 것들이 황폐해진 걸 상응합니다. 아모스입니다. the “captivity of tents” signifies the vastation of what is celestial, or of the holy things of love. In Amos:
그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암9:11) In that day will I raise up the tabernacle of David which is fallen; and will fence up the breaches thereof, and I will raise up its ruins, and I will build it as in the days of eternity, (Amos 9:11)
여기 ‘장막’(tabernacle) 또한 마찬가지로 천적인 것과 그것의 거룩한 것들을 가리킵니다. 예레미야입니다. where the “tabernacle” in like manner denotes what is celestial and the holy things thereof. In Jeremiah:
패망에 패망이 연속하여 온 땅이 탈취를 당하니 나의 장막과 휘장은 갑자기 파멸되도다 (렘4:20) The whole land is laid waste, suddenly are my tents laid waste, and my curtains in a moment. (Jer. 4:20)
내 장막이 무너지고 나의 모든 줄이 끊어졌으며 내 자녀가 나를 떠나가고 있지 아니하니 내 장막을 세울 자와 내 휘장을 칠 자가 다시 없도다 (렘10:20) My tent is laid waste, and all my cords are plucked out, my sons are gone forth from me, and they are not; there is none to stretch my tent anymore, and to set up my curtains, (Jer. 10:20)
여기 ‘장막’(tent)은 천적인 것들과, ‘휘장’(curtains)과 ‘줄’(cords)은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것들과 상응합니다. 계속해서 where the “tent” signifies celestial things, and “curtains” and “cords” spiritual things thence derived. Again:
너희는 그들의 장막과 양 떼를 빼앗으며 휘장과 모든 기구와 낙타를 빼앗아다가 소유로 삼고 (렘49:29) Their tents and their flocks shall they take; they shall carry off for themselves their curtains, and all their vessels, and their camels, (Jer. 49:29)
게달(Arabia)과 동방 자손들에 관한 말씀인데, 이들을 통해 천적인 것, 즉 거룩한 것을 소유한 사람들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speaking of Arabia and the sons of the east, by whom are represented those who possess what is celestial or holy. Again:
딸 시온의 장막에 그의 노를 불처럼 쏟으셨도다 (애2:4) Into the tent of the daughter of Zion the Lord hath poured out his wrath like fire, (Lam. 2:4)
신앙의 천적인 것, 즉 거룩한 것들의 황폐해짐에 관한 말씀입니다. speaking of the vastation of the celestial or holy things of faith.
[3] 말씀에서 이 ‘장막’(tent)이라는 용어를 채택, 천적인 것과 사랑의 거룩한 것들을 표현하는 이유는, 고대에는 예배의 거룩한 의식들을 그들의 장막에서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신성모독의 예배로 장막을 모독하기 시작하더니 성막이 세워졌고, 나중에는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이런 이유로, 장막은 먼저 성막이 가리키는 모든 걸 표현하더니, 나중에는 성전이 가리키는 모든 걸 표현하게 된 것입니다. 같은 이유로, 어떤 거룩한 사람을 가리켜 주님의 ‘장막’(tent), ‘성막’(tabernacle), 그리고 ‘성전’(temple)이라고도 합니다. ‘장막’, ‘성막’, 그리고 ‘성전’의 상응하는 바가 같다는 건 시편을 보면 분명합니다. The reason why the term “tent” is employed in the Word to represent the celestial and holy things of love is that in ancient times they performed the holy rites of worship in their tents. But when they began to profane the tents by profane kinds of worship, the tabernacle was built, and afterwards the temple, and therefore tents represented all that was subsequently denoted first by the tabernacle, and afterwards by the temple. For the same reason a holy man is called a “tent,” a “tabernacle,” and a “temple” of the Lord. That a “tent,” a “tabernacle,” and a “temple” have the same signification, is evident in David:
4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5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6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시27:4-6) One thing have I asked of Jehovah, that will I seek after, that I may remain in the house of Jehovah all the days of my life, to behold Jehovah in sweetness, and to visit early in his temple; for in the day of evil he shall hide me in his tabernacle; in the secret of his tent shall he hide me; he shall set me up upon a rock. And now shall my head be lifted up against mine enemies round about me, and I will offer in his tent sacrifices of shouting. (Ps. 27:4–6)
[4] 가장 높은 뜻으로는, 주님은 그의 인성(人性, human essence) 관련, ‘장막’(tent), ‘성막’(tabernacle), 그리고 ‘성전’(temple)이시며, 그래서 모든 천인(天人, celestial man)을 그렇게 부르고, 또한 모든 천적이며 거룩한 것들을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태고교회는 뒤이어 일어난 교회들보다 훨씬 더 주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고 당시 사람들은 홀로, 그러니까 가족 단위로 살면서 자기들의 장막에서 참으로 거룩한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이런 이유로, 장막은 성전보다 훨씬 더 거룩한 곳으로 여겨졌습니다. 이 성전은 신성모독을 범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기념하고자 초막절(the feast of tabernacles)이 제정되었는데요, 토지 소산을 거둘 때, 그들은 이 절기 동안 태곳적 사람들처럼 장막에서 지냈습니다. (레23:39-44; 신16:13; 호12:9) 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as to his human essence is the “tent,” the “tabernacle,” and the “temple”; hence every celestial man is so called, and also everything celestial and holy. Now as the most ancient church was better beloved of the Lord than the churches that followed it, and as men at that time lived alone, that is, in their own families, and celebrated so holy a worship in their tents, therefore tents were accounted more holy than the temple, which was profaned. In remembrance thereof the feast of tabernacles was instituted, when they gathered in the produce of the earth, during which, like the most ancient people, they dwelt in tents. (Lev. 23:39–44; Deut. 16:13; Hosea 12:9)
39너희가 토지 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일곱째 달 열닷샛날부터 이레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날에도 안식하고 여덟째 날에도 안식할 것이요 40첫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뭇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이레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41너희는 매년 이레 동안 여호와께 이 절기를 지킬지니 너희 대대의 영원한 규례라 너희는 일곱째 달에 이를 지킬지니라 42너희는 이레 동안 초막에 거주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주할지니 43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주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44모세는 이와 같이 여호와의 절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공포하였더라 (레23:39-44)
너희 타작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거두어 들인 후에 이레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신16:13)
네가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내가 너로 다시 장막에 거주하게 하기를 명절날에 하던 것 같게 하리라 (호12:9)
해설
스베덴보리는 야발이 ‘장막에 거주하는 자의 조상’이라는 표현을 통해, ‘장막에 거한다는 말이 사랑의 거룩한 것, 곧 천적인 상태를 뜻한다’는 점을 성경 전체의 용례로 입증합니다. 시편 15편에서 ‘여호와의 장막에 머무를 자’가 누구인지를 설명하면서, 그 자격을 바른 행실, 공의의 실천, 마음의 진실함으로 묘사하는데, 이는 장막에 거함이 단순한 장소 개념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삶의 상태’임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다시 말해, 장막은 외적 구조물이 아니라, ‘주님과의 내적 동거 상태’를 표상합니다.
시편 19편에서 ‘해를 위하여 장막을 베푸셨도다’고 할 때, ‘해’는 사랑을 뜻하므로, 장막은 곧 ‘사랑이 거하는 처소’로 이해됩니다. 시편 61편에서도 ‘주의 장막에 머물며’라는 표현과 ‘주의 날개 아래’가 병행되는데, 여기서 장막은 ‘천적인 것’, 날개 아래는 그 천적인 것에서 흘러나오는 ‘영적인 것’을 뜻합니다. 이는 천적, 영적 구조가 장막이라는 하나의 상징 안에 함께 담겨 있음을 보여 주며,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상응의 질서’가 시편 안에서 이미 작동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 아모스 등 예언서들에서도 장막은 일관되게 ‘사랑의 거룩한 것’을 표상합니다. 다윗의 장막이 다시 세워진다는 예언은 정치 체제의 회복이 아니라, ‘사랑과 공의가 다시 중심이 되는 교회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장막이 무너지고, 줄과 휘장이 끊어졌다는 표현들은 교회 안에서 ‘천적인 것과 그로부터 나온 영적인 것들이 황폐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이처럼 장막은 회복과 황폐를 모두 표현할 수 있는 상징인데, 그 이유는 장막이 곧 ‘교회의 가장 내적인 핵’, 즉 사랑의 상태를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왜 장막이 이런 의미를 갖게 되었는지를 역사적, 영적 맥락에서 설명합니다. 태고교회 시대에는 사람들이 도시나 성전을 중심으로 살지 않고, 가족 단위로 장막에 거하며 ‘매우 거룩한 예배를 장막에서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장막은 단순한 거주 공간이 아니라, 주님과 교통하는 ‘거룩한 생활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장막이 속된 예배로 더럽혀지자, 주님은 성막을, 이후에는 성전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장막은 여전히, 성막과 성전 이전의 ‘가장 순수한 예배 형태’를 기억하게 하는 상징으로 남았습니다. 그래서 장막은 이후 성막과 성전이 표상하게 된 모든 의미를 ‘원형적으로 담고 있는 표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성경에서는 한 사람 자체를 ‘장막’, ‘성막’, ‘성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는 사람이 주님의 사랑이 거하는 처소가 될 수 있음을 뜻합니다. 시편 27편에서 ‘주의 집, 주의 장막, 주의 성전’이 서로 교차하여 사용되는 것은, 이 셋이 본질적으로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최고 의미에서 보면, ‘주님의 인성 자체가 장막이요 성막이며 성전’이고, 그로부터 상응하여, 천적인 사람과 천적인 모든 것이 그렇게 불립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초막절의 제정 이유를 통해 이 상징을 더욱 분명히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추수 후에 장막에 거하도록 명령받은 것은, 단순한 농경의례가 아니라 ‘태고교회의 순수한 예배 상태를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곡식을 거두는 시점에 장막에 거한다는 것은, 모든 결실이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임을 고백하는 행위’였습니다. 따라서 ‘장막에 거한다’는 표현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의 거룩한 것 안에 거하며 주님께 의존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 모든 배경 위에서 스베덴보리는, 야발이 ‘장막에 거주하는 자의 조상’으로 불린 사실을 근거로, 그의 어머니 아다를 ‘천적인 것들의 어머니’라고 해석합니다. 이는 임의적 해석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반복되어 온 ‘상응의 질서와 표상의 일관성’에 근거한 결론입니다. 결국 AC.414는, 새 교회가 회복될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제도나 교리가 아니라, ‘장막으로 표상되는 사랑의 거룩함’이라는 사실을, 성경 전체의 증언을 통해 체계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AC.413, 창4:20, '아다'(Adah)는 천적인 것들의 어머니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3 ‘아다’(Adah)는 신앙의 천적인 것들의 어머니와 상응하는데요, 이는 그녀의 첫아들 야발을 일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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